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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 선진진입의 과제/김세원(시론)

    며칠전 서덜랜드 GATT 사무총장 초청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그 내용은 이미 언론매체를 통하여 보도되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 하지는 않겠으며 이와 관련하여 한국경제의 입장에서 정리해야 할 시각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한국경제가 국제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애매하다.흔히 신흥공업국 또는 중진국이라는 표현을 빌리고 있기는 하나 잠정적·편의적 정의일 뿐 GATT를 비롯한 어느 국제기구에서도 이에 대한 공식적 입장은 찾아볼 수 없다.따라서 선진국 또는 개도국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며 그 대답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국제적 대우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한 예로 UR과정에서 한국은 농산물무역에서는 쌀시장 개방을 비롯하여 분명히 개도국 대우를 받았으나 그 이외 보조금지급 조항이나 지적재산권협정등에 있어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GATT 당국의 입장은 한국이 선진국의 의무를 따라야 할 것으로 거의 굳히고 있으며 앞으로 재개될 일부 서비스협상에서도 이러한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다.반면 내년부터 EU가 GSP(일반특혜관세제도)의 혜택을 주기로 한 결정은 한국을 아직도 개도국으로 대우할 수 있다는 여유를 보여준다.어떤 의미에서는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세안제국을 GSP의 수혜대상으로 합의한데 따르는 정치적 배려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여하간 필자의 견해로는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에 대하여는 경제적 여건에 맞게 UR결과를 비롯한 국제협정의 내용에 따라 선진국 또는 개도국에 대한 대우를 적절하게 차등화 할 필요가 있다.다시 말하여 개도국의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경우에 따라 잠정적으로 예외적 대우가 불가피하며 선진국을 설득시킬 수 있는 논리가 준비되어야 한다. 물론 한국이 1996년 OECD에 가입한다면 선진국으로 자동 편입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등장할 수 있다.그러나 OECD 회원국이라고 다 선진국은 아니며 더구나 비유럽권에서 이미 멕시코가 가입했고 또 동유럽제국·중국·인도,그리고 아르헨티나 및 칠레등 남미제국도 가입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한다면 선진국에 대한 정의는 다시 모호해진다. 한편수차례에 걸친 무역협상에서도 보았듯이 GATT체제(앞으로 WTO체제도 마찬가지 이지만)에서는 중요무역국 원칙이 작용한다.최혜국대우나 호혜성(reciprocity)과 같이 그럴싸한 명목적 평등·동등과는 달리 협상은 실질적으로 경제대국들간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UR결과도 따지고 보면 주로 미국과 EU,그리고 일본이 추가된 3자간 타협의 산물이다.또 이 자체가 국제시장메커니즘의 소산이기도 하다. 한국이 비록 국제경제에서 개도국과 이해를 달리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어느 선진권과 보조를 같이 한다고 확실히 말하기도 곤란하다.현재 추진중인 경제구조의 조정을 비롯한 질적 개선을 이룩하여 선진제국과 비슷한 여건을 갖추고 상호이익을 바탕으로 협상권을 확보한 후 선진국 대우를 받는 것이 일의 순서인 것 같다. 물론 선진·개도국을 구분하는 명확한 객관적 기준은 있을 수 없다.보다는 우리가 선진화되었다고 느낄 때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 더 적중하다면 아직도 해야할 일은 산적해 있다.이렇게 본다면 국제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기에 앞서 국내적으로 경제안정의 바탕위에 지속적 성장기반을 조성하는 과제가 더 중요하다. 그간 한국경제는 내실을 다지지 못한채 선진제국의 발자취를 따라왔으나 앞으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독자적인 발전모형을 정립하는 일이라고 믿는다.어떤 선진국을 보더라도 자국 문화를 기반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틀을 확고히 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에 있어서 그렇게도 논의를 거듭해 온 의식,제도개혁,경제운영의 자율화,독자적 기술개발 및 산업구조 조정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끝으로 이미 지적했듯이 한국이 선진국 대우를 받기 위하여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면 이러한 여유는 실질적인 준비단계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더 이상 시간낭비나 시행착오를 거듭할수 없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뜨거운 여름(외언내언)

    세계 도처에서 기상이변 현상이 빈발하고 있다.그러나 누구도 이상기후라고 단정해 말하지도 못한다.아직은 이를 논증할 객관적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0년 우선 하나의 원칙을 국제적으로 세웠다.과거 30년간의 평균을 「기후평년값」으로 하고 이것도 매년 바꾸면 번거로우므로 10년단위로 쓰기로 했다.그러니까 지금 쓰고 있는 평년값은 1961년부터 90년까지의 평균이다.이 평균으로 월단위에서 2도이상 높거나 낮으면 이상기후 기온이다. 7월들어 현재까지의 전국평균기온은 이미 평균값 24.1도보다 무려 4.4도가 높은 28.5도가 됐다.이상기후로서도 극심한 수준이다.지난해 6,7월에는 2도가 낮았었고 8월에는 4도까지 낮아져 이상저온 현상을 보였었다.그런가 하면 올 4월에는 또 4도가 높았었다.한반도 기상난조는 지금 상당히 어지러워지고 있는 과정이다. 기후비교에서 4도차란 엄청난 것이다.2도차만 나도 1백년에 한번정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북반구 전체의 기온편차로 보면 80년대초부터 유럽 동부지역은 현저하게 낮아지고 시베리아와 북미 남부지역은 급격하게 높아지는 증상을 보인다.이속에 또하나 특징으로 호우지역과 가뭄지역이 같이 엉켜 나타난다.이를 이상기상의 블로킹현상이라고 말한다.극지방과 저위도지방의 기단간 교환이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겨울과 무더운 여름이 점점 더 확대될 것이라는 쪽이 정설화되고 있다.기상예측모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미기상청 지구물리유체역학 연구소,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영국기상국,미대기과학 연구소의 모형들이다. 이들 모두 지구의 온난화현상이 가속화되고 생태계 질서도 급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우리도 기후전문가팀을 가지고 한반도 기후예측 모형쯤은 만들어봐야 한다.
