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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대창으로 변한 14만㎢(흑룡강 7천리:25)

    ◎북대황 개간 40년 양국 연 850만t 생산/55년 전업관병 10만여명 집단 이주/문화혁명때 학생병단 수십만명 합류/황야 300만㏊를 옥토로 개간/국영농장 10여곳·공장 수십개 건설 관동이라고 하면 중국 사람들은 산해관 동쪽이라는 뜻으로 해석,동북땅을 상기한다.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중국 역사에서 관동은 함곡관 동쪽을 말한다.산해관은 명나라에이르러서 생긴 이름이고 그 전에는 유관이었으며 수당 초년에쌓은 것이다.더구나 유관의 위치로 보아 지리상에서 이동지구는 존재하지 않는다.청나라 초 산해관 밖으로 정배를 당한 문인들이 인명,지명,물명을 별칭하면서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그것을 받아서 청나라 말년에 러시아가 여순에 관동주를 설치하면서 많이 사용하게 됐다. 관동땅의 주인은 숙신,고구려,발해,거란,금 나라의 종족이었다.동북땅으로 한족들이 이민을 한 것은 요금 시기로 하북과 산서 두 성의 한족들이었다.그들의 이주노선은 희봉구,고북구를 통한 길로 이른바 주구자라고 한다. ○1947년 퇴역군인 첫 선 한족이 이곳에 나타나기 수천년 전에 원시 민족들은 동북땅에서 생활했다.특히 흑룡강 하류지역인 송화강,우수리강과 흑룡강이 합수하는 14만4천㎢의 거대한 면적 삼강평원을 중국에서는 북대황이라고 부른다.북쪽에 있는 거대한 평야,천고의 처녀지라는 뜻이다.이 곳으로 한족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이다.1947년 처음으로 퇴역군인들이 첫 보습을 박은 뒤를 이어 1955년에 10만 전업관병이 “지구에 도전하고 황야를 다스려 양식을 생산하자(향지구개전,향황원요량)”는 왕진 장군의 명령을 받들고 북대황으로 진군했다. 가목사에서 동강,동강에서 무원으로 가는 길옆에 세워진 마을 표지에 씌어진 이름들을 보면 지금도 군부대를 연상시킨다.한국전에 참가했던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의 일부도 한국에서 돌아오던 길에 북대황으로 향했다. 북대황으로의 두번째 대거 이주는 문화대혁명 시기였다.당시 상해,북경,천진 등 대도시의 수십만 중학교,고등학교,대학 졸업생들이 생산건설병단으로 조직되어 왔다. 군인들이 북대황에 진군하여 첫 보습을 박은뒤 꼭 40년이 되는오늘 이곳의 초가집은 벽돌집으로,진흙탕길은 아스팔트로 바뀌고 마을마다 양식창고가 숲처럼 들어섰으며 농기계가 즐비한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했다.3백만㏊의 황야를 옥토로 개간하여 100여개의 국영농장을 세웠고 수십개의 공장과 광산이 들어섰다.1996년까지 북대황에서 생산한 양식 총량은 7백20만t. 1997년 8백50만t 이었다. 북대황이 이름 그대로 북대창으로 변모한 것이다. 조선족이 북대황으로 이주한 역사는 150여년이 된다.무원현 조길향 파카이촌(무원현 길향팔개촌)의 지명 유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조길향에 사는 조진은(94)옹은 벌써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이 고장에서 150년 이상 대대로 살아왔다고 한다.그는 파카이촌이 증조부 때부터 있었다고 했다.박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세웠다는 것이다.조선말로 하면 박가촌인데 한족들이 박가의 음을 따서 발음한 것이 파카이라는 것이다. ○조선족 150년전 이주 그 후의 조선족 마을들로는 만주국 개척단으로 온 부락들이 있다.바로 동강시 근덕리(동강시근덕리)다.한족들의 지명에 리자가 붙는 법이없다.순수한 우리 민족의 지명인 것이 분명하다.하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근덕리마을은 원래 만주국때 개척단으로 이주해온 조선족들의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한족의 국영농장이다.이 농장에서 최후의 조선족으로 살다가 95년에 우의농장으로 이사를 갔다는 한태운(51)씨는 말했다. “나는 근덕리가 고향입니다.50여호 조선족들이 살았는데 68년도부터 떠나가 지금은 한 호도 없습니다.원예기술자였던 나는 월급도 꽤나 높았습니다만 그대로 고향에 눌러 있다가는 한족 며느리를 얻을 것 같아서 조선족이 많은 우의농장으로 이사를 갔습니다.우의현 우의농장 6분장 6대와 8대는 조선족 대대인데 6대가 300호,8대가 200호로 총 500여호나 됩니다.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있는데 물론 조선족 학교입니다.부근의 신광,선웅촌에서도 학생들이 모여와 기숙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도 “한국가서 돈 벌자” “농장원들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월급생활을 했습니다.대대에는 무기고가 있고 농한기에는 군사훈련도 하고 절반의 군인이었습니다.지금도 대장,회계는 월급을 받습니다.대장 월급이 1년에 한 만원 합니다” 국영농장에서 무기 등을 거두어가고 국유토지를 농장원들한테 나누어주었다.북대황에 있는 100여개의 국유농장이 20여만 개의 가정농장으로 되었는데 99.9%의 농장원들이 93.5%의 경작지를 도급맡았다고 한다. 한태운씨는 말한다. “우리 집은 아들 딸 모두 넷인데 논 5㏊가 있습니다.㏊당 9∼9.5톤이 생산되는데 모든 비용을 떼고서 ㏊당 순수입은 4천원입니다.벼 한 근에 국가 수매값이 68전이거든요.먹고 살기엔 좋은 고장입니다.내가 이사를 가서 한 3년 되는 사이에 해마다 10여호씩 시내로 가고 한국으로도 갔습니다.지금도돈 십만원씩 넣고 밀입국을 한다고 몇 년 번 돈을 탕진하고들 있습니다만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사람이란 만족을 알아야지 허욕을 부리면 결국 망합니다” 한국바람이 북대황에까지 불어서 우의농장의 조선족 마을에서도 처녀가 고갈됐다는 것이다.조선족 농장마을의 미래가 어찌될 건지 걱정됐다.
  • 앤드류 잭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4)

