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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한·일 관계:중(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0)

    ◎“일 응신왕은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나라 망하자 일 기내지방 건너가 위왕에 올라/김성호씨등 주장… 고분서 백제마제유물 출토 「백제인이 일본을 세웠다」는 학설이 80년대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를 정립한 공은 80년대에 이 분야를 집중 연구한 재야사학자 김성호씨와 최재석 고려대명예교수에게로 돌아가야 할 듯하다. 먼저 김씨가 82년에 발표한 책「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주장한 일본왕조의 설립과정을 알아본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비류백제를 기습공격하자 왕은 왕족·신하들과 함께 위열도의 구주로 달아난다.그곳은 서기 1백년 무렵 비류백제의 혈주에 의해 개척된「담로」,즉 구주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구주왜는 원주민들의 반발로 이미 유명무실해져 비류백제의 왕은 기내(나양지방)로 가 다시 위왕으로 즉위했다.그가 일본의 15대째 왕인「응신」이다.이후 비류백제의 유신·유민들이 대거 망명해와 응신의 기내위 왕조는 국가의 기틀을 세운다. 660년(온조)백제가 신라·당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668년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기내위는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 「일본서기」등의 사서를 편찬했다.비로소 비류백제땅의 회복을 포기하고 독립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김씨는 이같은 학설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측 사서인 「일본서기」 「고사기」등을 정밀해부,드문드문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추려내 한국의 「삼국사기」,중국의「삼국지 위지 동이전」등과 비교·분석했다. 그는 우선 응신의 즉위 직후 「일본서기」에 여러차례 등장하는 백제인의 집단망명 기사를 주목했다.응신 14년(403년)과 20년(409년)의 기록에는 백제의 1백20현,17현의 주민들이 대거 왜로 건너왔다는 기사가 나온다.김씨는 이처럼 대규모의 주민이동 사실을 하나의 국가가 자리를 옮긴 것으로 보았다. 이와 함께 응신이후 일본 국왕의 성씨가 비류백제의 왕성인 「진」씨를 이었음도 일본 상류측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을 통해 밝혀냈다. 이같은 김씨의 학설은 고고학 측면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지난 50년대 후반 기내지방의 우예야시에서는 응신왕의 고분이 발견됐다.일본의 고고학계는 응신의 묘를 발굴하는 대신 배총,즉 부속되는 묘를 발굴했는데 백제의 전형적인 마제유물들이 대량 출토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일본서기」속에 숨어 있다.(온조)백제가 망한뒤 주유성에서 벌인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났을때 기내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제 주유성이 함락되었구나.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의 묘소를 어찌 왕복할 수 있단 말인가』 (온조)백제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통곡한 당시의 일본인들.그들을 백제인이 아니라고 강변할 사람이 있을까.
  • 유산… 종중땅… 처가덕…/축재의혹 재력가들 변명도 갖가지

    재산공개 결과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전국의 지방공직가들은 주변의 곱지않은 시선을 의식,「유산」「종중재산」「처가덕」「높은 공시지가」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재산형성과정등을 적극 해명하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인천지역에서 가장 많은 1백54여억원의 재산중 80억원대의 부동산을 공개한 심상길시의회의장은 『고향인 경북 문경에서 목장과 양어장을 경영하기위해 부동산을 매입했으나 관리상의 어려움으로 사업을 정리하고 현지 주민에게 무상으로 임대하고 있다』고 설명.또 유복수시의원은 1백60억대의 부동산에 대해 『인천시 중구 중산동 영종도매립지를 구입한 것이 신공항건설의 계획에 따라 지가가 크게 상승해 재산규모가 커졌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이땅을 신공항건설이 한창 논의되던 지난 87년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지배적. 38억원을 공개한 인천시교위 윤세완의장은 무송 윤씨 25대종손으로 경기도 용인의 종중땅이 많아 재산이 늘었다고 설명. 경기도내에서 3위를 차지한 윤인식도의원(구리·82억1천2백만원)은 구리시 수택동 일대 44억원대의 대지 1만여㎡에 대해 『30여년전 부모로부터 상속받았으나 선영이 있어 처분하지 못하다 구획정리때문에 묘소를 이장한뒤 대지가 되는 바람에 부자가 됐다』며 『구리시의 공시지가가 평당 약 2백50만원으로 터무니없이 비싸 신고 액수만 높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전북지역 공무원중 가장 재산이 많은 김만종남원시장(13억2천6백54만원)은 본인 재산은 상속받은 주택등 2억7천1백만원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라고 해명.
  • 레닌 묘(외언내언)

