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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삼국 유물 대량발굴/경주 사라리고분군…덧널무덤 1기 원형그대로

    ◎청동검·재화상징 철도끼·쇠솥 등 110점 나와/AD2세기 초기 신라 수장묘 추정… 요갱 흔적도 경북 경주시 서면 사라리 573의3 고분군에서 서기 2세기쯤 초기 신라시대 최고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덧널무덤(토광목곽묘) 1기와 함께 유물 1백10점이 발견돼 26일 공개됐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사라리발굴조사단(단장 이백규)이 지난해 11월부터 착수한 (주)명성 제2공장부지 구제발굴에서 발견한 유물은 청동검과 청동거울,쇠솥과 철검,수정구슬로 돼있다.이들 유물이 나온 덧널무덤은 길이 3백25㎝,폭 2백25㎝,깊이 90㎝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고분은 모서리를 죽인 말각장방형의 묘광을 파고 그 안에 길이 2백5㎝,폭71㎝의 널(목관)을 만든다음 길이 2백69㎝,폭1백20㎝의 덧널(목곽)을 또 갖추어 널과 덧널이 있는 유관·유곽의 구조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널과 덧널사이에는 점성이 강한 흙을 작은 돌멩이를 섞어 덮었는데 특히 피장자의 허리부분에 직경 70㎝의 허리부분의 구덩이인 요갱 흔적이 남아있다. 목관 내부에는 70여개의 사각형 철도끼를7열로 깔았고 머리부분의 널 모서리 양쪽에 사각형 철도끼를 각 1점씩 꽂았으며 칼자루가 남아있는 세형동검(50㎝)1점을 널 머리 우측에 세워두었다. 유물은 덧널의 위쪽에서 나비모양 8자형 동기,청동환등이 S자형 재갈과 함께 출토됐고 깨진 토기와 쇠창 2점,쇠솥 1점도 묻힌채로 발견됐다. 이 고분에는 삼보로 알려진 칼·거울·옥과 함께 당시 재화의 의미를 가진 사각형 철도끼 70개가 부장돼 무덤에 묻힌 피장자가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최고 수장의 위치였을 것으로 문화재관리국은 평가했다.대체로 서기 2세기를 전후해 형성된 이 유구는 덧널이 아직까지 부장공간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채 단지 1점의 쇠솥을 묻은 것으로 미루어 초기 단계의 덧널무덤으로 추정된 동시에 신라 덧널무덤 사회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해석됐다.그리고 이번 발굴된 고분에서 피장자의 허리부분을 판 요갱이 함께 확인된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는 이 요갱은 아직까지 완전히 조사되지 않은 부분으로 신라 묘제발전단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구로 판단된다.〈김성호 기자〉
  • 마지막 왕세손(외언내언)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공이 63년 일본에서 환국할 때 그는 병상의 몸이었다.11살때 이토(이등) 통감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고국을 떠난지 56년만에 실현된 영구귀국이었다.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차안에서 영친왕은 『고국의 푸른 하늘을 보고 싶다』며 앰뷸런스 커튼을 젖혀달라고 했다.국민들은 그를 「비운의 황태자」라고 불렀다. 영친왕은 26대 고종황제의 셋째 아들.순종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3년 뒤 왕조가 망하는 비운을 겪는다.망국의 황태자는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왕실의 귀족인 방자여사와 결혼을 하게되고 왕세손을 낳는다.조선왕실의 재기나 백성들의 왕정 복고를 철저히 막기위해 일제가 취한 정략결혼이었다.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를 대마도 도주에게 강제결혼시킨 것과 같은 술책이었다. 영친왕의 아들은 당연히 왕세손이 된다.왕조시대라면 세자가 되고 때가 되면 왕위에 오르는 길이 열려있는 신분이다.그 마지막 왕세손 이씨가 17년만에 귀국하여 13일 역대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종묘를찾아 인사를 올렸다. 웅장한 건물앞 드넓은 어떠했을까. 왕조가 없어진 지금 왕세손이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왕자의 상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으리라. 일본에서 태어난 이씨는 미국 MIT대학에 유학해 건축학을 전공했으며 미국여성 줄이아와 결혼했었다. 그러나 오랜 별거끝에 이혼했으며 국내에서 사업을 하다 실퍄한 뒤 한국을 떠났었다. 이번 귀국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주선에 의해 이뤄졌고 이씨종약원 총재로 추대된 상태라 영구귀국으로 보여진다. 귀국후 생활대책에 대해서 아직은 아무런 보장이 없다. 이씨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일전한 직업없이 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종약원이 그를 불러온것도 국내 정착을 권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랜 방황끝에 고국에 돌아온 마지막 왕세손이 해마다 가행되는 종묘제례의 제주가 되어 이땅에서 당당한 자세로 여생을 살아가기 바란다.
  • 무형문화재 김성진옹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제20호 대금정악의 기능보유자인 김성진옹이 1일 하오 4시55분쯤 서울 강서구 방화동 217의132 자택에서 별세했다.향년 80세. 지난 82년 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녹조근정훈장,대한민국 예술원상,국악대상 공로상 등을 받았다. 발인 3일 상오 9시.(02)662­3501.
  • 국악인 김천흥(이세기의 인물탐구:89)

    ◎「춘앵전」 등 궁중무 재현에 80평생/14세때 아악생으로 입문…악·가·무 두루 갖춰/대한 국악원·민속 예술원 등 설립,후지 양성/오는 3월 미수 앞두고 “전아의 극치” 「춘앵무」공연 준비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 앵삼에 노란 관과 붉은 띠,오색 한삼속에 감춘두손을 좌우로 펼쳤다가 이마높이로 들어 모으며 창사를 읊조린다.여섯자 화문석위에서 「평조회상」에 맞춰 추는 「춘앵전」은 꾀꼬리가 버들가지를 넘나들며 노니는듯 노래부르는듯 화사하고 밝은 화전태와 여의풍이 특징이다.이는 궁중정재의 마지막 한끝을 잇는 심소 김천흥이 재현한 춤으로 그는 상영산에서 잔영산에 이르는 원형그대로를 추기도 하지만 느린 가락의 상영산을 생략하고 세영산을 위시한 삼현도드리와 변주곡인 군악의 장단으로 아정한 무작을 짜고 있다. ○꾀꼬리 춤사위 일품 그의 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사람의 심금을 움직인다.그것은 한낱노익장을 과시했다는 표현으로는 미치지 못하달 수가 있다.특히 한국무용의 기교를 전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처용무」는 「깊은 온축과 비범한 예술성,씩씩하고 장엄한 남무의 풍도와 낙화유수의 가녀린 애조가 두드러져 우리의 고대무용을 보다 본격적으로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즉 그의 춤은 천격이나 기교가 없이 「심소가 아니면 되살릴수 없는 무격이 제격」이다.크고 광활하게 장삼을 흩뿌리는 「승무」역시 무기교의 절제미와 정제미,무념무상의 선비적인 청정이 깃들어 몸이 아닌 마음으로 추는명무로 손꼽힌다.그런가 하면 그의 「살풀이」는 멈출듯 주춤한 정지속의 움직임과 여백의 미가 일품이다.명주수건을 던졌다가 다가서고 다가섰다 물러서는 흐르는 춤태는 손끝 하나에서도 예술의 연륜이 묻어나 이를 보고 「속으로 흐느끼지 않은이가 없다」는 찬사를 들을 정도다.이 춤은 지난 연초 하와이대 객원교수로 갔다가 배한라여사의 1주기를 맞는 추모무대에서 춘 것이 「그곳의 객석을 흐느끼게 했다」고 전해져 왔다.노예술가의 연륜을 거론하는 것은 외람되나 약관 14세에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의 아악생으로 입소하여 장천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기를 어느덧 70여년.1923년 순종황제 탄신 오순을 경축하는 창덕궁 어전연주에서 무동으로 뽑힌 것이 인연이되어 그는 당대 명인 하규일 함화진으로부터 「악.가.무」일체를 이어받는 예인의 길에 올랐다.그가 재현하여 공연에서 선보인 궁중무만도 「춘앵전」외에 「무고」 「가인전목단」,용알을 가지고 사를 부르며 추는 「포구락」등 48종.궁중명무로 알려져 있지만 한때 아악부를 떨치고 나가 교방의 무속악사로 전전한 경험때문에 민속무용과 무속음악에도 일가를 이루어 「꼭두각시」에서 「봉산탈춤」에 이르기까지 그가 추지 않은 춤은 없다.악기도 아악부시절의 전공은 해금이지만 양금 아쟁의 명수이고 곰삭고 결삭은 성대를 구사하여 남녀창인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선유가등 12잡가와 사설시조 휘모리시조를 어느 자리에서나 두루 거침없이 노래부른다.그가 춤과 국악으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개인무용발표회를 가진것은 56년부터 7차례,궁중무용 재현은 10여차례가 넘지만 공연뒤 리셉션을 가진 것은 72년 「무악생활 50년」과 92년 「무악생활 70년기념」공연등 단 두번뿐이다.그만큼 그는남에게 폐스러운 일,번거로운 일을 삼가고 분수에 넘치는 것은 넘보지 않는다.첫번째 공연에서 벌써 「우뚝하고 반듯한 김천흥의 무용」으로 평가되더니「완숙의 미와 멋과 흥」등 넘치는 찬사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만약 충고하는 조언이 있으면 언제라도 주춤거리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돋보인다. ○순종 오순때 무동으로 「일찍이 없었고 뒤에도 없을 그의 공업은 동료와 제자의 경의와 찬하만으로 모자란다」는 이성천교수(서울대)의 말대로 그는 참으로 많은 업적을남기고 있다.40년대초 이전에서의 국악교육을 필두로 대한국악원 국악사양성소 무용인협회 한국가면극 대한민속예술원 정농악회등 국악과 관련된 수많은 단체를 만드는데 앞장서 왔으나 그는 이를 굳이 「창단」「결성」으로 강조하기보다 단순히 「참여」한 것으로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청렴했던 심소는 80평생 살림집과 무용연구소 이사를 다닌 것만도 50여번이 넘는다.살림집은 사글세 전세 전세를 전전하여 40여번,연구소는 지난 55년 낙원동에 김천흥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나서 78년 문을 닫기까지 10여번이상을 옮겨다녔다.무용발표 때마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집을 가진 것은 68년 잠실주공아파트가 처음이고 그후 다시 수번을 이사한 끝에 2년반전 현재의 서초구임광아파트에 정착했다.그러나 무용연구소 시절 장구쳐 줄 사람이 없어 하루종일 「하나둘 하나둘」 육성박자로 춤을 가르치는 궁핍한 생활에서도 그는 연구생들이 내는 월사금외에 별도로 작품료를 받은 적이 없고 월사금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냥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만사에 최선을 다하여 대강 넘어가지 않는 그는 60년대초 원각사 공연때는 빈혈로 쓰러지자 아침마다 신당동에 다니며 소피를 먹으면서 무대에 선 적도있고 76년 미독립 2백주년기념 축하행사는 50일간 필라델피아 워싱턴등 11개지역에서 20여회를 공연하는 동안 급작스런 복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의 할바와 의무에 빈틈을보이지 않았다.지금도 「국록」을 받는다는 자세로 매일 국악원에 나와 직접후진을 지도한다. ○40여회 전·월세 전전 국악계를 통틀어 『높은 스승일뿐만 아니라 인품이요 덕망,학식이고 예술에서 앞으로 누가 있어 선생을 따를 이가 과연 있을 것 같지않다』는 성경린씨(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지휘 기능보유자)의 말대로 「명확한 운궁법을 통한 정확한 표현력으로 평가되어지는 악기」를 젖혀두고라도 전통무용으로 저문한 그는 당연히 「한국무용사의 산증인」이요 「궁중정재의 대명사」이며 「정재재현의 명장」이 아닐 수 없다.아악부 시절에 만난 성경린과의 총죽지교는 「한 핏줄과도 같은깊고 짙은 우정」으로 일요일마다 「산행의 동반자」이기도 하다.가족은 그를말없이 내조해온 부인 박준주여사는 2년전 타계하고 3남3녀중 5남매는 미국에 체류중.차남 정완씨(회사원)가 극진히 모시고 있다.여전히 가볍고 날렵한 그의 몸놀림은 어느 한구석 비틀거림이나 흐트러짐이 없다.갸냘프리만치 깡마른 체구에도 강단이 세고건강해서 그에게선 「노인」의 티란 찾아볼 수 없고 특히 춤을 출때 그렇다.『남과 다투지 않고 아부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고 마음 편히 늙었으니 행복하고후회가 없다』는 그는 『그러나 노장은 무용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무대에 서서 살아있는 춤을 보여주고 싶다』는 절규와도 같은 기원을 기필코지키고 싶어한다.오는 3월 30일 미수를 앞둔 제자들의 축하공연에서 심소는 또한번 「전아의 극치」로 일컬어지는 「춘앵무」로 우리에게 상서로운 봄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그것은 무용가 최현의 표현대로 「결과 멋과 흥」이 샘물처럼 어우러진 「절예의 경지」 또는 「입신의 경지」 그자체일 것이다. □연보 ▲1909년 서울출생 ▲22∼26년 이왕직 아락부원양성소 졸업(해금·양금·아쟁전공) ▲23년 순종황제탄신 오순경축공연 무동출연 ▲26∼4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아악수장 ▲40∼45년 이화여전 강사 ▲43∼45년 조선음악가협회회원 ▲45∼47년 대한국악원이사 ▲50∼88년 서울대·한양대·추계예대·숙대무용과 출강 ▲51∼95년 국립국악원 예술사,연주원,자문위원,현재 원로사범 ▲55∼78년 무용연구소 개설 ▲1956년 첫번째 무용발표회 이후 75년까지 7차례,창작무극 「처용랑」「만파식적」「흥부전」「봉산탈춤」등 발표 ▲61∼76년 한국국악협회이사,부이사장,상임고문,명예회장 ▲61∼80년 서울시 문화재위원 ▲62∼95년 미주·동남아·유럽지역등 해외공연 21차례 ▲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39호 처용무기능보유자지정 ▲73∼93년 대락회 이사장 ▲77∼현재 정농락회 회장,궁중무용발표회 이후 10여차례 ▲78∼현재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92년 「심소김천흥선생 무락생활 70주년기념」공연(국악원소극장) ▲93년 무악생활 70주년기념 해외순회공연 ▲95년 하와이대 초청 객원교수 한국무용의 기본무보(69년) 정악양금보(82) 정악해금보(88) 심소김천흥무악70년(95년) 서울시문화상(60년) 문화재보존공로상(68년) 한국문화대상(69년) 대한민국예술원상(70년) 국민훈장모란장(73년) 한국국악대상(83년) KBS국악대상 특별공로상(92년)
  • 백제 귀족 합장묘 발굴/능산리서 은제 장신구 함께

