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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민련 남측의장 등 넷 구속

    서울경찰청 보안과는 20일 불법으로 규정된 범민족대회를 주도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姜希南 목사(78) 등 이 단체 간부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 高宗의 부부싸움(秘錄 南柯夢:21)

    ◎“황태자 폐위” 궁중流言 나돌아/고종 “맏아들 폐위는 나라 망치는 일” 진노/“누구의 획책인가…” 嚴妃 추궁하자 졸도/30분뒤 깨어나니 노여움 풀고 부부화해/“가화만사성 경의 말들어…” 번갈아 하사품 고종과 엄비의 가정불화는 마침내 엄비의 기절로 끝나게 되었으니 궁중 사건으로는 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긴급 사태를 당하여 정환덕은 고종에게 “안심하십시요.30분 뒤에는 깨어나십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과연 깨어날수 있을까.이 예언이 맞지 않으면 당장 해임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30분이 지나 밤 8시가 되었다. 엄비께서 갑자기 몸을 옆으로 둘리시더니 얼굴을 벽에 대고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숨을 몰아 쉬셨다.기사회생한 것이다.상궁과 내인이 급히 뛰어 대청에 나와 고종에게 엄비가 깨어난 것을 아뢰었다.황상께서는 급히 달려가서 엄비가 깨어나신 것을 확인하셨다.너무 기뻐 좌우를 돌아보시더니 “정시종(鄭侍從=정환덕)의 추산법(追算法)은 과연 천하 제일이다”하시며 칭찬하시기를 마지 않으셨다. 어떻게 엄비의회생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그건 정환덕이 엄비의 졸도가 약으로 치료될 일이 아니라 화병으로 일시 까무라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엄비가 졸도하기 전 정환덕이 엄비에게 불려가 고종과 독대 내용을 질문받은 일이 있었다.그 뒤 소문이 고종의 귀에 들어가 다시 고종에게 불려갔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터이다. 황상께서는 경위총관(警衛總官) 이근순(李根淳), 궁내협판(宮內協判) 이봉래(李鳳來),탁지대신(度支大臣) 이용익(李容翊),평양참령(平壤參領) 길영수(吉永洙),호위대참장(護衛隊參長) 이서구(李書九) 등 요인들이 즐비해 있는 가운데 대청에 좌정하시어 나(정환덕)에게 물으시기를 “지금 엄비가 너를 불러 무슨 일을 묻던가”고 하시었다.이에 아뢰기를 “엄비께서 단지 나라 일을 걱정하시며 왕실의 운명에 대해 점치라고 하셨을 뿐 그 밖에는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했다.황상께서는 “알겠다”고 하시면서 자리를 뜨셨다. 그때 나는 몸을 일으켜 “한 말씀만 더 드릴 일이 있습니다”고 아뢰었다.“무슨일인가” 하시기에 “속담에도 있듯이 집안이 화평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家和萬事成)고 하였습니다.군신간에도 화목하여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부디 매사 평화와 관용과 원만으로 해결하시고 상벌을 분명히 하시며 허실(虛實)을 분명하게 하신다면 궁중은 물론 장안도 아무탈 없이 승평(昇平)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만일 그렇지 못하면 위험과 난리가 박두하게 될 것입니다. 본시 권좌에 오르면 그 순간부터 정신이 몽롱해져서 정사를 그르치게 마련이다.1904년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해다.그런데 국왕이 부부싸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 그것은 마치 클린턴이 성추문 사건에만 신경을 쓰다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그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은 입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던 말인데 ‘남가몽’에 보면 성주목사를 심선택(沈善澤)이 이같은 말을 하고 있다.심선택은 북간도 개척을 진언한 인물이다.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말아야 하고 즐거울 때 우환을 잊지말아야 한다(安不忘危樂不忘憂)는 것은 고금의진리입니다.지금 나라 형편을 보건데 겉으로는 태평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지극히 험난하여 문자 그대로 누란의 위기요,‘눈섭이 타는 위급’(燒眉之急)이라 할 것입니다.그러나 모두가 이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만신창이가 된 몸에 도화분을 발라 상처를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근본을 다스려야 낫지 말초를 다스려서야 나을 수있는 병이 아닙니다.지금이야말로 국가를 치료할 양약이 필요할 때입니다. 병든 나라를 치료하기 위한 양약이라고 했는데 이름이야 ‘개혁’이든 ‘제2의 건국’이든 상관이 없다.지금이야말로 그런 약이 필요한 때 아닌가. 아무튼 고종과 엄비의 부부싸움은 엄비의 졸도로 일단락됐는데 사실은 배후에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정환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내시가 한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봉시(奉侍:내시) 강석호(姜錫浩)였다.이 사람이 불시에 정환덕을 찾아오더니 엄청난 궁중비밀을 털어놓았다.정환덕도 몰랐던 일이기에 깜짝놀랐다. 봉시 강석호가 내게 찾아와 “영감께서는경선궁 사건을 실지로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하고 물었다.이에 답하기를 “사실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안개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고 했다.강석호는 말하기를 “영감이나 저나 천안(天顔: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는 몸으로서 다같이 나라와 고락을 함께 하고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하며 목소리를 낮추면서 “근일에 궁중유언(宮中流言)이 돌고 있는데 민비 소생인 황태자(순종)를 폐해 대군(大君)으로 강등하고 엄비의 소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모시고 저 한다는 말이 돌고 있는데 황상폐하께서 이 소리를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셔 말씀하시기를 ‘예부터 맏아들을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운다는 것은 국가를 망치는 근본이라 했다.어느 반역분자가 이런 일을 획책하고 있는가’하시면서 엄비를 나무라셨습니다.엄비가 황공무지하여 어쩔줄 몰라 하시다가 까무라치게 된 것입니다.영감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셨습니까. 강석호는 부부싸움의 진상은 대개 그러하니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해 앞으로 우리 두사람은 대소사를 가릴 것없이서로 협력하여 나가자”고 제의해 왔다.정환덕이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라고 동의했는데 얼마 뒤 고종이 정환덕을 불러 치하하였다. 황상께서는 “짐이 경의 말에 따라서 궁중의 유언비어를 말끔히 씻어 냈더니 화기(和氣)가 되살아났다.이 어찌 가화만사성 아니겠느냐”하셨다.엎드려 아뢰기를 “이는 이 나라의 훙복이옵니다.옛말에 ‘착한 마음을 한번 품으면 길신(吉神)이 따르고 악한 마음에 흉귀(凶鬼)가 따른다’고 하였사오니 이제 이 나라는 다시 회생할 것이옵니다”고 아뢰었다. 이때 고종은 손수 금일봉(금화 200환)을 하사하며 정환덕을 치하하였다.그런데 다음날 경선궁에서 엄비가 정환덕에게 “약간 정표를 준비했으니 받아 가라”는 하명이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물건을 그냥 받아갔다가는 큰일날 것 같았다. 그래서 10여일을 그냥 맡겨두고서 찾아가지 않았더니 엄비께서 “저번에 약간의 정표한 물건은 왜 받아가지 않느냐”고 물으셨다.대답하기를 “너무 황송해 받아가지 못했습니다”고 하였다.그리고 나서 황상께 고하기를 “경선궁에서 약간의 정표로 하사하신 물건이 있었습니다만 감히 받을 수가 없어 이처럼 말씀드립니다”고 아뢰었다. 황상께서는 “무슨 물건이든가”고 물으시기에 “엄비의 말씀이 ‘막중 존엄한 자리를 가까히 모시는 신하로서 의복이 남루해 혹시 정결하지 못하여 냄새가 날까 두려워 다소의 의복을 하사한다’하셨습니다만 아직 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고종이 “받는 것이 옳다”고 허락하셔 마침내 선물을 받아 펴보았다. 펴보니 구름 무늬 비단으로 만든 크고 작은 예복 각 한 벌씩과 물소뿔띠와 학을 그린 흉배자 각 한 벌,수단(繡緞) 두필,왜비단 두필,순인갑사(淳仁甲紗) 한필,가는 모시 세필,분명주 두필,목양목 두필,백미 10섬,지화(紙貨) 300환.씨를 뺀 화솜 50근.안동포 두 필 그 밖에 여러 물건이 들어 있었다. 고종은 200환밖에 하사하지 않았는데 엄비는 이처럼 지화 300환 이외에도 엄청난 물품을 하사하였으니 그때도 지금처럼 경제권이 여편 쪽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바보들 순교자들 반역자들/레이시 볼드윈 스미스 지음(화제의 책)

