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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BI ‘로즈웰 외계인’ 새로운 기록 공개 파문

    FBI ‘로즈웰 외계인’ 새로운 기록 공개 파문

    美 연방수사국 FBI가 로즈웰 외계인 관련 새로운 기록을 7일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다. FBI의 전자문서 공개 공식 웹사이트인 ‘더 볼트’(The Vault)는 그동안 극비 문서들을 공개해 왔는데 7일 새로 2천개의 디지털 파일이 업데이트 되면서 그 내용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공개된 문서에는 로즈웰 UFO와 외계인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1950년 3월 22일 FBI 워싱턴 담당 특수요원이었던 가이 호텔(Guy Hottel)이 FBI 디렉터에게 보낸 문서가 파문의 발단이다. 그가 보고한 문서에는 로즈웰에서의 UFO와 외계인 발견을 담고 있다. ”공군 조사관이 뉴멕시코에서 소위 비행접시라고 불리는 3개의 물체를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며 “비행물체는 원형으로 중간이 볼룩 올라와 있으며 지름은 50피트(15미터)” 라고 적혀있다. 각 비행물체에서 발견한 외계인의 묘사도 담겨있다. “각 비행물체에는 3개의 인간형태의 생물체가 있다. 키는 3피트(약 91cm)정도다. 그들은 금속성 물질의 옷을 입고 있는데 고속비행이나 실험비행을 할 때 입은 제복과 비슷하다.”고 적혀있다. 이어지는 문서에는 이름이 삭제된 채 관련내용이 담겨있다. “OO씨에 의하면 비행접시들은 뉴멕시코에서 발견되었으며, 당시 정부는 그 지역에 강력한 레이더를 설치한 사실로 보아, 이 레이더가 비행접시의 조정체계를 교란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고 적고 있다. 현재 이 문서는 미국 폭스뉴스와 각 외계인관련 웹사이트에 일파만파로 퍼지며 로즈웰 외계인의 진위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로즈웰 외계인 관련 다큐중 한 장면(위), FBI가 공개한 문서(아래)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김경태 tvbodaga@hanmail.net
  • 日 교과서 역사왜곡, 독도만이 아니다

    日 교과서 역사왜곡, 독도만이 아니다

    대담하게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워낙 자주 분기탱천하다 보니 ‘실효적 지배’ 같은 어려운 단어가 별스럽지 않게 쓰여질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독도만이 아니란 것이다. 때문에 역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독도에 다른 문제가 파묻히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애초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출판사는 이쿠호샤와 지유샤. 이 두 출판사는 1997년 출범한 우익단체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교과서가 애초부터 주목받은 이유려니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쯤으로 치부하기 곤란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고대사 깎아내리기 여전 기본적으로 한국 고대사 깎아내리기는 여전하다. 가령 한사군 이후 2세기에나 들어서야 한국에 고대국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처럼 묘사한다. 고조선은 신화에 불과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겨우겨우 국가를 세우기 시작한다는, 국내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 식민사관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도래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했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도 눈에 띈다. 다른 출판사들은 도래인이 존재했고 이들이 일본으로 넘어와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식으로 서술돼 있는 반면 이쿠호샤는 도래인 대신 ‘귀화인’이란 용어를 앞세웠다. 이는 지유샤의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보다 일본이 알아서 이들을 잘 포용했다는 점을 강조한 서술이다. ●임나일본부 기정사실화 여기에다 임나일본부 서술도 강화됐다. 다른 교과서들은 ‘임나 지역에 일본이 진출했다는 주장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 반면 이쿠호샤와 지유샤는 임나일본부를 기정사실화했을 뿐 아니라 지유샤의 경우 ‘5세기 동아시아’ 지도를 통해 임나가 한반도 남부 전역이라 표시까지 해 뒀다. 왜구의 구성도 논란거리다. 지유샤는 왜구에 대해 “일본인 외에 조선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고 서술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왜구는 일본의 잔학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국제 학계에 통용된다.”면서 “그런 비판적 인식을 피하기 위해 왜구의 활동 책임을 한국으로 떠넘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조선의 건국을 서술하면서 조선이란 국호 대신 굳이 ‘이씨 왕조’라는 표현을 강조하는 것도 이들 두 교과서다. 임진왜란 서술도 마찬가지다. 다른 교과서들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조선인들이 많은 피해를 봤다는 식의 건조한 서술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쿠호샤와 지유샤는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기충천을 강조한다. 특히 지유샤는 도요토미가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공략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한론에 대한 서술도 두 교과서는 유독 편파적이다. 다른 교과서들에는 조선이 일본의 과도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조선을 정벌하자는 의견이 대두됐고, 이 의견은 일본 내에서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정한론을 주장했던 이들이 실각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유독 이들 두 교과서만큼은 조선의 폐쇄적인 정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한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만 서술해 뒀다. 1910년 강제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이들 두 교과서는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데 강조점을 찍는다. 다른 교과서들은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권을 틀어쥐어 이 과정에서 많은 저항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반면 이쿠호샤는 “일본도 인접한 조선이 러시아 등 구미열강의 세력에 놓이게 되면 자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강해졌다.”고 서술했다. 일본으로서는 선택할 카드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지유샤는 아예 한술 더 떠서 “러일전쟁 뒤 일본은 한국통감부를 두고 근대화를 추진했다.”고 썼다. ●3·1운동 폄하… 종군위안부 서술 없애 이는 자연스레 3·1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다른 교과서들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지만, 이쿠호샤는 시위 사진 1장으로 대체해 버렸고 지유샤는 ‘초기엔 비폭력, 나중엔 충돌로 사상자 발생’ 정도로만 간략히 언급하고 만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도 다른 교과서에는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이쿠호샤와 지유샤는 교묘하게 이를 비튼다. 가령 종군위안부에 대한 서술은 사라졌고 창씨개명의 강제성과 저항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여기에다 지유샤는 “미혼 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고까지 해 뒀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세계에서 가장 돈많은 총각 재벌은 누구?

    세계에서 가장 돈많은 총각 재벌은 누구?

    잘생기고 매너까지 훌륭한 재벌 남성은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백마 탄 왕자님’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막강한 재력을 갖춘 총각의 억만장자는 전 세계적으로 생각보다 매우 드물다. 솔로의 억만장자라도 대부분이 미모의 여자친구와 사랑에 빠져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에 따르면 올해의 억만장자 1210명 가운데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 선호할 만한 억만장자는 단 3%에 불과하다. 123명의 솔로 억만장자가 존재하지만 50세 이하의 진정한 남성 솔로는 36명이 고작이다. 가장 대표적인 싱글남성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26)다. 전 재산이 69억 달러(약 7조 8000억원)에 달하고 사회적 명성도 대단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학시절 파티에서 만나 교제한 중국계 여성 프리실라 찬과 함께 페이스북 본사 근처에서 동거하고 있다. 1000명이 넘는 억만장자 가운데 가장 어린 더스틴 모스코비츠(26)도 솔로지만, 그 역시 여자 친구가 있다. 모스코비츠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미모의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인 캐리 투나로, 사업 계약서에 둘이 찍은 사진을 붙일 정도로 여자친구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다. 솔로 억만장자 가운데 대부분은 여자친구가 있다. 그것도 미모와 매력을 겸비한 여성들로 평범한 여성들을 좌절케 한다. 헤지펀드 계 신화 노엄 고테스만은 할리우드 스타 루시 루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으며 포스트만 리틀의 테디 포스트만은 인도의 미모 배우 파드마 라크쉬미와 교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각 억만장자 가운데 부인도 여자 친구도 없는 진정한 ‘솔로남’은 이스라엘의 억만장자 테디 사기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한 때 이스라엘 모델 바 라파엘리와 열애를 했지만, 라파엘리가 전 연인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돌아가면서, 현재 사기는 공식적인 솔로 상태다. 아래는 ‘포브스’가 정리한 총각 억만장자들 Dustin Moskovitz, 26, single Mark Zuckerberg, 26, single Albert von Thurn und Taxis, 27, single Scott Duncan, 28, single Eduardo Saverin, 29, single Fahd Hariri, 30, single Sean Parker, 31, single Yoshikazu Tanaka, 34, single Yusaku Maezawa, 35, divorced Serra Sabanci, 37, single Teddy Sagi, 39, single Jay Y. Lee, 42, divorced Chen Jinxia, 43, widowed Peter Thiel, 43, single Gil Shwed, 43, single Xavier Niel, 43, single Dmitry Rybolovlev, 44, separated Richard Li, 44, single Roman Abramovich, 44, divorced Filiz Sahenk, 44, single Richard Li, 44, single Dmitry Rybolovlev, 44, separated Alexei Mordashov, 45, separated Mikhail Prokhorov, 45, single Mikhail Fridman, 46, divorced Jeffrey Skoll, 46, single Oleg Boyko, 46, single Ralph Dommermuth, 47, divorced Li Lin, 47, divorced Andrei Rogachev, 47, divorced Alexander Nesis, 48, divorced Yuzhu Shi, 48, divorced Noam Gottesman, 48, divorced Nicolas Berggruen, 49, single Roustam Tariko, 49, single Mehmet Omer Koc, 49, single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 http://twitter.com/newsluv ) 
  • ‘박근혜·유시민 복지론’ 밑그림 제공 안상훈 서울대 교수 인터뷰

