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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모닝 베이징] 어느 중국인의 ‘끝장 접대’

    한 중국인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몽골족인 그는 처음엔 자신들의 뿌리인 초원 지역으로 안내해 ‘양을 한 마리 잡아’ 손님들을 모시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몽골족의 전통적인 손님 접대 방식일 것. 자신들의 방식으로 친구를 대접하려는 뜻을 저버리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결례란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공간적 제약으로 양해를 구했다. 결국 베이징 시내 톈안먼(天安門) 근처의 한 몽골 전통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중국이 서구 열강의 윽박지르기에 무기력하게 나라의 문을 열었던 시절 각국 대사관이 들어섰다던 이 거리에는 현재 전통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고, 거리의 끝에 몽골 식당도 있었다. 푸짐함을 미덕으로 삼는 이들답게 상 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한 양고기와 민물고기, 소젖으로 만든 전통차가 놓여있었다. 물론 술도 빠지지 않았다. 손님의 내공(?)을 배려한 것인지 38도 짜리인 나름 약한 술이 나왔다. 소주잔 절반 정도 높이의 낮은 잔이었지만, 꺾어 마시지 않는 것이 예의인지라 술병이 비어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그는 “너와 나는 민족도 나라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결국엔 친구가 아니겠느냐.”며 연신 술잔을 권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의 진심을 알 것 같았다. 한 번 손님을 대접하면 끝장을 보는 이들답게 자리는 장소를 옮겨 이어졌다. 보름을 훌쩍 남긴 장기 출장에 체력이 바닥난 터라 아무리 애를 써도 눈꺼풀이 닫힐 지경. 물론 그는 개의치 않았다.‘이쯤되면 집(숙소)에 가겠구나.’란 생각에 안도하던 순간, 마지막이라면서 야식집으로 안내했다. 꼭 무언가를 먹기 위해서라기보단 정해진 코스의 마무리란 느낌이 들었다. 간단한 오징어 조림과 국수 등을 주문한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중국술을 한 병 시켜 물컵에 술을 돌렸다. 이미 자포자기한 터라 류샹과 야오밍을 안주로 한참을 떠든 뒤 훗날을 기약하며 자리를 끝냈다. 사실 중국인에 대한 인상은 ‘아니거든요.’였다.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짜요(힘내라!)”를 외쳐대는 모습에 화가 났고, 거리에선 곡예에 가까운 비보호 좌회전과 유턴에 짜증이 났다. 특히 떼(?)를 지으면 공격적이고 무례하다는 인상이 강했던 것. 중국을 네 번째 방문했지만, 현지인들과 개별적으로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편견이 더욱 굳어진 것 같다. 길고 길었던 그 밤은 중국인에 대한 또다른 인상을 남겼다. 베이징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전남 32개 해수욕장 늦더위로 개장 연장

    전남도내 62개 해수욕장 가운데 32개가 막바지 늦더위로 개장 기간을 늘렸다. 전남도는 20일 “24일(일요일)까지로 예정된 해수욕장 개장 기간을 뒤늦은 피서객들을 위해 가장 늦은 곳은 다음달 5일까지 연장했다.”고 밝혔다.이달 말까지 목포 외달도, 고흥 나로도, 장흥 수문, 해남 송호, 완도 금일, 진도 가계 등 26개 해수욕장이 문을 연다. 또 9월5일까지는 신안 원평·시목·돈목·하트해변 해수욕장이,7일까지는 완도 명사십리, 신안 우전 해수욕장이 손님을 맞는다. 도 관계자는 “개장 기간을 늘린 해수욕장의 평균 수온이 섭씨 25도이고 해수욕은 20도 이상이면 가능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도내 해수욕장의 8월 말 평균 수온이 26∼29도로 7월 말보다 2도가량 높았다. 도는 개장 기간을 늘린 해수욕장에서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신안에서는 천일염 자루 메고 달리기, 장흥 수문에서는 개메기 체험, 영광 가마미에서는 바다 시화전 등이 있다. 도내 해수욕장은 6월2일 개장 이후 510만명이 찾았고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만명 늘었다. 피서객 증가는 해수욕장에 친 사랑의 텐트(몽골텐트), 해변 그늘막, 숙박·위생업소의 청결과 친절이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또 40개 기업체(7만여명)를 대상으로 한 하계휴양소 유치, 해변 골프대회 개최, 영화 상영 등 색다른 시책도 주효했다.무안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Beijing 2008] 노메달 81국·노골드 117국

    남태평양의 섬 나라 나우루공화국. 면적이 21㎢, 인구 1만여명으로 울릉도(72㎢)보다 작은 ‘미니 국가’다.1996년부터 올림픽에 나왔다. 현 대통령인 마르커스 스테판이 역도 선수로 세 번이나 올림픽에 나선 점이 흥미롭다. 이번 베이징올림픽에는 남자역도 +105㎏급에 딱 1명만 내보냈다. 이테 데테나모는 19일 밤 자신의 최고기록을 들었지만 10위로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나우루는 이제 다시 4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1920년부터 88년이 넘도록 메달을 못 딴 모나코보다는 나은 편이다.●섬나라 모리셔스 첫 메달 경사 나우루가 아쉬움을 삼켰던 비슷한 시간,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는 경사를 맞았다.1984년 올림픽 신고식을 치른 이 나라가 복싱에서 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확보한 것. 밴텀급(54㎏)에 나선 브루노 줄리가 4강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복싱은 3·4위전이 없어 체급당 동메달이 2개다. 올림픽은 출전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한다. 각 나라에서 날고 기는 최고들이 모여 승부를 겨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향 보따리에 메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허전한 것 또한 분명한 사실. 1896년 1회 아테네 대회에선 모두 14개국이 나와 11개국이 사이좋게 메달을 챙겨가는 등 올림픽 초창기에는 메달을 따는 나라가 많았으나 출전국가가 100개국에 육박하던 1960년대 중반부터 ‘빈손’이 많아졌다. 모든 나라가 1996년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자마자 레슬링에서 금 1개, 은 1개를 따내며 대박을 터뜨린 아르메니아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4개국이 출전한 이번 베이징 대회에서도 20일 오후 11시를 기준으로 메달을 단 한 개라도 건진 나라는 79개국에 불과하다. 그 중 ‘금맛’을 본 나라는 48개국이다.●파나마는 80년 만에 ‘金’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국가는 모두 205개국. 베이징에서 첫선을 보인 마셜군도, 몬테네그로, 투발루까지 포함해 통산 ‘노메달’ 국가는 모두 86개국,‘노골드’ 국가는 120개국이었다. 그래도 스포츠 강국의 틈을 비집고 베이징에서 기어코 메달 갈증을 푼 나라도 여럿이다. 파나마는 올림픽 출전 80년 만에 금메달을 따냈다. 그동안 육상에서 동메달 2개에 그쳤으나 지난 18일 육상 남자 멀리뛰기에서 살라디노 아란다(25)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감격을 누린 것.2004년까지 은메달 5개, 동메달 10개를 따냈던 몽골도 남자 유도 100㎏급에서 투브신바야르 나이단(23)이 금빛 메치기에 성공, 출전 44년 만에 첫 금메달을 신고했다. 바레인은 더 신났다.1984년 처음 등장했던 바레인은 첫 메달 신고를 금메달로 해버렸다.19일 육상 남자 1500m에서 라시드 람지(28)가 가장 먼저 결승선 테이프를 끊은 것. 람지는 모로코 출신 귀화선수라 제2의 조국에 두 배의 기쁨을 안겨준 셈이 됐다.●아프간 72년만에 첫 동메달 1912년 대회에 딱 한 번 출전한 뒤 76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다시 등장한 세르비아도 수영 남자 접영 100m에서 은메달 1개, 남자 테니스 단식에서 동메달 1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토고와 타지키스탄도 각각 출전 36년,12년 만에 카약과 유도에서 동메달을 획득, 메달 국가 대열에 합류하는 감격을 누렸다. 아프가니스탄도 20일 출전 72년 만에 태권도 남자 58㎏급 동메달로 첫 메달을 기록했다. 이로써 베이징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20일 오후 11시 현재 통산 ‘노메달’ 국가는 모두 81개국,‘노골드’ 국가는 117개국이 됐다.홍지민 오이석기자 icarus@seoul.co.kr
  • “자국 중심 역사관 벗는 계기 될 것”