    ◎미 영토 확장 크게 기여한 전쟁영웅/개척농민 유복자로 변호사·의원·대법판사도/귀족정치서 대중정치시대 연 첫 서민대통령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미국의 7대 대통령(1829­1837) 앤드류 잭슨은 미합중국 정치문화에 ‘대중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이른바 ‘잭소니안시대’을 전개시킨 대통령으로 전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6명의 전직 대통령이 버지니아,매사추세츠 등 동부 출신의 대농장주 후손으로 좋은 정규교육을 받은 ‘신흥귀족’ 출신이었던데 반해,그는 가난한 개척농민의 유복자로 통나무집(log cabin)에서 태어났으며 정규학교라고는 문턱도 밟아본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첫 ‘서민대통령’으로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어 대통령에 오른 잭슨은 대통령직 자체를 ‘최고의 지위’라기 보다는 ‘일할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그는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시킨 대통령으로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강인함 또는 단단함의 상징인 히커리나무에 비유되어 ‘올드히커리’(Old Hickery)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올드 히커리’ 애칭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67년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노스 캐롤라이나의 시골에서 태어난 잭슨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의 병사로 홀어머니에 의해 양육됐다.성질이 급하고 거친 그는 싸움질을 일삼아 아들을 목사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할 정도 였다. 장로교 목사로부터 가까스로 글을 깨친 그는 14세때 독립군 민병대에 가담,소년병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잭슨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이듬해 영국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그러나 적개심에 불타던 그는 구두를 닦으라는 영국군 장교의 명령에 불복,그로부터 칼로 머리를 맞아 깊은 상처를 얻게 됐다.그는 평생동안 그 상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다녔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온 그는 솔리스베리의 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공부를 시작,20세때인 178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테네시주 내슈빌로 옮겨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96년에는 새로 주로 승격된 테네시주의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됐으며 이어 상원의원,테네시 대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호전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1812년 미합중국의 선전포고로 영국과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였다.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잭슨은 인디안과의 전투에서 연승,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중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서남부 전체 미군의 지휘권을 얻게 됐다. 잭슨은 플로리다 펜사콜라 전투에서 승리,플로리다를 장악했으며 15년 겨울,뉴올리언스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군과 미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사령관을 포함한 2천600명의 사망자를 낸 반면,미군은 단지 8명의 사망자만 냈을 뿐이었다. ○영군과 전투서 대승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방적 승리로 기록된 뉴올리언스의 승전은 영국민에게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그동안 군사력 열세에서 유럽 강대국들에 소극적 대응을 해오던 미국은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국제사회에 독립국가로서의 위력을 과시하게 됐던 것이다.지금도 뉴올리언스 시가지 한복판에는 포효하는 말에 탄 그의 동상이 높이 서있다. 이같은 그의 업적은 그를 자연스레 1824년 새로 태어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부상시켰다.잭슨은 1차투표에서 승리했으나 과반수에 미달했고,2차투표에서 정치적 흥정에 의해 존 퀸시 아담스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그러나 잭슨은 4년후 다시 도전,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됐다. ○첫 암살대상자 기록도 잭슨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하면 가까와질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율의 관세제도를 개혁,관세율을 낮추었으며 예산절감을 통해 연방예산의 잉여분을 주정부에 골고루 이월할 것을 제안했다.따라서 그는 연방정부가 공공복지사업이나 건설사업 등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반대했다.정부의 지나친 부채는 국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까지 주장했다.이같은 국민편에 선 통치는 그의 재선을 무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잭슨은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많은 시행착오도 일으켰다.친구들을 요직에 등용,‘주방내각’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특히 그는 이혼녀인 부인 레이첼을 따라다니는 악의적 소문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그 문제로 대통령이 되기전까지 많은 사람들과 결투를 벌이곤 했다.그는 또 1935년 실패로 돌아갔지만 암살기도가 발생,역대 미대통령 가운데 처음 암살대상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영토의 확장 ▲귀족정치에서 대중정치로의 전환 ▲연방정부의 부채청산으로 건전재정 확립 ▲부패한 연방은행의 규제제도 확립 등이 꼽히고 있다.대중정치의 확립은 라이딩스의 미대통령 랭킹에서 잭슨은 42명 가운데 비교적 높은 8위에 랭크되고 있다.그는 69세 대통령을 퇴임하여 자신의 농장인 내슈빌 교외의 허미티지에서 78세로 숨을 거둘때까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잭슨 유적지 ‘허미티지’/평생 가꿔온 사저… 테네시주 내슈빌 위치/55만평에 정원·교회·농장·후손들의 집도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유적지로 지정된 ‘허미티지(Hermitage)’는 잭슨이 평생을 가꿔온 사저로 컨트리뮤직으로 유명한 테네시주의 주도,내슈빌에 위치해 있다. 외딴집이라는 의미의 허미티지는 55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에 잭슨과 그 가족이 기거하던 맨션을 중심으로 부인 레이첼을 위해 만든 정원과 교회,후손들의 집 등 각종 부속건물과 농장으로 돼있다.비지터센터 뒤에 위치한 맨션에는 잭슨 생존 당시의 실내장식과 함께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18세기말∼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터는 잭슨이 내슈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1804년부터 조금씩 구입해 모은 것으로 오늘날의 형태가 갖춰진 것은 대통령 재임중인 1833년 무렵이며 37년 대통령 퇴임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허미티지는 워싱턴 교외에 위치한 조지 워싱턴 사저인 마운트버논과 함께 미국내 대통령문화 보존의 한 본보기로 유명하다.1889년 애미 잭슨에 의해 창립된 허미티지부인회에 의해 보존되고 운영되고 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이 부인회는 내년 2월 창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애미 잭슨은 자식이 없던 잭슨 대통령 양아들의 아들인 잭슨3세의 부인이다.그녀는 45년 잭슨 사망후,수십년 동안 역사적 장소가 일부는 팔려나가고 퇴락해가는데 안타까움을 느낀 끝에 허미티지부인회를 결성,유적지키기에 나섰던 것이다. 30년 앞서 결성된 마운트버논부인회와 함께 허미티지부인회는 남자들이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전쟁에 휩쓸려 있는 동안 부인들의 힘으로 문화유적을 지켜낸 훌륭한 본보기로 남아 있다.
  • 최봉구 남북신뢰협회장이 밝힌 북풍 공작

    ◎대선 전 난데없이 김병식 북 부주석 편지/안기부 두차례 조사… DJ와의 관계 추궁 북풍 조작의혹 사건이 확산 일로에 있는 가운데 최봉구 남북신뢰회복추진협의회장은 요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13대때 국민회의 전신인 평민당 소속 의원이었던 그도 하마터면 북풍조작의 희생물이 됐을 뻔 했기 때문이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말과 12월초.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캠프는 ‘북한으로부터의’ 편지공세로 비상이 걸렸다.그렇지 않아도 색깔시비를 염려하고 있던 터에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김장수 편지’ 등이 날아든 것이다.당시 국민회의측은 이를 ‘재미사업가 윤흥준 기자회견사건’과 함께 안기부의 ‘북풍 공작’으로 의심했다. 북한 김병식 부주석의 편지는 최전의원에게도 전달됐다.조총련 출신의 김부주석이 김후보와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대선승리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최씨는 대선직전인 지난 11월과 12월5일 두 차례나 안기부측의 조사를 받았다.이미 남북경협 및 교류협력사업차 몇 차례 방북한 바 있던최전의원은 김대중 후보와의 관계를 집중 추궁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 국민회의측도 이 정보를 입수,행여 최전의원이 북풍공작에 말려들지 않을까 바짝 긴장했다는 후문이다.친한 사이인 정균환 의원이 최전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유도성 질문을 한뒤 몰래 녹음까지 해뒀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전의원은 끝내 ‘진실’만을 얘기해 사건은 더이상 확대되지 않았다.그뒤 김병식 편지사본이 지난해 12월 13일 재미동포 김영훈 목사와 임춘원 전 의원 등에 의해 일본 데이고쿠호텔에서 공개됐다. 최근 국민회의측이 사본공개를 안기부의 ‘작품’으로 규정했다.
  • 허영의 역사/존 우드퍼드 지음(화제의 책)