    니콜라이 레닌.블라디미르 일리치 율리아노프가 본명이다.지금은 몰락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의 창건자 레닌은 1924년 1월21일 밤에 세번째 발작으로 숨을 거둔다.그러나 그의 사실상 마지막 공적활동은 22년 3월의 제11차 당대회를 앞둔 중앙위원회에서의 보고였다.결과적으로 유언이나 다름없는 이보고에서 레닌은 사회주의 소련의 사활과 관련된 세가지 중대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농민문제였다.『우리 공산주의자는 농민에 대해서 그들을 구원해 낼 사람들임을 증명해야 한다.우리가 그것을 증명하든가 아니면 농민이 우리를 떨쳐내든가 두가지중 하나이다』 두번째 문제는 국가기업과 자본기업의 경합을 재검토하는 일이다.『당신들 공산주의자는 경제적효율면에서 자본가의 성적과 공산주의자의 그것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세번째 문제는 방만하고 비능률투성이의 관료주의였다.과연 레닌은 소련방 향후 70년의 문제점을 일찍이 1922년에 벌써 족집게로 집어냈던 것이다.그는 정치적인 천재요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그 레닌은 지금 모스크바 크렘린광장 사열대 바로 밑의 그다지 깊지않은 축축한 지하동굴묘에 검은 양복차림의 유체로 누워있다.지하묘에는 유체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감호실과 경비병들의 운동시설등 약 20개의 방이 있다.명실공히 「위대한 지도자」의 권위를 지켜내는 비밀기지인 것이다. 과거 「소련」시대 레닌유체의 정기적인 점검은 매주 월·김요일.관에서 끄집어내 체중과 신장이 측정된다.또 매달 한번씩 유체 일부가 표본채취되고 4년마다 정부조사위원회의 완전한 조사가 행해져 보고서로 작성비치된다. 위대한 사회주의자 레닌의 붉은 광장 묘소경비병이 최근 사라졌다.새 러시아의 개혁옐친이 구소련체제와의 단절을 결단하며 내린 조치라는 평가다.한시대 역사의 뒤안이며 사라져가는 「위대한 이념」의 종장이다.
  • 레닌묘 경비병 69년만에 철수/보초교대의식 6일로 중단

    ◎구소와 단절의지 상징/정부선 이장까지 검토 1924년이후 지금까지 69년동안 매시간 빠짐없이 이뤄지던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 묘소앞 보초교대가 6일 하오 4시(한국시간 하오10시)를 기해 중단됐다. 이타르 타스 통신은 레닌의 시신이 미이라로 보관돼 있는 레닌 묘소의 경계를 맡았던 제1초소가 「의식의 변경으로」 폐쇄됐다고 이곳을 담당하는 크렘린 특수경계부대 사령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번 조치는 보리스 옐친대통령이 최근의 정치투쟁에서 승리한 사실과 함께 공산주의와의 단절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된다. 레닌묘소는 그가 사망한 1924년 나무로 세워진뒤 1930년 붉은 화강암으로 재건축됐으며 이 구조물은 공산통치시절 지도자들이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단상으로도 사용됐다. 당시 서방의 소련전문가들은 단상위의 위치배열 등을 토대로 공산당 내부의 서열변화를 파악하기도 했다. 또 하루 24시간,매시간마다 무릎을 편채 총을 흔들며 걸어와 근무교대를 하는 보초들의 모습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큰 구경거리였다. 러시아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해 일부에서는 『옐친이 인민들로부터 역사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항의와 함께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정부는 레닌묘의 이장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한편 묘소인근의 레닌박물관도 조만간 폐쇄될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시는 1917년 공산혁명이전의 의회였던 「두마」가 재구성되면 이 박물관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전시물들은 혁명박물관으로 옮길 예정이다.
  • 만송원 뒷산 종가 묘역(일본속의 한국문화:4)

