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몽둥이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상고사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가지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부산시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극우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16
  • 폭력 없는 미래/마이클 네이글러 지음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명예교수이자 세계적 평화학자 마이클 네이글러의 책 ‘폭력 없는 미래’(이창희 옮김, 두레 펴냄)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비폭력은 강하다.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수세적 대응’이 아니라, 폭력을 이기는 ‘적극적 전략’이다. 비폭력은 가끔 효과가 있으며, 궁극적으로 항상 효과가 있다. 폭력은 가끔 효과가 있지만, 궁극적으론 전혀 효과가 없다. ‘비폭력만이 살길’임을 역설하는 책은 많다. 비폭력의 역사적 근원을 추적하고 철학적 가치 체계를 탐구하며 종종 비폭력 운동가의 숭고한 삶을 예로 제시한다. 언어는 매우 차분하다. 네이글러가 비폭력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는 비폭력을 이론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매우 강력한 신념으로 비폭력의 당위성을 소리 높여 주창한다. 언어는 차분하다기보다 간혹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선동하되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선동한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 수많은 사례를 소개하고, 비폭력적 삶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네이글러에게 비폭력은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아니다. 비폭력은 ‘적극적 행동’이자 ‘역사적 필연’이다. 그는 역사상 비폭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해 왔는지 역설한다. 서기 39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상을 세우겠다는 로마 칼리굴라 황제의 계획을 중단시킨 것은 예루살렘에 모여든 맨손의 유대인들이었다.1930년, 인도 구자라트주 소금공장에서 몽둥이세례를 받으며 소금세 폐지를 주장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그 동료들의 ‘사티아그라하’(‘진실에의 헌신’을 뜻하는 인도어) 행진은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지칭하는 관용어가 됐다.1943년, 나치 치하 베를린에서 게슈타포가 비유대인들과 결혼한 유대인 남성들을 로젠슈트라세 수용소로 끌고 갔을 때 이들을 석방시킨 것은 6000여명의 아내와 어머니들의 집단 항의였다. 네이글러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남의 권리를 무시하고 오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국가가 행복해진 적은 없다.”면서 “일단 폭력을 선택하면 안전과는 결별해야 한다.”고 말한다.9·11 사태 직후 취해진 미국의 폭력적 대응방식에 대해서는 “사상 유례 없는 군국주의화” “매카시와 밀로셰비치 시절 수준의 인권제한” 등 분노에 가까운 비판을 퍼붓는다. 네이글러는 냉소적인 사람은 되지 말라고 당부한다. 비폭력도 훈련과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제안한 실천전략 ‘우리 자신의 비폭력적 미래를 위한 다섯 단계’는 ‘생각의 진정함’→‘자신의 마음 돌보기’→‘관계맺기 속의 진실’→‘비폭력적 소양 쌓기’ 과정을 거쳐야 ‘평화를 위한 행동’에 가 닿는다. 사회와 세계의 평화는 자신의 평화, 이웃과의 평화에 뿌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이다. 폭력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미디어와의 절연도 제안한다.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폭력을 거부하는 자세가 폭력을 이기는 필수요건이란 얘기다. 미국의 주요 고등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채택됐고,2002년에는 전미국도서상을 받았다.2만 25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열린세상]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덫/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열린세상]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덫/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그들은 우리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르고 치켜세워서 죽이고 있어요.” 작년 여름방학 때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에서 만난 한 장족(藏族:티베트족) 청년이 내게 건넨 귀엣말이다. 최근 티베트의 라싸에서 수십명의 시위군중이 사망하는 유혈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다는데 그의 안위가 걱정된다.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기조는 채찍보다 당근이다. 이번 티베트 사태처럼 비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단 어르고 달래는 회유책을 펼친다. 중국 현행헌법 제4조를 보더라도 그렇다.‘중화인민공화국의 각 민족 인민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민족의 평등·단결·상호 협조관계를 옹호하며 이를 발전시킨다. 국가는 소수민족의 특성과 필요에 근거하여, 각 소수민족지구의 경제와 문화발전에 최선을 다한다. 각 소수민족 집거의 지방은 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자치기관을 설치하며, 자치권을 행사한다. 각 민족자치 지방은 모두 중국과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각 민족 모두는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으며, 모두 자기의 풍속과 관습을 유지하고 개혁할 자유를 가진다.’ 실제로도 한족(漢族)에 한해서만 1가구 1자녀만 낳게 하였고(저출산 문제로 최근 전면폐지 검토) 소수민족은 두자녀 이상을 낳을 수 있게 하였다. 우리의 국회의원 격인 전인대 대표 의석 비율을 소수민족에게 2배가량 많이 배정해 준다. 자치정부의 제1인자는 한족이 맡지만, 제2인자는 현지민족에게 맡긴다. 소수민족 집거지역의 자체 문자를 중시한다.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가보더라도 각종 간판에는 한글이 한자보다 위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소수민족에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명문대학 입학에 정원외 입학 등 특혜를 부여한다. 그 대신 현지 소수민족의 엘리트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에 세계 최다를 자랑하는 한족을 풀어놓는다. 어떤 외국인은 이토록 관대한(?) 중국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감격스러워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것이 가장 무섭게 느껴진다. 과거 일제의 이민족 탄압정책은 과격하였지만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에 비해 중국의 그것은 민족 주체성 자체를 마비시켜 버리는, 훨씬 교활하고 치밀한 민족말살 정책이라는 생각이다. 12억의 한족과 1억의 55개 소수민족을 합한 13억 인구, 한반도 면적의 40배를 넘는 영토를 하나로 묶는 중국, 막강한 중국의 힘은 중화사상이라는 자부심에 근거한 포용성의 제도화에서 나온다. 그러나 중화사상도 다른 각도로 살펴보면, 자신만이 전세계의 중심이라는 과대망상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오랜 의문 하나는 ‘과연 12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단일민족이 가능한가?’이다. 골상 자체가 한족과 다른데도 불구하고 중국 최북단 헤이룽장성에 사는 기골이 장대한 천(陳)선생도, 최남단 윈난성에 사는 영락없는 월남사람같이 생긴 롼(阮)여사도 모두 “나는 한족이야.”라고 자족하고 있는데…. 중국 건국 초기 최고지도자들은 민족의 정체성이 명확한 8%만 55개 소수민족으로 구분해 놓고 나머지 92%를 모조리 한족으로 한데 뭉뚱그려 놓았다. 따라서 실제로는 소수민족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류민족인 한족, 즉 메인스트림에 속한다는 착각의 덫에 걸려 살게끔 한다. 지금은 우리가 민족독립을 지상목표로 삼고 외세와 투쟁하던 20세기 전반이 아니다.21세기 지금 우리의 주요 국가과제는 국가통합이다. 이번 티베트 사태에서 우리는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티베트의 평화와 자유를 염원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단일민족이면서도 양분된 국토에다가 다시 지역·계층간, 동서남북으로, 내편 네편 갈라진 우리의 처지를 자성하며, 거대 중국이 소수민족들에게 도대체 어떤 마취제를 주입하였기에 통합을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는지, 그 마취제의 성분도 함께 연구하여야 할 때가 아닐까. 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 산 고양이로 만든 엽기요리 中서 논란

