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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산림 남산 면적 21배 줄어

    1년 동안 서울 남산 면적의 21배에 달하는 산림이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산림청이 23일 발표한 ‘산림자원조사’ 결과에 따르면지난해 산림면적은 641만 6000ha로 1년 전인 2000년 642만 2000ha보다 6208ha가 줄어들었다.이는 공원면적이 300ha에 조금 못 미치는 남산에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다. 줄어든 산림은 도로 1293ha,대지 1033ha,공장 806ha,묘지 등으로 3076ha가 전용됐다.반면 지난해 새로 조성된 산림은 189ha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 나무의 총량은 4억 2800만㎥로 1년 동안 8t트럭 250만대 분량인 2000만㎥가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산림청 관계자는 “나무의 총량은 나무가 자라면서 10년전에 비해 66%,6·25 직후보다는 약 7배 가량 증가했다.”고 말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
  • “북한산 민주공원 반대”

    장정식 강북구청장은 22일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산 국립공원에 민주공원(묘역)이 들어서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장 구청장은 “묘역 조성을 위해 국립공원부지를 해제하는 것은 국민의 환경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으로 정부에서 결정한 4·19국립묘지 인근지역은 민주공원의 적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정부의 민주공원 부지 선정 작업이 단 한차례의 주민공청회나 사업설명회도 거치지 않은 채 비민주적으로 진행된 밀실 행정”이라며 부지 선정 철회를 요구했다. 최용규기자
  • 광주 시티투어버스 ‘부르릉’

    광주권 문화와 관광을 체험할 수 있는 ‘시티투어 버스’가 22일부터 운행에 들어갔다.광주시에 따르면 월드컵과비엔날레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남도의 멋과맛을 즐길 수 있는 ‘시티투어 프로그램’을 다음달 말까지 운영키로 했다. 영어·불어·중국어 등 6개 국어 동시통역 시스템을 갖춘 45인승 대형버스가 각 코스를 돌며 버스에 배치된 문화해설 도우미가 안내를 맡는다. 제1코스는 하루 2회(오전 9시30분,오후 2시30분 출발) 운행된다.코스는 월드컵 경기장∼광주역∼충장사∼소쇄원∼5·18묘지∼비엔날레 전시관∼월드컵 경기장으로 이어진다.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제2코스는 하루 1회(오전 9시30분 출발)로 월드컵 경기장∼전남도청앞∼가사문학관∼5·18묘지∼우치공원 등지를 오간다. 문화예술을 맛볼 수 있는 제3코스는 송정리역∼월드컵 경기장∼비엔날레 전시관∼담양 죽물박물관∼예술의 거리∼월드플라자∼송정리역으로 이어진다.유적을 탐방하는 제4코스는 광주역∼국립광주박물관∼증심사∼화순 운주사∼월드컵 경기장∼광주역 구간 버스를 타면 된다. 이용 요금은 순환코스(제1코스) 1회 이용권은 성인 기준1000∼2000원,테마코스인 2∼5코스는 입장료,체험 실비 등을 포함,3000∼2만 5000원이다.(062)606-3358 광주 최치봉기자cbchoi@
  • [오늘의 눈] “NO”라고 말못한 환경부

    해방 후 50년 독재체제를 허문 일등공신은 누구 뭐래도 민주열사들이다.이들의 헌신적 투쟁이 없었던들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금도 독재의 암울한 질곡에 갇혔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현정권이 민주열사 ‘묏자리’를 선정한 과정을 보면 실망과 분노를 지울 수 없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위원회는 20일 기습적으로 북한산 국립공원 일대 8300평을 국립공원에서 해제시켰다.환경·시민단체들은 “환경보호에 나서야 할 주무부처가 환경훼손에앞장서고 있다.”며 일제히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환경훼손 여부만이 아니다. 민주화 열사들의 묘역을 조성한다는 명분을 걸고 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밀실·비밀 행정주의로 결정됐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그렇다면 환경보호의 파수꾼으로 자처하는 환경부는 무엇을 했는가. 