  • 국립 대구박물관/10월 개관 준비 한창

    ◎범어공원에 건립… 관계자들 전시계획추진에 구슬땀/고고·민속·미술·기획등 4개 전시실 구비/대구·경북지역 출토유물 중심으로 꾸며 전국이 찜통 더위속 이라지만 대구 사람에게 덥다는 투정을 부리면 아마 눈흘김을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그 만큼 대구는 요즘 정말 아무 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덥다.그런데 그 대구에서도 더욱 힘들게 여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바로 오는 10월로 다가 온 국립대구박물관의 개관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대구박물관은 대구·경북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이 지역 특유의 문화를 연구·보전하는 것과 함께 사회교육의 한 축을 담당케 하기 위해 지난 90년 7월 착공되어 지난 3월 이미 건축공사가 끝난 상태.경북고등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수성구 황금동 범어공원내에 있는 박물관은 3만5백81평의 부지에 건평이 3천46평규모로 전시실은 6백25평이다. 이 만만치 않은 크기의 「빈 건물」을 앞으로 세달 사이에 「박물관」으로 만들 임무를 띤 학예직은 김성구관장과 김홍주학예연구실장 그리고 2명의 학예연구사 등 모두 4명.이들은 지난 5월 부임한 이래 전시계획을 세우는 한편 중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진주박물관,각 대학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는 이 지역 출토 유물들을 모아오느라 지금 한창 진땀을 흘리고 있다. 전시계획에 따르면 4개의 전시공간은 각각 고고실과 민속실 그리고 기획전시실로 꾸며진다. 고고실은 대구 비산동과 내당동 가야고분 등 이 지역 출토유물을 집중 전시할 예정.주요유물로는 비산동 37호고분에서 나온 한쌍의 금동관과 내당동 55호 고분에서 나온 안장앞가리개와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 마구일체,등울 가지창 쇠낫 등이 있다. 미술실 역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 지역 출토유물 가운데 진수 만을 한데 모아 보여주게 된다.그 가운데서도 뛰어난 것은 8세기초 통일신라시대의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치(보물 325호).이밖에 안동 옥동 출토 신라시대 금동반가사유상과 선산 봉한동 출토 삼국시대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84호),영풍 성내동 출토 통일신라시대 금동용두 등이 돋보이는 유물들이다. 민속실은 흔히 유물 위주 전시가 되기 마련인 역사·고고박물관으로서는 드물게 민속박물관 식의 모형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영남의 선비문화」와 「영남지방의 주거생활」「영남의 신앙과 놀이」를 큰 주제로 영남 양반문화의 본거지인 이 지역의 의식·생활사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 전시계획 대로 된다면 일단 박물관의 「꼴」은 그런대로 갖추어 지는 셈.그럼에도 박물관주변에서는 아직 대구박물관이 신라중심의 경주나 백제중심의 부여,새로 생길 가야중심의 김해박물관과 비교해 성격이 모호하지 않느냐고 지적한다.자칫 특성없는 전시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물론,박물관의 사회교육활동 마저 외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주학예연구실장은 『대구박물관은 대구라는 입지상 성격이 다소 모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이 지역이 과거부터 양반문화의 중심지였고 현재까지 직조산업 및 상권의 중심지이며 약녕시가 위치하고 있는 만큼 차근차근 이를 활용하는 이 지역만의 특징적인 전시공간으로 만들어나가야 겠다는 생각』이라고 장기계획을 밝혔다.
