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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D-5

    “이게 아닌데…꿈이라도 이럴 수는 없어” 9일 이산가족 방문단 가운데 최고령인 109세 어머니 구인현(具仁賢)할머니가 이미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장이윤(張二允·72·부산 중구 영주1동)씨는 “오마니…”라며 혼절했다. 돌아가신 줄 알고 제사까지 지낸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지난달 27일 전해들은 장씨는 꿈같은 상봉을 손꼽아왔다. 대한적십자사는 이날 낮 12시20분쯤 “‘서류상으로 살아있는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연락을 북측으로부터 받았다”는 소식을 장씨에게 전했다. 이같은 노모의 비보를 접한 장씨는 “누가 38선을 가로막고 있나.현실이 아니다”며 되뇌이다 충격을 받고 부산 동구 초량동 성분도병원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귀가했다. 장씨의 병상을 지키던 아들 준용(俊龍·36)씨는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소식을 전해듣고 ‘마지막으로 효도 한번 할 수 있게 됐다’며 아버님께서마냥 즐거워 하셨다”며 “틈이 날때마다 인근 사찰을 찾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불공을 드렸다”고말했다. 장씨는 오는 15일 방북을 앞두고 한복을 준비하는가 하면 노모에게 줄 가락지와 팔찌·목걸이,한복과 고무신을 이미 마련했으며,이날도 방송사와 인터뷰를 끝낸 뒤 방북때 입고갈 옷가지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가려던 참이었다. 가족사진도 찍어두었다. 장씨의 아들 준용씨는 “아버지는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에 기분이 들떠 이웃에 자랑하고 다녔다”며 “한밤중에 할머님께 드릴 선물을 꺼내 보시면서 눈물을 훔치곤 하셨다”고 말했다. 장씨는 그래도 평양에서 생존이 확인된 조카 준관씨(64)와 준식씨를 만날수 있게 됐으나 모친 묘소참배는 남북간 합의에 따라 불가능하다. 준용씨는 “처음부터 돌아가셨다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비통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가슴찡한 '방북 양보'. “동생들을 만나러 하루라도 빨리 북한에 가고 싶지만,하늘이 무너지는 노모의 사망소식을 들은 분에게 양보하는 것이 도리겠지요” 8·15이산가족 상봉 방북단의 101번째 후보였던 우원형씨(65·서울 서초구잠원동)가 9일 장이윤씨(72)의 109세 노모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딱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장씨에게 방북 순서를 양보했다. 이날 오후 3시쯤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장씨가 모친의 사망으로 우선 순위에서 밀려있는 상태”라는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우씨는 “나야 처음부터 탈락의 아쉬움을 겪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지만 장씨는 갈 준비를하다가 비보를 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느냐”고 말했다. 경기도 개풍이 고향인 우씨는 생존이 확인된 남동생과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방북신청을 했었다. 김경운기자 kkwoon@
  • “홀트여사는 국경 넘은 위대한 어머니”

    지난달 31일 미국 오리건주 유진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한 버서 홀트여사의 영결식이 9일 오전 10시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홀트 일산복지타운 체육관에서 엄수됐다. 활짝 개인 날씨 속에 1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영결식에는 대통령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와 스티븐 보즈워스 주한 미 대사,강원룡(姜元龍)목사와 유족,홀트재단 후원 회원,시민 등 600여명이 참석,고인의 넋을 기렸다. 미국으로 입양돼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한 스테판 스털링(45)은 추모사에서“그녀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됐고,그녀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빌 클린턴 미 대통령 부인 힐러리는 보즈워스 대사가 대독한 추모 메시지를 통해 “여사의 헌신과 사랑에 더없는 찬사를 보낸다”면서 “사랑과 안전한 가정이 국적과 인종,민족적 배경의 차이를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바친 위대한 헌신을 이어 나가자”고 애도했다. 5세 때인 지난 79년 덴마크로 입양된 얼스 머(26·한국명 이재웅)는 “아시아계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느낄 때마다 조금은 서글펐지만 여사와 같이 오직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는 많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꿈을 키워 왔다”고 말했다. 여사의 첫 입양아로 미국에서 식품체인업체를 경영하는 큰 아들 로버트 헐트(57)은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대로 한국에 묻혔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면서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이으며 살겠다”고 추도했다. 40여년을 홀트 여사와 함께 한 일산복지타운 최고령 원생 김영희(50·여)씨는 영결식 내내 오열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김씨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홀트 여사의 유해는 남편의 묘소 옆 홀트동산에 안장됐다. 송한수기자 onekor@
  • 반세기만에 띄우는 편지/ 장두현씨가 돌아가신 어버이께

    “한가위날,음식을 앞에 놓고 50년 세월을 아버님 어머님께 봉양 못한 죄 때문에 한숨짓고 울부짖습니다.…어머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 소리치지만 대답이 없으시군요.…살아 생전 뵙지 못하더라도 이 불효자를 용서하시고 부디 만수무강 하소서.” 오는 15일 동생들을 찾아 북한을 방문하는 장두현(張斗顯·74·경기도 화성군 장안면)씨는 9일 지난해 추석명절 때 쓴 편지 등 북한의 부모님 묘소에바칠 30여통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명절 때만 되면 전해지지 못할 줄알면서도 ‘부모님 보약 다리는 심정’으로 써내려간 편지들이다. 장씨는 지난 80년 추석부터 부모님이 나이가 많아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부디 살아 계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장씨는 “행여 아내나 자식들이 괜한 짓한다고 핀잔이라도 줄까봐 한번 쓴편지는 남몰래 혼자서만 다시 읽고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고 말했다.그리고는 10년 동안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 북한 방문을 신청하면서 그렇게도 그리던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동생 6명만이 살아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장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별옥리.19살 때인 46년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향을 떠나 개성에서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했고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그만 6·25전쟁이 나고 말았다. 공부하러 떠나는 아들을 진남포역에서 배웅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이 돼 돌아오라”는 당부가 마지막으로 들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장씨는 고향의 가족들을 데려 오기 위해 육군 장교가 돼 참전하기도 했고,나이가 들어서는 북의 부모를 만날 때까지 건강을 지키기 위해 술과 담배를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 쓴 편지에서는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을이렇게 적었다. “철 따라 피고지는 진달래는 무려 53번이나 피고 졌습니다.…남과 북이 엇갈린 155마일 휴전선 녹슨 철조망 밑에도 진달래가 피고지건만 한 많은 세월 속에 두고온 푸른 산하가 그리워서 울면서 잔뼈가 굵었고 50년 세월 속에늙었으나 해마다 쓰고 또 쓰는 편지는 전달할 길이 없구나.”장씨는 “비록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묘소 앞에 그동안 쓴 편지를 내놓고 못다한 불효를용서해 달라고 빌겠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홀트여사 유해 국내 도착

    홀트아동복지회를 창설한 버서 홀트 여사의 시신이 7일 오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UA)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국내로 운구됐다. 홀트 여사의 시신은 공항에 도착한 뒤 국방부 의장대의 애도가(哀悼歌) 연주 속에 영구차에 실려 경기도 고양시 홀트 일산복지타운으로 옮겨졌다. 시신을 모시고 온 친딸 몰리 홀트(66)는 “어머니는 생전에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셨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오는 9일 홀트일산복지타운 내 체육관에서 치러지며 시신은 주변홀트동산에 있는 남편 해리 홀트의 묘소 곁에 안장된다. 김경운기자 kkwoon@
  • 北에서 오는 이산가족 맞을 남쪽가족들

