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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광훈 “신영복 존경하는 문재인 간첩…황교안, 가르쳐도 안돼”

    전광훈 “신영복 존경하는 문재인 간첩…황교안, 가르쳐도 안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전광훈 목사가 31일 문재인 대통령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겨냥해 각각 “간첩”, “가르쳐도 안 된다”며 수위 높은 비난 발언을 쏟아냈다. 전 목사는 이날 서울 용산시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열린 ‘자유통일당 중앙당 창당대회’ 축사에서 “신영복을 존경하는 문재인은 간첩”이라며 “문재인은 신영복이 무슨 죄를 지었나 아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의 목표는 두가지”라면서 “대한민국을 해체하고 김정은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쳤다. 정신나갔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문수 자유통일당 대표와 동시에 하늘로부터 사인이 오게 된 것”이라며 “저는 믿음이 적어서 불안해 과연 하나님이 이것(창당)에 동의할까 기도를 해보니까 성령은 ‘잘한다, 잘한다’ 했다”고 말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에 대해서도 강력한 비판 발언을 내놨다. 그는 “황 대표가 결국 공천관리위원장과 공심위원을 임명한 것을 보니 북한으로 넘어가겠다”면서 “(인터넷) 댓글에 ‘전광훈, 황교안 가르치세요’라고 하지만 가르쳐도 안된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황교안은 정치가가 아니다. 영양가 없는 사람들과 통화만 한다”며 “4·15 총선에 100% 망하게 돼 있다. 후보 단일화만이 대한민국을 살리지만 한국당은 후보 단일화를 못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심재철 “‘안철수 현상’ 사라진 지 오래…냉엄한 정치판, 통합 합류해야”

    심재철 “‘안철수 현상’ 사라진 지 오래…냉엄한 정치판, 통합 합류해야”

    “안철수 현상 사라져, 통합 합류해야”“김문수·전광훈 공로 인정, 선거 쉽지 않아”“보수, 현실적으론 통합 밖에 없다”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는 31일 혁신통합추진위원회 국민보고회와 관련해 “오늘 민심 요구인 통합열차가 출발한다”면서 “정치인 안철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전광훈 목사도 통합에 합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보수 목표는 문재인 정권 심판”이라며 “통합 와중에 자신의 지분은 챙기겠다는 이기심으로 통합 열차를 늦추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안철수 전 의원을 두고는 “3번의 창당, 2번의 탈당 경험이 안철수 정치의 한계를 확인시켰다”면서 “정치 초기의 안철수 현상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김문수 전 지사, 전광훈 목사에 대해 “국민 분노를 광장으로 끌어온 것은 공로”라면서도 “그러나 선거판에도 쉽게 통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지적했다. 심 원내대표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통합 이외엔 없다”며 “쪼개진 채 외치는 반문연대는 부족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작은 차이를 멈추고 문 정권 폭정 막는 통합열차 탑승해 함께 해야 훗날 도모가 가능하다”며 “그게 냉엄한 정치판이라는 것을 세 분도 잘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정부의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두고는 “뒷북대응·비밀주의로 국민 혼란을 가중시킨다”면서 “일상 파괴가 일어나는데 먼산 보기 한다”고 비난했다. 우한시 교민 전세기 이송 과정에 대해서는 “문 정부의 외교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면서 “평소 중국 눈치 보며 아부했지만, 급할 때는 도움 전혀 받지 못하는 초라한 꼴”이라고 말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전광훈 “‘하나님 까불면 죽어’ 발언 당시 성령 충만”

    전광훈 “‘하나님 까불면 죽어’ 발언 당시 성령 충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직 출마해 연임 성공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가 30일 회장직 연임에 성공하며 자신이 했던 신성모독 논란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전광훈 목사는 지난해 청와대 앞 거리 집회에서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당시 성령이 충만했다”면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이 맞다. 걱정을 끼쳐 드린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회에 관한 기사를 쓰거나 취재를 할 경우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을 기자로 써라. 그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전 목사는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의 단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불법 모금 의혹, 횡령 등 각종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지만 후보 자격 심사를 통과하고 한기총 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했다. 이날 선거는 반대파로 분류되는 총대(대의원)들의 참석이 배제된 채 치러졌고 박수 추대로 연임에 성공했다. 전 목사는 이날 총회에서 “불법 고발한 사람들은 제명하게 돼 있다”며 “(이들을) 다시 받아들여 총회를 하면 총회가 안 된다. 막 난리 치고, 소란치고 총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법에다 소송까지 한 사람 아니냐”고 주장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포토] 전광훈 목사, 한기총 대표회장 연임

    [포토] 전광훈 목사, 한기총 대표회장 연임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목사가 30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한기총 정기총회에서 26대 한기총 대표회장에 선출된 뒤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 나브라틸로바와 매켄로 호주오픈 시위 “경기장 이름 굴라공으로”

    나브라틸로바와 매켄로 호주오픈 시위 “경기장 이름 굴라공으로”

    왕년의 철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64 체코)가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도중 손수 만든 플래카드를 펼쳐 보여 호주테니스협회가 발끈했다. 알 만한 사람이 더 그러느냐는 것이다. 나브라틸로바는 28일(현지시간) 멜버른의 마거릿 코트 아레나에서 열린 호주오픈의 이벤트 게임인 레전드 매치의 엄파이어석에 앉아 심판을 본 뒤 몇 명 안되는 관중들 속의 존 매켄로(61 미국)를 찾아 코트에 나오게 한 뒤 플래카드를 펼쳐 보였다. 이 경기장 이름을 이본느 굴라공 아레나로 바꾸자는 취지였다. 그녀는 문방구점에서 사온 캔버스와 펜을 이용해 묵고 있던 호텔 객실에서 호주 원주민들의 애보리진 스타일로 플래카드를 손수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굴라공은 네 차례나 호주오픈을 우승했고 일곱 차례 그랜드슬램 대회 단식을 제패한 애보리진 레전드다. 나브라틸로바는 18차례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에다 세 차례나 호주오픈 단식을 제패했다. 매켄로는 일곱 차례 메이저 단식을 우승했다. 마거릿 코트가 2003년에 24번째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직후 마거릿 코트 아레나로 명명됐는데 코트가 대놓고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성 전환자)를 공격하는 발언을 해와 경기장 이름을 다시 정해야 한다고 나브라틸로바는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3년 전에는 코트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일간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 실어 굴라공은 단순한 우승 이력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나브라틸로바는 BBC 인터뷰를 통해 “(경기장 이름을 바꾸자는) 논란이 딱 그친 것처럼 느껴져”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려고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켄로도 일전에 유로 스포트 인터뷰를 통해 코트의 “공격적이고 동성애 무섬증” 견해를 비판했다.나브라틸로바는 “몇년 전에 끝냈어야 할 일”이라며 “호주테니스협회도 빅토리아주 정부도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거릿은 동성애 커뮤니티를 공격을 곱절은 늘렸다”며 “우리 마눌 율리아도 내게 ‘당신이 이태껏 불평해왔는데 앞으로 무얼 할 수 있겠나’라고 물어본다.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편지도 썼고 핵심을 찔러 발언도 했다. 그리고 여기 도착해 코트에 들어서니 (다른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늘 테니스계의 변화에 관심도 많고 목소리를 내온 매켄로가 눈에 띄어 불러냈다며 “논란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내가 옳은 일을 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2012년 영국 선수 로라 롭슨은 이 경기장에서 뛰면서 무지개 머리 밴드를 썼다. 널리 알려진 대로 무지개는 성적 소수자(LGBTQ) 존중을 상징한다. 2017년 코트가 호주 국적 항공사 콴타스를 겨냥해 “동성 결혼을 주선하는 프로모터”라고 비난했을 때도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다. 기독교 목사가 된 코트는 한 기독교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테니스 판이 레즈비언들과 트랜스젠더 아이들이 득시글대는 악마의 작업장으로 전락했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마침 27일은 코트의 4대 메이저 우승을 모두 차지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호주테니스협회는 기념식까지 성대히 열어 축하했다. 나브라틸로바 역시 “어떤 식으로든 코트의 성취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건물이든 공항이든, 거리든 삶의 일부만 반영하고 나머지를 무시하면 안된다. 난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항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우승을 존중하는 옳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호주테니스협회는 28일 “두 높은(high-profile) 손님들”이 프로토콜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그 전부터 여러 차례 코트의 개인적 견해에 찬동하지 않으며 “평등과 다양성, 포용”을 지향하는 가치에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혀왔다. 하지만 의견이 다르다고 이렇게 프로토콜을 벗어난 행동을 눈감아줄 수는 없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둘과 협력하겠다고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개헌 저지’ 꺼낸 한국당… ‘황교안 빅텐트’는 삐걱