    ‘박근혜·유시민 복지론’ 밑그림 제공 안상훈 서울대 교수 인터뷰

    “오해의 결이 워낙 두껍게 쌓여 있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 안상훈(42)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2006년 6월 내놓은 대답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중한 인터뷰 거절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당시 스웨덴 집권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총선에서 참패했다. 멀리 북유럽 국가의 선거 결과를 두고 더 흥분한 것은 한국 언론들이었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모델로 손꼽히는 스웨덴에서마저 사민당이 패배한 사실을 들어 ‘어쭙잖은 좌파’ 노무현 정권을 향한 맹공이 쏟아졌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냉소했다. 그래서 스웨덴 모델에 대해 냉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았다. 그래서 안 교수에게 인터뷰를 부탁했다. 그는 스웨덴에서 복지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의 몇 안 되는 학자다. 하지만 “두터운 오해의 결”을 내세워 거절했다. “그때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 많이 받았지요. 지금도 입 떼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 28일 서울 신림동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안 교수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은 시쳇말로 ‘기업 팔을 비틀어대도’ 이념 공세에서는 자유로운 이명박 정권 아닌가. 차기 대통령 선거 주자 ‘부동의 1위’를 달리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현 국회의원)도 ‘사회복지보장기본법 개정안’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복지구상을 밝혔다. 이른바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출산에서 노후까지 생애 주기를 구분해 소득보다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개념)다. 야당인 민주당도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묶어 3무(無) 정책으로 내놨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참여정부의 바통을 이어받아 ‘사회투자국가론’(복지 지출이 성장과 융합하기 위해 성과를 내는 투자 형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외치고 있다. 박근혜·유시민 두 사람의 복지 방안에는 안 교수의 주장이 상당 부분 녹아 있다. 특히 박 전 대표가 내놓은 ‘생애주기 맞춤형 복지’는 안 교수가 10년째 강단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판박이다.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인데도 안 교수는 왜 입 떼기가 여전히 어려울까. 그가 최근 ‘현대 한국복지국가의 제도적 전환’(서울대출판문화원 펴냄)이라는 제목의 연구서를 낸 것을 명분 삼아 어렵사리 만났다. →스웨덴 모델이 다시 화두다. 소회가 남다를 듯싶은데. -2006년과는 또 다르게 답답하다. 지금 당장 한국에서 스웨덴 모델은 불가능하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수준이 스웨덴과 다르다. 비유하자면 초등학생이 대학생 옷을 입고 멋 내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한국은 초등학생이 유치원 옷을 입고 있는 격이다. 이런 마당에 작은 옷이 싫다고 갑자기 너무 큰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짚어 달라. -스웨덴 모델이 인기를 끌면서 스웨덴을 다룬 대중서들이 참 많이 나왔다. 나도 가끔 보는데 결국 각자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나서 일방적으로 얘기한다. 스웨덴을 천국처럼 묘사하는 이들은 주로 1970년대, 그러니까 스웨덴 모델의 최전성기 때까지만 얘기한다. 1990년대 들어서 사민당마저 복지 다이어트에 나서면서 스웨덴 모델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세밀하게 접근하기보다 한때 유행했던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식의 논쟁만 남았다. 글쓰기 내공이 더 쌓이면 스웨덴 모델에 대한 대중서를 내가 직접 쓰고 싶을 정도다. →그러면 (스웨덴에서) 어떤 부분을 배워야 하나. -가장 배워야 할 부분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복지 그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지속 가능한 복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점이다. →‘사회서비스’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무슨 얘기인가. -복지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현금을 주는 것과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현금을 쥐여 주는 것은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지만 ‘근로 동기 침해’라는 문제점도 있다. 반면, 사회 서비스는 근로 동기 침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예컨대 실업자에게 실업수당 명목으로 150만원을 준다면 일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육비나 교육비로 150만원 지원하면 그 이유로 놀지는 않는다. 서구의 복지 선진국들은 사회 서비스 대 현금 서비스 비율이 1대2 정도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대4, 1대5 정도 된다. 사회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 서비스가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워크페어=Work+Welfare)나 노무현 정권의 ‘참여형 복지’(사회투자국가론)와 어떤 차이가 있나. -이전 정권에서 거론한 사회 서비스 강화는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제3의 길’ 저자)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너무 부분만 얘기했다. 생산적 복지는 일하면 돈을 더 주겠다는 것, 즉 자활 개념이 들어가 있다. 복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복지를 자꾸 저소득층을 도와주는 개념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식으로 복지를 받아들이면 결국 현금 중심 지원에 머물게 되고, 그 결과는 ‘복지병’에서 보듯 근로 의욕 상실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국가 재정 문제를 낳게 된다. 우리나라도 각종 연기금 문제에 대한 우려가 많지 않은가. →그래도 노무현 정권이나 유시민 대표의 사회투자국가론은 사회 서비스를 내세우지 않았나.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가 현금 지원에 자활을 합친 것이라면, (노무현 정권의) 사회투자론은 사회 서비스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한발 전진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유 대표의 주장을 보면 여전히 복지를 (저소득층에 대한) 시혜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상복지’ 시리즈를 내건 민주당과 마찰이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에 정말 사회 서비스를 통한 보편적 복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면, 이것저것 건드리지 말고 교육이면 교육, 보육이면 보육 딱 한 부분만 골라서 일단 시행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런 맥락에서 민주당이 내놓은 ‘무상’ 시리즈는 어떤가. -조금 더 차근차근 제시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무상 대상으로) 급식, 의료, 교육을 내세웠는데 그 세 가지를 왜 고르고, 왜 정책적 우선순위를 뒀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왜 무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설명도 충분치 않다. 복지 정책의 정치적 기대치를 너무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와, 공짜다.” 하다가 “에이, 이게 뭐야.”로 가게 된다. 그런 실망감이 누적되면 다음 정책 추진 때 어려워진다. 정권만 잡으면 전부 다 해 줄 것처럼 얘기하지 말고 왜 이 항목을 골랐고 어떤 방식으로 실천해 나갈 것인지 좀 더 깊은 고민과 논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복지안은. -내가 보기엔 가장 진보적이다. 아무래도 박 전 대표는 아버지(고 박정희 대통령) 영향 때문인지 국가가 선도적으로 나서서 개량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이 있는 것 같다. 유시민 대표가 영미식 제한적 복지에 그쳤다면, 박 전 대표는 좀 더 전폭적이고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복지 정책을 연구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대목은 우리나라 복지 프로그램에 없는 건 없다는 거다. 있을 건 다 있는데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찔끔찔끔 백화점식으로 늘어만 놓지 말고 핵심을 정해 국민을 설득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복지 제도에 대한 전면적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는 게 내 주장이었고 박 전 대표가 이를 많이 받아들였다. →학자로서 이론 전파에 일정 부분 성공한 셈인데 어떻게 (정치권과) 인연이 닿았나. -정치권과 직접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강단에서 늘 해 왔던 주장들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 때 복지부 정책평가위원으로 일한 적은 있다. 이때 논의한 내용들이 유 대표에게 전달된 것 같다. 박 전 대표 경우는, 대학 은사(최성재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께서 우리나라 복지 정책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며 (박 전 대표의 정책) 브레인으로 참여하셨는데 제자된 도리로 옆에서 조금 거들어 드렸다. →결국 복지 정책에 있어서 ‘빨갱이’ 취급을 당하기 쉬운 진보보다 공동체 복원을 내세운 보수가 더 유리한 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진보가 없으면 복지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도 없다. 진보의 역할이 크다. →진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강남 좌파’니 ‘분당 우파’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나. -말 장난이다. 언론이나 정치계가 자꾸 그런 말을 만들어 내는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책의 정교함이나 어느 게 국민에게 이로운가를 따져야지…. 언론은 그렇다 치고 대학 교수들까지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 →말씀을 들어보니 강남에 안 사나 보다. -하하. 굳이 따지자면 강남에 전세 사는 중도파다. →박 전 대표의 보수적 색채 때문에 집권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나온다. 당장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그의 공약은(세금과 정부 규모는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는 ‘풀’고, 법 질서를 ‘세’우자는) ‘줄푸세’였다. -박 전 대표의 구상 자체는 진보신당 대표를 지낸 노회찬 의원이나 참여정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용익 서울대 교수 등 반대 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남는 것은 진정성인데, 그건 학자인 내가 언급할 문제는 아니다. 학자로서 얘기하자면 가능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잘해야 한다는 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봐라. 이명박 정부가 잘해서 그 위기를 넘겼느냐, 그건 아니다. 1998년 이후 뒷정리를 잘 해둔 김대중 정부의 공덕이 크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치열하게 고민해서 세팅을 잘해야 한다. 어느 누구 하나의 공으로 될 일이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스웨덴 모델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스웨덴의 특수성, 예컨대 이웃 소련의 압박, 적은 인구, 유럽이라는 거대 단일 시장 등이 있었기에 (스웨덴 복지가) 가능했던 것 아닌가. -맞다. 스웨덴은 1·2차 세계대전 때 어디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초토화된 유럽을 상대로 전후(戰後) 보급기지 역할을 맡았다. 인구도 1000만명이 채 안 된다. 스웨덴 사람들은 일본인들처럼 남에게 욕먹고는 못 산다. 스웨덴 모델이 안 된다는 사람들은 은근히 미국을 내세운다. 미국이 복지 후진국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인종 문제(흑백 갈등)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인종 문제가 있나? 아니다. 심지어 평등 지향적 의식이 엄청 강하다. 그렇기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복지를 구상할 수 있고, 해낼 수도 있다. →그럼 무엇부터 손대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빨리’다. 지금 안 바꾸면 나중에 큰 골칫덩이가 된다. 프랑스를 봐라. 연금 체계가 굳어버린 뒤 뒤늦게 손대려 하니까 총파업이 터져나오는 고통을 겪지 않나. 우리는 갖춰진 게 없다. 그나마 이 점이 다행이다. 정해진 틀이 없으니까 이제부터 잘하면 더 좋은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여겨보는 대목은 ‘일과 가정의 양립’이다. 스웨덴 모델 성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노동운동, 즉 조직화된 노조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건 산업화 시대의 모델이다. 지금 같은 탈산업시대에는 지식이나 교육 분야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늘려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쉽게 말해 아이가 있는 젊은 여성과 그 여성에 연계된 젊은 남성의 표를 어떻게 유혹할 것인가, 하는 거다. 내 꿈은 한국이 이 과정을 잘 설계해서 스웨덴이 한국 모델을 배우기 위해 역방문하는 것이다. →이러다 나중에 복지부 장관이나 국무총리로 입각하는 것 아닌가. -하하. 나는 학자로서 복지국가 논의의 물길을 트는 데 관심 있다. 5년 단임정부에 들어가 일하는 것보다 차라리 100살까지 서울대 교수하면서 복지국가를 연구하고 싶다. 스웨덴은 학비가 공짜라 유학생을 잘 안 받아 준다. 그래서 스웨덴 모델에 관심 있는 학자들도 방문연구원 형식으로 몇 년 머무는 정도가 전부다. 내가 (스웨덴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1992년 사회복지학회 주최로 서울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에스핑 앤더슨(복지국가유형론으로 유명한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 복지정책학자) 등 유명 학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관련 논문도 번역해 주고 길 안내도 하고…. 그게 인연이 돼 공부의 길로 이어진 만큼 배우고 익힌 이론을 제대로 전달해 보고 싶다. →입각보다 100살까지 교수하는 게 더 어려운 것 아닌가. -하하하. 그건 쓰지 마라. 나 잘릴지도 모른다.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안상훈 서울대 교수는 ▲1969년 서울 출생 ▲1992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1996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비교사회정책 석사 ▲2000년 스웨덴 웁살라대학 비교사회정책 박사 ▲2001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2005~2007년 보건복지부 정책자문위원 ▲2006~2008년 대통령 자문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정책기획위원회 위원 ▲2009년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장
  • [옴부즈맨 칼럼] 언론의 재난보도 자세/김동극 행정안전부 인사정책관