    북측이 이산가족 100명의 명단을 통보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남쪽의이산가족들은 선물을 준비하는 등 상봉의 기대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미수(米壽;88세)의 어머니는 날마다 집안 청소를 하며 환갑을 넘긴 딸과의 만남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 지난 50년 고향 충남 청양에서 인민군에 징집돼 헤어진 형님 리상두씨(68)를 기다리는 이상기(李相起·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씨의 2남1녀 형제들은 요즘 매일 전화를 주고 받는다.이씨는 “지난 일요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형님과 형수님께 한복을 마련해 드리기로 했다”면서 “충남 천안에 사는 누님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열겠다’며 즐거워하고 있다”고 전했다.이씨는 “자식과 조카,손자손녀를 합해 80명이 넘는식구들이 일사불란하게 형님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흐뭇해 했다. ‘북한의 여성 예술인 제1호’인 현대무용가 김옥배씨(68·여)와의 상봉을기다리는 여동생 숙배(金淑培·64·여·경기도 분당 서현동)씨는 “어머니도 살아 계시고 형제들도 있으니까 100명 안에 꼭 들 것으로 확신한다”면서“동네 최고 미인이었던 언니에게 줄 금목걸이를 마련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김씨는 “88세 되신 어머니는 언니를 집으로 데려와 당신 손으로따뜻한 밥 한술 지어주시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어머니가 날마다 집안을손수 청소하며 언니를 기다리신다”고 말했다. 전영찬(全永燦·55·서울 성북구 장위1동)씨도 가족과 함께 영화배우 형님전덕찬씨(72)를 맞을 준비에 바쁘기는 마찬가지다.전씨는 “얼마 전 4남매와 가족들이 모였을 때 큰 형수가 북에 계시는 형님이 꿈에 나타나 ‘이번에는 만나러 가겠수다’라고 했다고 말해 온 식구가 웃음꽃을 터뜨렸다”면서 “미술을 전공하는 막내딸은 큰아버지 초상화를 그려드리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4남2녀 가운데 둘째 오빠 리종필씨(69)를 맞을 누이동생 이종완(李種婉·66·여·충남 아산시 건곡동)씨는 “신문과 TV 뉴스를 보면서 초조하게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면서 “100살 드신 어머니는 ‘북에 살아있는 둘째 아들이내려온다’고 종이에 써서 보여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이씨는 “어머님을 모시고 4남매가 모두 고향 충남 아산에서 잔치도 벌이고 고향땅에 모신 아버님 묘소에도 찾아가겠다”고말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기고] 광복절과 백범