    ◎32대 7백년 통치 대마도주 집안 묘지/향나무 숲속 자리… 아래부터 웃분모셔 특이/청수산성은 조선 침략군 전진·병참기지로 만송원 원당을 보고 나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수령 1천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사이로 이끼낀 돌계단이 놓여 있고 좌우에는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공동묘지다.혼자 가라면 망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애첩까지 함께 묻혀 바로 이곳이 고려시대 중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7백여년에 걸쳐 대마도를 지배하면서 한·일 두 나라 사이를 오간 32대에 걸친 대마도주들의 공동묘소다.일본에서도 단 세곳밖에 없다는 종중묘지인데 묘역에는 역대 도주는 물론 그 정실부인과 애첩들,그리고 그 피붙이들까지 모두 한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고 보면 고려때 우리나라에서 이 섬으로 건너간 송씨일족의 무덤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양식이 모두 왜식이라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느낌을 준다.가장 이색적인 사실은 아래위가 뒤바뀐 무덤의 서열이라 할 수 있다.이 공동묘지는 윗무덤(상어령실)과 가운뎃무덤(중어령실),그리고 아랫무덤(하어령실)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일 윗무덤에 19대 의지 이하 32대까지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그보다 아래에 자리한 가운뎃무덤에다 10대부터 18대까지의 선조들을 모셔놓았다.그리고 제일 아랫무덤에 이들 선조의 부인과 아이들을 묻어놓았으니 완전히 선후배가 꺼꾸로 자리한 꼴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마도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것 같다.19대 종의지와 그의 아들 종의성은 임진왜란을 이용하여 대마도를 일신해놓은 중흥의 명주로 알려져 있다.이 두 사람이 나오기 이전의 대마도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고 왜구들이 군웅할거하던 섬이었다.이런 대마도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는 기록이 송희경이 쓴 「일본행록」이다.송희경은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한 이듬해인 세종2년(1420) 사신으로 일본 가는 길에 대마도에 들렀다. ○왜군의 길잡이 노릇 그때 대마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배추빛(채색)으로 떠 있었다고 한다.배추빛이란 굶어서 얼굴이 누르스름하다는 이야기다.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본토가 모두 가난하여 도처에 해적들이 우굴거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잡혀 죽을 정도였다.송희경보다 50년 뒤인 1470년(성종2년)에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읽어보더라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대마도로서는 일본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고 죽으나 사나 조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말 대마도는 갑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다름아닌 임진왜란 때문이었다.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하자 종의지는 재빨리 왜장을 찾아가서 전승을 축하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선과의 교섭사명을 부여받았다.그러다 보니 결국 왜군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조선으로부터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종의지는 먼저 대마도를 조선침략군의 전진기지요 병참기지로 제공했다.바로 이곳 이즈하라의 진산인 청수산에 남아 있는 산성지가 그것인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지은 것이다.북구주의 명호옥에서 일기도의 승본을 거쳐 대마도의 청수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군 루트가 지금도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일본에서는 임란사적으로 지정해놓고 있다. 종의지가 다음에 한 일은 대마도민 2천8백명을 침략군 선봉에 나서게 하는 일이었다.2천8백명이었다면 임란때의 왜군 총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마도군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침략 왜군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번대와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번대,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용장정이 이끄는 제3번대가 그것이었다.이중에서 대마도군은 소서행장의 제1번대,그것도 최선봉군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일로 서울로 북진해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서로 믿고 지낼 수 있던 대마도주 의지가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으니 배신도 이만저만 배신이 아니었다.이때만 하더라도 일본 본토의 왜장들은 조선의 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아는 사람은 오로지 대마도인뿐.그들은 이미 고려때부터 조선을 내왕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상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만일 이 고려인의 후예 종가놈이 완강하게 길안내역을 거절하였거나 아니면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삼천포로 빠져 남한일대에서 헤매었을지 모를 일이다.만일 그랬더라면 왜란은 조기에 종결되었거나 그 피해 또한 그토록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임난후 쌀수출 중지 뿐만 아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대마도인의 접근을 금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부산에 있던 왜관이 폐쇄되고 대마도에의 곡물 수출을 일체 금지하게 되자 대마도경제는 일대 공황속에 빠지고 말았다.자업자득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배신행위에 대한 당연한 응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마도주로서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까지 험악해진 조선과의 사이를 또 다시 교활한 속임수로 뚫고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서위조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기극인데 임란 이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불과 8년만에 이루어졌다.이를일제침략 종식후 20년만인 1965년에 성립된 한·일국교정상화에 비한다면 배나 더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 배후에는 대마도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때 일본의 실권자 덕천가강은 단 한푼 배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마디 사죄하지 않은 상태로 앉아서 통신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대마도주는 일본 상전에게 두둑한 상을 받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조정에 대해서는 다시 배신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대마도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서 기울어졌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임란 전후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우리말·글 통해 나라사랑 실천/외솔 최현배선생(이달의 문화인물)

    ◎기념문집·추모행사등 다양 「10월의 문화인물」에 우리말과 글을 통해 나라사랑을 실천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선생(1894∼1970년)이 선정됐다. 문화체육부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말과 글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아릅답게 가꾸기 위해 한글날이 들어있는 10월을 맞아 그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외솔은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뒤 1910년 일본인들이 학교운영의 주도권을 잡자 주시경선생이 있던 조선어강습원에 나가기 시작했다.그곳에서 우리말과 글로 교육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소망이라는 신념을 갖게된 그는 연희전문과 이화여전에 재직하며 배달말과 배달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심는데 힘썼다.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 그는 해방직후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있으며 황무지였던 국어교육의 터전을 마련하는 한편 한글의 체계화와 과학화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민족 갱생의 도」「우리말본」「글자의 혁명」「나라사랑의 길」 등이 있다. 문화체육부가 외솔회 한글학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등 관련단체와 함께 펼칠 기념행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솔의 국어학과 그 영향」주제의 강연회 23일 상오10시 한글학회강당 ▲「국어학자 및 사회사상가로서의 외솔」주제 특별강연회 28일 하오2시30분 연세대 ▲「외솔문법과 맞춤법 통일안」주제 학술발표회 16일 하오3시 문예진흥원강당 ▲제15회 외솔상 시상식 30일 한글회관강당 ▲외솔추모행사 19일 경기도 양주군 장현리 묘소▲기념문집과 글모음 어록집 발간 등.
  • 토초세 이의 25%를 수용

    토지초과이득세(토초세)의 유휴지 판정과 관련해 고지전 심사청구로 각 세무서에 제기한 이의 가운데 25%가 받아들여졌다. 국세청은 지난 달 말까지 토초세의 유휴지 판정에 이의를 낸 3만5백8명중 25.2%인 7천6백94명의 주장에 이유가 있어 과세대상에서 제외했다고 27일 밝혔다. 토초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주장한 토지를 유형별로 보면 ▲재촌·자경농지 1천7백42명 ▲법령으로 사용이 금지되거나 제한된 경우 8백51명 ▲상속 및 이농농지 6백48명 ▲상속 임야 4백83명 ▲종중 및 금양(묘소) 임야 3백85명 ▲기타 3천5백85명이다.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진 비율을 유형 별로 보면 상속임야가 39.2%로 가장 높다.종중 및 금양임야는 36%,상속 및 이농농지는 33.1%였다.
  • “벌초·묘소관리 대신해드려요”