    [옴부즈맨 칼럼] 언론의 재난보도 자세/김동극 행정안전부 인사정책관

    ‘그라운드 스웰’(ground swell). 먼 곳의 폭풍으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이다. 사전적으로는 쓰나미와 같은 자연현상을 이야기하는 단어지만, 미국의 웹 전문가 조시 버노프와 셸린 리는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소셜미디어에 의해 오늘날 기업들의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을 그렇게 묘사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언론의 상황도 ‘그라운드 스웰’이라고 표현한다. 폭풍의 중심부에는 스마트폰 하나로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소셜미디어가 있다. 언론보다 더 빨리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 파급 영향도 점점 커지는 소셜미디어가 언론매체 입장에서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변화라는 것이다. 최근 며칠 동안 연이어 보도된 일본 대지진 뉴스를 보면 이러한 언론의 상황 변화와 재난 보도에 대처하는 언론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구글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방송과 신문에서 재난 상황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를 할 때 구글에서는 단 몇 시간 만에 ‘퍼슨 파인더’(Person-Finder)라는 사람 찾기 서비스를 오픈해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현재 상황 등을 등록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구글 재팬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재난을 몸소 겪고 있는 이재민과 그 가족의 입장이었다. 재난 소식에 애가 탈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 그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 찾기 서비스를 개설한 것이다. 일본 지진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어떤 보도를 원했을까. 피해 상황을 과장한 자극적인 보도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보도, 희망을 주는 보도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발생한 재난이기 때문에 우리의 원자력 발전소 상황은 어떤지, 일본 방사능 유출이 우리나라에 피해는 없는지 등이 우려되었을 것이다. 지진 발생 직후 서울신문 3월 12일 자 기사에는 ‘140년 만에 최악 강진…日 열도 절반 침몰 전조인가’라는 제하로 ‘침몰’ 등 자극적 표현과 함께 인터넷에서 대지진을 예언한 글을 인용한 내용이 보도돼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보도가 계속되면서는 Q&A, 전문가 토론 등 다양한 형식으로 독자들이 궁금하게 여길 만한 내용을 풀어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한다. 3월 14일 자 ‘Q&A로 풀어본 일본 대지진’은 평소 지진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인 일본이 왜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 심층분석해 보도했다. 3월 17일 자 ‘일본 방사성물질 상황과 대처 Q&A’는 방사능 유출 현지 상황, 방사능 대처법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준 기사였다. 또한 이웃 나라의 지진과 원전 사고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었을 독자들을 위한 기사도 많이 보도됐다. 3월 16일 자 ‘국내 원전 해발 10m 위치…해일엔 안전’, ‘한반도 연중 편서풍…방사성 물질 넘어올 가능성 희박’, 3월 21일 자 ‘1기 해체비 1조…경험 전무(全無), 폐로(廢爐)도 쉽지 않다’ 제하의 기사들은 우리 원전의 안전성과 방사성물질의 피해 가능성에 대한 국민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 주었다. 지난 15일 트위터에서 “방사능 한국 상륙설”이 유포되어 경찰이 유포자 신원 확인에 나서는 사건이 있었다. 기상청이 사태의 수습을 위해 방사능 위험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이 루머는 급속도로 퍼져 나가 국민들이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소셜미디어가 속도전에서 앞서 나가고 있을지 몰라도, 신뢰성 측면에서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재난 상황에서 언론은 이러한 소셜미디어의 한계를 능가하고 국민의 궁금증과 불안감을 해소하고 신뢰를 줄 수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언론이 ‘그라운드 스웰’ 상황에서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어린이날 노래’ 작사가이자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 동시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년)이 때아닌 ‘고향’ 논란에 휩싸였다. 법정 공방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논란은 윤석중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에서 불거졌다. 노경수 한서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동심의 근원을 찾아서-윤석중 연구’에서 윤석중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향’의 정서는 충남 서산 지역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자신의 단국대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심화시킨 결과물이다. 윤석중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두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외조모 밑에서 잠시 크기도 했고, 젊은 시절 부친이 거주하던 서산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①태어나서 자란 곳 ②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③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보기에 따라 윤석중의 ‘고향’은 서울도, 서산도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노 교수는 “시골과 고향을 노래한 윤석중 작품을 살펴보면 그의 고향은 서산을 가리키며, 서산은 향수의 공간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 예로 ‘서울 사는 아이야/ 시골 왜 왔니?/시골 바람 맑은 바람/쐬고 싶어 왔단다’(‘서울 사는 아이야’ 중) 또는 ‘시골 사는 아이들은/몇 갑절 저보다 큰/나뭇짐도 잘 지고’(‘시골 사는 아이’ 중) 등의 시구를 든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한다. 윤석중의 장남 태원(미국 거주)씨는 “아버지는 일본 도쿄 유학 생활을 제외하고 80여년 동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했다.”면서 “(아버지의) 정신적 고향이 서산이라거나 향수에 관련된 많은 작품이 서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법정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이에 대해 문단은 아동문학계에서 차지해 온 윤석중의 독보적 위치를 감안할 때 ‘고향’ 논란은 이해가 가지만 법정 공방까지는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그 이면에는 윤석중의 아픈 개인사가 있다. 윤석중의 부친 윤덕병(1885~?)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세 차례나 투옥됐던 민족주의계열 좌익 지식인이었던 것. 1930년대 초 윤덕병은 사회 활동을 접고 사별했던 전처(윤석중의 모친)가 남겨준 땅이자 윤석중의 외가인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46번지’로 내려와 은거하다 한국전쟁 때 좌우익 대립 속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들은 아직까지 윤덕병의 유골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노 교수는 “윤석중의 작품 이면에는 좌익계열이었던 부친을 한국전쟁 때 잃은 뒤 동심주의, 낙천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체험, 반공주의와 연좌제가 서슬 퍼렇던 시대적 배경이 있다.”면서 “서울에서 태어나고 주로 활동했을지라도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외조모와 부친이 있었던 서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중 전기를 썼던 신현득(78) 새싹회 전 이사장은 “할아버지로 인한 불편한 기억 때문에 유족들이 아버지 윤석중과 할아버지 윤덕병, 그리고 서산과의 인연이 새삼 거론되는 것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노 교수의 책이) 윤석중에 대한 일각의 일방적 비판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대목 등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윤석중에게는 ‘거목’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일제 치하 현실에 순응하려는 동심주의와 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낙천주의를 앞세워 아이들의 정서를 박제화시켰다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노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윤석중의 작품 세계는 동심주의적 정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초기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한 민족주의적인 색채와 일제 수탈에 대한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조선아들행진곡’에서는 ‘피도 조선 뼈도 조선/이 피 이 뼈는/살아 조선 죽어 조선/네 것이라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1929년에 쓰인 ‘허수아비야’는 ‘허수아비야…/ 여기 쌓였던 곡식을/누가 다 날라 가디?/…/넌 다 알 텐데/왜 말이 없니?/넌 다 알 텐데 왜 말이 없니?’라며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현실을 상징과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독일인 감독 국립창극단 ‘수궁가’ 연출

    판소리가 중심인 창극을 외국인이 감독한다? 언뜻 ‘위험해’ 보이는 시도를 국립창극단이 한다고 선언했다. 오는 9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무대에 올리는 창극 ‘수궁가’를 독일 출신의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77)에게 맡긴 것이다. 공연계의 시선은 기대와 우려로 엇갈린다. 프라이어는 28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지난해 방한 때 국립창극단의 ‘춘향 2010’을 보고 판소리에 흠뻑 매료돼 국립창극단의 파격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다.”면서 “한국인 아내의 적극적인 지지도 결심에 한몫했다.”고 말했다. 프라이어의 부인인 성악가 에스더 리는 ‘수궁가’의 조연출을 맡았다. ●9월 8~11일 국립극장서 세계 초연 표현주의 미술가이기도 한 프라이어는 ‘현대 부조리극의 아버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수제자다. 지난해 미국 LA 오페라극장에서 바그너의 ‘반지’ 시리즈를 연출하는 등 50여년간 150여편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2007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가 연출했다. ‘수궁가’는 한국에서 처음 공연된 뒤 ‘미스터 래빗 앤드 더 드래건 킹’(Mr. Rabbit and the Dragon King)이라는 영어 제목으로 12월 독일과 스위스 무대에도 오른다. ‘창극의 세계화’를 겨냥한 작품이다. 프라이어가 연출하는 ‘수궁가’는 토끼와 거북이가 주인공인 원작과 달리 스토리텔러(story-teller)가 극을 이끌어간다. ‘3m의 키 큰 사람’으로 묘사되는 스토리텔러는 안숙선 명창이 맡았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수궁가’의 무대 의상은 한국 고유의 색깔도, 유럽의 색깔도 띠지 못했다. 한지에 먹물로 그린 기하학적인 문양이 담긴 프라이어의 한복도 어정쩡했다. 한국과 유럽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국 고유의 얼과 혼이 담긴 판소리를 푸른 눈의 그가 얼마만큼 무대 위에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일각의 우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12월 독일·스위스 무대에도 올라 임연철 국립극장장은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판소리를 잘 보존해야겠지만 얼마든지 달리 해석해 세계 보편적인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면서 “국적 불명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새로운 시도에 대해 따뜻한 눈으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프라이어는 “(간담회 석상의 한국 기자와 창극단 관계자) 여러분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 솔직히 판소리를 들을 때도 비슷하다.”고 털어놓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색을 한 뒤 “유럽은 문화적으로 다 소진돼 예술가들이 다른 지역에서 영감을 얻는다. 파블로 피카소(화가)는 아프리카, 존 케이지(작곡가)는 동양 문화를 접목시켜 예술을 발전시켰다.”면서 “한국은 판소리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지닌 나라다. 이를 박물관 안에서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판소리만의 형태와 엄격한 규칙을 외국인들도 이해할 수 있게 자유롭게 변용할” 생각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어떻게 변주할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판단은 5개월여 뒤 관객의 몫으로 남겨졌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취미생활이 돈·직업 되니 꿈만 같아요”