환경부는 오히려 힘없는 부서의 설움을 하소연한다.그동안관련 회의에 참석치 못했다가 지난달 25일 묘역 부지가 최종 결정된 청와대 회의에처음 참석,결정을 통보받았다는 것이 환경부측 설명이다. 민주묘역 결정 과정에서 개입하지 않은 만큼 책임도 면해야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하지만 환경부의 이런 해명이 주무부처로서의 정당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묘지 선정이 북한산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과정을몰랐다면 이는 환경부의 ‘직무유기’이다.추진 과정을 알고도 방관했다면 관료 사회에 만연된 ‘면피주의’일 따름이다. 환경부는 연일 백두대간 보호니 대기오염 방지니 하며 보도자료를 쏟아내고 있다.하지만 이번 민주묘역 과정에서 환경부의 처신은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성’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환경부가 개발론을 주창하는 경제부처들과 힘겨운 싸움을 통해 애쓰는 것도 안다.하지만 대통령 공약사항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정권을 향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부가 될 때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민주묘역의 최종 부지 선정은 건교부의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회와 서울시 공청회 이후에 결정된다.민주열사들의 고귀한정신을 살리고 그 영혼들이 편히 잠들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을 간곡히 부탁한다. 오일만 행정팀기자 oilman@
  • [사설] 북한산 민주묘역 쉬쉬할 일인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 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민주공원’이 비민주적 방법으로 조성되고 있어 논란을빚고 있다.정부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 국립묘지 부근북한산 기슭 2만 7000평에 민주공원을 만들기로 하고,묘역용으로 8300여평을 우선 국립공원지역에서 해제했다고 한다.이같은 결정은 몇몇 행정 부처와 자치 단체가 지난달 25일 청와대에 모여 확정했다고 한다.전 국민적 관심속에 추진되어야 할 민주공원 건립이 공청회 같은 여론 수렴 절차 한번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이다.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사안이 밀실 행정이라는 가장 비민주적 행정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민주공원 세우기는 1999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에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시작되었으나 적당한 터를 찾지 못해 그동안 표류해왔다.서울 남산의 옛 안전기획부 터,강남구 내곡동의 대모산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무산됐다.민주공원은 대통령 선거 공약 사항으로 서둘러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찾아 낸 곳이 이번 북한산이었다고 한다.해당 지역이 밭과 취락지구로 생태계가 거의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운다.국립공원이니 특별히 나서서 왈가왈부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서둘러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공원은 여느 공원과 다르다.민주화의 고난을 새김질하고 자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산 교육장이어야 한다.북한산의 민주묘역을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도민주공원을 만드는 것 자체에는 적극 찬성한다.민주 공원은조성 과정도 공론화해 그 자체를 살아 있는 민주화 교육 교재가 되도록 해야 한다.민주공원은 국가적 과제다.일부의 전유물처럼 되어선 안된다.한두 해 좀 늦게 만들면 어떤가.어려운 대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가는 과정도 바로 민주공원을 만들려는 취지일 것이다.
