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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0) 여름날의 짚신 삼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0) 여름날의 짚신 삼기

    김득신의 작품 ‘여름날의 짚신 삼기’(그림1)다. 사내가 웃통을 벗고 앉아 발가락에 신날 둘을 걸고 짚신을 삼고 있다. 왼쪽 발 앞에는 벌써 삼은 한 짝이 놓여 있다. 짚신은 신틀(그림3 ‘신틀’)에 걸어서 삼지만, 신틀이 없으면 그냥 발가락을 이용해도 된다. 윤두서가 그린 ‘짚신 삼기’(그림2)라는 그림도 있다. 김득신의 그림과 다를 것이 없다. 짚신은 조선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신발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짚신인가. 신발이 닳아 없어지는 물건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재료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것 둘뿐이다. 먼저 잘 닳지 않는 것이 재료가 될 가능성이 있다. 가죽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가죽은 구하기 어렵고 가공하기도 어렵다. 또 하나는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풀이나 짚 같은 것이다. 벼농사를 짓고 사는 사회에서 짚신은 두 번째의 이유로 해서 선택된다. ●신을 수 있는 신발 계급별로 정해져 짚신의 역사는 오래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은 ‘문헌통고’에서 마한(馬韓)의 풍속을 소개하면서,‘신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고 했는데, 이 초리가 곧 짚신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도 초구(草)란 항목에서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모양이 이상하지만, 온 나라의 남자 여자 어른 아이가 다 신는다.”고 하고 있으니, 짚신은 역시 고려 시대의 남녀노소가 신는 보편적인 신발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짚신을 신는 전통 역시 저 삼국시대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흔히 옷은 그 사람이라 한다.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됨을 파악하고 평가하게 된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미국 드라마 ‘섹스앤드더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좋아하는 마놀로 블라닉 구두란 것은 단순한 구두가 아니다.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취향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드러난다. 현대는 그 취향 뒤에 있는 사회적 지위를 돈이 구체화하지만, 조선시대는 신분, 곧 양반인가 아닌가, 관료인가 아닌가 하는 구분이 사회적 지위를 구체화한다. 곧 조선시대 신발은 계급별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경국대전’ 예전의 ‘화혜(靴鞋)’를 보면, 정1품부터 정9품까지 품계가 있는 벼슬아치는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는 흑피혜(黑皮鞋), 공복(公服)에는 흑피화(黑皮靴)를 신게 되어 있었다. 다만 1품에서 3품까지는 평상복에 협금화(挾金靴)를 신는다고 규정되어 있다.4품에서 9품까지는 평상복에 어떤 신발을 신으라는 규정이 없다. ‘화(靴)’와 ‘혜(鞋)’는 같은 신발이지만, 서로 다르다.‘화’는 목이 긴 신발이고,‘혜’는 목이 없는 신발이다. 여성들이 신는 가죽신인 운혜나 당혜가 모두 목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흑피란 검은 가죽이니, 이런 신발들은 검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다. 협금화는 금속, 즉 징을 박은 신발이다. 앞의 흑피화 바닥에 징을 박은 것이 아닌가 한다. 특별히 정1품에서 3품까지는 평상시에도 징을 박은 가죽신을 신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가죽신을 신는 사람이 이렇게 정해져 있다 보니, 짚신은 자연스레 돈이 없고 신분 처지가 낮은 사람들의 차지다. 그림(1)과 (2)에서 보듯 조선시대 백성들은 대부분 짚신을 삼을 줄 알았다. 다만 솜씨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라 해도 도시 사람, 곧 서울 사람들은 신발을 사서 신었다. 당연히 서울 시내에 신발을 파는 가게가 있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의하면, 미투리전에서 생삼, 숙마의 미투리와 짚신을 판다고 하였고, 미투리전은 여러 곳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파는 짚신 중에 가장 인기가 있는 짚신은, 서린동 전옥서 감옥에서 죄수들이 삼은 것이라 하였다. 왜냐고? 죄수들은 할 일이 없어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다. 신을 삼아 팔면 먹을 것이 나온다. 한데 그것이 직업은 아니니까 정성을 들인다. 