    “자국 중심 역사관 벗는 계기 될 것”

    동북아 대학생들이 구체적인 역사체험을 통해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장(場)이 펼쳐진다. 건국 60주년 기념 ‘아시아 평화를 위한 동북아 대학생 역사체험 발표대회’가 오는 27∼31일 경기 성남시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에서 열린다.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열리는 이 대회에는 국내 대학생 93명을 비롯해 중국·일본·타이완·베트남·몽골·필리핀·태국·동티모르·우즈베키스탄 등 10개국 대학생 244명과 지도교수 등 모두 300여명이 참가, 역사체험 활동 결과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대회를 앞두고 주최 기관장인 김용덕(64)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20일 만나 역사체험 발표대회의 의미와 최근 다시 불거진 독도문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김 이사장은 “이번 대회는 동북아 각국 대학생들이 자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동북아 평화를 위한 미래 지향적 역사의식과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회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지난 7월14일 10개국 대학생 51개팀 244명을 선발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달간 동북아 역사갈등의 단초 등 50개 주제별 역사와 평화 현장체험 활동을 진행, 활동 내용을 평화지도·사용자손수제작물(UCC)·독립영화·다큐멘터리 등으로 제작하는 현장연구를 실시했습니다. 대학생들은 대회 기간동안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역사체험 워크숍도 진행합니다. ●독도 문제 장기적 연구 필요 ▶미국 연방정부 기관인 지명위원회(BGN·Board on Geographic Names)에 의해 독도의 영유권이 빼앗길 뻔한 일이 벌어졌는데요. -지난달 26일 ‘BGN 사태’가 터지자마자 즉각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미국측이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하려던 것을 ‘한국령’으로 되돌려 놓아 1단계는 해결된 셈입니다. 물론 ‘리앙쿠르 바위섬’으로 표기된 것을 ‘독도’로 표기하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현 상황에서 곧바로 ‘독도’로 표기를 바꾸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만큼, 당분간 제3자적 관점을 유지하자는 것이지요.‘리앙쿠르 바위섬’을 독도로 표기되도록 대비책을 강구할 방침입니다. ▶최근 독도와 동해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독도 연구소’가 출범했는데, 어떤 일을 하는 곳입니까. -사실 지금까지 우리의 독도 연구는 그렇게 부족한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보다 훨씬 많이 축적돼 있습니다. 다만 독도 연구가 이곳저곳 분산돼 있어 체계화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이지요.‘독도 연구소’의 가장 큰 목표는 분산돼 있는 독도 연구를 체계화, 종합적인 독도 연구센터로서 독도 정책을 세우는 데 기본 자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독도 문제는 국제법적으로 해석의 논란이 있는 만큼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독도 역사 연구는 물론, 국제적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정치적·지리적 연구도 함께 해 나갈 계획입니다. 연구소는 현재 소장을 포함해 연구직 8명 등 모두 15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독도문제와 관련, 일본에 대한 대응 논리의 근간은 무엇입니까. -역사적·국제법적으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를 입증할 근거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1877년 일본 태정관(太政官·메이지시대 일본 국가최고기관) 지령입니다. 이 지령에는 ‘울릉도 외에 한 섬(독도 지칭)이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고 돼 있습니다.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일본에서는 당시 ‘태정관’에서 지도를 잘못 봤다고 강변하지만, 궁색한 변명이죠. 자국 영토문제를 놓고 잘못 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백두산 훼손 방지위해 中과 협의할 것 ▶재단은 독도문제를 비롯해 7대 현안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먼저 동북공정 대응 논리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아시다시피 한국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백두산 문제도 빼놓을 수 없지요. 중국이 단독으로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 이름)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요. 고구려 고분이 북한과 중국의 공동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만큼 백두산도 공동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중국이 창바이산개발계획 등으로 백두산을 훼손하고 있는데, 이런 개발계획을 세울 때 적어도 우리와 협의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밖에 동해 표기 문제를 비롯해 일본 교과서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참배 문제 등이 주요 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해 표기의 경우 국제적으로 ‘동해’ 단독 표기되거나 ‘일본해’와 병기(2007년 기준 23.8%)되기보다 ‘일본해’로만 표기된 지도가 많습니다. 이를 ‘동해’로 바로잡는 근거자료를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청군 진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초조해졌다.‘황제’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면 화친이 쉬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바로 답장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국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황제’로 불렀으되 심복(心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청군 편이었다. ●그 많던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6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용진(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다는 것,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金化)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1월7일에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이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산성 쪽으로 진군해 온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1월8일, 답답해진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을 불렀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비변사에서 마련한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김류가 나섰다.“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바깥의 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김류는 그러면서 적진에 사람을 다시 보내 회답을 독촉하자고 건의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신료들의 이야기에 인조도 할 말이 없었다.“병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은 하루하루 떨어져 가고 있었다.‘병자록(丙子錄)’‘양구기사(陽九記事)’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이때 전하께서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주무셨다. 밥상에도 반찬으로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다. 그것은 필시 나에게 닭을 바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이 닭다리 하나뿐인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또 무엇으로 장졸들을 어루만질 것인가? ●참혹한 소식들 산성 안에서는 추위와 물자의 고갈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성 바깥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바깥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증언 내용은 참혹했다. 적진에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무수히 많고, 적진 바깥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병자년 연말 이후 몽골병을 비롯한 청군의 겁략(劫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나타난 참상이었다. 당시 청군은 서울 주변에서 포로를 획득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성인 남자들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녀자와 아이들 상당수가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청군은 특히 젊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서술하겠지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심양으로 귀환했던 청군 지휘부 내부에서 나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선 여성 포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청군의 대소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 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부녀자를 데려가려는 그들에게, 여자에게 딸린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어미는 진중으로 끌고 들어가고 아이는 죽이거나 바깥에다 유기하는 참혹한 상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1월8일, 예조는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이미 한 번 지냈지만 정성이 부족했다며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온조왕에게 가호(加護)를 빌자고 청했다. 예조는 또한 원종(元宗·인조의 生父 定遠君)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숭은전(崇恩殿)에도 신료를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인조는 숭은전에서 올리는 제사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포위된 성에서의 곤경이 길어지자 이러저런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1월9일 밤, 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권위는 며칠 전 북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권촉은 형의 수급을 자신이 모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언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효시경중(梟示警衆·목을 베어 매달아 군사들을 경계함)’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안의 장졸들에게는 여전히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던 분위기에서 빚어진 참혹한 ‘해프닝’이었다. ●다시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1월 초 남한산성의 동문(東門) 부근으로 진출하여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1월11일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농성 중인 조선 조정의 의도와 예상되는 향후 동향을 분석하는 한편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11일부터 산성 주변에 대한 압박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獻陵)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가운데 1만여명을 차출하여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각각 다시 배치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더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시에 산성의 북문과 서문 앞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상황은 더 엄혹해졌다 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써서 들고 간 국서의 내용 또한 공순했다.‘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강국에 복종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겠습니까?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대국을 받들고 자손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조선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듯이 청도 그렇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청은 이미 ‘명=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고쳐 쓴 국서 속에 담긴 ‘재조지은’을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과 청은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Beijing 2008]장성호 마지막 올림픽 ‘눈물’

