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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20년만에 전국행사로

    ‘5·18 민중항쟁 20주년 전야제’가 올 처음으로 광주와 서울 여의도에서열리고 임진각에서는 통일음악제가 개최되는 등 전국 15개 주요 도시에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짐으로써 5·18이 20주년을 계기로 전국화의 전기를 맞게됐다. 5·18 민중항쟁 제20주년 기념행사위원회(상임위원장 金東源)는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 기념행사 일정을 확정,발표했다. 행사위는 이날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광주민예총 등과 공동으로 5월 한달여 동안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금남로,망월동 묘지를 비롯해 서울·부산·대구·울산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다양한 민중문화 예술제를 열기로했다. 특히 오는 5월17일에는 광주 전야제와 별도로 사상 처음으로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살아있는 신화 5·18’이란 주제로 한국민예총 주관의 전야제가열리고 18일에는 임진각 야외특설무대에서 ‘통일 음악회’가 개최된다.또 5월1일부터 18일까지 ‘새로운 빛을 향하여’란 주제로 목포·부산에서 임진각에 이르는 국토종단 대행진 행사가 각종 예술제와 더불어 이어진다. 이번에 광주를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서 펼쳐지는 예술제에는 5월 풍물굿은 물론 마당극,5·18 국제음악제,민중가요 100선 거리음악회,서울시향의 ‘광주여 영원히’음악회,5·18영화제,망월동 문화체험 등 각종 행사가 마련됐다. 이밖에 제4회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회의,아시아민주단체 실종자 가족초청 행사,아시아 인권상황전,광주인권상 시상식,국제학술회의 등 각종 인권관련 행사도 이어진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평양 리포트/(하)월·납북 인사 행적·최후

    김흥곤 선생(76·북한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은 남한 현대사연구자들이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재북 인물중 한 사람이다.그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약관 22세 때부터 조소앙(임정 외무부장)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때는 조 선생을 수행해 평양에 다녀왔고,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후 인민군의 후퇴때 조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그는 지난 56년 7월 조소앙을 중심으로 안재홍,엄항섭(임정 선전부장),오하영(민족대표 33인중 1인),최동오(임정 국무위원),송호성(광복군·국방경비대 총사령관),김효석(자유당시절 내무장관)등 남한측 인사들이 조직한 북한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통협)에 참가해 현재 이 단체의 고문으로있다.그는 재북 임정요인들의 북에서의 삶과 최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4월 7일 오후 5시 평양 보통강호텔 면담실에서 어렵게 선생을 만났다. ●증언을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선생님의 증언은 우리 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남에서 온 기자선생을평양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운명에 대해 제가 70평생 체험한 이야기를 하려 하니 정확히 보도해주기 바랍니다”●선생님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조소앙 선생의 비서가 되셨습니까. “일제하 광주사범학교 3학년때 2종 교원시험에 합격해 교원생활을 했는데학생들에게 조선어 공부를 시키다가 43년 반일교원으로 몰려 파면당했습니다.독립운동가 출신 당숙의 소개로 서울 백남운 선생댁에 피신해 있었는데 해방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조 선생이 비서를 구하면서 내 얘기를 들으시고 비서로 삼으신 겁니다”●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셨을 때 일들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남의 좌익세력들은 비법적으로 배를 타고 해주로 들어갔지만 민족주의 세력은 합법적으로 올라갔습니다.김구,김규식(임정 국무위원),조소앙,조완구(임정 국무위원) 선생 모두 자기 차로 평양에 가서,그 차로 돌아다니다가 내려가셨습니다.연석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은 대단했습니다.참가자들에게 양복 와이셔츠도 해주고 과일,사이다 같은 것을안겨주면서 열렬히 환송했습니다”. ●남에서는 남북연석회의가 실패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오늘의 관점에서 남북연석회의를 평가하신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상 공산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합작 단결을 과시한최초의 대민족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금도 평화통일하자면 이념을 떠나민족이 대단결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앞으로도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남연석회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남북연석회의에 대해 남한의 보수진영 학자들은 ‘남북협상은 전적으로 북측에 이용당했다’는 입장이다.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협상 가운데 남북연석회의는 그런 측면이 있지만,이어 열린 남북요인회담(4김회담 포함)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의 민족적 노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편집자주]●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녹두꽃’에는 김 선생님께서 50년 9월 인민군이후퇴할 때 안재홍,조소앙 선생을 모시고 평양까지 후퇴한 것으로 나와있는데,후퇴과정과 그때의 민족주의 인사들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남쪽에서는대부분 이 분들이 강제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들을 모시고 올라온 내가 납치범이란 말인가.당시 그 분들은‘남북협상파’ 세력이라고 불렸습니다.그분들은 ‘남북 국회가 우선 통합해서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50년 8·15를 기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평화통일방안을 50년 6월 26일 국회에 상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전쟁이 난 것입니다.전쟁이 터진 후 조소앙 선생은 ‘우리가 조금만 빨리 평화통일방안을 통과시켰다면 이런 유혈전쟁이 없었을 텐데’하고 통탄해 하셨습니다.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남북협상을 주장하시다가 김구 선생이 희생당하신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안위를 걱정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조 선생께서는 빨리 유혈전쟁을 그치고 평화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고 전쟁이 그리 오래 가리라고는 보지않으셨습니다.이남 언론에서는 우리가 개성에서 서흥,봉산을 거쳐 대성산으로 갔다고 보도했는데 우리는 미국대사관에서 노획한 차를 타고 임진강 수중다리를 거쳐 다른 길로 왔습니다”[이에 대해 서중석교수(성균관대·현대사전공)은 “당시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조소앙·김규식·원세훈 등 중도우파 계열의 인사들이나 친일파로 지목된 이광수·백관수 등은 납북됐다고 볼 수 있다.반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등은 자진월북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당시 김씨처럼 남측인사들의 북행길에 동행했던 신경완씨(가명·80년대 망명·98년 작고)의 증언집 ‘압록강변의 겨울’에 따르면,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 노동당 군사위는 남한내 주요인사들을 포섭,재교육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키로 결정하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요인들을 연행,체포했으며,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후 후퇴하면서 평양에서 재교육을 받고있던 남측요인들을 데리고 자강도 만포까지 후퇴한 것으로 돼 있다-편집자주]●평양에 도착해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당시 평양 대동강 남쪽에 국제전화중계소가 있었습니다.그곳은 국제적으로 등록된 곳이라 폭격을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우리는 9월 20일 평양에 도착해서 국제전화중계소 인근 농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동네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해와서 융숭하게 대접받은 후 백선을 두른 특별열차를 타고 강계까지 갔습니다”●북으로 간 민족주의 인사들은 박헌영,이승엽사건과 56년 ‘종파사건’이나면서 큰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최근 공개된 58년 10월 6일평양주재 러시아대사 푸자노프의 ‘업무일지’에 따르면 “58년 9월 30일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조소앙 선생이 대동강에 투신자살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사실입니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조 선생이 별세하신 것은 58년 9월 10일입니다.별세하실 때까지 조 선생은 상급(장관급) 대우를 받으면서 상(장관)들이 사는평양 흥부동 4호주택에 사셨습니다.별세하실 무렵 선생은 학질을 심하게 앓아 많이 쇠약해 있었습니다.별세 전날인 9·9절 술을 드시고 10일 새벽 대동강으로 산보를 나가셨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물에 빠지셨는데 겨우 정신을 차려 집에까지 오셨습니다.그길로 남산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병원에서는 사망원인을 학질로 진단했습니다”●김규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주십시오. “김 선생께서는 50년 12월 10일 만포 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머리 뒤에 혹이 있고,오랜 숙환이 계셔서 전쟁중에 후퇴하시면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조완구,김의한(임정요인 김가진의 아들),엄항섭,송호성,유동열(임정 군무부장) 선생 등 다른 임정요인들의 사망시기와 최후도 궁금합니다. “면담에 나오기 전에 신 기자의 질문요지를 전해 받고,남에 있는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에게 제삿날이라도 정확히 알려주어야겠다는 일념에서 한분 한분 돌아가신 날짜를 정확히 적어 가지고나왔습니다(선생은 실제로 약 8쪽의 종이에 자필로 빽빽히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조완구 선생은 홍명희 부상(차관)의 고모부가 됩니다.평소에도 홍명희 선생이 자주 나와 잘 돌봐드렸는데54년 10월 27일 평양 대성산구역 청암동 자택에서 운명하신 후 홍명희 부상이 주관해서 장례를 잘 치러드렸습니다.김의한 선생은64년 10월 9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새마을동 자택에서 운명하셨고,통협 상무위원으로 부상급 대우를 받으시던 엄항섭 선생은 62년 7월 31일 평양에서 별세하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 송호성 선생은 평양 북새거리 자택에서 59년 3월 24일 운명하셨고,유동열 선생은 전쟁중 후퇴하다가 50년 10월 18일 자강도 희천 계선 쌍방골에서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제헌의원 가운데 생존해 계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경남 함안 국회의원이던 강욱중 선생은 69년 7월 1일 돌아가셨습니다.역시 제헌의원 출신이신 최태규 선생은 올해 80으로 얼마전 팔갑상을 받으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만 심장이 안 좋으셔서 요즘은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돌아가신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묘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김규식,조소앙,조완구,오하영,엄항섭,유동렬,최동오,임규섭 선생은 신미리 애국열사릉에,그외 통협 회원들은 신미리와 삼석구역(대성산) 특설묘지에 계십니다.또 통협 결성전에 돌아가신 현상윤(고려대 총장·50년 9월 25일폭격으로 사망),백관수(동아일보 사장·제헌의원·51년 10월 25일 폭격으로사망),정인보(국학자) 선생 역시 삼막 특설묘지에 모셨습니다.정인보 선생의따님은 홍명희 선생의 며느리가 되어 지금 평양 청류동에 살고 있습니다”junyoung@
  • 깨달음의 빛, 나누는 기쁨

