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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전벨트 안매 저승 문턱 갔다왔죠”

    “뉴저지주 주지사 존 코자인입니다. 저 죽을 뻔했습니다.” 코자인 주지사는 24일(현지시간) 안전벨트 착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익광고에 출연해 저승 문턱까지 갔다온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그는 지난달 12일 주경찰관이 운전하던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 앞좌석에 타고가다 충돌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안전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다. 이 신문은 당시 사고차량이 시속 105㎞ 구간에서 146㎞로 주행 중이었다고 보도했다. 이 광고는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프린스턴에서 회복 중인 주지사의 맨션에서 15일 녹음했고 전국 TV와 라디오 전파를 탔다. 광고는 올해 60세인 코자인 주지사가 자신의 부상을 세세히 묘사하는 동안 그가 타고 있던 SUV 차량의 처참하게 부서진 모습을 공개했다. 그는 다리와 갈비뼈 11곳, 쇄골과 흉골이 부러져 병원에 18일간 입원해야 했다. 코자인 주지사는 광고에서 “몸에 있는 피의 반 이상을 흘렸고 중환자실에서 여드레 동안 보내야 했으며 산소호흡기를 계속 걸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나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실수로 입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여러분은 그러지 말기 바란다. 안전벨트를 꼭 매라.”고 충고하고 광고 마지막에서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SUV차량 앞좌석에서 벨트를 매지 않아 주의 법을 어겼다며 46달러의 벌금을 자진 납부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자동차협회(AAA) 관계자는 이와 관련, 안전벨트를 매면 앞좌석 승객의 사망위험이 45%가량 줄어들고 중경상 사망위험도 절반까지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주지사의 광고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시론] ‘받아쓰기 저널리즘’ 확산을 경계한다/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 교수

    [시론] ‘받아쓰기 저널리즘’ 확산을 경계한다/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 교수

    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취재환경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는 반면,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는 일종의 ‘언론통제’라는 관점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정부와 언론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한국 언론의 취재환경 및 취재관행에 관한 것이지만, 본질은 언론의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청와대와 정부는 언론의 비판적인 보도로 인해 정부의 정책집행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진 반면, 언론은 정부의 활동 및 정책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언론 본연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참여정부는 언론의 비판적인 보도로 인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하락하고 경제위기론 조장으로 시장경제가 위축된다며 ‘언론 책임론’을 여러 차례 제기한 바 있다. 언론학계는 과학적인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언론 책임론’ 검증을 시도했지만, 학자들은 서로 다른 연구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을 설명하는 의제설정이론이나 점화효과이론을 적용하면 ‘언론 책임론’이 어느 정도 타당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이는 추론에 불과하다. 추론만으로 ‘언론책임론’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정부와 언론간 책임론 공방이 지속될수록 국민들은 정부는 물론 언론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정치냉소주의’와 ‘언론냉소주의’는 시민이 사회적 차원의 논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해악과도 같다. 현행 출입처 제도 하에서는 정부부처와 산하기관이 제공하는 보도자료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아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기사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약 정부가 추진하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이 현실화된다면 언론계에는 정부부처가 제공하는 관급기사를 그대로 보도하는 ‘받아쓰기 저널리즘’이 확산되어 정보유통과정의 왜곡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건전한 여론형성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이다. 시민은 언론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물론, 언론에 국정감시자 지위를 부여했다. 참여정부는 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언론에 빼앗겼다. 정부는 ‘언론 책임론’을 제기하기에 앞서 자신의 진실함이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공개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 언론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이다. 따라서 언론이 세상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언론은 ‘정론지(正論紙)’와 ‘정론지(政論紙)’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고 때로는 후자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재현된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언론이 ‘회사의 편집방침이나 논조’ 그리고 ‘언론사의 당파적 입장’을 기사에 반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특수한 취재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정부가 도입을 추진하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정책을 비판하는 게 당연하지만, 언론 또한 언론사의 당파성이 빌미가 되어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시도하는 것은 아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 교수
  • [씨줄날줄] 낙인(烙印) 정치/진경호 논설위원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자 곧바로 두 가지 별명이 따라붙었다.‘제2의 이인제’와 ‘보따리 장수’다. 한나라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붙였다. 당내 경선을 뿌리치고 뛰쳐나간 배신자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이인제 의원이 국민중심당을 나와 손 전 지사와의 연대의사를 밝히자 한나라당은 재빨리 새로운 ‘딱지’를 갖다 붙였다.‘배신자클럽’ 낙인(烙印) 정치의 시대다. 정치인, 특히 차기 대권에 근접한 대선주자일수록 한마디 한발짝이 무섭게 득달같이 딱지가 달라 붙는다. 정당도 예외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비노(非盧)진영 의원들은 ‘노무현당’이란 말만 들어도 기겁을 한다. 이들에게 ‘노무현당’은 무능정부의 이웃말이고, 교체대상을 뜻하는 상징인 것이다.3년여 전 한나라당을 궁지에 몰아넣은 ‘차떼기당’도 마찬가지다. 대선주자의 고공행진 속에 ‘웰빙당’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으나 여전히 지하주차장에서 돈을 주고받던 이미지가 서려 있다. 낙인은 그림으로 말하면 캐리커처다. 인물의 특징을 과장해 묘사함으로써 부분을 전체로 둔갑시킨다. 한눈에 알아채도록 하지만, 결코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은 보여주질 못한다. 독일 현대사회학의 거장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기득권자의 권력유지 기제로 ‘끊임없는 낙인찍기’를 꼽았다.“기득권 집단의 이미지(카리스마)는 최고 구성원들의 최상의 특성으로 이뤄지는 반면 피지배 집단, 즉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는 최악의 구성원들이 지닌 최악의 특성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냉전 시대 한국 사회의 대표적 낙인으로 군림해 온 ‘빨갱이’를 연상케 하는 분석이다. 그가 갈파한 낙인의 위력은 지대하다. 낙인은 곧바로 집단환상을 낳는다. 낙인을 찍는 쪽은 모든 죄로부터 면죄부를 얻는 반면 낙인이 찍힌 쪽은 제3자는 물론 스스로도 이를 실제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무력화돼 간다. 노무현 대통령이 엊그제 ‘1%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꺼냈다. 종합부동산세 조정을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이명박·박근혜 두 대선주자를 조준한 말이다.‘참 나쁜 대통령’이나 ‘1% 대통령’은 연말까지 이어질 낙인찍기의 예고편일 것이다. 그 집단주술에 어떻게 온 정신을 지켜낼지 유권자로서 걱정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지방시대] 우리의 우모자(umoja)를 찾아서/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지난달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연단의 뮤지컬 ‘우모자’를 감상했다. 무대 한쪽에서 나이 지긋한 모습의 내레이터가 자신의 지난 삶을 회상하면,40명 정도의 배우들은 노래와 춤으로 그 삶을 표현하였다. 나를 비롯한 모든 관객들은 그들이 무대 위에서 열정적인 몸놀림을 할 때 흥에 겨워 몸을 들썩거리다가도 영혼을 태우듯 신비한 소리를 내뿜으면 숨을 죽이며 무대 속에 빠져들었다.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다. 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대단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한 무대장치로 관객에게 볼거리를 서비스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40명 정도의 배우들이 번갈아 가며 무대로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출 뿐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마치 머리 한쪽을 얻어맞은 듯 멍한 느낌으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우모자를 보기 전 내 머릿속에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원주민들의 모습은 고난과 억압에 찌든 가엾은 모습이었다. 만델라를 통해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스러운 소리를 내뿜으며 열정적으로 무대를 휘젓는 그들에게서 가엾은 원주민들의 모습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지난 세월동안 자신들이 늘 살아있었고 힘이 있었으며 행복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어찌 그들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았겠는가. 인간으로서의 치욕은 또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는가. 그들의 삶이 척박하고 억압과 고통의 세월이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다. 우모자는 ‘함께하는 정신(the spirit of togetherness)’이라고 한다. 내레이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원주민들의 지난 세월을 우모자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힘든 날엔 힘들어서, 기쁠 때는 기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했다. 그저 눈을 마주치면 흥얼거리게 되고 서로 장단을 맞추고 두드리다 보면 저절로 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우모자는 바로 노래와 춤이었다. 내레이터는 앞으로도 그들의 삶이 우모자와 함께 변치 않을 것이며 여전히 행복할 거라고 말했다. 신기한 것은 나 또한 그들의 삶이 진정 행복하게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고통 속에서 기쁨을 찾고 즐기는 에너지가 있었으며 가난을 힘들어하지 않는 영혼이 늘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모습이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묘사하였던가. 어릴 때부터 귀에 따갑도록 듣는 얘기중의 하나가 ‘오천년 한의 역사’다. 그 얘길 듣고 우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늘 당하고, 슬프고, 한심하다는 느낌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충청권은 역사적으로 백제의 흔적이 가장 깊게 깔려있는데 이 역시 ‘패망의 역사’로 전달된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힘이 빠지고 불쌍해서 가엾기만 한 것이다. 우리도 좀 다르게 표현할 수는 없을까. 사실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이름을 좀 바꿔주자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지난 삶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브랜드를 붙여주면 안 될까. 언제까지 우리의 삶을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한 많은’ 역사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역사로,‘패망의’ 역사가 아닌 ‘투쟁과 승화’의 역사로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우리도 지난 삶을 자랑스러워하고 앞으로 희망과 긍지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하지 않겠는가. 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