    베이징올림픽 한국선수단 기수로 나서며 마지막 무대를 금빛으로 장식하려던 장성호(30·수원시청)가 공동 7위의 아쉬운 성적으로 올림픽을 끝냈다. 장성호는 14일 베이징 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열린 유도 남자 100㎏급 8강전에서 몽골의 투브신바야르 나이단에게 효과 하나 차이로 져 준결승 진출이 좌절됐고 패자 준결승에서도 그루지야의 레반 조르졸리아니에 져 결국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4년 전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에 머물러 한때 은퇴하려고 마음먹는 등 방황했다가 다시 마음을 추슬러 태릉선수촌 등에서 흘린 땀방울이 너무도 아쉽게 됐다. 한국 유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3개 대회 연속 출전한 장성호는 1회전을 한판승,2회전을 지도승으로 이기며 메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하지만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5위에 오른 나이단을 맞아 경기 종료 1분여를 남기고 통한의 효과를 하나 빼앗겨 4년의 와신상담이 물 건너 갔다. 장성호는 경기 후 “8강전, 패자 준결승 모두 이긴 경기라고 생각하는데 판정이 따라주지 않았다.”면서 “폐막일인 24일이 아내 생일이라 선물로 메달을 주고 싶었는데 아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베이징 올림픽특별취재단 jeunesse@seoul.co.kr
  • [Beijing 2008] 몽골 44년만에 첫金

    장성호(30·수원시청)를 8강전에서 제압한 몽골의 유도 선수 투브신바야르 나이단(23)이 올림픽 출전 44년 만에 처음으로 조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1964년 도쿄 대회부터 올림픽에 출전한 몽골은 2004년 아테네 대회까지 은메달 5개, 동메달 10개를 따낸 것이 전부였다.1980년 모스크바 대회부터는 그나마 있었던 ‘은맥’도 자취를 감췄다. 우직한 인상에 힘좋게 생긴 나이단이 14일 베이징 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열린 유도 남자 100㎏급 결승에서 아슈하바트 지트케예프(카자흐스탄)를 제압하고 조국에 첫 금메달을 안겼다. 나이단은 장성호를 어렵게 이기고 준결승에 올랐지만 그의 범상치 않은 면모는 1회전부터 드러났다.2004년 아테네 대회 100㎏이상급 금메달 리스트이자 2003년과 2005년 세계선수권 100㎏급을 거푸 제패했던 일본 유도의 강자 스즈키 게이지(28)를 다리잡아메치기 한판으로 꺾었기 때문. 일본 유도계는 스즈키의 한판패로 충격에 휩싸였다. 나이단에게 충격의 패배를 당한 스즈키는 벤자민 벨라(독일)와 맞선 패자 1회전에서도 경기 시작 1분도 안돼 모로돌리기 한판으로 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나이단은 176㎝ 키에 몸무게 105㎏으로 약간 비대해 보이는 체격의 소유자. 게다가 지난해 세계선수권 무제한급 5위, 아시아선수권 2위에 이어 올해 아시아선수권에서 100㎏급 3위가 그가 거둔 성적의 전부였다. 이렇다 보니 장성호나 스즈키 등 강호들로부터 경쟁자로 인식되지 않은 점도 금메달을 따내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오이석기자 cool@seoul.co.kr
  • [기고] ‘식량농업 위기’ 적극 대비해야/엄태범 농협중앙회 안성교육원 교수

    [기고] ‘식량농업 위기’ 적극 대비해야/엄태범 농협중앙회 안성교육원 교수

    일찍이 공자는 신(信), 식(食), 병(兵) 셋 중에서 군사(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식(食)이라고 하여 군사력보다 식량안보를 중요시하였다.2008년 초 세계적인 곡물부족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해 일반 물가가 상승하는 애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2000년 이전의 식량문제는 빈곤국가나 빈곤층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분배의 문제였다면, 그 이후 식량문제는 절대 공급량의 감소에 있다. 미국 농무부(USDA)는 2000년 이후 세계곡물재고량은 점차 줄기 시작해 2008년 세계곡물재고율은 14.9%로 적정재고율 16∼17%를 밑돌게 된다고 전망했다. 식량부족의 원인으로 유가 상승, 온실가스 감축의무 등에 기인한 바이오 연료용 곡물수요 증가와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세계인구의 42%를 차지하고 있는 신흥국가에서의 곡물수요 증가를 들 수 있다. 또한 도시화, 사막화에 따라 생산면적이 매년 감소하고 있다. 식량위기를 느낀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식량 수출국들이 수출 관세, 수출할당량, 수출금지 등 각종 수출규제를 시작하자 국제거래 물량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곡물메이저는 유례없는 기회로 인식하여 식량을 투기의 대상으로 무차별 공략하고 있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1980년대 중반까지 약 50% 수준이었던 것이 시장개방이 확대되면서 지속적으로 떨어져 전년도 기준 26.2%로 OECD 국가 중 포르투갈, 일본, 네덜란드와 함께 최하위그룹에 속한다. 쌀을 제외한 옥수수, 콩, 밀 등을 포함한 나머지 자급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금년 국제곡물가 폭등에도 다행히 소요사태나 사재기 같은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 밀, 옥수수, 콩을 원료로 하는 가공식품의 가격이 올라 물가가 상승하였지만 주식인 쌀의 국내 자급기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쌀 또한 개방을 해놓은 상태이고 2014년까지 8%의 의무수입을 해야 하는 상태이다. 우리와 가까운 중국은 식량증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2004년 곡물 최저수매가제 실시와 2006년 농업세폐지를 실시했다. 또한 일본도 식량 안보를 현실적 위기로 판단하고 자급률을 단계적으로 높여 45%로 끌어 올린다는 목표를 추진하면서 유사시 휴경지 100만㏊를 경작하여 위기를 극복한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자국의 안정적인 농산물 생산기반 확보를 위하여 농업보조금을 확대, 식량 자급률 상승을 유도하고 있다. 곡물 수출국의 공급 여하에 따라 우리 식탁은 양적 안전성뿐만 아니라 질적 안전성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부족한 국내곡물 생산기반 확대를 위하여 해외 농업자원을 개발하여 사료 곡물 공급기지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여야 한다. 일본의 경우 브라질, 러시아 등지의 해외 농장에 지분참여 형태로 진출하여 일본 국내 면적의 3배에 육박하는 해외 식량기지를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연해주, 몽골 등지에서 사료 곡물을 생산한 후 대륙횡단 철도를 이용해 국내로 들여오는 등 다각적으로 해외 식량기지를 조속히 확보해야 한다. 식량농업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다. 돈으로 언제든지 식량을 살수 있다면 선진국들이 막대한 보조금을 주어 가면서 식량작물을 보호하겠는가. 우리 식량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소수의 외국 농산물 취급 기업에 위탁하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평소에 공기나 물의 고마움을 별로 생각하지 않듯이 농업은 우리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목숨을 유지하는 생명산업이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식량작물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식량안보이고 생명 그 자체이다. 엄태범 농협중앙회 안성교육원 교수
  • ‘다문화가족’ 14일 첫 전파