    ‘개헌 저지’ 꺼낸 한국당… ‘황교안 빅텐트’는 삐걱

    현역 여론조사 외부기관에 의뢰 방침 黃 “공관위, 공정하게 심사 진행할 것” 김문수 “좌클릭 반대, 신당 창당한다”자유한국당 공천관리위원회가 27일 ‘청와대 낙하산 부대’ 등의 국회 진입을 저지해 ‘사회주의식 개헌’을 막겠다는 총선 공천 최우선 목표를 내놨다. 공천 단계에서부터 정권과 대립각을 세워 지지층을 결집한다는 전략이다. 김형오 공관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청와대 출신을 ‘낙하산 부대’, 86세대를 ‘586 얼치기 운동권’이라 칭하며 “이들이 21대 국회에서 틀림없이 사회주의식 헌법 개정을 할 것”이라며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101석)을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관위가 적절한 인물을 엄중히 선발하겠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청와대 출신이나 86세대 인물을 공천하는 곳에 ‘맞춤형 자객’을 보내겠다는 뜻이다. 공관위는 이날 현역 의원에 대한 여론조사 실시를 의결했다. 김 위원장은 “여의도연구원에서만 하면 반발이 있지 않겠나. 누가 봐도 공정하게 할 것”이라며 복수 외부 기관 등에 의뢰 방침을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지난해 총선기획단이 마련한 입시·채용·병역·국적 4대 비리 연루자 원천 배제 기준에 대해선 “더 엄격하게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당 해체를 요구한 김세연 의원의 합류, 이석연(전 법제처장) 부위원장의 “황교안 대표는 손을 떼라” 발언 등으로 공관위에 대한 일부 지지층의 불만이 감지되자 이를 진화하는 발언도 내놨다. 김 위원장은 “황 대표와 공관위는 업무적으로 명확히 분리돼 있지만 ‘원팀’으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도 촉구하며 지지층을 달랬다. 황 대표도 페이스북에 “공관위원들의 의견이 다 같을 수 없고, 독점할 수도 없는 구조이기에 토론하면서 공정한 심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한편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이날 한국당의 보수통합 논의 및 공관위원 선임에 불만을 표하며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목사와 함께 신당 창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황 대표의 ‘빅텐트’ 구상에도 차질이 생겼다. 김 전 지사는 페이스북에 “‘유승민당’과 통합하려고 한국당을 해체하고 태극기를 버리고 좌 클릭 신당을 창당하는 데 반대한다”고 썼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김문수, 전광훈과 신당 창당…홍준표 “오죽 답답했으면…”

    김문수, 전광훈과 신당 창당…홍준표 “오죽 답답했으면…”

