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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화분묘 조성 91명명단 공개/정·재계등 사회지도층인사 다수 포함

    ◎불법형질변경·산림훼손 보사부는 호화·불법으로 묘지를 조성한 사람에 대해서는 앞으로 형사처벌외에 명단을 공개하기로 하고 25일 1차로 91명의 호화·불법분묘설치자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명단에는 정부의 묘지면적축소시책에도 불구,전현직국회의원 전직장관 기업체사장 등이 다수 포함돼 충격을 주고 있다. 공개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작게는 50평에서 크게는 3천평이나 되는 조상의 호화분묘를 조성하면서 묘지설치에 따른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형질변경과 벌목을 일삼았는가 하면 공적비등 호화석물에서부터 연못·진입로등을 멋대로 조성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보사부가 이날 공개한 불법·호화분묘설치자 가운데는 석준규민자당의원 봉두완·오범수전의원등 전현직국회의원 3명,민병권전교통부장관 이활전법무부장관등 전직고위관료 6명이 포함돼 있다. 재계인사가운데는 구두회호남정유사장 구자열럭키금성상사이사 전응규주식회사청방회장 이회림동양화학그룹회장등 지도급 기업가 20명이 끼여있다. 봉전의원은 지난 78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 산31에 5백10평크기의 선친묘소에 석등2개 상석1개등을 설치,관리해오다 지난해 9월 경기도로부터 면적과다로 정비지시를 받았다. 권철현전연합철강회장은 지난88년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심석리 산60에 3천70평규모의 호화분묘를 불법으로 설치,임야훼손과 초지훼손혐의로 지난89년 당국에 의해 고발되기도 했다. 현행 매장 및 분묘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개인묘의 경우 88㎡(24평)이상,공원묘지는 7평이상을 쓸 수 없도록 규정하고 이를 어길 경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2백만원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있다. 보사부가 공개한 명단중 저명인사는 다음과 같다. ◇전 현직국회의원 ▲오범수▲석준규▲봉두완◇전직고위공무원 ▲정광호전해병대사령관▲민병권전교통부장관▲홍종국전영등포구청장▲박영하전전매청장◇기업체 대표 ▲권철현전연합철강회장▲민병린 삼성신약사장▲손재호 동양상호신용금고사장▲오종렬로터리클럽총재▲강숙희 패션디자이너▲노경환 상우항공사장▲전응규 청방회장▲김영설 삼성제약사장▲이동희 용인가든대표▲최만기 수유시장대표▲이회림 동양화학그룹회장▲최충경 경인회장▲한상훈 대유산업회장▲구자윤 LG유통사장▲구두회호남정유사장▲박영애 크라운사장▲김정훈 (주)기린사장▲정재원 정식품회장▲김동훈 롯데제과전무▲한석진 남산케이블카사장
  • 강군추모 학생들/화염병 격렬시위

    【광주】 명지대등 서울지역 대학생과 전남대등 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남총련)소속 대학생등 1천여명은 26일 하오4시부터 전남대 5·18광장에서 「고 강경대열사 혁명정신 계승과 5·18 성지순례단 실무자 파견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졌다. 강군 폭행치사 1주기를 맞아 열린 이날 대회에는 강군의 모교인 명지대생을 포함 서울지역 대학생 3백여명이 참석했으며 서울지역 학생들은 대회를 마친뒤 버스에 나눠타고 망월동 5·18묘역의 강군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대학생들은 대회를 마친뒤 『민자당 박살』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행진을 벌인데 이어 정문과 후문으로 가두진출을 시도,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2시간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달아오르는 경선표밭… 민자 양진영 움직임

