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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주양 유괴범 조기가석방 될듯/정규군 살해범 검거 결정적 공헌

    ◎경남경찰청,교도소에 요청 지난 79년 부산 효주양 유괴사건의 범인 李모씨(43)가 김해 梁正圭군 유괴살해사건의 범인 검거 때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조기 가석방될 전망이다. 경남지방경찰청은 李씨가 지난달 발생한 김해 梁正圭군 유괴살해사건 해결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을 참작,최근 법무부에 李씨의 조기석방을 건의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당초 경찰은 正圭군 유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범인인 朴珍奉씨(41·구속)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곳에 수감중이던 李씨를 만났다.이때 李씨는 교도소 내 목공소생활을 통해 알게 된 朴씨의 음성과 녹음된 협박 전화의 목소리가 동일하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수사관에게 확인해줬다는 것. 이씨는 지난 80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후 효주양 가족의 탄원과 모범적인 행형성적이 반영돼 20년으로 감형,현재 18년째 복역중이다. 한편 대전교도소는 이씨가 내년 2월 가석방 대상으로 법무부에 상신돼 현재 분류작업중이라고 밝혔다.
  • 노동부의 박노해 시인/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노동부의 기피인물이었던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니 만감이 교차한다” 19일 노동부 회의실에서 노동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박노해시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만감이 교차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부 직원들도 그런 표정이었다고 신문보도는 전한다. 그 신문을 읽은 많은 독자들도 그런 느낌이었을 게다. 그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간(84년)했을 당시 문학분야을 취재했던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노동의 새벽’이 문단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고 그 문학적 힘 때문에 그는 문단에서 부정되기도 했다. 진짜 노동자가 쓴 것이 아니라 얼굴을 가린 기성시인이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돈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성시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는데 ‘노동의 새벽’ 원고를 출판사에 건넨 고(故) 蔡光錫 시인과 金思寅 시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신비의 베일에 가렸던 시인은 91년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핵심인물로 검거되면서 ”살기어린 눈빛을 지닌 야수의 얼굴”로 공개됐다.그자신 “짐승같은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려 야수와 같이 싸웠다”고 말했지만 시대의 간계는 노동운동의 순수성까지 왜곡시켰다. 그리고 그는 일반인들 사이에선 잊혀졌다. 지난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무기징역수에서 벗어나 다시 우리 앞에 선 그의 모습을 한 언론인은 ‘성직자’혹은 ‘현자’에 비유했다. 실제로 그는 노동운동가라기보다 사상가의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 자신 ‘가스발’이라는 세례명을 지닌 가톨릭 신자이고 형과 누이가 각각 사제와 수녀의 길을 걷는 경건한 신앙인 가족이기도 하다. 사면후 대학과 공연장,방송등에서 보여준 그의 경쾌한 모습은 저 무거운 70년대의 노동운동 투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당혹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변모였을 뿐이다. 노동부에서 강의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란 점에서 감회가 깊다. 그 자신도 “내가 여기 설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고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말하고 있다. 박시인을 초청해 강의를 들은 노동부 공무원들의 열린 자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박노해 시인처럼 과거 권위주의 정권아래서 어쩔수 없이 색깔이 입혀진 사람들의 이름만 들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기득권층이 적지 않다. 그들도 시인과 노동부 공무원들처럼 열린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조화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 獄中喪主 김희로/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아들의 석방만을 기다리며 “한번만이라도 아들을 얼싸안고 싶다”던 金嬉老씨(70)의 어머니 朴得淑 할머니(90)가 지난 3일 숨졌다.5일 일본 시즈오카 현 가케가와시 시립양로원에서 있은 朴할머니의 장례식장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오늘 아침 어머니께 편지를 쓰던 중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쏟아졌다. 장례식 시간에 맞춰 형무소에서나마 어머니를 보내드리겠다. 정말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은 심정이다”는 金씨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편지만 날아와 지키고 있었다. 金嬉老. 그는 지난 68년 2월 일본 시미즈시에서 “더러운 돼지새끼 같은 조센진(朝鮮人)”이라는 민족차별적인 언동에 흥분해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붙잡혀 30년동안 복역하고 있다. 인질극 당시 朴할머니는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꺼끗이 자결하라”고 권할 만큼 강골의 여인이었다. 그러던 朴할머니도 아들이 사건발생 7년 뒤인 75년 무기징역형으로 확정판결을 받은 뒤 수감생활이 길어지자 일본 법무성에 수도 없이 탄원하며 석방을 고대했다. “아들이 일본 법률을 어긴 것은 절반 이상 나의 잘못”이라며 “차라리 나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일본의 무기수는 확정판결을 받고 10년이 지나면 가석방 대상이 되지만 金씨는 그때마다 번번이 제외돼 지금까지 차디찬 감방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기울인 석방노력도 간단하지 않다. 그 가운데 지난 90년 金大中 대통령과 金泳三 전 대통령 등이 서명한 10만명 석방보증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던 석방운동은 특별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난달 초 金대통령의 일본방문때도 이 문제가 실무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됐지만 결과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리가 金씨의 석방을 바라는 이유는 비록 그 잘못은 크지만 그동안의 수감생활을 통해 충분히 반성했을 뿐 아니라 그 행위 자체도 개인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차별적인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향한 우리 모두의 분노를 대변한 것이다. 30년째 일본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중인 그는 일본에서도 최장기수다. 그의석방을 위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길 기대한다.>
  • 얼굴없는 노동자시인 박노해:하(금지문화금지인생이제야말한다:13)

