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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의 문화 레시피] 대중음악

    ●정훈희 데뷔 50주년 기념공연 - 꽃으로 물들다 1967년 열입곱 나이에 ‘안개’로 데뷔한 뒤 개성 넘치는 음색을 뽐내며 한국의 다이애나 로스로 사랑을 받았던 정훈희가 ‘꽃밭에서’, ‘무인도’, ‘빗속의 연인들’ 등을 새롭게 편곡해 들려준다. 음악 동료이자 남편인 김태화를 비롯해 해바라기, 박상민이 함께한다. 17일 오후 4시·7시 30분·18일 오후 4시, 서울 성동구 행당동 소월아트홀. 6만 6000원. (02)2204-6400. ●2016 정동시대 - 전영록 & 혜은이 연말 디너쇼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의 오빠부대 원조 전영록과 ‘당신은 모르실거야’, ‘진짜 진짜 좋아해’, ‘제3한강교’의 한류가수 원조 혜은이가 함께 꾸미는 무대. 17일 오후 6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63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 20만~23만원. (02)789-5700.
  • [오늘 7차 촛불집회] 전국 100만 촛불…자축은 소박하게, 함성은 뜨겁게

    [오늘 7차 촛불집회] 전국 100만 촛불…자축은 소박하게, 함성은 뜨겁게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10일 전국에서 104만명(주최측 추산·경찰 추산 16만 6000명)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강하게 촉구했다. 오후 9시 30분 공식행사 종료 후에는 주최측(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나누어 준 폭죽을 터뜨리며 전날 있었던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축하했다. 하지만 샴페인은 이르다며 ‘끝까지 주시하겠다’고 외쳤다. 이날도 연행자는 없었고, 평화기조는 계속됐다. 퇴진행동은 오후 8시 30분을 기준으로 서울 광화문광장 80여만명(경찰 추산 12만명)을 비롯해 전국에 104만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지역별로 부산 10만명, 광주 7만명, 대전·경남 1만명 등 24만 3400명이 운집했다. 이날 오후 7시 50분 광화문광장에서 본행진이 시작된 뒤 촛불집회 무대는 청와대 200m 앞 청운효자동주민센터로 옮겨졌다. 행진한 시민들은 이곳에 미리 마련된 무대 앞에 앉았다. 남편, 딸 둘과 나온 김모(35)씨는 “기뻐서, 즐거워서 처음으로 집회에 나왔다. 정권교체, 박근혜 대통령 심판 등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때까지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염원한다”며 “우리 아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모(32)씨는 “박 대통령은 지금쯤 혼자 저녁 밥먹고 드라마 보지 않겠냐”며 “시끄러워서 TV를 보거나 독서를 하지 못하게 즉각 퇴진을 크게 외치겠다”고 말했다. 공식행사 종료가 선언된 오후 9시 30분에는 주최측이 폭죽을 나누어주었다. 김모(44)씨는 “탄핵안 가결을 자축하고 싶고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올바른 판단이 내려지길 폭죽을 터뜨리며 빌었다”고 말했다.전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은 “여러분이 부처님입니다. 여러분의 함성이 염불 소리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차벽을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인근에는 꽃스티커 대신 풍자스티커가 등장했다. 경찰 버스 창문에는 철창에 갇힌 박근혜 대통령 그림을 붙이는가 하면 ‘이러려고 의경했나’, ‘의경을 시민품으로’ 등의 문구를 쓴 스티커도 차벽에 달렸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재벌 등 전원을 구속하라는 의미의 스티커도 있었다. 시민들은 앞서 오후 4시 청와대 앞 100m 앞까지 3개 경로로 사전행진을 했다.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처럼 청와대를 동·남·서쪽으로 포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고, 경찰은 그간과 달리 율곡로·사직로 북쪽으로도 시간제한을 두고 집회와 행진을 허용했다. 참가자들은 연신 ‘박근혜를 구속하라’, ‘시간끌기 어림없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 6시부터는 광화문광장에서 공연과 시국 발언 등 본 행사가 이어졌다. 오후 5시 30분쯤 통의동 교차로까지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 소속 30여명이 탄핵안을 가결한 국회를 규탄하는 맞불행진을 하면서 긴장이 커졌지만 충돌은 없었다. 시민들이 이들을 에워싸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충돌은 자제했고, 경찰이 보수단체 회원들을 후퇴시켰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오늘 7차 촛불집회] 전국 100만 촛불, 집회의 중심은 청와대 앞으로

    [오늘 7차 촛불집회] 전국 100만 촛불, 집회의 중심은 청와대 앞으로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10일 전국에서 104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강하게 촉구했다. 전날 국회에서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지만 샴페인은 이르다며 ‘끝까지 주시하겠다’고 외쳤다. 촛불집회를 주최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오후 8시 30분을 기준으로 서울 광화문광장 80여만명을 비롯해 전국에 104만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지역별로 부산 10만명, 광주 7만명, 대전·경남 1만명 등 24만 3400명이 운집했다. 이날 오후 7시 50분 광화문광장에서 본행진이 시작된 뒤 촛불집회 무대는 청와대 200m 앞 청운효자동주민센터로 옮겨졌다. 행진한 시민들은 이곳에 미리 마련된 무대 앞에 앉았다. 남편, 딸 둘과 나온 김모(35)씨는 “기뻐서, 즐거워서 처음으로 집회에 나왔다. 정권교체, 박근혜 대통령 심판 등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때까지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염원한다”며 “우리 아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모(32)씨는 “박 대통령은 지금쯤 혼자 저녁 밥먹고 드라마 보지 않겠냐”며 “시끄러워서 TV를 보거나 독서를 하지 못하게 즉각 퇴진을 크게 외치겠다”고 말했다. 차벽을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인근에는 꽃스티커 대신 풍자스티커가 등장했다. 경찰 버스 창문에는 철창에 갇힌 박근혜 대통령 그림을 붙이는가 하면 ‘이러려고 의경했나’, ‘의경을 시민품으로’ 등의 문구를 쓴 스티커도 차벽에 달렸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재벌 등 전원을 구속하라는 의미의 스티커도 있었다.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까지 등장했던 꽃스티커는 이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꽃스티커를 제안했던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씨는 지난 7일 “국회 탄핵안 가결 여부에 따라 ‘차벽을 꽃벽으로’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시민들은 앞서 오후 4시 청와대 앞 100m 앞까지 3개 경로로 사전행진을 했다.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처럼 청와대를 동·남·서쪽으로 포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고, 경찰은 그간과 달리 율곡로·사직로 북쪽으로도 시간제한을 두고 집회와 행진을 허용했다. 참가자들은 연신 ‘박근혜를 구속하라’, ‘시간끌기 어림없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 6시부터는 광화문광장에서 공연과 시국 발언 등 본 행사가 이어졌다. 오후 5시 30분쯤 통의동 교차로까지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 소속 30여명이 탄핵안을 가결한 국회를 규탄하는 맞불행진을 하면서 긴장이 커졌지만 충돌은 없었다. 시민들이 이들을 에워싸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충돌은 자제했고, 경찰이 보수단체 회원들을 후퇴시켰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오늘 7차 촛불집회] 탄핵기념사진, 닭발즙…지치지 않는 이벤트

    [오늘 7차 촛불집회] 탄핵기념사진, 닭발즙…지치지 않는 이벤트

    10일 매서운 추위 속에 열린 7차 촛불집회를 따뜻하게 만든 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이벤트였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순식간에 줄이 길어졌다. 사진작가 손광은(28)씨는 “마음맞는 예술가끼리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됐는데 뭐라도 기념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이런 이벤트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2시간 동안 무대를 설치하고 준비작업을 했는데 1시간만에 50가족 이상이 참여했다”며 “촛불을 든 국민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족사진 찍은 이윤옥(58)씨는 “딸, 사위, 손자까지 가족이 함께 나왔는데 평범한 가족사진이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 속에 우리 가족이 함께 있다는 의미가 담겨서 좋다”며 “어제 탄핵안이 가결됐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종로구 통인동에서 차와 핫팩, 빵 등을 나누어주었다. 그 뒤에는 ‘이젠 한걸음, 우린 지치지 않는다. 세월호 엄마 아빠는 촛불 국민과 함께 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카페를 운영하는 김인숙(49)씨는 광화문광장에서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나눠줬다. 그는 “토요일마다 문 닫고 커피를 나누고 있는데 오늘의 커피는 ‘탄핵축하커피’다”고 했다. 한 건강음료업체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지치지 말고 힘내시라고 닭 잡아서 만든 닭발엑기스 드립니다. 이거 먹고 힘내서 청와닭 좀 잡아주세요!’라고 쓰인 플래카드 내걸고 실제 닭발로 만든 진액 음료를 무료로 나눠줬다. 역사박물관 앞에서 시민들에게 복숭아즙과 여주즙을 나눠 준 농민도 있었고, 한 시민은 솜사탕 기계를 들고나와 솜사탕을 어린이에게는 무료로 주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오늘 7차 촛불집회 무대 오르는 이은미, 리허설 모습 보니 ‘사뭇 진지’