    5·18민주화운동 27돌인 18일 광주에서는 기념식과 추모제 등 5월 영령들의 넋을 달래는 각종 행사가 개최된다. 오전 10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유족과 정부 주요 인사, 여야 대표 등 정치인,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이날 행사는 개회식과 묵념, 헌화·분향, 경과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1시간 동안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전야제가 열렸다.5·18묘지에는 이날 하루 동안 2만여명의 참배객들이 몰리는 등 추모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대구에서 온 김영석(49·택시기사)씨는 “TV에서만 보던 현장을 직접 느끼기 위해 시간을 냈다.”면서 “묘에 묻힌 수많은 희생자들을 대하니 숙연해 진다.”고 말했다. 이날 묘지를 찾은 전남대생 박모(21·여)씨는 “광주에서 태어났으나 5·18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5·18이 낯설게 느껴져 왔다.”며 “5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교육 등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채정 국회의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정치인들의 광주 방문도 잇따랐다. 한 전 총리는 “1980년 5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면서 “당시 교도소안에서 헬리콥터 굉음과 총성, 함성이 울리는 역사적인 현장을 함께했다.”며 5·18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5월에서 6월의 함성으로’를 주제로 열린 이번 전야제는 공연난장, 거리행렬굿, 진혼마당, 체험마당, 주제공연 순으로 밤늦게까지 진행됐다.금남로에서는 ‘주먹밥 나누기 행사’가 열려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옛 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일본 우타고에의 특별공연,‘무등합굿’‘님을 위한 행진곡’ 춤꾼 김은희의 넋풀이 ‘생명의 바다’가 이어졌다. 횃불행진에 이어 1980년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상황을 묘사한 상황극도 펼쳐졌다. 계엄군의 발포에 시민군이 결사 항쟁하는 모습, 시민들이 계엄군이 발포한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 등이 재현돼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했다. ‘가자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란 분수대 탑돌이 노래시극과 대동놀이가 펼쳐지면서 추모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밖에 시내 일원에선 5·18 사진전, 어린이 환경극,5·18 퀴즈, 통일체험행사 등의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졌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폭군 네로·황실 암투전 소설로 본다

    천년제국 로마의 저력은 역사적·철학적·정치적·문학적으로 언제나 주요 소재가 되곤 한다. 로마인들의 삶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이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성공에서도 입증된 사실이다. 로마의 역사인물들을 소재로 한 해외 유명작가 2명의 소설이 동시에 번역돼 나왔다. ‘나폴레옹’을 쓴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정치인 막스 갈로(75)의 ‘로마 인물소설’(이재형 옮김, 예담 펴냄) 시리즈 3권과 영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로 유명했던 로버트 그레이브스(1895∼1985)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전 3권, 오준호 옮김, 민음사 펴냄).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소설 시리즈는 모두 5권인데 이번에 먼저 3권이 나왔다.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희대의 폭군 네로, 예루살렘을 정복한 티투스 황제의 이야기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야기를 담은 두권도 곧 출간된다. 저자는 “로마는 극도로 세련되고, 기술적으로도 매우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최고로 사악한 야만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던 사회였다.”며 역사속 로마의 양면성을 실감나는 소설로 풀어썼다. 각권 9800원.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는 1934년 발표작 ‘나, 클라우디우스’와 ‘클라우디우스, 신이 되다’를 함께 소개한 작품.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였지만 말을 더듬고 실수투성이여서 황실의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았다. 소설은 50년간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천대의 세월을 견딘 뒤 권력을 움켜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로마 초기 제정시대를 그린 소설에는 로마 황실의 암투전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고, 아우구스투스를 유혹해 황후가 된 리비아, 어머니 리비아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 폭군으로 남은 칼리굴라 등이 등장한다. 각권 1만 500원.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하재봉의 영화읽기] 아포칼립토

    [하재봉의 영화읽기] 아포칼립토

    당신의 심장이 정말 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아포칼립토>를 봐라. 심장 뛰는 소리가 탐탐북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이다. 마야 문명이 태어난 원시림 속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생존의 혈투는, 생명력 넘치는 야성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내는 일은 예사롭게 펼쳐진다. 그 끔찍한 잔혹함이, 폭력성과 선정성을 무기로 값싼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잠시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무서운 속도의 질주와 싱싱한 에너지가 화면에 가득 차 있는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호주에서 건너가 어느새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에서 이제는 문제적 감독으로까지 성장한 멜 깁슨의 연출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작품이다. <아포칼립토>는 배우 출신 명감독 반열에 우뚝 올라선 멜 깁슨의 야심과,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화면을 압도하는, 의심할 바 없는 올해의 수작 필름이다. 멜 깁슨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브레이브 하트>가 아카데미를 휩쓸 때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의 멜 깁슨 앞은 탄탄대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연출 작품으로 예수의 삶을 소재로 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선택했다. 멜 깁슨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성서에 적힌 그대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문제는 유대인의 반발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 집단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은 할리우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제작 당시부터 처음 투자를 약속했던 투자자들이 유대인들의 압력을 받고 투자를 철회하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사람들에 의해 이 작품이 유대인을 비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멜 깁슨은 주장한다. 예수를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성서에 의하면,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이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는 것을 서로 피하기 위해 회피하다가 결국 군중들에게 묻는다. 진짜 살인범으로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한 사람을 풀어줄 텐데 너희들은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군중들은 차라리 흉악한 사형수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친다. 결국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 최후를 맞았다. 그 군중들이 유대인이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결국 멜 깁슨 감독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제작을 해야만 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멜 깁슨에 대한 할리우드의 시선은 싸늘하다. 비록 그 영화가 엄청난 상업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사재로 충당한 멜 깁슨에게 결과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지만, 멜 깁슨에 대한 미국 영화계의 우호적 시선은 사라졌다. 멜 깁슨 감독이 만든 다음 작품 <아포칼립토>는 시선을 15세기 마야 문명이 꽃피고 있던 원시의 밀림으로 돌린다. <아포칼립토>를 지배하는 것은, 원시림 속에서 거의 발가벗은 채 살아가는 마야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도 아니고,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는 살인과 복수의 잔혹함도 아니다.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속도다. 숲 속에서 거의 알몸으로 살아가는 마야의 전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서 그리고 숲을 파멸시키고 부족의 부녀자를 살해하며 힘센 남자들은 노예로 끌고 가려는 홀캐인 부족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복수를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카메라는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을 어떤 때는 그들보다 먼저 달려가서 잡아내기도 한다. 멜 깁슨 감독은 마야 최후의 전사들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서 아직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다. 할리우드 경력이 거의 없는 배우들은 그러나 관객들에게는 실제로 마야 전사가 화면으로 등장한 것 같은 놀라운 충격을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원시의 숲 속에서 맹수를 사냥하며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마야 부족의 리얼리티는 새 얼굴로 구성된 배우들과 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감독의 용별술에 의해 싱싱한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부족장인 부싯돌 하늘과 그의 아들 표범발(루디 영블러드 분)을 중심으로 원시림 속에서 맹수들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마야 부족. 그러나 잔인한 홀캐인 부족이 마을을 습격한다. 쇠로 만든 날카로운 단검과 돌도끼와 돌몽둥이 등 선진무기로 무장한 홀캐인의 침략 앞에 마야 부족의 전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홀캐인족의 마을 습격 장면은 놀라운 핏빛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문명인들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계산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에게서는 화면에 묘사된 잔혹함 그 자체보다 더 큰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정말 우리들의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장면은 그 뒤로 이어지는 추격신이다. 생포된 남편의 눈앞에서 강간을 당하고 잔혹하게 죽어가는 여인, 아들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살해되는 아버지. 홀캐인에게 생포된 남자들과 여자들은 숲 속에 건설 중인 거대한 사원 앞으로 끌려간다. 여자들은 인신매매 되어 노예로 팔려가고 남자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노예로 이용된다. 허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탈출의 기회를 잡은 표범발은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으로 도망친다. 그를 뒤쫓는 홀캐인 부족장들과 무리들. 생존을 위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신은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도 생생하게 만들어져 있다. 멜 깁슨 감독은 능숙한 조련사의 솜씨로 소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긴장의 지속과 이완의 짧은 순간으로 전체 내러티브의 완급을 조절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 준다. 영화의 백미인 표범발의 탈출신은 그를 쫓는 홀캐인 부족의 파괴력 있는 추격으로 더욱 빛난다. 머리 속까지 잠기는 늪, 나무 위로 도망쳤지만 거기에서 마주치는 표범, 그리고 독사의 공격까지 피하며 표범발은, 수직으로 만들어진 마른 우물 속에 숨겨 놓은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그러나 홀캐인의 추격자들 또한 용맹스럽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의 열대우림 정글 지역인 라정글라에서 파나비전의 고감도 디지털 지네시스 시스템으로 촬영된 필름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전사들의 미세한 동작까지 포착하고 있다. 또 국부만 겨우 가린 원시전사들이지만 각각 개성적인 헤어스타일과 이마까지 덮는 화려한 문신, 코와 입 등 얼굴 부위에 부착하는 장신구, 목과 허리 등에 걸치는 소품들이 어우러지면서 실제 마야 전사들을 보는 것같은 놀라움을 전해주는 <아포칼립토> 미술팀은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부족의 전사들이 끌려간 마야 제국. 제사장은 살아 있는 노예들을 신에게 바치면서 돌칼로 가슴을 자르고 뜨거운 심장을 한 손에 움켜쥐며 꺼낸다. 그리고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몸통을 계단 아래로 굴러뜨린다. <아포칼립토>의 이런 잔혹한 영상은 선정성으로 관객들을 유혹하는가 아니면 주제의 드러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가 우리가 갈등할 필요는 없다.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는 외투만 다르게 걸친 채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고 멜 깁슨 감독은 고대 마야를 배경으로 싱싱한 에너지가 넘치는 폭력적 세계의 모습을 창조해 냈다. 그가 타협하는 유일한 것은, 가족의 가치를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할리우드 전통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숲으로 돌아가려는 표범발의 질주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이유다.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월간 <삶과꿈> 2007.03 구독문의:02-319-3791
  • ‘마리’ 17일, ‘황진이’ 새달 6일 첫선