    ◎암울한 ‘불의 시대’ 지나 이제는 감싸고 흐르는 ‘물의 시대’ 같은 느낌/약한자들 고통과 슬픔 외면못해 뛰어든 노동운동/이념에 갇혔던 ‘사노맹’ 합리적 진보운동 밑거름 기대/정직한 성찰과 반성만이 희망의 미래 열어갈것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9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지난 8·15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시골출신의 노동자로 시작해 급진 이데올로기의 핵으로 활약하다 사형구형까지 받아 7년간 격리된 뒤 준법서약서를 쓰고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인물이다.출감직후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며 강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노해씨를 만나 보았다. ­91년 구속될 때와 요즘 분위기의 차이는. ▲당시가 어두운 시절 불덩어리처럼 자기 몸을 던지는 ‘불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열정을 내면화시켜 물처럼 흘러가는 ‘물의 시대’같은 느낌이 든다. ­처녀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글들은 언제 쓴 것인가. ▲선린상고 야간 시절 체험한 공장의 불쌍한 삶과 군제대 후 함께 부대끼던 공장과 버스회사 동료들의 짓눌린 모습들을 가식없이 담은 것들이다.작업장과 기숙사 구석에서 작업장 일지 등에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자평한다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본다.사회의 모순들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현장 분위기를 솔직하게 담았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었다는데 노동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는. ▲어렸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그러나 서울에 온 후 공장에 다니면서 계속되는 특근·철야잔업에서 동료들이 손을 잘리는 급박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때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로 했다.노동운동 아닌 노동운동부터 시작한 셈이다. -얼굴없는 시인으로 집필활동에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나만의 책상,나만의 펜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단 한순간도 편안히 앉아서 글을 써본 적이 없다.원고 전달때도 항상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85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한뒤엔 급진 노동운동가로 바뀌고 노동해방문학에선 정치적인 색채까지 보이는데…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대로 일하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였다.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분신과 구속 시위 등 항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람이 불에타 죽는 상황에서 시만 쓴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명을 부인하다 신동아 90년 12월호에 자전수기를 보내 신원을 밝힌 이유는. ▲86년 5·3인천사태로 구속된 金모씨가 조사과정에서 내 본명을 실토했다.수사기관에서 전담반까지 구성해 추적하는 상황에서 동료 노동자들이 박노해로 몰려 희생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수사기관에서 이미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판단,이름을 밝혔다. ­사노맹의 핵심사상은 무엇이었나. ▲사노맹은 80년 당시 군사독재하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그리고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노동해방을 온몸을 다바쳐서 밀고 나갔던 80년대 시대 정신의 절정이었고 시대의 최전선에서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사노맹의 실패 원인은. ▲시대변화에 너무 늦었고 실천과정에서 너무 조급한 게 한계였다.급진 사회주의에 갖혀 당시 정권을 여전히 군사독재로 규정한 채 변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 사노맹에 대한 생각은. ▲사노맹 사건은 500명이 구속되고 형량도 2,000년이 넘는 가혹한 희생을 치렀다.그동안 침묵 절필 삭발정진을 통해 책임을 지려했다.사노맹 관련자들 이 삶의 모범을 통해 극좌이념에 치우친 후배들을 진정하고 합리적인 진보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훌륭한 일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93년 옥중시집 ‘참된 시작’은 어떻게 나왔나. ▲91년도 대법원 상고 이유서를 쓸때 이미 창비(창작과비평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었다.진보운동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늦춘 것이다. 극우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모두 돌멩이를 맞았다.합리적 진보쪽에선 올바른 변화라는 평을 얻었다. ­‘참된 시작’에서 사상 갈등과 자기반성이 두드러지는데 그 배경은.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절대폭압의 조건 속에선 작은 권리 하나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붙든 게 사회주의였다.70∼80년대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살려내기 위해 야수처럼 싸웠다.그러나 사회주의 붕괴를 정직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3년 6월호 ‘사회평론’지에 낸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평에선 진보진영의 반성을 주장했는데… ▲철저하고 정직한 자기성찰과 책임 없이는 미래의 민주개혁과 진보적 운동이 불가능하다.새로운 진보이념과 비전,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목숨걸고 참구(參究)해 나가자고 한 것이다. ­계획된 작품은. ▲내년 여름쯤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올 겨울엔 6년만에 세번째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다.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동양사상과 서구사상,사회적 실천과 내적 영성(靈性) 등 양극대립을 모두 담을 생각이다. ◎격별의 글들/“그래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처절한 노동현장 ‘시다의 꿈’/강렬한 저항·분노 ‘노동의 새벽’/격랑뒤의 깨달음 ‘사람만이…’ ‘시다의 꿈’(83년 시동인지 ‘시와경제’에 발표)에서 ‘사람만이 살길이다’(97년 해냄刊)까지­.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활동하다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박노해씨의 글들은 험난했던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언들이다. 박노해란 이름을 처음 알린 ‘시다의 꿈’은 노동현장의 비극성을 그나마 우회적으로 들이민 처녀시였다.“…/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 박노해를 ‘한국문학을 관통하는 80년대 최고의 문제작가’로 자리매김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훨씬 거칠어진다.“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칠은 땀방울 피눈물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쓰린 가슴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어린이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모두 열악한 작업조건과 억눌린 사람들의 직설적인 고발이다. 그러나 옥중시 ‘참된 시작’과 지난해 발표한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살길이다’에선 사상의 갈등과 반성,그리고 새 생활에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마저 갖게 된다.“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건 앙상하고/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참된시작중 닭갈비)“희망찬 사람은 그자신이 희망이다/길찾는 사람은 그자신이 새길이다/참좋은 사람은 그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사람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사람만이 희망이다중 다시) 감옥에서 500여편의 작품을 구상했다는 박씨.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에서 이젠 만날수 있는 시인으로 바뀌어 새 작품을 구상중이다.80년대 노동계와 시단을 뒤흔들었던 박씨의 새 작품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31년간 불효한 못난 자식 옥중에서 목놓아 웁니다”

    ◎재일 무기수 金嬉老씨/모친 장례식 못간 심정 눈물로 쓴 편지로 띄워 “오늘 아침 어머니께 편지를 쓰던중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장례식 시간에 맞춰 형무소에서나마 어머니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어머니와 같이 가고 싶습니다” 지난 68년 일본 시미즈시에서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살해,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1년째 복역중인 金嬉老씨(70)는 어머니 朴得淑씨(90)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불효자의 심정을 편지로 대신했다. 朴三中 스님은 5일 오전 11시30분 일본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세레모니홀에서 열린 金씨의 어머니 장례식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중풍을 앓고 있던 金씨의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지난 3일 일본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시립양로원에서 ‘희로야 희로야’를 외치며 눈을 감았다.