    중국에서 유기된 고양이로 만든 음식을 파는 엽기 식당이 성행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후난(湖南)성 상탄(湘潭)시에 위치한 한 식당은 ‘고양이 고기’(猫肉)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영업하고 있다. 이 식당에서는 고양이를 산 채로 물에 삶아 만들어낸 ‘수이주훠먀오’(水煮活猫·생 고양이를 물에 익힌다는 뜻)라는 요리를 팔고 있어 주위를 경악케 했다. 요리사들은 우선 살아있는 고양이를 단단히 고정시킨 후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 쳐 기절 시킨다. 이 고양이를 끓는 물에 넣고 삶은 후 털을 뽑고 고기를 썰어내면 ‘엽기 요리’가 완성된다. 이 식당의 주인은 “식당에 파리만 날린다.”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인근 주민들은 “장사가 매우 잘되는 식당”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인근 창사(長沙)시의 한 식당도 이 같은 불법 고양이 요리를 판매하고 있다. 창사시 한 일간지에 이를 신고한 주민 리(李)씨는 “얼마 전 우연히 고양이 고기를 판다는 식당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갔다.”면서 “주인이 ‘고양이 고기는 자양식품’이라며 극구 권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 근(0.6kg)에 38위안(약 54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주방 쪽에서 끊임없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면서 “가보니 주방장이 몽둥이로 고양이의 머리를 내리치고 있었다.”며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리씨는 “기절한 고양이를 뜨거운 물에 넣자 다시 한번 고양이가 요동을 쳤다.”면서 “너무 끔찍하고 잔인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 창사시 동물보호협회 관계자는 “최근 창사·상탄 등지에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100여 마리의 고양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일이 벌어졌다.”면서 “불법 식당 업자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산채로 잡은 고양이는 주로 식당에서 요리돼 판매되고, 죽은 고양이들은 불법 시장에 나와 양고기로 둔갑해 팔리고 있다.”면서 “이 같은 유기 고양이 등으로 만든 음식은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등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포털 사이트 ‘163.com’에 2500여개의 댓글을 달며 “너무 잔인하다.” “중국인임이 부끄럽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등의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한편 중국 당국은 지난 2002년 중국을 강타했던 사스의 발병원이 사향고향이로 지목된 후 사육·포획·매매·요리 등을 전면 금지해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봄 기운이 완연한 요즘,30대 직장인들의 술자리에는 ‘벚꽃 구경’과 함께 ‘백골단’이 단골 메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경찰이 불법 시위 엄단 조치의 하나로 발표한 ‘체포 전담반’이 90년대 중반까지 시위 현장에서 흰색 헬멧을 쓰고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던 ‘백골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곤 했던 대학가 시위와 ‘백골단’을 둘러싼 30대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90학번인 조모(37)씨는 봄만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린다. 실제 상처가 남아 있다기보단 그저 화인처럼 남아 있는 곤봉 폭행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이던 90년은 수업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매일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 진압에 픽픽 쓰러지고, 농민들은 시장 개방에 비쩍 말라갔다. 책을 든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시절 조씨에게 ‘백골단(白骨團)’은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991년 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학과 동료를 위해 법원 마당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 앞에 전·의경들이 서 있었고, 경찰 기동대장은 해산을 요구했다.“평화시위를 해산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한 지 10여분 뒤. 청재킷과 흰 운동화, 몽둥이를 든 백골단이 전·의경 머리 위로 날아오르듯 확 튀어나오더니 시위대를 마구 팼다.“몸집이 참 큰 사람들이었죠. 그저 공포였습니다. 철거예정지에 가면 가끔 조폭들과 연계해 나타나기도 했죠. 대학생들이 왜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냐고 말들 많지만, 배우는 학생들이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게 21세기가 원하는 협동심과 리더십을 공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죠.” 직장인 이모(36)씨도 봄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벚꽃놀이 갈 생각에 설레는 게 아니라 대학 새내기 시절인 91년 봄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학교 앞 집회에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매일 집회가 계속 됐죠.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굉음과 강의실까지 스며드는 최루가스가 절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집회가 시작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강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강씨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대생 김귀정씨도 을지로 골목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숨졌다. 이후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고, 매일 대규모 집회가 서울시청 주변에서 열렸다.“서울시청 광장을 놓고 백골단·전경과 매일 싸웠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장소도 많은데 왜 꼭 서울시청 광장만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씨는 9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바지·청재킷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명동, 시청, 종로, 을지로 거리에서 숨바꼭질을 계속했다.“백골단은 전·의경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력’을 보유했죠. 한마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경찰이 바로 백골단이었습니다. 두꺼운 진압복을 입은 전·의경은 그저 특정 장소를 지키는 일에 주력했지만, 백골단은 검거가 목적이었죠. 백골단에 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뛰었던지….” 최근 경찰이 체포 전담반을 꾸린다고 하자 이씨는 가슴이 벌렁거린다.“지금이 대체 어떤 때입니까. 진짜 과거의 백골단을 다시 만든다는 얘기는 아니겠죠?” ●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대상´ 통일운동가 황선(34·여)씨도 씁쓸한 추억담을 털어놨다.92학번인 황씨는 같이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백골단에 의해 숨지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참 많이 닦아냈다고 돌아본다.“87년 민주화 이후에 집회시위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백골단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죠. 당연히 집회 참가자들은 더욱 분개했고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운동가 안진걸(37)씨도 백골단에 대한 ‘추억’ 아닌 ‘추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안씨는 백골단이 단순히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존재’였다고 말한다.“무작정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백골단이 누가 시위대고 누가 시민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죠. 이유도 모른 채 다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96학번인 대학생 황모(31)씨는 백골단의 끝물을 맛봤다.97년 노동절 집회 때 한양대 근처에서 당한 토끼몰이식 폭행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집회는 80년대와는 달리 선배의 강압 없이, 자기 생각대로 나가든 말든 결정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경찰은 96년 있었던 한총련 집회 뒤 또다시 강경 진압을 남발했다. 집회에 갔다가 여자 후배 한 명과 함께 백골단에 쫓겼고 여자 후배를 멀리 피신시킨 뒤 자신만 집중 폭행을 당했다.“백골단은 시위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생겼던 조직입니다. 해외에도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리는 경찰들이 있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방어선을 유지하다 시위대가 흥분해 주변 시민을 위협하면 그제서야 곤봉을 듭니다. 무조건적인 체포와 폭력진압을 위주로 하는 백골단과는 성격이 다르죠.” 중학교 교사가 된 96학번 이모(31·여)씨는 같은 대학, 같은 학번 노수석씨를 기억한다.96년 초 새내기였던 이씨는 선배들의 권유로 등록금 투쟁에 나섰다. 이씨는 “당시에도 등록금은 치솟고 있었고, 신입생 때는 무엇이든 참여하고픈 생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남대문에 다다르자 ‘등록금 투쟁’ 구호는 ‘정권 타도’로 바뀌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최루탄이 터졌다. 이씨는 남자 동기의 손을 잡고 서울역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백골단이다. 남대문엔 골목이 많다. 큰길로 뛰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었다.“대부분 서울역으로 뛰었죠.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노수석씨를 비롯한 몇몇이 골목으로 뛰었다는 거예요. 골목은 목격자도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데….”결국 노씨는 백골단에 폭행당해 숨진 채 발견됐다.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유모(32)씨는 백골단하면 촌스러운 청재킷이 떠오른다.96년 여름, 신분증 검사도 떠오른단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측은했다고 말했다.“연세대에서 8월 사태가 있었죠. 그리고 교문을 들어갈 때면 신분증 검사를 해야 했어요.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서 시킨다고 폭력까지 휘둘렀던 백골단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백골단으로 불리는게 너무 싫었어요” 90년대 초반 광주에서 ‘백골단’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던 전남지방청 소속 한모(44) 경사에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누가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당시엔 초임 경찰관 가운데 덩치가 좋고 날렵한 사람들이 대거 검거전담반으로 차출됐죠. 백골단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진압복도 입지 않은 채 대학생들이 휘두르는 쇠파이를 막느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더이상 그런 아픔은 없어야 겠죠.” 회사원 이모(32)씨는 98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그가 기억하는 백골단은 시위를 진압하는 ‘최후의 수단’이다.“의경 입장에서는 하얀 헬멧과 청재킷만 봐도 힘이 났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대학생들 앞에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백골단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씨에게 대학 시절 백골단은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전·의경 복무 시절 시위 현장에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갑자기 시위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싫어졌어요. 어떤 생각도 뛰어넘은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었죠.” 사건팀 nomad@seoul.co.kr ■ 백골단을 아시나요? “백골단이요? 알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백골부대를 모르는 사람 있나요.” 백골단이 한창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벌써 어엿한 대학생과 직장인이 됐다. 그들에게 백골단은 그저 생소한 이름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회사원 김모(25·여)씨는 백골단을 백골부대의 다른 이름으로 알았다.“백골단, 유명한 부대잖아요. 여자인 저도 아는 걸요. 해골 부대 마크 있고…. 철원에 있잖아요. 백마부대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대 중 하나 아닌가요.” 백골단은 80∼90년대 활동했던 사복 시위 진압대라고 알려주자 김씨는 몹시 당황했다.“그런 진압대가 있었나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리 그 당시 유치원생이었지만 우리 근대사의 일부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부끄럽네요. 인터넷에서 좀 찾아봐야겠어요.” 새내기 대학생 정모(19)씨도 백골단을 부대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글쎄요. 왠지 군대쪽에 관련된 거 같긴 한데…. 학교 다닐 때 백골단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아직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돼 잘 모르겠네요.” 정씨는 기자로부터 백골단의 의미를 알게 되자 되레 의아해했다.“정말 그런게 있었나요. 진짜 조선시대 이야기 같습니다. 당당하게 경찰복을 입고 진압하지 왜 치사하게 사복을 입고 진압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직장인 최모(26)씨도 백골단은 금시초문이었다. 최씨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모습을 담았던 영화 ‘화려한휴가’를 본 뒤 관련 책 등을 읽어봤지만 백골단은 난생 처음 듣는 단어였다. “사복경찰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그들이 백골단이란 이름으로 움직인 조직원들인지는 몰랐습니다. 고작 20여년밖에 안 된 일인데 정부가 교묘히 국민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나네요.”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깔깔깔]