    독립기념관에서 광복절을 맞는 나는 자연히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선열들을 생각하게 된다.그 중에도 백범에 대한 생각이 더 떠오른다.아마도 그분이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이고,통일을 염원했던 투쟁과 나의 집안과 맺었던 인간관계 때문일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소원은 대한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네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라고 할 것이다.또 “그 다음 소원은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백범은 해방후에도 통일조국을 보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면서 통일을 위하여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고 말하였다.이는 백범의 간절한 소망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항일운동가나 노애국자로서의 백범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다만 할아버지와 같은 인간 백범의 면모를 소개하고자 한다.백범은 나의 할아버지(백암 박은식),내 처의 할아버지(우강 양기탁)와는 항일투쟁의 동지이며 후배였고 상해 임정에서 고락을 같이 한 분이었다. 또 나의 외할아버지(최충호)와는 고향(황해도 신천) 선배이고 막역한 동지였으므로 나는 어릴 때 백범으로부터 손자와 같은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는말을 들었다.이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나의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이신 외할아버지를 따라 어려서 상해에 가서 한인보통학교(인성학교)를 다녔다.졸업 3일 전에 백범이 우연히 외할아버님 댁에 놀러왔다. 이때 어머니(윤신)는 울고 있었다.졸업식에 입고 갈 옷,신발과 양말이 없었던 것이다.백범이 그 모습을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지? 다 우리들의 잘못인데…”라면서 “윤신아,오늘 밤에 꿈을 잘 꾸면,내일 백발 할아버지가 좋은 선물을 갖다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백범은 1원을 보내,나의 어머니는 즐겁게 졸업을 하였다.당시 1원이 큰 돈이었고,가난한 독립운동가에게는 더더욱 큰 돈이었다.후에 안 일이지만 백범이 전당포에 당신의 외투를 맡기고 빌린 돈이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백범이 귀국하면서 나의 장인어른께 종이 한 장을 갖다주셨다.그것은 우강 양기탁 묘소의 위치와 그 지방의 이름이었다.처가에서 그 종이를 반세기 동안이나 간직하다가 중국과 국교수립후 지형과 주소가다 변한 곳을 여러해 수소문한 끝에 유골을 찾아 1998년에 고국으로 봉환하였다. 나는 묘소를 수소문하면서 백범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한번 더 갖게 되었다. 우강은 1920년말 임시정부가 매우 혼란할 때 마치 세상을 포기한 사람처럼홀로 한국인이 없는 중국의 오지 중의 오지에 가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뜨셨다. 백범은 해방을 맞아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귀국준비에 여념이 없었을텐데사망한 지 오래된 옛 선배동지의 묘소를 수소문해 귀국 전에 챙겼다는 것은보통사람이면 못했을텐데,하는 감동을 나는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백범은 나라와 정의를 위하여는 추상과 같았고 무서운 의혈투쟁을 서슴지않았던 분이다.그러나 어린이를 사랑하고 동지를 아끼는 아름다운 인간미도많았던 분이다.그러기에 아마도 우리는 그분을 민족의 지도자라고 존경하는것이 아닐까. 박유철 독립기념관 관장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3)金佐鎭장군 피살지 흑룡강성 海林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 장군은 독립운동 공적이나 고매한 인품에 비해 한동안 적절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다.기념사업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지난 89년에 뒤늦게 결성됐고,충남 홍성군에있는 그의 생가는 92년에야 겨우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학계의 평가 역시한동안 공백상태로 유보돼 왔었다.1962년 지도자급 독립운동가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은 그가 그동안 홀대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피살을 둘러싼 ‘의혹’ 때문이었다고 할 수있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남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는 인구 43만의 해림(海林)이란 작은도시가 있다.취재팀은 이곳에서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원성희(元聖熙·61)씨의 안내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흔적과‘최후’를 만날 수 있었다.원 회장은 해림 현장(縣長)과 시장·인민대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정년퇴직한 지역 유지출신으로 김좌진 장군의 기념사업·유적지 보호운동을 펴고 있는 중심인물이다.해림 시내를 빠져나와 비포장길을 1시간 정도를 달리면 우리나라의 면(面)에 해당하는 산시진(山市鎭)에 도착한다.이곳이 바로 김좌진장군이 암살자의 손에 최후를 마친 곳이다.그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한동안 묻혀 있었듯이이곳 역시 한국인들에게 한동안 낯선 곳으로 남겨져 왔다.그러나 지난해말이곳에 그의 유적지가 조성되어 문을 연 이후 최근까지 500여명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취재팀은 김좌진장군이 1925년 독립군을 이끌고 들어와 개척한 대황구(大荒溝)를 지나 신흥촌(新興村)에서 잠시 차를 멈추었다.원 회장이 우리 일행을안내한 곳은 그가 1930년 1월 24일 피살당한 뒤 임시로 묻혔던 옛 무덤터였다.그의 유해는 1934년 본부인인 오숙근(吳淑根·작고)여사가 고향으로 모셔가 지금 이곳은 묘소 흔적만 남아있다.묘소터 일대는 주변의 밭들과는 달리공터로 남아 있었는데 원 회장은 “이 일대를 꽃동산으로 꾸며 한·중 양국청년들의 우호증진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흥촌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남촌(道南村)에는 그의 유적지인 ‘백야 김좌진장군 구지(舊址)’가 단장돼 있다.이 ‘구지’는 지난해 11월 26일 한국측 (사)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와 중국측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회가공동으로 단장해 개관한 것으로 대지는 500평 규모다.전통 한국식으로 만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장군의 흉상이 나타나고그 뒤로 금성(金城)정미소를 복원한 건물이 보인다. 이 정미소는 그가 인근 농민들의 편의 제공과 한족총연합회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동청철도회사의 창고를 빌려서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연자방아를사용하다가 1928년 여름 하얼빈에서 목탄 발동기 중고품을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금성정미소 자리가 바로 그가 좌익청년 박상실(朴尙實)에 의해 피살된 곳이다.현재 이곳에는 연구회측에서 세운 순국추념비가 그날의 비극의역사를 전해주고 있다.흉상 좌측에는 그가 순국 직전까지 거주하던 거처와‘팔노(八老)회의실’이 복원돼 있다.이곳 거처는 그가 1927년 7월 903명의독립군과 1,000여 명의 재향군인·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에 진주한 후 이듬해 8월부터 피살될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팔노회의실’은 신민부의 뒤를 이어 발족된 한족총연합회에서 그를 보필하던 8명의 원로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하던 곳으로 1928년 10월 그가 자택 서쪽에 세웠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해림과 목단강 인근에는 ‘8노’의 후손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으나 근거자료 부족으로 한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구지’내 그의 옛 거처는 2m50㎝,팔노회의실은 2m70㎝,정미소는 2m90㎝로 높이가 제각각인데 거기엔 나름의 까닭이 있다.이는 그가 주도한 신민부(新民部)가 창설된 연도(1925년),신민부 본부가 이곳 산시로 옮겨온 연도(1927년),그리고 신민부의 후신인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된 연도(1929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그는 신민부의 군사부 위원장 및 총사령관,한족총연합회의 주석을 역임했다. 히 그는 항일독립운동의 명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좀더 다각적인면모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충남 홍성지방의 유지 집안에서 태어나 3세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김좌진장군은 15세 되던 해인 1904년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奴僕) 30여명에게 논밭을 나누어주면서 풀어주고이듬해 서울로 올라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1907년 향리로 돌아와 호명(湖明)학교를 세워 90여칸의 자기집을 학교 교사로 활용하였으며,홍성에 대한협회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그리고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의 자금조달차 족질의 집을 찾아갔다가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1918년 만주로 건너간 이후 무장항일투쟁의 대역정에 돌입했다. 이런 그를 두고 원성희씨는 “김 장군은 항일 명장이기 이전에 반봉건 선각자이자 민족개명의 위대한 교육자”라고 평가했다.특히 그가 서명한 ‘무오선언’에서 ▲한국독립 주장 ▲일본침략 폭로 ▲무력투쟁 선언 ▲독립후 공화국 건립 등을 주장한 것은 그가 “근대적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덧붙였다.김좌진연구회 부회장 겸 도남촌 당서기를 맡고 있는한족출신의 차유행(車有行·51)씨는 “김 장군은 한국과 중국 양 민족 모두의 영웅”이라며 “자금사정이 어려워 기념관 건립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편 김좌진 장군에 대한 평가는 국내와 북한은 물론 중국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조차도 한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중국과 북한에서 그를 낮게 평가한 것은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닌,공화주의자라는 점,그리고 그의 말기의‘변절의혹’ 때문이었다.그의 ‘변절의혹’은 국내에서도 한동안 유포됐었고,그의 아들 김두한이 반이승만 노선을 걸은 점 등도 한국사회가 그를 홀대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물론 92년 그의 생가복원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를 살해한 세력과 살해범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중이다. 만주 항일진영의 지도자였던 그를 살해한 사람은 조선인 박상실(朴尙實,본명 李福林)이었다.한때 신민부에서 활동한 이강훈(李康勳·98) 전 광복회장은 자서전에서 “일경에게 약점이 잡힌 김봉환(金奉煥)이 자기부하인 박상실을 시켜 김 장군을 살해했다”며 “당시 김 장군이 아나키스트들을 끌어들여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원망을 산 것은 사실이나 공산당측에서 김장군을 살해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연변대 박창욱교수의 견해 역시 이와 비슷하다.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한 논문에서 “김좌진이 ‘적화방지단’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해 공산조직의 침투를 막자 이들 단체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공산단체 적기단이 비밀단원 박상실을 시켜 암살했다”며 “적기단이 김좌진을 암살한 뒤 ‘김좌진이 변절했다’는 일제의 모략정보를 빌려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해 처단했다’고 암살동기를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그의‘친일변절’ 의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료로 입증된 바 없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시대의 선각자로 치열한 삶을 살다간 백야 김좌진.그는 92년 생가복원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옛 활동무대인 중국 흑룡강성해림에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해림(중국 흑룡강성)
  • ‘입양아들의 할머니’ 버서 홀트 여사 타계

    한국전쟁 직후 설립돼 세계 각국 고아 수십만명의 ‘고향’노릇을 해온 세계 최대 아동 입양기관 홀트의 공동 설립자 버서 홀트 여사가 지난달 31일미국 오리건주 주도 유진시 남쪽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향년 96세. ‘입양아들의 할머니’로 불려온 홀트여사는 25일 일과로 해오던 1.6㎞ 산책후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퇴원한 뒤 영면했다고 홀트 국제아동복지재단 수잔 콕스 대변인은 밝혔다.홀트여사는 미국인과 한국 여성사이에서 태어났다가 한국전쟁 직후 버려진 혼혈아들에 관한 다큐멘타리를보고 남편 해리 홀트와 함께 전쟁고아 입양사업에 투신,1956년 홀트 입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수개월만에 고아 8명이 해외에 입양돼 한국 어린이 입양과 관련,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홀트 입양 프로그램은 나중에 홀트 국제아동복지회로 발전,세계 10개국 산하기관에서 30여년간 5만명의 아이들이입양됐다. 홀트여사는 1996년 92세로 유진시 헤이워드 마스터스 클래식 경기에 출전,400m 경주에서 연령대 세계신기록을 수립할 만큼 신체단련과 식이요법에 충실했다.그러나 몇년 전부터 어지럼증에 시달려왔고 지난해에는 폐렴을 앓기도했다. 한국홀트아동복지재단은 “‘남편이 묻힌 한국땅에서 눈감고 싶다’는 홀트여사의 유언에 따라 7일쯤 미국에서 시신을 운구,9일쯤 영결식을 가진 뒤 홀트일산복지재단내 남편 해리 홀트씨 묘소곁에 안장키로 했다”고 밝혔다.한국내 빈소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관과 홀트일산복지타운내 기념관에 마련됐다. 손정숙기자 jssohn@
  • 문화예술의 향기 넘치는 지하철 7호선