    ◎농협 등 위탁사업 4년째 운영… 출향인사들에 큰 도움/농협/2년 단위로 계약… 1기 기준 10만원/조합/종교단체 등 집단묘지까지 위탁 가능 조상의 묘를 찾아 은혜에 감사하고 예를 올리는 명절 추석(30일).그러나 해외교포나 출장중인 사람,급한일로 쉽게 고향에 내려갈 수 없는 이들은 성묘를 할 수없어 미리부터 걱정이 앞선다. 추석절 같은때 성묘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농협중앙회와 산림조합중앙회에서는 수년전부터 이들을 위한 묘소관리 대행사업을 운영해오고 있어 이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산림조합은 지난해 강원도·충북·전남·전북·경남·경북등에 시범지역을 선정,해외인사및 출향인사가 신청한 묘소 1만4천기의 위탁관리를 한데 이어 올해에도 지난 7일부터 10월7일까지 한달간을 묘지위탁관리 특별봉사기간으로 정하고 신청자를 받고 있다. 1백41개 시·군 산림조합에서 실시하며 개인묘소와 문중의 선산,종교단체의 집단묘지까지 위탁관리가 가능하다. 신청시에는 희망자가 묘소 소재의 시·군 산림조합에 전화로 문의한후 본인 또는 대리인을 통해 묘소위치를 확인한 후 계약을 하면된다. 벌초등 기본관리에 드는비용은 산림조합 소재지에서 차편으로 30분이내 6평정도 묘지1기 기준 5만5천원선이며 잔디를 입히거나 나무를 심을경우 별도 협의후 실비로 대행한다.문의 02­416­9419∼20(산림조합 중앙회 지도부) 농협은 산나물등의 채취나들이·농촌일손돕기·특산품직거래·민박알선등 「고향서로나들이」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묘지위탁관리사업을 4년째 운영하고 있으며 산림조합과는 달리 1회가 아닌 2년단위로 계약해 관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국 1천5백개 단위농협가운데 2백50개 지역에 한해 실시하며 신청자는 해당농협에 문의후 계약관리비 및 도장을 지참하고 계약을 맺는다.벌초등 기초관리의 경우 일시 납입인경우 10만원이며 50만원을 정기예탁했다 2년후 찾는방법도 있다.산소의 위치 면적 지형조건과 잔디보수 나무관리등의 특약사항에 따라 협의 조정이 가능한데 비용은 실비라고 농협측은 설명한다.문의 02­397­5613∼7(농협중앙회 농촌개발부)
  • 순조 생모 박씨 묘소 조성 기록/불 반환 「휘경원…」은 어떤책

    ◎장례의식절차·경과·경비지출내역등 수록 프랑스측이 15일 돌려준 외규장각 도서는 조선조 순조임금의 생모인 수빈(수빈)박씨의 산소 조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 의궤」상하편중 「상」이다. 「휘경원」은 수빈이 서거한 뒤 정해진 묘소의 이름이며「원소」란 왕세자,왕세자빈 또는 왕의 친척들의 산소를 일컫는 말.「휘경원 원소도감」은 수빈의 장례를 치르려고 임시로 설치한 관서이며 이 관서에서 당시 행했던 모든 의식절차및 경과,경비지출 내역등을 적은 책이 「휘경원 원소도감 의궤」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수빈이 18 82년 12월26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기록돼 있고 이어 ▲장례 절차를 논의하려고 관리들이 모인 날짜 ▲도감관원의 관직,이름을 적은 명단 ▲장례에 따른 왕명을 적은 전교 ▲장례를 마친 뒤 관리들을 논공행상한 내용 ▲도감 설치이후 장례를 마칠 때까지의 경비 내역들이 수록돼 있다. 책의 크기는 가로 34.4㎝,세로 48.2㎝로 모두 1백29장이다.닥종이로 만들었고 겉장은 철책장정에 고리가 달려 있다. 현재도 제작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존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이 책은 국내에도 서울대 규장각등지에 2권 보존돼 있어,프랑스국립도서관에 아직 남아 있는 외규장각 도서중 유일본 38책에 비해서는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프랑스측이 이 책을 우선 보낸 이유는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국내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편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와 순조임금과 숙선옹주등 2명의 자녀를 낳았다.행실이 착하고 예절에 밝아 현숙하다는 칭송을 받은 것으로 순조실록등에 남아 있다. 그의 묘소인 「휘경원」은 경기도 남양주군 진전읍 부평리에 있으며 지난 91년 10월 사적 제360호로 지정됐다.
  • “북 핵위협 방관 않겠다”/미테랑 국회연설/한­불 농업교류 제의

