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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혔나 안걷혔나 거품경제(눈높이 경제교실)

    ◎‘저성장기’ 주택·토지가격 적정성 논란 우리나라에도 부동산 가격의 거품붕괴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경기의 장기침체에 따른 기업들의 부동산 급매물이 쌓여 대규모 부동산의 가격이 감정가의 60∼70%에 거래되면서 부동산 가격붕괴­은행파산등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특히 우리경제가 일정기간을 두고 일본경제를 뒤따라가는 경우가 많아 일본의 거품붕괴는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현실화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부동산거품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이들은 부동산 가격상승폭이 컸던 80년대 후반과 달리 지금은 주택과 토지의 공급이 수요를 크게 앞서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90년이후 연평균 가구증가율은 1.8%인데 비해 주택수 증가율은 5.4%에 이르렀고,88년 69.2%에 불과했던 주택보급률도 96년말 89.2%로 높아졌다.또한 우리경제가 이미 저성장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전제로 조성된 현재의 부동산가격은 거품제거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국내 부동산 수급상태가 여전히 ‘수요초과’라는 점을 들어 일본과 같은 급격한 거품붕괴는 없을 것으로 본다.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가격이 지난 4∼5년간 하향 안정세를 지속하여 충분한 조정과정을 거쳤고 아직 낮은 주택보급률로 인해 주택과 토지에 대한 수요가 꾸준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일본은 거품붕괴 시점에 주택보급률이 110%에 달했었다. 금융전문가들은 설령 부동산거품붕괴가 오더라도 국내 금융기관의 부동산 관련대출 비중이 일본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어서 금융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한다.96년말 현재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부동산 관련대출이 총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로서 일본의 30%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렇더라도 저성장시대의 진입과 함께 지속적인 사정과 사회개혁으로 ‘지하자금’의 수맥이 말라버릴 경우 지하자금을 토대로 만들어진 비싼 음식값,너무 많은 술집등의 ‘거품’은 언제든지 하루아침에 붕괴될 수 있을 것이다.〈이순여기자〉 ◎어떤 의미로 쓰이나 요즘 우리는 신문지상이나 TV를 통해거품이란 용어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거품경제,거품인기,거품가격,거품의식 등이 그 예이다.거품이란 엄밀한 의미의 학술적 용어는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실상에 비해 마구 부풀려졌다가 어느 한순간 돌연 터져버려 빈약한 참모습이 드러나는 현상을 묘사하는데 자주 활용된다.경제현상과 관련해서는 부동산,주식과 같은 자산가격이 단기간에 걸쳐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자산가치의 급격한 폭등현상 지침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거품현상은 17세기초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파동을 들수 있다.16세기 중반 유럽에 소개된 튤립은 귀족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면서 투기붐을 조성하였다.사람들은 튤립 뿐 아니라 이듬해 수확할 튤립알뿌리를 미리 사기 위하여 거액의 돈을 투자하였으며 급기야는 일부 품종의 알뿌리 가격이 일거에 25배 가량 폭등하기도 하였다.그러다가 가격이 터무니없이 올랐다고 생각한 일부 투기꾼들이 발을 빼기 시작하자 알뿌리 가격은 순식간에 폭락하고 말았다.그 결과 집과 땅을 팔아 투기에 나섰던많은 일반 시민들이 파산하면서 경제전체가 공황에 빠져들게 되었다. ◎화 튤립알뿌리값 25배 상승 첫사례 그 이후에도 미국,영국 등에서 몇차례 거품현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근래 들어 거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많은 나라에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다 폭락하여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어떻게 생성­소멸되나 이론적으로 부동산,주식 등 자산의 가격은 그 자산을 보유함으로써 얻을수 있는 예상수익,다시 말해 내재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그러나 실제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은 투기적 요소때문에 내재가치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예를 들어 경기가 좋아지거나 소득이 늘어나면 사라들은 자산을 매입하기 시작하고 가격은 서서히 올라간다.가격상승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이 엄밀한 경제적 평가없이 이에 가세하면서 자산가격의 상승 추세는 점차 가속된다.한걸음 더 나아가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면 무조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투기심리가 사회전체에 확산되면 자산가격은경제적 요인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급등하게 된다.그러나 정책당국이 자산가격의 이상 급등을 막기 위하여 투기억제정책을 시행하고 투자자들도 자산가격이 더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투매사태가 일어나 자산가격은 일순간 폭락하게 된다.거품이 꺼지는 것이다. ○내재가치 무시한 모방 투기심리 ‘발단’ 거품발생의 배후에는 거의 예외없이 통화량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돈이 많이 풀리면 사람들은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게 되어 투기대열에 나설수 있게 된다.또 높은 통화증가세는 인플레기대심리를 높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을 더욱 선호하게 만든다. ○통화 확대 ‘배후’… 투매사태로 ‘제자리’ 근래 들어 거품생성과 소멸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 주었던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일본은 198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엔화 강세의 영향으로 경기가 둔화되자 즉시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통화공급을 늘리는 등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하였다.이에 편승하여 대출담보 또는 투자대상으로서의 기업의 부동산 매입이 늘어나고 가계의 주식투자가 급증하면서 자산가격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였다.더욱이 그 시기에는 금리자유화가 크게 진전되어 자금조달 코스트가 상승함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예대마진이 큰 부동산업에 대한 대출을 크게 확대하였다.그 결과 일본의 지가(6대도시 상업용지가격)는 1986∼90년중 연평균 30% 상승하여 5년사이에 3.8배나 상승하였고 주가도 1986∼89년중 3배 가까이 급등하였다.그러나 90년대 들어 경제가 하강국면으로 돌아서고 부동산대출 및 거래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거품은 빠른 속도로 꺼지기 시작하였다.주가는 89년 이후 3년 사이에 무려 50% 이상 폭락하였으며 지가도 급전직하하여 96년말 지가는 90년의 1/3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어떤 영향 끼치나 거품의 생성과 소멸은 그 주기를 잘 예상한 극소수의 투기꾼들에겐 부당이득을 가져다 주지만 국가경제 전체로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먼저 거품현상은 금융산업의 안정성을 크게 훼손시킨다.금융기관들은 일반적으로 경기가 좋을때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주식투자나 부동산업에 대한 대출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거품붕괴로 주식가격이 폭락하고 부동산 관련기업이 줄이어 도산하게 면 수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투기꾼 부당이익… 금융기관 부실 초래 더욱이 금융기관은 대출을 해줄때 많은 경우 부동산을 담보로 잡게 되는데 부동산가격이 낮아지면 담보가치가 원금에 훨씬 못미칠 정도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이는 모두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금융기관의 경영부실과 이에 따른 신용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금융기관이 부실화되고 신용질서가 어지러워지면 돈이 필요한 부문에 제대로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된다. ○기업·근로자 한탕주의 조장… 경기 침체 또한 거품경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마비시킨다.기업은 기술개발보다 재테크에 열중하고 근로자들도 열심히 일하고 저축을 늘리기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에 몰두하게 된다.땅에 떨어진 기업윤리와 근로의식을 가지고 건전한 경제를 만들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떤가?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후반에 부동산 가격 및 주가의 급등을 경험하였다.주가는 1986∼89년중 연평균 62% 상승하는 폭등세를 보였으며 지가도 1986∼91년중 연평균 19% 상승하였다.당시에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사상초유의 국제수지 흑자,근로자 임금의 급상승 등으로 우리경제는 온통 장미빛 일색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머니게임에 열중하였다.그러나 폭등세를 이어가던 주가는 89년 하반기부터 국제수지가 적자로 반전되고 경기전망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하락세로 돌아서서 1990∼92년중 연평균 14% 하락하였다.89년 4월에 1007.8로 최고치에 이르렀던 종합주가지수가 92년 8월에 절반을 밑도는 459.1까지 폭락하였다.그 이후 주가는 경기국면에 따라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고 있으나 아직도 거품형성기보다 낮은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한편 지가도 1990년대 들어 하락세로 돌아섰으나 하락폭은 주식에 비해 완만하여 1992∼96년중 연평균 1.5% 하락하는데 그쳤다.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변동을 놓고 볼때 우리나라에서도 거품현상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으나 일본 등과 비교해볼때 그 정도는 상대적으로 크지않은 편이었다. ○80년대후반 지가·주가 폭등세 경험 한편 금년 들어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부동산 수요가 움츠러드는 가운데 기업들이 자구노력의 일환으로 보유부동산을 매각하거나 금융기관들이 기업부도후 담보로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매각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이에 따라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부동산가격의 폭락과 금융기관 부실화,그로 인한 신용불안이 겹쳐 실물경제가 더욱 위축되는 소위 복합불황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있기도 하다.
  • 이집트 아부 심벨(세계 문화유산 순례:39)