  • 이스탄불/처녀의 탑(아랍서 지중해까지:8)

    ◎바다위 돌탑… 안개에 싸여 “섬뜩”/아테네때 조망대로 건립…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딸이 뱀에 물려죽은 전설 간직 이스탄불의 서안에 있는 돌마바체궁전 앞에서 그 탑을 처음 보았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섬뜩했다.탑은 이스탄불의 동안인 위스퀴다르지역의 바다 한가운데 희뿌연 안개를 휘감고 솟아 있었다. 궁전 앞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터키말로 「KizKulesi·처녀의 탑」으로 불리는 그 탑은 본래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에 의해 살라케해안의 조망대로 세워졌으나 1857년이후 지금까지는 등대로 이용되어왔다고 한다.하지만 그 설명은 내 마음을 스친 섬뜩한 신비감과는 무관한 듯했다. 그뒤 탑은 두번다시 내 앞에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다.마치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춘 듯. 우리가 탁심거리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이 도시에 와서 무기같은 것이 내 속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껴요.저것이 눈앞에 보이는 것인가 하고 보노라면,그 너머에서 또다른 환영이 어른거려요.시공의 음영속으로 마음이 휙휙 감기는 기분이랄까」 내 얘기는 일행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사실 내 얘기는 주변분위기와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1백40년간 등대로 터키의 젊은 남녀들은 튀김닭이나 감자칩을 씹으며 콜라컵에 꽂힌 스트로를 빨면서 미국팝송에 맞추어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창밖으로 붉은 색의 이층버스와 노란색의 택시들이 줄지어 지나다녔고,어느 빌딩의 외벽에 설치된 실물모양의 대형넥타이는 이제 이스탄불이 더이상 코란을 정신적 지주로 삼지 않는다는 전시같았다(물론 지금도 이슬람은 여러 민족의 피가 뒤섞인 터키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동질성이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연합군으로부터 자주권을 챙취한 뒤 서구화에 박차를 가했다.그는 이슬람계파에게 재갈을 물린 반면 라틴알파벳의 표기를 의무화했고,여성들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케말이 사망한 지 56년이 지난 오늘 대부분의 터키국민들은 그가 회교정통파들에게 맞서 자본주의경제이념을 받아들임으로써 터키의 경제사정이 다소나마 나아졌다고 믿고 있었다. 「돈이 조금 더 많아지면 그만큼 생활이나아지는 것이다」 대낮에도 탁심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나 정작 상점안에는 주인들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신호텔의 수납일을 보는 타신씨에 의하면 최근들어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이 급격히 줄어들어 불경기라고 했다.쿠르드족의 폭탄테러로 3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 때문이다. 로터리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젊은이중 한 사람에게 테이프가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고 나서 양품점의 상호가 찍힌 카드를 내밀었다.필요하면 연락해달라고 사뭇 신사답게 돌아선 그가,일행들이 터키의 민속음악테이프를 고르는 꽤 긴 시간 상점앞에 서 있었다. 탁심거리를 메운 인파중에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시골청년이라고 한다.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관광객을 찾고 있었다.상점에 손님을 끌어다주고 받는 약간의 돈이 그들의 벌이였다. 이 거리에서 고도 이스탄불의 자취를 느끼게 하는 것은 협궤를 오가는 백년 나이의 전차뿐이었다. 그런데카데시로 불리는 전찻길주변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어느 샛길에서 「처녀의 탑」이 돌연 우리 앞에 나타났다. ○탁심가 인파 가득 저녁식사후 영화칼럼을 쓰는 L씨의 제의로 터키영화를 보기로 했다.영화관을 찾는 일은 마치 미로를 더듬는거나 다름없었다.길을 묻고 또 물어 골목 깊숙이 파묻혀 있는 영화관에 찾아가보기를 서너차례,그렇게 어렵게 찾아간 영화관에서는 「필라델피아」 「피아노」 「쉰들러 리스트」같은 미국영화 일색이었다.그중에 아무거나 한 편을 보아도 좋으련만 L씨는 한사코 터키영화여야 한다고 우겼다. 길도 꼬불꼬불,L씨의 막무가내의 고집까지도 가세해 선자리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숙한 미로 한복판… 언제부턴가 영화간판들,불이 환하게 밝혀진 텅빈 로비,행인들이 주고받는 이방의 언어,어둠속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고양이들이 실제이면서 환영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생시가 아니라 꿈속 같다.나의 몽롱한 의식속으로 한 남자가 푸른 물길 저편에서 노란 노를 저어오고 있었다.그는 자주빛 소파에 앉은 채로 노를저어왔다.나는 그 괴상한 포스터 앞에서 한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내 의식은 그가 노를 저어오는 푸른 물빛으로 물들었다. 블루,블루,여기는 어디일까.그로부터 얼마 뒤였다.우리가 여러번 지나친 골목 한가운데서 짙은 블루 색조의 영화포스터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Kiz Kulesiasi klari(처녀의 탑으로)」 농염한 키스신을 클로즈업시킨 그 영화의 제목이었다. 갈라타다리를 건너거나 해안을 지나칠 때마다 줄곧 찾아도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 다시는 나타나지 않던 탑. 그럴 법했다.그것은 미로 깊숙한 데서 길을 잃어버릴 때만 나타나는 전설이었다. 콘스탄틴대제에게는 몹시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다.왕은 그 딸이 뱀에게 물려 죽게 된다는 얘길 듣고 딸을 탑으로 피신시켰다.왕은 그 탑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뱀이 접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그러나 뭍에서 가져간 과일바구니 속에 숨어 있던 뱀이 물어 공주는 목숨을 잃었다. 오스만시대에 나무로 재건축된 이 탑은 화재로 타버린 뒤 아메드3세때 돌로 다시 복구되었다. 영화관안은 물이 가득 찬 수조를 연상시켰다.