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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연회장 어떤 처벌 받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률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고 ‘자력구제’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악랄한 범행으로 분류된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자력구제는 고소를 하는 등 법률 절차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보복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룹 총수인 김 회장과 피해자들의 관계가 대등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김 회장에 대한 수사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가능…구속도 가능할 듯 피해자들이 밝힌 것처럼 사건 당시 김 회장 일행이 피해자들을 납치·감금·폭행했다면 김 회장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3조 집단적 폭행 조항을 위반한 것이 된다. 징역 3년 이상의 형을 받을 수 있는 조항이다.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들었다면 같은 법에 따라 역시 징역 3년 이상의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단순 폭행을 넘어섰기 때문에 합의해도 처벌이 가능하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소시민들이 포장마차에서 싸움이 붙어 맥주병만 깨트려도 가중처벌된다. 피해자 진술이 사실이라면 김 회장이 구속될 수도 있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특히 김 회장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상, 직접 피해자들을 때렸든지 일행에게 때리라고 지시했는지 여부가 법률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일행의 우두머리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김 회장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공범이 되며, 혹시 재판에 회부된다면 일행 가운데 가장 높은 형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제3자 업무방해에 공인이 법치국가 근간 흔든 책임론도 제기돼 김 회장은 아들을 때린 종업원을 찾기 위해 관련이 없는 종업원을 폭행하고, 더 나아가 북창동 S클럽 사장의 뺨을 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S클럽 종업원들이 업무 외 영역에서 김 회장측과 분쟁이 생겼는데, 이를 이들의 영업장에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성폭행과 성추행을 즐기던 사내의 종착역은

    “쯧쯧,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여자만 보면 성폭행을 일삼더니만….” 중국 대륙에 여성만 보면 성폭행을 하지 못해 안달하던 ‘색귀(色鬼)’로 불리는 사내가 끝내 독살돼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최근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에 따르면 자신의 생명을 단축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깝죽대던 장본인은 중국 중서부 쓰촨(四川)성 루저우시에 살았던 장얼(張二·가명)씨.독신인 그는 주위의 여성들을 보기만 하면 성폭행과 성추행을 일삼다가 끝내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줄곧 독신생활을 해왔지만,궐자는 여성 밝힘증에는 누구 못지 않았다.해서 친구들로부터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자주 들었다.이에 대해 장씨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궤변을 늘어놨다. 그러던중 몇년전 어느날,장씨는 같은 동네에 사는 가오(高)모씨의 아내와 그의 딸을 볼 때마다 성폭행했다.이 사실을 안 가오씨는 참지 못하고 아내와 이혼했다.가오씨는 얼마 있다가 재혼했다. 장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가오씨의 재혼한 아내 류(劉)모씨에게도 성폭행과 성추행을 자행했다.가오씨 부부는 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뼈속 깊이 각인됐다. 지난달 1일밤,가오씨는 회사 일이 많아 야근을 하고 있었다.이 틈을 노려 장씨는 가오씨의 집에 몰래 들어가 혼자 집에 있던 류씨를 범했다.늦게 퇴근한 남편 가오씨는 이 사실을 알고 더이상 장씨를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이들 부부는 그를 열명길로 보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튿날 오전,장씨는 남편 가오씨가 회사에 간 틈을 타 또다시 류씨를 만나러 갔다.장씨는 류씨에게 “술을 좀 먹었더니 속이 쓰리다.”며 “꿀물이나 좀 타 달라.”고 요구했다.류씨는 “잠깐 기다려라.곧 꿀물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힐끗거리며 장씨를 쳐다본 뒤 두방망이질 하는 가슴을 안고 몰래 꿀물 속에다 쥐약을 탔다.이 꿀물을 맛있게 들이킨 장씨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아직도 죽지 않은 모습을 본 장씨는 옆에 있던 몽둥이를 들고와 확인 살해했다.이들 부부는 고의살인죄 혐의로 쇠고랑을 차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책 읽어주는 손숙·황석영

    책 읽어주는 손숙·황석영

    “홀아비 죽어 하무자귀야 총각 죽어 몽달귀야/너두 먹구 물러가라/무당 죽어 걸립귀야 소경 죽어 신선귀야/너두 먹구 나가서라/…/총 맞구 칼 맞구 몽둥이 맞구 가던 귀신/비행기 폭격을 맞구 가던 귀신/불에 타서 일그러지구 재가 된 귀신에/마차에 기차에 추럭에 땡크에 치여 죽던 귀신/염병 땀병 흑사병 호열자 장질부사/폐병에 가던 귀신 마마에 가던 귀신/왼갖 잡색 객사귀 원귀야/오늘 많이 먹구 걸게 먹구/모두 먹구 나가서라/…/오늘은 고픈 배 불리구 마른 목 적셔 가구/진 거는 먹구 가구 마른 거는 싸가지구 질빵 걸어 메구 가구/여귀는 똬리 바쳐 이구 가구/동자귀는 오질 앞에 싸가지구/인정 받구 노자 받구 좋은 데루 천도를 허소사” 얼쑤! 지난 27일 오후 7시, 서울 내수동 교보문고 이벤트홀. 연극인 손숙(63)씨에 이어 소설가 황석영(64)씨가 자신의 작품 ‘손님’의 마지막 장 ‘뒤풀이-너두 먹구 물러가라’를 구성지게 낭독하자 객석에서 열띤 박수가 쏟아졌다. 작가의 입을 통해 듣는 소설은 독자가 눈으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색다른 맛을 냈다. 손씨의 드라마틱한 낭독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황씨의 소설 ‘오래된 정원’ 가운데 주인공 오현우가 출감해 이미 세상을 떠난 연인 한윤희의 편지를 읽는 대목을 손씨가 절절한 감정을 담아 낭독하자 이를 지켜보던 독자들은 하나둘씩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황씨가 낭독 작품인 ‘오래된 정원’과 ‘손님’의 창작 내력 등을 자세하게 독자에게 설명하면서 독자와 작가의 거리감은 점점 좁혀졌다. 황씨는 “손 선생이 고교 시절에 학교 문예반장으로서 역시 고교생 문학도였던 나와 조해일, 조세희씨 등과 더불어 문학을 이야기했다.”며 알려지지 않은 손씨와의 인연을 밝혔고,“새벽 해장국 집에서 혼자 소주를 시켜놓고 ‘나는 재주가 없다.’며 자탄했던 적도 많다.”며 창작의 고통도 진솔하게 토로했다. 이날 행사에는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 100여명의 독자가 참석했다. 그 중에는 7년 동안 황씨와의 만남을 기다리다 광주에서 올라왔다는 독자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은 지난해부터 작가·예술인 두명씩 초청해 ‘낭독공감’을 열고 있다. 이날 행사는 올들어 두번째 열린 것이다. 교보문고측은 4월에는 유명 외국작가를 초청해 소설 낭독의 맛을 계속 살려나가기로 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방탄복에 숨은 원리는 총알 막는 그물

