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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일 강풍·천둥 동반 비

    주말인 31일 전국적으로 천둥·번개와 함께 강풍을 동반한 많은 비가 내릴 전망이다.호남 지역에는 최고 50㎜ 이상의 강우가 예상된다. 기상청은 “주말에는 전국적으로 기압골의 영향을 받다 점차 벗어나면서 흐리고 비가 온 뒤 오후 늦게 점차 개겠다.”면서 “전남·북 지역은 최고 50㎜ 이상의 강우가 예상되고 돌풍과 함께 천둥ㆍ번개가 치는 곳이 있어 비 피해에 대비해야 한다.”고 30일 밝혔다. 31일 예상 강수량은 서울과 경기, 북한이 5∼20㎜, 강원과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제주, 울릉도ㆍ독도가 10∼30㎜(전남·북 많은 곳 50㎜ 이상)이며, 강원 산간에는 2∼5㎝의 눈이 내릴 것으로 보인다. 아침 최저기온은 6∼12도, 낮 최고기온은 10∼17도로 예측됐다. 휴일인 다음달 1일에는 전국이 고기압 가장자리에 들면서 가끔 구름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상청 관계자는 “고비사막과 내몽골지방에서 발달한 황사가 저기압과 같이 남동진하면서 우리나라로 이동해 31일 비가 그친 뒤부터 다음달 1일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국제원조-재외보호국 신설

    외교통상부가 후진국·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국제원조국(가칭)을 신설하는 등 대대적 조직 개편을 단행한다. 정부 관계자는 29일 “외교부가 오는 6월 중 다른 나라의 원조를 맡는 국제원조국 신설을 비롯, 아시아·태평양국과 재외동포영사국을 각각 2개 국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규모 조직 개편을 한다.”고 말했다.외교부 개편안에 따르면 외교정책실 산하에 국제원조국을 신설, 공적개발원조(ODA) 등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국제원조국이 신설되면서 외교정책실은 글로벌정책실(가칭)로 이름을 바꾸고, 산하 국제기구국은 남는 한편 정책기구국은 별도로 분리된다.이와 함께 아태국은 일본·중국·몽골·타이완 등을 담당하는 동북아국과 인도·아세안·호주 등을 맡는 동서남아국으로 분리, 조직이 확대된다. 또 재외동포영사국의 업무 중 재외국민 보호를 전담하는 재외국민보호국이 신설돼 영사 관련 국이 2개로 늘어남에 따라 재외동포에 대한 서비스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2)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12)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Ⅳ

    1618년 4월15일 푸순성을 포위한 누르하치는 성주 이영방(李永芳)에게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이영방이 망설이자 후금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영방은 항복했다. 푸순성을 접수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한인(漢人) 상인들을 풀어 주었다. 그들에게 ‘칠대한’이 적힌 문서를 들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내용을 알리라고 했다. 자신의 거병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4월21일 광녕총병 장승음(張承蔭)이 푸순성을 구원하려고 달려왔다. 만주 주민들을 세거지에서 쫓아내고 수확을 금지시켰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병력은 1만명에 불과했고,6만명까지 불어난 후금군에 참패해 전사하고 말았다.‘명실록(明實錄)’은 ‘장승음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力屈死之)’라고 적었다. ‘중화(中華)의 대국’이 ‘오랑캐의 소국’에 밀리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후 누르하치가 요동의 명군을 공략하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각 지역에 분산배치돼 있던 명군을,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시켜 격파하는 것이었다. ●명, 충격 속에 대책을 모색하다 푸순성 함락과 장승음 전사 소식에 명의 조야는 술렁거렸다. 특히 이영방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소식은 ‘경악’ 그 자체였다. 요동 전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요동이 무너지면 산하이관이 흔들리고, 궁극에는 베이징까지 위협받게 된다. 명 조정을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누르하치가 코르친 등 몽골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몽골 지역으로 진입하면, 명이 요동에 설치한 변장(邊牆)을 우회해 명군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료들은 상소를 올려 산하이관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촉구했다.‘사납고 건방진 오랑캐’를 즉각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요동에 배치된 명군의 전력은 미덥지 못했다.1618년 6월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최경영(崔景榮)은 ‘요동의 방어선은 2000리나 뻗어 있는데 병력은 고작 8만∼9만명 정도뿐’이라고 했다.9만명이라고 해봤자 광활한 지역에 분산배치돼, 개별 지역이 팔기병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을 경우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더욱이 당시 요동의 명군은 군량 등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푸순 함락 직후, 병부상서 설삼재(薛三才)는 요동에 대한 군수지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1617년 가을부터 당시까지 요동 방어를 위해 지출했어야 할 군비(軍費)가 은 50만냥인데, 그것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향(遼餉·요동으로 보내는 군비)을 확보하고, 병력을 확충하려면 엄청난 비용을 염출해야만 했다. 설삼재는 호부(戶部)의 창고가 비었음을 실토하고 만력제(萬曆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의 ‘사금고(私金庫)’인 내탕(內帑)에 쌓여 있는 은화를 좀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설삼재뿐만이 아니었다. 상소를 올린 신하들은 거의 한결같이 내탕을 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만력제는 내탕에 수백만냥을 쌓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인색한 황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짐의 내탕이 공허해 요동의 군사비를 대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만력제란 인물은 역사가들의 만력제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명은 숭정제(崇禎帝) 대에 망했지만, 망하는 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만력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만력제의 정치적 행태를 ‘태정(怠政)’‘파공(罷工)’이라 부른다.‘정사를 돌보는 데 게으르고, 황제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만력제는 1573년 열 살에 즉위해 1620년 쉰여덟 살로 죽을 때까지 4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정치를 팽개친 것은 아니었다.1584년 무렵까지는 뛰어난 재상이자 ‘스승’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의 보좌를 받아 상당한 수준의 치적을 이뤘다. 조정의 기강이 잡혔고, 세입(稅入)이 앞 시기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척계광(戚繼光)과 이성량의 활약으로 남방의 왜구(倭寇)나 북방의 몽골, 여진의 위협도 잠재웠다. 1584년 장거정이 죽은 뒤부터 만력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중국인 역사학자 옌충녠(閻崇年)은 만력제가 즉위 과정에서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이 순조롭게 황제가 되었던 것,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인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1599년까지 임진왜란을 비롯한 세 차례의 큰 전쟁(萬曆三大征)을 치른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만력제는 융경제(隆慶帝)의 셋째 아들이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두 형이 유년 시절에 죽는 바람에 여섯 살에 황태자로 책봉됐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융경제 또한 재위(在位) 6년 만에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만력제는 황태자가 된 지 불과 4년 만에 자연스럽게 즉위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를 비롯한 청의 역대 군주들이 후계자로 선택되는 과정에서 왕자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던 것, 조선의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16년 동안이나 부왕(父王)의 견제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만력제는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역경을 모르고 일찍이 권좌에 올라 안일에 빠지기 쉬웠던 데다, 비만과 신병(身病) 때문에 움직이기를 싫어했던 것, 나아가 만력삼대정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방종에 빠지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대신해 정사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던 장거정마저 사라지자 만력제의 한계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태정’의 실상은 푸순성이 함락될 무렵 만력제가 보였던 ‘태정’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1600년 이후 20년 가까이 조정의 회의를 거의 주재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만력제에게 ‘조정에 나와 정사를 재결(裁決)해 달라.’고 수없이 주청했지만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최고 관직인 대학사(大學士) 가운데는 심지어 3년 동안 만력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만력제는 신료들이 자신에게 올린 상소나 건의에 대해 회답을 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불보(不報)’ ‘유중(留中)’이라 하여 회답이 없는 상태로 궁중에 방치됐다. 당사자의 사망이나 사직 때문에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푸순성 함락 직후 대학사 방종철(方從哲)이 ‘누르하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바로 비어 있는 관직을 채우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조정에 나오지 않고, 신료들의 결원을 보충하지 않으며, 상소나 건의의 내용을 재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정사를 팽개친 만력제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주색(酒色)에 빠지고 토목공사에 몰두했다. 죽은 뒤에 묻힐 정릉(定陵·현재의 명 13릉 가운데 하나)을 미리 짓기 위해 은 800만냥을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내탕이 축나는 것이 아까워 환관들을 전국 각지로 보냈다. 백성들로부터 비용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환관을 앞세운 마구잡이식 수탈에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다. 푸순성이 함락될 무렵 만력제가 보인 행보는 누르하치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설삼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내탕을 풀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미 명의 앞날에 낙조(落照)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병력을 운용할 비용이 없으면 누르하치를 제대로 막을 수 없고, 그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나라가 망하면 자신이 황제 자리에 있을 수도, 수백만냥의 내탕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던 것일까? 누르하치가 한창 떠오르고 있을 때, 최고 권력자가 만력제였다는 사실이 명에는 불행이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고려 초조대장경 복원 나선다

