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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에 일군 위안소 있었다”/당시 도청직원 증언

    ◎위안부 20여명 수용 【대구=이동구기자】 대구에 일제의 종군위안소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18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경북도청 근로동원과 원호계에 근무했던 유모씨(73·대구시 동구 검사동)가 증언함으로써 공개됐다. 유씨에 따르면 이 종군위안소는 태평양전쟁말기인 지난 1944년 10월 북간도 방면에서 후퇴해온 하야부사 전투비행대가 동촌비행장에 주둔하면서 당시 철공소자리였던 대구시 동구 검사동984 일대를 강제로 접수,50평짜리 2층 목조건물을 지어 사용했다는 것이다. 유씨는 또 위안소에는 20여명의 종군위안부가 있었다며 이 위안소는 해방직후 동촌지역 청년들이 조직한 동촌청년자위대에 의해 1945년 8월21일 폐쇄됐다고 밝혔다. 한편 영남대 오세창교수(한국근대사)는 『국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로 처음 밝혀진 사실』이라고 밝혔다.
  • 화천경찰서 화재로 전소

    【화천=정호성기자】 17일 상오 3시35분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하리24 화천경찰서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목조건물로 된 청사 6백2.25㎡가 전소하고 각종서류 및 M16 12정,38구경 권총 3정이 불에 타는 피해를 냈으나 1시간여만인 상오 4시35분쯤 완전 진화됐다. 건물안에 사람은 없어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화천경찰서는 지난 56년5월30일 건축된 목조 기와의 단층 건물로 강원지방경찰청 재산에는 1백98만6천원으로 집계돼 있다.
  • 세계서 가장 긴 휴전… 분단의 벽 언제 헐릴까

    ◎되돌아 본 “판문점 38년”/“냉전의 상징”… 성과없는 회담만 4백60차례 3년1개월이나 계속됐던 6·25전쟁의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전쟁의 포연이 멎은지 38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해도 세번이나 더 바뀔 세월이 흘렀어도 군사분계선을 사이로 남북2㎞씩의 비무장지대는 변함이 없다. 1953년 7월27일 상오10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육군대장을 대리한 해리슨중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을 대리한 남일대장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발효와 함께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휴전회담 회담장을 중심으로 8백m의 원을 그려 유엔군과 공산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삼은것이 오늘의 판문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판문점은 세계 뉴스의 초점이되어 왔으며 한반도를 찾는 남북한 방문객의 관광명소가 됐다. 당초 휴전회담은 51년 7월10일 공산측의 통제구역인 개성에서 시작됐다. 공산측의 제의에따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정한 유엔군은 휴게소 건물이나 회의장건물이 모두 공산측의 장악아래 있어 통신이나 경비·왕래 등에 불편함이 많았고 심리적으로도 협상대표들이 압박을 받기도 했다. 51년 10월25일 유엔군측은 당시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판문점을 새로운 회담장소로 제의,공산측과 합의를 보아 옮겼다. 대형 군용천막 4개를 급속히 세우고 통신시설과 도로 등을 닦아 회담장을 설치했다. 2년여동안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천막대신 목조건물이 세워졌고 53년 7월27일 역사적인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었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현재 판문점공공경비구역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유엔군측의 자유의집,평화의집,일직장교실,초소,막사등이 들어서고 공산측에도 판문각,통일각,경비본부초소,막사등과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등 10여채의 건물이 들어서있다.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리는 본회의장은 군대막사형인 단층의 콘크리트건물로 20여평밖에 되지 않는다. 군정위 본회담이 열릴때마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의 내외신기자1백여명과 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등 중립국감시위원단장교들이 창문을 통해 회의진행을 지켜본다. 휴전이후 4백60여차례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담이 열렸으나 합의한것은 아무것도 없이 수사학적인 언어의 전투가 계속되고있다. 유엔군측은 지난1월 군정위 수석대표를 미군장성에서 한국군장성으로 교체 임명 발표했으나 공산군측은 한국이 휴전협정에 조인한 당사국이 아니기때문에 대표권이 없다고 주장하며 군정위해체론까지 들고 나오고있다. 한국군의 장성이 군정위 수석대표에 임명된이후 본회담이 열리지 않고있다. 공산측은 『조선문제는 조선사람들끼리 풀어가자』면서도 한국군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고있다. 우리 민족은 부끄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긴 휴전의 역사를 갖게됐다. 휴전협정조문속에는 「통일」에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어 이 불안정한 휴전체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 “핵반대” 격렬시위… 한때 치안부재/지서등 관공서 습격ㆍ방화