  •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상(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2)

    ◎‘암흑속 노동’ 고발 ‘암흑속 수감’ 7년/야간고시절 어두운 현실 눈떠/‘노동의 새벽’ 민중문화 기폭제로/85년 본격 노동운동가 변신/수배·은둔·고초… 91년 끝내 구속/지난 8월 광복특사로 ‘햇빛’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을 통해 노동현장의 어두운 실상을 고발했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7년간의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의 새벽을 열고 있다.지난 8월15일 상오 10시 경주교도소.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가 상기된 얼굴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지난 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꼬박 7년을 감옥에서 지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박씨가 모습을 나타내자 부인 金眞珠씨(43)와 여동생,그리고 장인 장모,친척 등 10여명이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셨다.가족들과 뜨거운 인사를 마친뒤 모여 있는 기자들 앞에서 “이 시대의 변화에 주목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또박또박 읽어내리곤 교도소를 떠났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옆에 앉은 부인의 얼굴을 자꾸만 쳐다보았다.결혼후 수배로 인한 은둔생활과 구속·수감 탓에 밝은 세상을 함께 살아본 적이 거의 없는 부부였다.이화여대 약학대 재학중이던 부인 김씨를 알게 된 것은 선린상고 야간시절.야학 여교사와 학생 신분으로 만났다.이들은 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82년 결혼했다.신분노출을 염려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몇 사람만 초대해 숨죽이며 결혼식을 올렸다.그러나 91년 부인 김씨가 구속됐다.10일후 박씨도 구속됐다.김씨는 95년 먼저 석방된 후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주며 뒷치닥거리를 해왔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던 그에게 고교시절 야학은 그의 인생의 물꼬를 새롭게 터주었다.중학교 다닐땐 신부가 꿈이었다.그전엔 한때 정치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하지만 선린상고 야간시절 낮에 공장에 다니면서 체험한 현실 앞에서 신부는 낭만적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그래서 본격적으로 야학에 열중했다.창작과 비평(創作과 批評),사상계(思想界) 등을 탐독(探讀)하면서 명동성당 기도회와 반정부집회 투쟁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고교졸업후 최전방의 기술병을 자원해 군생활을 마친 뒤 곧바로 안양의 시내버스 정비공으로 입사했다.운전기사와 안내원들에게 의식화 학습을 시키는 등 노동운동을 벌이던중 노동조합 위원장에 출마한다.여기에서 내건 구호들이 당시엔 불온(不溫)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사측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회사는 학력위조란 핑계로 그를 해고시켰다. 84년 발표한 ‘노동의 새벽’(풀빛출판사刊)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이 때 쓰인 것들이다.작업장 한 귀퉁이에서,혹은 기숙사의 한 켠에서 구부린 채 작업일지 등에 끄적거린 것들이다.세상 사람들의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됐던 시집 ‘노동의 새벽’은 이렇게 태어났다.‘얼굴없는 시인’이란 별명도 따라붙기 시작했다. ‘노동의 새벽’이 나오자 문단에선 무성한 평들이 쏟아졌다.“이 땅의 조악한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절망과 슬픔,한과 분노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히 담고 있다”“인간다운 삶을 향해 몸부림치는 서민들,못가진 자들,억압받는 자들의 정서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이른바 박노해문학의 등장은 80년대에 확산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문화적 자기표현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계간 문예중앙이 지난 88년 40명의 중견 평론가들에게 지난 10년간 최고의 작품 한 편을 선정해 달라고 의뢰한 결과 ‘노동의 새벽’이 뽑혔을 정도였다.또 같은해 실천문학사가 선정한 ‘제1회 노동문학상’을 받았으며 91년 구속때까지 ‘노동의 새벽’은 7만여부가 팔려나가는 인기를 얻었다. ‘노동의 새벽’은 물론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채 낸 시집이다.형 기호씨가 가톨릭대학 학보에 한 면에 걸쳐 ‘노동의 새벽’에 대한 평론을 게재하면서도 동생의 작품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다.기호씨는 나중에 사실을 알곤 몹시 섭섭해했다고 한다.“여러 사람을 거쳐 시와 평론들을 출판사에 보내거나 공중전화 박스 등 특정 장소를 지정해 원고를 갖다놓는 방법으로 신분을 은폐했습니다.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는 동료 노동자들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덕분에 문단과 노동계에서 ‘얼굴없는 시인’이란 별명이 붙게 됐지요” 본격적인 정치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85년 8월 창립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가입하면서부터.서노련 기관지인 서노련신문에 노동해방투쟁을 선동하는 방대한 분량의 시·산문·정치평론을 잇따라 발표했다.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나선 것이다.초기시절 ‘노동의 새벽’식의 문학과는 엄청난 변화가 느껴지는 글들이었다.곧 평론가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노동의 새벽’을 통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판단했습니다.다음은 행동의 시기라는 생각을 갖게 됐지요.분신과 고문,의문사가 계속되는 시점에서 시에 천착하는게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그런 분위기에서 행동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중심에 서게 됐다고나 할까요” 86년 5·3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지목돼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점차 ‘급진적인 노동운동가’‘사회주의적 혁명가’로 변신해 갔다.그리고 89년 11월 마침내 사노맹 출범을선언한 후 공개수배를 받다 91년 영어의 몸이 됐다.암울한 노동현장,경찰수배,구속 등 어둠의 세상에서 탄압받았던 그의 삶과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사연들/박노해와 박기평/80년대초 폭압의 시절 탄압우려 필명 사용/‘공동단체명’ 등 온갖 추측/90년 사노맹사건 뒤에야 ‘박기평’ 본명 알려져 흔히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의 본명이 朴基平이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90년 안기부가 사노맹 사건 전말을 발표한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면서부터다. ‘노동의 새벽’이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왕성하게 발표해온 시와 평론들로 인해 한때 박노해가 특정인이 아닌 공동 창작단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그러나 朴씨가 검거되면서 결국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는 朴基平이란 전남 함평 출신의 노동자 시인임이 밝혀졌다. 그러면 박노해란 이름은 언제부터 쓰여졌고 왜 박노해인가. 박노해란 필명이 처음 쓰여진 것은 83년 가을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을 발표할 때였다.당시만 해도 ‘노동자’라는 말만으로도 ‘빨갱이’ 취급을 받는 폭압의 시절이었다.근로기준법을 내세워 노동현장에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들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줄인 말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성씨 박을 그대로 땄고 어감도 좋고 해서 노해란 이름을 썼던 것입니다.물론 노동자 해방의 의미도 어느정도는 담고 있었지요” 닥쳐올 탄압을 우려해 필명을 쓸 수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본명으로 시작(詩作)을 계속할 경우 탄압은 물론 노동운동도 지속하지 못할 것 같아 노해라는 이름을 계속 쓰기로 했다는 게 朴씨의 설명이다. 이후 ‘노동의 새벽’은 물론 서노련 기관지 ‘서노련신문’에 지속적으로 발표한 모든 글과 평론에도 이 이름을 썼고 91년 구속때까지 ‘얼굴없는 시인’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그러면 실체가 밝혀진 이상 박노해라는 이름은 살아있을 수 있을까.朴씨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감옥에서 나올 때 ‘상처 투성이’의 이름 박노해를 벗어 버리고기평이란 이름의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하지만 언제 일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른 채 살아야만 하는 불안한 시대임을 피부로 느낀다.이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평온한 생활을 찾을 때까지 상처많은 이름 박노해를 운명처럼 계속 써야만 할 것 같다” □그의 길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77년 선린상고 야간부 졸업 ▲82년 金眞珠씨와 결혼 ▲84년 안양 버스회사 정비공으로 입사 ▲83년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 발표 ▲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85년 서노련 가입 ▲86년 5·3 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수배 ▲89년 사노맹 결성 선언문 발표. ▲91년 구속·수감 ▲98년 출감
  • 야쿠자 살해 30년째 복역/金嬉老씨 새달 석방될듯

    ◎‘金의 전쟁’ 30년만에 마감/김 대통령 방문계기 일 성의 지난 68년 한국인 차별에 격분,일본인 야쿠자 2명을 살해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0년째 복역중인 金嬉老씨(70)가 다음달초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가석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29일 “한·일 관계를 고려,金대통령의 방일 기간중 일본 법무성이 이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일본 법무성은 지난 8월 朴三中 스님(55·부산 자비사 주지)이 金씨의 가석방에 필요한 신원 인수보증서를 제출하자 현재 이를 심사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재일교포 金嬉老 석방 후원회’의 李在鉉 대표(52·서울 관악구 봉천 3동)는 지난 5월 金대통령 앞으로 金씨 석방 탄원서를 보낸데 이어 지난 16일에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나카무라 쇼지부로(中村正三郞) 법무성 장관에게도 탄원서를 송부했다.金씨가 석방되면 한국에서 살수 있도록 그의 일본의 친지와 부인 頓卿淑씨(51) 등이 인천 부평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해 놓았다. 金씨는 39세이던 지난 68년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돼지 같은 조센진”이라고 자신을 모욕하던 이나카와 폭력단 소속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사살했다.이어 45㎞ 떨어진 후지미 여관으로 달아난 그는 20여명의 투숙객을 인질로 잡고 ‘재일한국인 차별대우 시정’을 요구하다 5일만에 기자로 변장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金씨는 75년 11월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서 30년째 복역중이다.일본 최장기수인 金씨는 아직도 법정대리인과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된 채 지내고 있다. 金씨는 지난 80년 3월 頓씨와 옥중재혼했다. 사건 당시 金씨에게 “일본인에게 잡히느니 자결하라”고 권유했던 어머니 朴득순씨는 지금 95세의 고령으로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 李賢世씨 노모 살해/10代 주범 사형선고/공범 3명 중형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합의1부(재판장 崔喆 부장판사)는 25일 만화가 李賢世씨(42) 집에 침입해 李씨의 노모를 살해하는 등 20여회에 걸쳐 강도와 성폭행 등의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된 金모 피고인(18)에게 강도살인죄를 적용,사형을 선고했다. 또 공범 朱모 피고인(19)에게 강도치사죄 등을 적용,무기징역을 선고하고 南모 피고인(19) 등 나머지 2명에게도 같은 죄를 적용해 징역 장기 12∼15년,단기 7년을 선고했다.