    ◎결속모임… 출마회견… 서로 “필승” 다짐/“JP도 우리편합류” 기세올리기/김후보측/“대의원민심 보여주겠다”/이후보측/공화계는 내부 혼선… JP,“내부정리” 나서 민자당의 대권후보 경선에 나선 김영삼대표·이종찬의원이 후보등록을 완료하고 25일 대규모 지지모임과 기자회견을 가짐으로써 대권후보 레이스가 공식화 됐다.양측은 모두 승리를 장담하고 있으나 장고를 거듭해온 김종필최고위원이 27일 김후보 지지를 선언할 것으로 예상돼 초반 경선판세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김후보 진영◁ ○…김후보 진영은 이날 상오9시 전국 15개 시·도에서 50명이상씩의 추천을 받아 대의원 1천3백81명의 서명으로 후보등록을 마친데 이어 민정계 위원장 및 전국구 당선자 등 88명의 민정계추대위 인사들은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범계파추대위 구성을 위한 확대회의를 열어 김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의. 이날 상오9시30분부터 열린 김후보측 민정계 진영의 결속단합대회는 이치호의원의 사회로 김윤환 전총장의 인사말,김재순전국회의장의 격려사,김종호 전총무의 범계파추대위 구성동의,이웅희의원의 「우리의 입장」낭독 등의 순으로 약 1시간동안 진행. 김전총장은 인사말에서 『6·29정신과 3당 합당정신을 계승·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평생을 민주발전을 위해 싸워온 김대표가 민자당의 대통령후보로 추대돼 정권 재창출이란 역사적 소명을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 이날 참석자들은 『김대표만이 세대간·지역간·계층간의 갈등과 위화감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유일한 정치지도자』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김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해 연말의 대선에서 기필코 승리할 것을 다짐. 이날 김후보 지지를 결의한 원내외 지구당위원장들은 ▲서울 13명▲부산 6명▲대구 4명▲인천 3명▲광주 1명▲경기 8명▲강원 8명▲충북 5명▲전북 3명▲전남 4명▲경북 14명▲경남 14명▲제주 1명 등 모두 84명이었으나 나웅배의원 등 외유중인 위원장과 빙모상을 당한 이영창위원장 등 13명의 인사들은 불참. 때문에 총 1백57명의 민정계 지구당위원장중 현재 김후보 진영에 합류한인사는 54% 수준에 해당. 한편 이날 모임에서는 김대표추대위 공동위원장(민정계대표)에 권익현 전민정당대표를 선임. ◇…민정계의 지지결의에 이어 이날 낮 순수 민주계도 62명의 지구당위원장및 전국구당선자들이 모여 김후보 지지를 다짐. 최형우장관 주재로 열린 이날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민자당의 대통령후보경선과 12월 대통령선거에서의 승리는 한개인 한정파의 승리가 아니라 이나라 정치의 전진이며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전제,『민주주의의 완결,국민화합을 위한 점진적 개혁및 국민통합을 위해 김대표가 대통령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결의. 김명윤고문은 격려사를 통해 『일부에서는 김대표를 대권욕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하지만 정치하는 사람이 대통령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면서 『김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3당합당정신의 순리』라고 역설. 한편 최장관은 이날 『김종필최고위원이 범계파추대위원장이 될 것』이라고 언급. ◇…경선정국에서 거중조정역을 자임하며 김대표·이의원 등 양후보에 대한 선택적 입장표명을 유보해온김종필최고위원이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김대표쪽으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것으로 알려져 주목. 김최고위원의 측근인사들은 이같은 선택에 대해 『두 후보의 대선득표력을 저울질한 끝에 정권재창출을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YS·JP의 연대배경에는 모종의 「역할분담론」이 개재돼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 김대표와 김최고위원이 24일 시내 H호텔에서 비밀회동을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이와관련 김최고위원의 한 측근은 『YS의 대중적 기반과 JP의 경륜을 합쳐 국정을 운영할 경우 상호보완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 그러나 공화계는 그동안 김용채의원 등 대다수 중진의원들이 친금대표성향을 보여온 반면 김용환의원 등 일부 중진과 대전·충청권 소장파의원들이 반금대표입장을 표명하는 등 내부적으로 혼선을 빚은 바 있어 전체의 15·8%에 이르는 계파 대의원들이 김대표지지로 돌아설지는 미지수. 28일 출범하는 범계파추대위에는 김용채·구자춘의원과 최재구고문 등이 참여할 것으로 보이나 공화계 지구당 위원장 29명 전원이 가세할지 여부는 25·26일동안 진행될 김최고위원의 설득여부에 좌우될 듯. ▷이후보 진영◁ ○…이후보측은 24일 후보등록에 이어 이날 출마기자회견,선거대책본부 현판식을 가짐으로써 출마에 즈음한 의식을 모두 완료. 이후보측은 이제부터 대의원과의 직접 접촉과 개인연설회 등을 통해 세대교체·지역감정타파논리만 제대로 전파된다면 초반 열세가 충분히 만회되리라고 기대하는 눈치. 이후보 비서실장인 박범진당선자는 『우리는 거의 무에서 시작하는 만큼 앞으로 개척여지도 무한하다』며 『대의원의 민심이 어떤지를 보여주겠다』고 장담. 이후보진영 일각에서는 김종필최고위원이 김대표를 지지할 것이 확실시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높으나 박당선자는 『김최고위원이 김대표 지지를 선언할 경우 함께 따라갈 대의원표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 ○…이날 상오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후보의 출마기자회견은 회견장을 가득 메운 대의원과 당원들의 박수 및 환호속에 시종 열띤 분위기로 진행. 이의원은 이날 상오9시 박태준최고위원,심명보·박철언의원과 양창식당선자등 7인 중진협멤버들과 함께 회견장에 도착해 참석자 3백여명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등단,회견문을 읽은뒤 곧바로 기자들과 일문일답. 이의원은 그동안 자신의 경력에 대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어 왔던 탓인지 『국가안보가 중요시되던 때에 육사를 선택,안보에 기여한 것과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변. 이의원은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나도 부끄러운 것이 있지만 그것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피력. 이날 회견에는 이한동·박준병의원을 제외한 7인 중진협 멤버를 비롯,윤길중고문과 김현욱·이긍령·이광로·이동진·고세진·오유방·이윤자·김중위·이건식·정원조·조남조·조기상·지대섭·유경현·이상하·남재두·이덕호·장경우·이영일·홍희표·김장숙·이호종·구천서씨등 30여명의 원내외지구당위원장과 14대 당선자들이 참석. 이날 기자회견에 대해 이후보캠프는 『할말은 다했다』고 만족해하면서 오는 28일의 관훈토론회와 개인연설회등에서 보다 구체적 내용들이 나올 것임을 예고. 이후보진영은 특히 이후보가 『공정한 경선이 되지 않을 경우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힌 사실에 대해 앞으로 여권핵심부가 김대표에게 지나치게 경사될 경우 「경선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 이후보는 당초 이번 회견에서 지구당위원장 지지서명과정에서 벌어진 회유와 협박을 조목조목 지적할 예정이었으나 최재욱대변인등이 『굳이 공개석상에서 김대표측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이들 내용이 빠졌다는 것. 이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이 끝난뒤 박최고위원,심명보·박철언의원등 20여명의 원내외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광화문사무실에서 이종찬후보추대위원회와 선거대책본부현판식을 거행. 이어 이후보는 선거대책본부관계자들과 국립묘지와 백범묘소를 참배한후 상공회의소에서 박최고위원,심명보·박철언의원등과 오찬을 함께 하며 결속을 다짐.
  • 의원들 서명 착수… 세확산 본격화/민자 대권후보 양진영

    ◎선거인 공고따라 추천활동 독려/김윤환의원등 20여명 전략숙의/김대표측/선대기구 발족·위원장 연쇄접촉/이의원측 민자당의 김영삼대표진영과 이종찬의원진영은 대통령후보자 선거일이 19일 공고됨에 따라 전국 각 지구당위원장을 중심으로 후보추천을 위한 대의원들의 서명작업에 본격 돌입했다. 김대표측에서는 신경식비서실장이,이의원진영에서는 장경우의원이 이날 상오 선거일이 공고되자마자 9시5분쯤 여의도당사 4층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후보등록신청서와 6천9백4명의 대의원명단,대의원추천서를 교부받았다. 양진영은 이어 선거대책본부사무실 등에서 각 시·도책에게 대의원명부와 추천서를 나눠주며 추천활동을 독려했으며 시·도책들은 이에따라 곧바로 귀향활동에 들어갔다. 양진영은 추천대의원 숫자가 초반기선을 잡는 관건으로 보고 등록마감일인 오는 26일 이전에 대의원추천의 상한선(10분의 2)인 1천3백80명에 가까운 추천을 받는다는 계획이다. 김대표는 4·19의거 32주년을 맞아 이날 상오 당직자와 사무처직원 40여명과함께 수유리 4·19묘소를 참배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본데 이어 자택에서 손님을 맞지않고 경선구도및 전략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었다. 이의원은 이날 4·19묘소를 참배하고 낮에는 호남지역위원장들을 만나 지지를 당부한데 이어 하오2시쯤 서울 힐튼호텔에서 박철언·심명보·최재욱의원·박범진당선자 등을 만나 경선전략을 논의했다 이의원진영은 이 자리에서 선거대책기구가 공식 발족했음을 밝히고 박태준최고위원이 거론되고 있는 선거대책위원장은 일단 공석으로 하고 부위원장에는 박철언의원을 비롯,박최고와 이의원을 제외한 중진협의체의 5인,선거대책본부장에는 심명보의원,부본부장에는 장경우의원,대변인에는 최재욱의원을 선임했다고 밝혔다. 김윤환전총장등 김대표계인사 20여명도 이날 상오 여의도 선거대책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경선전략을 논의하는 한편 20일 상오 63빌딩에서 민정계의원및 지구당위원장 70∼80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대표지지모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선거분위기를 과열로 몰고가고 상대방을 자극할수 있다는 이유등으로 모임을 연기했다. 이종찬의원도 20일 상오 당사에서 후보경선에 출마하는 공식입장을 밝힐 예정이었으나 우선 대의원추천활동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아래 후보등록을 마친뒤 공식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
  • 오늘 32주년 「4·19」/전국서 기념행사