    ◎군직원ㆍ경관등 묶어놓고 뭇매/일부는 밤늦도록 화염병 시위/안면사태/정부해명에 진정기미… 경찰,50여명 연행 【안면도=박국평ㆍ육철수ㆍ송태섭기자】 핵폐기물처리장 건설계획에 반대하며 지난 6일부터 3일째 집단시위를 벌이던 충남 태안군 안면읍 주민 1만여명은 8일 하오10시쯤 정부가 핵폐기물 계획이 없었다고 해명한 소식이 전해지자 일단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주민 5백여명은 『정부의 핵폐기물처리장 설치계획의 완전백지화가 확인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면서 이날 자정까지 안면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이에앞서 주민들과 학생들은 8일 하오5시쯤 안면지서와 안면 의용소방대에 난입,안면지서를 모두 불태우고 소방차 등을 탈취하는 등 하오 늦게까지 과격시위를 벌였다. 이들 주민ㆍ학생들은 또 이날 상오11시40분쯤부터 안면읍 승언리1구 한국전력 안면지소앞 도로를 점거,시위를 벌이다 현장에 나와있던 태안군청 공보실장 이영세씨(47)와 서무계장 박홍식씨(37) 등 군청직원 5명을 납치,몽둥이 등으로 때린후 팬티만입히고 옷을 모두 벗겨 양손을 나일론끈으로 묶은채,도로에 쌓아놓은 드럼통과 폐타이어위에 50여분동안 서있게한 뒤 읍사무소로 끌고가 감금,하오5시쯤 풀어주었다. 이들 시위대의 이같은 과격시위로 인구 2만여명의 안면읍은 행정업무가 마비되고 한동안 무법천지를 이뤘다. ▷시위동기◁ 이날 상오10시 안면읍 버스정류장 광장에서 주민 1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설반대」 대회에서 주민대표 박노태씨(45) 등 8명이 지난7일 서울에서 정근모 과기처장관을 만나 「에너지연구소 건설 강행방침」 답변만 듣고 왔다고 발표하자 흥분한 주민들이 일제히 처분장설치 반대를 외치며 과격시위에 들어갔다. ▷방화 및 경찰관 납치◁ 시위상황을 살피기 위해 현장에 나와 있던 공보실장 등 5명의 군청직원을 납치했던 시위대는 이어 현장에서 신임 안건수 안면지서장(47ㆍ경위)이 타고온 충남1 마3975호 로얄프린스승용차를 탈취,석유를 뿌려 전소시키고 안경위를 끌어내 집단폭행,2주이상의 상해를 입혔다. 이때 현장에 있던 안면지서소속오재규경장(35)과 김호성순경(29) 등 2명도 이들 시위대에게 몽둥이 등으로 맞아 오경장은 실신,안면도 서울병원에 입원하고 김순경은 무전기를 빼안긴 채 붙들려있다가 풀려났다. 시위대들은 경찰에 돌 등을 던지며 읍내에서 공방전을 벌이다 하오7시25분쯤 안면지서 건물에 휘발유 등을 뿌린뒤 불을 질러 목조건물 내부 1백65여㎡와 부속 예비군 중대본부 무기고 등 모두 3백30㎡를 불태웠다. 그러나 무기고에 보관중이던 총기류와 화약류는 직원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사전에 인근 군부대로 모두 옮겨놓았고 주요문서는 시위대들이 미리 지서 밖으로 꺼낸 다음 불을 질러 큰 피해는 없었다. 이에앞서 시위대 1만여명은 상오9시30분쯤 안면읍 승언리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3㎞ 떨어진 서해안연구단지 조성부지로 몰려가 건설현장 사무소의 가건물 1백여㎡와 포클레인 1대에 휘발류를 뿌려 전소시켰다. 한편 시위대는 낮12시쯤 사고현장을 취재하던 대전 매일신문 사회부 이광희기자(30)에게도 집단폭행을 가해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히고 카메라를 빼앗았다. ▷차량탈취◁ 하오5시쯤 의용소방대와 안면지서에 난입한 시위대는 의용소방대의 차고대형 철제셔터 2개를 부수고 충남9 가2086호 소방차와 안면지서옆 읍사무소에 세워져 있던 충남7 가2083호 쓰레기차를 탈취,한전 안면지소 앞까지 몰고가 이 차량으로 바리케이드를 보강했다. ▷시위진압◁ 충남도경은 하오 늦게까지 시위가 계속되자 전투경찰 9개중대 1천1백여명을 안면읍내에 투입,시위대들이 점거하고 있던 읍사무소와 안면지서 등을 되찾았다. 경찰이 투입되자 시위대는 도로에 설치됐던 드럼통과 폐타이어 등 바리케이드에 불을 질러 안면읍 전체가 30여분동안 폭발음과 연기 등에 휩싸였다. 안면읍에 투입됐던 경찰관 10개중대중 8개중대는 하오9시30분 현재 서산군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2개중대는 연륙교 인근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경찰에 밀려 연륙교와 승언리 한전앞쪽으로 밀려난 시위대는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맞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밤늦게까지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현장에서 주민대책위 최석칠위원장등 간부 5명과 주민 50여명을 연행,조사하고 있다.
  • 휴전 37돌ㆍ범민족대회 계기로 본 어제ㆍ오늘