    방탄복에 숨은 원리는 총알 막는 그물

    즘 고구려 건국을 다룬 인기 사극 ‘주몽’에서는 군사들이 칼을 막아낼 수 있는 철갑옷으로 무장해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주목을 끈다.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최근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테러 위협에 대비하라는 의미로 방탄 조끼를 선물받아 화제가 됐다. 그러면 신체를 보호하는 방탄복이나 방탄 유리 등 방탄 장비는 어떤 원리로 총알 등을 막아낼 수 있을까. ●총알 뚫지 못하게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 한낱 섬유로 만든 방탄복이 총알을 막을 수 있는 원리는 그물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높은 강도를 지닌 유리섬유를 빽빽하게 압축해 가로세로 엇갈려 짜는 것이다. 방탄복의 재료인 방탄 섬유는 보통 실과 달리 매우 질기고 탄성이 좋다.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10배 이상 강도가 높다. 이 섬유로 만든 실을 그물처럼 촘촘하게 짠다. 여기에 총알이 명중하면 그물을 이룬 실은 총알에 의해 눌려지며 잡아당겨지게 된다. 이때 실이 견디는 힘, 즉 인장강도가 커져 총알은 관통할 수 없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총알에서 발생하는 고열이 섬유를 녹이면서 응집작용을 일으켜 총알의 운동에너지를 떨어뜨리게 된다. 방탄복의 비약적인 발전은 2차 세계 대전 중 초강력 합성섬유인 ‘케블라’가 개발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이 섬유를 10∼20장 정도 겹치면 총알을 막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866년 병인양요 직후 요즘과 같이 가벼운 방탄조끼가 등장했다.‘면제배갑’이라고 불린 이 방탄조끼는 헝겊 13겹을 겹쳐 단단히 꿰매 총탄의 운동 에너지를 차례차례 흡수하도록 설계됐다. 신미양요 때 톡톡히 성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입고 있으면 너무 더운데다 불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방탄 조끼가 총알을 막는다 하더라도 충격까지 완전히 완화하지는 못한다. 몽둥이로 맞을 경우 옷을 뚫지는 못하지만 충격이 전달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방탄 유리, 고분자 필름 이용 유리는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방탄 기능을 갖는다. 유리 두께가 4∼5㎝를 넘으면 권총 총알이 뚫지 못한다. 유리섬유가 방탄복의 소재로 쓰이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만한 두께의 유리는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때문에 폴리에틸렌으로 된 고분자 필름이 이용된다. 이 필름을 투명하게 만들어 2장의 강화유리 사이에 채워 넣거나, 고온·고압으로 성형해 붙이면 방탄 유리가 만들어진다. 유리에 선팅필름을 부착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풍선에 테이프를 붙이고 바늘로 찌르면 풍선이 터지지 않는 이치와 같다. 총알 등이 유리를 관통할때 방탄필름이 조각난 유리를 꽉 붙잡게 되면서 깨어지지 않는 것이다. ●거미줄, 액체 방탄복 등장할까? 보다 더 단단한 방탄 섬유를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학자들은 최근엔 거미줄로 만든 방탄복에 주목하고 있다. 거미줄의 강도가 어느 섬유보다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거미줄로 짠 섬유를 이용한 방탄복은 합성섬유나 강철로 만든 방탄복보다 탄성이나 인장강도가 몇배 이상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거미줄의 대량 생산 여부인데, 최근에는 거미의 유전자를 동물 세포에 이식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함께 ‘액체 방탄복’도 개발 중이다.‘Armor Holdings’라는 갑옷 제작 업체는 최근 특수 섬유(fiber and polymer)를 이용한 액체 형태의 투구와 갑옷을 선보였다. 총알이나 칼 등 딱딱한 물체가 충격을 가해 오면 단단한 고체로 변하는 원리를 적용시켰으며, 경찰이나 군, 교도소 등에 활용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로 팔도 누빈 윤팔도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엿장수로 팔도 누빈 윤팔도씨

    # 질문1‘엿 먹어라.’가 왜 욕이 됐을까.1964년 12월 전기 중학입시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 중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정답으로 채점된 것은 ‘디아스타제’. 하지만 보기 중에 ‘무즙’이 있었는데 무즙을 정답으로 표기했다가 낙방한 학생의 어머니들이 법원에 제소하는 등 집단항의에 나섰다. 급기야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관련기관 등에 찾아가 “엿 먹어라! 무즙으로 만든 이 엿 먹어봐라!”하며 엿을 들이댔다. 결국 당시 한상봉 문교부차관과 김규원 서울시교육감이 사표를 냈고 무즙을 답으로 썼다가 낙방한 38명은 정원에 관계없이 경기중학에 합격했다. # 질문2 엿장수는 1분에 가위질을 몇번이나 할까.‘초딩’시절, 시골동네에 ‘엿장수’가 찾아와 가위질을 하며 “엿 바꿔먹으라.”고 소리칠 때 여러번 들었던 추억의 문제다. 초롱초롱 눈알을 굴려가며 애써 답을 생각하다가 “야, 그거야 엿장수 맘대로지.”라는 답을 듣고 허탈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릴 적 가장 반가웠던 손님은 뭐니뭐니 해도 ‘엿장수’였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절겅대는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약속이나 한듯이 다들 쪼르르 달려가 엿장수의 뒤를 따랐던 그 때 그 시절. 오는 날짜도, 가위질 하는 것도 ‘엿장수 맘대로’였지만 늘 반갑기 그지 없었다. 다 떨어진 고무신 한쪽, 망가진 양은 냄비 조각, 심지어는 누나의 긴 머리카락까지 내밀면, 엿장수는 끌과 가위로 탁탁 잘라주며 “옜다, 엿먹어라.”하며 던져주곤 했다. 가끔 “쟤는 왜 많이 주고 저는 쬐금만 주나요?”라고 항의하면 “야, 엿장수 맘이여.” 하며 꿀밤을 맞기도 했다. 윤팔도(81) 할아버지. 어쩌면 어렸을 적 동네에서 한번쯤 만났을 법한 추억의 할아버지다. 지난 66년의 세월동안 ‘엿장수’라는 외길인생을 살아오면서 전국 팔도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다. 원래 이름이 석준이었지만 ‘팔도(八道)´로 바꾼 것만 봐도 그의 인생역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한때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엿장수들이 모인 엿가위질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국가대표로 인정받기도 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기에 최장수 ‘엿장수’이자 살아 있는 ‘엿가위 예술의 달인’으로 꼽힌다. 더욱 눈길 끄는 대목은 그의 막내아들이 5년 전에 아버지와 합류했고 최근에는 손자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3대째 ‘엿장수 집안’이 된 셈이다. 설날이 가까워오면 자연스럽게 정겨운 시골추억이 생각나기 마련, 그래서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일산의 한 백화점 앞에서 엿장사로 가업을 잇는 이들 3부자를 만났다. 청주에 살고 있는 이들은 때마침 백화점측의 초청으로 설 대목 행사에 참석해 길거리에서 흥겨운 엿판을 벌이고 있었다. “일락 서산에 해 떨어지고 이내 목판에는 엿 떨어졌구나. 청춘 과부 잠못 잘 적에 먹는 엿이요, 큰애기 허벅지맹키로 희건 엿이 왔어요. 부산 동래 사탕엿, 울릉도에 호박엿, 전라도 봉산의 생강엿, 강원도 금강산 생청엿….” 윤 할아버지의 구성진 엿타령이 길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들과 손자는 엿가위로 어깨를 들썩들썩 하며 척척 장단 맞추는 모습에 절로 흥이 돋아난다. 잠시 짬을 낸 윤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다.81세의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게 보였다. 비결을 물었더니 “즐겁게 사는 거여.”라며 그저 호탕하게 웃을 뿐이다. 지나온 인생살이가 간단치 않을터.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8세 때 남사당패에 들어갔다. 왜소한 체구 ㅜ때문에 주로 3층 꼭대기에 올라가는 역할을 맡았다. 잘못되는 날엔 매맞기 일쑤였다.3년 뒤에는 창극단에 들어가 노래를 배웠다. 하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 14세되던 겨울, 그는 호구지책으로 엿장수로 나섰다. 동네 어른을 통해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경씨가 1000명 산다는 마을)에 위치한 엿방(엿공장)에 취직했다. 이때부터 하루 밥 세끼를 먹게 되면서 엿장수 생활에 만족과 즐거움을 느꼈다. “엿방에 갔더니 장작불 지펴놨지, 엿물로 밥지어 먹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비록 머슴 신세나 다름없었지만 남사당 가락으로 가위질 하며 용돈도 벌었어.” 19세되면서 세상 보는 안목이 넓어지자 홀로 독립한다. 음악을 알고 재주가 남달라 자신감이 더욱 생겼던 것. 우선 몽둥이만 한 엿을 만들었다. 이어 리어카를 구입하고 엿가위 두 개를 장만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어린 아이들은 “몽둥이 엿장수가 왔다.”며 떼지어 몰려들었다. 윤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날이면 “자, 엿먹어라.” 하며 길다란 몽둥이 엿을 몇개씩 집어주기도 했다. 서른 한살 때 군복무를 마친 어느날, 충남 광천의 시골에서 엿판을 벌일 때였다. 창극 노래, 트로트 등으로 이어지는 흥겨운 놀이마당이 한바탕 끝나자 어여쁜 처녀(김종숙·70·지금의 부인)가 다가와 뒤따라가겠단다. 가만 보니 부잣집 딸이었다. 고생 바가지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처녀의 진심을 알고는 친척이 사는 논산으로 함께 야반도주했다. 결국 연산면 살포리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엿장수한테 누가 딸을 주겠나 싶어 결혼 생각을 안 했지. 허긴 엿가위 장단에 처녀들이 담 넘어 올 정도로 꽤나 인기를 모았어. 생각보단 결혼을 일찍했지만 부인은 늘 독수공방이었지. 리어카 끌고 집을 나가면 1년만에 돌아왔으니까 말야. 그러면서 하나 둘 낳은 아이가 나중에 5남매가 되더군.” 1969년 어느날이었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큰 엿공장을 운영하는 한 부자의 주최로 서울 신당동에서 전국 엿가위질 경연대회가 벌어졌다. 호남의 송산갑, 부산의 김항구, 경기·인천의 백대가리, 서울의 윤팔도 등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였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쌍가위’를 들고 출전한 윤팔도가 최우수상을 차지, 전국 최고수임을 입증했고 부상으로 쌀 20가마를 받았다. 1985년 12월이었다.KBS 전국 노래자랑 연말결선에서 인기상을 받고 방송국 정문을 나서는데 “오라버니 타세요.” 하면서 누군가 승용차 문을 연다. 얼굴을 보니 코미디언 배연정씨였다. 그 길로 간 곳이 서울 돈암동의 유흥업소. 곧바로 무대 위에 올라 ‘물레방아 도는 내력’‘고향무정’‘돌아가는 삼각지’등 세 곡을 불렀다. 그랬더니 50만원이 든 봉투를 받았다. 며칠 뒤에는 MBC 차인태의 ‘출발 새아침’에 초대받았고 이 방송을 본 신소걸씨한테 연락이 와 2년동안 밤무대에 출연했다. 낮에는 엿장수, 밤에는 가수로 활동했던 것이다.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이북을 제외하곤 전국 안 가본 데가 없지. 엿가락 길이로 따지면 지구 수십번은 돌았을 거야. 그런데 요새는 엿가위 만드는 곳도 없어지고 뭔가 아쉬워.” 지난 2003년이었다. 윤 할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막내 아들 일권(36)씨가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쓰고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일권씨는 “60여년동안 일해온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만약 돌아가시면 엿불림(구전 판소리)도 끊길 것 같았다.”고 의미 부여를 한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일권씨는 2년 전 아버지와 함께 ‘엿불림 음반’(대표곡 ‘엿가위 인생´)을 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가업을 이은 아들은 초보답지 않게 2005년에는 2억원, 작년에는 3억원을 벌어들여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해마다 명절 때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엿판시합이 벌어진다는 일권씨는 “도저히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아울러 “이제는 초콜릿 대신 우리의 전통 엿을 사랑해야 한다.”면서 폐백이나 입학·졸업시즌에 애용되는 엿을 건강식 웰빙 스타일로 바꾸고 있다고 귀띔했다. “엿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인정을 나눠주는 메신저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가 해온 66년과 제가 합류해 100년을 꼭 채우겠습니다. 또 제 아들이 100년부터 다시 어어가겠죠.” 손자 경식(13)군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엿가위를 잡아 엿불림을 구성지게 부른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경식군은 휴일과 방학을 이용, 할아버지를 돕겠다며 활짝 웃는다. 인물 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6년 충남 논산 출생 ▲34년 남사당 입문 ▲40년 엿장수 생활 ▲69년 전국 엿장수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85년 KBS전국노래자랑 연말결선에서 인기상 수상 ▲2002년 윤팔도 전통엿집 개업(충북 청주시) ▲현재 사단법인 전통식품연구회 고문
  • [사설] ‘자물쇠 학원’에 아이 맡기는 부모

