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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4인방’을 아십니까/양필승 건국대 교수·차이나타운 건립위원장

    우리 언론이 심심치 않게 쓰는 용어가 ‘4인방’이다. 그 원조는 40년 전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1966∼1976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용어로, 실제로 1975년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마오쩌둥이 다시는 ‘방(幇)’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4인방 단어를 남용한다. 야구 고졸 루키 4인방, 토종미녀 4인방, 닭띠 CEO 4인방 등과 같이 무조건 4인의 조합을 가리킨다. 중국의 4인방은 마오의 처, 장칭을 필두로 상하이의 실력자 장춘차오, 문혁의 신델레라인 왕훙원, 그리고 문혁의 이론가 야오원위안 네 사람을 지칭했다. 이들은 마오주의를 추종했던 인물로서 모두 중국의 최고권력기구인 당정치국의 멤버였으며, 그 중 장과 왕은 9명에 불과한 상무위원으로 권력 최정상에 섰었다. 우선 야오는 1965년 상하이의 신문에서 희곡비평을 통해 마오의 반대파를 공격함으로써 문혁 촉발의 직접적 계기를 만들었다. 장칭은 마오의 개인적 권위를 이용해 홍위병을 진두지휘했다. 장춘차오는 4인방 중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서, 문혁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상하이 코뮌’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왕훙원은 상하이의 노동자에서 단숨에 당 부주석의 자리에 올랐으며 당시 서른 여덟에 불과했다. 4인방의 권력은 모두 ‘마오쩌둥의 사람’이란 추상적 기반에서 비롯된다. 마오의 처, 장칭이야말로 그 같은 속성을 가장 적절히 드러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객관적인 능력을 배양할 시간도 없었고, 추종세력을 따로 구축할 필요도 없었다. 마오와의 코드만이 권력의 기반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 사이의 연대를 조직화할 기회도 없었는데, 그 까닭은 마오와의 ‘관시’(관계)만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이들 네 사람 사이의 정치적 비중은 훗날 4인방 재판의 결과에서 드러났는데,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왕은 무기징역, 그리고 야오는 징역 20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다들 감형을 받았으나, 장칭은 199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같은 4인방의 급속한 몰락은 모두 문혁에 대한 중국인의 입장, 특히 마오시대를 청산한 덩샤오핑의 고민을 반영했다. 한마디로 문혁의 과오는 모두 4인방의 잘못으로 귀결짓고, 그를 주도했던 마오에게는 면죄부를 부여했던 것이다. 4인방 그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몰락에도 억울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권력 자체가 너무나 왜소했다는 측면에서도 스스로 억울하게 느꼈을 듯하다. 왜냐하면 문혁 기간 중 실제 권력은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구축된 관료세력이나 린뱌오가 이끄는 군에게 있었고,4인방은 고작 문화계와 관영 언론을 장악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혁을 주도할 힘도 없었고,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이념은 구체적인 정책에 의해 부인되거나 아예 무시됐다. 결국 ‘마오의 사람’들은 한번도 권력다운 권력을 휘둘러보지 못하고, 마오의 죄과를 몽땅 뒤집어쓰는 희생양으로 역사적 소명을 마쳤다. 그래서 중국 현대사에서 4인방이란 개념은 부정적이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언론이 4인방이란 개념을 얼마만큼 남용하는가는 그 자체로서 별 시빗거리가 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 4인방이 함축하는 비극성만큼은 충분히 고려하고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중국의 4인방과 같은 비극이 여전히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권력도 없으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만 높이고 끼리끼리 챙겨주다 나중에는 신념의 실패도, 정책의 실패도 아닌 채 우왕좌왕하다가 끝나고 말 한국판 4인방. 이제 우리도 4인방을 단순히 네 명이라는 숫자를 나타내는 도구로 쓸 것이 아니라 그 비극성을 충분히 담아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 역사적 교훈이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양필승 건국대 교수·차이나타운 건립위원장
  • [Book Review]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펴냄