    4·19의거 제32주년기념식이 19일 상오10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정원식국무총리등 3부요인과 4·19관련단체회원및 시민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이에앞서 「4·19희생자유족회」(회장 최정숙)는 18일 하오6시 서울 도봉구 수유동 4·19묘소에서 희생자추모제를 가진 것을 비롯,18·19일 이틀동안 전국에서 기념탑및 위령탑참배등 각종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 서울 26개 대학생/4·19 32돌 기념식

    서울대·성균관대등 서울시내 26개대 학생 1만4천여명은 4·19 32주년 기념일이 일요일과 겹치자 17일 학교별로 기념식마라톤등 기념행사를 가졌다. 동국대는 이날 상오 민병천총장을 비롯한 교직원 1백여명과 학생 1천여명이 4·19묘소를 참배한뒤 북한산 등반대회를 가졌으며 성균관대학생 등은 4·19묘소까지 왕복마라톤을 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이 한몸 광복위해”… 일 기념식장 폭탄던져/“상해사변 승리” 들뜬 일군 수뇌부 7명 사상/32년 4월 홍구공원에서 거사… 12월에 총살형/장개석 총통,“중국 1백만대군도 못한 일 조선 한 청년이 해냈다” 격찬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매헌 윤봉길 의사가 선정됐다. 4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이 극에 달했던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군 수뇌부를 강타,조국독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윤의사는 거사 직후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19일 가나자와(금택)현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윤의사의 의거와 생애 사상을 되새겨 본다.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는 일황 히로히토(유인)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상해사변의 전승기념식이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홍구공원 안에는 수많은 일본 거류민단과 장병·학생들이 도열해 있었고 중앙식단위에는 일본의 대륙침략 중심인물인 상해주둔 군사령관 시라가와(백천의측)대장과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라(야촌길삼랑) 중장,우에다(식전겸길) 중장 등 군수뇌와 시게미쓰(중광채) 주중공사,무라이(촌정창송) 총영사,거류민단장 가와바타(하단정차) 등 외교관들이 착석해 있었다. 윤의사는 미리 작정했던대로 군중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최후의 의거 준비를 했다. 상오 11시20분 축하식의 1차 행사인 관병식을 끝내고 2차 순서인 축하식으로 들어가 일본 국가가 제창되고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자결용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낸 뒤 재빨리 앞사람을 헤치고 2m가량 전진,단상위로 힘껏 던졌다. 폭탄이 단상중앙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불꽃이 솟아 식장은 순식간에 피와 살이 튀는 아수라장이 됐다. 억눌리고 짓밟힌 약소민족의 원한과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위력이었다. ○군사령관은 즉사 시라가와 대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는 다리가 절단되고 무라이 총영사 등 3명은 중상을 입었다. 윤의사는 거사후 경비군경에게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은 뒤 5월25일 상해주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윤의사의 거사성공 소식을 들은 장개석 총통은 『중국군의 1백만 대군도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윤의사야말로 우리 4억 중국인 누구보다도 위대하다』고 격찬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씨와 김원상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윤의사가 태어난 이듬해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저격하고 그 다음해는 한일합방으로 2천만 민족이 조국을 잃었다. 윤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개벽」잡지등을 읽으며 농촌활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나갔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하고 농촌개혁운동을 펴는 한편 체육회·월진회 등을 조직,농민들의 친목과 생활개선·체력향상 등에 몰두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지며 원산총파업·용천농민투쟁 등이 일어나자 윤의사는 일제에 항거,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동지들을 규합했다. 1930년 3월6일 윤의사는 『장부가 집을 떠나니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편지를 남기고 사랑하는 처자를 두고 만주로 망명했다. 31년 8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겼다. 보다 큰 인물과 접하면서 무엇인가 나라를 위한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윤의사는 프랑스 조계 안공근 선생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동포가 경영하는 공장에 취업하는 한편 밤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익혔다. ○김구선생 찾아가 그해 겨울부터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맹세했다. 1932년 1월8일 일본 도쿄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본왕을 폭살하려다 실패하자 일본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김구선생은 무력에 의한 의열투쟁을 계속할 조선인 청년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열혈청년들이 김구선생 휘하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무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중 『4월29일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행사를 일본군의 상해점령 기념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을 지참하고 행사에 참가하라』는 일본신문의 보도를 읽고 기념식에 참석할 일본군의 수뇌부를 일거에 괴멸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거사를 위한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야채행상을 가장한 윤의사는 여러차례 행사장을 사전 답사하고 지형·지물을 익혔다. 4월26일 윤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고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김구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나는 붉은 충성심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들을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윤의사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살신성인의 길에 올랐다. 일본거류민으로 위장한 윤의사는 기념식장에 들어가 예정된 작전시간에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인 군수뇌부에 폭탄을 터뜨려 2천만 조선민족의 울분을 풀어주었다. 일본헌병에 붙잡힌 윤의사는 『나의 각오는 철권을 가지고 적을 즉시 타도함이다. 죽어 관에 들어가면 쓸모없다』고 말해 거사의 성공을 즐거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의사는 일본상해 주둔사단의 모국기지인 가나자와(금택)현으로 옮겨져 12월19일 상오 7시27분 총살형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효창공원에 안장 윤의사의 유해는 46년 5월 순국 14년만에 가나자와에서 봉환,효창공원 묘소에 안장됐다. 윤의사의 생가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광현당이 복원되어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윤의사는 22년 배용순씨(88세 별세)와 결혼,종과 담 두 아들을두었으나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죽고 종은 농수산부에서 근무하다 퇴직,원호사업을 하다 80년대 후반 어머니 배씨보다 먼저 별세했다. 윤의사의 동생 남의씨(76)는 현재 예산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윤의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광복군 창설 중국지원의 계기로/이강훈 광복회회장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겼을때 우리 민족은 수많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찾기에 목숨을 바치는 지사와 선열들을 배출했다. 당시 선각자들은 나라를 찾기 위한 일념으로 사랑하는 부모·형제·처자를 남겨두고 험난한 형극의 길로 뛰어 들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문맹퇴치와 농촌개혁을 통한 민족 부흥운동을 주도하다 중국으로 망명 일본군국주의 군 수뇌부에 철퇴를 가해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윤의사의 상해 의거는 민족항쟁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으며 약소민족의원한을 풀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윤의사의 쾌거가 알려지자 당시 4억 중국인들은 한국사람들만 보면 『당신들 조선인들은 훌륭한 민족』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윤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증오의 눈으로 우리를 대하던 중국인들은 신뢰의 우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33년 낙양군관학교에 한국청년을 위한 한청반을 설치해주고 40년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창설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윤의사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84세인데 25세로 순국영령이 되어 자손만대의 사표가 되어 있다. 필자는 윤의사의 뜻을 받들려면 거사도 실패하고 무엇하나 남긴 것 없이 살고 있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짧은 일생동안 모든 것을 구국의 제단에 바친 윤의사의 성스러운 위업을 거울삼아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지름길로 매진해야 한다. 윤의사 의거 6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이같은 조국이 있게 해준 윤의사의 명복을 빌면서 새로운 각오로 선열의 순국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성결한의혈만이 역사의 앞날을 눈부시게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화장에 조문객 줄이어