    겨울방학을 맞아 ‘자물쇠 학원’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자물쇠 학원’이란 아이들을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붙잡아 두고, 외출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학원을 말한다. 이런 학원에서는 몽둥이를 든 감시원이 아이들을 통제하고 학원강사들의 체벌도 자주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학생 관리 시스템이 부모의 요구에 따라 생긴 데다 학부형·학생 할 것 없이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니 정말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물쇠 학원’이 성행하는 세태를 이 시대 사회병리적 현상의 하나라고 판단한다. 아울러 그 바탕에는 부모의 잘못된 자녀관·교육관이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먼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학업 성적을 높이려는 목적이 있다고 하나 방학을 맞은 자녀를, 외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몽둥이 찜질’까지 벌어지는 공간에 매일 12시간씩 잡아둔다는 것은 명백한 인권유린이다. 또 무작정 아이들을 붙잡아 두고 공부를 시키면 성적이 나아지리라는 인식도 교육에 관한 무지·몰이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듯해 안타깝다. 학교에서는 가벼운 체벌을 당해도 학생·학부모가 난리를 치면서 학원에서는 매를 맞아도 싸다고 동의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학부모의 의식 변화가 선행해야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공교육이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 교육당국도 관련법규가 없다고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청소년 인권보호라는 차원에서 ‘자물쇠 학원’의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바란다.
  • 유괴→결혼→탈출…10살 소녀의 인생 역정!

    유괴→결혼→탈출…10살 소녀의 인생 역정!

    “하느님! 이제 겨우 10년을 살았을 뿐인데….제 인생 살이는 왜 이렇게 팍팍합니까?” 중국 대륙에 아직 10살도 안된 어린 소녀가 차마 귀가 있어도 들 을 수 없고,눈이 있어도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힘든 생활을 하고 있어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중국 중부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에 살고 있는 한 어린 소녀는 아직도 어린 나이지만 지난 4년동안 유괴→인신 매매→성폭행→학대→강제 결혼→탈출이라는 인생살이의 험한 맛을 본 얘기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을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고 서부망(西部網)이 10일 보도했다.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은 올해 10살된 마옌옌(馬艶艶).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역에서 그녀의 험난한 지난 4년의 인생 역정이 널리 알려지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마양에 따르면 그녀는 4년전인 6살때 유괴되는 바람에 다시는 집 구경을 하지 못했다.이후 유괴,인신 매매,성폭행,강제 결혼,아동학대,극적 탈출….험난한 인생살이의 쓴맛이란 쓴맛은 모두 봤다. “6살때였어요.어느날 아침,밥을 사 먹으러 집 근처 식당에 들렀어요.그때 어른 두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지요.그런데 그 아저씨 두분이 나에게 유탸오(油條·커다란 꽈배기 비슷)와 콩국을 사주면서 같이 따라가자고 했죠.매일 맛있는 것과 예쁜 옷도 사준다고 했어요.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것이 고된 인생살이의 출발점이 됐죠.” 지나온 고된 세월에 너무 지친 탓인지 황달기가 있는 듯 얼굴이 부은 마양은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난 생활을 털어놨다.이들 유괴범들은 그녀를 데리고 중국 남부 닝샤(寧夏)지역으로 도망갔다.3일동안 기차를 타고….이후 4년동안 마양은 산시·닝샤·허난성 등 3개성으로 돌아다녔다. 닝샤에서 이들로부터 인신 매매된 그녀는 그곳 주인(양부모)로부터 성폭행까지 당했다.그때 나이가 아직 6살때였다.이 양부는 곧 허난성 중머우(中牟)지역의 어떤 사람에게 팔아넘겼다.이곳에서는 강제 결혼까지 한 뒤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학대를 당했다. 낮에는 소풀베기,농삿일,밥짓기 등의 집안일과 농삿일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밤만 되면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수모를 당하며 무자비하게 몽둥이로 맞아야 했다. 이를 참지 못한 마양은 결국 중머우의 주인(남편)이 잠든 틈을 타 몰래 도망나와 자기 집인 시안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 끝내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앞으로도 걱정이다.4년전 서안시의 집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이에 이날 정저우역 집법 공안을 찾아가 자신의 인생살이를 모두 털어놓는 바람에 그녀의 힘든 인생살이의 실체가 드러났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대학생 46% 여친폭행한 적 있다