    다문화가족을 위한 국내 첫 외국어 라디오 방송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이 14일 밤 12시 첫 전파를 탄다. 웅진재단(이사장 신현웅)이 ㈜디지털스카이넷(사장 김충현)과 제휴해 기획추진하는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은 우선 중국·베트남·필리핀·태국어 등 4개국 언어로 하루 24시간 문화, 예술, 복지 관련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내보낼 계획이다. 내년에는 러시아·우즈베크, 아랍어, 몽골어, 일본어를 추가해 8개 언어로 확대할 예정이다.방송은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의 오디오 음악방송 855번 채널과 케이블TV 디지털 오디오 811번 채널을 통해 청취할 수 있다.
  • [Beijing 2008] “올림픽 4修 없다”… 금메달 사수 작전

    [Beijing 2008] “올림픽 4修 없다”… 금메달 사수 작전

    한국 유도 중량급 ‘간판스타’ 장성호가 마지막 고별무대가 될지도 모르는 베이징올림픽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금빛 레이스에 도전한다. 14일 오후 1시 베이징 과기대체육관에서 열리는 남자 유도 100㎏급에 출전하는 장성호(30·수원시청)는 올해까지 한국 유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3번째 연속 출전에 성공했지만, 지난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만 1개 땄을 뿐 아직 금메달이 없다. 장성호는 4월말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다친 늑골 부상으로 통증이 심한데도 5월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서 남자 100㎏급 대표로 선발됐다.2004년 당시 결승전에서 벨로루시의 이하르 마카라우와 접전을 벌인 끝에 다리잡아메치기 절반으로 패했던 장성호는 금메달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이번 올림픽 이후로 은퇴를 미뤘다. 하지만 장성호는 밑에서 계속 치고 올라오는 실력있는 후배들 때문에 4년 후를 기약하기는 힘들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는 이번 올림픽을 사실상 마지막 도전으로 생각하고 남은 훈련에 임하고 있다. 장성호는 태릉선수촌에서도 발목과 손가락 등에 항상 테이핑을 한 채 훈련하는 등 금메달을 향한 투지를 불태웠다. 지난 6월 일본 전지훈련에서도 장성호는 크고 작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냈다. 그는 “잔부상 때문에 훈련 때 많이 힘들었다.”면서도 “상대 공격을 받아치는 등 경험을 잘 살려 노련한 경기운용으로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서 투혼을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장성호는 100㎏급 최강자인 일본의 스즈키 게이지(28)와 힘이 좋은 유럽 선수들을 경계하고 있다. 특히 100㎏급에는 최근 몽골과 네덜란드, 그루지야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는 등 강자들이 즐비하지만 금메달을 향한 열정과 노련미로 승부하겠다는 각오다. 장성호는 “컨디션이 좋은 만큼 최선을 다해 꼭 금메달을 따서 기대하는 팬들과 국민들의 성원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욕심을 내비쳤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1637년 1월3일, 도성으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12월 그믐과 정월 초하루, 몽골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홍타이지는 휘하 장졸들에게 군기를 확립하고 함부로 약탈을 자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시’일 뿐이었다. 더욱이 몽골병들은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고 청에 귀순했고, 또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군기를 강조하여 그들의 ‘욕구’를 언제까지고 묶어두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지켜 줄 군사도, 이끌어 줄 조정도 없는 상황에서 도성 백성들은 몽골병들의 분탕질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안쓰러웠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도성 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칭신(稱臣) 여부를 둘러싼 고민 1월3일,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조정은 당장 홍타이지의 ‘조유(詔諭)’에 회답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조유를 건네받는 자리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부하지 못한 이상, 조선은 이제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조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회답서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나라가 살아남은 뒤에야 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장차 무슨 명분을 논하겠습니까?’ 김류는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다. 청에 대해 ‘칭신(稱臣)’하는 문제를 자신이 담당하여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김류가 울자 인조도 울기 시작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망극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뒤 벌써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인 인조였다.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용상에 오를 적에만 해도, 아니 정묘호란 직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오랑캐에게 신하를 칭하며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눈물이 잦아질 만도 했다. 이홍주(李弘胄)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상 ‘대청황제(大淸皇帝)’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고 했다. 홍서봉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군부(君父)를 보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 저들의 지적대로 요금원(遼金元) 시절의 고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신속(臣屬)하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는 주장이었다. 김신국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선을 그었다. 그들에게 칭신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하더라도 인조가 직접 홍타이지를 대면하게 되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월30일, 인조가 성을 나가서 항복할 때까지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장유(張維)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일단 ‘조유’에서 홍타이지가 질책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과하되,‘칭신’ 여부는 그들의 반응을 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식(李植) 또한 ‘대청황제’라는 칭호는 그냥 사용하되 ‘칭신’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료들은 답서의 서식(書式)과 시작하는 단어, 내용에 들어가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외로운 성에 갇혀 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오랑캐’로 멸시해 온 여진족 추장에게 ‘칭신’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논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황제’임을 인정하다 고민과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답서의 맨 앞에 ‘조선국왕은 삼가 대청국관온인성황제(大淸國寬溫仁聖皇帝)께 올립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에 보내는 서신을 ‘조유’ 운운하면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홍타이지와 청의 위상을 처음으로 인정한 표현이었다. 답서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으로 채웠다.‘소방(小邦)이 대국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불렀습니다. 특사(特使)를 보내 정성을 드리려 했으나 병과(兵戈)에 막혀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궁벽한 구석까지 오셨다는 소식에 의심과 믿음,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지난해 봄의 일은 소방이 그 죄를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 소방 신민들의 식견이 얕고 좁아 대국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눈앞에 닥친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되, 자존심을 최대한 살리려는 몸짓이었다.‘조유’ 속에 넘쳐나는 홍타이지의 ‘질책’ 내용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하면서 사죄했다. 주목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소방’으로, 인조는 ‘조선국왕’이라 했다. 맨 마지막에는 의연히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조선 국왕 신(臣) 모(某)’란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칭신’은 일단 거부했다. 또 청의 연호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에 대한 충성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았다. 답서의 뒷부분은 홍타이지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生靈)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방에게 새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 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청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홍서봉(洪瑞鳳),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이 답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황제는 만나지 못했다. 답서를 접수한 마부대는 상의한 뒤에 회답을 주겠다고 했다. ●비변사의 독주에 대한 반발 상황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비변사의 몇몇 신료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화친을 추진하는 것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비변사 신료들은 과거 척화·주화 논쟁 때처럼 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적진에 보내는 문서의 초안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주고받았다.‘인조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보지 못하도록 소매에 넣어 출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상소했다.‘우리는 참월(僭越)하게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오랑캐에 맞서 명나라를 대신하여 화란을 당하는 것’이니 ‘의열(義烈)에 당당하고 해와 달에 비춰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의 국서를 태워버림으로써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화친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답서를 보낸 다음부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다시 최명길(崔鳴吉) 등 비변사 당상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에 대해, 적의 세력을 과장하고 화친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류에 대해, 하는 일 없이 겁만 많아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유백증(兪伯曾)은,‘칭신’한다고 해서 포위가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나라를 그르친 김류와 윤방(尹昉) 등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조유’에 대한 답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었다. 인조는 최명길 등을 감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보였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신료들 사이의 논란을 다시 방치할 경우, 화친의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7년 1월 초, 청과 조선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조유’와 조선의 답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의 ‘꿈’은 청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록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를 ‘조선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목상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조선국왕’으로 남아 명과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조선국왕’이란 표현 대신 ‘신(臣) 이종(李倧·인조의 이름)’을,‘숭정’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원하고 있었다. 누구의 꿈이 실현될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칭기즈칸 되겠다”

