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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시론] 집단무의식과 망국병

    일본은 고대 이래 정복과 개척의 역사를 이어왔으며,천황이 모두를 지배한다는 이른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정신으로 새롭게 정복한 무리들을 노예화했었다.일본인의 무의식에는 정복당하는 자는 악이며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정의로 여기는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이따금씩 터지는 일본고관들의 망언은 선거구민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그것이폭발한 것이 1923년 관동대지진이었고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7,000명 정도가 삽과 몽둥이로 무참히 학살당했다. 지난달 도쿄시장 이시하라는 일본 자위대 제1사단 창설 기념식의 축사에서그때의 만행을 미화하며 앞으로 그런 상황이 되면 다시 그럴 것이라는 발언으로 우리를 격분시켰다. 조직화된 대중의 집단무의식은 때로는 악에 의해 조작되기도 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년전 히틀러가 아리안 민족우수론으로 독일인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C.융은 ‘오딘(Odin)’에서 타민족에 대한 차별이 결국 유럽 전역에 피의 강풍으로 인류적 대재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었다.독일인의 집단무의식에는조상 대대로 이어온 피에 물든 ‘오딘’의 신화가 상징하는 대학살의 충동이잠재하고 있었으며 역사는 유태인 600만명 학살 등으로 그의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했다. 차별과 오만은 악의 씨앗이며 역사 이래 타부족,타민족을 차별하면서 만행의 정당화 구실이 돼왔다.최근 한미간에 물의를 빚어낸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도 미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멸시,차별이 근본원인이었을 것이다.역사적 만행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정도에서 그 나라 문명의 발달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자기나라 군대가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고발한 미국 언론인이 표창받았음은 미국인의 역사의식이 그만큼 성숙함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는 많은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잠재하는 왜곡된집단무의식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한번도 없었다.제주 4·3사건의 근본원인은 섬 주민을 멸시하는 의식이었고 거창사건의 비극은 산간벽지의 사람에 대한 군경의 오만 때문이었을 것이다.국군창설 초기 군대에서 일제 군대가 하던 것과 같이 민간인을 지방인으로 호칭하고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72년 대선 당시 공화당의 중진 이효상은 ‘신라 천년의 영광을 위해 경상도사람은 경상도 사람에게 투표합시다’라며 지역차별의 불씨를 지폈다.이 발언은 ‘조조’로 불리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선거전략상 지방간 감정대립공작을 실시하는 시기와 일치하며,계산된 정치공작이었음을 능히 짐작케 한다(청와대비서실,중앙일보 출판부).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결과가 올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융의 예지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그 후에 일어난 5·18 광주학살은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집단무의식에 몸을 맡길 때는 도취감을 수반하여 양심을 마비시키고,“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성경,누가복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일본 극우파는 계속 망언을 되풀이하여 일본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가운데한국 내에서의 차별발언을 비웃고 있다.그런데 우리의 경우,일부 정치인은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정지역에 내려가 고의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국민간에 적대심을 계속 확대 재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종교,교육,법과 언론 등은 추상적인 애국론 보다는 지역차별의 요인을 하나씩 청산하는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현 한국 호적법의 기본틀은 근대화 이후 일본이 제정한 호적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그것은 일종의 노예문서로서 식민지화된 한국인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었다.전 세계에서 호적제도가 남아있는 곳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뿐이다(호적이 만드는 차별,佐藤文明 저,일본 현대서관 발행).초등학교에서부터 반(反)차별 교육을 실시하여 차별식 발언이나 행동을 규제하는법제도도 마련되어야 한다.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내재하는 왜곡된 의식의퇴치가 통일을 위한 첫걸음인 것이다. 金 容 雲 한양대 명예교수·수학
  • [외언내언] 쿠바소년 ‘엘리안’

    구사일생으로 쿠바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6살짜리 한 난민소년에게 미국은물론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미국정부의 쿠바송환 방침에 따라 무장한이민국 특수요원들이 그동안 이 소년을 보호하고 있던 친척집을 급습하여 소년에게 자동소총을 겨누며 구인하는 모습은 살벌하고 섬뜩하다. 양육권이 있는 아버지에게 돌려주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고 하지만 ‘법대로’의 나라 미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엘리안 곤살레스라는 이름의 이 소년에게 어른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닥친 것은 지난해 11월.어머니와 함께 쿠바를 탈출하기 위해 탔던 난민선이난파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잃고 3일만에 혼자 가까스로 구조되면서 세계의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나이 어린 엘리안을 자유의 나라 미국에 살게 해야한다는 마이애미의 친척들은 그의 망명을 신청했고 쿠바는 아버지가 살고있는 쿠바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계속했다.고민끝에 미국 행정부는 불법입국자는 송환한다는 원칙과 엘리안의 양육권은 쿠바에 있는 아버지에게 있다는 판단에 따라 엘리안을 강제구인한 것이다.미국 행정부의 엘리안 송환방침에는 최근들어 지난 59년 카스트로의 공산혁명 이후 40여년간단절됐던 쿠바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깔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법행위에 대한 미국의 대응,특히 불법입국이나 체류에 대한 조치는 무자비할 정도로 강경하다.시위가 매일이다시피 벌어지고 있는 미국이지만 허용된 범위를 벗어난 행위에는 백주 대로에서 몽둥이질하기는 예사이고 기마경찰이 말발굽으로 마구 짓밟기도 한다.지난해 시애틀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와 얼마전 워싱턴의 IMF·IBRD연례회의의 경우에서도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미국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통과여객은 반드시 미국 비자를 받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공항에서만 머문다고비자 없이 들어갔다가는 다음 비행기를 탈때까지 권총을 찬 경호원이 지키는유치장같은 곳에 갇히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불법 입국을 막기위한 조치라는 이유로 어떠한 항변도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하더라도 이번 엘리안의 경우는 미국의 조치가 심했던 것 같다.‘법대로’의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법도 인도적이거나 도덕적인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된다.모든 것을 자신들의 잣대로만 재려는 미국의 우월감도 문제다.쿠바계 미국인들의 항의가 극렬하고 세계인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이유이다..미국 법원의 최종판결이 주목된다. 장정행 논설위원
  • “윤봉길의사 연행 사진은 가짜”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가 의거직후 일본군에 연행돼가는 장면을 보도한 일본신문의 사진은 가짜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상하이 주재 한국총영사관 강효백(姜孝伯)문화담당 영사는 1일 “거사 다음날짜 현지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5월 1일자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에 실린,일본군에 끌려가는 인물은 윤의사가 아니라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다른 외국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강 영사는 “거사직후 윤의사는 일본군경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해 거의 기절한 상태였으므로 모자를 든 채 일본군들과 함께 걸어서 끌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상하이 타임스’는 “그(윤의사)는 일본군경들에 구타당하여 때려 눕혀졌다.주먹질,군화,몽둥이가 그의 몸뚱아리 위로 쏟아졌다.그가 입고 있던 회색양복(grey suit)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는데 땅바닥에 쓰러진채 아무 기척이 없었다.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모습으로놓여 있었다. …잠시후 차 한 대가 나타났다.그 한국인은 머리와 다리가 집어 들려 짐짝처럼 통채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고 당시상황을 보도했다.동일자 ‘차이나 프레스’ 역시 “25세의 윤봉길은 땅바닥에 두 번이나내동댕이쳐졌으며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가다시피 운반되어 일본군사령부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했다.이 신문들의 보도내용은 그동안 윤의사가 의거직후 모자를 든 채 걸어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도한 ‘오사카아사히신문’ 등에 게재된 사진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강 영사는 “일본측이 가짜사진을 게재한 것은 참혹한 모습을 한 윤의사의사진을 게재했을 경우 한국인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한데다 일본군경의 인도적 모습을 선전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강 영사는 지난해 4월 상하이 의대 정형외과 전문가팀 등의 ‘골상학적 비교분석’ 결과를 토대로 이 사진의 가짜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반성과 양보가 민주화합 열쇠