    오늘 7차 촛불집회 무대 오르는 이은미, 리허설 모습 보니 ‘사뭇 진지’

    오늘 7차 촛불집회가 열리는 가운데 가수 이은미의 모습이 포착돼 눈길을 끈다. 10일 공연 제작사 아이스타미디어 측은 “오늘 7차 촛불집회 그 무대에 디바 이은미와 이은미 전국투어팀이 함께 나왔습니다. 매주 주말 공연으로 참석이 어려웠지만 일요일 천안공연을 앞두고 오늘 토요일! 드디어 함께 하게 됐습니다. 저녁 7시 13분 광화문에 희망의 노래를 전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사진에는 가수 이은미가 광화문에 설치된 무대 위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검은색 옷으로 스타일링한 이은미는 리허설임에도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스크린에는 ‘상처는 아물어간다’라는 가사가 포착됐다. 이는 이은미의 곡 ‘가슴이 뛴다’ 중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7차 대규모 촛불집회는 이날 오후 6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다. 사진=아이스타미디어 공식 인스타그램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프로그레시브록의 창시자 ‘ELP’의그렉 레이크 암 투병 끝에 하늘로

    프로그레시브록의 창시자 ‘ELP’의그렉 레이크 암 투병 끝에 하늘로

     프로그레시브록을 태동시킨 록그룹 ´킹 크림슨´과 ´에머슨 레이크 앤드 파머(ELP)´의 리드보컬리스트 그렉 레이크가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자답지 않게 맑고 청아했던 목소리를 다시 듣기 어렵게 됐다.    그는 ELP의 멤버였던 키스 에머슨이 미국에서 총기 오발 사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 지 9개월 뒤인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매니저 스튜어트 영이 페이스북에 “어제 12월 7일 암과의 길고도 결기 넘치는 싸움 끝에 가장 훌륭한 친구를 잃었다”면서 “그렉 레이크는 늘 그래 왔듯이 내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영국 록그룹 ´제네시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해켓은 트위터에 “음악계는 위대한 뮤지션이자 가수인 그렉 레이크의 영면에 고개 숙이고 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프로그레시브록 밴드 ´예스´의 키보디스트 릭 웨이크먼은 “또다시 그렉 레이크를 잃는 슬픔을 겪고 있다. 고인은 내 친구들과 키스 등과 같은 이들에게 위대한 음악을 남겨뒀다. 계속 살아 있으리라”고 추모했다.    영국 본머스 출신인 고인은 12세에 처음 기타를 접했으며 돈 스트라이크로 알려진 스승에게 사사했다. 함께 배웠던 로버트 프립과 친해졌으며 둘은 1969년 킹크림슨을 결성, ´21세기 스키조이드 맨´ 등이 수록된 데뷔앨범 ´인 더 코트 오브 더 크림슨 킹´을 내놓았다. 이 앨범은 프로그레시브록의 전범을 제시했으며 ´더 후´의 피트 타운센드로부터 “어깨를 겨룰 수 없는 명작”이란 품평을 들었다.   그러나 1년도 안돼 창립멤버 마크 가일스가 탈퇴하면서 레이크는 밴드와 함께 하는 것을 거부했다. 두 번째 앨범인 ´인 디 웨이크 오브 포세이돈´에도 목소리를 남길 정도로 곧바로 결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앨범은 구태를 벗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당한 비판을 들었다.    나중에 고인은 킹 크림슨의 북미 투어에 동원되기도 했고 새로운 밴드의 보컬리스트가 필요했던 에머슨의 설득에 넘어가 ´아토믹 루스터´의 드러머 칼 파머가 합류해 1970년 ELP가 플리머스 길드홀에서 라이브 데뷔공연을 펼쳤다. 그 뒤 와이트 섬 페스티벌에서도 공연을 행했다.    흔치 않게 밴드는 헤비록 리프와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뒤섞었고 ´전람회의 그림´ ´트라이올로지´ ´브레인 샐러드 서저리´ 등의 앨범을 연이어 내놓았는데 대부분 고인이 직접 프로듀싱했다. 1971년작 ´타커스´는 반은 탱크이며 반은 아마르딜로(철갑을 두른 것 같은 포유류 동물)인 가공의 캐릭터 타커스가 무대에 등장해 20분 이상 즉흥 연주를 들려주는, 앞서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1977년에는 애런 코폴랜드의 ´보통사람을 위한 팡파레´의 록버전으로 인기 차트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ELP의 광선 쇼와 즉흥 공연 전략은 1970년대 록음악의 전범이 됐으며 여러 펑크록 밴드들이 ELP를 본받고 싶은 밴드로 밝히곤 했다.   그러나 4800만장 이상 레코드가 팔려나간 뒤 1970년대 말부터 급격히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2010년 카니예 웨스트가 히트곡 ´파워´에 ´21세기 스키조이드 맨´을 샘플링해 다시 그들의 명성을 되살렸다. 고인은 공식 홈페이지에 “가장 위대한 음악은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을 마치 유언처럼 남겨놓았다고 BBC는 전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촛불집회 더 환하게 밝힌 ‘숨은 공신’들