    ●철창안의 참새 참새 한 마리가 달려오던 오토바이와 부딪치면서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마침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행인이 새를 집으로 데려와서 치료를 하고 모이를 준 뒤 새장 안에 넣어 두었다. 한참 뒤에 정신이 든 참새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내가 오토바이 운전사를 치어서 죽인 모양이군. 그러니까 이렇게 철창 안에 갇힌 거지.”●적당한 거리 결혼을 앞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부부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편히 살 수 있다고 하던데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렇다, 나도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럼 적당한 거리란 구체적으로 뭔가요?” 아버지는 주위를 살펴보고 엄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엄마가 몽둥이로 때리려고 할 때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적당한 거리라고 한단다.”
  • 강도가「님」되니 “더 놀다 가시라”

    강도가「님」되니 “더 놀다 가시라”

    <제1화> 탐라「비바리」울린 얘기 F=파렴치 백수건달 얘기를 하나 할까? 있지도 않은 매부를 팔아서 순진한 「탐라 아가씨」를 울린 친구가 있어. D=재주 좋은 아저씨군. F=충남 대전에 산다는 정재성(鄭在誠·27)이 그 주인공인데, 직업도 없이 빌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친구야. 며칠전 서울역에 나갔다가 예의 탐라 아가씨 송(宋)모양(18)과 인연을 맺은 거지. 올봄에 제주에서 여고를 나오고 취직차 상경했던 아가씬데 취직에 실패, 실의를 안고 귀향하던 길이었어. 정에게 『목포가는 완행열차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어본게 탈이었어. G=눈물의 목포행 완행열찬가?(웃음) F=같이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동행하면서 각본을 짠거지. 자기 매부가 한국은행 계장인데 까짓 취직쯤이야 하고 큰소리 친거야. 집에 가있으면 자기가 전보로 부를테니 그때 사진·이력서 지참코 급히 상경하라고 「고마운 분」행세를 그럴 듯하게 했어. E=물론 매부 비슷한 사람도 한국은행엔 없었겠지. F=2일 후에 「취직 결정 급상경」전보를 받고 단숨에 온 그 아가씨를, 서울역 앞 무허가 하숙에 잡아두고는…. D=그 다음엔 얘기 안해도 알겠다. F=이 친구 그 아가씨 손가락에 낀 금반지까지 빼먹었는데 19일 동안 꿩도 먹고 알도 먹다가 쇠고랑찼지. 그런데 이친구 하는 얘기가 『그 아가씨가 삼삼해서 그랬다. 출옥한 뒤에 정식으로 구혼하겠다』야. A=의리는 있다 이거지?(웃음) <제2화> 밤에 쌓아올린 만리장성 E=하수구로 사라진 신출귀몰 강도 얘기를 할까? 얼마전 성동서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강도 피해 신고가 들어왔어. 출동을 해보니 20만원을 갖고 집앞 하수구로 강도가 튀었다는 거야. 독안에 든 쥐지. 그 하수구는 어찌나 「메탄·개스」가 많은지 「개스·마스크」를 해야 들어갈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분명히 강도는 20만원을 품에 안은채 기절해 있으리라고 믿었지. 그런데 웬걸? 하수구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간곳이 없어. H=「메탄·개스」와 함께 사라지다군. E=결국 수사를 단념하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얼마뒤 이 녀석이 용산서에 걸렸어요. 역시 강도짓을 하다 잡혔는데 전과를 캐다보니까 예의 하수구 증발 사건을 불더래. 그런데 전혀 엉뚱한 비밀이 숨어 있었지 뭐야? I=말 못할 사연인가? E=그렇지. 그친구가 고백한 「그날밤에 있었던 일」을 들어보면-먼저 도심(盜心)을 품고 담을 넘어가 지하실로 스며들었어.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다 보니 아차! 깜박 잠이 들고 말았어. 그때 공교롭게도 주인여자가 물건을 가지러 지하실에 내려왔는데 문소리에 그 친구가 깨어나고 말았어. 얼결에 옆에 있던 몽둥이를 들고 위협, 안방까지 끌고 갔지. 때마침 남편은 출장 중이고 그집엔 부인과 식모 단 두사람뿐이었어. 별수 없이 요구하는 대로 돈(20만원)을 내주었지. 그런데 그때 시간이 너무 일렀어요. 통금 해제가 되려면 아직 멀었고. 한밤중 한 방에 「여와 남」이 같이 있으니…. D=막간 이용한 「게임」을? E=결국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참 묘하지. 모두 세차례의 관계를 했다는데, 그중 첫번째는 이 친구가 강제로 덮친 것이지만 나머지 두번은 여자 쪽의 간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나. E=그래 강도로 들어갔다 「님」이되어 나오게 된건데, 통금 해제가 되고 막 방문을 나서는데 식모에게 들키고 말았지 뭐야. 다급한 김에 마나님이 외치는 소리가 『강도야!』 A=『강도님을 고이 보내드리오리다』가 망했군.(웃음) <제3화> 3살박이 소녀심청 A=지난 주의 「빅·이벤트」는 역시 청평호 「버스」추락사고였지. B=80여명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버스」사고 신기록을 수립한 사건이었어. A=처음 그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갈 때는 피투성이가 된 시체가 뒹구는 아비규환을 연상하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더군. E=이윽고 와글와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 특히 물속에 잠긴 「버스」를 끌어 올릴때는 유가족, 인근 주민, 기자… 천여명이 모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A=물결이 일면 「버스」를 끌어올리는데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체를 흘릴 염려가 있어서 조심 조심 작업을 하고 있는 판인데, 「모터·보트」한대가 윙윙거리면서 마구 헤집고 다니는 거야. 청평유원지에 놀러온 족속이었지. E=잠수부들이 몽둥이를 들고 올라가서 죽인다고,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었지. B=이번 사고 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 얘기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이가 살았다는게 불가사의야. 어머니가 창 밖으로 던져서 살아 났다고 짐작되는데, 「버스」가 낭떠러지에서 물에까지 떨어지는 시간이 2초 정도였어.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아이를 밖으로 던질 수 있었겠느냐는 거지. A=「올림픽」 선수라도 그렇게는 못할거야. C=그런데 어쨌든 아이는 살아났고, 그 아이 때문에 감옥에 있던 아버지도 풀려나오게 됐고. B=아버지가 석방된 건 순전히 기자들의 덕이라 할 수 있지. 기자들이 담당 판사에게 석방시키도록 간청했으니까…. A=그래서 명숙(明淑·아이이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효녀심청이」가 된 셈이지. [선데이서울 71년 5월 23일호 제4권 20호 통권 제 137호]
  • [생각나눔 NEWS] 사형수 → 무기형 감형의 두얼굴

    “선원은 물론 병으로 귀국하기 위해 승선한 사람까지 범행은닉 목적으로 살해하는 등 인간의 행동으로 보기 어려운 범행을 저지른 만큼 원심의 형량은 결코 무겁지 않다.” 대법원은 지난 1997년 7월26일 해상강도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중국동포 전재천(49)씨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전씨는 199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의 주범. 남태평양 사모아섬 부근 해상에서 열악한 작업조건과 선상 폭력에 앙심을 품고 다른 중국동포 선원 5명과 함께 한국인 선원 7명 등 모두 11명의 선원을 살해한 뒤 사체를 바다에 버렸다. ●교화위원들 “사형은 법이 허가한 살인”우리나라가 국제 앰네스티(국제 사면위원회)가 분류하는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선포된 지 하루 만인 지난 31일 단행된 특별사면에서 부산구치소에서 11년째 복역중인 전씨를 비롯한 6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다. 참여정부 들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뤄진 사형수 감형조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교체 직전인 97년 12월30일 23명을 형장의 이슬로 보내 사형제에 쐐기를 박은 지 꼭 10년 만에 참여정부는 사형수 6명에게 ‘새생명’을 줌으로써 사형제 폐지에 한걸음 다가간 셈이다. 이로써 차기 이명박 정부 역시 사형 집행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됐다. 수십년 동안 사형수들을 만나온 교화위원들은 사형 역시 법에 의해 허가된 것일 뿐 ‘살인’임에는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또 함무라비 복수법식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보다 교화를 통해 뉘우치는 법을 깨닫게 하는 것이 진정한 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늦은 감이 있지만, 참여정부의 이번 사면을 사형제 폐지로 가는 중대한 단계로 높이 평가했다. 전씨 역시 처음에는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선상생활에 대해 “한국인은 우리를 개라고 부른다. 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가 났다.”면서 “고기 한마리 값보다 못했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인권단체에 편지를 보내 “내가 죽는 것만이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길임을 스스로 느끼며 혼자 마음정리를 해왔다.”고도 했다. ●피해자·유족 배려 뒤따라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영우 신부는 “사형수들이 수감될 때는 재판과정에서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고 불안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독설을 퍼붓지만, 또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한다.”면서 “피해자 유족과의 만남을 주선해 줬던 한 사형수는 ‘이렇게 용서를 빌기 위해 이날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다’고 참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사형제 폐지와 별도로 피해자 가족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씨와 오랫동안 연락해온 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정귀순 대표는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사형수 입장에서는 의미있는 일이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유족의 마음을 생각하면 의미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고 말을 아꼈다. 한 교화위원 역시 최근 페스카마호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려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겠죠. 어쩌면 영원히 그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니까 노력해야죠.”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깔깔깔]