    ◎람세스2세가 세운 웅대한 신전 ‘장관’/69년 아스완댐 건설로 3,200년전 신전 이전/나일강변 돌산 깎아 4년여 대역사끝 복원 1965년 5월 전세계 50여개국의 기술자들로 구성된 유네스코 작업반이 일강 서안의 작은 바위 절벽 아부 심벨에 도착했다.이들은 바위산을 깎아 만든 대신전을 원래 자리에서 90m위쪽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착수했던 것이다.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이며 ‘태양의 아들’로 자처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전이었다. 모든 역사에는 명암이라는 양면성이 깔려있는 모양이다.파라오 중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영광과 이집트의 번영을 기원하며 세운 이 대신전은 수몰위기를 맞았다.람세스 2세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빈곤에 시달려온 이집트는 신전을 무시하고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서둘렀다.1960년 1월에 착공됐다.아스완 하이댐 건설은 관개와 수력발전을 통해 이집트의 경제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대역사였다. ○유네스코서 이전 작업 그러나 이 댐은 길이 500여㎞에 달하는거대한 인공호수 낫세르호를 만들었다.그리고 이로 인해 주변에 있던 수십기의 고대 무덤과 신전,기념물들이 수몰의 위기에 내몰렸던 것이다.유네스코가 무엇보다 긴장했던 것은 가장 위대했던 파라오가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만든 아부 심벨 신전이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이었다.마침내 이들은 신전을 통째로 바위산 위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바위 절벽을 깍아 만든 신전에 모두 1만7천개의 구멍을 뚫고 그안에 33t에 달하는 송진덩이를 밀어넣어 먼저 신전의 바윗돌들을 단단하게 굳혔다.그리고는 거대한 쇠줄톱을 동원해 신전을 모두 1천36개의 돌블럭으로 잘랐다.돌블록 하나의 무게가 30t에 달했다. 신전을 옮길 절벽 위쪽의 바위에는 그안에 거대한 콘크리트 돔 2개를 만들어 덮어 단단한 인공 산을 만들었다.그 다음 신전의 재조립 작업이 시작됐다.1969년 2월,마침내 3천200년전에 탄생된 신전이 다시 완벽한 제모습을 갖고 안전지대로 옮겨졌다.4천2백만 달러의 공사비가 들었고 4년이 넘게 걸린 작업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를 신전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몬의 기적이라고 말했다.지금 우리가 아부 심벨을 다시 보게 된 것도 바로 유네스코의 이 이전작업이 성공한 덕분이다.신전을 장식한 신상과 조각들은 완전한 형태로 재생됐고 다만 원래는 없었던 돌 블록들을 이어붙인 이음선들이 선명하게 나타나있다. 남부 이집트 누비아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아부 심벨까지는 카이로 공항에서 국내선 항공편으로 2시간 남짓 걸린다.아부 심벨 공항에서 신전까지의 20여분 거리는 왕복 버스가 운행하는데 이를 타고 2­3시간 신전을 돌아보고 나면 다시 이 버스가 공항으로 데려다준다. 버스에 내려 10분여를 걸어가면 오른편으로 미풍에 수면이 흔들리는 푸른 나일강을 끼고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돌산이 나타난다.강쪽으로 난 이 돌산 한쪽 면을 깍아 신전 전면을 다시 세웠고 큰 동굴처럼 돌산을 안쪽으로 깍아 신전 내부를 만들었다.신전 전면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좌상 4개가 버티고 있다.얼굴의 좌우 길이가 1m는 족히 됨직하다.역학면에서는 거대한 람세스의 상 4개가 높이 30m가 넘는 신전전면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하도록 설계돼있다.왼쪽에서 두번째 상은 몸통과 머리부분이 모두 사라졌지만 나머지 3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신전 출입문 위에는 매의 머리를 한 여신 라 하크트의 상을 조각했다.출입문을 들어가면 길이 65m에 달하는 긴 인공 동굴이 나타났다.좌우로 8개의 오시리스 신상을 모신 복도를 지나면 신전의 가장 내밀한 방인 지성소에 도달한다.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신은 태양신 라와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였다.파라오는 지상에서 태양신 라를 대신하는 존재였다.지성소에는 왼편부터 차례로 람세스 2세,아몬 라,그리고 하르마키스신,그리고 어둠의 신인 프타의 신상이 나란히 앉아있다. ○공사비 4천2백만불 소요 이 지성소에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다.매년 2차례씩,3월 21일과 9월 21일 상오 5시 58분이 되면 정확하게 태양빛이 신전 입구에서 지성소에 이르는 65m의 길을 밝혔다.그리고 나서 햐지나 아몬 라 신과 람세스 2세의 상에 햇빛이 닿았다.햇빛은 또 수분뒤 하르마키스신으로 옮겨가기까지 20여분을 지성소안에 머물었다.그런데 어둠의 신인 프타에는 햇빛이 비치는 법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수몰 위기를 피해 이 인공바위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이 태양의 기적은 여전히 계속됐다. 신전벽은 람세스 2세가 전장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의 장면들을 그린 상형문자와 그림들이 빽빽히 들어있다.가장 인상적인 것은 람세스 2세 재위 5년에 그가 북부 시리아족의 일파인 히타이트군과의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면이다.‘카데슈 전투’인데 그의 활약상이 잘 묘사됐다.이 승전기는 테베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에도 새겼다.카데슈는 지금의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북서쪽에 위치한 요새였다.적의 매복 함정에 빠져 2천500대의 전차대에 포위됐다.그러나 태양신 아몬 라의 도움을 받아 단신으로 이들을 물리쳐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람세스 2세 신전의 옆에는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운 신전 하나가 더 있다.평화의 신을 모신 하토르 신전이다.이 신전은 람세스 2세가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었다.람세스 2세가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면 네페르타리는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왕비였다고 한다.고대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통해 람세스 2세의 위대한 힘은 왕비 네페르타리와의 사랑에서 비롯됐다고 상형문자를 통헤 예찬했다. ○카이로서 비행기로 2시간 하토르 신전 전면 벽에는 람세스 2세의 상 4개와 왕비 네페르타리의 상 2개가 나란히 새겼다.이집트 역사상 왕비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고 그 신전 전면을 왕비의 상으로 장식한 파라오는 람세스 2세뿐이다.태양이 되고자 했던 사나이 람세스 2세와 그가 ‘가장 아름다운 여인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노래했던 네페르타리 왕비와의 사랑.그 힘은 바로 아부 심벨의 신전을 탄생시켰고 또한 이 신전을 3천년 이상 지탱해온 원천이었던 것이다.
  • 조선후기 심사정의 ‘절로도해’(한국인의 얼굴:113)

    ◎선승 달마 전설 그림으로 묘사/손가락으로 그린 도석인물화 조선시대 후기에 활약한 현재 심사정(1707∼1769)은 도석인물화를 많이 남긴 당대의 선비화가다.그를 가리켜 꽃과 풀벌레를 잘 그린 화가라고 말한 이도 있기는 하다.그보다 후대를 산 강세황의 평이 그러하고 보면,꽃 그림 화훼나 풀과 벌레 그림 초충을 꽤나 그렸던 모양이다.그러나 오늘날 전해오는 작품은 오히려 도서인물화의 비중이 더 크다. 그의 ‘절로도해’는 독특한 화풍의 도석인물화다.파도가 출렁대는 바다위에 두건을 쓴 사람이 떠있는 것을 묘사했다.그런데 바다에 뜬 사람은 갈대잎을 밟고 서있다.바로 중국 남북조때의 선승 모습이다.그것은 살아 생전의 달마가 아니다.그가 죽고나서 자신의 고향인 남인도땅 향지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에서 달마는 전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달마상을 약간 비켜갔다.부리부리한 서역인 눈매에서 벗어났다.눈매에서 넘치는 기력을 찾아볼 수 없다.달마가 사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전설내용을그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로도해’속의 달마는 추워 보인다.볼품없는 옷자락이 해풍에 흐느끼듯 더펄대서일까….맨살의 정강다리까지 드러나 더욱 을씨년스러운 달마가 되었다. 그래도 달마의 코는 크다.두건 아래 눈썹이 짙고 수염 역시 검게 자랐다.그러고 보면 달마가 서역인 티를 다 벗지는 못했다.이런 달마를 그린 화가는 심사정 말고 아무도 없다.몸골과 입성을 그린 솜씨는 전통 동양화기법이라기보다는 얼핏 양화의 느낌이 와닿는다.이를테면 먹물이 뭉친 듯 뭉툭한 오른쪽 눈썹과 눈,옷을 처리한 선묘는 전통화법의 그림과는 사뭇 달랐다. 그 이유를 알고보면 그림을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손가락으로 그린 지두기법을 쓴 탓일 것이다.연한 갈색을 칠한 얼굴에도 더러 색깔이 뭉쳤다.지두로 묘사한 풍랑이 높은데,바다 물빛은 엷은 청색이다.종이에 먼저 물을 바르고 먹물을 칠하는 선염기법으로 처리한 반투명한 옷자락 가장자리가 너불거린다.달마가 남인도 고향으로 가던 바닷길은 험란했던 모양이다.비록 손가락 그림이긴 하나 갈대가 어줍지않다. 중국 땅에서 죽은 달마가 다시 살아서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는 이야기는 전설에 나온다.송운이라는 사람이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바다에서 사후의 달마를 보았다는 것이다.〈황규호 기자〉
  • 난세의 성군 ‘패자 중이’/일 대하소설 3권 번역 출간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문공 일대기 춘추오패 가운데 한 사람인 진나라 문공 중이의 이야기를 다룬 대하소설 ‘패자 중이’가 대산출판사에서 나왔다.지은이는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작가인 미야기다니 마사미츠(궁성곡창광).전문번역가인 양억관씨가 우리말로 옮겼다.이 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해야 한다.춘추시대는 주나라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된다.이 시대에는 서주 이래 제후국이 100여개나 존립하는 등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했다.한편 기원전 403년 진의 유력귀족인 한·위·조 세 씨는 실권을 잡고 진을 삼분해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이때가 바로 전국시대의 시초다.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해 진·초·연·제·한·위·조의 이른바 전국칠웅이 성립됐다.그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과 함께 부국강병에 힘써 기원전 221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이로써 춘추전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춘추오패란 중국 춘추시대 다섯 명의 패자를 일컫는 말.오패는 ‘순자’에 의하면 제의 환공,진의 문공,초의 장왕,진의 목공,초의 장왕,오의 합려,월의 구천을 말한다.이 소설의 주인공인 중이는 19년동안 1만리가 넘는 역경의 길을 유랑한 뒤 62세에 군주의 자리에 올라 중화의 패자가 된 인물이다.그는 때를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내는 전형적인 춘추시대의 인간형으로 묘사된다.중이 곧 문공의 치세는 불과 8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의리와 신의,어진 덕성을 고루 갖춘 모범적인 군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이 소설은 ‘고원의 황사바람’‘찢겨지는 왕조’‘중이,패자가 되다’ 등 모두 3권으로 이뤄졌다.
  • 위로하라 위로하라 위로하라(송정숙 칼럼)