  • 북한산에 ‘민주묘역’ 논란

    정부가 북한산국립공원 지역이 포함된 서울 수유동 일대2만7000여평에 민주공원 묘역을 설치하기로 결정해 주민과 환경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환경부는 20일 국립공원위원회를 열어 민주공원 묘역에포함되는 8300여평을 국립공원에서 해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북한산 국립공원 묘지조성 반대연합은 이날 성명을 내고 “북한산 국립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재산상의불이익을 감수하고 입장료를 내면서 보존해 온 국민의 휴양지”라며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훼손된 국립공원이 민주열사의 안식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이 단체는묘역 지정을 즉각 백지화하고 민주묘역은 민주적으로 국민의 합의에 따라 조성해야한다고 밝혔다. 주민들도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며 보호해야할 국립공원을 주민들 몰래 공청회 한번 열지 않고 묘역으로 지정한 것은 밀실 행정의 표본이라고 비판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국립공원에서 해제된 8300평은 취락지구와 임야 등으로 생태적 보전가치가 크다고 볼 수 없으며 법률적으로 해제요건에 적합하고 환경성 평가에서도 해제사유에 해당돼 통과시켰다.”고 말했다. 정부는 99년 제정된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해 4월부터 민주묘역 후보지를 물색해왔으나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다 최근 청와대 회의에서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민주공원 건립 사업은 총리실의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회를 통과하는 대로 최종 확정된다. 오일만기자
  • 5·18 영령 넋 기리며…

    5·18민주화운동 22주년인 18일 광주에서는 정부기념식을 비롯한 다채로운 추모 및 기념행사가 열린다. 이날 오전 10시 광주 북구 운정동 5·18묘지에서 열리는기념식에는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선후보,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고재유(高在維) 광주시장,5·18유족 등 각계 인사 2000여명이 참석한다. 오후 3시에는 동구 금남로 1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5·18민중항쟁 정신계승 국민대회,부활제 등이 열리며 5·18기념문화관에서는 제3회 광주인권상 시상식도 이어진다.또 각 종교단체들이 주관하는 추모행사도 시내 곳곳에서 열린다. 앞서 17일 오전 10시 5·18묘지에서 유족·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월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제2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어 오후 7시부터는 전남도청 앞 특설무대에서 1만여명의 시민·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5·18전야제가 열렸다.3시간 남짓 진행된 전야제는 횃불시위·차량시위·계엄군진압 등 80년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재연행렬과 해원 상생굿,북춤,풍물 등이 어우러진 ‘대동한마당’ 등 각종 공연이 펼쳐졌다. 한편 이날 5·18묘지에는 국내외 참배객 1만여명의 발길이 이어졌으며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는 사진작품 전시회,음악회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려 추모 분위기를고조시켰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5·18’ 22돌…추모열기 고조

    5·18민주화운동 22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광주 망월동 5·18묘지에는 참배객이 줄을 잇고 관련 국제행사가 이어지는 등 추모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달 들어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묘지를 찾은 참배객은 모두 2만 4000여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 늘었다.올해는 광주비엔날레가 겹쳐 외국인 참배객도 270여명에 이른다. 또 지난 15일부터는 상무지구 5·18기념 문화관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제3회 국제학술대회’가 개막됐으며,‘아시아 민주희생자 가족 광주네트워크’도 해외 참가자들이 광주에 도착하면서 7일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과 여성’을 주제로 전남대 5·18연구소와여성연구소 등이 마련한 이번 학술대회는 일본·멕시코·독일 등 7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남대 등지에서열리고 있다. 5·18기념재단과 5·18민중항쟁유족회,아시아 인권위원회,광주인권센터,광주 국제교류센터 등이 공동 주관한 ‘아시아 민주희생자 가족 네트워크’는 인도네시아·스리랑카·파키스탄 등 아시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희생자 가족 등이 참여한 가운데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17일에는 5·18묘지에서 추모제가 열리며 1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기념식에는 이한동 국무총리 등 정부 및 각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배설선생 서거 93주년 추모식