    ◎역사 바꾼 인물들의 삶·죽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물음에 대한 답은 많다. 하지만 그 대답은 한결같을 수 없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책에는 숱한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죽은 마카베오 형제들,노예해방을 위해 광기를 부린 존 브라운,히틀러 암살을 시도하다 교수형을 당한 디트리히트 본회퍼 목사,원자폭탄의 비밀을 팔았다는 혐의로 전기의자에서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테마로 묶여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스미스는 이 책에서 “순교자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그 시대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역사의 관점에서 해석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문호 옮김 지호 전2권 각권 1만2,000원.
  • 잘 나가는 귀순자/지명도 활용 자립 꿈 결실(탈북 그 이후:2)

    ◎최세웅 부부·김용씨 북한음식점 성업중/황장업씨 집필·강연 김신조씨 목회 전념 지난 95년 귀순한 崔세웅씨(38·전 북한 대외무역회사 대성총국 유럽지사장)와 만수대 무용단 출신인 申영희씨(38) 부부는 요즘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지난 4월 일산 신도시에 북한 냉면집 ‘진달래각’을 개업하면서부터다. 6월에 평창동에,7월에 광주에 분점을 냈다. 전국에 분점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다. 자유의 품에 안긴지 2년 남짓된 ‘애숭이’지만 누구보다 적응력이 빠르다는 말을 듣고 있다. 냉면집 카운터에서 “어서 오세요”라며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崔씨 부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IMF잖아요. 더 열심히 일해야 해요. 그래야 통일 뒤에 부모님과 친척을 만나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이렇듯 탈북자의 상당수는 崔씨 부부처럼 생소한 여건속에서도 꿋꿋하게 생활하고 있다. 기반을 잡은 사람도 꽤 된다. 가수로 활동했던 金勇씨(35)는 고양시 근처에 북한냉면집을,93년 귀순한 요리사 출신 강봉학씨는 경기도 용인에 북한전문요리집을 차렸다. 崔씨 부부는 “특별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시절,전문직종의 경험을 살려 성공한 예도 많다.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였던 黃長燁씨(75)는 당국의 신변안전실에서 기거하며 집필이나 외부강연 등으로 소일하고 있다. 외교관 출신인 高英煥씨(콩고주재 1등서기관)와 玄成一씨(잠비아주재 3등서기관)도 북한문제조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2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근무하다 망명한 金동수씨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다. 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의 金신조씨(56)는 지난해 1월 목사안수를 받은 뒤 충남 예천에서 농촌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87년 일가족 10명과 함께 한국에 온 金萬鐵씨는 남해에 기도원을 세웠고,모스크바대학 유학중 망명한 金명세씨는 침례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남북나눔운동연구위원회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87년 KAL기 폭파사건의 金현희씨(36)는 지난해 말 경주 출신의 사업가와 극비리에 결혼했다. 자신의 수기 ‘나도 여자가 되고 싶어요’의 희망처럼 지방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군 출신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83년 망명한 李웅평 공군대령(45·공군대학 교수)은 간경변으로 입원했다가 최근 퇴원해 요양중이다. 96년 미그19기를 몰고 온 李철수대위와 같은 해 강릉무장공비 사건때 생포된 李광수씨(33)는 각각 공군과 해군본부에서 교관으로 자리잡았다.
  • 실직자 지원 종교단체가 나서야/安基成 목사(기고)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마당 처마와 나뭇가지 사이에 줄을 치고 거미 몇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비가 한차례 내리쏟고 나면 마당에 나가본다. 거미는 그대로 있다. 밤새도록 소나기가 내렸는데도 아침에 나가보니 거미는 그대로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떠내려가고 야단들인데 거미는 그 세찬 비바람에도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꼼짝없이 견뎌내고 있지 않는가. 이 말부터 꼭 해야겠다. 실직자들이여, 제발 생명을 포기하지 말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된다. 힘들고 짜증스럽다고 가족을 팽개치고 집을 나가버리지 말아라. 아무리 지금의 상황이 심각하다 할지라도 가족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참아내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람이 한낱 미물인 거미보다 못한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정부가 뚜렷한 대책이 없고,국회는 한심하기 짝이 없으며,매스컴은 연일 갑론을박에 빠졌고,가진 자들은 IMF여 영원하라고 건배를 들고 있을지라도 이들을 탓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남은 가족들이라도 보험금으로연명하도록 하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200명이 넘어섰고,주부들은 생계 대책을 한탄하며 집을 뛰쳐나가고 있으며,청소년들은 용돈이 모자라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줄줄이 몸을 던지고 있다. 서울역,서소문 공원에다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하룻밤이라도 돌아다녀 보라 전쟁통 피난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실직에 잇단 가정파탄 필자는 개신교 목사로 교회를 포함한 전체 종교단체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더 있겠는가. 종교단체가 실직자 가정을 책임지고 돌보는 일이 지금은 시작 단계지만 더욱 확산되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한 가정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아파도 대책이 없고 아이들 양육비는 어쩌란 말인가. 싸움 끝에 부모들은 뛰쳐나가고 아이들은 쓴 눈물만 삼킨다. 어른이야 하루 이틀 굶어도 찬물 마시며 견디어볼 만하지만 어린 것들이 하루에 한끼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 수만 있겠는가. 종교단체가 닫힌 문을 열고 실직자 가족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 실직자들이 한달 두달 줄을 서서 밥을 얻어 먹다보면 거지 행세에 익숙해지고 만다. 몇푼 구걸한 돈으로 선술집이나 드나들고 노름판에 끼어들다 보면 인생은 망가지고 가정은 산산조각,사회는 깊이 멍든다. 그러나 종교단체에 찾아왔다고 돈 몇 푼 주고 거지 취급해서 보내는 일은 제발 하지 말자. 종교단체에 와서 샤워도 하고 이발도 하고 세탁도 하며 옷도 갈아입고 그리고 나서 차분하게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하자. 집으로 돌아가서 콩 한조각이라도 나누며 어떤 희망을 만들게 하자. 한 교회나 한 종교단체가 이 모든 일을 다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하나씩 맡아 협력하여 좋은 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나눠주는 쉼터로 가능하다면 작은 일자리라도 하나씩 만들어 이웃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직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자기 땀과 수고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일자리 하나가 한 가족을 살릴 수 있다면 말이다. 교인 중에 사업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작은 일자리 하나씩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참으로 좋겠다. 이들의 생활이 몸에 배어 행려자가 되고 길거리 사람이 되기 전에,추위가 닥쳐오면 범죄가 늘어나고 알코올 중독자가 늘어나서 길거리의 주검을 보기전에,너무 늦었구나 후회하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軍 부대·유원지서 산사태 잇따라/복구작업 군인 7명 참변