    촛불집회 더 환하게 밝힌 ‘숨은 공신’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6차례의 촛불집회에서 주인공은 ‘국민’이다. 민주주의를 되찾겠다며 한목소리로 외쳤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평화 집회를 만들고 지켜 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국민도 있다. 수화통역 봉사를 해 온 박미애씨, 촛불집회 안내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한 대학생 김건준씨, 경찰차벽을 꽃으로 덮은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씨가 그들이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수화 떼창’ 지휘자 - 수화통역 자원봉사 박미애씨 장애의 벽 넘어 하나 돼 감동 화장실 갈까봐 물도 안 마셔요 “5차 촛불집회(11월 26일) 때 수화통역을 하는 무대 바로 앞에 청각장애인들이 앉아 있었어요. 노래 가사를 수화로 전달하니 ‘수화 떼창’을 하기 시작했죠. 장애의 벽을 넘어 모두가 촛불의 일원이 됐다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8일 만난 12년차 수화통역사 박미애(36·여)씨는 지난달 5일 열린 2차 촛불집회부터 매주 수화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1차 촛불집회(10월 26일)에 참석했는데 자막·수화 서비스가 전혀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주요 집회·시위에서 수화 통역 봉사를 해 봤던 터라 자신이 속한 시민단체 ‘장애인정보문화누리’ 동료들과 집회 주최 측(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에 봉사를 제의했다. “촛불집회는 주최 측의 프로그램을 따르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나갑니다. 예전에는 시민발언 중에 장애인 비하가 있어도 일일이 거를 수 없다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시민들이 바로 경고를 하고 나서죠.” 집회마다 3명의 수화통역사가 참여한다. 한 명은 무대에 올라 10~20분간 수화통역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카메라 모니터링을 한다. 다른 한 명은 손을 녹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봐 하루 종일 물도 안 마시고 참아요. 인파가 몰리면 무대에 진입할 수 없어 통상 2시간 전부터 대기하죠.” 그는 “장애인 참가자가 늘어나는 게 피부로 느껴지니 혹여나 통역에 대한 불만이 접수돼도 외려 즐겁다”며 “청각장애인이 수화로 발언을 하면 통역사가 음성으로 전달하는 ‘음성통역’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로운 촛불집회 분위기에 장애인들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습니다. 촛불집회로 시민의식이 한 단계 더 성장한 거죠.” ‘초보 촛불’ 안내자 - 집회 안내 앱 개발 김건준씨 화장실 찾는 시민들 불편 포착 미흡해도 행동하는 게 촛불정신 “사실 정치에 무관심한 대학생입니다. 하지만 난생처음 나선 촛불집회에서 세대와 계층을 떠나 수많은 사람이 한마음으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봤습니다. 가슴이 먹먹했고 힘을 보태자 싶었죠. 할 수 있는 건 집회 초보자에게 안내서를 제공하는 거였구요.” 대학교에서 정보통신학을 전공하는 김건준(25)씨는 “저도 집회 초보자여서 집회에 익숙하지 않은 시민들의 불편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앱 개발에 해박한 지식은 없지만, 미흡하면 미흡한 대로 행동을 하는 게 촛불의 정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달 18일 공개한 모바일 앱 ‘촛불집회 안내도’는 현재까지 2만명 이상이 내려받았다. “지난달 12일 지인과 제3차 촛불집회에 참석했는데 화장실이 급한 거예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달려갔죠. 그런데 저처럼 화장실을 못 찾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더군요. 나중에 서울시에서 개방 화장실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앱으로 만들기로 했죠.” 전문지식이 없다 보니 초보자가 앱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으로 가장 간단한 형태를 만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오히려 서울시에서 지난달 25일 “원래 화장실 49개를 개방하는데, 집회 기간 동안 210개로 늘렸으니 반영해 달라”며 연락을 해 왔다. 이후 국회의원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직접 청원하는 온라인 사이트 ‘박근핵닷컴’이 화제가 되자 해당 홈페이지 개발자와 연락해 앱에서 바로 탄핵 청원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신설했다. “불평에서 멈추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불편함을 고민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듯 광장에 나온 촛불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거라 믿습니다.” ‘꽃벽 저항’ 예술가 - 꽃 스티커 제작 이강훈씨 하나의 저항 방식 제시한 것 자발적 시민들… 프로젝트 진화 “부모님과 온 어린아이들이 차벽에 제가 도안한 꽃스티커를 붙이는 모습이 가장 큰 보람이었죠. 지금은 의미를 모르겠지만, 평화로운 저항의 경험을 해 본 아이들이 자란 뒤에는 우리 사회가 어떤 형태의 벽에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곳이 될 겁니다.” 경찰 차벽을 꽃스티커로 장식하는 ‘차벽을 꽃벽으로’ 프로젝트를 제안한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43)씨는 8일 “촛불집회의 힘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집회가 진화했다는 데 있다. 나도 하나의 저항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3차 촛불집회에서 차벽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한 경복궁역 사거리의 풍경을 본 이씨는 ‘유리벽처럼 자연스레 우리를 가두고 있는 공권력에 문제를 제기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평화적인 저항의 형태로 경찰차벽에 꽃 그림을 붙이면 어떨까”라고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본 클라우드 펀딩 업체 세븐픽쳐스 전희재 대표가 “진짜 실행해 보자”고 제안했다. 성금을 모금하고, 예술가들이 재능기부로 꽃의 도안을 디자인했다. 4차 촛불집회(11월 19일)에 이씨를 포함해 예술가 27명이 30가지의 꽃그림을 그렸고, 2만 9000장의 꽃스티커를 제작했다. 꽃스티커는 등장과 함께 큰 조명을 받았고, 5차 집회에 예술가는 82명, 꽃스티커는 9만 2000장으로 늘었다.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에는 5만장을 배포했다. 이씨는 “꽃스티커뿐 아니라 생화나 각종 풍자 스티커를 붙이는 등 프로젝트는 시민들에 의해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예술의 힘은 수용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뻗어 나가는 의외성에 있죠. 촛불집회도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 나간다는 점에서 그 동력이 예술의 힘과 맞닿아 있습니다.”
  • “응답하라 국회” 촛불 5000개 여의도로…박사모, 탄핵안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8일 시민사회단체와 학계, 종교계 등은 차질 없는 탄핵 표결을 주장하며 국회를 압박했다. 촛불집회를 이끌어 온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이날 오후 7시부터 국회 인근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시국토론회를 가졌다. 비가 내렸지만 5000여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모였다. 이들은 “국회는 응답하라”, “국회는 탄핵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탄핵안 가결을 촉구했다. 국회 정문 앞에서는 정의당,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참여해 시민자유발언대, 탄핵 릴레이 토크쇼 등을 열기도 했다. 5살, 2살짜리 딸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김수정(37)씨는 “광화문광장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힘을 보태고 싶어서 나왔다”며 “평일 저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면 국회도 민심을 받아들여 올바른 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모(26)씨는 “탄핵소추안이 부결되면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던 국민들까지 광장에 쏟아질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퇴진행동은 지난 7일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공문을 보내 8~9일 국회 본관 앞 광장을 집회 장소로 개방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정 의장은 “자유로운 의정활동과 의사표현이 제한될 수 있다”며 거부했다. 국회 정문 앞 무대 설치와 집회를 허용하고 차벽은 설치하지 않도록 경찰에 요청했지만, 이날 주최 측이 준비한 ‘국회 포위 인간띠 행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도 이날 경기 평택시청에서 출정식을 가진 뒤 2차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농민 200여명은 트랙터 6대, 화물차 30여대를 끌고 수원을 거쳐 9일 오후 2시 국회에 도착한다. 이외 퇴진행동은 새누리당 의원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탄핵을 촉구하는 동시다발 1인시위를 하고 인증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등 탄핵안 가결 촉구 시위를 이어갔다. 문화예술인 단체인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전국언론노조와 공공운수노조 등 노동계도 이날 국회 인근에서 결의대회를 열어 탄핵안 가결을 압박했다. 서울대 교수 796명은 이날 오전 학교 4·19 기념탑 앞에서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2차 시국선언을 했다. 교수들은 성명서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세 차례에 걸친 담화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할 때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즉시 탄핵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탄핵 이후 검찰과 언론, 재벌의 개혁도 촉구했다. 시국선언문은 이날 오전 국회의원 300명 전원에게 팩스로 전달됐다. 박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졸업생과 학생 1121명도 시국선언을 통해 “이미 드러난 진실만으로도 박근혜는 대통령일 수 없다”며 탄핵안 가결을 촉구했다. 개신교, 천주교, 조계종 등 종교계도 잇따라 시국선언문을 내고 대통령 퇴진 등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박 대통령의 팬클럽 ‘박사모’(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를 비롯해 보수진영 시민단체들은 성명 발표와 시위 등을 통해 박 대통령 탄핵 반대를 주장했다. 박사모는 박 대통령 탄핵안 집행 정지를 요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로 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데이비드 보위부터 카스트로까지…올 해 세상 떠난 해외 인사들