신발이 꼼꼼하고 질길 수밖에 없다. ●재주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편 되기도 죄수에게 짚신 삼기가 돈이 되듯, 보통 사람에게도 짚신 삼기는 돈이 되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를 보면 이지함이 굶주린 백성을 살린 일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흥미롭게도 짚신 이야기가 나온다. 요지는 이렇다. 선조 3년(1570)에 영남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이지함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백성들을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는 큰 집을 지어 유민들을 수용하고 사람의 소질을 보아가며 이런 저런 수공업을 가르치고 그것으로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 준다. 그런데 언제나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볏짚을 가져다주고 짚신을 삼으라 한다. 곁에서 챙겨보니, 하루에 열 켤레는 삼는다. 이렇게 해서 만든 물건을 내다 파니, 먹을 것이 생긴다. 돈을 모아 옷도 다시 지어 입도록 한다. 이처럼 짚신 삼기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가죽신은 원래 벼슬을 하거나 돈 많은 양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관습도 조선후기가 되면 바뀐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예전에는 선비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짚신을 신고 걸어 다녔고, 말을 타는 일은 드물었다. 지금은 조관(朝官)처럼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닌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하고 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벼슬아치들만이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니고 선비들은 짚신을 신고 걸어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 이후 선비들도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익은 이런 풍조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성호사설’의 ‘초갹(草 )’ 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영남 지방의 풍속은 보통 때는 짚신을 신고, 미투리는 외출할 때만 신는다 하니, 그 검소함을 본받을 만하다.” 영남 지방에만 검소한 풍속이 남아 있어 선비들이 집에서는 짚신을 신고 외출할 때만 미투리를 신는다는 것이다. 미투리는 볏짚이 아니라, 삼이나 노(종이를 비벼 꼰 줄)로 만든 신이다. 짚신에 비해 훨씬 정교하다. 서울 선비들은 고운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신지 않으려 하는데, 영남 사람들은 그 미투리를 외출용 신발로 신는다는 것이다. 이익은 영남의 검박(儉朴)한 풍습에 감동했는지 곳곳에서 칭찬을 거듭하고 있다.‘영남속(嶺南俗)’이란 글에서는 다시 영남 선비들이 짚신을 신고 미투리조차 잘 신지 않는 풍습을 소개한 뒤 “경기 지방 선비가 만약 영남의 검소한 풍속을 본받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와 혼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버리는 짚신은 거름으로 재활용 외출을 하려고 문간에서 신발장을 열어 보니 안 신는 신발이 가득하다. 예전에 신발 뒤축이 한쪽만 자꾸 닳아 샀던 가게에 가서 밑창을 갈아달라고 하니, 엉뚱한 것으로 갈아준다. 그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무릎을 다친 뒤로는 다시는 밑창을 갈아 신지 않는다. 그러니 신발장에 위쪽은 멀쩡하건만 한 쪽 밑창이 닳은 신발이 여럿이다.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짚신조차 아꼈던 사람의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시대 때 지씨 성의 구두쇠 재상이 있었는데,“설과 한식이 되면 공동묘지에 사람을 보내 지전을 주워 오게 해서 도로 종이를 만들고, 남이 신다 버린 짚신을 주워 땅에 묻고 동과 씨를 심었는데, 동과가 잘 열려 많은 이문을 남겼다.”고 한다. 짚신을 거름으로 썼던 것이다. 실제 허균은 ‘한정록’에서 버리는 짚신을 외양간에 넣어 소의 똥오줌에 썩혔다가 마늘을 심는 데 거름으로 넣으면 마늘이 굵게 자란다는 농법을 소개하고 있다. 홍만선 역시 ‘산림경제’에서 버리는 짚신은 말 오줌에 담가두었다가 파초를 심을 때 거름으로 쓰면 파초가 잘 자란다고 하고 있다. 짚신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 활용하는데, 신발장 속에 쟁여 있는 멀쩡한 내 신발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풍요로운 자본주의 시대라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까운 생각,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어디 이번 여름에는 나도 짚신이나 신고 다닐까 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문병권 중랑구청장 신뢰경영대상