    실험적 설치미술의 집합체가 달린다.갤러리는 지하철 객차 8량.그곳엔 우리의 일상과 이미 지나간 역사의 이미지들,그리고 생명과 숲,예술이 어우러진 실험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이름하여 ‘달리는 도시철도 문화예술관’.서울도시철도공사가 1일 지하철7호선 완전개통을 기념해 준비한 문화이벤트중 하일라이트다.적어도 이 열차에 관한 한 지하철은 어쩔수 없이 이용해야하는 힘겨운 공간이 아니다. 2일부터 9월말까지 한시적으로 운행할 이 문화예술 열차는 미술평론가 임창섭씨의 기획으로 16명의 작가가 참여해 ‘역사야 노올자’‘춤은 언제나 즐거워’ 등 객차마다 주제를 달리해 8량을 꾸몄다. 7호선 개통과 함께 달리게 될 도시철도문화예술관은 평일과 토요일은 4회,공휴일과 일요일은 6회 운행한다. 7호선 완전개통과 함께 공사가 마련한 또 하나 눈에 띄는 프로그램은 ‘메트로 아티스트’ 운영. 일정한 수준의 기량을 갖춘 다양한 장르의 공연예술인을 선발,일정기간 도시철도 역사내에서 순회공연을 하게 하는 내용이다. 음악 12,무용 2,패션쇼 1,인형극 1 등 17팀이 정해졌다.이들은 이달부터 세부 공연일정이 잡히는데로 5·6·7·8호선 전 역사를 돌며 연중 공연을 펼칠 계획.지금까지 아마추어 예술인들이 할 수 없었던 지하철 공연의 ‘고급화’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도시철도공사는 이밖에도 8월 한달동안 7호선 32개 역에서 음악회·전시회등 크고 작은 41개 종류의 축하행사를 펼친다. 공사 관계자는 “이번 문화이벤트와 각종 상설 공연 프로그램 운영으로 지하철이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다시 태어날 수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쇼핑·레저생활 이젠 마음껏 즐기세요”. 서울지하철 7호선 신풍역∼건대입구역간 15개역 구간이 1일 오후 6시 운행을 시작했다.장암∼온수 구간 42개 역 45㎞에 달하는 7호선 구간이 완전 개통됨에 따라 서울 북동부와 강남,남서부가 직접 연결돼 이 지역을 오가는 시민들의 출퇴근과 나들이길이 한결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또 새로 들어선 역사 주변엔 가볼만한 곳이 그득해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데도 큰 도움을 줄 전망이다. ■ 교통개선 경기도 의정부 및 노원·중랑구 등 수도권 및 서울 북동부 주민들의 강남 진출입이 훨씬 쉬워졌다.지금까지는 4호선이나 1호선을 이용해 다시 2·3호선으로 갈아탔으나 7호선 이용으로 30분 이상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됐다. 또 구로·영등포 등 남서부 지역,인천시,경기도 광명시 등 수도권 서부지역과 강남간 이동 시간도 최고 40분까지 단축된다.7호선은 또 온수·대림·건대입구역 등에서 2호선이나 경인전철로 갈아탈 수 있어 승객 분산 효과도 클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10만여명이 밀집한 주택가인데도 버스노선이 부족해 민원이 끊이지않던 총신대∼숭실대 일대 주민들도 7호선 혜택을 톡톡히 볼 수 있게 됐다. ■ 가볼만한 곳 새로 개설된 역 주변에는 쇼핑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그득하다. ■가구거리 강남구청∼학동∼논현역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따라 국내 브랜드는 물론 고가의 수입가구 매장이 들어서 있다.또 고가구를 사고 싶으면 이수역에 내려 사당동 가구거리를 찾으면 된다. ■고속터미널역 이미롯데 강남점 등 백화점과 지하쇼핑센터가 자리잡고 있으며,다음달엔 초대형 유통레저센터인 센트럴시티가 개장할 예정.센트럴시티엔 호텔과 대형서점,영화관,상가 등이 들어선다.3호선을 갈아탈 수 있어 강남의 새로운 유통 중심지로 떠오를 전망이다. ■보라매역 3번출구로 나와 도보로 5분 거리에 보라매공원이 있다.12만만평의 대규모 가족공원으로 동물원과 인공호수,수영장 등이 있다.청소년 및 체육시설도 많이 갖추고 있어 7호선 이용객 발길이 잦을 것으로 보인다. ■뚝섬유원지역 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로 수영장과 각종 체육시설,한강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 등이 있다. ■장승배기역 도보로 1분 거리에 이 지역 지명의 유래가 된 장승이 서 있다. 조선시대 정조가 부왕인 사도세자 묘로 성묘하러 수원에 가는 길에 액운을막기 위해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 새 구간중 가족단위로 조용히 쉴만한 곳으로는 도산 안창호선생의묘소와 도산기념관이 있는 도산공원(강남구청역) 및 학동공원(학동역),청담공원(청담역) 등이 있다. 임창용기자
  • 이산가족 애틋한 사연들