    데이비드 보위부터 카스트로까지…올 해 세상 떠난 해외 인사들

    어김없이 다사다난했던 2016년 한 해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많은 해외명사들이 숨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정치, 문학, 예술, 학술, 스포츠계에 길이 남을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난 이들의 생애를 돌아봤다. 1. 데이비드 보위(1947.1.8 ~ 2016.1.10) 본명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1947년 영국 남부 브릭스톤에서 태어나 1963년부터 가수, 작곡가 겸 배우로 활동했다. 50년 넘게 혁신적 예술가로 추앙됐으며 70년대의 작품들로 특히 인정받았다. 특유의 독창적 음악세계와 무대연출은 세계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전에 1억 4000만 장의 앨범을 판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됐다. 말년에 세간에 알리지 않은 채 간암으로 투병했으며 1월 10일 마지막 앨범인 ‘블랙스타’가 출시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2. 알란 릭먼(1946.2.21 ~ 2016.1.14) 영국의 배우. 활동 초기엔 왕립연극학교를 나와 로열셰익스피어극단에서 고전극과 현대극을 연기했다. 영화 활동으로는 ‘다이 하드’(1988)의 악역 ‘한스 그루버’로 유명세에 올랐고, 노년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역으로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6년 영화 ‘라스푸틴’에서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을 연기해 골든글로브 상을 받았다. 2015년 4월, 19세 때부터 50년간 교제해왔던 영국 노동당 당원인 리마 호튼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으나 이듬해 1월 췌장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3. 위르켄 힌츠페터(1937.7.6 ~ 2016.1.25)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1963년 처음 공영방송 영상 기자로 경력을 시작해 1967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당시 계엄 사태의 심각성을 취재, 광주의 비극을 외부 세계에 알리면서‘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리게 된다. 같은 해 9월엔 김대중 전 대통령 사형 판결에 항의하며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1986년에는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폭력으로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지난 2004년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해지면서 “국립 5·18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1월 25일 독일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둔 이후 생전 밝힌 뜻에 따라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 4. 움베르토 에코 (1932.1.5 ~ 2016.2.19)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미학자이다. 1956년 논문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적 문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문학비평계와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래 현대미학과 문학비평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학계 총아로 떠올랐다. 1968년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와 ‘기호학 이론’등 저서로 세계적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기호학·철학·미학·역사학 등 여러 학술 분야에 더불어 9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로 알려져 있으며 제임스 조이스 학회 명예 이사, 예일대 방문교수, 볼로냐 대학 교수, 이탈리아 인문학 연구소 소장 등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또 케임브리지 하버드 등 세계 명문에서도 강의했다. 출판계에서 일하던 여자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해 1980년 최초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발표한 이래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등 작품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도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오랜 암 투병 끝에 올해 2월 19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5. 앨빈 토플러 (1928.10.3 ~ 2016.6.27)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 ‘제3의 물결’을 예견한 미국의 미래학자겸 작가. 젊은 시절 생산직 노동자, 백악관 출입기자, 포춘지 노동관계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경영·첨단기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사를 넓혀 관련 저술을 시작했다. 뉴욕대학교·마이애미대학교 등 5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넬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IBM등 대형 기업들의 의뢰로 첨단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다각적으로 분석했으며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 정부 및 비영리민간단체, 일반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 프로젝트와 강연을 진행했다. 본인과 같이 작가 겸 미래학자인 하이디 토플러와 결혼해 연구와 저술활동을 함께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월 27일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세상을 떠났다. 6. 무하마드 알리 (1942.1.17.~2016.6.3.)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명언을 남긴 복싱계의 전설. 12세였던 1954년에 아마추어 복서 활동을 시작해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약 20년 간 활약하며 총 19회에 걸쳐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며 통산전적 55승 5패를 기록했다.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기소됐으나 오랜 법정싸움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때문에 3년 5개월의 경력 공백이 발생했지만 곧 재기에 성공, 1981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권투뿐만 아니라 흑인민권운동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노년에는 파킨슨병을 앓았으며 6월 3일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영면에 들었다. 7. 피델 카스트로 (1926.8.13 ~ 2016.11.25) 쿠바 해방을 이끈 혁명가인 동시에 쿠바를 장기간 지배한 독재자. 스페인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아바나대에 입학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1947년 쿠바인민사회주의당에 입당하며 사회주의자가 됐다. 195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에 저항,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수감되면서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처음 널리 알렸다. 2년 뒤 사면돼 멕시코로 망명해 체 게바라 등 중남미 해방운동가를 흡수한 뒤 1956년부터 쿠바에서 전쟁을 재개한 끝에 1959년 수도 아바나에 입성, 내각 책임제의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혁명에 성공한다. 혁명으로 군부정권을 타도했으나 정작 본인도 쿠바를 장기간 독재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1965년에는 쿠바를 일당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고 스스로 쿠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며 1976년에는 각료 회의 의장 및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군 최고 사령관 등을 겸직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2006년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 권력을 이양하고 2011년 정계에서 공식 은퇴했으며 지난달 25일에 사망이 공식 발표됐다.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복지정책을 실시해 국민적 지지를 얻고 소련 해체 이후 중남미의 사회주의 노선을 이끌면서 사회주의의 대부로 높이 평가 받은 바 있으나 강력한 언론탄압과 반대파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라는 비난 역시 면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 사망 소식을 접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카스트로라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주변의 세상과 인물들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기록하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몫일 것”이라는 말로 고인을 기렸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31>MC계의 ‘팔방미인’ 허참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31>MC계의 ‘팔방미인’ 허참

