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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지구촌 신익희선생 여행기](2)

    *佛·獨등 서유럽 9개국 순방. UN군 우방국을 찾아 사의를 표하는 제2의 임무를 위해 낙위(諾威·노르웨이)의 오슬로와 서전(瑞典·스웨덴)을 거쳐 6월12일 정말(丁抹·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뻬이콘(베이컨)을 만드는데 가서 보니까 낳은지 8개월쯤 되는 어린 ‘도야지’를 잡아서 만들었다.목장 주인은 비밀을알려주겠다며 “새끼가 태어난지 2∼3일만에 다른 곳으로 데려가 인공으로 젖을 먹여 기르면 1년에 2번밖에 새끼를 낳지못하는 어미 도야지가 새끼를 3번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1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와서 비행기를 바꿔 타고 화란(和蘭·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헤이그에서는 애국열사 이준(李儁)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묘지 이름이 ‘힐 오브 뉴오크’라고 하니 신상릉(新橡陵)인셈이다. 마침 이역(異域)의 향수를 자아내는 궂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묘 앞에 서서 눈을 감으니 47년 전 선생이 순국하시던 때가 떠올랐다.일본 제국주의의 흉도(凶濤)는 일거에우리나라를 병탄하려 하였다.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우리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다. 선생의 비문은 영문으로 ‘이준 선생은 1858년 한국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서거하다’라고 쓰여 있었다.중간에 한자로 ‘李儁’이라고 표기돼있는데 필적으로 보아 선생의 생전 동지이던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친필인 것이 분명하다.한시가 떠오른다. 壯志未酬一身輕 宇宙長留萬古名 我來今讀墓前碑 後人不禁追慕情 ‘큰 뜻을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몸을 던졌으니,그 이름이 우주에 오래토록 머물 것이다.내가 지금 와서 묘앞의 비를 읽으니 후세 사람들은 추모의 정을 금하지 못하겠구나.’ 선생의 유골을 파서 본국으로 가져 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이준 선생의 묘가 여기 있는 이유가 알려져야 하기에 말렸다. 20일 룩셈부르크를 떠나서 백이의(白耳義·벨기에)를 거쳐불란서(佛蘭西·프랑스)에 왔다.파리공항에서 전규홍(全奎弘)공사가 맞았다. 개스톤 몬너빌 상원의장은 불란서 식민지인 남미 혼혈에 흑인 계통 신사로 언변과 풍채가 상당한 장년 정치가였다.에드워드 해리오 하원의장은 내가 한국의 사정을 말할 때마다 “트레비용”을 연발하니 그것은 우리말로 “옳거니 과연 그렇지요”라는 말이다. 내 나라 일에 바쁜 나로서 남의 나라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싶지 않으나 이 나라는 나라 일에 성실한 책임자가 적고정부 인사라는 이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국외로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니 이 나라의 전도(前途)가 어렵다는 생각이들었다. 파리의 밤은 주록등홍(酒綠燈紅).술은 푸르고 등불은 붉으며 미려한 부인들이 곱게 단장하고 밤을 낮 삼아 삼삼오오떼를 지어 몰려 다니니 파리는 과연 향락의 도시인 동시에불란서를 좀먹는 죄악의 도시다.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을 수없다. 이즈음 본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통일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과감한 영단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이태리(伊太利·이탈리아) 로마에는 7월2일 도착했다.가톨릭 법황(法皇·교황)의 나라인 바티칸이라는 독립국이 특이하다.인구 1,000여명의 독립국 형태로 있으면서 법황이 황제노릇을 한다. 피우스 법황은 우리나라에 대해 많은관심을갖고 있었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법황은 “한국에 대하여많은 도움을 못 주어 대단히 미안하다.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난 많이 받은 한국은 응당 원조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친절하고 정다운 말을 하였다.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전쟁 전에 법황의 평화 권고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 이성적으로처리했다면 수백만 인류를 전화의 불구덩이에 몰아넣지 아니하였을 것이요,좀더 조기강화(早期講和)를 하였어도 그 화를 감소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종교를 믿지 아니하고 독재의폭군이던 무솔리니도 법황에게만은 경의를 표한 흔적이 있다. 그것은 전 세계에 널려있는 가톨릭 교도의 여론을 계산해넣은 정치적 고려가 아닌가 한다. 정리 안동환기자sunstory@