    “팔순 언니·오빠가 살아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고향방문단의 북한가족의 생사가 확인된 27일 정명희씨(72·강원도 동해시천곡동)는 고향에 언니 덕화씨(85)와 오빠 기화(80),여동생 기선(71),남동생기명씨(66)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는듯 했다. 1·4후퇴 때 남편 박동석씨(75)와 남한으로 내려온 정씨는 “오빠를 만나면 부모님의 생전 얘기부터 자세히 물어 봐야겠다”면서 “산소의 흙이라도 한줌 쥐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50년 6월19일 신의주에서 오빠와 헤어졌으며,다리가 아파 고생하던 아버지의 약을 가지러 고향 원산으로 갔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국군이었던 남편과 함께 곧바로 남하해야 했다. 정씨는 “막내 남동생은 헤어질 무렵 평양공대 합격증을 받아 가족들에게기쁨을 안겨줬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정열씨(62)만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채성신씨(72·경기도 하남시 덕풍동)는 “지난 48년 공부를 하기 위해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38선이 고향 가는 길을 영영 가로막을줄은 미처 몰랐다”며 눈물을 훔쳤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들만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윤대호씨(71·서울 관악구 봉천6동)도 “그리움으로 이젠 눈물조차 말랐다”면서 “이번에 북한에 가서 부모님 묘소를 찾아 제사라도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
  • 구국의 뜻 되새기자/ 해외 항일유적 현황·실태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필수 방문코스 가운데 하나는 홍구공원이다.이는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있은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공사와 일본군 수뇌 수명을 폭살시킨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을느껴보고자 함이리라.윤의사 의거는 단순히 일제의 고관 수 명을 살상한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이던 장개석 정부의 마음을 돌려놓아 물심 양면의 지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항일세력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러시아·미국 등지에본거지를 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이 활동근거지로 삼은 항일유적지는생생한 ‘민족혼의 현장’이라고 할수 있다.낯선 이국땅에서 접한 선열의 이 름이나 묘소,항일전적지는 후대들에게 애국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정부차원에서 이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수십권의 항일운동 관련 홍보책자보다 선열의 얼이 서린 ‘흔적’ 하나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항일세력들은 국내·외에서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하였다.이들은 1919년 전 민족이 궐기한 ‘3·1의거’와 같은 비 폭력 투쟁은 물론 안중근·윤봉길 의사로 상징되는 의열투쟁,그리고 청산리·봉오동전투와 같은 대규모 무력항쟁도 전개했다.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항일투쟁은 곳곳에 그 애국혼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그 가운데 임시정부 청사 등 일부는 정부의 복원·보존 노력으로 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최근 보훈처가 전문가들의 조언과 자체 현장조사를 통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해외독립운동 관련사적(시설물 포함)은 모두 317개소로 파악됐다.이들중 244개소는 중국지역에 소재하고 있으며,흔히 ‘만주’로 불리는 동북3성일대에 163개소가 밀집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36,일본 4,카자흐스탄 4,대만 2곳 등 총46개소이며,그밖에 미주지역 24개소(미국 22,멕시코 2),유럽지역 3개소(프랑스 1,네덜란드 2)등이다. 중국내 항일전적지는 동북3성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에집중돼 있으며 그 가운데서는 용정(龍井)일대가 단연 으뜸이다.90년대 들어 중국관광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정이다.이곳은 우리귀에 낯익은 가곡 ‘선구자’의 고향으로 비암산,일송정을 비롯해 민족시인윤동주의 생가와 묘소가 있어 더욱 한국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이밖에도인근 교외에 위치한 ‘3·13반일의사릉’을 비롯해 서전서숙·명동촌교회와‘봉오동전투’ 전적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근 화룡현에는 3·1의거 이듬해인 1920년 10월 독립군이 일본군 3,000여명을 궤멸시킨 ‘청산리전투’ 현장과 대종교 3종사의 묘소가 남아 있다.흑룡강성 하얼빈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현장을 비롯,경박호·사도하자 전투지가 남아있고,영안(寧安)에는 김좌진장군의 묘소와 김 장군이 운영했던 정미소,그리고 신민부 군정파본부,고려공산당 북만지부 건물 등이 남아있다.또요령성 봉천에는 편강렬의사의 전투현장,신빈현에는 양세봉장군 순국지·서로군정서 본부,단동에는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륭양행은 당시 영국식민지인 아일랜드출신 무역상 윌쇼가 경영하던 건물로 임시정부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교통국을 두고 국내와 연락거점으로 활용했었다.집안현,장백현 일대에는 독립군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돼 10여년을 머문 상해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임정기관지 독립신문사 터,윤봉길의사의 의거현장인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애국지사 다수가 묻혀 있는 만국공묘(외국인 묘지),인성학교 등이 남아있다.북경에는 단재 신채호,우당 이회영 선생이 활동했던 흔적과 신한혁명단본부 자리가 남아있고,1932년 윤의사의거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머물다간 진강,가흥,기강,장사,항주 등지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비롯해 임정청사 이전지가 더러 남아있다.강소성 남경에는 의열단원들의 합숙지이자 민족혁명단의 본부였던 호가화원이 있다.서안에는 OSS훈련지와 광복군 2지대주둔지가,임정 마지막 정착지인 중경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광복군사령부본부건물(현 미원식당 건물) 등이 남아있다.국토 전역에 걸쳐서 항일투사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는 중국은 ‘항일전적지의 진열장’이라고 할만하다. 중국 다음은 러시아로 모두 36개소의 항일독립 유적지가 있다.일제 당시 연해주로 불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초의 한인거주지를 비롯해 신한촌,해조신문사 터 등이 남아있고,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은 커리마을이 있다.하바로프스크에는 한인사회당 창당지와 지금은시민휴식공원으로 변한 독립군 전투지,그리고 1937년에 사망한 한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또 리르쿠츠크에는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지(현 레닌거리 23번지 인민의 집)와 이범윤 유배지 등이 남아있다.89년 소련붕괴후 러시아에서 분리된 카자흐스탄에는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옛집과 동상,묘소(크질오르다시 공원묘지)가 있으며,계봉우 선생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한인 이민들이 처음 정착한 하와이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뉴욕 등에 민족세력들의 활동무대가 남아있다.하와이에는 당시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을 비롯해 조선국민단 사관학교,하와이국민회관 등이 남아있다.샌프란시스코에는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가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인 페어부두,스티븐스가 투숙했던 페어호텔이 90년이 넘는 세월속에서도 여전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곳엔 대한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발간지(페리스트리트 232)도 여전히 남아있다.로스앤젤레스에는 애국지사이자 대표적 재미한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가(남가주대 구내소재)와 흥사단중앙회관이 남아있다.이밖에도 캘리포니아 클로세트 윌로스에는 계원 노백린 장군의 한국비행단 설립지가,네브래스카주에는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지(현 헤이스팅스 네브래스터니 농장)가 남아있다.구미위원회 관련 유적은 뉴욕에 있다. 그밖에 프랑스 파리에는 평화회의 대표관과 임시정부 파리통신국,네덜란드에는 ‘헤이그밀사’ 가운데 한사람인 이준 열사의 묘역과 데용호텔이 항일관련 유적지로 기록할 만하다.일본에는 2·8독립선언의 현장인 도쿄기독교청년회관과 김지섭·이봉창의사의 의거현장인 도쿄 궁성의 앵전문과 이중교 일대,즉 일본의 최심장부가 바로 항일유적지인 셈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백범 김구선생 51주기 추모식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는 김구선생 서거 51주기 추모식을 26일 오전 8시 30분 효창공원 소재 선생의 묘소 앞에서 거행한다.지난 1948년선생은 이념을 초월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남북협상을 벌이는 등 통일역정에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추모식 행사에 이어 10시에는 효창공원내 백범기념관 건립 예정지인 테니스장에서 기공식이 거행될 예정이다.행사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3부 요인,애국지사,각계 인사,시민 등이 참석한다.
  • 남북 화해시대/ 비전향 장기수·실향민 표정

    “마음은 벌써 고향을 달리고 있습니다.” 실향민과 비전향장기수들은 15일 남북 정상이 광복절 이산가족 교환방문과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들떠있었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과 은평구 갈현동의 ‘만남의 집’에는 이른 아침부터 축하 전화가 쇄도했으며 백발의 노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41년 7개월을 복역하다 지난해 3·1절 특사로 풀려난 우용각(禹用珏·71)씨는 “아직도 고향 영변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는다”면서 “우리들의 송환이 조국 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5년이라는 최장기 복역기록을 갖고 있는 김선명(金善明·76)씨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이제 진정으로 남과 북이 모두 내 조국이됐다”며 감격해했다.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인 김석형(金錫亨·87)씨는 “어젯밤 남한으로 오기전 세살이었던 막내 광선이가 엄마 등에 업혀 손을 흔드는 꿈을 꿨다”면서“46살이 된 광선이가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이산가족들도 벅찬 하루를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의 이산가족통합정보센터에는 아침부터 80여명의 실향민이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하러 몰려왔다.평소 10여통에 불과하던 이산가족상봉 문의 전화도 수백통으로 폭주,직원들은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였다. 고향 황해도 송화군에 어머니와 사촌형제들을 두고 온 최부삼(崔富三·72·서울 강남구 논현동)씨는 “석달뒤 돌아간다는 약속을 50년이 넘도록 지키지 못했다”면서 “어머니가 살아계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어머니 묘소라도 지금 당장 찾아가 한없이 울고 싶다”고 말했다. 1945년 서울로 시집오면서 이산가족이 돼버린 손숙자(孫淑子·73·강남구신사동)씨도 “부모님과 형제들을 아직 또렷하게 기억한다”면서 “가족을만난다는 기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창구기자 window2@
  • 남북 화해시대/ 金新朝목사의 벅찬 감회