    6일 상오 3시쯤 경기도 고양시 벽제 육군 1군단사령부에서 산사태가 발생,통신복구작업을 하던 장교와 사병 등 7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벽제 부근 공군 방공포대에서도 산사태로 초소지반이 붕괴되면서 경계근무중이던 초병 2명이 흙더미에 깔렸다. 또 이날 상오 6시쯤 서울 강북구 우이동 계곡유원지에서 산사태가 발생,음식점 ‘영화상회’를 덮쳐 음식점 주인 임상업씨(39)와 부인 李영분씨(39),딸 효나양(5) 등 3명이 흙더미에 매몰돼 숨지고 아들 승돈군(12)과 종업원 崔성복씨(29) 등 4명이 크게 다쳤다. 아르바이트생인 姜정민군(18·경기공고1년)은 실종됐다. 이날 상오 4시쯤 서울 노원구 하계2동 동부간선도로 하계동 출구 도로에서 金원태(47·목사·광진구 구의동)·黃정란씨(46·여) 부부가 쏘나타승용차안에 갇혀 있는 것을 노원소방서 119구급대가 수색작업중 발견,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金씨 부부가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동부간선도로로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갇혔다가 차량 안으로 물이 차오르면서 익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종교인 30여명 11일 방북 예정

    8·15 통일 대축전과 때를 맞춰 남한의 개신교와 불교,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 저명인사 약 30명이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위원장 박태호)과 조선종교인협의회(회장 장재철) 등이 지난 7월말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인 金蒙恩신부와 개신교계 원로 姜元龍 목사,조계종의 法陀 은해사 주지 등을 초청했으며,정부는 이들의 방북 승인을 긍정 검토하고 있다. 오는 11일부터 18일까지 방북하는 이들 종교인들은 북한 종교단체들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한 뒤 일부는 고향을 방문해 이산가족과도 만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남한 종교인들을 초청한 것은 14∼15일로 예정된 ‘통일대축전’과 때를 맞춰 남한 종교인들이 동참하는 대규모 종교집회를 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 민주열사 열전:1­2/張俊河 선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체제 맞서 ‘불굴의 투쟁’/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항일운동/해방후 ‘사상계’ 창간 반독재투쟁 선도/朴正熙정권 끝내 부정… 의문의 추락사 “오늘의 헌법(유신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이에 우리 국민은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1973년 12월23일 상오 10시 서울 YMCA회관 회의실.통일당 張俊河 최고위원이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수십명의 보도진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咸錫憲·白樂濬·金壽煥·白基玩·桂勳梯·兪鎭午씨 등 각계 지도급 인사 3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이었던 것이다.이 일로 張俊河 선생은 白基玩씨와 더불어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다.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張俊河 선생.그는 정부수립 이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골짜기에서 불귀의 객이 될때까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5·16쿠데타 때까지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무기로,그 이후에는 직접 몸을 던져 독재와 싸웠다.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78)은 張俊河 선생을 ‘애국자·혁명가·인격자이며 권모술수와 배금주의를 배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서러워했다. ‘사상계’를 빼놓고는 그의 반독재투쟁사를 말하기 어렵다.그의 손아래 동서로 사상계에서 편집부장을 지낸 劉庚煥씨(61·전 문화일보 논설실장)는 “張俊河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신앙에 가까운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사상계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오히려 반독재 정론지로써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란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58년 12월 자유당 정권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개악시켜 통과시킨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張俊河 선생은 61년 7월호에 실린 咸錫憲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목의 글로 중앙정보부장 앞에 불려가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빨리 민정이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또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밀수왕초’,‘매혈자’등으로 몰아부치고 국가원수모독죄 등으로 구속된다.이러한 투쟁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반유신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의 반독재투쟁에 대해 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65)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로 몰아가려는 반통일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했다.劉庚煥씨는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 반공주의자였다.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朴正熙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또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쿠데타는 후세에 좋지 않다는 신념으로 朴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회고했다. 張俊河 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가 광복군 대위 시절 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피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피빛으로.◎張俊河와 朴正熙/광복군대위­일본군중위 출신부터 달라/남로당관련 등 박정희 약점 과감히 들춰 5·16 쿠데타 이후 張俊河 선생이 숨질 때까지 ‘張俊河는 朴正熙의 천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그만큼 앞뒤 안가리고 朴대통령에게 모멸감을 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1966년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하자 재벌밀수규탄대회에 초청된 그는 朴대통령에게 ‘밀수왕초’란 이름을 선물했고,3개월간 옥고를 겪는다.6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그해 4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朴대통령에게 ‘매혈자’란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한 말이었다.이로 인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나 오히려 6월 총선에서 옥중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또 “朴正熙는 과거 남로당 조직책으로 조직원 동료를 팔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로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물” 등 朴대통령의 최대 약점들을 과감하게 들추어냈다. 張俊河 선생의 이런 행태에 대해 평전 ‘재야의 빛 장준하’를 썼던 朴敬洙씨(68)는 “張俊河 선생의 朴正熙관은 애초부터 멸시와 경멸이었던 것 같다. 상대가 일본군 중위일때 그는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였다는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朴正熙의 갖은 폭력을 겪으면서도 분노에 앞서 그 인격 자체를 대단치 않게 본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개헌을 위한 백만인 청원운동으로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던 張俊河 선생은 출감하자 75년 1월 朴대통령에게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고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유족들의 생활/결벽중에 가까운 청빈으로 가족들 큰 고통/문상객도 자기먹을 쌀 가져올 정도로 궁핍 “월급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17살때 시집왔다는 張俊河 선생의 미망인 金熙淑 여사(71)의 말이다.사상계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張俊河 선생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남은 것은 20만원짜리 월세방과 쌀 한 됫박뿐이었다고 전해진다.한 문상객이 미망인의 손을 붙들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거냐”며울자 망연자실해 있던 金여사는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라고 남의 얘기 하듯 했다고 한다. 白基玩씨는 “문상올 사람들에게 자기 먹을 쌀을 가져오라고 연락을 했었다”며 “당시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전셋집을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이렇게 지나칠 만큼의 청빈에 대한 그의 결벽증은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 밖에 없었다.사상계에 대한 탄압으로 항상 빚에 쪼들렸던 것도 이유가 됐다. 3남2녀중 장·차남인 호권·호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세 아들중 호준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한신대를 나와 목사로 있다.딸들은 이대를 졸업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 각각 살고 있다. ◎비극의 수수께끼/추락사한 유해 겨드랑이 피멍자국/17m 벼랑에서 떨어진 안경은 말짱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張俊河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張俊河 선생이 숨져 누워있던약사봉 골짜기의 이 표석문의 ‘멋 훗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당시 검찰의 ‘추락사’발표는 실로 의혹투성이였다.그때 徐燉洋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張俊河 선생은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그는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金龍煥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徐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그리고 그날 낮 金龍煥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이때문에 당시 ‘재야대통령’이라고 불리던 張선생의 사인을 서둘러 추락사로 발표한 의혹을 샀다. “집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를 보니 겨드랑이 밑 양쪽 팔에 피멍이 있었어요. 엉덩이와 팔 두군데 주사기로 찔린 듯한 자국도 있었고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사체가 너무 깨끗했습니다.순간 양쪽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갔다고 직감했지요” 서울 상봉동 셋집에서 장례 대소사를 떠맡았던 劉庚煥씨의 증언이다.또 金龍煥씨가 말한 하산코스가 등산장비 없이는 도저히 내려오기 어려운 벼랑이어서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張俊河 선생이 갖고 있던 커피보온병과 끼고 있던 안경이 17m 높이의 벼랑에서 돌밭으로 떨어져 말짱했다는 불가사의한 의혹 등도 나왔다. 劉庚煥씨는 또“소나무가 휘어진 자국이라며 金龍煥이 말한 부분에 동그랗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칼로 벗겨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연보 ▲1918 평북 의주에서 아버지 張錫仁 목사와 어머니 金京文 여사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1932년 평양 숭실중 입학 ▲1940년 일본신학교 입학 ▲1944년 1월 金熙淑 여사와 결혼,20일 후 학도병으로 입대 ▲1944년 7월 일본군 탈출,중국군 가담 ▲1945년 1월 중국 중경의 광복군에 편입 ▲1945년 11월 金九 선생과 함께 입국,비서로 활동 ▲1948년 한신대 졸업 ▲1953년 월간 ‘사상계’ 발행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 상 수상 ▲1971년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시절을 담은 저서 ‘돌베개’ 출간 ▲1972년 7·4 공동성명 지지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수많은 의혹을 남긴채 숨짐
  • 反독재 희생자 331명 명예회복 범국민운동/‘열사 범추위’ 결성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된 민족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汎)재야기구가 출범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 회 등 40여개 재야 및 시민단체들은 3일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약칭 열사 범추위)를 결성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민주화와 분단극복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운명한 331명의 열사 및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고 진정한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의 길을 열기 위해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열사 범추위는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국가보안법과 노동관계법 등의 개폐,범국민적 차원의 열사 추모 및 기념행사 추진 등을 주요사업으로 정했다. 범추위 상임대표에는 전국연합 李昌馥 상임의장,文정현 신부,기독교서회대표 金상근 목사,李海東 목사,원불교 金玄 종무원장,실천불가승가회 공동대표 청화 스님 등이 위촉됐다. 이날 결성식에는 고 全泰壹씨의 어머니 李少仙 여사,고 李韓烈군의 어머니 裴恩深씨,고 朴鍾哲군의 아버지 朴正基씨 등 유가족을 포함,50여명이 참석했다.
  • 北間島 개척(秘錄 南柯夢:19)