    배설(裵說)선생기념사업회(회장 陳採鎬)는 항일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영국명 베델) 선생의 서거 93주년을 맞아 15일 서울 합정동 외국인묘지공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영국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 침략이 본격화한 1904년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창간,항일 언론투쟁을 벌이는 한편 국권회복투쟁 및 의병활동 지원에 나서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서다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추모식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현희 성신여대 교수,크리스토퍼 로빈스 주한 영국 부대사 등이 참석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광주시 북구는 광주인구의 3분의 1차지

    광주시 북구는 5개 자치구 중 인구가 48만여명으로 광주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첨단과학산업단지와 무등산 일대의 시가(詩歌)문화권,5·18묘지,광주비엔날레 전시관 등 산업 및 문화시설이 산재한 ‘광주의 관문’이다.때문에 북구 발전은 광주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로 구청장의 역할이 그 어느곳보다 중요하다. 차기 북구청장은 최근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오주 광주시의회 의장과 김재균 북구청장의 맞대결로 압축된다. 경선과정에서 김 구청장이 제기한 ‘불공정’시비가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경선 승리 분위기를 본선에까지 끌고간다는 게 오 의장의 전략이다. ‘경제 북구,복지 북구’건설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북구 경제 활성화’가 광주의 발전을 선도한다는 점을강조하며 유권자의 표심을 파고들고 있다.전시행정보다는주민복지와 삶의 질 향상에 역점을 두고 진정한 지방자치를 이뤄 나가겠다는 포부다. 2대에 걸친 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오씨는 선이 굵고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민주당 경선이 ‘원인무효’라며 중앙당에 이의신청을 낸 김 구청장은 조만간 탈당과 함께 무소속 출마를 준비중이다.이번 경선 참여자 일부가 당적이 없고 한 거주지에서 여러 명이 선거인단으로 구성됐다는 것이 이의를 제기한 내용이다. 오 의장에 비해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김 구청장은 지난 4년동안 무난하게 구정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있다.특히 북구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현행 지방자치제가 안고 있는 제도상의 한계 속에서도 ‘주민참여 활성화’와 ‘광주정신 확립’등을 이뤄냈다는 것이다.그동안 추진해온 각종 현안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적임자라며 유권자를 접촉하고 있다.그는 ▲깨끗한 지방정치 구현 ▲주민자치 활성화 ▲‘문화북구’정책 계승,발전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5·18묘지 관리권 ‘줄다리기’

    5·18묘지의 국립묘지 승격을 앞두고 광주시와 국가보훈처가 관리업무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는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공포,발효됨에 따라 광주시는 그동안 맡아오던 5·18묘지관리사무소 등의직제를 폐지하고 업무를 보훈처로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3일 광주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이 법률이최근 공포됨에 따라 5·18묘지가 공포일 기준 6개월 만인 7월27일부터 국립묘지로 승격된다.이에 따라 5·18묘지 관리업무는 국가보훈처로 이양된다. 보훈처는 4·19묘지 등 국립묘지 관리 기준을 준용해 5·18묘지 관리를 맡기로 하고 이에 대한 인수작업에 들어갔다.그러나 광주시는 “5·18테마공원 등 자치단체가 추진해야 할사업이 많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묘지 관리권 이양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시는 대신 ▲광주시 위탁 관리 ▲광주시가 한시 관리후 국가보훈처 이양 ▲관련법 시행령에 따른 국가보훈처 이양 등3개안을 마련,보훈처와 협의중이다. 시는 “묘지 관리를 국가보훈처로 즉시 이양할 경우 연간 10억원의 관리비용 절감 효과가 있으나 다른 국립묘지처럼 참배객 안내 등 단순한 관리기능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며 30주기인 2010년까지 한시적 관리후 이양을 추진하고 있다. 한시 관리후 이양 방안이 채택될 경우 관련법 시행령 개정을 건의할 방침이다. 시는 이를 위해 5월 단체 등의 의견 수렴에 나섰다.