    ◎고서 1권 김대통령에 전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은 15일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핵위협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핵위협 제거는 국제사회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미테랑대통령은 이날 하오 국회연설에서 이같이 말하고 『북한은 핵개발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편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자발적으로 가입한만큼 의무조항을 준수하고 사찰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테랑대통령은 이어 『프랑스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철저한 준수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핵위협을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테랑대통령은 한·프랑스간 경제협력에 관해 언급,『프랑스는 한국의 외국인투자 개방,세제개혁,금융시장개방등 자유로운 교역을 저해하는 제도의 철폐에 고무되고 있다』면서 『프랑스도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겠으며 특히 양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미테랑대통령은 『한국 새정부의 신경제계획은 한국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수준으로 향상시키고 OECD의 가입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면서 『한세대의 짧은 기간동안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은 저개발국가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미테랑대통령은 『엑스포관람을 통해 한국의 역량과 잠재력을 확인했다』면서 『한국과 프랑스의 경험과 기술은 많은 국가의 경제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편 미테랑대통령은 이날 상오 수원에 있는 프랑스참전기념비에 헌화,참배하고 대전엑스포 현장을 방문,한국정부관 미래예술관 프랑스관 유럽공동체관등을 관람했다. ◎청와대 재방문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탈취됐던 외규장각 고도서 1권이 15일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방한 이틀째인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은 이날 저녁 7시16분 청와대로 김영삼대통령을 예방,지난 14일 정상회담에서 반환키로 약속했던 1백89종 2백95책의 외규장각 도서중 「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1권을 전달했다. 「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한 빈의 사망에 따른 장례식 의례와 절차·경비,묘소작업등을 서술한 것으로 상·하로 된 두권중 한권이며 파리국립도서관 소장번호 2495라는 분류인이 찍혀 있었다. 이날 반환은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반환에 앞선 상징적 조치로 풀이된다. 프랑스측은 지난 14일 한불정상회담직후 파리국립도서관으로부터 이책을 긴급공수,15일 하오 2시4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었다. 미테랑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접견실에서의 전달식에서 『한국민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왔다』며 『외무장관에게 나머지 도서들을 어떤 방법으로 전달할 것인가등을 협의케하겠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미테랑대통령의 성의에 거듭 감사의 뜻을 전달하면서 양국 외무장관의 협의가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어록으로 본 김 대통령의 통치철학

    ◎“우리경제 못살리면 역사의 죄인된다”/도도한 개혁의 강물 누구도 막을 수 없다/금융실명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빗길 김영삼대통령의 취임 6개월은 정치적 수사보다 실천에 체중을 싣고있다. 그러나 지난 6개월동안 쏟아낸 어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진면목과 인간적 체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앞으로 개혁의 강도가 어느 정도 될 것이며 개혁의 물꼬가 어떤 방향으로 트일지도 예상이 가능하다. 그의 통치철학이 곳곳에 배어있는 것이다. ▲이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2월25일 취임사) ▲선열들의 숭고한 피에 개혁으로 보답하겠다.(3·1절 경축사) ▲앞으로 정치자금은 한 푼도 받지않겠다.(3월4일 출입기자간담회) ▲꽃샘 추위가 있다고 해서 개혁을 향한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3월8일 재경 언론사사장단과 오찬간담회) ▲나의 취임사 중에 눈물은 반성을,땀은 고통과 인내를 뜻한다.눈물과 땀이 없으면 이 나라는 새로 태어날 수 없다.(3월15일 안기부순시) ▲임기중에 골프를 치지않겠다.(3월17일 금융기관장과 오찬)▲고통분담을 위해 공무원의 봉급을 동결한 것은 참으로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다.(3월22일 신경제 1백일보고회) ▲재산공개는 우리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다.(30일 대구방문) ▲사람도 1주일에 한번은 쉬어야 한다.(신문의 날을 하루앞둔 4월6일 출입기자 간담회) ▲재산공개와 관련해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4월9일 민자당 제3차 상무위원회) ▲우째 그런 일이….달리다 보면 돌부리도 나오는 법이다.(4월13일 최형우전민자당사무총장이 대입부정입학과 관련됐다는 보고를 받고) ▲토지·건물등 부동산을 갖고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4월16일 신경제계획 민간위원과 조찬) ▲도도히 흐르기 시작한 개혁의 강물은 어느 누구도 막을수 없는 역사의 대세이다.(4·19묘역 방문) ▲역사상 가장 정직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조국이 어려울 때 살려낸 대통령으로 평가되길 원한다.(4월23일 미 CNN­TV와 회견) ▲(개혁의 속도를 자전거의 스피드에 비유하면서)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5월1일 모범수출업체 대표 20명과 오찬) ▲돈내라는 사람도,갖다줄 곳도 없는데 기업만 하면되지 무슨 걱정이 있느냐.(5월4일 언론사 사회부장과 오찬)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이며 문민정부의 출범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다.(5월14일 5·18 특별담화) ▲세종대왕이 이루신 위로부터의 개혁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5월16일 세종대왕 탄신 숭모제전) ▲5·16은 분명히 쿠데타라고 생각한다.(6월4일 취임 1백일 기자회견) ▲사정엔 성역이 절대 없다.(6월15일 민주당 이기택대표와 조찬) ▲우리는 그동안 당선만 되면 그만이다는 그릇된 인식속에서 온갖 불법선거가 당연시 되어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6월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 9명과 오찬) ▲백범선생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지도자이며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신 분이다.(6월26일 김구선생의 묘소에서)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고쳐야 할 한국병의 하나이다.(6월28일 사회자원봉사자와 오찬) ▲누구든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중용할 생각이다.(6월29일 민자당 시도지부위원장단과 만찬) ▲우리는 청년의 나라인데도 노화현상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6월30일 청년회의소 간부들과 다과회) ▲우리경제를 못살리면 천추의 한이 되고 우리가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므로 다함께 뛰자.(7월2일 재벌그룹총수들과 만찬) ▲선진국과 후진국은 종이 한장의 차이로 우리는 싸우고 싸워서 선진국의 길로 나가야 한다.(7월16일 대전엑스포 현장을 둘러보며) ▲개인이나 집단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이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데 최근 애국이라는 말이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7월22일 체육계인사와 오찬) ▲(여름휴가에 대해)내가 안가면 각료들도 못갈 것이고 차례로 그아래 사람들도 눈치를 보게될 것이다.(7월25일 수석비서관회의) ▲금융실명제는 신한국으로 가는데 반드시 넘어야할 고빗길이다.제도개혁에는 아픔이 따를수 밖에 없다.(8월12일 금융실명제 실시 특별담화) ▲(금융실명제와 관련)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겠다거나 벌어 감춰놓은 사람이 걱정이지 국민 대다수는 구애받을 이유도,걱정할 필요도 없다.(8월20일 구로공단 대륙정밀 방문)
  • 김 대통령,묘역참배