    노동계와 자본계 간의 대립·충돌양상이 송구영신의 사회경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경제의 신탁통치’라고 할 IMF 위기관리 체제하에서 실업의불안과 노동조합활동 자체의 약화와 파괴를 노리는 ‘전임자 무임금’ 주장에 참을성을 잃은 양대 노동조합 조직은 반세기,아니 100년의 한을 딛고 분연히 궐기하고 있다.재벌을 비롯한 기업가집단 역시 더이상은 밀릴 수 없다는 임전무퇴의 자세로 이른바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얼핏보면 그럴듯하면서도 현대세계 노동운동사상 유례가 없는 부도덕한 원칙을 깃발로 내세우며,제밥통을 지키려는데 연연해 있는 국회의원들의 약점을 들먹이며 입법권 행사까지도 돈의 위력에 의해 차단시키려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은 물질 경제적 조건의 공급지원을 받고 있는 의식주체들 간의 사랑과 협력에 의해 가능하며 더 윤택한 발전의 길로 나아간다.근로자는 회사와 가정과 국가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을 가능케 하는 물질경제 생산·창조의 중심주체들이어서 노동기피성향이라는 보편적 인간본성의 원리대로라면 오히려 이들의 노동 고통의 덕택으로 살아가고 있는 주변사람들이 거꾸로 도움을 청하거나 협력·지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개인보다도 선행적 존재자인 사회,그것도 근로자가 탄생하기이전부터 버티고 있는 힘있는 자들의 공동체사회는 자본소유주들의 자의적노동력 지배를 원칙 이전의 철칙으로 묶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근로자들은의식의 주체·생산의 주체라기 보다는 부유계층의 지배수단인 자본을 증식시켜주는 지능을 가진 기계장치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되어 자기의 생산물을 자주적·협의적으로 함께 관리 운용할 수 없는 처지에 있어 왔다. 개인과 공동체의 물질 경제적 삶의 역사는,사람들의 욕망과 수요에 비해 자원과 공급이 언제나 부족하여 대립·갈등과 고통을 주고받으며 충돌하여 왔음을 입증해주고 있다.이런 현상은 인지와 과학수준이 낮았던 과거로 올라갈수록 심하였다.그러니까 생산된 재화를 많이 차지해간 사람이든 빼앗긴 사람이든 과거로 올라갈수록 공정성을 판단하는 지혜의 수준도 낮았고 빈곤의 수준 역시 피차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수준이 높아진 오늘날에 와서는 생산·공급할 수 있는 온갖 재화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에 적절하게 분배하고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갖게 된다면 상당한 수준의 생존·생활상의 수요는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물질조건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어찌하여 세계적 민주사회와 경제선진국임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폭력이 격돌하는 집단 난투극이 아니면 문제해결이 안되는 암둔한 상황을 헤매게 되는 것일까.집단난투극이 빈발하고 또 이 난투극밖에 문제해결의 방법이 없게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사회가 된 원인은 무엇일까. 추정 가능한 요인을 든다면,원천적으로는 개인 모두의 생존적 욕구에 원죄가 있겠으나 사회구조적으로는,장기간의 봉건적 관행과 침략외세에 의한 식민지 노예적 노역강요와 겁탈과 세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보다 중요한 요인은,이 모든 불합리했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우리 사회성원들,특히 지배계층 인간들의 반성적 실천이 거의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공자의 가르침을 핑계삼아(가르침 자체에도 결점이 많았지만) 지배계층의 입맛에 맞게 조작된 유교적 위계질서와 신분제 강행은 사람이사람을 노예로 부려먹고 순종 안하면 때려죽여도 항의가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물질 경제적 소유여부의 선택권이 오로지 소수 지배계층에게 점유된 채 수 백년 수십 세대 동안이나 절대다수의 생산근로자들을 머슴백성으로 짐승처럼 길들여 왔다. 이같은 약점을 잽싸게 이어받아 총칼에 의해 통제의 고삐를 틀어쥔 일제의간악한 통치배들의 노역강제와 수탈,저항에 대한 고문·학살,몽둥이질에 의한 교육과 언론세뇌,이어서 그들에게서 훈련받은 친일 반역세력이 부당한 자산을 그대로 지닌채 지배세력으로 재등장하면서 자신들의 범죄은폐를 위해자주적 근로세력에 대해 오히려 적반하장의 반공 역적몰이를 상시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이 사회의 노동질서와 의식,생산·소유·분배질서를 인도주의적협력과 공정한 원칙보다는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에 따르도록 관행화시켜 놓았다.이제 역사의 왜곡없는 진실인식에서부터 반성·양보·협력하는 올바른 실천의 길을 찾아야할 때이다. [朴智東 광주대교수·언론정보학]
  • 폭력시위자 6명 구속영장

    서울경찰청은 12일 ‘민중대회’ 거리 행진을 하면서 폭력을 휘두른 강모씨(25·외대 4년)와 박모씨(28·전남 고흥) 등 6명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연행된 61명 가운데 56명은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5명은 훈방했다. 강씨 등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역에서 제2차 민중대회에 참가한 뒤 명동 방향으로 행진하다 오후 5시20분쯤 퇴계로 입구 연세빌딩 앞에서 여경 기동대등에 쇠파이프와 몽둥이 등을 휘두르고 질서 유지선을 무너뜨린 혐의를 받고있다. 김재천기자 patrick@
  • 張永達의원 고문경험담

    이근안(李根安)사건과 관련,박처원(朴處源) 전 치안감에 대한 검찰 수사가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17일 국민회의 장영달(張永達)의원이 고문받은 경험담을 털어놓아 시선을 끌었다. 장의원은 이날 ‘차라리 죽여달라고 매달려야 했다’는 제목의 논평에서 “내 청춘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30여차례의 연행과 구류,8년여에 걸친 투옥생활로 독재권력의 형벌에 묻혔고 이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문에 시달렸다”고 말문을 열었다. 고문대인 ‘칠성판’에 누워 고문이 가해지기를 기다려야 했고,두 손과 발이 묶여 허공에 매달린 채 ‘매타작’을 당했다고 말했다.머리에 권총이 겨누어진 채 진술을 강요당했고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구둣발에 짓밟히며 바닥을 기었다고 술회했다. 특히 지난 86년 8월 말에는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처원(朴處源) 당시 경무관의 방으로 직접 끌려가 온갖 회유와 협박,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장의원은 밝혔다. 김대중(金大中) 당시 야당지도자와 ‘연계시키려는 작업’이 실패하자,박씨는 부하들을 시켜 물고문,몽둥이 타작을가했다고 털어놓았다.무지막지하게가해지는 고문에 장의원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소연’까지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장의원은 “고문으로 괴롭힌 자들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지만 독재권력의하수인으로 고문을 자행한 박처원·이근안 등에 대한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이들이 국민 앞에 사죄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유민기자 rm0609@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38)한수산’욕망의 거리’