    “이제야 통일의 새 아침을 맞게 됐습니다.” 지난 32년 동안 남모를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충남 예산 성락교회 김신조(金新朝·58)목사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그는 지난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에 부인 최정화(崔正化·55)씨를 얼싸안고 목놓아 울었다. “박정희 목아지 따러 왔쉐다.” 삭풍이 살을 에이던 지난 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단 소속으로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했던 ‘냉전시대의 전사(戰士)’.그는 이제 고향인 함북 청진에서 복음을 전하는 ‘통일시대의 목자’를꿈꾸고 있다. 68년 당시 김씨의 투항으로 청진에서 직업동맹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독실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형당했다.인민군 소좌였던 매형을 비롯,6남매 가족과 공군 장성을 지낸 작은아버지 등 친척도 모두 숙청당해소식이 끊겼다. 70년 4월 삼부토건에 취직한 뒤 반공강연 등으로 살았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이 엄습할 때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비 자식’이라고 놀림받을 때면 술에 빠져들었다.그러다가 81년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97년 1월에는 서울영등포구 신길동 성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나는 전쟁의 불씨를 지고 남쪽에 왔던 사람”이라면서 “김정일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전쟁의 불씨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또 김위원장이 서울에 온다면 북한의 변화도 훨씬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오랜만에 고향 말투를 들으니 반가웠다는 김씨는 “북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내색을 하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몹시 강하다”면서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을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와서 과거를 따지는 것은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라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친구들이 금강산 관광을 같이 가자고 했지만 행여 북측을 자극할까봐 사양했다는 김씨는 “이제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고향에 가서 나 때문에 고통받은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부모님 묘소라도 찾아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영우기자 ywchun@
  • [대한포럼] 빛바랜 흑백사진