    김영삼대통령은 10일 하오 임정선열 5위가 안장된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을 참배하고 유족대표 박유철씨(박은식선생손자)등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자리에서 『국내의 여러곳에 흩어져있는 다른 임정요인들의 묘소도 유족들이 원한다면 함께 모시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수행한 이병대보훈처장에게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아직 해외에 있는 많은 독립유공자들의 유해를 국내 봉환할수 있도록 유족및 관계당국과 적극 협의하라』고 말했다.
  • 김대통령, 취임후 첫 고향방문/조상묘소 둘러본 뒤 생가서 오찬

    ◎주민들 손잡고 불편한점 묻기도 김영삼대통령이 7일 고향마을을 찾았다.김대통령내외는 이날 경남 거제군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해군잠수함「최무선함」진수식에 참석한 길에 고향인 장목면외포리 대계마을을 방문.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후 고향을 찾았으나 대통령취임후에는 이번이 처음.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속에서 마을에 도착한 김대통령은 마을어귀에 위치한 모친 박부연여사와 조부모등의 묘소에 차례로 성묘하고 생가에서 수행원및 마을대표들과 오찬. 부인 손명순여사와 함께 묘소앞에 국화꽃을 놓은 후 묵념을 올리고 묘소를 돌며 잡초를 제거한 김대통령은 한참동안 눈앞에 보이는 마을과 앞바다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이 묘소는 김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뒤 들러 당선통지서를 내놓고 울었던 곳이기도 하다. 김대통령은 이어 생가에서 있은 오찬자리에서도 모친 박씨의 묘소에 얽힌 내력등을 참석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그자리는 원래 할아버지묘소로 쓸 자리였으나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님묘소가 됐다』며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자리라고 하더라』고 설명. 김대통령은 오찬자리에 참석한 윤한도경남지사에게 냉해피해에 대해 물은뒤 『최선을 다해 피해가 적도록 하라』고 당부. 이날 점심은 쌀밥과 해초된장국. 점심을 마친 김대통령은 방을 나서며 생가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가씨에게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는데 얼마나 오느냐』고 관심을 보였는데 안내원은 『주말이면 4천∼5천명이 몰려온다』고 답변. 김대통령이 도착한 마을입구에는 마을주민·관광객등 2백여명이 기다리고 서있다 대통령이 승용차에서 내리자 일제히 박수로 환영했으며 김대통령은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또 일부 마을주민들은 「소원이 있습니다」란 플래카드를 들고서있다 김대통령이 다가가자 『관광객이 몰리는데 화장실등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며 『편의시설을 설치해달라』고 부탁하기도. 대통령당선이후 관광명소가 된 이곳 생가에는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하루평균 2천∼3천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생가입구에는 「이집이 김영삼대통령이 태어난 집입니다.김대통령은 1928년 4월4일(음력)이집에서 아버지 김홍조옹과 어머니 박부련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란 입간판이 서있었다. 마을주민 배인실씨(61)는 이날 『지난번 대통령에 당선된직후 왔지만 대통령에 취임한 후로는 처음으로 들러 참으로 기쁘다』며 『우리마을에서 대통령을 냈다는 자부심속에서 살고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생가에서 나온 김대통령은 입구에 기다리고 있던 관광객들에게 『어디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면서 또한번 일일이 악수를 한후 1시간반동안의 짧은 고향방문을 마쳤다.
  • “뒤늦은 국내봉환에 송구”/봉환단장 이충길 보훈처차장

    ◎66위 아직 소재파악못해 안타까워 『국민들의 큰 관심속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를 무사히 고국에 봉환하게 돼 더없이 기쁩니다』 임정선열 유해봉환단장으로 상해 천묘식에 참석했던 이충길국가보훈처차장은 유해봉환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무척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차장은 『봉환에 앞서 며칠동안은 잠도 제대로 못잘 정도로 부담감을 느꼈다』면서 『봉환단장을 맡으면서부터는 몸가짐에도 남다른 신경을 썼다』고 토로했다. ­이번 봉환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석을 놓고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던 다섯분의 유해를 영면 70여년만에 국내로 봉환하게 된데 대해 송구스러움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이번 봉환은 우리 민족에게는 정말 뜻깊은 일이며 법통계승과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있어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 입니다. 이차장은 『유해봉환에 적극 협조해 준 중국 정부와 상해시 당국,그리고 우리 공관원과 현지 교포들에게 거듭 감사드린다』면서 북한측의 봉환방해공작이 없었던 점이 천만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독립유공자로서 해외에 안장돼 있는 분은 얼마나 되며 그동안의 봉환실적과 봉환자의 안장실태는 어떠합니까. ▲가장 어려운 점은 묘소 소재의 확인입니다.묘소소재확인,독립유공자와 유해의 동일성 문제는 독립유공자의 활동당시 동료나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재 조사를 실시,정확한 검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앞으로도 관계전문가와 현지 동포 등을 통해 사적지답사 및 묘소실태조사를 실시,미봉환된 선열들의 묘소확인과 봉환작업을 계속 추진하겠습니다. ­앞으로의 봉환추진계획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현재 미봉환된 유해 87위 가운데 21위는 묘소가 확인되었으나 66위는 아직 소재를 모릅니다.확인된 21위는 유족과 협의,국내 봉환을 추진하겠으며 합장 등으로 개별확인이 곤란하거나 유족들이 현지묘소 단장을 희망할 때는 단장을 해줌으로써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려나갈 생각입니다.
  • 임정선열 5위 70여년만에 돌아오다/문민법통 새정부서 계승발전