    문병권 중랑구청장이 25일 서울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08 대한민국 신뢰경영 대상’에서 기초지방자치단체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신뢰경영 대상은 각 분야의 최고 경영자 중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우수 경영인을 선정해 표상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올해로 2회째를 맞았다. 문 구청장은 중화재정비촉진사업을 비롯해 ▲청량리∼신내동간 경전철과 서울시 최초 개방형 자율고인 원묵고 유치 ▲사가정공원, 봉화산공원 등 공원 조성 ▲망우묘지 공원화사업 추진 등 주거·교통·교육·환경 등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수해예방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과거 상습 침수지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신내2·3택지개발사업과 상봉재정비촉진지구 개발, 이화교·겸재교 신설, 망우로에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건립 등으로 서울 동북부의 핵심도시로서 면모를 갖추도록 하는데 힘써왔다.그 결과 정부와 서울시가 평가하는 청렴도, 행정혁신, 민원행정 등 34개 분야에서 최우수·우수기관으로 선정돼 28억 5200만원의 인센티브를 받는 성과를 달성했다. 문 구청장은 “이번 수상은 구민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공직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중랑구를 선진도시로 도약시키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5월 영령들 곁에 묻히고 싶어요”

    “5월 영령들 곁에 묻히고 싶어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렸던 50대 미국인이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청원서를 보내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24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한 의료 관련 연구회사 부회장인 데이비드 돌린저(55)가 재미 한국교포 오모(55·여)씨를 통해 자신이 죽으면 ‘5·18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이메일로 전해왔다. ‘임대운’이란 한국 이름을 가진 돌린저는 28년 전 미국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전남 영암보건소에서 일하던 중 5·18을 직접 겪게 됐다. 1980년 주말을 맞아 영암에서 광주에 온 그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던 5월17일과 18일 공수부대의 유혈 진압을 직접 목격한 뒤 근무지로 내려갔다. 그는 3일 후 석가탄신일을 이용해 다시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는 공수부대가 활개치고, 시민들이 무장에 나서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도시 곳곳에는 계엄군의 총검에 시민들이 쓰러지고, 취재하려는 외신 기자들도 속속 도착했다. 돌린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매일 일기 쓰듯 피로 물든 광주를 기록했고, 뉴욕타임스 등 외신 기자들의 ‘귀와 입’ 역할을 자청했다. 또 사상자들이 즐비한 전남대·기독교병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했고, 이같은 참상을 언론 매체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5월 항쟁’ 이후에도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며 1년 더 한국에 머문 뒤 198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돌린저는 귀국 이후에도 매년 5월이 되면 직장 동료들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하고,5·18의 진실을 알리는 등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25돌인 2005년 5월엔 가족과 함께 ‘5·18묘지’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5·18기념재단 관계자는 “돌린저가 국가유공자가 아닌 만큼 5·18민주묘지에 묻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광주시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구 묘역에 묻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2004년 ‘5월 광주’를 가장 먼저 알렸던 독일출신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71)는 광주시로부터 사후에 구 묘지에 신체 일부를 묻고,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부고] 양순직 前서울신문 사장 별세

    [부고] 양순직 前서울신문 사장 별세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양순직 전 서울신문사장이 24일 오후 5시 지병으로 숨졌다.83세.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양 전 사장은 해군본부 정훈차감을 거쳐 1962년부터 약 1년간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고인은 또 충남 논산지역 등에서 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공화당 재경위원장을 지냈지만, 나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에 반대하다 공화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신민당 부총재, 평화민주당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순자(76)씨와 아들 희태(개인사업), 희룡(개인사업), 상훈(에프아이텔 대표)씨 등 3남 4녀가 있다. 발인은 26일 오전 9시, 장지 천안공원묘지,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다.(02)3010-2631.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Seoul In] 23일 자매도시 청소년 초청 캠프

    강북구(구청장 김현풍) 자매도시 청소년을 서울로 초청하는 ‘2008 청소년 교류캠프’를 23∼25일 연다. 올해는 강원 고성군과 충남 당진군, 전남 보성군 등 자매지역 90명과 강북청소년구정평가단원 30명이 참여한다. 문화정보센터, 재활용선별처리장,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 국립4·19민주묘지 등을 둘러본다. 가정복지과 901-2262.
  • [부고] 애국지사 조영진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조영진 선생 별세

    중국과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 조영진 선생이 21일 오후 7시 별세했다.91세. 선생은 191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1935년 원산상업학교 3학년 때 ‘독서회’를 조직, 한글역사서적 및 위인전 등을 탐독하고 비밀리에 토론회를 열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적발돼 퇴학당했다. 1936년 2월 중국에서 한인회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하 항일조직을 결성했으며 1938년 4월 일본대학 부속 제2상업학교에 편입해 동지를 규합하고 지하 항일학생단체인 ‘동경영흥유학생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41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도쿄 물리학교의 본과 수학부에 진학해 유학생 및 교포들과 접촉하며 배일사상 고취 활동을 벌이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도쿄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을,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보경(82) 여사와 아들 경삼(경희대 의대 내과교수), 경식(울산의대 영상학과 교수), 딸 경설 등 2남 1녀가 있다. 발인 24일 오전 7시30분, 장지 국립대전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 빈소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 (02)3010-2230.
  • [부고] 3·15의거 첫 시위 이끈 정경도옹 별세

    [부고] 3·15의거 첫 시위 이끈 정경도옹 별세

    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해 4·19혁명에 불을 지핀 3·15의거의 첫 시위를 이끈 정경도옹이 12일 오후 1시41분 별세했다.98세. 정옹은 3·15의거 당시 민주당 마산시당 감찰위원장으로 투표소 곳곳에서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시민들의 항의를 보고 정남규 민주당 마산시위원장 등 4명과 함께 시내를 돌며 부정선거규탄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마산 어시장과 불종거리, 남성동 등으로 번져 격화됐고 3·15의거의 불을 댕겼다. 정옹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돼 3일간 고문을 받는 등 40일간 옥고를 치렀다. 정옹은 3·15의거 공로로 1964년 건국포장,1995년에는 사단법인 3·15의거기념사업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3·15의거기념사업회는 15일 오전 9시 국립 3·15민주묘지 참배단에서 의거기념사업회장으로 영결식을 갖는다. 고인의 유해는 3·15민주묘지에 안장된다. 유족은 4남1녀로 발인은 15일 오전 7시30분. 연락처 마산의료원 장례식장 신관 1호(055-249-1401.010-5587-7112). 마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Local] 부산 공기업, 노인 일자리 창출

    부산시 산하 공기업들이 노인 일자리 만들기에 나섰다. 부산환경공단은 14일 쓰레기매립장과 소각장, 하수처리장 등 11개 사업장에서 경비 및 녹지관리 업무 등에 40여명의 노인을 고용할 방침이다. 공단은 또 기간제 근로자의 고용기간이 끝나거나 결원이 생길 경우 노인들을 우선 채용하기로 했다. 부산시설공단도 지난해 10월 전국 최초로 공공시설물 관리업무를 60세 이상 노인을 위한 일자리로 제공하기로 한국노인인력개발원과 협약을 맺었다. 중앙공원과 태종대 유원지 등의 녹지관리, 영락공원 묘지관리, 자갈치시장 건물의 경비·청소에 102명의 노인을 상시 고용했다. 부산경륜공단도 지난 4월 금정체육공원의 매표 업무와 주차 및 청소, 조경관리 등에 노인인력을 활용하고 있으며 79명이 고용됐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국정원內 옛 영릉은 장경왕후 초장지”