    ◎“간도 개간해 영유권 회복” 은밀히 제의/관직 물러난 심선택,부국강병책으로 진언/고종,“뜻은 거창하나 재정연구뒤 착수” 지시/심,“삼도 어사삼으면 수령출척 충당” 아뢰니 “흉년에 민폐 끼칠라…” 물리치자 없던 일로 두만강 건너 이북의 땅을 북간도(北間島)라 한다. 지금 연변 조선족이 사는 곳이다.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그리고 발해의 옛 강역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그토록 귀한 땅이 대륙의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은 고려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간도땅을 차지한 민족을 만주족,일명 여진족이라 하는데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학자 가운데는 여진족이 이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금과 청의 역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한국사의 일부로 끌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만일 계속 간도땅을 영유하고 있었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맛보지도 않았을 것이요,일제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간도에 고종황제가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느날 심선택(沈善澤)이 나(정환덕)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전 동부승지 의평(宜平)의 아들이다. 지난해 엄귀인(嚴貴人:엄비)의 여동생에게 장가들어 외척이 되더니 그 인연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자리를 얻어 나갔다. 그러나 겨우 일년이 지나 어머니 상(喪)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상를 마친 뒤 아무 직업도 없이 있다가 드디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매우 좋은 일이 있소이다. 영감께서 황상께 아뢰어 꼭 성취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일이요,창업공신과도 맞먹는 일이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라는 것이었다. 심선택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것은 북간도 개척문제였다. 그래서 정환덕은 “순서대로 조용히 말씀해보시오”라고 말했다. “북간도는 원래는 조선 땅으로 사방이 4천리나 됩니다. 남이(南怡) 장군이 당시에 백두산의 북쪽인 중국 동부지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여기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보면 그 지역이텅비어 있고 관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곳에 공사관(公使館)이나 영사관(領事館)을 설치해 중국과 조선이 서로 무역을 하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 부국강병책이 스스로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는 이 사업을 각별히 힘써서 주선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간도의 지도 한장과 북간도에 관한 사실을 조사한 서류 한 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세종때 남이장군이 세웠다는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목격자도 많은데 일제가 폭파했다는 설이 있다. 그뒤 18세기초에 다시 청나라가 강요하여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에 새로 세우게 되어 백두산 천지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문제된 강이 토문강인데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두만강이 아니라 해란강이라고 주장했다. 심선택은 이같이 간도땅의 역사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에게 건의하여 간도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은 거창한데 재정이 어려워 섣불리 착수할 수가 없다. 아직은 보류하고 재정을 연구한 뒤 착수하기로 하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심선택에게 상감의 교시가 이와같다는 뜻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감의 교시가 비록 그와같다 해도 좋은 방도가 있으니 상감께서 우리일가 심상훈(沈相薰)을 불러 “북간도의 일을 심선택과 상의하여 보라고 처분을 내리시면 방도가 나올 것이니 다시 그렇게 아뢰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대궐에 들어가 다시 아뢰었더니 상감께서 심상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북간도 일은 심선택과 함께 상의해 처리하라”고 교시하시었다. 심상훈은 대한제국의 공신으로 고종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심선택이 심상훈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선택의 말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심상훈이 심선택에게 “상감께서 북간도 일을 어른(심선택)과 상의해보라는 교시를 내리셨는데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감께서 잘 여쭈시어 나를 북쪽 삼도(三島) 어사(御史)로 삼아 옛 식대로 마패(馬牌)를 가지고 현지 수령들을 출척(黜陟)하는 권한을 갖게 해주신다면 일년도 되기 전에 쉽사리 몇천만원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북간도에 들어가 시설을 하면 재정의 부족은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국고(國庫)의 돈으로써 경비를 낭비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농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는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나라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 문화와 의복을 지켰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한국농민들에게 머리를 깎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으면 토지소유권을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백의민족으로서 긍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심상훈과 심선택은 의견충돌이 일어나 각자 화를 내고 헤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심선택은 국가의 일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그 뒤 심상훈이나를 찾아와 “북간도의 일은 다시 여쭈지 말라”고 단단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심상훈이 황상께 입대해서 아뢰기를 “신(臣)이 저의 일가 심선택의 말을 들어보니 북쪽 삼도(三島)백성의 재산을 거두어서 북간도를 개척하자고 하기 때문에 ‘민간의 재정이 고갈돼 있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데 이러한 때를 당해 저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일이 성취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니 서로 관계하고 싶지않다’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황송한 마음은 모두 여쭈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심선택이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저 일가 사람 심상훈이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이와같이 반대하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처음부터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요,심상훈이 반대한 것이 아니니 차차 일의 형편을 보아가며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심선택은 물러가고 말았다. 독도는 우리땅이라 했듯간도도 우리땅이었다. 우리 농민들이 개척한 땅이어서 이름을 간도(墾島)라 불렀던 것인데 일제가 ‘사이 간’자로 바꿔 간도(間島)라 명명했고 1909년에 마침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땅을 중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 희생은 자발적이어야/崔一道 목사(서울광장)