    원불교가 28일 원기 85년 대각개교절을 맞아 오는 5월 11일까지 전북 익산중앙총부와 전국 각 교구교당에서 다채로운 봉축행사를 마련한다. 대각개교절이란 원불교를 세운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득도한 날을 말하는데 원불교는 이 날을 창교일로 삼고 있으며 매년 대각개교절을 전후해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가져왔다. 올해 대각개교절 봉축행사는 ‘깨달음의 빛 나누는 기쁨’이란 주제아래 중앙총부가 주관하는 ‘법잔치’,‘은혜잔치’,‘놀이잔치’와 각 교구별로 진행하는 문화예술행사,어린이날민속잔치,특별법회,봉사활동 등으로 꾸며진다. 익산 중앙총부는 24∼28일 반백년기념관에서 특별기도식,24∼28일 대각전에서 특별법회를 여는데 이어 대각개교절인 28일 반백년기념관에서 경축기념식을 갖는다.중앙총부는 특히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 20명과 백내장 환자인 무의탁 노인 10명에게 무료시술도 하며 29일 부송동 그린체육공원에선 제1회장애인큰잔치를 연다. 중앙교구는 22일 오전에 익산 배산과 군산 월명공원에서 시민공원가꾸기운동을 펴며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원광대와 군산 월명공원에서 어린이날 민속잔치를 마련한다.서울교구도 지난 9일 흑석동 원불교회관에서 신도 200명이참가한 헌혈운동을 가졌고 이달초부터 3년간 일정으로 북한 산모와 신생아에게 ‘분유 1만통보내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밖에 대전·충남교구에서는 지난 18일 대전 국립묘지에서 국가유공자 천도재를 가진데 이어 25일 대전소년원에서 소년원생 200명을 대상으로 생일잔치와 공연 음식공양 등으로 이루어진 소년원 대법회를 연다. 김성호기자
  • [외언내언] 의자왕부자 假墓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가 그곳에 묻힌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隆)의넋이 1,300년 만에 고토(故土)로 돌아온다. 충남 부여군은 9월 말까지 부여읍 능산리 고분군안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와 제단을 설치하고 10월 백제문화제때 이곳에서 초혼제를 지낸다. 새로조성될 가묘에는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북망산에 있는 융의 묘 주변에서 가져올 흙도 뿌려진다. 그동안 왕자 부여융의 묘는 확인이 됐지만 의자왕의 묘소는 밝혀지지 않았다.부여융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석(墓誌石) 복제품도 제단에 안치한다니 비록 ‘가묘’일망정 혼령은 깃들 것 같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의자왕은 서기 660년 7월18일 사비성을 나와왕자·대신들과 함께 마침내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무열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올리게 하니 백제의 군신이 목메어 울었다고 한다.항복한 의자왕은 왕세자를 비롯,대신·장수 88명,백성 1만2,870명과 함께 포로로 당나라에 잡혀갔다. 우리 역사상 국왕이 외적에게 잡혀간 일은 의자왕이 초유의 일이다.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이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고 병자호란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역시 청국에 끌려가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왕세자가 일본에볼모가 된 적은 있었지만 국왕이 외적에 붙잡혀 간 일은 의자왕이 처음이자마지막이다. 의자왕은 당나라 뤄양에서 3년 동안 지내다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당나라는 백제 유민 회유책으로 꽤 호화로운 장례를 치러주었다.그리고 셋째 아들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의 유민을 회유하고 신라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도록 했으나 10여년 만에 백제 유민의 저항이 심하고 신라의 직할통치가 강화돼 융이 당나라로 들어감으로써 백제 왕씨 부여(扶餘)씨는 이땅에서 멸족하고 ‘부여’라는 지명만 남게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삼한지중 백제최강 최문(三韓之中 百濟最强 最文)”이라 하여 백제의 강성과 문명의 찬란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이렇듯 강성하고 문명이 찬란했던 왕조가 어이없이 무너지고 ‘잃어버린 왕조’가 됐다. 백제왕조는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나·당연합군의 잔혹한 주민학살로 부흥운동이 쉽게 세를 얻을 수 있었다.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삼아 부흥전쟁에 나섰다.그러나 지도부의 내분과 강력한 연합군의 공격으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역만리 적지에 묻혀 있던 의자왕과 부여융의 넋이 고토를 찾게 된다니 1,300년 역사의 흐름이 한갓 유수(流水)와 같구나. 金三雄주필 kimsu@
  • 金대통령 4·19 40돌 기념사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9일 수유리 4·19 국립묘지에서 열린 ‘제 40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국민의 정부는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을실천하기 위해 자유 인권 정의의 실현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말했다.또 “정치참여 확대와 인권 신장,합법적 집회와 시위의 보장,시민사회의 역할 증대 등을 통해 아름다운 민주주의 꽃을 피워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4·19로 시작된 민주화 대장정의 과정으로 4·19정신의맥을 잇고 있다는 의미다.김대통령이 헌화와 분향만을 했던 98,99년과 달리기념식에 참석,처음으로 기념사를 낭독한 것도 이러한 의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히 지난해 11월17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순국선열 추모제전에 참석한 이래 올해들어서만도 2·28 대구학생의거,3·15 마산의거 기념식 참석과 연관시켜 볼 때 김대통령의 향후 의지를 읽게 하는 대목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김대통령이 기념사에서 “세계는 지금 거대한 격변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중차대한 국가적·민족적기로에서 우리가 살 길은 국정의지속적인 개혁과 발전 뿐”이라고 강조한 부분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는 여야가 협력해 국정을 안정시키고 미래지향적인 정치를 펼치라는 것”이라며 정치개혁과 참여민주주의 발전 등을 거듭 다짐한대목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사회정의도,국민통합도 기약할수 없다”면서 “이러한 개혁의 막중한 과업을 임기중에 기필코 이룩하겠다”는 약속으로 4·19 정신을 기렸다.김대통령은 이날 오후에는 4·19 관련단체 관계자들을 연무관으로 초청,다과를 베풀고 위로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4·19’ 40돌 與野표정

