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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예수는 있는가?/김진호 당대비평 주간·목사

    한 잡지사는 내게 이 영화가 예수를 세밀하게 묘사하기위해 치밀한 고증을 거쳤냐고 물어왔다. 물론 영화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았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에 의아해할 사람은 없다.모양이 닮았지만,양자는 서로 별개임을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한데 ‘교회에는 예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매우 심각한 문제제기로 들린다.예수와 교회는 서로 깊게 연루되었다,되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한참 시사회를 할 무렵 한 영화 잡지가 내게 글을 청탁하면서,최근의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관점에서 이 영화의 예수를 다루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그것은 ‘패션‘이 예수에 관한 ‘사실적’ 묘사를 위해 치밀한 고증을 거쳤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점검해 보라는 얘기겠다.물론 예상대로 영화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았다.예수에게 고문을 가하는 장면의 리얼리티 정도가(비록 직접적인 정보는 없더라도) 개연성을 지닐 뿐,그 외의 역사적인 고려는 최근의 연구 성과는커녕 고전적인 연구조차 참조하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감독인 멜 깁슨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지지하지 않는,가톨릭 신자라는 정보를 들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의 신학적 성과를 수용하여 교리적이고 체제적인 개혁을 결의한 가톨릭 교회회의였다.그리고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결부시켰다.요컨대 멜 깁슨의 영화가 현대 신학의 역사학적 논의를 충실히 반영하였는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그가 사실 고증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열렬하게 토로한다 할지라도,그것은 적어도 학문적인 개연성을 갖지 못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에게까지도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데 성공했다.특히 미국이나 한국처럼 원리주의적 기독교가 성행한 사회에서 그러하다.이것은 교회가 학문적 구성물인 ‘역사의 예수’를 수용하지 않는 태도와 맞물려 있다.실제로 ‘역사의 예수’와 ‘교회의 예수’는 많은 경우 대립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의 거대 규모의 한 개신교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 두 사람이 교수직과 성직자의 직위를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그 이유 중의 하나는 ‘역사의 예수’에 관한 연구 성과를 수용한 학문적 논의를 했다는 것이었다.신학 학술사적으로 이 분야 연구가 그리 일탈적인 것이 아님에도 대학교에서 이러한 학문적 견해가 파면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그것은 분명 사실이다.이것은 극단적인 사례지만,한국의 어떤 신학교에서도 ‘역사의 예수’ 연구는 학생들에게 거의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는 형편에 있다.그나마 최근 영미권에서 이 연구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덕에,몇몇 학술지나 비판적인 연구기관 등에서 최근의 논의가 종종 소개되고 있는 형편이다. 신학교가 이런 사정이니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요컨대 교회에는 ‘역사의 예수’가 없다.물론 그것이 신학 관련 매체가 아닌 곳에 고자질할 만큼 중요한 문제거리냐고 반문할 수 있다.하지만 ‘패션‘의 경우는 이런 양상이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내가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이 영화는 인종적·성적·계급적 편견을 담고 있다.사람들이 온갖 고문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예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고 고백할 때,그러한 감정 이입은,의도했든 아니든,영화 속에 함축된 여러 편견들과 함께 우리 내면에 끼어 들어온다. 마치 지난 총선에서 정치인들의 ‘자학적인’ 선거운동이 유권자에게 감정 이입되면서 그들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처럼,‘신의 자학’이라는 ‘교회의 예수’ 담론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지극히 감성적인 반응만을 자극하는 리얼리티만을 부각시키면서 다가올 때,신앙의 비판적인 성격은 실종되고 만다.더구나 ‘패션‘은 모든 인간사를 ‘선과 악’ 이분법으로 단순분할하고 있다.최근 미국과 한국에서 정치세력화하고 있는 원리주의적 기독교가 그렇듯이 말이다.이럴 때 ‘악’은,‘악’으로 규정된 존재들은 세상의 증오와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미국인에게 아프간과 이라크가 그랬던 것처럼. 김진호 당대비평 주간·목사˝
  • [씨줄날줄] 추기경의 감사/강석진 논설위원

    추기경에 관한 이야기를 몇달만에 다시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글 첫머리부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그래서인지 추기경 기사를 다시 쓰고 싶지 않았다.지난 2월3일자 같은 난에 ‘비판대에 선 추기경’이라는 글을 썼었는데 오늘 다시 추기경에 관한 글을 쓰려니 무척 조심스럽다. 우리나라에서는 추기경이라는 단어를 대명사로 써도 아직은 괜찮다.한 분만 계시기 때문에 이름을 안 붙여도 누군지 다 안다.그 분이 지난 28일 동국대 불교경영자최고위과정에서 초청 강연을 하면서 “저를 비판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제게 교훈을 주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추기경이 최근 한 언론인과 가톨릭 신부로부터 각각 비판을 받은 데 대한 소회를 처음 공개적으로 털어놓은 것이다.추기경은 “지도자는 자기와 다른 생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정치권은 모든 이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예수의 리더십을 보다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건전한 토론문화다.토론 문화가 시민사회를 떠받치는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책임있는 비판과 경청이 전제가 돼야 한다.작금 우리 사회는 남에 대한 비난은 즐겨 하되 자기에 대한 비판에는 귀를 닫으며,권리는 있되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풍토가 만연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자주 제기된다.특히 인터넷 공간을 뒤덮는 일방적인 비난이나 익명의 욕설 섞인 글들로 인해 토론 문화는 멍이 들고 있다. 혹자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혹자는 PC통신 시대에는 어느 정도 지켜지던 ‘네티켓’이 완전히 허물어졌다고 개탄한다.경실련 중앙위 의장인 서경석 목사도 얼마전 한 인터넷 언론에 띄운 글에서 민주화 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쥐었지만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 과잉’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과잉 현상은 인터넷 언어폭력과 포퓰리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어둠’ 속에서 내뱉는 무책임한 비난과 욕설은 시민사회라는 유리병을 내려치는 망치와 같다. 추기경에 대한 칭찬은 차마 외람되다.“하느님께 갔을 때 ‘너는 세상에서 들을 칭찬 다 들었어.내가 해줄 칭찬은 없어.’라는 말씀을 들을까 걱정했다.”는 말까지 한 추기경에게 무슨 칭찬을 더 보태겠는가.다만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되돌아가야 할 건전한 토론 문화의 전범을 보여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을 뿐이다. 강석진 논설위원 sckang@seoul.co.kr˝
  • 한국영화계 대부 유현목 감독