    고려 초조대장경 복원 나선다

    일반인들은 흔히 고려대장경을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쯤으로 인식한다. 부처님의 가피를 빌려 몽골의 침략을 막아낼 방편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거의 정설처럼 따른다. 그런데 고려 무신정권기인 1236∼51년 제작된 이 팔만대장경보다 무려 220년이나 앞서 1011년(현종2년)부터 제작된 초조(初雕)대장경이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팔만대장경은 처음 제작한 초조대장경과 구별해 다시 찍어냈다는 의미를 붙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으로 부른다. 한국과 일본의 초조대장경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이 초조대장경을 복원하기 위한 본격작인 연대작업에 나선다. 한국의 고려대장경연구소(이사장 종림 스님)와 일본 교토의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한·일 학자 400여명이 연구단체를 결성, 오는 4월2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포식을 갖는다. 고려 초조대장경 조성이 시작된 1011년으로부터 따져 오는 2011년이 정확히 1000년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 이같이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대장경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각종 전기, 역사, 사전, 야담을 수록한 동아시아 문화사의 보고. 당시 지식·학술 측면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의 표준 텍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대장경 편찬은 방대한 문헌 작업과 비용이 필요한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사업이었던 만큼 ‘국력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일본만 하더라도 직접적인 목판 제작은 포기한채 고려에서 인경된 부분을 수집해 책으로 묶어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시대의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에 이어 세계 대장경으론 두 번째. 나중에 대각국사 의천이 불경 주석·연구서를 보완해 일체경인 교장(敎藏)으로 발전시켰다. 따라서 한국 불교계는 이 초조대장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초조대장경과 교장은 1만1000여권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몽골전쟁 때 그 목판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1967년 초조대장경의 인본(印本)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된 이래 양국 학자들이 확인작업을 벌여 지금까지 국내 300여권을 포함해 일본 교토 남선사의 2000권, 대마도의 600권 등 전체 초조대장경 분량의 절반 정도인 3000권(인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한·일 양국의 학자들은 4월2일 선포식을 시작으로 지난 2004년부터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진행해온 초조대장경 디지털화 사업을 공동으로 벌이게 된다. 이미 확인된 모든 인본을 정밀 촬영하고 있으며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기초작업도 진행중이다. 양측은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초조대장경 인본을 늦어도 2011년까지는 모두 디지털화하는 것과 함께 나아가 세계의 모든 대장경을 함께 검색할 수 있는 통합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면 세계 각국의 연구자와 신자들은 초조대장경과 세계의 모든 대장경을 한 번 검색만으로 비교해 볼 수 있게 된다. 종림 스님은 “초조대장경은 단순한 불교문화사를 넘어 당시 동아시아 지역이 함께 했던 우수한 공동창작물로 그 복원은 아시아 지역의 매체와 지식 교류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만큼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연상女+연하男’ 커플 10년째 증가

    지난해 결혼한 부부 가운데 여자가 연상인 부부는 12.8%로 10년째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자가 10세 이상 많은 초혼 부부도 332쌍에 이르렀다. 재혼은 6년 만에 감소했다.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가 지난해와 같은 30.9세, 여자가 0.1세 높아진 27.8세다. 농어촌 남자 10명 중 4명은 외국 여자와 혼인했다. 특히 10대 베트남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비율이 늘면서 지난해 10대 후반 여자의 혼인율은 32%로 껑충 뛰었다. 입춘이 두번 낀 ‘쌍춘절’ 효과로 지난해 혼인한 커플이 6년 만에 가장 많았다. 전년보다 16만여명이 늘어 혼인 증가율도 10년 만의 최고치인 5.2%를 기록했다. 통계청이 22일 발표한 ‘혼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은 33만 2800건으로 전년 31만 64000건보다 5.2%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를 나타내는 조혼인율은 6.8명으로 2000년 7.0명 이후 가장 높았다. 초혼 비율은 남녀 각각 82.8%와 81.8%로 전년보다 똑같이 2.4%포인트 늘었다. 반면 재혼 비율은 남녀 각각 16.7%와 18.0%로 2.2%포인트,3.1%포인트 줄었다. 재혼 비율이 감소한 것은 6년 만이며 남녀 모두가 재혼인 비율은 12.4%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70년 이래 최저치를 보였다. 연령별 혼인 증가율은 남자 30대 후반(13.3%)과 여자 10대 후반(32%)이 가장 높았다. 통계청은 “한국 남자와 베트남 10대 후반 여자의 혼인이 전년보다 82%(1900건) 늘어나면서 전체 10대 후반 여자의 혼인 증가율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초혼 부부 가운데 남자가 연상인 경우는 71.9%로 10년 전보다 8%포인트 줄었다. 반면 여자연상 부부는 12.8%로 같은 기간 3.5%포인트나 증가했다. 외국인과의 혼인은 3만 9690건으로 3431건 줄어 비율도 13.6%에서 11.9%로 떨어졌다.‘한국 남자+외국 여자’의 혼인도 감소한 가운데 외국 여자는 중국·베트남·일본·필리핀·몽골 등의 순으로 많았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한·중·미 6者 정상궤도 주력

    |베이징 이지운특파원|한국과 미국, 중국 정부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동결자금 송금 이체 문제를 이른 시일 안에 해결, 북한의 2·13 합의 이행을 이끌어내고 북핵 6자회담을 정상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주력키로 했다. 중국 외교부는 26일 웹사이트를 통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과 전화통화를 갖고 관련 대책을 집중 협의했다고 밝혔다.앞서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도 라이스 장관, 리자오싱 외교부장 등과 잇따라 전화통화를 갖고 이 문제를 협의했다. 한편 중국을 방문 중인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실무책임자인 대니얼 글레이저 재무부 부차관보는 이날 중국측 관계자들과 잇따라 면담을 갖고 BDA의 북한자금 송금 지연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글레이저 부차관보는 “마카오와 중국이 송금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술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 왔다.”고 밝혔다. 북한은 현재 2500만달러를 현금으로 직접 수령하거나 중국은행에서 평양으로 곧바로 송금하는 방안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미·중 양국은 이번 회담에서 중국은행을 거쳐 돈을 넘겨받을 제3의 은행을 찾는 방안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됐다.북한은 중국은행에 있는 조선무역은행 계좌에 2500만달러가 입금되는 즉시 러시아를 비롯한 베트남, 몽골 등 제3국의 은행에 개설된 북한계좌로 자금을 이체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jj@seoul.co.kr
  • 김재현 土公사장 “올공급 택지 69%가 수도권”