    이승만초대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 생활관에는 19일 이른 아침부터 노태우대통령·박준규국회의장·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과 김종필·박태준최고위원,민주당의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등이 보낸 조화가 잇따라 답지했으며 백두진전국회의장·이한빈전부총리·윤보선전대통령미망인 공덕귀여사 등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빈소에서는 아들 이인수씨(61·명지대교수)·며느리 조혜자씨(51)와 손자 병구(22·연세대 정외과4년)·병조군(20·한양대 사학과3년)등 가족들이 조문객들을 맞았다. 한편 고인의 유해는 23일 상오8시 이화장을 떠나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중구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영결예배를 본뒤 11시 동작동 국립묘지 공작봉에 있는 이전대통령묘소에 합장된다.
  • 외언내언

    님은 갔습니다./아 아,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길을 걸어서/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만해 한용운의 대표작 「님의 침묵」의 첫 구절.사랑의 본질을 노래한 서정시이지만 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한이 서리 서리 맺혀있다.◆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33인중의 한분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썼던 만해는 당대의 민주시인이자 「불교유신론」을 제창했던 스님이기도.그러나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할 가장 큰 교훈은 도도한 기개와 지조로 일관했던 투철한 애국정신.◆까까중머리에 검정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검정고무신만 신었던 만해는 3·1운동 거사후 감옥에 갇혔을때 「옥중투쟁 3대원칙」을 철저히 지켰다.첫째 변호사를 대지말것,둘째 사식을 취하지 말것,셋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것.◆만해는 서울 성북동에 「심오장」이란 옥호를 붙인 조그마한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북향이었다.일제의 총독부쪽은 바라보기도 싫다는 고집때문.그 북향집에서 한겨울에도 장작불을 지피지않고 지냈다.어느날 지조를 꺾은 육당 최남선이 길거리에서 만해를 보고 반가워 하자 『육당은 벌써 죽었어』라면서 침을 탁 뱉고 돌아서 버렸다는 일화.◆만해가 태어난곳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박철부락.이곳에 만해생가가 복원돼 6일 준공식을 가졌다.생가복원을 계기로 4천3백평의 부지에 만해기념관,사당,시비등을 건립하고 서울 망우리묘지에 있는 묘소도 이곳으로 이전,역사공원을 만든다는 소식.반가운 일이다.겉치레가 아니라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 공원을 찾아 만해정신을 배우고 기릴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 만해 기념관 건립/기념사업 본격화/노 대통령 지시

    노태우대통령은 6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개최된 만해 한용운선생의 생가복원 준공식에 관계비서관을 보내 유자녀 한영숙여사(58)에게 금일봉을 전달,위로하고 복원공사를 위해 노력해온 현지 관계공무원들을 격려했다. 노대통령은 이번 생가복원을 계기로 4천3백여평의 부지에 만해기념관 사당 시비 등을 건립하고 현재 서울시립 망우리묘지에 있는 묘소를 이장하는 등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3·1 독립운동정신과 민족정신 함양을 위한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도록 지시했다.
  • 안두희씨,백범묘소찾아 참회 눈물

    지난 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씨(76)가 28일 하오5시10분쯤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묘소를 참배했다.안씨는 베이지색 코트,검은 바지차림으로 백범묘소에 도착,50㎝높이의 대리석제단에 얼굴을 묻고 15분간 흐느끼다 소리내어 울었다. 안씨는 『지난 87년 「민족앞에 진실을 밝히라」며 나에게 테러를 가했던 권중희씨(51·마포구 도화1동 363)가 오늘 아침 집으로 찾아와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해 사죄를 표시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편강열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의성단 조직,만주벌 항일무장투쟁/장춘 일 영사관 습격,7명이 일경 60명 사살/하얼빈역 광장서 포위된채 치열한 총격전/중과부적으로 피체… 옥중고문 후유증으로 37세에 순국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애사 편강열의사가 선정됐다.황해도 연백에서 출생,2일로 탄신 1백주년을 맞은 편강열열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29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편의사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일제하인 1924년8월 만주 하얼빈역 광장에서 완전무장한 일본경찰들이 무장항일독립운동가 편강렬의사를 체포하기 위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만주일대에서 3백여명의 조선청년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하던 편의사는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한뒤 길림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하얼빈역으로 왔다가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의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편의사는 길가 상점에 뛰어들어 장시간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왜경에 체포됐다. ○만철병원도 습격 편의사는 1924년 대원 5명을 데리고 봉천의 만철병원을 습격한뒤 같은해 대원 6명과 함께 장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7시간에 걸친 격전끝에 적 60여명을 사살해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왔다. 일경에 체포된 편의사는 25년 평양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중 고문으로 인해 생긴 지병으로 29년1월16일 안동현 적십자병원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졌다. 편의사는 병상에서 『내가 죽거든 유골을 내가 활동하던 만주땅에 묻고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편의사는 1892년 2월2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씨의 4남중 3남으로 태어났다. 편의사는 어려서부터 애국심과 충의심이 깊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4세의 어린 나이에도 의분에 떨어 1주일간 항의 금식했다.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복수를 주장하며 의병이 봉기하자 경상·충청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이강년대장을 방문,이대장 휘하에 들어가 소집장 및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의병을 인솔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3일간 격전을 벌이다 부상을 입은 편의사는 190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편의사는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항일운동에 정진하다 1911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5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뒤에는 의병동지들과 무장결사대 광복회를 조직,친일파·민족반역자·일본경찰을 처단하는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일대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동생 덕렬씨를 상해임시정부에 파견,국내조직과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그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최명식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조달한뒤 항일무장투쟁을 할 거점을 마련키위해 군사준비단을 조직하자 편의사는 황해도 대표로 활동했다. ○밀고자 즉결처분 1919년 9월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된 편의사는 징역1년을 선고받고 21년에 출옥했다. 23년1월 편의사는 동지 김경배·김태규·조종호등과 함께 중국의 독립운동상황을 살피기위해 북경으로 가 상해·만주등지를 전전했다.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편의사의 눈에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논쟁만 일삼던 임시정부의 무력함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23년 10월 만주로 돌아와 강진지·양기탁·남정동지들과 무장항일투쟁비밀결사인 의성단을 조직,단장에 피선됐다. 의성단의 활동무대는 길림성과 장춘일대의 넓은 평야지역이었다. 편의사는 이 지역에 이주한 동포들에게 『조선인단체를 조직해 이민족에게 억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민족적 공감대를 넓혀갔다. 재만동포들의 물적 인적지원을 받은 편의사는 2백50명의 의성단원을 무장시켜 장춘·봉천일대의 일본인 병원·영사관·우체국·경찰서·철도·군수기지를 습격,혁혁한 공을 세웠다. 일본은 경찰력과 헌병·밀정등을 총동원해 편의사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신출귀몰하는 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사는 의성단활동을 하는 한편 만주지방의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전만통일의회를 조직했다. 편의사는 만주지역의 비밀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해서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만드는 공작을 하던중 24년8월 하얼빈역에서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포위됐다. 당시 이범석장군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어 밀고자 김을 즉결처분했다. 편의사가 체포되자 의성단활동은 위축되고 2∼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원들도 뿔뿔이 헤어져 소멸됐다. 옥고를 치르는동안 편의사는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척수염을 얻어 불구의 몸이 됐다. ○왜놈치료는 싫다 혼자 일어설 수도,앉을 수도 없는 지경이된 편의사는 병보석을 얻어 28년 선천의 미동병원에 입원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친지와 가족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28년9월 동생이 있는 만주의 안동으로 옮겼으나 4개월만인 1929년1월16일 순국했다. 편의사의 묘소는 중국 요령성 단동시 원보구 인충가 진강산 장군봉 뒤편에 있었으나매장후 61년이 지나는 동안 이 지역이 시가지로 개발되어 비석은 커녕 묘소의 흔적조차 남지않게 됐다. 지난해 가을 국가보훈처와 편강렬의사 탄신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편의사유해봉환반」을 구성,현지답사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편의사는 후사가 없어 동생 덕렬씨의 2남인 충무씨를 양자로 입양했으나 충무씨도 지난 80년대초 미국으로 이주했다. 정부에서는 62년 편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마지막 의병장” 불굴의 절개 빛나/17세때 13도창의군의 서울탈환대작전 참가 편강렬의사에게는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편의사의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고 역사적 평가도 높지 못한 실정이다. 구한말의 의병전쟁에서 20연대 중반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운동에 참가해 청춘을 불살라버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책에서는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다.이때문에 편의사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무덤마저 정확한 자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편의사는 중국단동 공동묘지 어디인가에서 압록강과 강건너 신의주를 바라보며 조국통일을 애타게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편의사가 13도 창의군의 서울대탈환 작전에 참가한 것은 17세때이다.여기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니 이 사실만으로도 독립운동가로 치부될 수 있다.그러나 이 부상은 37세로 순국할때까지 20여년간의 항일투쟁의 시작일 뿐이었다.1910년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던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으로 연루되어 최초의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나머지 그의 투쟁사와 기묘한 일치를 보여준다. 「양양한 압록강물은 흘러서 어드메로 가는가」라는 그의 옥중시에서 보듯 편의사의 일생은 압록강과 숙명의 관계를 맺고있다. 3·1운동후 두번째 옥고를 치르고 압록강을 건넜을 뿐아니라 세번째 마지막 옥고를 치를때도 압록강을 건느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한국인의 성품 가운데 끈기를 제일로 드는 이가 많다. 편의사야말로 독립운동 하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끈기의 대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것은 불요불굴의 절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마지막 재판정에서 7년 징역형이 내려졌을때 파안대소했는데 이는 그가 의병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의병정신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편의사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편의사의 탄신 1백주년이기도한 2월을 맞아 새삼 조국통일로서 망국한을 달래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 실효성있는 것부터 하나씩(사설)