    조선 세종이 처음 묻힌 초장지(初葬地)로 알려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의 옛 영릉(英陵)은 중종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처음 묻은 옛 희릉(禧陵)일 가능성이 커졌다. 1973년 옛 영릉을 발굴하면서 출토된 묘지석(墓誌石) 파편이 장경왕후의 무덤에 쓴 신도비문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화재 실측설계 전문가인 안경호씨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하는 ‘정신문화연구’ 2008년 여름호에 실린 ‘세종대왕 초장지(舊英陵)에 대한 재론(再論)’에서 이같이 밝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20세기 지성’ 손택의 마지막 이야기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20세기 미국의 지성’….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1933∼2004)에게 붙는 수식어는 이처럼 끝이 없다. 손택은 1964년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통해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라며 그동안의 서구미학 전통을 통렬하게 비판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 손택은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반전운동가 등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신시키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 ‘열렬한 실천가’로 불려 왔다.1988년에는 미국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 한국정부에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고,93년에는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 전세계인들의 반전 의식을 일깨웠다. 2002년 9월 9·11테러 1주년을 맞이해 손택은 ‘진정한 전투와 공허한 은유’란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미국 대테러전쟁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해 또 한번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를 보여 줬다. 손택은 2003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세계 사상수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손택의 아들인 저술가 데이비드 리프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유해를 사르트르, 보들레르 등이 묻혀 있는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손택의 말년을 엿볼 수 있는 책 두 권이 동시에 출간됐다. 손택의 마지막 소설이자 200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인 아메리카’(임옥희 옮김, 이후 펴냄)와 리프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록한 ‘어머니의 죽음’(이민아 옮김, 이후 펴냄). 지병인 자궁육종 치료까지 뒤로 미루고 손택이 심혈을 기울여 써내려간 소설 ‘인 아메리카’는 19세기 후반 미국으로 이민 온 폴란드 국민 여배우 헬레나 모드제예브스카를 모델로 가상의 주인공을 만들어내 미국 서부에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그들의 시도를 그리고 있다. 다양한 형식 실험이 돋보인다.1만 6800원. ‘어머니의 죽음’에는 손택이 암 판정을 받은 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9개월간의 모습이 아들 리프의 담담한 회고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95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열린세상] 괴테의 독일에 압록강이 흐르게 한 이미륵/최창일 현대시인협회 이사·시인

    [열린세상] 괴테의 독일에 압록강이 흐르게 한 이미륵/최창일 현대시인협회 이사·시인

    밤비행기를 타고 우린 낯선 도시 뮌헨으로 갔다. 한국문인협회(이사장 김년균)가 주관하는 해외 심포지엄과 2008년 해외 문학상을 시상하기 위해서다. 해외문학상은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모국어인 한국어로 작품을 쓴 이에게 준다. 창작활동을 해온 우수한 동포 문인을 발굴, 상을 드림으로써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제 17회째인 해외문학상 수상자는 ‘배우수업’의 강유일 소설가다. 강유일은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독일문학연구소 문학창작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2005년 ‘피아노소나타 1987’과 ‘배우수업소설’이 독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상을 주러 간 협회 일행은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뮌헨에서 두어 시간 남짓한 거리에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 박사가 묻힌 묘를 안내하겠다는 가이드를 만난 것이다. 1946년 전후 독일 문단을 놀라게 하였던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는 남부 독일 언론의 이슈가 되어 100여개의 신문이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이미륵은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세계적인 작가로 한국의 문학과 세계간의 다리를 놓은 온유한 중재자로 평가받고 있다.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품이 꾸준히 호평 받으며 사랑받고 있다. 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추억이다. 역사이며 살아 가는 생활이다. 우아하고 따뜻한 인간애가, 순수함과 고결함으로 숨 쉬고 있다. 이런 李義景(이미륵의 본명)의 묘소를 안내받게 된다. 1899년에 황해도에 출생하여 1951년에 독일에서 영면한 작가 이미륵. 청년 이미륵은 일제하의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선다. 일경에 쫓겨 안중근 의사의 조카 봉준씨의 소개로 마르세유를 거쳐 1920년 독일에 망명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을 전공한다.1928년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뮌헨 대학 동양학부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사진 촬영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독일의 여러 신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담긴 사진을 기고한다. 낯선 동양의 문화를 전파 하는데도 힘을 쏟는다.1951년 3월20일에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그가 묘지에 묻히던 날, 독일 친구들은 이미륵 박사가 평소 들려준 한국말로 애국가를 불러 주었다. 타국에서의 죽음이었지만 3백여명의 조문객이 모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준다. 그가 처음 묻힌 장소는 눈이 녹지 않는 공원묘지 외곽 음산한 곳이다. 그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교포인 송준근 옹에 의하면 한국 정부와 교포가 뜻을 모아 공원의 정원이 널찍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으로 1995년 이장을 했다. 독일인이 묻히는 평수보다 세 배의 넓이로 묘소를 만들었다. 사연 많게 자식들도 모두 고인이 되었다. 위암으로 죽음을 앞둔 이미륵 박사를 돌본 이는 독일인 여자 친구 에파 크라프트란다. 그의 현재 나이는 94세. 그는 한국인의 방문이 있으면 매우 정중하게 대해 준다. 마치 이미륵 박사를 대하듯 말이다. 그가 얼마나 인격자로 살았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전후 독일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려워 시민들은 배급을 받아서 생활하였다. 그가 받은 보급표에 한 장이 더 딸려 들어 온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반환한다. 이런 이 박사를 두고 당시 신문은 미담으로 소개하였다. 가짜 보급표까지 나돌던 궁핍한 시기에 조선의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이 박사는 망명과 나치 출현의 2차대전이 일어난 충격 속에서 삶에 대한 봉사를 놓지 않고 살아갔다. 독일인들은 그를 두고 ‘자랑스러운 한국의 위대한 아들’로 부르고 있다. 이 박사가 기거한 옛 집터의 독일인 집주인은 기념조형물과 동판을 통해 한국의 옛 문인을 기념하고 있다. 괴테의 독일, 한국인 이미륵 박사의 빛의 문학이 지금도 숨 쉬고 있다. 최창일 현대시인협회 이사·시인
  • [부고] 애국지사 이두일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 학생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이두일(李斗一) 선생이 7일 별세했다.94세.제주 태생인 이 선생은 제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3월 한국인 학생들을 억압하던 일본인 교장의 사택을 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그해 10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을 받고 출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발인은 9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대전묘지 애국지사 3묘역, 빈소는 경기 군포시 수리동 성당. 전화 017-719-0324.
  • 용인지역 기획부동산 주의보