    머리를 남정네처럼 깎고 남방 계열사람들이 그렇듯 피부빛깔이 갈색이 된 ‘훈’할머니는 먼곳에 넋을 두고온 사람처럼 김포공항 청사 한 복판에 망연히 서서 ‘아리랑’을 불렀다.그것만이 생소한 고국의 관문을 통과하는 의례이기라도 하듯 ‘아리랑’을 불렀다.본래 이름도,고국말도 못하는 그가 한국인임을 입증받을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것 뿐이라는듯 부르고 있는 그의 아리랑은 처연했다. 언론들은 그렇게 부른 그의 아리랑이 “또렷한 발음”이었다고 묘사했지만 그의 ‘아리랑’은 “발음”보다는 가락이 분명했다.구성지고 청승스런 가락.‘아리랑’을 그렇게 흘려내듯 한숨섞어 부르는 것이 ‘조선사람’식이다. 우리민족 특유의 것이라는 ‘한(한)’의 정서를 말할때 우리는 ‘아리랑’을 인용한다.아리랑은 그 감수성을 대변할 수 있는 전형이다.집을 떠나 먼 외국을 돌다가도 이국땅에서 문득 아리랑의 가락을 만나면 우리는 금방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고국’이 서리서리 그리워 그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진다.억지로 보내진 여행도 아니고 호강스런여행을 하다가도 공연히 서러워지게 하는 가락이 아리랑이다.‘애국가’가 울리면 저절로 손이 가슴에 올려질지언정 그렇게 눈물이 나지는 않는데 ‘아리랑’은 듣는 순간 가슴을 파고들어 그립고 서럽고 따뜻함이 엉겨진 뜨끈한 덩어리를 명치끝에 솟게 한다. ○그녀가 부른것은 아리랑 남방땅에서 얻은 가무잡잡한 혼혈의 손녀들을 동반하고 너무도 이국적이어서 망연할 뿐인 고국땅을 찾은 ‘훈’할머니에게서 저절로 흘러나온 한숨같은 노래.그것이 아리랑인 것은 당연하다.다른것은 다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지고 ‘아리랑’만이 그렇게 체내에 박혀있다는 것은 그가 틀림없는 조선여인임을 말해준다.그리고 그 시대에 ‘남양군도’로 끌려가서 살아남은 조선여인이라면 그것은 일본이 강제로 동원했던 일본 군대위안부인 것이다. ‘훈’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이 ‘나미’라고 했다.그의 이름이 ‘나미’라는 것은 어쩐지 좀 안 어울린다.가요를 약간 혀짧은 소리로 부르던 어떤 여가수를 연상시키는 ‘나미’라는 이름은 ‘훈’할머니시대의 ‘조선의 딸들’의이름은 아니었다.너무 ‘현대티’가 나는 것이다.아리랑이 신음이나 한숨처럼 몸에 밴 조선여인인 그가 간직해온 이름이므로 틀림이 없을 터인데 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것일까. 혹시 ‘나미’가 아니고 ‘남이’인 것은 아닐까.‘남이’일수도 있고 ‘남이’일수도 있다.또는 끝자가 ‘남’으로 끝나는 이름일수도 있다.‘정남’‘후남’‘영남’‘순남’으로 사내 남자를 붙여 ‘남’으로 끝나게 한 이름이 우리의 딸들에게는 많았었다.“사내동생을 보아라”는 주술적 효력의 기대로 붙여준 이름들이다. ○그 소원만은 풀어주어야 끝자가 ‘남’일 경우 집안에서는 “남이야!”하고 불렀을 것이다.“남이야!”는 “나미야!”와 같은 발음이다.그러고보면 ‘나미’라는 박래품 냄새나는 이름의 숙제도 풀린다. “내이름은 나미,가족을 찾아주세요”‘아리랑’을 부르며 그는 서툰 글씨로 쓴 분홍색 청원서를 내보였다.그 소원만은 풀어줄 수 있어야 우리는 ‘조국’의 자격을 운위할 수 있다.천만명의 이산도 찾아준 우리다.온갖 기법도 터득한 처지고모든 사회적 정보의 전산망 자료화작업도 거의 완성했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그런 우리가 ‘훈’할머니의 가족도 못찾아준다면 전산망이 아무리 잘되어있다해도 허망한 것일 뿐이다. ○‘훈’할머니가 던지는 잠언 황량하기가 사막처럼 되어가는 우리를 한탄하는 자리에서 한 종교 목회자가 자신이 발견한 경전 귀절을 소개한 일이 있다.그의 신이 가르치는 ‘말씀’중에서 “위로하라.위로하라.위로하라”는 말을 찾아냈다고 했다.잠재의식에서 “아리랑가락”을 발굴하여 들고 우리를 찾아온 ‘훈’할머니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름을 확인해주고 가족을 찾아주는 일이다.그러는 것이 “위로하고 위로하고 위로하는 길”이다.증오와 비난과 험구로 상처만 증폭되어가는 우리의 어리석은 오늘을 반성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다. 할수 있는대로 우리서로 위로하고 위로하고 위로하자.
  • 이색 ‘육체전’ 내일부터 금호미술관서

    ◎육체의 다양한 모습 작품으로 표현/현대사회 시달리는 인간의 몸·이성 접근 시도/젊은작가 19명 변해가는 모습·표정 등 담아내 우리 몸의 다양한 모습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해 현대사회에서 시달리는 인간의 몸과 이성을 접근해보는 이색전시가 6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720­5114)에서 열린다. 90년대 들어 사회 일반적인 담론의 대상으로 가장 흔하게 대두되고 있는게 인간의 육체라고 한다면 미술계에서도 가장 빈번한 표현의 대상이 되고 있는게 바로 이 육체로 볼 수 있다.즉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고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기 연출을 해나가는 모습이 일반적인 상황.미술 작가들도 이 사회현상의 하나인 육체와 주체의 혼돈을 작품으로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현대인들의 육체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으며 그 달라지게 된 동기나 원인을 찾아보는 한편 동시대의 인간을 둘러싼 생각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자리.젊은 작가 19명의 육체와 주체에 대한 관심과 논의들이 어떻게 작품속에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통해 미술작가들의 문제의식을 들여다볼수 있는 전시로 볼 수 있다. 참여작가는 강홍구 구경숙 권혀현 김영헌 김인태 김준 김현희 방지현 신민주 신혜경 육태진 이강우 이수경 이윤태 장희정 조헬렌 최영희 최지안 홍영아 등.이 가운데 강홍구 신민주 권여현 방지현 이강우 조헬렌 등이 컴퓨터 합성사진 등 사진작업을 통해 요즘 인간·육체의 단면들을 담아냈다면 최지안 장희정은 아크릴 평면작품과 거울을 이용해 육체의 부분적인 묘사와 표정을 담아 변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들춰내고 있다.또 김준과 이윤태는 각각 혼합재료를 써 혓바닥 형상으로 인간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거나 장애인들의 삶에 대한 욕구를 표현했고 김현희 김영헌 김인태는 틀에 박힌 사회에 어쩔 수 없이 묻혀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육체의 부분묘사인 설치작품으로 담아냈다.이와함께 육태진은 지친 몸을 끌고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남자의 모습을 비디오 프로젝터와 VTR로 투영해 목표없는 순환의 비극성을 강조했고 구경숙은 천과 어망을 바느질로 처리한 여자 속곳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된 여성의 생명과 육체의 흔적들을 드러냈다.
  • 행주대첩 실질 지휘/조경 장군 영정 공개/선조가 하사한 공신상