    ◎“냉전ㆍ대화의 장”… 두얼굴의 판문점/화해ㆍ도발ㆍ긴장 엇갈린 「국권의 사각지대」/북측,남북교류 구실로 정치선전장화 기도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37년,그동안 판문점은 동서이념 대결과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뉴스의 초점이 돼왔으며 최근에는 활발해진 남북대화와 함께 개방여부를 놓고 또 한차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1953년 7월27일 상오 10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육군대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발효와 함께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휴전회담 회담장을 중심으로 직경 8백m의 원을 그려 유엔군과 공산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삼은 것이 오늘의 판문점이다. 세계 각국의 언론에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기묘한 장소」라고 불리운 판문점은 북위 37도57분20초,동경 1백26도40분40초,한국도 북한도 아닌 국권의 진공지대이다. 휴전이후 37년동안 4백50여차례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담이 열렸으나 합의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논쟁과 설전만 계속해왔다. 북한의 선전과 도발,생떼,어거지가 본회담의 주류를이루던 판문점은 때로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팽팽한 긴장의 현장이었으나 7천만 민족의 통일의 염원이 결려있는 곳이며 남과 북의 유일한 대화통로여서 늘 뉴스의 초점이 되어 왔다. 당초 휴전회담은 1951년 7월10일 공산군의 통제지역인 개성에서 시작됐다. 공산측의 제의에 따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정한 유엔군측은 휴게소건물이나 회의장건물이 모두 공산측의 장악아래있어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았다. 1951년 10월25일 유엔군측은 당시 남북군사분계선상에 있던 판문점을 새로운 회담장소로 제의,공산측의 합의를 받아 옮겼다. 초가집과 판잣집 4채 밖에 없던 주막거리 판문점은 일약 유엔군과 공산군의 고위장성을 실어나르는 헬리콥터와 내외신 보도진들이 몰려드는 뉴스의 현장이 되었다. 대형 천막 4개를 급히 세우고 이속에서 회담은 계속 됐다. 2년여동안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에는 천막대신 목조건물이 세워졌고 53년 7월27일 역사적인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됐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현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유엔군측의 자유의 집ㆍ평화의 집ㆍ일직 장교실ㆍ초소ㆍ막사 등이 들어서고 공산측에도 판문각ㆍ통일각ㆍ경비본부초소ㆍ막사 등과 중립국 감시위원회 회의실 등 10여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리는 남북의 회담장은 군대 막사형인 단층의 목조건물로 20여평밖에 되지 않는다. 회담장 한 가운데 녹색 커버를 씌운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테이블위로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의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다. 