    대학생 46% 여친폭행한 적 있다

    #1 여중생 A(15)양은 동갑내기 남자친구 C군으로부터 입술이 터질 정도로 자주 뺨을 맞는다. 평소 매너가 좋던 C군이 성적 얘기만 나오면 돌변했기 때문이다. 부잣집 외아들로 부족함없이 자랐으나 성적 콤플렉스를 가진 C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1시간만 지나면 잘못했다며 싹싹 빌었고 지금도 이 같은 관계가 반복되고 있다. #2 회사원 채모(24)씨는 3년째 남자친구 김모(26)씨와 사귀었다. 약속에 늦는 것을 유독 싫어하던 김씨는 어느날 채씨가 1시간 늦자 옆 건물 옥상으로 끌고가 엎드리게 한 뒤 ‘왜 맞는지를 생각해 보라.’며 몽둥이로 때렸다. 다음 날 김씨는 꽃을 사 가지고 용서를 빌었고, 채씨는 약간 화를 냈지만 그대로 넘어갔다. 탤런트 이민영-이찬(본명 곽현식) 커플이 결혼 전부터 상습 폭행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데이트 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같은 사례들은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데이트 폭력’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음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 10명 중 4명 데이트 폭력 경험 4일 삼육대 서경현(상담학과) 교수가 오는 3월 건강심리학회지에 발표할 예정인 논문에 따르면 20대 여성 279명 가운데 36.9%가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 대학생 중 46.2%가 한 번 이상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행사한 경험이 있었다. 또 한국 성폭력상담소에 지난해 상반기 접수된 1328건의 성폭력 상담 중 6.8%인 90건이 데이트 폭력인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트 폭력은 언어적 모욕을 포함, 신체적·성폭력까지 다양한 범주를 담고 있다. 특히 데이트 폭력은 고스란히 가정폭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여성의 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센터에 따르면 응답자의 15.9%가 결혼 전부터 폭행을 당했으며 38.6%가 결혼 후 1년 이내에 맞기 시작한 것으로 조사됐다. 폭행을 당하던 피해자가 그대로 결혼에 이르거나, 잠시 폭력성을 숨기던 가해자가 새로운 상대와 결혼을 한 뒤 본색(?)을 드러내는 셈이다. ●데이트 폭력 처벌 쉽지 않아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은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데이트 폭력은 오히려 처벌이 쉽지 않다. 민·형사상 처벌을 할 수 있지만 피해자가 경찰서에서 도착한 순간부터 첩첩산중이다. 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센터장인 문채수연씨는 “데이트 폭력은 일반 폭력사건 안에 묻혀 있고,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면서 “일선 형사들의 인식이 문제다. 다른 폭력 사건보다 세심하게 다뤄야 하는데 ‘그렇게 애인을 콩밥 먹이고 싶냐.’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고 꼬집었다. 한국 성폭력상담소 이윤상 부소장도 “데이트 폭력은 가정폭력과 비슷하게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은폐되기가 쉽고 피해자가 드러내기도 쉽지 않다.”면서 “또 ‘그렇게 싫으면 헤어지지 왜 계속 사귀냐.’는 식의 사회적 편견도 피해자로 하여금 폭력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고 밝혔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한번 웃자고 하는 말

    [한승원 토굴살이] 한번 웃자고 하는 말

    ‘한번 웃자고(笑呵) 하는 말이다.’‘하하하(呵呵呵)’ 이 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이나, 조희룡의 짧은 산문들 속에서 발견되는 말이다. 그 글들은 그분들이 늘그막에 들어서 쓴 것들이다. 그런데, 한번 웃자고 한 말들이라지만 그냥 웃자고 한 소리들만은 아니다. 옥편에서 ‘가(呵)’를 찾아보면,‘꾸짖을 가’이기도 하고,‘깔깔 웃을 가’이기도 하다. 거기에서는 ‘희롱’(戱弄-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려댐)이 담겨 있다. 늙은이들의 희롱은 그냥 희롱이 아니다. 상대를 꾸짖는 뜻이 담겨 있고, 거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희롱하는 뜻이 담겨 있고, 스스로의 삶 즐기기가 담겨 있다. 풋 늙은이인 나도 그분들처럼 이 해 마지막 달력장을 앞에 놓고, 한번 웃자고 하는 말을 하고 나서 망년(忘年)하고자 하니, 혹 망령(妄靈)이 나 있다고 흉허물하지 않기 바란다. 얼마 전,‘우리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말을 앞세우고, 자기 화물차를 세워놓고 시위를 한 사람들은 그들 일부는 고속도로를 막고 몽둥이를 들고 시위를 했고, 자기들의 뜻에 반하여 움직이는 물류 화물차들에 불을 질렀고 운전자들을 끌어내려 두들겨 팼다. 그 때문에 망가진 화물차의 수가 70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차들을 훗날 마음 넉넉한 당국이 모두 보상해주었다고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반대자들은 ‘미국의 강압에 대한민국이 망가진다.’면서 하필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필사적으로 시내 교통을 마비시키면서 몽둥이를 들고 시위를 했다. 언론은 물류유통의 멈춤으로 인하여 나라경제가 금방 찌그러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지만,FTA 반대 시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껏 언급하다 하다 지친 것인가.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맞은편 노약자 석을 차지한 ‘무소유의 천사’ 두 사람이 ‘말’을 허공중에 띄우는 희롱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FTA 반대꾼들이 미국으로 시위 원정을 갔다는 뉴스를 듣고 나는 바짝 긴장을 했다고. 우리 시위꾼들은 미국에 가서 과연 시위를 할까. 미국 경찰은 그 시위를 허락할까. 만일 시위를 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 시위꾼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대한민국 땅에서 하듯이 몽둥이를 들고 막는 경찰들을 두들겨 팰까…. 손에 땀을 쥔 채 조마조마하면서 뉴스 시간을 기다렸지. 그런데 막상, 브라운관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야말로 평화로웠어. 우리 사랑하는 시위꾼들은 몽둥이를 들지도 않았고, 화염병을 던지지도 않았고, 차도를 점령하지도 않았어. 영문으로 쓴 피켓 한 개씩을 들고 아주 다소곳한 모습으로 시위를 했어. 그런데 그 평화로운 시위를 보는 내 심사는 허망하고, 슬프게 비틀리고 있었어. 우리 시위꾼들은 왜 대한민국 땅에서 하듯이 거친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도 평화롭게 시위를 했을까. 아, 미국이 무섭기는 무서운 나라인 모양이다.” “그야 뻔할 뻔자지. 미국에서는, 경찰이 시위를 허락하면서 정해놓은 구획과 선(법) 밖으로 시위꾼들이 만일 한 발짝만 벗어날 경우 사정없이 파김치가 되도록 두들겨 패버린다. 두들겨 맞은 시위꾼들이 항의를 해도 소용없어.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에서도 나 몰라라 한단 말이여. 미국이란 나라는 법으로만 똘똘 뭉쳐진 나라 아닌가. 미국에서는 함부로 땅에 떨어진 휴지를 못 줍는다. 청소부가 자기들의 사업 영역을 침범했다고 신고를 해 버리면 휴지를 주운 사람이 꼼짝없이 벌금을 물게 되니까.” “에끼 순!” 한쪽 천사가 어처구니없어 하자 다른 천사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법다운 법도 없고, 그어놓은 선도 없어. 대한민국 경찰은 사정을 두고 막는 체할 수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여차하면 나중에 과잉 진압했다고 오히려 처벌을 받기 때문이여. 반대로, 과잉 진압을 하도록 충동질해 가지고 두들겨 맞은 시위꾼은 영웅이 되는 거라. 남보다 앞장서서 투쟁하곤 한 영웅은 자기들의 선거철에 노조 간부로 당선되고, 일단 그렇게 되면 귀족처럼 그랜저 굴리면서 살 수 있고,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시위는 일종의 신분상승 수단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여.” 한 천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하긴 그 말이 맞네. 대한민국에서의 시위는 과격하면 과격할수록 언론이 보도를 더 크게 하는데, 시위꾼들은 그것을 여론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더라고. 여론화되면 정부쪽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시위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시위는 의사 표시의 차원이 아니고 의사 관철의 차원이다 이거야. 그야말로 법은 없고 주먹하고 몽둥이만 있는 원시지대인 것이지.” “아이고 법이 법답고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사람다워야 따르지.” 천사들이 희롱하는 말 때문에 속으로 슬퍼하면서 웃고 또 웃었다. 아, 송년하지 말고 망년(忘年)하자, 가가가(呵呵呵).
  • 고은 ‘평화’ 품고 찾아오다