    “유현목은 영화다.”“아니다,유현목은 인간이다.” 오발탄(1960년),임꺽정(61년),김약국의 딸들(63년),카인의 후예(68년),나도 인간이 되련다(69년),사람의 아들(80년)….건국 이래 한국영화 최고작으로 인정받은 ‘오발탄’을 비롯,43편의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미학을 이끌어온 유현목(79) 영화감독.한국영화사의 산증인이자 영화계의 영원한 ‘대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삶은 흑백과 컬러필름으로 50년 동안 모질게도 온몸을 친친 감아왔다.까닭에 ‘유현목’하면 덜도 더도 없이 한편의 ‘영화’에 비유된다.평론가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으로 한국 영화사를 관통했던 용감한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장 콕토는 ‘영화란 영상으로 쓰는 문장’이라고 했다.유 감독은 더 나아가 ‘영상으로 사고한다.’고 했다.일흔아홉의 성상은 그렇게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으며 질그릇에 켜켜이 담아왔다.이같은 그의 ‘시네마인생’을 흐트러짐없이 끄집어낼 수 있을까. 서울 남대문 옆 명지빌딩 20층에 자리잡은 ‘태평관기영회(太平館耆英會)’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태평관기영회는 학교법인 명지학원(이사장 유영규)이 지난 2002년 12월 마련한 최고 원로들의 사랑방이다.명지빌딩 자리에 있던 조선시대 외교공관 ‘태평관’과 중국 송나라 때 은퇴한 현사들의 모임이었던 ‘낙양 기영회’에서 이름을 땄다.참여멤버는 유 감독을 비롯,고병익 전 서울대총장,이영덕 전 국무총리,정원식 전 국무총리,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등 내로라 하는 원로 32명이다.유 감독은 “매월 첫째주 수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이곳에 온다.같이 늙어가는 각계 원로들과 만나 서로의 경험담을 주고받는 일 또한 공부가 아니냐.”고 했다. 근황이 궁금해졌다.그는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에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다.야트막한 동산을 뒤로 한 노독일처(老獨一處)인 셈이다.뒷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30평의 주말농장에서 땅을 일구는 일에도 새록새록 재미를 느낀다.시금치,쑥갓,마늘 등 28가지의 채소를 가꾸며 동네사람들에게도 나눠준다. 나들이할 때는 늘 부인 박근자 여사와 동행한다.부인은 서양화가로 현재 여류화가협회 고문이기도 하다.부인은 지금까지 ‘여보’ 대신 ‘감독님’이라고 부른다.그는 부인 얘기가 나오자 ‘무던한 순둥이’라며 웃는다. 그는 지독한 골초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루도 술을 거른 적이 없다.저녁 식사후 TV 9시 뉴스를 보고나면 반드시 맥주 3∼4병은 마신다.부인이 술을 못하기 때문에 혼자 식탁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며 세월을 음미한다.영화 같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즐거움에 푹 빠지는 시간이다. 그의 예술가적 역마살은 소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됐다.어느날 지방순회 공연차 온 유랑 신파극에 매료됐다.교회에서 성극대본도 쓰고 연출도 직접 했다.방학때면 동네 창고에 천막을 치고 성냥갑 몇개로 입장시키는 놀이도 했다.그렇게 모인 성냥갑으로 엿을 바꿔먹기도 했다. 1939년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의 휘문중학에 입학했다.하숙생활이 시작됐다.중학때는 기계조립에 취미가 붙었다.남산의 과학관을 다니며 ‘어린이 과학’이니 ‘학생과학’이니 하는 잡지에 탐닉했다.하루는 ‘에디슨 위인전’을 읽었다.발명왕 에디슨의 학력이 겨우 소학교 4학년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중학2년 때 휴학을 했다.담임 선생한테는 중이염이라고 둘러댔다. 때마침 담임선생 아들이 만성 중이염에 따른 뇌손상으로 사망했던 터여서 휴학계를 선뜻 받아주었다.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독의 가을을 만나면서 도화지와 수채화 도구를 둘러멨다.이리저리 쏘다녔다.흙을 반죽해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다.하루는 바이올린 곡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폐장을 쥐어짜는 듯한 슬픔의 아름다움에 도취했다.어머니한테 졸라서 ‘스즈키 7호’ 바이올린을 샀다.그걸 끼고 다시 복학의 길을 떠났다. 이 무렵 학교에서 단체로 ‘조택원 무용발표회’를 관람했다.그는 처음 대하는 육체의 선율에 반해 무용가가 되기로 다짐하고 무용연구소를 맴돌았다.그러나 피골이 상접한 모습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 겨울이었다.조선인징병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되는 바람에 졸업장을 쥐고 고향에 내려가 세무서 임시고용원으로 취직했다.그러나 숫자놀음이 격에 맞지 않아 곧 그만두고 평양을 드나들면서 헌책방에서 건축잡지를 탐독하기 시작했다.건축미술가의 꿈을 꾸었다. “하마터면 목사가 될 뻔도 했지.어머니의 성화로 인해 서울의 감리교 신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영어시험에서 낙방했어.그런데 외가집 소개로 아펜젤러 박사를 만나 연희전문학교 백남준 교장에게 입학시켜달라는 메모까지 받게 됐지.목사가 다 된 기분이었어.그런데 그만 메모쪽지를 잃어버렸지 뭐야.하나님께서 나를 목사자격 없는 놈으로 계시하신 줄 알고 포기했지.” 1946년 소련군이 진주하자 그는 다시 서울로 왔다.거리 곳곳에는 연극포스터들이 쫙 붙어있었다.그는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연극 연습장 한구석에서 하루종일 지켜보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다. 결국 그 이듬해,희곡공부를 위해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이 무렵 그는 프랑스의 피에르 슈날 감독의 영화 ‘죄와벌’을 관람했는데 너무 감동을 받아 열 네번이나 미친 듯이 봤다.강의가 끝나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죄없는 전선’ 촬영현장을 찾아다녔다.덕분에 여러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다.무성영화였던 임운학 감독의 ‘홍차기의 일생’에 조감독 겸 출연까지 했다.이때 영화감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미술,음악,무용,문학,건축,연극이 합쳐진 종합예술이라는 답을 얻었다. 1948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재학시절,한국대학에선 처음으로 ‘영화예술연구회’를 창설해 ‘해풍’이란 영화를 만들었다.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풍파에 아버지를 잃고 미치광이가 된 젊은 아들의 이야기이다.이는 배우로서 데뷔작이며 마지막인 셈이다. “납북된 시인 김기림 선생이 지도교수였지.당시 신문기사에는 영화과가 없는 대학에서 이같은 유성(토키)대작을 만든 것은 동양에서 처음이라고 하더군.양주동 선생은 ‘배짱 하나 컸군,내 막걸리 한 잔 사지.’라고 거들기도 했어.돌이켜 보면 선무당이 사람잡는 모험이었으나 오늘날의 길을 굳혀준 출발점이기도 하지.” 그는 50년 영화인생을 뒤돌아볼 때 가장 아끼는 작품은 ‘오발탄’이라고 했다.그도 그럴 것이 ‘오발탄’은 1984년 영화진흥공사의 ‘광복40년 베스트 10’에서 1위,98년 ‘건국50년 영화,영화인50선’에서 1위,99년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명작’에 1위로 뽑힐 정도였다. “다시 영화를 만든다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섬세하게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백발홍안’의 노(老)감독.예나 지금이나 술이 얼큰하면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베마리아’를 부른다.집앞 골목에 이르면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작곡한 ‘고향’을 부른다.그러면 기다리던 ‘무던한 순둥이’가 마중나와 팔짱을 낀다.이렇게 영화같은 그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가 걸어온 길 ▲1925년 황해도 사리원 출생.45년 휘문고졸.49년 동국대 문과졸.64년 동국대 강사. ▲73년 한국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장.76∼90년 동국대연극영화과 교수.80년 유네스코 문화위원. ▲81년 예술원회원(현).89년 한국영화학회장.90년 동국대예술대학장. ▲97년 부산국제영화제심사위원장,99년 춘사영화제 심사위원장.2000년 영화감독협회 고문(현). ▲주요 수상=서울시문화상,대한민국예술상,예술원상,대종상 등. ▲주요 작품=‘오발탄’‘인생차압’‘잃어버린 청춘’‘막차로 온 손님’‘카인의 후예’‘사람의 아들’‘불꽃’‘장마’ 등 43편. 김문기자 km@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상생의 문화/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