    복잡다기한 국내외정세속에서 우리의 주요과제인 남북문제를 풀어갈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이 10일부터 3박4일간 서울에서 열린다.이번회담에서는 지난번 평양회담에서 제목만 합의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내용을 다루게 되어있어 표면상의 기대는 크지만 최근 일련의 정황으로 보아 어느만큼 기대충족이 될지 의심스럽다. 우선 남북회담 자체만을 놓고보아도 순탄치않을 조짐이 보인다.남북은 이번 회담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판문점에서 네차례나 실무대표접촉을 갖고 상호체제의 존중,내정불간섭,비방 중상과 파괴전복행위중지,이산가족재결합,교류협력등 원칙적문제에 관해 합의했다. 그러나 교류를 실천하기 위한 서울·평양상주대표부 설치라든가 3통위원회의 설치,언론개방등 구체적인 문제에는 북한이 반대의 태도를 확실히 함으로써 합의서 내용절충이 난항을 겪고있다.북한측의 이같은 자세는 말로는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면서 막상 구체적인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이중성의 표본으로보여 유감이다. 회담외적인 최근의 해프닝들을 보아도 북한이 과연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에 뜻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몽양묘소에서의 김일성 꽃다발소동이라든지,문선명통일교주를 불러놓고 벌이는 「말장난」이라든지,그밖에 어떤것을 보아도 「북한을 믿을 만하다」는 평가가 나오기 어렵다.오히려 통일전선전략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있다는 우려만 심해질 뿐이다. 이같이 신뢰를 기초로 하지않는 대화는 진정한 합의와 결실을 낳기 어렵다.더욱이 지난번 회담에서 제기됐던 북한핵문제가 이번회담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안이 될것이 틀림없다고 본다면 과연 어떤 획기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회의적이다. 사실 구체적인 담보없이 남북의 평화와 안정등에 대한 원칙적이고 선언적인 합의서가 나온다해도 북한의 핵위협이 점차 가시화되고 이를 제어할 방법이 없다면 합의서는 휴지쪼가리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신뢰구축을 위한 구체적 장치 없이 무조건 불가침선언만 하면 된다는 주장은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남북간의 신뢰구축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며 그같은 신뢰를 토대로 점진적인 통일작업을 이루어나가야 된다고 믿는다.따라서 이번 회담도 신뢰구축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 논의되고 양보와 조화속에 어느정도라도 채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이같은 노력은 화해와 평화라는 세계조류나 통일열망이라는 국민적 기대와도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지금 통일이 싫다는 국민은 없다.이제는 통일로 가기위한 보다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방안이 남북간에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이번회담은 이같은 기대에 최소한이라도 부응하여야 할것이다.말로는 「파괴전복행위 포기」라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포기는 커녕 이를 조장하는 이중성이 계속 용인된다면 이는 남북 7천만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정부는 신뢰회복과 점진적 교류라는 대화기조를 확실히 유지하면서 남북간의 관계를 크게 저해할 요소,예를 들어 북한핵문제등은 확실한 원칙아래 흔들림없는 자세로 임해야 할것이다.
  • 북한테러 사령탑은 김정일/KAL 피격4돌 계기로 본 실상