    북이 고향인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반세기가 지난 빛바랜 흑백사진 몇장씩을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움과 회한이 뒤엉킨 추억의 사진들이다. 헤어진가족과 친지,정들었던 고향의 모습이 담겨 있다. 명절이다 뭐다 해서 남들이고향을 찾아갈 때면 이를 뒤적이며 울적함을 달랜다. 일이 안풀리고 마음이텅빈듯 할 때는 방바닥에 펼쳐놓고 어린애처럼 펑펑 울기도 한다.사진 그 자체는 아픔이면서 더없는 위안거리이기도 한 것이다.필자는 실향민 2세대다. 분단 55년이지만 실향민들에게 북녘땅은 여전히 고향이다.북에 두고온 가족의 생사가 최우선 관심사다.고향을 바로 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현실을 두고두고 괴로워한다. 남북정상이 분단 반세기의 벽을 허물고 처음으로 상봉한 13일 많은 이산가족들은 또다시 낡은 사진첩을 꺼내들었을 것이다.고향과 혈육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격에 젖었다.이제는 정말 만나보게 되는 것일까.마지막 기회일지도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정상회담 뉴스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기도 한다던가.남북 정상의 첫 만남은 모양새부터 좋았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스스럼 없는 상봉장면은 모두에게 안도감을 갖게 했다.이렇게 만나면 좋은 것을 그 오랜 세월동안 왜 그렇게 헐뜯고 싸우고 미워했을까. 분명 민족의 경사이며 축제였다. 두 정상이 공항행사를 마치고 단둘이 승용차에 올라 평양시내로 향하는 모습은 감격 그것이었다.남이건,북이건 정상회담에서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같은 민족이니까 가능했다.예감이 좋았다.실향민들에게는 특히 더했다. 이산가족들은 당분간 열병을 앓을 수밖에 없겠다.김대통령이 평양 방문을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밤잠을 설쳐야 한다.남북정상의 만남을 바로 나의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산가족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곧잘 모태(母胎)신앙에 비유된다.평생을 가슴에 안고 살기 때문이다.이미 수많은 실향민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났다.이들의 묘소 가운데 상당수는 휴전선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향 땅에 한치라도 가까이 하겠다는 마음에서다.수구초심(首邱初心)이다.고령의실향민 중에는 북에 두고온 가족·친지들의 이름을 버릇처럼 쓰고 또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나이를 더 먹으면 잊어버릴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고향 동네 구석구석을 지도로 그려 자손에게 건네주기도 한다.나중에 고향을 찾으면조상의 묘라도 제대로 살펴보라는 뜻에서다. 고향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으면 실향민들은 달려간다.연일 만원을 이룬 평양교예단 서울 공연 관중의 절대 다수는 이산가족이었다.금강산관광객들도 그렇다.북한의 냉면 맛과 비슷하다는 소문이 난 몇몇 음식점들은실향민들의 약속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이북5도민 체육대회를 비롯,시·군민의 날 행사 등 모임도 잦다. 아쉬운 것은 세월이 흐르다보니 행사의 주체가실향민 2세대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2·3세를 위한 장학사업도 활발하게펼쳐지고 있다.모두가 고향을 잊지 말자는 간절함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같은 이산가족들의 노력과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기만 했다.북에남은 가족의 생사라도 확인케 해달라는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다.말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웠지만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적 이해의 장벽에 가로 막혀 뒷전으로 처지기 일쑤였다.이산가족 중 일부는 비공식 창구를 통해 베이징 등에서북한에 사는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그러나 평범한 실향민들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방법이다.절차도 복잡하지만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한시가 급한 실향민 1세대들은 이제 ‘통일’도 사치스러운 구호로만 여긴다.무엇보다 만남이 중요하다.이산가족 1세대는 120만명 남짓으로 줄었다.70세 이상 고령의 이산가족만이라도 편지를 왕래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도록 남북 당국간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남북정상회담이 불행한 이산가족사에 마침표를 찍는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金 命 緖 논설위원 mouth@
  • 남북정상회담/ 각계 기대와 희망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난다.반세기 넘어 처음이다.때로는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저 밑바닥에는 언제나 민족이라는 핏줄 특유의 애틋함이 흐르고 있었다.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들을 대표해서 정상들이 만난다니 그냥 좋다.몇번이나기대에 부풀었다가 실망해버린 적이 있었다.일정이 하루 늦춰지면서 가슴이철렁하기도 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무언가 이뤄질것 같은 예감이 든다.남북 정상들의 만남에 앞서 ‘사람들’의 얘기를 모아봤다. ■강동희(프로농구 기아 엔터프라이즈 선수)그동안 각종 국제대회에서 이명훈 등 북한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눠왔다. 그러면서 분단된 남북한이 하루빨리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을 직접 피부로느꼈다. 특히 지난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통일농구대회를 치르면서 통일의 물꼬가서서히 열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스포츠 류가 농구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졌으면한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한의 스포츠 교류가 더 이상 뉴스가 되지않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더 나아가서는 한국프로농구(KBL)에 북한의 벼락팀이나 우뢰팀이 참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또 축구,탁구에서와 같이 농구에서도 남북단일팀이 구성되기를 바란다. ■김은선(실향민·76·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51년 결혼한 아내와 함께 남한에 내려와 2남3녀를 두고 열쇠공 기술을 익혀 힘겹게 고생하며 산 지 50년째다.북에 두고온 아버지와 여동생의 생사 한번 확인하지 못하고 한달에 1∼2차례 임진각에 가서 고향땅을 바라보며 한스러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우리같은 실향민의 마음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단지생전에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땅을 한번 밟아봤으면 좋겠다.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다른 것보다도 북한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주고 식량이라도 많이 가져가 나눠줬으면 좋겠다. ■박종환(숭민원더스여자축구단 단장)90년 통일축구대회를 위해 대표팀을 이끌고 북한에 갔을 때의 감회가 새롭다.당시 15만명이 입장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펼쳤는데 운동장 시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현지에서 느꼈던 것은 북한 사람들이 남쪽과 모든 것을 성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또 칭찬해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그러나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1단계,2단계 하는 식으로 과정을 만들어 일을 미루곤한다. 그들과 무엇을 하고자 할 때 주의할 점은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조급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때보다 세월이 10년이나 흘렀으니 북한 사람들도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기대가 된다. ■신무성(미 8군사령부 병장·24) 남북한이 화해무드 속에서 성사된 회담이라 국민적인 기대감이 무척 큰 것 같다.회담 성사 사실을 발표하던 날을 생각하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회담 성사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그러나 너무 갑작스런 평화·화해 무드에 도취돼 느슨한 생각으로 북한을 바라봐서는안된다고 생각한다.현역 군인으로서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긴장감을 풀지 않고 국가방위에 충실하고 있다.다른 전우들도 마찬가지다.양측의 적대관계가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는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다.회담의 최우선 과제는 어떤 경우에도 서로 전쟁은 피한다는 국제적 선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측은 경제위기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빗장을 연 것으로 여겨진다. ■신현균(서울 성민교회 목사)지난 부활절,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 봉수교회에서 열린 남북 합동연합예배에 남한 개신교를 대표해 참석했다.감회가 새로웠다.당시 북한 기독교계의 달라진 분위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종교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교류가 많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후 보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교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지금 우리 종교계에서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목소리와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북한의 종교계에서도 남북 교류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지난 부활절의 남북 합동예배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직접 실감했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종교계가 명실상부한 화합과 일치를 이룰 수있도록 회담이 튼실한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유영례(주부·44·인천시 강화군 송해면) 내가 사는 강화는 북한과 밀접해있어서 집안까지 대남방송이 다 들린다.그래서 그런지 이번 회담을 접하는느낌은 되레 담담하다.다만 아들이 최근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북한이 갑자기이번 회담을 핑계삼아 무슨 도발이라도 할까봐 가슴이 뛸 때가 많다.남북한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 만나는데 모든 일이 쉽게 풀리기는 어려울 것으로본다.김대통령께서는 너무 회담 성과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국민은 정부가 소신껏 대북정책을 펴는데 신뢰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물어봤으면 좋겠다.남한에서 쌀이나비료도 지원해주는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이산가족도 만나게해주고 아니면 전화통화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터놓고 상대하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남은(인천 부평구 부광여고 3학년·18) 우리 국민과 북한 동포들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이렇게 해서 서로 방위비를 줄이면 교육비에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불쌍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사실 북한을 다른 나라처럼 여겨왔는데,정상회담이 잘 돼 교류가 늘면 한민족이라는 생각이 싹틀 것이다.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으로 곧 통일이 온다고는믿지 않는다.50여년 동안 다른 사상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는데 쉽게 동질감을 느낄수 있겠는가. 우선 평양교예단이나 학생예술단처럼 문화 방문단이 서로를 번갈아 찾으면좋겠다.우리나라 가수들의 공연을 보면 북한 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사뭇 궁금하다.많은 일을 하시는 대통령께서는 다음 회담을 위해서라도 몸건강하길 빈다. ■최우영(납북자가족모임 총무·30·여) 납북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상회담에 거는 기대와 설렘은 누구보다 크다.아버지는 지난 87년 1월 부산에서출발한 동진호를 타고 조업을 하다 납북되었다.올해 54세가 되었지만 생사조차 전혀 모르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두 정상이 만나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했으면 한다.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한에 억류돼 있는 우리 국민들에 대한 얘기를 꼭 전해주었으면 좋겠다.이번 회담의 성사는 지속적인 ‘햇볕정책’의 결과이듯이 북한에 억류돼 있는 납북자와 북송을 원하는 미전향 장기수에게도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살게 해줬으면 좋겠다.이번 회담에서는 이산가족과 함께 납북자 문제가주요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태진아(가수)지난해 12월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나로서는 남북 정상의 만남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놀랍고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그때 만나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던 북한 분을 평양교예단 공연장에서 만나뵙고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평양 공연때 무릎을 꿇은 채 ‘사모곡’을 부르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왜 그렇게 울었냐”고 묻길래 “나보다 더 평양을 그리워했을 실향민들을 생각하느라 그랬다”고 대답했었다.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분들의 50년 숙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나아가 정상회담 이후 남북의 문화교류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온 배달민족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한필성(목축업·67·경기도 파주시 교하면)남북정상회담으로 꿈에 그리던고향방문길이 꼭열릴 것 같다.90년 2월 일본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단 스케이트 코치로 참가한 여동생 필화(59)를 상봉한 뒤에도 기회가있을 때마다 어머니(최원화)와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준비해 왔지만 번번히무산됐다. 71년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북한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선수로 참가한필화와 전화통화만 하고 만나지 못했던 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생전에 그렇게도 보고 싶던 어머니가 98년 4월19일 94세로 세상을 떠나셨다.고향방문길이 열리면 어머니와 아버지 묘소부터 찾아가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빌겠다.이번에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현정화(한국마사회탁구단 코치·전 국가대표)91년 남북 탁구단일팀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을 당시엔 당장 통일이 될 것같은 분위기였다.벌써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통일무드가 조성되는 것 같아 너무 기쁘지만 사실 늦은감이 없지 않다.지난 10년간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했으면 탁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발전이이루어졌을 것이다. 우승을 확인한 순간 같이 부둥켜안고 울던 북한의 이분희가 무척 그립다.팀동료 김성희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나 탁구단일팀 구성은 물론 그리운 사람들도 마음껏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91년에 느꼈던 ‘작은통일’의 감격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황석영(작가)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자고들 하지만 비전을 갖고 해야 할 것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꿔야 한다. 4강이 한반도를 통해 정치적 이익을 얻고 있는 만큼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91년에 합의한 남북합의서에 기본정신은 다 들어 있다고할 수 있다.그걸 실천하겠다는 두 정상의 선언이 공식화돼야 하겠다.한반도긴장 완화를 위해 평화선언이라도 해서 그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문화교류가 물밀듯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문화인의 한 사람으로서교통정리가 되길 바란다.‘두루미와 여우’의 만남처럼 서로의 이질성만을부각시켜서는 안된다.통일문화를 형성한다는 의도된 목표 아래 공감할 수 있는 부분부터 교류할 수 있도록 문화교류기획위원회 같은 전담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 남북정상회담/ 정치권 움직임