    연행 인사들은 대략 2박3일 내지 4박5일 코스로 전혀 예기치 못했던 혹독한고통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우선 당사자인 한수산은 이렇게 털어놓는다. “나는 공항에서 눈이 가려졌고,신원을 알 수 없는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에게 양팔과 허리를 ‘달랑 들려져’ 차에 태워졌고,우박처럼 쏟아지는 폭행속에서 승용차 재떨이에 이마를 처박힌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거기서의 며칠 몇 밤을 이제와서 떠올릴 분노조차 나는 가지고 있지않다.도구만은 기억한다.찢기고 부서져 가는 내 알몸 위로 쏟아지던 몽둥이,물,전기,주먹과 발길,매어달림….”(신동아 1987.12)작가에게 시종 추궁한 것은 ”현 정부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었던 데 비하여 정규웅부장에게는 더 한층 가혹했다.수사관은 정부장을 작가 한수산의 배후 조종인물로 설정하고 그 틀에 맞추려는 낌새였다.어느 필화나 그랬듯이 그 구성요건은 필자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배후 조종인물을 가상하고 있다.말하자면 정부장은 반정부적 시각을 가지고 자신이책임지고 있는 신문지상을 통해 한수산으로 하여금 반정부 사상을 사주했다는 식이었다.여기서 끝나면 오히려 간단하다.존재하지도 않는 정부장의 배후 조종세력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을 테고 그 난이도에비례해서 매타작은 더 더욱 심해지기 련이다. 과연 위에 인용한 구절 때문에 이들은 고문을 당해야만 했는지,국가와 사회에 위해를 끼쳤는지에 대한 해답은 곧 필화사건은 원천적으로 불필요하다는인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사건으로 가장 억울했던 인사로는 박정만 시인을 꼽는다.고려원 출판사편집부장으로 작가 한수산을 몇 번 만났다는 사실 때문에 연행된 박시인에게 가해진 고문은 간첩 불고지죄 정도에 해당하는 가혹한 체벌이었다.시인은‘저 쓰라린 세월’이란 시집 ‘후기’에서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이다…광주사태로 민심은 소란하고 힘을 결집할 곳이 없었다.그런데 왜 가십란에도 못 오르는 뭇매가 나를 때리는가.적어도 나는 건강하게 살려고 했던 이 땅의 보통사람에 불과했다”면서 고문의 고통을 시로 읊었다. ”펄펄 끓는 물솥에수건을 적셔/내 몸의 어혈 위에 찜질도 하고…/탕기에선 한밤내 부글부글/죽은이들 끓는 소리/절명하라,절명하라,절명하라/이를 갈다 이를 갈다/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하나 되고”작가 한수산은 “전화번호부 두께의 책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다양한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보다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 극복이 더 힘들었습니다”라고 이 사건을 회고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가끔의 폭음과 10여일씩 자취를 감추는 기행을 저지르다가 1988년 9월 일본으로 떠났다.한수산은 이해 5월 28일 교보문고의 ‘작가와의 대화’에서 “일체의 연재를 중단함과 아울러 TV와 영화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 영상화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어떤 매스컴에도 얼굴을 내놓지 않겠다는 작가로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선언”(이문재의 글)을 한 바 있다. 시인 박정만은 어땠을까.고문 이후 그는 심한 육체적·정신적 공허감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잃은 데다 병마까지 겹쳐 1988년 10월 2일 타계했는데,누구도 박정만 시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설 ‘욕망의 거리’는 80년 5월의 군부독재가 남긴 가장 비인간적인 필화사건의 한 전범으로 남을 만하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재난구조·주차단속등 공무원 체험 책으로 펴내

    “2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목숨을 신속한 대피조치로 구한 공무원들이 있었다” 화제의 주인공들은 전북 농업기술원 소속 김종엽(金鍾燁·38)씨 등 5명으로2명은 퇴직하고 김씨 등 3명은 공직에 남아있다. 행정자치부는 최근 이들의 이야기를 비롯해 지방공무원들이 공무 수행의 일선에서 겪은 체험담 가운데 우수사례 103건을 모아 ‘공직현장 25시’로 묶어 펴냈다. 김씨는 ‘200명의 목숨을 지킨 숨은 이야기’라는 체험담에서 87년 8월에있었던 2박3일의 장수군 4H야영 교육때,중·고생 200여명을 갑작스런 폭우로부터 대피시킨 경험을 담담히 적고 있다.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씨랜드 화재사건을 생각하면 ‘이런 주인공들을 진작 귀감으로 삼았더라면…’이라는안타까움이 그치질 않는다. 긴급대피는 ‘호르륵,호르륵’하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비상’을 외치면서 시작됐다. 야영장인 장수군 번암초등학교 사암분교에서 전북 좌도농악을 한창 배우고있던 중,학교 뒤 장안산에 소나기성 폭우가 쏟아져 삽시간에 불어난 계곡물로 집채만한 바위들이 굴러와 순식간에 학교를 덮칠 기세로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씨 등은 소지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학생들 엉덩이를 몽둥이로 떠밀며 “몸만 빠져나가,창문으로 나가!”라고 다급히 외쳤다.교실의 전깃불이꺼지면서 ”꽝!,꽈광!,꽝!’소리와 함께 학교가 완전히 급류에 휩쓸려버린것은 200여명의 학생들이 맨발과 러닝셔츠 차림으로 뒷산으로 대피한 지 불과 2∼3분쯤 지나서였다. 김씨는 “당시 선배들의 침착하고 따뜻한 보살핌,4H회원들의 신속한 행동이없었더라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참상이 빚어졌을 것”이라며 “씨랜드 화재사고도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책에는 주차단속,체납차량의 번호판 영치 등 공무원이 현장에서 일을 하다 부딪치며 겪는 갖가지 애환,독거노인을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성심성의껏돌보는 사연 등 일선 공무원들의 생생한 일상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일반 배포는 하지 않지만 민원실 등에 비치될 예정이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외언내언] 어느 學兵의 편지