    ◎김 대통령 담화/남은 87위 조속봉환에도 최선/어제 상해서 환국… 10일 국립묘지 안장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선생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가 5일 하오 사후 70여년만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중국 상해 만국공묘에서 국내로 봉환된 임정 선열5위의 유해봉영식은 이날 하오 김포공항 귀빈주차장에서 제전위원장인 황인성국무총리및 제전위원·유족대표·시민등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황총리는 봉영사를 통해 『선열들께서는 혹독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불굴의 투지와 용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시고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이 나라의 법통과 민족사의 맥을 이어주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열 5위의 유해는 박은식선생의 유해를 선두로 김포공항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경찰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국립묘지 영현 봉안관으로 운구돼 안치,3부요인과 각계 대표등의 헌화와 분향을 받았다. 유해영결식은 오는 10일 상오7시30분까지 일반조객들의 참배를 받은뒤 상오10시 국립묘지 현충문 앞에서 각계인사와 외교사절·시민 6천여명이 참석,국민장급인 국민제전으로 거행된다. 이번 임정 선열 5위의 유해봉환으로 국내로 봉환된 유해는 28위로 늘었다. 이에앞서 천묘식이 5일 상오 중국 상해 만국공묘에서 봉안단·유족대표등 1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다. 봉환단장인 이충길보훈처차장은 추모사에서 『선열들의 불멸의 정신은 겨레의 가슴속에 면면히 맥을 이어 오늘의 광복과 번영된 조국의 영광으로 결실맺었다』고 말했다. ◎제2건국 이룩 다짐 김영삼대통령은 5일 『새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문민적인 정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선언하고 『임시정부 선열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애국에의 열정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날 「임시정부 애국선열 유해봉환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독립운동이 그때의 애국이라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경제를 살리며,국가기강을 바로잡아 나가고,맡은 바 책무를 다하여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오늘의 애국』이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오늘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국무총리·의정원의장·법무총장·신민회총감등 요인의 유해를 우리땅에 모셔오는 것은 우리나라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이 된다』면서 『정부는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제전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것을 참으로 뜻깊게 생각하며 커다란 자부와 긍지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아직 봉환되지 못한 87위의 유해봉환을 위해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그분들과 그가족들의 못다한 한을 풀어드리고 항일독립운동의 민족정기를 계승,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우리국민 모두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영령들에 대해 뜨거운 존경과 감사를 바쳐주기를 희망한다』면서 『이를 계기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애국심이 뜨겁게 소생해 우리의 손으로 제2의 건국을 이룩해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87위 조속봉환 지시 김영삼대통령은 5일 미봉환 애국선열 87위도 하루빨리 조국에 안장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박관용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현재 명단이 파악된 87위는 중국에 양기탁등 75위,일본에 강상립등 1위,미국에 서재필등 3위,러시아에 김공사등 8위가 있으나 이중 66위는 정확한 묘소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 “선열공적 되새기는 계기돼야”/유해봉환 준비 바쁜 김승곤 광복회장

    ◎독립유공자 대대적 발굴사업 추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우리 국민 모두가 선열들의 공적을 새롭게 기리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 입니다』 유해봉환을 앞두고 나름대로 준비작업에 한창인 광복회 김승곤회장(78)은 유해봉환에 따른 감회가 각별하다고 밝히면서 『유해봉환이 민족기강 확립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해봉환에 대한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국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이미 70여년전에 돌아가신 선열들을 늦게나마 고국에 모실 수 있게 돼 기쁩니다. 우리 풍습으로는 한번 땅에 묻힌 분에 대해서는 다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하지만 일찍이 모셔왔어야 할 민족지도자들을 뒤늦게나마 국민들의 환영속에 모셔와 고국에 「영원한 유택」을 마련할 수 있게 돼 다행으로 생각합니다.그동안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뿐 아니라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오늘과 같은 결실을 거두게 된 것으로 봅니다』 지난 33년 18세의 나이로 중국 남경으로 망명,군사학교인 조선의열단 간부학교2기로 졸업한 뒤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독립운동을 벌인 김회장은 나이답지 않게 아직도 정정함을 과시하면서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는 듯 했다. 김회장은 『임정요인들의 유해가 국가적인 관심속에 고국으로 귀환하는 시점에 광복회장직을 맡고 있어 개인적으로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이번 유해봉환에 대한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 헌법전문과 김영삼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 정부의 정통성의 뿌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데 있다고 봅니다.민족정기를 한차원 더 높이는 데도 한 몫을 했습니다.또 국민들이 선열들의 업적을 되새겨 자신을 각성하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해봉환을 위해 그동안 광복회측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압니다. 『보훈처등 정부관련부서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해왔지만 우리도 「조국」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국민들의 가슴속에 심어줄 절호의 기회로 보고 힘을 쏟았습니다.그동안 4천명 광복회원들이 같이 뛰었습니다.지난 65년 광복회가 설립된 이후 어쩌면 이번 처럼 경사스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다시한번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임시정부 선열들이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워 나간 모습을 특히 청소년층에게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청소년들의 건전한 의식형성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임정요인등 애국지사유해가 87위나 됩니다.추가 유해봉환과 관련된 계획은 있는지요. 『이번 유해봉환으로 추가 유해봉환사업은 가속화 될 것입니다.광복회에서도 중국·러시아등지에 묻혀있으면서 아직 안장장소가 확인되지 않은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찾아 정부측과 봉환을 협의할 생각입니다.오는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1만명 가까운 독립유공자를 새로 발굴,포상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발맞춰 우리도 대대적인 자체발굴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 임정선열 5위 유가족 상해도착/봉환준비작업 본격화