    허참(67)은 얼마 전 경기 남양주에 있는 자기 농장을 일반에 오픈했다. 음식을 먹고 노래를 듣는 전원형 레스토랑으로 꾸미고 ‘참스팜스’라는 간판을 세웠다. 2층은 일종의 기록실로 만들었다. 자신의 예능 40여년 역사가 담긴 사진, 포스터, 앨범들을 여기에 모았다. 자기 그림 작품들도 여러 점 걸었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울 여의도 KBS 녹화홀에서 25년 동안 실제로 썼던 ‘가족오락관’ 네온사인이다. “창고에 처박아 두면 그냥 썩는다고, 방송국에서 선물로 주더군요. 그걸 여기 가져와서 전원을 연결하니까 불이 들어오는데, 눈물이 납디다. 그 오랜 시간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내가 널 지켜봐 줄게, 이렇게 다짐했어요.” ●1973년 여동생 결혼 밑천인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 -기차가 덜컹거리며 부산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아무 대책 없는 ‘무작정 상경’의 주인공이 내가 되다니…. 군에서 막 제대한 1973년 어느 날이었다. 지갑 속엔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오빠가 나중에 돈 벌면 몇 배로 갚아줄게.” 결혼 밑천 삼는다고 고이 모아 온 여동생의 돈이었다. -서울살이는 예상보다도 힘들었다. 집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군대나 고향 친구들 집을 번갈아가며 하루하루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정동 MBC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자전거로 채소나 생선 같은 것들을 배달해 주며 공짜 숙식의 대가를 치렀다. 그러고 있다 보면 코미디언이 됐든, MC가 됐든, DJ가 됐든 뭐라도 하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기회는 뜻하지 않게 왔다. 그해 겨울 군대 친구와 함께 종로에 나갔다가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를 지나치게 됐다. 문앞에 탄산음료 ‘오란씨’ 시음 행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한 잔 얻어먹을 요량으로 안에 들어갔다. (입구에 유난히 코가 큰 사람이 서 있었는데, 쉘부르의 주인이자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PD 겸 DJ로 활동하던 이종환 선생이었다) 무대에서는 이태원, 전언수씨로 구성된 통기타 듀오 ‘쉐그린’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마친 뒤 객석 손님들에게 경품을 주는 행운권 추첨을 시작했다. 내가 딱 걸렸다. “무대로 잠깐 올라오세요.”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내 몇 마디에 공연장은 폭소와 박수로 가득 찼다. 정신없이 웃던 이태원씨가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 그게…기억이 안 나네요.” “허 참, 자기 이름도 몰라요?” “앗,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허참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이종환 선생이 나를 불렀다. “여기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월급은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그걸로 족했다. 청소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틈틈이 손님들 신청곡 받아 노래를 틀어주는 게 나의 일이었다. 그러다 잠깐씩 무대에 올라 짤막하게 MC를 볼 일이 생겼는데, 차츰 “쉘부르에 명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입소문이 났다. 날 보러 오는 손님들이 하나둘 늘면서 몇 달 후에는 어니언스, 쉐그린, 김정호, 김세화, 권태수 같은 포크 스타들의 공연을 진행하는 정식 MC로 승격이 됐다. 스탠딩 코미디와 노래를 섞은 ‘허참쇼’라는 코너도 만들어졌다. -MBC의 라디오 PD 겸 DJ였던 박원웅 선생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우리 회사에서 ‘청춘은 즐거워’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DJ 해볼 생각 없나.” 현기증이 났다. ‘얼마 전까지 자전거에 동태 궤짝이나 채소 꾸러미를 싣고 지날 때마다 그토록 높게 보였던 MBC 사옥. 그곳에 내가 입성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쉘부르의 객석에서 소파 몇 개 붙여놓고 슬리핑백에서 잠을 자는 신세였다. 노래 ‘편지’의 성공으로 형편이 나아진 어니언스 임창제가 물려준 슬리핑백이었다. 방송 DJ를 시작하면서 동대문 근처에 방을 얻은 나는 임창제의 슬리핑백을 의기양양하게 다른 친구에게 물려주고 쉘부르 시대를 마감했다. ●남다른 입담…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에서 운명의 MC 제안 -우리 집안의 뿌리는 황해도다. 나도 거기에서 태어났는데, 이듬해 6·25 전쟁이 났고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월남을 했다. 어쩌다가 땅끝인 부산까지 와서 부민동에 터를 잡고, 법원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그 덕에 적당히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소고기 반찬을 싸 주면 나보다 못사는 아이가 배급받아온 옥수수빵과 바꿔 먹기도 했다. -나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1956년 부민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여러 번 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그려 팔아 용돈을 벌기도 했다. 미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었다면 남다른 끼와 말솜씨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소풍 가서 사회자는 늘 내 차지였다. 그래선지 말이나 행동에 남다른 스타 의식이 강했다. 이를테면 아침에 교문에서부터 영화배우처럼 겉멋을 부리며 걸었다. 저 멀리 3층 교실 창문에서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여자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웅변대회에도 단골로 나갔다. 주위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만들었던 것은 나의 성우 흉내였다. ‘삼국지’, ‘수호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외워 목소리 흉내를 내면 식구들, 친구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국어 시간에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미망인 모씨는~’으로 시작하는 고전 ‘조침문’을 ‘전설 따라 삼천리’의 성우 유기현씨 목소리로 읽어주면 교실은 난리가 났다. -공부는 못했다.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영남상고에 들어갔는데, 막상 졸업을 할 때가 되니 아버지는 “네가 장남인데 대학을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재수를 시작했는데, 길게 하지는 못했다. 공부 의욕도 떨어졌지만 집안 형편이 크게 기울어졌다. 안 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공부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도 크다. -1972년 군 복무 중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박정희 정부는 전군에 ‘문화선전대 경연 행사’를 열어 유신의 필요성을 병사들에게 홍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사단 웅변대회 선수로 뽑힌 나를 대대장이 불렀다. “이상용, 너는 오늘부터 웅변 대신에 문선대 경연 준비를 해라.” 유신헌법이 뭔지를 내가 알 리 없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우리 몸에는 우리 옷을 입어야 하는데, 유신헌법이야말로 우리 몸에 맞는 옷이다’를 주제로 코미디를 구성해 연기했고, 사단에서 1등을 했다. 그때부터 MC 겸 코미디 담당으로 예하부대를 돌며 유신 홍보 공연을 다녔다. MC와 코미디언으로서 능력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얼마 후에는 사단 내 방송 DJ도 맡게 됐는데, ‘쌀’을 ‘살’로 발음하고 ‘의사’를 ‘어사’라고 말하는 억센 부산 사투리가 문제가 됐다. 문선대 공연에서야 사투리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수단이었지만, 아무래도 방송에선 아니었다. 교정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매일 책과 신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 또한 나중에 사회에 나와 큰 도움이 됐다. ●‘수그려라’가 제 좌우명… 저를 방송인으로 남게 한 건 8할이 ‘노력’ -박원웅 선생의 스카우트로 MBC 라디오 데뷔를 한 이후 몇몇 프로그램이 나를 더 따라왔다. 사람들은 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리듬감 있는 말투를 좋아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위기가 찾아왔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가요계를 평정할 때였으니 1976년쯤인 듯한데, MBC 라디오의 간부 한 분이 나를 호출했다. “라디오 진행자를 전부 아나운서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위에서 내려왔다. 미안하다.” 교통정보 프로그램 ‘푸른 신호등’에서 하차하라는 말이었다. 방 한 칸 신혼살림에 아내는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 세간이라곤 쌀통 하나뿐이고, 찬장도 없어 사과상자로 대신하고 있던 우리 부부였다. “저, 좀 더 잘하겠습니다. 이거 그만두면 생계가 막막해집니다.” 소용없었다. 다시 실업자가 됐다. 폭음을 하고 들어가 아내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방송하는 사람은 방송국에서 안 불러 주면 끝이다. ‘푸른 신호등’에서 졸지에 잘린 뒤 나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MBC 근처에 신발가게를 차렸다. 동대문 시장에서 패션구두 같은 것을 떼어다 아내와 같이 팔았다. 조용필이나 이은하 같은 스타들이 찾아와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6개월도 안 돼 망했다. 장사는 말주변만 갖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묘하게도 신발가게를 폐업하자 방송 요청이 연달아 들어왔다. 잠깐 동안의 실업자 생활과 신발가게 실패를 통해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에 간단한 것은 없다. 무엇이든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 -라디오로 주가가 오르면서 TBC ‘7대 가수쇼’ MC로 TV 데뷔를 했다. 운현궁 공개홀에서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 당대의 스타들과 인사를 했다. ‘내가 여기까지 왔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시 고려진씨와 짝을 이뤘는데 최초의 남녀 공동 MC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150명 정도의 여성 MC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얼마 후에는 MBC ‘토요일 밤에’와 함께 주말 저녁을 양분하고 있던 TBC ‘쇼쇼쇼’의 MC로 위키리(이한필)의 뒤를 이어 발탁됐다. 쇼쇼쇼에서 나와 최고의 콤비를 이뤘던 정소녀씨를 만났다. ‘허참’ 하면 ‘정소녀’, ‘정소녀’ 하면 ‘허참’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나와 같이 MC를 보던 정혜경씨는 내 이름에 이어 자기 이름을 말하는 순서에서 돌연 ‘정소녀’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보기 드문 방송사고를 내기도 했다. -한창 때에는 새벽부터 심야까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방송을 했다. 방송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극심한 스트레스다. 수십년을 해도 마찬가지다. 거기에서 오는 긴장과 피로, 고독감을 술로 달래면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한밤중 방송이 끝나면 심신이 허기져서 무교동 낙지골목 등을 훑고 다녔다. 그렇게 일에 술에 파김치가 돼서 집에 갔다가 새벽에 나오는 생활이 이어졌는데, 방송국에서 쓰러져 응급차로 실려간 적도 있었다. -나를 대표하는 ‘가족오락관’은 1984년 4월 3일 벚꽃이 한창일 때 처음 전파를 탔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공교롭게 마지막 1237회 녹화일이 2009년 4월 2일이었다. 하루도 어긋나지 않는 만 25년. 나의 청춘과 중장년이 그대로 녹아 있는 사반세기와 좀 더 따뜻하게 이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참 아쉽다. 새로운 포맷의 참신한 가족오락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서 갑자기 관두게 됐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KBS는 가족오락관 후속으로 ‘가정오락관’이란 프로그램을 편성했지만, 몇 번 내보내고는 시청자 반응이 안 좋다며 폐지해 버렸다. 지금은 온 가족이 모여 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수그려라’가 나의 좌우명이다. 남을 존중하고 경청하려고 애쓴다. 남들 앞에 과하게 나서지 않으려 한다. 나는 항상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두고 무대에 오른다. 후배들한테 말한다. 분위기 뜨고 흥겹다고 해서 객석에 마이크 들이대며 반말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방송인으로서 나의 능력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끼’는 타고났을지 몰라도 나머지를 채운 것은 나의 부단한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젊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위해 시중에 있는 거의 모든 유머집을 구입해 외우고 또 외웠다. 소설이건 수필이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을 메모해 암기했다. 교수, 의사, 성악가, 요리사, 언론인 등 자기 분야의 고수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과의 얘기는 모두가 살아 있는 공부였고, 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단련될 수 있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허참은 누구 본명은 이상용. 1949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 MC’ 중 한 명이다. TBC 동양방송, KBS 한국방송, MBC 문화방송에서 수많은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26년 동안 진행한 KBS ‘가족오락관’은 그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코미디언, 가수,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남상고, 동아대, 중앙대 국제경영대학원 수료 ▲TV 프로그램 TBC ‘7대 가수쇼’ ‘쇼쇼쇼’ ‘전국 TOP10 가요쇼’, KBS ‘가족오락관’ ‘도전! 주부가요스타’ ‘왕건오락관’ ‘지구촌 노래자랑’, MBC ‘젊음은 가득히’ ‘지붕뚫고 하이킥’, 대전MBC ‘허참의 토크&조이’, SBS ‘빙글빙글 퀴즈’ ‘잉꼬부부 재치부부’, MBN ‘엄지의 제왕’ ▲라디오 프로그램 MBC ‘싱글벙글쇼’ ‘푸른 신호등’ ‘청춘은 즐거워’, SBS ‘허참의 즐거운 저녁길’ ▲음반 ‘왜 몰라주나’(1976년) ‘추억의 여자·소낙비’(2007년) ▲제29회 한국방송대상(2002년) 제12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2005년) KBS 연예대상(2006년)
  • ‘최고 연기’ 배우에 쏟아진 박수…알고보니 심장마비