    김재현 土公사장 “올공급 택지 69%가 수도권”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수도권내 부족한 택지를 공급하는 데 토지공사의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김재현 한국토지공사 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수행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날인 23일 경기도 분당 토지공사 본사에서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차질없이 택지를 공급하는 게 올해 최대의 경영 목표”라고 설명했다.2기 신도시를 비롯해 수도권내 택지 공급이 줄줄이 예정된 만큼 공공택지 공급 주체인 토공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토공이 올해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신도시 건설 등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설립 이래 최대 규모인 773만평의 택지를 올해 공급할 계획입니다. 지난해 공급한 택지(297만평)의 두 배가 넘습니다. 이중 (그동안 집값이 많이 오른 편인)수도권에 공급하는 비율이 69%나 됩니다. 내년 이후에도 공급이 잘 이뤄지도록 신규 택지 후보지도 전국 683만평 규모 수준으로 지정할 계획입니다. ▶보상비가 부동산 시장으로 다시 들어가 주택 가격을 올린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데요. -이 문제를 최소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보상비가 수도권의 땅을 사는데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토지상환채권을 발행하려는 것도 보상금이 토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측면이 있습니다. ▶행정도시와 혁신도시는 잘 되고 있습니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오는 7월 착공됩니다. 당초 계획대로 강제 수용을 최대한 줄여 협의보상률이 83.1%나 됩니다. 혁신도시는 오는 5월중 토지 보상에 착수해 오는 9월 대구, 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 착공에 들어갑니다. ▶개성공단은 어떻습니까. -북핵 문제로 아직 분양이 남아 있는 개성공단 53만평(300개 업체)은 늦어도 오는 4∼5월중 분양할 계획입니다. ▶토공이 건설업체들에 비싼 값에 땅을 넘겨서 고분양가를 부추기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습니다. 소위 ‘땅 장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요. -택지 개발 과정을 이해하면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해에 따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요. -예컨대 토공이 전체 사들인 토지가 100이라면 이를 다 파는 게 아닙니다. 이중 52%는 도로 등 기반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주고 있습니다. 택지개발한 토지중 48%를 팔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중에서도 임대나 중소형 아파트, 학교 등 공공시설의 경우는 원가나 원가 이하로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남나요. -중대형아파트 택지나 단독택지는 감정가로, 상업용지는 입찰가로 팝니다. 이런 부분에서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토지공사는 정부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이익이 나면 정부에 배당으로 줍니다. 지난해의 경우 순이익 약 6000억원중 정부에 배당으로 나간 게 2000억원입니다. ▶나머지는 어디에 쓰이나요. -나머지는 국민임대, 행정중심복합도시, 경제자유구역, 산업단지 등 공공사업 재투자에 썼습니다. 공익성과 수익성을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엔 개발이익이 해당 지역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발 이익을 지역에 어떻게 환원시키나요. -예컨대 현재 장성군 등 전국 47개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개발 이익을 지자체에 재투자하는 지역종합개발사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곧 착공을 앞둔 남양주의 경우 개발 이익의 50%를 지역에 재투자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원가공개 등에 따라 이익을 내지 못하는 형태로 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도시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임대 주택 문제를 놓고 주공과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요. 밥그릇 싸움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고요. -오해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합니다. 정부 정책이 중형임대를 많이 공급하는 것이고 그 물량을 다 채우려면 현재의 상태로는 어렵지 않겠느냐 하는 차원에서 토공도 임대주택을 짓는 쪽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토공이 임대주택을 한다면 펀드를 조성해서 할 것입니다.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 ‘무능력 공무원 퇴출제’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토공에서는 몇년 전부터 해오던 일입니다. 지난 2005년부터 1∼2급중 능력과 성과부진자 하위 5%를 보직퇴출자로 뽑아 현장부서에 파견하는 등으로 긴장을 주고 있습니다. ▶인사정책이 앞선다는 평이 많습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나이제한과 학력제한을 없앴습니다. 또 지난해부터는 지방대 출신을 입사자의 40% 수준까지 늘렸습니다. 토공이 전국에서 개발사업을 벌이는 만큼 지방대 출신이 중요합니다. 최근 청와대에 인사정책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에서도 토공을 최근 자주 찾는 것 같은데요. 토공이 인정받는 강점이 무엇인가요. -‘U시티’(유비쿼터스 시티) 조성 기술입니다. 지난 2003년 착공한 화성 동탄을 시작으로 성남판교, 인천청라, 행정중심복합도시, 송파거여 등 앞으로 토공이 시행하는 모든 신도시가 U시티로 조성됩니다. 세계 각지에서 이 기술을 전수받으려 몰려들고 있습니다. 몽골 카자흐스탄 알제리 등과는 신도시 개발 기술 전수를 위한 양해각서(MOU)도 체결했습니다.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일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은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습니다.1급 간부들에게는 대외 협상력을 갖추고 후배들에게 의지가 되는 ‘적극적인 리더십’을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바람나는 직장도 중요하겠지요.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를 조성해 직원들이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조직(2800명)의 40%가 3∼4년차의 새내기입니다. 현재 129명의 신입사원이 연수중인데 올해부터 신입사원 하나에 부장급을 한명씩 붙여 지도하도록 하는 ‘멘토제’를 도입했습니다. 정리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기업문화 투명하게 대혁신 토지공사가 수년간 투명한 경영 문화를 만들겠다며 추진하고 있는 경영혁신이 지난해 기획예산처의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 1위라는 영예로 돌아왔다. 김재현 사장은 토마토를 좋아한다. 경영혁신의 모토도 토마토다. 겉이 빨간 색이면 속도 빨갛게 익은 토마토처럼 투명한 토지공사가 되자는 취지에서다. 지난 2005년 신청, 추첨, 계약체결, 잔금 납부, 소유권 이전 등 토지 청약의 모든 과정을 인터넷으로 공개하는 ‘토지매수 고객에 대한 토마토 거래시스템’으로 구체화됐다. ●‘훌륭한 일터´ 추진 최근에는 ‘훌륭한 일터’라는 뜻의 GWP(great work place)를 기업문화로 추진중이다. 임·직원의 청렴의식을 높이고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클린토공 청렴학교’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 강화도 혁신활동의 일환이다. 최근 ▲국토사랑 ▲이웃사랑 ▲문화사랑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토공만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체계화했다. 본·지사 26개 지부 1200여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토공 온누리 봉사단’은 지부별로 사회복지기관과 자매결연을 맺어 활동을 펴고 있다. ●5년 연속 매출 4조원 이상 조직의 변화는 높은 경영성과로 이어졌다.2000년 261%였던 금융부채 비율은 지난해 135%로 낮아졌다.5년 연속 4조원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는 등 창사 이래 최대 경영성과도 거두고 있다. 토공의 지난해 매출액은 전년보다 20%가량 증가한 5조 3740억원. 순이익은 5831억원.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김재현 사장은 누구 김재현 토지공사 사장은 사내에서 ‘불도저’로 통한다. 1990년 6공 시절 정부의 통일정책사업으로 추진된 통일동산과 자유로 조성사업 때의 일화 때문이다. 당시 김 사장은 이 사업의 총책임을 맡았다.8·15 광복절 기념으로 통일전망대 주차장∼오두산 전망대를 연결하는 오두산1교 개통 준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개통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시공상 문제점이 발견됐다. 마땅히 재시공을 해야 했지만 그럴 경우 광복절에 맞추기가 불가능하다는 게 주변의 지적이었다. 결국 기념행사에 맞춰 임시개통한 뒤 재시공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철거를 강행했다. 그뒤 4개월간 현장에 상주하며 매일 공정과 현장 상황을 일일이 체크해 오두산1교를 완벽한 상태로 개통시켰다. 이후 자유로도 개통됐다. 그의 이같은 밀어붙이기식은 토공의 조직 혁신에도 적용시켰다. 무능력자 퇴출제 도입, 입사연령 폐지, 지역파괴, 특별승진제 도입 등 혁신 정책을 주도해나갔다. 그래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은 ‘혁신 전도사’로 통한다. 이같은 그의 자신감의 배경에는 토공 설립 원년(1979년) 멤버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경력이 뒷받침하고 있다. 지역 및 도시계획기사 1급, 토목기술사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철탑산업훈장, 산업포장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주말마다 산을 찾았으나 최근에는 가끔 골프도 즐긴다. 부인 정현옥(58)씨와 사이에 3남. ●프로필 ▲62세 ▲전남 고흥 출생(1945년) ▲순천 농림고 졸(1964년) ▲조선대 토목공학과 졸(1969년) ▲토지공사 입사(1979년) ▲지원사업처장(1993년) ▲택지본부장(1999년) ▲부사장(2001년) ▲사장(2004년)
  • ‘中 동북공정’ 허구 입증 나선다