    ◎에피소드로 다룬 인간의 허영심 인간의 허영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사랑하면서부터 시작된다.그 대표적인 예가 나르시스다.그리스 신화 가운데 가장 불행한 인물로 꼽히는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눈물겨운 사랑을 하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이러한 나르시시즘의 정체가 바로 허영심이다.이 책에서는 인간을 옥죄는 미망과도 같은 허영심의 역사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다룬다.인간의 허영심은 자기도취가 고개를 내미는 지점에서 싹튼다.그것은 문학작품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오스카 와일드가 그린 소년 도리언그레이나 제인 오스틴의 ‘설득’에 나오는 월터 엘리어트 경,앤소니 트롤로프의 소설에 등장하는 야심만만한 목사 슬럽 등은 연민의 감정까지 자아낸다.이 책에서는 또 인간의 언어에 관한 ‘계급의식적’인 허영을 중세 영국의 시인 초서를 인용해 살핀다.초서가 그린 여자 수도원장이나 에글라틴 부인은 교회에서 ‘품위 있는 콧소리로 노래를 부르고’,프랑스 말처럼 툭툭끊어서 발음해 스스로 높아진 신분을 과시한다.될수 있는 한 대화 중간에 프랑스어로 된 토막말을 많이 써 멋을 부리는 상류계급의 허영은 이처럼 그 역사가 자못 깊다.또 한 예로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은 편지를 모두 이런 식으로 치장한 것으로 유명하다.가령 누군가의 집을 묘사하면서 ‘un vrai bijou(진짜 보석)’라고 하는 식이었다.연못 위의 백조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물속에서 허우적 거려야 한다.이와 마찬가지로 허영에 찬 인간들은 자신의 멋부림을 만족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발버둥쳐야 했다.이 책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아름다움의 또 다른 정체,그것을 담아내 오늘의 교훈으로 삼는 데 초점을 맞춘다.여을환 옮김 세종서적 7천500원
  • 남북 농업협력 ‘청신호’/김용상 연구위원(남풍북풍)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지원받은 식량 일부를 군량미로 빼돌리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그러나 저들은 군량미 확보 여부와는 상관없이 작심만 하면 언제든 무력도발도 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그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따로 있다.굶주린 북한주민,특히 어린이들에게 나타날 후유증이 결국은 우리의 부담으로 돌아와 장차 엄청난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근자에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줘선 안된다는 강경론이 시들해진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그대신 “단순한 식량지원으로 그칠게 아니라 적극적인 남북간 농업협력을 통해 수확량을 늘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일각에선 이미 추진되고 있다. 20여년전 부터 ‘두레마을’이라는 농촌공동체운동을 펴 온 김진홍 목사는 최근 “연내에 북한의 나진­선봉지구에 3백15만평에 달하는 두레마을을 조성,콩 감자 옥수수 채소 등을 심고 돼지 등 가축도 길러 이를 가공 판매하는 남북한 합영 시범농장을 운영키로 했다”고 발표했다.이 합영농장엔 20명 이내의 남한 농업전문가들이 상주하며 영농기술 보급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이 계획에는 인공 씨감자를 개발한 한국과학기술원의 농업전문가들도 동참하고 있다. 얼마전 북한의 옥수수 재배실태를 살피고 돌아 온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도 북한의 기후와 지형에 알맞는 수퍼 옥수수를 빠른 시일내에 개발키 위해 오는 13일 국제옥수수재단을 창립한다. 김박사는 이 재단이 개량해 낼 북한형 수퍼 옥수수는 병충해에 강해 소출이 많고 당도가 높아 맛도 좋을 것이라고 장담한다.그동안 북한의 옥수수 수확량은 ㏊당 3.5∼4t이 고작이었는데 이 수퍼 옥수수는 7.5t 이상이라니까 그의 말대로라면 고질적인 북한의 식량난이 일거에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새 정부는 정경분리원칙에 따라 농업분야를 포함한 대북경제협력을 강화키로 했고 김성훈 농림부장관도 북한에서 농축산물을 생산, 국내로 반입하는 계약재배 등 남북한간 농업협력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농사용 비닐과 농약 비료 등의 지원방안도 검토중이라고 한다.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이른바 ‘주체농법’이 망가뜨린 북한의 농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10년도 넘게 걸릴 것이라 한다.그러나 급한대로 좋은 씨앗과 농약 비료 등을 지원해주고 2년여 정도 영농기술지도를 해준다면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다만 각 기관 기업 단체가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한건주의는 철저히 막아야 한다.그러기 위해선 정책과 집행을 조율하는 창구를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다.
  • 우드로 윌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3)

    ◎‘민족자결주의’ 제창 국제평화 기본틀 다져/독점기업·세제 등 개혁… 노동자보호 앞장/‘이상주의자’ 평가속 20년 노벨평화상 수상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민족자결주의로 한국민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28대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른바 ‘버지니아왕조’,즉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 8명중 마지막 대통령 이다. 프린스톤대 총장을 지낸 학자 출신의 이상주의자로 알려진 윌슨 대통령은 1차대전의 와중에서 미국익의 성실한 수호자역을 맡아 국제정치의 무게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대통령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명실공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는 온화한 외적 분위기와는 달리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의 생가가 있는 스톤튼은 애팔래치아산맥 동부의 빼어난 절경인 셰난도계곡 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윌슨의 도시로 유명하다.이 작은 도시에서는 도시 설립 250주년을 기념,지난해 9월부터 올 1월말까지 5개월 동안 생가에서 ‘스톤튼의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가졌다. ‘윌슨시대의 도시(1855­1912)’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회에는 윌슨이 이곳 장로교회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자라고 대통령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났던 때까지,사진과 각종 유품 등 당시의 생활상을 상세히 진열해 윌슨을 키워낸 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잘 살펴볼수 있게 했다. ○한국독립 운동에 침묵 이곳의 윌슨 사적지에는 그의 생가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새로 지은 박물관과 부친 조셉이 시무하던 교회,설립한 대학 등이 시가지 곳곳에 그대로서 있다.우드로 윌슨 재단에 의해 사적지 내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윌슨의 존스 합킨스대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낸 ‘의회 정부론’를 비롯,‘민주주의 국가론’‘분열과 통합론’‘조지 워싱턴’‘미국 민중사’ 등 그의 명저들을 비롯,1차대전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프린스톤 총장에 이어 뉴저지 주지사를 역임했던 윌슨 대통령은 총장 당시 리승만 대통령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써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그러나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수반으로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리승만의 거듭된 주장에 그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한국민에게는 섭섭한 감정을 남기고 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내 일기 시작한 혁신주의운동은 정당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윌슨에 의해서도 계승됐다.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사회적 침체와 함께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일소하여 미국을 진정한 민주사회로 개혁하자는 이 운동의 가장 큰 목표는 당시 모든 폐해의 근원이 되고 있던 국내의 독점기업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윌슨이 내세운 정강은 바로 이같은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기업의 독점을 와해시켜 시장원리에 따른 자유경쟁을 부활시키자는 이른바 ‘신자유(New freedom)’였다.‘신자유’는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재선을 꾀하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대중을 독점기업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개개인을 모든 형태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 개혁주의자들을 전면에 포진시켰다.대표적인 정책으로는 관세인하,연방소득세 신설 등 세제개혁과 연방지불준비법 등 은행제도의 개혁이 있었다.루즈벨트 시대의 셔먼법보다 훨씬 강화된 독접 규제법인 ‘클레이턴 트러스트 금지법’도 제정했다. ○전쟁중 경제활황 재선 윌슨 대통령이 이같이 국내문제에 심혈을 쏟고 있는 동안 191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인해 발발한 1차대전은 미국에 국제정치의 중심역할을 맡게하는 계기를 가져왔다.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급증하는 군수수요는 미국의 경제활황을 가져다 주었다.이같은 상황에서 16년 그의 재선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러나 독일군 잠수함의 집요한 미국 상선 공격은 1917년 4월 마침내 미군의 참전을 불러오게 했다.미해군과 육군의 참전은 전세를 급속히 반전시켰으며 이듬해 1월 윌슨은 1차대전 이후 국제평화의 기본틀이 된 유명한 ‘14개항 원칙’을 발표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전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공개외교 ▲평화시나 전쟁시 항해의 자유 ▲군비축소 ▲자유무역의 원칙 ▲식민지 요구에 대한 공정한 판결 ▲영토본전을 위한 국제연맹 창설 등으로 돼있다. 이 선언은 파리평화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에서는 국제연맹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이유조약을 도출해 냈다.그러나 집단안전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윌슨에게 뜻하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었다.공화당이 가맹국의 내전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표방했던 먼로주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을 밝혔다. 윌슨은 국민들에의 직접 설득을 통해 이를 돌파하려 애썼지만 국제연맹 가입안은 미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막상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가입을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이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여러차례 윌슨은 겪어야 했고 이때문에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는 평을듣고 있다.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는 1920년 노벨문화상수상으로 보상 받은 셈이 됐다. ◎룰라 브룩스 윌슨박물관 큐레이터/“도덕정치·개혁 실천한 지도자”/“이상주의 추진” 용기와 노력 본받을만/첫부인 앨런과 사별… 재임중 재혼 기록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스톤튼의 이야기들’전시회를 주관했던 우드로 윌슨 박물관의 엘렌 시아 큐레이터는 “5개월간의 전시기간중 많은 관람객들로 붐벼 윌슨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놀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윌슨 대통령의 성품에 대해 설명해달라. ▲윌슨을 흔히 미국의 마지막 지성인 대통령이라고 한다.그는 높은 도덕정치와 과감한 개혁을 동시에 행한 지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이때문에 그는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서 42명중 6위라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오늘날 생각하면 그의 생각들은 모두 옳은 것이었다.한 예로 그의 세계정부론은 선견지명이 있던 것이다.그러나 당시의 수준에서는 너무 앞선 것이어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이상을 실현하려는 그의 용기와 노력은 우리가 본받을만 하다.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가.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 였기 때문에신앙이 좋고 매우 검소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 남부의 여러곳을 다니며 성장했다.그러나 출생지인 스톤튼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성장후에도 틈틈이 찾아왔던 기록이 있다. ­.가족관계는 어떠했는가. ▲첫부인인 앨런과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대통령 취임 2년만에 그녀가 죽고 불과 9개월만에 에디트 갈트와 재혼,재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하는 측근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타일러,클리브랜드와 함께 대통령 재임중 결혼의 기록을 남겼다.
  • 특별사면 10일 이전 단행/정부,김 대통령 취임 경축

