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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삶의 마지막 노래를 들어라/이상철 지음, 이상엽 사진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한국 불교계에 가장 큰 자취를 남긴 인물로 추앙받는 성철 스님. 윗글은 지난 1993년 스님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긴 말씀이다. 큰 스님들이 죽음, 즉 열반에 들기 전 후인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열반송(涅槃頌)이라고 한다. 한 유명 목사님이 TV 설교에서 특이하게도 성철 스님의 이 열반송을 인용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라는 대목에 매달렸다. 그날 설교의 요지는 이랬다. 평생을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지낸 분이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 지었을까.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리고 어느 순간 생각에 다다랐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죄라는 뜻 아닐까. 이걸 기독교식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인간이 가진 지식, 권세가 덧없다는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선승들의 열반송은 이렇듯 종교와 상관 없이 큰 가르침을 준다.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선승 65인의 열반송을 담은 ‘내 삶의 마지막 노래를 들어라(이상철 지음, 이상엽 사진, 이른아침 펴냄)’는 이생의 삶을 정리하는 고승들의 한마디를 거울 삼아 스스로를 되돌아 볼 것을 권한다. 각 장마다 스님들의 열반송과 함께 이들의 유명한 일화, 걸어온 길 등이 실려 있다. 속박과 번뇌, 미망과 아집에서 벗어난 적멸의 순간에 전하는 마지막 노래에는 고승들의 삶의 흔적과 선(禪)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한 평생 사셨는데 남기실 말씀 없습니까?” “할 말 없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2003년 입적한 서암 스님은 컨테이너 박스, 다리 밑을 집으로 삼아 살았다. 평생 청빈을 몸소 실천한 분답게 열반송 또한 검박하다. 삶 자체로 이미 수행자의 본분을 보여줬는데 무슨 미사여구가 더 필요할까.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을 맡았던 법장 스님은 열반 후 자신의 법구(승려의 시신)를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스님의 영결식은 종단장 사상 처음으로 다비식 없이 치러졌다.“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입도 없고 밑도 없다/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나누고 베푼 스님의 일생이 후세인들에게 더없이 서늘한 울림을 전해준다. 신정아씨 사태와 아프가니스탄 납치문제로 불교와 기독교가 세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종교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믿음과 구도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과학과 더불어 인간의 삶을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다. 물질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는 삶을 성찰하고 긍정하는 힘이 되어준다. 이 책은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저자의 바람대로 “스님들의 촌철살인 같은 열반송을 통해 작은 명상”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다.1만 2000원.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20일부터 서귀포 칠십리축제

    “바닷물이 철썩 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휘파람도 그리워라. 쌍돛대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새가 운다.” 가수 남인수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서귀포 칠십리’는 아직 한라산 남쪽 서귀포 사람들에겐 친숙한 노래다. 제주에서도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명품 해안선 서귀포 칠십리에서 20일부터 4일간 칠십리축제가 화려하게 펼쳐진다.‘서귀포의 꿈과 사랑, 그리고 칠십리’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에는 칠십리대행진, 제주민속공연, 청정 서귀포 바다 체험 행사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식전 행사인 칠십리대행진은 19일 서귀중앙여중∼천지연광장 구간에서 17개 읍·면·동 주민들이 참가, 제주목사 행차 재현 행렬을 선보인다. 이어 4일간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불꽃놀이, 제주민속공연 등이 펼쳐지고 해녀수영대회, 무동력선노젓기대회, 무병장수기원 등달기 행사도 마련됐다. 또 전통초가 공예품 만들기, 전통옹기 만들기 등 체험행사와 칠십경사진전, 세계자연유산 상설 사진전 등도 열린다. 서귀포시 관계자는 “칠십리 축제는 그저 아름다운 칠십리 해안길을 눈에 넣고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며 “청정한 서귀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물 맛에 빠져 보는 것은 축제의 덤”이라고 말했다.(064)760-2682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부흥운동 100년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됐다

    부흥운동 100년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됐다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평양 장대현교회 예배당이 복원됐다.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초지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관장 한영제 장로) 부지 안에 원 크기의 5분의1 규모로 들어서 오는 20일 오전 11시 이 박물관에서 예배당 준공 감사예배가 열린다. 평양 장대현교회는 1907년 한국교회의 회개와 부흥을 주도했던 이른바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된 중심공간. 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신교계의 인사들이 부흥운동의 원 정신을 되새기자는 뜻을 모아 축소된 형태나마 그 예배당을 세워놓았다. “올해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숱하게 열렸지만 기념행사나 이벤트성 행사에 치우쳐 아쉬웠다. 장대현교회 복원이 100년전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지난 5월부터 복원공사를 벌여와 예배당을 세워놓은 박물관측의 설명이다. 82.5㎡ 크기의 예배당 안에는 100년전의 선교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아 당시 평양 지역 복음전파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관련 사료를 토대로 강대상이며 헌금함·휘장도 복원해 놓았다.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시비와 마포삼열·이길함·한석진·길선주 같은 평양지역 선교 개척자들의 기념비도 들어서며 예배당 준공에 맞춰 박물관 본관에서는 길선주 목사의 친필 8폭 병풍도 전시한다. 지난 3일부터는 올해말까지의 일정으로 ‘빛바랜 사진, 부활하는 역사’라는 주제의 특별 전시회도 열리고 있다. 이 박물관 소장자료 중 200여점을 뽑아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자리. 이 박물관은 지난 30년 동안 전국의 고서점과 개인, 경매 사이트를 통해 10만여점의 사진과 그림엽서, 문헌들을 모아 한국 개신교박물관 가운데 가장 많은 희귀 자료를 갖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에는 세브란스 의학교 실험실 모습을 찍은 사진과 1906년 배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의 사진이 나와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건축 현장모습과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기념식,1930년대 동평양장로교회 주일학교 예배 모습을 담은 사진도 모두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913년 YMCA가 마련했던 성경 사경회에 교사로 참석한 몽양 여운형이 월남 이상재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박물관측의 설명대로 “흔히 좌익 인사로만 불려왔던 여운형 선생을 재평가할 수 있는 자료” 측면에서 관심이 쏠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부고] 김동완 前 KNCC 총무 별세