커튼도,의자도,바닥도 모두 청색이었다.아들의 부축을 받고 머리 흰 노인이 천천히,아주 천천히 푸른 통로 사이로 걸어왔다.관객은 열 사람 남짓했다. 청색커튼이 미끄러지듯 양쪽으로 갈라지며 하얀 스크린이 나타났다.바깥세계와 전혀 다른 시간이 열린 것이다.40대의 남자가 거룻배를 타고 등대로 가고 있다.바다에는 비바람이 불어 파도가 뱃전을 때린다.남자는 오래된 탑의 모형을 소중하게 들고 있다.사공이 남자를 등대에 내려주고 뭍으로 돌아간다.남자는 등대꼭대기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간다.오래전부터 비어 있은 듯 그 방에 있는 모든 것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녹이 슨 철침대,침대옆 벽에 걸려 있는 등대지기의 제복·모자,침대아래 놓여 있는 신발·벽거울·책상과 걸상… 모든 것이 등대지기가 살아 있을 때 그대로다. 남자는 모형을 책상위에 내려놓고 서랍을 열어본다.오래전 날짜의 소인이 찍힌 엽서 한장과 일기장. 남자가 일기장을 펼치자 내레이션이 깔린다(터키말이므로 뜻을 알 수 없다.그러나짐작컨대 그의 딸에 관한 얘기인듯).남자는 일기장을 반쯤 읽다 말고 자기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본다.거울에 나타난 얼굴은 그가 아니라 오래전에 사망한 등대지기다.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남자는 등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등대지기의 환영을 계속 뒤쫓는다.환영을 쫓는 사이 남자는 환생한 등대지기로 바뀐다. ○오스만때 재건축 그러자 그의 발길은 저절로 탑의 구석에 있는 하나의 방으로 이끌려간다.그 방의 문에는 녹슨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자물쇠를 부수고 남자는 안으로 들어간다.그 방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기미가 역력하다.푸른 시트가 덮여 있는 커다란 침대,촛농이 흐른 두개의 촛대,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나신의 처녀가 횃불을 높이 쳐들고 어두운 바다를 비추고 있는데,나신의 남자가 등대를 향해 기를 쓰고 헤엄쳐가고 있다. 뭍에서는 등대지기의 딸이 어머니 몰래 집을 나와 거룻배를 타고 등대로 간다.그녀는 등대로 올라서자 횃불을 켜들고 바다를 비춘다.마치 남자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남자는 바다를 헤엄쳐 등대에 이르러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처녀는 이전에 그래왔듯이 촛대에 불을 붙인다. 딸과 아버지의 정사. 등대지기의 제복을 입고 남자는 집(등대지기집)으로 돌아간다.그의 아내가 남편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키다가 분통을 터뜨린다.집을 나가서 그동안 무얼 하다가 이제서야 돌아오느냐고.아내는 분을 참지 못해 뜨거운 물 한바가지를 그의 국부에다 끼얹는다. 그후에도 두 사람은 등대에서 만나 정사를 계속한다.어느날 딸에게 생긴 남자 때문에 둘은 심하게 다투던중 촛불을 쓰러뜨려 방이 불에 탄다. 등대는 그후부터 어둠에 잠기고 다시는 불을 밝히지 않는 등대가 된다. 청색커튼이 열릴 때처럼 그렇게 천천히 일마즈 귀니감독의 이름 위로 닫혔다.
  • “김일성사망 민족비극 마감계기로”/동구서망명 북한출신대학생의 소감

    ◎가까워진 통일… 매일밤 고향부모 꿈 꿔/추석마다 임진각방문 이젠 끝냈으면 귀순한 북한출신 대학생들에게도 김일성의 사망소식은 「메가톤급 뉴스」였다. 동유럽에 유학중 자유를 찾아 귀순한 12명의 북한출신 대학생들이 만든 「동류회」회원들이 김일성 사망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회원 정현씨(29·고려대 경영학과 4년)는 김일성 사망소식을 접한 직후 『이젠 통일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맨먼저 떠올랐다고 전했다. 옛소련 도치니크 공과대에 유학중 제3국을 통해 90년 8월 귀순한 정씨는 『그동안 고향에서 고생하고 계실 홀어머니 생각에 잠못이룬 날들이 많았다』면서 『아직 흥분할 일은 아니지만 바라던 일이 일어난 만큼 통일의 그날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정씨보다 1년늦게 폴란드 그다니스크종합대에 유학중 우리나라에 온 동영준씨(28·고려대 경제학과4년)는 『이젠 시부모님을 만날수 있겠다며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통일의 그날이 멀리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지금까지 김일성이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씨의 마음속 한구석엔 한 조각의 불안한 마음 또한 가시지 않고 있다.79년 10월 북한에 있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소식에 수업까지 전폐하고 학우들과 통일이 됐다며 기뻐했던 순간이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김일성사후에 대한 연구가 시급할 것 같다』며 『남한의 흡수통일을 두려워하는 북한은 앞으로 개방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미·일에 협조를 요청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것』이라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동씨는 『추석이나 설등 명절때면 부모님 생각으로 잠못이루다 임진각으로 차를 몰고 달려간 적도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소련여인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며 결혼까지 해 화제를 모았던 「사랑을 위하여,자유를 위하여」의 주인공 김지일씨(30)는 김일성의 사망이 북한의 개방으로 이어졌으면 하고 기대했다. 김씨는 『90년 소련을 탈출할 당시 부모형제 생각으로 몇번이나 망설이다 동구권의 붕괴를 보면서 북한에도 5년안에 변화가 오리라는 확신아래 불효를 감수하고 귀순을 결심했다』고 상기하면서 『북한에도 개방의 바람이 불어 인간다운 삶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국어대에 재학중인 조승군씨(28)등 동병상련의 귀순 유학생들이 동유회를 만든 것은 91년 4월.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만나면서 망향의 설움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데 대부분 귀순을 한 뒤 결혼을 해 모임이 있을 때에는 동부인을 하고 있다.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해 곧 모임을 가질 예정인 이들은 김의 사망이 7천만 민족의 비극을 마감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고 한결같이 바라고 있다.