    ●적당한 거리 결혼을 앞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부부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편히 살 수 있다고 하던데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도 네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럼 적당한 거리란 구체적으로 뭔가요?” 아버지는 주위를 살펴보고 엄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엄마가 몽둥이로 때리려고 할 때 재빨리 피할 수 있는 안정적 거리를 ‘적당한 거리’라고 한단다.”●중앙선 침범 티코가 중앙선을 침범해서 경찰관이 달려왔다. “중앙선 침범입니다. 면허증 좀 주세요.” 티코 운전사가 말했다. “경찰관 아저씨, 한번만 봐주세요.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해 놓아서 그랬어요.”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5) 상여 장식에 쓰였던 木人(목인)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5) 상여 장식에 쓰였던 木人(목인)

    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뜻하는 혼백(魂魄)으로 되어 있어,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저승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염라대왕의 명으로 달려온 저승사자는 쇠몽둥이로 등을 치고, 쇠사슬로 얽어매어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떼어 간다는 것입니다. 저승사자는 이렇게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저승길의 난관을 헤쳐가면서 망자와 동행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면 가장 먼저 ‘사잣밥’을 차려서 저승사자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지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시신을 운구할 때 썼던 충남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마을의 ‘남은들상여’(중요민속자료 제31호)에서도 용머리판 마룻대 중간에 동자 차림으로 팔장을 끼고 있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상여 꼭대기에 버티고 서서 잡귀들에게 앞길을 막아서지 말고 썩 물러나라고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지요. 상여에는 저승사자뿐 아니라, 갖가지 색깔로 치장된 다양한 목조각이 베풀어졌습니다. 가마는 임금이나 고관대작이 타는 것이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는 신분의 제약이 없었지요. 혼례식 하루 만큼은 신분이 낮은 신랑신부라도 사모관대와 족두리, 원삼 등 궁중예복을 허용한 것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가마’라고 할 수 있는 상여의 목조각은 오히려 신분이 낮은 사람 것이 훨씬 화려해지기도 했습니다. 남연군 것을 비롯하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실종친의 상여가 단층인 데 비하여,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살던 만석꾼 최필주의 장사(1856) 때 사용한 ‘산청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중요민속자료 제23호)’는 4층의 누각식 건물 형태지요. 조각 장식은 살아 생전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주고, 저승사자처럼 망자에게 길동무도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성리학이 국교인 조선시대에 장례절차는 당연히 유교관습을 따랐지만, 내심으로는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그대로 갖고 있었음을 상여 장식은 보여줍니다. 이렇듯 나무로 만든 인형을 목인(木人)이나 목우(木偶), 목용(木俑)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에 원색의 화려함과 해학이 더해진 목인은 최근 수집가들 사이에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지요. 특히 상여에 장식된 목인은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입니다. 말이나 해태, 호랑이를 타고 있는 선인, 선비, 광대는 악귀로부터 망자를 보호합니다. 이 망자의 보호자는 일제강점기에는 칼을 든 순사, 해방 이후에는 철모를 쓴 국군의 모습으로 나타나 시대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봉황을 타고 있는 동자를 조각한 목인은 망자가 하늘로 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상여 장식에 광대와 재인, 악공이 보이는 것은 귀인의 행차를 의미합니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사흘동안 서울시내를 돌아다녔는데, 세악수(細樂手)가 연주하는 가운데 광대가 춤추며 익살을 부렸고, 재인은 줄타기나 곤두박질로 흥을 돋우었다고 하지요.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동안 느낄 지루함이나 무서움을 덜어주었을 것입니다. 신랑신부도 등장합니다. 저승에 가서도 좋은 인연을 만나 백년해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요. 그런데 신랑신부의 모습만 혼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호적을 들고 있는 여인도 결혼을 상징합니다.‘호적을 판다.’는 말은 여자가 호적을 남자에게 옮긴다는 뜻이지요. 상여 장식에서는 이승에서 호적을 파서 저승으로 가져간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 인사동 골목에는 목인박물관이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수집한 3000점 남짓한 목인을 소장하고 있지요. 자칫 잊혀질 뻔했던 목인이 최근에는 민속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민중예술의 한 장르로 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런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軍 과거사위 진상 조사] ‘법난’신군부와 불화가 도화선

    [軍 과거사위 진상 조사] ‘법난’신군부와 불화가 도화선

    25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10·27법난’의 근본 원인은 월주 당시 총무원장 등 조계종단 지도부와 신군부의 불화다. 종단 내 비리와 부정에 대한 내부 투서가 계기가 됐다는 신군부측 주장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신군부측과의 불화가 도화선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80년 2월 문화공보부는 당시 종권을 장악하고 있던 월주 스님 등 개운사측 승려들의 이념성향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문공부는 개운사의 일부 승려들이 ‘호국불교’라는 순응종교를 버리고 저항불교로 변화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부 판단에는 월주 총무원장이 신군부측이 요구한 전두환 장군 지지표명과 문공부의 자율정화 지침을 거부하고 불교재산관리법 개정을 요구하는 등 신군부측과 갈등이 심화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위원회 판단이다. 신군부는 종단 집행부 35명을 사회정화 척결대상으로 지목한 종정측 일부 승려들의 진정서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투서 허위 판명에도 사퇴 강요 10월27일 새벽 45명을 연행한 합동수사단은 수사 결과 투서 내용이 대부분 허위이며, 월주 총무원장에게 법적 정통성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강제로 총무원장 사퇴서를 받아낸 것도 새롭게 확인됐다. 서울과 지역 보안부대에 연행돼 조사받은 승려들도 취조 과정에서 혐의를 인정하고 모든 직책에서 사퇴할 것을 강요받았다. 월주 총무원장에 대한 비리를 투서한 승려 4명은 무고혐의로 합수단 조사를 받고 형사 처벌된 것으로 밝혀졌다. 11월 합수부가 발표한 중간수사 결과도 왜곡·과장됐다는 게 위원회 판단이다. 당시 합수부는 승려들의 부정축재액이 200억여원에 달한다고 밝혔지만 사찰이나 재단법인의 재산을 개인 재산으로 판단해 산정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승려들의 승복을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힌 뒤 몽둥이로 구타하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사실도 확인됐다. 당시 수사3국에서 조사받은 혜성(현 서울 도선사 원로) 스님은 25일 동안 구금된 상태에서 구타와 각목으로 오금치기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석방 뒤 탈장수술을 받았고, 정수(서울 화개사 원로) 스님은 고춧가루와 빙초산 섞은 물을 코에 붓는 고문과 함께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정윤수의 오버헤드킥] K리그에 기어코 경찰 불러들일텐가