    4·19혁명 40주년인 19일 여야 지도부는 잇따라 수유리 4·19 국립묘지를참배하고 ‘4·19정신’을 기렸다. ◆민주당 서영훈(徐英勳)대표는 이날 오전 이인제(李仁濟)전 선대위원장,김옥두(金玉斗)사무총장,박상천(朴相千)총무 등 당직자 100여명과 함께 4·19국립묘지를 찾아 헌화했다. 정동영(鄭東泳)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4월혁명이 제시한 자주,민주,평화의통일원칙은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햇볕정책의 기조가 되어 남북 정상회담을 맞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도 오전 김덕룡(金德龍)부총재,맹형규(孟亨奎)총재비서실장 등 당직자 100여명과 함께 수유리 4·19기념탑을 찾았다. 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현 정권은 3권 분립,대통령직과 여당 총재직 분리 등 민주화를 위한 권력구조 개편을 시행해 4·19혁명정신에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민련 이한동(李漢東)총재도 당직자 50여명과 함께 4·19묘역을 찾아 헌화,분향했다.김학원(金學元)대변인은 “정치권은 독선과 독주의 정치를 청산하고 상생의 정치를 회복함으로써 권력의 오만을 심판한 4·19 영령의 숭고한뜻을 역사 속에 심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민주화운동 1세대로 60세 안팎인 4·19세대는 정치권 내에서 갈수록입지가 줄어들고 있다.특히 이번 총선에서 일부 4·19세대 정치인은 30·40대 후진에게 속속 밀려나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한나라당 이우재(李佑宰)부총재는 30대인 민주당 장성민(張誠珉)전 청와대상황실장에게 배지를 내줬다.한나라당 이세기(李世基)의원은 386세대인 민주당 임종석(任鍾晳)후보에게,한나라당 김중위(金重緯)의원은 50대 초반 민주화투사 출신인 민주당 심재권(沈在權)후보에게 각각 지역구를 내줘 5선 고지도전에 실패했다. 민주국민당 이기택(李基澤)최고위원은 부산시의원 출신으로 40대인 한나라당 권태망(權泰望)후보에게 2만여표 차이로 패배했다. 그나마 민주당 김원길(金元吉)·한나라당 박명환(朴明煥)·신경식(辛卿植)의원 등이 총선에서 살아남아 4·19세대의 정치적 명맥을 이었다. 박찬구 김성수기자 ckpark@
  • 대기근 아프리카 참상

    “열흘을 걸어오는 동안 네살바기 다섯살바기 아이 둘이 차례로 죽었어요. 숨이 끊어지는 것을 그저 넋놓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나마 구호 식량이 분배되고 있는 고데로 오기 위해 고향을 떠난 케이 이브라힘이란 에티오피아 여성의 절규.15년전 인구 100만명이 굶어죽은 에피오피아와 아프리카동북부 나라들에 다시 그 참상이 재연되고 있다. ◆에티오피아 = 84년 대기근과 이번 기근의 원인은 같다.가뭄에 따른 식량 부족과 식수 고갈,질병.난민을 양산하고 구호물품 통로를 차단한 원인이었던에리트레아와의 국경분쟁도 여전하다.98년부터 2년째 대규모 난민을 양산하며 전쟁중이다.당시 대기근을 은폐했던 정부가 이번엔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한 것만 다르다. 그러나 인구가 3,500만명에서 6,000만명으로 급격히 늘고 식량을 조달하기위해 땅을 혹사,식량난이 더 심각해졌다.유일한 구호품 통로 수단인 에리트레아의 아사브와 마사와 항구를 에리트레아 정부가 내줄 수 있다고도 밝혔으나 에티오피아 정부가 거부한 상태.수송 도중 약탈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84년 국제사회의 지원이 늦어진 이유는 에티오피아 정권이 공산정권이라는점 때문.식량 지원이 전쟁중인 군부로 유입되고 공산정권을 공고히 해줄 수있다는 우려 때문에 서방이 늑장 지원해 100만명 아사라는 대참극을 불러왔다. 가장 피해가 심각한 오가덴 지역은 청소년과 건장한 어른들만 살아 있다고할 정도로 아이들의 피해가 크다.“아이들이 하이에나에 먹혔다”는 끔찍한보도가 잇따르고 국제구호요원들은 공동묘지 5개 가운데 3개가 모두 어린이들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다. 반란군들의 구호품 차량 약탈로 국제구호요원들이 활동을 중단하거나 철수하는 일이 빚어지고 있다.구호요원들은 공항이 필요없는 헬리콥터 등 경항공기 지원을 호소하고 있으나 에티오피아 정부는 내전과 자연재해는 별개의 문제라며 내전 종식에 무관심이다. ◆에리트레아 = 가뭄에다 곡물 생산지역인 남부가 에티오피아의 분쟁지역에 포함되면서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했다.게다가 인접국 에티오피아 난민들이유입되고 있다. ◆케냐 = 에티오피아에 이어 두번째로 심각한 나라.북서쪽 투르카나 구역이 극히 심각하다. ◆소말리아 = 90년 이후 계속된 반군과의 내전으로 600만명 이상이 유민으로전락한데 이어 구호물품 약탈이 심각하다.120∼150만명이 아사 위기에 처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70만명이 구호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중 7만5,000명이 아사 직전인 수단을비롯해 브룬디,지부티,탄자니아,우간다 등도 대동소이한 형편이다. 잇단 천재와 내전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인구는 6억6,000만명.90년부터 대외부채가 국내총산상(GDP)의 60% 이하로 떨어져 본적이 없다. 인구 중 2억2,500만명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감염됐다.지하 부존자원을 둘러싼 영토분쟁과 종족분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아프리카의 비극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기고] 국가보훈 외면한 제2건국 없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물질지상주의,맹신적 지연주의,애국애족정신의 결핍,모함과 사이비가 판치는 혼탁한 우리의 현실에서,분단극복의 역사적 과제와 제2건국운동의 추진을 위해 진정한 민족공동체 의식과 민족정기의 함양을 바탕으로 한 국민통합이 절박히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문제해결에 큰 역할을 맡아야 할 국가보훈처가 ‘중장기보훈정책’을 제시한 것은 늦은 감은 있으나 매우 적절한 일로서 크게 환영하는 바이다.분단국이란 특수상황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위상이나 예산·인력 등이 열악한데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성과를 바탕으로의욕적 발전방안을 제시한 것에 대해 격려를 보내고 싶다. 이번 중장기 발전방안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시대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정기 함양과 보훈문화의 확산에 대한 접근이다.민족정기함양사업의 효과적 추진을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를 비롯해 호국 시설물,사적지에 대한 종합적인 실태조사와 활용계획을 수립한 것과 범정부적 추진체계를 마련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시한 것은 매우 의의있고 현실성있는 대목이다. 또 독립유공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포상하고 국가유공자 범위를 재조정해독립운동 관련 건국 포상자와 대통령 표창자를 새로 포함한 것과 전·공상군경의 부상 인정수준을 국제기준으로 상향조정하는 등 해묵은 민원을 적극수용한 것도 매우 적절한 것으로 평가된다.아울러 참전군인들에 대한 생계보조및 의료지원,안장지원 등 체계적 지원시스템 마련,국가유공자의 노령화에대비한 의료및 복지시설의 확충계획,제대군인의 사회복귀 지원시책 강화계획등은 비록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긴 하지만 단계적으로 꾸준히 개선하려는 의욕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발전방안에서 미흡한 점과 누락된 점이 있어 이를 지적하고,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국가유공자 및 유족의 예우에서 선진국 수준의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청사진의 제시가 미흡하다.이를테면 주택,건강,교육,취업,휴양,생활안정,그리고 품위유지 등 기본적인 생활영역의 전반에 걸쳐 선진국 수준 또는 그 이상의 수준을 구체적으로예시,이에 필요한 예산액을 제시해야 한다.그리고 그실현방안들이 단계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둘째,중국·러시아 등 해외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 대한 적극적인 본국이주지원 및 생활지원과 사적지 보존관리 등 해외보훈사업에 대한 대책이 부족하다.이는 민족공동체의식 확산을 통한 통일기반 조성이라는 차원에서도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셋째,현재 각 부처에 산재한 독립기념관,전쟁기념관,국립묘지 등 민족정기관련 시설들이 민족정기 함양사업의 활발한 추진을 위해 보훈처로 통합할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미흡하다.결론적으로 자칫 민족애와 정체성을 망각하기 쉬운 개방화시대에 국가유공자들의 애국애족정신을 확산하여제2건국을 성공적으로 일구어내기 위해서는 지도층의 결단과 모든 국민의 의식전환이 절대로 필요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남현욱 세종대교수·행정학
  • 고성 또 대형 산불