    우리 시대의 지성 아니 스승으로 통하는 신영복(65). 감옥에서 20년 20일의 세월을 보냈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결딴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정반대다. 그의 사유는 더욱 투명하고 명징해졌으며, 고아한 풍채는 그야말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다.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최근 출간된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펴냄)라는 책을 통해 ‘인간 신영복’에 다가가 보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 정년퇴임(25일)을 기념하는 책이다. 정년퇴임을 기념한다면 한정된 지인이나 학계를 대상으로 의례적인 정년기념 논문집 같은 걸 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상식을 배반한다. 신 교수의 저서를 감명깊게 읽고 그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신영복 독해’를 시도하는 새로운 형식의 정년기념 문집이다. 그를 아끼는 동료 교수, 친구, 제자 등 60여명이 저자로 참여했다. 교수는 잘 알려져 있듯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년간 복역한 뒤 1988년 가석방돼 이듬해부터 성공회대 교수로 일해 왔다.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해온 그는 창백한 관념성을 극복, 현실과 민중 속에서 자신의 의식과 삶을 재구성한 글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줬다. 저자 가운데 한 명인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영복의 화두는 늘 사람과 사랑이었다.”며 그를 ‘사람을 거울로 삼는 구도자’로 평한다. 이어 이렇게 말한다.“신영복은 바위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다.…그는 오래전에 ‘투쟁 패러다임’을 내버렸기에 자신의 메시지를 투쟁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독(誤讀)이 많아졌다. 신영복을 탓할 수는 없다. 그는 실천 없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신영복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비롯해 출소 후 8년 만에 낸 사색의 글모음 ‘나무야 나무야’, 해외 여행기 ‘더불어 숲’, 동양고전 읽기를 통해 ‘관계론의 철학’을 펼친 ‘강의’등 그의 대표적 저작들에 대한 성찰도 담겼다. 책은 신 교수의 삶과 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핀 1부와 그와 인연을 맺은 지인들의 사적 기록을 담은 2부로 이뤄졌다. 각자 나무로 살다가 선생을 만나 ‘더불어 숲’을 이룬 이들의 이야기. 그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처음처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권성 헌재재판관 퇴임… “역풍 몰아칠수록 원칙 지켜야”

    권성 헌재재판관 퇴임… “역풍 몰아칠수록 원칙 지켜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의견마다 소수의견을 제시해 ‘Mr. 소수의견’이라고 불렸던 권성(65·사법시험 8회)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11일 헌재 대강당에서 퇴임식을 가졌다. 권 재판관의 정년퇴임은 13일이다. 권 재판관은 퇴임사에서 “재판관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기본적 인권을 누리고 살 수 있었던 건 대한민국이 가진 민주헌법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국가의 진로에는 따로 그늘이 지고 역풍이 몰아닥치는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원칙을 굳게 지켜 나라의 민주주의 체제와 헌법을 수호하는데 힘쓰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관에 임명되기 전 명지대 석좌교수였던 권 재판관은 퇴임 후에도 후학양성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부산지법 판사로 법관의 길에 들어선 권 재판관은 99년 서울행정법원장을 마치고 2000년 헌재 재판관에 취임했다. 권 재판관은 판사시절이던 96년 12·12와 5·18사건 항소심 재판장을 맡아 사형과 징역 22년 6월을 선고받은 전두환·노태우씨를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해 주면서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겨 논란이 되기도 했다.87년에는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권리라는 ‘신원권’을 도입, 배상판결을 내리기도 했었다. 헌법 재판소 재판관이 된 뒤에서도 그는 이슈가 되는 사건마다 독자적인 논리로 눈에 띄는 소수의견을 내놨다.2001년과 2002년 간통죄 위헌 소송이 제기됐을 때 헌재는 각각 8대1과 7대2로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권 재판관은 간통을 국가가 형사처벌하는 것은 성적 예속을 강제해 인간 존엄성을 침해한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그는 2004년 신행정수도 건설 관련 특별법, 지난해 행정 중심복합도시건설 특별법, 지난 6월 신문법 대부분 조항에 대해서도 모두 위헌 의견을 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2년미만 징역형 무혐의 처분땐 수사기록 즉시 삭제

    앞으로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법정형에 따라 수사경력자료 보존기간이 최고 10년까지 다양해진다. 수사경력자료란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지문을 채취하고 인적사항과 죄명 등을 기재한 표를 전산입력해 경찰청이 관리하는 자료로 여태까지는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무조건 5년 동안 보존해 왔다. 법무부는 이런 내용의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다음달 말부터 시행한다고 25일 밝혔다. 개정 법률에 따라 법정형 2년 미만의 징역이나 금고, 자격정지, 벌금, 구류에 해당하는 죄는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무죄 선고를 받는 즉시 범죄 기록이 삭제된다. 법정형 2년 이상의 징역·금고에 해당하는 죄는 5년간, 법정형이 사형·무기징역·10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는 10년간 자료가 보존된다.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 등을 위할 때’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표시된 수사경력 조회 요건도 구체적으로 적시됐다. 즉 앞으로는 국가정보원에서 신원조사를 하거나 외국인 체류 허가, 사관생도의 입학 및 장교 임용, 병역의무 부과와 관련돼 필요한 경우에만 관련 기록을 조회할 수 있게 됐다. 아울러 개정 법률은 법무부장관이 전과기록 또는 수사 경력자료 보관·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장에게 조회기록 등 관련 자료 제출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아내살해 靑행정관 징역15년

    서울북부지법 제11형사부(부장 이병로)는 23일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이 구형된 전 청와대 행정관 이모(39)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위 공무원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개인과 사회의 신뢰와 의무를 저버린 채 아내를 살해해 피해자의 유족에게 한평생 치유할 수 없는 고통과 설움을 남겨 줬다.”고 밝혔다.재판부는 “이씨는 자신의 가족에게도 실망감을 주는 한편 국민의 공복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수많은 공무원들의 도덕성까지 크게 훼손해 엄중한 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꽃을 피우기보다 씨를 뿌려라”