    ◎니카라과등 38국에 요원파견 훈련/작전부는 요인 납치·정찰국선 파괴공작/60년대 이후 22개국 반정단체 지원 1백15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대한항공 858기폭파사건이 발생한지 29일로 네돌이 됐다.최근에는 국제사회에서 테러국가로서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는 북한이 핵사찰까지 거부함으로써 전세계에 적지않은 우려와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미케네디재단 상임 연구원인 게리 밀홀린은 최근 『북한의 핵은 세계 암거래시장으로 흘러나갈 것이며 이 핵은 테러리스트 손에 넘어갈 경우 한개의 폭탄으로 워싱턴시는 물론 주요 도시를 파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보내고 있을 정도다.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테러조직과 폭력혁명의 실상등을 알아본다. ▷테러기구◁ ▲북한의 테러기관은 통치기구의 핵심인 로동당 중앙위 직속기구로 돼있는 연락부,통일전선부,작전부,대외정보조사부,인민무력부 정찰국등을 들 수 있으며 김정일이 직접 이들 기관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연락부는 주로 남한내간첩망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며 아웅산 폭파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통일전선부는 테러활동외에도 남북대화와 대남선전선동,심리전등도 도맡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전부는 테러리스트의 훈련과 요인납치및 살해,외국인 테러리스트에 대한 훈련과 지원업무등을 하며 대외정보조사부는 해외정보수집과 테러를 병행하고 있다.또 인민무력부 정찰국은 4만명 규모의 특수8군단을 비롯,경보병여단및 해상특공부대등 모두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면서 파괴공작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테러분자양성◁ 테러리스트는 사상적으로 견실한 사람,다시 말해 주체사상에 투철한 사람으로 가정·사회적 배경,당성등 주위환경과 사업조건이 좋아야하는 것은 물론 육체적 건강이 뒷받침돼야 한다.정치,군사,경제,사회문제등에 대한 판단이나 분석이 예리해야하며 또 목숨을 버리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입이 무거운 것도 필수적인 선발조건이다. 훈련과정은 단기 3∼6개월에서 장기 1∼2년까지로 돼 있으며 훈련내용은 도시및농촌게릴라 전투에 대한 이론과 전술등으로 육박전,각종 무기및 폭발물 사용법,사보타지,정찰법,지도작성법,비밀통신법,비밀거점확보방법,주변사람조종법,공공시설물 파괴방법,요인납치및 암살방법등을 모두 배우게 된다. ▷테러실상◁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이후에는 뜸해졌으나 그전만 해도 대남테러및 게릴라활동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저지른 테러·공작활동도 적지 않았다.대남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와대 습격사건(68년),울진·삼척 침투사건(68년),미얀마의 아웅산 묘소폭파사건(83년),대한항공기 폭파사건등이 있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들 기억에 남아 있다.이밖에도 크고 작은 테러,게릴라 활동은 부지기수여서 지난 67년과 68년에는 각각 6백29건과 5백64건을 기록했을 정도다. 해외에서는 지난 82년 파나마에서 반정부파괴활동을 지원하다 북한요원 5명이 추방됐으며 인도에서도 대학생을 세뇌하려다 발각돼 요원 1명이 역시 추방됐다. 이밖에도 북한은 80년대 들어 베네수엘라,튀니지,버마,스리랑카,콜롬비아등지에서 반정부활동을 지원하다적발되기도 했다. 또 북한은 69년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등 36개국에서 1만여명의 요원들을 데려다 게릴라 훈련을 시켰으며 니카라과,엘살바도르등 38개국에 특수요원들을 파견,현지에서 훈련을 시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뿐만 아니라 북한은 테러수출국답게 6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인민해방군등 22개국의 반정부단체에 소총,탄약,수류탄,경기관총등 무기및 자금을 지원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이미 결정된 일” 조기귀환 강행/북 여성 참가단 평양행 이모저모

    ◎여씨,“가는 곳마다 막았다” 퉁명스레 불평/군사분계선 다시 넘어와 동창생과 포옹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 북측 참가단 15명은 29일 상오 11시52분 승용차편으로 판문점 남측지역 「자유의 집」앞에 도착,환송나온 남측 참가자들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나눈뒤 7분만에 북으로 귀환. 남측 이효재씨와 함께 도착한 여연구씨는 마중나온 북측 연락관들과 악수를 나눈뒤 이씨에게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작별인사. 이에 이씨가 『또 만납시다』라고 화답하자 여씨는 『그럼요.자주보면 뭔가 이뤄지겠지요』라며 서운한 표정. 이어 정명순 조평통참사등 북측 여성참가자들도 남측 참가단과 일일이 포옹하며 『사랑합니다.평양에서 만납시다』라고 인사. ○…여대표는 북측지역으로 돌아가면서 일정단축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소 퉁명스런 어조로 『다 참았다.동창들도 못 만나게하고 가는 곳마다 다 막았다.우리 여성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통일을 하러왔다』며 불만을 토로. 그러나 북으로 향하던 그는 이화여대 동창인 이효재 윤정옥씨등과의 헤어짐이 아쉬운 듯 군사분계선을 다시 넘어와 이들과 포옹하며 거듭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남측 윤정옥씨가 여씨를 껴안으며 『미워 죽겠다』고 하자 여씨는 『밉지,미우면 꼬집으라우』라고 응답. ○…28일 하오 북한참가단의 조기귀환을 통보받은 주최측은 이날 자정부터 29일 상오3시30분까지 조기귀환결정을 번복하도록 마라톤 설득을 벌였으나 끝내 실패. 설득작업에 나섰던 이우정씨는 29일 상오 피곤한 모습으로 『북측참가자들은 「한번 결정된 입장이라 바꿀 수 없다」고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며 『그들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 이씨는 특히 『북측참가자들이 미리 주최측에 불만사항을 전해줬더라면 사전에 시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그러나 이번 일정동안 남과 북 사이에 사고및 표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실감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덧붙였다. ○…여연구씨는 출발에 앞서 이날 상오10시25분쯤 토론회장인 올림피아호텔 1층 로비로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사무국직원들과 포옹한 뒤 사촌동생 여명구박사와 몽양선생 추모사업회 관계자들과 작별인사. 이 자리에서 여명구박사는 여씨에게 『언제 또 다시 만나냐』며 눈시울을 붉혔으며 여씨는 이우정씨를 가리키며 『내년봄 평양에서 3차토론회가 열릴 때 같이 오라』고 응답. 또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여씨에게 26일 몽양묘소 참배때 찍은 기념사진액자를 선물. 여씨는 상오10시50분쯤 호텔앞에 대기중이던 서울1가7859호 감색 그랜저승용차에 우리측 이효재씨와 나란히 타고 판문점으로 출발. 여씨의 사촌동생 명구박사는 차가 떠나기 직전까지 뒷문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기약없는 이별의 아쉬움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이 글썽.
  • 「정치」로 지샌 서울의 「북녀」들/함혜리 생활부기자(오늘의 눈)