    강원도 고성군에서 사상 최악의 산불이 난지 4년 만에 또다시 대형 산불이7일 발생했다.고성군 북쪽 비무장지대에서 난 산불도 남쪽으로 번지고 있다. 강릉시 사천면에서는 산불로 5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날 오전 1시45분쯤 고성군 토성면 학야리 육군 모부대 부근 운봉산에서원인을 알 수 없는 산불이 나 초속 20∼25m의 강풍을 타고 인근 운봉·백촌리와 죽왕면 야촌·삼포리 일대로 급속히 번졌다. 이 불로 오후 4시 현재 산림 1,000여㏊와 가옥 등 56채가 불에 타 110명의이재민이 발생하고 한우 42마리가 폐사하거나 화상을 입었다.토성·죽왕면 10개 마을에서 950여가구 3,000여명이 대피했다.동광농공고 등 4개 학교가 임시휴교해 학생 1,100여명이 등교하지 못했다. 불이 나자 고성군은 공무원·주민·군인 등 4,000여명과 산림청·군 헬기 14대를 동원,진화에 나섰으나 나무들이 말라 있는 데다 바람마저 강해 불길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함께 이날 새벽 4시20분쯤 고성군 현내면 송현리 모부대 관측소 북쪽4㎞지점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나 2,400㏊를 태운 뒤 남진하며 명호리 통일전망대를 1㎞ 지나 남쪽으로 번지고 있다. 또 이날 오전 8시50분쯤 강릉시 사천면 석교리 공원묘지 앞 야산에서도 산불이 발생,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석교1리 최은자(48·여)씨가 불에 타 숨지고 같은 마을 신동일(38)씨 등 4명이 화상을 입었다. 고성 조한종기자 bell21@
  • 국가유공자 등록 간편해진다

    앞으로 국가 유공자들은 유공자 등록증 발급 등 상훈기록을 확인받기 위해정부 중앙청사를 찾지 않아도 된다. 행정자치부는 3일 “국가유공자 등록 및 국립묘지 안장신청 등을 위한 상훈 기록확인을 받기 위해 행자부를 방문하는 민원인들이 한해 평균 1,000명이나 된다”면서 “이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상훈 전산정보를 국가보훈처전산망에 연결시키기로 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는 민원인이 전국 16개 보훈지청에다 국가유공자 등록신청만 하면 상훈수여 증명사실 조회 등 나머지는 해당 보훈지청에서 행자부상훈정보망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현재는 민원인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유공자 신청을 보훈처에한 뒤,이에 필요한 상훈수여 증명원을 행자부에 신청,이를 발급받아 다시 보훈처에 제출하는 등 2곳의 중앙부처를 왔다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박현갑기자
  • 피의 능선등 격전지 6곳 6·25전사자 유해 찾는다

    6·25전쟁중 전사한 국군 유해발굴작업이 오는 3일부터 실시된다. 31일 육군에 따르면 6·25 격전지 29곳 가운데 올해 1차로 경북 다부동·안강지역과 경기도 김포 개화산을 비롯,강원도의 화천 마현리,양구 백석산,양구 피의능선 등 6개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진다. 발굴된 유해는 고고인류학자,유전공학자,치과의 등 20여명의 국내 전문가와청주 중원문화연구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을 통해 군번표,신발,탄약 등유류품과 DNA 유전자 감식으로 신원확인작업을 거치게 된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DNA 유전자 감식을 위한 시료채취가 불가능한 유해는 국립묘지 납골당에 합동 안장할 계획이다. 북한군과 유엔군으로 판명된 유해는 북한을 비롯해 해당국가에 인도하되,인수를 거부하면 경기도 파주군의 ‘북한군·중공군 묘지’와 부산 ‘유엔군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다. 육군은 오는 2001년과 2002년 9개 지역,2003년 5개 지역 등에서 유해발굴작업을 계속하며,이 지역에 최소한 10만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 부음/ 조만식선생 미망인 전선애여사