    “취미생활이 돈·직업 되니 꿈만 같아요”

    “6~7년간 취미생활로 해 왔던 일이 돈도 되고 직업도 된다니 꿈만 같아요.” 중랑구 면목2동 한지·칠보공예 동아리 회원 16명은 마을기업 출범을 앞두고 “걱정 반 기대 반”이라며 28일 이같이 입을 모았다. 마을기업이란 지역공동체에 산재한 향토·문화·자연자원 등 특화자원을 활용해 주민 주도의 사업을 펼쳐 안정적 소득 및 일자리를 창출하는 마을 단위의 기업이나 지역공동체를 말한다. 동아리 회원들로 구성된 마을기업 탄생은 서울시에서는 처음이다. 주민센터 2층에는 한지·칠보공예 회원들이 다음 달 1일 창업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로비벽면에는 한지로 만든 입체화 10여점이 눈길을 끈다. 전래동화 한편을 보는 듯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한지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가지붕, 울타리, 절구, 메주, 짚신 등이 실물처럼 디테일하게 묘사돼 있다. 한지공예를 하는 이혜연(44) 총무는 “보통 가로 15×20㎝ 크기의 액자그림을 그리는 데 1~2주 걸려요. 우선 밑그림을 그린 뒤 하늘의 구름, 땅의 돌멩이는 물론 널뛰기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일일이 한지를 뜯어 붙여요. 진땀 나는 작업일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지공예를 하는 9명의 주부들은 하나같이 경력 6~7년된 베테랑들이다. 2009년 10월엔 주한일본대사관 초청으로 일본에서 한지&화지 한·일교류전까지 한 실력파다. 이생순씨는 “처음엔 바지의 주름, 사람의 수염, 콧구멍까지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며 “지금은 아이들이 엄마의 직업이 주부가 아니라 한지공예를 하는 예술가라며 자랑스러워해 기운이 난다.”고 뿌듯해했다. 옆방에는 칠보공예 회원 6명이 귀걸이, 반지 등 액세서리 작업에 한창이다. 작업장 한귀퉁이에 전시하는 반지와 귀걸이 등 액세서리는 옥이나 비취로 만들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다 아마추어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작품들이 수두룩했다. 한지공예를 하는 주부들과는 달리 새내기들로 구성돼 있다. 신유진 회장은 “1~2주만 배워도 간단한 액세서리는 금세 만들어요.”라며 “6개월간 테크닉을 배우는 트레이닝과정을 거치면 강의도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칠보공예 회원들은 접시, 명함, 액자, 스탠드, 가구 등 실용적인 공예품들을 많이 만들어 녹색가게나 프리아트마켓을 통해 시중가보다 20% 이상 싸게 판매하며 면목2동 마을기업 홈페이지를 개설, 온라인 판매를 통한 수익 창출에도 나선다. 특히 한지·칠보로 카네이션을 만들어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이벤트를 통한 판로 개척에도 나설 예정이다. 은은한 질감과 여백의 미를 잘 살릴 수 있는 한지와 신비스럽고 고급스러운 색채가 조화를 이룬 칠보로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 상품을 개발, 마을 브랜드로 특화한다는 계획이다. 김영자 마을기업 대표는 “수공예 양성화 프로그램 개설로 작가 발굴을 통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판매 수익금의 10%는 불우이웃돕기와 청소년 장학사업 등 지역복지를 위해 기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마을기업은 5월쯤 서울형 사회적기업을 신청할 계획이다. 글 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B형 간염 TV 공익광고 논란

    대한간학회가 B형 간염 백신과 정기검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말기 간 질환자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한 TV광고를 방영해 논란이 되고 있다. 28일 의료계에 따르면 이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문제의 TV광고는 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가 검진을 소홀히 하다가 황달, 복수 등의 합병증으로 악화되는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B형 간염은 산모와 태아 간의 수직감염이 주요 감염 경로인데도 광고에서는 환자의 태만으로 질환이 악화되는 모습만 묘사함으로써 B형 간염으로 투병 중인 환자들에게 좌절감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광고 방영 이후 간 질환자 모임인 간사랑 동우회 사이트에는 비판글과 광고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간학회는 “일부 광고는 편집을 다시 했지만 이를 중단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WHO&WHAT] 독재자의 만찬