  • “”못다한 선생님 꿈 우리가 이어갈게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을 하다 숨진 스승의 뜻을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잊지 않고 기리는 제자들이 있다. 부산 구덕고(사상구 학장동) 졸업생 30여명은 다음달 11일중구 민주공원 중강당에서 고 신용길(당시 35세) 교사의 제10주기 추모제를 가질 예정이다. 신씨는 91년 당시 불법이던 전교조 활동에 적극 참여하다투옥된 뒤 단식 투쟁 끝에 위암으로 숨지면서 자신의 안구를구덕고에 기증했다. 구덕고 졸업생 30여명으로 구성된 ‘고 신용길 선생님 추모사업회’는 이에 앞서 14일 밤 사하구 괴정동 신씨의 집에서부인 조향미씨 (41·부산여고 교사)와 아들 준재군(14) 등과함께 제사를 지내고 오는 18일 신씨의 묘소에 참배할 계획이다. 신씨에게서 ‘국어과목’을 배웠던 90,91년 졸업생들은 92년부터 삼삼오오 모여 추모제를 지내오다 96년 추모사업회를결성했다. 이들은 신 교사의 뜻을 이어 영세민 자녀들을 위한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 군입대와취업준비 등으로 한때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현재 신 교사의 10주기를앞두고 추모제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훈현씨(30·회사원)를 중심으로 지난해 하반기 다시 모여 스승의 뜻을 이어가기로 생각을 모았다. 이 결과 풍물패 결성과 건전한 영화보기 행사 등을 통해 올바른 청소년 놀이문화를 만들어 가기로 하고 지난해 12월 부산 신라대에서 매월 ‘테마가 있는 영화보기’ 행사를 시작했다. 전교조 부산지부는 신교사의 10주기 추모제를 함께 지내자고 이들에게 제의했다. 이훈현씨는 “99년 7월 전교조가 합법단체로 인정됐을 때선생님의 묘소를 찾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며 “선생님의의로운 행동은 제자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는 지표가 됐다”고 말했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대한광장] 정조와 정치개혁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후 세손을 이미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시켜 보호했다.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세손의 지위는 변동없게 한 것이다.사도세자를 제거한 집권 노론(老論)은 세손의 즉위를 막기 위해 갖은노력을 기울였으나 영조의 보호로 실패해 그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정조다.그런데 정조의 즉위 일성은‘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것이었다.이 말은 노론이 아버지의 원수이자 조선 발전을 위해 반드시 개혁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정조가 보기에 노론은 임금인 황숙(皇叔:경종)을 독살하고,선왕(영조)을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며,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수구세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 뿌리를 따지면 노론은 인조반정(1623)부터 정조 즉위때까지 무려153년을 집권하는 동안 남인과 소론을 모두 제거한 거대 정당이었다.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철학을 가진 정치세력이 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정조는규장각과 장용영을 통해 문무의 젊은 개혁세력을 길렀고 서얼들을 등용해 개혁의 외연을 넓혔다.그리고 노론 강경파인벽파는 배제하되 온건파인 시파는 끌어안아 노론을 분열시키는 한편 재위 12년 2월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특배(特拜)해 남인들을 정치개혁의 주축으로 삼으려는 뜻을밝혔다. 그러자 노론은 정조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12년말 이인좌의 난(영조 4년)때 영남 선비들이 난에 저항해 싸운 기록인 ‘무신창의록’을 간행해 영남 남인들을 신원하려하자 노론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임금의 시신(侍臣)인 승지와 사관이 왕명 봉행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정조는“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꾸짖었으나 이 무렵 신하들은 이미 국왕의신하가 아니라 소속 당의 당인(黨人)들일 뿐이었다. 정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위 13년 양주 매봉산에 묻힌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해 현륭원으로 높이는것으로 정치개혁의지를 과시했다.그리고 이인좌의 난 이래등용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을 끌어안기 위해 재위 16년에 무려 1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도산서원에서 별시(別試)를 열어영남 유생 둘을 급제시켰다. 현륭원을 이장한 때부터 사망하는 재위 24년까지 정조는 11년간 무려 12차례나 현륭원에 행차했는데,이는 단순히 묘소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애민의군주임을 과시하는 대중정치의 장이었다.백성들은 앞다투어관리들에게 당한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 호소는 그대로 정치개혁의 명분이 되었다. 왕조국가의 국왕은 공화국에서는 국민이다. 지금의 국민은옛날의 정조처럼“오늘날 국가에 국민이 있는가 신하(정치가·관료)가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나라 세금을 선거자금으로 이용하는 대죄를 저질러도‘국법’은‘당(黨)’앞에 무력하니‘기강’ 이설리 없는 것이다. 정조는 즉위 당일부터‘사도세자의 아들’임을 표방하면서개혁에 나섰지만 재위 24년이란 길다면 긴 기간에도 이를 완성하지 못한 채 승하(1800)하고 말았다.그의 사망과 더불어정권은 다시 노론의 손에 들어가 곧바로 대대적인 개혁세력사냥인 신유박해(1801)가 발생한다.이후 노론은 나라 자체를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망국에 이르게 했다. 해방 후 최초의 정권 교체로 확보한 기간이 5년, 개혁을 완수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인가? 아니면 개혁세력을 기르려는 눈에 띄는 시도도 별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개혁 성공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가? 정조의 실패에서 연속성의중요성을 배우길 바랄 뿐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민통선지역 성묘 12~31일 전면허용