    독립운동가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미망인인 전선애 여사가 29일오전 7시 45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96세. 고인은 1904년 개성에서 태어 나 개성 호수돈여고와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교사생활을 하다가 37년 고당 선생과 결혼했다.해방 후 고당이 소련 군정에 의해 연금되자 선생의 머리카락을 간직하고 세 자녀와 함께 월남했으며일신감리교회 장로와 선인중·고 교장 등을 역임했다.91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조만식 선생 추모·안장식때 선생의 유해 대신 40여년간 간직해 온 머리카락을 묻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선영(62) 연흥(60·조선일보 제작국장 겸 이사) 연수씨(58) 등2남1녀가 있다.발인 31일 오전 9시 (02)363-9699
  • 안중근의사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의 안중근과 신채호. 안중근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중국 요령성 뤼순시 향양가 139호 원호방에자리한 뤼순감옥은 90년전 동양천지를 진동한 의사(義士)의 죽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이날따라 많은 중국인 참관자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봄기운 완연한 따사한 햇살아래 사위가 붉은 벽돌 담벽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뤼순감옥은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중국애국자들의 수난의 장소지만지금은 역사관광지가 되고있다. 워낙 큰사건 큰인물이라 안의사가 순국한 날까지 갇혀있던 ‘특설감방’은의사가 5개월동안 머물면서 사용했던 지필묵과 몇가지 유품이 전시되고 벽에는 휘호 두점이 걸려있었다.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박보희)간부들이 안의사의 흔적이 깃든 감방에서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서울에서 만들어온안내판 현판식을 거행했다. 뤼순감옥은 중국정부가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이다. 50여만명의 중국 항일정치범과 사상범그리고 일부 한국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옥살이를 하고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일제는 ‘국사범’또는 ‘회유’의 차원에서 일반 재소자의 감방이 아닌 간수사무실 바로 옆에 특별감방을 만들어 안의사를 수감했다. 이것을 근년에복원하여 요즘 ‘특별관리’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안의사의 인격과 거사를높이 평가하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안의사감방’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선생도 이곳에서 옥사 뤼순감옥은 뤼순시의 역사와 함께 제국주의 침탈의 고난의 사력(史歷)을 간직한 곳이다. 원래 러시아제국이 1902년 동북3성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감하고자 신식감옥을 신축한 것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확장공사를 하여 1907년에는 감방 253칸, 중벌수형자용 독감방4칸 등 2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감옥을 만든것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뤼순감옥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안의사의 순국과 함께 신채호선생이 이곳에서 8년 옥고끝에 옥사당한 사유때문이다. 단재는 안의사가 순국한지 18년이 지난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련(大連)법정에서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으로 압송되어 복역한 것이다. 단재는 죄수번호 411번으로 붉은 수의를 입고한많은 옥살이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른바 위채(爲채)사건으로 그와함께 수감된 임병문은 26세로 재판과정에 고문으로 숨지고 이지영 ·이종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8년만에 단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형무소측의 병보석 출감회유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하다가 1936년 2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옥사한 것이다. 유해는 곡절끝에 충북 청원군 향리에 모셔졌다. 애국자들의 혼령 깃든 곳 뤼순감옥 수인묘지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의사의 유해는 순국 90주년이 지난지금까지도 찾을 길이 막막하다. 1986년 7월 북한에서 유해발굴단이 수인묘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이 8년동안 옥고를 치룬 감방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쫓겨가면서 모든 자료를 불사른 때문이다. 다행이 진열관의 낡은 서류철에서 찾은 뤼순감옥에 입감할 때 찍은 퇴색한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존재증명’이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뤼순의 언덕받이에 자리한 감방에서 남다른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안의사와 단재 선생 그리고 무명지사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역에서 몸을 불살랐을까. 안의사의 유해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현지에서 새삼 절감했다. 중국측의 태도도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더 늦기전에 남북이 협력하여 중국정부를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재 선생이 옥고를 치룬 감방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뤼순에서. kimsu@. *인근 거주 중국인 증언.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동쪽방향으로 500∼600m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전문가들이 발견한 지도에 나온 뤼순감옥 동남쪽 300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200~300m 더 가야 합니다” . 중국인 탄충쿠이(潭忠魁·79)씨는 “안의사께선 순국당시여순 고등법원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800m 지점에 묻히셨다”고 증언했다. 안의사의 순국추모식이 열렸던 지난 26일.기자는 뤼순감옥 부근에 살고있는탄 노인을 만나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일제(日帝)때부터 뤼순감옥 주변 마을인 위엔바오지에(元寶街) 56호에 살아온 이곳 토박이.그 역시안의사의 순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감옥 관계자,당시 지역 노인,일본인관계자들로부터 안 의사의 묘지 위치를 여러차례 확인해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고 밝혔다. □4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감옥과 일반 묘지에 대한 파괴행위는없었다.다만 일본인 납골당과 군인 묘지는 폭파시키고 떠났다.한국인과 중국인 수감자들의 유해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안의사의 유해도 마찬가지다. □이후 훼손됐을 가능성은. 일제 패망직후 소련군이 진주해 점령했지만 훼손 행위는 없었다.1970년이후이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됐지만 유해가 묻혀있는 지역은 포함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다렌(大連)의 일본학교를 졸업한뒤 지난 1942년부터 조선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을 존경해 왔다.일본패망전에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한 다른 정보는. 지난 85년 판우충(潘茂忠)뤼순감옥 전시관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를 표시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당시 미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손자들이 감옥전시관에 전달해온 자료였다.판 연구원의 일본어 선생인 나는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안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지난 86년 북한의 당정(黨政)대표단이 방문,안의사의 유해의 위치를 확인한적이 있다. 판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 표시도를 근거로 북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유해발굴에 북측도 높은 관심을 밝혔었다. 뤼순 김삼웅 주필@kdaily.com. *뤼순감옥은 어떤곳. 한민족의 비통과 투쟁의 숨결이 담긴 뤼순(旅順)감옥.50여년의 풍상속에서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뤼순시 외곽 위안바오방(元寶房)지역에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민족의 스승인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총 면적 22만6,000㎡.감옥주위에는 높이 4m ,둘레 725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회색 벽돌건물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제가건축했다.감방수는 253칸.한 칸이 가로 5.6,폭 2.7m였다.일제말기 감독원만120명 가량됐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실,햇볕이 통하지 않는 암실 등도 발견됐다.교수형을 집행하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여순 형무소’라고 불렸다. 제정러시아가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남하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말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98년 3월 차르 황제의 러시아제국이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조차한뒤 이곳에 관동주(關東州)총독부를 설치했다.그뒤 1902년 식민지배를 위한감옥을 건설한다. 러·일전쟁이후 이곳을 점령한 일제는 러시아가 지어놓은 85칸의 감옥을 257칸으로 늘리고 ‘관동도감부 감옥서’(關東都督府 監獄署)라고 불렀다.그뒤1920년에는 관동청 감옥(關東廳 監獄)으로,1926년에는 ‘關東廳 형무소’ 로,1934년 ‘관동 형무소’로 개칭한다.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형무소가 커지고 수형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 안중근의사 순국 90주기/ ‘만주일일신문’서 본 최후의 날