    요즈음 뇌졸중으로 인한 환자가 늘어간다고 한다.치료와 예방책은 의료계가 내놓겠지만 환자의 힘든 거동을 보는 눈은 안타깝고 아쉽기만 하다.중풍이란 한쪽의 정상기능 부재로 인한 비정상의 모습이다.인간의 몸이 체질과 구성 요건상 좌우가 공존하며 정상적으로 역할을 분담해야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그것은 신비의 영역이다.인간창조의 신비라 할 것이다.우리는 이 신비함을 통상적인 삶으로 누리며 산다.좌·우의 공생적 결합의 중요성을 평상시에는 모르다가 한쪽이 상처를 입거나 마비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한국의 사회를 보면 그것이 공생적 유기체임을 실감한다.한 가정의 구성요체는 선남선녀의 결합이다.남성우위가 절대적 가치인 양 기승을 부리던 오랜기간 여성의 위상과 역할은 일종의 잠재적 뇌졸중의 억울한 피해자의 그것으로 위축되었었다.양성평등은 비정상적인 가정의 틀을 정상화시키자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믿는다.불편부당한 기득권 속에 안주하려는 남성은 전통가치의 붕괴라며 반발할지 모르나,가정창조의 신비에서 보면 옳지 않은 주장이다. 물론 세계 여러 부족들 가운데 모계사회 전통을 이어받은 여성우위의 절대가치가 지배하는 곳도 있기는 하다.이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문제는 양성평등의 요체는 건강한 가정과 정당한 인간다움의 회복일 것이다.그 핵심에는 진정한 남녀간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고 또 자리해야 옳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사회는 우리의 뜻과는 달리 소위 냉전이라는 구조 속에서 좌·우의 극단적 대립과 갈등 ,그리고 상잔의 결투를 벌이며 살아왔다.민족분단의 비극이 원인이 되어,여전히 적대적 냉전대결은 그 정도가 과거와는 다르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잔재가 남아있다.21세기를 말하면서 이런 냉전적 사고의 찌꺼기를 계속해서 지고가야 할 것인가.일종의 중풍병적 자화상을 자랑스럽다는 듯 지켜가는 것이 우리사회의 건강함인가.결코 그렇지 않다.세계 어느 곳을 가도 오른팔·왼팔의 협력,기성세대와 신진세대,진보와 보수,남·여관계의 상생적 결합이 꽃피는 곳에는 자유롭고 민주적 질서가 견실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총선을 통하여 한국사회에 하나의 이변이 생겼다.기존 정당들 가운데 부침을 맛본 경우는 제외하더라도 한 ‘좌파재야’집단이 제도권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놀라운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의 때늦은 상생의 정치를 위한 첫 단추라고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예상컨대 좌편향의 정치구도가 만들어진 게 아니냐는 의구심보다는 오히려 중풍병적 비정상의 사회가 정상의 상황으로 변모해야 건강한 21세기를 살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의 출현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다만 진지하게 당부할 것이 있다.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좌향이든 우향이든 과격한 극단주의는 자리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스스로 개혁적이라 주장하는 진보는 건전한 보수를 끌어안고 협력할 수 있는 ‘합리적 진보’여야 옳다.스스로 안정추구세력이라 자처하는 보수는 개혁적 진보를 끌어안고 협력할 수 있는 ‘열린 보수’일 수 있어야 한다.합리성이 결여된 진보는 실제로는 허구이다.열림이 결여된 보수는 수구이다.허구와 수구의 지난날 대결은 이제는 벗자.합리적 진보와 열린 보수의 상생을 꽃피워 보자.그 중심에는 상생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사랑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게 아니다.사랑은 나눔에서 꽃이 핀다.구약성서의 시편 133편에 이런 축복의 말씀이 있다.“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땅에서 연합하면 하늘도 땅과 연합한다는 약속이다. 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부고]

    ●원불교 서대인 종사 열반 원불교 서대인(徐大仁) 종사(宗師)가 21일 오후 3시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내 원로수도원에서 노환으로 열반했다.세수 91세.법랍 72세.전남 영광 출신인 서 종사는 ‘남존여비 관행을 타파하고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을 세워 18세때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를 직접 친견한 뒤 출가했다. 이리보육원 서무부장을 거쳐 교육부장·감찰원장을 지냈으며,특히 교육부장으로 재직중 육영사업회를 만들어 ‘육영통신’을 창간하는 등 교단 인재양성에 앞장서왔다.빈소는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 대각전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3일 오후2시,장지는 전북 익산 왕궁면 원불교 영모묘원.(063)850-3344. ●崔相勳(ERA월드 대표)相敏(한국과학기술원 교수)相哲(기아자동차 이사)相奎(경희의료원 방사선과 직원)相模(고양시 세브란스가정의학과 원장)相順(연세대 교수)相玉(한양대병원 간호행정과장)씨 부친상 金漢根(한앤김건축사사무소장)蘇在俊(자영업)鄭昌湮(㈜아성 대표)씨 빙부상 22일 0시3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4일 오전 8시 (02)3010-2291 ●鄭完在(에이콘출판사 편집인)씨 별세 筍文(리어코리아 구매부 과장)壹文(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睿中(가람중 교사)씨 부친상 22일 오전 6시2분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발인 24일 오전 9시 (031)920-0302 ●金鐵源(킴스디지털정보 대표)씨 모친상 洪熙錫(크라운제과 전무)씨 빙모상 21일 오후 11시38분 경희의료원,발인 23일 오전 5시30분 (02)958-9545 ●李鍾雲(서울 장로교회 목사)金仁浩(자영업)許慶龍(주마부동산컨설팅 전무)씨 빙부상 22일 오전 5시3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4일 오전 10시 (02)3010-2260 ●金壽容(서울 김수용치과의원장)씨 모친상 22일 오전 5시4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4일 오전 6시 (02)3010-2240 ●柳錫馨(인천시교육청 장학사)씨 빙모상 22일 낮 12시 대전 중구 목동성당,발인 24일 오전 10시 016-9449-4472 ●李鍾仁(인도네시아 거주)許道(전 SK텔레콤 전산실장)呂珉基(AM텔레콤 대표)李常烈(시흥시약사회장)金仁培(헤럴드경제 편집부 기자)씨 빙모상 22일 오전 9시 인천 인하대병원,발인 24일 오전 6시 (032)890-3199 ●權在旭(자영업)在亨(㈜코바이 대표)在浣(한미은행 리스크관리부장)씨 부친상 李光在(대구시청 감사실 직원)具立會(자영업)씨 빙부상 22일 낮 12시 대구 경북대병원,발인 24일 오전 6시 (053)420-6145
  • 서울탱고-떠나가는 배

    “저 푸른 물결 외치는/거센 바다로 오 떠나가는 배/내 영원히 잊지 못할/임 실은 저 배야 야속해라/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가곡 ‘떠나가는 배’는 제주출신 시인 양중해의 글에 6·25 당시 제주에 피란왔던 풍운의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인 노래다.이 노래는 섬이 안고 있는 숙명을,전쟁의 아픔과 상처를,인간이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별리의 정서를 담은 곡으로 ‘한국적 리얼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노래가 지어질 당시인 50년대만 해도 제주와 육지를 잇는 교통수단은 뱃길뿐이었다.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황영호·유명호·남신호·이리호·제천호·평택호·광성호 등 목선 기선들이 부산이나 목포에서 제주를 오고 갔다.그래서 당시의 제주부두는 오는 이들을 맞는 환희와 해후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떠나는 이를 보내는 작별과 통한의 나눔터였다. 1957년 2월 서울~제주간 대한항공공사 소속 KNA기가 운항을 개시하고,이어 1962년 12월 제주~서울간에 DC13기종의 30석짜리 KAL기가 취항했어도 제주부두는 여전히 육지와의 연결고리였다.10시간 가까이 배멀미와의 싸움은 6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 출항을 알리는 남일해의 ‘잘있거라 항구야’는 어찌해서 손수건을 적시게 만드는지,닻을 올리는 순간부터 울리는 굵은 뱃고동 소리는 왜 그리도 가고 보내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대는지…,선창에 남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객선 화통의 검은 연기가 수평선 너머 사라질 즈음에야 붉은 눈으로 돌아서곤 했다. ‘떠나가는 배’ 역시 제주부두가 고향이다.어느 노래든 배경과 사연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 노래 역시 기구한 사연을 안고 태어났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77·전국문화원연합 제주도지회장) 시인은 “시든 소설이든 사람 사는 방식을 유언처럼 남기는 문학작품”이라며 “1953년 시인 박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처로 제주를 택했고,둘의 사랑은 끝내 이별로 마감하게 됐으며,제주부두에서 여자가 탄 배가 수평선 너머 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목월의 심사를 담은 것이 바로 ‘떠나가는 배’”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놨다.(서울신문 4월21일자 9면 보도) 양 시인의 말을 듣고 목월의 제주거주 당시를 추적한 끝에 목월이 1년동안 묵었다던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집 아들 이창주(64)씨를 만날 수 있었다.그때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는 이씨는 “여자는 대학생으로 성은 한씨이며 무척 예뻤고 말수가 적고 다소곳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둘의 동거는 6∼7개월 계속됐으며,그녀는 목월이 제주대학으로 출근할 때나 귀가할 때 언제나 웃는 낯으로 보내고 맞았다.그러던 어느날 목사인 여자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딸을 데리러 내려왔다.가지 않겠노라는 딸을 이틀 낮밤에 걸쳐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나갔다.배에 오른 여자는 어깨만 들썩거릴 뿐,한 번도 뒤 돌아보지 않았고,셋은 배가 수평선 너머 사라질 때까지 마냥 서 있다가 돌아왔단다. “아마도 여자 분은 연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겠지요.그때 저는 굉장히 울었어요.여관에 있는 동안 무척 정이 들었거든요.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선생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는 집으로 돌아온 즉시 ‘부두의 이별’을 시로 옮겨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했고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한다. 이제 제주항 여객선 가운데 목선은 없다.위풍 당당한 코지아일랜드·오하마나·레인보우·컨티넨탈·페가서스·온바다훼리·뉴씨월드 등 3000∼9000t급 페리와 초고속선들이 부산·목포·여수·인천·완도·녹동 등을 오가며 연간 100만명이 넘는 손님들을 실어나르고 있다.암스테르담·퍼시픽비너스·클리퍼오디세이·크라운·닛폰마루 등 외국의 초대형 크루즈유람선들도 수시로 찾아온다.대합실 하나 없이 초라하던 여객선 부두에는 면세점 등 갖출 것 다 갖춘 대형 터미널이 들어앉았고,양곡·유류·비료·시멘트·목재·철재·잡화 등 연간 600만t에 이르는 연안화물이 입·출하되고 있다. 목월이 여자를 떠나 보내던 자리는 전체 일곱개 부두 가운데 여객부두인 제2부두가 됐다.그러나 제주항은 부두길이가 2582m로 길어졌음에도 선석이 포화를 이뤄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제주지방해양수산청은 지난 2001년 시작한 1374억원 규모의 제주외항 1단계 공사에 이어 1203억원 규모의 2단계공사를 추진,8만t급 크루즈선 부두와 2만t급 부두안벽 축조공사를 벌일 계획이지만 예산문제가 따라주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부고]