  • 두 어머니의 눈물/임수경 통일운동가(굄돌)

    8·15를 기념한 양심수 석방이 있던 날,어느덧 칠순을 넘긴 두 어머니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고인다.13년만에 아들을 품에 안은 김성만씨의 어머니와,여전히 갇혀 있는 아들을 두고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강용주씨의 어머니가 교도소 앞에 허탈하게 서 있다. 지난 85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이 된 아들들,조작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동안 어머니들의 삶은 사는 게 아니었다.평범한 주부인 어머니는 보랏빛 수건을 두르고 거리로 나서 아들의 구명을 호소했다.국제사면위원회는 김성만씨를 ‘세계 30대 양심수’로 선정했고,그를 주제로 한 영화와 노래도 만들었다.20대 발랄한 청년에서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이 돼 돌아온 김성만씨와 그의 어머니,그러나 재회의 기쁨은 잠깐이고 이들은 또다시 눈물짓는다.같은 사건 관련자 4명중 강용주씨만이 석방되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혹시나 아들의 이름이 있을까 안동교도소 담벼락에 붙은 석방자 명단을 바라본다.아무리 들여다 봐도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은 없다.모르던 일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고인다.준법서약서만 쓰면 나올 수 있던 아들,그러나 불과 석달전 사상전향제 폐지를 요구하며 20일 넘게 단식까지 한 아들은 그에 응할 수 없었다.아들의 바람대로 사상전향제는 폐지됐지만 남들이 쉽게 말하는 것처럼 ‘그까짓 종이 한장’과 13년간 빼앗겨 온 자신의 자유를 바꾸지 않았다. 다시 시작된 아들의 감옥생활,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양심수가 단 한명도 없는 세상에 아들이 마지막으로 감옥 문을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그때까지는 꼭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과연 이 어머니는 살아서 아들을 바깥에서 만날 수 있을까.강용주씨의 만기 출소일인 2006년은 너무나 멀기만 하다.
  • 朴노해씨­사노맹 주역… 전향 자세보여/석방 인사 면면

    ◎金洛中씨­진보적 통일운동가 무기수/張玲子­2차례 수감… 건강 악화로 나와 이번 ‘8·15특사’에는 대형 공안사건 등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던 각종 사건의 주인공들이 다수 포함됐다. ◇權魯甲 전 의원=국정감사 선처 명목으로 한보그룹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2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5년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정치적 부담을 우려,지난 3·13 대통령 취임 사면에서는 제외됐었지만 이번에 잔형 면제와 복권조치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난 1월 지병인 당뇨병과 고혈압이 악화돼 검찰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서울 강북삼성병원으로 주거지를 제한받고 있었다. ◇朴基平(필명 박노해),白泰雄씨(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자생적 사회주의세력인 사노맹의 양대 주역으로 91년과 92년에 각각 검거돼 무기징역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朴씨는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운동권에서 일약 ‘얼굴 없는 민중 시인’으로 떠오른 인물.수감 중이던 지난해 출간한 수상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시장경제 옹호론자가 아니지만 결코 사회주의자도 아니다”고 공언하는 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화제를 뿌렸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白씨는 제헌의회(CA)그룹의 좌파 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운동권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불렸다.지난해 ‘사노맹 결성은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한 것이 아니라 全斗煥·盧泰愚정권에 대한 이념적 저항운동’이라며 사노맹 해체 및 재건 포기를 선언,金壽煥 추기경과 재야인사 등 141명이 사면·석방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黃仁五·仁郁 형제,金洛中씨(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북한의 ‘장관급’ 여간첩 李善實과 연계,남한내에 대규모 지하당 조직을 주도하다 92년 당국의 수사끝에 실체가 드러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핵심인물들이다. 전 민중당대표인 金씨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55년 월북,북한에 포섭된 뒤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민사협)고문 등을 맡으며 진보적 재야인사 및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 적발돼 무기수로 복역해 왔다.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적발된 黃仁五씨는 사북중 2년 중퇴가학력의 전부로 ,80년4월 사북사태를 주도한 뒤 같은해 6월 부산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 대회장 폭파기도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중부지역당 편집국장으로 적발된 동생 仁郁씨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에서 아프리카 역사를 전공했으며,87년1월 북한방송 청취내용을 운동권 최초로 교내 대자보로 부착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 운동권 출신. 1심 재판 진행중이던 93년1월 서울대 교수들이 선처를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張玲子씨=건강악화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張씨는 82년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에 이어 94년에는 거액의 어음부도 사건을 일으켜 세간을 두번 놀래킨 큰 손.82년 당시 남편 李哲熙씨와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92년 잔형 5년여를 남기고 가석방됐으나 107억여원을 편취하고 5억원을 부도낸 혐의로 2년여만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鄭守一씨(무함마드 깐수)=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암약한 고정간첩으로 96년 검거돼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이번에 감형됐다.