    김문수 “한국당, 태극기 버리고 좌클릭 반대”홍준표 “대통합 필요한데 좌파들만 살판났다”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27일 자유한국당이 추진하는 보수통합에 반대하며 신당 창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신당에는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목사가 후원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지사는 이날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한국당이 문재인 정권과의 투쟁을 가장 열심히 한 ‘광장세력’을 극우로 몰고 있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태극기를 뺀 보수통합에 반대한다.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말했다. 김 전 지사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유승민당’과 통합하기 위해 자유한국당을 해체하고 태극기를 버리고 좌클릭 신당을 창당하는 데 반대한다“고 밝혔다. 총선과 관련해서는 ”선거의 전략·전술과 정당의 강령은 다른 차원“이라며 한국당과의 선거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다. 김 전 지사에 따르면 신당명은 ‘국민혁명당’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수통합과 관련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결국 총선은 각개전투로 치르고, 총선 후 ‘헤쳐모여’로 재편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경제 폭망, 외교 왕따, 북핵 노예, 실업 폭증으로 3년 만에 판을 뒤집을 호기를 맞이했는데도 갈가리 찢어져 각자 자기 팔만 흔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아울러 “보수 우파가 대통합하는 것이 시대 정신인데 한국당과 유승민당(새로운보수당)은 서로 자기들만 살기 위해 ‘잔 계산’을 하기 바쁘고, 태극기 세력은 조원진당·홍문종당·김문수당으로 핵분열하고, 보수 우파 시민단체는 20여개 이상 난립하고 있으니 좌파들만 살판이 났다”고 지적했다. 또 김 전 지사가 신당 창당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해서는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며 “25년 전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영혼이 맑은 남자 김문수’라고 별칭을 내가 붙여 줄 만큼 순수하고 바른 그가 오죽 답답했으면 신당 창당을 결심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라고 적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해리스 대사, 호르무즈파병 압박 등으로 ‘총독’ 비난받아역대 23명 대사 중 유일 직업군인 출신, 국민에게 낯설어결례 논란 전임 대사도 자유롭지 않아…현대사에 영향력미국대사 과거 막후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공공 외교관변화된 역할 조정 과정서 시행착오 겪으며 논란 불거져 ●한국민에게 낯선 미국대사, 해리스 “해리스 대사는 한국 총독처럼 행세하지 않느냐. 자기가 무슨 총독인 줄 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17일 공개된 재단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에 대해 이같이 언급했다. 해리스 대사가 지난 7일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이 그곳에(호르무즈해협)에 병력을 보내길 희망한다”며 정부에 파병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총독 행세’라고 비판한 것이다.해리스 대사가 16일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같은 날 신년기자회견에서 남북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향후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당정청은 일제히 반발했다. 다음 날 “의견 표명은 좋지만 우리가 대사가 한 말대로 따라 한다면 대사가 무슨 조선 총독인가”(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내정간섭 같은 발언은 동맹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민주당 설훈 최고위원), “대북정책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해당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통일부 이상민 대변인),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부적절하다”(청와대 관계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앞서 해리스 대사는 호르무즈해협 파병과 남북 협력 사업뿐만 아니라 한미 방위비분담협상,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과 관련 미국 정부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표명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해 11월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인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을 관저로 불러 방위비분담금을 50억 달러 내라는 요구만 20번 정도 반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외교적 결례라는 비난을 받았다. 해리스 대사는 같은 달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린 데 대해 “한국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안보 영역으로 확대한 데 대해 실망했다”며 종료 결정을 번복할 것을 압박했다.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우선 대사의 개인적 성향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해리스 대사는 첫 직업군인 출신 주한 미국대사다. 1949년 부임한 1대 존 무초 대사부터 해리스 대사까지 23명 대사 중 6명을 제외하면 모두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비외교관 출신 6명 중 해리스 대사를 제외하고는 외교를 전공한 교수이거나 한국과 인연이 깊은 목사, 외교에 익숙한 중앙정보부(CIA) 출신 요원, 국회와 국방부에서 외교를 담당한 정치인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외교적 수사보다 직설 화법에 익숙한 해리스 대사가 한국민에겐 ‘낯선 대사’라는 것이다.외교 소식통은 “한국어에 능숙한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와 한국민과 스킨십을 즐겼던 마크 리퍼트 대사에 익숙했던 한국민에게 4성 장군으로 태평양사령관을 역임한 해리스 대사의 야전군 사령관 스타일이 낯설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다만 주한 미국대사의 행보와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한미 관계 현안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표출하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여 이 대통령의 반감을 샀다. 박정희 정권에 베트남 파병을 압박했던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카운터파트인 이동원 외무부 장관을 ‘패싱’하고 정일권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짓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진보적인 노무현 정부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정부가 마찰을 빚던 당시 노무현 정부의 남북 화해협력 정책과 어긋나는 발언을 해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의 총독’이라는 논란은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 정부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한 미국대사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불거졌다는 해석이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마다 주·조연으로 등장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와 한국 정치에서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국가원수급 대우 받은 초대 미국대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주한 미국대사는 존 무초 대사다. 무초 대사는 1948년 8월 13일 주한 최고대표로 임명돼 사흘 후 부임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1일 한국을 정부로 승인하고 4월 7일 무초 최고대표를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했다.1년 전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을 ‘장엄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4월 20일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는 이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삼부 요인이 모두 참석했고, 무초 대사는 중앙청에 육해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입장했다. 국가원수급 대우를 받은 무초 대사는 1950년 이 대통령과 6·25 전쟁 첫 2년을 함께 겪었다. 무초 대사는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초 미국 의회에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전쟁 당일인 25일 워싱턴 국무부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들어갔다. 무초 대사는 피난가겠다는 이 대통령을 말렸지만, 이 대통령은 무초 대사에게 알리지 않고 27일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이후 한국 정부를 따라 수원·대전·대구·부산으로 피난가던 도중 이 대통령을 자신의 차에 태워 피신시키기도 했다. ●이승만 하야 작전의 선봉장? 이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을 한 친미주의자였지만, 집권기에는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이 대통령은 6·25 전쟁 기간 휴전 반대,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휴전을 원하던 미국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미국은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뿌리쳤고, 미국의 우려에도 독재의 길을 걸어가면서 양측의 갈등은 악화됐다. 미국 정부는 이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미국대사들이 야당 인사들과 접촉하며 최전선에서 하야 계획을 수행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당연히 미국대사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1955년 5월 취임한 3대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재한 미국인 상사에 세금을 물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충돌하자 이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반감을 느껴 이례적으로 미국 정부에 대사 교체를 요청했고, 취임 다섯 달 만에 레이시 대사는 사임했다. 후임인 4대 월터 다울링 대사는 진보당 사건, 보안법 파동 등 이승만 정권의 정치 탄압을 두고 이 대통령과 부딪쳤다. 다울링 대사는 이승만 정권이 1958년 야당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 등을 간첩 혐의로 체포해 사형을 구형하자 정권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을 두 차례 만나 조봉암을 구명하려 했으나 조봉암은 1년 후 사형당한다. 1958년 12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일방 통과시키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울링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1959년 12월 부임한 5대 월터 매카너기 대사는 이승만 정권의 종말에 일조했다. 매카너기 대사는 1960년 4·19 혁명 당일 “시위자들과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시위대에 우호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19일과 21일 경무대에 이 대통령을 찾아가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26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리자 매카너기 대사는 “전국적으로 퍼진 정당한 국민의 불만 표시에 한국 정부는 즉각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고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다”며 이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시사하는 성명을 냈다. 직후 경무대로 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의사를 전달 받았다. 경무대 앞에 있던 시위대는 매카너기 대사의 차가 경무대에서 나오자 그가 이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며 ‘매카너기 만세’, ‘미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박정희 인정하되 미국 요구 관철시킨 대사들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하에서 미국대사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반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을 돕기도 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이들을 견제하기도 했으며, 국익과 가치의 딜레마에서 이들의 독재를 방관하기도 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한 달여 후 취임한 6대 새뮤얼 버거 대사는 박정희의 쿠데타 세력을 사실상 인정하되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쿠데타 발발 당일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사대리와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전역하고 1963년 10월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2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기본조약 등을 체결했다.7대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박정희 정권에 미국이 수행하던 베트남전 참전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자 그 해 9월 베트남에 의무 요원과 태권도 교관을 파견했는데, 브라운 대사는 12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증파를 요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0월부터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했고, 브라운 대사는 이듬해 3월 한국의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을 담은 ‘브라운 각서’를 전달했다. 브라운 각서와 월남 특수로 한국은 경제·군사적 성장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국군 장병의 피를 돈을 받고 팔았다는 비난도 제기됐다. ●유신 정권과 대립했던 대사들 1970년대 미국에 닉슨·포드·카터 정부가 차례로 들어서고,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 개정으로 독재의 길을 걸으며 양국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냉전 완화(데탕트)를 이유로 아시아에서의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자력 방위를 요구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8대 윌리엄 포터 대사는 1970년 박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6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감축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박 대통령이 감축에 불만을 갖고 미국의 주한미군 주둔비용 지원 요구를 거부하자 포터 대사는 “(박 대통령은) 엉클 샘(미국)의 큰 젖통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려 한다”며 독설을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등 동맹국이 미국을 벗겨 먹는다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한미군 감축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셈이다.1971년 10월 취임한 9대 필립 하비브 대사는 ‘미국 당대의 가장 걸출한 전문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구명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비브 대사는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이 야권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하자 조용하지만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했다. 하비브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고 있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끝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서울지부장이자 후일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회고했다. 김대중은 납치 닷새 후 서울 자택에서 풀려났다. 후임 10대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는 박정희 정권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사실을 알아채고 박정희 정권에 경고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무마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독재 정권의 견제자인가 방관자인가 11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8년 7월 취임, 이듬해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을 겪은 인물이다. 1977년 출범한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외교 노선을 앞세우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고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함에 따라 한미 관계가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카터 대통령을 설득해 주한미군 철군 계획을 철회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월 국회에서 여당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를 동원해 야당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카터 정부는 항의의 뜻으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기도 했다.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와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최소 방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과 그의 참모들을 만나 광주에서의 군사 작전을 항의하기도 했으나,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하루 전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에) 군사작전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백악관에 보고한 것으로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신군부의 진압작전을 묵인했다고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신군부의 행동에 미국이 공모자는 아니었으나 무력했던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12대 리처드 워커 대사는 1981년 8월부터 1989년 1월까지 약 7년 5개월간 재임해 현재까지 최장수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1대 무초 대사부터 11대 글라이스틴 대사까지 모두 직업 외교관이었으나, 워커 대사는 학자로서 첫 비외교관 출신 주한 미국대사이기도 하다. 워커 대사는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을 석방시키는 데 역할을 했지만, 김대중 석방 대가로 전두환 대통령의 조기 방미를 성사시켜 12·12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민주화 이행기의 CIA 출신 대사들 13대 제임스 릴리 대사와 14대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CIA 요원 출신으로, 1987년 6·10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까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목격했으며 민주화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방조 의혹으로 반미 정서가 고조됐던 1980년대 말 부임했던 릴리 대사와 그레그 대사는 한국민의 거센 반감에 직면해야 했다. 릴리 대사는 반미 시위대로부터 수차례 인형 화형식을 당했으며, 그레그 대사는 시위대의 관저 침입을 겪기도 했다. 특히 릴리 대사의 후임으로 연이어 CIA 출신인 그레그 대사가 미국대사로 임명되자 야당과 언론은 ‘미국이 한국을 외교 대상이 아닌 정보·공작 대상으로 본다’며 반발하기도 했다.하지만 1987년 6·10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명동성당에 강제 진입해 학생들을 연행하려 하자 릴리 대사는 13일 최광수 외무부 장관을 만나 “전 세계가 떠들썩해질 것”이라며 진입을 저지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검토하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시위를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요청해 받았다. 릴리 대사는 전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으나 청와대는 18일 거절 의사를 밝혔다. 릴리 대사는 결국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 친서를 전달하고 “무력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고 경고했으며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레그 대사는 취임 약 4개월 후인 1990년 1월 광주를 찾아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책임을 묻는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취임 후 첫 외국 정상으로 초청한 것은 김대중을 사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레그 대사는 노태우 정권의 남북화해정책과 북방정책을 지지했으며 미군 전술핵무기의 한반도 철수를 추진하며 1992년 남북 한반도비핵화선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레그 대사는 1992년 남북화해를 위해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하도록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미 정부는 그레그 대사와 상의 없이 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은 준선시상태를 선언했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그레그 대사는 2015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북핵 전문 외교관 전성시대 1993년 북한의 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되자 미국의 대한국 외교는 물론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북핵 문제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1993년 11월 취임한 15대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목사 출신으로 직업 외교관은 아니었으나, 1947~1950년 서울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1959~1964년 연세대에서 신학을 가르친 ‘지한파’였다. 레이니 대사는 1994년 북한이 영변의 핵연료봉 추출을 강행하고 미국은 영변 핵시설 정밀 타격을 시행하려 하면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오르자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대북 특사로 방북해 중재할 것을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으나, 7월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하지만 북미는 9월 제네바합의를 타결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켰다.레이니 대사의 후임인 16대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 17대 토머스 허버드 대사, 18대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모두 북핵 전문 외교관이다. 보즈워스 대사는 1995~1997년 제네바합의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는 역할을 맡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보즈워스 대사는 2001년 주한 미국대사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2009~2011년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대북특별대표를 맡아 북미 협상을 총괄했다. 그는 미국 대북 협상파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허버드 대사 역시 1994년 북미 제네바협상에 실무급으로 참여한 대북 협상 전문가다. 2001년 9월 취임한 허버드 대사는 이듬해 2차 북핵 위기를 맞게 된다. 아울러 2002년 6월 주한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 사건, 이듬해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 2004년 주한미군 기지 평택 이전 반대 시위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한미 동맹의 균열 우려가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는 데 임기를 보냈다.후임인 힐 대사는 2004년 9월 취임해 이듬해 2월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로 지명됐으며, 두 달 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취임하면서 대사직을 내려놓았다. 힐 대사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반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힐 대사는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리코드 브레이커’ 대사들의 명과 암 19대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부터 23대 해리 해리스 대사까지 다섯 명의 대사는 주한 미국대사 역사의 ‘신기록 보유자’들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직전에 주러시아 미국대사를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 중 역대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한국어 구사 대사, 성 김 대사는 최초의 한국계 대사였으며 마크 리퍼트 대사는 현재까지 최연소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해리스 대사도 최초의 직업군인 출신 대사 기록을 세웠다. 2005년 10월 취임한 버시바우 대사는 역대 주한 미국대사 중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하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버시바우 대사는 부임 초기 북한의 인권과 위조지폐 문제를 거론하고 김정일 정권을 ‘범죄 정권’이라고 칭하며 대북 강경 기조를 보였고 당시 노무현 정부는 버시바우 대사에게 북한 비난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버시바우 대사는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실망스럽다”고 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빚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손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를 주장한 데 대해 “과학적 근거도 없이 불안을 야기한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했으며, 민주당 측은 이를 공개하며 반발했다. 다만 버시바우 대사는 힐 대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을 상대로 한 공공 외교를 이어나갔다. 스티븐스 대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 국민과 접촉면을 늘리면서 공공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사로 평가받는다. 스티븐스 대사는 미국 평화봉사단에 들어가 한국 복무를 자원, 1975~1977년 충남 예산군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다. 그는 1978년 국무부에 입부한 후 1983~1989년 한국에 다시 와 서울 대사관과 부산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2008년 10월 취임하자마자 33년 전 봉사한 예산중학교를 방문, “예산은 내가 외교관으로 필요한 자질을 배웠던 곳”이라며 한국 국민의 마음을 샀으며, 블로그도 개설해 글을 연재하며 ‘파워 블로거’로서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후임 성 김 대사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6자회담 특별대표를 역임하다 그 해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김 대사는 2017년 주필리핀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으나 이듬해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과 정상회담 조율을 위한 실무협상을 했다. ●‘같이 갑시다’ 한미 동맹 캐치프레이즈 만든 리퍼트 리퍼트 대사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 보좌관을 지내다 2008년 오바마 정부 인수팀에 합류했다. 정부 출범 후 국방장관 수석보좌관,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 국방장관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2014년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이전 직업 외교관 출신 대사들이 ‘늘공’(늘 공무원)이었다면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참모로서 관직을 맡은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셈이었다.리퍼트 대사는 2015년 3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기종 씨에 의해 습격을 당했을 때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습격 소식이 전해지자 리퍼트 대사의 수술은 물론 한미 관계에 대한 우려의 여론이 높아졌다. 리퍼트 대사는 사건 당일 수술을 마치고 트위터에 “한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귀합시다. 같이 갑시다!”라고 올리며 우려의 여론을 신속히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같이 갑시다’(Go together)는 한미 동맹의 캐치프레이즈가 돼 한미 동맹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인사말이나 건배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됐다. 리퍼트 대사는 대사 부임 전 한국과 인연이 별로 없었지만, 부임 후 빠르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익히며 한국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리퍼트 대사는 한국 부임 후 갖게 된 첫째 아들에게 ‘세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줬고, 딸에게도 ‘세희’라는 미들 네임을 붙였다. 야구팀 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유명한 리퍼트 대사는 대사 재임 기간은 물론 퇴임 후에도 야구장을 찾아 두산을 응원하면서 ‘야구 외교’를 선보이고 있다. ●막후 외교서 공공 외교로 대사의 역할 변화했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2월 주호주 미국대사로 지명됐다가 세 달 후 주한 미국대사로 재지명된 뒤 7월 취임했다. 전임 리퍼트 대사가 퇴임하고 1년 6개월여 만에 공석을 메운 터라 기대도 높았던 반면, 그가 대북·대중 강경파라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교차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6월 상원 외교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실제 협상에 진지한지 가늠하는 차원에서 주요 (한미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며 트럼프 정부의 대북 협상 기조에 보조를 맞췄다. 해리스 대사가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우려를 표하고 문 대통령의 남북 협력 사업 추진에 한미 협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개인의 신념이라기보다 트럼프 정부의 기조를 대변한 것이다. 해리스 대사뿐만 아니라 전임 대사들도 한국 정부와 이견이 있는 이슈에서 항상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버시바우 대사도 재임 기간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의 기조대로 ‘남북 경제협력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 해리스 대사처럼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대사도 2010년 한미의 핵심 현안이자 2000년대 한국 내 반미 정서의 주요인이었던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한국의)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기를 바라지만 이 사안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다”며 비록 정제된 톤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그럼에도 해리스 대사의 발언이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트럼프 정부가 방위비분담협상 등 한미 관계의 현안에 대해 한국 정부를 전례 없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공교롭게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중에 해리스 대사가 부임하고, 그의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가 한국 정부에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번복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며 해리스 대사에게는 ‘고압적인 미국 외교관’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한미 관계가 과도기를 겪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 모두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을 변화한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같은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냉전 구도가 해체되고 한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한미 관계가 상호 호혜적 관계로 재조정되는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대국민 공공 외교를 통해 한미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변화할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과거 미국대사의 한 마디에 한국 정부의 기조가 흔들렸던 경험을 겪었던 한국민은 미국대사의 발언을 정부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간주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대사들도 한국과 미국이 불평등한 관계에 있었던 역사와 한국민의 의심을 고려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오해를 자초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1990년대 초반까지 주한 미국대사는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냉전 이후 한국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미국대사는 한미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로 변화했다”고 했다. 이어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대사 개인의 성향에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한미 정부가 변화된 양자 관계 속에서 이견을 조율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제된 톤으로 발표하는 데 서툰 모습을 보이는 탓도 있다”고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불교계 만나라” “점잖으면 진다” 황 대표에 충고한 원로들