    [WHO&WHAT] 독재자의 만찬

     ‘민주’(民主)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날, ‘독재’(獨裁)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은 단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멋대로 좌우하고 과장된 논리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에게도 ‘독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군사정권에 맞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를 일궈냈다는 자부심,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최장수 독재체제(북한)와 마주하고 있는 현실 등 우리는 독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몰아닥친 ‘재스민 혁명’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십년간 그래온 것처럼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이 ‘찻잔 속 태풍’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빗나갔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과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고, 이젠 국제사회의 개입도 본격화됐다.  가상 인터뷰 ‘WHO&WHAT’의 이번 주인공은 역사 속 인물들이다. 이름 자체가 공포가 되고, 금기어가 됐던 이들. 현대 정치사를 피로 물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악몽’ 그 자체였던 네 명의 독재자들을 만찬장에 초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재스민 혁명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독재돼지 나폴레옹(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식당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살아생전 서로 배신의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도 있었고, 서로 ‘사상적 동지’로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반세기의 시간도 서먹한 분위기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사전에서 바로 튀어 나온 듯한 이들은 같은 자리에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뜩치 않아 보였다.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셋, 군복을 입은 사람이 셋이었다. 앞에 이름표를 놓을 필요조차 없이 얼굴만으로도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뚱, 사담 후세인. 인류 또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났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엔 자기자신의 안위와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찬 이미지만 역사에 남긴 공통점을 가진 이들. 한 사람만 있어도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20세기 정치가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만찬 자리는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전성기 시절 국내외 정치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을 역량을 과시했던 이들에게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강타하고 있는 ‘쟈스민 혁명’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만찬의 주제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독재’인데 말이다.  네 사람의 만남에 적합한 사회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민주화 전문가나 학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을 통제하기엔 늘 역부족이기 마련. 결국 메이너 농장의 절대권력자 나폴레옹(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독재자 돼지)에게 어려운 역할을 부탁했다. 1945년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농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능력이라면 참석자들도 특별한 불만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오웰이 묘사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사람이 돼지인지, 돼지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능수능란하게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본인들의 얘기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늘의 메뉴●  애피타이저 - 당신은 떳떳한가  메인 디시1 -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버렸을까  메인 디시2 - 당신은 부패했나  디저트 - 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애피타이저> 당신은 떳떳한가.   →나폴레옹 인간 세상 최고의 독재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 기쁘다. 나야 동물 100여마리 거느리는 수준이지만, 당신들은 수백만명에서 수억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한 손에 좌우했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이기도 많이 죽였고…. 당신들보다 훨씬 잔혹하거나 무자비한 사람도 없진 않지만, 20세기 이후 독재자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선정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우선 당신들이 지금 이 테이블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부터 묻고 싶다.   히틀러 정당성을 묻는거냐.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원해서 적합한 위치를 맡았을 뿐이다. 내가 총통이 됐을 때 4500만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그중 3800만명이 찬성했다.(히틀러는 1934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은 직후 1시간 만에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통합하고 최고사령관 직까지 합쳐 그 자리에 오른 다음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내가 그 위치에 올랐다는 증거다. 정당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왕들과는 평가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 중에서도 네로나 헤롯 같은 사람이 있었고, 나름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살면서 그 권력을 조금 더 쓰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 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고 성공시킨 레닌이 직접 지목한 정당한 후계자다.(실제로는 레닌이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편지를 공개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막았다. 뿐만아니라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과 역사기록을 조작했다.) 그루지아 출신이라는, 심지어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범 러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대해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독재고 뭐고 간에 아예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총과 칼로만 쿠데타를 일으켜서 최소 몇 년 이상 유지한 사례가 얼마나 될지 지난 100년 간을 꼽아봐라. 처음엔 그렇게 잡더라도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되는 게 정치다.   →나폴레옹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역사에 악인으로 이름을 남긴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듣다보니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요새 연설을 통해 계속 반복하고 있는 논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얘기는 나중에 이어가기로 하고, 최근 전 세계 최고 관심사인 ‘쟈스민 혁명’에 대해 들어봤나.   마오 내용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기분이다. 지난해 12월 한 청년이 분신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 불과 석달 만에 이렇게까지 커지다니. 벌써 두 나라(튀니지·이집트)의 정권이 뒤집혔고 리비아, 시리아, 바레인도 내전이 한창이지 않은가. 난 ‘공산당’을 알리고 ‘혁명 동지’를 모으기 위해 10만여명을 이끌고 1934년 370일 동안 1만 5000㎞를 걸어야했다.(마오는 12개의 지방을 지나고 18개 산맥과 24개 강을 건넜다. 마오의 짐은 두 장의 담요와 홑이불, 외투 한 벌, 책 몇 권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도 15년 이상 지나서야 중국을 세울 수 있었다. 고작 석달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보다 완벽한 혁명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히틀러 거기엔 100% 동감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수단이 있었으면 내가 연설을 일부러 석양무렵에 하면서 다양한 무대장치를 동원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아이디어는 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능력이라는 얘기가 정설이다.) 아! 물론 난 연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국민들을 설득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후세인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딱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 입장에서 쟈스민인지 뭔지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아랍에는 ‘하마’라는 게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시리아의 하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났는데, 정부는 마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다시피 했다.(2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정부는 그 숫자를 본보기 삼아 일부러 널리 공포했다.) 그 이후 ‘하마’는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반항에 대한 응징을 뜻했다. 아랍권에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던 반 체제 인사들은 힘을 잃었고, 일반인들은 조용해졌다. 그게 지금까지 아랍권을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왕정이든 사회주의 체제든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물론 무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영TV와 신문을 장악하고,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세뇌시켰다. 나름 치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나폴레옹 후세인 당신과 카다피가 유난히 비슷한 점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세인 카다피와 나는 소위 말하는 ‘역경의 자식들’이다. 전통적인 아랍사회가 혈통과 명문을 높이 떠받드는 점이 가장 큰 타도의 목표가 됐다는 점에서 일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랍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시되지만 혹시 내 아버지나 카다피의 아버지 이름을 아는가? 뭐 사실 이 만찬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합의나 계급은 무시하고, 아랍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권력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지워버렸다.  <메인디시1>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외면했나.   →나폴레옹 슬슬 본격적인 식사로 들어가보자. 여러분은 다들 수십년에 걸쳐 자기 나라는 물론 주변국가, 나아가 전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독재는 총칼 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는 게 선행돼서 가능했다. 그런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 통치스타일이 변하면서 서서히 독재자가 돼 가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말은 자꾸 바뀌고, 점점 잔혹해지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안듣게 되었는데.   스탈린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내 목표는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내 뜻에 복종해야 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틈만 나면 배신하려 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도 내 목표량에 미달했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모든 농민들이 국가 소유의 조합에 가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들은 재산을 내주는 대신 땅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였다.) 결국 나는 그들을 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됐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철저하게 복수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히틀러 난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대부분 다 지켰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는 본인의 증오 이외에 ‘독일 국민들에게 잘 통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솔직히 내가 세운 모든 계획 중에 딱 하나 틀린 게 있었는데, 바로 전쟁에 졌다는 것이다. 난 거창하게 세계정복 같은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가 받을 수 있을 걸 받자고 얘기했을 뿐이다. (히틀러의 전쟁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영국과 프랑스 양강으로 구분돼 있던 유럽 내에서 독일의 정당한 위치를 인정해 달라는 권리찾기에 가까웠다.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히틀러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독일 사람들은 1933년부터 2차대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내가 제3제국을 이끌던 시기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다면 난 절대로 여기 다른 ‘실패한 독재자’들과 함께 앉아있지 않을거다.   마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공통된 적이 필요했다.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면 당연히 원동력이 필요하고, 그 힘은 밑에서부터 나온다. 히틀러는 그것을 외부(유대인)에서 찾았고, 나와 스탈린은 노동자·농민을 앞세워 인민의 적을 만들어내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공공의 적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당연히 사회적 결집력과 추진력이 떨어지지 않겠나. 난 1950년대 중반에 무조건 억누르기만 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다.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금방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마오는 헝가리에서 검열 완화 이후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모든 의견’을 허용하는 대신 ‘공산당의 입지를 굳히는 의견’만을 허용했다.) 고작 6주간 ‘백화제방·백가쟁명’(쌍백) 정책을 펼쳤는데 불온성을 이유로 잡아들인 사람이 100만명이 넘었다.   →나폴레옹 뭐 결국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국민들이 그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압적인 독재자들로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인 것들 같은데. 국민들이 언제 돌아서는 것을 느꼈나.   스탈린 독재에 대한 대중의 영합은 독재권력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힘들어지면 힘을 잃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일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권이 제시하는 조건이나 삶의 질에 만족하면 그 권력을 지지하지만 그게 안 되면 외면하는 게 국민들의 속성이다. 내 영향력이 다소간 줄어든 것도 ‘산업화’라는 당면과제가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총과 칼이나 숙청, 강제노동 등을 동원하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다. (스탈린은 꾸준한 생산력 증대를 원했고, 만족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이런 것이 독재자와 왕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독재자에게 불리한 점이다. 독재자는 국민들이 실망하면 이를 되돌리기가 군주보다 훨씬 힘들다. 엘리자베스1세 말기에 영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최저였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히틀러 이번 아랍혁명이 ‘빵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식량값 폭등 같은 단편적인 시각에서 볼 수는 없는 문제다. 원래 독재자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고 조금이라고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 입장에서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은 별 의미가 없다. 독재자가 “5년 후에 우리가 이 정도 수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면 반드시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가 뚜렷하게 정책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방하는 제3제국이 명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위기가 찾아오는 거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재정권들이 망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건 왕정 아래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정권을 잡으려는 독재자들은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소리친다. 결국 삶에 찌들어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지만, 결코 그들이 약속한 삶은 만들어낼 수 없다.   후세인 아랍권의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구조적으로 ‘복지독재’라는 희한한 형태가 있어 국민들이 모두 돌아서는 시기를 간단히 전망할 수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왕권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의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은데, 국민들의 삶은 다른 나라보다 풍요롭다. 일자리도 주고 의식주 걱정도 없다. 대학도 보내준다. (아랍의 왕조 체제에서는 가진 자의 수가 극히 제한돼 있고, 이들은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을 띤다. 이들은 국부를 독점하는 만큼 그것을 나눠주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그럼 이 상황을 뒤집어서 민주화가 되고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가진 자의 수가 늘어나면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민주화라는 것은 결국 허상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난 가진 자의 입장에 설 기회가 생긴다.”는 생각만 한다. 결국 ‘기회’라는 게 어느 순간 현재 생활에 대한 불만을 뛰어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메인디시2>당신은 부패했나.   →나폴레옹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로드 액튼 경이 말했다. 독재와 관련된 경구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독재자는 부패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부패가 독재의 종착점인가.   히틀러 진정한 목표가 있는 독재자는 부패할 시간이 없다. 난 채식주의자에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다. 가끔 맥주를 마시기는 하지만, 내 뒤를 아무리 캐봐라. 내가 부정적인 일에 연루됐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심지어 난 평생 두 여자(의붓여동생의 딸인 겔리 라우발, 최후를 같이 했던 에바 브라운)만을 사랑했고, 한명이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만약에 지금 세상처럼 청문회가 있다면 난 무조건 100% 무사 통과다. 오로지 위대한 제3제국을 세우겠다는 목표 이외에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었다. 제3제국이 부패해서 망했다고 말할 수 있나. 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탈린 나 역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이 나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딸 스베틀라나가 나중에 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내 가족들조차도 화려한 옷이나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스탈린은 부인을 잃은 후 스베틀라나를 사실상 ‘어린 퍼스트레이디’로 대접했고, 자식 중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다.) 오로지 대업을 완수하는 것만이 내가 평생을 생각했던 유일한 관심사였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윈스턴 처칠의 부관들은 스탈린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본 중 가장 철두철미하고 명석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나폴레옹 최근 아랍권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은 물론이고 부인이나 아들, 측근들이 부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후세인 당신도 자식 간수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후세인 독재자는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결국에 믿을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 그런데 가족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각자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절대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용서 받는다. (후세인의 큰아들 우다이는 공식 행사에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싸움을 벌이는 등 난폭했다. 정신박약아라는 설도 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 카다피 모두 가족이 문제였고 자식한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결국 ‘부패’의 진정한 원인은 독재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독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1인 중심적인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   마오 아무리 독재라도 권력은 최소한의 시스템이라도 갖추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으로 대놓고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게 부패한 거다. 난 솔직히 주지육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기구를 갖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그의 문화혁명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홍위병은 결국 스스로 부패하고 갈라져 사라져갔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목표를 갖고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을 오로지 지키려는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건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저질이라고 생각한다. 카다피나 북한의 김일성, 저기 앉아있는 후세인이 대표적인 인간들이다.  <디저트>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나폴레옹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카다피가 계속 버티고 있다. 심지어 쟈스민 혁명이 곧 사그라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쟈스민 혁명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히틀러 국민을 장악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연설을 통해 국민을 사로잡았다면 카다피한테는 TV로 보여지는 강력한 모습과 반미 감정몰이가 결정적인 힘을 줬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 결국엔 모든 것이 정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저렇게 폐쇄정책을 고집하겠나. 밖에서 국민들이 정보를 얻기 시작하면 바깥세상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지금까지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결국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럴듯한 꼬임이나 세뇌만으로 할 수 있던 독재의 시대가 끝났다. 결국 총과 칼을 통한 억압만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번에 혁명이 실패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번 떨쳐 일어났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마오 그래도 중국은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리비아가 여러 개의 부족이라서 마지막 한 고비를 넘을 원동력이 부족한 것처럼 중국 역시 민족이 다양하고 워낙 지역도 넓기 때문에 하나로 모으는 추진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아직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들이 뭔가를 추가적으로 기대할 여지가 남았다는 얘기다. 특히 연안지역만 개방해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조금씩 열어가면서 개방과 통제라는 두가지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반면 북한 같은 경우에는 특정지역만 열고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에 경제적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 체제붕괴를 피하기 힘들다.   후세인 내가 보기엔 미국이 얼마나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군사적, 외교적으로 영향력이 절대적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 미국과는 좋은 감정이 아니겠지만, 내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솔직히 대량 살상무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달아서 억지로 쫓아낸 것 아니냐. 이번에도 이집트에는 개입 안하고, 리비아에만 개입하려고 꼼수를 쓰는 모습이라니…. 결국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자기 입맛대로 골라서 이용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민주화니 어쩌니 떠들지만 실제로 국제사회를 독재하고 있는 건 미국이다.   →나폴레옹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의 논리로 무장한 당신들에게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스탈린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평양 시민들을 기억하나. 그 원조가 바로 나다. 내 시신을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수백명이 깔려 죽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방부처리된 시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조문객의 일부가 바리케이드에 부딪히거나 밟혀서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마오 내가 죽은 후 숱한 변화 속에서도 난 중국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톈안먼 광장에 걸려있는 내 초상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마오가 죽은 1976년 그의 문화혁명으로 쌓인 불만이 폭발한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그의 후계자 덩샤오핑은 마오의 문화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한지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책임연구원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 美창조론자 “공룡과 인류가 공존한 증거 찾았다”

    美창조론자 “공룡과 인류가 공존한 증거 찾았다”

    미국의 창조론자들이 공룡과 인류가 공존했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주장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최근 유타주 남동쪽 내추럴브릿지국립공원의 카치나교(Kachina Bridge)에서 발견한 공룡의 암면조각이 공룡과 인류가 공존했다는 증거로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반적으로 공룡은 2억 30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 살았고, 인류는 200만 년 전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손으로 그린 것으로 보이는 암면조각에 쥐라기 후기에 살았던 초식공룡 디플로도쿠스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창조론자들은 고대 인류가 공룡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 센터 미국 페이트빌주립대학 생물학과 교수는 디스커버리 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논란이 된 이미지는 미국대륙에 살던 수 만 년 전 인류가 흙벽이나 돌 표면에 그린 것으로, 대부분 동물이나 사슴 등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그것은 두 그림이 하나로 합쳐져 공룡으로 보이는 것일 뿐, 지금까지의 이론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그림 속 ‘공룡의 다리’로 부분은 뱀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과 단순히 진흙의 쓸림일 뿐이라는 반박 등이 제기됐다. 이 같은 논란은 고생물학회지인 팔레온톨로지아 엘렉트로니카(Palaeontologia Electronica)에 소개됐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황달에 복수’ B형간염 말기 그대로…공익광고 논란