  • 故 金始顯 선생 외아들 峰年씨의 착잡한 ‘8·15’

    ◎3代 걸쳐 항일투쟁/훈장없는 독립투사/金九 암살배후 李承晩 지목… 저격 미수/‘나라 위한 외길’ 불구 유공자 지정 못받아 □金始顯 선생 공적 독립군 군자금 조성 5차례 16년간 투옥 상해서 의열단 조직 비밀군관학교 설립 “3대가 독립운동을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부친의 단호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8·15 광복절 쉰세돌을 맞는 金峰年씨(76·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감회는 착잡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인 金씨의 일가족 가운데 모친 權愛羅씨(작고)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자신과 부친 金始顯선생(1883∼1966)은 아직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일가의 이력은 조부인 金澤東 선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맹렬하게 활동했다. 金始顯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는 이처럼 부친의 영향이 컸다. 1917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대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체포되면서부터 가시밭길을 걸었다. 1920년에는 군자금을 조성하려다 붙잡히는 등 일제 치하에서 모두 5차례에 걸쳐 16년동안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어떠한 탄압도 선생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부인 權씨는 192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항쟁을 주도하다 만났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세계 약소민족대표자대회’에 임시정부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 독립운동의 평생 반려자로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선생은 1923년에는 폭탄 밀반입사건(일명 黃鈺 사건),1925년에는 난징(南京)에서 비밀군관학교를 설립,독립군을 양성한 혐의 등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외아들 金씨는 1942년 상하이에서 독립군에 편성돼 무장항쟁에 참여했다. 金씨는 “만주에서 모친과 함께 비밀 감옥소에 수용됐을 때 ‘봉년아 잘 있느냐. 어미도 잘 있다’는 모친의 친필을 화장실 기둥에서 발견하고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부친 金始顯 선생은 그러나 2대 민의원(안동)을 지낼 때 金九 선생의 암살배후자로 李承晩 대통령을 지목,6·25 발발 얼마 후 李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52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4·19혁명으로 석방되면서 복권돼 5대 민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金씨는 “저격 미수 전력 때문에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金九 선생의 암살로부터 나라의 비극이 시작됐다는 게 부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親日의 군상:1­2/외국의 민족반역자 처벌(정직한 역사 되찾기)

    ◎佛,나치 협력자 15만명에 실형/대만­비밀경찰조직 軍統局서 명단 작성/중국­‘인민의 적’ 규정… 인민재판 통해 처단 2차대전 종전은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준엄한 단죄의 서곡이기도 했다.종전후 승전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패전국의 전쟁지도자들을 처단했으며,일부 피지배국가들은 자국내의 민족반역자들에게 준엄한 단죄를 하였다. 유럽의 ‘뉘른베르크재판’과 일본의 ‘도쿄재판’이 전범재판이라면,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이 외세협력자를 처단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 국가는 종전 직후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암울했던 피지배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반면 우리는 해방후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역사’로 기록돼 왔다.외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의 실상을 알아본다. ○150만∼200만명 연루 ▷프랑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단은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 발포로 본격화됐다.저항작가 장 포랑의 연구에 따르면,이 숙청조치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1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이들중 죄상이 경미한 99만명은 1개월 이내에 풀려났으나 15만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원수격인 페탱을 포함,3부요인 등 고위인사를 특별심판한 최고재판소는 1960년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총 108건을 처리,18명에게 사형,2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15명에게 공민권 박탈조치를 내렸다. 페탱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지식인 대부분 중벌 일반법원은 총 취급건수 14만건중에서 4만여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하고 나머지 5만7천건을 재판하여 6,763명에게 사형,2,777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2만6,529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3,678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사형선고를 받은 자 가운데 779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지방법원은 총 12만건을 재판에 회부,4,78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이들중 3,00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시민법정 역시 다수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하였다.11만5,000여건을 취급하면서 9만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비국민 판정은 선거권 박탈,공직진출자격 박탈,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의 권리를 박탈한 준 사법적 조치로,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린다.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나치지배하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2년5개월 漢奸재판 ▷중국·대만◁ 전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친일파를 처단하였는데 처단방식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우선 중국은 1946년 4월부터 2년5개월에 걸친 ‘한간재판’(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름)에서 ‘인민재판’ 방식을 취했다.피의자에 대해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진행,군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중국공산당 정부는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들의 울분을 정화시키고 민심을 살 목적으로 이 방식을 취하였다.특히 중국공산당 정부는 친일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간재판을 통해 봉건세력을 제거하고 동시에 혁명의 기반을 닦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유전무죄’ 유행하기도 한편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피의자를 체포·기소·재판하는 ‘규문(糾問)주의’방식을 취하였다.국민정부는 비밀경찰조직인 군통국(軍統局)이 작성한 한간 명단을 근거로 ‘한간사냥’을 진행하였는데,가정부로 위장해 근무해오던 특무요원이 그 주인을 체포한 예도 있었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심했던데다 1심판결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감정적 처리가 빈발했었다.또 재판관중에 친일파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져 국민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데다 국민정부측이 汪精衛(일제의괴뢰정부인 남경정부의 주석)의 무덤을 폭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민중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친일파 청산 ‘용두사미’/반민특위 의욕적 출발… 사형선고 1명마저 석방 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8월말 업무를 마감할 때까지 8개월동안 총 682건(여자 66명 포함)을 처리하였다. 이중 반민특위는 중추원 참의 등 당연범 198건을 포함,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중 305명은 체포(자수 61명 포함)하였고 미체포자는 173명이었다.또 반민특위는 이들중 84건을 석방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221건이 기소되었다. 기소사건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이 종결된 건수는 38건으로 이중 체형선고는 12건이었다.최고형인 사형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金悳基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6·25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고 나머지 유죄판결자 역시 이같은 경로로 전부 풀려났다.결국 반민법 해당자로 처단된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당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를 7천명 정도로 잡고 왕성한 의욕을 보였으나 친일파의 방해와 인력부족,중도에 공소기간 단축으로 친일파 청산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 문제 반드시 청산돼야/민족통일과 연결… 새 역사 출발점으로/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제 강점시대의 친일파들은 대부분 죽었다.따라서 아직도 친일문제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친일파 문제가 과연 현실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그러나 친일문제는 엄연히 현실문제요,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문제다. 역사교육 및 사회정의 차원에서 친일파 문제는 청산돼야 하며 그것은 오늘의 현실적 과제이다.역사에서 李完用 등은 분명히 매국노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매국행위로 얻은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그밖의 친일행위자들도 그 자신이 단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친일행위로 얻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그대로 누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재산 버젓이 상속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역사교육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사회정의라는 말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반세기가 아니라 1백년이 지났다 해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불가피함을 알게 된다. 