    부여군 능산리 백제고분군에서 인골이 남아 있는 백제귀족의 부부합장묘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0월12일부터 충남 부여군 능산리 백제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와 고분 60여기를 확인하고 이 가운데 백제귀족의 합장묘 1기와 평민 합장묘 1기를 확인했다고 19일 발표했다.이번 고분이 발견된 곳은 왕릉으로 알려진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귀족의 합장묘는 백제후기의 전형적인 석실분묘제인 판석조의 횡혈식 육각형으로 여기에서 은제관모·요대장식과 금동제 귀고리 등이 발견됐으며 인골은 좌측 서편의 경우 치아가 완전한 턱뼈와 정강이뼈등 일부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백제후기에 은제장식은 6두품이상만 쓰도록 돼 있는데 지금까지 백제고분에서 은제장식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부부합장묘에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인골이 확인된 또 다른 고분은 북쪽 벽에 판석 1개를 세운 뒤 양측 벽은 깬 돌을 면을 맞추어 쌓고 바닥에는 작은 할석을 깐 형태로,인골은 현실좌·우측에 각각 1구씩 나란히 있다.이 인골은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인골 주위에는 별도부장품은 없고 나무관에 부착됐던 관고리장식과 못·나뭇조각이 남아 있다.
  • 국악계 원로 김천흥옹 회고록 출간/내일 출판기념회

    한국무용사의 산 증인이자 국악계의 대원로인 김천흥 선생(86)이 회고록 「심소 김천흥 무악70년」을 최근 출간했다. 회고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과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인 김선생이 19 22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한 이래 지금까지 겪어 온 개인사 및 한국음악과 무용의 현대사를 담고 있다. 『크림과 박가분을 바르고 순종황제와 윤황후 앞에서 춤을 춘 기억이 생생하다』는 김선생은 15세이던 19 23년 창덕궁 인정전의 어전 연주회에서 무동으로 춤을 춘 이래 지난 92년 「무악생활 70년 기념공연」에 몸소 출연해 명무의 기량을 선보이기까지 70평생을 오로지 춤과 음악에 바쳐왔다.현재도 하와이대 초청 객원교수·예술원 회원·국립국악원 원로사범·정농악회 회장 등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회고록 출판기념회는 14일 하오 6시30분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열린다.
  • 세계문화유산 등록 경축행사 풍성

    ◎문체부·사찰·지자체 주관… 내년 5월까지 계속/강연회·홍보책자 발간·표석 설치/문화재 관리국 19일 종묘서 고유제/불국사·해인사도 경축대법회 열어 불국사 석굴암,해인사 대장경판 및 판고,종묘 등 우리 문화재 3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기념하는 경축행사가 줄을 이을 전망이다. 문화체육부와 관할 지방자치단체,해당 사찰 등이 주관하는 경축행사는 고유제와 기념리셉션,강연회 개최를 비롯해 표석과 현수막 설치,각종 홍보책자 발간 등으로 내년 5월까지 다채롭게 펼쳐진다. 문화재관리국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오는 19일 상오 종묘에서 문체부장관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문화예술계 인사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묘제례악 연주와 함께 고유제를 지낸다.또 19일 하오 8시20분 서울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문화예술 및 체육계 인사와 문체부 및 산하단체 임·직원이 참가한 가운데 마련되는 경축리셉션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한 우리 문화재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선포식도 겸하게 된다. 경주시는 이에앞서 18일 하오 1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 소속된 스리랑카의 니말 드 실바 교수(모라투와대)를 초청,학술강연회를 마련한다. 이들 문화재의 관할 사찰과 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도 다양하다.불국사와 해인사,합천군은 이달 말까지 불국사와 해인사 일주문 입구,합천군 등 3곳에 기념아치를 세우며 경주시와 경남 합천군도 내년 1월중 불국사와 석굴암,해인사에 각각 기념아치를 건립할 계획이다.또 내년 1월중 종묘,불국사·석굴암,해인사에는 기념표석이 세워진다.특히 불국사와 해인사는 19일 조계종 총무원 후원으로 불국사,석굴암,해인사에서 불교계 인사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대법회와 함께 범패놀이와 탑돌이 행사를 가지며 팔만대장경 각인 재현행사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 문화재관리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내년 4월중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한국문화주간 행사 중 한국의 대표적 문화재 사진 100점을 전시하는 사진전 개최와 함께 5월에는 세계유산 사진전을 국내에서 마련할 계획이다.
  • 이도학 박사,저서 「…고대국가 연구」서 주장