  • 이산가족 오갈길 열어야/강제문(남북정상회담에 바란다)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김영삼대통령의 굳은 의지와 용단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오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열리게 된 것을 우선 크게 환영한다.근 반백년동안 불신과 반목으로 적대속에 살아오면서 쌓인 두꺼운 분단의 벽이 이번에는 허물어질 것같은 흥분과 설레임은 비단 본인만이 갖는 심정은 아닐 것이다. 북측의 「서울 불바다」「전쟁불사」등 거듭되는 망언과 핵사찰 거부등으로 고조된 긴장과 위기감이 정상회담합의를 계기로 반전되어 남북간에 타협과 대화의 기운이 싹트고 큰 전환의 계기가 될 가능성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들뜨거나 지나친 기대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더 큰 좌절감을 맛보지 않을까하는 불안감도 없지않다. 그것은 북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다.그동안 남북관계는 멀리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때 김구선생이 이용을 당한 일로부터 가깝게는 지난 3월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에 이르기까지 북측에 의해 당하기만 했다. 특히 월남실향민들의 김일성집단에 대한 불신감은 골수에 박혀있으며 뇌리속에는 6·25전쟁의 상혼이 여전히 깊게 자리잡고 있다.6·25동란을 아직도 북침전쟁이라고 억지주장을 하고 83년 10월9일 랭군에서의 테러폭발사건과 87년 1월에 있었던 KAL기 폭파사건은 모두가 다 조작해낸 자작극이라고 역선전을 하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정부당국에서는 모처럼만의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국민들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여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남북간에 풀어내야 할 문제는 너무도 많다.그러나 양정상이 마주 앉았을때 최우선과제로 북측의 핵문제 해결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위기상황으로 이끈 이 핵문제의 해결이 타결되지 않을때에 두 정상간의 상봉이 우리 민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따라서 정상회담의 큰 성격의 하나는 통일논의에 앞서서 핵문제를 확실히 타결하는 회담이 되어야 할 것이다.핵은 한반도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위험한 요소이며 북측의 핵개발을 포기하는데 합의를 못본다면 회담의 성과는 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핵문제해결도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새삼스럽게 큰 의제로 내걸고 의견교환이니 토론이니 하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없다.1992년 남북간에 상호합의로 발표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에서 이미 결정이 난 문제다.문제는 김일성이 합의된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신뢰성있는 약속을 하면 되는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 휴지화된 합의내용을 상기시켜 그 이행을 강력히 촉구하여야 할 것이다.핵투명성 보장에 이어 풀어야 할 가장 초미의 과제는 이산가족의 문제이다. 7백50만을 헤아리는 월남실향민은 정든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생이별한지 반세기가 흘렀다.그동안 이산가족들은 남북을 가로막는 인위적 장벽때문에 북한에 계시는 부모님의 생사도 몰라 자식으로서 마땅한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고 설이나 추석이면 탄식으로 보내고 있다.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과 중국등 여러나라는 이미 통일을 이루었거나 상호교류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있다.이제 이 지구상에 우리만이 오직 완전한 단절과 고통속에 몸부림치고 있다. 통일이나 민족화합이라는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은 겨레의 뜨거운 핏줄기가 민족애로 동포애로 발로되어 가슴아픈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할때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가족간의 생사를 확인하고 서신교환을 하며 친혈육을 상봉케하는 인도주의사업에 북측이 이번에는 꼭 호응하여야 할것이다. 개방과 개혁이 그들 체제의 붕괴와 연계하여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북측으로서는 이 문제 역시 내심 꺼려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김영삼대통령이 수차 언급한 바와같이 북한을 결코 흡수통일하지 않겠다고 말한 진실성을 믿고 체제붕괴 공포증으로부터 탈피하여 상호신뢰로 이산가족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북측의 핵투명성 보장,이산가족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면 경제 문화교류의 협력과 증진,군축문제등 모든 난제에 대한 해결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6·25참변의 진상도 남북정상이 공개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모처럼 무릎을 마주댈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은 평양에서만의 단발성이 아닌 서울에서도 회합을 갖는등 지속적인 회담을 통해 상호신뢰감을 쌓고 7천만 겨레의 염원을 원만하게 풀어나가길 두손모아 기원하는 바이다.
  • 이산의 한부터 풀어야한다(사설)

    남북정상회담개최 합의에 가장 큰 기쁨과 기대를 보이고 있는 것은 남북의 1천만리산가족들일 것이다.마침내 이산의 한을 정말 풀수있을 것인가.특히 시간이 많지않은 나이든 분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이산가족의 고향방문 성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김영삼대통령의 다짐도 그러한 아픔을 함께하는 위로요 결의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의 남북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북한의 핵투명성보장과 남북긴장완화및 통일의 문제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그보다 더 중요할수 있고 시급한 과제가 바로 1천만 이산가족 교류실현의 문제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겠는가.대통령도 그런 심정일 것이며 때문에 이번 평양정상회담에서 핵문제와 함께 이문제를 가장 중요한 의제로 삼을 생각임을 밝힌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기회있을 때마다 이산가족상봉의 실현을위해 북한의 문을 두드려 왔다.도덕정치와 인권외교를 지향하는 김영삼대통령도 취임이후 이산가족문제에 깊은관심을 보여왔다.이인모노인을 무조건송환하는등 인도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이산가족문제에 관해서만은 핵문제와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특별방침도 견지해 왔으나 이렇다할 북한의 호응을 얻지 못한채 현재에 이르고있다. 정말이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않을수 없다.탈냉전이후 동서독일의 통일은 말할것도 없고 가까운 중국과 대만도 자유로운 왕래가 이루어지게 된지 오래다.러시아는 물론 북한의 맹방이요 같은 공산당 독재국가인 중국과 우리도 자유왕래를 하고있다.왜 남북한의 왕래만 안된다는 것인가.부모형제자매의 상봉은 커녕 서신왕래도 할수없단 말인가.이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민족적 수치요 무능이 아니면 불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남북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당장의 자유민주통일일 것이다.다음이 공존공영의 자유왕래다.어렵다면 이산가족 남북왕래와 상봉부터 시작하자.남북왕래가 곤란하면 판문점면회소 설치는 어떤가.중국이나 일본등 제3국에서의 상봉도 좋을 것이다.서신왕래도 무방하다.전화연결을 주선할수도 있다.미군실종자 유해도 찾아주고 있는북한이다.생사확인 만이라도 시작하면 어떻겠는가. 분단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다.이산가족상봉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다.어떤 형태로든 성사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명의 하나라 생각한다.북한의 호응여부가 관건이다.우리는 김일성 북한주석의 이문제에 대한 대응을 특별히 주목할 것이다.그것은 대북신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YS/IS/“돌파력대관록” 예측불허 한판승부(남북 정상회담)