    ◎후손,중앙박물관 기증 국립중앙박물관은 임진왜란 당시 권표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의 작전을 짜고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해 큰 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봉된 무장 조경(1541∼1609)의 영정을 29일 공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조경의 13대 후손인 조돈환씨(61·서울 은평구 응암동)로부터 기증받은 가로 90㎝,세로 165㎝ 크기의 이 영정은 선조가 이순신 등 18명에게 하사한 공신 초상화중 하나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무공신상이다.대례복 차림의 좌상인 이 영정은 담홍색의 옅은 얼굴색에 얼굴과 턱 주위에 희끗희끗한 수염까지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존하는 초상화가 주로 문신 초상화인데 비해 이 영정은 대례복을 착용한 보기드문 무신의 초상으로 제작연도가 확실해 17세기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 조선후기 조영우의 ‘노승헐각’(한국인의 얼굴:112)

    ◎지친 노승이 노송뿌리에 풀석/마른 얼굴·광대뼈 탁발승 묘사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관아재 조영우(1686∼1759)은 인물화를 잘 그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숙종과 영조때에 활약한 선비화가다.겸재 정선.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의 선비화가 삼재로 꼽혔다.그의 인물화 솜씨는 뛰어나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리는 일에 추천될 정도였다고 한다.그 스스로도 “산수는 정선이 한수 위이나,인물은 내가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린 인물화 가운데 ‘노승헐각’은 빼어난 작품이다.비단천에 먹물로 그린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했다.늙은 스님이 땅위로 솟아 난 노송 뿌리에 털썩 주저앉았다.화제에는 아픈 다리를 쉰다는 뜻이 들어있다.노구를 이끌고 암자로 오르는 산길을 접어 들었던 스님은 마냥 지쳤다.동냥한 곡식이 서너줌 들었을지도 모를 걸망을 내동댕이 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다.앉기는 했어도 숨이 하도 가빠 헐떡거리고 있다.얼굴은 아주 깡말랐다.그래서 광대뼈가 불쑥 튀어 나왔다.이빨도 다 빠져 입이 합죽한 노승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표정이다.오죽 지쳤으면 동냥 걸망을 벗어 던졌을까.탁발승으로 살아온 온갖 풍상을 얼굴에 가득한 주름으로 새겼다.걸망 하나를 달랑 걸머메고 구름따라 바람따라 떠 돈 늙은 운수납자다.간밤을 잔 절을 나와 또 다른 암자를 찾아 다니기를 몇 수십년을 하는 사이 어느덧 늙어버린 것이다.노승은 앉고 나서도 몸을 온통 지팡이에 내맡겼다.그래서 굽은 등이 더 굽었는데,목에 걸어놓은 굵은 알 염주조차 무거워 보인다.고개를 들어 먼 허공을 바라보는 눈매에도 기운이 없다.그래도 눈꼬리가 처진 노승의 눈에는 무슨 생각이 분명히 어렸다.그것은 우주만물이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제행무상의 마음일 것이다.큰 소나무 장송 앞에서 덧없이 흘러간 풍상의 세월을 곱씹고 있는 노승은 이제 초조할 것이 없다는 눈치다. 수염은 서너가닥,고행으로 살아온 노승의 삶 만큼이나 빈약했다.광대뼈에 가린 귀 역시 실하지 않다.대나무 살을 엮어서 만든 모자를 썼다.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회흑색 먹물옷과 염주,지팡이와 걸망이 있을 뿐이다.도를 닦는데 마음을 기울인 이판이란 말로 자신을 내세울만한 스님도 아니다.그렇다고 절의 살림을 맡았던 사판은 더욱 아니다.어디 한군데 집착하지도 않았거니와 무소유로 살아온 터라 지금 탈속의 경지에 들었다.〈황규호 기자〉
  • 도예가 윤광조(이세기의 인물탐구:139)

    ◎분청사기만을 고집하는 영원한 ‘도공’/전통양식에 자기 특유의 ‘작품 혼’ 담아/삶의 규칙·구속 배제하는 ‘자유주의자’ 질끈 동여맨 동자머리에 광목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운동화나 짚신을 신고 윤광조는 전혀 예기치 않은 자리에 바람처럼 나타난다.나이를 비껴가는 해사한 용모탓에 대부분은 그를 여자인줄로 착각하는 예가 흔하다.그림을 그린다든가 시를 쓴다든가 절에서 도를 닦는 현대화된 여승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전 국립박물관장이던 최순우씨가 그렇게도 아끼고 자랑해 마지않던 ‘분청사기의 명인’, 바로 그 윤광조인 것이다.도예가는 많지만 분청사기만을 고집하는 희소성으로 인해 그는 지금도 평자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해사한 용모 여증 착각 경기도 광주에 머물다가 그가 가마를 경주로 옮긴 것은 지금부터 3년전이다.경주시내에서 한 시간이상 골짜기로 꺾어지르는 안강에 칩거해 있다가 전시가 있을때만 서울에 올라와서는 대낮부터 술독에 빠져버린다.그리고 그를 구속하려는 모든 규칙이나 구속을 배제한채 ‘나는어디 한군데 걸릴 것 없는 바람’임을 스스로 자랑삼는다.심지어는 가족에게 얽매이지도 않고 그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마저 그의 고독에 지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에서 가족은 서울에 남겨두고 그는 주로 경주에 파묻혀 오로지 도공으로만 살고 있다.반면 정감이 넘치고 친구를 좋아하되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고집에서 대선배 최순우씨와 원로 화가 장욱진씨만을 스승으로 손꼽고 뉴욕에서 활동하던 화가 정찬승과의 우정을 소중히 간직한다.그러나 그들마저 모두 타계한 지금 그는 극도로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는 처음부터 도예가의 꿈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자유롭고 낙천적인 성격탓에 백색 세라복을 입는 해군이나 태평양을 누비는 마도로스,정치가나 사업가를 꿈꾸기도 했다.공무원이던 윤득호씨와 대한부인회 초대조직부장을 지낸 박채련씨의 4남2녀중 아들로 막내.부친은 6·25때 작고하고 홀어머니밑에서 자랐으나 활동적인 어머니는 아들이 정치가가 되기를 바랐고 그는 해군사관학교와 연세대 경제과 낙방후 홍대미대에 진학했다.도자기로 돈 것은 홍대에 강의를 나오던 최순우씨가 도자기만의 깊고 푸른맛, 특히 분장청회사기의 남성적인 소박한 매력을 끊임없이 권유해주었기 때문이다.또 도예를 하기 위해서는 도자기와 관련된 문학 철학 미술 역사를 두루 공부할 것을 충고했다.이른바 과묵하고 심도있게 지도하면서 정성껏 만든 작품을 보여드리면 스승은 ‘좋으네’ 한마디 뿐이었다. 74년에는 문공부가 주관하는 도자기수업을 위해 도일,그때도 임진왜란때 건너간 도공의 후예들이 어떻게 도자기를 이어가고 있는가,개인공방에서 작가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가마를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었다.수업기간은 3년예정이었으나 그들의 도자기가 하나같이 일본화된 것을 보고 그는 ‘내가 자란 땅에서 우리의 흙으로 나의 것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1년만에 귀국해버렸다. 윤광조의 분청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수반 항아리 문방구 제기 합과 화분을 통해 분청사기의 여러 기법을 다양하게 선보이게 되면서부터다.형태나 문양에서 전통적인 분청사기의 형식을 갖추되 연적이나 합,지통같은 원통형과 발의 형태를 절충하고 문양에서도 상감문과 귀얄문,조화와 인화를 고루 사용하면서 조선조 분청의 질서에 지나치게 맹종하지 않았다.76년 개인전 팸플릿에서 최순우씨는 ‘그의 표현애속에 깃든 아첨없는 양감과 장식은 한국인다운 소탈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길어올리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지속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다.그러다가 78년 현대화랑 박명자대표가 기획한 장욱진과의 합작전에서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기면이 마르기 전에 작은 태토를 덧붙여 화장토를 바르거나 튀어나온 부분을 긁어내고 흙띠를 두르는 방법,또 기면을 무작위로 찔러 큰 붓질로 화장토를 입히고 그릇 전면에다 백토를 분장한 분청사기에다 장욱진 화백의 꾸미지 않은 동화는 절묘하게 어울렸다.평론가 이구열은 이때의 전시를 가리켜 ‘윤광조의 무심과 장욱진의 소박한 동심이 절로 맞아떨어져 마치 한 작가의 작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어릴땐 마도로스 선망 이무렵 그는 스승 장욱진씨의 손에 끌려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화신뒤 옹달샘에서 두주불사로 언제나 명정을 면치 못했다.‘술이 취해야만 모든 구태한 생각을 떨궈버리고 새로운 창의력을 얻는다’는 술철학으로 ‘술없이는 예술도 못하고 살맛도 없다’는 태도다.다만 아무리 취해도 ‘종횡무진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의 특기이자 남들이 놀라는 점이다.장욱진합작전에서 전람회개막 30분만에 작품이 모두 팔려나가자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나 경기도 광주에다 가마를 마련했고 그때 최순우씨가 집앞에 흐르는 맑은 곤지암천에 뜬 달을 보면서 ‘급월당’이란 당호를 지어내렸다. 이후 분청예술과 선종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깨달은 그는 83년 겨울 송광사에 입산,목탁을 두들기고 단소를 부는 좌선내관으로 도예의 형상에 무념무상의 자율성을 결합시킬수 있었다.형태는 더욱 명상적으로 되었고 ‘정’과 ‘화음’‘관’ 등의 화두로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방하착’의 상태에서 무늬를 자유롭게 그려 나갔다.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아무렇게나 빚은듯한 편안한 경지와 나무와 바람의 이미지를 속도감있게 긁어낸 추상적 조화의 성취가 그것이다. ○“술없이는 살맛도 없다” 도자기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단한번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흙과의 끝임없는 대화와 실험과 도전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며 과도한 장식이나 세련된 묘사보다 ‘무작위의 작위’에 이르기 위해 그는 피와 살과 영혼까지도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일념으로 추구해 나갔다.윤광조의 모습은 최순우씨의 표현대로 ‘물위에 뜬달’처럼 허심탄회하다.그래서 늘 자유롭게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인위와 조작이 없는 자연그대로의 ‘무하유지향’에서 그는 고매하고 순수한 예술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연보 ▲1946년 함남 함흥 출생 ▲1970년 홍대 미대 공예학과 졸업 ▲1973년 동아공예대전 대상수상 ▲1976년 서울신세계미술관 개인전 ▲1978년 경기도 광주 초월면에 급월요개설,서울현대화랑 개인전 ▲1979년 공간도예대전 우수상 수상 ▲1984년 서울예화랑 개인전 ▲1986년 일본 교토크래프트센터 갤러리및 서울 한국미술관 개인전 ▲1987년 서울현대화랑 개인전 ▲1991년 호주시드니 맥쿼리갤러리 및 부산지니스화랑,서울선화랑 개인전 ▲1994년 경북 경주 안강읍이주 ▲1997년 서울 다도화랑 및 통인화랑 ‘윤광조 그릇전’,독일 프랑크푸르트(10월) 및 삼성갤러리 오픈기념전(11월)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호암미술관,워커힐미술관,런던 대영박물관,호주시드니 NSW아트갤러리외 간송 전형필 선생 동상도판제작
  • “창작의 자유 침해” 강력 반발/만화가 이현세씨 어제 소환조사