    [부고] 김동완 前 KNCC 총무 별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를 역임한 김동완 목사가 뇌졸증으로 12일 오후 8시5분 별세했다.65세. 김 목사는 지난달 24일 캄보디아와 인접한 국경도시인 태국 알란시의 한 호텔에서 식사 도중 쓰러진 뒤 귀국해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출신의 김 목사는 기독교계의 대표적 진보인사로 도시 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종교운동에 투신했고,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다.1995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KNCC 총무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김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사랑의원자탄운동본부 이사장으로 희귀 난치병 환자 수술·치료 및 소외계층 지원에 앞장서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권경순(55)씨와 장녀 계리씨, 차녀 예리씨, 장남 진우씨 등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15일 오전 8시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장(葬)으로 치러진다.
  • [문화플러스] 제44회 언더우드 학술강좌 개최

    새문안교회(담임목사 이수영)는 14∼16일 서울 신문로교회 본당에서 ‘21세기 동북아의 미래와 기독교-진리의 빛& 기독청년’주제의 제44회 언더우드 학술강좌를 개최한다. 한·중·일 3국 기독청년이 참가하며 이장로 고려대 교수, 일본기독교단 총회장 야마키타 노부히사 목사가 발제한다. 홈페이지(www.saemoonan.org) 참조.
  • [부고]

    ●윤영표(전 한국은행 검사국장)씨 별세 규식(전 서울은행 본부장)두식(자영업)홍식(〃)우식(〃)씨 부친상 1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30분 (02)3410-6909●임장원(AFP 서울지국 특파원)씨 모친상 11일 강북삼성병원, 발인 13일 오전 6시 (02)2001-1091●김승재(신한일 과장)인걸(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승모(사업)씨 모친상 박현경(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대표)씨 시부상 10일 서울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2)2072-2011●박천일(사업)우일(LG파워콤 강원네트워크운영센터장)정숙(사업)씨 부친상 11일 대구 동산의료원, 발인 13일 오전 6시 (053)250-8142●박병우(대전상공회의소 사무국장)씨 모친상 이병길(대전시청 주차단속담당)씨 빙모상 10일 대전을지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30분 (042)471-1660●최인수(대한스쿼시연맹 사무국장)씨 부친상 10일 충남 금산군 동백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9시 (041)751-4944●고승권(뉴질랜드 늘푸른교회 목사)씨 별세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 (02)3410-6905●이원형(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수형(무역업)씨 부친상 11일 대구 모레아장례예식장, 발인 14일 오전 8시 (053)801-9999●이종식(현대산업개발 상무)씨 부친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2)3010-2292●최동수(사업)화수(경북건철 대표)일수(주원 이사)현수(애즈랜드 대표)씨 부친상 이명수(사업)박용수(〃)기서종(대진건설)씨 빙부상 엄삼광(경북건철)김인순(에이스프린팅 대표)씨 시부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7시 (02)3010-2631●윤종관(동원부동산컨설팅 대표)영진(현대백화점)영관(중소기업은행 안산지점)씨 부친상 민완식(MBC 라디오운영팀장)최종태씨 빙부상 10일 경기 광명성애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30분 (02)2689-9054●이상현(한국캘러웨이골프 대표)영림(미국 거주)행림(〃)상운(〃)미옥(〃)연희(〃)씨 부친상 11일 미국 뉴욕, 발인 13일 오전 1-203-874-5500●남승현(KTF 언론홍보팀 차장)씨 부친상 11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6시 (031)787-1506●김성배(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순배(충주 목행초등학교 교사)옥배(청주교육청 장학사)인배(충남 연기군 보건소 계장)씨 모친상 손승재(사업)박종호(논술학원 원장)안중면(찬중종합건설 대표)씨 빙모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7시 (02)3010-2237●강병훈(국민은행 본점 팀장)병욱(삼성전자 안양지점장)씨 부친상 최영호(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전략기획본부장)씨 빙부상 11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11시 (031)787-1510
  •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상) 한계 부딪친 당원제도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상) 한계 부딪친 당원제도