친일파 문제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친일 논리가 청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李完用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친일파들은 그때 그때마다 저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을 내놓았다. 그것을 요약하면,한 시대 한 민족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그 역사를 누가 주체가 되어 움직여 가는가,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전진해 가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인이야 누구든,폭압통치가 자행되건 말건,그 사회가 물량적으로 ‘풍부’해지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발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그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이 되지 못한 논리가 이른바 한·일 국교 재개 이후 일본 학계에서 다시 살아나더니,어느 틈에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파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우리가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래도 친일파 문제가 현실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문제 청산은 일본과의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도 중요한 문제다.지금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려 하고 있다.그런데도 일본은 아직 과거의 침략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국주의 찬양 문화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우리의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그 벽을 낮추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본문화 개방 폭을 넓히는 전제조건으로서,또 우리의 문화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제시대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불가결하다. ○日 문화개방 전제조건 친일문제 청산이 민족통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통일이 어느정도 전망되고 있지만,통일의 시점이 바로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될 일이 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미 교환된 남북합의서는 어느 한 쪽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이 아니라 분명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하고 있다.통일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분단시대 청산은 바로 일제시대 청산과도 연결될 것이며,이 점에서도 남북 양쪽이 대등한 조건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이렇게 보면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5·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거듭나야할 법조/“권력이익이 우선” 탈법 방조/악법운용에 직간접 연관 고문 등 양심수주장 외면/최근에 검은돈에도 연루 ‘최후의 인권보루’ 요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법을 순진하게 잘 지키는 사람만 손해본다” 우리사회에 그동안 유행돼온 법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말들이다.이는 법이 결코 대다수 국민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인식의 결과이다. 이런 법치문화의 위기는 법을 악용하고 조작한 독재권력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법조인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악법과 법 운용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법부와 검찰은 왜곡된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의 법조로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 역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1987년 이래 폭발적으로 분출해온 온 국민의 민주화열기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오늘날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88년 6월15일 서울지역의 판사 59명이 발표한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란 성명서 내용의 일부다. 이 성명사태는 전국 법원으로 확산됐고,마침내 金容喆 대법원장의 퇴임과 李一珪 대법원장 취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와 움직임은 없었다. 수많은 양심수를 양산해내고 고문 주장에 얼굴을 돌렸던 부당한 재판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도,사죄 한마디도 없었다. 수색영장 남발,고문주장 사건의 증거 인용 등 탈법적인 수사활동을 조장·방조하는 일이 이어졌다. 검찰은 행정부에 소속된 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검사들은 업무의 특성상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도록 준사법관으로서 법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성역없는 법 적용을 통해 추상같은 검찰권을 세워야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검찰은 그동안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 88년 金淇春 검찰총장의 취임사는 국민들이 검찰의 변신에 대한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국민에 준법을 선도하고 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검찰부터 수사상의 적법절차를 엄히 지키고…,우리 검찰권이 중립성과 독립성이 존중되어야하는 국가공권력임을 잠시라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임사로 끝났다. 사법부와 검찰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아직도 씻겨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올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법조인들의 돈과 관련된 비리사건들은 우리 법과 법조인의 왜곡됨이 그 한계에 다다른 느낌마져 주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들이 법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법조인들을 신뢰하고 존경할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수백만달러의 연봉이 보장된 변호사를 포기하고,수십만달러를 받는 봉급장이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미국 국민들이 있고,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결정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 법조인들이 깊이 되새겨보아야할 점이다. ◎시국사건판결 50년명암/권력에 맞선 소신 판사 줄줄이 해임/반공법사범 석방하자 뇌물사건 엮어 보복/대법원장이 “현실을 직시하라” 훈시하기도 격동의 반세기 속에서 많은 판사들이 권력의 편에 섰다. 굴욕을 거부하고 용기있게 권력에 맞선 법조인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굴욕을 감수하면 살아남고,이에 맞서면 옷을 벗어야 했다. 정의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법조계의 반세기도 이같이 굴절된 어두운 역사로 얼룩져 있다. 1958년 7월 서울지법 유병진(재판장)·이병용·배기호 판사는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된 조봉암 진보당위원장에게 국가보안법 일부 위반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적제거를 위해 사건을 조작한 이승만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조용순 대법원장은 사법감독관회의를 열어 “법관이라 하여 국가목적을 위한 숭고한 정신을 망각하고 주관적인 견해만을 고집한다면 국가이념에 배치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라고 훈시했다. 사법부의 수장 스스로 정치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어 서울고법 김용진(재판장)·최보현·조규대 판사는 항소심에서 조봉암에 사형을 선고했고,다음해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7월 사형이 집행됐다.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판사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법관 연임이 거부됐다. 판사가 권력에 맞서 소신판결을 내리면 즉각 권력의 반격이 뒤따랐다. 대법원은 71년 국가재정 형편을 이유로 군인과 군속이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판사 9명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2년후 모두 의원면직됐다. 또 비슷한 시기에 신민당사에 들어간 서울대생들과 월간 ‘다리’지 사건에 연관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임중빈씨 등에 대한 무죄가 선고됐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보복을 불러,반공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판사들이 제주도에 출장가면서 항공료 등 9만3,000원의 뇌물을 받았다며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 기각과 재청구,재기각 사태가 벌어졌고,급기야 전체 법관의 3분의 1인 153명이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유신시대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때이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해 합헌이라고 판결,독재정권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들의 저항권 자체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75년 법원장회의에서 “현실을 직시하라.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이고 사법부의 권위를 앙양시키는 길인가를 생각하라”고 훈시했다. 이때 판사들은 대다수의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朴禹東 변호사 인터뷰/“법조인들 나약해 법치주의 위협받아”/통치권자 사면권도 남용되면 곤란/오판위험 줄이게 피고·원고 모두 연구를 “법조 50년에 대한 평가요? 법조인치고 우리 법과 법조인이 제역량을 해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朴禹東 변호사(64)의 우리 법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인색하다. 그 자신 33년간 판사생활을 했고 지금도 재야법조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은 사정이 없다. 