    ●원불교 서대인 종사 열반 원불교 서대인(徐大仁) 종사(宗師)가 21일 오후 3시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내 원로수도원에서 노환으로 열반했다.세수 91세.법랍 72세.전남 영광 출신인 서 종사는 ‘남존여비 관행을 타파하고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을 세워 18세때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를 직접 친견한 뒤 출가했다. 이리보육원 서무부장을 거쳐 교육부장·감찰원장을 지냈으며,특히 교육부장으로 재직중 육영사업회를 만들어 ‘육영통신’을 창간하는 등 교단 인재양성에 앞장서왔다.빈소는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 대각전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3일 오후2시,장지는 전북 익산 왕궁면 원불교 영모묘원.(063)850-3344. ●崔相勳(ERA월드 대표)相敏(한국과학기술원 교수)相哲(기아자동차 이사)相奎(경희의료원 방사선과 직원)相模(고양시 세브란스가정의학과 원장)相順(연세대 교수)相玉(한양대병원 간호행정과장)씨 부친상 金漢根(한앤김건축사사무소장)蘇在俊(자영업)鄭昌湮(㈜아성 대표)씨 빙부상 22일 0시3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4일 오전 8시 (02)3010-2291 ●鄭完在(에이콘출판사 편집인)씨 별세 筍文(리어코리아 구매부 과장)壹文(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睿中(가람중 교사)씨 부친상 22일 오전 6시2분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발인 24일 오전 9시 (031)920-0302 ●金鐵源(킴스디지털정보 대표)씨 모친상 洪熙錫(크라운제과 전무)씨 빙모상 21일 오후 11시38분 경희의료원,발인 23일 오전 5시30분 (02)958-9545 ●李鍾雲(서울 장로교회 목사)金仁浩(자영업)許慶龍(주마부동산컨설팅 전무)씨 빙부상 22일 오전 5시3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4일 오전 10시 (02)3010-2260 ●金壽容(서울 김수용치과의원장)씨 모친상 22일 오전 5시4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4일 오전 6시 (02)3010-2240 ●柳錫馨(인천시교육청 장학사)씨 빙모상 22일 낮 12시 대전 중구 목동성당,발인 24일 오전 10시 016-9449-4472 ●李鍾仁(인도네시아 거주)許道(전 SK텔레콤 전산실장)呂珉基(AM텔레콤 대표)李常烈(시흥시약사회장)金仁培(헤럴드경제 편집부 기자)씨 빙모상 22일 오전 9시 인천 인하대병원,발인 24일 오전 6시 (032)890-3199 ●權在旭(자영업)在亨(㈜코바이 대표)在浣(한미은행 리스크관리부장)씨 부친상 李光在(대구시청 감사실 직원)具立會(자영업)씨 빙부상 22일 낮 12시 대구 경북대병원,발인 24일 오전 6시 (053)420-6145˝
  • [오늘의 눈] 文목사와 민노당/박록삼 정치부 기자

    민주노동당에 ‘문익환 목사’는 어떤 의미인가. 봄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던 지난 19일 민주노동당 대표단은 총선 후 첫 공식일정으로 70여명의 민족민주 열사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을 찾았다. 단숨에 10석을 얻은 민주노동당의 성공적인 국회 진출을 열사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전태일 열사를 포함,20여명의 묘역을 주욱 둘러보면서도 끝내 문 목사의 묘소 앞에서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민족통일의 다짐을 보고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사람대접받는 세상’을 상징하는 전태일 열사를 맨 먼저 찾은 것은 이해된다. 벅찬 감격에 노동열사들 위주로 참배하고 문 목사의 존재는 깜빡 잊었을 수도 있다. 당 정책에 통일 관련 내용은 잘 정리돼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쉬 가시지 않았다.간단한 실수로 보기에는,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민족민주·노동운동의 향후 과제 및 활동 방향을 생각하면 우려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문익환 목사는 평생을 노동자,농민,빈민,철거민 등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던 1989년 북한을 방문,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한반도 3단계 통일방안의 원칙을 합의한 뒤 제발로 감옥에 걸어 들어간 이였다. ‘감상적 통일론자’라는 일부의 비판도 있었지만,문 목사가 뿌린 씨앗은 2000년 남북 정상의 6·15공동선언으로 꽃피었다. 그래서 일반인도 모란공원에 가면 꼭 문 목사의 묘소를 찾는다.서거 10주기를 맞아 ‘문익환 평전’이 출간된 요즘 더욱 그렇다.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통일이나 한반도 평화 등 시급한 과제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일상적인 활동에서 나타날 때 비로소 사회 일부가 민주노동당에 던지는 ‘노동계급 편향성’과 같은 우려를 불식할 수 있을 것이다. 박록삼 정치부 기자 youngtan@˝
  • ‘떠나가는 배’ 주인공 박목월 시인이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내 영원히 잊지 못할/님 실을 저배야/야속해라/날 바닷가에 홀로 버리고/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가곡 ‘떠나가는 배’(작사 양중해 작곡 변훈)의 주인공은 1978년 타계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라는 것과, 50년대 중반 그와 한 여대생의 ‘제주 잠행’ 생활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증언이 나와 관심을 끈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77·시인·전국문화원연합 제주도지회장) 시인은 목월이 50년대 중반 잠시 제주에 머물 때 시와 술을 나눈 절친한 친구 사이.양 시인은 “1953년 휴전 무렵 유부남이던 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에 왔으나 끝내 이별하게 됐으며,제주부두에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을 시로 옮긴 게 바로 ‘떠나가는 배’”라고 말했다.양 시인은 지난해 7월 제주문화원에서 열린 한 문학강좌에서도 ‘떠나가는 배’에 대해 “목월의 아픈 이별을 담은 시”라고 거론한 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목월이 당시 머물렀던,지금은 사라진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 가족들에 따르면 목월은 한국전쟁 막바지에 제주에 왔으며,여대생(당시 홍익대 재학)과 함께 6∼7개월간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목월과 함께 온 여인의 성은 한씨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일마다 근처 서부교회에 나가 예배를 봤고,몸이 아플 때는 목월이 직접 부축하거나 업고 갔다.이 여인은 아주 깔끔해서 빨래가 잦은 편이었고,식사도 여관에서 내주는 음식 대신 직접 지어 목월에게 내왔다.또 아이들을 좋아해 과자와 과일을 자주 나눠줬고 튀김 등을 직접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여관에서도 시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여인은 늘 목월 곁에 앉아 경청하곤 했다. 여관집 아들 이창주(64·당시 중학교 2학년)씨는 “그 여자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으며,지금의 여느 탤런트보다도 예뻤고 몸도 호리호리했으나 자주 아파 병원 출입이 잦았다.”고 기억했다.또 “목월에게 ‘이름이 왜 목월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느날 밤 나무에 걸린 달이 너무 고와 ‘영종’이라는 이름 대신 ‘목월(木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목월과 여자가 이별할 무렵 여관에 있던 짐을 도둑맞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는데 이 여인은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사진첩만 찾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범인이 이미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린 후여서 몹시 상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짐 소동이 있고 얼마 후 목사인 이 여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왔고,가지 않겠다는 딸을 이틀 밤낮에 걸쳐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 나갔으며 여인과 목월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미뤄 우는 것 같기는 했는데,우리 쪽으로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더군요.아마도 정인(情人)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이씨는 “여관에 있는 동안 이런 정 저런 정 많이 들어 그때 무척 울었다.”며 당시 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 선생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 시인은 집으로 돌아온 즉시 ‘두 정인의 부두에서의 이별’을 시로 옮겼고,같은 학교 음악교사이던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해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했다. 그동안 기록(잡지 ‘시인세계’ 등)에 따르면 목월과 이 여대생은 시인과 문학소녀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결국 제주도로 잠행했다.그때 두 사람은 겨울 한복을 지어 제주로 찾아간 부인의 인품에 목월이 반성하고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사랑은 끝나며,목월에게 ‘이별의 노래’를 남겼다는 내용만 나와 있을 뿐이다.이번처럼 목월의 ‘제주 잠행’에 대해 당시 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낮은 소리] 점자도서관