    ■ 열린우리, 실패한 혁명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원 투표가 아닌 국민경선으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후보 선출 방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여론조사 방식’으로 실시된 예비 경선(컷 오프)은 ‘유령선거’ 논란만 남겼다. 원내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승계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이 원칙없이 치러지는 까닭은 후보가 난립했고, 당원들이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데 있다. 특히 옛 열린우리당은 집권당으로는 처음으로 당비를 납부하는 기간당원이 후보 선출 등 당내 중요 의사결정권을 갖는 ‘당원 혁명’을 시도했었기 때문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어느 기간당원의 회한 열린우리당 대의원들이 당 해체를 결의하던 지난달 18일. 꼬박꼬박 당비를 내며 기간당원으로 활동했던 김성현(42)씨는 눈물을 흘렸다. 정당을 통해 ‘생활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꿈이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경기도 광명에 있는 교회의 목사다.“목사들은 예전부터 정치에 관여를 많이 했어요.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여서 출마자들이 목사를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죠.”김씨는 이런 음성적인 방식보다는 공개적인 참여를 택했다.“신도들과 지역 문제를 토론하고, 우리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이 필요했습니다. 상향식 민주주의를 표방한 열린우리당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기간당원제는 도입과 동시에 퇴색했다. 특히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명시의 기간당원이 하루 밤새 500명씩 불어나는 기현상을 목격했다. 김씨는 “지방선거 후보들이 당비를 대납해 주면서 자기편 기간당원을 대거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기간당원제는 항상 권력투쟁의 원흉으로 꼽혔고, 아홉 차례의 당헌·당규 개정을 거치면서 계속 후퇴하다가 결국 폐기처분됐다.”면서 “기간당원들은 특정 후보의 지지자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당원 혁명’ 왜 실패했나 김씨의 말대로 창당 당시 ‘권리행사(전당대회) 2개월 전에 입당해 월 2000원 이상의 당비를 6개월 이상 납부한 자’로 정해졌던 기간당원제는 단 한 차례도 적용되지 못했다. 희망제작소 유시주 객원연구위원은 기간당원제 실패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탓이라고 지적했다. 유 위원은 “차기 대권을 노리는 당의장들이 지지자들을 당원에 대거 포함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기간당원제를 흔들었다.”고 말했다. 공직후보 선출과 당내 요직 선출에서 기간당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조직관리에 위기를 느낀 당의장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간당원제 요건을 완화했다.‘선거꾼’ 활동에 익숙한 과거 당원들이 대거 들어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기간당원들과 ‘동원’된 당원들은 해당 지역에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실제로 2006년 2·18 전당대회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3개월새 기간당원이 30만명이나 늘어 ‘종이당원’,‘대납당원’ 논란이 일었다.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던 김희숙(36·여)씨는 “수평적인 정치 네트워크를 실현하기 위해 당 활동에 적극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면서 “열린우리당이 총선 직전 급조됐고, 일거에 최대 의석을 차지해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소속의 임종인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 노사모 회원들이 기간당원의 주축이었다.”면서 “특정 개인을 위한 계파 성격이 강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기간당원제 사수를 끝까지 주장했던 김두수(45) 전 중앙위원은 “유럽식 대중(계급)정당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 근본적인 한계였다.”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참여한 만큼 발언권이 주어지는 개방·참여·공유의 ‘웹2.0’식 정당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한나라, 당심의 분노 경남 합천에 사는 임모씨(57)씨는 15년 전인 1992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돈을 받고 당에 가입하는 게 자연스럽던 그 시절, 임씨는 돈을 내고 당원이 됐다. 그만큼 김영삼 총재의 비전과 철학을 지지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다시 한나라당으로 바뀌는 동안 정당에 대한 임씨의 지지는 변함이 없었다. 매월 1만원씩 통장에서 당비가 빠져나갔지만 아깝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씨의 생각은 요즘 들어 바뀌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당에 반영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임씨는 “당 소식은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접한다. 옛날에는 가끔 중앙당에서 전화해서 내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이렇듯 평당원의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130만 당원을 거느린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당원들은 대부분 충성도가 높고 오랫동안 당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더 큰 파급력을 갖는다. 인천 계양을 당원협의회 소속 당원인 이모(52)씨는 “옛날부터 당원은 선거 때 표를 모으는 수단이거나 당 행사에 동원되는 인력일 뿐이었다.”고 씁쓸해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당원도 “당이 좀더 민생정치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는데, 이런 의견을 당에 전달할 통로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대선 경선을 거치면서 일부 당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당심(黨心)보다 일반 국민 여론조사의 결과가 경선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판단에서다. 불만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했던 당원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경선 불복 소송을 낸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 정광용씨는 “선거법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경선을 여론조사로 대체할 수 있다고 했는데, 투표도 하고 여론조사도 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시절부터 당원이었다는 김모(67)씨도 “당원 투표로도 충분한데 왜 여론조사까지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당 교육도 꼬박꼬박 받고 당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이 이번 경선을 통해 드러난 평당원들의 불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는 “박사모와 같은 자발적인 지지자의 출현은 고무적인 현상”이라면서 “이들을 책임있는 당원으로 포섭해 자발적 참여자가 주인되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민노, 우물안 내분 국내 유일의 계급정당인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이후 줄곧 진성당원제를 유지하고 있다. 매월 당비 1만원(저소득층은 5000원)을 내는 진성당원만이 공직후보 선출권을 갖는다. 옛 열린우리당이 진성당원제와 유사한 기간당원제를 도입했고, 한나라당도 책임당원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민노당 역시 이번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당원의 역할을 두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진성당원제를 엄격하게 유지하다 보니 대중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주장과 당 정체성을 위해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다 결국 정파선거로 이어졌다. 진성당원제를 접점으로 해묵은 노선투쟁의 골이 더 깊어진 셈이다. 다수파인 자주파(NL)는 국민들에게도 경선 참여의 길을 열어 놓아야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민참여경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평등파(PD)의 반대로 무산됐다.NL은 권영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정파적 투표를 감행했고, 노회찬 후보를 중심으로 한 PD는 이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세를 규합해 나갔다. 인천시당 김응호 사무처장은 “지지자 획득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외연확대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당 마포구위원회 정경섭 위원장은 “국민참여경선을 했다면 선거인단 모집에 당의 모든 정치활동이 매몰됐고,‘종이당원’ 논란도 불거졌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평당원인 백준(45)씨는 “국민참여경선을 무산시킨 PD, 정파선거를 한 NL 모두 비판받아야 한다.”면서 “지역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중앙당만 여전히 주도권 다툼에 사로잡힌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국민참여경선 논란과 정파선거는 극한 대립을 낳았다.”면서 “당 발전의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이 조선의 비호 속에 가도에 머물면서 후금을 탈출하는 반민(叛民)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의주·정주·안주성 차례로 함락 후금군은 1월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후금군은 다국적군이었다. 만주족 병사들뿐 아니라 한족과 몽골 출신 병사들도 있었다. 사령관은 아민이었고,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 조선 출신의 강홍립과 한윤(韓潤)도 지휘부에 끼어 있었다. 이영방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했고, 강홍립은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했다. 한윤은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이었다. 후금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한윤은 변장하고 몰래 의주성으로 들어왔다.14일 새벽 후금군이 성을 포위하여 전투가 시작되자 한윤은 병기고에 불을 질렀다. 혼란한 와중에 후금군에 내응하는 자들이 성문을 열었고 후금군은 수월하게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을 지키던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되었다. 의주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은 일제히 조총을 쏘았지만 다시 탄환을 재기도 전에 돌격해 들어간 후금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가 되었다. 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전부 살해했다. 백성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뒤 전부 머리를 깎였다. 머리를 깎은 것은 포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후금군은 1월21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들이닥쳤다. 안주는 당시 청북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조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방어태세를 점검해 왔던 곳이었다. 성 안의 군민도 3만 6000이나 되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결전을 준비했다. 적의 돌격이 시작되자 대포와 화살을 일시에 발사하여 저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남(三南)의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의 대병력이 순식간에 성을 넘어왔고, 조선군은 우왕좌왕했다.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안주 함락 후 아민은 병사들에게 4일간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들은 느긋했다. 반면 안주성이 함락된 후, 숙천(肅川)과 평양의 조선 관민들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졌다. 후금군의 승승장구였다. ●당황하는 조선 조정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월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보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장만(張晩)은 속히 하삼도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에 별장(別將)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자고 촉구했다. 이귀(李貴)는 황해도를 방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강화도를 피란처로 정해 놓았다가 안주에서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 곧바로 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패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설정해놓고 대응하려는 자세 같았다. 최명길은 임진강을 방어할 계책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비변사 신료들도 무신 신경진(申景 )을 임진강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의 우선 관심사는 자신의 호위(扈衛:궁궐을 지킴) 문제였다. 인조는 아마도 ‘이괄의 난’ 당시 권력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궁벽한 강화도로 들어가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조운(漕運)도 어렵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굳이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분조(分朝)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되, 왕세자를 삼남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흠(申欽)은 인조에게 민심 수습을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종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건의를 받아들여 장유(張維)에게 교서를 짓도록 했다. 인조는 교서에서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옥사(獄事)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호패법(號牌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등 ‘실정’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고 자책한 뒤 ‘부디 열성(列聖)의 은혜를 생각하여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굴욕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인조는 1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1637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강화도 이외의 방어를 포기하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인조는 신료들과 가졌던 대책 회의에서 장만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했다. 방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장만은 황해도의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영군(御營軍) 가운데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 100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거부했다. 호위에 충당할 어영군의 병력을 덜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비변사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반정공신들 또한 극도로 몸을 사렸다. 강화도로 피란하기로 결정한 직후 논란이 된 것은 임진강을 방어하는 문제였다.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하게 되자 임진강 방어에 충당할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김류는 이시백(李時白) 휘하의 수원부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발끈했다. 이귀는 ‘군량이 궁핍한 상황에서 수원의 병력을 임진강으로 보내면 오직 죽음 뿐’이라고 반발했다. 이시백은 이귀의 아들이었다. 이귀는 수원의 병력도 인조를 호위하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류는 반박했다.‘적병이 이미 깊숙이 들어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를 버리고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냐?’고 힐문했다. 인조는 결국 이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원의 군병도 강화도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보다 못한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적이 아직 천리 바깥에 있음에도 먼저 도성을 버릴 궁리만 하고 있다.”고 통탄하고 인조에게 경솔히 파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병력 500명만 주면 임진강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1월26일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기 위해 노량(露梁)으로 거둥했다. 하지만 배가 부족하여 강을 건너기가 여의치 않았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모래밭에 앉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피해 한강변으로 나왔던 이래 두 번째 맞는 파천이었다. 다음날 인조는 김포를 경유하여 저녁에 통진(通津)에 도착했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임진강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후금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부고]