반면 보훈처는 국립묘지를 자치단체가 위탁관리한 선례가 없다며 반대 입장을 보여 협의 과정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광주시의 5·18관련 직제 및 인력은 5·18협력관실의 지원·정신선양·기념사업의 3개팀 12명,5·18묘지관리사무소 11명,5·18기념문화센터 22명 등 모두 46명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관련자에 대한 교육·취업·의료 지원 등의 지원업무는 보훈처로이관되며,기념문화관·기념공원·자유공원 관리 및 전남도청 이전부지의 기념광장 조성 등의 업무는 시가 계승한다. 시 관계자는 “묘지관리 업무를 위탁받지 못할 경우 직제폐지 등에 대비,인력관리 대책 등을 마련중”이라고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공권력집행 정당성 훼손”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지난 27일 89년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한 데 대해 경찰청이 법적 타당성 검토에 들어가는 등 후유증이 커지고 있다. 경찰청 김정석 법무과장은 29일 “민주화운동관련법에 대한 법률 검토를 위해 보상심의위에 동의대 사건과 관련된자료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면서 “‘경찰관 다수가 사망한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 정밀 법적 검토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김 과장은 “당시 공무집행과정에서 숨진 전경들은 이미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고 덧붙였다. 경찰청(www.police.go.kr)과 민주화보상심의위(www.minjoo.go.kr) 홈페이지에는 위원회의 결정을 비난하는 글이 수백여건 넘게 올라오고 있다. 경찰 내부에서는 당시 데모학생들이 일으킨 화재로 공무수행중인 경찰관 7명이 사망,불법폭력시위로 규정된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 것은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을 뿌리째 흔들고 경찰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며 반발의 목소리가 높다. 경찰청은 특히 홈페이지의 ‘사이버 경찰청’을 통해 “동의대 사건의 민주화운동 인정 결정에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대응자료 및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혀 조직적 대응방침을 천명했다. 최문순이란 네티즌은 “경찰에게 폭력을 가하고 화염병으로 불태워 죽이면 민주투사가 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유가족들도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동의대사태 순국경찰관 유족회 정유환 대표는 “법과 치안을 유지하다가순직한 경찰관들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데,학생의 시위가 민주화운동이라면 고인들은 매국노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정 대표는 “청와대를 비롯,보상심의위 등에 공식 항의 방문 및 진정서를 제출하고 소송 등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보상심의위는 민주화운동 인정에 대한 재심 및 행정소송절차가 현행법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서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영중 조현석기자 jeunesse@
  • 민주 대선 후보 노무현/ 선출후 첫날 이모저모

    노무현(盧武鉉)대선후보와 한화갑(韓和甲) 당 대표 등 민주당의 새 지도부는 28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 출근,농담을주고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30여분간 상견례를 가졌다. 상견례 직전 조순용(趙淳容)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축하 난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노 후보는 “대통령도 기뻐하시죠.”라고 말했다가 “참,내가 이렇게 말하면 안되죠.”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한 대표는 “내일 최고위원회의에 노 후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적극적인 지원의사를 내비쳤다.이에 노 후보도 “형식적인 면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까다롭지 않게하겠다.”고 화답,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노 후보와 당 지도부는 상견례후 국립묘지와 4·19묘역을차례로 참배한 뒤 마주치는 시민들과 악수했고,4·19묘역근처에서 갈비탕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노 후보는 국립묘지방명록에 ‘거룩한 뜻 반드시 받들겠습니다.’라고 적었고,4·19묘역에서는 ‘4·19혁명의 정신을 꼭 실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김상연 홍원상기자 carlos@
  • ‘임실 호국용사묘지’ 준공식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李相薰)는 30일 오후 3시 전북임실군 강진면 백련리에서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를 비롯,향군 회원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실 호국용사묘지’ 준공식을 갖는다. 총 180여억원을 들여 10만6000여평에 조성된 임실 묘지는 납골묘 2만기와 납골당 3만기를 수용할 수 있다.참전용사를 비롯해 10년 이상 장기복무 제대군인,전몰 군·경,무공수훈자 등이 안장 대상이다. 김경운기자 kkwoon@