    ◎장기수 등 포함될듯 김대중 대통령은 새 정부 조각이 끝나는 대로 이달 10일 이전에 대통령취임을 경축하기 위한 특별사면과 복권을 단행할 방침이다. 박지원 청와대대변인은 1일 “김영삼 전 대통령도 취임후 조금 지나서 특사를 단행한 전례가 있다”면서 “조각이 이뤄지면 곧바로 검토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해 5∼7일 사이에 단행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박대변인은 그러나 아직 새정부의 법무부장관이 임명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사면·복권 대상자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관련,김대통령은 당선된 뒤 김수환 추기경,강원용 목사,송월주 조계종총무원장 등을 만난 자리에서 이들 교계지도자들의 ‘역대정권에서 정권유지,연장을 위해 희생된 모든 양심수들의 사면·복권’ 요구에 긍정적인 뜻을 밝힌 적이 있어 큰 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취임 경축 사면대상자에는 소설가 황석영씨,무기수인 박노해 시인,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강희남 목사,한국외대 박만희 전 교수,전 불교인권공동위원장 진관 스님,사노맹 백태웅씨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 평민당 의원 서경원씨와 권노갑,홍인길,황병태 전 의원과 정태수 전 한보총회장 이철수·신광식 전 제일은행장 등 한보사태 관련자들이 포함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 요절 복서의 마지막 승리/장기기증… 7명 새 생명(조약돌)

    ◎경기중 충격으로 뇌사 ○…뇌사상태에 빠진 아마추어 권투선수의 양훈석씨(24)가 27일 서울 중앙병원 장기기증센터에서 7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 양씨는 지난 2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서울시 아마복싱협회가 주최한 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가 상대선수가 휘두른 주먹에 머리를 맞고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사판정을 받았다. 가족회의 끝에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한 아버지 양성균씨(53·목사·북제주군 구자읍 행운리)는 “아들이 군 복무를 마치고 상경한 뒤 2년여동안 소식이 끊겨 권투를 하는지도 몰랐다”면서 “아들의 장기로 다른 환자들이 새 생명을 얻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4월25일 북 돕기 금식”/서울 등 세계 70개시서 행사

    전세계의 종교지도자와 사회단체 대표,정치인이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하루 굶기 행사를 펼친다.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송월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강원룡 목사등 종교계와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북한기아대책 하루굶기 국제캠페인위원회는 오는 4월 25일 하루를 굶고 북한돕기 성금을 모을 계획이다. 우리나라 20개 도시를 비롯해 전세계 70개 도시에서 일제히 행사를 펼친다.
  • 모두 243명… 전 총리 이상 7명/외국사절 누가 왔나

    ◎스필버그 감독 등 80명 자비 부담 참석 25일 개최되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는 16개국에서 총 243명의 외빈이 참석한다고 외무부가 24일 밝혔다. 외빈 가운데 전직총리급 이상은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대통령,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대통령,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다케시다 노보루(죽하등) 전일본총리,사마란치 IOC위원장,도이 다카코 일본 사민당당수,피에르 모로와 전프랑스 총리 등 7명이다.취임준비위측이 주요 외빈으로 분류한 인사는 이외에 미국의 제시 젝슨 목사 등 15명이다. 미국 정부는 토마스 맥라티 클린턴대통령특별보좌관을 단장으로,스티븐 보스워스 주한대사,토마스 하킨 상원의원,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대사 에드윈풀러 헤리티지재단회장 등 9명을 경축사절단으로 공식 파견했다.또 리처드 리오단 로스엔젤레스시장,조지 소로스 퀀덤펀드회장 등도 입국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 80명이 자비부담으로 참석한다. 일본에서는 나카소네 전 총리 등 총리급 인사 이외에도 고노 요헤이 전 외무장관,덴 히데오 참의원 등 대규모 의원단과 경제인사 등 70여명이 방한했다. 중국에서는 류수칭(유술경) 전 인민외교학회장,무 슈신 심양시장 등 6명,러시아에서는 사도브니크 모스크바대 총장,에브게니 바자노프 외교아카데미부원장 등 7명이 참석한다. 대만에서는 리 피시엔 한·대만 의원친선협회장 등 8명,독일 프랑스 영국필리핀 스위스 호주 캐나다 스페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5명 정도씩이 참석한다.
  • 소수민족 허저족(흑룡강 7천리:22)