    고은 ‘평화’ 품고 찾아오다

    시인 고은이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지난 2002년 ‘두고온 시’ 이후 4년만에 창작시집 ‘부끄러움 가득’(시학 펴냄)을 최근 출간했다. 시인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다가 아깝게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스웨덴 정부가 주관하는 시카다문학상을 받는 등 세계는 이미 그의 시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시인은 새 시집 첫머리에서 ‘나에게 시가 왔다.’라고 외친다. “브루디외가 물었다/지금 너에게 시가 왔느냐/라고/(새가 지나갔으니 틀림없이 너에게 시가 왔을 것이다)//나는 창 밖의 물 속에서/방금 솟아올라/오래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나는 젖은 장님으로 대답했다/그렇다 시가 왔다/라고”(‘너에게 시가 왔느냐’ 부분) 그에게 찾아온 시는 어떤 모습일까. 시인의 이번 시집은 평화시집이라고 불릴 만하다. 모두 96편의 시와 다섯 편의 시조가 실린 시집 마지막을 8편의 ‘평화’ 연작시로 마무리했다. 시인은 “피이스/라는 낱말에서/나는 피 묻은 사체를 본다/피이스/라는 낱말에서/나는 한밤중 포탄이/작렬하는 광경을 본다/…/피이스/라는 낱말에서/나는 침략과 수탈을 본다”(‘평화·3’ 부분)며 평화를 위해, 평화를 짓밟는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시인이 생각하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도 내비쳤다. 시인은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곳/그곳을/평화라 한다/”(‘평화·4’ 부분) “오직 누구의 평화만이 평화이다//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는/평화가 아니다”(‘평화·6’ 부분)라고 외친다. 이번 시집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목이 메며 낭송했던 즉흥시 ‘대동강 앞에서’와 같은 격정적인 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 분단의 비극 등 시인의 주된 관심사는 여전하다. “저 장대비 그대로 맞은 순하디 순한 사람이//1950년 9월 12일/ 그날 밤 저 혼자/원당부락 남녀노소 서른 아홉 명을/몽둥이로 쳐 죽인 사람이란다//저 사람이/다 죽이고 나서/뒷산 솔밭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절하고/사라졌던 사람이란다”(‘극악’ 부분) “한강과/임진강이/허어/허어 오랜만에 만나는 듯 만나는 곳/조강/조금 더 가면/예성강을 만나는 곳/분단국경/거기라면 좋겠다”(‘또 하나의 무덤’ 부분) 이외에 시집에는 폴란드, 라오스, 타클라마칸 사막 등 시인이 주유했던 세계 여러 곳과 제주도, 부산, 삼천포, 백두산, 금강산 등 한반도 곳곳을 방문해 얻은 시적 영감도 함께 묻어 있다. 생활주변의 소소한 이야기, 가족과의 애틋한 감상 등 서정시들도 함께 실려 있다. “딸이 오는 날/제라늄화분 여섯이/일제히 꽃들을 피웠다//딸이 가는 날/늙은 내 손가락/씀뻑 벴다”(‘그 아비’ 전문) 노벨상 수상에 실패했지만 세계 문학계는 여전히 시인에게 주목하고 있다. 풍부한 시적 감수성에다 민주화운동 경력까지 갖춰 문학외적 요인도 중요한 심사기준으로 삼는 노벨문학상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 있는 작가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의 2007년이 주목된다.1만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삼청교육대 死因조작 의혹도

    “몸에 새를 그려 놓은 문신이 있으면 새를 잡는다고, 호랑이 문신이 있으면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몽둥이로 집중적인 구타를 당했다.” “한겨울 새벽에 연병장에 알몸 상태로 집합시켜 물 묻힌 빗자루로 물을 뿌린 뒤 움찔거릴 때마다 몽둥이 구타가 이어졌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동료를 서로 세워놓고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가 10일 밝힌 삼청교육대사건 조사결과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인권유린과 가혹행위가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태도불량자로 찍힌 입소자들은 낮뿐만 아니라 새벽 취침시간에도 1시간30분마다 강제로 일어나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특히 여성들은 돌이 많은 연병장에서 머리를 땅에 박는 ‘원산폭격’을 하다가 정수리가 터진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계엄사령부는 ‘입소 직후 3∼5일간 공복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반발과 저항력을 감소시키라.’는 교육계획을 하달했으며, 식당에는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는 구호를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6만 755명 중 전과가 없는 경우가 35.9%에 달했다.”며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 달리 다수의 억울한 피해자가 포함됐다.”고 밝혔다.또 입소자 중에는 중학생 17명을 포함해 학생이 980명이나 끼어 있었고, 여성들도 319명이나 끌려갔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집행된 삼청교육 기간 중 사망자는 총 54명으로 집계됐다. 조사결과 자살로 발표된 김정호씨의 경우 1980년 8월7일 폭행치사로 최초 보고됐으나 5일 뒤 보고서에는 자살로 변경되는 등 36명의 사인에 상당한 의혹이 있다고 과거사위는 말했다. 그러나 삼청교육 기간(1980년 8월4일∼1981년12월5일)에 숨진 54명 외에 추가 사망자는 없으며 실종자 대부분은 퇴소 후 가출 또는 사망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삼청교육 피해자 단체가 주장하고 있는 한탄강변의 시체처리소각장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중 훈방·재판 조치된 경우를 제외한 3만 9742명 가운데 현재까지 4644명(11.6%)만이 보상신청을 했다고 밝혔다.신청이 저조한 이유는 피해자가 보상 실시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삼청교육 전력이 알려지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딸을 성폭행하고 때려죽인 게 아버지? 악마?

    “친딸을 성폭행하고 때려죽여 암매장한 아버지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중국 동북부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 루위안(綠園)구에서 살고 있는 왕잉(王英·여)씨는 평생 씻을 수 없는 크나큰 한을 오롯이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남편이 친딸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무려 6시간 동안 몽둥이·전선줄·경운기 삼각대 등으로 마구 때려 죽인 뒤 암매장하는 것을 보고도 겁이 나서 수수방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겁을 내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겁도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없어지게 마련이다.딸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도 말 못하던 그녀는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하루내내 고민하던 왕씨가 남편을 체포하라고 경찰에 신고했다.천인공노한 만행 사건의 전모는 이렇게 해서 드러났다. 지난 7월 25일 오후 6시쯤,왕씨는 루위안구 공안분국에 남편 류창(劉强)이 작은 딸 훙훙(紅紅·가명)을 성폭행한 뒤 때려죽여 암매장한 혐의로 체포하라고 신고했다고 성시만보(城市晩報)가 최근 보도했다. 왕씨에 따르면 훙훙양은 15살 밖에 안된 꿈많은 소녀였다.하지만 그녀는 친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해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강제로 낙태수술을 받았고,결국에는 아버지 손에 맞아죽은 뒤 암매장까지 당했다. 그녀의 불행한 사건은 지난 7월 24일 오후 발생했다.남편 류가 집에 돌아온 뒤 왕씨에게 “훙훙이 남자친구와 손잡고 다니는 것을 봤다.”며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겠다.”고 분을 삭이지 못하며 식식거렸다.오후 5시쯤,훙훙양이 돌아오자마자,류는 몽둥이로 딸을 사정없이 두둘겨 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몽둥이가 부러지자 경운기의 삼각대로 마구 때렸다.훙훙양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삼각대를 손으로 잡자,궐자는 전선줄을 가지고 와서 또 때렸다.훙훙양이 도망다니자,이번에는 칼을 들고 와 다리·등짝 등을 가리지 않고 찔렀다. 이것도 모자라,류는 또다시 삼각대로 두둘겨 팼다.왕씨는 더이상 두고볼 수가 없었지만 제지하지도 못했다.큰딸 화화(花花·가명)와 함께 집을 나와버렸다.너무나 겁을 먹어서…. 류는 딸이 “살려달라.”는 애원소리도 무시하고 얼굴 등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짓밟았다.이렇게 하기를 무려 6시간.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계속됐으니,어떻게 사람이 살아 날 수가 있겠는가? 25일 아침,훙훙양은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아프다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와서 보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훙훙양은 끝내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훙훙양이 죽은 것을 확인한 류와 왕씨는 그녀의 시신에 옷을 새로 갈아입힌 뒤 뒷산으로 메고 가서 암매장해버렸다.왕씨는 그때까지 류를 말리기는 커녕 한마디 말도 못하고 눈 뜨고 지켜보기만 했다.류가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한 까닭이다. 그러나 왕씨는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하루종일 죄책감에 시달린 왕씨는 오후 6시쯤 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겁이 없어졌다.딸을 죽인 것만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데,살인자를 더이상 그대로 두고볼 수만 없었다.그리고 조용히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남긴 밥 탓에…” 저승길에 오른 소년의 사연