    ‘마리’ 17일, ‘황진이’ 새달 6일 첫선

    ‘끝나지 않은 그녀를 둘러싼 거짓과 진실’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알지만 그녀를 알지 못한다.’ 이달 17일과 새달 6일 잇따라 관객을 찾을 외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한국영화 ‘황진이’의 홍보문구다.16세기 조선과 18세기 프랑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역사책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온갖 장르의 예술작품에 등장했던 그녀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귀가 닳도록 들어온 두 여성에 관한 영화는 그래서 ‘파격’을 시도했다. 정치적 역학관계에 휘말린 마리 앙투아네트는 현실도피를 위해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둘렀다. 현실에 저항하는 황진이는 질식할 것 같은 유교적 엄숙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블랙을 사용한 과감한 배색으로 저항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익숙한 인물을 낯설게 보게 만드는 영화예술의 효과를 만끽할 수 있다. ●18세기에 캔버스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제치고 의상상을 수상했다. 의상감독을 맡은 밀레나 카노네로는 이로써 세번째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귀여운 소녀 같으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우아한 ‘베르사유의 장미’를 원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과자 ‘마카롱’의 색을 따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커스트 던스트)의 드레스들은 깜찍, 발랄, 경쾌한 느낌이다. 구두는 ‘섹스 앤드 더 시티’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마놀로 블라닉이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요즘 신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캔버스화도 등장한다. 인터넷 강국답게 네티즌들 사이에서 ‘옥에 티가 아니냐.’는 의구심과 함께 벌써 캡처 사진이 떠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시대를 초월해 지금의 10대들과 소통하게 만들고 싶었던 코폴라 감독의 귀여운 장난이었다. 지난해 칸영화제에 선보인 영화는 극과 극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비판하는 쪽은 역사적 배경묘사에 소홀했다는 것. 영화는 “빵을 달라!”는 성난 군중들을 향해 “케이크나 먹지 그래.”라고 던진 한마디로 사치와 허영에 찌든 ‘골빈 여자’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앙투아네트를 위한 ‘변명´이다. 그녀는 14세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프랑스로 시집을 왔다. 영화는 이국 땅에서 겪었을 법한 심적인 고통과 외로움 등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남편의 무관심, 주변의 뒷담화에 시달리다 임신을 못하면 동맹이 흔들릴 수 있다는 친정어머니의 걱정 가득한 편지를 받아들고 오열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사랑에 굶주린 그녀가 현실도피의 방책으로 파티와 사치, 도박, 불륜에 빠져들 수밖에 더 있었을까. 전개는 다소 지루하다. 하지만 화려한 의상과 소품, 실제 베르사유궁을 들여다보노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하다. ●한복에도 블랙 &화이트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북한작가 홍석중의 원작을 토대로 한 영화 ‘황진이’는 기존에 우리가 알던 황진이와 사뭇 다를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알던 황진이는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뭇 남성들을 치마폭 안에서 가지고 놀았다 하는 정도. 하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인 ‘놈이(유지태)’에게만 순정을 바치는 지고지순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여기에다 그녀는 마치 여성·사회 운동가 같은 모습이다.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계급사회의 모순에 대항해 스스로 천민인 기생의 길을 택한 주체적인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듯 자유롭고 당당한 황진이를 표현하는 데 의상과 메이크업, 장신구가 한몫 단단히 한다. 디자이너 정구호는 예상을 뛰어넘는 한복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분홍, 빨강 등 화사한 색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검은색을 주로 하고 여기에 초록과 보라, 청색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색상을 과감하게 섞어 놓았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모던한 황진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스모키 아이 메이크업에 블랙 시스루 한복을 입은 황진이의 강렬한 자태에서 넘보기 힘든 위엄이 엿보인다. 특별한 감각을 입고 태어난 의상은 몸에 걸치는 순간 그 힘을 발휘하는가 보다. 송혜교는 거동과 표정에서 차갑고 도도한 16세기 여장부를 제대로 연기해 그녀를 다시 보게 만들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스피노자의 뇌/안토니오 다마지오 지음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죽던 날 태연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죽음과 더불어 영혼은 오류와 악의 원천인 육체를 벗어나 순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영혼에 대한 이런 관념은 그 뒤 2000년 이상 서구인의 생각을 지배했다.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방생하듯 영혼을 하늘나라로 돌려 보낼 궁리만 하며, 영혼의 방해물인 육체를 감자처럼 땅에 묻어버리지 못해 안달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300여년 전 네덜란드에서 출현한 스피노자는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그는 마음이 몸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무지함에서 비롯된 미신 같이 치부하고, 오히려 신체 그 자체가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지금까지 아무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무도 신체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이런 나무람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한 한 저명한 뇌과학자가 3세기후 스승의 인도를 받아 신체와 마음의 관계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뇌‘이다.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해부용 메스만 손에 들어본 적이 없을 뿐이지 신체, 그것도 가장 중요한 신체인 뇌에 대해 잘 이해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도를 받으면서 현대의 의학기술을 활용하면 뇌의 구조와 마음과의 관계의 비밀이 제대로 밝혀지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다마지오가 뇌 연구를 통해 비밀을 밝혀 내려는 ‘마음’이란 ‘정서와 느낌’을 일컫는다. 전지구적으로 사람들이 알코올, 약물, 담배, 섹스 등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좋은 느낌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과 자원을 바치고 있는 동안에, 신경과학자들은 느낌의 문제를 과학의 문 바깥에 내팽개쳐 두고 있었다(9쪽). 그러므로 다마지오가 보기엔 기쁨과 슬픔 같은 느낌의 전문가였던 스피노자가 어서 강림해 신경과학자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가령 현대 뇌과학은 다음과 같은 스피노자의 말에서 어떤 통찰을 얻어 내는가?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몸에 대한 관념”이며 “마음은 몸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신을 인식한다.”(245쪽). 이 말을 저자는 우리 뇌(몸)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 우리 느낌(마음)은 몸의 각 부분에 대한 이미지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풀이한다(247쪽). 실험해 보자. 코카인 복용자는 온몸이 얼얼하고 따뜻하다고 하고, 엑스터시 복용자는 오르가슴의 상태를 느낀다(146쪽). 결국 느낌이란 뇌신경 패턴을 신체적 이미지의 유형화를 통해 나타내는 생물학적 절차인 것이다(148쪽). 이런 방식으로 이 책은 “스피노자가 알지 못했던 뇌에 대한 세부적 지식을 가지고 그가 할 수 없었던 말을 대신 할 수 있게 되었다.”(247쪽). 스피노자에 대한 풍부한 전기적 기록들을 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선명하게 묘사된 스피노자의 삶이 지루해질 수 있는 과학담론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뿐 아니라, 이 철학자가 사생활에서는 정서와 느낌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엿보게 해 준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좋아했고, 다니던 학교의 라틴어 교사와의 첫 섹스 이래 암스테르담 시절 내내 육체관계를 즐겼다(276,391쪽). 스피노자는 영혼을 맑게 닦다가 육체를 벗고서 피안의 세계로 돌아가는 수도승이기보다는, 육체를 활용해 ‘기쁜 느낌’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생명체로서 살고 소멸하기를 원했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호모레프트,왼손잡이가 세상을 바꾼다/데이비드 올먼 지음