    조상의 묘소가 민간인통제선(민통선) 북쪽 지역이나 연평도 등 서해5도에 있는 사람들의 설 성묘길이 자유로워졌다.합참은 12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성묘객들이 민통선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묘소지역을 전면 개방키로 했다. 노주석기자
  • 永川호국용사묘지 안장대상자 확정

    국가보훈처는 12일 경북 영천시 고경면 청정2리에 문을 연 호국용사묘지에 안장할 대상자를 확정했다.4만8,000기 수용규모인 영천묘지에는 6·25전쟁 및 베트남전 참전 군인,참전 경찰,종군기자를 비롯,10년 이상 장기복무 제대군인과 지리적 여건 등으로 국립묘지보다 영천묘소를 희망하는 전몰군경,전상군경,순직군경,공상군경,무공수훈자등이 안장 대상이다.문의는 보훈처 제대군인정책과(02-780-9645),호국용사 묘지(054-336-0775). 노주석기자 joo@
  • 미당선생님 영전에

    선생님.저무는 한 해의 끝머리를 조용히 닫듯 세상을 뜨신 서정주선생님.천 수의 시를 남긴 시성으로 추념하는 마음 허전합니다.그러고도 늘 후생에게 따뜻했던 넉넉한 미소가 간절합니다. 사모님을 앞세우고 급격히 나빠진 병환과 더불어 선생님께서 무엇을생각하고 계셨는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마는,마침내 종용(從容)한 대왕생이었으리라 믿습니다.거듭 경망을 떨기로는,아내이기보다 ‘안해’라는 옛표현이 얼맞는 사모님 뒤를 따르듯 가신 우연한 경위가 아름답기도 합니다. 공덕동 시절의 선생님댁을 드나들며 얻어마신 막걸리의 기억이 이때어른거립니다.소쿠리에 담은,한참 자란 두릅 맛을 그 무렵에 처음 알았습니다.열무처럼 큰 두릅을 된장에 찍어 먹는 맛이 여린 순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선생님의 크나큰 시적 성과를 추앙하는 자리에서 하찮은 얘기를 주워섬기기 무엄합니다마는,어차피 작은 개인사를 들어 선생님의 진면목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저는 그만한 일탈이 다 소중합니다. 구이팔 수복 직후 전주에 오셔서,문학강연을 겸한 ‘시국보고’모임의 강사로 나서신 때가 저로서는 선생님을 처음 뵙는 기회였습니다. 흰 두루마기 차림이었습니다.전쟁의 한복판에서 희한하고 놀라웠으나시인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는 인상을 깊이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신문기자의 직분으로 이런 저런 청탁이랄지 인터뷰를 하고,동향의 새까만 후진으로 만나뵈었습니다.정부수립을 전후한 시기에는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거쳐 문화부장을 지내셨기 때문에저의 입사 선배이기도 하구요.선생님은 그 와중에 ‘추천사(^^韆辭)’를 쓰셨습니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로 시작하는 시를,김삼규(金三奎)편집국장의 ‘지독한 여드름 구멍’을 바라보며 지으셨다고 훗날 술회하셨습니다.똑같은 편집국에 앉아 그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머금었던웃음이 이런 계제에는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컨대 선생님은 편했습니다.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긴장을풀도록 했습니다. 관후한 분위기를 조금도 티 내는 법 없이 풀어 즐거웠습니다.그러나 시를 쓰면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내공의시간은 오죽 혈흔이 낭자했겠습니까.‘일언이폐지하여 사무사(思無邪)’라고도했던 깊고 넓은 시의 경지야 감히 근접을 못하는 대로,선생님의 문학적 외유내강이 감히 부럽습니다. 유해를 고향으로 모신다고 들었습니다.아시겠지만 선운사 들머리에는 돌에 새긴 선생님의 시 ‘선운사 동구’가 서 있습니다.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유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이 시비 가운데 두어 글자가 훼손되었습니다.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완벽하기 어려운 사람의 일생에 생길 법한 그만한 흠집을 어쩌겠습니까. 아무려나 ‘질마재’로 가시기 잘 하셨습니다.선운사 동백꽃만 보지않고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가게 되어 좋습니다. 가서, 글줄을 끼적끼적거리며 허락도 없이 선생님의 시를 수없이 인용한 죄를 빌겠습니다.생전에 그토록 즐겨 드신 맥주 한잔 올리고 싶습니다. ♤ 최일남 소설가
  • 趙국방, 내주 동남아3국 순방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은 오는 17일부터 9일 동안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3개국을 순방한다. 조장관은 베트남 방문 기간중 판반차 베트남 국방장관과 회담을 갖고 양국 군차원에서 과거사를 정리하는 등 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할예정이다.또 호치민 묘소를 참배하고 베트남 국방대학원도 둘러볼 계획이다.지난 75년 베트남전 종전 이후 한국 국방장관으로는 첫 방문이다. 노주석기자 joo@
  • MBC 스페셜,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비 줄리아