    경기장 출입문은 지하철 개찰구처럼 철저하다. 그나마 안전요원들이 도열해 있는 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번에 한 명씩 들어갈 수 있으며 통로는 좁고 길다. 그렇게 한 명씩 들여보내면서 블랙리스트의 사진과 대조해 본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소동이라도 벌어지면 순식간에 경찰이 달려온다. 경기장 안에서도 주의 사항이 많다. 흡연은 더러 용인해 주지만 지나친 음주는 사절. 야유를 넘어선 언어 폭력이나 실제적인 물리력은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번 리스트에 오르면 경기장 출입 자체가 금지된다. 경기 도중에는 의자에서 일어서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엔 예외지만.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잉글랜드의 축구장 풍경이다. 이 상황은 필자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들이다. 잉글랜드가 이러한 제도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지난 1980년대의 훌리건 난동 때문이었다. 끊이지 않는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언론도 참여했다. 방송에서는 경기장 난동을 어떻게 진압하였는가를 생생하게 보도했다. 경찰은 훌리건을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면 그 대가로 몽둥이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퍼졌다. 관광객의 눈에는 기마 경찰이 이채로운 풍경이지만 현지 팬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소란을 벌인 사람들은 말발굽 소리를 듣고 전율을 느끼며 도망친다. 누구라도 소란을 멈추지 않으면 기마 경찰은 몽둥이를 휘두른다.물론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축구 경기가 수많은 경찰과 안전요원에 의지해 진행되는 것은 정상적인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건장한 남성들이 야유를 주고받다가 주먹질을 벌이고 비극적인 죽음까지 겪다 보면 이같은 고육책을 쓸 수밖에 없다. 지금 K-리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축구에 대한 사랑이 비극적인 짝사랑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합창으로 마무리될 것인지 중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모든 사랑엔 죄가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될 만한 방식은 반드시 문제 삼아야 한다. 몇 해 전 수원의 이운재는 “제발 동전만은 던지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설마 동전까지 던지랴 생각했었는데, 최근 대전-울산의 경기에서 재연됐다. 물통과 깃발을 던지고 동전까지 던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경찰과 안전요원에 둘러싸여 축구를 구경하는 우울한 풍경을 만날지 모른다. 격렬한 난동이나 비참한 사고를 겪게 될 수도 있다. 일반 팬들은 이미 떠나간 다음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풍경이다.K-리그를 살려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쳐온 수많은 팬들이 자신의 열정과 사랑을 스스로 치욕스럽게 만드는 일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 서울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 서울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그리스·로마 신화에 상상력을 가미하는 작업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 이윤기는 런던에 있는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록 몇권을 사가지고 나와 입구의 계단에 앉아 펼쳐보다가 ‘바즈라파니(Vajrapani)’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에 눈길이 갔습니다. 곧 금강역사인데, 뜻밖에도 ‘헤라클레스 차림으로 제우스의 벼락을 든 부처님의 수행원’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지요. 그는 다시 박물관으로 뛰어들어가 부처님 일행을 돋을새김한 이 간다라 조각을 찾았습니다.‘수행원’은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왼손에는 제석천이 아수라를 쳐부술 때 썼다는 금강저, 오른손에는 굵직한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지요. 올리브 나무를 뿌리째 뽑아 만든 몽둥이를 든 헤라클레스가 성미가 고약한 네메아 골짜기의 사자를 30일 밤낮으로 목졸라 죽인 뒤 그 가죽을 쓰고 다녔다는 그리스 신화 그대로였습니다. 최근 발간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인 간다라는 서기전 327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 슬그머니 부처님의 호위무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대대적인 문화융합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사자는 그리스 시대에 이미 무사의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어깨(肩甲·견갑) 장식으로 정착된 듯합니다.‘영웅 따라 하기’를 좋아했던 로마 황제들은 사자가 입을 벌린 채 마치 어깨를 무는 듯한 견갑 장식을 즐긴 것으로 알려지지요. 간다라에서 불교에 편입된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부르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습니다. 미술사학자 권영필은 중국에서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사자가 어깨 장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657년 시안(西安)의 무덤에서 나온 무인상이 그렇습니다. 베이징 교외의 명 13릉에 도열한 무인석의 어깨 장식도 로마 황제의 그것과 매우 닮았지요. 간다라에서 금강역사가 된 헤라클레스는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다시 사천왕으로 변신합니다. 신라 문무왕이 682년 세운 경주 감은사 서탑의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지요. 금강역사나 사천왕 모두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니 역할은 달라지지 않은 셈입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의 목조 사천왕상은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불법을 수호케 하는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사천왕은 일주문에 해당하는 진여문(眞如門)에 버티고 있습니다. 조선 영조 22년(1746년) 당시 능창군 이숙 부부의 시주로 조성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발원문이 2002년 발견되었지요. 사자 모양의 어깨 장식을 하고 있는 사천왕은 정면에서 보아 진여문의 왼쪽 바깥쪽에 서 계시는 서방광목천(추정)입니다. 어깨뿐 아니라 배에도 사자 머리가 장식되었는데, 무섭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는 광목천의 표정에 걸맞게 귀여운 아기 사자의 모습입니다. 사자 머리 아래에는 한 마리 분의 사자 가죽이 고리로 매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가죽을 벗겼다는 네메아의 사자일 것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유서깊은 절이 지금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화보다 더 신화적이지 않습니까. dcsuh@seoul.co.kr
  • 70대 할아버지가 아들에 매를 맞는 속사정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70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매일 아들에게 매를 맞는 까닭은?” 중국 대륙에 70대 노인이 아들이 마구 때리는 폭행을 더이상 피할 길이 없자 차라리 감옥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하고 나서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통에 주변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황당한’사연의 주인공은 중국 베이징(北京)시 핑구(平谷)구 뤄잉(羅營)진에 사는 탕(唐·75)모 노인.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5년형(질환으로 집에서 생활하는 감옥외 집행형)을 받고 생활하던 중 아들이 시도때도 없이 때리는 매를 견디지 못해 감옥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하고 나서는 바람에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고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이 10일 보도했다. 탕 노인이 아들에 매를 맞고도 꼼짝하지 못하는 사연은 이렇다.지금부터 3년여전인 지난 2004년 4월28일,탕 노인은 집에서 별로 할일 없는 까닭에 오랜만에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이때 마침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같은 동네에 사는 팡팡(芳芳·12·여)양을 만났다. 아리잠직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치솟는 춘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팡팡양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아무 것도 모르고 뒤따라갔던 그녀는 육허기에 진 종자의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그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못된 일을 당한 그녀가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집중적으로 따지고 들자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이에 화가 꼭뒤까지 치민 팡팡양의 어머니는 즉각 핑구구 공안(경찰)당국에 고소했다.곧바로 체포된 탕은 핑구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하지만 핑구법원은 그의 지병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감안해 감옥외 집행을 받고 집에서 생활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그의 큰 아들이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며 틈 날때마다 몽둥이나 벽돌 등으로 마구 때렸다.더욱이 이웃 주민들도 그의 행위에 손가락질을 하는 바람에 감히 집밖 출입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들로부터 매를 맞는 것도 하루이틀이지,매번 맞을 수만 없었다.더이상 참지 못한 탕노인은 할 수 없이 감옥으로 보내달라며 사법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사법사무소 왕쯔창(王志强) 사무장은 탕 노인의 큰 아들에게 “비록 당신의 아버지가 몹쓸 짓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며 “특히 범죄자도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가 있는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든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이에 큰 아들은 “잘 알았다.”며 “앞으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3) 명과 후금의 정세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33) 명과 후금의 정세 Ⅰ