    “불교계 만나라” “점잖으면 진다” 황 대표에 충고한 원로들

    인명진 “천주교·불교 지도자도 만나라”박관용 “너무 점잖으면 정권 탈환 못해”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2일 전직 당 대표 및 비상대책위원장, 전직 국회의장단과 잇달아 만나 4·15 총선 승리를 위한 조언을 들었다. 이날 황 대표와 만난 일부 원로는 “좀 더 거칠게 싸워라” 등의 직설적인 충고를 전하기도 했다. 황 대표는 이날 낮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황우여 전 새누리당(한국당 전신) 대표, 인명진·김병준 전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났다. 황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지금 나라가 많이 어렵고 우리 당도 힘든 상황”이라며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서 이 정권의 잘못된 폭정을 반드시 막아내도록 힘을 내겠다”고 말했다. 황우여 전 대표는 “절대 사심을 가지지 말고 국민들의 근심과 걱정을 품는다는 마음으로 (공천 등을) 해달라”고 말했다. 김병준 전 위원장은 통합과 관련해 “한국당이 쇄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통합을 통해 수도권에서 ‘어벤져스’를 만들어 큰 승리를 거뒀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인명진 전 위원장은 황 대표에게 쓴소리를 했다. 인 전 위원장은 “8석 있는 정당과 108석 있는 정당이 1대1로 만나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납득이 안 간다”며 “탄핵 이후 갈기갈기 찢겨서 지내왔는데 화해와 용서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는 “시간도 없는데 밥그릇 싸움, 지분 싸움하고 결국 (통합이) 안 되면 오히려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특히 갈릴리교회 원로 목사인 인 전 위원장은 “최근 개신교가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목소리가 큰데, 우리 사회가 개신교만 있지 않다”며 “저도 개신교 목사이지만 국민들이 (전광훈 목사를 보고) 저게 개신교라고 인식할까 봐 상당히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대표님이 천주교 인사, 불교 지도자들을 만나보셨는지 (모르겠다)”라며 “바둑이나 장기도 훈수 두는 사람이 훨씬 더 잘 알기 마련인데, 멀리 계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지낸 이완구 전 총리, 새누리당 대표를 지낸 김무성 의원,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 등은 개인 일정 등을 이유로 오찬에 불참했다. 이어 황 대표는 이날 저녁 한국당 계열 정당 출신인 박관용·박희태·강창희 전 국회의장과 만찬을 했다. 박관용 전 의장은 “정권을 빼앗으려면 조금 와일드해야 한다. 너무 점잖으면 정권을 빼앗지 못한다”며 “이번 총선은 정권을 빼앗을 수 있는 결정적인 첫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황 대표가 “당을 젊게 하자는 관점에서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고 소개하자 강창희 전 의장은 “국민에게 감동을 준다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수 있지만 그분들이 국회의원이 되어서 과연 정책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황 대표는 “유념하겠다”며 “영입 인재 중 외교·안보 전문가인 신범철 박사라는 인재가 있는데 용기도 있고 실력도 있어서 영입했고 아마 지역구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답했다. 황 대표는 만찬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야당은 투쟁이다. 계속 싸워라’는 말씀을 해주셨다”며 “강 전 의장은 ‘통합에 힘 써달라, 다 들어오게 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성전환 변희수 하사 “성 정체성 떠나 최전방에서 나라 지키고 싶어”

    성전환 변희수 하사 “성 정체성 떠나 최전방에서 나라 지키고 싶어”

    “제 이름은 6군단 5기갑여단 하사 변희수입니다. 저는 군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싸울 겁니다.” 국군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복무 중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22) 육군 하사의 목소리는 내내 울음이 섞여 떨렸다. 22일 육군은 “군인사법 등에 따라 계속 복무할 수 없는 사유에 해당한다”면서 강제 전역 결정을 내렸지만, 변 하사는 “성 정체성을 떠나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남고 싶다”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시민단체 군인권센터가 연 기자회견에 군복을 입고 참석한 변 하사는 얼굴과 소속을 모두 공개하고 “저를 포함한 모든 성소수자 군인이 차별받지 않는 환경에서 각자 임무를 수행하면 좋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변 하사에게 군인이라는 직업은 어릴 때부터의 간절한 꿈이다. 그는 “10대 시절 독도 문제 관련 일본 규탄 집회, 북한 인권 집회 등에 참석하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집 근처 인문계고 진학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남 장성의 부사관 특성화고로 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늘 어지러웠다. 머리로는 여성이라고 느끼지만, 신체는 남성인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이다. 변 하사는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남성들과의 기숙사 생활, 가혹한 부사관 학교 과정을 겨우 거쳤다”면서 “마침내 2017년 부사관으로 임관해 꿈을 이뤘는데도 혼란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고 말했다. 꾸역꾸역 눌러오던 마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복무 이후 줄곧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겪던 변 하사는 결국 2018년 4월부터 국군수도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그가 받은 진단은 ‘성별 불쾌감’(젠더 디스포리아). 자신이 다른 성으로 잘못 태어났다고 느끼는 상태라는 뜻이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젠더 디스포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성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면서 “정신과 상담뿐 아니라 외과 수술로 완전히 성을 바꿔야만 극복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폐쇄병동을 쓸 정도로 젠더 디스포리아로 인한 증세가 심각했던 변 하사는 결국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수술까지 결심했다. 그는 “수도병원에서 치료와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에 있던 짐을 쌓아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라’는 조언을 들었다”면서 “계속 억눌러둔 마음을 똑바로 마주보고, 성별 정정 과정을 거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은 여군으로서 끝까지 복무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변 하사는 “아침에 전역심사위원회에 갈 때만 해도 ‘설마’하는 마음뿐이었다. 심사를 받은 뒤에도 군을 믿었다”면서 “갑작스럽게 전역 결정이 나면서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울먹였다. 그는 “전역심사위 결정 이후 주임원사가 전화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면서 “소속 여단에서도 제가 계속 복무하는 게 적합하는 답변까지 올린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육군 본부는 성전환자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히 신체 훼손 기준으로만 전역 심사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임관할 때만 해도 병사들이 휴대폰 쓰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 사용은 물론이고 영창 제도까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면서 “제가 사랑하는 군은 계속해서 인권 존중하는 곳으로 진보해나가고 있다. 미약한 개인이지만 인권 친화적인 군으로 바뀌어가는 이 변화에 보탬이 되고싶다”고 말했다. 군대 내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변 하사가 고른 대답은 시의 한 구절이었다. 독일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썼다고 추정되는 것으로, 나치가 특정 집단을 하나씩 제거할 때 침묵한 지식인들에 대해 비판한 시의 전문은 이렇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대항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더는 없었다 아무도. 대항할 수 있는 자가.”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탄핵심리 하루 전… 흑인표 공략 나선 트럼프