    얼마전 치러진 보궐선거를 보면서 여러가지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교실의 반장도 손을 들어 선택하고 나라 최고 지도자도 투표를 해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쪽으로 판가름이 난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결정들이 대부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직접선거를 부르짖으며 감옥엘 갔고 피를 뿌려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방법과 구조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수결’은 사람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기계적인 숫자로 파악하게 만든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말은 불변하는 진리처럼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예수를 죽였던 제사장 가야바의 논리도 이런 것이었다. “한 사람이 많은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 무척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향해하는 말이었다. 인류역사상 강자들이 희생되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약자들만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약자들만 희생양 삼아 구제금융 시대를 맞이해서 우리는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이 고통은 우리가 뿌린 씨앗의 당연한 열매다. 정부와 기업은 부정직과 무능으로 서로를 지탱해 주면서 버텨왔다. 따라서 고통은 일차적으로 이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기업경영을 잘못한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정치를 잘못한 정치인들은 세비까지 올려받아 가면서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 이 땅에 불어닥친 경제한파의 결과물은 고스란히 서민들의 몫으로 내려오고 있다. 법을 만드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 사회의 강자이며,그 법을 집행하는 이들도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흐름 속에 있는 서민들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와 밥그릇 싸움을 해야하는 경쟁자가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어른들은 접어둔다 치더라도 앞으로 이 땅을 살게 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성실하게 땀흘리며 일을 해온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밀려나는 기막힌 사실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이제 더 이상 어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덕목들은 그들의 가슴을 움직일 수가 없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방향타를 잡은 사람들은 늘 거창한 구호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러나 그 속엔 구체적인 인간배려가 보이질 않는다. 인간다운 삶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진다면 이 사회는 모래위에 쌓은 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가진만큼 나누게 하자 어떤 공동체든 희생이 없이는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그 희생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견고함을 잃어갈 것이다. 병든 공동체는 약자들의 희생위에 세워진다. 한때 우리가 누렸던 풍요와 안정은 누구의 희생위에 세워져 있었던가. 우리 앞에 산적해 있는 과제의 해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내놓아야 한다. 위정자의 역할은 희생이 고르게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내놓게 하고,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내놓게 해야 한다. 이것이 위기의 전정한 극복이며 바로 세움의 기초다.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내놓고 나누기 시작한다면 오늘의 난국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기초부터 다시 세울 때다.
  • 희귀지팡이展 서울타워서 내일부터

    ◎위인을 부축하고 권위를 상징하고…/DJ 포함 역대 대통령 사용품/애국지사·유명인사 것도 함께/수호신·인물 조각된 지팡이도 애국지사와 전·현직 대통령,문화예술인,체육인 등 각계 저명인사의 지팡이 300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이색전시회가 24일부터 99년 3월말까지 서울 남산 서울타워내 지구촌민속박물관(773­9590·대표 박희문)에서 열린다. 정부수립 50주년 기념행사로 마련한 ‘애국지사,역대 대통령 지팡이전 및 세계 희귀 지팡이전’이 그것.이 전시회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김구 손병희 선생,이시영 초대 부통령, 이범석 장군 등이 즐겨 사용한 지팡이가 출품된다. 또 전 조계종 종정 성철 큰스님,김병로 전 대법원장,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김상협 전 고대총장,일엽스님,노기남 대주교,문익환 목사,강원룡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이광정 원불교 종법사,체육인 손기정옹,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김기창 화백 등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도 나와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아프리카 도곤족과 세포누족 등 지구촌 여러 부족의 추장들이 사용하던 지팡이도 함께 전시된다. 이들 지팡이는 용도 재질 모양 등이 다양하다.목제와 금속제가 가장 많고 상아나 뱀가죽으로 만든 것도 있다.호랑이나 개,코끼리 등 동물을 조각한 지팡이도 있고 각 민족의 독특한 수호신이나 인물이 조각된 것도 있다. 지팡이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가진 사람의 권위와 권능을 상징한다.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권위,신통력,지혜,효도와 봉사의 의미를 나타낸다. 대나무로 만든 ‘죽장(竹杖)’은 수명이 길고 늘푸른 대나무와 같이 장수를 상징하고 선비의 곧은 절개와 부모에 대한 효성을 나타낸다.또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는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종교별로도 지팡이의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유교에는 비둘기 장식을 새긴 ‘구장(鳩杖)’이라는 지팡이가 있다.이는 모이를 쫄 때 목이 메이지 않는 비둘기처럼 노인이 음식을 먹을 때 잘 삼키라는 뜻에서 였다고 한다. 불교에는 ‘석장(錫杖)’이 있다.비구 18지물 가운데 하나로 긴 막대기끝에 걸려있는 쇠고리 갯수에 따라 4환장,6환장,12환장으로부른다.좌선이나 설법을 할 때는 ‘주장자(柱杖子)’를 사용했다. 이밖에 대나무와 오동나무로 된 상주(喪主)의 지팡이,시각장애인용 지팡이,스포츠용 지팡이,의장 및 지휘용 지팡이,마술용 지팡이 등이 출품된다.
  • 권총 차고 예배드리는 목사님?