    “어머니.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아마 열명은 될것입니다.네명의 특공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을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제가 사람을 죽이다니요.어머니.무섭습니다.지금 내 옆에는 여러 전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이 적들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엎드려 있습니다. 어머니.오늘 제가 죽을지도 모릅니다.저 많은 공산군이 그냥 물러갈것 같지 않습니다.어머니도 동생들도 다시 못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무서워집니다. 어머니.살고 싶습니다.천주님은 우리 어린 학병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어머니.꼭 살아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1950년 8월 육군 제3사단에 편입되어 포항전투에 투입됐던 학병이우근(李佑根)군이 쓴것이다.그는 당시 18세로 서울 동성중 5학년때 ‘6·25’를 맞았고 곧 군을 따라 피난가다 대구에서 학병으로 참전하게 됐었다. 꼭 살아서 어머니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이군은 편지를 쓰던 날 전사했다.이군은 이 편지를부치지 못한채 주머니 속에 넣고 전투에 나섰던 모양이다.전우들이 총에 맞은 이군을 업고 대대본부로 돌아왔을때 이군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전우들이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고 한다.군번도 계급도 없이 교복을 입은채 총을 잡았던 소년 이군이 “어머니”를 부르며 전사한지 올해로 49주년이 됐다.‘6·25’가 없었다면 이군은 지금 67세의 정정한 노인으로 여생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시인 김지하(金芝河)씨가 회고하는 ‘6·25’도 참으로 비극적이다.그때 겨우 열살이었던 어린 소년은 숙부가 좌익에 의해 총살장으로 끌려가던 날 밤,백부는 월출산에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 인사온것을 보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영산강 변두리에 있던 작은마을로 피난가 있었을때 좌익동네 사람들이 대낮에 옆의 우익동네 마을로 몰려가 우익동네 전직 경찰관의 어린 아기를 몽둥이로 마치 개를 잡듯이 때려죽이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고 회고한다. ‘6·25’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남북문제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엉뚱한지 이해하기 힘들것이다.서해 교전이나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이 다이처럼 참혹했던 ‘6·25’의 깊은 상처와 연관돼 있는 것이다. 임춘웅 논설위원
  • [무대뒤 사람들]문예회관 조명팀장 최형오씨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무대 역시 빛이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하지만너무 가까이 있으면 소중함을 모르듯,정작 무대에 호흡을 불어넣는 조명디자이너도 ‘조명’받지 못하는 분야다. 한국의 대표적 ‘빛장이’인 최형오(40)문예회관 조명팀장.그는 29일까지공연하는 ‘그,불’(손진책 연출)을 비롯해 지난 20년 동안 연극 150편 뮤지컬 40편 무용 300여편에서 ‘남들만 비추며’ 무대를 지켜왔다. “조명은 기술과 예술의 만남입니다.단순한 빛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광선’을 만듭니다.그러나 출발은 몸으로 때우는 단순·막노동이죠.환상을 갖고뛰어드는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대학(서울예술대)새내기 때 맛본 매력은 나이의 절반인 20여년동안 빛만 먹고 살도록 그를 이끌었다.그는 이른바 ‘국내파’지만 감각은 동물적이다.그의 말대로 “밑바닥에서부터 잡초처럼 길러온” 안목은 웬만한 유학파나 이론전문가들도 따라잡기 힘들다.명성황후로 미국 링컨센터에 갔을 때 뉴욕타임스가 “천상에서 내려온 황금빛 조명”“도발적인 에너지”라고 그의 빛에 감탄했을 정도다. “처음엔 그쪽 스태프들이 깔보는 기색을 보이더군요.그러나 제 방식대로수정작업을 하고 도면을 들이미니까 꼼짝 못하더라고요”. 5년전부터 텅 빈 연습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그 감각은그저 얻은 게 아니다.몽둥이가 오갔던 도제 시스템에서,‘빛의 세계’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실신한 일이 있을 만큼 ‘몸으로’ 쌓아온 것이다.아들 둘이 태어날 때 병원에도 못갔다.당연히 자기 고집도 강해 색깔 강한 연출자를 만나면 대판 싸우곤 한다.L씨와 일할 때는 최종 도면을 찢기까지 했다. “대본을 받고 개념을 잡은 뒤 연출자나 다른 스태프의 구상을 참고하고 연습장면을 보면서 기초작업을 마칩니다.우리 현실상 최종 셋업을 하루에 끝내야 하는데 보통 200번의 조명전환이 머리 속에서 왔다갔다 하죠.이때는 누가 뭐라면 욕은 보통이고 재털이도 날아갑니다”. 공연이 시작하면 이틀 동안 물만 마셔 살이 찌지 않는다는 최팀장.하지만그는 “늘 새로운 일을 하니 늙지 않아서 좋고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니 스스로도 흐뭇하죠”라며 웃는다. “무대·조명·음향파트를 단순기능으로만 인식하는 관행이 빨리 깨져야 합니다.행정이나 스타급 배우·연출자만 중요시하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공연예술의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습니다.현실적으로 제일 아쉬운 것은 극장스태프를 외국에 보내 재교육하는 프로그램 마저 없다는 겁니다”. 이종수기자
  • ‘대화, 세기를 넘어서’ KBS1 네번째 편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우리 사회의 원로에게 20세기에 한국이 거쳐온 길과 21세기의 나아갈 방향을 알아보는 토크프로 KBS1‘대화 세기를 넘어서’가 화제다. 늦은 밤 11시 45분에 방송되지만 지난달 6일 첫방송 이래 재방송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지금까지 3차례 방송된 것을 7일부터 3일간 매일 오전 11시 특별앙코르 방송한다.첫회에는 수학자이자 한일문화비교론의 권위자인 김용운교수가,두번째는 한국상고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학술원 최고령회원 최태영옹이,세번째는 이돈명 인권변호사가 각각 출연해 자신이 겪은 일화와 미래의 비전을 펼쳐보였다. 3일 방송되는 네번째 프로의 주인공은 판소리 명창 박동진옹(83)이다.무대에선 능란한 말솜씨와 재담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하지만 무대밖에선 말을 아끼는 박옹은 “한국이 21세기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선 정직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일제 때 일본어로 판소리를 하라는 협박을 받았고 이를 거부하다 경찰서에끌려가 몽둥이로 맞았던 일을 털어놓는다.45년 광복되기 며칠전,탄광 징용자를 위한 일본위문공연에서 일본을 놀부심보에 비유,억눌린 민족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밝힌다. 판소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옹은 미수(米壽)를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그는 ‘끊임없는노력’이 비결이라고 말한다.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3∼4시간씩 연습하고 있으며 판소리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모든 판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외우는 일을 되풀이한다.박옹은 “판소리와 우리 음악은 물론 우리의 언어와 정서,사는 방식 등 우리 것에 대한 확실한 교육과 인식없이는 21세기에도‘힘겨운 싸움’을 펼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남주기자 yukyung@
  • ‘99 자랑스런 공무원-金鎭星 용인시 기흥읍장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장 김진성(金鎭星·53)씨는 동료들 사이에서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연구하는 공무원’으로 통한다.업무에 대해서는 맺고 끊음이 분명하면서 국민의 혈세를 아끼기 위해서는 연구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지난 97년 7월 용인시 청소과장 재직 시절 김씨는 3만5,264t의 축산 분뇨침전물 쓰레기를 처리하면서 고심하게 됐다.냄새나고 질척거리는 이 쓰레기를 김포매립지로 운반해 처리하려면 80억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소각,용역업체 하청 등 여러 방법을 강구한 끝에 용인시 매립장에묻기로 결정했다.문제는 어떤 비율로 분뇨와 흙을 섞어야 질척거리지도 않고 흙은 적게 들어 경제성도 있는 복토(覆土)용 토사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김씨는 환경전문업체의 자문을 받아 수십 차례 배합실험을 거친 끝에분뇨 침전물과 흙을 1:8로 섞으면 경제성과 실용성을 가진 최적의 복토용 토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분뇨가 주위로 흐르지 않도록 고무판을깔고 위는 비닐으로 덮는 등 오염 방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방법은 찾았지만 정작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비용을 줄이기위해 청소차를 작업에 동원하기로 했지만 직원들은 아침에 청소작업을 하고다시 분뇨 쓰레기 처리 작업에 동원되는데 강력히 반발했다.김씨는 아침 저녁으로 직장과 술자리에서 직원들을 설득,마침내 직원들도 ‘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마음을 돌리게 됐다.“마음을 바꾼 뒤엔 불평없이 묵묵히일해 준 직원들이 고맙습니다”면서 김씨는 공을 직원들에게 돌렸다.자신도공사기간 동안 매립장에 살다시피하는 바람에 가족들까지 냄새 난다고 슬슬피했다면서 김씨는 웃음을 지었다. 지난 74년 용인시 9급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뒤 25년간 교통·감찰 등다양한 공직에서 일해 온 김씨는 그 동안 공무원의 업무환경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말한다.김씨는 “지난 97년에 쓰레기 매립장과 소각장을 건설하면서반대하는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올 때는 그만두고 싶었다”고 토로했다.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김씨는 소박한 꿈을 지켜나가고 있다.“명예하나 바라보고 사는 직업아닙니까.그만두는 날까지 원칙을 지키며 최선을다하겠습니다.”장택동기자 taecks@
  • [역경을 딛고…]고대에 10억기증 崔丙順할머니 육필수기(4)

    순탄할 듯 보였던 인생을 풍비박산낸 것은 이념과 전쟁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작은아버지가 경기고녀에 입학한 딸을 나에게맡겼다.나는 이 때 하숙집을 남자하숙으로 바꾸었는데 기생들의 생활이 조카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이것이 화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얼마쯤 뒤 숙부가 사업자금을 부탁해왔다.집을 70만원에 팔아 20만원으로전세를 얻고 남은 돈을 드렸다.마침 남자들 하숙이 불편한 점이 많아 장사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48년 겨울 어느날이었다.갑자기 순사들이 들이닥치더니 ‘빨갱이 주모자를숨겨주었다’면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순사들은 “빨갱이를 먹여살리더니 집을 팔아 정치자금을 댔다”며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다.황당했다.게다가 있지도 않은 정치자금 150만원과 권총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그런 일이 없다고 버티자 순사들은 악질을 만났다며 회유를 하기도 했다.40여일간 취조를 하더니 트럭을 태워 춘천으로 보냈다.차에는 나 말고도 수십명의 ‘빨갱이’들이 타고 있었다.몹시도 추웠던 그해겨울,잠도 못자고 가는동안 내내 차멀미를 했다.춘천에 도착해 철창에 기대어 졸았더니 간수는 그엄동설한에 나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사찰계 주임이라는 사람에게 불려나가 취조를 당했다.십수일간 취조를 당한 뒤 무죄석방이 됐다.내가 빨갱이를 하숙으로 받았는 데다 그 남자의 부인이 ‘최진순’이었는데 이름이 비슷해 내가 부인의 동생쯤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너무도 억울해 유치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집에 돌아와보니 다 도둑맞고 집은 아수라장이었다.서럽고 분한 마음에 조카딸만 나무랐다.장사라도 해보려고 숙부에게 돈을 되받아 가게를 얻으러 다니다 알고 지내던 순사를 만났다.예전에 인사동 집 근처에 파출소가 있어 평소 순사들을 잘 대해 주었고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다.그 순사가 목이 좋은가게가 있다길래 60만원에 계약을 했는데 알고보니 사기였다.실제 점포 주인이 나타나 명도 소송을 낸 것이다. 쌀 한말이 몇푼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엄청나게 큰 돈을 날릴 판이어서나도 이의신청을 내고 법적 절차를 밟았다. 돈도 날리고 가게도 낼 수 없던 터라 마포로,자하문 밖으로 돌아다니며 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있던 중 6·25가 터졌다.서울이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고모두들 숨죽여 살고 있는데 몇개월 지나니 국군이 되돌아왔다.경찰은 공산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며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내가 또 끌려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순사가 와서는 다짜고짜 동대문서에 가두었다.몇주 뒤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는데 감방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지하실에 끌려갔는데 “누구 순사를 아느냐”고 물었다.나에게 사기를 친 순사이길래 “안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사형을 언도했다.그 순사를 밀고했다는 게 이유였다.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산군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서 대전으로,부산으로 이감됐다.이송되는 나흘 동안 물 한방울 먹지도 못하고 화물차에 실려갔다.열차에는 죄수만 탔다.사람을 포개고 포개 한 열차에 다 태웠다.굶어 죽고,깔려 죽고 정차역마다 죽은 시체만 한무더기였다.특히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끼니로 주는 한 움큼의 생쌀도 못얻어먹었지만 나는 목숨이 질긴지 살아남았다.‘죽어서는 안된다’는 의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신세대도 교육적 체벌은 감수”