    ‘황달에 복수’ B형간염 말기 그대로…공익광고 논란

    대한간학회가 B형간염 정기검진의 중요성을 알린다는 취지로 제작·방영한 TV광고에 말기 간질환 환자의 모습을 여과없이 노출시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달 방영을 시작한 문제의 TV광고는 정기검진의 중요성을 간과한 한 B형간염 보유자가 황달, 복수 등 합병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직접 보여준 뒤 정기검진과 치료를 통해 다시 건강을 되찾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기검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B형간염이 수직감염 등의 원인으로 악화될 수 있는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광고는 환자의 부주의로 악화되는 모습만 사실적으로 묘사해 환자들에게 악형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불과 악화된 환자가 출연하는 부분은 불과 10여초 밖에 되지 않지만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인 모습이 환자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줄수 있다는 지적이다.  간질환 환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간사랑 동우회 등에는 “우리 아이는 수직감염인데 이 광고를 보고 절망할까 두렵다.”, “노란 눈에 불룩한 배를 표현한 광고 때문에 B형간염 환자에게 편견을 갖게 될지 걱정스럽다”, “광고를 보고 내가 곧바로 죽을 사람 같았다.식은땀이 났다”는 등 비판과 함께 광고를 중단하라는 요청도 올라왔다.  대한간학회는 이 광고가 환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는 있지만, 정기검진을 통해 합병증을 막자는 취로 이해해달라는 입장이다. 광고가 다소 자극적일지라도 인식개선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배시현 교수(서울성모병원 소화기내과)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대한간학회는 만성간염에 의한 간암예방을 위해 B형간염 백신과 정기 검진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라며 “일부 편집을 다시 했지만 광고를 중단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회는 논란을 의식한 듯 복수가 찬 환자를 근접촬영한 장면을 멀리서 잡은 화면으로 교체 편집해 방송하고 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한족 틈에 낀 ‘마이너’들의 삶

    한족 틈에 낀 ‘마이너’들의 삶

    중국 윈난(雲南)성의 까마득한 오지 지눠산(基諾山)에 지눠족이 산다. 중국 정부가 1979년 자국 내 민족 가운데 마지막 56번째로 등록한 소수민족이다. 인구 2만여명에 불과한 ‘초미니’ 민족이다. 지눠족은 해마다 ‘터무커절’(特慕克節) 행사를 연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이자 제사다. 단 하루 열리는 축제는 밤이 깊어갈수록 춤추며 놀던 낮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읊조리는 가운데 화톳불 주변에 모인 주민들은 미망에 사로잡힌 듯 우울해 하다가 급기야 구슬피 울기 시작한다. 그들은 무슨 까닭으로 해마다 눈물의 축제를 여는 걸까. 장샤오쑹(張曉松) 구이저우사범대학 교수 등 4명이 공동 집필한 ‘중국 소수민족의 눈물’(김선자 옮김, 안티쿠스 펴냄)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漢族)의 틈바구니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의 가슴 저린 삶을 따라간다. 원제는 ‘풀뿌리들의 빼어난 노래’란 뜻의 ‘초근절창’(草根絶唱). 제목에서 보듯 소수민족들의 기쁨과 슬픔, 특히 최근 개방과 개발의 혼돈 속에서 정체성마저 위협받는 그들의 위기감이 낱낱이 묘사돼 있다. 지눠족은 예로부터 같은 씨족끼리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다. 연애조차 할 수 없다. 이를 어기고 같은 씨족의 남녀가 동거하면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워낙 외진 탓에 씨족 밖의 외부세계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금기를 깨고 목숨 건 사랑에 도전하는 남녀들도 생겨났다. 이들을 ‘바스’(巴什)라 부른다. 바스들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노래, 또는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뜻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바스들은 내세에서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직접 만든 허리띠 등 정표를 나눈 뒤, 이를 평생 간직하다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함께 묻는다. 이는 ‘관습법의 보호’를 받는 데, 현실의 아내와 남편조차 간섭할 수 없다. 지눠족 사회는 바스들이 회포를 풀 수 있도록 일년에 한 번 기회를 준다. 그날이 바로 터무커절이다. 옛 연인과 마음껏 춤추고 놀다 끝내 우울한 노래를 읊조리며 축제를 마감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책은 또 모계(母系)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는 쓰촨(四川)성 루구호(瀘沽湖)의 모쒀인(摩梭人)과 먀오족의 큰 제사인 고장절(鼓藏節)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서남지역 소수민족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무엇보다 사진을 풍성하게 곁들인 것이 장점. 루셴이 구이저우(貴州)성 사진작가 협회 부회장 등 6명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이 찍은 120컷의 생생한 사진들이 실려 있다. 과장 좀 보태면 윈난성이나 구이저우성의 현실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1만 98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4대강사업은 물관리 종합대책”

    “4대강사업은 물관리 종합대책”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은혜와 존재가치를 일일이 무게를 재어 봐야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김건호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은 23일 ‘물’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무게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물은 우리 삶의 으뜸가는 보물이자 평생 길동무로, 겨레와 후손을 위해 이제 모두 그 가치를 되새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30여년간 공직생활을 해 온 그는 요즘 물 관리 전문기관이요, 공기업인 수자원공사의 수장으로서 경인아라뱃길과 4대강 살리기 등 다양한 국책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국토해양부의 수자원종합계획에 따르면 5년 뒤인 2016년 우리나라가 물 부족 현상을 겪는다는데. -우리나라는 지난 40여년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물 이용량도 6.6배나 증가했다. 그런데 물 부족은 이용량 증가보다는 가뭄시 가용 수자원 부족이 더 큰 문제다. 우리나라의 평상시 가용 수자원량은 평년 779억㎥이나 가뭄이 극대화되면 416억㎥까지 줄어든다. 물 수요량인 358억㎥를 조금 웃돈다. 이런 가용 수자원량도 57%가량이 홍수기에 집중돼 상당량이 바로 바다로 유실된다. 다목적댐 등 저류시설이 중요한 이유다. →시민단체 등 환경론자들은 “정부의 물 부족 전망이 사실관계를 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동안의 가뭄피해에 대한 공식적인 데이터가 정부의 물 부족 전망이 호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지난해 강원 태백지역의 물부족 사태와 같은 극심한 가뭄피해가 과거 13~14년 주기에서 최근 7년으로 단축됐다. 일본 등 선진국은 이미 물 부족에 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부터 권역별 급수체계를 조정해 왔다. 이런 측면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종합적인 물관리 대책으로 시급한 것이다. →4대강 사업 중 보 건설의 근거를 제시한다면. -2006년 수립된 수자원장기종합계획에선 낙동강에서 2016년 기준 1억 4000만t의 물 부족이 발생한다고 전망한다. 전체적으로 10억t의 물부족이 예상되는데 물그릇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보설치로 8억t, 댐 건설과 기존 댐 연결로 2억 5000만t 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건설된 보는 댐과 함께 정보기술(IT)을 적용한 통합시스템에 따라 실시간 수위와 유량이 측정·관리된다. →화학업체 다우의 최고경영자(CEO)인 앤드루 리버리스는 물을 ‘21세기의 석유’로 묘사했다. 수자원공사의 친환경 에너지 사업은. -수력발전소 30곳 등에서 1018㎿ 규모의 청정에너지를 생산, 공급 중이다. 2008년 안동, 장흥 및 성남 소수력 발전을 통해 얻은 탄소배출권을 국내 최초로 네덜란드 ABN암로 은행과 거래해 1억 800 0만원가량의 수익도 거뒀다. 지난해에도 소수력 발전시설에 대한 온실가스 감축실적을 전문업체에 판매, 2억원의 수익을 냈다. →해외 수자원사업에서도 성과를 냈는데. -40여년간 축적한 물관리 경험을 바탕으로 1994년부터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수자원, 수력, 상·하수도 등 물 산업 전반에 걸쳐 18개국 27개 사업을 마무리했다. 현재 7개국 10개 사업을 시행 중이다. 최근에는 투자사업 진출로 다변화하고 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4)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4)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봄이라 하기에는 지독하게도 잔인한 날들이다. 여전히 봄다운 봄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계절을 기다리는 설렘 가운데, 봄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한 건 없지 싶다. 혹독한 추위 속에 이어지는 잔인한 세상살이 탓에 더 그렇다. 모두가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한껏 펼치고 환한 봄 햇살 아래를 오래 걷고 싶은 시절이다. 동백꽃은 추위가 혹독할수록 더 붉게 피어난다. 겨울 꽃으로 알려졌지만, 남쪽의 몇 곳을 제외한 대개의 지역에서 동백꽃을 보려면 아무래도 봄이 돼야 한다.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가장 북쪽 지역인 고창 선운사의 경우, 4월 들어서야 피어날 정도다. ●기묘사화 때 낙향한 선비들이 심은 나무 동백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성마르게 달려간 곳은 전남 나주 왕곡면 송죽리 금사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겨우 조롱조롱 맺힌 꽃봉오리는 여전히 단단한 겨울 침묵에 쌓인 채다. 나무 주위로 떨어진 열매 껍질 조각과 씨앗만 수북하다. 금사정 동백나무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의 삶에 서리서리 맺힌 붉은 한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년 전인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바람이 세상을 휩쓸던 때의 일이다. 급진 개혁을 주창하던 풍운아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의 길로 떠난 뒤, 그를 따르던 선비들에게도 죽음의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들 가운데 이곳 나주 출신의 선비들이 있었다.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 직장 벼슬을 지낸 나일손(逸孫), 생원 정문손(鄭文孫) 등 11명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좌절하게 된 그들은 피바람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금강 11인계를 조직한 그들은 짬짬이 세상 이치를 짚어 보며 훗날을 기약했다. 정자를 지은 건 그들이 낙향하고 10년쯤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정자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선비들의 토론장으로 쓰였다. 정자를 다 지은 그들은 금강결사의 뜻을 따 ‘금사정’(錦社亭)이라 이름 붙이고 정자 앞에 나무를 심었다. 그들이 골라낸 나무는 동백나무였다. 세상이 변한다 하더라도 사철 내내 푸른 동백나무의 잎처럼 뜻을 잃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또 좌절한 그들의 핏빛 한이 언젠가는 동백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담았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11명의 선비들은 채 꿈을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한 그루의 동백나무는 금사정 앞에 듬직하게 서서 옛 선비들의 이루지 못한 뜻을 지켜 왔다. ●독립한 동백나무로는 최초의 천연기념물 나무 줄기 안에 배어있는 선비들의 뜻을 새겨보는 중에 고요한 마을 길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 자동차 2대가 교차할 수 없는 비좁은 마을 길, 금사정 앞에 세운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주 지역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의 기자였다. “작년에는 이맘 때에 활짝 피었는데, 올해는 아직 이르네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꽃 피어나기를 기다려서 찾아 왔죠. 정말 멋지더라고요. 올해도 이 나무 사진을 신문 지면에 소개할까 하고 왔는데, 허탕이네요. 다시 와야죠.” 금사정 동백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15호로 지정된 건 2009년 12월이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건만 독립 노거수로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이 나무가 처음이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던 선비들의 한을 국가가 보상해 주었다는 기쁨이라도 있었던 걸까.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이태 전의 겨울을 지내고 금사정 동백나무는 이듬해 햇살 따스하던 봄날,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고 한다. 동백꽃은 화려한 붉은 빛으로 피어났을 때도 좋지만, 그 못지않게 낙화할 때의 멋도 좋다. 전혀 시들지 않은 붉은 꽃봉오리가 노란 꽃술을 그대로 담은 채 후드득 떨어지는 순간의 놀람은 숨이 멎을 듯하다. 한창 ‘세시봉’으로 주가를 올리는 가수 송창식도 그래서 동백 꽃을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그 꽃’이라고 노래했다. 지금 숱하게 매달린 꽃봉오리들이 모두 꽃을 피우고 후드득 낙화를 마쳤을 때의 장관이 눈앞에 선하다. “나무 좋지! 저 정자를 지키는 사람이 살림채를 짓고 살면서 잘 지켜오다가 집도 허물고 지키던 사람도 떠났지. 금강계에서 관리하는 거야. 계원이 한 열댓 명 될 걸. 그 중에 우리 마을에 사는 계원은 한 명밖에 없어. 원래는 모두 여기 살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다 다른 데로 나갔어.” 꽃샘바람 사이로 살짝 비친 따스한 오후 햇살을 찾아 느린 걸음으로 해바라기 나온 정휴환(83) 노인의 이야기다. 옛 선비들처럼 개혁 정치를 이루기 위한 결사 조직은 아니지만, 여전히 옛 사람들처럼 금강계는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금사정도 여전히 금강계에서 관리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나서, 정자 지킴이가 떠나고 그가 살던 살림채도 허물었다고 한다. ●오래도록 변함없이 이 땅을 지켜갈 나무 정 노인의 이야기에 수시로 들고나는 마을 살림살이의 변화가 성가시다는 듯한 아쉬움이 묻어있다. 나무는 변한 게 없는데, 그를 둘러싼 세상은 쉬지 않고 변했다. 옛사람은 나가고 새사람이 들어온다. 따라서 살림살이도 변했다. 마을 붙박이로 살아온 노인에게 변화는 성가실 뿐이다. 쉼 없이 변하는 사람살이 속에서도 금사정 동백나무는 개혁의 뜻을 잃지 않기로 맹세했던 옛 선비들의 핏빛 다짐을 잊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피처럼 붉은 꽃을 끊임없이 피워낼 것이다.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들은 들고남을 거듭하며 숱한 변화를 일구겠지만, 나무는 오로지 제게 주어진 빛깔과 향기에 맞춤한 모습으로 직수굿이 살아남을 것이다. 안팎으로 잔인하게만 흘러가는 이 계절, 세월 흘러도 이 땅을 아름답게 지켜줄 한 그루의 동백나무가 그래서 더 소중하다. 글 사진 나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길 전남 나주 왕곡면 송죽리 130. 서해안고속국도 무안나들목으로 나와 광주, 나주 방면으로 3.5㎞ 가면 학교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국도 23호선을 타고 11㎞ 가면 후동사거리에 이른다. 신포리 지석묘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8㎞ 쯤 더 간 뒤, 박포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1㎞ 가면 나오는 마을이 송죽리다. 마을 안으로 난 좁은 길로 250m 쯤 가면 마을 끝에 금사정이 나온다. 나무는 금사정 안에 있다.
  • 신씨 수억 계약금說… 출판사 공개거부