    역사의 소용돌이는 때로 전혀 이방인인 듯한 개인의 삶까지 송두리째 휩쓸어 버리는 법. 17일 밤11시5분 ‘MBC스페셜-줄리아의 마지막 편지’편은 미국인으로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비가 됐던 줄리아 리 얘기다.한반도가 어디붙어있는 지 모른채 살아갔을지도 모를 줄리아는 MIT공대에 유학중이던 고종황제 손자 이구를 만나 혼약하게 되면서 한민족 격변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온 셈. 그 줄리아가 지난 9월 77세 중풍든 몸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한국방문길에 올랐다.남편이었던 이구를 만나려는 것.58년 7살 연하 황세손과 결혼해 신혼단꿈에 젖은 것도 잠시,이국인을 못마땅하게 여긴 종친회에 의해 82년 이혼당한 뒤 쫓겨나다시피 하와이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하와이에서 한인 양로원이나 남편이 지은 이스트웨스트센터 방문 등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줄리아가 모처럼 작심하고 돌아온 한국은 그러나 마냥 따뜻하지 않다.줄리아는 이미 이곳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져버린 인물이었으며 종친회의 냉대속에 남편과의 재회에도 실패한다.몰락해간 왕조를 증언해줄 450점의 사진,왕가 문장과 유물 등을덕수궁 박물관에 기증하고 시아버지였던 영친왕의 묘소를 찾는 것이고작,한달만에 하와이로 돌아가고 만다. 이 프로는 줄리아의 이같은 방문길을 내내 동행하면서 역사의 희생자인 한 여인의 입을 빌어 당시를 증언한다.황세손이었음에도 결혼패물 하나 해줄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던 왕가,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원치않던 결혼을 당해야 했던 영친왕의 비극적 스토리,왕가 여인들의거처인 낙선재에서 쓸쓸하게 사라져간 윤비,이방자여사,덕혜옹주 등에 대한 회상 등. 3년전 제작진이 최초 접촉했을 때만 해도 고운 모습이 사라진 것을보이기 싫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던 줄리아는 풍을 맞은 뒤 한층 초라해졌지만 이번에는 카메라 앞에 나섰다.스스로 사연많은 개인사에 대한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을까. 제작을 담당한 이종현 PD는 “한국 근현대사는 가치관에 혼란을 줄만큼 격변을 거듭해왔음에도 우리는 서글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은근슬쩍 지워버리고 넘어온 게 부지기수다.줄리아를 통해 이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 美 대표단 평양 첫날 이모저모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등 미 대표단은 도착 첫날인 23일 바로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갖는 등 숨가쁜 2박3일의 일정에들어갔다.올브라이트 일행은 김일성(金日成)주석의 묘를 참배, 화해분위기를 돋우었다. ■김일성 묘소 참배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날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김일성 주석의 묘를 참배하는 것으로 평양방문의 첫 일정을 시작. 올브라이트 장관은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예방하는 형식으로금수산 기념궁전을 방문,김일성 주석의 묘를 참배했다.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올브라이트 장관은 20분 정도 조 부위원장과 만났으며 15분동안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영구보존 처리되어 있는 묘소를 둘러 보았다.미국 관리들은 비공개로 진행된 이 일정에서 “올브라이트 장관이 화환이 놓여 있지 않은 김 주석의 유해 앞에 잠시 멈춰섰으며 유해를 바라 보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유치원 방문 올브라이트 장관은 오전 11시 세계식량계획(WFP)의 지원을 받고 있는 평양시 낙랑구역의 정백 2 유치원을 방문했다. 유치원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이들이 노래와 율동으로 환영하는 가운데 올브라이트 장관은 사무실에서 WFP 관계자들로부터 식량분배 투명성에 관해 보고를 받았다.올브라이트 장관은 “국제사회 식량 지원자들은 그들이 보내는 식량이 원래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며 북한에 제공된 식량의 군수 전용 가능성 방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보고를 받고 나오는 도중 유치원생들의 앙증맞은 동작을 보고 아이들과 함께 서서 율동을 따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대표단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을 수행한 대표단과 취재진의 규모가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두번째를 기록할 전망이다.대표단·취재진은 모두 150명 정도로 남북 정상회담 때 182명보다는 적으나서방과의 행사로는 가장 큰 규모. ■도착 올브라이트 장관은 당초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은 오전 7시직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영접나온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등 관계자들과 반갑게 악수한 뒤 화동이 건네주는 꽃다발을 받았다.올브라이트 장관은 별다른 도착 성명을 발표하지 않은 채 김 부상의 안내를받으며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과 함께 북한측이 제공한 캐딜락을타고 미국 대표단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로 향했다. ■북한 언론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일행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 김일성 주석 시신을 참배했다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보도했다.중앙TV 등도 주요 뉴스로 올브라이트의방문과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소식을 전했다. 중앙통신은 “올브라이트 장관이 수행원들과 함께 참배하고 김일성주석께 경의를 표시하였다”고 보도했다. 평양 공동취재단
  • 조만식선생 순국 50주기 추모식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 순국 50주기 추모식이 18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김유배(金有培) 국가보훈처장,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김재순(金在淳) 전 국회의장 등 각계 인사와 광복회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식에 이어 유족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있는 선생의 묘소를 참배,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렸다. 노주석기자 joo@
  • 금천구 15일 어가행렬 재연

    18세기 후반 조선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화성·지금의 수원)에 들렀다가 환궁하는 길에 잠시 머물던 시흥행궁에서의 어가행렬이 재연된다. 금천구(구청장 潘尙均)는 오는 15일 제5회 구민의 날을 앞두고 13일오전 10시부터 시흥대로에서 구민 및 구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정조대왕,금천구민의 민정(民情)을 듣다’라는 행사를 갖는다. 1,2,3부로 진행될 예정인 이번 행사 프로그램중 1부 순서인 이번 어가행렬은 출연진 400명으로 구성돼,시흥3동 박미고개에서 시흥5동 은행나무 앞까지 2㎞ 구간에서 펼쳐진다. 이어 2부에서는 은행나무 앞 가설무대에서는 정조대왕이 시흥행궁행차도중 백성들과의 대화,효자·효부에 대한 격려 등 당시 모습이현장극으로 재연된다. 3부에서는 정조대왕이 베풀던 ‘양로연’이 관내 노인들이 참석한가운데 열리며,아울러 사물놀이 및 민속무용 등의 공연이 이어진다. 한편 금천구는 이번 구민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21일까지 시흥대로를 비롯한 관내 주요간선도로와 행사장 입구에 구민의 날 깃발과구기를 일제히 게양했다. 문창동기자 moon@
  • [‘6.15’이후의 북한](5)리억세 고려약기술센터 실장