    “교육적인 체벌은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더욱 원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서울 중대부고 2학년 鄭多禧양(17)은 24일 교육적으로 필요하면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눈길을 끌었다.鄭양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회장 金玟河)가 ‘교육적 체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날 오후 여의도 사학연금관리공단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학생들도 체벌의 필요성은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하지만 체벌의 방법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鄭양은 “요즘 학생들은 과거의 학생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중요하다”고 지적했다.이른바 ‘신세대’들은 개성을 중시하고 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이 때문에 체벌은 반드시 교사와 학생,학부모 등 모두가 공감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벌이 필요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의 구체적인 예도 들었다.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다른 학생을 괴롭혔을 때,음주나 흡연 등 비행을 저질렀을 때,교사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거나 반항했을 때 등은 체벌 대상이다. 반면 시험을 못봤을 때,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 가해지는 체벌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공동체 의식’이라는 명목으로 단체 기합을 주는 것도 불공평하게 느낀다고 설명했다. 손이나 발을 이용한 체벌은 감정에 치우치는 수가 많기 때문에 자제해 줄것을 당부했다.‘사랑의 매’라 하더라도 몽둥이나 걸레자루의 사용은 피해달라고 주문했다.학생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은 반감을 살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회에서 참석자 대부분은 교육상 불가피한 체벌은 허용해야 한다고입을 모았다. 다만 체벌의 기준과 방법에 있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일부는 학교 내부적으로 체벌 규정을 만들어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체벌의 사유와 절차,종류,체벌권자,장소,도구,횟수,신체 부위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 굄돌-교사의 체벌

    얼마전 고등학교 선생님이 불성실한 학습태도를 보인 학생의 뺨을 몇차례때리자 학생이 선생님을 경찰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세상에 알려지면서 체벌에 저항한 학생 사건이 사회문제화됐다.사회여론 재판은 교권에 대한 부당한 저항이라는 ‘판결’을 내렸다.교육당국은 교권수호를 위하여 교사들의 적당한 체벌행위를 합법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교사들의 학생체벌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초·중·고등학교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이다.교사와 학무모간에 학생체벌로 인한 갈등이 여러번 사회문제화돼 왔다.그 때마다 선생님의 교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왔다. 우리는 지금 자유와 평화를 이념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개개인의 인권을가장 소중한 가치로 믿고 살고 있다.그런데 학생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직도 학교 교실에서 잘못한 학생의 뺨을 때리거나 주먹으로 구타하고 심지어는 야구방망이와 같은 몽둥이로 때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여학생의 경우 머리채를 잡기도 한다고 한다.폭력적 체벌과 인격 모욕,폭언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폭력행위들은 설사 숭고한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이것은 교육이전의 문제라고생각한다. 필자도 체벌에 의한 교육적 효과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그러나 모든 세상이 변하고 발전한 만큼 교육방법도 발전적으로 변해야 한다. 무조건적 복종심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교육방법에서 스승의 사랑과 학생의존경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이해를 통한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물리적 체벌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교육방법에서 과학적이고 보다 합리적인 민주교육방법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 IMF시대 인기직종 경찰공무원(6회)-두얼굴의 경찰像

    “민중의 지팡이에서 몽둥이를 든 비리 경찰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경찰생활 20여년째를 맞은 한 경찰간부의 말이다.한해에 5,000여명의 ‘새내기 경찰’이 밀려들면서 경찰의 두 얼굴과 윤리관은 새삼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그렇지 않아도 각종 부조리와 사고로 바람 잘 날 없는 경찰사회에서 신참내기 가운데 누가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찰청장 보좌관인 金重謙 경무관은 “눈앞의 자그마한 검은 돈에 현혹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승진 경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승진이야말로부패를 막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순경이 받는 검은 돈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많게는 수백만원씩 받는 경우도 있지만,대부분은 업소로부터 인사치레로1만∼2만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런 많지 않은 돈에 명예와 양심을팔지 말라는 것이다. 경찰청 치안연구소의 李모경정은 순경으로 출발한 지 22년만에 경정으로 진급,한달 평균 280여만원을 받는다.경찰생활을 함께 시작한 동료 가운데는 아직 경장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도 많고 그들의월급은 계급이 낮은 만큼 적을 수밖에 없다.승진이야말로 돈과 명예를 버는 지름길이란 얘기다. 李경정은 시험 승진을 거듭한 노력파에 속한다.그는 4년 뒤면 총경을 달고일선 경찰서장으로 나갈 꿈에 부풀어 있다.그는 누구나 부조리를 저지르지않고 노력하면 신참내기 때의 꿈인 서장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검은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경찰의 변화 조짐도 없지 않다.경찰의 선호부서는 뒷거래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형사·조사·교통분야에서 최근들어 파출소로 바뀌고 있다.서울 남대문경찰서 역전파출소의 鄭鍾泰소장(경위)은 “요즘들어 파출소 근무를 희망하는 경찰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수당이 비교적 많은 파출소 근무로 검은 돈을 물리치겠다는 생각들인 것이다.여기에는 사정(司正)기능의 강화 탓도 없지 않다. 경찰의 부정부패는 ‘이정도쯤이야’라는 데서 비롯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그리고 ‘뭘 모르는 철부지 취급이 싫어서’ 또는 ‘썩은 세상에 혼자 맞서봤자’란 생각에 부조리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두번의 일선 서장을 거친 경찰청金相奐 교육과장(총경)은 “새내기 경찰들은 고급인력이 많아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고 평가하고 “하지만 검은 돈을 한번 받으면 영원히 부조리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고 강조했다.경찰이 바로 서느냐,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는 경찰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아울러 지팡이로 자리매김하려면 친절은 부정부패 추방 못지 않은 덕목으로 꼽힌다.그래서 경찰헌장은 1조에 친절,2조에 깨끗한 경찰상을 규정하고 있다.李志運 崔麗京jj@
  • 민주열사 열전:8/金永哲 5·18시민군기획실장(정직한역사되찾기)