    탄핵심리 하루 전… 흑인표 공략 나선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마틴 루서 킹의 날이자 상원에서 자신의 탄핵 심리가 열리기 전날인 20일(현지시간)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함께 워싱턴DC의 킹 목사 기념비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탄핵심판이라는 국내의 불리한 정치 상황을 뒤로한 채 다보스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로 출발했다. 워싱턴DC AFP 연합뉴스
  • “신라는 무슬림 포용했는데… 지금은 차가운 시선 아쉬워”

    “신라는 무슬림 포용했는데… 지금은 차가운 시선 아쉬워”

    “알라(하느님)의 말씀인 쿠란에는 ‘누구에게도 종교(이슬람교)를 강요해선 안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무리 교리가 좋아도 억지로 신앙을 믿게 하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죠. 무력으로 종교를 이식하려는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은 무슬림이 아닙니다. 그들은 알라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앞둔 지난 17일. 인천의 명물인 구월동 도매시장 거리의 한 건물에 자리잡은 ‘인천평화성원’에서 조촐하게 무슬림 예배가 진행됐다. 이날은 금요일로 전 세계 이슬람 신자들의 합동 예배일이다. 한국에서는 금요일이 평일이다 보니 무슬림이 예배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이날 성원에 온 신자는 모두 5명. 머리에 ‘이마마’로 불리는 모자를 쓰고 설교대에 앉아 아랍어로 능숙하게 예배를 이끄는 이가 눈길을 끌었다. 바로 박동신(34) 이맘. 한국인이다. 이맘은 무슬림 종교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기독교의 신부나 목사에 해당한다. 최근 이슬람 국가인 이란이 미국과 전쟁 직전 상황까지 치닫는 갈등을 빚고 있던 터라 그의 설교가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그는 지난해 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슬람 성원을 열었다. 무슬림이라고 하면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이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는 모습을 떠올리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슬람 신자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했다. 그에게서 직접 ‘무슬림으로 사는 법’을 들어 봤다.●“목사 꿈 접고 이슬람에서 해답 찾아” 기원전 17세기 인류 문명의 중심이던 메소포타미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생몰연대 미상)에게 자신을 유일신으로 칭하는 ‘야훼’가 나타났다. 유일신은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에서 새 민족을 세우라”고 명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말에 순종해 팔레스타인 가나안 지역에 정착했다.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신앙을 학계에서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고 부른다. 유대교와 기독교(가톨릭·개신교), 이슬람교가 대표적이다. 세 종교는 모두 같은 신을 믿는다. 신자 수는 기독교 24억명, 이슬람교 18억명, 유대교 1500만명 정도로 전 세계 인구(약 77억명)의 절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이슬람교는 선지자 무함마드(570~632)를 신의 마지막 사도로 여기는 종교다. 무슬림은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 모세 등이 본래 이슬람 신자였다고 본다. 박씨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한다. 보통 오전 5시쯤 잠에서 깨 깔개 위에서 절을 하며 “알함두릴라”라고 되뇐다. 아랍어로 ‘찬양한다’는 뜻이다. 다른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하루 다섯 번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기도한다. 그는 ‘함양 박씨 문원공파’로 부산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이다.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고민이 컸다고 한다. 오랜 방황 끝에 그 해답을 이슬람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안식교를 믿으셨고 어머니도 장로교 신자셨어요. 친척들의 종파도 다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안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20대가 돼서도 이 문제가 풀리지 않아 많이 힘들었어요. 결국 ‘나무보다는 숲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을 차근차근 살폈습니다. 본래의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낸 종교는 이슬람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죠. 2009년 12월 한국 이슬람교 중앙성원(이태원)을 통해 입교했습니다.” ●10년 가까이 중동 유학… 어머니도 개종 무슬림이 되긴 했지만 ‘열정만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박씨는 1년 뒤 한국을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터키(2011~2012)를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2012~2015), 요르단(2015~2017), 이집트(2017~2019) 등을 다녔다. 대학과 모스크 등에서 아랍어와 이슬람 교리를 습득했다. 현지에서 돈을 벌며 공부하다 보니 시간도 길어졌고 어려움도 컸단다. 하지만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돕는 이가 있다’고 했던가. 마지막 목적지인 이집트에서 만난 한 퇴직군인이 이역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박씨가 안쓰러웠던지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신의 딸까지 소개해 줬다고 한다. 지금의 아내인 올라(28)씨다. “이슬람교를 믿게 되면서 제 삶은 180도 변했습니다. 진정한 한 분의 신을 섬기며 쿠란에 기록된 선행을 행하자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진정한 행복도 느끼게 됐어요. 처음에는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반대가 특히 심했죠. 하지만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며 짜증을 내거나 질책하지 말라’는 쿠란의 구절을 지키며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자 결국 아버지도 제 종교를 인정해 주셨어요. 어머니는 저를 따라 무슬림이 되셨죠.” 지난해 아내와 한국으로 온 박씨는 어머니가 사는 인천에 터를 잡고 가정 예배를 시작했다. 2013년 그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한국이슬람방송’ 등을 보고 무슬림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신자가 많은 날에는 30명 가까운 무슬림이 박씨의 집을 방문했다. 예배 공간이 부족해지자 지난해 말 자비로 조그마한 사무실을 빌려 인천평화성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 50~60곳의 이슬람 성원이 있지만 한국인이 세우고 직접 운영하는 성원은 거의 없다. 2009년 이슬람교에 입교한 지 정확히 10년 만에 이룬 성과여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그는 자평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인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천년 넘은 이슬람교와의 역사 원래 이슬람교는 우리 민족과 가까웠다. 845년 중동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상당수 아랍인들이 신라를 동경해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도 무슬림 수만 명이 벽란도와 개성 일대에 모여 살았는데, 이들은 ‘예궁’이라는 모스크를 짓고 종교 활동도 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도 무슬림이 등장한다. 쌍화란 튀르크계 만두의 일종이다. 고려 여인이 쌍화점(만두 가게)에 음식을 사러 들어갔더니 무슬림 주인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유혹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국호인 ‘코리아’는 당시 무슬림 상인들이 고려를 부르던 아랍어다. 금속활자와 고려 인삼도 무슬림이 전 세계로 퍼뜨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수시로 무슬림 지도자를 초청해 쿠란을 낭송하고 기도를 올리게 해 국가의 안녕을 바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 이슬람교 중앙성원 등에서 추정하는 한국인 무슬림은 3만 5000명 정도다. 하지만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보고 평생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하는 메카 순례를 경험한 ‘진짜’ 무슬림은 몇 백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극복하고 신자로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과거 중동에서 건설 붐이 일었을 때 일부 공사는 무슬림만 참가할 수 있었거든요. 이때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업상 이유로 대거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 와서도 종교 활동을 이어가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맘은 종교 공동체에서 추대 형식으로 선출되기에 무슬림 수십~수백명당 한 명씩 나오게 돼 있어요. 한국인 무슬림이 3만명이라면 한국인 이맘도 수백명은 돼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한국인 이맘은 저를 포함해 3명에 불과해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죠.”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화해 분위기 현재 세계는 조금씩이나마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가톨릭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틈날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이라며 무슬림을 언급한다. 영국에서는 일부 성공회 교회가 금요일마다 이슬람 신자들에게 예배 공간을 빌려준다. 다만 한국에서는 신자 수 기준 세계 2위 종교를 위험하다고만 여기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고 그는 전했다. “진정한 이슬람에는 강요가 없습니다. 헌금도 요구하지 않아요. 이슬람 교계에서도 모두가 힘을 합쳐 테러리즘 근절에 앞장서고 있어요. 한국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이기에 존중합니다. 다만 이슬람 세계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등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만큼은 꼭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중동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서 대한민국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할 좋은 전략이 아닐까 싶습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강남순의 낮꿈꾸기] ‘마약 중독적’ 종교를 벗어나 책임성의 종교로