    국어학자 리극로(李克魯·1893∼1978) 선생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의 주모자로 함흥 감옥에 투옥돼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애국자로 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였다.그 후 오랫동안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돼 왔다.기자가 많은 월북 지식인들의 후손들 가운데 특히 리극로 선생의 아들 리억세씨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일제시기 리극로 선생이 지었을 것임이 분명한 ‘억세'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방북취재중 조선고려약기술센터에서 리억세씨(69)를 만났다.그의 직책은 이 센터 자료조사실 실장.그는 “서울에서 온 기자선생들을 만나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며 반갑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향에서 온 젊은이들을 보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름은 리극로 선생께서 지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그런데 사람이 이름처럼 우람해 보이지는 않지요?”솔직히 그랬다.마른 체구에 온화한 미소,부드러운 말씨로 전혀 ‘억세'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리극로 선생이 남북연석회의 참가후 남으로 돌아가지 않으신 배경은?” “당시의 심정을 나중에 말씀하셨는데 왜놈도 못 죽인 김구·여운형 선생을 죽이는 친일파 세상에 대한 환멸과 김일성 장군의 인간적 흡인력이 북에 남기로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 하셨습니다.아버지 말씀에 따라 48년 8월중순에 온 가족이 평양으로 왔습니다” 북은 종전에 ‘동의학'이라 부르던 민족의학의 명칭을 ‘고려의학'으로 바꾸었다.그는 “중국측이 우리의학을 동의학이라 하는데 우리는고려의학이라 불러야지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고려약학이 전공이십니까?” “본래는 합성약(양약) 전공인데 고려약 발전에 기여하고자 중간에고려약으로 돌았습니다.조국전쟁때 인재양성정책에 따라 50∼55년까지 레닌그라드 제약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전쟁때 혼자 해외에 나와 공부하는 게 죄스러워 새벽 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그 결과 레닌그라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개교이래 최초의 전과정 5점(all A) 학생이었고 ‘공화국 최초의 제약기사'이기도 했다.북의 ‘약제사'는 우리로 치면 약사이고 ‘제약기사'는 제약 연구진이다.남쪽이 의약분업·한약분쟁 등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북의 고려 의료체계가 궁금했다. “고려약은 어디서 생산합니까?” “보건성의 약무국이 약 전반을 관장하고 고려약은 고려약 생산관리국에서,신약(양약)은 제약생산관리국에서 생산합니다.” “고려의학에서 의약분업의 형태는?” “병원에서 고려의사가 처방을 내면 고려약제사가 약을 주는데 처방전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먹기 좋고 흡수가 잘 되게 법제를 하는 것이 약제사의 임무입니다.규격화된 고려약들은 약국에서 판매되는데 총 1,500여종중 일상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20종 정도입니다. 약국에는 약제사가 있어 문답도 해주는데 중등교육으로 양성된 조제사는 판매만 할수 있습니다.” 리억세 실장은 해방 직후 서울대 의대 교수와 의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해 북에서 초대 보건상을 지낸 이병남 박사의 사위이기도 하다.리 실장의 부인 리원영씨(67)는 신경내과 전문의다.리병남선생의 5남매중 3남매가 의료인이라 했다. 며칠 후 추석이었다.기자는 북의 추석 명절 지내는 모습을 둘러보러 나섰다.아침 일찍 평양인근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갔는데 뜻밖에도리극로 선생 묘소에 성묘하고 있는 리억세 실장 일가와 마주쳤다.리원영 여사는 기자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아버지 병원이 종로 파고다극장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 바뀌었겠지요?” 그녀는 파고다극장 옆에 용빈루라는 중국요리점이 있었고,옆에 리병남 소아과가 있었다며 해방직후의 종로2가 모습을 한참 설명했다.기자가 별 신통한 대답을 못해도 리 여사는 남에서 온젊은이들을 만난 것 만으로도 못내 기쁜 듯 했다. 신준영기자 junyoung@
  • 中 동북3성 항일유적지 답사기 낸 박도씨

    이대부속고등학교 국어교사이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소설가 박도(朴鍍·55)씨가 최근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우리문화사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은 박씨가 지난해 8월 초순 10여일동안 중국 동북3성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후 여행기 형식으로 펴낸 것.답사에 쏟은 열정과 애국선열에 대한 박씨의 추모의 정이 책 곳곳에 흠씬 담겨 있다. 박씨는 답사에 앞서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찾아 “선열들의 발자취를 백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보고 바로 쓸 수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고 한다. 박씨의 답사길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증손 이항증(李恒曾)씨와 일송 김동삼(金東三)선생의 손자 김중생(金中生)씨가 동행했다.박씨는 “중국에서 활동한 애국선열 가운데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거나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분이 많아 가슴아팠다”며 “반면 친일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 역사가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이 책은 박씨가 쉬운 작가적인 필치로 쓴 것으로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독립운동 관련 서적이 드문 현실에서 중국 일대의 항일투쟁사를 쉽고도 재미있게 접근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썼다. 책속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100여 장의 현장사진과 현지에서 만난관계자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어 자료가치도 우수하다. 박씨는 내년쯤 책 한 권을 더 낼 계획이다.새 책에서는 자신과 같은경북 구미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한 허형식(許亨植,일명 許克)과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근무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제 하의 대비된 삶을 다룰 예정이다. 금년 여름 박씨는 두 사람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답사를 마쳤다. 정운현기자 jwh59@
  • “어머니! 형이 北에 살아있어요”

    “어머니,다음 추석에는 형님과 함께 찾아 올게요” 지난 8·15때 북에서 내려온 형 동진(東振·75)씨와 감격의 상봉을한 김동만(金東萬·69·서울 은평구 갈현동)씨가 8일 경기도 파주에있는 어머니의 묘소를 찾았다. “어머니가 그토록 기다리시던 형이 살아 있어요. 형의 모습이라도 실컷 보세요”.동만씨는 어머니의 묘 앞에 형의 사진을 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의 묘 옆에는 형의 가묘가 있었다.동만씨는 “92년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형과 함께 있고 싶으니 북쪽과 가까운 곳에 나를 묻고옆에 형의 무덤도 만들어 달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지난달 서울에 온 형 동진씨는 호텔방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붙잡고목놓아 울며 “부모님이 생존해 있길 바라며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이번 추석부터는 내가 북에서 어머니의 제사를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동만씨는 묘를 빙 둘러본 뒤 “어머니,이제 형이 북에서 정성껏 차려주는 제사상을 받으세요.기쁘시죠”라고 되뇌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동진씨는 지난 44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입학하면서부터 좌익에 빠졌다.그때부터 동만씨 가족의 수난이 시작됐다. 일본 순사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만씨 집으로찾아왔고, 해방 후에 동진씨는 좌익운동을 한 혐의로 2년 동안 형무소 생활을 했다. 동만씨는 “어머니는 2년 동안 매일 형무소를 찾아 다닐 만큼 형을끔찍이 사랑하셨다”고 회고했다.50년 9월 동진씨의 월북으로 온 가족이 옥고를 치렀으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옥사해 시신조차 찾지못했다. 동만씨는 “어머니는 북에 간 형이 생각날 때면 ‘몹쓸 놈,어미를버리다니’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항상 형을 그리워했다”면서“조금만 더 살아계셨어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파주 이창구 홍원상기자 window2@
  • 이산상봉 가족 추석 준비 “북쪽형제 사진들고 성묘”