    ◎만화가협,‘천국의 신화’는 인류발전 다룬것/심의까지 마친 작품 음란물 규정 수용못해 만화작가의 상상력과 창작의 자유는 법적으로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검찰은 23일 인기리에 발매되고 있는 만화 ‘천국의 신화’(해냄 미디어 간행)가 음란·폭력성이 짙다는 이유로 작가 이현세씨(41)를 소환,조사한 뒤 귀가시켰으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창작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박재동·이우정씨 등 만화가협회 회원 50여명은 이날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처사”라고 집단 반발하고 나섰다. ‘천국의 신화’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시대별로 인류가 발전해 온 과정을 총체적으로 다룬 작품.모두 100권 분량으로 기획된 ‘대하’ 만화책이다.지금까지 6권이 발간됐다. 검찰은 이미 이씨의 작품에 대해 “잔인한 폭력과 인간과 동물간의 집단 성교 장면을 노골적으로 실은 음란물”이라고 잠정 결론지은 상태다.성인용으로 발간되고 있기는 하지만 유통 과정에서 청소년에게 유출,악영향을 끼치고 있어 그냥넘어갈수는 없다는 분위기다. 이씨는 이에대해 “선사시대 인류는 한마리 원숭이와 같은 존재”라면서 “당시로서는 한낱 동물에 불과한 인류의 성행위를 묘사한 것이 불법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또 “전체적인 작품성을 보지 않고 단편적인 장면만으로 포르노 여부를 따지는 것은 받아들일수 없다”면서 “나머지 작품을 계속 그릴 것이며(창작의 자유를 침해받으면)차라리 절필하겠다”고 말했다. PC통신에서도 논쟁이 시작됐다.하지만 “현대판 분서갱유” “작가의 상상력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한 편어서 검찰의 사법처리 여부가 주목된다.
  • 콜린 파월 자서전/콜린 파월·요셉 E 퍼시코 지음(화제의 책)

    ◎흑인 첫 4성장군 탄생 감동적 묘사 자메이카 이민 2세로 뉴욕 빈민촌 할렘에서 태어나 미군 최고 지도자가 된 콜린 파월(60) 장군의 인생록.인종적 편견의 벽을 넘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흑인출신으로는 처음으로 4성장군·합참의장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묘사됐다.할렘 모닝사이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뒤 뉴욕시립대 ROTC로 군문에 들어선 파월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군단장을 거쳐 백악관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과 합참의장으로 레이건 부시 클린턴 등 3명의 대통령을 보좌한다.그런 만큼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걸프전,이란·콘트라 사건,파나마사태,베트남전 등과 관련된 미국의 대외정책 수립과정을 소상히 알 수 있다.파월은 이 책에서 주한미군 대대장으로 동두천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KAL 007기 피격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자서전은 단순히 일개 군인의 성공 스토리에 머물지 않는다.현대의 국제전쟁사이며 미국의 권부 엿보기이자 미국인의 생활상 그 자체로도 읽힌다.“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각보다 나빠지지는 않는다.아침이 되면 좋아질 것이다”라는 파월의 좌우명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유진 옮김 샘터 1만5천원.
  • 이현세씨 ‘음란 만화’ 출판사 대표 소환조사

    서울지검 형사1부(윤종남 부장검사)는 21일 만화작가 이현세씨의 작품 ‘천국의 신화’를 출판한 해냄 미디어 대표 송영석씨(44)를 불러 폭력 및 성행위 장면이 묘사된 이 만화책을 펴낸 경위 등을 캐물었다. 검찰은 인도네시아에 머물고 있는 이씨도 귀국하는대로 소환,조사한 뒤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 ‘악마주의’음반 불법유통 2명 구속

    서울지검 서부지청 형사2부도 이날 살인 및 성행위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악마주의(DEATH METAL)’계열 그룹의 외국 음반을 불법 유통시킨 대만계 다국적 음반수입사 ‘록레코드’ 간부 정원석씨(31)와 김재경씨(27)등 2명을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정씨 등은 지난해 7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미국 메탈 블레이드사가 제작한 미국 그룹 ‘식인시체(CANNIBAL CORPSE)’의 음반 7종을 불법 수입한 뒤 1만여장을 제작해 국내 유통망을 통해 소매가 1만8천원씩에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씨 등은 이들 음반이 정상적인 음반인 것처럼 꾸며 공연윤리위원회의 수입 추천을 받은뒤 국내에서 대량 제작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음반에는 ‘잔인함은 나의 취향’ ‘폭력은 삶의 방식’ 등의 가사와 죽음과 자살을 찬미하고 악마의 부활과 마약을 숭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표지에는 뼈만 앙상히 남은 사람,여자를 칼로 찔러 죽이거나 난잡한 성행위 장면 등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 조선후기 윤덕희의 ‘하마선인도’(한국인의 얼굴:111)