    ‘中 동북공정’ 허구 입증 나선다

    올 여름 고구려 연구자들이 몽골을 찾는다. 이번 발굴과 답사는 한민족의 ‘원형질’을 확인하는 작업의 마무리이자 시작이라고 한다. 몽골에 무엇이 있기에 고구려 연구자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일까. ●동북공정 깰 ‘열쇠’ 고구려연구회는 6월 초부터 한 달 보름동안 러시아·몽골 연구자들과 함께 러·몽 서부접경 지역, 이른바 ‘몽골 알타이’에서 돌궐시대의 제사터와 무덤 등을 발굴할 예정이다. 러시아측에서는 학술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고고학인류연구소, 몽골측은 몽골과학원 고고연구소가 참여한다. 발굴이 마무리될 즈음인 7월7일부터 열흘간 일반인을 포함한 답사단이 현지를 방문, 발굴성과 등을 돌아보게 된다. 한·러·몽 3국의 연구자들이 돌궐에 주목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과 무관치 않다. 무분별하게 북방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중화문화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음모에 3국 학자들이 공동 대응한다는 차원이다. 돌궐은 6세기부터 2세기 동안 중국의 서북방을 다스렸던 국가다. 당시 중국은 수와 당이 지배했고, 요동과 한반도 북방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들 3국은 힘의 균형을 유지했으며 그 균형이 깨졌을 때 전쟁이 벌어졌다. 수와 당은 돌궐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할 때 중국은 돌궐의 융기를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 이전도 마찬가지다. 고조선 시기에는 흉노가 있었다. 북방의 흉노, 중원의 중국, 동방의 고조선 사이에는 힘이 정립돼 있었다.108년 한이 고조선을 점령하고, 한4군을 세웠으나 흉노가 중국을 침략하자 한4군은 흔들렸다. 이번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동북아 정세는 항상 세 세력의 관계가 좌우했다.”면서 “러시아, 몽골과 함께 최초로 돌궐을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앙아시아와의 공동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한국어가 알타이어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동안 우리는 몽골을 소홀히 했다.”고 덧붙였다. ●알타이~요서~한반도 ‘문화벨트’ 확인 발굴팀이 단순히 돌궐에만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몽골 알타이’에서 중국 요서지역, 그리고 한반도로 이어지는 석기·철기문화의 공통점을 확인한다는 계획도 있다. 중국이 자국 문화로 편입시키려는 ‘홍산문화’의 집산지인 요서지역의 경우,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 등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는데다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적석총 고분군도 수십개 산재해 있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 무렵의 유물들도 많이 발굴됐다. 고구려연구회는 이미 2000∼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요서지역을 답사했고,2003년과 2005년에는 실크로드와 ‘러시아 알타이’ 지역을 집중연구한 바 있다. 여기서 중국의 원류인 중원문화와는 상관이 없는 유목민족의 ‘뿌리’를 확인했다. 실제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되는 ‘활쏘는 무사 벽화’와 비슷한, 말 타고 활을 쏘는 ‘바위그림’이 여럿 발견됐다. 서 교수는 이번 발굴 및 답사의 의미를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했다. 바로 러시아, 몽골, 한국 연구자들이 학술교류를 시작한다는 점과 아시아 균형론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한편 북방민족의 특징들을 확인한다는 사실이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이색거리 탐방] (9) 화곡동 유통 단지

    [이색거리 탐방] (9) 화곡동 유통 단지

    목동에서 인천방향으로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신월나들목 못미처 ‘○○유통’‘○○통상’이란 간판이 쭉 늘어서 있는 거리가 있다. 총 1.2㎞ 구간에 230여 생활용품 점포가 들어선 화곡유통단지다. 생활용품 단지로는 국내최대 규모인 이곳은 “먹을거리와 입을거리 빼곤 다 있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물건이 다양하고 많다. 특히 가격면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싸다고 장담한다. 취급품목을 보면 문구, 완구, 화장품, 주방용품, 판촉물, 도자기, 가방·벨트 등 가죽용품, 소형가전, 공구, 차량용품, 인형, 게임기, 매트, 인테리어 팬시용품, 우산, 타월, 경품, 생활 잡화 등 종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가격. 저렴한 가격 덕분에 중간상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쉬쉬하며 감추는 ‘비밀의 쇼핑장소’다. 같은 장사라도 남보다 싸게 물건을 공급받아야 경쟁력이 생기는 탓에 ‘침묵의 카르텔’은 지켜진다고 이곳 상인들은 말한다. 화곡유통협동조합 홍종국 이사장은 “품목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형마트의 반값으로 쇼핑이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면서 “덕분에 지방 상인은 물론 러시아,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를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까지 찾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싸도 소매를 안 한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지만 지난해 8월 조합 이사회는 회의를 통해 도매와 소매를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대 초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래 도매만을 고집했던 이곳이 소매를 시작한 것은 사정이 있다. 최근 할인마트와 대형슈퍼마켓들의 공세에 주고객층인 소상인들의 구매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 편리함으로 무장한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도 불황을 가중시켰다. 주방용품을 파는 한 상인은 “도매전문상가에서 소매를 취급하는 건 제 살 깎아먹는 격이란 논쟁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 상점의 30% 정도는 소매를 하지 않는다. 매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 도매가격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일부 단골 소매상들이 심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가격경쟁력에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협동조합 박상근 상무는 “주 고객이 도매상인 탓에 일반소비자에 비해 (도매 소비자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조금 불편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싼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상가 대부분이 오전 9시∼오후 7시 문을 열며 일요일엔 쉰다. 글· 사진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어디서 무얼 살까 그러면 화곡동 생활용품단지의 대표적인 품목을 중심으로 쇼핑에 나서 보자. 아동용 완구전문점인 벤처유통은 3층짜리 건물 전체가 각종 무선조정완구와 게임기, 로봇, 인형, 소형게임기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전품목이 일반매장에 비해 30% 이상 싸다. 소형가전 전문점인 성원상사에선 전기밥솥부터 전화기, 스팀다리미, 토스터, 면도기, 다리미 등 각종 전자제품을 살 수 있다. 무선주전자도 만원이면 살 수 있다. 한 가게 주인은 “백화점에서 20만원까지 호가하는 T사의 신형 전기그릴이 이곳에선 10만원 정도로 평균 40%는 싸다.”고 말했다. 고속도로변 미화물산은 액자와 스탠드, 장식장, 청동장식 등 앤티크풍의 인테리어 소품을 판매한다. 인테리어 용품은 사치품목인 데다 소량생산으로 물건이 귀해 가게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그만큼 바가지 쓰기 좋다는 말인데 이곳에선 일반매장의 50% 정도 가격에 구입이 가능하다. 지갑, 벨트, 가방 등 각종 가죽제품을 파는 CM유통에선 벨트는 2000원, 지갑은 7000∼8000원부터 살 수 있다. 한동유통에서는 그릇, 수저, 프라이팬부터 식당에서 쓰는 대형 솥단지까지 주방용품 일체를 판매한다. 매장을 돌며 발품 파는 것이 힘들다면 만물유통과 같은 ‘마트식 도매점’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4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이곳은 스포츠용품부터 공구, 시계, 주방잡화, 자동차용품, 주방용품까지 마치 유통상가를 축소한 듯하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황당 휴회’ 6자회담 풀리지 않는 의문들