    박은식선생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5위의 유해봉환을 위해 유가족 일행이 3일 상오 중국 상해에 도착,본격적인 봉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고 보훈처가 밝혔다. 이들 유가족들은 5일 상오 9시30분부터 상해 만국공묘에서 유해봉환단과 현지 동포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천묘식에 앞서 선열 5위의 묘소를 성묘한뒤 유해를 국내로 모시기 위한 화장절차를 끝낼 예정이다. 한편 이충길국가보훈처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선열 5위 봉환단 60여명은 5일 상오 6시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상해로 출발한다.
  • “선대의 한 풀었다” 벅찬 감회/유해봉환 맞는 유족 표정

    ◎중국과 수교전엔 교섭 번번이 좌절 임정요인 5인의 유해봉환을 앞둔 유족들은 모두 『독립운동과 관련된 고인들의 유해를 드디어 고국땅에 모실수 있게 돼 여한이 없다』고 입을 모으며 벅찬 감회에 젖었다. 유족들은 이미 대표를 선정,3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봉환절차에 입회할 예정이며 5일 유해와 함께 귀국할 계획이다. 유족대표로는 박은식선생의 손자 유철씨(55)를 비롯,신규식선생의 외손자 민영수씨(72),노백린선생의 손자 영훈씨(55),김인전목사의 외손자 최순성씨(64),안태국선생의 손녀사위 이의석씨(72)등이 있다. 박유철씨는 『할아버지 유해를 조국에 모셔오기 위해 수십년동안 노력해 왔다』면서 『이제 늦게나마 결실을 보게 돼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특히 박씨는 박시창전광복회장이 선친이기도 하며,지난 86년 작고하면서 『내가 죽더라도 아버지의 유해를 꼭 조국의 흙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는데 이에대해 『선친의 유언도 이뤄져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또 신규식선생의 외손자 민영수씨는 『외조부의 유해를 고국산하에 모시게 돼 어머님의 한까지 모두 풀어드리게 됐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대만공사를 지낸바 있는 민씨는 『그동안 유해봉환노력은 중국이 미수교국이었던 문제로 번번이 성사되지 않았었다』면서 『지난 90년 중국측이 비공식으로 허락했으나 애국선열유해봉환을 비밀리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거부했었다』고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털어놓았다. 신선생은 슬하에 아들이 상호씨 한명뿐이었으나 15세때 상해에서 사망,외동딸 창희씨가 민필호씨와 결혼해 2남4녀를 뒀으며 이중 큰딸 민영주씨는 김준엽전고려대총장의 부인이기도 하다. 노영훈씨 역시 『생전에 모습을 뵌 적은 없지만 내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해온 할아버지를 가깝게 모시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노씨는 지난 84년 조부의 묘소를 수소문,상해 공동묘지에 있음을 확인해 봉환케 됐는데 『단한번 정복차림에 말을 타고 조국 남대문에 입성했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셨던 조부가 이제 정말 오시게 됐다』면서 『이 기쁜 소식을 아버지께 전해도 고혈압으로 누워계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세월의 무상함을 원망하기도 했다. 김인전목사의 딸 설영여사(88)는 3살때 청력을 잃은 탓에 아들 최순성씨와의 수화를 통해 『살아 생전에 아버님 유해를 모시게 돼 여한이 없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최씨 역시 『어머님이 항상 독립운동가 후손님을 명심,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제 그 어른을 모실수 있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안태국선생의 유일한 손녀인 효실씨 역시 『조부의 유해가 돌아오신것에 지하에 계신 선친도 기뻐하실 것』이라면서 『목숨 바친 조부의 뜻이 후손들에게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중대 법대학장 윤화사

    【광주=박성수기자】 24일 상오 8시50분쯤 전남 영암군 신북면 유곡리 오장성마을앞 13번 국도상에서 정옥태중앙대 법대학장(45·사진)이 몰던 광주1너 8502호 엑셀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앞서가던 전남8라 2095호 1t트럭(운전사 강동을·62)의 뒷부분을 들이받아 정학장이 그자리에서 숨졌다. 유족들에 따르면 정학장은 이날 선친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 장흥으로 가다 이같은 변을 당했으며 화물차 운전사 강씨는 인근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으나 중태다.
  • 이준열사 86주 추념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침략행위를 호소하고 할복자살한 일성 이준열사 86주기 추념식이 14일 상오 11시 서울 도봉구 수유동 산127의1 묘소에서 엄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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