    ◎선인과 두꺼비의 익살 그려/선 굵은 얼굴에 큰웃음 담아 도교와 불교를 도석이라고 한다.도교의 상징은 물론 신선이다.그러나 도석인물화라는 그림에서 불교의 상징은 부처가 아니다.나한이나 승려가 등장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도석인물화는 도교의 신선과 불교의 나한을 묘사한 그림이다.도석인물화는 거의가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아내어 흥미롭거니와 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의 하나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낙서 윤덕희(1685∼1766)가 그린 ‘하마선인’이다.도교풍의 선인이 어깨에 올려놓은 두꺼비 말목을 슬쩍 거머쥐고 걷는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했다.신선은 마치 두꺼비와 말을 건네는 자태다.그리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성큼성큼 걷고 있다.두꺼비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신선은 함빡 웃음을 지었다.두꺼비는 막상 말을 던져놓고 선인 표정을 살피는 눈치다. 이 그림의 주제는 옛날 이야기 고사에 두었다.10세기쯤 중국의 후량에 유해라는 선인이 세개의 발을 가진 두꺼비와 살았다.그가 바로 하마선인이다. 하마선인이 키운 두꺼비는 주인을 세상 어디라도 데려다줄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 영물이었다. 그런데 두꺼비는 가끔 우물속으로 달아나 버렸다.그럴 때마다 선인은 금돈이 달린 끈으로 두꺼비를 잡아 끌어냈다.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마선인과 두꺼비가 나오는 그림을 행운의 상징으로 보고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선인과 두꺼비의 만남은 대자연의 섭리요,자연에 순응하면서 생명체들이 어울려 사는 공존의 질서다.그리고 그림에 나타난 선인과 두꺼비의 삶에는 조화가 깃들였다.그림이 신비스러워 보이는 까닭도 비범하기 짝이 없는 두꺼비와 선인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데 있을 것이다.참으로 기이한 그림이기는 하나 화폭에는 푸근한 정감이 어렸다. 선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선이 굵은 얼굴에 큰 웃음을 담았다.나이 탓도 있겠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골 깊은 주름이 진 것은 소탈한 웃음 때문일 것이다.웃음이 너무 커서 다물지 못한 입속으로 이빨이 드러났다.그야말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만면희색의 선인은 코주부 못지않은 코를 자랑했다.눈썹은 아직 검다.눈은 본래 컸을 법도 하나 웃음을 웃느라 좀 작아졌다.관자놀이 연저리에 좀 남은 머리칼이 아니었더라면,선과 석을 구분하지 못했을만큼 귀 역시 크다.오종종한데가 없이 기골이 장대한 선인이다.〈황규호 기자〉
  • 발해사 재인식(송화강 5천리:31)

    ◎92년 대규모 ‘무덤떼’발굴 연구 본격화/무기류 등 2천여점 출토/중 10대 고고발굴로 평가 중국에서 발해사 연구는 사실상 도외시 되어왔다.그런데 90년대 들어 시각이 바뀌어 발해사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에 걸쳐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칠색송어장 부근에서 발굴한 발해무덤떼가 그 계기를 이루었다.국가 관계기관으로부터 1995년 중국 10대 고고발굴로 평가된 이 무덤떼는 이른바 칠색송어장무덤군으로 호칭되고 있다. 이들 무덤은 용암언덕 모래땅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돌무덤을 비롯,벽돌무덤,돌과 벽돌을 함께 써서 축조한 무덤 등 형태도 다양했다.4만㎡에 이르는 넓은 면적에서 발굴한 유적은 323기의 무덤과 7기의 제단으로 되어있다.생활용품과 무기류,말갖춤,장신구를 포함한 2천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덤 323기·제단 7기 그러나 관광객들이 쉽사리 대할수 없는 유물이다.칠색송어장무덤군 출토유물 뿐아니라 중국에서 다른 발해유물도 찾아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관광객들에게 개방한 유물이있다면 발해진 중앙대가에 자리한 흥륭사 경내의 석조유물 정도가 고작이었다.남대묘라고도 부르는 흥륭사 용암돌담을 돌아 큰 대문옆 쪽문을 들어서면 가지가 휘휘 늘어진 고목이 길손을 맞았다.300년을 자랐다는 고목의 버드나무는 제법 그늘을 드리웠다. 그 나무밑에서 쉬노라니 큰 돌거북 대석구가 첫눈에 들어왔다.지난 1976년 8월12일 발해진 발해소학교 울안 1.2m 땅속에서 나온 유물인데,이 절로 옮겨온 것이다.높이 58㎝,길이 1m의 돌거북은 높이 32㎝,길이 1.36m의 대석에 올라앉았다.돌거북은 희한하게도 용머리와 용발을 했다.그러니까 용두용족의 거북인 것이다.매우 아름다운 조형물인 돌거북이 왜 용머리와 용발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절 맨 뒤쪽에 들어앉은 대웅보전 앞뜰에는 석등탑이 우뚝했다.용암을 쪼아서 만든 석등탑은 높이가 6m에 이르고 있다.기단은 4개의 큰 돌을 이어서 붙여 놓았다.그리고 활짝 핀 연꽃무늬를 새겼다.발해의 제3대 왕인 문왕이 승려를 서천에 보내 불경을 구한 뒤에 세웠다는 석등탑은 애절한 전설도 간직했다.문왕대에 만든 걸작의 대석불도 이 절에 있다.옛 기록을 보면 석불의 높이는 3길이었다.그런데 건륭연간인 960∼963년 사이에 불두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지금은 복원되어 196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에 모셔놓았다.이 석불 역시 전설을 안고 있다.경박호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 하나가 살았다.하루는 고기를 싣고가는 수레에 웬 스님이 올라탔다.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스님이 오간데가 없었다.고기를 내리고 돌아오는 길에 스님이 사라졌던 지점에 이르렀을때 근엄한 여래석불이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바로 오늘날 흥륭사의 대석불이라는 이야기다.이 절에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대석불앞에 넙죽 엎드렸다.이는 석불에 얽힌 전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물고기를 내려주고 돌아가던 길에 여래석불을 만났던 어부는 그 자리에 넙죽이 엎드려 소원을 빌어 부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전설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발해유적에서 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그러나 길림성 화룡시 정효공주묘와 같은 중요 고분벽화는 감히 들여다 볼 수가 없다.유적보호를 위해 일반에는 절대 공개하지 않은지가 오래되었다.이와는 달리 누구라도 아무때나 볼 수 있는 바위그림이 흑룡강성 해림시 임구현 고려정촌에 있다. 고려정촌은 목단강시에서 75㎞가 떨어졌다.본래는 조선족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조선족이 모두 마을을 떠났다.그래서 한족 70가구가 사는 한족 마을이 되었다.조선족과 큰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고려정촌이라 불렀던 마을이다.하지만 조선족들이 모두 떠나고 우물마저 메워버렸으니,고려정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무색하게 되었다. ○흥륭사 대석불 전설 역사는 어차피 세월과 함께 흘러가는 옛날의 이야기인지 모른다.그래서 역사를 붙잡아 둘 수는 없는 것이지만,읽고 가꾸는 기록으로라도 남겨야한다는 집념의 사람들이 있다.흑룡강성 벌리현 향수향 행선촌 최금산선생과 임승환선생이 그들이다.두 분은 3년여에 걸쳐 대하역사소설 ‘해동성국 발해전’을 합작으로 탈고했다.조사비 등 10여만원의 돈을 들인 이 대하소설은 10부작으로 2백50만자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이다. 최선생은 경박호변 남호두가고향이고 임선생은 상경용천부가 고향이니까 모두 발해진 태생이라 할 수 있다.최선생은 대흥구 중학교를 다닐때 학자였던 하숙집 주인때문에 발해와 인연을 맺었다.하숙집 주인으로부터 발해에 대한 이야기를 2년동안이나 들었다.이야기를 들을수록 새로웠다는 최선생은 ‘발해연의’를 100회나 쓴 적이 있다.그리고 임선생은 조선족과 만족,몽골족과 함께 살면서 그들속에 남아있는 발해설화와 신화 80여편을 수집 정리한데 이어 ‘발해전’120회를 썼다. ○대하소설 합작 탈고 그들은 발해라는 고대왕국을 소재로 이미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쉽사리 합작을 약속했다.두 분의 대하소설 ‘해동성국 발해전’은 고왕 대조영이 698년 오늘의 요령성 조양땅인 영주에서 나라를 세워 926년 망하기까지 229년간의 역사를 그렸다.오늘의 중국 동북3성은 물론,러시아의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부를 잇는 영토확장을 위해 숨가삐 달린 발해의 영욕이 담겨있다.자그마치 300명 인물이 등장하는 이 대하소설은 발해의 정치,군사,경제,외교,문화 등 여러 분야의 발자취가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 2위 그룹 단일화 모색 활기/전대 1주일 앞둔 여 경선 판세점검