    ◎‘광주 고통’안고 18년 투병끝 숨져/‘투사회보’ 제작… 계엄군 잔학상 시민에 알려/좌수족 마비·정신질환 앓다 지난 8월 영면 5·18 광주 민중항쟁도 18년이 지난 올 8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 5월 추모탑 앞에서 ‘5월 시민군’ 金永哲 열사의 민주시민장이 치러졌다. 영결식에서 시인 文炳蘭은 영면한 고인을 다음과 같은 조시로 추모했다. …여기 한 사나이는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앓으며 살았다 18년을 죽으며 모질게 살았다. …꽃도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이 흐르는 정신병동 쇠창살에 18년을 죽어온 당신의 신음소리는 18년을 앓아온 광주의 고통이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 투쟁위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던 金永哲은 계엄군 진압대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질환 초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대부분을 가족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지내야 했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많은 무고한 인명을 비롯해 숱한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에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가했다.이들은 32세의 金永哲을 18년간의 정신병동 폐인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金永哲은 광주항쟁의 시민군 기획실장 이전에 최하층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빈민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먼저 빛난다.의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후 어머니가 고아원 보모를 하게 되어 목포의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성장했다.지역 명문인 광주 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5급 공무원이 됐다.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하고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다. 군복무를 마친 金永哲은 신문배달 과일행상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결혼한 지 1년도 못된 77년 부터 광주의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와 주민들과 직접 부딪혔다.시가 피난민 부랑민들에게 지어준 후 판자촌이나 다름없게 황폐해진 이곳에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마을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를 이끌었으며 신용 협동조합을 정립하고 아파트의 개조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빈민들 삶 개선위해 혼신 78년 7월 이곳 빈곤 청소년들을 상대로 尹祥源과 朴寬賢 등 전남대생들이 강학으로 나선 ‘들불’야학이 시작되고 金永哲은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이 야학의 교장이 됐다. 80년 5·18이 터지자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金永哲은 19일 저녁부터 尹祥源 등 들불야학 팀과 논의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는 ‘투사회보’제작에 나선다.투사회보는 광주시민들이 한데 뭉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으며 고아로서 金永哲과 의형제를 맺고 같이 살던 박용준과 광천동 야학생들이 제작과 배포에 중요한 역을 맡았다.20일 金永哲은 금남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이 부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좌수족 불구로 고생했다. 金永哲은 22일 자신이 신용조합 참사로 있던 YWCA의 여성 회원들과 함께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사와 수천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이 가슴에 달도록 했다.그는 계엄군이 철수한 후 열린 23일의 1차 시민궐기대회에서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계엄군에게 무기반납을 주장해오던 기존 수습위가 물러나고 25일 金宗培·尹祥源 등이 주도하는 새 시민학생 투쟁위가 도청에 들어서자 金永哲은 조직 업무를 총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도청출입 통제,무기 및 보급품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일을 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해온 27일 새벽 金永哲은 尹祥源 등과 도청을 사수하다 尹祥源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계엄군에 체포됐다. ○간첩으로 몰려 자살 시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계엄수사대가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자신을 간첩으로 몰고 가자 다시 자살을 결심한다.그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여러 차례 찍었다.이를 발견한 헌병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젖은 金永哲을 군화발로 밟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다.그리고 나서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으로 묶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그러나 수술한 이마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왔다.심한 환각과 환청 증세에 시달리며 80년 10월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金永哲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의 통증을 참지 못해 엉엉 울면서 사방에 머리를 찧고 이상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정신질환자였다.석방된 뒤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정신이상 증세가 더욱 심해져 84년부터 나주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그러나 끝내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8월16일 세상을 떴다. ◎金永哲 열사 연보 1948년 전남 순천 출생 55년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64년 광주서중 졸업,광주일고 입학 68년 5급 지방 공무원 76년 결혼 77년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운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80년 5·18 ‘투사회보’제작 참여,시민학생 투쟁위 기획실장 80년 10월 ‘내란중요임무 종사’혐의로 1심 12년 선고 81년 12월 특사 석방 84년 나주정신병원 입원 98년 8월16일 영면 ◎부인 金順子 여사/병수발 18년… 세자녀 키우느라 안해본 일 없어/“야학교장 등 즐겁고 보람된 생활 못내 그리워” 金永哲 열사가 계엄군에 끌려갈 때 당시 26세였던 부인 金順子 여사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버지가 상무대에 갇혀 있을 때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 고3이고 그 위의 1남1녀는 나란히 대학2년생이다.18년간 정신이상의 남편을 병수발하면서 없는 살림에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金여사는 안해본 일이 없다. 우유배달원,구멍가게,옥수수 행상,과일·채소장사,공장 일,파출부,사글세 음식점 등. “병원에 10여년 입원했었지만 최근에야 정부로부터 기초적인 의료지원을 받았다.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 카드도 뒤늦게 발급됐다”고 부인은 말한다.이번 민주시민장도 조의금으로 치러야 했다고 한다. 자녀들과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면서도 金여사는 80년 당시 남편이 ‘광천동 삼화신협 이사장,새마을 지도자,반장,조기 축구회 회장,야학 교장’ 등으로 활동하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못내 그립다고 말한다. ◎吳壽成 전남대 교수가 분석한 정신손상 유형/기질적 장애­총상·몽둥이 등에 머리다쳐 사고기능 단계적으로 와해/정신분열증­계엄군에 무차별 폭행 당해.감정 통제·현실적 판단 마비/외상후 스트레스­공수대원 고문 후유증으로 군인 공포·모든 일에 무관심 5·18 항쟁의 진압이 잔혹했던 만큼 金永哲 열사 같은 참혹한 정신 손상자들이 많다.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吳壽成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5·18로 인한 정신장애는 3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기질(器質)적 정신장애로 항쟁 와중에 직접적으로 두뇌에 총상을 입었거나 개머리판이나 몽둥이에 머리를 다쳐 뇌의 손상을 갖게 된 경우로 金永哲 열사가 대표적 사례다.그의 병증은 외상(外傷)성 성격장애,정신분열증,간질 및 뇌수종에 의한 기질적 정신장애,기질적 정신병으로 심화됐다.한 마디로 인간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사고기능이 와해되어 있고 사고 자체가 지리멸렬된 상태다. 두번째는 정신분열증.5·18 당시 아침운동을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밖에 나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붙들려 눈을 가리운 채 지하실로 끌려간 시민이 있었다.깜깜한 속에서 여러날 전신을 구타당한 뒤 승용차에 태워져 외곽도로에 버려졌다.그후 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고 집에 있으면 무섭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날 후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곤 했다.집안 사람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말에 조리가 없으며 연상 장애,비현실적 판단이 두드러진다. 세번째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시위대에 참가했던 한 시민은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깨어나 보니 여러 명이 같이 손을 묶인 상태로 고개를 땅에 처박힌 채 군화발에 차이고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같이 있던 사람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조사과정에서 무수히 맞아서 이빨이 나가고 코뼈가 부러졌다.20여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7개월 동안 몸져 누웠고 10여년 동안 직장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당시의 일이 자꾸 기억나고 같이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군용트럭의 군인들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직도 두려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 ‘철의 노동자’ 꽃다지(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8)