    용인에서 주택지나 묘터를 살 때 소비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행정 당국이 나서 과대과장 광고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 줄 것을 당부하고 나설 정도다. 4일 경기 용인시에 따르면 최근 가장 극성을 부리는 것은 주택용지로 일부 기획부동산업자들이 ‘용인시 평균땅값’ 운운하며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이들은 구시가지 외곽지역인 처인구 등을 중심으로 장기도시계획에 포함된 토지들을 당장이라도 되팔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해 텔레마케팅과 신문광고를 하며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이 판매하는 평균 토지가격은 평당 50만∼70만원가량으로 1∼2년 뒤면 인근 주택용지가격인 150만원까지 치솟을 것이라며 매수를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시는 이 땅들의 용도가 확정되지 않아 섣불리 매수에 나서면 낭패를 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묘지용 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시는 최근 몇몇 경제신문에 실린 용인시 모현면 일대의 묘지용 임야 분양 광고도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시는 지난 4월부터 관련 문의전화가 이어지고 현지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나자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고 보고 모현면 일대에 묘지 분양 광고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용인시 관계자는 “문제의 지역은 묘지 설치 허가가 날 수 없는 곳”이라며 “신문 등에 잇따라 게재되는 용인지역의 묘지용 토지 분양 광고는 대부분 거짓이거나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또 “부동산 분양과 관련된 광고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전화가 도시계획 관련 부서에 쇄도하고 있다.”면서 “일반인들의 경우 자세한 내용을 몰라 사기당할 위험성이 크다.”고 말했다. 시는 지난해부터 부동산 분양 사기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홍보를 해오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최근에는 기획부동산 광고가 많이 실리는 주요 일간지에 광고 게재에 신중을 기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용인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유해발굴감식단장 박신한 대령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유해발굴감식단장 박신한 대령