    “꽃을 피우기보다 씨를 뿌려라”

    “사람은 머리만 있어서는 안 되고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비판적인 담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인 애정이 함께 담겨 있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담론과 사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신영복(65) 교수가 오는 8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8일 교내 대성당에서 고별강의를 했다. 신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했다.1988년 가석방돼 이듬해부터 17년간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성당에는 재학생, 졸업생, 시민 등 300여명이 그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다. 강의주제는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동양고전 주역(周易)에 나오는 ‘석과’란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과실이다. 석과불식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사회는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가 인간적이고 보람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꽃은 최후가 아니고 씨를 만들기 위한 무수한 과정의 연속이지요. 꽃을 피우기보다는 씨를 묻으세요.” 신 교수는 “세계무역기구(WT O)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징되는 세계화의 물결로 야기된 지금의 위기상황이 석과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마지막 과실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듯 진정한 희망 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세상을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라.”고 했다. 강연 후 기자간담회에서 신 교수는 회고했다.“89년 첫 강의 때에도 느티나무가 보이는 2층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때도 오늘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20년 감옥살이하고 어떻게 말하는지 보러 온 것 같았지요.”그는 “내 인생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 20년, 감옥에 들어가 있는 20년, 그리고 나온 뒤 20년”이라면서 “감옥도 학교로 치면 나는 평생 학교와 관련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 ‘양심론’을 들었다. 감옥에 있을 때 왜 여기 있을까 곰곰이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이념이나 사명감 때문이었다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데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고 했다. 퇴임 후 계획에 대해 신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사회적 이슈에 대해 저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격리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현안을 따라가는 데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요. 무대 위 한복판에 서는 것이 서툴러서 조용히 할 수 있는 저술활동 같은 일들을 계속 하겠습니다.”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숫자를 잘못 본 탓에…” 살인 부른 18세 소녀