    정치권은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2일 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조찬기도회를 여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국회 조찬기도회 소속 여야 의원들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남북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가졌다. 민주당은 당내에 남북정상회담 상황실을 설치하고 통일부 상황실 및 롯데호텔내 프레스센터와 상호연계,정상회담 소식을 국내외 언론에 서비스하기로했다.지난 11일부터 당직자들은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갔다. 13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출국하는 서울공항에는 서영훈(徐英勳)대표이인제(李仁濟)상임고문 김옥두(金玉斗)사무총장 등 당지도부를 비롯,현역의원 대다수가 환송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이날 총재단회의를 열어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정상회담 의제에포함시키고,김대통령이 김일성(金日成) 생가 및 묘소 등을 참배·조의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지적했다.공항에 이회창(李會昌)총재는 나가지 않고 대신김기배(金杞培)사무총장이 나간다.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도 전날 전화로 김대통령에게 인사했다.김종호(金宗鎬)총재권한대행과 함석재(咸錫宰)사무총장 등 당3역은 환영인사를나갈 계획이다.국회에서는 이만섭(李萬燮)의장이 참석한다. 최광숙기자 bori@
  • 순국선열 묘소·동상 관리 엉망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과 민족정기 회복에 몸 바친 선열들의 묘소와 동상·기념비 등 애국심을 일깨우는 귀중한 시설물이 내팽개쳐지고 있다.관리 주체가 국가보훈처,문화재관리청,지방자치단체,각 기념사업회 등으로 분산돼있어 체계적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관리비 예산이 부족한것도 원인이다. 사적 330호인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은 상해임시정부 요인이었던 김구·이동녕·조성환·차리석 선생과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안치된곳.그러나 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의 묘소나 기념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지판조차 없다. 김구 선생의 묘비는 비바람에 퇴색해 회색으로 변했고,비둘기와 까치 등의배설물을 뒤집어 쓴 채 외롭게 서 있다.봉분에도 잡초만 무성하다. 이봉창 의사의 동상은 다 쓰러져가는 울타리 안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솔방울과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곁에 나란히 있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안중근 의사의 묘소와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 청소를 했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하다. 공원관리사무소 직원 이모씨(53)는 “하루 평균 2,000여명의 시민들이 찾아와 무책임하게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면서 “8명의 직원으로는 쓰레기 청소도 버겁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남산공원에도 안중근 의사를 비롯,순국 선열 10명의 동상과 9개의 기념비가있으나 사정은 효창공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동상과 기념비들은 건립된지30년이 넘어 심하게 녹이 슬었고,심지어 표면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공원관리사무소에 따르면 공원내 동상 관리에 배정되는 예산은 연간 180만원 안팎.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동상에 스며든 녹과 기단의 화강암에 낀 때를 제거하려면 동상 1개당 2,000여만원이 든다”면서 “예산이 모자라 1년에한번 비둘기 배설물만 닦아 낸다”고 말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애국선열 묘역의 이준 열사,이시영 선생, 광복군 18인묘소와 위훈비 관리도 엉망이다.이준 열사 위훈비는 이끼와 거미줄로 범벅이돼 있고 흉물스런 철조망이 묘소를 둘러싸고 있다. 묘역 입구에 사는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 서차희(徐且喜·90)씨는 “예전에는 정부에서 묘소 관리를 도와주곤 했는데,요즘은 지원이 거의 없어 동네 사람과 참배객들의 힘을 빌려 청소한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선양정책과 신명철(申明澈)서기관은 “공원·기념비·묘소 등의관리 주체가 제각각인 현 상황에서는 시설물의 소재 파악조차 힘들다”면서“관리체계를 일원화할 수 있는 법령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윤경빈(尹慶彬)광복회장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산재해 있는 독립운동유적지에도 관심을 가질 때”라면서 “선열들의 넋이 깃든 곳을 보살피지 못하는 것을 국민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호국영령 추모행렬 줄이어

    제45회 현충일인 6일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넋을 기리는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참배객들은 이른 새벽부터 조화를 들고 현충원을 찾았으며 묘비를 어루만지며 오열하는 소복 차림의 전몰군경 유족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어 숙연한 분위기였다.사회단체 인사와 학생들은 무연고 묘소를 찾아 헌화한 뒤 풀을 뽑았다. 현충원 관리사무소는 이날 지난해보다 2만여명이 많은 17만여명의 참배객이다녀간 것으로 추산했다. 서울시는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해 6개 노선에 210대의 버스를 늘리고 6개노선을 신설해 운행했으나 추모 인파로 오전 한때 동작동 국립묘지 부근의이수교차로와 현충로·동작대교 일대에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는 등 큰 혼잡을 빚었다. 시민들은 가정마다 조기를 게양하고 오전 10시 정각 사이렌에 맞춰 1분간선열의 넋을 기리는 묵념을 올리는 등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일부는 가족 단위로 근교 유원지를 찾아 휴일 하루를 즐겼다. 한편 이날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의 판교∼신갈,양재∼서초 구간과 호남고속도로 하행선 회덕 분기점∼유성 구간은 오전부터 몰려든 성묘 및 행락차량등으로 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제8회 공초문학상 시상식

    대한매일신보사가 제정한 제8회 공초(空超)문학상 시상식이 2일 수상자 이탄(李炭) 시인과 공초숭모회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 차일석(車一錫) 대한매일 사장은 “우리 나라 신시의 선구자이시며 현대 한국의 대덕이셨던 공초 오상순 선생의 맑고 깊은 정신이 물질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새삼 그리워진다”면서 많은 시에 공초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이탄 시인의 수상을 축하했다. 김규동(金奎東) 원로시인은 심사보고를 통해 수상자의 ‘끈질지게 삶의 깊이를 파고드는 의지’를 높이 샀으며 수상작 ‘나무 토막’의 일상적 스케치를 통한 초현실적 수법을 칭찬했다.이근배(李根培) 공초숭모회 회장과 구상(具常) 숭모회 고문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려 했던 공초의 무소유 정신을기렸다.특히 구상 시인은 “공초 선생의 무소유 무정처 무작위 정신은 존재의 실체에 대한 물음없이 그저 소유와 기능 등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현대 한국인,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상자이탄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전통을 무시하고 시의 새로운 실험을할 수는 없다”면서 “시가 ‘생명의 발현’이 되도록 끝까지 애쓰겠다”고다짐했다.지난 64년 등단한 이탄 시인(본명 김형필)은 ‘기교나 재주부리지않은 차분한 지적 관조’를 40년 가까운 시작생활 동안 견지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10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 한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이다.공초문학상 상금은 500만원. 한편 이날 시상식을 마친 후 공초숭모회원 등 참석자들은 3일로 37주기를맞는 공초 선생의 수유리 묘소를 참배,추모 행사를 가졌다. 김재영기자 kjy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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