    ◎노동가요­대중 묶어준 ‘노래패’/노동자들의 애환 서정적 선율에 담아 합법성 인정받으려 공륜과 힘겨운 싸움/첫 앨범 ‘가사변경’ 장벽 뚫고 원안수록 감격/‘희망의 노래’ 보안법위반 시비는 시대착오 노동자 집회나 대학가 시위에선 반드시 노동가요와 민중가요가 불려지게 마련이다.이 노동가요와 민중가요만을 보급해오고 있는 전문 노래패 ‘꽃다지’는 일반인들에겐 조금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하지만 웬만한 노동가요와 민중가요치고 이들의 작품이 아닌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꽃다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이처럼 큰 성과 뒤에는 눈물겨운 투쟁이 숨어 있다. 이 단체가 정식 출범한 것은 지난 92년 3월.하지만 그 뿌리는 전국에서 민주노조 결성을 위한 총파업이 거행되던 87년 7월부터 9월까지 현장 문예운동의 첨단에 섰던 두 노래패로 거슬러 올라간다.노동자노래단(노노단)과 대학 노래패 출신들의 모임인 예울림이 그것. 당시만 해도 노동가요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주로 학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그러나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입에 올려지던 관념적인 이 노래들은 구사대가 몽둥이를 휘두르던 급박한 상황엔 맞지 않았다.노동가요의 대표적 작곡가로 노노단에서 노래운동을 벌이던 金호철씨와 현재 아라리요민요연구회 대표인 金애영씨가 ‘파업가’‘노동조합가’‘민주노조사수가’ 등을 만든 게 이때다. 88년 가을 ‘총파업가’를 실은 비합법 테이프는 만든지 3∼4개월만에 20만개가 팔려나갔다.방송을 타지 않았는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주문이 쇄도해 매일 밤을 새면서 만들어내야 할 정도였다.이때부터 ‘운동권 노래’는 학생운동,지식인 위주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이후 만들어진 89년의 ‘단결투쟁가’와 91년의 ‘철의 노동자’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레퍼터리다. 그러나 90년 전노협이 결성되고 민자당이 출범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고 노동자집회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이전의 투쟁가와는 달리 생활공간에서 불려질 수 있는 서정적인 노동가요의 필요성이 부각됐다.그래서 노동자노래단과 예울림이 합쳐진 게 바로 ‘꽃다지’다.노노단과 예울림에서 모두 33명이 활동을 시작한다.그러나 이들의 노래가 합법적으로 불려지기에는 상황이 너무 험했다.92년과 93년 사이에 각각 15곡씩이 실린 테이프 1·2집을 내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이나 노동집회현장에 내다 팔았다.이렇게 구전되던 이들의 노래는 마침내 94년 첫 공식음반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꽃다지’는 이 첫 음반으로 뼈아픈 사연을 겪게 된다.공윤 심의에 15곡을 올렸는데 4곡을 빼곤 모두 반려됐다.가사를 바꿔 내라는 것이었다.15곡은 6개월전부터 2,000여명의 현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선곡한 것들.공륜을 찾아가 항의했다.“풀뿌리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문민정부의 모순이 불거진 것이지요.수십만명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바꾸라는 것은 대중정서를 훼손하는 우스운 짓입니다.심의 싸움은 사실상 음반회사의 몫이지만 그때 분위기상 음반사 입장에서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려 했고 어쩔수 없이 우리가 투쟁에 나섰습니다”(꽃다지 대표 李銀珍·33). 재심의가 열렸다.이번엔 ‘단결투쟁가’ 한곡만 빼면 통과시키겠다는 양보를 얻어냈다.‘단결투쟁가’는 그 당시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노래.문화평론가들의 자문을 구해 소견서를 첨부해 제출하며 ‘단결투쟁가’를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맞섰다.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모든 노래가 실릴 수 있게 됐다.그래서 나온게 94년 5월 노동절에 맞춰 선을 보인 첫 음반이다.‘꽃다지’ 창립 1년만의 일이다. 노래는 흔히 불려졌지만 이들의 무대는 좁았다.첫 음반이 나오기 한 달 전에야 처음 공식적인 무대에 설 수 있었다.민노총이 주최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공연이 그것이다.여러 노래패의 연합공연이긴 하지만 꽃다지로선 의미있는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이후 전국의 대학 강당과 소극장,운동장,공원등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그러던중 96년 대표가 구속되는 위기를 만나게 된다. 대표 李銀珍씨는 연세대 재학시절부터 노래운동에 뛰어든 전문가.90년 전노협 노래책 ‘진짜 노동자’와 92년부터 민맥출판사에 펴낸 노래책 ‘희망의 노래’ 4집의 선곡·감수를 맡았다.그런데 이 ‘희망의 노래’가 국가보안법에 걸려들었다.노래 가사가 북한의 노선과 맞물린다는 이유였다. 96년 2월 장안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갇혔다.이기간 내내 꽃다지 회원들은 매일 낮 12시 탑골공원에서 시위를 벌였고 李씨는 결국 50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8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흔히 불려져 음반으로 발표됐던 노래들을 문제삼은 것은 시대착오적인 조치였다고 봅니다.6월 민주화항쟁을 담은 노래마저도 문제시됐는데 그렇다면 6월항쟁도 불법이란 말인가요.합법적으로 나와 유통되던 노래책을 뒤늦게 묶는 조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李銀珍 대표) 지난해 낸 2집 음반과 싱글음반은 모두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했다.지금까지 3집에 걸쳐 음반을 내면서 전국에서 가진 크고 작은 공연만도 1,800여회.방송에서도 이들의 노래는 드문드문 들려진다.전국의 노래패중 가장 많은 가수와 연주자,기획자를 확보한채 활발하게 움직이는 전문 노래패이기도 하다.“이젠 집회나 대학축제때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적인 노래를 벗어나 안방과 일반 모임에서도 불려지는 레퍼터리로 정착해야 합니다.노동가요와 민중가요가 거부감없이 입에 올려질 정도로 노래와 일반인들의 인식이 모두 성숙했습니다.시민들이 스스로 문화의 장르를 찾는 능력이 쌓일때 문화는 성숙해가는 게 아닐까요”(李銀珍 대표) ◎금지된 사연들/대중화된 노래 가사 바꾸라니…/1집 대부분 방송금지 ‘족쇄’/‘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서정성 극치 ‘꽃다지’의 레퍼터리는 급박한 시위현장의 합창이 전부인가.87년 노동자 총파업 속에서 선동적으로 진행되던 노래운동은 90년 노동자 탄압에 밀려 서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한다.물론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는 숱한 노동·민중가요는 노동현장의 열악한 분위기와 통일에의 꿈을 분명히 담고 있다.지난 94년 공윤심의에서 모두 통과한 1집음반의 일부가 방송에서 철퇴를 맞았던 사연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KBS의 경우 1집음반중 ‘단결투쟁가’를 탈락시켰고 MBC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거부했다.“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우리는 가리라 기필코 가리라 승리의 한길로”(단결투쟁가),“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서울에서 평양까지).대중들의 민감한 반응을 의식해야만 하는 방송의 입장에선 당시 분위기상 선뜻 전파에 실을 수 없는 노래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부른 노래중 적지않은 것들이 방송을 탄다.‘바위처럼’‘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전화카드 한장’‘통일이 그리워’가 그것들이다.“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바위처럼),“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전화를 하라고 내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전화카드 한장). 작가와 단체만으로도 탈락했던 과거 심의 잣대라면 ‘꽃다지’의 노래는 무조건 거세돼야만 한다.그러나 서정적인 양식을 갖추고 파급됐던 이들의 노래들은 여과없이 안방에도 들어가고 있다.사람들을 위해 꽃과 잎,씨앗을 모두 바치며 사는 한해살이 풀 꽃다지.결국 한해살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여지는 노래패 ‘꽃다지’에게도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다. ◎꽃다지의 길 ▲92년 꽃다지 창립.연세대 대강당서 제1회 콘서트. ▲93년 세종대 대양홀,예술극장 한마당서 제2·3회 콘서트. 효창운동장서 전노협주최 전국노동자대회 초청공연. ▲94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서 민예총 주최 ‘다시 서는 봄’ 공연 출연.합법음반 제1집 발매.세종문화회관 대강당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 출연.마당세실극장서 제4회 콘서트. ▲95년 소극장 오늘서 제5회 콘서트.창무포스크극장서 제6회 콘서트.연세대 대강당서 민노총 출범 축하공연.마당 세실극장서 제7회 콘서트. ▲96년 두레극장,마당 세실극장서 제8,9회 콘서트. ▲97년 제2집 앨범 발매.마당 세실극장,대학로 라이브1관에서 제10,11회 콘서트.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 발매.북한어린이돕기 거리공연. ▲98년 동숭아트센터서 콘서트
  • 국세청장이 募金責이라니(사설)

    지난해 대선때 국세청 청장과 차장이 한나라당쪽의 선거자금을 불법으로 모금한 사건이 드러나 정가를 소란케 하고 있다. 검찰은 林采柱 전 국세청장이 한나라당 徐相穆 의원의 요청을 받은 李碩熙 전 차장과 함께 대상기업을 나눠 선거자금을 모금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徐의원을 소환해서 조사할 예정인데,한나라당은 徐의원에 대한 수사착수를 ‘보복적 표적수사’이자 ‘야당 파괴공작’이라고 주장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하는등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기국회를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 소동을 이성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를 느낀다. 첫째가 국세청 청장과 차장이 여당 후보를 위해 대기업들로부터 불법 선거자금을 모금한 부분이다. 한국적인 특수성이긴 하나 국세청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이나 기업인은 없다. 국세청은 세무조사권,곧 세무사찰이라는 몽둥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국세청의 청장과 차장이 기업들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세금감면이라는 당근을 내밀어 불법 자금을 긁어모아 여당에 건넸다면,직권남용의 차원을 벗어나 명백한 범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林청장이 모금한 자금이 38억원이고 따로 모금활동을 폈던 李차장은 미국으로 달아나 모금규모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명백히 정치자금법을 위반하고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통신과 한국중공업등 공기업에 압력을 행사해서 여당의 선거자금을 우려낸 안기부 공직자는 이미 사법처리를 받았다. 다음으로 정치권력이 불법 선거자금 모금에 개입한 부분이다. 정치권력이 국세청을 동원해 불법 선거자금을 모금한 것은 공정해야할 세무행정을 침해한 행위다. 조세법정주의가 오히려 무색하다. 동시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비리 차원이 아니다. 국가기강에 관한 문제다. 정치권과 재계가 유착해서 사회전반에 부정부패를 만연시키는 악폐를 척결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엄정한 수사가 있어야 한다. 林청장의 진술에 따르면,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선기획단장이던 徐의원이 李차장에게 “세무조사권을 앞세워 선거자금을 모금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모금대상 기업명단을 넘겨주어 모금활동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徐의원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도 徐의원은 검찰의 조사에 응하는 게 순리다. 그리고 한나라당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검찰의 조사결과를 지켜보아야 옳다. 정치개혁을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鄭大哲 국민회의 부총재도 구속되는 마당이다.
  • 궁중의 중상(秘錄 南柯夢:17)