    ‘최고 연기’ 배우에 쏟아진 박수…알고보니 심장마비

    체첸공화국의 한 40대 남성이 공연 무대 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뉴욕포스트 등 해외 언론이 5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남부 자치공화국인 체첸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48세의 쿠사이노프는 현지에서 열린 한 공연 무대에 올라 정해진 안무에 맞춰 춤 동작을 선보였다. 그가 춘 춤은 레즈긴 족의 전통춤인 레즈긴카(Lezginka)로, 팔과 발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 쌍이 춤을 추기도 하고 남자 혼자 출 수도 있으며 종종 독수리를 흉내내거나 검무를 추기도 한다. 당시 쿠사이노프는 체첸 전통 복장을 입고 레즈긴카를 추고 있었고, 춤을 추며 무대 왼쪽에서 여성 댄서를 지나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다리를 휘청하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무대에는 현장에 있던 가수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관객들은 그의 동작이 안무의 일환이라고 여기고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하지만 곁에 서 있던 동료 배우는 쿠사이노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관객들에게 박수를 멈추라고 소리쳤다. 무대 뒤에 있던 동료배우들도 달려 나와 그의 상태를 살폈지만 그는 이미 숨진 후였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충격적인 장면은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무대를 촬영하던 관객이 우연히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은 “쿠사이노프는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자 배우, 댄서로 활동했으며, 평소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전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삼수 끝에… 이정은 LPGA 진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통산 5승을 올린 이정은(28·교촌F&B)이 2017년 미국 무대에 진출한다. 이정은은 5일 미국 플로리다주 데이토나비치의 LPGA인터내셔널 골프장(파72)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 최종전 마지막 날 5라운드에서 3타를 줄여 합계 10언더파 350타를 기록, 단독 5위에 올라 내년 LPGA 투어 출전권을 확보했다. 2006년 KLPGA 투어에 입회해 매년 꾸준한 성적을 낸 이정은은 이로써 세 차례 연속 퀄리파잉스쿨 도전 끝에 LPGA 출전권을 따냈다. 13언더파 347타를 기록한 제이 마리 그린(미국)은 1위로 LPGA 무대에 서게 됐다. 경기가 끝난 뒤 이정은은 “(LPGA는) 정말 오고 싶었던 곳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이어 “시드 유지가 먼저다. 퀄리파잉스쿨은 다시 가고 싶지 않다”며 “우승 한 번은 하고 싶다”는 목표를 전했다. 이정은은 당장 구체적인 미국 진출 일정을 정하지는 못했다. 한편 LPGA 2부 투어에서 활동한 김민지는 1오버파 361타로 공동 35위에 올라 조건부 출전권을 받았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미·중 신경전에… 키신저의 빛난 존재감

    미·중 신경전에… 키신저의 빛난 존재감

    中서 시진핑 등 지도부들과 회동 시 주석 “새로운 미·중 대국관계 ‘제로 섬’ 사고 버리고 협력해야” 키신저 “차기 트럼프정부도 기대” “미국인 어느 누구도 중국인에게서 그처럼 존경받는 사람은 없다. 중국 지도부와 적어도 그처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할 사람은 없다.” 블룸버그가 지난 2일(현지시간) 헨리 키신저(93) 전 미국 국무장관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동을 두고 한 보도의 일부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미국 외교의 대부’인 키신저가 다시 외교 무대에 등장했다. “중국 지도부는 아직도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며 키신저에 기대고 있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80차례 이상 중국을 방문한 그는 중국 역대 최고 지도자와 각별한 관계를 텄다. 중국의 국부 격인 마오쩌둥과는 비밀회담을 통해 미·중 수교의 초석을 닦았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과도 관계가 각별했다. 키신저의 이번 중국 방문은 중국 인민외교협회 초청으로 이뤄졌다. 그가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관영 인민일보는 ‘라오펑유’(오랜 친구)라며 그를 반겼으나 이번에는 그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다. 그가 시 주석과 지난 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동하면서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의견을 교환한 수시간 뒤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통화했기 때문이다. 키신저가 트럼프의 차이 총통과의 통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거나, 트럼프가 키신저가 시진핑과 회동한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트럼프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 간의 미묘한 관계에 무지했을 수 있다. 시 주석은 키신저에게 “중국과 미국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 건설을 촉진하려면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해선 안 된다”며 “양국은 ‘제로 섬’(한쪽이 이득을 취하면 다른 쪽은 손해를 보는 것)과 같은 사고를 버리고 서로의 전략적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키신저는 “미·중 관계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할 것으로 믿으며 차기 미국 정부도 그렇게 하길 기대하고 있다”면서 “본인도 미·중의 상호 이해 증진 교류 협력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고 화답했다. 하버드대 교수 출신인 키신저는 1969년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닉슨 대통령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1971년 7월에는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고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키고 1979년 미·중 수교를 견인한 막후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무정부 상태와도 같은 국제사회에서 평화는 ‘세력균형’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미·중이 경쟁을 하더라도 냉전 때처럼 극단적 군사 경쟁으로 치닫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트럼프는 지난달 17일 뉴욕에서 공화당 원로이기도 한 키신저를 만나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광범위한 자문을 받았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키신저에게 외교 안보 분야를 자문했었다. 키신저는 지난달 20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내 일생에서 만난 가장 독특한 대통령 당선자로 어떤 특정 그룹에도 빚을 지지 않고 자신의 전략만으로 대통령이 됐다”며 “트럼프가 굳이 선거운동 당시 공약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靑 100m앞 행진, 연행자 ‘0’… 앞장선 세월호 유족 “구속해야”

    靑 100m앞 행진, 연행자 ‘0’… 앞장선 세월호 유족 “구속해야”

    지난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6차 촛불집회는 ‘탄핵 무산 가능성’에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도 평화집회 기조를 지켜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만 사상 최대인 170만명(주최 측 추산)이 운집했고, 처음으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이 허용됐다. 보수 시민단체가 맞불집회를 열었지만 충돌은커녕 연행자도 한 명 나오지 않았다. 경찰 역시 흥분한 시민 3명에 대해 연행이 아닌 격리조치하는 등 인내 대응을 했다. 오후 4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이 시작됐다. 앞서 주최 측(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은 행진 지점을 청와대에서 30m 거리인 분수대로 신고했지만 경찰은 금지통고를 내렸다. 집회 전날 법원이 일몰(오후 5시 30분)까지 100m 앞 행진을 허용하면서 시민들은 청와대 서쪽으로 효자치안센터, 남쪽 자하문로16길 21앞, 동쪽 팔판길 1-12(126맨션)에 모여 청와대를 에워싸고 ‘퇴진’과 ‘구속’을 외쳤다. 행진 선두에는 416가족협의회 등 세월호 유가족들이 섰다. 박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2014년 8월부터 76일간 노숙 농성을 벌였던 이들이다. 2년여만에 청와대 코앞에 다다른 유가족들은 “박 대통령은 국민의 목숨을 손톱의 때 만큼도 여기지 않았다”며 “박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수사하고 구속해야 한다”며 오열했다. 오후 6시 본집회가 광화문광장과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탄핵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셈법, 박 대통령의 꼼수 등에 대해 분노를 보여주자는 뜻에서 가수 출연을 줄였다. 유일하게 가수 한영애씨가 무대에 올라 ‘조율’, ‘홀로 아리랑’ 등을 불렀다. 이날 ‘1분 소등 행사’는 오후 7시에 열렸다. 지난 집회 때보다 한 시간 앞당긴 데 대해 주최 측은 “세월호 7시간의 진실을 밝히라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직후 시작된 본행진에서는 청년당원 200여명이 ‘횃불’을 들고 나섰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조롱에 ‘더 큰 횃불로 번졌다’는 의지를 보여준 퍼포먼스였다. 집회 참석 인원은 본집회 시점 60만명에서 30분 만에 90만명으로 급증했고, 오후 7시엔 동시간대 최대 규모인 110만명을 기록했다. 오후 9시 30분에는 170만명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주최 측은 이 시각 기준 서울 포함 32곳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232만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경찰도 5차 집회 때보다 5만명 늘어난 32만명으로 집계했다. 이 역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오후 11시 공식행사는 끝났지만 효자치안센터 인근에서 자정까지 일부 시민과 경찰이 대치했다. 하지만 경찰의 강제해산 조치에 시민들이 순순히 응했고, 연행자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 3명이 잠시 격리됐지만, 금세 풀려났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처음으로 여의도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 3000여명은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 대통령의 퇴진과 새누리당 해체를 요구했다. 집회를 마친 뒤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빌딩을 거쳐 여의도역까지 2㎞ 구간을 행진했다. 같은 시간 보수단체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에서 맞불 집회를 열었다.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대연합’ 소속 회원 3만명(주최 측 추산)은 오후 2시 집회를 열고 “선동의 촛불은 김정은(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명령”이라며 “(박 대통령을) 마녀사냥에 내몰지 말라”고 주장했다. 이어 종로 3가까지 행진했지만 촛불집회 참가자와 충돌은 없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메이저리거’ 이대호 “2017년 소속팀, 나도 궁금해”