    ◎합종연횡 17·19·21일 3차례 고비/이회창 진영 ‘소연대’로 맞불 구상 전당대회를 일주일 앞둔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의 판세는 머리와 꼬리가 확실하고 몸통은 계속 뒤틀리는 상황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이회창 후보는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으며 계속 확실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그러나 아직 지지율이 40%를 넘지 않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최병렬 후보는 열정적으로 정책대결을 추진하고 있지만,가장 열세가 확실하다.박찬종 후보도 2위권에서 다소 떨어져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상황이 복잡한 것은 2위권.이인제 후보와 이한동 이수성 김덕룡 후보가 저마다 2위를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객관적으로는 ‘젊은 대통령’ 바람을 일으키는 이인제후보가 2위권에서 가장 앞서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다만 경선이 막바지로 갈수록 조직의 위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바람이 표로 연결될지는 불확실하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이한동 박찬종 김덕룡 후보의 ‘3자 연대’ 그리고 이한동 이수성 후보간의 후보단일화가 본격적으로 모색되고 있다.어느쪽이든 다른 후보를 끌어안는 후보는 2위권 안으로 올라가 결선투표를 바라볼수 있게 된다.이인제 후보도 2위권을 확실히 하기위해 김덕룡 박찬종 후보와의 연대를 추진중이다. 2위권을 다투기 위한 합종연횡은 앞으로 휴일인 17일과 서울지역 합동연설회가 열리는 19일,그리고 전당대회 당일인 21일 등 세차례의 큰 고비를 맞으며 판세를 결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17일까지는 이한동 이수성 후보간의 연대가 윤곽을 드러내고,19일에는 ‘3자 연대’내의 우열이 확실해질 것이다.21일에는 반이회창 대연합의 성패가 결정나게 된다. 선두인 이회창 후보도 이런 흐름에 맞서 나머지 후보간의 반이 대연대를 저지하기 위해 김덕용 박찬종 최병렬 후보를 바라보는 소연대를 추진중이다.연대의 흐름이 반드시 이회창 후보측에 불리한 것은 아니다.최병렬 후보는 13일 “특정인을 반대하는 연대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이회창 후보측은 고무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 ‘후보경선’ 언론보도 유감/이규억 산업연구원장(서울광장)

    금년의 대통령선거는 문민정부를 계승하여 민주정치를 더욱 발전시킬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이다.이러한 시점에서 신문·방송 등 언론매체의 책임은 더할 나위 없이 막중하다.언론이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선거과정은 물론 결과의 가치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이것은 특히 언론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언론매체는 어느 정도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가.이러한 답은 흔히 한 나라의 언론은 그 나라의 정치·사회·문화의 전반적 수준을 대변한다는 말로 간접적으로 표현된다.오늘날 언론의 선도적 기능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언론은 그러한 자조적인 평가보다는 오히려 사회를 한 차원높게 이끌어나가는 사명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과대논평·자화자찬 난무 이 관점에서 최근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양상은 적이 실망스럽다.엄청난 지면을 연일 같은 주제로 융단폭격하듯 뒤덮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정보과잉을 지나 정보불감 내지 정보불신의 지경에까지 밀어 넣어버린다.여당의 차기 대통령후보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렇다고 하여 같은 후보들을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가 한짝이 되어 똑같은 형식으로 번갈아 경쟁적으로 토론회에 불러내고 그에 대한 극히 일부 청취자의 반응이 마치 전국민의 의사인 양 과대논평하고 자화자찬하는 것이 과연 성숙한 언론이 하여야 할 일인가. 한 정당의 후보선출은 그 정당의 당원들이 하는 것이지 일반국민이 선택할 단계의 일이 아니다.그럼에도 마치 본선진출한 후보들인 양 일반국민을 상대로 지지여부를 묻는다는 것은 정당후보선출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다.더욱이 가관은 확정된 타 정당의 후보들과 아직 확정되지 않은 여당의 여러 후보들을 동렬에 놓고 지지도를 조사하여 일등,이등을 운위하는 일이다.이것은 도대체 무슨 논거에서 인가.심지어 표본작성에서의 오류가능성을 간과한채 조사결과를 마치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것인 양 발표하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일이다. ○자만심 버리고 진솔해야 신문이 자신의 판단으로 지지후보를 명시적으로 밝힐 수는 있다.그러나 행여 독자를 잃을까 보아 간접적 표현과 기사의 형식을 빌려 그 의사를 암묵적으로 밝히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여당의 경선은 처음 있는 일이다.그만큼 의미가 있고 보도할 가치도 크다.처음이기 때문에 보도하는 방법이 서투를 수도 있다.그렇다고 해도 언론은 여전히 신중하고 차분하게 합당한 정도로 보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치,행정,기업계는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기사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이러한 풍토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키워져 온 언론의 자만은 버려야 한다.우리의 언론은 아직 많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그만큼 사회에 대한 영향력도 크다.외국에는 그야말로 존경받는 신문들이 적지 않다.그들이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큰 눈으로 똑바로 보고 배워야 한다.우리 국민은 언필칭 문화국민이다.문화국민에 걸맞는 진솔하고 의젓한 필치로 현실의 중요한 면을 전달하고 바람직한 앞날을 그려야 할 것이다.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언론은 배전의 노력으로 공부하여야 한다.추측기사를 남발하거나 아무도 모를 영문이니셜로 자연인을 묘사하면서 가십성 기사를 쓴다거나 사실이 아닌 기사를 게재하고서도 이를 충분히 해명하지 않는 일들은 이제 버려야 할 것이다.일반기업들에는 경쟁의 미덕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은 진정한 경쟁을 회피하는 이율배반도 사라져야 할 것이다. ○‘자유따른 책임’ 명심을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사회의 기본권이다.그러나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이것을 어느 수준에서 이해하느냐가 결국은 그 사회의 성숙도를 가름할 것이다.성숙한 언론은 성숙한 정치를 유도한다는 이치에 맞게 금후 언론의 진일보한 보도를 기대해 본다.
  • 화가 권영우(이세기의 인물탐구:137)