    경외에 찬 ‘그 독백’은 전 세계인의 심금을 참으로 건드렸다.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다. 격전의 전장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진다. 의식을 가까스로 되찾았을 때 푸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 하늘이었다. 청년은 중얼거린다. “어째서 지금까지 이 높은 하늘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라도 겨우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하다. 그렇고 말고! 이 끝없는 하늘 외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기만이다. 이 하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푸른 하늘은 ‘영원’한데 지상의 ‘영광과 욕망’은 사소하고 부질없음을 처음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전쟁과 평화’의 명문구로 꼽힌다. 이 말이 새삼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일까.6·25전쟁 발발 58주년을 며칠 앞둔 지난 주,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전 10시가 채 안된 이른 시간인데도 6·25때 전사한 유해를 찾아달라는 유가족들의 애끓는 전화가 쇄도했다. 경남 마산에 거주하는 전이길(69)씨.“우리 큰형님이 6·25때 입대했는데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어요. 전사통보도 못 받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에 계시는지 시신만이라도 꼭 확인하고 싶어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전화를 합니다.” 대구광역시에 사는 김두남(62)씨.“어머니께서 위독해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6·25때 전사한 아버지(김봉곤)의 유해를 찾아 국립묘지에 안장해 드리고 싶어요.” 이처럼 아버님과 형님을 찾는 전화가 많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지난 6일 현충일때 채혈행사를 가진 이후 이런 문의전화는 최근들어 더욱 많아졌다. 유가족의 채혈을 통해 유해를 보다 빨리 찾을 수 있는 희망의 방법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 실제로 지난 3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고(故) 강태수 일병의 경우 생존해 있는 아들(62)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우연히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들러 채혈을 했다가 극적으로 아버지 유해를 찾은 케이스. 신혼초에 신랑은 귀여운 아들을 하나 낳고 전장으로 떠났고 82세된 신부는 58년 만에야 신랑의 유해와 만나는 눈물겨운 광경을 연출했다.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38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유해발굴 사업은 올해로 8년째. 처음에는 증언과 유품 등을 통한 신원확인에 의존했으나 2003년부터는 유해와 유가족의 DNA검사를 추가해 정밀도를 높였다. 특히 지난해 1월 관련법 제정에 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조사와 발굴, 감식 등 전 분야에 걸쳐 독자적인 수행능력을 확보했다. 또한 올해 12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내에 3층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완공되면 감식실과 유해보존실을 갖추는 것은 물론 유전자 은행 설치 등으로 세계적 수준에 올라서게 된다. 지금까지 유가족 혈액의 경우 4973건을 채취했으며 발굴된 유해 1892구 중 72구가 신원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42구가 유가족 품에 안겼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6·25때 국군 전사자는 약 13만 7000명, 실종자는 2만여명이다. 국립현충원에 2만 7000여기가 안장돼 있으니 현재 13만명가량이 어디엔가 쓸쓸히 묻혀 있다는 것이다.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유해발굴감식단 단장 박신한(51) 대령을 만났다. 집무실에는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반세기 만의 귀향’ 등의 문구와 발굴현장 모습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는 6·25전쟁이 몇년도에 일어났는지 모르는 젊은 대학생들이 3분의1이나 된다는 조사내용을 언급하면서 결코 잊혀진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호국의 달이자 장마철입니다. 발굴사업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겠지요. “이달에만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안동(27일까지)과 강원도의 진부(7월11일까지), 인제(27일까지) 등에서 진행되고 있지요. 한 지역당 100곳정도 굴토하면서 유품이나 유골 등의 흔적이 나오면 전문요원 8명이 투입돼 정밀 감식을 하게 됩니다.1년중 동·하절기를 제외한 8개월 동안 계속 진행되지요.” ▶감식단 요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됐습니까. “군인과 군무원, 그리고 형질인류학과 법의학을 전공한 민간 감식전문요원 등 모두 134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89명의 발굴병인 경우 대학의 고고학이나 인류학과 출신의 지원자들로 모집·충원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비록 6·25의 3세대에 해당되지만 58년 동안 차가운 땅속에 묻힌 호국의 얼을 거둔다는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인골탐지기도 없이 산간 고지대에서 주먹밥을 먹어가며 고생도 많지만 평생에 남을 보람으로 여기며 열심히 일하고 있지요.” ▶발굴사업에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요. “유해는 전투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마을 주변에 널부러져 있다가 마을 주민들이 수습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58년이 지났고, 지역개발도 많이 했고, 전사자 유해에 대한 자료조차 없습니다. 어디쯤에서 전사했다는 막연한 제보와 현장에서 당시 전술적 상황분석을 통해 진행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지요.” ▶제보가 들어오면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제보내용과 현장상황 등을 여러가지를 종합 판단해 주요 포인트를 정하게 됩니다. 대개 70∼80%는 참호나 교통호,20∼30%는 논이나 밭 등이 대상입니다. 그 다음 전문요원들이 문화재 발굴처럼 기록과 수습을 하면서 진행되는데 소중한 유해인 관계로 중장비 없이 호미 등으로 조심스럽게 굴토합니다. 그러다가 유해가 발굴되면 먼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구분하지요. 유품과 기록 등으로 피아를 구분한 뒤 아군인 경우 시료를 채취하고 또 유가족으로부터 채혈을 통해 얻은 DNA 등을 대조합니다. 신원이 확인되면 현충원 정식묘역에 안장되고 미확인되면 일단 무명용사탑에 있다가 나중에 확인되면 다시 모셔집니다.” ▶적군의 유해는 어떻게 하는지요. “지금까지 북한군 384구, 중공군 177구의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이 가운데 북한군 352구, 중공군 84구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인도적 차원에서 매장해 놓고 있지요. 저희는 매년 군사정전위를 통해 송환의사를 타진하지만 아직까지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측에서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발굴사업이 좀 늦었지요. “원래 이 사업은 2000년 6·25 50주년기념사업으로 처음에는 한시적으로 3년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유해가 발굴됐고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국가영구사업으로 전환시켰지요. 국가가 국방의무만 부과시켜 놓고 책임에는 소홀했다는 점에서 발굴사업이 다소 늦었다고 봅니다. 전후복구와 경제개발 등 국가가 먹고 사는데 전력하다 보니 국가적 여유가 없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난 8년 동안 말 그대로 ‘무에서 유’의 발굴사업을 진행해 오면서 벌에 쏘이는 등 단 한 건의 사고가 없었다는 그는 “아마 땅에 묻힌 영령들이 도와주는 것 같다.”고 했다. 또 “6·25세대들이 하루에 1만명정도 돌아가시고, 또 국토는 계속 개발되고 있어 유해발굴사업은 향후 5년이 매우 중요한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아직도 이 땅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13만여의 호국용사들이 이름모를 산야에 묻혀 있습니다. 이들의 유해는 단순한 뼛조각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버팀목입니다. 마지막 한 분까지 찾아 부모형제,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일은 살아 있는 우리들의 영원한 책무입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57년 목포 출생. ▲75년 광성고 졸업. ▲80년 성균관대 졸업, 학군 18기 임관. ▲92∼95년 31사단 96연대 1대대장. ▲98∼2000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99∼2002년 육본 인사운영실 대령보직장교. ▲02∼03년 9공수여단 참모장. ▲03∼04년 36사단 107연대장. ▲05∼06년 육본 인사참모부 전사자 유해발굴과장. ▲07∼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 ●유해발굴 주요 실적(2008년 6월 현재 누계) 아군 1892구, 북한군 384구, 중공군 177구. 유품 32종 5만 7995점(실탄, 장구류, 개인소품 등).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춘천, 시가화용지 확충