    “이번 추석에는 더욱 정성스럽게 차례상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달 50년 동안 헤어졌던 혈육과 감격적으로 만났던 이산가족들에게 올 추석은 더없이 특별하다. 그동안 반신반의하며 부모님 제사를 미뤄왔던 사람들은 북쪽 형제들로부터 부모님의 사망 사실과 제삿날을 전해듣고 늦게나마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 북에서 내려온 형제들을 만났던 이들은 부모님 묘소에 북쪽 형제들의 사진을 들고가 성묘를 하기로 하는 등 ‘특별한’ 추석을 준비하고 있다. 방북단에 포함돼 평양에서 동생 4명을 만나고 온 장두현(張斗顯·74·경기 화성군 장안면)씨는 동생들로부터 부모님의 기일이 각각 7월19일과 12월11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부모님의 생전 사진도 받아왔다.명절만 되면 차례상을 차려야 할지 고민했던 장씨는 “이번 추석에는 부모님의 사진까지 모시고 정성스럽게 차례를 지낼 수 있게됐다”면서 “못난 장남의 제사상을 받는 부모님들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북에서 만난 누나에게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한 김상현씨(66·서울 송파구 마천동)는 올 추석에 어머니에게 첫 제사를 드릴 예정이다. 김씨는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지만정성껏 제사상을 차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허탈해했다. 북에서 온 형 김동진(金東眞·74)씨를 만났던 동만(東滿·68·서울은평구 갈현동)씨는 추석때 형의 사진을 들고 부모님의 묘소에 갈 생각이다.동만씨는 92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부모님 묘소옆에 형의 가묘까지 만들었다. 죽은 줄만 알고 사망신고까지 했던 형 김덕호(金德鎬·74)씨를 만난 기호(圻鎬·65·서울 은평구 녹번동)씨는 부모님 비석에 새긴 자손명단에 형과 조카들의 이름도 추가할 예정이다. 이창구 윤창수 조태성기자 window2@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7)丹東 臨政 교통국과 쇼우의‘이륭양행’

    일제하 항일투쟁 대열에 섰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국내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구한말 항일 필봉을 드날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베델(한국명 裵說·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이었고,영국인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3·1의거와 일제의 ‘제암리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국명 訖法·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지원한 주인공이다.베델과 헐버트 박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스코필드 박사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헐버트 박사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박사의 유언이 적혀 있다. 한편 한국독립을 도운 외국인 가운데 G.L 쇼우(1880∼1943·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라는 인물이 있다.그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에 사망한데다 그의 후손도 한국과 왕래가별로 없었으며,또 그동안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부족했던 탓으로생각된다.그가 활동했던 1920년대초 당시 국내 일간신문을 펼치면 그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그러나 국내에선 그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그를 만나려면 지금은 중국땅이 된 남만주로 찾아가야 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중국과 국경을 이루며 황해로 흐르는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땅 건너편에는 단동(丹東,옛 지명은 安東)이라는 도시가있다.심양(沈陽)에서 아침 7시45분발 기차를 타면 점심때인 낮 12시10분에 도착하는 거리다.취재팀은 일행의 안내차 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박문호(朴文鎬·65)선생과 먼저 점심식사를 한 뒤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취재팀이 첫 답사대상으로 삼은 곳은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었다.이 건물은 쇼우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輻公司) 대리점이었다.70년 세월이 지났건만 놀랍게도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채 취재팀을 반겼다. 단동시내 육도구(六道口) 흥륭가(興隆街)25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현재 단동시 건강교육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월의 풍상을 겪은낡은 모습이었다.겉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나 실지로는 3층 건물로,현재 이 건물은 1층만 건축 당시 그대로이며 나머지는 신축됐다고 한다.주민들에 따르면,인근에 헌 건물들이 많아서 이 건물도 곧헐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건물의 주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방인 쇼우는 어떤 인물인가? 영국인들의 생몰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의 ‘제너럴 레지스터 오피스’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쇼우는 1880년 1월 25일 파고다 아일랜드에서 해양조사원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년 부친사망 당시 그는 중국 남동부의 항구도시 복주(福州)에 살고 있었다. 1912년 당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단동에서 일본여인 후미 사이토(당시 28세)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장남이 태어날 당시 그는 일본 고베에 머물고 있었다.그가 한국의 독립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쇼우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로 한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첫째는 그의 출신과 가족구성.그는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태생으로 자신의 고국이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을 잘이해하고 있었다.특히 모친과 부인이 모두 일본인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더욱이 그의 사무실(이륭양행)은 안동(현 단동)구시가지에 위치해 있어서 일본영사관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한국인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바로 이곳 2층에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동(安東)교통국사무국’이 들어있었다.교통국은 임정초기 정보수집과 재정모금,인물소개 등을 담당하였는데 국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교통부 산하 7개 교통국 가운데서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그는 단순히 장소만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기도 하고,상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1920년 그가 소위 ‘이륭양행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한 그의 행적자료에 의하면,그는 봉천(奉天) 주재영국 총영사가 일본당국의 요청으로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사건 지원 ▲독립군 무기수송 ▲독립운동 근거지 제공 ▲임정 비밀문서 전달 등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0년 7월 오학수(吳學洙) 등이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기 위해 그가 소유한 계림환(桂林丸)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자 그도 이들과 함께일경에 구속되었다.1924년 단동을 떠나는 조건으로 영국 측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그는 복주(福州)로 거주를 옮겼는데,그해 11월30일 63세로 타계하였다.그의 사후 57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그에게 건국훈장 추서한 것이 전부일 뿐 그의 묘소에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다. 항일투쟁 끝에 단동에서 최후를 마쳤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쇼우처럼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독립투사 한 분이 있다.바로 편강렬(片康烈·1892∼1929) 의사다.17세때인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이듬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편 의사는 이후 1911년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1919년‘구월산주비단사건’으로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출옥후만주로 건너가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결성,단장에취임한 편 의사는 이듬해 3월 장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다시1개월 뒤에는 봉천(현 심양)에서 일경과 백주에 시가전을 벌여 적 다수를 사살하였다. 1924년 길림과 하얼빈에서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편 의사는 국내로 압송돼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척추염이 발병,안동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였다.불과 37세였다.구한말 의병전쟁에서 부터 독립군 투쟁에 이르기까지 청춘을 항일투쟁에 몸바쳤으나 이름을 아는 이가 적음은 물론 그의 묘소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생전에 편 의사는 ‘나라가 광복되기 전에는 내 유체를 고국에 이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지금도 단동 진강산(鎭江山) 기슭 공동묘지 어디엔가 누워있을 편 의사를 생각하면 후손된 자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단동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마지막 모습을 감추는 곳이자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과 마주하고 있어 우리 민족에겐 ‘비원의 땅’이라고 할수 있다.또애국선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의탁하던 곳이자,살 길을 찾아 만주땅으로 향하던 유민들의 한숨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錦江山)공원(구 진강산공원) 옆에 있는 안동주재 일본영사관 건물은 아직도 그 화려한 건축미를 간직한 채 지금은 단동 경비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두 철교 가운데 6·25때 끊어진 철교를 중국의 모 회사가 매입,관광용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단동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중국의 경제개방 열풍속에서 나날이 변모하고 있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남북이산상봉/ 새 선례와 전망