    ‘낮은 소리’는 사회의 그늘진 곳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다수의 큰 목소리에 가려,외면되고 있는 소외층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입니다.방치할 경우 사회의 대형 갈등요인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을 미리 공론화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입니다.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제보를 기다립니다.서울신문 편집국 사회교육부(02)2000-9173,www.seoul.co.kr 또는 www.kdaily.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시각장애인들은 아무래도 활동성이 떨어지다 보니 집에서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일주일에 1∼2번 점자도서관에 가서 점자 및 음성도서를 빌려보는데 전문서적은 별로 없고 주로 소설 등 베스트셀러나 안마,지압 등과 관련된 책들이 많아요.”박종태(서울·60)씨는 국어교사 출신으로 시각장애인이다.은퇴한 이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독서가 유일한 소일거리다.그렇지만 그의 독서범위는 제한을 받는다.인문과학 서적 등을 구해서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전문서적은 가격이 비싸 구입하기가 무척 힘들다. 또 신간서적을 대하기도 ‘하늘에 별따기’다.신간서적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하다 못해 어떤 신간이 나왔는지 출판계 동향이라도 궁금하지만 신간안내를 받는 것도 쉽지 않다. 박씨는 “점자도서관 홈페이지에 신간안내 코너가 있긴 하지만,몇달씩 늦다.”고 아쉬워했다. ●묵은 정보 알려주는 수준에 불과 김민숙(서울·62)씨는 매달 점자잡지를 즐겨 읽는다.무료인 데다 여러 잡지에서 나온 내용을 발췌한 것이어서 읽을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러나 “점자잡지 내용이 2,3개월 전에 나온 기사를 점역한 탓에 시각장애인에게는 새로운 정보라기 보다는 묵은 정보를 알려주는 수준에 불과하다.”면서 “시각장애인은 정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까닭에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인쇄매체’보다는 TV나 라디오 등 ‘방송매체’를 통해 뉴스나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하지만 적지 않은 시각장애인들은 “방송매체는 한계가 있다.”면서 “책을 읽어야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며 ‘책 사랑’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관은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17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등원하는 등 사회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점자도서관의 역할과 기능이 ‘업그레이드’돼야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는 평가다. ●“있는 책도 버려야 할 판” 현재 전국에는 32개 점자도서관과 43개의 공공도서관내 장애인열람실이 있다. 국어사전 1권을 점자도서로 만들면 80권이 될 정도의 양으로 점자도서는 부피가 크다. 그만큼 대부분의 점자도서관은 ‘공간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지난 69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점자도서관인 한국점자도서관은 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구립 ‘햇볕도서관’을 위탁운영하고 있다. 280여평 규모의 공간에 2만여권의 책과 CD,카세트테이프 1만여개 등이 소장돼 있다.그것도 1990년 이전의 도서들은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대부분 폐기처분했지만 일부 점자도서들은 여전히 계단과 복도에 쌓여 있다. 장순이(70·여) 관장은 “35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독립 공간을 확보하기는커녕 공간 부족으로 ‘신간 점자도서를 제작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참한’ 얘기까지 나올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경기도 유일의 부천 점자도서관도 사정은 비슷하다. 6000여권의 도서를 도서관 서고에 비치하기가 어려워,마당에 임시 천막창고 2동을 지어 여기에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다.부천시 심곡 2동에 자리한 이 도서관은 균열이 가는 등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어서 재건축을 추진했지만,인근 주민들이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고 하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했다.어렵사리 국고 등으로부터 20억원을 지원받아 시유지인 중2동에 새 도서관을 신축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천 점자도서관을 운영하는 강학섭(43) 목사는 “다음달 착공하는 새 도서관도 결국 우리가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청소년도서관 등과 함께 활용하게 됐다.”면서 “도서관 완공 후 2년이 지나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공간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 손길 아쉬워 한국 점자도서관은 올해 예산이 7억원에 달하지만 국가 등으로부터의 지원은 불과 6000만원(문화관광부 3000만원,서울시 3000만원)에 불과하다.후원금이라고 해봐야 4000만∼5000만원선이다.이같은 규모의 지원으로는 각종 서적들을 점자도서·디지털 녹음도서로 제작하는 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책 한권을 점역하는 데는 인건비를 포함해,100만원가량 들어간다.이런 상황이어서 시각장애인들이 강력히 요구하는 ‘점자 전화번호부’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책자는 2년째 발간을 못하고 있다. 장 관장은 “예산 지원이 늦어지거나 후원이 적을 경우 직원들이 몇달씩 월급을 못받는 등 갈수록 점자도서관의 운영이 어렵다.”고 말했다. 부천 점자도서관도 예산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각 지자체의 민원업무 및 점자 시정홍보지 등을 점역하고 있지만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강 목사는 “김포·화성시 등의 시각장애인과 복지관 및 안마시술소 등 시각장애인 시설로부터 이동도서관 방문 요청을 받고 있지만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만 찾아 무료로 도서를 열람·대출해 주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점자도서관은 단순히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시각장애인들의 각종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각종 사업을 해야 한다.”면서 “독서토론회,역사기행 행사 등을 하고는 있지만,예산 부족 등으로 내실있게 운영하지 못해 정말 아쉽다.”고 털어놨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불법복제 ‘그리스도의 수난’ 교회 상영

    일선 교회에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불법복제돼 상영되는 사례가 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불법상영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한기총은 최근 미국영화협회 한국지사로부터 “불법으로 다운받은 동영상물을 교회 등에서 상영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는 요지의 ‘저작권 및 배급권 보호 협조 요청’을 받고 각 교단과 단체에 이 영화가 불법 상영되는 일이 없도록 주지시키고 예방하는 내용의 공문을 전달했다.한기총 총무 박천일 목사는 “불법 복제된 영상을 공적인 장소에서 상영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는 만큼 기독교인들이 위법을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양심을 거리끼면서까지 신앙적 감동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2일 개봉한 ‘그리스도의 수난’은 십자가의 죽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12시간을 표현한 작품으로 5월 말까지 상영될 예정이다.
  • [김영두의 그린에세이] 홀인원과 잔치