    ‘호모레프트, 왼손잡이가 세상을 바꾼다(신현승 옮김·황금나침반 펴냄)’는 왼손잡이들에겐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세계 인구의 10∼12%를 차지하는 왼손잡이는 왼손을 금기시하는 문화 때문에 억지로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음식을 먹도록 박해를 받아 왔다. 오른손잡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유만으로 편견에 시달려온 왼손잡이 데이비드 올먼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왼손잡이를 만나고 왼손잡이에 관한 연구조사 자료를 모아 책을 썼다. 저널리스트인 올먼은 ‘뉴스위크’ ‘뉴사이언티스’ 등에 칼럼을 싣고 있다. 오랜 선입견과 조롱, 무시의 결과로 왼손잡이들은 저도 모르게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고 올먼은 말했다. 예를 들어 친구 결혼식에서 주례가 신랑이 신부의 오른손을 잡도록 하자 머릿속에는 음흉한 오른손의 지배가 시작됐다는 불만이 차오른다. 식탁에서도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와 수저를 든 손이 부딪히기 때문에 항상 자리를 나중에 선택하거나 구석에 앉고 만다는 것이다. 서방세계에서 왼손잡이는 죄악, 악마숭배, 사탄 등과 연결지어졌다. 가톨릭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왼손잡이는 ‘짐승의 흔적’이라고 가르쳤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불행한 사람은 왼손잡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오른손으로 자비롭고 신성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른손잡이가 세상을 지배한 이유에 대해서 진화론은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원시인류는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비율이 동일했다. 하지만 우측이동 유전자가 좌뇌에 특정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말하는 능력과 두뇌를 발전하게 하면서 왼손잡이는 점점 줄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진화론은 단지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며, 언어의 필요조건으로서 우측이동 개념은 폐기대상이라고 밝힌다. 어떤 논문은 왼손잡이가 유전자가 아닌 사회적 도태 때문에 줄었다고 주장했다. 일부 과학자는 진화설의 관점에서 왼손잡이가 성적 매력을 갖고 있어 존속됐다고도 말했다. 저자는 왼손잡이와 관련된 수많은 연구가 계속 진행중이어서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며 책을 마무리한다. 왼손잡이들에게 이 책은 왜 왼손잡이가 특별한 존재인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특별하다.272쪽.1만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내가 본 광주항쟁 영화에 생생히”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제작 기획시대)’ 제작보고회가 9일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외신기자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지훈 감독을 비롯해 안성기, 김상경, 이요원, 이준기, 박철민 등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압구정 CGV에서 열린 보고회에는 1980년 당시 미국의 유력지 시카고 트리뷴 서울특파원이었던 도널드 커크(69)씨가 참석, 당시 광주의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현재 자유기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지난 30년간 한국의 굴곡 많은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 커크씨는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해 “2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죽음을 맞은 비극적인 사건일 뿐아니라 한국 민주화의 전환점이 된 대단한 사건”이라며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사실 그는 5월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서울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가 광주를 찾은 것은 소요가 일단 가라앉은 직후이다. “전남도청 옆에 수많은 나무관들이 쭉 도열해 있었는데 유족들이 관 뚜껑을 일일이 열어보며 자기 가족을 확인하는 장면이 눈에 생생하다.”며 “영화 속에 이 장면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 민주화항쟁은)개인적으로 슬픈 추억”이라고 덧붙였다. 전날 영화를 본 그는 크게 감명받았는지 함께 자리한 감독과 배우들을 보며 “영광” “감사”라는 말을 연이어 쏟아냈다. 또 “영화가 사건의 핵심을 잘 살린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작비 100억원 규모의 대작 ‘화려한 휴가’는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는 소시민의 삶을 통해 광주 민주화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오는 7월 중순 개봉을 앞두고 있다.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미군, 이라크 전투장면 유튜브 게재 논란