    ‘메이저리거’ 이대호 “2017년 소속팀, 나도 궁금해”

    추신수(34·텍사스 레인저스)가 ”동갑내기 친구들이 동시에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건 다시 없을 기회“라고 벅찬 기분을 이야기하자 이대호(34·전 시애틀 매리너스)가 ”나 때문에 다시 없을 기회라고 말하는 것인가“라며 한 마디를 던졌다. 아직 새 소속팀을 정하지 못했지만 이대호는 여유가 넘쳤다. 이대호의 호탕한 답에 팬들도 웃었다. 이대호는 3일 서울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추신수, 오승환(3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과 함께 ‘야구야 고맙다’ 출판 사인회를 했다.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동시에 활약한 동갑내기 3명은 책을 공동 출간했다. 2017년에도 세 명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추신수와 오승환은 내년에도 텍사스와 세인트루이스에서 뛴다. 시애틀과 1년 계약을 한 이대호는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새 둥지를 찾고 있다. 이대호는 ”내 행선지는 나도 궁금하다“고 웃으며 ”분명한 건 연락을 주는 구단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락을 주는 구단’이 속한 리그도 밝히지 않았다. 최근 이대호의 이름은 미국과 일본, 한국 언론에 동시에 오르내린다. 한미일 3개 리그에서 이대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 한국과 일본 무대를 평정한 이대호는 올해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시애틀은 메이저리그 승격을 보장하지 않았지만 이대호는 스프링캠프에서 경쟁자를 제치고 개막 로스터(25명)에 포함됐다. 우타 1루수로 역할이 제한돼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전반기에는 타율 0.288, 12홈런, 37타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후반기 성적은 타율 0.200, 2홈런, 12타점으로 뚝 떨어졌다. 이대호는 올 시즌을 타율 0.253, 14홈런, 49타점으로 마친 뒤 ”전반기 부상 신호가 왔을 때 조금 쉬었다면 한결 나은 몸 상태로 후반기를 치를 수 있었을 텐데…. 당장 뛰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 후반기에 고전했다“고 곱씹었다. 10월 31일 귀국 인터뷰에서는 이대호는 ”처음에는 대타로 나가는 것도 재밌었다. 나중에는 자존심이 상하더라“며 ”내가 경기를 못 뛰는 게 억울하고 더 뛰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며 ‘출전 기회’를 계약 조건 중 하나로 꼽았다. 한 달 동안 이대호는 휴식을 취하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구단과 조용히 협상했다. 모든 리그에서 관심을 보이지만, 이대호의 거취를 가장 궁금해하는 이들은 한국 팬이다. 이대호는 ”조금 기다려주시면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꼭 한국 팬에게 가장 먼저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이재명과 美 샌더스/임창용 논설위원

    [씨줄날줄] 이재명과 美 샌더스/임창용 논설위원

    ‘홍준표 경남지사와 박근혜 대통령은 내 홍보대사.’ 이재명 성남시장이 요즘 시국 강연에서 자주 하는 말이다. 홍 지사는 103년 전통의 진주의료원을 적자 누적을 이유로 폐원시켰다. 학교 무상급식도 중단했다. 박 대통령은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의 노령수당을 주겠다는 대선 공약을 깼다. 무상복지에 대한 반감도 여전하다. 이 시장은 정반대로 했다. 최첨단 공공의료원을 건립하고 청년들에게 수당을 지급했다. 중고생들에게 교복을 사 주고, 산모에게 산후조리원 비용을 지원했다. 논란이 일면서 전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됐고, 이 시장의 인지도가 올랐음은 물론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역설적이게도 그의 ‘홍보대사론’이 일리 있어 보인다. 이재명 시장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치솟고 있다. 지난해 봄 갤럽 조사에서 처음으로 1%를 찍은 뒤 최근 15%를 넘어섰다. 지난달 30일 리서치뷰 조사에선 17.2%, 28~30일 리얼미터 조사에선 15.1%로 나타났다. 쌍두마차였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빅3’ 구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높은 지지율을 고려할 때 이 시장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 중요 현안에 대한 대권 주자들의 입장을 물을 때 대개 뒷전에 밀린다. ‘투명인간’으로 취급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검증되지 않은 기초단체장이란 시각이 워낙 커서다. 외려 외신에서 관심을 갖는다.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이 시장 인터뷰를 크게 실었다. 그가 기득권층의 부패와 불공정한 분배, 실업 사태 등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에 주목하면서 유력 대권 주자로 뛰어올랐다고 분석했다. 이 시장은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뽑아 기득권층에 카운터펀치를 날렸듯 한국의 선거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트럼프보다는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비교되길 원한다. 두 사람 모두 극빈 가정에서 전형적인 ‘흙수저’로 태어나 자랐다. 자치단체장으로서 주민 참여를 최우선으로 하는 풀뿌리 민주정치를 기반으로 정치 경력을 쌓은 점 등 유사점이 적지 않다. 기성 정치권과 주류 언론에 맞대응해 싸우는 점도 비슷하다. 각각 성남과 벌링턴이란 자치단체의 성공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세상을 바꾸려 하는 목표도 같다. 이 시장은 만약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후보가 됐다면 트럼프를 꺾고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야권의 어떤 후보보다 본선 경쟁력이 높다는 자신감이 읽힌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그가 혹독한 검증을 거치면서 거품처럼 지지율이 꺼질 것이란 시각도 여전하다. 이 시장이 ‘성공한 샌더스’가 될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변방의 장수가 민심을 기치로 해 낡은 기성 정치인들과 맞짱 뜨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기는 할 것 같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꽃미남 연기돌? 진짜 열혈 배우!

    꽃미남 연기돌? 진짜 열혈 배우!

    “제가 해 본 가장 큰 일탈이 뭐냐고요? 이번 영화가 가장 큰 일탈 같아요. 안 해 봤던 걸 한꺼번에 다 해 본 느낌이었죠.” 인기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민호가 배우 최민호(25)로 관객 앞에 성큼 다가왔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누아르 영화 ‘두 남자’를 통해서다. 2008년 샤이니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2010년 KBS 드라마스페셜 ‘피아니스트’로 연기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아이돌 활동 중간에 간간이 시트콤으로, 드라마로 연기를 병행했지만 배우라기보다는 아이돌의 이미지가 강했다. 올봄 ‘계춘할망’에서 주인공 김고은의 친구로 등장하며 스크린에 데뷔했지만 무엇인가 보여 주기에는 주어진 몫이 너무 작았다. 이번엔 다르다. 불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그가 밝고 건강한 모범생 이미지를 훌훌 벗어던졌다. 가출 청소년 무리의 리더 진일 역을 맡은 최민호는 툭하면 담배를 입에 문다. 연기를 위해 안 피우던 담배도 배웠다가 끊었다고. 거친 욕설은 입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길거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텨 내려고 크고 작은 절도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내내 악덕 노래방 업주(마동석)에게서 여자친구를 구해 내려고 흠씬 두들겨 맞거나 땅바닥을 구르는 등 고군분투한다. 그러면서도 마동석의 카리스마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영화를 본 어머니가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깜짝 놀라셨어요. 학창 시절에 어머니 허락을 받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찜질방에서 잠잤던 정도가 일탈이라면 일탈이었거든요. 사인회 때 만난 팬들도 잘봤다고 말은 하면서도 얼떨떨한 모습들이 많았죠.” 그간 쌓아 온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봐 회사에서도 고민이 많았다고. 하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마동석의 응원에 출연 결심을 굳히게 됐다며 환하게 웃는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까지 한 톤의 색깔을 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두 남자’에서는 어두운 톤의 새로운 색깔을 가지게 됐죠. 한편으론 실제와는 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불편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저도 몰랐던 제 표정을 보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들을 배우는 등 정말 얻은 게 많아요.” 어려서 꿈은 운동선수였다. 축구 국가대표였던 아버지(최윤겸 강원FC 감독)의 영향이 컸다. 아주 어릴 적 기억에서부터 아버지는 늘 운동장에 있었다. 초등학교 때 축구 선수를 하겠다고 했다가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꿈 잃은 소년이었는데 중학교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오디션에 합격해 회사(SM)에 들어오게 됐어요. 이때는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죠. 아버지는 한번 해 보라는 반응이었는데 ‘조금 하다 말겠지’ 하고 생각하셨나 봐요.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결국 허락을 받고는 본격적으로 데뷔를 준비하기 시작했죠.” 춤, 노래 수업보다는 연기 수업을 많이 들을 정도로 왠지 모르게 연기에 끌렸다는 최민호. 전업 연기자에 대한 꿈은 없을까. “좀더 시간이 지나 군대에 가야 할 시기가 다가오면 그 전후로 어쩔 수 없이 팀 활동보다는 개인 활동이 많아질 거예요. 그때면 솔로 활동이 아니라 연기 욕심을 한껏 낼 것 같아요.” 아이돌 활동으로 바쁜 나날이지만 연기 공부를 위해 영화를 많이 본다며 눈을 빛냈다. “2박3일 동안 잠자는 시간 빼고 몰아서 보기도 해요. 한 배우에게 꽂히면 젊은 시절 작품까지 찾아 연달아 보기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죠. 최근엔 조지프 고든 래빗의 작품을 그렇게 봤어요. 그러면서 몰랐던 것을 알아갈 때면 문제지를 푸는 기분이 들기도 하죠.” 아이돌로서의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이제 무대 위에서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고 노련해지고 여유로워졌는데 그러한 것이 카메라 앞에서 시너지를 낸다는 것이다. “빨리 뛰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한 발 한 발 걸으며 단단하게 다져서 더 멀리 가고,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개발·좌초… 20년 애물단지 中 자본 복합리조트 초읽기