    홀인원이나 베스트 스코어는 동반자가 증거해 주지 않는 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골퍼가 홀인원을 한다거나,첫 번째 싱글 스코어를 기록한다거나,또 60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그런 경사를 맞은 골퍼는 같이 라운드를 한 동반자와 주위의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푼다.잔치는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이기도 하지만,홀인원 등을 널리 자랑하려는 의도가 더 많이 포함돼 있다.일요일이면 예배는 빼먹고 혼자서 라운드를 하는 목사가 있었다.이를 괘씸하게 여긴 하느님께서 목사를 혼내주기로 결심하셨다.어느 일요일,목사는 파4홀에서 홀인원을 했다.자랑을 안 할 수 있겠는가.목사는 동네방네에 자신의 홀인원을 광고했다.그러나 증인이 없는 홀인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에 남편이 상가에 조문을 갔다가 왔다.향냄새가 풍풍 풍기는 옷을 벗으면서 내게 선물이라면서 책 두 권과 A4용지 크기의 종이 한 장을 주었다.책은 골프 칼럼집이었다.나는 책을 후르르 훑어보고 난 뒤에 반으로 접은 종이를 펼쳤다.골프라운드 기록표의 복사본이었다. “어디 보자….아들아,엄마 돋보기 어디 갔냐.냅둬라,여기 있네.흠….1자도 몇 개 있고….똥글뱅이 파가 9개에….속에 -1이라는 숫자가 채워진 하트가 옴마 6개나 되네….근데 하트,11·12·13·14홀,네 홀이 연거푸 버디네,이런 걸 사이클 버디라고 한다냐 뭐란다냐….동반자들 줄초상이 났겠구만….옴마….69타네….여보,이사람 밥 먹기 위해 공 치는 사람이야,공 치기 위해 밥 먹는 사람이야?” 기록을 먼저 보고,휘둥그레진 눈으로 골퍼의 이름을 보니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우리 여자동기의 남편이야.나하고는 안면이 있어.당신 글은 열심히 읽고 있대.” “라운드한 날짜가 1999년 여름이야.아마 100장쯤 복사를 해서 5년 동안 명함대신 나눠주는 모양인데….케케묵은 기록표를 뿌리는 이유가 뭐래? 누구 염장지르고 싶대?” “얼마나 좋고 자랑하고 싶으면 그러겠어.당신이 선전 좀 해줘봐.” “어림 택도 없는 소리 말아요.맨 입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전해요.” 천사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은 대가 없이 남의 자랑도 들어주고 축하도 해주고 광고도 해주는지는 모르지만,나는 경제적 수지타산이 안 맞는 짓은 안한다.고린전 한 잎이라도 얻어 쓴 뒤에,술 한 잔이라도 받아먹고 나서,자랑도 들어주고 남에게 알려주라고,골프스승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두사부일체’라고,두목과 스승과 아버지는 같은 등급이라는데,골프스승에게 교육받은 대로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가·골프칼럼니스트 youngdoo@youngdoo.com˝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2)여자라는 이름의 논개 (上)

    도래 소주 열 번 고아 애(왜)늠 장수한테 믹이갖고 진주 기생 이애미(의암)는 우리 조선 살릴라꼬 옥가락지 열 찐(낀) 손에 애늠 장수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졌네 진주 남강 떨어짐서 노랑 수건 파랑 수건 수건 두 개 떠올라 오면 노랑 수건은 건져주고 파랑 수건은 건지지 마라. 두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곧잘 부르셨던 노래다.살아계셨으면 아흔 두 살이 되셨을 어머님이 처녀 적 길쌈하면서 부르시던 노래였다.물레질 할 때나 삼 삼을 때 동무들이 짝짝으로 마주 보고 앉아 한쪽에서 한 소절을 먼저 메기면 맞은편 여인들이 그 다음 소절을 받는다.노래하는 사람마다 남 모르는 설움이며 가슴 속 사연들을 살며시 섞어 부르곤 하기 때문에 노래는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일제 식민지 한복판 아슬한 민족의 베틀 위에서 기구한 운명을 씨줄 날줄로 엮어 짜며 불렀던 이 노래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어머니는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애옥살이에 자식 일곱을 낳아 기르셨고,‘이애미(의암,義巖)의 전설’은 식민시기 진주 남강 기슭에서 고달픈 삶을 꾸렸던 사람들에게 식을 줄 모르는 분노와 그치지 않는 민족 사랑을 함께 일깨워주었다. ●베틀질 노랫소리로 맥이은 ‘이애미 전설’ 노래의 주인공은 논개다.논개는 여자이고,기생이고,관청에 소속된 노비이고,적장을 살해함으로써 조선의 운명을 구한 전사이며,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이 사랑하던 여인이며,꽃다운 나이 스무살에 죽은 민족의 딸이고,죽은지 147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전사 사실을 확인받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문 내력을 지닌 이다.그리고 논개는 그저 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딸이 아니라,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애인이고 동무이다. 논개의 삶과 죽음이 전설과 오해로 점철되어 온 것은 그의 성장지와 죽은 곳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죽은 곳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가 정리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난 1574년부터 죽던해인 1593년 초까지 그는 고향에서 살았고,부군인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 결전장으로 온 것은 1593년 봄 이후였다.죽기까지 진주에서 머문 것은 길게 잡아도 5개월을 넘지 않았다.1593년 여름 진주성을 함락시킨 적장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던진 이후 그의 죽음이 이룬 엄청난 전과에 대한 보상문제가 제기되었는데,이 때 진주목사가 논개의 집안을 확인하기 위하여 진주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는 공식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오해 속에 파묻어버린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흔히 진주성 2차 전투로 불리는 싸움은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조선의 희생자를 낸 처참한 살육전이었다.유생들의 당파싸움과 허구에 찬 이론 논쟁으로 허수아비가 된 관군은 이미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이 아니라 높은 관직의 유생들을 추종하는 비겁하고 무능한 자들이었다.조선의 성리학과 유생들이 이 시기에 저지른 죄와 그에 대한 응징은 없었다.관군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변명 속에서 진주성은 외로운 섬처럼 왜적에게 포위돼 공격받았다.9일 밤낮으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다.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려한 대부분은 호남에서 온 의병들이었다.비록 직함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지만 최경회도 전라도 화순의 의병장으로서 진주성 사수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라곡창 점령 위해 왜적들 진주성 공략 결국 전투력의 열세로 진주성은 함락되고,진주성안으로 피란해 있던 6만여 명의 피란민들까지 모조리 왜적에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여자들과 노인들이었다.그들의 주검은 산이 되어 여름 장마 속에서 썩어갔다.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그 흔하던 양반과 잘난 유생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죽음으로써 왜적의 칼날을 무디게하는 것은 민중뿐이었다.진주성 사수에 실패한 전라도에서 온 의병장들은 책임을 지고 진주성에서 자결했다. 왜적들은 진주성을 함락하자 곧장 하동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 곡창지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왜적들이 진주성 함락을 위해 총력전을 편 이유는 전라도 곡창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임진왜란이 시작된지 불과 두 달여 만에 평양까지 진출했던 왜군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이용하여 전쟁물자를 수송해야 했다.그 때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 보급로를 공격하자 왜군은 다시 남쪽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서해바다를 이순신의 해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해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왜군사령부에서는 이순신의 해군을 제거해야만 조선을 지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그러나 이순신과 그의 해군을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이길 수 없었다.대신 전라도를 점령하는데 힘을 쏟았다.이순신의 해군은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보급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전라도 의병들이 그토록 무섭게 전투에 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전라도와 이순신을 제거해버리면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출입구가 되는 진주성을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모든 왜군을 총동원하여 진주성을 함락했다.최경회 장군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왜적들은 하동을 거쳐 보성 지방까지 진군했다가 일단 진주로 돌아왔다.전력을 재정비하여 보다 완벽하게 전라도를 점령하자는 전략에서였다.진주로 돌아온 왜병들은 일단 진주성을 함락한 전승기념 파티를 열었다.왜장들이 촉석루 언덕 위에서 벌인 전승기념 파티에는 그때까지 살아남은 진주목과 경상우병영에 속해있던 관기(官妓)들을 모조리 끌어내고,진주의 여염집 젊은 여인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관기로 잠입한 논개… 전승잔치서 적장 살해 진주는 지방 도시로서는 드물게 경상우병영과 진주목관아가 위치해 있어서 군인과 관료가 많았다.지방관에는 공공의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음악과 춤을 주관하는 교방(敎坊)이란 부서가 일찍부터 설치되어 있었다.이곳에는 이른바 관기로 불리는 여성들이 음악,춤,그림,글씨 등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생활했는데,나쁜 목민관의 경우에는 관기들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여 마치 몸파는 일을 하는 여성들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논개는 부군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온 이후로 줄곧 이곳 교방에서 지냈다.그러다가 성이 함락되고 부군도 자결하자 논개는 복수를 결심했다.스스로 관기가 되어 왜장들의 전승축하파티에 잠입했다.그곳에서 왜장 기다 마코베(貴田孫兵衛)라는 가토 기요마사부대의 선봉장을 죽였다.기다 마코베의 뜻밖의 죽음은 왜병들에게 큰 충격이었고,전라도 침공 계혹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논개가 전라도를 위기에서 구출하고,나아가 조선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게 된 셈이었다.논개가 이같은 결과를 모두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이같은 사실을 놓고 조선 정부는 논개의 행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논개가 여자인데다 기생 신분이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만약 이를 인정한다면 남자들의 권위가 진흙탕에 처박힌다는 두려움으로 논개가 죽은지 147년이 지나도록 외면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2)여자라는 이름의 논개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2)여자라는 이름의 논개 (上)