    최근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 문제가 다시 거론되면서 안 의사의 ‘최후’에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안의사연구가인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이지난 76년 일본에서 입수,공개한 ‘만주일일신문’(1910.3.27)의 ‘사형집행기’는 간접취재한 것이긴 하나 안 의사 형집행 당일의 기록이 별무한 상황에서 유익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다음은 이 신문의 보도를 통해 안의사 ‘최후의 날’을 재구성한 것이다. 191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처단한 안 의사는 체포된 후 여섯 차례의 재판 끝에 이듬해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사형선고를 받았다.안 의사는 “비굴하게 살아남는 것 보다는 깨끗하게 죽음을 택하겠다”며 항소를 포기했다.형집행은 3월 26일,의거일로부터 152일째되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뤼순감옥에는 봄비가 내렸다.형 집행시각은 오전 10시,장소는 뤼순감옥내 형장이었다.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안 의사는 고향에서 보내온 옷으로 갈아입고 간수 4명의 호위를 받으며 형장으로 향했다.이날 안 의사의 복장은 조선명주로 만든 흰 웃저고리,검정색 비단바지에 흰 두루마기 차림이었다.흑백으로 대비된 옷차림은 몇 분 후 명(明)에서 암(暗)으로 바뀌는 형인(刑人)을 상징하는듯 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잠시후 검사,전옥(典獄,교도소장),통역,서기 등이 교수대 전면에 있는 검시실에 도착하자 교수대 옆 준비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 의사가 끌려나왔다. 교도소장이 “본년 2월 14일 재판언도 확정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한다”고하자 통역이 이를 통역하였고 안 의사는 이에 대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도소장이 다시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안 의사는 “유언할 말은 없으나단지 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내가 죽은 후 한일양국이 일치 단결,동양평화를 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때 간수는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사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다시 흰 베를 둘렀다.안 의사는 수분간 묵도를 올린 후 간수의 부축으로 교수대에 올랐다.곧이어 형이 집행됐고 10시 15분경 안 의사는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형집행에는 불과 11분이 걸렸다. 사형수의 유해는 보통 나무통에 넣는 것이 상례인데 안 의사 용으로 별도의소나무 침관(寢棺)이 제작됐다. 시신을 담은 관 위에 백의(白衣)를 두른 뒤관을 감옥안 교회당으로 옮기고는 안 의사가 최후의 순간까지 가슴에 품고있던 그리스도상을 관 양쪽에 걸어놓았다.교도소측은 우덕순 등 거사 동지 3명에게 마지막 고별기회를 주었는데 이들은 천주교신자가 아니어서 한국식으로 재배하고 모두 흐느꼈다.안 의사의 유해는 이날 오후 빗속에서 감옥내 공동묘지로 옮겨져 매장됐다. 정운현기자 jwh59@. *안중근 의사 연구현황. 국내 학계의 안중근 의사 연구는 아직 불모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박사학위 논문 한 편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지난 93년 한국 외국어대에서 ‘안중근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일고(一考)-그의 군주관과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라는 석사학위 논문 한 편이 나왔을 뿐이다.지난해 인하대 윤병석 교수가 펴낸 ‘안중근전기전집’이나 출판인 이기웅씨(열화당 사장)의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등은 모두 연구서라기 보다는 자료집성격이 짙다.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이 거의 유일하게 수 십년째 안의사 관련 자료수집과 연구를 해오고 있을 뿐이다. 현재 국내 역사학계에서 안 의사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는 약 20여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안 의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없고 자기 분야 가운데서 안 의사 부분을 다루고 있는 정도다. 반면 해외에서는 연구자는 물론 연구활동도 왕성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 96년 일본인 학자 20여명이 중심이 돼 ‘안중근연구회’를공식 발족했다.회장인 가노 다쿠미(鹿野琢見)변호사는 안 의사가 뤼순감옥수감시절 간수 헌병을 지낸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의 후손이다. 중국 조선족동포들의 연구열기도 뜨겁다. 지난 92년 하얼빈시에서는 ‘중국 흑룡강성 안중근연구회’(회장 김성배)가 결성됐다.이 연구회는 조선족 학자·지식인 9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한편 북한의 안 의사에 대한 연구실태는 구체적 내용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북한당국은 80년대부터 유해발굴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안중근의사 순국 90주기/ 安의사 의거와 ‘대한매일신보’

    구한말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다음날부터 관련기사를 대서특필,민족지로서의 면모를 한껏 과시했다.특히 안 의사의 사형언도일인 1910년 2월 14일을 전후해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공판내용을 보도했다.또 안 의사의 옥중소식이나 가족근황 등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보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안 의사 의거 다음날인 10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한글판)는 하얼빈발 26일자 전보를 인용,이토가 하얼빈역에서 ‘한국사람’에게 총을 맞은 사실을 보도하였다.같은 날짜 ‘잡보’에서는 ‘조선일일신문’의 호외보도를 인용,이등박문이 26일 아침 암살당하였다고 보도하였다.11월 21일자에서는 일본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보도를 인용,안 의사가 예심에서 밝힌 이토를처단한 이유 15항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1.명성황후 살해 2.을사조약 체결,… 5.군대해산 등이다.이 해 12월 5일부터는 뤼순감옥에 수감중이던 안 의사의 동정을 변호인 등 면회자들의 입을 통해 ‘뤼순통신’이란 제목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1월 29일자 ‘시모시자(是母是子)’라는 기사에서는 안 의사의 어머니 조(趙)마리아 여사가 “중근은 러일전쟁 이후로 줄곧 위국헌신 사상을 가지고있었으며 국채보상금 모집때도 아내의 패물을 기꺼이 내놓았다”며 아들을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두고 조 여사의 인간됨이 한국에서 드문 인물이라고보도하였다. 한편 안의사에 대한 재판이 본격 시작된 이듬해 2월부터는 공판내용을 연일지면의 절반 가량을 할애해 보도하기 시작했다.안 의사에게 ‘살인죄’로 사형이 언도된 14일을 전후해 12일자부터 대한매일신보는 10회에 걸쳐 이를 보도하였다.15일자에서는 안 의사가 최후변론에서 “나는 일개인의 자격이 아니라 의군(義軍)의 참모중장으로 이 거사를 한 즉 의전(義戰)의 포로이니 보통 형사피고인으로 처리함은 불가하다”고 진술한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순국 하루전인 3월 25일자에는 안의사가 변호인을 통해 한국동포에게 보내는 유언을 실었다. “한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그 목적을달성치 못하고 여기서 죽노니 2천만 형제자매들은 분발하여 학문을 면려하고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나는 아무런유감이 없다” 이밖에도 대한매일신보는 안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편지 6통을 남긴 사실도 보도하였다.이 편지들은 안 의사가 사형언도 당일 어머니와 부인 앞으로쓴 2통과,홍(洪)신부,아우 명근(明根),민(閔)주교,숙부 등 4명 앞으로 쓴 4통 등 모두 6통이다.천주교 신자인 안 의사의 편지 첫머리는 모두 ‘야소(耶蘇,예수)를 찬미합니다’,‘아멘’ 등으로 시작하고 있다.특히 부인 앞으로보낸 편지에서 안 의사는 “이슬과도 같은 허망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배필이 되고 다시 주(主)의 명(命)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의 은혜로 천당영복의 땅에서 영원(靈源)에 모이려 하오…장남 분도는신부가 되게 하려고 마음에 결정하였으니 잊지말고 천주께 바쳐 신부가 되게하시오”라고 부탁하였다. 한편 대한매일신보는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당일 이를호외로 보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실물은 전하지 않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安의사 유해발굴 70년대부터 추진. 우리 정부는 지난 77년부터 안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을 추진해 왔으나 아직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중국과 수교 이전에는 현장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데다 그 이후도 중국이 북한을 의식,적극적인 협조를 보이지 않고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 유해발굴작업은 80년대 중반부터 정부차원에서 본격 추진됐다.86년12월 정부는 외무부(현 외교통상부)·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중국 당국에 협조요청을 한 바 있으며,88년에는 중국을 방문한 학자들을 통해 조사를 의뢰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89년 안의사 의거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참가차 당시보훈처 관계관이 뤼순감옥을 처음 답사했으나 묘소위치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2년 뒤인 91년 중국지역 독립운동관련 사적지 답사차 방중한 학자 및 관계공무원 일행은 뤼순감옥 뒷편의 공동묘지가 모두 발굴된 후 일반건물이 들어섰으며,안 의사 묘소의 이장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특히 이들은 북한측에서도 수 차례 안 의사 묘소를 방문,조사를 벌였으나 묘소위치 확인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92년 안 의사 유가족과 안의사숭모회 관계자 등이 현지 방문조사를 벌였으나 특별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93년 8월 한중외무차관 회의시 우리정부는다시 협조요청을 하였으나 중국측은 묘소확인의 어려움과 안 의사가 북한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명했다. 이 해 11월 정부는 광복50주년행사의 일환으로 범국민적 차원에서 일본내자료수집과 관련자 면담 등 다각적인 노력을 벌였으나 이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94년 방한한 중국 문화부 장관은 조사결과 근거자료가 없어 묘소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우리정부에 공식 전달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은 지난 7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의 특별지시와 중국당국의 특별협조를 얻어 뤼순감옥 기록 등을 검토하고 감옥 주변을 조사했으나 유해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의사 90주기 행사 참석을 위해 최근 방한한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손자인 안웅호(安雄浩·67·재미)씨는 방한기간중 안 의사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될 경우 안 의사 유해 진위확인에 필요한 DNA검사 등을 위한 혈액·머리카락 등의 채취에 참여할 계획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최근 도쿄에서 공개된 자료를 입수,검토하여 유익한 자료로 판단될 경우 정부차원에서도 묘소발굴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특별제언/ 安의사 유해 찾아 판문점에 모시자. 그날 중국 뤼순(旅順)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찌 하늘인들천하 대장부, 만대 의사가 가는 길에 무심하겠는가. 안중근의사는 모친이 새로 지어 보낸 한복(상의는 백무지, 하의는 흑색)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 형장으로 향했다.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달리 유언할 아무것도 없지만 원래 나의 거사는 오로지 동양평화를 위한성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바라건데 오늘 임검한 일본관헌도 행여 나의뜻을 양지한다면 피아의 구별없이 합심협력하여 동양평화를 기도하기를 절망(切望)할 뿐이다. 덧붙여 내 요망은 죽음을 앞두고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싶다”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마지막 소원도 거부하고 형을 집행했다. 교수형이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15분, 당시 안의사는 32세,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5개월 되는 날로서 생을 접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집행전날 면회온 두 동생이 슬퍼하자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꼭 죽는 법, 죽음을두려워할 내가 아니다. 삶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면하는 것, 조금도 어려운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동생들을 달랬다. 사마천은 일찍이 사람은 한번 죽지만 그 의의는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고기러기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고 했다. 정의를 위한 죽음은 태산보다 중하지만 불의한 장수는 기러기털보다 가벼운 것, 안의사의 속령 32세를 어찌 짧다고 하겠는가. 안의사의 순국을 청국의 원세개(袁世凱)는 이렇게 찬양했다.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평생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구나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아니고 몸은 한국출신이지만 이름 만방떨치니 백년못사는 인생 죽어 천년을 가리. 순국 5분후 안의사의 관은 백포(白布)에 쌓여 뤼순감옥 성당에 안치되어 우덕순·정도광·유동하 3동지에게만 마지막 예배를 시키고 오후1시 감옥묘지에 매장되었다. 안의사는 동생들에게 “유골은 하르빈공원묘지에 묻었다가국권회복 후 고국으로 반장하라”고 일렀다. 기록마다 ‘고국’또는 ‘고향’으로 표기가 다르다. 백암 박은식은 거사 후에 쓴 ‘안중근전’에서 ‘국권회복이 반장고토(國權回復而返葬故土)’라 하여 ‘고토’라고 표시했다. 안의사의 고향이 황해도신천인 관계로 북한이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어 유언의 내용은 중요한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로’모시느냐가 아니라 유해를 찾는 작업이 급선무다. 유해를 찾게되면 판문점이나 휴전선에 남북함께 안의사기념관을 짓고 그곳에 봉안했다가 통일후 고향에 안장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안의사의 유해발굴문제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때마침 안의사 유골발굴위원회 도교(東京)사무국에서유해 매장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어유해발굴 가능성을 높이고있다. 안의사 순국 90주년, ‘국권회복’55년만에 이제야 의사의 유해발굴에 나선것은 남북한 7천만 동포의 부끄러운 일이지만, 새천년 벽두에 남북이 함께참여하여 유해발굴이 성사된 다면 민족적 경사가 될것이다. 안의사는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형집행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서론 부분만 집필했지만 그의 사상과 활동의 연관성을 어느정도 보여준다. 그는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自存)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나라에 대한 야욕을 버린 뒤 서로 독립한 3국이 동맹하여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 개화의 역(域)으로 진보하여 구주와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90년전 안의사의 주장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동양 3국은 ‘구주와 세계각국’과 더불어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할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통일되어 한·중·일의 ‘독립한 3국’이 정립하여 아시아 평화와공존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안의사 순국 90주년의 의미이며 그의 유지(遺志)이기도 하겠다. 김삼웅 주필 kimsu@
  • 前 醫史學회장 奇昌德박사 별세