    강원 춘천시가 2020년을 대비해 개발이 가능한 ‘시가화용지’를 대폭 늘리기로 했다. 강원 춘천시는 2020년 인구 40만명을 목표로 춘천도시기본계획을 변경하면서 주거 및 공업용지를 대폭 늘리기로 했다고 20일 밝혔다. 시는 도시기본계획 일부 변경(안)에서 보전용지는 245만 9954㎡로 줄이는 반면, 시가화 예정용지는 주거형과 공업형이 각각 38만 9414㎡와 207만 540㎡씩 늘린다. 시가화 예정용지로 변경·지정된 곳은 ▲동내면 학곡리 ▲남산면 수동리 ▲신동면 혈동리 ▲동산면 봉명리 등 4곳이다. 학곡리 일대는 춘천∼서울 고속도로 개통에 대비하고 공동묘지와 화장장 이전에 따른 부지를 활용하면서 38만 9414㎡ 규모의 주거형 시가화 예정용지로 변경될 예정이다. 수동리 일대 33만 800㎡는 ‘더존 IT단지(수동 농공단지)’와 수도권 소재 소프트웨어 유망 벤처기업이 집단으로 들어설 예정이다. 지역 특성화 전략산업단지가 조성되는 혈동리와 행촌리 일대 67만 2700㎡(제1단지), 봉명리 106만 7040㎡(제2단지)도 공업형 시가화 예정용지로 새롭게 지정된다. 반면 동내면 신촌리, 고은리 일대는 시가화 예정용지 규모를 357만 3000㎡에서 317만 3000㎡로 축소·조정한다. 춘천시는 이 같은 도시기본계획안을 지난 17일자로 공고한 데 이어 다음달 1일 강원정보문화진흥원에서 주민공청회를 개최한다. 이광준 춘천시장은 “지역균형발전과 수도권 고속교통망 개통에 따른 기업단지 조성을 위해 도시기본계획 변경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군복무중 자살자 첫 현충원 안장

    군 복무 중 구타와 가혹행위 등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희생자들이 ‘순직’으로 처음 인정돼 1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날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순직 군·경 의문사 희생자 합동 안장식’을 거행했다. 현충원에 안장된 순직자 14명 중엔 선임대원의 구타와 욕설, 가혹행위로 우울증 등 병증이 악화돼 자살한 희생자 8명이 포함돼 있다. 자살자의 이번 현충원 첫 안장은 지난 2월28일 ‘자해 사망자’의 국립묘지 안장금지 조항을 삭제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가능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자라 하더라도 부대 내 구타와 가혹행위 등 복무관련성이 확인돼 해당기관에서 순직으로 인정될 경우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경찰청과 법무부는 구타·가혹 행위 희생자들의 순직 처리에 긍정적인 데 비해 국방부는 여전히 미온적이어서 유족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지금까지 군의문사위가 요청한 재심의 건에 대해 경찰청(5건)과 법무부(2건)는 이미 수용했거나 심의중이지만, 국방부(14건)는 한 건도 수용하지 않았다. 군의문사위 관계자는 “자살자의 국립묘지 안장은 불의의 죽음을 당하고도 적절한 예우를 받지 못했던 수많은 장병들을 위로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도 “국방부의 순직결정 거부는 유족들의 아픔을 외면한 처사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이 16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85세.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경기공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근무 중이던 1943년 3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무기 공급 책임을 맡았다. 황 선생은 이듬해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무기를 밀반출해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인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황인기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미국 LA 자택. 발인은 20일 오전 9시(현지시간).LA 글렌데일 공동묘지.
  • [길섶에서] 낡은 유모차/ 최종찬 국제부차장