    ●장재룡(전 주 프랑스 대사)재규(동양시멘트 상무이사)보윤(프랑스 거주)씨 부친상 양태종(법무법인 두레 변호사)한동만(주 미국대사 참사관)씨 빙부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410-6915●전원규(계림빌딩 회장)상규(살아나는학원 원장)택규(풍성여행사 대표)매희(경기대 교수)광희(영란여중 교사)씨 모친상 문정일(전 해군 참모총장)나형수(변호사)최영권(부장검사)장래성(해군 목사)씨 빙모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010-2231●공정옥(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씨 부친상 10일 대구 동경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53)746-5315●유민재(TELCORDIA 수석연구원)련(대통합민주신당 환경전문위원)덕희(종로약국 약사)씨 모친상 서석윤(SSCP 부사장)심응섭(상도무역 대표)이근우(연세대 치과대 보철과장)씨 빙모상 10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30분 (02)392-0299●이근식(연세대 법과대학 명예교수)씨 별세 홍(전 대우증권 이사)승(수원 제일산부인과 원장)강(헤어메디칼 이사)씨 부친상 10일 일산 국립암센터, 발인 12일 오전 9시 (031)920-0301●김종일(KBS 보도본부 디지털뉴스팀)종현(영파여중 교사)씨 부친상 10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 (02)590-2697●유재권(세계일보 울산주재 기자)씨 상배 10일 울산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52)250-8422●김인성(학교법인 경암학원 야탑고 이사장)진현(야탑고 행정실장)씨 모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010-2295●이원태(전 청도초등학교 교장)씨 별세 동희(한국제지 상임감사)준엽(캐나다 거주)동탁(국민은행 카드마케팅부 팀장)씨 부친상 이정돈(전 능인고 교사)씨 빙부상 8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3시 (02)3410-6916●이명기(맨텍시스템즈 차장)미선(학일출판사 대리)씨 부친상 김윤정(삼성엔지니어링)씨 시부상 10일 건국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5시50분 (02)2030-7909●김재윤(오스템 뉴욕지사장)성연(경원대·나사렛대 강사)씨 부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010-2291●이석용(국민대 교수·전 이트레이드증권 대표)씨 별세 이석조(UN기념공원 관리처장)씨 아우상 10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590-2660●김용일(삼성서울병원 외과 교수)씨 별세 구면(삼성정밀화학 대덕연구소 책임연구원)씨 부친상 박준혁(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 과장)씨 빙부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410-6917●장용준(경기일보 인천분실 사진기자)씨 부친상 10일 성인천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9시 011-315-9836
  • [길섶에서] 여행가방