    |베이징 김미경특파원|‘2·13합의’ 이행 논의를 위한 제6차 북핵 6자회담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22일 휴회하면서 회담 결과를 둘러싸고 갖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지난 19일 나온 미 재무부의 BDA 자금동결 전액해제 발표과정이 석연치 않다. ●서로 눈치보기? 당시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북측과 BDA에 동결된 자금을 전액 반환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당시 성명에는 (미)재무부는 마카오와 중국 정부에 이 합의를 지지한다는 점을 통보한 것으로 명시돼 있다. 이와 관련, 정부 소식통은 “중국측이 BDA 해제에 부담을 느껴 미국측에 성명발표를 요청했으며, 미국도 소임을 다하기 위해 해제발표를 했지만 ‘북한 동결자금 처분은 마카오 법에 따라 마카오 정부가 결정할 사항’이라는 단서를 달아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며 “그 뒤로 생길 금융시스템상 기술적·절차적 문제를 미 재무부가 몰랐을 리 없고 중국 및 마카오 당국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나 서로 눈치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은행측이 회담 마지막 날인 22일 BDA의 북한자금 이체를 요청받은 바 없다고 밝힌 것도 의문이다. 중국 수석대표인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은 “회담 당사국들이 중국은행과 긴밀히 협의 중”이라고 밝혔으나 은행측은 “어떤 접촉도 가진 적 없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와 은행간 손발이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6자회담 소식통은 “뉴욕 증시 상장을 앞둔 중국은행이 주주들을 고려, 불법적인 성격의 BDA 북한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미국 책임론 제기 북한도 송금 지연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측 회담 관계자는 “북측 대표단이 마지막 수석대표회의에서 (BDA문제 지연에 대해)미안한 톤으로 얘기했으며,2·13합의 이행 협의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해 아쉽다는 언급을 했다.”고 전했다. 중국은행의 송금 수용거부뿐 아니라 북측 계좌 50개 예금주의 계좌이체신청서 제출도 늦어진 만큼 북측에도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측이 당초 2·13합의 이후 BDA문제를 30일 내 해결하겠다고 한 약속을 깨고 송금이 지연돼 김계관 부상이 본국으로부터 돌아오라는 훈령을 받은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러시아측 수석대표인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외무차관은 “미국이 북한자금 해제 의무를 지키지 못해 6자회담이 실패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며 “모든 문제는 미국측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로슈코프 차관은 “북한자금을 접수할 다른 은행을 찾고 있으며, 베트남이나 몽골, 러시아 은행일 수도 있다.”며 “(은행들의 우려가 있는 만큼)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미 정부의 서면각서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국제금융거래가 거의 막힌 상황에서 제3국 은행이 이를 수용할 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가능성 낮은 제3국 송금 이에 따라 예금주들이 직접 BDA에서 자금을 인출하거나, 평양 내 은행으로 송금받는 방법 등도 거론된다. 하지만 예금주의 직접 인출은 신청서 제출이 필요해 북측이 거부할 가능성이 높고 평양 내 은행 송금도 금융시스템상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우다웨이 외무성 부부장이 북한에 진출한 한국 은행의 협조를 받는 방안을 우리 정부측에 제안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중국측이 그런 제안을 한 적이 없고 현재 북측에서 영업 중인 우리 은행에는 북측 계좌가 개설돼 있지 않아 BDA 자금이 이체되는 일은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chaplin7@seoul.co.kr
  • ‘거장’ 조정래·김원일 다시 묻는다

    한 남자가 있다. 일제 때 군대에 끌려가 일본 관동군에서 복무하다 몽골전투에 참가한 이 남자는 동료 ‘조센징’들과 함께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소련군으로 ‘전향’한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해 독일군과 전투를 하다 또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수용소에서의 간단없는 삶 끝에 독일군 ‘동방대대’에 편입된 이들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의 ‘대서양 방어선’ 건설에 투입됐다가 미군의 포로가 된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이 된 이들의 ‘기막힌’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전락할 수 있을까. 다른 한 남자가 있다. 할아버지는 ‘독립투사-관동군 731부대 보초-빨치산’이라는 특이한 경력이 있고, 아버지는 ‘산업화의 주역’으로 현장에서 오른쪽 팔목 밑을 프레스에 잃은 뒤 가정폭력을 일삼고, 행패나 부리며 살더니 결국 ‘개백정’으로 전락했다. 공교롭게도 부자가 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조용하게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지내다 죽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거구 유전자를 물려받아 신장 190㎝인 ‘그 남자’는 또 어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개백정 짓에 이골이 난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이름난 깡패짓을 하더니 고등학교 문턱도 못가고 교도소만 들락거렸다. 가출했던 누이는 ‘YH사태’때 투신했다가 장애인이 됐다. 아버지한테 강간을 당해 억지로 결혼한 어미는 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기막힌’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피’의 그림자가 이렇게 짙을 수 있을까. 문단의 두 거두인 소설가 조정래(64)씨와 김원일(65)씨가 ‘인간’에 천착한 문제작 ‘오 하느님’(문학동네 펴냄)과 ‘전갈’(실천문학사 펴냄)을 최근 각각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각각 장대한 ‘공간’과 ‘시간’을 다루고 있다. ‘오 하느님’이 아시아, 유럽, 미주를 아우르는 거대공간을 갖고 있다면,‘전갈’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대다. 두 작품 모두 ‘의도적으로 잊혀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붙잡힌 동양인 독일군의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오 하느님’이나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일제 부역자’ ‘산업화 역군’ ‘조폭’ 등 3대를 그린 ‘전갈’은 모두 우리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올해 조씨는 등단 37년, 김씨는 41년째를 맞았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양감 넘치는 대하소설을 주로 발표해온 조씨이기에 사실 이번 작품은 의외다. 계간지 문학동네에 겨우 두 차례 연재한 경장편이다. 하지만 소재나 주제는 이전 작품에 견줘 전혀 가볍지 않다. 결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씨는 “‘도대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범인류적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장편의 제목은 ‘맙소사’라는 뜻이 강한 ‘오마이갓(Oh my God)’과 다르지 않는 ‘절망적 절규’를 담고 있는 셈이다. 조씨는 “역사가 바뀌어도 강대국은 끊임없이 약소국을 억압할 것”이라면서 “이는 결국 인류공통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며 작가는 이런 문제를 계속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도 5∼6편 정도 이같은 범인류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갈’은 김씨의 13번째 장편이다. 지난해말 갑자기 찾아온 병마(뇌경색)를 딛고 난산한 작품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김씨는 “처음부터 지독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작정하고 썼다.”면서 “당대에는 소수집단으로 분류될지라도 그들의 발자취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3대 가운데 아버지인 ‘강천동’은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일 뿐이지만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형이고, 아들과 꼭 닮았다. 아직 온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작가는 가을에 또다시 중단편집을 한권 더 낼 작정이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생명 은인’ 몽골인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병원을 떠나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지난 17일 발생한 서울 신도림동 D주상복합건물 화재 당시 건설인부로 일하던 한 몽골인이 다수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구해낸 것으로 밝혀져 감동을 주고 있다.이 몽골인은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강제추방될 것을 우려해 치료를 포기하고 사고 당일 사라진 4명의 몽골인 가운데 한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구로성심병원에 입원한 D건설 직원 강승우(33)씨는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라면서 한 몽골인의 몸을 아끼지 않은 구조활동에 대해 증언했다. 화재 당시 23층에서 인테리어 작업을 하던 강씨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유독가스를 피해 27층까지 올라갔지만 위층에서도 내려오는 연기에 막혀 오도가도 못한 채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그때 위층에서 “밑에 누구 있어요.”라는 소리가 들렸고, 강씨는 필사적으로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강씨는 “위층에서 한 젊고 건장한 젊은이가 내려와 나를 부축해 건물 옥상으로 대피시켰다.”고 말했다. 강씨를 구한 뒤에도 이 사람의 활약은 계속됐다. 강씨는 “이후로도 그는 위급한 사람들을 여러명 대피시켰고, 구조 헬기가 옥상에 모인 사람들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소방대원들을 도왔다.”고 밝혔다.13층에 설치된 소방사다리까지 부상자들을 옮긴 뒤 사다리로 내려 보내고서야 자신은 걸어서 계단을 내려갔다는 것이다. 강씨를 구한 사람이 몽골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려준 것은 강씨와 함께 작업을 했던 이모(37)씨다. 이씨는 “강씨를 구출한 젊은이가 같은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의사가 국적을 묻자 ‘몽골’이라고 대답했다.”면서 “나중에 그 사람이 불법체류 신분이라서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부상자 접수를 담당했던 병원 관계자는 “경황이 없어 유심히 보지는 못했지만,‘덩치가 크고 젊은 몽골인’이라면 S(21)씨나 K(27)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화재 당시 유독가스 흡입 등으로 병원에 입원한 12명 가운데는 몽골인 4명이 포함돼 있었지만, 이들은 입원 직후 링거주사기를 뽑고 사라졌고, 현재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화재 당시 옥상구조를 지휘했던 전동휘 구로소방서 구조대장도 “몽골인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화재진압 과정에서 우리를 도와 위급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강씨는 “목숨을 걸고 다른 이들을 구한 사람이 정작 자신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치료조차 못 받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24일은 세계 결핵의 날