    “어이구,그놈의 돈이 뭐길래…숫자 ‘0’자 한자 더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내 신세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네.” 중국 대륙에 같은 방 친구의 돈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정부(情夫)를 불러들여 살인까지 저지르게 한 냉혈 소녀가 붙잡혀 충격을 주고 있다.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성 하이커우에 살고 있는 한 소녀는 같은 방을 쓰는 친구의 돈을 빼앗기 위해 정부를 불러 살인까지 저지르게 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아 주변을 경악하게 했다고 광주일보(廣州日報) 인터넷신문인 대양(大洋)망이 5일 보도했다. 대양망에 따르면 살인에 연루된 사건의 장본인은 올해 18살의 모델 지망생 왕진잉(王金英)씨.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순박했던 그녀는 물욕에 눈이 먼 정부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영원히 헤어나기가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졌다. 중국 중서부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출신인 궐녀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집안의 농삿일을 거들며 생활해왔다. 그러나 자신이 연예인 못지 않은 뛰어난 미모와 쭉 빠진 늘씬한 몸매에 왕은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몸맵시가 뛰어난 만큼 장래 희망이 슈퍼모델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때문에 힘든 농삿일을 계속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왕은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 하드웨어를 최고의 전략상품으로 내세워 청두 잡화점의 판매원으로 취업했다.뛰어난 외모에 늘씬한 몸매의 그녀가 판매원으로 나서자마자 매출이 급증했다.매출이 2배·4배·8배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왕의 아리따운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이 가게로 몰려들었을 정도로 궐녀의 인기가 상한가를 기록한 덕분이었다. 매출 급증에 즐거운을 비명을 올리던 잡화점 사장 위안카이밍(袁開明)도 아리잠직한 왕의 모습을 볼 때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흠뻑 빠져들었다. 위안은 어떻게 하면 왕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수 있을까 하고 노심초사했다.그래서 궐자는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 그녀 옆에 붙어 온갖 ‘교태’를 다 부렸다. 다른 점원들의 월급이 300위안(약 3만 6000원)에 불과했지만,매출이 좋다는 이유를 내세워 궐녀에게만은 2배 이상 많은 800위안(약 10만 4000원)이나 줬다.여기에다 가게 근처에 깨끗한 오피스텔까지 얻어줬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오후,위안은 왕에게 매출이 하루가 다르게 크게 늘어나고 있으니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사겠다고 꼬드겼다.이들 두사람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뒤,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워 2차를 갔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서로 주거니받거니하며 53도짜리 독주를 2병이나 비웠다.그동안 술이 별로 먹어본 적이 없는 왕으로서는 온몸에 열이 나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것은 당연했다.비틀거리는 왕을 부축한 위안은 곧바로 호텔로 가 성관계를 맺으면서 왕의 정부가 됐다. 위안은 멋있는 여자를 애인으로 둔 탓에 궐녀가 언제 도망갈지 몰라 항상 마음을 졸였다.해서 그는 잡화점 경영은 내팽개치고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싼 옷을 사주랴,맛있는 음식을 사먹이는데 올인했다.자연히 잡화점의 매출이 날이 갈수록 뚝뚝 떨어져 끝내 부도를 냈다. 지난 2005년 2월,왕은 돈을 벌기 위해 위안이 소개해준 하이난성 하이커우로 왔다.슈퍼모델을 꿈꾸고서….모델이 되기 전 왕은 우선 5성급 호텔 가라오케에 1000위안(약 13만원)씩 받고 웨이트리스가 됐다. 당시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웨이트리스는 천(陳)모씨.같은 청두 출신이었다.왕은 천씨와 함께 방을 쓰며 생활하게 됐다.같이 생활을 하다보니 천씨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을 뿐 아니라 사장에게도 신임을 받고 있어 월급 외에 부수입도 꽤 짭짤했다. 하루는 왕이 천씨가 예금통장을 들고 돈이 얼마나 예금돼 있는지를 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옆에 가서 슬쩍 엿보니 무려 50만위안(약 6500만원)이 아닌가. 50만위안! 자신은 도대체 얼마 동안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액수일까.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었다.바로 이 순간,왕의 마음은 탐욕스러운 ‘돼지’로 변했다.궐녀는 천씨의 돈을 강탈하기 위해 곧바로 청두에 있는 정부 위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해 5월 25일,위안이 득달같이 하이커우로 달려왔다.이들은 호텔 방을 빌려놓고 돈을 털기 위해 도상 연습까지 했다. 마침내 D-데이가 됐다.왕은 같은 고향인 점을 내세워 고향에서 친구들이 왔는데 함께 저녁이나 하자며 꼬드겼다.이들은 저녁을 하러 나온 천씨를 욱대겨 돈을 찾을 작정이었다. 저녁하러 나온 천씨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술집으로 끌고 가 예금통장을 내어놓으라고 협박했다.이에 천이 내놓은 통장의 잔고는 고작 5만위안(약 650만원).이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천씨를 마구 때렸다.이들의 무차별 몰매를 맞은 천씨는 결국 열명길에 올랐다. 아무리 윽박질러도 더이상의 돈은 없을 수 밖에 없었다.왕이 50,000위안을 500,000위안으로 잘못 본 것이다. 이들의 잔인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천씨가 숨을 거두자 이들은 ‘완전 범죄’를 위해 시체를 토막내 플라스틱 봉지에 넣어 바다에 갖다버렸다. 얼마 뒤 천씨의 부모는 1주일에 한두번씩 꼭 안부 전화를 하던 딸이 1개월 여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하이커우 공안당국에 딸의 실종신고를 냈다. 신고를 받은 공안당국은 천씨가 일했던 호텔 가라오케에서 수사를 벌여 왕과 위안 등을 살인죄·강도죄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하이커우시 중급인민법원은 왕과 위안에게 살인죄·강도죄 등의 혐의를 적용해 왕에게는 무기징역,직접 살인을 저지른 위안에게는 사형을 각각 선고했다. 온라인뉴스부
  • 이강학 고려통상명예회장 부고 왜 하지 않았을까

    명동 사채업계의 ‘큰손’이자,‘부동산 재벌’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강학 고려통상 명예회장이 최근 삶을 마감했지만 이를 주변에 알리지 않아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고 이 회장은 지난 22일 오후 7시4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82세. 하지만 유족들이 고 이 회장의 장례식을 조용히 치르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인들만 빈소를 찾고 있다. 고려통상 관계자는 “(이 회장의 부고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유족이 아닌 이상 말하기가 곤란하다.”면서 말을 아꼈다. 고 이 회장의 삶은 비극적인 한편의 드라마.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 치안총수 자리에 올랐지만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징역이 확정돼 4년형을 살고 나온 뒤 고 이 회장은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배웠다고 한다. 부를 축적한 계기는 원양어업과 부동산의 성공으로 알려졌다. 그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1년 대화재를 입은 대연각호텔을 인수하면서다. 이때부터 그는 재계 인물로서 활동 폭을 넓혀간다. 고 이 회장은 명동의 부동산을 기반으로 78년 대아증권(고려증권 전신)을 인수했으며,83년에는 반도투금(고려종금)을 설립했다. 또 동광약품과 명동 계양빌딩 등을 잇따라 인수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금융재벌 총수로서 순탄한 길을 걷던 고 이 회장이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외환위기 시절이었다.1998년 고려종금과 고려증권, 고려생명 등 주축기업 3인방이 지급여력 부족으로 영업정지 명령을 받으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고 이 회장은 이후 외부 활동을 줄이고, 역대 경찰청장 모임에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청은 예우 차원에서 지난 23일 합동조문을 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37회 성폭행범 무기징역 선고

    37차례에 걸쳐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은 30대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청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김홍준 부장판사)는 11일 홀로 귀가하는 여성이나 원룸에 사는 부녀자를 37차례에 걸쳐 성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은 혐의(특수강도강간)로 구속기소된 양모(30)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딸 앞에서 어머니를 성폭행하고 여동생 앞에서 언니를 성폭행하는 등 범행수법이 너무도 대담하고 흉악하다.”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청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특수강도강간 혐의 최고 사형