    우리 가족에게 제주도는 항상 씁쓰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두 아이가 아직 학교 문턱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 가족이 함께 갔던 제주 여행길에서 가방을 잃어 버렸다. 콘도에서 나와 택시로 공항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을 챙기느라 이불 봇짐만한 가방을 놓고 내렸던 것이다. 가방에 연락처를 붙여 놨으므로 행여 하는 마음에 분실신고를 접수했지만 끝내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방에 특별한 물건이 들었던 건 아니다. 휴가 동안 땀에 전 빨랫감과 뒤축이 다 닳은 운동화 등이었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가방이 사라진 것보다는 누군가 냄새가 밴, 남의 속옷을 훔쳐 봤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더 당혹감과 불쾌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첫 해외여행길에서 가방을 잃어 버리곤 이러한 곤혹스러움을 어떤 글에선가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난 일요일 목사님 설교 도중 잃어 버린 가방이 떠오르면서 나는 어떤 가방을 들고 이승길을 떠나게 될까 생각해 봤다. 그때 가방 속에 담겼던 악취 풍기는 속옷보다 더 역겨운 탐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지 않을까.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아프간 구상권’ 행사 않기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해결에 소요된 정부 예산에 대한 구상권 행사와 관련, 석방된 피랍자들의 운송 등에 사용된 실비만 정산, 피랍자측에 상환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10일 “이번 사태 해결과정에서 소요된 경비 문제는 위법행위나 채무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와는 다른 만큼 구상권 행사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다만 비용상환 청구 차원에서 일부 소요 경비를 상환토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비용상환 청구 대상은 석방된 피랍자의 귀국 항공비용 및 숙박료, 희생자 운구비 등 실비로 정했다.”며 “석방교섭 관여자 출장비 등은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재외국민 보호 의무 때문에 발생한 것인 만큼 청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말했다.정부가 청구할 비용의 세부 목록은 석방된 피랍자들이 카불·두바이 등에 체류했을 때 발생한 숙박료, 카불-두바이(또는 뉴델리)-인천공항의 경로로 입국하는 데 소요된 항공료,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 등 희생자 2명의 운구 비용 등이라고 당국자는 전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박은조 목사 ‘장례식 발언’ 또 파문

    지난 8일 경기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에서 열린 고 배형규 목사의 장례식에서 “그의 귀한 죽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드린다.”는 박은조 샘물교회 담임목사 등의 발언이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9일 네티즌들이 샘물교회 앞에서 교회의 자성을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하는 등 교회 측의 선교 방식에 대해 반성과 개선을 촉구했다. 박 목사는 배 목사 장례예배인 ‘천국환송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순교자라 우리가 그렇게 표현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귀한 죽음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예장통합총회장 이광선 목사도 “복음은 선교의 피로 이어진다.”면서 “배 목사를 순교하게 한 탈레반 사람들도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장례식에는 배 목사의 유가족과 1500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했다. 아프간에서 석방된 21명도 참석해 장례식 내내 눈물을 흘리며 침통해했다. 장례식을 마친 뒤 배 목사의 시신은 고인의 뜻에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서울대 병원에 기증됐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종교토론방(아고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네티즌 10여명은 이날 “한 종교의 교리를 지나치게 자기들 방식대로 추종한다면 국민 전체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면서 “이 사건으로 세금이 낭비되고, 국가의 외교적 명예와 위신이 추락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박은조 목사는 자숙하라,’,‘국민혈세는 선교자금이 아니다.’는 등의 피켓을 들고 나와 왜곡된 선교문화에 대한 교회 측의 반성을 촉구했다. 한 참가자는 피랍자의 ‘바지 피랍일지’를 모방해 3일 간 집회 준비 과정이 적힌 바지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시민과 네티즌 사이에도 박 목사 발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회사원 김모(26·경기 안산시)씨는 “장례예배의 형식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죽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등의 표현이 국민 반감을 악화시키지는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성남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케이블·위성방송]