    조선이 모문룡의 작폐에 시달리고 있던 정묘호란 무렵 대륙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1621년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요동 전체를 장악했다. 후금은 요동 벌의 중심인 심양(瀋陽)으로 천도하여 산해관까지 넘볼 기세였다. 명은 분명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명의 내정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당쟁은 격화되었고 환관들은 날뛰고 있었다. ●격화되는 黨爭 1620년 7월 명의 만력제(神宗)가 죽었다. 제위에 오른 지 48년만이었다. 장남 주상락(朱常洛:1582∼1620)이 즉위하여 연호를 태창(泰昌)으로 고쳤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만력제의 암우(暗愚)와 태정(怠政)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태창제(光宗)에게 기대를 걸었다. 태창제는 즉위 직후 내탕(內帑)에서 100만냥의 은을 풀어 누르하치를 방어하고 있는 요동의 장사들에게 지급하고, 악명 높았던 광세사(鑛稅使) 등의 파견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조야는 감동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태창제는 즉위한 지 한달 만에 급사하고 말았다. 다시 태창제의 아들 주유교(朱由校)가 즉위하니 그가 곧 천계제(天啓帝) 희종(熹宗)이다. 만력 중반부터 천계 연간까지 명 조정의 당쟁은 격렬했다. 비운의 황제였던 태창제의 존재와 급사는 당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만력제는 정비(正妃)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상락은 왕(王)씨 성을 지닌 궁녀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만력제는 왕씨와 주상락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만력제는 정귀비(鄭貴妃)와의 사이에서 난 삼남 주상순(朱常洵)을 총애했다. 그는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신료들은 ‘장유(長幼)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격렬히 반발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당시 명 예부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을 계속 거부한 것도 이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차남’ 광해군을 승인할 경우, 만력제가 ‘삼남’ 주상순을 책립(冊立)하는 것에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상락의 황태자 책립은 19년 동안이나 미루어졌고, 그는 1601년에야 비로소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파란의 한 가운데 있었다.1615년 장차(張差)라는 괴한이 주상락의 거처에 몽둥이를 들고 난입하여 그를 위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벌어졌다. 황태자를 해치려 했던 엄청난 사건임에도 재상 방종철(方從哲) 등은 사건의 전말을 철저히 규명하려 들지 않았다. 사건의 배후에 정귀비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신료들은 방종철 등을 탄핵했다. 이 사건을 ‘정격안(檄案)’이라고 한다.‘안(案)’이란 사건을 가리킨다. 태창제의 급사 원인을 둘러싼 당론(黨論)도 치열했다. 태창제는 병석에 누운 뒤, 이가작(李可灼)이란 관인이 바친 붉은 환약(紅丸)을 복용했다. 홍환 복용 후 황제가 급사하자 다시 치열한 논란이 빚어졌다. 동림당 관인들은 시약(侍藥) 업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방종철을 공격했고, 방종철을 옹호하는 관인들은 황제의 죽음이 홍환과는 관계가 없다고 맞섰다.1625년(천계 5)까지 이어진 치열한 논란을 ‘홍환안(紅丸案)’이라 부른다. 태창제 사후, 그가 총애하던 후궁 선시(選侍) 이(李)씨는 황자 주유교를 자신의 거처인 건청궁에 감추었다. 주유교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환관 위충현(魏忠賢)과 연결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하려 했다. 동림당 계열은 그 같은 기도에 반발하여 주유교를 이씨에게서 떼어내고, 이씨를 별궁으로 옮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또한 격렬한 정쟁이 빚어졌는데 그것이 ‘이궁안(移宮案)’이다. ●東林黨과 奄黨 ‘정격안’,‘홍환안’,‘이궁안’을 아울러 삼안(三案)이라고 한다.‘삼안’을 놓고 명 조정의 관료들은 수많은 장주(章奏)를 올려 논쟁했고 그 과정에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천계 연간(1621∼1627) 명 조정에는 절당(浙黨), 초당(楚黨), 선당(宣黨), 제당(齊黨), 곤당(昆黨) 등 여러 당파가 있었지만 당쟁의 중심은 동림당과 엄당이었다. 동림당은 만력 초기 재상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의 전횡에 반대, 도전했던 청의파(淸議派) 관료인 고헌성(顧憲成), 추원표(鄒元標), 조남성(趙南星)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장거정이 죽은 뒤에도 내각과 환관들의 비정을 비판했다. 동림당은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에 있는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거점으로 삼았다. 주자학 강학(講學)을 통해 자파 세력을 결집하는 한편, 조정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들이 황태자 책립, 인사, 요동 방어 등 다양한 문제를 놓고 내각이나 환관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당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엄당은 환관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타무라 다이스케(三田村泰助)는 환관을 가리켜 ‘만들어진 제3의 성(性)’이라고 표현했다. 환관 가운데는 종이를 발명한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나 명 초기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대원정(大遠征)을 주도했던 정화(鄭和)처럼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도 있었다. 하지만 환관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환관이 맡은 일은 천한 것이었지만 때로 천자나 후궁과의 연결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궁극에는 국가의 명운마저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른 자들도 나타났다. 명대에 특히 환관의 폐해가 심했다. 왕진(王振), 유근(劉瑾), 위충현 등이 대표적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삼안’처럼 궁정의 문제가 정쟁의 현안이 될 경우, 환관들이 그 과정에 개입하고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높았다. 천계 연간 위충현이 엄당을 이끌며 조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은 유명하다. ●끔찍한 魏忠賢의 시대 위충현(?∼1627)은 하북성(河北省) 숙녕현(肅寧縣)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무뢰배였던 그는 도박에 모든 것을 탕진한 뒤, 스스로 환관이 되었다. 본래 이진충(李進忠)이었던 이름도 위충현으로 바꾸었다.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위충현의 권세는 날로 높아졌다.1621년 사례감(司禮監)의 병필태감(秉筆太監)이 되었다. 환관들의 수장 격이었다. 그는 황제 직속의 비밀 경찰인 동창(東廠)의 책임자도 겸했다. 1624년, 동림당원 양련(楊漣)은 위충현을 탄핵했다. 그에게 스물 네 가지의 잘못이 있다고 했다. 위충현은 동창의 책임을 사임하는 등 일단 몸을 낮춰 위기를 벗어났다. 이윽고 천계제의 신임이 회복되자 보복이 시작되었다. 위충현은 1625년 동림당의 핵심 인물인 양련, 좌광두(左光斗), 원화중(袁化中), 위대중(魏大中), 주조서(周朝瑞), 고대장(顧大章) 등 6인을 ‘수뢰’ 혐의로 탄핵했고,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위충현의 심복 허현순(許顯純)은 이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을 못 이겨 고대장은 자살했다. 차라리 그가 행복했다. 나머지 5명의 시신은 전부 문드러졌다. 위충현은 1626년에도 옥사를 일으켰다. 고반룡(高攀龍), 주순창(周順昌), 황존소(黃尊素) 등 7명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고반룡은 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나머지 6명은 예의 혹형을 받았다. 환관들이 금의위(錦衣衛)에서 행한 고문은 잔혹했다. 끌려온 자들에게 5가지의 도구를 이용하여 혹형을 가한 후 가죽을 벗기기도 했다고 한다. 주순창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위충현을 비판하다가 이를 모두 뽑혔다. 동림당을 탄압하면서 위충현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배경에는 천계제의 방임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림서원을 비롯한 동림당의 근거지는 파괴되었고, 각 지역에는 위충현을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모문룡도 가도에 위충현을 기리는 생사당을 세웠다. 위충현의 전횡에 절망한 관료들은 사직했고, 변방의 지휘관들 상당수는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누르하치의 철기(鐵騎)는 달려오고 있는데 명은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 [여수참사 6개월 끝나지 않은 악몽] (중) 단속 공포에 떠는 마석 1500 이주노동자

    후텁지근한 폭염이 계속된 지난 16일 낮 경기 남양주시 마석 생성공단의 수은주는 정점에 달했다. 나환자촌에서 이름난 가구단지로 탈바꿈한 이곳은 요즘 ‘폭풍전야’와 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400여개 중소업체,150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이방인의 메카’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인 A(35)씨는 “한국 정부가 이달초부터 불법체류자 집중단속 방침을 밝힌 뒤 절반가량이 숨어 지낸다.”면서 “대부분 고용허가제 도입 직전 실시된 2003년의 집중단속 악몽을 떠올린다.”고 전했다. 이곳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가구단지 노동자 중 70∼80%를 불법체류자로 보고 있다. ●70~80%가 불법체류자 정부의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에 대한 원칙은 ‘무관용’이다. 지난 6월1일 출입국관리법령이 개정됐고 두 달간 계도기간을 거쳐 1일부터 법무부, 경찰청, 노동부 등이 합동 단속반을 운영하고 있다. 단속 대상도 노동자에서 사업주로 확대됐다. 불법고용 사업주에 대한 범칙금이 10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높아졌고, 고용외국인 수에 따라 수천만원까지 중복 부과도 가능하다. 영세점포 사장인 B씨는 “휴가철 출입국관리소 업무가 폭증해 아직 단속이 심하지 않은 편이다. 우리공장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를 잠시 쉬게 한 뒤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면서 “이들은 숙련도와 적응성, 한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나다. 국내 노동자는 이곳에서 두 달 이상 버티지 못하더라.”고 전했다. 덕분에 대부분 업체들은 개점휴업 상태다. 사업주연합회는 ‘정부가 합리적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연판장을 돌리고 있다. 성공회 남양주교회 이영 신부는 “불법 이주노동자는 허술한 정부정책의 희생양인데 단속위주 정책을 고집하는 건 불합리하다.”면서 “이미 폐지된 산업연수생제 외에 시행 3년째인 고용허가제도 노동자의 이동권을 철저히 제한한 노예제”라고 주장했다. 이 신부는 최근 지역 출입국관리소측과 ‘일터나 숙소까지 들이닥쳐 잡아가지는 않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짐을 꾸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방글라데시인 샤니(26)는 “출국 티켓을 끊었다. 단기 관광비자로 들어왔지만 이곳 모습을 보니 답답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단속보다 제도개선을” 12년째 체류 중인 방글라데시인 이라니(32)는 “2003년 단속반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친구를 몽둥이로 때린 뒤 잡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돈 벌 시간이 없었다.”면서 “5000만원을 모아 10명의 부양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1995년 입국했지만 매달 40만∼50만원을 받아 겨우 생계를 유지했고, 경기가 회복된 2002년까지는 외환위기의 여파로 야근수당도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 이곳 체류자들은 노동·주거환경이 개선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라니는 “폭행·폭언이 거의 사라지고 임금도 100만∼150만원선으로 크게 올랐다.”면서 “이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하려면 브로커에게 뒷돈(1000만∼1200만원)을 줘 매달 60만∼70만원가량의 월급으로는 손해보기 일쑤였다. 불법체류가 잘못인 줄 알면서도 도망쳐야 했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가 4월에 내놓은 5년 이상 체류 이주노동자에 대한 영주권 부여 계획도 전문 직종에만 해당돼 이곳 노동자들은 혜택을 보지 못한다.”면서 “단속이 아닌 제도적 개선을 부탁드린다.”고 하소연했다. 남양주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11) 체벌때 자존심 상처 안 주려면…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11) 체벌때 자존심 상처 안 주려면…