    서울토론회에 참석한 북한참가단이 5박6일의 서울 체류일정을 채우지 못하고 29일 북으로 돌아간다.우리 주최측의 토론회는 끝났으나 예정대로 하루를 더 묵어가라는 간곡한 권유가 있었음에도 이를 뿌리치고 평양행을 강행키로 한 것이다. 이번 토론회는 남북여성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이땅에서 만났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예견된 모임이었는지 모른다.그래도 민족끼리의 만남이라는 데서 행여 바늘귀반치라도 동질성 회복의 물꼬가 트이지나 않을까 하는 미련을 모두 접어두지 못했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는 첫날부터 무너져 버렸다.북으로부터 비밀스럽게 가져온 정치시나리오 「김일성의 헌화」가 몽양묘소에서 실연된 것이다.그 묘소속에 잠든 이의 딸(여연구)이 있어서 별일이 없었던 것처럼 무례를 덮어주었지만 정치적으로 챙길만한 일에는 모두 욕심을 부렸다. 그들은 우리와의 만남에서 늘 휴대하는 단골주문서를 이번에도 예외없이 내밀었다.우리 실정법을 위반한 방북인사나 그 가족과의 면담요청,고려연방제 주장,미군과 핵무기철수,팀스피리트중지등 온갖 정치성 구호가 그것이다.6·25를 계속 북침으로 우겨댄 토론회장에서는 그런대로 웃어주었다.그들은 서울에 온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기귀환 이유로 우리 국내의 몇몇 단체들이 호텔주변에서 보여준 시위가 무섭다는 것을 내세웠다.서울의 시위는 그들이 익히 아는대로 일상적일 만큼 흔한 것이어서 사실상 명분에 불과한 느낌이다.그들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부인회등 여성단체들이 수차례 초청장을 보냈으나 그동안 묵묵부답이였다는 데서도 찾아진다.그러한 북한이 재야 여성단체 주축의 이번 행사초청을 선뜻 수락한 것 자체가 벌써 정치목적의 「선별수락」이라는 평가도 나와있다.북측은 특히 이화여대방문일정 취소에 크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방문의 최대목적으로 설정했을 「정치한판」이 불가능해지면서 조기귀환을 서두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우리는 결국 변화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보았다.지구위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남은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모두 벗어던졌음에도 그들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막무가내로 휘정거리고 굳이 떠나겠다는 북의 여인들.표정 마다에는 서울토론회 주제의 대강 「평화…」와 걸맞는 「화해의 빛」은 얼씬도 하지않았다.통일은 좀 멀었나보다.
  • 북한 여성의 「서울나들이」(사설)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린 서울토론회의 공식 일정은 끝났다.46년만에 「여성대표」자격으로 참석한 북한여성대표들의,「평화모색」과는 관계없는 행동만 남겼을 뿐인 이 회의의 흔적을 이쯤에서 한번쯤 곰곰 톺아보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우선 북한여성 대표들은 그들이 목적하고 온 것을 십이분 달성한 것같다.첫째 그들은 토론주제 바꾸기를 관철했다.원주제와 직접 관계없는 「통일문제」를 토론 내용으로 「쟁취」한것이다.그것으로 그들은 배제된 「정치」를 다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두번째로 그들은 송이수까지 계산된 김일성화와 김정일화로 엮어 만든 김일성꽃다발을 「남한인민들」앞에서 당당하게 떠받들고 소리내어 그것을 예찬하는 일에 성공했다.그것도 민족 지도자의 한사람이었던 몽양의 묘소를 교묘히 이용하여. 세번째로 그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확성기를 대놓고 이렇게 외치는데 성공했다.『북은 남침을 한 적도 없고 현재 할 의사도 없으며 앞으로 할 계획도 없다』.그리고 『있다면 북침이 있을 뿐이다』라고 거침없이 소리치는데 성공한 것이다.이 대목에서 토론장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고 한다.어처구니 없어서 나온 실소였겠는데 북한대표의 귀환 「보고」용으로는 이 웃음조차도 소득이 될 것이다. 이밖에도 「이대방문」이라는 카드도 효과적으로 써먹었다.이슈가 없어서 골몰중인 운동권학생들에게 근사한 빌미를 줄 수 있었으므로 성공하든 안하든 손해볼게 없는 카드였다.주최측의 사려없는 준비과정과 결정이 그런 결과를 불렀다.이 카드를 거꾸로 이용하여 시장이나 거리구경까지도 그들은 배척할 수 있었다.문목사와 임수경이라는 「약점」을 슬쩍슬쩍 건드려가며 장난성 자극을 충분히 즐겼던 그들은 북쪽 체제가 파견한 여성 척후병 역할을 잘 해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충격도 아니고 실망도 느끼지 않는다.그들이 벌이는 이 가장행열의 레퍼토리에는 우리도 충분히 적응되었으므로 실소나 한번 하고 나면 그뿐이다.그러나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키높이가 비슷한 동반자로 성숙시켜 통일을 도모하려는우리의 뜻에는,이런 일의 반복은 도움이 안된다.그들이 「적의 심장에 비수 한개를 꽂고 돌아 왔다」고 의기양양해하며 더욱더욱 문단속에 골몰한다면 우리의 뜻은 뒷걸음질치는 결과 밖에 안될 것이다. 그렇게라도 「만난 것이 소득」이라고 대견해하는 주최측의 자긍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지만,그들에게 반성할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북이 기회있을 때마다 드러내는,그 변함없는 「막무가내」를 그렇게 허랑허랑하게 받아주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반성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수십년동안 「생떼쓰기」를 조금도 멈추지 않아온 그들은 「여성」을 「파견」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방법을 썼다.그런 그들에게 말끝마다 박수를 쳐주고 통일가장행열에 같이 늘어서서 「댕기매기」니 통일노래부르기 따위를 호들갑스럽게 함께하는 일은 그들의 환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담담하고 어른스럽게,적어도 진실이 스며들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서 만이라도 사려깊은 대응을 했다면 좀더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 몽양 맏딸 북서 비참한 최후

    ◎이명영교수가 밝힌 여난구의 「기구한 생」/초대 북경공사 지낸 송성철과 결혼/남편 아오지탄광 유배로 영락/권좌에 오른 차녀 연구,언니최후 의식 “김일성 예찬”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 참석차 서울에 온 여연구는 알려진대로 최고인민회의부의장으로 북한여성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있는 「인물」이다.부친은 혁혁한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선생. 그러나 이런 이런 집안의 형제중에서도 북한의 김일성체제 아래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26일 북한문제전문가인 이명영교수(성대)에 따르면 근황이 알려지지 않은 여연구의 언니 여란구(여란구)는 수년전까지 생존이 확인됐었으나 여연구가 25일 하오 몽양묘소를 참배하며 바친 화환에 이름이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고 분석했다.화환에는 「려연구」「려원구」(여원구)「려붕구」(여붕구)의 3남매 이름만 적혀 있었다.몽양은 본래 4남3녀를 두었는데 이름이 알려지기로는 이들 3남매 이외에 봉구(봉구)홍구(홍구)등이 있었고 「난구」에 대해서는 전해진 바 없었다.그러나 몽양의 장녀인 「난구」는 실상은 대단한 인물의 부인이었었다.이화녀전을 다니다 일본에 유학을 간 「난구」는 제주출신으로 역시 소피아대(상지대)유학을 마친 송성철을 만난다.송은 견결한 국제공산주의자로서 일본공산당 당원이었으며,해방무렵에는 열댓명밖에 안되는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후보의 자리에 까지 오른다.당시 조선인후보로서는 김두용·박은희가 있었으며,정치국에는 김천해가 정치위원 5명중 1인으로서 조선인의 이름을 뽐내고 있었다.일본이 패전하자 점령군 사령부는 일본공산당에 대해 추방령을 내린다.송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북한으로 갔으나 송만은 서울로 돌아와 박헌영의 남로당에 합류하여 활동했다.이때 몽양의 장녀 「난구」와 만나 결혼하게 된다.이들은 48년 「난구」와 함께 월북했다.여연구의 다른 형제들 보다는 늦게 월북한 셈이다. 송은 부수상겸 외상인 박헌영밑에서 북경대사관 초대 공사를 지냈으며 외교부 아주국장으로도 근무했다.송은 미제스파이로 몰린 박의 숙청과 더불어 몰락한다. 송은 귀국후 고문을 당했으며 60년쯤에는 아오지탄광으로 유배되어 72∼73년쯤 사망했다.여난구도 남편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음은 물론이다.자식을 두지 못한 이들 부부는 일본 오사카(대판)에 사는 송의 형님 아들중에서 재용을 양자로 맞았다.이 송재용은 현재 일본에서 통일연맹중앙의장의 직함으로 반김일성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이광 바로 그 사람이다.이광씨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양부의 장인인 몽양을 위해 도쿄(동경)에서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여연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아왔다. 25일 45년만에 선친의 묘소를 찾은 여연구는 한마디 말도 못한채 처음 20분간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반세기만의 「지각참배」를 뉘우치는 그의 울음은 주위사람들의 가슴까지도 처연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인간의 모습」은 이내 김일성예찬론자로 「표변」했다.분향을 마친 그는 15분간 계속된 추도사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댔다. 북에서 내려온 기자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갖다 댔다. 어쩌면 여연구는 북측기자들의 카메라와 녹음기를 의식,김일성의 이름을 거듭거듭 외쳐댔는지 모른다. 김일성의 미움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는 북한.그 「실락원」에서 언니 「난구」와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지않기 위해 그는 서울에서 김일성찬양의 목소리를 높인게 아닐까. 김일성의 미움을 사 송성철과 함께 불행한 생을 마감한 「난구」는 항상 여연구의 마음을 짓눌러온 멍에였다. 46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앞에서 애끊는 자식의 심정만을 표현할 자유도 없는 곳.그곳이 바로 북한 임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김일성화환」 내미는 촌극을 보고/박순녀 소설가(특별기고)