    ◎“백제뿌리는 고구려 아닌 부여”/4세기에 2차 남하… 3년만에 비약적 발전/국호변경·왕성계보·모제등을 근거로 제시 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논문을 많이 내는 학자,새 학설을 가장 자주 발표하는 학자로 꼽히는 이도학 박사(38)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은 저서 「백제 고대국가 연구」를 최근 냈다(일지사 출판).백제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국내 학자의 연구서가 많지 않은 학계 현실에서 이 책은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저서에서 이씨는 지난 10여년동안 발표한 논문 40편을 바탕으로,백제의 기원에서 4세기 집권국가 체제를 확립하기 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구성했다.그가 세운 백제사의 틀은 다음과 같다. ­백제 세력은 원래 부여족의 한 갈래로 서기 1세기 무렵 남하,한강 유역에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를 형성한다.이어 4세기 때 중국 동북부에서 활동하던 부여족 일파가 또 백제지역으로 남하한다.한뿌리에서 나온 두 세력은 충돌없이 타협해 「백제」를 형성한다.2차 남하집단은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마병단으로서,우월한 무력을 바탕으로 마한제국을 정복해 나간다.이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이다.이후 백제는 노령 이북을 통치하는 한편 가야와,영산강 일대 마한 잔여지역에 대해서도 통치권을 간접 행사한다.이같은 세력확대를 바탕으로 백제는 국내에서는 율령을 정비하는 등 집권체제를 확립한다… 이씨의 이론틀을 구성하는 부분부분들은 각기 논문으로 발표될 때마다 학계로 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새 학설(신설)들이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받은 학설이 「4세기 부여족의 2차남하로 백제가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이다.「정복국가론」이라고 부르는 이 학설을 일본·미국 학자들이 일부 제기하긴 했지만,이씨가 이를 구체적으로 입론했다. 그는 『4세기에 백제는 한차원 높은 국가적 발전을 이루는데 이에 소요된 기간이 3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이는 외부 세력 영입없이는 불가능하며,그 「외부」의 정체는 만주의 부여족 일파(곧 백제족)라고 주장한다.그 근거로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한동안 통치했다」는 중국 사서 기록을 든다.이사료는 그동안 「백제 요서경략설」의 토대가 돼 왔지만 이씨는 거꾸로 「한반도 백제 세력이 요서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백제족이 원래 만주에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그는 자신의 설을 한국·중국의 문헌과 고고학적 성과로 뒷받침하고 있다.이씨는 4세기에 백제 왕실이 교체됐으며,이에 따라 백제사는 마한 소국 단계인 「백제」와,고대국가를 완성한 「백제」로 구분된다고 결론지었다. 「정복국가론」못지않게 중요한 학설이 백제의 기원을 부여에서 찾은 것.학계 통설은 백제를 고구려계로 보았지만 이씨는 백제 개로왕의 상표문,묘제,백제의 왕성,「남부여」로의 국호변경등을 근거로 제시했다.이밖에 ▲백제 「칠지도」의 기본성격 ▲고대국가에서 소금교역,제의권이 갖는 역할을 밝힌 것들이 이씨가 세운 주요 학설들이다. 지난 91년 「백제 집권국가 형성과정 연구」로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씨는 요즘 연세대·한양대등에 출강하고 있다.그는 『백제의 집권체제 확립후 백제말까지를 다룬 후속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그 작업이 끝나는대로 『고조선에 버금가는 노대국이자 고구려·백제의 뿌리』인 부여사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 연해주­동해안 신석기 문화 “일치”

    ◎한·러 학계,시베리아 보이스만 유적 공동 발굴조사/“두만강 중심 동일선상의 문화” 결론/납작밑 토기·홑 낚시바늘 오산리와 같은 형태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의 신석기문화가 우리나라 동해안 신석기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동일선상의 문화로 밝혀졌다.이는 지난 7월20∼8월25일 연해주지역 보이스만(Boisman)유적을 대상으로 한·러학계가 처음으로 실시한 공동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이 발굴조사는 고려학술문화재단 후원으로 러시아에서 극동대학,한국에서는 서울대,교원대,이화여대,충남대가 공동 참여했다. 보이스만유적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국경 두만강하구를 잇는 해안선 중간쯤에 자리했다.조갯더미(패총)를 비롯,집자리무덤으로 이루어진 이 유적에서 사람뼈(인골),뼈 연모(골기),토기와 석기,고기잡이 용구(어구)등이 출토되었다.특히 토기는 5백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이와 더불어 신석기시대 주거문화와 무덤형태(묘제)를 규명할 수 있는 집자리와 무덤을 각각 5기씩 발굴했다. 토기의 경우 납작밑을 한 바리모양토기(평저발형토기)는 연해주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토기 주둥이 부분에 삼각형 무늬 몇 줄을 돌리고 그 아래에 물결무늬를 찍은데 이어 맨 아래에다 다시 삼각형 무늬를 돌렸다.이 토기가 연해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나와 극동대학은 「새로 발견한 유물」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그러나 함북 나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똑 같은 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보이스만유적에서는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신석기 유적에서 나온 것과 같은 납작밑토기도 이번에 출토되었다.주둥이 부분에만 점줄무늬(점열문)를 돌리고 그 아래는 민무늬로 비워둔 이같은 토기는 함북 서포항에서도 나왔다.이밖에 골기로는 홑 낚시바늘(단식조침)3개가 연해주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는데,함북 서포항유적 등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흔히 나오는 유물이다.또 보이스만유적에서 수습한 뼈로 만든 작살과 조개팔찌 역시 서포항유적 출토품과 흡사했다. 이렇듯 보이스만유적의 베일이 뒤늦게 벗겨진 까닭은 이 지역이 옛 소련의 중요 군사기지였기 때문이다.러시아의 개방정책에 따라 이번에 발굴조사단의 발길이 미친 보이스만유적은 한·러학계가 앞으로 계속 발굴키로 합의했다.보이스만 신석기유적 발굴조사의 실무책임을 한국측에서는 임효재교수(서울대·고고학),러시아측에서는 샤프코노무교수(극동대·〃)가 맡았다.그리고 북한에서는 서국태교수(사회과학원·〃)가 옵서버로 참여했다. 이 보이스만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에 따른 연대측정에서 6천5백년전(BC4500년)쯤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그러니까 우리나라 동해안의 오산리와 서포항 이른 시기에 비해 약 5백년이 늦은 시기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다만 서포항 중간시기 내지 늦은 시기와 맞먹는 유적이 보이스만유적인 것이다.이에 따라 한·러학계는 두만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신석기시대의 선사문화가 남으로 오산리,북으로 보이스만까지 연결된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연해주지역 보이스만 발굴현장에서 귀국한 임효재교수는 『우리나라 동해안과 연해주는 자연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적을단계에서 선사인들이 공통문화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이번에 발굴한 인골을 통해 고아시아인에 대한 체질인류학적 규명히 기대된다』고 말했다.
  • 통일신라 여인상 흙인형(한국인의 얼굴:19)

    ◎수즙은 눈매에 용모·매무새 단정/요조숙녀인양 옷소매로 살짝 입 가리고/정성들여 빗은 머리,가리마 뚜렷이 표현 우리 고대사에서 신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삼국이 정립했던 시대 개념에서 벗어나 통일신라는 자신들의 시대를 가졌기 때문이다.문화면에서도 신라가 전통성을 가장 오래 유지한 까닭도 여기있다.흙인형의 경우도 고신라에 비해 사실적 표현이 강조될 뿐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진다. 그 대표적 유물이 경북 경주시 황성동과 용강동 출토품이다.이들 흙인형은 출토지가 확실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더구나 무리를 이루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이른바 일괄유물이어서 흙인형 마다의 성격규명은 물론 서로 관련된 연계성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규명할 수 있는 것이다.우선 경주시 황성동에서 나온 인물상을 살피면 남녀인물상으로 구분되고 복식이 신분에 따라 다르다. 경주 황성동 고분 출토 흙인형 인물상 5점 가운데 2점은 목이 잘려 나갔다.그러니까 3점만이 완전한 상태로 출토되었다.이들 인물상은 1점만이 여인상이고,나머지 2점은 남자상이다.남자상은 복두와 호모를 각각 썼다.호모를 쓴 남자상은 분명한 서역인 모습이다.먼저 주목할 유물은 여인상이 아닌가 한다.이 여인상에는 신라의 다른 흙인형에 나타나지 않은 헤어스타일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경주 황성동 고분에서 나온 여인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높이가 15.4㎝에 불과하지만 표정은 요조숙녀인양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다.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이 여인상은 신라 흙인형 중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용모와 매무새가 단정하다는 느낌이 든다.머리를 정성들여 빗질한 탓일까,가리마가 선명하다.고개를 다소곳이 숙여 앞을 바라보는 눈매도 수줍다. 여인은 긴 옷소매로 입을 살짝 가렸다.떠나가는 님을 먼 발치에서 배웅하는 것 같기도 하고,모셨던 주인을 작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통일신라시대는 순장풍습이 사라진 뒤라 사람 대신에 흙인형을 무덤에 넣었다.그렇다면 여인상은 무덤의 주인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여인은 왼손에 작은 병을 들었는데,저승길을가는 주인에게 술이라도 대접하려는 것이 아닐까….한마디로 부덕이 보인다. 이 여인상이 나온 황성동 고분은 지난 1986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했다.돌을 가지고 널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다음 시신을 안치하는 돌방무덤(석실분).고구려 국내성과 대동강 유역에서 유행했던 이 무덤형태(묘제)는 한강유역을 거쳐 주로 백제와 가야에 전파되었다.경주지역에는 AD669년대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돌방무덤이 들어오지만 중기가 지나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황성동 고분에서 나온 여인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어 만들어진 흙인형이라 할수 있다.이와 함께 출토된 서역인상은 당시 아랍인들이 신라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 고신라 흙인형 남자상(한국인의 얼굴:14)