    ◎중 정부 “희귀 종족 보호” 산아제한 없애/45년 300여명서 95년엔 4,275명으로/‘고향’ 동강시만 821명… 민속박물관도 여기는 삼강평원,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강이다.중국 역사는 동강을 이렇게 적고 있다.주나라 때는 동강이 숙진부,당나라 때는 하북도 흑수부,요나라에서는 동경도 오국부,명나라에 이르러 삼성부도관할구에 속했다는 것이다.1906년 이곳에 임강주가 서고 3년 후엔 임강부로 개칭,또 4년 후에는 임강현이 됐다.동강으로 이름이 고착되기는 그 다음해인 1914년이고 현에서 시로 승급한 때는 겨우 10년 전인 1987년이다. 오랜 옛적에는 성곽이었던 이 곳을 허저족들의 말로는 라하쑤쑤(나합소소),페허라는 뜻으로 불렀다. 1654년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을 일망타진한 곳이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합수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했다.하지만 아침 9시에 가목사를 떠나 270㎞ 겨울길을 달려서 동강에 도착한 때는 지난해 12월4일 하오 4시,벌써 겨울 짧은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가로등이 널따란 아스팔트 길을 밝히고 도로 양켠에 늘어선 고층 건물들에는 전기불이 밝혀졌다.옛날엔 페허였을지 몰라도 오늘의 동강시는 발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우리는 동강호텔로 곧장 갔다. 동강시 민족사무위원회의 우립군(35) 주임과 오채운(42) 부주임이 호텔에서 우리를 맞았다.가목사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이미 전화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점심에 도착할 줄 알고 식사를 같이 하려고 그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우·오 두 사람은 모두 허저족(혁철족)이었다.중국 사책에서는 허저족을‘허진(혁진)’ ‘허지쓰리(혁길사륵)’ ‘허지리(혁길륵)’ 등으로 표기했는데 그 뜻은 동방,하류라는 것이다. ○선조는 북해지방서 어렵 바로 흑룡강 하류에 사는 동방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허저족으로 사책에 처음 기재된 것은 ‘청성조실록’인데 “강희 2년 3월 임진(1663년 5월1일)에 4성 쿠리하(고리합) 등에 명하여 수달피를 바치도록 했는데 허저 등국은 영고탑에서 수납했다”고 씌어 있다.허저족으로 고정되기시작한 것은 민국 23년(1934년) 능순성이라는 사람이 ‘송화강 하류의 허저족’이라는 책을 펴낸 때부터다. “우리 선조들은 원래 북해지방 바이칼호 부근에서 어렵으로 살았답니다.어렵장 쟁탈 전쟁에서 쫓겨 흑룡강,송화강,우수리강 유역으로 옮겨온 연대는 똑똑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서북방에서 온 통구스(통고사)인임엔 틀림이 없답니다” 1976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허저족을 위한 일을 해온 오채운 여사의 말이었다. 현재 동강시 오기진의 만족들이 1990년 인구조사때 허저족으로 등기하고 허저족자치촌을 만든 사실이 이를 입증하기도 한다.‘효종실록’에 기재된 변급의 견문기에도 “흑룡강 하류에 또 어피달자가 있다.북경에 귀순했다”고 돼있다. 이튿날 동강시에 있는 허저족 민속박물관을 참관했다.흑룡강변 공원 옆에 세워진 박물관 건물은 영국인들의 세관이었다고 한다.청조 말년에 동강이 중국 북방의 중요한 무역항구로 되면서 1907년에 라하쑤쑤분관이 섰다.그러나 청조는 영국·미국·독일·러시아·일본·프랑스 등 11개 국가와체결한 불평등한 ‘신축조약’에 따라 해 관세 등을 배상금으로 외국인한테 주었다.1910년 영국인들은 바로 중국식과 서양식이 반반씩 섞인 벽돌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항일전투서 40명 희생 인적이 끊긴 박물관은 썰렁했다.모두 네 개의 칸으로 된 박물관은 허저족들의 복장(짐승가죽과 물고기 가죽으로 만들었다),생산공구(활,작살,그물 등)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에서 제일 인구가 적은 민족이랍니다.18세기 초 강희 말년에 1만2천여명(2천398호)이었는데 1856년에는 5천16명,1911년에는 3천400여명이었습니다.그런데 20년 후인 1930년에는 겨우 1천200명뿐이었고 광복이 되던 해에는 300명밖에 안 남았었지요.우리 민족은 멸망의 변두리에 이른 것이랍니다” 오채운 여사가 말했다. “동강,부금지구에서 우리 민족이 항일에 나선 용사들은 50여명입니다.칠성강 전투에서 40여명이 희생되고 나머지 분들은 러시아로 해서 신강으로 이전해서 항일을 계속했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허저족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향수,인구가 급성장했는데 1995년 당시 4천275명이 되었다.한족은 무조건 아이 하나,만족을 제외한 모든 소수민족은 아이 둘까지 허용되어 있지만 허저족은 둘 이상도 허용된다. “정부에서는 허저족에 대한 특별한 우대정책을 주고 있습니다.동강시구역 내에 사는 허저족은 821명입니다.일년에 한 번씩 운동대회를 할 때면 국가에서 자금을 대지요.올해 여름 운동대회때 시 민족사무위원회,시 정부,향 정부에서 각각 10만원씩 30만원을 대주었습니다” ○조선족은 ‘대우’ 못받아 12만 인구를 가진 동강시 관할구역 내에 사는 조선족은 922명,허저족보다도 많지만 소수민족 대우를 그들처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동강진병원 원장 박광일(44)씨는 말한다. “동강은 허저족의 고향입니다.우리 조선족들이 연변자치주의 수도 연길을 수도처럼 생각하듯이 허저족들도 동강시의 동강진을 수도처럼 여긴답니다.민속박물관도 여기에 있습니다.용정에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섰다더군요.허저족 민속박물관을 볼 때마다 용정에 가서 우리 민족의 박물관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민족을 모르고 산답니다” 흑룡강성 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45만,그런데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아직 없는 실정이다.내년에 가목사시에 박물관이 서는데 두칸을 내서 허저족과 조선족의 민속을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 목사가 주부 성폭행/알몸사진 찍어 협박

    서울 강서경찰서는 반석교회 김장석 목사(36·서울 금천구 독산동)를 공갈미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지난 5일 낮 12시쯤 서울 강서운전면허시험장에서 우연히 만난 신모씨(32·주부·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게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며 접근,수면제를 탄 커피를 마시게 한 뒤 여관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뒤 신씨의 나체사진을 찍어 “1천만원을 가져오지 않으면 남편에게 알리겠다”며 수차례 협박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 반석교회에서 신도 20∼30명을 두고 목회활동을 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 미 교포경제인과 면담/‘3·1선언’ 출판회 참석/김 당선자

    ◎모국제품 구매운동 협조 약속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12일 국회에서 뉴욕한인 경제인협회 회장단을 접견,실사구시에 바탕을 둔 교민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7백만 교포와의 경제협력과 문화전수,2세교육을 위해 아낌없는 협조를 약속하면서 “긍지를 갖고 살아갈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김당선자는 이들이 2억달러 상당의 중소기업 제품을 구매하고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한다는 계획을 듣고 “중국의 강택민주석도 우리민족의 금모으기운동에 부럽다는 찬사를 보냈다”며 이들의 행동에 거듭 찬사를 보냈다. 김당선자는 “과거 정부가 교포문제를 대단히 등한시하고 활용하지 못한 것은 정부나 교포 모두에게 손해”라고 비판한뒤 “주재국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교민청 (신설)문제에 대해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전향적 입장을 피력했다.김당선자는 특히 “2세들이 한국문화와 언어를 습득하게 되면 살고있는 나라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소중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말로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문경완 회장은 “교민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불안감을 제거해 준 김당선자에게 감사한다”며 한인협회차원의 적극적인 협조를 거듭 약속했다. ◎76년 명동성당사건 당시 회고 이른바‘명동성당사건’으로 불렸던 지난 76년의 ‘3·1 민주구국선언’을 역사적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자리가 마련됐다.당시 참석자들의 증언을 모은 ‘새롭게 타오르는 3·1 민주구국선언’출판기념회 형식이었다.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가진 출판기념회에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종교계와 재야,정치권에서 관련인사 800여명이 참석했다. 3·1선언은 김당선자를 비롯,재야와 종교계 지도자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정권에 몸으로 항거한 집회였다.당시 참석한 인사는 모두 18명.김당선자와 고인이 된 윤보선 전 대통령·함석헌 선생·정일 형박사,안병무 교수,문익환 윤반웅 서남동 목사와 이문영 경기대석좌교수,이우정 전 의원,김승훈 함세웅 문정현 장덕필 신부,이태영 여사,이해동 문동환목사 등이다.김당선자와 문익환 목사가 초안을 작성하고 집회계획수립 등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대부분 집회현장에서 체포돼 실형을 선고 받았다. 김당선자는 인사말에서 “3·1선언은 지난해 대선승리의 시발점이 됐다”고 역사적 자리매김을 했다. 이어 “내가 이 세상에서 숨쉬고 있는 동안 3·1선언의 정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 출병의 현장 의란(흑룡강 7천리:21)