    ◎美 켄터키주 ‘은닉 휴대’ 조건부 허용/“자위권 행사” 주장속 비판도 많아 【렉싱턴(미국 켄터키주)AP 연합】 켄터키의 목사들과 교회 간부들이 권총을 휴대하고 예배당에 들어가는 것이 최근 합법화됐다.단 무기를 남의 눈에 띄지않게 휴대하는 허가를 공식 취득하는 조건하에서다. 켄터키주 의회가 최근 총기휴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예전에도 당국의 허가하에 남에게 보이지 않게 무기 휴대를 할 수있었지만 학교나 관공서,예배당 등과 같은 다수의 장소에 무기를 휴대한 채 들어가는 것은 금지됐다. 그러나 법정의 판사나 업무중의 의회의원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했고 서머싯 그리스도 교회의 윌리 램지 목사는 이같은 특권을 남녀 성직자들과 다른교회 간부들에게까지 확대해 주도록 캠페인을 벌여왔다. 물론 종교 지도자들이 새로운 변화에 모두 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적지 않은 목사들이 예배중 총기 휴대에 반대하는 입장이다.램지 목사는 여러 교회가 헌금으로 인해 강도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는 “문제는 그들이 돈을 빼앗기 위해 우리를 쏠 것이라는 점”이라며 권총 휴대는 “자위권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외대 관선이사 9명 선임

    교육부는 19일 재단비리 등으로 파행 운영되고 있는 한국외국어대의 정상화를 위해 이 대학 재단인 동원육영회 임시 이사로 邊衡尹 전 서울대 교수(71) 등 각계 인사 9명을 선임했다. 선임된 임시 이사는 邊 전 교수를 비롯, 盧東善 한국외대 명예교수, 李元卨 전 한남대 총장, 金永熙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이사장, 李珍雨 변호사, 朴英淑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장, 金槿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洪淳瑛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金英運 작은교회 목사 등이다. 신임 이사진은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이사장을 호선하게 된다.
  • 햇볕은 강풍을 흡수한다/朴宗和 목사(특별기고)

    지난 6월에 이어 이틀전 동해시 묵호동 해변가에서 잠수복차림에 기관권총과 수류탄 등을 휴대한 북한 무장간첩 주검 1구가 발견되어 또다시 난리법석이다.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상응한 강력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달 잠수정 사건 때문에 연기되어 왔던 鄭周永씨 증여 501마리 소의 북행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시점에 발생했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강경파 전략 경계를 첫째로 분단이후 지난 50여년동안 남북쌍방에서 ‘햇볕정책’을 정부당국의 공식 통일정책으로 채택하고 선언한 경우는 현 국민의 정부가 유일무이하다. 그동안 남·북 모두 ‘강풍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이번 두차례에 걸친 잠수정 관련사건도 변함없는 강풍정책의 표현이다. 이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번 일련의 사건도 남북간의 냉전적 적대관계 상태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강경파의 정치권력적 생존전략임에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전략에 힘을 실어줌으로 남북관계를 냉각상태로 몰아가는 우매한 대응은 절대 금물이다. 둘째로는 햇볕론의 엄청난 ‘힘’을 이번 기회에 역으로 넣어줄 필요가 있다. 북쪽은 남한에 중요한 국운을 건 선거의 투표일이 임박하면 늘상 무장공비를 보내고 잠수정 침투를 시도해왔다. 필요한 시기를 노린 이러한 강풍정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아왔다. 남한의 정치문화·선거문화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잠수정 몇척이 침투공비 몇명이 좌우한 셈이다. 이런 현상을 그동안 수구적 집권세력은 얼마나 즐겨왔고 악용해 왔는가? ○강한 햇볕 쬐어줘야 새로 들어선 국민의 정부는 북쪽의 이러한 맛을 톡톡히 들여온 강풍정책이 전혀 씨알도 먹히지않게 하겠다는 분명한 선언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햇볕정책의 큰 힘이다. 솔직히 말해서 햇볕정책은 강풍정책을 비웃을 정도로 힘이 있어야 한다. 정책집행자만의 힘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걸머지고 주체적으로 나설 국민 모두의 정책으로 나서면 힘이 생긴다. 남북통일 전날까지 잠수정 사건 비슷한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통일전 독일의 경우도 그랬다. 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어 교류협력의 햇볕정책이 공식 출범하고서도 통일 전날까지 동독측의 강풍정책은 현란하게 지속돼왔다. 그러나 서독은 햇볕정책의 기저를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허약해서도 아니고 무지해서도 아니다. 햇볕의 원대한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고 여야를 초월하여 국민간에 합의된 민주적 의견수렴이 굳센 때문이다. 결과는 햇볕이 강풍을 흡수하고 말았다. ○힘 있어야 햇볕제공 셋째로 햇볕은 힘있는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정책이다. 상대적으로 허약한 자는 심리적 불안 때문에 자기방어용 강풍정책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북쪽이 남한에 상호주의 미명하에 강풍정책을 요구한다고 이를 들어줄 남한도 아니며,남한이 상호주의 원칙하에 햇볕정책을 북쪽도 택하라고 요구한다해서 이들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있고 힘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햇볕정책이 담고 있는 교류협력의 틀은 지속적으로 강화시켜야 한다. 북쪽의 강풍지도층의 권력이 지니는 힘도 크지만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갈증으로 고통당하는 2,000만 북한 동포들의 힘은 더욱 크다. 강풍을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강력한 강풍대응을,그리고 강풍 때문에 희생당하는 2,000만 동포에게는 보다 따뜻하고 사랑이 깃든 햇볕제공을 간절히 기원한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2(정직한 역사 되찾기)