  • [대한광장] ‘日 네오파시즘’ 두고만 볼건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또 다시 전격적으로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여 우리를 분노케 하고 있다.지난해 8월에 이은 두 번째 참배이다.지난 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총리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적이 있지만,두 번씩이나 참배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뿐이다.그는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다. 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문제인가? 말할 것도없이 야스쿠니신사가 A급 전범의 위패까지 봉안한 곳이기 때문이다.야스쿠니신사는 전몰자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시설로서,여느 나라에나 있는 국립묘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그곳은 근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원흉과 전범들을 군신으로 추앙함으로써 전쟁을 미화하는 역사왜곡의 진원지이다.한번이라도 야스쿠니신사에 가본 사람이라면,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전쟁의 광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신사를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전범을 공식적으로 추앙하는 반역사적인 행위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는 일련의 역사왜곡과 동일한 맥락에 있는 정치적 행위로서,우경화운동을 견인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지난해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중학교 교과서에 이어 지난 9일 극우 조직의 하나인 ‘일본회의'의 ‘최신일본사'까지 검정을 통과함으로써 역사왜곡은 고등학교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최신일본사'의 집필자들 역시 일본 우익운동을 이데올로기측면에서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며,궁극적으로는 ‘전쟁을 할수 있는 나라' 일본을 지향하고 있다.교과서를 통한 일본의역사왜곡은 결코 단발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일본사회 내부를 관류하고 있는 거대하고도 조직적인 네오파시즘의 물결이 만들어낸 파도의 하나이며,총리의 신사 참배는 또하나의 파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나름대로 절묘한 시점에 신사를 참배했다.8월 종전기념일에 참배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중국과의수교 30주년이 되는 9월을 피하면서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목전에 두고 있는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는 시점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 경시의 얄팍한 계산은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둘것이다.예상대로 한국정부는 일본대사를 불러 ‘엄중 항의'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새역사교과서'와 동일한 사관을 갖고 독도의영유권까지 주장하고 있는 ‘최신일본사' 등의 고교 교과서검정 통과에 즈음하여 ‘일부 기술을 개선한 점에 대해서는이를 평가한다.'는 견해를 표시한 바 있다.지난해 역사교과서 파동 때에 비하면 훨씬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이러한 반응에 대한 회답이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로 나타났다고 하면,억측일까? 역사왜곡과 총리의 잇단 신사 참배,자위대의 해외 파병 등일본은 단계적으로,치밀하게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지금이라도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한다.혹여 월드컵대회를 잘 치르자는 생각에서 이러한 일본의 행위를 감내하려 한다면,회복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정부는 중국,북한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일본의 군국주의화에 공동 대응하는 외교 전략을 수립하고,문화개방의 지연 내지 축소 등 한·일관계를 재점검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지난해 화끈 달아올랐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시민들의관심도 이번에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시민들의 자발적인 관심과 일본에 대한 올바른 인식,그리고 적극적인 대응이 아시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가장 굳건한 초석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조직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한편,평화를 사랑하는 아시아 민간인들과의 폭넓은교류와 연대를 모색해야 하겠다. ▲안병우 한신대교수·국사학