    소암(素岩) 기창덕(奇昌德·76) 박사가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지난 24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기 박사는 48년 서울대 치과대를 졸업한 뒤대한의사학회(大韓醫史學會) 회장,일본 치과의사학회 명예회원,가톨릭대 치과 과장 등을 지냈다.기 박사는 의학사(醫學史) 연구에 한평생을 바쳤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경숙(丁敬淑·71) 여사와 아들 윤철(允鐵·기비뇨기과원장),선호(善鎬·미국 국립보건연구원 연구원)씨가 있다.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장지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남서울공원묘지다.발인은 22일 오전 8시,연락처는 (02)3410-6912. 전영우기자
  • [사설] 火葬은 늘고 있는데

    장례문화가 매장(埋葬) 중심의 오랜 관습에서 점차 벗어나 화장(火葬)으로바뀌고 있다.지난 98년 작고한 최종현(崔鍾賢)SK그룹 회장의 화장 유언을 계기로 사회 지도층과 종교·사회단체들의 참여가 늘고 화장에 대한 일반적인인식도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결과이다.전국의 묘지면적이 서울 여의도의 100배에 이르는 데다 해마다 여의도보다 큰 국토가 묘지로 잠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화장의 증가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서울의 경우 지난 98년 이전까지 30% 수준에 불과했던 화장률이 지난해에는43%로 늘어난 데 이어 올 들어서는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화장의 증가 추세는 서울뿐 아니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니 더욱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최근의 한 여론조사 결과 화장을 원하는 사람이 6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처럼 확산되고 있는 화장중심의 장례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 좀더 많은 지원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뜩이나 좁은 국토가 더 이상 묘지로 잠식되는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안된다.매장을 최대한 억제하고 화장을 늘리는 것만이 해결책이다.화장은 국토의효율적인 관리 차원에서뿐 아니라 장례비용을 절약하고 후손들의 묘지 관리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효과도 있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납골당은 묘지보다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조상을 번듯한 묘지에 모셔야 후손의 도리를 다한다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앞으로는 매장을 한다 하더라도 개정된 묘지법에따라 60년간의 매장 허용기간이 지나면 어차피 납골당에 다시 옮겨야 한다. 화장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데 이를 수용할 수 있는시설이 부족해 문제다. 화장장이 턱없이 모자라 늘어나는 화장 수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수도권의 경우 4곳의 화장장이 있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나마 시설이 낡아 이용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증설이 시급하지만 혐오 시설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부지조차 선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화장장과 납골당 등 시설이 뒤따르지 못하는 한 장례문화의 개선은어렵다. 요란한 캠페인이나 지원도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앞장서 필요한 시설의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주민들이나 이용자들이 기꺼이받아들일 정도로 장례시설을 현대화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장례시설에 대한주민들의 인식을 바꾸고 설득하는 노력도 다해야 할 것이다.화장문화 정착은더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 올들어 火葬率 크게 늘었다