    ●mbn 06:20 체험 지구촌 홈스테이 08:20 주간팝콘영상 09:20 부동산 특급 알짜가 보인다 12:20 신화창조 13:20 체험 지구촌 홈스테이 15:30 열린TV 열린세상 ●Q채널 09:00 TV특종 놀라운 세상 10:00 날아라 슛돌이 13:00 인간극장 17:30 미녀들의 수다 23:00 휴먼다큐 사랑 01:00 리얼다큐 천일야화 ●MBC드라마넷 08:50 NG스페셜 해피타임 09:50 M-BOX 10:45 커피 프린스 1호점(재) 12:10 커피 프린스 1호점(재) 13:30 행복주식회사 14:40 무한도전 ●어린이TV 10:00 쫑아는 사춘기 11:00 토끼네 집으로 오세요 12:00 뽀로로 13:00 울트라맨 16:00 콩닥콩닥 콩콩 17:00 캔디 19:00 해적섬 21:00 세계의 가족   ●CTS기독교TV07:00 예꼬클럽 08:00 CTS뉴스와이드 09:00 김양재목사의 공동체고백 09:50 월드미션투데이 10:20 열방을 향하여 11:15 장부흥&김영웅●온스타일08:30 섹스 & 시티 10:00 프렌즈 5 12:00 할리우드E!NEWS위크엔드2007 17:00 온 더 랏 22:00 도전!FAT제로3 13:00 스타일매거진   ●시네마TV05:40 별을 쏘다 10:00 놀러와 11:05 유덕화의 도신 13:00 야인시대 14:10 NG스페셜 해피타임 15:20 신비한TV 서프라이즈   ●EBS플러스107:00 EBS기본과 특별한(종합)영어테마독해, 영문법 즐겨찾기08:40 EBS기본과 특별한(종합) 국사, 수학10-나(1)(2)11:10 EBS기본과 특별한(종합) 국어(하)(1)(2), 도덕13:40 EBS포스(종합) 수학Ⅱ(1)(2)15:10 EBS포스(종합) 영어구문투어 216:10 EBS포스(종합) 수학Ⅰ(1)(2)18:10 EBS포스(종합) 영어독해유형19:50 잊혀져가는 것들(재)●EBS플러스210:00 중학 ― 사고와 논술1,211:45 꾸러기 실험실12:30 춤추는 소녀 와와13:00 동물대탐험 구리구리 댕댕(1)(2)(3)15:00 초등학교 3힉년 국어, 수학(재)16:00 초등학교 4학년 국어, 수학(재)19:00 방과후 반가운 시간20:20 천사랑
  •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데이비슨 뢰어 지음

    독일 시인 괴테는 “오직 한 언어만 알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아무 언어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물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만 알고 있다면, 그것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는다는 뜻이다.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가 터졌을 때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일종의 ‘벽’을 느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일종의 ‘선민의식’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비판의 대상이 된 이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이라며 합리화하지만, 이같은 교리적 근본주의는 사물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만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현직 목사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고통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비판이 담긴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데이비슨 뢰어 지음, 정연복 옮김, 샨티 펴냄)은 다름 아닌 교회에서 이루어진 설교 내용의 일부이다. 지은이는 올바른 입장은 오로지 하나뿐이며 바로 자신들이 그런 올바른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이야기지만, 전혀 남의 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설교 내용 대부분이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지은이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제일 유니테리언 보편구제설 교회(the First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 목사이다. 그의 설교는 ‘교회의 단어’가 아닌 ‘세상의 단어’로 되어 있다. 평범한 언어만이 다원주의 세계의 수많은 정치적·종교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차이와 유사성을 보여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보통의 언어야말로 가장 정직한 종교적 언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근본주의의 다른 이름인 정통신앙이란 사람들을 자기 집단의 크기에 맞춰 자유로운 생각의 싹을 싹둑 잘라내는 일종의 집단 사고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들은 규율과 통제로 권위와 힘을 배타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고 비판한다. 지은이는 자신이 ‘예수의 종교’를 좋아하는 것이지, 베드로, 바울, 그리고 초기의 교부들이 만들어낸 ‘예수에 관한 종교’를 좋아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이라는 개념에 대한 믿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하느님은 ‘꼭두각시 하느님’이다. 신이 인간의 손에 부림을 당하는 꼭두각시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와 파시즘 사이에는 놀랍도록 강하고 깊은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원리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9·11테러가 일어난 뒤 “테러리스트를 추적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사살해야 한다.”고 외친 목사들이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데서 알 수 있듯,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똑같은 증오의 목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한다. 지은이는 종교란 하느님 혹은 신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더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는 강조한다. 종교의 초점을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초월적인 내세로부터 지금 이곳에서의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독교관이다. 그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듯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충고한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독교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고귀한 이상을 보고,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애쓰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1만 2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문화플러스] ‘종교자유·비판’ 주제 기독언론포럼

    한국기독언론협회와 한국종교사회연구소는 14일 오후 2시 종로5가 여전도회관 2층 마리아홀에서 ‘종교자유와 종교비판의 자유’주제의 제5회 기독언론포럼을 개최한다. 윤이흠 소장이 주제발표를 하고 김용준 전 대법관, 김성만 이일법률사무소 대표, 강춘오 목사 등이 강연자로 나선다.(02)744-1236. 한편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14일 오전 7시 강남구 도곡동 강변교회에서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것들’주제의 조찬기도회를 개최한다.(02)3463-0815.
  • [염주영 칼럼] 순교와 억울한 죽음

    [염주영 칼럼] 순교와 억울한 죽음

    아프간 인질사태로 개신교계가 자성을 요구받고 있다. 기업들이 서로 실적경쟁을 벌이듯 해외선교 경쟁에 나서는 일부 교회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 와중에 희생된 꿈많은 20대 청년의 참혹한 죽음이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심성민(29)씨. 분당 샘물교회 해외봉사단으로 아프간에 갔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두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함께 간 동료들이 돌아온 날 10대 종손을 잃은 그의 아버지는 미치도록 아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남을 돕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섰고, 교회에서도 장애학생을 담당하는 교사로 봉사했다. 공대를 나와 IT분야 회사에 다니다 농촌지도자가 되기 위해 농업 전문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꿈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인질로 잡혀있다가 열흘 남짓만에 머리 등에 다섯발의 총상을 입은 시체로 발견됐다. 스물아홉 그의 삶은 짧지만 고귀했다.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교회는 그의 죽음을 ‘성스러운 순교’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은 아프간에 뿌려진 성도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기독교가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 많은 선교사들이 흘린 피가 큰 역할을 했던 것처럼, 피흘린 그 자리에 복음의 씨앗들이 피어나 열매 맺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아프간에 간 많은 사람들중에 하필이면 자기 교회의 봉사단원들이 인질로 잡힌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이 교회의 목사는 인질들이 붙잡혀 있는 동안에도 성도들의 피가 뿌려진 그곳이 하나님이 맺어준 선교지일 것이라며, 기회가 주어지면 아프간에 더 헌신 봉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다. 이런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의 죽음은 상당부분의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모집해 그곳으로 보낸 것이 교회였기 때문이다. 성장 제일주의 한국 교회의 무모한 해외선교 경쟁이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교회 밖에서 그의 죽음을 성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불운하고 불행한 죽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개죽음이지 어떻게 순교냐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의 죽음을 너무 쉽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아닐까. 그의 죽음을 순교로 포장하기에 앞서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아버지 심진표씨는 아들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졸지에 마음씨 고운 10대 종손을 잃은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한마디 얘기도 없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됐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함께 간 일행은 살아 돌아오는데 내 자식만 주검으로 돌아와야 했는지,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아들이 더욱 보고 싶다고 한다. 그는 정부와 교회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준비중이다. 심성민씨가 아프간으로 떠날 때 죽음을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그가 죽고 없는 지금 순교냐 억울한 죽음이냐를 따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의 죽음은 교회와 사회가 어떻게 관계 맺고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논설실장 yeomjs@seoul.co.kr
  • ‘피랍희생’ 불가피성 주장 파문