    ◎금방울음 터뜨릴듯 비통한 모습/주인사망 슬퍼하는 하인을 묘사/입벌린채 망연자실… 몸도 뒤틀려 신라의 흙인형은 조형술이 뛰어나 일찍부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과감한 생략기법을 구사했음에도 표정과 동작에서는 제작자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얼굴에 나타난 감정과 몸둥이를 통해 묘사한 율동이 그것이다.이러한 작품들 가운데는 별 다른 구분없이 그저 흙인형(토우)으로 부르는 한 떼의 유물들이 전해진다.말을 탔거나 끄는 사람,악기를 다루는 주악상,여러 표정의 남녀 인물상이 있다. 이들 흙인형들 중에서 슬퍼하는 남자인물상은 아주 감동적이다.무릎을 꿇고 슬픈 얼굴을 한 인물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서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상(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이들 인물상은 두손을 모아 한껏 예의를 갖춘 자세다.그러나 얼굴은 금새 울음을 터뜨릴 듯 비통해 보인다.슬픔을 못 견딘 나머지 몸 마저 뒤틀렸다.무릎을 꿇은 인물상이 더욱 그렇다. 무릎꿇은 인물상은 슬픔이 너무 커서 망연자실한 것인가,눈을 크게 뜬채 입도 다물지 못하고있다.우람한 어깨 한쪽이 올라간 것은 슬픔을 추수릴 수가 없는 탓이리라.손은 비록 대담히 생략되었을 지라도 그 끝에 까지도 슬픔이 포개어 졌다.소박한 솜씨 뒷전에 생동감 넘치게 살아난 동작과 표정은 가히 신라 흙인형미술(토우미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서 있는 인물상은 오랜 슬픔으로 해서 거친 모습이다.입을 다물 힘도없고,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기력을 잃었나보다.이들 흙인형은 주인을 평생 모셨던 봉사자들이 그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한다.죽음을 슬퍼하는 인물상 중에는 줄(현)이 달린 비파모양의 악기를 타면서 만가를 부르는 주악상도 있다.주인의 저승길을 탄주로 인도하는 이 인물상의 슬픔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자에 대한 봉사자들의 슬픔이 이쯤되고보면 주종관계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이들 흙인형은 불행히도 출토지가 밝혀지지 않은채 막연히 경주출토품으로 전해질 뿐이다.그러나 공식적인 발굴조사에서 흙인형들은 주로 신라 지배자급 무덤들에서 나온다.이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을 위해 껴묻거리로 만들었을 것이다.결국 흙인형은 죽은 주인공의 사후세계 동반자 구실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흙인형이 출토되고 있는 이른 시기의 무덤형태(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경주에서 널무덤(토광묘)이 사라지면서 4세기 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돌무지 덧널무덤은 고신라특유의 무덤이다.한반도 전체는 물론이고 영남지방에서도 경주분지에만 존재하고 있다.시신을 넣은 나무널 위에 다른 큰 나무덧널을 씌우고 돌멩이로 덮은 뒤 흙을 쌓아 만들었다. 이 돌무지 덧널무덤은 신라가 연맹왕국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나타났다.
  • 충북 옥천군 안터 고인돌 인면상(한국인의 얼굴:6)

    ◎작은 돌에 새긴 실눈의 여인/지하 무덤방서 출토… 피장자 묘사/4천년전 신석기시대 유적 추정 우리나라 신석기유적은 해안지대의 조개더미(패총)가 주류를 이루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저 유명한 서울 강동구 암사동 집자리나 무덤과 같은 신석기시대의 내륙 유적도 많다.이러한 유적 가운데는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안터 금강상류에 자리잡았던 고인돌(지석묘)과 선돌(입석)이 있다. 고인돌은 주검을 묻는 무덤시설이다.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무덤형식(묘제).그런데 옥천 안터 고인돌은 좀 별나게 청동기시대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깊게 그어 무늬를 새긴 빗살문(즐문)계통의 토기가 나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전인 신석기시대 말기 유적으로 결론을 내렸다.그래서 선사시대의 문화상은 칼로 두부모를 가르듯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고인돌유적에서는 사람얼굴을 표현한 인면상 하나가 나왔다.길이 12㎝,너비 9㎝,두께 2㎝ 정도의 강돌을 생긴대로 이용한 이 인면상은 여자 얼굴이다.돌 표면을 쪼기수법으로 두 눈과 입을 만들었다.가느라단 실눈을 애써 표현한 흔적이 남아 여자로 보고있다.그리고 여자 몫의 식생활관련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도 이 인면상을 여자로 해석한 이유의 하나다.이들 유물은 모두 고인돌 아래 땅바닥 무덤방에서 나온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고인돌 아래 묻힌 주검의 주인공이 여자라는 사실은 밝혀진 셈이다.1977년 이 유적을 발굴한 충북대 이융조교수팀은 뚜껑돌에 옴팍하게 새긴 구멍의 크기와 숫자를 가지고 피장자의 나이를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여인의 주검 주변에는 노란색 염토를 덩어리째 뿌리고 문제의 인면상,토기,갈돌,×모양을 새긴 돌을 묻었다.그리고 나서 흙을 덮은 뒤에 다시 붉은 흙을 뿌렸다. 이 여인을 고인돌무덤에 장례를 치러준 안터사람들은 2백10m 떨어진 일직선상에 선돌을 세웠다.2백62㎝의 키를 가진 선돌은 배부른 사람이 고인돌을 바라보는 형상이다.배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지름 90㎝의 원을 쪼기 수법으로 돌렸다.원의 지름은 전체높이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수치다.얼굴부분은 길이 45㎝로 다듬어 배 지름의 2분의1이 되게 만들었다.그러니까 얼굴은 전체길이의 8분의1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석기시대를 살았던 안터사람들에게 경탄을 보낼 수 밖에 없다.이들은 2분의1,3분의1,4분의1,8분의1 등의 줄인비를 응용할줄 아는 수리에 밝은 사람들이었다.특히 선돌 배부분을 쪼아서 원을 정확하게 그린 안터사람들은 기하를 일찍 터득했다.도형으로서 원은 그리 흔치 않으나,BC2000년경 아일랜드 그랜지 무덤유적의 둘레돌과 경남 밀양 조음리 고인돌의 덮개돌 등 몇몇 예가 있다. 안터사람들이 고인돌을 쌓고 선돌을 세우는 등의 거석문화를 일으킬 무렵 신석기인들의 인지는 상당히 발달했다.수리에 밝았던 안터사람들은 고인돌 덮개돌과 선돌을 이웃 돌산에서 옮겨오는데 나무썰매를 이용했다.무거운 돌을 옮기자면 공동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우두머리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다. 신석기시대는 언어도 보편화되었다.지금 모양의 세계지도와는 다른 3만5천∼10만년전 구세계에 살았던 구석기인 네안데르탈사람들도느릿느릿 말을 했다는 학설이 있다. 그러고 보면 신석기인들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일제때 함북 웅기 조개무덤에서 개뼈가 나와 신석기인들은 가축도 길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신석기시대부터 개가 컹컹 짖어댔을 안터마을.지금은 대청댐 수몰지역이 되었다.
  • 백제를 다시본다를 마치고/전문가 좌담