    ‘간이 콩알만 해졌다.’‘심장이 강하다.’‘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비위가 좋다.’‘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가슴이 뜨끔하다.’‘눈이 높다.’‘얼굴이 뜨겁다.’‘목에 힘을 주다.’‘어깨를 짓누르다.’‘발이 묶이다.’ 위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신체의 일부분을 빗대어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말들만 모아 본 것입니다. 말 그대로 간이 콩알만 해진 것이 아니고 매우 놀랐다는 뜻이고, 심장이 튼실한 것이 아니라 성격이 강인하다는 뜻이고, 배가 실제로 아픈 것이 아니라 시기심이 생긴다는 뜻이지요. 마음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채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난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상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몸이나 물건, 풍경 등에 빗대어 표현하곤 합니다. 특히 신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스스로 쉽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에 물건이나 풍경에 비해 마음과 관련된 표현이 많습니다. 마음을 알아챈 후에 마음에 영향을 주고 싶을 때도 우리는 신체의 일부분을 사용하곤 합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팔로 가슴을 감싸거나 불편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배를 문지르거나 눈물이 나오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을 까봐 눈을 끔뻑끔뻑합니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일 때가 많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더 그러합니다. ●신체 중 ‘목´ 부분 위는 자존심 영역 아이들을 기르면서 ‘대체 저 아이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기에 저 모양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잘 몰라 난감할 때 주로 하게 되는 말입니다. 이때 몸을 통해서 마음에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포옹의 교육적 효과라는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피부 접촉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칭찬이나 격려, 지지 등을 어린 자녀에게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로서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서는 칭찬이나 격려, 지지 등이 아닌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꾸중이 꼭 필요한 경우입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합리적 꾸중을 해야 하지만 꾸중하다 보면 화가 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꾸중은 야단으로 변질되면서 결국에는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체벌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교육적인 체벌이라도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참 많이도 쓰이고 있는 방법이 육체적 체벌, 즉 매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불가피하게 매를 들게 될 때라도 절대로 얼굴과 머리만은 때리지 말라고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 중 목 윗부분인 얼굴과 머리는 자존심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자존심이 발달하게 되면 자존심과 관련된 신체 부분이 생깁니다. 대표적인 자존심 신체 영역이 바로 목 윗부분인 얼굴과 머리입니다. 아이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행동으로 칭찬을 할 때 어른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합니다. 그러나 칭찬을 받을 때조차도 아이들은 아무에게나 머리를 쓰다듬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굳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만 접촉을 허용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굴·머리 맞으면 반항적 행동 처벌의 경우에도 역시 신체 다른 부분과는 그 효과가 다릅니다. 등이나 손바닥, 엉덩이를 맞는 것은 그냥 신체의 일부분이 매를 맞는 것이지만 머리나 얼굴을 맞는 것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머리나 얼굴을 맞게 되면 반성이 되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하면서 반항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선생님보다 덩치가 더 큰 남학생들을 보면 선생님이 두꺼운 몽둥이로 매우 세게 엉덩이를 때려도 그대로 조용히 맞고 있지만,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거나 손으로 따귀를 때리게 되면 자리를 박차고 학교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목 윗부분을 맞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 즉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나쁘고 참기 힘들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체벌을 하게 될 경우라도 얼굴이나 머리 부분만은 때리지 마십시오. 꽃으로라도 얼굴이나 머리만은 때리지 마십시오. 불가피하게 꼭 필요한 경우에만 자존심을 덜 다치는 부분인 손바닥이나 엉덩이 부분을 체벌하십시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처벌은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지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처벌은 교육적 효과가 없습니다. 특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랑의 매’는 원치 않는 행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킵니다. 옳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처벌은 학대나 폭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사랑하는 자식을 학대하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하는 부모가 있을 뿐입니다.
  • 진실화해위 재심권고 ‘아람회 사건’ 피해자 김난수씨

    “딸 아람이가 벌써 스물일곱 살입니다. 지금 수의사로 일하고 있어요. 아람이도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는 5일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아람회’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 김난수(54)씨는 이날 소식을 전해듣고 “취업이 안 돼 고통받은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면서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고 손해배상까지 받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단순 친목모임이 반국가단체로 ‘아람회’ 사건은 1981년 대전경찰서가 김난수씨와 박해전씨 등 12명을 불법감금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뒤 법원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 등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미국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피해자들은 2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아람’은 김씨의 딸 이름이다. 경찰은 81년 7월 아람씨의 백일잔치를 계기로 김씨 집에 모인 사람들이 단순 친목모임 명칭으로 거론한 ‘아람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았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김씨는 당시 육군 대위로서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김씨는 “장교 선배들과 친구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딸아이 백일을 축하했을 뿐”이라면서 “사건 이후 집안은 거의 파탄이 났다.”고 안타까워했다. ●보안부대 지하실서 한달간 고문 김씨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81년 8월 혼자 제507보안부대로 이첩돼 조사를 받고 군 검찰에 송치됐다. 김씨는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운 채 군홧발에 밟히는가 하면 발가벗긴 상태로 구타당하는 등 보안부대 지하실에서 한 달간 고문을 받았다.”고 밝혔다.83년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출소 직후 3개 회사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불합격처리됐고, 노태우 정권 때까지도 보안관찰 대상이라 취업이 안 됐습니다. 사면복권된 후엔 나이가 너무 들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김씨는 식당과 독서실 등을 운영해 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10여년째 무직상태다. 김씨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아람이도 아빠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빠에 대한 불신이 컸을 것”이라며 가슴아파했다. 태어나자마자 반국가단체의 이름이 돼버린 딸 아람씨는 지금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5·18광주민주항쟁 유공자이기도 한 김씨는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에 따라 2004년 4월 재심을 청구했고 현재 대전지법에 계류 중이다. 박해전씨 등 다른 피해자들의 재심청구는 작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개시됐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적반하장’ 경찰 민중의 몽둥이?

    ‘적반하장’ 경찰 민중의 몽둥이?

    경찰이 순찰차로 어린이를 치고도 곧바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항의하는 아버지를 형사입건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24일 서울 강서경찰서와 목격자들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후 11시30분쯤 서울 강서구 화곡2동 H태권도장 앞 골목에서 이 동네에 사는 A(4)양이 강서경찰서 지구대 소속 최모·이모 경사가 탄 순찰차에 치였다. 그러나 순찰차를 운전했던 최 경사가 곧바로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쓰러진 A양을 지켜 보기만 했다는 게 동네 주민들의 증언이다. 곧바로 인근에 있던 A양 아버지(40)가 달려와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최 경사는 A양을 외면한 채 “보험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며 사고처리를 위해 순찰차 주변에 흰색 스프레이를 뿌리기 시작했다. 경찰의 고압적인 행동에 격분한 동네 주민 20여명이 경찰을 에워싸고 항의하자 최 경사는 “아이가 피만 안 나면 된 거 아니냐. 따지는 사람들을 모두 연행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최 경사와 A양 아버지 간의 실랑이가 이어졌고, 최 경사는 갑자기 “나를 폭행했으니 공무집행방해죄로 연행하겠다.”며 A양 아버지를 입건했다. 결국 30여분간 방치돼 있던 A양은 어머니에 의해 뒤늦게 병원으로 후송됐다. 최 경사는 사건 직후 “A양 아버지의 폭행을 입증할 진단서를 첨부하겠다.”며 병원에 일주일가량 입원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한 주민들은 “사고를 낸 경찰이 오히려 동네 주민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쳐 무서웠다.”면서 “피해자 아이의 아버지가 입건되는 공권력의 횡포를 실감했다.”고 입을 모았다. A양의 아버지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모두 맞다.”면서 “당시 억울한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다행히 아이의 건강에 별 문제가 없고 경찰도 ‘입건을 하지 않고 사건 해결에 최선을 다할 테니 언론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강서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주민들이 흥분한 상태에서 지켜본 탓에 상황을 과장한 측면이 있다.”면서 “사고직후 최 경사와 동승했던 이 경사가 곧바로 내려 아이를 보호했으며, 최 경사는 당시 너무 놀라 A양 부모가 올 때까지 앉아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피만 안 나면 된다.’는 발언도 ‘아이가 피가 안 나니 괜찮은 것 같다.’는 안도의 의미였으며, 주민들에게 ‘연행하겠다.’고 한 것은 주민들이 워낙 거세게 항의하고 욕을 해 경찰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아 주변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 경사가 워낙 왜소한 사람인데 A양 아버지가 팔목을 세게 붙잡아 이를 놓으라고 수차례 경고했는데도 듣지 않아 그랬던 것”이라면서 “A양 아버지를 조사해 형사계에 넘기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형사계 쪽에서 ‘말이 안된다.’고 반려했다. 입건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외국인근로자 현대판 노예?