    아프간 탈레반에 납치돼 2명이 피살된 것과 관련, 경기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 측 관계자가 “구한말에 미국 선교사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했다.”며 선교 중 사망의 불가피성을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또 피랍자들이 석방된 뒤 샘물교회와 피랍자 가족들이 위험지역 선교 활동을 재개할 방침을 밝히는 등 잇따라 태도를 바꿔 비판 여론도 확산되고 있다.●이슬람 지역 선교 재개 시사 샘물교회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혁수 장로는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기독교에서의 선교 활동 중 순교는 우리나라에서도 모두 경험했던 일인데 기독교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비난한다.”고 말했다.그는 “구한말 미국 선교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학·병원들을 세운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면서 “이제 우리가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나라에 들어가 봉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밝혀 샘물교회 측이 이슬람 지역 선교를 재개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이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교황 중심의 천주교와 달리 기독교는 개별 교회 단위의 봉사 활동이 진행돼 성과는 많아도 세간의 평가가 늘 박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그는 “현재 대다수 언론이 박은조 목사의 설교 가운데 일부만 발췌해 ‘심성민 형제 같은 순교자가 3000명은 나와야 한다.’는 식의 왜곡 보도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면서 “무슨 말을 해도 비난밖에는 돌아오지 않아 일절 대응을 하지 않겠지만 일단 사태가 진정되면 적극적으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피랍 석방자의 어머니 조모(53)씨가 한 선교협회에서 간증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등 간증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계 안팎에서는 ‘신앙 간증은 개인이 선택하는 자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피랍자 가족과 석방자들은 이를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하느님 덕택 석방” 자제 목소리 김종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선교와 간증은 자기 신앙의 확신을 통한 구원으로 상당히 개인적인 부분이라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느님 덕분에 석방됐다.’는 식으로 간증하는 것은 사회의 일반적 사고와 일치하지 않는 한국 교회의 오류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윤형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도 “한국 교회의 잘못된 선교 활동이 문제되고 있는 만큼 피랍 석방자 및 가족들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건강을 회복한 뒤 간증 활동을 하는 것은 피랍 석방자들에게 득될 게 없다.”고 지적했다.성남 류지영 이경원기자 superryu@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마을 주민들에게 두봉(78·본명 렌 뒤퐁) 주교는 ‘웃기는 괴짜 할아버지’로 통한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여는 맘씨 좋은 푸른 눈의 프랑스 선교사. 목사님이나 스님이나 거리낌없이 방 안에 들어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꺼내도 껄껄 웃으며 들어주는 외국인.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문화마을에 두봉 주교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분위기 메이커’인 것이다.2004년 11월 이 봉양마을에 왔으니 올해로 4년째. 한국인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며 거침없이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는 두봉 주교에게 한국은 ‘하느님이 명령한 선교 임지’에 앞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땅’이다.1954년 11월 한국 땅을 밟은 뒤 53년간 단 한번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은 채 서슴없이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두봉 주교. 그에게 과연 한국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왜 이토록 한국을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능력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침을 따른 선교사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선교사의 사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대답에 ‘한국은 나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절절한 심중이 읽힘은 왜일까. 프랑스 오를레앙, 그러니까 잔 다르크의 전설로 유명한 그 고장에서도 한참 벗어난 궁벽한 농촌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두봉은 저 멀찍한 한반도의 부름에 이끌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형제, 아니 사촌형제 두 명까지 모두 7형제가 한 집에서 살며 어렵게 어린시절을 보냈던 두봉은 형제 중에 유일하게 ‘성소’의 뜻을 밝혀 신학자, 목회자의 길을 밟았다. 한국이라는 동양 끝 저쪽 나라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쌓았던 그가 털어놓는 한국과의 인연은 거의 필연으로 다가온다. 오를레앙 신학교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병영생활을 하던 말미에 한국전쟁이 터졌다.“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료들이 거의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내가 한국에 가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그였다. 당시만 해도 ‘위험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한국은 신학생인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먼 나라일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6·25전쟁으로 성직자들이 거의 전멸하디시피 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해 5명의 신부가 배정됐던 것.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발령을 받아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인천 땅을 밟은 게 1954년 11월. 처음부터 “한국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던 그에게 “한국인으로 한국땅에 묻히겠다.”는 변함없는 소신을 준 것은 과연 믿음일까, 삶일까. 전쟁의 끝자락에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폐허만 눈에 띌 뿐” 어느 한 곳 번듯한 게 없었던 한국 땅.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맡은 게 한국 사목의 시작이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당시 대흥동 본당 주임이었던 오기선 신부가 지어준 이름. 두봉 주교의 프랑스 이름자에 맞춰 지었다고 하는데 두봉 주교는 “중국의 두보와 같은 성씨”라며 은근히 이름 자를 치켜세운다.“두견새가 큰 봉우리에서 우니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등학교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활동을 했던 때문일까,‘눈에 밟히는 가난한 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 50명쯤 되는 어려운 집 아이들이 집을 나와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전 JOC 청년회원들이 1년 넘게 같이 어울리며 살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일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당시 대전 MBC 라디오를 통해 진행한 ‘5분명상’ 프로그램은 대전 지역 가난한 이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돼 초대 교구장을 맡을 무렵 “바늘방석에 앉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두달 뒤 주교서품을 받았는데 주교 서품 때 응당 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아 당시 화제가 되었다. 주교라면 12사도 후손의 반열에 오르는 천주교의 큰 명예인데 굳이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마다한 까닭은 무엇일까.“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서민인 내가 무슨 문장을 가져.” 한사코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외국인 사제는 한국인 뒷바라지만 하면 됐지 뭐 교구장 자리까지 차지하느냐.”며 안동교구장 자리를 고사했지만 교황청의 내리누름에 밀려 할 수 없이 눌러앉았다. 지난 1990년,22년 만에 안동교구장 자리를 내놓을 때까지 “한국인 사제를 교구장으로 임명하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 교황청에 탄원을 낸 인물이다. 전통 문화의 고집이 센 ‘유림의 땅’ 안동에서 22년간이나 큰 탈 없이 천주교 교구장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안동지역 최초의 문화회관을 만든 것을 비롯, 함창에 상지 여중·고를 세운 일,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한 일…. “지금 생각해도 그 의롭고 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도 안동은 전통이 살아있는 유별난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더군요. 천주교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지요.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1979년 ‘안동농민회사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은 잊지 못할 큰 사건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영양군이 알선한 불량감자씨를 심은 농민들이 감자농사를 망쳐 피해보상을 받았는데 보상운동에 앞장선 오원춘이 정부기관에 납치되어 폭행당한 사실을 안동교구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들고 일어서 전국에 폭로한 것.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교구장 두봉 주교의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교황청이 나서 추방명령이 철회됐다. 두봉 주교에게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는 별명을 붙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젠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교구장에서 은퇴한 게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둔 채였다.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공소에서 능곡성당 신부를 도와 성직자와 수도자 신도들의 피정 지도를 14년간 하다가 지난 2004년 안동교구의 주선으로 이곳 봉양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향격인 안동 지역에서 살게 해달라는 주문이 받아들여져 이곳에서 살게 됐는데 너무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한다.“사는 집에 따라 마음가짐은 물론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달라진다.”며 한사코 번듯한 집을 마다했던 그다. “한국 천주교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중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은 나의 모범 선배”라는 두봉 주교. 그 10명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한다. 사목표어는 만들지 않았지만 마음속 표어는 있지 않으냐는 짓궂은 물음에 마지못해 떠듬떠듬 말한다.“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 “기도 많이하고 남과 함께 살다가 주님의 뜻이 뚜렷해지면 주님 뜻대로 하겠다.” 신부로 15년, 주교로 21년 한국에서 40여년을 선교한 끝에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지금도 한 달에 절반은 피정에, 강의에 아주 바쁘다. 인터뷰를 마친 뒤 고추며 가지며 텃밭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들을 주섬주섬 챙긴 주교가 거실 벽에 걸린 문구를 가리킨다. 두봉 주교 은퇴 후에 안동교구 사제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목표어란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 출생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1년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3년 사제 서품 ▲1954∼1955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1955∼1965년 대전교구 대흥동 본당 보좌신부 ▲1967∼1969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 임명. 주 교 서품 ▲1982년 프랑스 나폴레옹훈장 ▲1990년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1∼2003년 행주외동 행주공 소 피정 지도 ▲2004년∼ 봉양문화마을 거주
  • 개신교 “무리한 해외선교 반성” 참회기도회