    ◎남북정상의 스타일과 회담전망/밝은심정 가진 낙관론자/YS/숱한 정치 역정… 술수 능란/IS/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쉽은 “공통분모” YS(김영삼대통령)와 IS(김일성북한주석)의 만남은 우리 민족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일대 분수령이다. 지나간 역사는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지도자의 한순간 판단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수가 허다했다. 온 민족의 앞날을 어깨에 걸머지고 다음달 25일 평양에서 만나는 YS와 IS는 어떤 인물들인가.그들이 각기 유명인사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만나는 새로운 「조합」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두사람이 자라온 배경과 특성을 짚어 보면 다소의 궁금증은 풀릴수 있을 것 같다. YS와 IS의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정치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카리스마적이라고 평가될 정도다.그 카리스마를 YS가 민주주의에 적합하게 발휘하고 있는 반면 IS는 50년 가까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혜택을 주고 반대할 때는 정치적으로 거세시키는 보스기질이 강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정치9단으로서 두사람은 뛰어난 순발력과 판단력을 공유하고 있다.핵심에 들어가는 능력과 순간선택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일반의 평가다.YS와 IS는 「사건」을 만들어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다.이번에 남북한 정상회담을 극적으로 성사시킨 것도 그 「사건 생산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다. 두사람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김일성의 부친은 한의사인 김형직이며 모친은 기독교의 집사였던 강만석이었다.김대통령이 기독교 장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IS는 그러나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에 입문하면서 기독교집안의 전통을 저버렸다. 두사람은 스포츠를 좋아하고 멋진 용모를 가졌다는 점에서도 닮았다.건강에 대한 노력도 모두 남다르다.다만 YS가 조깅등 스스로의 노력으로 건강을 가꾸는 반면 IS는 보약,좋은 음식 심지어 처녀의 피를 수혈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부의 도움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YS와 IS는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다. 전체적 분위기에 있어 YS는 밝은 인상이다.30여년동안 야당지도자로서 탄압을 받았지만 항상 긍정적이고 미래를 낙관한다.상당히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아 서울대를 졸업했고 25살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되는등 순탄한 초년을 보낸 것이 그를 밝게 만든 것 같다. 이에 비해 IS는 음험한 인상을 풍긴다.카터전미국대통령처럼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지적이고 쾌활해 보일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음모형이다.오랜 세월 북한의 전제군주 자리를 유지하면서 숱한 술수를 체험적으로 습득해 왔다.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험난한 빨치산활동을 했고 중학중퇴라는 학력이 그의 심성을 어둡게 했을 수도 있다. YS와 IS의 역사적 만남은 그들의 특성 가운데 어느쪽이 우세하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YS는 정권을 잡기까지의 성향이 그랬듯이 IS와 만나서도 공격적으로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실무진이 짜놓은 의제나 합의를 무시하고 민족통일의 거보를 진전시키기 위한 실질적 합의를 IS에게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정상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보는 예상이 상당수 있는 것은 YS의 이러한 순수성이 IS의 노회한 복선에 걸려 이용만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탓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두사람은 모두 정치달인이다.역사적 사건을 이루어내는데도 주역들이었다.따라서 정상회담을 빈손으로 끝내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설령 IS가 YS를 이용하려 해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IS의 관록보다는 YS의 상대적 패기가 돋보일 가능성이 높다.게다가 국제적 지원도,역사의 흐름도 YS편이다.서로가 서로를 의심해온 남북한 관계의 기존 틀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려는 YS의 정면돌파가 성공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 “나는 한국전에 이렇게 참전했다”/중국군의 증언

    ◎중국군 참전병사 2인 인터뷰 중국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만주까지 넘봤다는 당시의 주장을 아직까지도 공식 입장으로 고수하고 있다.대부분의 일반 주민들도 그대로 믿고 있다.특파원이 만난 당시 참전 병사들도 그랬다. 이같이 한국전에 관한 정확한 재평가가 없어선지 고위 지휘관 출신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그래서 어렵사리 사병과 초급 지휘자 몇 사람의 체험만을 들을 수 있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가식없는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우리 땅에 왔던 「중공군」들의 40년후 회고담을 들으며 새삼스레 느끼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었다. ◎“동홍각/“미서 중국 침략” 선전 믿고 압록강 도하/51년3월 터키군과 교전… 4명만 살아 『미국은 왜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 남북조선사람들에게 그토록 큰 괴로움을 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50년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분대장으로 압록강을 넘었던 동홍각씨(66·가명)는 아직도 한국전쟁을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그는 미국이 49년에 나라를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넘어뜨리기 위해 조선북쪽을 삼키고 압록강까지 와서 중국땅 단동에까지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으며,이는 일본이 조선반도를 거쳐 만주를 빼앗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과 똑같은 수법이라고까지 주장했다.당시 중국에선 병사들에게 참전명분을 이렇게 선전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사실을 언제 처음 알았었나. 『1950년 10월초로 기억된다.당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서 조선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전쟁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었다』 ­이 전쟁은 6·25전쟁이라고도 한다.이는 6월25일에 일어난 때문인데 그로부터 4개월도 더 지난뒤에야 개전소식을 알았단 말인가. 『그렇다.우리는 군대에서 훈련 받느라 6월에 전쟁이 터졌다는 얘기는 못들었다.아무도 그런 얘기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그뒤 2∼3개월만에 낙동강이남을 제외한 한국 땅 대부분을 점령했다.