    [강남순의 낮꿈꾸기] ‘마약 중독적’ 종교를 벗어나 책임성의 종교로

    비판 기능 마비시키는 이기적 종교는 마약 기계적으로 선동 추종하는 기독교인 많아 타율적 미몽의 삶 ‘종교 중독’ 탈출하려면 ‘지금 여기 천국’ 만드는 책임 회복 등 필요 인간은 생물학적 동물성을 지닌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어떤 철학자는 인간이 언어와 상징체계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 또는 시간개념을 지닌 존재라는 점이 인간을 동물과 상이한 존재로 만든다고 본다. 그렇다. 인간이 창출한 언어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동물성을 넘어서 인간성을 확보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시간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라며, “인간만이 죽는다. 동물과 식물은 소멸할 뿐이다”라고 한다. 인간이 지닌 시간개념은 자신의 죽음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한다. ●인간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서 철학·종교 탄생 죽음에 대한 인식은 알 수 없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살아 있을 때의 의미와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한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행복한 삶을 지향하고자 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씨름하는 철학과 종교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죽음을 넘어서는 ‘구원’에 대한 관심이 인류에 철학과 종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교육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철학자 뤼크 페리는 철학과 종교의 공통점은 ‘구원’이라고 규정한다. 다만 철학은 ‘신 없는 구원’(salvation without God)을, 종교(기독교)는 ‘신 있는 구원’(salvation with God)에 관심한다는 상이성을 지닐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나선형처럼 연결된 인간의 시간개념은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구상하고, 꾸려 가는가에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시간개념을 분명하게 지니며 살고 있을 때, 자기 삶의 주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을 품고서 살아가게 된다. 이 현실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닌 오직 자기라는 점, 따라서 살아감이란 책임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회는 이러한 시간개념을 왜곡시킨다. 그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 개인들이 지녀야 할 주체자적 이해를, ‘저 세상에 있는 신’ 또는 ‘죽어서 천당’이라는 ‘왜곡된 초월’ 개념으로 대체해 버린다. ‘초월’의 개념을 상징적이 아닌 사실적 공간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이 매일 살아가는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관심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는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심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들은 ‘지금 이곳’에서의 사랑과 연민의 삶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사후 저곳’에서의 구원으로 대체했다. 교회가 ‘구원 클럽’으로 전락하게 되는 지점이다.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저곳’을 강조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박탈하고, 인간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책임성을 ‘신의 축복(물질, 건강, 성공의 축복)’과 ‘내세의 구원’으로 대체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수한 기독교인은 종교적 기계로 전락한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한 이들은, 너무나 쉽게 정치적 또는 종교적 선동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결국 개인의 비판적 사유를 마비시키고, 사후 구원에 집착하게 하고, 이기적인 축복을 가르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마약’으로 기능할 뿐이다. ‘한국교회총연합’이라는 기독교 단체가 2020년 1월 6일 ‘동성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110만명의 기독교인들의 서명지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광화문광장에는 ‘전광훈’이라는 이름과 연결된 소위 기독교인들이 지속적으로 모여 전광훈씨 앞에 앉아서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쳐대고 있다. 그들은 어떤 개별적인 감정이나 이성적 사유 기능의 작동을 중지시키고, ‘종교적 기계’같이 천편일률적인 몸짓과 소리를 내고 있다. ●교회들 사기업화… 세습은 ‘하나님의 일’ 왜곡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기계’처럼 행동하는 기독교인들이 광화문광장에만 있는가. 아니다. 지금도 한국 곳곳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멘’과 ‘할렐루야’를 부르짖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동에 따라서 움직이는 종교적 기계로 존재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110만명의 서명자들, 전광훈씨가 말하는 것마다 ‘아멘’을 외치는 이들, 전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여전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며 사명감에 불타서 전도 활동을 하는 이들 모두는 어쩌면 종교적 기계가 돼 자신들이 정작 무엇을 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종교의 위기, 특히 기독교의 위기는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회는 유독 ‘반지성주의’가 마치 기독교 신앙을 지니는 것의 필요조건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대형 교회는 거대한 사기업이 되고 있으며, 그 기업을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은 그러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이라는 목회자들의 설교는 정확하게 ‘자본주의화된 왜곡된 종교’다.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신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예’와 ‘아멘’을 하는 것은 바로 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맹목적 충성을 할 때 ‘물질적으로 축복받고, 모든 것이 잘되며, 궁극적으로 영생으로 가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들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들 목회자들은 무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원’과 ‘축복’이라는 제품을 만들어서 그 상품으로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종교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종교 사업은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철저히 개별 목회자와 교회의 이득 확대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거룩과 초월’의 옷을 입고 그 기만성을 은닉한다. 칸트의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글을 보면 미몽에서 벗어나 계몽으로 전이하는 것은 자율성과 타율성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율성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반면 타율성은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존재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자율이 아닌 타율적 삶을 살 때 인간은 ‘스스로 강요된 미성숙’(self-imposed immaturity) 속에 빠져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미몽의 삶을 살게 된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종교적 기계로 전이되는 이들은,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강요된 미성숙’의 감옥 속에 스스로를 집어넣는다. 광화문의 기독교인들, 소수자 혐오에 앞장서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는 타율적인 미몽의 삶을 살게 하는 ‘마약’의 기능을 한다. 그들은 교회 안에 앉아 있으면 세상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구원이 보장돼 행복한 것 같다. 마약을 맞기 때문이다. 예수만 믿으면(여기서 ‘예수 믿음’이란 ‘교회 등록’을 의미한다) ‘만사형통’한다며 ‘아멘’을 외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정작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그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모색할 필요나 의지, 또는 용기도 작동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의 종’이라는 목회자의 ‘선동’에 따라서 하라는 대로 따르는 종교적 기계로 움직인다.●소수자 혐오 확산시키는 ‘사유 없음’은 범죄 혐오의 정치를 ‘신의 일’로 대체하는 기독교인들의 ‘사유 없음’은 그 자체가 사회와 인류에 대한 범죄다. 그 ‘사유 없음으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특정인들에 대한 혐오를 확산하고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 현 대통령의 연설을 화면에 방영하면서, ‘저 소리는 성령의 소리입니까, 사탄의 소리입니까?’라고 묻는 전광훈씨의 선동적 물음에 ‘사탄의 소리’라고 광화문이 떠나가도록 우렁찬 함성을 지르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종교가 ‘마약’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약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출발점이 있다. ‘사후 천당’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살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천국’을 만드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책임성의 회복,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자율성의 회복, 비판적 성찰을 통한 민주적 시민성의 회복, 다양한 소수자들과의 연대와 연민의 회복, 그리고 그 소수자들의 인권 확장을 위한 사회정치적 개입 등을 통해서다. 21세기에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특정 종교에 소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다층적 회복과 개입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글 텍사스 크리스천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그림 김혜주 서양화가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美 항모에 이름’ 흑인 수병 도리스 밀러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美 항모에 이름’ 흑인 수병 도리스 밀러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21일(이하 현지시간)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대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이날 하와이 진주만에서는 79년 만에 뜻깊은 행사가 열린다. 바로 차세대 해군 항공모함에 대통령이나 해군 제독이 아닌 평범한 흑인 수병의 이름을 붙이는 명명식이 열리는 것이다. 조만간 건조에 들어가 7~8년 후 취역할 것으로 예상되는 ‘USS 밀러’ 호(號)에 이름을 제공한 주인공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당시 취사병인데도 기관총을 잡고 적기를 겨눈 전쟁영웅 도리스 밀러다. 밀러 호는 앞으로 50년 동안 바다를 누비게 된다. 링컨, 루스벨트, 레이건, 트루먼, 아이젠하워, 부시, 포드, 케네디로 이어지는 전직 대통령 이름 뒤에 오롯이 해군 수병 밀러가 당당히 이름을 내민다.1919년 텍사스주 와코에서 태어난 밀러는 네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딸을 임신한줄 알고 지어놓은 이름을 그대로 썼다. 짐 크로 법에 따라 흑인들은 권리를 부정당하고 백인과 함께 한 공간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남부에선 특히 심했다. 고교를 중퇴한 뒤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자 스무살 때인 1939년 입대했는데 여자 이름 도리스를 갖고서였다. 부대에서는 ‘도리’로 불렸다. 물론 해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일, 예를 들어 백인 장교들의 허드렛일을 돕는 공관병으로 일하다 1940년 구축함 웨스트 버지니아호에 배치됐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당시 그는 세탁물을 개키다 일본군 어뢰가 웨스트 버지니아 호를 맞혀 배가 가라앉는 순간 다른 수병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다친 선장을 피신시킨 다음 흑인 병사들이 다룰 수 없다고 엄하게 단속하는 50구경 캘리버 기관총을 잡고 수백 대의 일본군 전폭기들에게 총알을 퍼부었다. 그는 나중에 해군 전사에 “어렵지 않았다. 난 그냥 방아쇠를 당겼을 뿐인데 그녀(기관총)이 너무 잘 작동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내 생각에 (일본) 비행기 중 한 대는 잡은 것 같았다. 비행기가 우리랑 너무 가까운 물속에 처박혔다”고 돌아봤다.총알이 다 떨어지자 부상당한 갑판원을 도왔다. 배가 끝내 침몰할 지경에 이르자 생존자들과 함께 배를 포기했다. 이듬해 1월 미 해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흑인 남성이 포함된 진주만을 구한 영웅들 명단에 발표했는데 두 달 뒤 도리스 밀러란 이름이 확인됐다고 피츠버그 쿠리어가 보도했다. 일본의 기습으로 2300명 이상이 죽고 미국은 곧장 2차 세계대전의 수렁에로 빠져들었다. 곧바로 상원과 하원에서 별도의 법안을 제출해 밀러 같은 흑인 수병도 무공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고 흑인 단체들도 캠페인을 벌여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물론 다른 인종 그룹에서는 밀러의 인종까지 드러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맞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 해 5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논쟁을 그만 두라고 명한 뒤 그에게 해군 십자훈장(3등급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 뒤 밀러는 연설 투어를 돌며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뒤 다시 항공모함 리스콤 베이 호에 승선했지만 1943년 11월 마킨 전투에서 일본 잠수함에 격침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2001년 영화 진주만에 쿠바 구딩 주니어가 밀러 역을 해냈으며 2017년 와코 시는 밀러 동상을 제막하기도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진중권 “조국 무혐의 주장 심재철 공수처 1호사건 돼야”