    ◎“문화·사회사적 접근… 백제사 인식 새롭게”/금동향로서 보듯 수입문화를 자기화/학자 동원 알기쉽게 풀이… 독자이해 도와/풍납동토성·아치산성 보존대책 시급/문헌자료 부족… 역사분야 공백에 아쉬움/「백제문화권 개발」은 완벽한 역사 복원위해 학술조사 선행돼야 ▷참석자◁ 김기웅 문화재전문위원·고고학 이기동 동국대교수·한국사 최몽용 서울대교수·고고학 서울신문이 10개월여에 걸쳐 매주 금요일 연재해 온 「백제를 다시본다」가 30회를 끝으로 지난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해 연말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세기적 보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출현과 더불어 시작했던 이 기획시리즈는 새로운 시각의 백제문화사라 할 수 있다. 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갈채를 보내온 독자 여러분의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더 충족시켜주기 위해 관계학자들이 참여한 정담을 마련했다.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내려지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김기웅박사=지금까지 백제에 대한 인식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백제를 다시본다」는 일반독자들이 그동안 전문가가 독점했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백제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여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여기에는 참여한 학자들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써 일반독자들의 백제역사를 이해하는데 한 몫을 했지요.「백제를 다시본다」는 한마디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백제연구의 총 결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연구는 너무 세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한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어두운 것이 현실이었어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30여명에 이르는 각 분야 학자들의 전문적 연구결과를 모아놓고 보니 백제역사의 대강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어요. ○백제연구의 총결산 ▲최몽용교수=사실 이런 유의 기획은 과거 TV에서도 여러차례 시도된 적이 있었지요.그러나 TV가 지닌 한계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어요.그런 점에서도 「백제를 다시본다」는 좋은기획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김=욕심이겠지만 백제 뿐 아니라 신라나 가야·고구려도 다루었으면 해요.「백제를 다시본다」에서 보듯 한 지역문화를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이 시리즈는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됐지요.이 향로는 한때 무령왕릉 발굴로 바짝 달아올랐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침체되어 가는 마당에 출토되어 백제를 다시 인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최=향로가 나온지 10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그동안 이 향로 자체에 대한 해석도 불교·도교,혹은 백제의 건국신화와 연관시키는 등 여러가지로 논의됐습니다.여기에 악기와 의복 기타 미술사적인 연구도 활발했지요.물론 뒤에 총체적인 해석이 나오겠지만 이 향로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다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백제문화의 진수입니다. ▲김=이 향로는 결국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역량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백제는 외국문화를 수입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향로에서 보듯 절대 그대로 수용치 않고 자기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공주 벽돌무덤을 보면 중국의 묘제를 받아들였지만 연꽃모양의 벽화를 그려넣는 등 백제화 시켰습니다.당시 무덤의 양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문제였지요.묘제를 바꾸는 것은 바로 집권자의 상징을 바꾸는 것이었으니까요.비슷한 예는 석촌동 2·4호고분과 이번에 익명의 일본사람이 기증한 3백77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백제귀고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귀고리서도 발견 ▲이=문화분야의 경우 그래도 물질자료가 상당히 출토되어 어느 정도 이야기가 가능합니다.그러나 문헌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역사분야는 자료의 혜택을 거의 못받아 연구상의 공백도 많습니다.아시다시피 국내 자료라고는 「삼국사기」가 거의 전부이고 「삼국유사」가 약간 보충하고 있는 정도입니다.「삼국사기」도 그나마 연대기적인 간단한 자료지요.그런데 「일본서기」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는 2백년 동안 백제와의 교섭을 다룬 자료가 풍부합니다.어떤 시기는 일본의 국내 사정보다 분량이 더 많을 정도니까요.그 때문인지이마니시(금서 용)라는 일본학자가 쓴 「백제사 연구」라는 책을 보면 백제는 외교만 한 나라같은 인상입니다.여기에 해방 이후 우리연구자들도 백제의 국가사를 중심으로 정치제도·중앙관제·지방통제기구·관제·중국과의 교섭사 등을 주로 다루었습니다.연구가 정치사와 외교사에 치우쳐 있었던 셈이지요.그런데 백제 자체의 성격을 알려면 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바람직합니다.최근 젊은 연구자들은 고고학적 사고를 일부 동원하면서 백제사의 내부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종래 정치사에서는 백제는 지배층이 북방에서 남하한 고구려계가 서남쪽의 마한계 토착세력을 정복한 왕조로 지배세력과 토착세력의 이중성으로 심한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백제 멸망도 사회구조의 이중성에서 오는 갈등에서 연유했으리라는 추측이었지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이중성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흡수통일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최=토착세력은 고구려계의 정복전쟁 과정에서이미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나머지 공백지대는 백제에 쉽사리 동화되었지요.마한세력이 확실히 남아있었으면 이중적인 구조가 됐겠지만 이미 남하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서기 369년께에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도 이 남하세력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이=「일본서기」에는 그들 남하세력을 「남만」이라고 썼어요.굉장히 경멸하는 표현이지요.이질적인 문화 때문이었을 겁니다.그런데 이 「남만」은 바로 백제에서 부르는 그대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이름에서 보듯 백제의 남쪽이지 일본에서는 서쪽이니까요. ▲최=고구려까지 패배시킨 근초고왕의 힘이 아니었으면 남쪽까지 정벌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백제에 흡수되지 않은 이 세력은 처음에는 직산이 본거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이 세력이 바로 목지국이지요. ▲김=백제의 마한정벌 이후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 대안리의 백제고분을 보면 백제가 정벌 이후 행정관을 파견해 지배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백제화 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백제의 내부관계를 알 수 있는 한 예가 되겠지요.이제 문화재 보존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일본서기 기록 많아 ▲최=백제는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475년까지 한성시대,서기 538년까지 웅진시대,이후 서기 660년 멸망 때 까지 사비시대로 나눌수 있습니다.이 가운데 공주와 부여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유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정부의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조사가 착수되면 유물·유적이 대거 나올 것입니다.유물·유적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보존대책을 지금부터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그런 생각을 미리 안해 실패한 예가 바로 한성백제입니다.올림픽경기장이 주위에 있는 석촌동 3·4호분과 몽촌토성은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풍납동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방치되어 황폐화한 상태입니다.전장이 3.5㎞에 이르는 풍납동토성은 지금 5백m만 복원 되었을 뿐 대부분 길이나는 등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강 건너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이 두 곳에 가보면 우리에게 문화정책이라는게 과연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올해가 조선을 기준으로 서울 정도 6백년이라지만 더욱 중요한 백제시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합니다.이 두 곳은 유적보존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역사관광지로 만 신경을 써도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올해가 「한국방문의 해」라지만 하다못해 문화유적을 관광수입과 연결시키는 정책만이라도 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풍납동토성은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정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풍납동토성은 기원전 18년 백제의 기원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몽촌토성은 4세기 정도로 연구되고 있지요.풍납동토성이 하북위례성,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많아요.강 대안의 고구려 성이 불안해서 도성을 쌓은 것이 몽촌토성으로 보는 거지요. ○단순 관광지 안돼야 ▲김=석촌동고분군을 발굴하니까 적석총 아래에 토광묘군이 나왔습니다.두 묘제는 전혀 이질적이에요.정복자와 피정복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이 지역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입니다. ▲이=조금전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계획이 지역개발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최=그렇습니다.백제권개발계획이 이미 확정은 됐습니다만 착공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학술적 조사를 충실히 하고 학자들의 중지를 모아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행정당국의 백제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자세가 아쉬운 시점입니다. ▲이=유적정비도 중요하고 관광휴양단지도 중요하지만 백제역사의 복원이 그 사업의 궁극적 목표라면 내실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연구원을 대폭 보강해야 하는 것인데 부여문화재연구소를 활성화시키는 일도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연구소를 세워놓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그 중요한 부여에 문화재연구소와 박물관을 합쳐 현장에 나가 발굴하고 보고서를 쓸 수 있는 학예직원은 소장·관장까지 포함해 합쳐 10명이 있을 뿐 입니다.일본의 경우 특별사적이 있는 나라에는 이보다 1백배가 넘는 연구인력이 있습니다.문화재 정책이 1백년 앞을 내다보려면 늦더라도 연구인력을 키워야 합니다.공주에도 박물관이 있고 공주대 사학과가 있지만 연구인력은 몇명이나 됩니까.유적·유물이 모두 사라지고나서 도굴됐다느니 매몰됐다느니 그래봐야 이유가 안됩니다.역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문화재 보존·보호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 입니다.
  • 익산의 유적들(백제를 다시본다:27)

    ◎무왕 익산에 새도읍 건설 추진한듯/미륵사와 왕릉 추정의 쌍릉 이웃에/왕궁리 4∼5㎞ 주변 토성·산성 산재/중국문헌에 “무광왕 천도” 기록… 출토유물도 문헌과 일치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은 주로 도읍지와 그 도성 밖 가까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요즘 개념으로 말하면 수도와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고구려와 백제는 몇 차례에 걸쳐 수도를 옮기면서 그 이웃에 귀족문화흔적을 펼쳐놓았다.수도를 단 한번도 바꾸지 않은 신라 역시 경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형의 문화를 영조했다.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 과정에는 대개 몇가지의 공통적 특징이 나타난다.그 하나가 화려한 왕궁을 건설하는 일이다.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문화현상인 것이다.이어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게 되는데,사찰은 국가가 관장하는 국립사찰형태로 창건했다.불교는 사회문화발전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전제왕국의 호국이념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도성을 지척에 둔 자리에는 반드시 왕릉이 축조되었다.삼국시대의 왕릉은 규모도 물론 컸거니와 묘제를 적용한 방법이나 껴묻거리(부장품)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이들 왕릉을 통해 당대의 문화상이 어떠했는가는 백제의 경우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증거하고 있다.이렇듯 수도로서의 도읍을 경영하는데 왕릉이 수반된다는 사실 이외에 왕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성의 경영도 필수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기록엔 없어 이들 삼국의 도읍지는 모두 역사기록에 나오는 수도들이다.그런데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왕도의 모습이 보인다.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데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어렴풋이나마 왕도로 떠오르는 땅은 바로 오늘날 전북 익산군 금마면과 왕궁면일대다.그래서 일찍부터 이른바 「백제 익산천도설」이 제기되었다.익산을 왕도로 볼 수 있는 정황은 고고학적 발굴이나 현존하는 유적을 통해 여러군데서 발견된다. 이 지역 금마면 기양리에는 우선 백제 최대의 가람규모를 자랑하는 그 유명한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5층석탑의 잔영을 겨우 전하고 있지만,미륵사터에 대한 장기적인 고고학발굴에서 찬란한 백제불교문화상을 속속 파헤쳐냈다.그리고 미륵에서 2㎞ 떨어진 금마면 연동리에는 백제불상광배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석불이 남아 이 지역에 융성했던 불교의 실상을 가늠케 해주고 있다. 우리가 「백제 익산천도설」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익산지역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이를테면 왕궁면 왕궁리 왕궁평도 그러한 지역의 하나다.여기에는 왕궁이 있었다는 구전의 전설이 전해내려오고,실제 백제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현재 5층석탑 1기가 남아 있고,그 이웃에서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든 백제기와가 출토되었다.제석사가 세워졌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는 목탑의 주춧돌이 발굴되기도 했다. ○「궁려사」 기와 출토 이 왕궁리에서는 고고학발굴결과 사구석유구와 함께 관궁사라고 새긴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익산천도설에 더 가까이 접근한 바도 있다.어떻든 왕궁리유적은 백제의 왕궁이 자리한 가운데 왕실의 원찰로서의 제석사가 창건되었으리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이 왕궁리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유적은미륵사다.왕궁평에서 3㎞에 불과한 미륵사는 도성 이웃의 대가람으로 창건되어 미륵하생의 이상향적 불국토를 염원하는 불심을 담았을 것이다. 왕궁리를 중심축으로 한 반경 4∼5㎞ 안에는 백제시대의 여러 성곽이 있다.미륵산성을 비롯,왕궁리토성,익산토성 등이 그것이다.왕궁평을 왕궁이 세워졌던 자리로 본다면,북쪽으로 국립사찰격의 미륵사와 주변 성곽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그래서 8·15이전에 이미 익산일대의 유적배치상을 통해 중국 낙양의 수도경영형식과 근사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라 익산지역에는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존재함으로써 고대국가 수도 경영형식과 꼭 맞아떨어진다.이에 따라 「백제 익산천도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를 전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다.문헌사학과 현존 유적및 고고학발굴성과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익산천도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얼마전에 소개되었다.일본인학자 목전체량이 중국문헌에서 백제천도 사실을 적은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9세기경에 찬술된 이 자료는 「백제무광왕천도 지모밀지 신영정사 이정관십삼년… 천대뢰우 수재제석정사」라고 기술하고 있다.여기서 우선 정관13연은 AD639년으로 백제 무왕40년에 해당한다.그리고 무광왕으로 표기한 왕은 무왕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 이 중국문헌에 나오는 지모밀지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겨 새로 지은 절이 제석정사라고 기술함으로써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들어 있는 익산 왕궁리 출토 명문기와의 절이름과 일치한다.또 제석사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후 목탑에서 꺼낸 유물들을 일일이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왜냐하면 현존하는 왕궁리 5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발견한 김판금강반약경·사리함·사리병 등이 목탑속에서 꺼냈다는 불구유물기록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비와 별군 추정도 그렇다면 중국 문헌자료에 나오는 제석정사와 오늘날 절터만이 남아 있는 제석사는 같은 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 제석사 목탑에서 꺼냈다는 불구들과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불구유물 역시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이로 미루어 지모밀지는 오늘날 익산 왕궁면 왕궁리일대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특히 정관13년은 백제 무왕의 재위 연간이고,익산 미륵사를 무왕때 창건했다는 「삼국유사」기록을 신빙성을 가지고 다시 떠올려볼 수도 있다. 이들 문헌자료나 고고학자료들은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인지 모른다.그러나 학계는 대체로 사비도성의 별도로 익산지역을 수도로 경영했을 것이라는 쪽과 천도를 준비한 단계로 보는 쪽도 있다.백제 익산천도의 꿈이 실현되었는지 아니면 끝내 실현을 못보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앞으로 풀릴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정부가 현재 이 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 국책발굴사업을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왕이 왜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을 구체화했는가를 짚어볼 차례다.거기에는 광활한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거점확보정책이 깔려 있을 것이다.또 한편으로는 무왕 때까지도금마일대에 활거한 마한의 세력집단을 융합 내지 통합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왕동 쌍릉/능산리고분과 같은 굴식돌방무덤/“무강왕릉” 구전… 무왕부부묘 가능성 무왕(?∼641년)은 사비시대 백제의 지위를 한껏 격상시킨 정복군주다.불교문화를 꽃피우면서 신라를 위협,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는데도 크게 공헌했다.특히 익산천도의 꿈을 키운 군주로도 유명하다. 무왕의 익산천도가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떠나 그가 묻힌 지역도 익산지방이라는 설이 제기되어왔다.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이리시 석황동에 있는 쌍릉을 무왕의 능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무강왕릉이라는 전설을 지닌 이 쌍릉은 북쪽의 것을 대왕묘,남쪽의 것을 소왕묘로 부르고 있다.1915년 일본인 다니이(곡정제일)에 의해 백제말기인 7세기경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밝혀졌다. 대왕묘는 지름 30m,높이 5m 정도이고 소왕묘는 지름 24m,높이 3.5m정도인데 모두가 원분이다.내부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부여 능산리고분 돌방과 같은 형식의 널돌(판석)을 사용했다.대왕묘의 경우 널방(현실)을 남북 장축의 장방형 편면을 이루었다.남벽 중안에 널길(선도)이 나 있고 널길은 널돌로 막았다.4면의 벽과 바닥·천장은 다듬은 널돌로 조립한 형태다. 그리고 바닥 중앙에는 한 단이 높은 석재 한장을 가지고 널받침을 마련해 놓았다.조사당시 유물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널만은 그냥 남아 있었다.이 나무널은 복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이 널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렸다.관고리에는 여덟 잎사귀의 연꽃형 밑동쇠(좌금구)가 달려 호사스럽다.널의 크기는 길이 2.4m,너비 0.76m,높이 0.7m로 되어 있다. 이 능묘는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 등의 유적이 이웃에 산재한 사실을 감안하면 무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도 엿보인다.특히 무왕의 익산천도의지와 연관해볼 때 그 가능성은 더욱 짙다.설령 익산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장차 꿈을 실현시킬 염원을 가지고 무왕 스스로가 생전에 이 지역에 묻히길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 6세기 횡혈식 석실분 발굴/김해 유하리서