    서울시민의 화장률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일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 따르면 지난 1∼2월중 서울시의 하루 평균 사망자는 103명으로 이 가운데 56명이 화장,화장률 54%를 기록했다.이는 지난해같은 기간의 사망률보다 11%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또한 지난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화장예약제도 빠르게 정착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 집계에 따르면 화장예약제가 시행된 이후 1주일간의 화장건수는 모두 482건이었으며 이중 예약화장은 446건으로 93%의 예약률을 보였다. 관리공단 관계자는 “서울시민의 화장률이 이처럼 높아지고 있는 것은 지난 98년 이후 시민단체 등이 펼치고 있는 화장장려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사회전반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서울시는 화장수요 증가에 따라 벽제 시립화장장의 화장로 7기 증설을 연내에 마무리하고 파주시 용미리 1묘지 ‘왕릉식 추모의 집’과 2묘지 ‘제2추모의 집’ 등 납골시설 추가건설도 조기에 끝내기로 했다. 문창동기자 moon@
  • [여성 선언] 박종철 열사를 생각함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묘지에 가면 입구 오른편 언덕빼기에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그곳은 원래 일반 공원 묘지였으나 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쓰러져간 넋들이 하나 둘씩 묻히면서 민주화의 성지가 되어 참배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중의 하나는 스물두살 꽃다운 나이에 물고문,전기고문으로 처절하게 죽어간박종철 열사의 묘역이다.그만큼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커다란 모습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인물이있다. 1987년,한 젊은이의 고문에 의한 죽음과 그 사실을 단순 사망으로 은폐하려던 사건은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그의 넋은 오래도록 갚아야 할 빚으로남아 있었다. 못다한 그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고도 감히 생각했다. 어쩌면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나는 그렇게 학생운동과투옥의 길을 걸었고,쉽지 않은 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그리고 골목마다나붙었던 수배 전단들,그중에는 박종철 열사가 끝까지 행방을 말하지 않았기에 고문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야 했다는 바로 그 선배의 얼굴도 있었다.사진속의 얼굴과 이름 석 자를 보며 자신 때문에 후배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그사람의 수배의 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있다. 또 다른 기억 하나,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어떤사람이 내려오면 수사관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부동자세를 취하곤 했다.그는항상 험악한 표정으로 나에게 온갖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고,그가 한번 다녀가고 나면 지하 조사실은 팽팽한 긴장이 다시금 감돌았다.당시 나는 그가 누구인지,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이후 그는 매일처럼 TV 화면에 나타났다.그는 안기부의 대공수사국장이었고 지금은 국회의원이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예전 안기부의 부훈처럼 음지에서 일하던 그는 국회의원의 신분이 되어 양지로 나왔다.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벌떡일어나는 악몽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비단 나만이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또 다른 의미로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전환점을만든 계기가 된 인물이다.한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까지도. 참으로 이상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인연이라고 말하기에도 불쾌하고 역겹다.한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어냈던 젊은 넋을둘러싸고 그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그 선배라는 사람과감옥에서 고문 은폐 사실을 알고 바깥 세상으로 그 소식을 전했던 사람, 그들을 기소하고 법정에 세워 징역을 살게 했던 사람,스물두살 청년을 고문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 당사자 중의 한 명인 사람,당시의 권력을 움켜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자들이 모두 한 정당에 모여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함께 손을 잡고 모두 한 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불행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가 처절하게 죽음을 맞은 젊은 넋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다시 한번 그를 죽이는 장면이 공개적으로 펼쳐지고 있다.정치란 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을 만큼의 신비로운 화해의 힘인가,아니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잔인한 탐욕인가. 문득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어쩌면 나 자신으로 인해서도 어떤 다른 이의인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가장 두렵다.한때는 내가 존경하고 그들의 삶을 따라 배우고자 했던 사람들,그들을 이제는 내가 손가락질하고 있다.아직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차가운 땅 속에 누워 있는 박종철 열사는 그의 동지들과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이 한편이 되어 손을 맞잡고 있는 광경을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임수경 美코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 [대한광장] 국익 우선과 ‘아름다운 악역’

    김대중 대통령은 얼마전 “차기 대통령후보는 자유경선으로 하겠다.국민의지지를 받는 사람을 밀어주겠다”고 밝혔다.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이말이 오히려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군사독재시절 전직 대통령들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당해본 현직 대통령으로서 간절한 여망일 것이다.당내 민주화를 확실하게 실천해보이겠다는 의지이다.가능하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거대한경제정책 시야,민족운명에 대한 깊은 애정,국민을 하늘같이 받들 사람 등 구체적 방향제시까지 해놓았다.이것은 김대통령의 평소 정치신념이기도 하다. ‘자유와 자율’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사회이념은 없다.인간은 어머니로부터 탯줄이 잘리면서 운명적으로 자유로운 몸으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그리고 어머니의 품에서 성장하면서 인격적인 개체가 조성되는 것이다.어떤 종교나 이념도 이 자유를 부자유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퇴계 선생은 ‘인간은 천지창조의 동참자이며 동시에 인간은 능력을 가졌기에 신뢰한다’며 능동적 사유체계를 주창했다.자유와 자율성을 강조한 이 사상은 주자의 ‘자연적 도덕법칙’보다도,칸트나 괴테의 ‘도덕적 의지의 발견’보다도 한 단계 높은 인간의 능동적 가치관을 읽어준 것이다.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율성은 정치문제 뿐 아니라,사회 전반의 모든 것을 편하게 해준다.부자유해질수록 불편해진다.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차기대통령을 자유경선으로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다.자유민주주의의 생명인 이러한 주제는 차기대통령 뿐 아니라,국회의원들에게 더 필요한 정치덕목이다. 그러나 총선을 코앞에 둔 지금의 정치판은 어떤가? 신당이 창당되면서 정치권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탈락된 낙천자들 중심으로 또 하나의 ‘양로원당(?)’이 급조되면서 전직대통령들까지 가세하고 있다.독재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망월동 묘지까지 만든 그들,수많은 IMF 노숙자를 만들고 자칫오늘의 인도네시아와 같은 ‘양아치경제’ 수렁으로 빠지게 할 뻔한 그들이또다시 길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 그늘 밑에서 또다시 금배지를 달아보겠다고 몰려다니는 전·현직 의원들이 있는가 하면 평생 동지를 배신하고 탈당을 콜라마시듯 하는 ‘콜라의원’도 있다.그들은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아는 것’ 같지만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지금의 유권자중 30% 이상은 386세대 이후이다.80년대 전후 민주화세대들인이들은 지금 사회의 중견층으로 자리잡고 있으며,더욱 투명한 의식의 486세대가 그 뒤에 포진하고 있다.과연 이들을 선심형 관광버스에 오르게 할수 있는가.각계 각층의 ‘시민총선연대’ 등도 이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이들을법률적으로 재단하려고 하지만 ‘민주시민’으로서 그 뿌리는 감옥행이라고해서 절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독재시절에 경험한 바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전력에 문제가 있는 국회의원 후보는 공개해야 한다.미국 같이 유권자들이 알 것은 알고 검증돼야 한다.막강한 비자금이 있고,정치적으로 배경이 강력하다고 해서 ‘무차별 돈봉투 분배’ 의식으로 국민을 농단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아름다운 악역’을 필요로 한다.검찰이나 경찰,국정원 등의총수는 엄격해야 한다.정치권을 떠나 국가와 민족을 우선해야 한다.이들이 정치권의 냄새에 따라 흔들린다면 국가기강이 어떻게 확립될 수있겠는가. 미 CIA 등은 국익에 우선하여 때로는 해외에까지 나가 잔인한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해 지탄을 받아 CIA국장이 퇴출당하기도 한다.하지만 그들은 당당하다.국가를 위해 악역을 맡았기 때문이다.미국 뿐이랴.세계 각국의 주요 권력기관이나 정보기관들은 ‘아름다운 악역’을 맡는다. 그러나 한국의 주요 권력기관의 장들은 어떤가.국익보다는 오히려 사리사욕에 한눈을 팔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다.국가의 안보와 국민 전체의 안녕을위한 엄중한 역할보다는 나중에 국회 출마를 염두에 두고 지역구 표밭관리를 위해 더 열성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유비에겐 제갈량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관운장과 장비와 같은 악역도 있었다.우리도 관운장과 같은 악역의 애국자가 필요하다.그렇다고 과거정권과 같은 어두운 악역이어서는 안된다. 신상성 용인대교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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