    24일은 세계 결핵의 날

    ‘결핵’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때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결핵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22일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결핵에 감염된 환자수는 3만 5361명으로 2004년 이후 3년 연속 늘고 있다. 결핵 신(新)환자수는 2001년 3만 4123명,2002년 3만 2010명,2003년 3만 687명으로 꾸준히 감소하다 2004년 3만 1503명,2005년 3만 5269명으로 상승세로 전환했다. 인구 10만명당 신환자율도 2003년 64명이던 것이 2006년 73.2명으로 최근 5년내 최고치를 갱신했다. 특히 10·20대 층에서 결핵환자가 증가해 젊은층과 60세 이상 노년층에서 결핵환자가 늘어나는 후진국형 ‘양봉’형태로 회귀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20대 연령층에서 가장 많은 6589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올해 전국 결핵환자 추정치는 14만 2000여명으로 OECD국가 중 최다 결핵환자 발생률과 사망률(2004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65.4명,6.1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국보다 각각 18배,100배 높은 수치다. 류우진 결핵연구원 역학조사부장은 “결핵 신환자 5명 중 1명꼴이 20대 연령층으로 65세 이상 노년층 다음으로 많다.”며 “이는 우리나라에 여전히 결핵 감염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후진국일수록 주변 감염자가 많아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 10대에 감염돼 5년 이내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1965년 역학조사 때 10∼14세 연령군의 결핵감염률이 최고였고,1995년에는 15∼19세,2005년 30대까지 연령대가 늦춰졌다가 다시 후퇴하고 있다. 류 부장은 “‘최근 감염에 의한 발병’으로 노인층의 경우 40∼50년전 젊은 시절 감염된 균들이 재활성화되면서 발병율이 증가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특히 10대 환자 증가요인으로는 불규칙한 생활습관과 학업 등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가 꼽히고 있다. 환경과 위생이 열악한 일부 PC방, 노래방, 극장 등 다중집합장소 출입이 과거보다 빈번한 것도 요인으로 지적된다. 급증하는 불법 입국 외국인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결핵연구원측은 2001년 126명에 불과하던 국내 외국인 결핵 신환자수가 2005년 388명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류 부장은 “중국, 필리핀, 몽골, 베트남,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순이며, 중국이 전체 신환자수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며 “이는 신고된 환자수로 불법 입국자의 경우 검사에서 제외된다.”고 지적했다. 여러 가지 약을 한꺼번에 써도 치료가 잘 되지 않는 다제 내성균과 일명 ‘슈퍼 결핵균’이 등장하는 것도 우려를 낳고 있다. 박병하 질병관리본부 질병예방센터 본부장은 “이런 결핵균에 감염되면 치료도 어렵고 때론 사망한다.”면서 “환자들이 결핵약을 복용하다 중단하기를 반복해 강한 내성균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핵 전문가들은 “폐결핵 환자의 40%가 전염성 강한 도말양성 환자”라며 “2∼3주 이상 기침, 가래, 미열, 식은땀, 체중감소 등이 계속되면 보건소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覇者)로 등장하기 전까지, 명이 상대하기에 가장 버겁고 까다롭게 여긴 대상은 예허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르하치가 하다, 호이파, 울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예허는 고립되었다. 명은 이제 예허를 다독여 누르하치의 후금을 견제하려 했고, 위기에 처한 예허도 명에 의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히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라고 부르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명과 후금 사이의 현저한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과 맞서는 것을 애써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명, 예허와 결탁해 만주 견제 누르하치에게 복종과 배신을 거듭했던 부잔타이는 1613년 울라가 망하자 예허로 망명한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예허에 세차례나 사자를 보내 부잔타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예허가 자신의 요구를 일축하자 누르하치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허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예허의 국주 긴타이시(錦台什)는 명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누르하치가 예허를 정복하고 나면 랴오양(遼陽)을 쳐서 수도로 삼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목초지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 예허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병력 1000명을 예허로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접한 누르하치는 명에 보내는 국서에서, 과거 예허가 주동이 된 해서(海西)연합군이 자신을 먼저 침략했던 것과 부잔타이가 배신을 거듭했던 사실을 적고 자신의 예허 공격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명이 예허만 편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누르하치가 국서를 들고 명군 주둔지인 푸순성(撫順城)까지 직접 가서 전달했던 점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에게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명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누르하치의 바람과는 달리 명의 견제와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1615년, 명의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은 시하(柴河), 무안(撫安), 삼차(三 ) 등지에 대대로 살았던 만주의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허투알라와 푸순 사이에 위치한 세곳은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하고 있던 땅이었다. 명은 경작과 수확을 막아 경제적 기반을 차단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는 격분할 만했다. 누르하치는 1608년 푸순 지역의 명군 지휘관들로부터 과거부터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거주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당시 백마를 잡아 하늘에 맹서하고,‘만일 약속한 경계를 침범하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를 그대로 두면 묵인한 사람이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의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장승음이 맹서를 어겼다고 성토하고,“대국이 소국이 될 수 있고, 소국이 대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며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명과의 정면 대결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공격´ 주장 신료 말리며 역량 키워 1615년, 명이 일방적으로 예허의 편을 들고 경작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자 누르하치의 신료들은 격앙됐다. 그들은 당장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누르하치는 신중했다. 그는 신료들에게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저축이 없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어봤자, 백성들만 고달프게 될 뿐’이라고 공격론을 일축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자 평가였다. 당시 아무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자 강국이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명의 인구는 만주보다 수백배나 많았고, 명의 대군은 만주가 갖추지 못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승음의 ‘견제 조처’가 나온 직후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을 보면,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만주의 각 니루(牛 )에서 장정 열명과 소 네 마리씩을 내게 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에 힘쓰도록 한 것, 창고를 세워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전담관원을 임명한 것, 신료들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강조한 것, 백성들이 소송(訴訟)을 제기한 사안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함을 없애라고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국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인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몽골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했던 점이다.1614년 4월부터 1615년 1월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 만주는 몽골과 모두 다섯 차례나 혼인관계를 맺는다. 1614년에는 홍타이지를 비롯한 누르하치의 네 아들들이 몽골의 자루트( 特)와 코르친(科爾沁) 부족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다.1615년에는 누르하치가 코르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617년 1월, 누르하치의 장인인 코르친 부족의 밍간(明安) 국주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오자, 누르하치는 왕비와 모든 신료들을 대동하고 허투알라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밍간은 누르하치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허투알라에서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렇게 중첩된 사돈관계를 통해 우호를 유지했던 것은 만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실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게 선전포고하고 푸순을 공략할 때, 원정군 가운데는 그의 몽골인 사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남쪽으로 명, 동쪽으로 만주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이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섣부른 공격 대신 몽골을 회유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대 원한´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 누르하치는 명과의 격돌을 피하면서 내실을 다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후금(後金)의 건국을 선포하고, 칸(汗)으로 즉위했던 1616년. 명 조정은 광녕 순무(巡撫)로 이유한(李惟翰)이란 인물을 임명했다. 광녕 순무는 사실상 요동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자, 누르하치 등 여진 부족들과 교섭하는 최고위급 ‘채널’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유한이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신료 강구리(綱古里)와 팡기나(方吉納)를 인사차 파견했다. 그런데 이유한은 강구리를 비롯한 후금의 사절 11명을 쇠사슬로 묶어 구금해 버렸다. 이어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가 경계를 넘어온 한인(漢人)들을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한인 살해’에 가담한 자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누르하치는 과거 ‘월경한 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비석에 새겼던 내용을 상기시키며 사자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결국 광녕에 억류된 강구리 등을 살리기 위해 편법을 쓴다. 후금이 구금하고 있던 예허의 포로 10명을 ‘한인 살해자’로 이유한에게 넘겼던 것이다. 강구리 등은 약속대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명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1618년 4월13일. 누르하치는 신료와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을 공격해야만 하는 ‘일곱가지 원한’, 이른바 칠대한을 제시했다.1583년, 이성량이 자신의 부조(父祖)를 살해했던 것이 첫 번째 원한이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명이 예허를 편든 것, 맹서를 어기고 한인들의 월경을 방조한 것, 만주인들을 세 주거지에서 내쫓고 경작과 수확을 금지한 것 등이 골자였다. 명이 자신과 후금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윽고 제천의식이 끝나자 기병과 보병 2만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이 푸순성을 향해 진격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일 TV 하이라이트]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5000년의 역사를 지닌 중동의 전통 화장술인 헤나 문신이 아랍에미리트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헤나 문신은 영구적이지 않아 부담이 없고 독특한 아랍문화도 체험할 수 있다. 도형, 꽃, 동물 등 디자인이 다양하고 신체 어디에나 가능하다. 헤나 문신은 이제 당당한 패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큐10(EBS 오후 9시50분) 비잔틴제국의 정신적 토대가 된 그리스정교가 어떻게 발전했고 또 어떤 문화유산을 남겼는가를 살펴본다. 비잔틴제국의 초기 6세기쯤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가운데 하나인 카타리나 수도원을 방문, 수도사들이 어떻게 주변의 이슬람 세계와 공존해 왔는지도 알아본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오후 6시50분) 특별 프로젝트 소아비만편. 열두 살 장원이와 열한 살 선경이. 이들의 정확한 몸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검사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기에 어린 나이에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비만을 불러온 충격적 원인과 그 해결을 위한 비법을 알아본다.   ●나쁜여자 착한여자(MBC 오후 7시45분) 소영은 말자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건우와 서경이 식사를 하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말자는 건우가 서경의 옛 연인이며 요즘도 만나고 있다는 소영의 말에 놀란다. 배신감에 주저앉고 만 말자는 어쩔 줄 몰라하고, 소영은 웃는다. 한편 넋이 나간 세영은 무작정 길을 걷다가 여관으로 들어간다.   ●놀라운 아시아(KBS2 오후 8시55분) 몽골 고비사막에서 1년에 단 한번 열리는 낙타축제. 몽골 낙타와 함께하는 흥겨운 축제의 한마당을 소개한다. 일본에는 지금 초미니 열풍이 불고 있다. 조리공간이 30㎝ 밖에 안 되는 도쿄의 네 평짜리 스테이크 하우스에서부터 공중전화부스 크기의 초소형 쌀집까지 일본 초미니 하우스를 공개한다.   ●생로병사의 비밀(KBS1 오후 10시) 아무런 증상 없이 혈관이 부풀어 오르는 질환인 대동맥류. 어느 날 갑자기 파열돼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에 ‘몸속의 시한폭탄’이라 불린다. 파열되기 전까지는 통증이 없어 숨겨진 대동맥류 환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동맥이 부풀어 오르는 원인과 그 치료법에 대해 알아본다.
  • 불법체류자 4명 치료포기 잠적