    또다시 ‘칭기즈칸 경영론’?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지난달 31일 미국 경제전문 통신사 블룸버그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 화제에 올랐다. 박 회장은 이 인터뷰에서 “미래에셋은 ‘칭기즈칸’의 전략을 본떠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한국인만으로 세계시장으로 확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동맹군을 찾아야 한다.”면서 “100만명이 채 안 되는 몽골족이 150년간 2억명의 세계인구를 지배한 ‘연합전략’이 벤치마킹 대상이다.”라고 밝혔다. 박 회장은 또 미래에셋의 미래를 “이머징 마켓에 특화한 아시아 최대 펀드 회사”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자 패기넘친다는 호평과 이미 그 위험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몰빵 투자’를 합리화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엇갈렸다. 올 들어 전세계 금융경색으로 중국·인도 등 신흥시장 증시가 폭락하면서 미래에셋의 해외펀드 수익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달아오르고 금방 식어버리는 신흥시장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투자 패턴을 유지하다가는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경고도 끊이지 않는다.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지금은 투자지역 다양화와 위험관리수단 확충이 주요 과제”라고 꼬집었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83)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83)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Ⅰ)

    남한산성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낸 것이 어느덧 17일, 병자년(丙子年)이 저물고 정축년(丁丑年)이 밝아 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탄천(炭川)에 진을 쳤다. 청군 병력이 30만이나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성에 대한 청군의 정찰은 훨씬 강화되었다. 홍타이지까지 산성 근처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으니 청군은 이제 모든 역량을 다해 조선 조정을 압박할 요량이었다. 조선군 근왕병들이 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시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명길·김상헌 사신 파견 싸고 대립 1월1일 원단. 인조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마쳤다. 이어 2품 이상의 신료들이 인조에게 새해 인사를 올렸다. 새해를 맞아 광주목사(廣州牧使) 허휘(許徽)가 쌀로 떡을 빚어 인조께 진상했다. 신하들에게도 얼마간씩 떡이 돌려졌다. 성첩을 지키는 장졸들에게도 ‘새해 선물’로 특식이 주어졌다. 삶은 콩과 말고기였다. 나만갑(羅萬甲)은 떡을 대하니 아침부터 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조정은 비변사(備邊司) 낭청(郎廳) 위산보(魏山寶)를 청군 진영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술과 고기를 들려 보냈다. 신년 인사를 겸하여 적정을 살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청군 장수들이 조선 사신 일행을 대하는 태도가 영 달랐다. 사신 일행이 도착했을 때, 어떤 자가 위산보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들어가려 했다. 다른 자가 만류하여 겨우 멈췄지만, 태도는 여전히 뻣뻣했다.“황제께서 산성을 순찰 중이시니 우리가 함부로 받을 수 없다.”며 위산보 일행을 퇴짜놓았다. 이제 조선이 사신을 보내는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위산보가 돌아온 직후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먼저 청군의 군세(軍勢)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김류, 이홍주(李弘胄), 홍서봉(洪瑞鳳) 등 상당수 신료들은 청군이 군세를 과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청군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이 조선을 기만하기 위해 세력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료들은 홍타이지가 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갑갑한 현실 인식이었다.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청군이 이전부터 누차 ‘황제가 올 것’이라고 말해 왔던 것에 주목했다. 최명길은 ‘황제가 왔으니 조선 실정을 알리려 한다.’는 명목으로 청군 진영에 사신을 다시 보내 적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헌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김신국은, 근왕병들이 사신이 적진을 왕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해이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역시 반대했다. 하지만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동조했다. ●‘최악의 상황´ 예상 못한 화친론 김신국(金藎國)과 이경직(李景稷)이 다시 청군 진영에 가서 화친을 청했다. 청장 마부대(馬夫大)는 역시 황제가 순찰 중이라는 핑계로 즉답을 피했다. 이튿날에도 조선 조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지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황제가 진짜 왔는지, 황제가 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황제가 왔다는 것을 이유로 인조에게 출성(出城)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논의가 분분했다. 김신국, 이경직, 홍서봉 세 사람이 청군 진영으로 다시 가기로 결정되었다. 인조는 그들에게 실언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 수 있다며 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김상헌은 적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레 ‘와신상담’ 운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다시 반박했다. 하지만 인조 또한 “강국도 약국에 거만하게 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약국이 강국에 뻣뻣하게 굴 수 있냐.”며 최명길을 두둔했다. 논란 끝에 예상되는 청의 요구 가운데 두 가지만은 따를 수 없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하나는 인조에게 성에서 나오라는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왕세자를 입송(入送)시키라는 요구였다. 이식(李植)은 화친을 추구하되, 그 내용은 철저하게 기존의 형제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이제 청과 화친하겠다는 방침은 다시 확고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청이 과연 조선의 바람대로 따라줄 것인가. 결과적으로 보면, 인조와 왕세자의 출성 거부를 ‘마지노선’으로 삼은 것은 그저 조선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홍타이지가 몸소 탄천까지 내려와 산성에 대한 압박을 독려하는 상황에서 청이 ‘인조의 출성 불가’를 용인할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당시까지 비변사 신료들은 ‘최악의 상황’이 닥쳐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신료들은 여전히 근왕병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신국 등은 청군 진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마부대 등을 만나자 황제에게 전하는 문안 인사를 건넸다.‘황제께서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먼길을 오셨으니 10년 형제의 의리상 염려가 되어 이렇게 찾아왔다.’며 분위기를 살폈다.‘형제관계’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탐색하려는 의도였다. 잠시 후 용골대가 나와 누런 종이를 내밀며 황제의 조유(詔諭, 황제가 신료들에게 내리는 조서와 유시문)라고 일컬었다. 그러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네 번 절한 뒤에 가져가라고 강요했다. 분위기에 압도된 김신국 등은 결국 네 번 절하고 그것을 갖고 돌아왔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마음 속으로는 의연히 그들을 ‘오랑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오랑캐의 칸(汗)’이 황제가 되고, 그가 내민 쪽지가 ‘조유’가 되고 ‘칙서(勅書)’로 변한 기막힌 현실을 직접 목도했다. ●형제→신하관계로 바뀐 현실에 경악 김신국 등은 인조를 알현했을 때, 모두 죽지 못하고 돌아와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는 ‘대청관온인성황제(大淸寬溫仁聖皇帝)가 조선 국왕에게 초유(招諭)한다.’는 문구로 시작했다. 내용은 과거의 국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자신들은 조선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조선이 명에 붙어 자신들과 적대했다는 것’ 등을 비롯하여 조선에 대한 섭섭함을 열거했다.‘청은 강하다고 뻐긴 적이 없는데, 약소국인 조선이 왜 대드냐?’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러 왔던 몽골 버일러들을 만나주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과거 고려(高麗) 시절 요·금·원(遼金元) 세 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머리를 숙였던 조선이 지금은 왜 그리 뻣뻣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신을 보내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홍타이지의 ‘조유’를 접했을 때 신료들은 경악했다. 답서를 보내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인조가 회의를 소집했을 때, 신료들은 머뭇거렸다. 누구도 섣불리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상헌이 나섰다. 지금 사죄해 봤자 저들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군사들에게 적서(賊書)를 보여주어 적개심을 고취시키자고 촉구했다. 그러자 최명길이 막아섰다. 홍타이지가 온 이상 대적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뿐이라고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홍서봉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답서에서 홍타이지를 부르는 명칭을 ‘제형(帝兄)’이라고 쓰자고 했다. 일각에서는 최명길, 장유(張維), 이식 세 사람에게 답서를 쓰게 하되,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보내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엄혹한 현실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심했지만, 막상 오랑캐가 ‘황제’와 ‘조유’를 운운하는 또 다른 ‘현실’을 직접 마주했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다시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은 조선 조정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1) 애완견과 개장국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1) 애완견과 개장국