    이라크 철군 압박 등 사면초가에 놓인 미군이 이라크에서의 전투 영상을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게재해 논란이 일고 있다. 더욱이 영상 대부분은 미군이 차량폭탄 희생자를 도와주거나 석방된 인질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장면 등 미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전의 장’으로 유튜브를 활용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은 지난 3월부터 유튜브에 ‘MNFIRAQ’라는 자체 채널을 만들어 실전에 투입된 미군의 전투 장면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고 AFP통신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게리 케크 미 국방부 대변인은 채널 운영에 대한 명확한 의도는 밝히지 않은 채 “이라크전에 관한 정보를 널리 알리려는 특별한 노력”이라고 언급했다.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은 유튜브에 이라크 전투영상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좀더 자세하게 보는 것도 때로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바쿠바에서 벌어진 아침 전투’,‘하이파 거리에서의 전투’,‘박격포 대항 작전’ 등의 제목으로 게재된 영상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순간들을 담고 있다.‘박격포 대항 작전’은 박격포탄 발사에 실패한 뒤 탈출하려고 승용차 속으로 몰려 들어가는 무장괴한 6명의 모습을 공중에서 포착했다. 이들이 시골길로 접어들어 속력을 낮추자 미사일이 등장해 폭발하는 장면이 이어진다.이어 ‘연합 공군이 차량과 박격포, 저항세력을 궤멸시키고 있다.’는 자막이 흐른다. 미군은 채널 안내문을 통해 “이라크 자유화 작전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이 작전에 대한 전망을 전 세계 네티즌 시청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설치한다.”면서 “시간 및 안전상의 이유, 자극적이거나 공격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영상을 편집하겠다.”고 설명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18세기 일본에서 쇼군(將軍)이 정권을 세습하면서 가장 먼저 조선통신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박지원은 역관 이언진의 전기 ‘우상전’ 첫머리에서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준비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저축을 늘리고 건물을 수리했으며, 선박을 손질하고 속국의 여러 섬들을 깎아서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기재(奇才)·검객(劍客)·궤기(詭技·술수꾼)·음교(淫巧·기교꾼)·서화(書畵)·문학 같은 여러 분야의 인물들을 에도(江戶)로 모아들여 훈련시키고 계획을 갖추었다. 그런지 몇년 뒤에야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치 상국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손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도 문신으로 삼사(三使)를 선발한 뒤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을 수행원으로 발탁했다. 박지원은 이렇게 기록했다.“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으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은 모두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여러 명이 범인 목격…외교문제로 비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과 일본 두나라가 국력을 기울여서 온갖 전문기예자를 총동원해 맞섰다. 일종의 국제문화박람회라고도 할 수 있다. 무력으로 이름난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군관이다. 이들은 사행단을 호위하며 무예를 과시하거나,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才)를 공연했다.1763년 사행 때에 486명 일행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 선장 유진원은 배 밑창 곳간에 떨어져 죽고, 소동(小童) 김한중은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격군 이광하는 미친 증세가 일어나 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러나 경상도 무관(장교)이었던 도훈도 최천종은 일본인 역관에게 찔려 죽었기에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이는 외국인을 보기 힘들었던 일본에서 200년 동안 연극이나 소설의 소재로 전해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처음 가져온 것으로 널리 알려진 통신사 조엄(1719∼1777) 일행이 에도에서 외교적인 의전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1764년 4월7일 오사카(大阪)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도훈도 최천종이 피살됐다. 이 절에는 500명을 재울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조엄이 새벽에 보고를 듣고 의관과 군관을 급히 보냈더니, 곧이어 한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최천종이 피가 흥건하게 흘러 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닭이 운 뒤에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돌아와 새벽잠을 자는데, 가슴이 답답해 깨어보니 어떤 사람이 가슴에 걸터앉아 칼로 목을 찔렀소. 급히 소리 지르면서 칼날을 뽑고 일어나 잡으려 하자, 범인은 재빨리 달아났소. 이웃방 불빛에 보니 왜인이었소. 나는 어떤 왜인과도 다투거나 원한 맺을 꼬투리가 없으니, 나를 찔러 죽이려 한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죽게 되니 너무 원통하오.” 첩약을 붙이고 약을 달여 마시게 했지만, 최천종은 해가 뜨자 운명했다. 자루가 짧은 창과 ‘어영(魚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이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왜인의 것이었다. 범인이 달아나다 격군 강우문의 발을 밟아 그가 “도적이 나간다.”고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여러명이 목격했다. 조엄은 “범인을 색출해 목숨으로 변상하라.”고 일본측에 통고했다. 밤늦게야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왕복행차를 호위하는 쓰시마 수행원과 살해사건이 일어난 오사카의 법관, 그리고 조선의 역관들이 함께 입회해 검시(檢屍)했다. 최천종은 조엄이 대구 감영에 있을 때부터 신임하던 장교였으므로 정성껏 장례준비를 했다. 14일에 주변 인물들을 신문하던 과정에서 쓰시마 역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하는 편지를 보내고 달아났다. 일본측에서 목격자 진술에 의해 인상서(人相書)를 만들어 배포했다. 범인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 나이 26세, 쓰시마 역관, 얼굴색이 희고 키는 5척3촌이라고 자세하게 밝혔다. 수백명의 수사력이 동원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 ●범인 “거울 도둑으로 몰며 때려 살해했다.” 17일부터 군사 2000명과 배 600척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서,18일 다른 지방에서 체포했으며,19일부터 니시혼간지 경내에서 신문했다. 최천종이 6일 거울을 잃어버렸는데, 스즈키 덴조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말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해 밤늦게 찾아와 살해했다는 동기까지 밝혀졌다. 그러나 과연 거울 하나 때문에 국제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범인을 처형하니 조선 역관과 군관들이 참관해 달라는 통고가 29일에 왔으며,5월2일 삼헌옥(三軒屋)에서 집행했다. 조엄은 김광호를 시켜 최천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원수를 갚았다고 아뢰게 했다. ‘명화잡기(明和雜記)’나 ‘사실문편(事實文編)’을 비롯한 일본측 기록들은 대부분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달라는 독촉 때문에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몇달 걸리는 국제여행 경비를 조정에서 직접 지급하지 않고 인삼을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수행원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른 물건으로 사왔다. 사대부들은 정량을 지켰지만, 역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남몰래 더 가지고 갔다. 몇차례 단속에 발각되면 인삼도 빼앗기고 엄한 처벌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밀무역은 그치지 않았다. 쓰시마 역관들이 에도까지 따라가면서 호위하는 과정에서 인삼을 팔아주었으니,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가지는 과정에서 칼부림이 났을 가능성이 많다. 밀무역 죄를 감추기 위해 거울을 잃어버려 말다툼이 생겼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한양에서 따라온 조선 역관들의 일본어 회화실력이 낮았으므로, 저간의 숨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야기는 계속 부풀었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피살된 사건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최천종이 살해된 사건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작품을 ‘도진고로시(唐人殺し)’라고 한다. 도진(唐人)은 외국인을 가리키며 네덜란드인,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포함된다. 박찬기 교수는 이들 수십종의 작품을 이국인(異國人) 살해, 통역관 살해, 혼혈아의 원수 갚기, 인삼 밀거래에 의한 보복 살해의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국인 살해와 통역관 살해 유형은 가부키(歌舞伎)와 조루리(淨瑠璃)로 상연되었다. 박찬기 교수가 정리한 도표에 의하면 오사카와 교토의 여러 극장에서 1767년부터 1883년까지 42회, 에도에서 5회 상연됐다. ●막부 압력으로 연극 줄거리 바뀌기도 가장 먼저 1767년 2월17일 아라시히나스케 극장에서 상연된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 )’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허구화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글자는 다르지만 제목에 ‘스즈키’라는 음이 들어간 것만 보아도 최천종 살해사건을 다루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열흘도 못 되어 같은 작가가 다른 제목으로 바꿔 같은 극장에서 또 상연했다. 가부키 연표에는 “첫날 둘째 날은 관객의 반응이 좋아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사정이 있어 상연 중지”라고 기록되었는데, 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염려한 막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후에 줄거리가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은 나카야마 라이스케(中山來助)와 지카마츠 도쿠조(近松德三)가 지은 ‘겐마와시사토노다이츠(拳揮廓大通)’이다.1802년에 초연을 시작해 1883년 5월까지 33회나 상연됐다. 이 작품에는 이국인을 살해하는 장면 묘사가 없고, 역관 고사이덴조(香齋傳藏)를 살해하는 유형으로 바뀌었다. 덴조(傳藏)라는 쓰시마 역관의 이름 정도만 남고, 이국인의 복장이나 언어 같은 이국적 정취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종교건축 이야기] (27) 한남동 이슬람 중앙 사원