    ◎청­러전 참전 조선군 함성 들리는듯/효종,청 지원요청 따라 포수부대 262명 파견/1658년 ‘송화강 전투’서 러시아군 270명 섬멸 지난해 12월 2일 나는 하얼빈에서 가목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96년 여름 송화강 답사차 가목사로 갈 때는 장장 9시간을 밤기차를 탔고 1년 전 가목사에서 하얼빈으로 갈 때만 해도 택시로 근 10시간을 달려야 했던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국가 1급 도로가 완공돼 화장실까지 갖춰진 독일제 호화버스로 345㎞를 4시간만에 닿았다. 신나는 여행이었다.하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조선족역사 연구’(고영일 저)에서 인용했던 ‘이조실록’의 한 토막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면서 역사의 귀곡성이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효종 5년(1654년) 2월 이상진이 국왕에게 상소했다. “지금 나선(러시아를 가리킴)의 정형은 걱정거리로 되었나이다.만일 강변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또 어떤 군대로써 이를 방어하겠나이까. 신하의 소견은 문신중에서 덕재를 겸비한 자에게 북노병마사의 직책을 지우고 그 지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의염려의 덕택을 알도록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군정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보나이다” ○영고탑서 청군과 합류 효종은 찬동을 표시했다. 1643년 외흥안령 야크츠크의 보야코브가 흑룡강을 넘어 살륙을 시작하면서부터 침략이 빈번해지자 청 정부는 경차도위 명안달례를 파견,‘송화강전투’를 발동하게 하면서 조선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청군 주력이 모두 관내에 진출한 불리한 조건이라 청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지원군은 150명.그들의 행군노선을 보면 함북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오늘의 연변지역을 경과하여 8일만에 영고탑(오늘의 흑룡강성 영안시)에 도착,거기서 청군과 합류하여 목단강 뱃길로 닷새만에 회통강(송화강)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단강이 송화강과 합수하는 곳이면 바로 오늘의 흑룡강성 의란현의 소재지 의란이다.하얼빈에서 235㎞,가목사로 가는 길옆에 있는 현성인데 36만 인구중 조선족은 겨우 4천592명이 살고 있다.서쪽은 소흥안령,동과 북은 완달산,남쪽은 장광재령에 둘러싸인 분지다.만족의 조상이 거주했던곳이라 청실의 ‘조종발상중지’라고도 한다.의란을 만족어로는 ‘의란허라’라 부른다.의란은 셋,허라는 성이라는 뜻으로 의란의 원이름은 삼성이다.지금도 도시 안에는 ‘삼성전화공사’ ‘삼성관상대’ ‘삼성상점’ 등 간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삼성이란 갈,노,호씨인데 청나라 천명원년(1616년)에 태조 고황제의 초무를 받아 기적에 든 허저족 커이거러(갈의극륵),누예러(노업륵),허리(합리)씨족을 지칭한다.이들은 만주 팔기에 들어 누르하치,황태극,순치 등을 따라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전공을 세웠다.그 공으로 천명 5년에 의란땅을 세습지로 하사받았던 바 영고탑,훈춘과 나란히 길림삼변으로 유명했다. ○오국성유적 그대로 12월 3일 의란현성에 이르자 나는 당시 청군과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과 혈전을 벌였으리라 짐작되는 목단강과 송화강의 합수목으로 달려갔다.얼어붙은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봄이 오고 강이 녹으면 배들은 짐을 싣고 송화강을 거슬러 하얼빈으로 가기도 하고 또 물결을 따라 흑룡강으로 가기도 한다.그런데 애석하게도 송화강 물결을 따라 의란과 가목사로가는 항로에는 암초가 많아서 큰 배는 통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하지만작은 배는 무난히 오갈 수 있다고 했다. 조선 지원군이 적선에 불벼락을 안겼던 곳인 목단강과 송화강의 합수지점엔 오국성 유적이 남아 있다.의란진 북쪽 변두리에 ‘오국성옛터’라고 쓴 커다란 시멘트판이 서 있다.그 뒤로 세월의 흐름속에 겨우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흙으로 쌓은 성벽이 낙엽진 버드나무의 쓸쓸한 형상을 띠고 언 대지위에 누워 있었다.역사의 기록에 보면 오국성 성벽의 둘레는 2천210m,높이 4m,기관 8m,정관은 1.5m였다고 한다. 오국성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 역사상 ‘정강지란’이 이곳에서 있었기 때문이다.의란진에 있는 자운사의 용왕묘 옆에 세워진 시멘트 푯말에는 ‘휘흠이제유금지지’라고 적혀 있다.바로 여기서 송조 말기의 두 황제가 연금생활 끝에 1133년 한많은 생을 마쳤다. 자운사가 선 때가 1928년,바로 용왕묘 자리는 의란 부도통의 포병진지였다고 한다.1900년 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포격으로 이곳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17세기 중반 조선 지원군의 포화에 쫓겨갔던 러시아는 20세기 초입에 다시 포화로 진격해왔다.역사는 톱질과 같이 밀고 당기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 와중에 인간은 애향심에 울며 세상을 떠나갔다. ○아군 8명 전사 25명 부상 1658년 6월 조선정부는 신류를 대장으로 소관 2명,포수 200명,고수와 화정 60명의 군사들에게 군량 3개월분을 휴대시켜 두만강을 넘어 영고탑으로 진군시켰다.이들은 6월 5일에 출발,10일 흑룡강에 이르렀다.전투는 도착날인 6월 10일(양력 7월 11일) 흑룡강과 송화강의 합수지점(오늘의 흑룡강성 동강시)에서 벌어졌다.싸움은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쓰제바노브의 러시아군은 270명이 섬멸되고 47명이 겨우 도망했다.아군은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그들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거친 북만주에서 시신으로 쓰러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던 순간 나는 분명 애끓는 귀곡성을 들었다.
  • 부금 조선족의 깨어진 꿈(흑룡강 7천리:20)