    ◎연출된 「정치몸짓」에 실망만이…/45년 달래온 「이산의 아픔」 더욱 증폭시켜 이 글을 쓰기가 참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에 북한에서 여성계 대표가 참석했다.이 일 때문에 판문점에서 예비모임이 있을 때부터 우리는 조마조마했다. 남북간에 무슨 일이 있으려면 판문점에서 꼭 예비회담이 열리는데 그럴 때마다 대개 서로간의 의견에 차이가 있어서 말썽이 되곤했다.우리는 자주 만나고 통해야 서로가 친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썽이 생기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의 남북한 여성대표가 만난 판문점 모임에서는 별다른 이견(이견)이 나온 것 같지 않았다.저기에서 또 서로가 쓸데없는 자기 고집을 피우면 어쩌나 하고 불안했던 우리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데 대해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그뿐이 아니다.북한의 여연구대표하고 우리 대표들이 학교 동창이라는 사실,그리고 그들이 얼싸안은 뉴스화면을 봤을 때는 정말로 마음속이 착잡했다. 우리는 본시 이런 사인데 그 사이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 동안,그렇게 오래도록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들었는가! 그들이 공식일정을 마치고나면 여성들끼리 오순도순 정치색 없이 남한에서의 며칠을 보낼 모양이다.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25일,그들이 남한으로 넘어온 후 우리의 관심은 온통 그들에게 쏠렸다.여연구대표는 여장을 풀자마자 아버지 여운형선생의 묘소로 달려갔다고 한다.1천만 이산가족의 절통한 슬픔을 너무도 잘 아는 우리는 여대표가 묘소로 달려간 심정을 너무도 잘 헤아릴 수 있다.45년만에 서울에 돌아와서 여대표 말대로 「지척에 두고도 이렇게 늦게 찾게 됐다」는 그 말,그말은 바로 우리의 말인 것이다. 그 절통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알기에 우리 측에서는 여대표에게 서울에 오자마자 아버지 묘소를 찾게 배려했을 것이다.그런데 그들은 김일성 명의의 조화를 상자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묘소 앞에서 조립했다고 한다. 이럴 수 있는가.그들은 왜 우리 가슴을 찢어놓는가.서로 마음을 써서 만난 자리,일을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앞날에 뭔가보탬이 되고자 만난 자리다.그렇다면 서로가 싫어하는 일은 피해야 옳다.싫어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면 우리의 대화는 하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사실 김일성 명의의 꽃이,그것도 조화가 아닌 생화가 서울의 어느 꽃집에서 만들어져서 여운형선생 묘소에 바쳐질 수도 있다.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조심스레 서로 한발짝씩 다가가려고 애쓴다. 그렇게 애쓰는 우리 앞에 대형상자 속에 넣은 조화를 북에서부터 가지고 와서 그것을 묘소 앞에서 조립을 해서까지 헌화할 필요가 무엇인가.이 글을 쓰면서 그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다.신문에 났던 그 조화도 보지 않았던 것으로 하고 싶다.그들의 기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든간에 우리가 말려들지 않으면 된다. 남과 북이 다 통일을 염원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하는 일마다에 우리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그들은 아는가.무엇이 와르르 무너져서 모든게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이 불안한 마음을 그들은 아는가.
  • 외언내언

    「남북의 창」「통일전망대」를 통해 우리는 북한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다소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가성의 여자목소리,「외닥딱!」이니 「일떠서다」따위 투박한 어휘가 문어체속에 예사롭게 섞이는 북한식 언어에도 이제는 적응이 꽤 되었다.◆그런 가운데서도 도무지 어색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김일성화」「김정일화」라는 것을 소개하는 장면들이다.식물학자,역사학자,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이런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불가해」함이 한없이 낯설게 만드는 사회다.왜 이런 짓을 하고,하란다고 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때문일까.◆그 곤혹스런 명칭의 꽃들로 만든 화환이,서울하고도 수유리의 몽양묘소에 등장했던 모양이다.김일성의 이름을 새긴 커다란 리본까지 달린 이 꽃다발을 안고 오느라고 그들은 매우 송구했을 것이다.이런 몸짓이 이쪽에서는 아무런 효과도 낼 수 없음을 그들은 진정 모르는 것일까.◆북에서 온 여성대표단장 여연구는 며칠사이에 스타로 등장했다.나타나기만 하면 다투어가며 손을 잡으려고 야단이고연설을 하면 구절구절마다에서 박수를 쳐댔다.그의 목소리는 많은 북쪽 여성들이 쓰는 가성이 아니었다.기품있고 정감이 느껴지는 깊이있는 소리였다.◆그런 목소리에 취하기라도 한듯 남쪽의 인심좋은 여성들은 그의 만찬답사 구절구절마다에서 박수를 보냈다.그런 분위기 속에서 「핵」문제 「통일」문제 들이 구절마다에 박혀 있다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드디어는 「김구선생」을 꼭지에 놓고 「문익환목사」와 「임수경」양도 쓰윽 끼어들었다.한 대목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던 참가자들은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정확하게 건너 뛰고 말았다.◆거의 기계적으로 치는 박수였는데도 절묘하게 뛰어넘는 「박수치기」였다.어떤 틈새기라도 있으면 비집고 정치선전을 하고 싶어하는 북측에 비하면 서툴고 무모한 측이 남쪽인 것 같은데 「아닌 것」에는 말려들지 않는다.그래도 여전히 버릇을 못버리는 그들이 웬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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