    ‘8·15 방문단 교환’은 이산가족 상봉의 물꼬와 교류협력 및 인도적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푼 ‘시건’이었다.남북간에 9·10월 후속방문단의 교환과 면회소 설치에 관한 구체적 논의가 뒤따른다는 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의 제도화·정례화의 물꼬를 연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새 선례 남긴 상봉] 소수 인원의 제한된 장소에서의 만남이었지만이번 상봉은 남북이 안고 있던 각종 금기의 틀을 허물면서 새로운 선례를 남기는 데 기여했다. 어머니의 생존을 알면서도 상봉장소 제한 때문에 만나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던 북측 상봉단 량한상씨(69)의 ‘병원상봉’은 큰 변화의 단초를 예감케 한다.량씨는 당초 남북이 합의한 장소가 아닌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어머니를 상봉할 수 있었다. 남북의 두 당국은 과거처럼 원칙을 고수하며 상봉을 막지는 않았다. 파격과 예외도 인정됐다.지척에 있는 가족들의 집이나 부모친지 묘소에 대한 성묘,고향방문 등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병원 상봉’은 큰변화를 향한 작은 발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지난 12일 언론사사장단접견에서 “내년에는 고향도 방문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이산가족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활발해질 후속조치] 비전향장기수의 북한송환도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과 함께 인도적 현안의 하나를 해결했다는 의의를 갖는다.면회소설치도 9월초 열릴 적십자회담에서 구체화된다.정부는 매달 한번이상씩100명이상의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면회소 설치를 제안할 방침이다. 또 면회소를 통해 상봉자를 비롯해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서신과 물품을 전달하고 생사확인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가겠다는 생각이다. 남북한에서 서로 ‘기피 대상’이던 월북자와 월남자들이 떳떳하게자신이 떠났던 고향을 찾았고 서울과 평양은 이들을 환영으로 끌어안았다. 이번 상봉은 남북에 흩어져 살던 이산가족 700여명의 만남이었지만7,000만 온 겨레에게 남북화해와 협력의 진전 필요성을 알렸다. 일회성아닌 지속적인 조치로서의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현안들의 해결이 더욱 당위성과 힘을 얻게 됐다. 이석우기자 swlee@
  • 남북이산상봉/ 서울 상봉 이모저모