    개가 나오는 풍속화는 여럿이 있다. 그런데 개가 주인공이 된 경우는 드물다. 그림(1)과 (2)는 확실히 생활 현실 속에서의 개를 그렸다는 점에서 여느 개 그림과는 다르다. 그림(1)은 신광현의 ‘강아지와 놀기’다. 어린아이가 앞서 달리며 강아지를 부르고 강아지는 열심히 쫓아간다. 이처럼 어린이가 좋아하는, 어린이와 어울려 노는 강아지는 애완견이다. 하지만 김준근의 ‘개백정’(그림2)을 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사내, 곧 개백정이 개를 끌고 있고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앞발로 줄을 잡아당기고 있다. 불쌍한 생각이 왈칵 든다. 이 경우 개는 개장국의 재료일 뿐이다. 애완견과 식용견의 구분은 있지만, 그 선은 명확하지 않다. 인간의 태도에 따라 애완견이 식용견이 되기도 하고, 식용견이 애완견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1)의 애완견은 언제 그림(2)의 식용견이 될지 모른다. 애완견의 역사는 오래다. 동아시아의 정치교과서인 ‘서경’에는 개에 관한 글 한 편이 실려 있다.‘여오’라는 글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하자 사방에서 공물을 바친다.‘여족’이 보낸 것은 큰 개(‘오’는 개란 뜻이다)였다. 여족이 바친 개는 식용이 아니고, 애완의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여족의 개를 보고 소공이 무왕에게 이렇게 충고한다.“개와 말은 지금 이곳의 풍토에 맞지 않으면 기르지 마시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왕이 애완동물에 빠져서 국정을 게을리 하고 또 이런 것들을 구하느라 백성을 괴롭힐까 하여 하는 소리다. 어쨌거나 ‘여오’를 보면 애완견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시장에서도 개장국 많이 팔아 조선시대 문헌에 애완견의 존재를 찾기란 어렵다. 다만 연암 박지원의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쓴 글’에서 개를 ‘애완’하는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여름 날 밤 박지원은 박제도(박제가의 형)·이희경·이희명·원유진·이덕무·서유린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운종가 종각 아래를 걷는다. 직접 읽어 보자. “이때 3경 4점이 벌써 지나 달빛이 더욱 훤하게 비치고, 사람 그림자는 모두 열 발이나 늘어났다. 돌아보니 오싹하여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길거리에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댄다. 큰 개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왔는데 희고 수척했다. 여럿이 둘러 앉아 쓰다듬으니, 좋아서 꼬리를 흔들고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연암은 이어서 이 개가 몽골 원산이라는 것, 말처럼 크고 사나워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 중국에 들어간 것은 작은 종자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 작은 종자라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 개보다는 그래도 크다는 것, 중국에 간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온다는 것 등 이 개에 대한 정보를 늘어 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개의 이름이다. 보통 이 개를 호백(胡白)이라 하고, 그 중에서 작은 종자를 ‘발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발바리’란 애완견은 아마도 이 개를 지칭하는 것일 터이다. 다시 더 읽어보자. 무관(이덕무의 자)이 취하여 개에게 ‘호백(豪伯)’이란 자를 지어 주었는데,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다. 무관이 서운하여 동쪽을 향해 서서 흡사 오래된 친구를 부르듯 ‘호백이!’ 하고 세 번을 불렀고, 일행이 한바탕 껄껄 웃었다. 그러자 길거리에 개떼가 마구 달리며 더욱 큰 소리로 짖기 시작하였다. 어떤가. 개에게 자까지 지어 주었으니, 이덕무가 개를 가장 ‘애완’했던 모양이다. 호백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애완’은 그날로 끝나고 개장국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 개장국 이야기를 해 보자. 정조 때 문헌인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의하면 개장국을 먹는 것은 복날 풍속이다.“개고기를 총백(파의 밑동)과 섞어 푹 찐다. 닭고기나 죽순을 넣으면 맛이 더욱 좋다. 이것을 ‘개장(狗醬)’이라 부른다. 혹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려 흰 쌀밥을 말아서 먹기도 한다. 이것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 유득공은 “‘사기’에 진(秦)나라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 제사를 지냈다. 사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막았다.”고 한 것을 복날에 개를 잡아먹는 풍습의 시초로 보고 있다.‘예기-내칙’에도 개고기에는 차조가 잘 어울린다고 하고 있으니, 아마도 개는 가축이 되면서부터 식용이 되었을 것이다. 유득공의 기록에 의하면 개장은 원래 개고기를 찐 것이었고, 지금의 국을 말아 먹는 스타일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개고기를 푹 찐다.”는 부분의 원문은 ‘훈증(燻蒸)’이다. 찐다는 의미의 ‘증(蒸)’ 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다시 국을 만든다.”(又作羹)라고 하고 있으니, 원래 개장은 찌는 요리였던 것이다. 순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도 개장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경도잡지’의 것과 동일하다. 다만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는 부분만 추가되어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개장국은 조선후기 시장에서도 많이 파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개백정’ 그림 역시 영업용 개장국을 끓이기 위해 개장수가 개를 끌고 가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서울 시내에 개장국을 파는 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조실록’ 1년(1777)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던 일당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개장국 이야기가 나온다. 정흥문이란 자의 자술서에 “7월 28일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서 강용휘와 제가 개장국을 사 먹은 뒤 같이 대궐로 들어갔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곧 서울에 개장국을 상시적으로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이다. ●손꼽히는 개고기 마니아는 중종때 권신 김안로 개고기는 서울 시내에서 팔기까지 한 전통 식품이지만, 개고기는 먹는 사람, 안 먹거나 못 먹거나, 먹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뚜렷이 갈린다. 근대 이후에 와서 분화된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19세기 문헌인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실린 ‘정승이 개장국을 즐겨 먹은 일’이란 글에는 북경에 가서까지 개고기를 삶아 대령하라고 해서 먹은 심상규와 남의 집 잔치에 나온 개장국을 보고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아니라며 먹지 않았던 이종성의 일화가 나란히 소개되어 있다. 개고기 마니아와 개고기를 혐오식품으로 보는 시각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고기 마니아를 꼽자면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있다. 이팽수란 자는 김안로의 비위를 맞추느라 봉상시 참봉이 되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요리해 김안로에게 올렸고,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팽수는 그 공으로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승정원 벼슬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청직이다.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되었으므로 ‘가장주서(家獐注書)’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가장이란 ‘집노루’란 뜻인데, 개고기를 가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초복날 성균관 유생들에게 인기 있던 별미 개고기는 또 성균관 유생들에게 공급하는 별미이기도 하였다.19세기 초반의 윤기란 문인은 성균관에서 오랫동안 학생으로 있었는데, 그가 성균관의 풍속을 노래한 한시에 개고기에 관한 부분이 있다. 학생들에게 주는 특식을 ‘별미’라 하는데, 매달 1일 6일이 드는 날 아침에 대별미를 제공한다. 고직이는 그 날이 되기 전에 미리 유생들에게 물어보고 요구하는 것을 구해 올린다.3일 8일이 되는 날은 소별미날이다. 이 날은 생선을 올린다. 국을 끓이거나 구워서 올리는데 양이 적어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 외 명절 등의 별식이 있는 날이 있는데, 복날도 거기에 들어간다. 초복에는 개고기를 주었고, 중복에는 참외 2개, 말복에는 수박 1통을 주었다고 한다. 윤기는 초복의 개고기가 사소한 것 같지만, 중복의 참외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 국립대학에서 초복에 주는 보신탕이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개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리에 끼면 마지못해 수저를 들지만,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지는 않는다. 집에 강아지를 키우고 난 뒤로 그렇다. 이제 아주 안 먹으려 한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英 기번 원전 국내 첫 완역