    무리한 해외선교로 비난을 받아온 개신교계가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사 100여명은 서울 종로5가 연동교회에서 참회기도회를 열고 아프간 피랍 사태로 불거진 한국 교회의 폐해를 고백했다. 김형태 연동교회 원로목사는 “목사들의 물량적 교회 성장 정책은 파송 선교사 수의 증가를 과시하거나 외국 자원봉사자 수와 업적을 성과처럼 선전하는 전투적 선교활동을 부추기고 있다.”며 뉘우쳤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금지령 해지 후 아프간 선교 계속”

    “금지령 해지 후 아프간 선교 계속”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가 미국의 유명 기독교잡지 ‘크리스쳐니티 투데이(Christianitytoday)’와 인터뷰를 갖고 소속 교인들의 피랍과 석방과정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털어놨다. 이 인터뷰에서 박 목사는 정부의 규제를 넘지 않는 선에서 중동 지방 선교를 계속 해나가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박 목사는 “교회는 후회뿐이다.”라는 말로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한국인들, 특히 기독교인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비판적이며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면서 “인질들이 피랍된 상태에서는 드러내고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피랍자들이 돌아온 지금 그동안 갖고 있었던 생각을 쏟아내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와 테러단체가 대면 접촉을 한 것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 여론에 대한 질문에는 “국제적인 이슈가 될만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며 “그러한 여론을 무릅쓴 정부의 노력에 감사한다.”고 답했다. 앞으로의 선교 활동에 대한 질문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박 목사는 “이 사건으로 무슬림 국가들에 대한 선교의 길이 막히지 않기를 바란다.”면서도 “위험 지역이 아닌 무슬림 국가들로 선교단을 파송하려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금지령이 해지된 후에 다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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