  • [월드컵 이야기] (13)터키

    터키 국민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광적인 수준이다.터키 국민 모두가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축구다.터키에서 프로축구팀이 처음 창설된 것은 52년전인 1950년.현재 전국적으로 200여개 프로팀이 등록돼 있어 거의 매일 경기가 열리고 있다.모든 국민이 ‘축구로 잠을 깨고,축구를보다가 잠을 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터키는 2002년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조 추첨 결과한국에서 예선전을 치르게 되자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체육·언론계 인사들은 터키가 브라질을 제외하곤 비교적 해볼 만한 상대인 코스타리카·중국과 함께 예선 C조에 배정돼 절호의 예선통과 기회를 잡았다며 흥분했다. 터키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54년 월드컵 이후 48년 만이다.터키는 당시 서독에 1대4로 패한 뒤 한국에 7대0으로 이겼으나 8강전에는 오르지 못했다. 터키의 명문 프로축구팀인 갈라타사라이는 99·2000 유럽축구연맹(UEFA)컵 대회에서 우승,터키의 뛰어난 축구 실력을과시했다.터키 대표팀은 갈라타사라이,페나르바흐체,베식타시등 명문 프로팀 소속 선수들로 구성됐다.터키는 오는 6월3일 브라질과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9일 코스타리카,13일 중국과 각각 예선전을 치른다.터키 대표팀은 현재 최소한 8강전에는 오른다는 목표 아래 마무리 맹훈련을 펼치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터키대표팀이 전통적인 우방국가인 한국에서 예선전을 치르게 된 것은 행운이라며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터키와 한국은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 이후 혈맹의 우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터키군은 6·25전쟁에서 740명이 전사하고 2100명이 부상하는 등 참전 16개국 가운데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봤다.터키 전몰 장병들은 부산 유엔묘지에 잠들어 있다. 터키 국민들은 이렇듯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는 한국에서 경기를 할 때 한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응원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대부분 TV를 통해 이번 월드컵 경기를 관전할 것이다.이때 한국인들의 응원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된다면 양국의 우호관계는 더욱 증진될 것이다.터키 국민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우리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부탁드린다. 김영기 대사
  • [대한광장] 헌법 비웃는 ‘연좌제’ 유령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13조 3항) 모반이나 반역 혐의자에게 삼족을 멸하던 왕조시대에 비하면 실로 눈부신 인권의식의 성장이 아닐 수없다.연좌제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일까?세습제 왕조시대의 한 장면이 아닐까? ‘단종애사'의 사육신에 얽힌 일화중에 심금을 울리는 대목은 성삼문이 형장으로 끌려 가면서 어린 딸에게 한 말이다.‘너는 괜찮다.너는 딸이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라던. 왕조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연좌제는 군국주의 일본이 식민통치 강화를 위해 소생시켰다.아무 법적 근거없이 독립사상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휘두른 이 피묻은 칼날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인해 고난받아야 했던 숱한 원혼과 짓붉은 상흔을 남겼다. 그래서 동족 학살과 단군 이래의 천문학적 부정축재로 역사에 오명을 남긴 전두환 정권조차도 그 비이성과 반인륜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폐지를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좌제가다시 유령처럼 출몰하고 있다. 한밤중에 햄릿에게 몰래 나타나 원한을 애소하던 힘 없는 유령이 아니다.밤비 내리는 음습한 묘지 어드메쯤서 배회해야 할 유령이 나타난 곳은 어디인가.초국적 자본이 지구촌을 휘젓는 세계화의 중심부에 서 있는 21세기 한국의,인터넷 환경이 종이매체의 권위를 붕괴시키고 있는 기술정보 강국의 대선 후보자를 향한 검증 과정이라는 환한 대낮의 광장이다.그것도 민주인권 국가를 소망하는 노벨평화상수상자가 대통령으로 있는 곳이다. 필자는 인권위에서 차별행위 조사와 구제라는 소임을 맡고 있다. 이 서슬 푸른 연좌제마저도 철저하게 차별적으로 적용됐음을 역사는 기록으로 말하고 있다.박정희 전 대통령은 본인이 젊은 한때 남로당 군사책이었고,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장인으로 대구 10·1폭동에 연루돼 사망한 박상희는 그의 형이었다.인근에서 그는 두루 존경받았던 인품으로 전해지고 있다.