    “아무리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도 체면이 좀 깎인 것 가지고 때려죽이기까지 하다니!” 중국 대륙에 한 초등학생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학교 선생님의 남긴 밥을 몰래 먹었다가 열명길에 오르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벌어져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중국 중북부 간쑤(甘肅)성 징위안(靖遠)현 류촨(劉川)향에 살고 있는 한 초등학교 소년은 선생님이 남긴 대궁밥을 몰래 훔쳐먹다가 난장을 맞아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난주신보(蘭州晨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소년을 때려죽인 장본인은 다름아닌 계모인 자오(趙)모고,불행히 사망한 당사자는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의 장둥둥(張東東)군. 사건은 지난해 11월 3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둥둥군은 이날 오후 수업을 마친 뒤 우연히 선생님의 사택 앞을 지나가다 선생님이 먹다남긴 대궁밥을 보는 순간,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선생님은 둥둥군의 집으로 가 의붓어머니 자오를 만나 대궁을 훔쳐 먹은 사실을 털어놨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자오는 둥둥군 탓에 그녀의 체면이 깎였다며 둥둥군에게 몽둥이로 머리 등 온 몸에 난장질을 했다.이 때문에 둥둥군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 온몸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오는 한참이나 더 두들겨 팬 뒤에야 화가 풀렸는지 멈췄다.병원에 갈 생각을 조차하지 않은 그녀는 단지 둥둥군의 피흘린 상처에 형식적으로 연고만 발라줬을 뿐,그대로 방치했다.이미 둥둥군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음날 점심때가 돼도 둥둥군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덜컥 겁이 난 자오는 곧바로 외지에 나가 돈을 벌고 있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후 6시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아버지 장씨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둥둥군을 안고 곧장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둥둥군은 이미 저승길로 떠난 뒤였다.이에 겁이 난 자오는 남편에게 어젯밤 둥둥군이 화장실에 갔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이런 변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다.그녀는 남편과 함께 둥둥군의 시체를 산으로 끌고가 불에 태운 뒤 암매장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아버지 장씨는 둥둥군이 죽은 만큼 공안(경찰)에 신고했다.신고를 받고 도착한 공안당국은 현장조사를 실시했다.이상했다.둥둥군이 화장실에서 넘어져 다쳤다고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었다. 며칠 뒤 법의학자의 검시결과가 나왔다.하지만 전문가도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공안당국은 DNA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검사결과 둥둥군의 DNA와 자오의 몸에 뭍은 피의 DNA가 일치했다. 자오에게 의혹을 품고 있던 공안당국은 그녀를 불러 사건 일체를 자백받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공안 조사결과 전처와의 사이에 둥둥군을 두고 있는 장씨는 이미 아이 두명이 있는 자오와 결혼했다.뜬벌이인 장씨는 돈을 벌기 위해 외지에 나가 돈을 벌어 부치고 자오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냉혹하고 악랄한 자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둥둥군에게 욕을 하고 때리는 것은 다반사고,제대로 먹이지를 않아 둥둥군은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다.이러다 보니 둥둥군은 선생님이 남긴 대궁을 보고 참지 못해 몇 숟가락을 먹다가 결국 저승길로 떠난 것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日은행권 경제침탈” 유통반대운동 주도

    왕산 허위(1854∼1908)는 구한말 정미의병 때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려고 했던 의병장이다.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은 1996년부터 그의 호를 따 ‘왕산로’라고 불린다. 왕산뿐 아니라 왕산의 바로 윗 형인 성산 허겸과 맏형 방산 허훈도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군자금을 만들어 왕산에게 보내주기도 하고, 왕산과 함께 의병활동도 했다.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지며 독립운동을 했다. 왕산은 맏형 방산 허훈(1836∼1907)에게 글을 익히고 학문을 배우며 영남학파의 지식주의와 실용주의를 익혔다.27살이 되던 1881년에 아버지를 여읜 왕산은 10년 동안 후배들을 가르쳤고, 이 때 의병활동을 함께 할 동지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된 1895년 동학군을 피해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방산이 아우 성산 허겸과 함께 진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이다. 이 때 방산의 나이는 이미 환갑 가까이 됐다. 방산과 함께 피난 중이던 왕산은 김산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에 패한 뒤 세력을 다시 모으고 있었다. 이 때 왕산이 쓴 격문의 일부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안에 발을 내리고 앉았음이 이미 두어 해나 되었건만 의리를 좇아서 응모하는 자가 보잘 것 없다. 팔도 안에 참으로 의용과 지략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는가. 손을 내리고 바라만 볼 수 없기에 기필코 이 도적의 괴수를 소탕코자 하는 바이다. 여러분은 같은 소리로 응모하라. 비록 몽둥이와 허리를 가지고 달려들어 공격해서 용기를 도우면, 적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6년 3월 왕산은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다시 김산의진을 일으켰지만, 몇차례 관군에 패하고 해산하게 된다.1898년에 왕산은 이건석과 함께 구국상소를 올렸고, 이듬해에는 나중에 대한광복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상진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45살이 되던 1899년 왕산은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영희천 참봉 판임관, 성균관 박사, 소경원 봉사를 거쳐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을 전후해 주차일본공사관수원, 통정대부, 평리원 재판장 등 고위직에 올랐다. 이 동안 왕산이 한 활동 중 눈에 띄는 게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반대운동이다. 제일은행권 유통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전초를 만드는 작업으로, 우리 정부의 허가 없이 이뤄진 작업이다. 유통반대운동은 공제소에서 주도했지만, 일본공사의 압력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7월 공제소에 대한 해산령을 내렸다. 하지만 왕산은 동료들을 규합해 운동을 이어갔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교장/김학준 지방자치부 차장

    “개는 몽둥이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주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자기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보신용으로 개를 써야 할 형편이면 이웃에게 대신 잡게 했다. 얼마 전 초복을 앞두고 강화의 한 초등학교 교장이 사택에서 기르던 개를 잡은 뒤 교육청 간부들을 불러들여 학교급식소에서 개고기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학교급식 식중독 파동으로 사회가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교육자”라며 교장을 비난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교장이 교육위원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선거운동 차원에서 의욕을 부린 것이 해괴한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권력욕에 휩싸이면 판단력을 잃게 된다. 동서고금을 보면 권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형제끼리 죽이고,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교장의 행태가 이보다는 훨씬 낫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인가. 김학준 지방자치부 차장 kimhj@seoul.co.kr
  • [잘못된 관행 이젠 깨자] (2) 임의동행·강압수사

    [잘못된 관행 이젠 깨자] (2) 임의동행·강압수사

    경찰은 해마다 혁신과 수사 구조개혁 등을 외치고 있다. 개선도 적지 않게 되고 있다. 하지만 관행의 굴레로부터 자유롭다 할 순 없다. 불법적 임의동행, 인신구속과 자백에 의존하는 수사관행 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고소하려면 해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김모(40)씨는 지난 3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지하철역 화장실 앞을 지나던 중 점퍼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당신 언니가 납치됐으니 같이 가자.”며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순간적으로 ‘납치’라고 생각한 김씨는 필사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백화점 직원이 나섰다. 이에 마지 못한 듯 뒤늦게 신분증을 내민 남자는 다름아닌 경찰이었다. 이 경찰관은 “납치 용의자가 백화점에 나타날 거라는 제보가 있었고, 당신을 용의자로 잘못 본 해프닝”이라고 말하고는 사과도 없이 순식간에 도망치듯 사라졌다. 김씨는 “실수로 엉뚱한 사람을 검거하려 했다는 것은 이해한다 해도 그 뒤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것은 아직 국민 앞에 오만하기만한 공권력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면서 “그 때 놀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말했다. 이후 김씨는 해당 경찰서에 항의했으나 ‘납치극은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고 정 고소하고 싶다면 자작극을 벌인 사람을 상대로 하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들었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잘못된 관행은 수사과정에서도 이어진다. 아들이 강도 살인혐의로 구속됐다 1·2심에서 모두 무죄선고를 받은 아버지 조모씨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며 울먹였다. 조씨의 아들(당시 15세·중3년) 등 3명은 5년 전인 2001년 9월 강도 살인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다음해 2월 춘천지법 원주지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경찰관들이 조군 등을 조사하면서 구타 등으로 자백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6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압수사가 문제였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의 폭행 사실은 흡사 공포영화를 연상시킨다. 흰 종이로 감은 몽둥이로 목과 팔, 머리 등을 닥치는 대로 내리쳤는가 하면 소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도 했다. 결국 소년들은 2건의 미제 살인사건을 모두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거짓자백’했다. 조군의 아버지는 “20명이 돌아가면서 아들을 때렸고 취조 과정에선 아이를 가운데 잡아두고 경찰 2명이 앞뒤로 마주보고 서서 번갈아가며 폭행했다.”고도 했다. 그는 “맞은 사실 등을 말하면 부모를 못 만나게 할 거라거나 사형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세무 공무원으로 평생 국록을 먹고 살았지만 이젠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며 울먹였다. 하지만 법원이 조씨에게 결정한 보상은 위자료 7100만원이 고작이었다. 지난 19일 서울고법 민사13부는 “국가는 위자료 등 7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폭행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유죄’가 ‘무죄’로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자백’에 폭행까지 개입됐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길회 김준석기자 kkirina@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130)捐世(연세)