    ◎‘그리는 그림’아닌 생명의 혼 터치/순백의 캠버스에 명암따라 부조 성취/‘종이의 화가’ 대부… 파리·LA서도 개인전 ‘종이의 작가’로 알려진 화가 권영우의 그림작업은 ‘흰무명을 볕에 바래어 표백하는 과정’처럼 생략과 절제가 끈질기게 중복된다.먹을 가는 동안 화상을 가다듬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종이 자체에서 그는 ‘깨끗하고 고요한 담벽과 담흑색’을 캐내고 싶어한다.‘한국화’라는 전승표현의 범주에서 벗어나 화면에 구멍을 뚫거나 찢는 변칙은 종이가 지닌 불가사의한 생명력을 추구하려는 그만의 조형수단이다. ○작품세계 생략·절제 중복 서울대 미대시절에도 동양화과에 다녔으나 나체모델이 배당된 서양화 실기실에 드나들었고 선묘 위주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70년대이후 기하학적으로 윤곽처리된 묘사적 화풍에다 광활한 여백을 화면에 함축하는 것이 특징이다.그런 한편으로는 동양화에 있어 거의 숙명적이라고 할수 있는 종이의 섬세한 재질감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물들이는 수묵 농담의 수법에서 언제나 과묵하면서도담소한 감수성을 지킨다.이른바 백색 일색의 종이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화판에 담기는 층이나 명암에 따라 리듬의 부조를 성취시키는 것이다.물기가 아련히 스며든 여러층의 마티에르는 지루하리만큼 수많은 구멍들이 모래벌판에 찍힌 철새의 발자국이나 고공에서 바라본 비늘구름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에 혁혁함을 던져준다.조용한가 하면 행동적인 데가 있고 전위적인가 하면 전통을 고수하는 곡진한 그의 방법에 대해 “결국 미의 종합세계를 이루어놓고야 말았다”는 평론가 박래경의 말은 옳다.그는 실제로 ‘그리는 그림’이 아닌 ‘만들어진 흰빛의 그림’속에 순백의 적요를 흩뿌리면서 ‘거울같이 맑고 고요한 수면보다는 빗방울이 떨어져 소용돌이가 일고 물결치는 상황’으로 작품을 몰아나간다. 그의 추상화면은 작은 알들이 깨지는듯한 ‘껍데기가 깨지는 아픔’과 ‘탄생의 기미’를 창출하면서 직선과 사선과 횡선에 먹번짐과 균열과 누빔을 엇가르고 총총하게 뚫어진 화면은 온통 보석타래가 흩어진 형국이다.그렇게 인위적으로뚫린 그의 창들은 내면과 외부를 향해 저마다 쏘듯이 다른 광채를 내뿜고 있는 것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직선에서의 영롱한 물방울무늬를 얻어낸 그는 76년 파리의 권위있는 자크마솔화랑 초대전을 갖게 되었고 파리의 미술평론가 알랭 보스케는 “더없이 다양한 추상풍경화의 경이”로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그때 자신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끝없는 추상의 전조를 예감하고 그는 전업작가로 남기 위한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기에 이른다.이른바 자신의 테마에 파고들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파리여정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국내에서 다진 명성과 중앙대교수직을 버리고 오십이 넘은 나이에 새출발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앞날이 막막한 보장 없는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그러나 그만의 방법과 그만의 세계를 부여잡게된 이상 그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파리전시 2년후인 78년에 도불,예술은 다만 ‘던지는 것’이며 ‘전력투구로 매달릴뿐’ 어떤 방해도 그를 막을순 없었다.연약해 보이는 체구에 말이 별로 없는 대신 고집이세고 일단 마음먹은 것은 만류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파리시내에서 25㎞ 동쪽으로 떨어진 트로시의 아틀리에에 틀어박힌지 2년만에 아트포럼 앙테나쇼날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평론가 데니스 로제로부터 “맑고 투명하고 평화로운 공기속에서 작가는 빛과 깊이의 이중감정을 실천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그 무렵 이일씨가 표현한 ‘종이의 정교한 무표정속에서 무한한 진폭을 지닌 무구한 정신성’과 ‘동양으로의 현대적 회로’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함경남도 이원에서 소사업을 하던 권태인씨의 1녀3남중 차남.그는 부친을 따라 한국인 밀집지역인 북간도 용정에서 광명중학에 다닐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그가 도불을 결심하게 된것은 광명중 시절의 미술스승이던 석희만씨가 “둑을 지키는 포플러가 아닌,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 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서울로 와서 해방 다음해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고 ‘비어있는 것이 저장되어 있는것’이라는 ‘무사무위’의 노장사상을 그림에 적용하여그만의 ‘숭려’를 체득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2년간 생활 남천 송수남은 “그의 묵시적이면서도 금욕적이고 수도자적인 자세는 누구라도 일단 외경심을 갖지 않을수 없다”고 전제한다.“화선지의 흰빛에 흐르는 무구한 숨결과 그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무관심성은 요약과 절제로 일관된 것 같으나 실은 허세없는 작가의 본성이 그속에 창만해 있다”는 것이다.과연 그의 그림에서는 어둠을 가르는 여명이 새어나오고 그 순백의 새벽빛은 모든 광원의 색광들을 반사한 본질색이며 화선지가 포용하는 영험하고 신비스러운 통합적 상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가의 근작은 또다른 실마리를 추구하려는 자세다.먹과 과슈에 의한 설채의 도입,또 뚫고 찢기 위해 찰상을 가하는가 하면 예리한 칼날로써 형성된 선조는 물감과의 교호작용으로 운율의 파문을 현란하게 일으켜준다. ○독자적인 동양화추상 고수 10여년만에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도심을 피해 전원적인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 정착하여 주로 한밤중에 일어나 작업에 임하고 있다.최근의 대형화면들은완고한 예술정신과 심도가 스민 발색을 존립시키고 ‘순수무결’과 ‘세련미’는 남이 넘볼수 없는 도저한 화풍으로 경도되지 않을수 없게 한다.서울대 미대 동기동창이며 동갑인 부인 박순일씨는 스승인 월전의 소개로 만난 사이.자녀는 아들만 둘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류에 물들지 않은 독자적인 동양화추상’을 지키는 그의 집념은 결국 카뮈의 요나처럼 어느날 화면에 점 하나를 찍게 될지도 모른다.이순을 넘긴 지금도 조용하고 시적인 소년의 자세를 변치않는 이 혁신적화가는 예술의 끝을 향해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면서 대양을 이루기 위한 만리심을 좀처럼 잠재울줄 모른다.〈사빈논설위원> □연보 △1926년 함남 이원 출생 △1951∼57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졸업 및 동대학원 졸업 △1956∼77년 국전출품 △1966년 개인전(서울신세계화랑) △1970∼79년 한국미술대상전 출품 △1974년 개인전(서울명동화랑) △1976년 파리 자크마솔화랑 개인전 △1977년 개인전(서울신세계화랑) △1978∼89년 프랑스 파리체류 △1980년 파리 개인전(아트포럼 앵테나쇼날화랑),아세아현대미술전 △1982년 파리(주불한국문화원) 및 서울개인전(현대화랑) △1983년 주불한국인화가전(파리) △1984년 LA개인전(삼일화랑) △1986년 서울개인전(현대화랑) △1987년 LA(아트코아화랑) 및 토론토 개인전(브리지스톤화랑) △1988년 조선일보현대작가초대전 △1990년 서울(호암미술관) 및 일본오타와대학초대 개인전 △1991년 선재현대미술관개관기념초대전(경주),한국현대회화유고전 △1992년 개인전(서울현대화랑) △1993년 대전 한림갤러리개관기념전 △1994년 에꼴드서울전(관훈미술관) △1996년 후소회 창립60주년기념전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중앙비엔날레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장 〈수상〉 국전문교부장관상(58·59년),국전초대작가상(74년)
  • 전략 시뮬레이션게임 다크 레인/산·황야·진흙밭서 종횡무진 전투

    ◎섬세한 그래픽·진짜같은 폭발 ‘짜릿’ ‘다크 레인(Dark Reign)’은 미국 액티비전사가 만든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국내에는 이달말쯤 LG소프트(02­3459­4285)에서 선보인다.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커맨드 & 컨커’와 ‘워 크래프트’라는 양대산맥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게임으로 특히 ‘커맨드 & 컨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실시간이라는 조건 때문에 지금까지 적용할수 없었던 전략게임의 여러 요소들을 도입,게이머는 마치 전쟁의 지휘관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우선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실적인 관측라인과 다양한 지형.‘커맨드 & 컨커’에서도 부서진 건물이나 도로,평야,숲 등 다양한 지형이 존재했지만 실제 게임을 진행할 때는 ‘지나갈 수 있는 곳’과 ‘지나갈 수 없는 곳’ 단 두가지 지형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크레인’에서는 산과 자갈,진흙 등을 게이머가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 지형에 따라 장비의 진격 속도도 달라진다.예를 들어 전차가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를 주행할 때는 고속으로 움직이지만 황야에서 진격할 때는 속도가 느려지는 식이다. 따라서 빠른 공격을 원하는 적은 도로를 통해 신속한 이동을 하려들 것이므로 이를 미리 알고 도로변에 보병을 매복시켜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써볼 만하다. 또 ‘다크 레인’에서는 장비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장소만 관찰할 수 있다.장애물로 시야가 가려진 곳은 볼 수 없다.부대의 규모가 커지면 속도가 느려지는 등 지휘에도 현실적인 요소를 삽입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게임에서는 건물을 먼저 짓고,탱크를 투입하는 식의 대규모 물량전은 별 효과가 없다. 게이머는 항상 머리를 쓰면서 플레이해야 한다. 여기다 세밀한 그래픽은 다른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생생한 안개와 실감나는 폭발 장면의 묘사를 비롯,울퉁불퉁한 지형 위를 비행할 땐 그림자 모양도 그대로 따라 울퉁불퉁하게 나타난다.탱크가 지나간 흔적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 조선중기 윤두서의 자화상(한국인의 얼굴:109)

    ◎국보 240호… 해남 녹우단 보존/기개있는 선비 묘사… 걸작 평가 조선시대 중기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한 공재 윤두서(1668∼1715년)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남겼다.작가가 자신을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뚜렷한 ‘윤두서상’은 사실상 가장 오래된 자화상일 것이다.문인이자 화가였던 그는 자기의 얼굴을 종이에다 옅은 물감을 써서 그렸다.국보 240호인 그의 자화상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종가 녹우단에 보존되었다. 이 자화상에는 얼굴만이 가득 들어있다.세로 38.5㎝,가로 20.5㎝의 화폭을 온통 얼굴과 얼굴을 감싼 수염으로 채웠다.화폭에는 얼굴 말고 다른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그래서 얼굴이 강렬하게 부각되었다.거울에 비친 자신과 대결이라도 하면서 자화상을 그린 듯 박진감이 넘친다.그래서 화면을 선뜻 마주하기에는 좀 두려운 구석이 있다.서양미술이 자화상에서 추구한 자아인식은 아닐지라도,어떤 내면세계가 분명히 보이는 작품인 것이다. 이 자화상은 윤곽을 검은 선으로 가늘게 그리고 색을 칠하는 구륵법보다는 붓질을 여러 번 하는방법으로 어두운 부분을 표현했다.눈두덩 위와 눈아래 부분,코와 코방울 언저리에서 입가로 흘러내린 주름 법령등이 그것이다.입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처리되었다.다시 말하면 얼굴바탕과 같은 색깔을 여러번 칠해서 강조할 부분을 돋보이게 한 필법이다.이 화법은 당시 유행한 초상화 기법이기도 했다. 눈은 살아서 번득이고 있다.사람이 빨려들어갈 것처럼 생동감이 우러나는 눈이다.이 초상화의 핵심은 바로 눈에 있다.얼굴을 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눈동자를 그려넣는 이른바 점정의 효과를 최대로 살린 자화상인 것이다.얼굴 각 부위에 수염이 잇달아 난 연발수는 눈과 함께 자화상 주인공의 인물을 위풍당당하게 만들었다.기개있는 선비로 묘사된 이 자화상은 조선시대 걸작의 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화상의 효시는 물론 윤두서가 아니다.그 이전에도 자화상을 그린 사람들이 있었다.허목(1595∼1682년)의 미구기언을 보면 고려의 공민왕이 거울속의 자기 얼굴을 그렸다는 ‘공민왕조경자사도’ 이야기가 나온다.그리고 조선시대 ‘매월당집’은 김시습(1435∼1682년)이 젊어서와 늙어서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두 장을 그렸다고 기록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실물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또 후대에는 이광좌와 강세황이 자화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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