    ◎호석·시상대 등 구조 완벽/동의대 박물관팀 부산 동의대박물관 발굴단(단장 임효택)은 7일 경남 김해군 장유면 유하리 654의 1에서 원형의 봉분·호석·묘도·연도·시상대 등 거의 완전한 구조의 6세기 후반경 횡혈식 석실분과 어린이·노인을 포함한 5명 이상의 사람뼈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도굴로 인해 약간의 토기조각과 철도자편 1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유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고분이 전해오는대로 가락국 2대왕인 거등왕의 능이거나 장군묘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단은 이 고분이 6세기 후반께 이 지역을 장악했던 지배자와 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횡혈식 석실분이 이처럼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극히 드문 일로 당시 묘제와 사회상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 5명 이상의 유골이 한꺼번에 발굴됨에 따라 가야말기부터 가족을 한무덤에 잇따라 장사지내는 추가장이 횡구·횡혈식 석실분을 통해 이루어졌음이 입증되는 한편 고대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을 밝히는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유교문화의 영향(백제를 다시본다:26)

    ◎고이왕때 경학사상 바탕 관제 정비/6좌평 16관계는 주례·예기 모델로/4세기엔 경학박사 배출… 일에 파견/성왕땐 태학교육 확충… 졸업생 대부분 관직에 등용 백제의 사상은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이는 백제불교가 계율불교로 자리잡는데도 유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백제유교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원시유교와도 부딪치지만,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건국 집단과 직결된다.이들 건국집단은 대륙의 선진학술을 수용,경학론이에 입각한 백제유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백제는 한성시대부터 이미 한대의 경학을 받아들였다.한의 경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의 군현이었던 낙낭·대방과 가까이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그래서 백제사상은 고조선 이후 전승되어 온 원시유교적 본질과 한대의 경향을 기본으로 틀을 잡아나갔다.이러한 경학사상을 국가사회의 문물제도에 접목시켰다.우리는 여기서 유교가 도교나 불교 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백제를 선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은 백제초기인 3세기경 국가제도정비에 우선 나타난다.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는 고이왕(AD 234∼286년)때의 중앙관제 제정이 그것이다.고이왕은 중앙관제를 6좌평 16관계로 제정했는데,이는 「주례」의 육관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공복제도를 갖춘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그리고 고이왕은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예기」명당편에 나오는 남당은 군주가 신하들과 이야기하고 정사를 말하는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예속에도 영향 유교사상에 의해 국가제도가 정립된 것처럼 일반사회의 예속 또한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교는 인간도덕성을 매우 중시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특히 원시유교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예의사상은 백제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중국의 사서 「주서」백제조는 이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백제는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절을 하는 예는 두손으로 땅을 짚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혼례는 중국 풍속과 거의 같았고,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3년동안 복상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체제를 굳건히 다지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유고사상이 깔려있다.국민을 복종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과도 직결된 유교사상은 학술의 발전을 가져왔다.4세기경 백제를 중흥시키는데 공헌한 근초고왕(AD 346∼375년)은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했다.그 사서는 바로 「서기」다.국가 중흥기에 국사로서의 정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동시에 통치차원에서도 필수적인 국가사업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학문을 중시한 흔적은 「주서」이역전에도 나온다.「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경서와 사서를 좋아했는데,그중에 뛰어난 이는 한문을 읽어 글을 지었다」고 기술했다.또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와 강례박사를 데려왔다는 기사도 보인다.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중국에서 초빙한 학자를 가리킨다.그러나 백제에도 일찍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근초고왕때 국사를 편찬한 박사 고흥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파악된다. 우리는 고흥이라는 인물의 백제박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유는 근초고왕 즉위 뒤에 중흥의 시대를 맞은 백제는 중국에서 처럼 관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전문학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이 분야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근초고왕 26년(AD 371년)에 고구려를 크게 무찌른 백제가 한산으로 천도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창설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고구려가 세운 태학의 충격을 받아 동진의 태학제도를 청사진으로 그리고 이 학교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처음 박사로 임명된 케이스가 고흥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사서에는 또 다른 백제의 박사가 등장한다.근초고왕 재위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간 박사 왕인이 그 사람이다.근초고왕의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아직기의 추천으로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일본왕의 태자 도도차랑자의 스승이 되었다.또 경서에 통탈한 그는 왕자 이외에 군신들에게도 경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왕인,일왕자 교육 일본의 사서 「고사기」는 왕인의 이름을 화이로,「일본서기」는 왕인으로 적고 있다.화이나 왕인은일본식 발음으로 다 같은 「와니」(Wani)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자이름의 표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되어있으나,「일본서기」는 아신왕 말년쯤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 처럼 기록했다.30∼40년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왕인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스승임에는 틀림이 없다.백제는 AD 475년 날로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핍박속에 웅진(공주)으로 남천하기에 이른다.이어 백제의 중흥대업을 꾀한 성왕(AD 523∼554년)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여러 제도를 정리,개정했다.내관 12부,외관 10부로 구성된 22부나 22첨노제가 그것이다.이들 관제는 10간12지와 오행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백제의 중앙집권체제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 뒤에 완비되었다.이와 더불어 성왕은 무령왕이 웅진시대에 중국에 남량의 제도를 본떠 학교를 확충하고 오경박사를 둔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강화했다.그래서 성왕 때 들어와서는 전경전사가 비로소 등장하거니와,경학교육을 전담한 종래의태학교육은 신설된 22부의 하나인 사도부가 담당하게된다. ○실용교육도 병행 이 사비시대는 유교주의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시기이기 도 하다.특히 상류계층은 태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아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주요관직에 등용되었다.중국의 군현제와 흡사한 첨노의 지방장관은 모두 상류층 자제로 충원했다는 기록이 「양서」백제전에 나온다.백제가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4세기 후반에 창설한 태학교육이 6세기에 만개한 것으로 보면 옳다. 오경박사나 전경박사로 불리는 학관 말고도 전업박사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전업박사의 존재는 AD 553년(성왕 31년)「백제가 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해에 의,역,역등의 박사를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일본서기」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백제는 경학 위주의 관학성격의 교육을 실용교육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따라서 6세기 후반 백제의 교육은 의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분야로 확대된다.이는 전통경학이 사회전반에 스며들어간지 오래여서 새로운 실용학문을 추구한 일종의 학술적 경향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이같은 백제의 선진교육은 일본의 고대학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다만 1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제교육제도가 뒤늦게 일본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삼국의 유고/고구려·백제선 교육·통치와 직결/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2백∼3백년 뒤져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나라들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유교문화를 일찍 수용했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유교가 부분적으로 처음 들어온 시기는 대략 BC 3세기경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여겨진다.이 시대의 유교는 예의에 입각한 사회정의와 윤리적 정절을 강조하는 이른바 원시유교다.다시 말하면 중국 은대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문화와 주대의 인문주의적 예제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고대국가 가운데 맨 먼저 유교를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다.고구려 유교를 자세히 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몇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유교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그 하나가 사서의 편찬인데,「유기」와 「신집」을 국가사업으로 찬수했다.그리고 교육제도의 정립은 가장 큰 고구려 유교문화의 소산으로,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태학을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설립한 것이다. 백제는 알려진대로 고구려계가 남하하여 세운 고대국가다.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유교체제의 통치력을 갖추었다.그 뿐이 아니라 국가차원의 종묘제도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유교의 교사지례를 실천했다.이는 온조왕이 창업 6년만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는 것과 후대의 왕들이 즉위하는 해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는 한반도 동남쪽에 외지게 자리잡은 데다 중국과도 거리가 멀어 유교수용시기가 늦다.법흥왕 재위시기인 AD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기에 이른다.그리고 「국사」편찬은 진흥왕 6년(AD 545년),국학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AD 682년)에 설치하는 등 유교문화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2백∼3백년 뒤늦은 시기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 묘제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22)