    도래 소주 열 번 고아 애(왜)늠 장수한테 믹이갖고 진주 기생 이애미(의암)는 우리 조선 살릴라꼬 옥가락지 열 찐(낀) 손에 애늠 장수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졌네 진주 남강 떨어짐서 노랑 수건 파랑 수건 수건 두 개 떠올라 오면 노랑 수건은 건져주고 파랑 수건은 건지지 마라. 두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곧잘 부르셨던 노래다.살아계셨으면 아흔 두 살이 되셨을 어머님이 처녀 적 길쌈하면서 부르시던 노래였다.물레질 할 때나 삼 삼을 때 동무들이 짝짝으로 마주 보고 앉아 한쪽에서 한 소절을 먼저 메기면 맞은편 여인들이 그 다음 소절을 받는다.노래하는 사람마다 남 모르는 설움이며 가슴 속 사연들을 살며시 섞어 부르곤 하기 때문에 노래는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일제 식민지 한복판 아슬한 민족의 베틀 위에서 기구한 운명을 씨줄 날줄로 엮어 짜며 불렀던 이 노래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어머니는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애옥살이에 자식 일곱을 낳아 기르셨고,‘이애미(의암,義巖)의 전설’은 식민시기 진주 남강 기슭에서 고달픈 삶을 꾸렸던 사람들에게 식을 줄 모르는 분노와 그치지 않는 민족 사랑을 함께 일깨워주었다. ●베틀질 노랫소리로 맥이은 ‘이애미 전설’ 노래의 주인공은 논개다.논개는 여자이고,기생이고,관청에 소속된 노비이고,적장을 살해함으로써 조선의 운명을 구한 전사이며,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이 사랑하던 여인이며,꽃다운 나이 스무살에 죽은 민족의 딸이고,죽은지 147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전사 사실을 확인받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문 내력을 지닌 이다.그리고 논개는 그저 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딸이 아니라,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애인이고 동무이다. 논개의 삶과 죽음이 전설과 오해로 점철되어 온 것은 그의 성장지와 죽은 곳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죽은 곳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가 정리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난 1574년부터 죽던해인 1593년 초까지 그는 고향에서 살았고,부군인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 결전장으로 온 것은 1593년 봄 이후였다.죽기까지 진주에서 머문 것은 길게 잡아도 5개월을 넘지 않았다.1593년 여름 진주성을 함락시킨 적장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던진 이후 그의 죽음이 이룬 엄청난 전과에 대한 보상문제가 제기되었는데,이 때 진주목사가 논개의 집안을 확인하기 위하여 진주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는 공식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오해 속에 파묻어버린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흔히 진주성 2차 전투로 불리는 싸움은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조선의 희생자를 낸 처참한 살육전이었다.유생들의 당파싸움과 허구에 찬 이론 논쟁으로 허수아비가 된 관군은 이미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이 아니라 높은 관직의 유생들을 추종하는 비겁하고 무능한 자들이었다.조선의 성리학과 유생들이 이 시기에 저지른 죄와 그에 대한 응징은 없었다.관군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변명 속에서 진주성은 외로운 섬처럼 왜적에게 포위돼 공격받았다.9일 밤낮으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다.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려한 대부분은 호남에서 온 의병들이었다.비록 직함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지만 최경회도 전라도 화순의 의병장으로서 진주성 사수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라곡창 점령 위해 왜적들 진주성 공략 결국 전투력의 열세로 진주성은 함락되고,진주성안으로 피란해 있던 6만여 명의 피란민들까지 모조리 왜적에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여자들과 노인들이었다.그들의 주검은 산이 되어 여름 장마 속에서 썩어갔다.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그 흔하던 양반과 잘난 유생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죽음으로써 왜적의 칼날을 무디게하는 것은 민중뿐이었다.진주성 사수에 실패한 전라도에서 온 의병장들은 책임을 지고 진주성에서 자결했다. 왜적들은 진주성을 함락하자 곧장 하동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 곡창지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왜적들이 진주성 함락을 위해 총력전을 편 이유는 전라도 곡창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임진왜란이 시작된지 불과 두 달여 만에 평양까지 진출했던 왜군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이용하여 전쟁물자를 수송해야 했다.그 때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 보급로를 공격하자 왜군은 다시 남쪽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서해바다를 이순신의 해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해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왜군사령부에서는 이순신의 해군을 제거해야만 조선을 지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그러나 이순신과 그의 해군을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이길 수 없었다.대신 전라도를 점령하는데 힘을 쏟았다.이순신의 해군은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보급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전라도 의병들이 그토록 무섭게 전투에 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전라도와 이순신을 제거해버리면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출입구가 되는 진주성을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모든 왜군을 총동원하여 진주성을 함락했다.최경회 장군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왜적들은 하동을 거쳐 보성 지방까지 진군했다가 일단 진주로 돌아왔다.전력을 재정비하여 보다 완벽하게 전라도를 점령하자는 전략에서였다.진주로 돌아온 왜병들은 일단 진주성을 함락한 전승기념 파티를 열었다.왜장들이 촉석루 언덕 위에서 벌인 전승기념 파티에는 그때까지 살아남은 진주목과 경상우병영에 속해있던 관기(官妓)들을 모조리 끌어내고,진주의 여염집 젊은 여인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관기로 잠입한 논개… 전승잔치서 적장 살해 진주는 지방 도시로서는 드물게 경상우병영과 진주목관아가 위치해 있어서 군인과 관료가 많았다.지방관에는 공공의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음악과 춤을 주관하는 교방(敎坊)이란 부서가 일찍부터 설치되어 있었다.이곳에는 이른바 관기로 불리는 여성들이 음악,춤,그림,글씨 등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생활했는데,나쁜 목민관의 경우에는 관기들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여 마치 몸파는 일을 하는 여성들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논개는 부군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온 이후로 줄곧 이곳 교방에서 지냈다.그러다가 성이 함락되고 부군도 자결하자 논개는 복수를 결심했다.스스로 관기가 되어 왜장들의 전승축하파티에 잠입했다.그곳에서 왜장 기다 마코베(貴田孫兵衛)라는 가토 기요마사부대의 선봉장을 죽였다.기다 마코베의 뜻밖의 죽음은 왜병들에게 큰 충격이었고,전라도 침공 계혹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논개가 전라도를 위기에서 구출하고,나아가 조선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게 된 셈이었다.논개가 이같은 결과를 모두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이같은 사실을 놓고 조선 정부는 논개의 행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논개가 여자인데다 기생 신분이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만약 이를 인정한다면 남자들의 권위가 진흙탕에 처박힌다는 두려움으로 논개가 죽은지 147년이 지나도록 외면했다.
  • 말말말˙˙˙

    교회내 노동자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등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그러나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감수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교회노조 설립을 주도한 이길원 목사,교회노조가 담임목사의 전횡과 교회세습 타파의 계기가 될 것이라며-˝
  • [열린세상] ‘희생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김진호 당대비평 주간 목사