    영국의 세계적인 역사가이자 문장가인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의 고전 ‘로마제국 쇠망사’(송은주 등 옮김, 민음사 펴냄)가 국내 최초로 완역돼 나왔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쓴 기번의 이 역작은 로마사를 다룬 수많은 저술 가운데서도 단연 압권으로 꼽힌다. 첫선을 보인 지 2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로마사에 관한 한 요지부동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근간으로 삼은 책이기도 하다. 인도의 네루는 “흐르는 듯한 선율의 문장을 어떤 소설보다도 더 몰두해서 읽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역사서이되 역사서술을 뛰어넘는 문학작품으로서의 독창적 세계관이 일찍이 ‘소설보다 재미있는 역사서’란 평가를 낳았던 것. 책은 서기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서 출발해 서로마제국의 멸망, 동로마제국의 창건, 신성로마제국 건국을 거쳐 동로마의 멸망까지 1400여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기독교의 확립, 게르만 민족의 이동, 이슬람의 침략, 몽골족의 서정(西征), 십자군 원정 등 서양문명의 원형으로 로마사에 등장하는 대사건들을 완벽하게 복원한다. 숱한 영웅호걸들이 시간의 질곡에서 명멸하는 과정도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동안 기번의 원전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몇 차례 있었다.1994년 11권으로 마무리된 대광서림판, 데로 손더스의 요약판을 번역한 까치글방판(1991년) 등. 하지만 방대한 주석 가운데서 상당 부분을 뺐거나 일본어 중역이었던 만큼 원전의 묘미를 그대로 살려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책은 원전의 4700여개 주석 가운데 본문을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는 350개만 생략했다. 따라서 원전을 완벽하게 번역한 완역본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출판사는 원전과 똑같이 책을 6권으로 내놓는다.1차분으로 2권이 먼저 나왔다. 앞으로 두세 달 간격으로 3·4권,5·6권을 출판할 계획이다.1권 3만원,2권 2만 5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인천 “베이징특수 짭짤하네”

    인천이 예상과는 달리 중국 베이징올림픽 특수를 짭짤하게 누리고 있다. 30일 인천시체육회 등에 따르면 이날까지 제29회 베이징올림픽 출전을 앞둔 8개 국가 8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단 120여명이 인천을 전지훈련 장소로 선택했다. 이미 온두라스, 튀니지, 몽골, 베트남 등 4개국 국가대표 선수단 56명이 인천에서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갔다. 또 전날 입국한 불가리아 남자배구 선수단 22명과 폴란드 핸드볼 선수단 25명이 인천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다. 지난달 출국한 튀니지 태권도 선수단은 최근 다시 입국, 인천에서 두번째 전지훈련 중이다. 다음달에는 독일 남자 배드민턴 선수단과 체코 사이클 선수단 등이 입국한다. 이처럼 인천이 외국 선수단의 전지훈련 장소로 인기를 끄는 것은 중국 베이징과 가깝고 인천국제공항이 자리잡아 교통이 편리한 데다, 지원시설도 비교적 잘 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천시는 외국 선수단이 원활하게 전지훈련을 소화할 수 있도록 호텔 숙박비를 할인해주고 차량, 통역, 스포츠용품 등을 지원하고 있다. 시 체육회 관계자는 “당초 4∼5개국의 선수단이 인천에서 전지훈련을 할 것으로 내다봤으나 베이징과 가까운 점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외국 선수단을 유치하게 됐다.”고 말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국내 거주 외국인 89만명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수가 89만 1341명으로, 전체 인구의 2%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5월1일 현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과 90일을 초과한 장기체류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외국인 주민은 지난해보다 23% 증가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는 국내 전체 등록인구(4935만 5153명)의 1.8%에 해당하며 지난해보다 17만명이 증가한 수치다. 서울·경기와 인천·충남 등 4개 시·도는 전체 인구 평균을 상회해 각각 2.5%,1.8%의 외국인이 거주했다. 특히 서울 영등포구(3만 9793명)는 전체 인구 대비 외국인 주민수 비율이 9.8%를 기록했다.10명 가운데 1명 꼴이 외국인인 셈. 서울에서는 금천구가 7.8%, 구로 6.8%, 종로 5.5%, 용산 5.3% 순으로 외국인 주민 비율이 높았다. 부산 강서 7.2%와 경기 김포 6.4%, 화성 6.1%, 포천 5.9%도 외국인 주민이 많았다. 외국인 주민들은 주로 기업이 밀집한 수도권에 3분의2 이상 집중됐다. 경기(31.2%), 서울(29.2%), 인천(5.5%) 순이다. 국제결혼 이주자도 경기·서울·인천 등 수도권에 절반이 넘게 몰렸다. 외국인 가운데는 근로자가 43만 7727명(49.1%)으로 가장 많은 절반을 차지했다. 국제결혼이주자는 14만 4385명(16.2%), 유학생 5만 6279명(6.3%), 상사 주재원 등 기타 17만 1104명(19.2%) 순으로 나타났다. 혼인 등으로 한국 국적을 얻은 외국인은 7.4%인 6만 5511명으로 파악됐다. 근로자 가운데는 남성이 69%로 많았지만 결혼이민자는 여성이 대부분(88%)이었다. 국적별로는 조선족이 작년보다 44% 늘어난 37만 8345명으로 전체의 42%를 차지했다.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 22.2%, 미국 3%, 일본 2.7%, 몽골 2.4% 등이 뒤를 이었다.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11억 印 올림픽메달 다합쳐 17개