법치가 외면받고 위협받아온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법조인들의 나약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에 과감히 맞서 싸운 법조인이 많았다면 독재정권이 오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고만 있어도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요. 법치주의가 서려면 지금이라도 법조인들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대법관,법원행정처장 등에 임명될 때 마다 ‘학구파’,‘선비형’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朴변호사. 그는 후배 판사들이 존경하는 선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몇 안되는 법조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은 판사시절을 돌이켜보며 “왜 좀더 깊이 검토하지 못했을까.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만큼,원고와 피고 양쪽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했던 것일까”라고 반문해보곤 한다. 그리고 항상 후배들에게 “50%가 아닌 100%의 연구와 검토를 양쪽 모두에게 쏟으라고 주문한다고. 그래야만 오판의 위험을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조가 일부 판사와 변호사들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것에 대해 朴변호사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99.9%의 판사는 깨끗하고,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변호사들의 수임 관련 비리도 대한변협의 적극적인 자체정화 노력으로 점차 자취를 감출 것으로 내다 봤다.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변호사들은 수임이 어려워 비리의 유혹을 받기 쉬운 만큼 개업보다는 법인에 취업하기를 권했다. 사법개혁 차원에서 사법시험 합격자를 양산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법조인 수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과 사법시험 체제에서 합격자만 늘리는 것은 법조인의 질을 떨어뜨릴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전에 외국의 로스쿨 같은 폭넓은 시각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朴변호사는 법치문화 정착을 위해서는 통치권자의 사면권 남용도 지양돼야 한다고 본다.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이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대법원에서 확정받고,해도 넘기기 전에 풀려나는것을 보면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했겠느냐고 했다. 그는 “앞으로 대통령은 과거와 같은 ‘고유권한적·자의적 사면권 행사’라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특집기획팀 ▲李昌淳 팀장 ▲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국가보안법 어떻게 될까/여야 “폐지·개정은 시기상조” 의견일치

    ◎운용의 묘 살리고 독소조항만 손질 주장/여권일각 개정·대체입법 목소리도 국가보안법의 일부 조항들이 과거 정권에서 인권침해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데 대부분의 정치권 인사들은 동의한다. 그러나 여야 정당 모두 법개정 혹은 폐지를 서두르지 않고 있다.‘운용의 묘’를 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본격적 보안법 개폐논의는 내년 이후에나 가능하리라 전망된다. 국민회의 고위 정책관계자는 “남북관계 현상황을 고려하여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운용하고 법을 보완해나가겠다는 게 여권의 기본입장”이라고 설명했다. 金大中 대통령도 지난 3월 한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가혹한 형법을 갖고 있다”면서 “국가보안법 철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해 정치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법폐지,대체입법,형법흡수,개정 등 4가지다. 보안법 개폐요구에 대한 여권의 대응방안은 두 갈래다. 첫째는 법해석이나 적용에 있어 남용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애겠다는 것이다. 국민회의 정책관계자는 “법 7조 찬양고무죄,법 10조 불고지죄 등 포괄적,추상적 조항이 아직 있는게 사실”이라면서 “검찰기소 과정에서는 물론 법원의 판단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해 억울한 희생자가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자는 이어 “보안법 제19조 규정에 헌재 위헌결정이 남으로써 이미 법시행을 헌재 결정에 따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19조는 보안법 위반사범에 대해 일반 형사피의자보다 20일간 더 구속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재는 지난 92년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 혐의자에 대해서도 구속기간 연장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위헌소지가 있다고 지적했었다. 둘째,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나 북한이 상호주의 차원에서 호응이 없다면 당분간 보안법의 폐지나 대체입법은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이른바 독소조항으로 지적되는 부분을 손질해 나갈 계획이다. 보안법 폐지 및 대체입법이 안된다는 것은 공동정권의 한 축인 자민련이 지난해말 대선 합동공약으로 요구한 사항이기도 하다. 물론 여권 안에서 개혁적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아태평화재단 洪翼杓 책임연구위원은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신정권의 과제’라는 논문에서 “냉전시대의 양분법적 사고의 유산인 국가보안법은 대내외적인 환경의 변화를 고려하여 개정되거나 보다 민주적인 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조항을 인권을 우선시하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조항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잠수정 침투 등 무모한 도발을 중지하고 남북화해에 진정한 자세를 보일 때 洪위원과 같은 보안법 대체입법 주장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민주질서보호법’이나 ‘국가안전보장법’등으로 명칭을 바꾸고 일부 독소조항을 정리하는 방안이 여권 일각에서 계속 검토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현시점에서 보안법을 손댈 생각이 없다”는 것이 기본 당론이다. 諸廷坵 제1정책실장은 “북한이 최근 보안법 철폐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개정 필요성이 있더라도 당장은 고치지 않는 게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훨씬 흉측한 법들을 가지고 있는북한의 태도변화가 있고 난 뒤 보안법 개정 문제를 거론하는 게 순서”라고 밝혔다. □국가보안법 연혁 ●1948.12.1 ­국헌을 위해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하는 등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각종의 행위를 처벌하려는 것.(6개 조항) ●1949.12.19 ­형사절차 규정을 신설하고 기타 미비점을 보완,법정최고형이 무기징역에서 사형으로,3심제가 단심제로 됨. ●1949.4.8 ­사형에 대해서는 상고가 가능하게 함. ●1958.12.26 ­기존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새 국가보안법 제정. 기존의 반국가단데 등 외에 국가기밀탐지,정보수첩,편의제공,언론조항 등이 새로이 규정됨. ●1980.12.31 ­반고법을 폐지하고 국가보안법에 통합,공산계열의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국내외의 결사 및 집단도 반국가단체의 범주에 포함시킴. 많은 부분에서 형량이 상향조정됨 ●1991.5.31 ­반국가단체의 범위를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로한정. 잠입 탈출 찬양 고무 등의 행위에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이라는 단서를 붙임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4­1/보안법 문제(정직한 역사 되찾기)

    ◎보안법 상처의 흔적들/시행 50년… 멍든 인권 곳곳에/曺奉岩 등 수많은 政敵에 간첩죄 적용/사회 전반에 올가미… 한해 수백명 구속 영화 ‘레드 헌트’는 제주 4·3항쟁때 양민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지난해 9월 홍익대학교에서 열린 인권영화제와 한달 뒤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검찰은 이 영화 상영과 관련,인권영화제를 주최한 인권사랑방 대표 서준식씨를 지난해 11월 구속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반포 혐의였다. 그러나 부산영화제(조직위원장 문정수 부산시장) 상영과 관련해서는 구속된 사람이 없었다. 같은 영화 상영을 둘러싸고도 보안법 적용은 이렇게 다르다. 검찰은 당시 “서씨는 비전향 사상범으로 고의성 여부가 문제된다”고 밝혔다. 사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법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논리다. 국제사면위원회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석방노력으로 서씨는 얼마전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논란과 시비는 끊이질 않았다. 보안법과 관련,서준식씨의 경우처럼 세인의 주목속에 논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조용히 처리되는 사건이 훨씬 많았다. 올해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50주년을 맞지만 보안법 역사의 뒷면에는 대한민국 인권의 상처투성이 흔적들이 가득하다. 우리 사회에서 보안법을 비켜갈 수 있는 분야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보적인 정치인,지식인,학생,노동자 등이 보안법의 올가미에 걸려 죽기도 하고 감옥에도 갔다. 진보적 정치운동과 관련, 보안법에 의한 최대의 피해사례로는 조봉암과 진보당사건 및 2차 인민혁명당 사건,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을 들 수 있다. 1958년 1월11일 밤 경찰은 조봉암 위원장 등 진보당 간부 10여명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야당 당수 조봉암은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다음해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심 재판장인 유병진 판사는 이승만 정권의 간첩조작에 저항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유병진 판사는 우익세력들에 의해 용공판사로 몰렸고 2년후 법복을 벗어야 했다. 2차 인혁당사건은 1974년 전국적인 반(反)박정희 투쟁을 준비하던 민청학련을 용공으로 몰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던 배후조직을 조작한 사례로 비판받고 있다. 10년전 1차 인혁당 사건에서 이미 경미한 혐의로 판명됐던 인혁당이 10년 뒤 재건되어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것. 그러나 2차 인혁당 사건은 1차 때보다 더 증거가 없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75년 대법원에서 상고는 기각됐고,24시간도 못되어 8명이 처형됐다. 보안법과 관련,현대언론사에서 최대의 필화사건으로 꼽히는 것은 1961년의 ‘민족일보’ 사건이다. 