    드디어 총선이 끝났다.항상 그런 느낌이지만,휘몰아치듯 지나간 선거 태풍은 퍽도 거세다. 방송은 저녁 6시를 카운트다운으로 시작하더니,밤새도록 누가 당선됐고,어느 당이 성공했고,지방색은 어땠고,계급적 성향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고,‘탄풍’,‘박풍’,‘추풍’,‘노풍’ 등등은 어땠는지를 분석한다.아마 며칠이 지나도록 신문과 방송은 이 얘기를 끝도 없이 우려먹겠지.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공적이든 사적이든 만남이 있는 곳곳에서 사람들과 그 얘기를 나눴고,얼마간은 그렇게 하겠지. 선거 결과는,대체로 주변 사람들 거의 대부분에게 꽤나 만족스러운 것처럼 보인다.내게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한데 마음이 좀 찜찜하다.실은 한달쯤 전에 한 사람이 내게 던진 질문이 계속 나를 성가시게 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연일 보도됐던 아이들의 유괴,소녀들을 포함한 부녀자의 강간,자녀 학대,노인 학대,그리고 이들 피해자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사건 소식에 접하면서 그는,왜 사회의 실패자들이 자신보다 약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는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피 튀기는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이 자신을 포기하기로 맘먹은 그 순간에 왜 자신의 완력을 약자에게 휘두르는지,바로 그 사실이 그는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몇 년 전 TV 외화 ‘X파일’의 한 에피소드는 자기 몸에서 ‘지방’을 합성해내지 못하는 돌연변이 남자가 뚱뚱한 여자들을 연쇄 살해하는 얘기였다.남자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희생자를 골랐다.그런데 이들 희생자는 한결같이 뚱뚱한 젊은 여자였다.남자들과의 만남이 두려워서 인터넷 대화에 몰두했던 여인들은 이 돌연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돌연변이는 지방을 그녀들의 몸에서 흡수함으로써 살아간다.문명의 희생자인 돌연변이는 또 다른 희생자를 공격해야만 한다는 비극이 이 에피소드의 요지인 것이다. 어쩌면 유괴,강간,학대,살해를 저지른 우리 사회의 돌연변이들은 그런 행위들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항상 누군가에 의해 패배하고 좌절하는 것만이 아니라,다른 누군가를 이길 수 있고,그 희생자에게 절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총선은 우리 사회에서 꽤나 성공한 사람들의 잔치다.후보자들은 대개 인생에서 실패의 경험보다는 성공의 경험이 월등히 많은 사람들이다.기회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만큼 자신을 잘 관리한 대가이기도 하다.물론 큰 정당 소속일수록 대체로 더욱 성공적인 사람들이다.그런데 그런 정당의 선거 대표자들이 예외 없이 자신의 몸을 학대하면서 선거를 치렀다.‘자해’는 자신의 몸에 실패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사람들은 그들의 자해를 보면서,저 대단한 사람들의 고통을 안쓰러워하기도 하고,그 고통이 평범한 자기 자신의 실패의 쓰라림이기라도 한 양 공감하는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대표자들은,나를 괴롭힌 그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까? 최후까지 몰린 실패자들도 성공의 가학성에 취하고 싶어 하는 문명의 저주를 푸는 비법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꽤나 효과적이었던 ‘자해’,그것의 기억은 그들로 하여금 성공주의 사회의 저주받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느끼게 해 줄까?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만,자해를 행한,각 당의 선거 대표자들의 입에서는 ‘승리’라는 말이 떠나질 않았다.이겨야만 하는 게임은 이렇게 지나갔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를 이 경쟁의 논리 속으로 계속 붙잡아 놓을 것이다.미디어는 그런 흥분을 유지하고 싶어 할 것이고,정치인들도 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빨리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한동안 미디어를 온통 채웠던 그 문명의 저주에 관한 기억을 얼른 다시 떠올려야 한다.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향한,실패자들의 저주받은 가학성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진호 당대비평 주간 목사˝
  • “검문때 동양인 5~6명 봤다” ‘이라크 피랍’ 목사일행 귀국

    지난 8일 이라크 무장세력에 피랍됐다가 풀려난 허민영 목사는 14일 “우리가 검문당했을 때 다른 동양인 5∼6명도 검문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며 “이들 중 한 명은 나중에 TV를 통해 본 납치된 일본인 남자와 비슷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허 목사는 다른 8명의 목사와 함께 요르단 암만을 출발해 이날 인천공항에 도착해 “무장세력이 그들의 짐을 불태우자 동양인 여성이 항의했고,남자 4∼5명도 있었다.”며 “TV에서 일본인 억류 소식을 듣고 그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그러나 “일본 말을 했는지는 모르며,확실히 본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부고]

    ●폐암투병 탤런트 이미경씨 폐암 투병 중이던 탤런트 이미경(44)씨가 11일 끝내 세상을 등졌다.고인은 11일 오후 10시30분쯤 오빠 성진씨와 대학 동창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이씨는 지난해 10월말 SBS대하사극 ‘왕의 여자’ 출연중 성대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 선고를 받아 곧바로 드라마에서 하차했다.서울 원자력병원에 입원했으나 차도가 보이지 않아 지난달부터 집과 병원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해오다가 이달 초부터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 임종을 지켜 본 한 지인은 “치료를 포기한 상태에서 며칠 전부터 친오빠와 대학동창들이 번갈아가며 간병해 왔다.”며 “이렇다 할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 이대 목동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3일 오전 5시.가족들은 시신을 화장해 일산의 납골당에 안치키로 했다. ●高性鎬(롯데 기업문화실 부장)씨 백씨상 12일 낮 12시 경기 부천시 가톨릭성가병원,발인 14일 오후 2시 (032)340-7300,018-396-5707 ●李天載(법무부 공보관실 사무관)씨 부친상 11일 오전 9시 서울 경희의료원,발인 13일 오전 11시30분 (02)957-3099 ●李景洙(자영업)亨洙(한국방송광고공사 홍보부 차장)允洙(예성초등학교 교사)씨 부친상 12일 오전 5시 충북 충주의료원,발인 14일 오전 9시 (043)841-0382 ●金滋鉉(전 의협신문 주필)씨 별세 永錫(삼성SDS 과장)永宰(중외제약 주임)씨 부친상 李侖珍(싱가폴항공 대리)씨 시부상 李成一(국방부 군종실 군종목사)씨 빙부상 12일 0시4분 서울대병원,발인 14일 오전 8시 (02)760-2025 ●金東旭(자영업)씨 부친상 奇永德(종근당 상무)씨 빙부상 11일 오전 5시50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발인 13일 오전 8시 (02)392-0499 ●愼興範(전 외환은행 지점장)씨 별세 成皓(알스바 영업담당이사)晟熙(유니버설뮤직 과장)씨 부친상 李鍾奭(제오빌더 영업차장)씨 빙부상 10일 오후 7시10분 서울 강북삼성병원,발인 13일 오전 6시 (02)2001-1096 ●金允培(건설공제조합 총무부장)二培(대림자동차 서울사업소장)昌培(한화증권 온라인사업센터 상무)根培(현대자동차 소장)淸培(삼신문화사 상무)씨 부친상 崔子善(삼신문화사 대표)씨 빙부상 12일 0시10분 삼성서울병원,발인 14일 오전 9시 (02)3410-6906 ●李亨敏(전 산업은행 이사)씨 별세 根鎬(미국 립튼 부사장)根雄(미국 거주)根賢(대우건설 전무)씨 부친상 李弼圭(보험신보 회장)朴昌淳(강신산업 대표)씨 빙부상 11일 오후 11시45분 서울대병원,발인 14일 오전 9시 (02)760-2091 ●朴乙鏞(한동대 석좌교수)씨 별세 惟辰(미국 거주)씨 부친상 12일 0시15분 서울아산병원,발인 14일 오전 7시 (02)3010-2238 ●李俊曉(더보스톤컨설팅그룹 어소시에이트)씨 부친상 炯八(동화기업 사장)炯九(한화마트 사장)宗哲(세화기계 전무)씨 제씨상 11일 오후 8시5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13일 오전 8시30분 (02)3010-2293 ●金明洙(광주생활체육협의회 사무처장)씨 부친상 12일 오전 전남 순천시 성가롤로병원,발인 14일 오전 9시 011-601-5169 ●김정렬(자민련 정책국장)박경태(스카이삭스 대표)씨 빙부상 12일 오후 1시15분 인천 남동구 간석4동 광연병원,발인 14일 오전 9시 (032)429-2213 ●閔景重(전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씨 별세 12일 오후 1시30분 서울 강남성모병원,발인 14일 오전 8시 (02)590-2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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