    #사례1 베트남에서 건너와 인천 서구 A공업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웬 반륭(34)은 지난 3월 작업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장소장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해 왼팔이 부러져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현장소장은 형사상 책임은 물론, 치료비 지급마저 거부하고 있다.#사례2 역시 베트남 출신인 쩐 디마이티엡(24·여)은 경북 경산시 B섬유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지난해 7월 추락 사고를 당해 8개월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하지만 고용주는 산업재해 보상신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비 1000여만원을 대납했다는 이유로 예금과 급여를 압류했다.#사례3 이란인 압둘 후세인은 불법 체류자 신분이어서 수개월 동안 임금을 체불한 사업주를 고발조차 못하고 있다.“임금 체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강제 출국되지 않는다.”는 설명에도 신분을 밝히기를 꺼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사례4 인천 서구 C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베트남인 하 득빈은 사장에게 보증금 명목으로 700만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사장은 반환 요청을 묵살하고 있다. 국내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들은 일부 악덕 고용주에 의해 기본권마저도 짓밟히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지난 4월과 5월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인천 도화동 ‘외국인 노동자 센터’에서 실시한 현장 순회상담에서 드러났다. 웬은 고충위의 도움으로 산업재해 신청을 마쳤으며, 소송을 제기하는 문제도 검토하고 있다. 쩐을 비롯한 나머지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도 고충위에 접수돼 현재 처리 절차를 밟고 있다. 30일 고충위에 따르면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두 차례 순회상담을 통해 모두 142건의 민원을 접수, 처리했다. 이 중 임금·퇴직금 체불이 전체의 42.2%인 6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고용주가 사업장 이탈방지를 이유로 여권을 압수한 뒤 돌려주지 않는 등 출입국 관련 문제 48건, 산업재해 및 민·형사상 문제가 14건 등이다. 고충위 관계자는 “언어 소통이 안 되고, 절차를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여전히 많다.”면서 “오는 7월 대구,9월 경기,10월 충북 등에서도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순회상담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충위는 최근 외국인 근로자 전용 민원상담전화(1588-1517)도 개설, 운영에 들어갔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하재봉의 영화읽기] 아포칼립토

    [하재봉의 영화읽기] 아포칼립토

    당신의 심장이 정말 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아포칼립토>를 봐라. 심장 뛰는 소리가 탐탐북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이다. 마야 문명이 태어난 원시림 속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생존의 혈투는, 생명력 넘치는 야성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내는 일은 예사롭게 펼쳐진다. 그 끔찍한 잔혹함이, 폭력성과 선정성을 무기로 값싼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잠시도 시선을 돌릴 수 없는 무서운 속도의 질주와 싱싱한 에너지가 화면에 가득 차 있는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호주에서 건너가 어느새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에서 이제는 문제적 감독으로까지 성장한 멜 깁슨의 연출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작품이다. <아포칼립토>는 배우 출신 명감독 반열에 우뚝 올라선 멜 깁슨의 야심과,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화면을 압도하는, 의심할 바 없는 올해의 수작 필름이다. 멜 깁슨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브레이브 하트>가 아카데미를 휩쓸 때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의 멜 깁슨 앞은 탄탄대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연출 작품으로 예수의 삶을 소재로 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선택했다. 멜 깁슨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성서에 적힌 그대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문제는 유대인의 반발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 집단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은 할리우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제작 당시부터 처음 투자를 약속했던 투자자들이 유대인들의 압력을 받고 투자를 철회하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사람들에 의해 이 작품이 유대인을 비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멜 깁슨은 주장한다. 예수를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성서에 의하면,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이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는 것을 서로 피하기 위해 회피하다가 결국 군중들에게 묻는다. 진짜 살인범으로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한 사람을 풀어줄 텐데 너희들은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군중들은 차라리 흉악한 사형수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친다. 결국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 최후를 맞았다. 그 군중들이 유대인이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결국 멜 깁슨 감독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제작을 해야만 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멜 깁슨에 대한 할리우드의 시선은 싸늘하다. 비록 그 영화가 엄청난 상업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사재로 충당한 멜 깁슨에게 결과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지만, 멜 깁슨에 대한 미국 영화계의 우호적 시선은 사라졌다. 멜 깁슨 감독이 만든 다음 작품 <아포칼립토>는 시선을 15세기 마야 문명이 꽃피고 있던 원시의 밀림으로 돌린다. <아포칼립토>를 지배하는 것은, 원시림 속에서 거의 발가벗은 채 살아가는 마야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도 아니고,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는 살인과 복수의 잔혹함도 아니다.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속도다. 숲 속에서 거의 알몸으로 살아가는 마야의 전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서 그리고 숲을 파멸시키고 부족의 부녀자를 살해하며 힘센 남자들은 노예로 끌고 가려는 홀캐인 부족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복수를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카메라는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을 어떤 때는 그들보다 먼저 달려가서 잡아내기도 한다. 멜 깁슨 감독은 마야 최후의 전사들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서 아직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다. 할리우드 경력이 거의 없는 배우들은 그러나 관객들에게는 실제로 마야 전사가 화면으로 등장한 것 같은 놀라운 충격을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원시의 숲 속에서 맹수를 사냥하며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마야 부족의 리얼리티는 새 얼굴로 구성된 배우들과 그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감독의 용별술에 의해 싱싱한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부족장인 부싯돌 하늘과 그의 아들 표범발(루디 영블러드 분)을 중심으로 원시림 속에서 맹수들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마야 부족. 그러나 잔인한 홀캐인 부족이 마을을 습격한다. 쇠로 만든 날카로운 단검과 돌도끼와 돌몽둥이 등 선진무기로 무장한 홀캐인의 침략 앞에 마야 부족의 전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홀캐인족의 마을 습격 장면은 놀라운 핏빛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문명인들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계산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에게서는 화면에 묘사된 잔혹함 그 자체보다 더 큰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정말 우리들의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장면은 그 뒤로 이어지는 추격신이다. 생포된 남편의 눈앞에서 강간을 당하고 잔혹하게 죽어가는 여인, 아들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살해되는 아버지. 홀캐인에게 생포된 남자들과 여자들은 숲 속에 건설 중인 거대한 사원 앞으로 끌려간다. 여자들은 인신매매 되어 노예로 팔려가고 남자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노예로 이용된다. 허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탈출의 기회를 잡은 표범발은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으로 도망친다. 그를 뒤쫓는 홀캐인 부족장들과 무리들. 생존을 위해서 쫓고 쫓기는 추격신은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도 생생하게 만들어져 있다. 멜 깁슨 감독은 능숙한 조련사의 솜씨로 소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긴장의 지속과 이완의 짧은 순간으로 전체 내러티브의 완급을 조절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 준다. 영화의 백미인 표범발의 탈출신은 그를 쫓는 홀캐인 부족의 파괴력 있는 추격으로 더욱 빛난다. 머리 속까지 잠기는 늪, 나무 위로 도망쳤지만 거기에서 마주치는 표범, 그리고 독사의 공격까지 피하며 표범발은, 수직으로 만들어진 마른 우물 속에 숨겨 놓은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그러나 홀캐인의 추격자들 또한 용맹스럽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의 열대우림 정글 지역인 라정글라에서 파나비전의 고감도 디지털 지네시스 시스템으로 촬영된 필름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전사들의 미세한 동작까지 포착하고 있다. 또 국부만 겨우 가린 원시전사들이지만 각각 개성적인 헤어스타일과 이마까지 덮는 화려한 문신, 코와 입 등 얼굴 부위에 부착하는 장신구, 목과 허리 등에 걸치는 소품들이 어우러지면서 실제 마야 전사들을 보는 것같은 놀라움을 전해주는 <아포칼립토> 미술팀은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부족의 전사들이 끌려간 마야 제국. 제사장은 살아 있는 노예들을 신에게 바치면서 돌칼로 가슴을 자르고 뜨거운 심장을 한 손에 움켜쥐며 꺼낸다. 그리고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몸통을 계단 아래로 굴러뜨린다. <아포칼립토>의 이런 잔혹한 영상은 선정성으로 관객들을 유혹하는가 아니면 주제의 드러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는가 우리가 갈등할 필요는 없다.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는 외투만 다르게 걸친 채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고 멜 깁슨 감독은 고대 마야를 배경으로 싱싱한 에너지가 넘치는 폭력적 세계의 모습을 창조해 냈다. 그가 타협하는 유일한 것은, 가족의 가치를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할리우드 전통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숲으로 돌아가려는 표범발의 질주에 영화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이유다.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월간 <삶과꿈> 2007.03 구독문의:02-319-379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