    儒林(638)에는 捐世(버릴 연/세상 세)가 나오는데,‘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捐자는 원래 ‘버려서 덜다’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돕다’‘기부하다’의 뜻이 파생하였다.用例(용례)에는 ‘棄捐(기연:자기의 재물을 내놓아 남을 도와줌. 내버리고 쓰지 않음),義捐金(의연금:사회적 공익이나 자선을 위하여 내는 돈),出捐(출연:금품을 내어 도와줌. 자기의 의사에 따라 돈을 내거나 의무를 부담함으로써 재산상의 손실을 입고 남의 재산을 증가시키는 일)’ 등이 있다. ‘世’의 字源에 대해서는 “‘葉’(잎사귀 엽)의 古文(고문),‘十’자가 세 개 모인 것, 돗자리를 짜고 새끼를 꼬는 데 쓰이는 도구”라는 등의 설이 분분하다.‘經世濟民(경세제민: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出世(출세: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됨)’등에 쓰인다. 죽음은 時空(시공)을 초월한 인류의 관심사였기에 표현이 다양하다.去(거),故(고),亡(망),沒(몰),崩(붕),死(사),殉(순),卒(졸),終(종),薨(훙)….考終命(고종명),棄世(기세),暝目(명목),別世(별세),死亡(사망),死去(사거),逝去(서거),捐館(연관),永眠(영면),長逝(장서),作故(작고),潛寐(잠매),絶命(절명),下世(하세)처럼 죽음을 이르는 單語(단어)들도 많다. 죽음은 形態(형태)에 따라,‘客死(객사:객지에서 죽음),絞死(교사:목 졸려 죽음),變死(변사:뜻밖의 사고로 죽음),病死(병사:병으로 죽음),非命橫死(비명횡사:뜻밖의 사고를 당하여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殉國(순국: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夭折(요절:젊은 나이에 죽음),自然死(자연사:노쇠하여 자연히 죽는 일),打殺(타살:몽둥이 등의 둔기에 맞아 죽음),被殺(피살:죽임을 당함)’과 같은 표현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무수한 내 이웃들의 죽음 가운데 자기도 결국 죽을 것이라는 자각에서 不安(불안)과 恐怖(공포)와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宗敎(종교)와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양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온 儒(유)·佛(불)·道(도) 三敎(삼교)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來世(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실적 삶에 의의를 두는 儒敎(유교)에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魂魄(혼백)의 結合(결합)과 分離(분리)로 이해한다. 죽음이란 자연의 法則(법칙)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요,後孫(후손)들의 생명 속에 자신이 부분으로 살아 있다는 確信(확신)을 갖는다.佛敎(불교)에서의 죽음은 色(색),受(수),想(상),行(행),識(식)의 五蘊(오온)이 모두 공(空)이고 地(지),水(수),火(화),風(풍)의 四大(사대)가 내가 아님을 바로 보는 것이다. 즉 生死(생사)의 業(업)과 煩悶(번민)에서 벗어나 涅槃寂靜(열반적정)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老子(노자)와 莊子(장자)는 사생의 문제를 氣(기)의 聚散(취산)으로 본다. 죽음은 삶과의 비교 판단에서 오는 스스로의 속박과 굴레일 뿐, 기뻐하거나 싫어할 대상이 아니다.莊子(장자)가 아내의 주검 앞에서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 것도 이런 脈絡(맥락)일 것이다. 김석제 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정말 친부모 맞아? 아들 마구 때려죽인 사연

    “정말 친부모 맞느냐구요? 양부모라도 그렇지,하물며 친부모가 아들이 숫자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고 때려죽이기까지 하냐구요.” 중국 대륙에 세살바기 아들이 가르쳐준 숫자를 제대로 못 외운다고 마구 때려 숨지게 한 엽기적이고도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친부모가 붙잡혀 10년 동안 완전히 사회와 격리됐다. 중국 동중부 저장(浙江)성의 항저우(杭州)시 샤오산(蕭山)구 인민법원은 세살짜리 아들이 가르쳐준 숫자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고 나무 몽둥이로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붙잡힌 젊은 부부에게 고의상해죄를 적용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고 광주일보(廣州日報)가 30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 엽기적이고 잔인하기가 이를데 없는 친부모는 허난(河南)성 출신의 정하이셴(鄭海現) 부부로 부모로서의 소양을 조금도 갖추지 못한 파렴치한 그자체였다. 돈도 없고 배움도 부족한 이들 부부는 허난성의 한 오지 마을에서 아들 정보(鄭博·3)을 보다 좋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불원천리 항저우로 이사왔다. 이들 부부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며 어렵게 생활하면서 세살바기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그러던중 지난 4월 29일,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들 부부는 너무나 화가 났다.세살바기 아들에게 숫자 세는 법을 아무리 가르쳐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까닭이다.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정씨의 아내는 아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회초리로 몇 대 때렸다.이때 아들이 숫자를 외우는 것을 너무너무 싫다며 앙탈을 부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씨는 아들에게 너무너무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조금 전에 가르쳐준 숫자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은 점점 소리 높여 울며 이들 부모를 자극시켰다. 참다 못한 이들 부부는 아들에게 뺨을 갈기거나 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뭇매를 가했다.이들 부부의 구타는 이웃 주민들이 말리려고 온 저녁 때까지 아들을 두둘겨 팼다.아마 이들 주민들이 달려오지 않았으면 그자리에서 즉사시켰을 것이다. 밤 12시 무렵,아들 정보가 한바탕 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이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이들 부부는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아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티없이 맑은 눈을 가진 세살바기 아들은 부모를 남겨두고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법의학 의사는 아들 정보의 사인을 머리 부분에 두들겨 맞은 충격에 따른 손상,구토물이 기도를 막은데 따른 질식사로 규정했다. 더욱이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점은 세살짜리 정보의 손·등·사타구니 등 온몸에 두들겨 맞아 생긴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씨 부부는 뻔뻔스러워 주변 사람들의 분노케 했다.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반성의 빛을 보이기는 커녕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정말 고의가 아니었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부모로서의 최소한의 혐치도 없는 파렴치한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온라인뉴스부
  • 王자형 터널 500명수용 규모 “日본토~한반도 잇는 초계지”

    王자형 터널 500명수용 규모 “日본토~한반도 잇는 초계지”