    진중권 “조국 무혐의 주장 심재철 공수처 1호사건 돼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기소를 둘러싸고 상갓집에서 벌어진 검찰 ‘항명사건’을 놓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1호 사건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 전 교수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피의자를 기소하여 처벌해야 할 검찰에서 외려 피의자의 변호인이 되어 변론을 펴준다는 게 말이 되나”고 비판했다. 검찰의 상갓집 항명사건이란 지난 18일 대검찰청 한 중간간부의 가족 상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검사 수십 명과 기자들도 모여 있는 상황에서 심재철 대검 반부패부장이 양석조 대검 반부패부 선임연구관의 심한 항의를 받았다. 항의 내용은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을 조 전 장관이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무마한 의혹에 대해 심 부장이 ‘무혐의’ 의견을 냈다는 것이었다. 조 전 장관은 현재 구속 중인 유 전 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에 대해 “감찰 종료 후 보고를 받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조치를 결정한 것”이라며 “직권남용이란 공소사실은 허구”라고 주장했다. 양 연구관이 십여 분간 항의를 이어가자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취재가 이어졌고, 심 부장은 처음에는 내부 토의 중의 일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가 “내 의견이 결정에 반영되기도 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진 전 교수는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검사는 무조건 기소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그런데 검찰의 반부패부장이 조 전 장관의 직권남용을 무혐의라 주장한 것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검찰 간부 인사를 할 때 이미 예상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반부패부장이 유재수의 부패를 덮어준 조국의 부패를 다시 덮어주는 부패를 저질렀다”며 “장관이 방부제를 놔야 할 자리에 곰팡이를 앉혀놨다”고 비난했다. 이어 심 부장의 혐의는 뻔뻔한 수사방해 혹은 기소방해, 명백히 직무유기,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며 공수처 1호 사건 대상자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심재철 반부패부장은 지난 8일 추 장관의 첫 인사를 통해 대검 간부로 승진했다. 추 장관 인사청문 준비단 대변인을 맡았으며 전북 완주 출신으로 윤석열 검찰총장 라인으로 불렸던 한동훈 전 반부패강력부장의 후임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이름 난 ‘주먹’이 올레길 ‘산파’로, 서동철 시인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이름 난 ‘주먹’이 올레길 ‘산파’로, 서동철 시인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제주 조직폭력 ‘땅벌파’ 두목이었으나 제주 올레길의 숨은 산파로 변신한 시인 서동철 씨가 이승의 강을 건넜다. 향년 61.  섬 여행가 강제윤 시인은 지난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2007년 친누나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이 올레 길을 내겠다고 귀향하자 조직 생활을 청산하고 올레길을 만드는 탐사대장으로 활동했던 서씨가 세상을 떠나 전날 제주 빈소에 다녀왔다고 알렸다. 고인은 14일 오후 제주 서귀포의료원에서 숨을 거뒀고 18일 오전 발인했다. 중앙 일간지 가운데 딱 하나, 한겨레신문만 그의 부음을 전했다. 보고 들은 게 적은 기자는 19일 저녁에야 부음을 접했다.  어줍잖게 서 시인의 삶을 요약하기보다 강 시인의 글을 옮긴다.  ‘또 한 생이 레테의 강을 건넜다. 가파도에 살던 나의 형, 서동철 형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때 제주 조폭 두목이었다. 세상에 좋은 조폭은 없다. 그래서 조폭 시절의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개심한 뒤 그는 제주를 위해 또 세상을 위해 아주 귀한 일을 했다. 제주 올레를 만든 것이다. 세상은 서명숙 이사장만을 기억하지만 실상 그는 서 이사장과 함께 제주 올레의 공동 창시자다. 단언컨데 그가 없었다면 제주올레는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서이사장도 인정한다.  서동철 형은 서 이사장이 처음 제주에 걷기 길을 만들기로 했을 때 그 뜻을 이해하고 함께한 첫 번째 동지였다. 그는 제주 올레 초대 탐사대장으로 서 이사장과 함께 올레길을 개척했다. 다들 가망없는 시도라고 반대할 때 그만 적극 찬성하며 서 이사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의 적극적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제주올레가 마을길들을 통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드센 마을청년회원들을 밤낮으로 만나 술까지 사주며 설득한 것은 그였다. 어둠을 위해 쓰던 힘을, 빛을 위해 썼고 그러자 그 힘은 더욱 강력했다. 제주올레의 핵심은 길 그 자체다. 길을 내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가 그 물꼬를 터주었다. 제주도 지사도, 공무원들도 설득할 수 없는 이들을 그가 설득했다. 서 이사장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했다. 그가 없었다면 제주올레도 없었을 것이다. 제주 올레와 서명숙 이사장이 세상의 조명을 받을 때 그는 뒤에 물러나 숨어 살았다.  자신의 과거가 누이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이주빈 아우와 제주로 건너가서 서명숙 누이와 함께 그를 추모하고 돌아왔다. 봄이 오면 그와 같이 도모하기로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끝내 봄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 누군가 겨울을 사는 덕에 누군가는 봄을 산다. 형이 영원한 안식의 봄이 돼서 산하에 깃들기를 기원한다.’  서 시인은 2012년 가파도에서 길을 내다 가장 심하게 반대한 51년 물질의 해녀 강수자 씨를 만나 여섯 번째로 결혼해 가파도에서 죽 투병해왔다. 강씨는 다큐멘터리 독립 영화 ‘숨비’ 주인공이다. 마침 병석에 누운 그녀를 살뜰히 보살피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듬해 12월 한국 국보문학 64기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85년 다른 폭력조직 선배의 밀고로 악명 높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그는 이북 출신 아버지에 제주 출신 어머니, 유신 반대에 앞장 선 누이 등 정권이 간첩으로 몰기에 최상의 인적 자원을 갖고 있었다. 마침 사상이 의심스러운 재일교포와 만날 참이었다. 해서 주전자 안에 유리병 조각을 넣어 던졌다. 함께 연행돼 조사받던 조직의 부하들까지 자해하겠다고 수사관들을 겁박해 어머니를 면회해 재일교포 에게 피신하라는 메모를 건넸다.  전기고문 끝에 그는 간첩이었다고 거짓 실토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형사가 쓴 진술 조서를 신발 밑창에 숨겼다. 교도소는 물론 검찰에 가도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했음을 증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법정에 가서야 원본은 따로 있고 자신은 거짓 자백을 남긴 것이라며 형사가 쓴 조서를 증거 보전 신청했다. 그렇게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아는 것이 많았다. 순전히 ‘꼬붕’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국립대학’(교도소)에서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어 제주의 역사, 사투리, 희귀한 동식물 이름까지 뚜르르 뀄다. 제주 목사가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 순력을 할 때 시흥(始興)에서 시작해 종달(終達)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서 올레의 시작점 1코스로 누나에게 추천했다. 두 마을은 해녀의 바다 구역과 농지를 두고 오랜 세월 반목해온 사이였으니, 평화를 지향하는 ‘올레 정신’과도 맞아떨어졌다.  고인은 올레길에서 만난 이들에게 난데 없이 끝말 잇기를 하자며 ‘제주’를 외치곤 했다. 제주-주전자-자리돔-돔구장-장소-소름 하면 끝이었다. ‘름’ 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강제윤 시인은 올레길에서 누군가 불쑥 나타나 끝말 잇기를 하자고 하면 틀림없이 서동철 시인일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를 만날 일은 없게 됐다.  그가 어떻게 생과 작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명복을 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정세균 총리, 종교계 지도자 예방

    정세균 총리, 종교계 지도자 예방

    정세균 국무총리가 17일 불교와 기독교계 지도자를 잇따라 예방하고 국정운영에 대한 조언과 협조를 구했다. 정 총리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를 찾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앞에 놓여있는 큰 산과 같은 과제들을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정성껏 하나하나 감당해 국민들께 도움이 되도록 열심히 해보겠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정 총리는 또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통합을 이뤄야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께서 과거에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화합하고 화해하는 데 기여해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잘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기독교회관을 찾아 한국교회총연합 김태영·류정호·문수석 목사를 만나 “국민통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통합의 총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정치권·정부 차원에서 노력을 해야겠지만 종교계도 힘을 많이 보태주셔야 한다”면서 “사회통합이 이뤄져 국민들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이홍정 목사를 예방해 정치·사회·외교 등 현안을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박찬구 선임기자 ckpark@seoul.co.kr
  • [부고]