    ◎부여지역선 굴식돌방무덤이 주류/석실바닥 장방형… 삼국중 가장 발달/아치형 널방·물갈음한 널동 등 독특/토착묘제인 독무덤도 능산리·중정리일대 다소 분포 우리는 옛 무덤을 가리켜 고분이라고 부른다.그러나 고고학에서는 옛 무덤이라고 해서 모두 고분의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역사적이나 고고학적으로 자료가 될 수 있는 무덤을 고분으로 파악하고 있다.또 고분은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무덤의 축조방식을 묘제라 일컫는 것이다.삼국시대의 무덤,특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실력자들의 무덤은 도읍지를 중심으로 축조된다.그것도 언덕처럼 생긴 거대한 분구를 이룬 무덤들이 떼로 만들어지고,돌널(석곽)이나 돌방(석실)등의 내부구조를 갖추었다.또 거기에는 껴묻거리(부장품)를 넣어 무덤의 주인공이 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백제시대의 고분 역시 도읍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그리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백제의 고분 변천은 크게 전기(AD2세기∼475년)한성(서울)시대,중기(AD475∼538년)웅진(공주)시대,후기(AD538∼660년)사자(부여)시대로 구분한다.전·중기를 거쳐 사비시대에 이르면 잘 정비된 무덤이 영조되어 백제고분문화의 진수를 오늘날까지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분 내부구조 다양 사비시대 고분들은 다양한 묘제를 가지고 출현했다.널무덤(토광묘)을 비롯,독무덤(옹관묘),화장무덤,구덩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등이 그것이다.이 가운데 백제후기 사비시대 도읍지였던 부여지역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이 특히 주류를 이루었다.그리고 백제불교의 일본전파를 뚜렷이 입증하는 화장무덤과 더불어 여러점의 뼈그릇(장골용기)도 남겨놓고 있다. 사비시대의 굴식돌방무덤은 언덕 위나 언덕 비탈,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또 산기슭이 부채꼴로 펼쳐진 지세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경우 지형을 살펴보면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앞쪽에 해당하는 남쪽에는 평지가 있다.그리고는 서쪽에는 나성이위치한 언덕이 뻗쳐있고 동쪽에는 이에 상응하는 언덕이 자리잡았다.외형이 반구형인 언덕으로 서상총,동상총,동하총등의 왕급 무덤들이 축조되었다. 이들 능산리 굴식돌방무덤은 내부구조는 신라·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를 필두로 신라·가야에서도 일찍부터 나타나지만 5세기중엽 백제지역에서 가장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한다.고구려와 가야의 굴식돌방무덤의 기본평면이 방형이라면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은 장방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또 돌방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석재,벽면의 구성및 천장형태,널길(선도)의 위치 등도 백제적 특징을 지니고 나타난다. 백제 굴식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이 때에 천장은 큰 널돌(판석)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놓았다.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이 있다. ○고구려·가야식 탈피 그 다음 형식은 널방의 평면은 역시 장방형이지만 사방의 벽을 다듬은 돌이나 물갈음한 큰 널돌을 가지고 축조한 굴식돌방무덤이다.이 형식의 굴식돌방무덤 천장은 대개 양쪽 끝이 경사지거나 평평한 평천장을 이룬다.또 천장이 반원통을 이룬 경우도 있다.널방 바닥에는 1∼2개의 널받침(관대)을 마련했다.널길은 남벽 좌우 한쪽에 치우친 것과 중앙에 위치한 예가 있는데 널길 입구에는 돌문(석비)시설을 갖추었다. 이같이 다듬거나 물갈음한 널돌을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는 능산리 제3호분,능산리 벽화고분,능산리 중하총이 꼽힌다.이들 고분은 저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능산리 서하총의 경우 널방의 동·서벽은 잘 다듬어진 큰 널돌을 각각 4장씩 맞물려 세우면서 북벽은 위아래로 2장을,남벽은 널길문 위에 1장을 세워놓았다.천장은 동서벽 위에 1단의 고임돌을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놓고 널돌 4장을 가로질러 마감시켰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벽면과 천장을 1장짜리 화강암·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그 거대한 판돌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벽면에다는 사신도,천장에다는 비운과 연화도를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주검의 집을 멋을 부려 축조한 또 다른 예는 능산리 중하총에서도 찾아진다.널방의 4면벽을 벽돌모양으로 가지런히 다듬은 돌로 쌓았다.그 공인들 오죽했으랴,하는 마음이 든다.동서벽에 해당하는 긴벽을 쌓으면서도 예사롭게 처리하지 않고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점점 오그라뜨렸다.그래서 널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면 아치형 널방을 만나는 것이다.널방 바닥에는 방형의 널돌을 바둑판처럼 깔고 석회를 발랐다. 이 가운데 능산리 벽화고분과 중하총은 사비시대 백제고분의 백미다.삼국시대에 백제고분에서만 볼 수 있는 수준높은 건축기술의 산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백제시대 고분을 통틀어보면 삼국 어느 나라에 비해 다양하게 변화하였고 백제적인 독자성을 끊임없이 추구했다.전기 한성시대에는 고구려적 요소의 돌묻이무덤(적석총)과 봉토분을 차용했으나 이를 곧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따라서 중기웅진시대에는 돌묻이무덤 대신에 분구의 외형이 반원형을 닮은 가장 백제적인 봉토분이 출현하는 것이다. ○벽화고분 등 백미 우리는 지금까지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 한성과 웅진시대의 고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그러나 백제강역의 토착묘제로서의 독무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독무덤을 기술할 차례가 되었다.광복을 맞기 직전에 왕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이웃에서 60∼90㎝가량의 구덩을 파고 묻은 독널(옹관)들이 발견되었다. 이밖에 부여 중정리에서는 부식된 암반 중심부에 지름과 깊이가 각각 30㎝정도인 구덩을 파고 안에 뼈단지를 묻은 다음 돌로 덮은 뼈단지무덤도 발견되었다.부여 염창리에서도 비슷한 뼈단지가 출토되는 등 사비시대 도성 언저리의 여러 독무덤 존재는 흥미를 끄는 무덤유적이기도 하다. 어떻든 고분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많은 자료를 던져준다.당시의 사상으로부터 문화와 예술,때로는 결정적 역사기록까지도 제시하고 있다.특히 제사유적설이 있는 김동용봉봉래산향로 출토지점 바로 옆이 능산리 고분군이고 보면,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능산리고분/모두 7기로 왕급 무덤 추정/백제 굴식돌방무덤의 대표적 유적 백제 전시대에 걸쳐 백제문화요소를 가장 많이 함축한 고분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고분군이다.부여읍에서 논산가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3㎞ 떨어진 해발 1백21m의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고분군은 3기씩 앞뒤로 2열을 이루고,맨 뒤에 1기가 더 있다. 왕릉으로 전해지는 이 고분군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15년 일인학자 구로이타(흑판승미)가 2호(중하총)와 3호(서하총)를 조사하고부터다.이어 1917년 야스이(곡정제일)가 1호 (동하총)와 4호(서상총),6호(동상총)를 각각 발굴조사했다.이 가운데 1호분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유명한 고분으로 떠올랐다. 이 고분군이 들어앉은 자리와 주변지세는 명당으로 알려졌다.동쪽에 청룡,서쪽에는 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튀어나왔다.또 앞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과함께 더 멀리에는 주작으로 풀이될 수 있는 안산이 솟았다.그 너머로는 백마강이 흐르니,풍수지리적으로 입지조건을 잘 갖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없었다.단지 도굴자들이 내팽개친 몇점의 유물만이 수습되었을 뿐이다.5호분 널받침 위에서 칠목관조각,금동맞새김장식,금동꽃모양장식이 나왔다.그리고 2호분에서는 칠기조각,여러점의 금동못 등이 나와 사비시대 백제의 공예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했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2호분이 6세기 중엽,1호분이 7세기 전후,3·4호분은 7세기 이후로 편년되었다.이들 고분을 통해 본 사비시대의 문화상은 외래문화를 백제화한 본격적인 백제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한성시대의 고구려 문화 영향기나,웅진시대의 중국 남조문화수입기와는 크게 대비되는 것이다.
  • 논산 모촌리 백제 고분군/“5세기 지방 수장급 무덤” 확인