그래서 미군을 비롯한 16개국 유엔군이 참전키로 했다.미군이 먼저 침략했다면 유엔깃발아래 16개국가의 유엔군이 어떻게 파견될수 있었겠는가. 『처음 듣는 얘기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격전지는. 『51년3월에 우리 중국군 30명은 한 고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터키군 1백80여명이 한밤중에 산위로 진격해 올라왔다.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육박전까지 벌이다가 도망치듯 하산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고지에는 터키군도 보이지 않아 그들도 밤중에 퇴각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이 전투에서 받은 칼자국 상처가 아직도 내몸 여러곳에 남아있는데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쪽에선 단 4명뿐이었다』 ­전쟁중 고통스러웠던 점은. 『우리의 군장비나 무기는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버린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유엔군에 비해 크게 낙후됐었다.그렇다고 북조선에서 물자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식량이나 의류등 모든것을 중국에서 가져 갔다.우리가 신세진 것은 먹는 물뿐이었다.이같은 장비의 낙후외에도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미군의 끈질긴 공습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8노군때부터 군대생활을 시작해 국공내전과 이른바 6·25때의 항미원조참전을 거쳐 70년대 중반까지 현역생활을 했던 그는 『전쟁으로 손해보는 것은 인민들 뿐이다.인민들만 온갖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고 『전쟁중 부모형제를 잃고 넋이 나간채 울부짖던 고아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내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강/소속부대원 1천명중 2백여명 전사/보급물자 모자라 미군이 버린 약품써 『중국군 의무부대에는 당시 약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미군들이 버리고 간 의약품이 중국군 부상병을 치료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우리는 심지어 미군시신을 샅샅이 뒤져서 약품을 챙겨 쓰기도 했다』 한국전 당시 의무병 반장으로 참전했던 왕강씨(64)의 회고다.그는 당시 중국군은 물자가 너무 부족했지만 미군이나 기타 유엔군들은 보급물자가 풍족해서 부럽기 한이 없었다고 말했다.그래서 당시 중국군인들이 전투때마다 꼭 승리하려고 기를 썼던 이유중에는 승리한후 적군이 소지했던 맛있는 음식이나 약품등을 빼앗아 쓸수 있다는 희망도 꼽지 않을수없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군 의무부대에서는 어떤 약들을 보유하고 있었나. 『중국에서 제조한 서양의약품들로 진통제·지혈제·소염제가루에 붕대정도를 갖고 있었던게 전부였다.당시 한약은 가져가지 않았었다』 ­의무병이어서 당신은 비교적 안전하게 지냈겠다. 『그런 것도 아니다.내 몸에도 세군데나 상처가 남아있다.특히 내 오른쪽 가슴에는 탄환이 완전히 뚫고 나갔었다.천만다행으로 당시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좋은 약을 써서 탄환 상처를 깨끗이 완치시킬수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한번 사용했던 붕대를 다시 쓰기 위해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을 때 총탄을 맞았다고 했다.놀라운 사실은 그 당시는 총소리도 못듣고 아픈줄도 모르고 막사로 돌아왔는데 동료들이 등뒤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말해줘서야 총맞은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고통스럽던 기억은 무엇인가. 『먹을 게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우리는 밥이나 고기 채소류는 먹어보지도 못했다.강냉이를 먹거나 녹두 콩등으로 만든 미숫가루로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다.워낙 영양가 없는 것들만 조금씩 먹다보니 야맹증에 걸려서 제대후에도 오랫동안 고생했다』 왕씨는 50년10월25일 66군 588단 위생반장으로 압록강을 건넌후 이듬해인 51년4월까지 불과 반년남짓 참전하고는 귀국했다.그후엔 중상을 입고 중국으로 후송돼온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바삐 보냈다는 것이다. ­당신소속 부대는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는가. 『588단은 1천여명에 달했다.그중 2백여명이 전사했다.이들은 마대자루에 넣어 그대로 땅에 묻어버렸다.부상병도 수없이 많았는데 주로 민간주택에서 20∼30명씩 모아 치료를 하다가 어떤때는 미군의 공습으로 혼쭐이 나기도 하고 전투가 조용해지면 좀더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후송하기도 했다』 ­요즘은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가. 『전쟁에서는 침략자든 피침략자든 어느쪽을 막론하고 피해를 보는 것은 인민이라는 생각이다.그래서 다시는 참전하고 싶지 않다.우리 자손들에게도 전쟁이 일어나면 불참하라고 권유하겠다』
  • 바그다드·암만/“신의 도시” 바빌론(아랍서 지중해까지:5)

    ◎시간도 멈춰선 「2천5백년전 왕국」/거대한고 장엄한 이슈타르게이트… 네자르왕의 위엄 보는듯 고고학자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다.바빌론 궁전의 유명한 「행진의 거리」복판에 섰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그들은 역사의 미궁속으로 끊임없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치 현대의 어린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여행을 꿈꾸듯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동안 나도 그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의 도시,고대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같은 수식어로 바빌론은 역사의 문외한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그 이름이 주는 매력과 신비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증발의 유혹」에 빠졌는지 모른다.영화 「타임머신」에서 인간은 첨단기계를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최근 대전엑스포에서 시승해 본 「미래의 서울로 가는 자동차」는 이보다 한층 단순하고 솔직했다.이것은 고속으로 전개되는 대형 멀티비전 화면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나 바빌론에서 시간여행을 하는데는 그런 구차스런 문명의 이기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는 시간도 잠을 자고있다. ○외성은 흔적 없어 먼저 우리앞을 막아선 것은 청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이슈타르 게이트였다.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란 뜻이다.이 문은 본래 바빌론내성의 출입문인데 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바빌론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우리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이 문도 복제품으로 원형의 절반 규모밖에 안된다고 한다.이슈타르 게이트의 전면에는 이상한 동물의 모양이 무늬처럼 일정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말과 개의 중간쯤이라고 할까.이것은 상상의 동물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었다.상상의 동물은 궁안의 여러군데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오른쪽에 뜻밖에 소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이 건물은 바빌론박물관으로 1899년 이도시가 처음 발굴될때 발견된 여러가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박물관을 지나약간 오르막진 언덕으로 올라가자 눈앞에 행진의 거리와 왕궁의 웅장한 성벽들이 나타났다.