    ●이광신(전 단국대 부총장)씨 별세 이순건(전 마포고 교사)·경숙·진숙씨 부친상 김성수(전 부여홍산교회 목사)·이태섭(롯데그룹 준법경영담당부사장)씨 장인상 16일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2)2258-5940 ●유영애씨 별세 방만규(국기원 교육본부장)씨 모친상 16일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18일 오전 8시 10분 1588-1533
  • [부고]

    ●이광신(전 단국대 부총장)씨 별세 이순건(전 마포고 교사)·경숙·진숙씨 부친상 김성수(전 부여홍산교회 목사)·이태섭(롯데그룹 준법경영담당부사장)씨 장인상 16일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2)2258-5940 ●유영애씨 별세 방만규(국기원 교육본부장)씨 모친상 16일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18일 오전 8시 10분 1588-1533
  • 가슴으로 낳은 세 딸 키우다 내 인격의 바닥을 봤습니다

    가슴으로 낳은 세 딸 키우다 내 인격의 바닥을 봤습니다

    느지막이 눈물 콧물 다 뺐다… 환갑 넘어 들춰보는 ‘공개입양일기’차성수(63) 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은 스스로를 이 시대 지식인이자 교양인이라고 자부했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그는 학생 운동에 몸담으며 서울 구로공단 노동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서른두 살에 동아대 교수로 임용됐고 2007~08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지냈다. 2010년부터 8년간 서울 금천구청장을 연임했다. 재작년부턴 자산 30조원을 굴리는 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배운 사람의 여유랄까요. 저는 제 인격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웬만한 일에는 화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거든요. 그런데 입양한 세 딸을 키우면서 제 인격의 바닥을 봤어요. 보육원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냈던 딸들이 나와 아내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외면했을 때, 사춘기 시절 입양아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거세게 반항했을 때…. 저는 인간의 온갖 추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나약한 한 사람에 불과했어요.” ●맏아들 다 키우니… 50세에 하늘이 맺어 준 인연 14일 서울신문이 서울 여의도 차 이사장 집무실을 찾은 건 그가 ‘가슴으로 낳은’ 세 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차 이사장 슬하 네 남매 중 맏아들 남준(33)씨를 제외한 혜인(19)·혜윤(18)·혜주(16)양은 공개 입양한 자녀다. 벌써 14년 전인 2006년 두 돌을 좀 넘긴 막내 혜주양을 첫 입양했다. 차 이사장이 우리 나이로 쉰을 맞았을 때다. 지천명을 맞아 자신을 바꿔 보기로 결심했다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꿔 보자며 입양을 선택했다. 젊은 시절 함께 시민운동을 했던 아내와 “언젠가 입양한 자녀를 길러 보자”고 했던 약속을 뒤늦게 지킨 것이다. 이듬해 혜주양의 언니를 만들어 주기 위해 혜인양을 가족으로 맞았다. 더는 입양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2008년 혜윤양과도 하늘이 맺어준 것처럼 인연이 닿았다. “경북 김천에 있는 보육원이었어요. 떨리는 마음으로 내려갔는데 혜주를 처음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왔어요. 마치 제가 낳은 아이 같았죠. 혜주가 아내와는 금방 가까워졌지만 저는 보기만 하면 울더군요. 그러다 한 100일쯤 지났나….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꼬옥 안아 주는 거예요.” 어린 나이에 입양한 혜주양은 딸 키우는 재미를 쏠쏠하게 알려줬다. 하지만 여섯 살 때 데려온 장녀 혜인양은 달랐다. 혜주양과 빨리 가까워지라고 같은 보육원에서 입양했는데, 이미 유아기를 넘어서인지 쉽게 차 이사장 가족에 녹아들지 못했다. 마치 희로애락의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족들의 눈치만 봤다. “혜인이를 키우면서…. 제가 참…. 제 인성이 무너졌어요. 애가 어금니를 쓰지 않고 앞니로만 음식을 씹는 거예요. 태어나서 그때까지 누가 밥 먹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앞니만 쓰다 보니 구강도 뒤틀려 있었어요. ‘ㅊ’을 ‘ㅅ’처럼 발음했죠. 우리 성인 ‘차’를 말할 때 ‘샤’라고 했어요. 이미 6년간 밴 습관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죠. 매일 야단치고, 혼내고…. 그래서 혜인이의 마음을 더 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차 이사장은 혜인양을 보육원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내 유현미(61)씨가 차 이사장의 생각을 들은 다음날 혜인양을 호적에 올렸다. 이미 맺은 인연, 절대로 끊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차 이사장은 “우리 가족은 사실상 아내가 일군 가정”이라며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 덕에 나와 딸들이 성숙해질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차녀 혜윤양은 생모가 기를 여건이 안 돼 보육원에 위탁한 아이였다. 보육원은 정기적으로 며칠씩 아이들을 일반 가정에 가족체험을 보내는데, 혜윤이가 차 이사장 집으로 왔다. 처음에는 4박5일, 다음에는 한 달가량 차 이사장 집에 머물렀던 혜윤이는 “여기서 살겠다”고 떼를 썼다. 생모가 반대했지만 혜윤이가 먼저 차 이사장 집으로 입양을 보내 달라고 졸랐다. 생모가 원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혜윤이도 차 이사장 가족이 됐다.●돌아가면서 사춘기… 행복 찾는 길 열어줄 뿐 “딸들 나이 차가 크지 않다 보니 사춘기도 돌아가면서 겪더라고요. 첫째 아이를 간신히 넘기니 곧바로 둘째가 오고….” 특히 혜인양이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공부하라는 엄마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고, 그럴 때마다 혜인양은 뛰쳐나갔다. 엄마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원망했다. 결국 고등학교 과정을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제가 혜인이를 키우면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깨달았어요. 사랑은 인내하는 것. 사랑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것. 혜인이가 우리 원하는 대로만 하길 바랐더니 더 반발이 컸던 거죠. 그 시기를 넘기니 혜인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검정고시를 통과해 고교 졸업장을 땄고 지금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어요. 저도 혜인이가 무엇을 하든,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입니다.” 여기서 차 이사장은 동네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고향인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그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동네에 작은 분식집을 차렸다. 아내와 함께 40년 가까이 가게를 운영하며 두 자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자영업을 하면 열에 아홉이 망한다지만, 친구 분식집은 동네 명소가 됐다. 매일 새벽 시장에 나가 직접 식재료를 고르고, 인심 좋게 장사한 덕분이다. 어느덧 부모가 된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와 “아빠, 엄마도 너희 나이 때 이 집에서 떡볶이 먹었다”고 회상하는 곳이다. 장성한 자녀들이 “이제 그만 쉬시라”고 권해도 “아직 정정하다”며 오늘도 가게 문을 연다. “구청장이 돼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 오랜만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죠. 가방끈 길게 만들어서 월급 많이 주는 직장 다니는 게 행복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우리 고향에서도 그런 사람은 별로 도움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어린 시절 공부 잘해 명문대 간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죠. 구청장에게 동네를 위해 ‘일 잘하라’고 따끔한 충고를 날리는 이는 중학교만 나와서 분식집을 하는 그 친구뿐입니다. 저도 딸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요. 행복을 찾는 길만 열어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늙은 아빠 부끄럽게 생각 않고 인정해 줘 뭉클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혜주양은 여전히 차 이사장에게 큰 기쁨을 안기는 존재다. 다음달에 중학교를 졸업하는 혜주양은 며칠 전부터 차 이사장에게 졸업식에 꼭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차 이사장이 학교에서 인기 스타라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차 이사장이 구청장 시절 혜주양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구청장 아빠’라는 말에 신기해하며 앞다퉈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세 딸 키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요?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혜주가 네다섯 살쯤 됐을 때 과자를 사 주려고 슈퍼마켓에 데려갔죠. 주인이 저를 보더니 ‘할아버지가 맛있는 것 사 줘서 좋겠네’라고 했어요. 그때 혜주가 큰 소리로 ‘할아버지 아니에요. 우리 아빠예요’라고 외쳤습니다.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센 저를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빠로 인정해 줬던 그 순간, 얼마나 혜주가 고맙고 예쁘던지…. 딸들이 순간순간 안겨 준 그런 소소한 기쁨이 진정한 행복이에요.” 차 이사장은 아무리 바빠도 혜주양 졸업식에는 꼭 갈 생각이다. 다만 혜주양을 안달나게 하려고 튕기는 척하고 있다. 지금은 구청장이 아니라서 혜주양 친구들이 실망할까 걱정이다. 그는 “구청장 시절엔 업무에 치여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며 “아이들에게 항상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사랑은 핏줄 아닌 내 곁에 있는 사람 “목사셨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신학을 공부했고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머릿속으로는 알 수 없었던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입양한 세 딸을 통해 가슴으로 깨달았죠. 피가 통하느냐 아니냐는 사랑을 하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곧 사랑이었어요.” 비혼과 비출산 트렌드가 점차 확산되는 요즘을 차 이사장은 어떻게 바라볼까. “젊은 사람들이 아이 키우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거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 중장년층의 잘못이 크죠.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이상의 기쁨과 행복, 감동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야 풍성해지는 법입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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