    ◎호분 「말재갈·은고리칼」로 신분 추정/백제의 간섭 받던 마한 호족 통치 지역 충남 논산군 양촌면 모촌리에서 최근 발굴된 백제시대 고분군 가운데 일부가 이 지역 토착집단의 수장급 무덤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끌고있다. 공주대박물관팀이 백제문화개발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발굴한 이 고분군은 백제와 마한세력간의 관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주요 유적으로 떠올랐다. 논산 모촌리 고분들은 2기의 독무덤(옹관묘)을 제외하고 나머지 17기는 모두가 돌을 쌓아 만든 백제의 석축무덤.석축무덤들은 유형상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분)으로 분류되었다.이 가운데 17기는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아 널방(묘실)을 꾸몄다.널방 안에는 주검받침(시상대)을 마련하면서 한부분을 판돌로 막아 딸린덧널(부곽)을 설치했다.그리고 천장을 석재로 덮었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들 고분의 출토유물은 토기와 철기가 주류.토기의 경우 회청색의 경질토기와 함께 적갈색 연질토기가 간간이 나왔다.구덩식돌방무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굽다리잔(고배)이나 바닥이 둥글고 아가리가 넓은 항아리(원저광구호)이외의 삼발이토기(삼족토기)와 뚜껑달린접시(개배),병모양토기(병형토기)등은 논산 모촌리 고분들이 지닌 특징적 껴묻거리(부장품)로 지적되었다. 철기유물은 주로 4호분과 5호분에서 나왔는데,무기류와 말갖춤류(마구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특히 5호분 출토 말갖춤은 형태나 내용에서 특이성을 보여주는 유물.말재갈(마함)의 경우 3개의 재갈이 맞물려 고삐로 이어지도록 고안된 이른바 삼연함으로 되어있다.이와 더불어 말안장 아래 붙였던 철선형태의 장식과 띠고리(교구)도 함께 출토되었다.말재갈은 4호분과 14호분에서도 나와 말갖춤을 껴묻거리로 사용한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철제무기류 가운데 관심을 끈 유물은 5호분 출토 고리칼(환두대도)이다.칼 몸체(61㎝)와 손잡이 일부(5.5㎝)는 쇠로 만들었다.그리고 쇠손잡이 부분에 더 긴 나무를 결합시켜 손잡이 길이를 늘린뒤 은제 고리와 연결된 은판으로 나무를 감싸놓은 형태.그래서 은제고리칼로 불리는 이 고리칼의 존재는 말갖춤과 더불어 5호분에 묻힌 주검의 주인공을 이 지역 토착집단의 수장급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들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체로 5세기 중반에서 말기까지로 편년된다.발굴조사팀은 그 이유를 널방에 주검받이를 만들고,딸린 덧널을 설치했다는 점에서 찾았다.그리고 논산 모촌리 고분군을 영조한 집단이 토착세력이라는 사실은 구덩식돌방무덤을 고집했다는데 있다는 것이다.왜냐하면 웅진시대(475∼538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유행한 백제의 묘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기 때문이다. 공주대박물관팀은 5호분에서 나온 뚜껑달린접시와 병모양토기가 추가로 껴묻힌 흔적을 역력히 보였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했다. 이들 토기류는 굴식돌방무덤의 전유물이라는 점과 5호분 무덤의 주인공 신분을 고려하면 백제 중앙정권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이들 추가 껴묻거리 토기는 중앙정권이 내려보낸 조문품정도로 해석했다.그래서 학계는 당시 이 지역은 백제 중앙정권 영향을 받은 마한세력의 호족이 간접통치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있다.
  • 중요 무형문화재 제도/문체부,관련규정 개정

    정부는 30여년의 역사를 가진 중요무형문화재 제도에 비현실적인 요소가 많다고 판단해 문화재보호법중 관련규정을 개정,제도를 개선 키로했다. 문화체육부는 3일 지난 62년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다라 64년 12월27일 종묘제례악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이후 현재까지 94종목이 지정되고 보유자 1백80명이 공예·민속·음악 등 우리의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에 기여하고 있으나 30년이 지나는 동안 시대상황이 변해 제도개선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현재 문화계에서는 ▲보유자의 인정과 관리가 전수자가 모자라며 ▲종목간의 불균형들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문체부는 현행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위해 오는 10일 보유자·전승자·문화재위원·학계·언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의 집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결과를 참고할 계획이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는 ▲예능 24종목에 전승자 9백7명 ▲놀이와 의식36종목에 전승자 8백22명 ▲공예기술 34종목에 전승자 2백72명이다. 정부는 종목이 많은 공예분야에 기능 보유자가 44명밖에 되지않고 이수자나 전수희망생들이 많지않아 이를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 뒤늦은 국가체제 정비(백제를 다시본다:14)

    ◎5세기말에야 마한 완전 통합/부여족 남진정복… 토착세력과 갈등/방·군·성 지방행정망 갖춰 중앙통치/남북으로 긴 영토 사회통합 장애… 군정적 지배 의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의 국가형성 과정은 자못 다르다.주지하듯 백제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해온 부여주의 일파가 마한사회의 북방인 현재의 서울시 일대에서 지배권을 확립한 일종의 정복국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부여족의 이동 정주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백제국가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마한토착세력에 의해 건국되어 발전 도상에 있던 백제 소국을 부여족이 정복한 것인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그것은 어쨌든 백제국이 마한의 땅에서 형성된 부여족의 정권이라는 건국사정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정복자집단과 토착세력집단 간의 이중성이랄까 괴리현상이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백제의 정치·사회사는 바로 이같은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진통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은 그 지형적인 특수성이었다.마한의 영역은 서해안을 끼고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를 차령산맥과 노영산맥이 달리고 서해로는 금강과 영산강이,남해로는 섬진강과 탐진강이 각기 흐르고 있어 여러개의 고립된 지형구를 형성하였다.그 결과 마한사회는 소백산맥 동쪽에 펼쳐진 진한·변한사회에 비하면 현저하게 지역적 통일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더욱이 서해안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마한의 50여개 소국들은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된 중국군현인 낙낭군이나 대방군과 자유로이 접촉했다.이는 백제 주도하의 마한세력 통합을 장기간 방해했다.신라가 진한 12개국을 비교적 단기간내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폐적인 자연환경에 힘입은 바 컸었다.그런데 마한사회는 각기 독자적인 지역성을 고집하는 다양한 지역사회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다원적인 지역적 구성이 백제의 정복자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수성 한몫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마한정복을 시조 온조왕 27년(AD9년)때의 일인양 기술했으나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마한의 최북방에 해당하는 현재의 서울에서 국가형성에 성공한 백제가 남해안에 이르는 마한사회 전체를 호령하게 된 것은 대체로 4세기 후반 근소고왕 때의 일로 짐작된다.다만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백제가 곧바로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에까지 통일된 지배망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최근 전남지방의 고분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측해 볼 때,백제가 이 지방의 마한세력을 명실공히 통합하여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백년쯤 뒤인 5세기 후반,즉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475년)한 이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사실 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은 영산강유역까지는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으며,그대신 이곳에는 옹관묘(독무덤)가 여전히 유행했다.이 지역에서 옹관묘가 석실분으로 바뀌는 시기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보고 있다. 마한영역을 통합한 뒤 백제조정이 들고 나온 통치철학은 중국의 고전인 「주례」에서 많은 것을 차용한 느낌이 든다.이 「주례」는 중국전국시대 말기에 장차 출현하게 될 대제국의 정치적 체계를 위한 일대 청사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거기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통일적·체계적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사비(부여)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바위 뒤에 두었다가 얼마뒤 개봉하여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는 금강 대안의 규암면 울성산성 밑 호엽사터의 바위를 정사암 혹은 천정대라고 하는데 이 「천정」이란 말 자체가 「주례」에서 나온 것이다.즉 이 책의 천관 가재조에 의하면 천관은 3백60관을 총섭하는 최고의 관직이다.그러니까 천정대란 바로 그같은 천관의 정사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주례」의 통치철학 백제의 중앙정치제도를 보면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외관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그 관청의 이름 중에는 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 「주례」에서 따온 것이 적지않다.실은 좌평이란 명칭 자체가 「주례」 하관 사마조의 「이좌왕,평방국」(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이라 한데서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문무백관의 관등은 좌평 이하 16등급으로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명칭 또한 매우 우아한 한식으로 되어 있다.이는 토착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구려·신라의 관등 이름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한편 지방통치조직은 국가권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차츰 정비되어 갔다.한성시대만 해도 전국의 각 지역세력의 대표자를 통해 성과 읍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근초고왕의 대정복사업이 성공리에 완수된 뒤 백제는 전국을 22개의 행정구역(당노)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보내어 통치했다.이같은 담로체제는 공주로 천도하면서 더욱 충실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백제가 정연한 통치망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538년 부여로 천도한 뒤의 일이다.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축적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다.이 사비시대에 백제는 고사성(전북 고부)을 중방으로 하여 전국을 크게 5개 방으로 구획하고 37개 군을 두어 2백개 내지 2백50여개에 달하는 성을 장악했다.이 성은 후일의 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중 가장 취약 이같은 방·군·성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국가권력은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침투할 수 있었다.다만 백제의 지방지배는 멸망의 순간까지 현저하게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민정을 게을리 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대체로 보아 군정적 지배로 일관한 듯하다.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백제사회의 구성이 본디 이중성을 띠고 있는 데다가 지역공동체의 세력이 너무나 강고하여 국가권력이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쨌든 이는 고구려나 특히 신라의 경우와 비교할때 백제의 커다란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신라는 지역사회의 말단인 촌에까지 도사와 같은 행정관을 파견한다거나 혹은 지방세력가인 촌주에게 관등(이른바 외위)을 준다거나 하여 이들을 최대로 지배망에 포섭한 기반 위에서 삼국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원인을 통치체제 면에서 찾는다면 바로 이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패망후의 마한/나주지역 중심 지방호족 할거/고유의 독무덤·금동관 출토가 증거 백제가 마한사회를 통합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걸렸다.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가 비록 정복국가의 기틀을 잡았을지라도 토착세력을 쉽사리 편입시키지 못했다.이같은 정황은 오늘날 전남북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고대묘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난 1917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독무덤떼(옹관묘군)가운데 하나인 제9호분이다.마한의 전통묘제이기도 한 5∼6세기경의 이 무덤에서는 큰고리칼(환두대도),금동관,금동제신발(김동식리)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금동관은 9호분 안에 묻힌 8개의 독 가운데 가장 큰 이음독(합구식옹관)머리부분에서 나왔다.맞새김의 초화무늬 솟을장식(입식)을 단 외관안에 모자가 붙은 수준급 금동관으로 평가되었다. 이같은 유물은 5∼6세기경 까지도 영산강유역에는 막강한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하면 나주지역 중심의 당시 영산강유역은백제 중앙정권의 통치권이 완전히 미치지 못한 가운데 지방호족들이 어느정도 할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따라서 기층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묘제 역시 마한고유의 독무덤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유역 나주지역에 백제의 묘제가 수용되는 시기는 6세기말∼7세기초다.이 시기는 사비시대에 해당하는데,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나타난다.지난 1978년 당시 전남대 최몽용교수(현 서울대)가 발굴한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 제3호분이 이 시기의 백제계통 무덤이다.돌방과 널길(선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긴목항아리(장경호),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은장도조각,금실,쇠못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듯 서남해안에 가까운 마한지역에는 백제의 발길이 더디게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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