    서울 중·서부 일대에서 14건의 성폭행을 저지른 김모(31)씨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법조문에는 최고 사형까지도 가능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씨는 피해자들을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하거나 금품까지 빼앗았기 때문에 특수강간과 특수강도강간 등의 혐의가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성폭력특별법에서는 특수강도 강간의 경우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수강간의 경우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김씨와 같은 연쇄 성폭행범에게는 중형을 선고해 온 것이 법원의 관행이다.2003년 3월부터 2년 동안 인천과 경기도 일대에서 50여차례에 걸쳐 술집 여주인을 상대로 금품을 빼앗고 성폭행한 `빨간 모자´ 송모(31)씨는 1심에 이어 고법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범행수법과 죄질이 나쁘고 피해 여성들이 대인 공포증을 호소하는 등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초등생 살해범 무기징역 선고

    용산 초등학생 살해범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서울서부지법 제11형사부(부장 김윤권)는 13일 초등학생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김모(53)씨에게 무기징역, 사체유기를 도운 아들(25)에게 징역 3년을 각각 선고했다. 검찰은 판결에 불복,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사전에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우발적으로 범행에 나선 점, 범행에 관하여 깊이 반성하고 죄를 뉘우치고 있는 점에 비춰 무기징역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을 방청한 피해자 허양의 부모와 시민단체 회원들은 이 같은 법원의 판결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재판부가 10분 동안 휴정하기도 했다. 아버지 허씨(38)는 “딸아이가 60,70년은 더 살 수 있었는데 저 사람 때문에 10년밖에 못살고 죽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는 또 “범인을 극형에 처해달라는 수백명의 탄원서보다 저들의 반성문 몇장이 더 큰 것이냐.”고 항의했다. 함께 재판을 방청한 시민단체 회원들도 “무엇을 반성했다고 무기징역이냐.”“똑바로 판단하라.”고 말했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女아나키스트

    한국인의 아내로 살며 조선을 사랑하다 숨진 일본여인의 묘지가 한국에 있어 일본인의 발길이 늘고 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자리잡은 묘의 주인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朴烈·1902∼1974)의사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 일본 요코하마 출생인 가네코는 문경 출신인 박열 의사의 도쿄 유학시절인 1922년에 만나 일제에 항거하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가난에 찌든 어린시절, 신문을 팔며 힘든 생활을 했던 이력도 작용했다. 박 의사와 동거하던 1923년 9월1일 간토(關東)대지진 때 가네코는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로 박 의사와 함께 검거돼 1926년 3월25일 둘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일본 당국은 가네코가 그해 7월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감생활 중 박열과 가네코가 옥중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옥중에서 임신까지 하게 돼 당국이 이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낙태수술을 하다가 숨졌다는 설도 있다. 이후 박 의사의 형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네코의 시신을 수습해 집안 선영인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죽은 일본인이 한국에 묻히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남자를 사랑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했던 이력이 있었던 것이다. 박열의사기념사업회는 2003년 11월 마성면 박열 의사의 생가 뒤편으로 가네코의 묘를 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열 의사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해에 도쿄로 건너가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친일파에 대한 테러활동도 전개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돼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장을 지낸 뒤 1974년 1월17일 사망했다. 일본 릿교(立敎)대 교수를 지낸 야마다 쇼지는 2003년 국내에서 발간된 ‘가네코 후미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에서 죽음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네코의 일생을 그렸다. 가네코의 짧지만 극적인 삶은 1972년 일본에서 일대기를 그린 ‘여백의 봄’이 출간된 뒤 일본에서 연구모임까지 결성될 정도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가네코의 고향인 야마나시현(山梨縣) 학습추진센터 회원들로 구성된 문인 14명은 3일 문경을 방문, 그의 삶을 기렸다.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시론] 범인은 ‘살인의 추억’을 반추하는데…/ 하창우 변호사