    [종교건축 이야기] (27) 한남동 이슬람 중앙 사원

    서울 한남대교에서 남산 터널 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왼쪽 이태원 언덕의 도드라진 이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1976년 세워진 뒤 31년간 그 자리를 지키며 한국 이슬람 총본산 역할을 해온 이슬람교 중앙 사원(모스크·용산구 한남동 732~21)이다. 전국 10개의 이슬람 사원과 선교원,40여개의 이슬람교 예배소를 총괄하는 한국 이슬람의 핵. 많은 이들에겐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만 3만 5000여명의 한국 무슬림(이슬람 신도)과 10만여 외국인 무슬림들에겐 절실한 신앙공간이다. 이태원 소방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광초등학교 삼거리 왼쪽 길을 택해 오르면 허름한 주택들이 줄지어 선 골목 양쪽에 아랍어 간판을 단 집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이슬람 성서인 코란을 비롯해 아랍 과자·음료수를 파는 가게며 서점, 터키 전통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골목 끝에 서면 푸른색의 아치형 문이 길을 막는다.‘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하마드는 그분의 사도입니다.’ 이슬람 교리를 가장 극명하게 압축한 문구를 보며 회랑처럼 생긴 오르막길을 올라 너른 마당에 서면 큼지막한 아랍어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라 쓴 중앙 사원이 눈에 든다.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5차례의 이슬람 예배가 어김없이 열리는 곳. 한국은 물론 서남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한국에 온 무슬림들의 신앙이 이어지는 이색지대이다. 멀찌감치선 우람하게 비쳐지는 것과는 달리 막상 사원 앞에 서면 아주 단촐한 인상을 받는다. 모스크를 상징하는 지붕 중앙의 돔(쿱바)과 앞쪽 두 개의 높은 첨탑(미나렛), 그리고 돔과 첨탑을 호위하듯 선 자그마한 첨탑들이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모든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을 잘 불러모을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모스크를 세운 것처럼 한국의 무슬림들도 중앙 사원을 이태원 꼭대기 높은 언덕에 세워놓았다. 사원이 세워진 것은 1976년.6·25전쟁 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軍) 이맘(이슬람교 예배 인도자), 압둘 가푸르 카라 이스마일 오울루의 전도로 1955년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 한국 최초의 무슬림이 탄생한 지 21년 만의 일이었다. 중동 붐을 타고 이슬람 국가와의 친교가 긴요했던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초동 쓰레기 매립장 10만평과 지금의 사원 자리 등 두 군데 중 한 곳을 사원 터로 무상 제공할 뜻을 비쳤다고 한다. 한국 이슬람교가 지금의 부지를 택한 것은 당시 주변에 아랍 상인들과 이슬람 신도들이 모여 살았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태원에 살던 영향력 있는 한국인 신도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선 신도층이 두텁지 못해 사원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구걸하다시피 전 세계 이슬람 나라들에 손을 벌려야 했다.1970년 부지가 확보된 뒤 한국의 무슬림들이 모금 사절단을 구성, 이슬람 각국을 돌아 미화 40만달러를 모았다.1974년 10월 첫 삽을 뜬 지 1년 7개월 만인 1976년 5월 마침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이슬람 건축물을 세워놓은 것이다. 당시 개원행사엔 17개 이슬람 국가의 장관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붕 위의 첨탑인 미나렛은 이슬람의 가장 대표적인 순례지인 사우디아라비아 하람성원의 것을 그대로 본떴다. 미나렛은 무앗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올라가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외치는 첨탑. 이슬람 전통을 따르자면 매 예배 때마다 무앗진이 이곳에 올라 예배시간을 알려야 하지만 마이크와 스피커로 대신하고 있다. 사무실과 회의실이 들어선 1층에서 계단으로 오르게 되는 2층 예배공간에선 교회나 성당에 흔한 성상이나 초상, 상징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코란 구절만이 빙 둘러 새겨져 있을 뿐이다. 6개의 둔중한 기둥이 떠받치는 중앙 돔과, 양측 벽 위쪽의 아치형 창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이 바닥의 붉은색 양탄자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배공간의 중심은 아랍어로 ‘너희들이 어디에 있건 하람성원을 향할 지니.’라 쓰여진 미흐랍. 전 세계의 이슬람 신도들이 예배 때 마음과 몸을 둔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만든 예배 방향 표시이다. 그 오른쪽,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올라서서 설교하는 계단인 민바르도 독특하다.2층이 남자 신도들의 예배공간이라면 3층은 여 신도들의 공간.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가 이곳에도 살아 있다.3층 여 신도 공간 앞쪽엔 가리개를 쳐 남자 신도나 예배 인도자조차 여 신도들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여 신도들은 이맘의 목소리만 듣고 예배드릴 뿐이다. 평일 5차례씩 열리는 예배 참석자는 매회 40명 정도. 대부분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외국인 무슬림들이다. 평일과는 달리 금요일 오후 1시 특별 예배엔 전국에서 500여명이 몰리며 한국인 신도도 40∼5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예배는 한국인 이맘 2명과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들어온 선교사 2명이 번갈아 인도한다. 라마단이 끝나는 다음날인 이슬람력 10월1일과 이슬람 성천(聖遷)일인 이슬람력 12월10일의 축제일엔 3000명이 모여 신앙을 넘어선 거대한 만남의 장을 일군다. “서구인들이 이슬람교를 왜곡하기 위해 지어낸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말 그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이슬람교와 교도들을 호전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이슬람 중앙 사원의 이행래(70) 이맘. 그는 “순종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슬람 사원은 무슬림들의 본 모습을 가감없이 볼 수 있는 평화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kimus@seoul.co.kr ●한반도와 이슬람교 서기 610년경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무하마드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이슬람교. 유일신 ‘알라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코란’을 따르며,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천국에 임할 수 있음을 기초교리로 삼는 일신교다. 신성에 관한 한 어떠한 복수(複數)적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은채 ‘가장 훌륭한 일신교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이슬람 신도, 즉 무슬림은 전세계 13억명. 이 땅에선 1955년 첫 한국인 무슬림이 탄생하면서 신앙이 태동했지만 한반도와 이슬람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기 무슬림 상인들의 교역상품이나 이슬람 세계의 것으로 여겨지는 물품들이 흔히 사용된 기록으로 미루어 9세기 중엽부터 이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용 일행을 ‘동해안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한 삼국사기 기록은 ‘처용가’의 주인공이 아랍인이라는 설을 낳기도 했다.11세기 초 고려기엔 ‘대식(大食)’으로 알려진 아랍 상인들이 고려조정과 교역을 자주 시도했다. 고려사에 ‘1024년,1025년,1040년에 아랍 상인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을 갖고 개경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기인 13∼14세기 무렵. 당시 원(元)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조정에는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의 위구르 무슬림들로 수도 개성에 이슬람 성원까지 세웠다고 한다. 조선조 세종 때엔 궁중 행사에 무슬림 대표들이 코란을 낭송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도 했으며, 그때 이슬람 역법이나 도자기 기술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조 유교사상으로 인해 이 땅의 이슬람은 15세기 중엽 이후 썰물처럼 빠졌다. 이후 1920년대 들어 소련치하 소수민족인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망명해와 학교며 이슬람 성원을 건립하기도 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대부분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한국이슬람교 중앙회측은 보고 있다.
  • 시사만화협회 ‘백무현화백 만평 재개’ 촉구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김상돈)는 서울신문 백무현 화백의 조속한 복귀와 서울만평 연재 재개를 촉구했다. 시사만화협회는 최근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과 관련, 성명을 내고 ▲백무현 화백의 조속한 복귀와 만평 재연재 ▲파문을 확대재생산하는 일부 보수언론의 여론몰이식 보도 중지 ▲시사만화가들의 표현 자유와 풍자를 검열하는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시사만화협회는 성명서에서 “백 화백에 대한 만평 중단사태는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일부 언론의 대미 굴종적인 언론 보도태도와 더불어 해당 사건을 묘사한 서울신문 백 화백에게 몰아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라고 비판했다. 협회는 이어 “본 협회와 소속 회원들은 과도한 표현으로 지적받는 해당 만평이 사실은 총기소지허용법안을 비롯한 미국 정치·사회의 구조적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 화백의 의도였다는 것에 공감한다.”면서 “정확한 경위파악과 취재를 생략한 채, 백 화백과 서울신문사의 공식사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의 비난여론을 부추겨 파문을 확대재생산하는 일부 보수언론의 기만적 행태에 대해 개탄한다.”고 덧붙였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사르코지 만평에 파리 숫자 늘어난 까닭은…