    5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주상복합 아파트 공사 현장 화재로 병원에 입원했던 불법 체류자가 추방될 것을 우려해 치료를 포기하고 달아난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18일 서울 구로성심병원과 보라매병원에 따르면 17일 오전 8시20분 발생한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D주상복합아파트(지상 30층) 공사현장 화재로 유독 가스를 마셔 병원에 입원한 공사장 인부 몽골인 P(41)씨와 K(27)씨 등 불법체류자 4명이 18일 새벽 몰래 달아났다.P씨와 K씨는 출입국관리소 확인 결과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확인됐으며, 나머지 2명은 신원이 파악되고 않고 있다. 당시 사고로 박모(46)씨가 숨지고 54명이 다쳐 이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이었으며, 외국인 노동자는 P씨를 포함해 6명이 다쳤다. 병원 관계자는 “이들의 부상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유독가스를 마셔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면서 “이들이 치료도중 경찰 당국에 신분이 노출되면 국외 추방 등 사법처리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치료를 포기하고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사고는 공사현장 2층에서 용접공들이 천장 에어컨 동배관 연결 작업을 하다 불꽃이 우레탄폼에 옮겨붙어 일어났으며 건물 2300㎡ 등을 태워 2억 3000여만원(소방서 추산)의 재산피해를 냈다. 불이 나자 소방대원 136여명과 경찰 10여명, 소방차 61대, 소방헬기 3대가 출동해 진화에 나섰고 헬기와 고가 사다리차가 동원돼 구조작업을 벌였다. 경찰은 현장 소장과 안전관리담당자에 대해 이번 사고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의 벽 조금씩 허물었죠”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의 벽 조금씩 허물었죠”

    “(한국인들이 고집하는) 순수한 혈통이란 없습니다. 한국인 혈통의 40% 정도는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결합할 때 사회가 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축사-박경태 성공회대 교수) “막연히 한국인들이 외국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한국어가 서툴러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6주가 흐른 뒤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답사-필리핀 출신 이한나) 18일 서울 구로구 항동의 성공회대 정보과학관. 평소 일요일 오전 한산할 법한 캠퍼스가 이날따라 왁자지껄했다. 몽골, 필리핀, 카자흐스탄, 미얀마, 방글라데시, 중국 등 아시아 각국에서 온 이주민들과 한국인들이 한 데 모여 아주 특별한 수료식을 열었다. 조그만 강의실에서 열린 ‘이주민을 위한 한국시민사회 이해 교육’ 과정의 수료식은 어떤 졸업식보다 진지하면서도 흥겨웠다. 성공회대 측의 축사와 수료생 대표의 답사가 오간 뒤 필리핀 결혼 이민자들의 민속공연과 참여연대 노래패의 축하공연으로 한껏 흥이 달아올랐다. 마지막엔 모든 참가자들이 흥겨운 풍물에 맞춰 강강술래를 돌며 하나가 됐다. 이들은 지난달 6일부터 6주 동안 일요일 아침 졸린 눈을 비벼가며 성공회대에 모였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오슬로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홍세화씨 등이 한글과 한자, 영어를 뒤섞어 진행한 강의가 끝나면 이주민들은 어설픈 한국말로 열띤 토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이주민들의 마음 속에선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출발은 44명이 했지만 두번째 결석부터 중도탈락시키는 엄격한 학사관리로 23명이 수료의 기쁨을 나눴다. 미얀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지난 1994년 당국의 탄압을 피해온 마웅저(39·‘함께하는 시민행동’ 활동가)는 “한국인들은 ‘우리’라는 의식이 너무 강하다. 그 ‘우리’ 속에 이주민들의 자리는 없었다.”면서도 “한국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열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 하얼빈 출신의 안영화(39)·윤경전(38) 부부는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이해할 순 없다.”면서도 “서로 이해하면서 벽을 허무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박경태(사회학과) 성공회대 교수는 “김장 담그기나 컴퓨터 교육 등 이주민에 대한 기술 교육은 포화 상태”라면서 “일정학력 수준을 넘어선 이주민들이 직접 뿌리내리고 살아갈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교육과정을 실질적으로 준비한 김애화 한국국제이주연구소 연구위원은 “다문화사회에서 한국인이 이주민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물론 이주민들도 한국 사회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했다.”면서 “수강생들의 한국어 실력차가 커 100% 이해하기는 힘들었겠지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흐뭇해 했다. 글 사진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해외스타 해외입양 동기는 뭘까