뿐만 아니라 5공 실세였던 허화평씨는 남파된 동생 때문에 군복을 벗을 뻔했다가 전두환씨의 부하사랑으로 구사일생했다.오랫동안 공화당의 곳간 열쇠를 관리한 김성곤씨 부부는 인민위원회 활동가 출신이다. 반면 권력과 먼거리에 있는 문인들은 피울음을 삼켜야 했다.이문열·김성동·이문구·김원일 등은 작가로 입신해야 했다.이뿐인가.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확인되지 않은 좌익 경력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꿈을 접어야 했던가.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남편의 행위 또는 ‘머릿속 생각'으로 고난을 감내했던가. 혈연관계로 인한 책임을 묻는 ‘연좌(緣坐)'든,사제간 또는 친구와 같은 비혈연적 관계의 연대책임을 묻는 ‘연좌(連坐)'든 간에 이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가치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념에 정면으로 반한다.연좌제는봉건왕조와 군국주의가 체제수호를 위해 제한적으로 쓰다가 버린 낡은 유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장인 사위관계는 혈연도 아닌 관계이다.설령 혈연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시비선악을 떠나 민족사의아픔이 가로놓인 문제를 두고 손쉽게 경쟁자를 비방하는근거로 들이대는 일만은 제발 되풀이하지 말았으면 한다.일거수 일투족이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는 공론의 장,특히 그 파급력이 폭풍과도 같은 대선후보 검증과정에서벌어지는 연좌제 공방은 깨어 있는 국민을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필자의 친구중에 방송가에서 성공해 이름이 꽤 알려진 이가 있는데 그가 지난해 어느 밤에 불쑥 집에 찾아 왔다.취기가 완연한 얼굴에 눈이 젖어 있었다.북에 어쩌면 살아있을지 모르는 팔순 아버지를 적십자사에 상봉신청하고 오는 길이었다.나는 그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줄로 알고있었다.남편의 월북을 감지하고 평생 홀로 살아온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장래를 염려한 나머지 일찍이 사망신고한까닭으로 그는 입사시에 큰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그날 밤,그는 말했다.‘내 가슴에 박힌 못을 누가 알겠노?' △ 유시춘 국가인권위원·작가
  • 5·18 행불 3명 신원확인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 옛 묘역에 묻힌 무연고 분묘 11기중 3기가 DNA 분석결과 신원이 확인돼 유가족 품으로 되돌아가게 됐다.5·18 행방불명자 중 과학적인 증거에 의해 가족이 확인된 것은 22년 만에 처음이다. 광주시는 19일 5·18 무연고 분묘에서 수습된 유골에 대한 DNA 분석 결과 유가족 유전자와 일치한 채수길·김준동·김남석씨 등 3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채수길(59년생·식당종업원·광주 북구 우산동)씨는 80년 당시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의 공수부대원 버스 총격사건때,김남석(61년생·인천직업훈련원생·광주 남구 주월동)씨는 지원동 벽돌공장 앞에서 각각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있다.김준동(63년생·목공·광주 동구 계림동)씨는 당시가출해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것으로 나타났다. 전남대 법의학팀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무연고 묘지에서 수습된 유해와 ‘행불자’신고를 한 93가족에서 채혈한 샘플을 유전자 비교 분석한 결과 3기가 일치했다.”며 “나머지 유골에 대한 분석을 마치는 이달 말쯤최종 보고서를 작성,‘행불자찾기 사실조사위원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최규선씨, 영암에 불법 가족묘

    최규선씨가 부친의 고향인 전남 영암군에 불법으로 가족묘지를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19일 영암군과 주민들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최씨가 풍수지리학상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금정면 안로리 552일대 7274㎡(2200평)에 가족묘 5기를 만들고 주변에 소나무 등 조경수와 잔디를 심었다. 묘가 차지하는 면적은 200여평이다.지목상 밭으로 돼 있는 이곳은 현행 농지법이나 묘지법상 묘를 쓸 수 없도록돼 있다.다만 매장이 아닌 납골묘나 납골탑 등 묘지관련시설을 세울 때도 반드시 농지전용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땅은 광주에 사는 나모(55)씨가 지난 99년 11월 감나무를 심는다며 군에 개간신청을 낸 뒤 2001년 2월 밭으로준공검사를 받았고,같은해 3월8일 최씨가 사들였다. 최씨의 부친은 금정면과 이웃한 덕진면 운암리 1구 대천마을에서 출생했으며 나주시로 이사했다. 군 관계자는 “현장을 확인한 뒤 묘를 이장토록 원상복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앞으로 3개월 안에 이를 이행치 않으면 최씨를 고발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영암남기창기자kc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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