    서울과 평양에서의 3박4일은 반세기 동안의 ‘긴 이별’에 비해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다.남과 북으로의 출발을 하루 앞둔 17일 이산가족들은 하룻밤만 자고 나면 또 다시 ‘생이별’을 해야하는 기막힌 현실에 울고 또 울었다.남북이 각각 주최한 환송 만찬에 참석했다숙소로 돌아온 이들은 회한과 상념에 젖어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 했다.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17일 저녁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마련한 만찬에는 여야 정치인을 포함,300여명이 참석,성황을 이뤘다. 박 장관은 만찬사에서 “짧은 시간이었던 만큼 헤어짐은 더욱 애틋해 잡았던 손을 차마 놓치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접고 다시 만날그 날을 기약하자”며 북측 상봉단과 남측 참석자들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남한의 막내딸 최순애씨(48)씨가 선물한 한복을 입고 나온 류미영북측 단장도 답사에서 “서울에서 보낸 며칠은 격정 속에 흘러간 나날이었다”고 회고한 뒤 “남측의 배려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만찬장에는 정계 뿐 아니라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 때 방북했던강성모 린나이코리아 회장 등 재계 인사와 문화·체육·언론계 대표들이 참석했다.경기대 교수인 전 방송인 차인태씨,전 영화배우 김보애씨,그룹 ‘코리아나’의 여성멤버 홍화자씨 등 낯익은 인사들도 포함됐다. 미국 국적의 인요한(41·본명 존 린튼)연세대 외국인진료소장도 눈길을 끌었다.인씨는 형 세반씨(50·스티브 린튼)와 함께 북한의 결핵 퇴치사업을 펼치고 있는 유진벨 재단 활동으로 북한에도 잘 알려져있다. ◆하얏트호텔측은 북측 상봉단이 고령임을 감안,북어와 더덕구이,갈비와 전복구이,수정과 등 부드러운 음식들로 상을 차렸다. 또 한 테이블에 한명씩 배치하던 서비스 요원을 3명씩 배치해 몸이불편한 상봉단들을 부축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약 2시간 동안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만찬은 북측 상봉단과 남측 참석자들간의 뜨거운 악수와 함께 “또 만납시다”“건강하십시오”라는 등의 덕담으로 끝맺었다. ◆서울 체류 3일째인 이날 남북 이산가족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은하지 말자”며 짧은 재회의 아쉬움 속에 다시 만날 희망의 날을 기약했다. 상봉 마지막 날인 탓에 “한 번이라도 더,1분이라도 더 만나게 해 달라” “부모님 산소라도 찾게 해 달라” “어머니와 하룻밤이라도 자게 해 달라”는 안타까운 주문도 잇따랐다. ◆북에서 온 김용호씨(72)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면서 “면회소가 생기면 아직 못본 조카들도 만날 것”이라며 다시 만날 날을 확신했다. 김씨를 비롯한 이산가족들은 “연락사무소 설치나 이산가족의 정례적인 만남도 중요하지만 우선 전화 통화와 편지의 상시 교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덕씨(64)는 “형님과 얘기를 해도 해도 끝이 없다”면서 “하룻밤이라도 같이 자면서 밤 새도록 얘기하고,부모님 묘소에 성묘라도한 번 같이 갔어야 하는데…”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북한 평양무용대학 교수이자 최초의 여성박사 김옥배씨(68·여)는“어머니 품에서 잠들고 싶어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면서 “어머니께 밥을 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북측 이산가족 김인수씨(68)는 이날 대한적십자사측에 요청,6·25때 헤어졌던 선린상업중학교 시절단짝 김학모(70·서울 중랑구 망우동)·이창영씨(70·서울 은평구 응암동)를 50년만에 극적으로 만났다.까까머리 중·고교시절의 삼총사가 허연 백발이 돼 재회한 것이다. 김학모씨는 16일 오후 고교 총동창회로부터 50년 전 행방불명된 뒤로 ‘죽었다’는 소문만 나돌았던 친구 인수가 북에서 내려와 자신을애타게 보고 싶어 한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김학모씨는 중학교 5학년 동안 내내 같은 반이었던 삼총사 중 나머지 한명인 이창영씨에게 연락,이날 오전 김인수씨가 머물고 있는 서울 워커힐호텔을 찾았다. ◆신정현씨(86·서울 은평구 불광동)는 이날 창경궁 관람을 마치고나오던 북한의 ‘계관시인’ 오영재씨(64)에게 북한에서 문인으로 활약했다는 오빠 구현씨(89)의 생사를 물었으나 타계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망연자실,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신씨는 46년 충북으로 시집간 뒤 고교 교사였던 오빠와 소식이 끊겼으며 10년전 우연히 오빠가 김일성대 언어문학연구부 교수 등을 역임한 문인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특별취재단
  • 남양주시,비지정 문화재 도난 잇따라

    각종 비지정 문화재의 도난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14일 남양주시 문화원에 따르면 지난달 30일쯤 와부읍 팔당리 향토사료관 개관 예정지에서 조선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5m,폭1.2m의 5층 석탑이 도난당했다. 앞서 98년에는 조선 중기때 부제학을 지낸 김식선생 묘소(와부읍 율성리 소재)에서 장명등(長明燈)과 문ㆍ무인석물 등이,조선 중기때 옹주(翁主)묘(와부읍 율성리)에서 무인석이 각각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다.고려시대 무관인 변안열선생 묘소(진건면 용정리)에서는 장명등과 무인석이 사라졌다. 이처럼 90년 이후 도난사고로 없어진 문화재가 남양주시에서만도 수십여점에 이르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의정부 한만교기자 mghann@
  • 원성희 김좌진연구회장 “친일파설은 일제의 모략”

    문화관광부가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장군의 항일투쟁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행사가 10일 오후 2시 한국일보사 12층 강당에서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한화갑 민주당 의원)주최로 열렸다.이날 행사에는 중국 현지에서 김 장군의 항일운동 업적 연구와 기념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김좌진연구회 회장 원성희씨(元聖熙·61·중국 흑룡강성해림시 거주)가 참석했다.원 회장을 만나 기념사업의 성과와 장래계획 등을들었다. ■언제,어떤 경위로 김좌진 장군 연구에 관심을 가졌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김 장군을 두고 몇 사람의 부정적인 견해를빌어 매도하는 경향이 많아 연구를 통해 이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88년부터 김 장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이후 93년 전문연구자 60명이 참석한가운데 해림에서 대대적인 토론회를 가진 이후 본격화됐다. ■당시 김 장군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은 어떤 것이었나? 김 장군이 반역자라거나 친일주구배,친일파라는 주장이 피살의혹과 함께 난무했다.그러나 조사결과 이는일제가 살포한 계략,또는 반대파들의 모함으로밝혀졌다. ■그동안 연구·기념사업으로 어떤 일을 추진해 왔나? 우선 김 장군이 활동했던 지역의 유적답사 및 증언 채취·자료수집에 중점을 뒀다.작년 10월에는 김 장군의 순국전 투쟁 근거지였던 옛 자택을 복원했다.그동안 1,000여명이 다녀갔다. ■앞으로의 계획은? 김 장군의 첫 묘소터를 꽃동산으로 꾸미고 부근에 산재한 독립군의 묘소를이곳으로 옮겨 ‘기념산’을 조성할 계획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김 장군의공원 및 사적전시관을 건설,북만주의 ‘독립기념관’으로 꾸밀 계획이다. 원 회장은 김 장군이 최후를 마친 해림시의 시장·현장·인민대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정년퇴임,지금은 김 장군 기념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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