    지난 주말 미 할리우드 톱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베트남 호찌민의 고아원에서 세살된 남자 아이를 입양한 것을 계기로 해외 유명 연예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외국 아이 입양이 화제가 되고 있다. 졸리는 지난해 파트너인 배우 브래드 피트와 사이에 낳은 딸 실로 누벨 말고도 아들 매독스(6)를 캄보디아에서, 딸 자하라(3)를 에티오피아에서 이미 입양했다. 부모와 4자녀의 국적·인종이 제각각인 유례없는 ‘다민족·다문화 가족’을 이룬 셈이다. 팝 스타 마돈나도 최근 말라위에서 아들을 입양했다. 이혼한 배우 맥 라이언도 중국에서 딸을, 이완 맥그리거 부부도 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살난 여자아이를 몽골에서 입양했다. 해외 입양의 선구자격인 배우 미아 패로는 직접 낳은 아이 넷이 있지만, 한국 등 외국에서 10명을 입양했다. 동기는 뭘까. 졸리가 호찌민의 고아원에서 흘렸던 눈물에서 읽을 수 있듯, 인류애적인 사랑의 발현일까, 단순 동정심일까. 아니면 원죄의식에 대한 구원 심리일까. 미국 abc방송은 최근 심리학자와 해외입양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출산 능력이 있는 연예인들의 해외 입양 동기를 분석했다. 심리학자인 힐러리 허너핀 박사는 “‘엄마가 된 사람’으로서, 정상적인 가정을 갖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모성애가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입양 전문가인 데이비드 커시너는 “일종의 강박관념일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여러명을 입양하는 것은 ‘원죄 의식과 구원’의 복합적 심리가 작용한 결과로, 임신에 대한 공포와 출산의 고통이 하나의 동기일 수 있고,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개인적인 성향이 경쟁적으로 작용, 세상에서 가장 다양하게 구성된, 훌륭한 대가족을 만들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전 세계 고아들은 1억 4300만명. 전문가들은 연예인들의 해외 입양 동기가 어떻든간에 해외 입양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고통속에 있는 어린이들을 구제하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해서여진과 몽골의 연합군마저 물리친 누르하치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하다, 호이파, 울라 등 해서의 여러 부족들을 강온(强穩), 양면으로 통제하여 가장 강한 예허부(葉赫部)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당시 해서여진이 누르하치에게 맞서려면 4부 사이의 단결이 절실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알력 때문에 누르하치에 대해 연합전선을 펼 수 없었다. 하다, 호이파, 울라는 차례대로 누르하치에게 각개격파되었고, 혼자 남은 예허는 결국 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예허의 그 같은 전략을 꿰뚫었다. 그는 해서여진을 공략하는 동안, 자신을 견제했던 명에 몸을 낮추었다. 명의 견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여 명분을 축적하고, 내실을 다졌다.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기 위해 숨고르기를 했던 것이다. ●하다와 호이파를 멸망시키다 1599년 하다의 국주(國主) 멩게불루는 예허와의 갈등으로 전쟁을 하게 되자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멩게불루가 셋째아들을 볼모로 보내자 누르하치는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하다를 원조하려 했다. 다급해진 예허는 개원(開原)에 주둔한 명군 지휘부를 움직여 멩게불루를 질책했다. 누르하치와 동맹을 맺은 것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멩게불루에게 자신을 딸을 아내로 주었다. 멩게불루는 예허의 요구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와의 동맹을 철회했다. 누르하치와 예허, 명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의 ‘눈치보기’였다. 격분한 누르하치는 하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멩게불루를 사로잡았다. 그러자 명이 개입했다.1601년 명의 만력제(萬曆帝)는 사신을 보내 누르하치를 질책하고, 하다의 유민들을 멩게불루의 아들 우루구다이(武爾古岱)에게 반환하라고 강요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요구에 따라 유민들을 송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허가 하다를 공격하여 우루구다이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누르하치는 명에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자신이 하다를 격파한 것은 문제삼고, 예허의 침략은 그냥 넘어가는 이중적 태도를 따졌다. 하지만 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하는 것은 삼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호이파를 정벌하는 과정도 하다의 경우와 유사했다.1607년 9월, 호이파의 신료들이 모반하여 예허로 귀순하자, 국주 바인다리는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7명의 볼모를 보내왔다. 그러자 예허는 바인다리에게 “누르하치에게 볼모 보낸 것을 취소하면 귀순한 자들을 송환하겠다.”고 제의했다. 바인다리는 예허에게 속아 누르하치에게 다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결국 정벌에 나서 바인다리 부자를 살해하고, 호이파를 병합했다. 예허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울라 격파와 조선에 미친 파장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해서 부족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울라였다.1596년, 울라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억류하고 있었던 부잔타이(布占泰)를 송환하여 국주로 즉위시킨 바 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은혜에 감사하여 혼인 관계를 맺고 동맹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수시로 향배를 바꾸어 배신과 복종을 반복했다. 부잔타이는 국주가 된 이후 모두 7차례나 누르하치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누르하치 또한 자신의 딸을 포함한 세 명의 여인들을 부잔타이에게 아내로 주어 다독였다. 부잔타이는 끝내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압박하여 곤경에 처하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조선에 손을 내민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610년, 누르하치의 압박 때문에 위기에 처하자 부잔타이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직첩(職帖)을 하사해주고 교역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울라의 세력은 두만강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은 부잔타이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그에게 직첩을 주고, 관복을 하사했다. 광해군의 의도는 그들을 회유하여 두만강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보면 당시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와 해서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변의 추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1610년 2월14일의 경우,‘이 오랑캐가 겉으로는 누르하치와 화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은 형상이 있다. 예허와의 중간 길이 끊기고, 교역의 통로가 막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에서 교역하기 위해 우리의 의도를 떠보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참으로 정확한 정세 판단이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보를 기초로 누르하치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했다. 나아가 곧 닥쳐올 ‘누르하치와 명의 대결’이라는 파장에 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팔기제(八旗制)를 완성하다 누르하치는, 향배가 무상했던 부잔타이를 공격하여 1613년 마침내 울라부를 멸망시켰다. 예허만 빼놓고 해서여진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윽고 1616년, 국호를 아이신(金)으로 고치고, 칸(汗·한)으로 즉위했다. 바야흐로 12세기 한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구다(阿骨打)의 위업을 계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지배하는 종족이 다양해지고,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 체제가 필요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팔기제(八旗制)였다. 팔기제는 니루(牛)라는 만주족 고유의 조직에서 기원했다. 만주인들은 수렵 등을 나갈 때 10명을 한 조로 삼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뽑아, 그를 니루라고 불렀다.‘니루’란 ‘큰 화살’을 뜻한다. 누르하치는 성년 남자 300명을 1니루로,5개의 니루를 1자란(甲喇)으로, 다시 5개의 자란을 1쿠사(固山)로 편제했다.1쿠사는 결국 7500명인 셈인데 그것을 한자로는 기(旗)라고 했다. ‘기’는 군사조직이자 정치, 사회조직으로 모든 만주인은 예외 없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각 기에는 고유한 깃발이 있는데 황색, 백색, 홍색, 남색만으로 제작된 것을 정기(正旗), 황색, 백색, 남색 깃발에 홍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과 홍색 깃발에 백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을 양기(旗)라고 한다. 1616년 누르하치는 본래 4기였던 것을 8기로 확충했다. 해서여진을 통합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귀순해 오는 한족과 몽골족이 늘어나면서 한군팔기, 몽골팔기가 등장했다.“나가면 병사가 되고 들어오면 인민이 되는(出則爲兵 入則爲民)” ‘군민일체’,‘군정일체’의 팔기제의 효용성은 엄청났다. 평소 일상 생활과 전쟁에 동시에 대비할 수 있게 편제된 팔기제 아래서 후금(後金)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력과 전투 능력은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당시 쇠망의 조짐이 뚜렷했던 명군이, 조직화된 팔기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 팔기는 1644년, 청이 베이징으로 입성한 뒤에도 중원(中原)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원 장악 이후, 팔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별도의 호적에 편입된 특수 신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지(旗地)라 불리는 토지를 하사 받고, 그들만을 위한 독자적인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중원 입성 이후 기인들은 오로지 만주어를 익히고 궁술(弓術)을 연마하여 관리나 군인으로 등용되었다. 다른 농공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권도 컸지만 의무도 명확했다. 기인들에게 만주어를 익히게 하고, 궁술을 연마시킨 것은 결국 만주족이 지닌 정체성과 야성(野性)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수십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이상의 한족을 270여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비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1616년, 팔기제를 완성하면서 누르하치는 명과 일전을 겨룰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황사방지 국제기금 조성 추진

    황사 특보 기준이 강화되고 ‘황사방지기금’조성도 추진된다. 황사를 줄이기 위해 개성공단과 금강산에 관측장비가 설치되고 몽골·중국 등 황사 발원지 생태복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국제협력도 강화된다. 정부는 13일 환경부와 소방방재청 등 14개 기관 합동으로 ‘황사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마련, 다음주 국무회의에서 확정키로 했다고 밝혔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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