    ◎한·중 합작 삼강평원 개발 중단으로 허탈/94년 양국 관심속 화려한 기공식/완공땐 1억1천여만평이 옥토로/한국서 투자 끊겨 중단… 폐허로 중한 합자인 흑룡강성 두흥농장(안중근 기념농장)을 찾아가는 나의 심정은 무거웠다. 지난 95년 7월 한국의 대륙종합개발주식회사 장덕진 회장과 함께 ‘중한농업협력의 상징’이던 두흥농장을 찾아갔던 한국 취재팀들의 마음이 한여름 열기처럼 부풀어 있었다면 2년후인 지난해 12월10일 농장답사를 떠나던 나의 마음은 한겨울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계절 탓만이 아니었다.가도 가도 끝없는 만주벌판,저 멀리 지평선에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불타던 두흥농장이 불과 3년 후인 오늘 꺼진 석양처럼 내마음에 어둠을 몰아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얼빈에서 가목사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승용차로 10시간 거리였고 가목사에서 부금까지는 승용차로 3시간 길이었다.하지만 지난해 하얼빈에서 부금까지 일급 도로공사가 완공돼 하얼빈∼가목사가 승용차로 4시간,가목사∼부금은 1시간30분으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상오 9시에가목사를 떠난 우리는 부금시 20㎞ 못미쳐서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부금시 서안향 선풍촌으로 갔다.큰 길에서 15리 떨어진 선풍촌은 벽돌집과 초가가 반반인 22가구의 아담한 동네였다. 촌장 최학봉(31)은 말했다. “우리 마을은 77년에 섰습니다.그보다 2년 전엔 두림향으로 이주해서 집을 짓고 논을 개간했는데 그곳 땅이 염질인데다 못의 물을 관개해야 했는데 수원도 부족해 2년을 살고 이곳으로 옮겨왔지요.몇해 전에 두흥농장이 서자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한·중서 5천여명 참석 성황 선풍촌의 이현준씨(42)는 자식이 둘 있는데 30리 떨어진 향소재지의 서안학교에 다닌다.66세인 노모는 셋집에 살고 있는데 그는 두집살림에 들어가는 돈보다 한식구가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안타깝고 모친한테 불효스럽다고 했다.지난 92년 4월17일 하얼빈에서 있은 중한합자 삼강평원농업개발유한회사 개업식에서 장덕진 선생은 임직원 50%를 조선족으로 하겠다며 조선족들이 적극 성원해 주고 많이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이 말이 신문에 실림으로써선풍촌 사람들은 손꼽아 두흥농장의 개업을 기다려 왔다.선풍촌의 1인당 연간수입은 2천500원.농촌치고는 꽤나 부유한 곳이지만 아이들 교육 때문에 부모들 마음이 쓰리다고 한다.6리 밖에 학교가 있지만 길이 없어서 논둑길로 오가는데 여름이면 진창길을 맨발로 오가야 하기 때문에 모기들의 성화에 다리가 퉁퉁 붓는다는 것이다.또 한족학교라서 조선글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는 것이다. “농장이 서면 조선족들이 많이 모일테고 한국농장이라 한국어학교도 세워줄 것이라 믿었지요.장덕진이라는 분은 부금시 한족 중학교에 10만달러를 증정했으니 동포를 위해 학교하나 못 꾸려 주겠는가 하는 생각들이었지요” 그로부터 2년 후인 94년 7월5일엔 중한합자 부금두흥농장 기공식이 있었다.부금시 중·소학교 학생과 시민 5천여명이 모인 그날 기공식장에는 흑룡강성 손괴문 부성장,중국국제상회 서대우 부회장,중국국제우호연락회 진화 부회장,그외 국가·성·가목사시와 부금시의 책임자들이 참가했고 한국측에서는 한국대륙종합개발주식회사 회장이자 중국 흑룡강성 정부의 경제고문인 흑룡강성 삼강평원농업개발유한회사 장덕진 이사장,한국대륙산업개발회사 이대영 회장,대우 이희원 대표이사,이동호 전 내무부장관,중국주재 한국대사관 조상훈 공사 등이 참가했다.그리고 중국 국무위원 진준생과 한국 이영덕 국무총리 등이 축전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오 2시에 기공식이 시작됐는데 중국 국가와 한국 국가가 울릴때 눈물이 나더라구요.시 당서기 한인이 기공식을 선포하자 수천개 고무풍선이 하늘로 날고 폭죽소리가 하늘땅을 진동했습니다” 장이사장과 손괴문 부성장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인 전기운 외교부장이 친필로 쓴 ‘두흥농장’이라는 이름의 간판을 제막했다.당시 중국정부에서는 이 합작을 대단히 중시,이붕 총리도 여러번 문의했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중국 정부와 흑룡강성 정부가 두흥농장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게 된 배경은 기존의 국영농장들의 기계화 수준이 낮고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외국과의 합작투자를 희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흥농장은 부금시에서 동남으로 약 35㎞ 떨어져 있다.두림진까지는 포장도로가 아니어도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두림진에서 두흥까지 가는 20여리 길은 험했다. 96년 11월 농장건설 완수를 선포하는 대회를 가지기로 했었는데 한국에서의 투자가 끊겨 중단됐다.원래의 계획대로 진척되었다면 눈으로는 끝을 잴 수 없는 넓디 넓은 옥토가 되었을 것이다.자그마치 1억1천4백만평,여의도의 130배나 되는 엄청난 크기다. ○‘개발사업 안내도’만 쓸쓸히 농장의 임시본부가 자리했었던 곳에 도착하자 ‘한중합자 삼강평원두흥농업종합개발사업 안내도’라고 쓴 거대한 현 황판이 쓸쓸히 서 있다.기공식을 가지면서 세웠다는 현 황판은 당시 합작자들의 뜨거웠던 머리를 그대로 시사해 주고 있었다. 거창한 사업이었다.그런데 그것은 지금 자금난 때문에 꿈으로 남았다.벽에 ‘1977년 8월1일’이라고 쓴 빨간 단층 벽돌집으로 다가갔다.문화대혁명 후기에 지은 집임을 알 수 있었다.집앞 널따란 마당에는 ‘대우’라는 빨간글자가 선명한 포클레인 7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농장 공정처가 자리했던 곳이라고안내자가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총성이 울렸던 흑룡강 땅에 의사의 이름으로 된 농장을 세운다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두흥농장­그것은 한마당의 꿈이었다.그리고 농장과 운명을 같이해 온 조해산씨와 같은 조선족들한테는 한마당 악몽이었다.
  • 자연/랠프 왈도 에머슨 지음(화제의 책)

    ◎19세기 미 사상가 에머슨 에세이 모음집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사상가 겸 시인 에머슨(1803∼1882)의 에세이 모음집.아내를 잃고 뒤이어 유니테리언파의 목사직을 사임한 후 비탄과 절망 속에서 쓴 초기 대표작 ‘자연’을 비롯,‘미국의 학자’‘초령’‘경험’ 등 4편이 실렸다.이 작품들엔 30대의 에머슨이 고향 콩코드의 자연을 사유의 동반자로 삼아 삶의 길을 모색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에머슨에 대한 여러 갈래의 비판적 반향은 그가 미국 지성사의 중심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윌리엄 제임스는 에머슨을 가장 미국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실용주의의 선구자로 보았다.또 페리 밀러는 에머슨의 초월주의를 ‘대각성 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청교주의 전통의 계승이라는 시각에서 살핌으로써 그를 이른바 ‘뉴잉글랜드 전통’의 적장자로 부각시켰다.한편 F.O.매티슨은 자신이 ‘미국의 르네상스’라고 부른 19세기 중엽 미국문학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에머슨을 꼽았다.에머슨에 대한 최근의 평가 역시 다양하다.해롤드 블룸 같은 비평가는 에머슨의 비유적 언어와 간결한 문체에 주목,그를 미국적 상상력의 한 전범으로 파악했다.스탠리 카벨 같은 철학자는 칸트에서 니체 그리고 하이데거에 이르는 반체계주의 철학의 계보에 에머슨을 놓음으로써 그의 철학적 사유의 역동성을 강조했다.에머슨은 또한 미국적 개인주의의 이론가로,사회개혁주의자로,다윈의 선구자로,혹은 생태주의적 사유의 주창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에머슨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초월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함과 절제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그의 독특한 에세이 형식도 음미할 수 있다.신문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5천원.
  • 5·18 피해보상 824명 추가신청