진보적 혁신 언론을 표방한 민족일보는 용공언론으로 몰려 조용수 발행인의 사형집행과 함께 폐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공소장에 용공으로 단정돼 예시된 것들은 ‘통일에의 전진을 위하여’‘남북교역 시기는 성숙하였다’ 등의 제목하에 실린 기사들이다. 보안법 위반 사건 가운데 한가닥의 온정도,최소한의 법적 기본권과 인간의 존엄성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게 바로 간첩사건이다. 공안기관은 월·납북자의 친·인척,정보사법 전과자,조총련의 연고가족,납북 귀환어부 등의 신상 정보를 모두 입력해 놓고 있다. 이러한 신상 정보는 언제라도 ‘간첩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자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작 의혹이 적지않았다. 78년 귀국중 간첩혐의로 체포돼 20년째 갇혀 있는 조상록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소조항/반국가단체 구성·가입죄­노동·학생단체 등 민주화 운동 조직 파괴/찬양·고무죄­개념 모호해 자의적 해석 가능… 남용 심각/불고지죄­‘침묵의 자유’ 침해… 반인륜적 행위 강요 치안유지법,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국방보안법,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불온문서임시취체법…. 일제가 군사파시즘의 길을 걸으면서 국내외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했던 대표적인 법률들이다. 이중 치안유지법은 일본 및 식민지의 사회주의자와 반체제주의자,독립운동가 등을 처벌한 대표적 악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탄생(1948년 12월1일) 과정부터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빼닮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형법의 특별법인 이 법이 형법 제정(1953년 9월18일)보다도 빨리 만들어졌다는 것은 당시 반대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 법이 얼마나필요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국가보안법은 제2장의 제3∼10조가 범죄로 규정되는 행위들과 처벌을 정하고 있는 핵심적인 조항들이다. 이중에서도 제3조·7조·10조가 가장 독소적이고 남용될 소지가 많다고 비판받는 조항들이다. 제3조는 반국가단체 구성 및 가입,가입권유 등에 대한 처벌로 제7조 3항의 이적단체 구성·가입죄와 함께 민주화운동 조직을 파괴하는 주요한 조항으로 지목돼 왔다. 형벌도 반국가단체 수괴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혹하다. 그러나 막상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힌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단순한 반정부적 노동·학생운동 조직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운동조직인 전민학련과 민청학련,기독교 청소년들의 신앙공동체인 한울회 등이 대표적 사례다. 제7조는 반공법 제4조를 그대로 승계한 것으로 찬양·고무 및 이적단체 구성과 가입,이적표현물 제작·반포·판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심각하게 남용돼온 조항으로 일반 형법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보안법의 ‘상징’과도 같다.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그 문언상 위헌이나 한정적 해석하에 합헌”이라는 한정 합헌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먼저 찬양·고무·동조라는 개념이 너무 애매모호해 지극히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집을 철거하려는 당국자에게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했다가 구속되고(1978년), “북한이 남한보다 중공업이 더 발달되어 있다”고 했다가 이 조항에 걸려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1976년). 10조는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불고지죄 조항이다. 모든 보안법 위반자에 대한 불고지를 처벌하다가,91년 개정때 3조·4조·5조의 죄에 한해 성립하도록 범위를 축소했다. 또 친족관계일 때는 죄를 감경(減輕)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에도 불구하고 불고지죄는 ‘침묵의 자유’를 침해하고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직업윤리를 저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반사회적인 행태를 여전히 강요하고 있다. 수년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에서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가 인터뷰중 알게된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구속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김동식 간첩사건과 관련,불고지죄 혐의로 구속됐다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씨는 “설사 보안법 위반자라는 것을 알아도 친구나 친척을 당국에 신고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라며 불고지죄의 반인륜성을 비판했다. ◎北 형법은 가혹한 反인권적 악법/유추해석 인정·중벌위주 형벌체계 적용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것이 북한의 반국가사범에 대한 가혹한 형법체계다. 보안법보다 훨씬 가혹한 법조항들이 북한내 통일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안법만을 폐지하면 ‘남쪽만의 무장해제’가 아니냐는 시각이다. 북한 형법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의 기본 원칙인 법치주의 원리를 무시한 가장 비민주적인 악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북한 형법은 유추해석을 인정해 죄형법정주의를 무시하고 있다. 제10조에 “형사법에 동일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이 없을 때는 종류와 위험성으로 보아 가장 비슷한 행위를 규정한 조항에 따라 형벌을 정한다”고 돼 있어,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범죄인으로 규정,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소시효에 대한 명문규정도 없다. 제42조는 “반국가범죄와 고의적 살인죄에 대해서는 기간에 관계없이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로 규정,범인은 죽을 때까지 형사소추를 받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방하거나 그들에게 저항하는 행위는 반국가범죄(제44∼55조)로 규정,사형이나 전재산 몰수형으로 처벌하게 돼 있다. 또한 은닉범,불신고범,방임범의 처벌규정을 두고 있고,반국가범죄의 경우 이를 예외없이 적용하고 있다. 형벌의 종류를 규정하고 있는 제21조에는 반국가범죄의 경우 ‘○○년 이상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돼 있어 우리법의 “○○년 이하의 형에 처한다”는 형식에 비해 중벌위주의 형벌체계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한없는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반인권적 형벌체계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앰네스티와 보안법/“국제인권기준에 맞게 개정해야”/매년 인권보고서 통해 개폐 촉구 “양심수를 양산해온 국가보안법은 국제인권법에 크게 미달하는 수준입니다. 이는 국제인권기준에맞도록 개정돼야 합니다”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로스 대니얼스 집행위원은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테러단체를 조직하거나 폭력혁명을 공개적으로 추구하지 않은 이상 구속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앰네스티의 인권보고서를 통해 “보안법 위반으로 매년 체포되는 수백명 중 상당수가 폭력이 아닌 단지 ‘고무찬양’과 ‘이적행위’ 등으로 구속됐다”고 지적했다. 앰네스티는 매년 인권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국가보안법 개폐를 주장해왔다. 또한 주요 보안법 위반 사건마다 항의성명과 함께 피해자 석방을 촉구했다. 지난 96년에는 보안법 개정과 안기부의 권한 남용 방지 장치 마련을 촉구하는 편지를 우리나라 정당 대표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외국인 수감자 8·15 特赦/법무부 검토

    ◎사형수 2명 등 상당수 포함 법무부는 오는 8월15일 광복절 50돌을 맞아 수감 중인 외국인 상당수를 특별사면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17일 밝혔다. 외국인 수감자는 그동안 개별적으로 가석방이나 형집행 정지 등의 형태로 풀려난 적은 있으나 집단적으로 사면 대상에 포함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면 대상에는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93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인권단체들에 의해 무죄 주장이 제기됐던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 등 파키스탄인 사형수 2명도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국외추방 절차를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 관계자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대화합 차원에서 외국인 수형자에 대한 사면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부정식품 사범 법정 최고형/구속수사 원칙 8월까지 특별단속/대검

    대검찰청 형사부(安剛民 검사장)는 14일 최근 엘니뇨에 따른 이상 고온으로 집단 식중독 사고가 잇따라 발생함에 따라 오는 8월 말까지 부정식품 및 의약품 사범을 특별 단속키로 했다.특히 인체에 유해한 식품이나 용기를 제조·판매한 사범은 구속 수사한 뒤 법정 최고형을 구형할 방침이다. 대검은 이날 서울시와 식품의약청 등의 실무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정식품·의약품 사범 특별단속 유관기관 실무대책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전국 검찰에 시달했다. 검찰은 특히 지금까지는 인체에 유해한 식품 및 용기의 제조·판매업자에게 식품위생법을 적용했으나 앞으로는 형량이 무거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적용,최고 5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구형키로 했다.또 양벌 규정을 적용,행위자와 함께 업주도 처벌하고 해당업소에는 형사처벌과 행정처분을 함께 내리기로 했다.
  • 나리양 유괴 살해 全賢珠 무기징역/서울지법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李胤承 부장판사)는 30일 朴초롱초롱빛나리양(당시 8세)을 유괴,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은 全賢珠피고인(29·여)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약취·유인 및 살해죄를 적용,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유괴,살해한 피고인의 범행은 생명 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다”면서 “그러나 별다른 전과가 없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난한 사회생활을 해온 점으로 미루어 선천적으로 악성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극형은 피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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