    [시론] 범인은 ‘살인의 추억’을 반추하는데…/ 하창우 변호사

    1991년 3월26일 도롱뇽 알을 주우러 집을 나갔다가 개구리 소년 5명은 실종됐다. 이후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유골이 대구 달서구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돼 타살로 판명됐다. 이들이 실종된 그날 타살됐다면 지난 26일 공소시효가 끝났다. 또 범인이 잡히지 않은 9건의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중 8번째 사건은 지난해 11월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마지막 사건도 내년 4월이면 공소시효가 끝나게 된다.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는 10년, 장기 10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는 7년 등 공소시효는 범죄에 따라 기간이 정해져 있다. 이 기간이 지나 범인을 잡거나 범인이 나타나 범행을 자백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에 대해 검사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으며,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더라도 법원은 형을 선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소시효제도를 두게 된 이유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의 사실상태를 존중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기하자는 데 있다. 또 오랜 시간이 지나면 범죄의 증거가 없어져 형벌권을 적절하게 행사하기가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범죄에 대한 사회의 비난과 관심이 희박해지고, 범인의 사회적 생활 안정을 보장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어린이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죄나 주로 10대나 20대의 나약한 여성을 골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범죄에 대해 사회적 비난과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공소시효제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범죄의 증거를 오랫동안 보존하기 어렵다는 점은 첨단과학의 발달로 궁색한 변명이 됐다. 공소시효를 만들 당시에는 범죄의 증거를 확보하는 방법이 원시적이었고 증거를 장기간 보존할 경우 변질되어 범인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혈액과 체모나 체액을 DNA 분석으로 해독하여 범인에 관한 정보를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공소시효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가 흔들리게 됐으니 제도를 정비할 때가 됐다. 아날로그 시대에 만들어진 공소시효를 디지털 시대에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실체적 진실을 은폐하고 범인에게 살인의 면죄부를 주는 격이 된다. 수많은 피해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은 끝까지 추적하여 처벌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피해자의 생명을 존중하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살인의 공소시효가 15년이 된 것은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 일본의 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도 시대 변화에 따라 2004년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공소시효를 15년에서 25년으로 늘렸다. 현재 미국은 연방법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고, 사형제를 폐지한 주(州)도 있지만 각 주는 살인죄에 대해서만은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다. 독일도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30년이다. 공소시효가 없으면 범인을 언제든 잡기만 하면 처벌할 수 있다. 우리도 이런 세계적 추세에 맞추어 살인과 같은 중한 범죄의 공소시효를 대폭 늘려야 한다. 지난해 8월 국회에 살인의 공소시효를 20년으로 늘리는 ‘공소시효 연장에 대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상정되었으나, 지금보다 5년을 늘리는 정도로는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는 범죄의 증거를 포착하여 범인을 처벌하기에는 부족하다.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것은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될 여지가 있으므로 25년 정도로 늘리는 것이 타당하다. 하창우 변호사
  • 영남제분 회장 전처 ‘재심청구’ 준비

    경기 하남 여대생 공기총 청부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영남제분 류원기 회장의 전 부인 윤모(61·여)씨가 복역중인 조카 등 공범 2명을 위증 혐의로 고소한 뒤 이들이 검찰수사 과정에서 법정 진술을 번복하고 나서 수사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일 청주지검에 따르면 윤씨가 지난해 10월 공범인 조카 윤모(44)씨 등 2명을 검찰에 위증 혐의로 고소했다.윤씨는 2002년 3월 조카 윤씨 등을 통해 여대생 하모(당시 22세)씨를 청부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윤씨는 고소장에서 “조카 등이 살인청부를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내 지시를 받아 하씨를 살해한 것처럼 법정에서 허위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에 따라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조카 윤씨 등 공범을 불러 조사했으나 이들은 검찰에서 “살인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재판 당시의 증언을 번복했다.청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이총리 사의표명] 정치권 표정

    한나라당은 5일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파문’과 관련, 이 총리의 부도덕성을 집중 부각시키며 총리직뿐 아니라 의원직 사퇴까지 거론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이 총리는 노 대통령 부재중에 신변을 정리하고 대통령 귀국 즉시 총리직은 물론 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즉각 사퇴해야 한다.”며 의원직 사퇴까지 요구했다. 한나라당의 총공세는 이 총리 개인에 대한 반감도 있지만 3·1절 골프 파문에 대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데다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파문으로 인한 수세국면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주말 부산 현지조사를 지휘한 이재오 원내대표는 이날 염창동 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이 총리가 대통령 순방후 거취를 표명하겠다고 한 것은 사실상 사의를 표명한 것과 다름없다.”며 “노 대통령은 이 총리의 사의를 받아들여 최대한 빨리 사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원내대표는 “자체조사 결과 이 총리가 3·1절에 부산에서 상당히 부적절한 형태의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그런 골프를 쳤다면 200만명의 골프 인구가 분노할 일”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부적절한 동반자’ 중에는 수년전 ‘남한산성 여대생 살인사건’을 교사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비정한 장모’의 남편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공세에 대해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파문을 덮으려는 시도”라고 반박하면서도 내심 곤혹스러운 모습이었다. 정동영 의장은 이날 영등포 당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나라당이) 최 의원 문제를 덮고 가기 위해 (이 총리 골프 파문에 대해)정치적 총공세를 벌인 측면이 있다.”면서도 “정치권의 자숙이 필요한 시기”라고 지적했다. 또 이 총리가 어떻게 거취를 표명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묻자 “거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우상호 대변인도 “실정법을 위반한 최연희 의원은 전화 연락이 안된다면서 보호하면서 국민에게 사과하고 거취까지 표명한 총리에게 의원직 사퇴까지 요구하는 것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 대변인은 “골프파문이 많은 국민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최 의원의 성추행 사건, 실정법 위반사항보다 중요해 의원직을 사퇴할 문제인가에 대해 국민들은 적반하장이라고 느낄 것”이라며 “더 이상의 정치공세를 중단하고 최의원이 언제 어떻게 사퇴할 것인지, 아니면 사퇴 안할 것인지를 국민 앞에 명백히 밝히라.”고 촉구했다. 전광삼 황장석기자 hisam@seoul.co.kr
  • “이런 금수같은…” 소녀만 성폭행한 독신남