    사르코지 만평에 파리 숫자 늘어난 까닭은…

    |파리 이종수특파원|프랑스 유력 대선후보 니콜라 사르코지 머리 위에 날고 있는 파리 숫자가 늘어난 까닭은? 프랑스에 대선 결선투표를 일주일 남기고 ‘만평 논쟁’이 벌어졌다. 진앙지는 유력 일간 르 몽드의 만평.(그림)르 몽드는 29일(현지시간) 사르코지 캐리커처 머리 위에 그려진 파리를 놓고 그와 저명한 만평 화백인 장 플랑튀가 주고 받은 신경전을 소개했다. 내막은 이렇다. 사르코지가 대선후보와 내무장관을 겸하고 있던 시기 플랑튀 화백에게 한 통의 ‘항의 편지’를 보냈다.“주의깊게 보지 않았으면 당신의 만평속에 등장하는 내 머리 위를 파리가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못알아 차릴 뻔했다. 당신 만평 속 파리는 주로 극우파 장-마리 르펜을 묘사할 때 따라다니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진짜 모르겠다.” 표현은 정중했지만 가시가 담긴 말이다. 이어 사르코지는 자신이 극단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실시했음을 상기시킨 뒤 “오해를 풀 겸 한번 만나자.”고 말했다. 그러나 플랑튀 화백은 사르코지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날 만평에서 사르코지 위에 나는 파리를 세 마리로 늘렸다. 뿐만 아니라 만평속 사르코지는 개를 끌면서 제복에 완장까지 차고 있었다. 플랑튀 화백이 르펜을 묘사할 때 이용하는 ‘소품’이다. 그러자 사르코지가 발끈했다. 편집국장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플랑튀의 만평은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사르코지 머리 위의 파리 수는 더 늘어났다. 르 몽드는 “플랑튀 화백은 억압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고, 이 때문에 편집국의 지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플랑튀 화백에 대해 찬반 양론이 쏟아졌다. 팬클럽 회원들은 “당신은 르 몽드의 ‘천재’다.”(클레르 베를레, 알랭 보테로) 라며 극찬했다. 장 쿠랭이라는 독자는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심지어 그의 만평이 1면이 아니라 속지로 들어갈까 우려하는 반응도 있었다. 물론 비방하는 글도 있었다.“세골렌 예찬자”(샤를 몰리노),“비열한 짓”(피에르 베르제) 등의 비난이 나왔다. 심지어 지난달 22일 대선 1차투표가 끝나고도 ‘흑색선전’‘증오’ 등의 표현을 담은 편지가 이어졌다. 그러나 분량은 많지 않았다는 게 르 몽드측 설명이다. vielee@seoul.co.kr
  •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본 한국 정치인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본 한국 정치인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전 세계 네티즌들이 직접 아이템의 내용을 쓰고 편집하는 ‘집단지성 행위’의 산물인 위키피디아는 이따금 부정확한 내용을 포함하지만 인물이나 사건을 좀더 국제적·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위키피디아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가족 등 개인의 신상과 삶, 정치 입문 시기, 대통령직 수행 등 세 개의 큰 항목을 갖고 있다. 특히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해 미국과의 관계를 별도의 항목으로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위키피디아는 노 대통령이 대선 당시 ‘반미주의자’로 인식됐지만, 지지자들의 배신감 속에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전에 파병했다고 기술했다. 위키피디아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5개 항목으로 나눠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5번째 항목은 지역별 지지율 격차, 외환위기 극복에 대한 평가 등 김 전 대통령을 둘러싼 비판들을 적고 있다. 대신 이 항목 앞에 “정보 출처나 참고문헌이 적시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출처를 통해 내용을 개선시켜 주기 바란다.”는 설명을 붙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교적 짧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취임이후 재산공개 등을 통해 개혁을 시도했으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부패 등의 혐의로 구속토록 했다고 적고 있다. 또 임기 중에 성수대교 붕괴 등의 대형사고가 많았으며, 외환위기도 발생했다고 기술했다. 위키피디아는 올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비 후보들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한 ‘혁신적인 정책 추진가’로 묘사했다. 또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선거자금 문제로 기소됐던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8줄. 박근혜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이 부각돼 있다. 지난해 습격받아 얼굴에 상처를 입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전체 내용은 14줄.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정 전 장관을 햇볕정책의 강력한 지지자로 규정했으며,2004년 총선 당시 “노인들은 투표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관련한 위키피디아의 기술은 단 두 줄.1996년 국회의원이 됐고, 경기지사가 됐다는 내용. 김근태 의원에 대해서도 열린우리당 의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라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그밖의 다른 정치인들은 대부분 위키피디아에 등록돼 있지 않다. 시대 변화에 따라 정치인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그같은 변화에 따라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지금 이 시간에도 바뀌어나가고 있다. 그것이 위키피디아의 가장 큰 특징이다. dawn@seoul.co.kr
  • [책꽂이]

    ●입술(이명랑 지음, 문학동네 펴냄) 서울 영등포시장의 삶의 활기를 구성진 입담으로 들려주던 작가가 등단 10년 만에 낸 첫 소설집.‘꽃을 던지고 싶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 등 작가가 발표한 장편소설은 모두 영등포시장을 배경으로 했다.`하현´ ‘미니 초코파이´ ‘래 날래 까우리로 까이라?´ 등 9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은 ‘시장´을 다룬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로 나뉜다. 시장의 소멸 속에서 작가가 새롭게 찾은 문학적 영토가 엿보인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우울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화해´와 ‘용서´이다. 작가는 “왜 쓰는지 더는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저 ‘삼인칭의 세계´로 나는 곧장 걸어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삼인칭의 세계´서 만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각오로 들린다.9500원.●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김서령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작가의 첫 창작집. 등단작인 ‘역전다방´과 표제작 등 9편의 단편을 묶었다. 불행이 누적되다 결국 비정한 삶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등 ‘소설의 진정성´을 생각하게 하는 수작들이다.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되어야 했던 여고 삼수생(작은 토끼야…), 아이와 헤어져 살아야 하는 다방 여종업원(역전다방), 아이를 언니에게 떠맡기고 새 삶을 찾아 먼 나라로 떠나간 젊은 엄마(무화과 잼 한 숟갈) 등. 때로는 ‘신파적´인 작품속 인물들을 작가는 서로 마주치게 하고, 서로 기대어 살도록 만든다. 섬세한 사건들과 심리묘사로 인물 각각의 개체적 특이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적인 힘이 넘친다.9800원.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8) 한어 역관 이언진의 활약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8) 한어 역관 이언진의 활약상