    개발·좌초… 20년 애물단지 中 자본 복합리조트 초읽기

    제주 오라관광단지는 1997년 2월 제주시 오라2동 268만 3000여㎡ 일대가 오라관광지구로 확정되면서 개발 사업이 시작됐다. 당시 쌍용건설, 유일개발, 오라공동목장조합 등 3개 사업자가 함께 4400여억원을 들여 숙박시설과 골프장, 공원, 쇼핑센터 등을 갖춘 대규모 관광위락시설 건설을 계획했다. 하지만 쌍용건설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는 바람에 지체하다 2002년 7월 말 가까스로 기반시설 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2년 뒤 쌍용건설이 자구노력 차원에서 100% 출자한 유일개발을 지앤비퍼시픽에 매각, 손을 떼면서 오라관광지구는 수차례 사업 시행자 변경과 사업 기간 연장을 반복하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2005년 7월 다단계 업체 제이유그룹이 오라관광지구 토지를 사들이고 사업권을 인수했으나, 주수도 회장이 수조원대 사기 행각으로 구속되면서 사업이 좌초됐다. 이어 웅진그룹 계열의 극동건설이 사업권과 개발 부지를 인수, 2008년 10월 재추진에 나섰지만 4년 뒤 부도를 맞으면서 다시 물거품이 됐다. 오라관광지구 개발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자 제주도는 지난해 5월 오라관광지 개발사업 시행승인(관광지 지정 포함)을 취소했다. 이후 중국 자본인 JCC가 지난해 7월 오라관광단지를 복합 리조트로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개발 사업 부지 대부분을 사들인 JCC는 지난해 11월 개발 사업 승인신청서를 제주도에 제출했다. 좌광일 제주주민자치연대 정책국장은 “오라관광단지는 20여년간 부동산 투기로 한몫 잡아 보려는 국내 투기 세력들의 탐욕의 무대였다”며 “급기야는 실체가 불분명한 중국 자본의 부동산 투기 먹잇감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조연에서 주연이 된 악기

    조연에서 주연이 된 악기

    조연으로 익숙하던 악기들이 무대 중심에 나서는 공연이 잇따라 눈길을 끈다.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위)이 오는 30일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정신적 스승이었던 투츠 틸레망을 기리는 공연 ‘바이, 투츠’을 연다. 재즈 하모니카의 거목이었던 틸레망은 지난 8월 94세로 세상을 떴다. 전제덕은 2004년 데뷔한 뒤 국내 음악계에서는 소품으로 취급받던 하모니카의 위상을 솔로 악기로 끌어올렸다. 최근 하모니카의 고향인 독일의 최고 브랜드 호너의 공식 아티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물놀이패에서 활동하던 그를 하모니카의 세계로 이끈 게 바로 틸레망이다. 라디오방송에서 우연히 접한 틸레망의 연주에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재즈 하모니카를 독학한 것. 시각장애인이라 오로지 귀에만 의지해야 했던 전제덕에게 틸레망의 음반은 교과서였다. 1000번 이상씩 들어 CD가 고장날 정도였다고. 이번 공연에서는 틸레망의 대표곡 ‘블루젯’과 그가 즐기던 ‘이프 유 고 어웨이’, ‘더 데이스 오브 와인 앤드 로지스’ 등을 비롯해 자신의 오리지널 곡과 재즈 스탠더드, 팝 넘버 등을 함께 들려준다. 이보다 앞서 오카리스트 양강석은 4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무대에 오른다. 흙으로 빚은 오카리나는 목가적인 음색을 들려주는 이탈리아 태생 악기다. 작곡가 출신으로 국내 오카리나 1세대인 양강석은 2001년부터 꾸준히 음반과 교본을 발표하는 등 오카리나 문화를 전파하는 데 앞장 서왔다. 하와이 전통악기인 우쿨렐레와 팬플루트, 카혼 등 여러 월드뮤직 악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이번 공연에서 우쿨렐레 연주자 데이비드 첸 등과 협연한다. 레인보우 레이디 오카리나 앙상블도 무대에 올라 오케스트라 식으로 편성된 오카리나 7중주를 선사한다. 양강석의 오리지널 곡과 유명 팝송, 재즈, 영화음악 등을 연주한다.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아래)는 내년 1월 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로 ‘출격’한다. 독일이 고향인 반도네온은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을 대표하는 악기다. 반도네온에 빠져 카이스트를 중퇴하고 일본과 아르헨티나에서 탱고 음악을 공부한 고상지는 정재형, 김동률, 윤상, 이적 등 인기 가수들의 공연을 함께하며 존재를 알렸고,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도 단골 초대 손님으로 나와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2014년 첫 정규 앨범 ‘마이크그네 1.0’과 올해 2집 ‘아타케 델 탱고’를 내놓으며 호평을 받았다. ‘에반게리온’의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를 동경한다는 고상지는 음악인의 꿈을 키워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OST를 새롭게 편곡해 들려준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조수미, “아버지 장례식 때도 무대에..” 화려한 무대 뒤 아픈 개인사

    조수미, “아버지 장례식 때도 무대에..” 화려한 무대 뒤 아픈 개인사

    조수미가 2부작 다큐멘터리를 통해 50년 음악인생과 화려한 무대 뒤 감춰진 개인사를 공개한다. 오는 12월 1일 방송되는 ‘디바 조수미’ 1부에서는 세계 3대 소프라노로 손꼽히며, 국제무대에서 맹활약 중인 조수미의 새로운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조수미는 “지난 2006년, 샤틀레 극장에서 독창회를 준비하던 중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바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머니가 ‘관객과의 약속을 지켜라’며 귀국을 만류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무대를 지켰다”고 말했다. 당시 조수미는 눈물범벅이 된 모습으로 끝까지 무대를 마쳐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을 세계적인 음악가로 만들기 위해 4살 때부터 혹독한 교육을 시켰던 엄한 어머지가 지금은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연도 털어놓는다. 조수미는 “철저하게 나를 ‘내 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딸, 세계적인 딸’로 키우셨다. 그런데 그 때문에 어머니를 옆에서 돌봐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그게 어머니한테 좋은 일인지 어머니께 여쭤 보고 싶다”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조수미는 앞서 방송에서 “하루는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준다고 장을 봐 오셨는데 냉장고에 재료가 없었다. 나중에 혹시나 해서 옷장을 열었더니 그 안에 음식 재료가 있었다. 그때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고 고백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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