    “인간이 어떻게 더이상 이런 파렴치한 짓을….” 중국 대륙에 어린 10대 소녀에게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하고 아이까지 낳게 한 것은 물론,그녀의 친구를 공갈·협박해 성폭행하는데 도와주도록 욱대긴 독신남은 인간이 얼마나 파렴치해질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 장사만보(長沙晩報)는 13살짜리 소녀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성폭행해 임신케 했을 뿐 아니라,그 소녀의 친구를 을러대 성폭행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록 한 혐의로 50대 독신 남성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최근 보도했다. 장사만보에 따르면 더이상 인간이기를 거부한 주인공은 중남부 지역 후난(湖南)성 장자제(張家界)시에 살고 있는 푸이궈(付衣國·52).그는 온갖 폭력·협박 등의 악랄한 수단을 써서 어린 소녀 탕쿠이화(唐桂花·가명)를 수차례 성폭행한데 이어 아이를 낳게 만들었다. 특히 그는 탕의 친구 천잉즈(陳英姿·가명)에게 협박·폭력을 통해 탕을 성폭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아 분노를 사고 있다. 1991년 5월생인 탕은 집안이 너무 가난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주며,조금은 어렵지만 단란한 가정생활을 해왔다. 반면 이웃 마을에 사는 푸는 놀기만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 까닭에 ‘무능력자의 대명사’로 널이 알려지는 바람에 결혼하지 못한 탓인지,성도착 증세를 보이며 인근의 부녀자들에게 기피인물로 꼽혀 왔다. 이런 상황에서 2004년 6월 탕에게는 천인공노할 악마의 손길이 뻗쳐 왔다.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있던 탕은 집에서 핀둥거리기가 지겨워 나무하러 왔던 푸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노칠세라 푸는 몰래 살금살금 탕에게 다가가 뒤에서 껴안고 땅에 쓰러뜨린 뒤 짐승같은 짓을 저질렀다.그는 이어 “만일 오늘 일을 남에게 말하면 죽여버리겠다.”고 낫을 들고 협박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첫번째 범행에 성공하자 재미를 붙인 그는 심심하면 탕의 집을 낫을 찾아가 성폭행을 하고는 5위안(약 650원)씩 주곤 했다. 1개월여가 지난 그해 7월.푸는 산에 올랐다가 탕과 그녀의 친구 천이 함께 산나물을 뜯는 것을 발견했다.천을 불러 탕을 성폭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욱대겼다.일을 마친 뒤 이들 2명에게 각각 5위안씩을 줘 입을 막았다. 그러나 푸의 완전 범죄는 1년여만에 결국 들통나고 말았다.탕이 임신을 해 딸을 낳았기 때문.대경실색한 탕의 부모가 탕을 집중 추궁한 끝에 푸의 범죄 사실을 알아내고 공안(경찰)에 신고했다. 붙잡힌 푸는 끝까지 범죄사실을 부인했으나,친자 확인 DNA검사 결과 탕의 딸이 그의 친딸임이 밝혀져 결국 쇠고랑을 차게 됐다. 장자제 중급 인민법원은 푸에게 강간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5위안을 받고 성폭행을 방조한 탕의 친구 천에게는 징역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온라인뉴스부
  • DJ “나도 사형집행 직전까지 갔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26일 “우리 나라와 전 세계에서 사형제도가 없어져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사형제 폐지를 촉구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제앰네스티(AI) 기고문를 통해 “한국의 인혁당 사건이 그러했고 나 자신도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 직전까지 갔던 일이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98년 대통령 취임 이후 5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사형집행을 한 일이 없으며 몇 사람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고 소개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올해 한국을 ‘사형제 폐지를 위한 집중 캠페인 국가’로 선정, 김 전 대통령의 기고문을 세계 160개국의 국제앰네스티 회원 소식지에 실을 예정이다. 이 기구의 한국지부 김희진 사무국장은 “국제앰네스티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양심수로 지정해 구명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며 “김 전 대통령 기고문을 통해 사형제 폐지운동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간첩·조작’ 40년 논란 종지부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가 밝힌 동백림 사건의 실체는 ‘공안기관의 무리한 확대적용’과 ‘정권의 정치적 악용’이 빚어낸 공안사건이라는 것이다. ●‘실체’를 확대적용한 공안사건 공안기관이 무리하게 확대 적용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한 사실은 진실위 조사결과 곳곳에서 드러났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를 동백림 공작단의 일부라고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진실위는 “중정은 당시 6·8부정선거로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가혹행위를 동원, 민비연과 황성모 교수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재판 결과 민비연 관련자들은 대부분 무죄선고를 받았고 민비연이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공소사실은 무죄 판결됐다. 동백림 수사과정에서 검찰 송치자 66명 가운데 23명에게 간첩죄가 적용됐지만 최종 선고결과 피고인 기운데 단 한 사람도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사건 발생 3년 뒤인 1970년 12월까지 사형 선고를 받은 정하룡·정규명 박사를 포함, 모두 석방됐다. 단순 대북접촉자까지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한 탓이다. 중정이 해외 연행을 위한 ‘GK공작계획’을 수립해 30여명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서독지역 연행자는 모두 자진귀국했고 나머지는 임의동행했다고 밝혔지만 사실상 강제연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 동백림 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고 불려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먼저 인지한 특이한 사건이기도 하다. 진실위는 비록 ‘정권이 사전 조작하거나 기획하지 않았던’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당시 6·8 부정선거 시위가 이 사건 직후 수그러졌고 사형선고자가 무죄로 석방되는 등 정황상 ‘조작’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중정이 ‘동백림 간첩단’이라고 발표하지 않아 진실위측은 간첩단 여부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방문, 금품 수수, 대북접촉 주선, 대북방송 청취’ 등을 예로 들어 중정은 간첩활동 혐의를 적용해 실정법 위반을 내세웠다. 사실상 간첩단임을 시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에 맞춰 진실위의 적극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대목이다.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이응로 선생 등 세계적인 예술가가 연루돼 조명을 받았던 사건이기도 하다. 지난 40여년 동안 분단으로 인해 ‘간첩’과 ‘조작’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무형의’손실도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동백림 사건 중앙정보부가 1967년 7월 대학교수와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 194명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고 공개한 사건. 정규명씨 등 2명에게 사형이, 강빈구·윤이상씨 등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등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천상병 시인은 사건 연루자인 친구로부터 막걸리 값을 받아썼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독일과의 외교분쟁으로 이어질 뻔했고 연루자들은 1970년 광복절 특사로 모두 풀려났다.
  •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전모] “법원 무죄판결로 명예회복·보상을”