    일본에서 문인들에게 환대를 받고 돌아온 역관 이언진(李彦 ·1740∼1766)이 연암 박지원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보냈다.“오직 이 사람만은 나를 알아 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이건 오농세타(吳細唾)야. 너무 자질구레해서 보잘 것 없어.”라고 하였다. 오농세타는 중국 오(吳)지방의 가볍고 부드러운 말을 뜻한다. 이언진이 명나라 말기 오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유미문학을 본떴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언진은 노하여 “미친 놈이 남의 기를 올리네.” 하더니, 한참 뒤에 탄식하며 “내 어찌 이런 세상에서 오래 버틸 수 있으랴.” 하고는 두어 줄기 눈물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언진이 세상을 떠나자, 연암은 자신이 젊은 천재를 타박한 것을 뉘우치며 ‘우상전(虞裳傳)’을 지어 주었다.우상은 이언진의 자이다. ●전기 6편 나왔지만 직접 만나 보고 쓴 작가는 없어 이언진이 25세에 일본에 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돌아오자 조선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다. 하지만 2년 뒤에 병으로 죽었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하찮은 역관이었기에, 그를 만나본 사대부 문인들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지었던 작품마저 불태워 버리고 죽었기에,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워낙 알려졌기에, 여섯명이나 되는 작가가 그의 전기를 지었다. 그 가운데 그를 만나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남긴 시와 전해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암중모색하며 그의 모습을 재구성해낸 것이다. 그를 가장 잘 이해했다는 이덕무도 그의 전기를 지으며 왜어 역관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에 간 역관이니까 왜어 역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한어 역관이었다. 물건을 관리하는 압물판사(押物判事)로 따라간 것이다. 역관이었던 그의 아버지 이덕방(李德芳)은 문장이 뛰어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관제묘(關帝廟)에 빌어 이언진이 태어났다. 총기가 매우 뛰어나 눈길이 한 번 스치면 모두 이해했다. 문장이 뛰어난 아들을 원했던 것을 보면 글 잘하는 집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역과에 합격하지 못해 ‘역과팔세보(譯科八世譜)’ 합천이씨(陜川李氏)조에 ‘생도(生徒)’로 기록되었다. 사대부 족보는 조(祖)·부(父)·자(子)·손(孫)으로 내려오지만, 역과 합격자들의 친가, 외가, 처가 선조들을 기록하는 ‘역과팔세보’는 손자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했다. 이언진의 할아버지 이세급(李世伋)은 1717년 역과에 10등으로 합격하여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냈다. 외할아버지 이기흥(李箕興)은 1714년 역과에 7등으로 합격해 절충장군(정3품)까지 올랐는데, 집안 대대로 청학(淸學)을 전공했다. 위항시인들의 시선집인 ‘풍요속선’에서는 “파리한 모습에 손가락이 길었다.”고 묘사했는데, 창백한 천재의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이상적은 “총기가 세상에 뛰어나,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고 했다. 이덕무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먹고 자는 것까지 잊었다. 다른 사람에게 귀중한 책을 빌리면 소매에 넣어가지고 돌아오면서,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길 위에서 펼쳐 보며 바삐 걸어오다가 사람이나 말과 부딪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타고난 천재일 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천재였다. 스승인 이용휴는 제자의 유고집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생각이 현묘한 지경까지 미쳤으며, 먹을 금처럼 아꼈고, 문구 다듬기를 마치 도가에서 단약(丹藥)을 만들 듯했다. 붓이 한 번 종이에 닿으면 전할 만한 글이 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먹을 금처럼 아꼈다는 말은 시를 쓰면서 그 표현에 꼭 필요한 글자만 썼다는 뜻이고, 단약을 만들 듯했다는 말은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여러 번 갈고 닦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쉬움과 함께 이뤄진 것들이다. 생전의 활동은 1759년 역과에 13등으로 합격해 두 차례 중국에 다녀오고,1763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25세 청년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오사카까지 조선 배를 타고 가 육지에 상륙해 수군을 남겨두고, 사신과 수행원들만 육로로 에도(江戶·도쿄)에 갔다. 오사카에서는 체제를 정비하느라 자연히 며칠 묵었다.1월22일 손님이 워낙 많이 찾아오자 제술관 남옥은 오전원계(奧田元繼)라는 문인을 이언진에게 미뤘다. “외당에 손님이 있으니, 나가서 접대해야겠습니다. 사역원 주부 이언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고사를 잘 아니 만나보십시오. 분명히 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남옥이 만날 일본 문인이 19명이나 되었으니, 그 가운데 한사람쯤 이언진에게 맡긴 것이다. 이언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박한 학식과 번쩍이는 시를 지어 일본 문인들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관상´과는 달리 출세 못한 채 요절 1월23일과 25일에는 임성(林成)이라는 관상가가 객관에 들려 조선 수행원들의 관상을 보아 주었다. 이언진이 자신의 관상이 어떠냐고 묻자,“골격이 준수하고 학당(學堂)에 근본이 부족하지 않으니 크게 출세할 것”이라고 답했다. 학당은 귓문(耳門)의 앞쪽을 가리키는데, 관상서인 ‘태청신감’에서는 학당을 총명지관(聰明之館)이라고 하였다. 귀(耳)와 눈(目)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당이 넉넉하면 문장을 떨치게 된다. 귀국한 지 2년 뒤에 이언진이 병들어 죽은 데다 아들마저 없어 양자를 들였으니 그의 관상 내용은 틀렸다. 하지만 조선 문사들과 필담을 나누며 한시를 주고받았던 임성이 이언진의 영민한 모습에 주목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관상 이야기는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에 실려 전한다. 일본 문인들은 조선 문사들의 시를 얻고 싶어서, 음식을 싸가지고 며칠씩 걸어와서 만났다. 명함을 들여놓으며 만나 달라고 신청한 다음에, 허락받으면 들어와서 인사를 나누고 필담과 시를 주고받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만나고 몇 십수씩 시를 짓느라 조선 문사들은 지쳤다. 서기들은 그것이 임무였기에 피할 수 없었고, 서너달 동안 이천수 정도 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언진은 한어 역관이었기에 바쁘지 않았다. 일본어 통역을 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서기들처럼 의무적으로 일본 문인들을 만나 시를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 대신에 자신이 만나고 싶은 문인이 나타나면 자기가 먼저 그에게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서기들처럼 하루에 백여수를 짓다 보면 천편일률적인 시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는 어쩌다 짓고 싶을 때에만 지었기 때문에 개성이 번쩍이는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시를 받아본 일본 문인들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사신 행렬이 어느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이름이 먼저 퍼졌다. 그가 부채에 써준 것만 해도 500개나 되었다고 한다. ●박지원에 혹평 받고 충격… 원고 대부분 소각 사상이 다양했던 일본 문인들은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 문사들과 필담을 나누며 한계를 느끼다가, 명나라 고문파(古文派) 문인 이반룡과 왕세정을 숭상하는 이언진에게 흥미를 느꼈다. 정주학(程朱學)에서 벗어나 옛날의 말로써 옛날의 경전을 해석하자고 주장하는 조래학자(徠學者)들이 찾아와 송학(宋學)을 비판했다. 이에 이언진은 “국법이 송유(宋儒)를 벗어나 경서를 설명하는 자는 중형을 내리니, 이런 일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하면서 문장에 대해 논하자고 하였다. 구지현 선생은 ‘이언진과 일본 문사 교류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필담 내내 이언진은 왕이(王李)로,(조래학자) 정민경(井敏卿)은 이왕(李王)으로 칭하는 것에서부터 양쪽의 견해가 처음부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언진은 고문처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고문의 정신을 잘 체득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이반룡이 아니라 왕세정에게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앞서 지나갔던 곳을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르자 그의 시집이 이미 출판되어 있었지만, 일본 문인들은 그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관심도 시들해졌다. 그는 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765년 ‘일본시집’을 편집하고 짧은 머리말까지 썼지만 출판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자기의 문장이 평범치 않다는 것을 알아, 병이 깊어 죽게 되자 원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누가 다시 이 글을 알아주겠느냐.”라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해 박지원에게 품평을 구했다가 혹평을 당한 충격이 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지원은 “우상이 나이가 젊으니 부지런히 도(道)에 나아간다면 글을 지어 세상에 전할 만하다고 생각했었다.”라고 변명했다. 기이한 것보다 정도에 힘쓰라고 권면했는데,“우상은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내가 불길 속에 뛰어들어 일부를 건져냈다. 그의 원고는 ‘피를 토하는 글’이라는 뜻의 구혈초(嘔血草)라고도 불렸고, 유고집은 ‘타다 남은 글’이라는 뜻의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日 국가에 목숨 바칠 인간 키우려 해”

    “日 국가에 목숨 바칠 인간 키우려 해”

    |도쿄 박홍기특파원|다와라 요시후미(66). 일본 시민단체인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워크 21’의 사무국장이다.2005년 극우 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전면전을 펴 역사 왜곡 교과서의 채택을 최소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달 30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내년부터 사용될 2006년 고교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을 때 가장 먼저 세계사·일본사 등 관련 교과서의 왜곡·축소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정부는 26일 올해 검정에 통과한 교과서를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25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10여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붉은 셔츠 차림의 다와라 국장을 만났다. 그리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 다와라 국장은 “학생들에게 역사는 있는 그대로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특히 올해 검정교과서와 관련,“주변국의 역사 왜곡을 넘어 일본의 역사마저 사실을 뒤집고 있다.”고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했다. ▶일본 정부의 의견이 어느 때보다 교과서에 적극 반영됐다는데, 한국과 관련된 부분은. -분명 정부가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출판사에 압력을 넣었다. 일본을 비롯,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본해로 사용되는데 한국에선 동해라고 부르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한국의 ‘억지’라는 얘기다. 물론 독도의 일본 영유권 주장도 강하다. 거의 모든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의 내용이 들어 있지만 ‘강제연행’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예 빠졌다. 지난해 검정이 끝난 모든 중학교 교과서에는 위안부의 존재 자체가 없다. ▶올해 검정교과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제점은. -2차 대전때 오키나와의 집단자살이다. 일본의 역사까지 비틀었다. 지금껏 일본군의 강제 명령에 의한 집단 자살이라는 내용에서 일본군이 강제했다는 대목을 들어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묘사, 일본군의 가해·잔학 행위를 교과서에서 없앤 것이다. 교과서에 일본 우익들의 주장이 반영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교과서 왜곡의 문제는. -교과서에서 전쟁의 사실, 역사의 사실을 없애려고 한다. 교육의 힘을 통해 과거를 지우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을 키우려 하고 있다. 과거 전쟁과 같이 말이다. ▶문제의 교과서 채택 저지 방안은. -2001년,2005년 때처럼 채택 반대운동을 펴 나가려고 한다. 일선의 교원들은 역사 사실을 기술한 책을 원한다. 교과서 채택 권한을 가진 교육위원회의 위원들을 적극 설득해 나갈 예정이다. ▶2005년 한·중·일 3국이 공동 집필한 책 ‘미래를 여는 역사’의 반응은. -일본에서 7만여부가 팔렸다. 딱딱할 수밖에 없는 역사책이 이렇게 팔린 사례는 거의 없다.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공립 고교에서 사용되면 좋을 텐데 우익들의 ‘공격’ 때문에 간단치 않다. 마지막으로 “언제까지 활동할 생각인지.”라고 묻자 껄껄껄 웃은 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은퇴하고 시골에서 지내고 싶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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