    남녘 고향의 풀 냄새가 그리워 정을 붙일 수 없던 아파트 9층에 살던 김씨 할머니가 한밤 대학병원 앰뷸런스에 실려 나갔을 때에도 이웃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김씨 할머니가 결국 눈을 감았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실려 아파트 9층을 집집마다 노크했을 때에도 이웃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대신에 천수를 누렸으니 호상(好喪)이라고 말했다. 김씨 할머니가 종일 마을 다니던 아파트 주변 잔디에 세워진 천막에서 밤새워 화투를 치면서도 이웃들은 호상이라고 줄곧 중얼거렸다. 식구들도 덩달아 호상이라며 슬픈 얼굴을 거두어들였다. 김씨 할머니의 운구차가 털털거리며 아파트를 떠나 망우리 공동묘지로 향할 때도 이웃들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식구들과 이웃들이 김씨 할머니의 기억과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나갈 때 1층 경비실의 모퉁이 재활용품 수거 코너엔 유품 하나가 놓여 있었다. 김씨 할머니의 생전의 벗이었던, 아이를 태울 수 없던 낡고 조그마한 유모차가 외롭게 떨고 있었다. 최종찬 국제부차장
  • [6·10 촛불집회]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

    [6·10 촛불집회]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

    “만감이 교차합니다.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한열이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된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68)씨는 10일 서울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한열이가 죽은 지 21년이 됐는데 이렇게 큰 외침이 필요한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연세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이한열(당시 21세) 열사는 87년 6월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평범한 어머니이자 가정주부였던 배씨의 인생은 이날부터 180도 달라졌다. 아들은 7월5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배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지만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 나섰다. 아들을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은 배씨는 대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후 배씨는 민주화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다른 부모들과 함께 시위현장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배씨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매일 시위현장의 맨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최루탄도 직접 맞아보고 경찰의 방패 앞에 서서 대중들과 함께 싸웠다.”면서 “그렇게 듣고 보고 또 몸으로 느끼면서 한열이의 뜻도 차차 이해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배씨는 최근 촛불집회에도 빠짐없이 참가한다. 지난 5일부터 나흘간 계속된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에서는 ‘이명박 정부 규탄, 쇠고기 재협상, 과거사위원회 통폐합 철회’를 위한 천막농성에 참여했다. 배씨는 “촛불집회에서 어린 학생들이 자유발언을 통해 할 말 다하는 걸 보면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느낌도 든다.”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단히 성숙하고 그 힘도 강하다는 걸 요즘 다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배씨는 “군사정권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최루탄을 쐈는데, 앞으로 다시 최루탄이 등장하지는 않을까 염려된다.”면서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이 성숙했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촛불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돼야 제2, 제3의 한열이가 나오지 않을 텐데….” 배씨가 말끝을 흐렸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53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지켜드릴래요”

    “53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지켜드릴래요”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데 53년이 걸렸습니다. 너무 늦게 찾아 오래도록 옆에서 모시겠습니다.” 현충일인 6일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의 한 묘비 앞에 은발의 한 중년신사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캐나다인 레오 드메이(55). 그는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묘비를 어루만졌다.50여년간 잊고 지냈던 생부 ‘앙드레 아델라드 레짐발드’의 묘비다. ●태어난지 보름만에 의사 집안에 입양 레짐발드는 1952년 9월5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두 달도 안 돼 전사했다. 당시 나이 20세. 이 와중에 드메이는 태어난 지 보름여 만에 의사 집안에 입양됐다. 그의 아버지는 파병 당시 어머니와 약혼한 상태였다. 드메이는 이후 양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고, 공직생활을 하며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생부에 관해서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잊고 지냈다. 2년 전 어느 날, 캐나다에 살던 그에게 입양기관에서 전화가 왔다. 친어머니가 그를 찾고 있다는 전화였다. 친어머니를 만난 그는 아버지의 이름과 그가 한국전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生父와의 질긴 인연의 끈 드메이는 곧바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캐나다 국회의사당과 문서보관소를 뒤져 사망일, 군번 등 전사 내역을 찾아냈고 부산 유엔묘지에 아버지가 묻혀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같은 노력 끝에 그는 지난해 4월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 재방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았다. 처음 바라본 유엔기념공원의 아버지 영전에 장미꽃을 바쳤고, 판문점을 찾아서는 아버지가 전사한 ‘355고지’를 먼발치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드메이는 “자신과 아버지간에 보이지 않는 질긴 인연의 끈이 있었다.”며 아버지를 찾은 일화도 소개했다. 우연과 행운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던 중 캐나다의 한 선술집에서 ‘KOREAN WAR VETERANS(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글씨가 적힌 모자를 쓴 70대 노신사를 발견했다.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갔고, 한국전 참전용사인지, 그렇다면 ‘앙드레 아델라드 레짐발드’란 사람을 아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 노신사는 아버지의 부대 지휘관이었고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 후방으로 옮겨 준 은인이었다. 그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유엔공원 옆에서 영어 가르치며 생활 그는 아버지를 지근에서 모시기로 하고 지난해 11월 캐나다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아버지가 모셔진 유엔공원 인근의 한 영어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는 공원관리처 직원을 도와 영문번역과 교정일을 거들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 5∼6년간 부산에 머물며 묘소를 돌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토록 찾던 아버지를 늦게나마 지근에서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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