    ‘학력 위조 사건’의 장본인 신정아씨의 자전 수필 ‘4001’의 후폭풍이 거세다. 실명이 거론된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은 차기 대선 주자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고 있으나 일단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다. 머리글자로 거론됐지만 ‘성추행범’으로 묘사된 C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C 의원은 법적 대응을 고려 중이라며 발끈했다. ‘4001’을 출간한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는 23일 “출간 첫날인 22일 2만부가 나갔다. 초쇄를 5만부 찍었는데 서점의 주문 물량이 이를 넘어서 오늘 오후부터 2쇄를 찍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신씨에게 수억원의 계약금을 건넸다는 소문과 관련, 안 대표는 “계약금과 인세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공개하지 않기로 (신씨와) 약속했다.”며 밝히기를 거부했다. 이어 “신씨는 새로운 인생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책을 냈지 (인세를 챙겨) 돈을 버는 게 출간 목적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신씨가 다른 출판사를 먼저 접촉했으나 성사되지 않자 ‘폭로 수위’를 높였다는 풍문에 대해서는 “우리(출판사)는 구성이나 편집에 관련된 조언만 했을 뿐, 판매를 위해 전략적으로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출신인 안 대표는 자신이 야권의 386 핵심 인사와 대학 동창이라는 정운찬 전 총리 측의 주장에 대해 “386인 것도 맞고 학생운동을 했던 것도 맞지만 당시엔 대부분 운동권이었다.”며 “이광재, 안희정 등 여러 야권 정치인의 이름이 거론되지만 대학을 같은 시기에 다녔을 뿐,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신씨의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연결됐다.”고만 짤막하게 설명했다. ‘신정아 사건’은 드라마로도 다뤄질 예정이다. MBC에서 오는 5월 방영 예정인 이다해 주연의 ‘미스 리플리’는 신정아 사건이 계기가 됐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카다피 6男 카미스 사망 보도 잇따라

    계속되는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카다피 정부군의 피해도 크다. 카다피의 여섯째 아들 카미스(33)의 신변 이상설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22일(현지시간) 반(反)카다피 매체인 알마나라는 “카미스가 리비아 공군 조종사의 자살 전투기 공격으로 일주일 전에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아랍권 언론 매체인 아라비안 비즈니스 뉴스는 “카다피의 관저인 바브알 아지지야 요새가 폭격당했을 때 카미스가 화상을 입어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황은 다르지만 사망했다는 내용은 같다. 하지만 리비아 정부는 이 같은 사망설을 부인하고 있다. 카미스는 카다피군 가운데서도 가장 정예 부대로 꼽히는 민병대 제32여단, 일명 카미스 여단을 이끌며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반정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왔다. 일부 외신에서는 그를 1983년생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0호에 따르면 1978년으로 돼 있다. 트리폴리 군사학교에서 군사학으로 학위를 받았으며 러시아 프룬제 군사학교에서도 공부했다. 위키리크스는 그에 대해 “카다피 정권을 수호하는 카미스 여단을 이끄는 사령관이자 ‘카다피 정권의 수호자’로 불리며 리비아 군 안에서는 존경받는 사령관”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다른 형제와의 후계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있지만 꾸준히 영향력을 높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리비아 국영TV는 “트리폴리 내 여러 곳이 ‘십자군’의 새로운 공습을 받고 있다.”면서 “이런 공격이 리비아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독일서 잠자던 ‘한국 유물’ 깨어나다

    독일서 잠자던 ‘한국 유물’ 깨어나다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돌아오고 일본에서 조선왕조의궤가 반환될 움직임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독일에 잠들어 있던 한국의 고미술품들이 한자리에 전시된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21일 ‘한국의 재발견-독일 박물관 소장 한국의 보물’전이 독일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독일 소재 10개 박물관에 소장된 6000여점의 한국 유물 가운데 116점을 엄선해 오는 25일부터 2013년 2월까지 쾰른 동아시아미술관,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박물관, 슈투트가르트 린덴박물관 4곳을 순회 전시하는 일정이다. 2009년 논의를 시작해 20개월의 준비 작업을 거쳤다. 대부분 민속품이긴 하지만 수준 높은 작품들도 있다. ‘고려수월관음도’는 쾰른 동아시아미술관 창립자인 아돌프 피셔가 1901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사들인 작품이다. 관음도답게 부처가 쓰고 있는 천이 투명하게 묘사된 것이 고려 불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조선백자 컬렉션은 독일인 무역상들의 손을 통해 독일로 넘어 갔다. 궁중 사람들이 내다 판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5~6세기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걸이, 1794년 제작된 조선시대 8폭병풍, 19세기 말 동경제국대 교수를 지낸 칼 코트셰가 1884년 조선 여행길에 사들인 대동여지도 사본 등도 함께 전시된다. 민영준 교류재단 베를린사무소장은 “유럽에서 이렇게 성대하게 한국 유물을 전시하는 것이나 독일 10개 박물관이 공동으로 참가하는 것 모두 처음이라 독일에서도 역사적 전시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면서 “영어와 독일어 도록도 제작돼 유럽인들에게 한국 유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리비아 내전 국제전 비화… 카다피 “다국적군은 십자군”

    리비아 내전 국제전 비화… 카다피 “다국적군은 십자군”