    ◎잘못된 법 적용/간첩누명 복역수 가족 비탄의 나날/새법 재정 재구금… 가정 풍비박산/정권안보차원 범죄 날조 처형/김 대통령 한때 사형선고 받아/고문조작으로 10여년째 구금도/심장병·신경질환 등 후유증 심각 비가 오는 가운데 초췌한 모습의 한 남자가 푸른 수의를 입고 탑골공원 정문 앞에 앉아 있다.그는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에게 연신 무죄를 호소한다.그러나 전기스위치가 올려지고,그의 코에 물주전자의 물이 거듭 부어진다.그는 눈동자가 풀어진 채 옆의 사내가 불러주는 대로 횡설수설 따라 읊는다. “북한의 우순학이 제 처입니다”“저는 30년간 북한의 공작원이었습니다”. 탑골공원을 무대로 지난 9일(목요일) 상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건장한 사내는 고문기술자 李根安이고 초췌한 남자는 16년째 간첩죄로 복역중인 咸珠明씨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갖는다.이날 집회의 주제는 ‘고문조작 간첩사건 피해자의 석방’.이 자리에는 군사정권 아래서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복역하고있는 14명의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 등 50여명이 참가해 새정부의 조속한 석방조치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법과 동일시되는 것이 정의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악법 논란’은 지난 50년간 끊일 날이 없었다.대부분이 아는 것과 틀리게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한 적이 없다.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전하고자 한 것은 ‘법에 대한 사전 합의와 동의의 중요성’이었다. 지난 61년의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유신시절의 비상국무회의,80년의 국가보위입법회의 등은 국회가 아닌 비정통적인 대의기구들이다.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에서 이런 기구가 쏟아낸 법률들이 사전동의나 합의의 절차를 충실히 거쳤다고 하기는 어렵다.또한 본인의 자백 외에는 증거가 없는,고문에 의한 조작 논란이 많았던 사건들도 정당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71년 통일사회당 위원장 金哲씨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북괴를 북한으로 불러야한다’는 발언을 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됐다.당시 혐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이조항은 국가보안법 7조에 그대로 편입됐다.그러나 남북한 동시가입은 수년후에 이뤄졌고,지금 북한을 공식적으로 북괴라고 호칭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돼왔다는 논란 속에 숱한 인권침해와 위헌시비를 일으켰다. 이종·최남규·김중종씨 등은 50∼60년대 남파돼 체포된 뒤 10여년간 복역을 마쳤으나,75년 사회안전법 제정으로 재구금됐다가 89년 이 법의 폐지로 다시 석방된 이들이다.출소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다가 새 법이 제정돼 느닷없이 다시 갇히는 사람들의 황당함은 어떤 것일까. 정권안보차원에서의 범죄의 날조·조작은 법 자체 문제보다 더 심각했다. 李承晩 정권은 야당당수였던 曺奉岩 진보당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고,金大中 대통령도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가지 받았었다. 고문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으로 수십년째 갇혀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함주명·이장형씨 처럼 고문기술자 李根安으로부터 취조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함씨는 남파된 뒤 즉시 자수했으나 30년후 재구금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16년째 복역중이다. 이씨는 무기형을 선고받고 14년째 구금돼 있는 상태다. 함씨의 누나 함주옥씨(73)는 “너무 억울하다.지금이라도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하루빨리 재심절차가 있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떨구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74년 일본 유학때 조총련계 인사를 접촉한 것이 빌미가 돼 23년간 복역하다가 올 3월 특사때 나온 유정식씨. 南奎先 민가협 총무는 “현재 유씨는 심장병과 신경질환 등 극심한 고문후유증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또 “함께 나온 재일동포 손유형씨도 후두암 당뇨병 등으로 고생하다가 현재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고 전했다. ◎張俊河·白基玩씨 악법철폐 앞장/학생들 민주화투쟁 전위대 역할… 3·4·9차개헌 견인/80년대 후반 민가협 등 수백개 민주단체서 주도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1974년 1월에 발표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는 이렇게 시작된다.朴正熙 대통령은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자 긴급조치를 발동했다.정권유지를 위한 강경책이었다.과거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헌법과 법을 고치고 그를 정권유지에 이용했다.그러나 온갖 탄압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법과 헌법에 대한 저항과 투쟁도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긴급조치가 발표되자 張俊河·白基玩씨 등은 ‘반유신 백만인서명운동’을 벌였다.그러나 서명운동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두 사람은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당시 판결은 구형과 판결이 일치하는 이른바 ‘정찰제 판결’로,이후 많은 공안사건의 판결 기준이 됐다.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그들은 민주화운동과 악법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일부 판·검사들의 ‘정의 투쟁’도 있었다.지난 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에서 이용춘·장원찬·김병리검사는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공안사건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지난 96년 유원석 판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박충렬·허인회씨에게 잇따라 무죄판결을 내려 공안사건에서도 ‘증거재판주의’원칙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는 지난해 2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법복을 벗어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러나 누구보다 앞장서서 법의 타락에 맞서 싸운 주체는 학생들이었다.그들은 왜곡된 헌법과 법을 바로 잡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난 60년 이루어진 3·4차 개헌과 87년 민주항쟁에 의해 얻어진 9차개헌도 사실 학생들이 이룬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들은 법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제도권에 몸담은 기성세대들이 하기 어려웠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전위대’ 역할도 담당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역할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 수백여개에 달하는 민주시민단체와 비영리전문단체들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인권운동사랑방 등이 대표적 단체.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운동과 악법철폐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며,매주 목요일 주제를 정해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민변 또한 지난10여년 동안 文益煥 목사 방북사건,姜基勳씨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의 진상조사 및 변론을 맡았고,국가보안법 개정·폐지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하루소식’지를 통해 법 집행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사례를 찾아내 공론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간첩 불고지혐의 무죄판결 받은 咸雲炅씨/“명예실추·정신적 피해 상상 초월 보안법 자의적 적용 빨리 고쳐야” “무죄판결은 받았지만 실추된 명예와 정신적·금전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습니까.”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咸雲炅씨(34).“재판중에는 모든 피고인이 무죄로 추정돼야 하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 당하는 피해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咸씨는 지난 95년 ‘남파간첩 김동식 사건’과 관련해 불고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지난 12일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그러나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겪은 정신적 고통과 이미지 실추로 인한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남북분단 상황에서 일단 간첩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생활에는 족쇄가 채워집니다.그 점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지요.” 지난 96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咸씨는 “선거를 불과 몇개월 앞두고 이 간첩사건에 관련돼 조사를 받았다.그리고 그것은 선거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말했다. 咸씨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면 일부 언론사와 국방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고 피해보상도 요구할 방침이다.언론사에는 재판중인 사건임에도 자신을 완전히 범죄자로 기정사실화해 보도한 책임을,국방부에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 등을 사병들의 정신교육 자료에 사용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수년전보다는 많이 완화돼 과거의 ‘막걸리 보안법’수준은 벗어났다는 점은 인정했다.그러나 여전히 독소조항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친척까지도 신고해야하는 불고지죄는 반인륜적이라고 비판했다.유교적 윤리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친척과 친구를 신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이적단체 찬양고무죄나 이적표현물 제작 및 소지죄 등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제의 조항이라고 했다.그는 “새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자의적 해석에 의해 보안법이 적용되고 있다”면서 수사기관에 시정을 촉구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메카로 가는길’은 아직 공사중?/孫靜淑 기자(객석에서)