    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스포츠 대회 성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외교정책 전문 격월간 포린폴리시 인터넷판이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역대 대회에서 인구나 외교력에 비해 메달과 ‘억세게 인연이 없었던’ 다섯 나라를 꼽았다. 악연의 주인공은 인도와 이스라엘, 베네수엘라, 타이완, 페루다. 인구 11억명인 인도는 1900년 이후 올림픽에 꾸준히 참가해 왔지만 따낸 메달이라곤 금·은·동 합쳐 17개가 전부다. 인구 1억 3000만명으로 10분의1 수준인 나이지리아보다도 메달이 적다. 스포츠 경기장이 33개에 불과할 정도로 정부 지원과 기반 시설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꿈나무 육성은 남의 나라 얘기다.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금메달 1개도 건지지 못했다. 여자 역도 69㎏급 동메달 1개가 전부다. 하지만 최근 철강재벌 라크시미 미탈이 2012년까지 선수 훈련, 의료 지원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로 하는 등 뒤늦게 스포츠 투자에 발벗고 나섰다. 강소국 이스라엘도 사정은 마찬가지. 역대 메달 6개로 막강한 외교력과 대조적으로 초라한 수준이다.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야 사상 첫 메달을 획득했다. 메달 6개는 우간다와 같은 숫자다. 베네수엘라는 올림픽 첫 메달을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따냈지만 여태껏 얻은 숫자는 금메달 1개를 포함해 10개뿐이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메달 수와 같다.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첫 메달을 딴 그루지야가 메달 12개로 벌써 베네수엘라를 앞지른 것과 대조적이다. 타이완은 외교무대에서 중국에 밀리다가 스포츠 분야에서도 밀린 뼈아픈 케이스다. 역대 메달 수는 15개로 경제규모가 100분의1 수준인 몽골과 같다. 중국의 올림픽 참가 방해공작으로 ‘타이완’이란 국명 대신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란 호칭을 쓰고 타이완 국기 대신 국가올림픽위원회 깃발을 써야 하는 처지여서 더 서럽다. 페루는 메달 총 4개로 같은 중남미권에서 경제규모 4분의1인 자메이카에도 처진다. 자메이카는 육상 단거리 종목이 강한 덕분에 페루보다 10배나 많은 메달을 자랑한다. 페루의 ‘굴욕’은 빈곤과 인프라 부족 때문이다.10년 전까지 페루 올림픽 대표팀은 영양부족에 시달렸고 유니폼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5월 2016년 올림픽 개최지 경쟁 참여를 선언하며 스포츠 외교무대에 시동을 걸었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더위 차라리 즐겨라

    대구 수성구는 수성못과 두산로 일대에서 ‘폭염축제’를 연다. 다음달 1일부터 3일까지다.폭염을 피하지 말고 떨치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역발상의 행사다. 물과 얼음을 활용한 체험 프로그램이 많다. 수성못 북쪽 두산로(폭 18m, 길이 500m 구간)에서 열리는 ‘물 난장 퍼포먼스’에서는 참가자들이 물총을 쏘고 물풍선을 터뜨리면 소방차가 물세례를 퍼붓는 행사가 준비된다. 또 초대형 얼음그릇에 화채를 만들어 먹고 몽골 천막 안에 설치한 얼음 위를 맨발로 걷는 행사도 마련된다. 공기를 불어 넣고 물을 채운 기구에서 하는 물씨름과 물풋살대회도 즐길거리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CEO칼럼] 잘 먹을까? 잘 잘까?/홍준기 웅진코웨이 사장

    [CEO칼럼] 잘 먹을까? 잘 잘까?/홍준기 웅진코웨이 사장

    푹푹 찐다.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여름밤 잠을 청하기가 힘들다. 최저기온이 25도를 웃도는 밤을 열대야라고 하는데, 열대야 현상이 발생하는 날이 해마다 앞당겨지고 있다. 열대야의 시작은 전력소비량이 먼저 알려준다. 올해는 최대 전력소비 날짜가 작년보다 한 달가량 빨라졌다. 이제 열대야는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이 아닌 것이다. 열대야의 고통은 말 그대로 더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70%가 열대야로 인해 업무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열대야는 전력소비량과 함께 불쾌지수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열대야의 원인은 환경 파괴에 따른 지구온난화다.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 등 온실가스가 지구온난화를 유발한다. 이는 산업사회의 화석연료 사용, 과도한 육식생활과 연관이 있다. 예컨대 공장에서는 이산화탄소를 뿜어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식탁에 올리기 위한 가축들이 지구의 풀을 먹어 치운다.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킬 숲은 파괴되어 온실가스는 과잉 생산된다. 온실가스는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 에너지는 통과시키도록 하는 반면 지구로부터 나가는 복사에너지는 흡수해 지구의 기온을 올려놓는다. 침팬지의 어머니로 통하는 생태운동가 제인 구달 박사는 쇠고기 1㎏을 얻는 데 16㎏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제 1900년대 초 약 50억㏊에 달하던 지구상의 숲은 오늘날 29㏊로 줄었다. 현재 아마존 개척지의 70%는 방목장으로 쓰인다. 방목장을 만들면 대개 숲을 태우는데 이때 대규모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고, 광합성 감소 효과를 초래한다. 과도한 육류 수요 때문이다. 가축들은 온실가스로 분류되는 메탄가스도 뿜어낸다. 소가 발생시키는 메탄가스는 지구 전체 메탄가스 배출량의 18%에 달한다. 해마다 봄이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찾아오는 황사 역시 중국과 몽골의 과도한 방목으로 인한 사막화가 그 원인이다.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깨달은 세계는 해법 찾기에 나섰다.1997년 체결된 교토의정서는 38개 선진산업국가를 중심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온실가스 총배출량을 1990년 수준보다 5.2% 줄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업들도 이산화탄소 배출 표시제 도입, 나무심기 행사 등 지구 살리기에 동참하고 있다. 개인도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나서야 한다. 식습관을 고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과도한 육식을 자제하는 등 조금 덜 잘 먹기 실천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일화 한편이 ‘덜 잘 먹기 실천’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쌈을 싸서 먹고 있는 다산 선생에게 어떤 이가 물었다. “절여 먹는 것과 쌈을 싸서 먹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요?” “이것은 내가 입을 속이는 방법일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살면서 절대 속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지만, 단 한가지 ‘자기 입’만은 속여도 된다고 했다. 입맛에 맞는 것을 찾기보다는 입을 속이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숙면을 돕는 음식 중의 하나가 바로 상추다. 상추의 락투카리움 성분은 최면과 진통 효과가 있어 숙면을 유도한다. 잠 못 드는 열대야 속에서 쌈장과 함께 상추쌈을 먹으며 자기 입을 속여 보는 것을 어떨까?그러면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도 생각해 보자. 잘 먹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잘 자는 편이 낫지 않을까? 홍준기 웅진코웨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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