    다국적군이 19일(현지시간) 오후부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반정부군 거점인 동부 벵가지 등의 주요 군사시설을 목표로 한 공습을 전격 단행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실질적인 공격을 담당했으며 캐나다와 이탈리아도 작전에 일부 참여했다. 이번 작전은 일단 리비아군이 보유한 주요 방공망을 무력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다국적軍 8년만에 아랍권 공격 이번 공습은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아랍권을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 군사개입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데 이어 다국적군이 본격 행동에 나섬으로써 그동안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 진영과 반정부군이 벌이던 내전은 국제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됐다. 이날 오후 6시 45분 프랑스 공군 소속 라팔·미라주 전투기 20여대가 벵가지 인근에서 정부군에 조준사격을 가하면서 ‘오디세이 새벽’ 작전은 시작됐다. 몇 시간 뒤에는 지중해에서 대기하던 미군 잠수함 3척과 미·영 해군 함정 25척이 리비아 영내 방공망 시설들을 목표로 토마호크 미사일 112발을 발사했다. AFP 통신은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 수도 트리폴리 동쪽에서 강한 폭발음이 들렸다고 보도했다. 다국적군은 20일 오전 2시 30분쯤에는 B2 스텔스기를 비롯해 여러 전투기들을 동원해 트리폴리를 공습했다. 일부 포탄은 카다피 관저인 바브 알아지지야 인근에도 떨어졌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벼랑끝 카다피 “무기고 개방할 것” 이번 작전은 미 아프리카 사령부 사령관 카터 햄 대장이 총지휘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이번 작전이 비행금지구역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수도 트리폴리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데 목적을 둔 것이라며 향후 추가 작전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익명을 요구한 미군 관계자가 “리비아군 피해 정도를 아직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리비아 정부군 대공 방어망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국적군은 전력을 속속 보강하고 있다. 캐나다 해군 소속 HMCS샬롯타운 함정이 다국적군에 합류하고 이탈리아가 시칠리아 트라파니기지에 전투기 수십대를 배치했으며 스페인과 덴마크 공군 등도 전투기를 파견하는 등 다른 서방국들도 후속 작전 참여를 위해 합류하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은 리비아 반정부군이 다국적군 공습 다음 날인 20일 벵가지에서 150㎞ 떨어진 아즈다비야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진격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 취재진은 이 도로에서 시신 14구를 직접 봤고, 탱크 14대와 장갑차 20대, 트럭이 파괴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다국적군이 리비아를 전격적으로 공습하자 카다피는 20일 국영 TV를 통해 방송된 전화연설에서 유엔헌장 51조에 따라 침략에 맞서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다국적군 공격을 “리비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공격이자 야만적이고 부당한 침략 행위”라고 비난했으며, 다국적군을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동을 침략한 “십자군”으로 묘사했다. 리비아 관영 자나(JANA)통신은 리비아 정부가 20일부터 100만명 이상에게 무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카다피군, 미스라타 진격 트리폴리 국제공항과 카다피 관저인 바브 알아자지야, 군사시설이 운집한 복합단지 주변에는 19일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 수백명이 모여들었다고 국영TV가 밝혔다. 이 시설들은 모두 프랑스 등 다국적군의 공습 목표물이다. 이들은 녹색 국기를 흔들며 카다피를 찬양하는 응원가를 불렀고 스스로 “인간방패가 되겠다.”고 소리쳤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리비아 정부군도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카다피군이 20일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미스라타 중심가에 진입했다고 보도했다. 현지 주민들은 로이터통신과 전화통화에서 “건물 지붕에 저격수들이 있고 정부군 탱크 4대가 미스라타 시내를 돌고 있는 등 아비규환상태”라면서 “미스라타 항구를 에워싸고 원조물자가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영TV는 트리폴리 부근에서 프랑스군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영국 일간 가디언은 격추된 전투기가 반군에 소속된 미그23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탈리아 뉴스통신 ANSA는 이탈리아인 선원 8명과 인도인 선원 2명, 우크라이나인 선원 1명 등이 승선한 이탈리아 민간 예인선 한척이 전날부터 리비아 당국에 억류돼 있다고 20일 보도했다. 이그나지오 라 루사 이탈리아 국방장관은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발표했다. 강국진·유대근기자 betulo@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자유영혼’ 비트겐슈타인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자유영혼’ 비트겐슈타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듣고 있노라면, 이 어질할 정도로 아름다운 왈츠곡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가 프러시아 군대에 패한 직후에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어렵다. ‘예술의 도시’ 빈이 실은 말러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을 가장 홀대했던 도시라는 사실도. 이런 빈의 이중성을 로베르트 무질은 이렇게 묘사한다. “국가 제도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였지만, 그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다.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지만, 삶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이 시민은 아니었다. 부여된 자유를 매우 엄격하게 행사하는 의회가 존재하지만, 정작 의회의 문은 대개 닫혀 있었다.”(‘특성없는 남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태어난 곳은 바로 여기, 몰락해 가는 제국의 수도이자 신흥 부르주아의 장식적 예술 취미가 극에 달한 도시, 클림트·쉴레·쇤베르크·아돌프 루스 같은 새로운 천재들로 북적거리는, 역설과 파괴와 새로움이 공존하는 세기말의 빈이었다. ●빈, 세기말 제국의 마지막 나날들 비트겐슈타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철강 재벌이자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벌이 그렇듯, 그 역시 자식들의 예술적 삶만은 용납하지 않았고, 그와 갈등하던 큰아들을 비롯해 세 아들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다른 여덟 형제들에 비해 가장 ‘비예술적’이었던 막내 비트겐슈타인은 고등학교 졸업 후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이 과정에서 러셀과 프레게가 제기한 수학적 문제들에 흥미를 느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얼마 후 부친이 사망하고 그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지만, 가난한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에게 유산을 기부하고 본격적으로 논리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을 사로잡았던 문제는 오직 하나, 기만과 허영에 들뜬 부르주아의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 ‘논리-철학 논고’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탄생했다. 죽음을 마주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논리학 책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아주 낯선 형태로 등장하는 윤리학, 미학, 영혼, 인생에 대한 사유의 편린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전장에서 그는 한 손으로 ‘논리-철학 논고’를 집필하는 한편, 다른 한 손에는 늘 톨스토이의 책을 쥐고 있었다. 삶의 의미란 자신의 실천적 일상에 충실한 사람에게만 드러난다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서 중요한 화두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논리-철학 논고’는 논리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삶의 영역들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언어와 세계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작업의 가치는 “문제들이 해결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보여준다.”는 사실에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명제를 구성할 때 그에 상응하는 ‘그림’을 산출한다. 건축가가 떠올리는 청사진처럼,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떤 ‘모델’을 떠올리는 것이다. 물리학의 좌표 체계처럼 하나의 명제는 특정한 논리적 공간을 갖는다. 다시 말해, 어떤 이름이 뜻을 갖는 것은 이름들 간의 논리적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다. 예컨대, ‘장미’라는 이름은 다른 여러 꽃들의 좌표 체계 속의 한 위치로서 규정된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실재를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언어로 ‘모든 것’을 기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언어가 모델을 통해 실재를 기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즉, 언어는 실재를 기술할 수는 있지만 “더 높은 것은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 삶의 의미, 윤리적 가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 바깥에 놓인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은 말해진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에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삶을 사변적인 것으로 대상화하려는 철학적 태도를 비판한다. 삶의 의미는 말해질 수 없고 다만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윤리는 명제들의 체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절,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에 함축된 의미다. 이처럼 삶의 가치는 단지 행위를 통해 ‘보여질’ 수 있을 뿐 말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는 ‘논리-철학 논고’를 버려야 한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라!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바람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이 힘들게 만들어 놓은 ‘사다리’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나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한층 견고하게 지지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조롱으로 오해되었으며, 그가 주목했던 ‘언어의 한계’에 대한 사유는 무시되었다. 모든 오해들에 맞서는 대신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방향 전환을 꾀한다. 빈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 것. 오래지 않아 케임브리지로 돌아가서 자신의 철학적 탐구를 계속했지만, 교사로서의 경험은 후기 저작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저 너 자신을 개선시켜라” 1936년부터 1949년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은 ‘철학적 탐구’는 자신이 밟고 올라가기 위해 만든 ‘논고’라는 사다리를 스스로 버리고 얻은 결과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탐구했던 ‘언어와 실재’의 논리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언어가 사용되는 삶의 맥락 속으로 뛰어든다. 이제 문제는,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실천적인 규칙들과 이런 규칙들로 운용되는 다양한 언어 게임들, 그리고 이런 언어 게임들을 구성하는 여러 삶의 형식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어떤 말의 의미는 결국 그것의 사용에 있다. 삶의 의미가 사는 행위에 있듯이. 언어는 형식적 구조가 아니라 행위라는 깨달음! 이 지점에서 논리학과 윤리학은 구분될 필요가 없어진다. 논리학은 윤리학이다. 나의 논리가 나의 삶인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삶이 바로 나의 논리인 것! 우리는 언어의 한계로 우리를 데려가는 낯선 삶의 실험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언어의 차원을 넘어선 고결하고 종교적인 삶의 형식들, 그 속에서만 언어는 행위가 되고 시(詩)가 되기 때문이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나니, 행위하는 자들은 자신의 삶으로 논리를 구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스승이었지만, 사유의 측면에서 비트겐슈타인과 가장 멀리 있었던 러셀의 묘사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완전하게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열띠고, 지배적인 천재”의 살아 있는 예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천재성’은, 인간은 성실하고 진실해야 하며, 그것이 전부라는 신념의 발현이었다. ●교수이면서도 강단 위 직업적 철학 혐오 그는 강단에서 행해지는 직업적 철학을 혐오했고, 철학교수가 되려는 제자의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물론 그 자신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직을 끝내 사임했다. 이유는 하나. 대학교수이면서 정직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심장한 문제들은 위대한 작가들이 제기해 놓았고, 철학은 단지 그런 문제들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사유를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철학이 오해되는 것에 대해서도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 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 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철학에 덧씌워진 모든 사변적 장식물과 합리적 보정물을 제거해 나가고자 했다. 음악에서 쇤베르크가 했던 것처럼, 건축에서 로스가 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도 가장 기본적인 질문만을 갖고 삶을 돌파해 나간 것이다. “그저 너 자신을 개선시켜라. 그것이 네가 세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동료들과 그 자신에게 반복했던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고향집이 아닌 케임브리지에서 임종을 맞는다. 앞으로 며칠밖에 못 살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그의 대답은 “좋습니다.”였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던 의사 베번 부인에게 남긴 유언은 “그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내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였다. 일체의 지적, 사회적 관습에 의연하게 맞서면서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다그쳤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삶이란 말해질 수 없고 다만 보일 수 있을 뿐인 어떤 것, ‘멋진 예술작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채운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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