    ◎한화갑 의원·조비오 신부 포함/광주시,4월부터 보상금 지급 1월 한달동안 실시된 5.18 민중항쟁관련 피해보상 추가신청자가 모두 824명으로 집계됐다. 31일 광주시에 따르면 이날 하오 5.18 민중항쟁관련 피해보상 추가신청을 마감한 결과 상이자 480명,연행구금자 274명,행방불명자 51명,사망자 19명 등 824명이 신청을 했다. 이번 신청기간중에는 지난 92년과 93년 피해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 가운데 새정치국민회의 한화갑 의원과 강신석 목사,조비오 신부 등 32명도 피해보상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시는 다음달부터 경찰청의 협조를 받아 이들 신청인에 대한 현지확인과 심의절차를 거쳐 빠르면 4월부터 피해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 1원의 경제학/우홍제 논설위원실장(외언내언)

    우리 주변에서 한푼의 상징인 1원짜리나 5원짜리 동전이 눈에 띄지 않은지가 꽤 오래됐다.아니 10원짜리 동전도 보기 힘들게 된 세상이다. 엄연한 법화이면서도 이러한 소액주화가 외면과 괄시를 받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돈 값어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인플레의 제물이 된 것이다.그래서 한국은행도 올해부터 1원,5원짜리 두 주화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수요가 거의 없을뿐만 아니라 주화를 만들때 드는 각종소재가치가 액면가치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1원짜리 1개의 경우 주로 수입에 의존하는 알루미늄 소재의 값이 주화 액면가보다 24배이상 비싸다.24원을 들여 1원짜리를 만드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5원짜리는 30원가량의 재료비용이 든다.이는 단순히 소재가격만을 계산한 것이며 생산설비와 인건비 등을 합치면 2배 가까이로 늘어난다. 요즘 생활에서는 10원미만의 돈으론 아무런 매매행위도 할 수 없지만 60년대만 해도 1원짜리는 개구장이들이 왕사탕 하나를 입에 물수 있을 정도로 그런대로 괜찮은 값어치가 있었다.대중음식점의 메뉴에도 한 그릇 99원짜리가 숱하게 많았다.100원부터는 유흥음식세가 큰폭으로 부과됐기 때문에 세금감면을 위해 1원 싸게 팔았던 것이다. 한강인도교 공사 등 굵직한 정부 토목사업입찰에 최저가 낙찰을 노려 1원을 적어 넣었던 재벌기업가도 있었다.바꿔 표현하면 오늘은 아무도 되뇌이지 않는 1원에게도 영광과 위력을 누린 그 자신의 시대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얘기다.1원짜리 주화는 지난 62년 통화개혁때 지폐로 선을 보인뒤 그후 5원짜리와 함께 주화로 바뀌었다가 이제 두 주화가 모두 생산중단의 운명을 맞게 됐다.정부에서는 이미 국고금 단수계산법을 고쳐 10원미만 끝자릿수는 쓰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 원화는 공공거래에서 10대 1의 명목절하를 하게 된 셈이다.그렇지만 근검 절약·저축이 그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국제통화기금(IMF)시대를 맞아 1원의 정서 값어치는 길이 보전돼야 마땅하다.단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니까.
  • 킹 목사 추모장 총기 사고… 4명 사상

    【배턴 루지 AP UPI 연합】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 루지에서 흑인민권지도자 고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추모행진이 진행되던 중 괴한이 총기를 발사,1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했다. 이날 총격은 악대가 포함된 학생 등 수 백 명이 행진을 벌이던중 발생했으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25세의 남자 1명이 총상으로 숨졌다고 경찰이 밝혔다. 또 등에 총을 맞은 6세 여자 어린이는 중태에 빠졌으며 9세 여자 어린이는 다리와 손에,9세 남자 어린이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 등 모두 3명이 부상했다. 경찰 대변인은 범인이 흑인으로 보이며 사망자와 부상자도 모두 흑인이라면서 범행동기는 인종 또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믿어진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범인이 최소한 1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 추적에 나섰으며 시위군중간의 다툼이 총격으로 비화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 “정리해고 적용 섣불리 안할것”/김 당선자·종교지도자 대화록

    ◎김 당선자­“외국의 경영기법·기술 배울 기회”/종교인들­“양심수 있어선 안돼… 적절 조치를” 김대중 당선자는 14일 일산자택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교계 지도자 3인과 오찬을 함께하며 IMF경제위기 극복과 정리해고 등의 실업자 대책 등 시국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음은 김당선자와 3인과의 대화 내용. ▷정리해고 문제◁ 김당선자=빚을 갖고 부자행세를 했기 때문에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 강목사·송원장=대기업 총수들이 재산을 회사에 투자하고 경영이 부실할경우 퇴진키로 합의한 것은 당선자의 지도력 덕이다. 김당선자=어제 하루에 50년 동안 정리하지 못한 과제를 말끔하게 처리했다. 대기업 총수들은 시대적 요망을 받들어 자발적으로 수용한 것은 의미가 크다. 오늘 새벽 양 노총이 노사정위원회의 참여키로 결정했다. 강목사=앞으로 노사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달라. 김당선자=양 노총은 물론 많은 노동자들도 정리해고제 도입이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세분 지도자께서 노동자 설득에 협조해 달라. 강목사=대선후 노조간부 세미나에 참석해보니 1백만명의 실업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노조가 그대로 있을수 없다는 고민을 들었다. 가진자들과 봉급자들이 적은 액수라도 실직자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줘야 한다. 김당선자=국내기업인들은 정리해고를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도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기업은 (정리해고를)도입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돈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경영기법과 기술,시장도 함께 오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 밟아가야 한다. 강목사·송총무원장=어제 회동에서 이건희 삼성회장에게 한 말과 김우중 회장을 귀국시키지 않은 것은 국민을 안심시키는 좋은 예가 됐다. 김추기경=정리해고를 하면 많은 실업자가 생기는데 실업자의 마음을 달래야 노사정간 내용적인 합의가 이뤄진다. 실업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중요하다. 김당선자=이제 새정부는 과거 구습에서 떨치고 기업은 노동자와 사회를 위해 기업활동에 전념해야 한다. ▷양심수문제◁ 김추기경=(서경원 전 의원과 박노해 시인등을 거명하며)현정부에서 양심수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상 많다. 강목사·송원장=양심수는 민주주의에서 있을수 없는 일이다. 당선자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김당선자=세 분의 말씀 잘 알고있다. 국제적인 문제나 국내여론도 있지만 아직 취임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관계기관과 협의,검토해 적절한 조치를 취임 후 시간을 갖고 실시하겠다. ▷남북문제◁ 송원장=남북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김당선자=남북합의서 실천이 중요하다. 이것만 하면 통일을 빼고는 다 잘될 것이다. 나의 당선을 알리지않고 있는 북한에 대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해 놓고 북한의 동정을 지켜보고 있다. 북한은 자기 편리한 대로,믿고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이다. 송원장=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김당선자=나는 정경분리 원칙에서 적십자 등 민간단체를 통해 도와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적이 잇다. 명확한 결정은 더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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