군사분계선을 앞에 놓고 유엔군과 공산군의 장군급대표 5명이 『안녕하십니까』나 『또 만납시다』라는 인사말도 없이 37년간 수사학적인 말의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단뒤로는 비서장을 비롯한 보좌관과 한국어ㆍ영어ㆍ중국어 통역 등 20여명씩의 수행원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다. 군사정전위가 열릴때마다 유엔군대표들은 서울을 출발,헬리콥터나 차량편으로 임진강의 자유의 다리를 건너 회담장으로 가고 공산측은 하루전에 평양을 출발,개성에서 1박을 한뒤 4천m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대신 북쪽에 새로 놓은 다리를 지나 판문점에 도착한다. 유엔군측의 자유의집은 65년 9월30일 준공됐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공산측도 2층 건물인 판문각을 준공했다. 80년 6월20일에는 자유의 집옆에 연건평 1백40평의 남북총리회담장 건물이 준공됐고 89년 12월20일에는 남북회담장소로 사용할 3층의 백색건물 「평화의 집」을 준공했다. 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과 72년 7월의 7.4공동성명으로 판문점에서 남북조절위원회가 열리면서 판문점은 휴전이후 두절된 남북대화의 통로가 활짝 열리는듯 했었다. 그러나 73년 8월28일 북한의 일방적인 남북대화중단 선언으로 판문점은 또다시 냉전과 설전의 싸늘한 분위기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남북회담이 중단된지 3년뒤인 76년 8월18일 북한의 경비병 30여명이 도끼와 몽둥이 등으로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한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 판문점은 숨막히는 긴장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도끼만행사건이전에도 59년 1월27일 소련 프라우다지 평양특파원 이동준씨 귀순,67년 3월22일 이수근위장탈출,75년 6월30일 미군장교 구타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없이 일어났다. 80년대에 들어 남북대화가 재개되면서 판문점은 남북회담장소로 변해 84년 11월15일 남북경제회담과 85년 7월23일 남북국회회담을 위한 예비회담 체육회담 등이 계속해 열렸다. 85년 9월20일에는 남북고향방문단 2백여명이 이곳에서 출입사열을 거쳐 교환방문했으며 84년 수재때에는 북한이 제공한 수재구호물자 쌀 7천1백96t,의약품 7백59상자가 이곳을 통해 전달되기도 했다. 휴전뒤 37년동안 1백55마일의 군사분계선중 유일하게 총칼대신 탁자가 놓여진 이곳에서는 상스러운 욕설에서부터 고도의 이념논쟁에 이르기까지 수억만 단어가 3개국 언어로 구사되면서 때로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주는 장소로,때로는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 대낮 카페에 불/7개 점포 태워

    30일 상오11시50분쯤 서울중구 인현동1가 101 3층목조건물의 1층 핑크펑크카페에 불이나 이웃 금성치과의원과 을지문화인쇄소등 7개점포로 옮겨붙어 1억여원(상인주장)의 재산피해를 낸뒤 40분만에 진화됐다.
  • 쌀가게 누전으로 불 잠자던10대 소사

    16일 하오 9시45분쯤 서울 동대문구 휘경2동 493의45 박상식씨(42·미곡상)집 천장에서 전기누전으로 불이나 박씨의 큰아들 승연군(18)이 불에 타 숨졌다. 불은 안방 천장속 전깃줄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안방에서 거실로 옮겨붙어 목조건물 30평을 모두 태운뒤 1천만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30분만에 꺼졌다. 박군은 이날 안방에서 혼자 잠을 자다 피하지 못해 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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