    ■ 강제 동원된 거문도 생존자 증언 “비가 오고 파도가 높게 치는 날에도 배를 타고 다른 섬에 건너가야 했어.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십장’이라는 일본인들이 사정없이 우리들을 방망이로 내려쳤지. 나야 워낙 어렸지만 연세 많은 아저씨들까지 스무살도 안돼 보이는 십장들한테 얻어맞는데, 정말 비참하더라고.” 1944년 거문도 군사시설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이성화(76) 할아버지는 격앙된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일본군이 매일 필요한 인원을 요청하면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서 ‘어느 집 누구 내일 나오시오.’ 하는 거야. 나가지 않으면 식량배급표를 안 주는데 안 나가고 배길 재간이 있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우리 집에 남자는 나뿐이라 고기잡이도 못하고 매일 끌려다녔지.” ●할아버지, 청소년 100여명 노력동원…몽둥이질 일삼아 16세 나이에 강제 부역을 해야 했던 이성화 할아버지는 “60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본군이 섬에 머무르며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저지른 만행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1938년 5월 일제는 전국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시체제에 맞춰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37년 300만명이던 조선 내 노동가능인구를 1941년 400만명으로 늘려잡는다. 노동가능 연령대를 20∼40세에서 14∼50세로 대폭 확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김윤미(26) 조사관은 “생업에 피해를 받으며 무임금으로 부역에 동원됐으면서도 강제동원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군사시설들은 1944년 12월부터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 걸쳐 지어졌다. 일본인의 관리감독 아래 황해도 옹진 등의 내국인 발파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동원된 100여명의 주민들은 돌을 옮기고 굴을 파는 등 단순작업을 시켰다. 거문도를 구성하는 3개 섬 중 동도에서만 9개의 터널이 발견됐다. 이중 7개는 해안가에 지어졌으며 배를 댈 수 있도록 콘크리트 접안시설까지 갖췄다. 터널은 폭 2.5∼3.0m, 높이 3m, 길이 15∼25m로 h·I·王·T자형의 다양한 형태로 지어졌다. 위원회 한흥수(45) 조사1팀장은 “전쟁이 났을 때 군수물자, 식량, 어뢰정 등의 보관·대피시설로 활용하거나 주변 정찰을 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王자형 터널의 경우 최고 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고 해안가 터널은 군용정 4∼5척까지도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규모”라면서 “특히 콘크리트 벽의 두께가 30㎝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고 말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 했을 가능성”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큰 일제시대 군사시설은 제주도의 터널 300여개였다. 그러나 거문도의 시설물은 제주도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지영임 연구원은 “이번에 처음 학계에 알려진 거문도 군사시설은 일제가 한반도 자체를 전장(戰場)으로 삼으려 했음을 뜻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면에서 제주도 군사시설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서도리 불탄봉(해발 195m) 정상 근처에 있는 참호 2개는 군수물자 보관용이라기보다는 주변 정찰의 용도가 더 큰 것으로 파악됐다. 참호에서는 남동쪽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지나는 선박의 움직임 등 주변 정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콘크리트로 입구 두 곳에는 철문을 달 때 쓴 경첩이 남아 있어 유사시 공격에 대비해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찰용 참호를 지을 때에는 주민들이 위치와 형태에 대해 알 수 없도록 비밀리에 진행했다. 이규동(81) 할아버지는 “우리는 중턱까지 시멘트나 목재 같은 물자를 올려주는 일만 했고 그 위로는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다.”면서 “불탄봉에 주둔해 있던 육군들이 직접 짓고 포탄을 숨기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돌로 만든 80m 이상 전쟁용 방어벽도 건설 한 주민은 “일주일에 2∼3차례 수송용 비행기가 진해에서 물자를 날라 왔고 1944∼45년 사이에 함정 6∼7대가 항상 정박해 있었다.”고 증언했다.“해안가에 막사를 짓고 일본군과 기술자 100여명이 생활을 했지. 권총을 찬 해군이 군수물자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게 권총을 보여주며 나를 귀여워하기도 했어. 나중엔 일본군이 집단 이질에 걸려 일본인 대위가 친구집에서 매실즙을 마시고 나았다고 들었어.”(70세 원용삼 할아버지) 가운데 섬인 고도 거문리의 회양봉 중턱에서는 돌을 쌓아 만든 높이 60∼80㎝의 방벽이 발견됐다. 산책로를 따라 섬의 북쪽을 두르고 있는데 눈으로 확인된 것만 80m 이상이었다. 거문리 신사터 뒤편에는 1938년 일본이 거문리에 130m에 이르는 방파제를 개축했다는 기념비가 있다. 1904년 일본군이 매설한 해저 케이블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직경 약 1㎝의 구리선을 수십가닥 엮어 만든 케이블은 광복 전까지 일본군이 통신용으로 사용했다. ●일본식 건물, 신사(神社)터…황민화 등 일제 잔재 그대로 현재 거문도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어업·양식업에 종사하거나 낚시꾼을 상대로 하는 민박·식당업을 하고 있다. 하루 두번 관광객과 주민을 실은 배가 오갈 뿐 조용한 모습이다. 그 속에 일제의 잔재가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도에는 일본식 건물의 흔적이 많다. 고도는 원래 주민들이 살지 않던 곳이었으나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일본인 거주지역이 됐고 현재는 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있는 중심지다. 일본인들이 거문도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로 1897년 원양어업장려보조법을 만들어 국가차원에서 어업이민을 장려했다. 김윤미 조사관은 “연중 어장이 풍부하고 지리적 요충지인 거문도는 일본인을 이주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목적으로 활용하기에 최적의 섬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1942년에는 87가구가 이주해 346명의 일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250가구 이상 살았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일본인이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소학교 3곳과 신사 터도 그대로 남아 있다. 비석만 흉칙하게 남은 200여평 넓이의 신사터는 현재 헬기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도 소학교를 다닌 원용삼 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10장의 카드를 주고 한국말을 사용하면 친구에게 카드를 뺏도록 해 카드의 개수가 적으면 마구 때렸어. 정월 초하루와 해군이 출격하기 전날엔 동네사람들을 모아 억지로 신사참배도 시켰지.”라면서 60여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글 사진 거문도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하필 거문도에 왜 지었나 거문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중간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와 부산의 사이에 있지만 거리로 따지면 일본에 더 가깝다. 거문도∼부산이 198㎞인 반면 거문도∼규슈는 161㎞밖에 되지 않는다. 예부터 일본∼중국, 여수·부산∼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이 풍랑을 피하거나 식수를 얻는 중간 기항지로 이용한 이유다. 이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열강들은 호시탐탐 거문도를 점령할 기회를 노렸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885년 ‘거문도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영국해군은 거문도에 무단으로 침입해 2년 동안 점령했다. 그래서 거문도에는 영국군이 만든 국내 최초의 테니스장과 영국군 묘지가 남아 있다. 일본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거문도에 해군과 육군을 1개 중대씩 배치했다. 그러다 1944년 말 군사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이미 미군이 일본 오키나와까지 치고 들어가 있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일제는 최후의 항전을 앞두고 거문도를 본국과 한반도를 잇는 초계기지 겸 병참기지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도와 서도 사이 내해(內海)의 물결이 잠잠하고 외부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활용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비슷한 시기 제주도에 건설된 군사시설은 지하갱도 300여개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제주대 지영임 연구원은 “제주 해안가 갱도는 길이가 40∼60m에 이르며 함정을 출격시킬 수 있는 추진장치도 발견됐다. 실제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제주도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씨줄날줄] 리콴유의 충고/이목희 논설위원

    1990년대 중반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 리콴유 전 총리를 만나는 현장을 취재했다. 리콴유의 형형한 눈빛과 자신감, 국제정세를 꿰뚫는 언급들. 플라톤이 이상론으로 펼쳤던 ‘철인 통치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몇번 더 싱가포르를 갔다. 안정적 일자리, 영구임대주택 대량보급, 부정부패가 없는 정부에 우대받는 기업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버무려놓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싱가포르 국민이 느끼는 행복감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치·언론 자유의 통제, 오락문화의 규제가 건조한 삶을 만들고 있었다.“숨통을 터주지 않으면 강력한 체제저항이 나타날 수 있겠다.”는 걱정을 한때 해봤다. 그러나 리콴유의 통찰력은 그런 우려를 날려버렸다. 정권에 염증을 내는 분위기가 나타나자 총리직을 던지고 선임장관-고문장관으로 조금씩 물러앉았다. 아들 리셴룽도 정치력을 충분히 검증받은 뒤 총리직에 오르도록 했다. 최근에는 토플리스 쇼 ‘크레이지 호스’ 공연장을 허가하는 등 유흥 분야를 풀고 있다.“자유는 질서속에만 있다.”고 강조한 리콴유. 사실상 독재자였지만 뛰어난 자질과 청렴성은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무엇보다 국민 불만이 폭발하지 않도록 미리 대처하는 현실주의자였기에 그는 성공했다. 서울을 찾은 리콴유가 한국사회를 향해 일갈했다.“노조원과 전경이 격렬히 대치하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데 사용하면 한국은 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몽둥이를 드는 제스처까지 쓴, 실감나는 충고였다.“시간만 주어지면 중국이 모든 것을 따라하게 되므로 한국은 중국이 흉내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팽창하는 중국·인도 사이에서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미래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국이 노사갈등을 접고 비슷한 노선을 따르라는 제안은 설득력이 있었다. 싱가포르는 인구 400만명의 도시국가다. 리콴유가 한국 지도자라면 그의 뜻대로 국민을 이끌 수 있을까. 인구가 10배 이상이며 남북이 갈라진 나라. 민주주의 욕구가 크고, 그리 순종적이지 않으며, 자기 주장이 강한 국민성. 싱가포르보다 몇배는 힘들 거라고 본다. 리콴유를 넘어서는 뛰어난 지도자가 그리운 이유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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