    31년 만에 드러난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의 진실 앞에 피해자와 유족은 묵은 세월에 대한 회한을 쏟아냈다. 시민단체는 환영과 함께 정부 차원의 보상을 촉구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강창덕(79·대구 동변동)씨는 7일 “죽기 전에 진실이 밝혀져 기쁘다.”면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사형당한 여덟 분도 기뻐하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나경일(76·대구 범어동)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사형을 당한 고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70·대구 방촌동)씨는 “남편이 사형당한 후 2남3녀를 키우면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했다.”면서 “이제 고문과 사건조작 당사자의 양심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임구호(57·대구 시지동)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한 당시 정권 핵심부의 가담 여부까지 확인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고 아쉬워했다. 유가족들은 이날 오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8명 중 4명이 안장돼 있는 경북 칠곡군 현대공원 묘지를 참배했다. 시민단체들은 ‘국가범죄’에 대한 역사적 심판과 향후 재발 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은 “과거 군사정권이 자행해 온 조작과 은폐, 고문 등 도덕성 추락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간사는 “국정원의 발표는 환영하지만 피해자들의 고통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다.”라며 “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내려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사과와 보상방안 마련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대구 황경근 서울 안동환기자 kkhwang@seoul.co.kr
  •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전모] ‘인혁당’ 무기징역형 전창일씨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전모] ‘인혁당’ 무기징역형 전창일씨

    “30년 넘게 왜곡됐던 진실을 다른 곳도 아닌 국정원에서 밝혀내니 ‘결자해지’라는 말이 떠오릅디다.” 국가정보원이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날조를 시인한 7일 전창일(77) 통일연대 상임고문은 떨리는 목소리로 기자를 맞았다. 전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0.75평 독방에 수감돼 있다 9년 만에 석방됐다. 그는 “굳은 양심과 결의로 진실을 밝혀준 국정원 조사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발표 전 “국정원이면 중정(중앙정보부)의 후신인데 어떻게 믿겠느냐.”며 강한 불신을 갖고 있던 터라 더욱 감격스러운 듯했다. 1974년 건설회사에서 중동지역 수주를 담당했던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여권까지 신청해 둔 상태에서 갑자기 중정에 끌려갔다. 무차별 구타와 물고문에 전기고문까지 당할 때에는 3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머리를 깨버리고 싶었다. 결국 ‘폭력혁명을 꾀했고 다른 사람들과 접선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는 거짓자술서를 썼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당시의 충격으로 병을 얻은 아내는 30년을 병치레로 고생하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도 못본 채 2003년 세상을 떴다. 전씨는 “이렇게 기쁜 날 혼자라니….”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실은 밝혀졌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서울지법에 당시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지만 3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죽은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지만 명예만큼은 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 국가권력의 횡포로 억울하게 형극의 길을 걸어온 유족들에게는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하고요.”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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