    ◎쏟아지는 대사 쫓아가기 급급… 완성도 ‘미흡’ 예술가 소설이란 것이 있다. 예술가 내면풍경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거친대로 요약되겠다. 성좌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메카로 가는 길’의 원작도 그런 유형. ‘메카…’는 그래서 ‘예술가 연극’이라 부름직하다. 작품 뼈대인물인 헬렌이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속에 들끓고 있는 것은 예술적 욕망의 한 갈래다. 20여년째 남아프리카 외진 마을 카루에 사는 그는 남편이 죽고부턴 교회며 이웃을 다 끊은채 램프와 거울로 거실을 도배해놓고 조각품 만들기만을 업으로 칩거해 왔다. 예술적 욕망이란 자기에게 절실한 무언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골자일 것. 자기만의 문제기에 실생활엔 무익하기 쉽고,남들이 상서롭지 않게 여기기에 안으로 억압되었기 십상이다. 때문에 예술가 문학은 부지중 상식사회와 돌출인물의 충돌을 낳게 된다. 헬렌 역시 카루 일상인들에게 몰이해 받고 있다. 젊은 개혁주의자인 엘사 정도가 친구다. 아무리 ‘튀는’ 교구민도 신의 양으로 받아들여야하는 목사마리우스는 헬렌 스스로 양로원에 걸어들어가게 만들어 이 작은 불순 공간을 폐쇄하려고까지 한다. 혼자 동떨어진 헬렌의 속앓이가 일반인에게 무슨 관계인가. 왜 그 앓는 소리를 들으러 연극까지 봐야할까. 그건 예술가의 욕망이 실은 일상인의 은폐된 욕망을 반사할지 모르며 별일 없는듯 하지만 알고보면 가식투성이인 사회에 균열을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밀폐된 내면은 구경꾼들이 엿보고 교감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 있는 파장이 생긴다. 스스로를 감추는 예술적 욕망의 속성과 열린 대화로만 일궈지는 공감의 공간은 그래서 늘 ‘예술가 예술’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율배반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작품의 생기가 달라진다. 그럼 ‘메카…’는 생기띈 예술가 연극일까. 메시지는 무게있게 던져지고 있다. 헬렌 역의 전경자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배우들은 다들 문학전공의 선생 출신. 연기가 좀 어설퍼도 자기 대사의 의미는 뚜렷이 알고 있을 이들이다. 하지만 연극이란 대사를 공간화하는 작업. 헬렌이 기성사회를 대변하는 마리우스 목사에게 강하게 반발하며 엘사에게 집안 촛불을 모두 켜도록 시키는 대목을 보자. 촛불이 하나씩 켜짐에 따라 어둠속에 은폐됐던 헬렌의 분신같은 공간(거실)이 확 떠올라 관객이 오가는 대사로만 짐작하던 헬렌의 ‘메카’를 눈으로 확인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무대가 어스름한 조명아래 처음부터 낱낱이 드러나 있었기에 이런 효과는 원천봉쇄됐다. 두시간 반동안 물밀듯이 쏟아져나오는 ‘참을 수 없는 대사의 무거움’만 넘칠뿐 이것을 무대위에 축조하는 ‘연극성’이 빠져 있다. ‘메카…’는 아직 다 익은 연극이 아니다. 부화중인 작품을 대중들의 대학로에 내거는건 무리다. 8월2일까지 성좌소극장. 745­3966.
  • 교수들이 꾸민 ‘메카로 가는 길’

    대학로에 교수들이 모여들었다.방송통신대나 문예진흥원쪽으로가 아니다.뚜벅뚜벅 연극무대로 걸어 올라왔다.독립극장의 ‘메카로 가는 길’.여기서 교수들은 연출,번역은 물론,파격적으로 배우까지 꿰찼다.7월2일부터 8월2일까지 서울 성좌소극장. ‘메카로 가는 길’은 남아공 작가 아돌 후가드 원작.가톨릭대 영문과 교수를 휴직하고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과 한국어교육 겸임교수로 재직중인 전경자씨는 92년 이 작품 초연때도 무대에 섰다.하지만 성이 풀리질 않았다.자신을 매료한 깊이에 비겨볼때 빚갚음이 못되는 것만 같았다.그래서 여름방학을 통째 헐어 지인들을 모아 98년판을 짜게 됐다. ‘메카’란 자기만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말.남편이 죽자 속세와 울타리를 치고 그 안을 메카로 여기며 칩거한 헬렌.엘사는 그녀의 유일한 벗이지만 너무 젊고 발랄해 둘은 곧잘 어긋난다.나름대로 헬렌을 포용한다는 목사 마리우스도 끼어든다.헬렌을 놓고 둘이 벌이는 섬세하고도 격렬한 정신의 줄다리기가 부조되며 현대산업사회에서 자유의지,인간의 참모습을 묻는 작품. 번역과 헬렌역을 맡은 전씨는 제작비도 지원했다.엘사엔 공연예술아카데미 예수정 교수,마리우스엔 순천향대 영문과 이현우 교수가 나서며 연출은 상명대 연극학과 박철완 교수.화∼목 하오 7시30분,금∼일 하오 3시30분·7시30분.540­4629.
  • 재야원로 姜希南 목사 36년만에 주민증 발급

    ◎“박정권 인정못해” 찢은후 ‘국민의 정부’때맞춰 신청 “국민의 정부를 믿어요. 새 정부마저도 재야단체를 탄압한다면 또 주민등록증을 찢어야지요” 우리나라 대표적인 재야 운동가 姜希南 목사(77·본명 姜在禹·전주시 덕진구 인후동)가 36년만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姜 목사는 지난 92년 故 文益煥 목사와 함께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남측본부 의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을 주도해오다 4차례나 투옥됐었다.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朴正熙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어요.이 나라의 국민노릇 한다는 것이 창피하고 분해서 주민등록증을 아예 찢어 버렸어요” 全斗煥과 盧泰愚,金泳三 정부 역시 군사정권의 연장인만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며 이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지금까지 36년 동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 그런 그가 국민의 정부 탄생과 함께 지난 5월 말 주민등록증을 다시 만들었다. 주민등록번호 200113­154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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