    ◎고종 총애 지극하니 궁궐축출 모략이…/정환덕 상감모시기 10년… 정적들 시기받아 감기로 며칠 쉬는 틈타 지방으로 좌천 공작/“시골군수가 소원” 거짓주청에 임금도 속아 “일주일만 참으라” 했으나 한달넘게 무소식 이튿날 정오 상감 부자께서는 신(정환덕)을 급히 입궐하라 명하시고 말씀하시기를 “鄭가 성을 가졌다해서 모두 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할 수 없다.필시 경(卿=정환덕)을 몰아내기 위한 계책이었으니 사퇴하지 말 것이며 정가성을 가진 사람으로 추방당한 모든 사람을 다시 입궐,근무토록 하라”고 분부하시니,환호의 소리가 하늘에 닿고 궁중에 화기가 넘쳐 났다.그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치란 반칙투성이의 축구시합이라 했다.권력의 속성 가운데 가장 더러운 부분이 바로 권력투쟁이다.권력투쟁에는 반드시 중상모략이 오가게 마련이라 선비가 권력의 주변에 가까이 가면,온갖 수모를 당하고 물러서게 마련이다. 정환덕 이하 모든 정씨가 궁중에서 숙청당한 사건은 장지동의 군함사건을 계기로 당대의 세도가 길영수(吉永洙)와 말다툼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남가몽 15회 참조). ○길영수와 말다툼 화근 길영수로 말하면 본래 지관(地官)출신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더니 1889년 과천군수를 거쳐 일약 13도부상도반수(十三道負商都班首)로 뛰어 올라 전국의 보부상을 지휘하여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야당인 독립협회의 개혁요구를 몽둥이로 진압한 국가유공자(?)였다.광무정권을 수립하는데 가히 일등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거물을 상대로 일개 시종이 싸우기란 벅찬 일이었다. 다행히 1903년 한 선비의 상소로 “육군부령 길영수는 간사한 무리로서 성총을 빙자하여 민재(民財)를 약탈하고 관직을 매매하는 등 나라를 병들게 한자”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정환덕의 다음 정적은 길영수보다 더 엄청난 거물 이용익(李容翊) 이었다.이용익은 임오군란 때 민비(명성황후)를 도와 매일 서울∼장호원간을 달려서 왕래한 충신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광무개혁을 사실상 주도한 인물이었다.그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지방수령(군수) 331명에 대해 일제 수사를 벌였다. 이용익이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재무장관)으로서 열읍의 포흠 (浦欠:부정행위)낸 수령을 조사하고 보니 전국 360 고을(郡) 가운데 단 한 면도 온전한 곳이 없었다.이 때문에 포흠을 낸 관찰사(도지사)와 수령들이 도망쳐 피신하였는데,경남 산청의 단성(丹城)군수도 역시 그 가운데 들게 되어 사촌 정환기가 도망치고 말았다. 저번에 이용태(李容泰)의 주선으로 정환기를 내장원(內藏院)의 산림기사(山林技師)로 취직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이 꼴이 되고 말았으니 모두 빈 공중의 꽃이 된 것이다.한탄한들 무엇할까. 정환덕이 출세했다 하여 시골에서 일가친척들이 무작정 상경해 한 자리 청탁하는 사람이 많았다.요즘같은 세상에도 상경한 시골의 일가친척을 냉대하였다가는 크게 욕을 먹는데,그때야 더했다.서대문 정환덕의 집에는 쉴새없이 일가친척이 찾아 왔는데,단성군수와 운봉군수를 시켜준 사람은 멀지 않은 사촌들이었다. ○사천군수 재기용 호소 사천(泗川) 군수 정환기(鄭煥琦)는 단성군수로 가게 되었는데 길영수가 들어서서 자기가 추천한 윤치일(尹致日)을 사천군수로 삼았기 때문에 정환기가 좌천된 것이다.얼마 안되어 정환기는 또다시 영양(英陽)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정환기의 군수 자리가 길영수의 훼방으로 이렇게 좌천되게 되니 정환덕이 참다 못해 상감에게 하소연을 했다.그러자 황상께서 물으시기를 “단성군수 정환기가 너에게 4촌이 되느냐” 하시었다.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또 말씀하시기를 “영양군수가 단성군수보다 낫지 않느냐” 하시었다. 대답하기를 “네,그러하옵니다.두 곳의 군수 자리 중 어느 곳이 나은지는 우열을 가리지 못하오나 소신의 천박한 생각으로는 단성군이 사천군만 못하고 영양군이 단성군만 못하오니 본래의 사천군으로 돌려 주시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상감께서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라” 하시었다. 이로써 알수 있듯이 정환덕에 대한 고종의 총애는 지극하였다.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환덕에 대한 모략은 더욱 극성스러워 마침내 궁궐에서 물러나 시골에 가서 군수를 살게 되었다. 간사한 무리들이나를 대궐에서 축출할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실패하고 성공하지 못했으니 다시 무슨 일을 가지고 헐뜯을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내가 잠시 병들어 누워 있는 동안에 상감에게 아뢰기를 “정환덕은 10년 가까이 상감마마를 지척의 자리에서 모셔 오면서 더 부지런하고 더 힘써서 밤을 낮으로 삼고 공경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을 하루같이 충성하다보니 지쳐 병이 들었습니다.그러니 이제는 산수 좋은 고을을 택해서 잠시 소풍하듯 고을살이를 하게 하면 어떠하오리까”하고 아뢰었다.황상께서 이들의 말을 옳게 여기시어 드디어 충남 대흥(大興)현감을 제수하시었다.그러나 그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생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환덕이 잠시 감기로 대궐에 나가지 못한 틈을 타서 길영수 일파로 보이는 정적들이 그를 지방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니,눈뜨고 코베어 가는 세상이었다. 하루는 비서장(秘書長) 김하영(金夏榮)이 우리집에 찾아와 문병하고 상감이 나를 충남 대흥군수로 제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물론 이것은 저들의 공작이었다.이튿날 늦게 대궐에 들어가 입대했더니 상감께서 물으시기를 “병은 완쾌되었느냐.그동안 누가 와서 네가 지방의 외읍(外邑)을 맡아 나가는 것이 소원이라 하여 내가 너를 대흥군수로 제수했는데,너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시었다.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성상의 은총이 이와같이 융성하고 흡족하오니 참으로 송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대흥군수로 나가고 싶다는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옵니다.10년을 하루같이 모셔온 이 몸이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멀리 귀향가듯이 대궐을 떠날 수 있단 말입니까.신이 비록 보잘 것없는 사람이오나 바라옵건대 해타(咳唾:바로 턱앞)에 두시어 부리신다면 그보다 더 영광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황상께서 들으시더니 “내가 한번 더 저들에게 속았구나.그러나 기왕 발령을 냈으니 잠시 내려가 군수로 부임했다가 일주일 이내에 다시 올라오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턱앞 두시어 부려달라” 정환덕이 대흥군수로 내려간 것은 1903년 3월7일이었다.일주일 뒤에 다시 올라오도록 하겠다던 말씀을 믿고 임지로 내려갔으나 한달이 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임지에 부임한지 한달이 넘도록 올라오라는 분부는 없고 내부(內部=내무부)로부터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훈시만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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