행진의 거리는 철책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쌌는데 그 길이가 수백m는 될것 같았다.성벽들은 행진의 거리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거리의 바닥에는 단단한 흙벽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행진의 거리는 「적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축제가 열렸었다.그러나 네부카드 네자르가 죽고(BC605∼562)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승리의 거리에 페르시아의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행진했다는 사실(BC539)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00년전의 길바닥 위로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고 있었다.성벽으로 에워싸인 행진의 거리는 정적이 가득했다.문득 이 공간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면 저 성벽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서 네부카드 네자르의 병사들과 신하들을 당장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거리 복판에 서서 나는 잠시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이 공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성벽을 쌓은 벽돌들마다 네부카드 네자르 대신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엔 후세인 이름 사실 이 거대한 왕궁은 후세인의 지시에 의해 최근 복원된 하나의 무대세트에 불과한 것이다.후세인은 2500년전 이 도시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네부카드 네자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바빌론을 복원시켰고 왕궁의 성벽을 쌓은 벽돌에는 네부카드 네자르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후세인은 자기 이름이 다시 2500년 뒤에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으로 회자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9월에 열리는 바빌론축제도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사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이 축제가 열리는 주무대인 그리스 극장은 바빌론성에서 수백m 떨어진 한적한 들가운데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일종의 야외극장인 이 무대가 그리스극장이란 이름을 갖게된 것은 BC300년경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그리스의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봐서 무척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야외무대를 건립하는데 사용된 벽돌이 모두 바벨탑의 잔해에서 거둬들인 것들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궁전의 성벽을 조금 벗어나 옆뜰로 나서면 넓은 공터의 복판에 커다란 사자상이 버티고 있다.높이 2m,폭2·5m의 이 용맹한 사자상은 그러나 지금은 보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이 사자상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있고 적들을 제압하는 상징물이란 얘기도 있으나 어느쪽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자밑에는 사람이 누워있고 사자는 앞발로 인간을 찍어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침략자를 제압한다는 왕궁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의 유적은 바빌론성에서 거의 1㎞쯤 떨어진 외딴 언덕위에 있다.바벨탑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설이 있을 뿐이다.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다.그러나 바벨탑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이 구약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심하기 좋아하는 이방인을 잠시나마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밋밋하고 먼 언덕길을 올라갔다.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났다.미사일이나 큰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것 같았다.벽돌조각이나 건축물의 다른 잔해조차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역사를 벌였다는 느낌은 쉽게 받았다.웅덩이의 넓이나 깊이로 미뤄볼 때 그 규모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바벨이란 말에는 「하느님의 문」이란 뜻과 「혼돈」이란 뜻이 함께 있다.거대한 웅덩이 잔해를 봤을때 한마디로 혼돈이란 말이 생각났다.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열정,하느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이 제단을 쌓아올라갔다.그러나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만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탑의 건축을 중지시켰다.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해 대강 이런 얘기가 나와있다.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을 왜 배신으로 오해했을까?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뜻을 신에게 올바로 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든 것인가? ○탑문화 크게 발달 이라크 남부에는 구약의 표적물이 유난히 많다.바벨탑을 위시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우르」,쿠르나의 에덴동산 등이 그것이다.「노아의 방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의 홍수얘기를 전해듣고 훗날 돌아가서 신화로 꾸며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분명한 것은 유프라테스 평원에는 탑이 많다는 사실이다.유프라테스 뿐아니라 나일강 유역도 마찬가지다.평원에는 산악지대와 달리 하늘로 높이 솟은 탑문화가 유독 발달되어 있다.사람들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탑에 의지해 자기의 권력의지와 신에 대한 갈망까지 모두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바벨탑의 잔해는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의 허망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바빌론성 외곽을 멀리 벗어난 곳에 인류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의 석상이 있었다.법전을 새겨놓았다는 높이 2.5m크기의 돌기둥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형이었다.원형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도 자연 보잘것이 없었다.귀중한 유산들이 열강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탓이다.박물관 진열대에는 고작해야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작은 토기 몇점만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길을 끈것은 1899년 독일인 콜데베이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기 직전의 바빌론성의 전경과 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의 사진들이었다.발굴직전의 바빌론 성은 짙은 안개에 싸인 고성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신비로 가득했다.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그런가하면 발굴현장 사진은 시장바닥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아,귀중한 유물을 훔쳐가기 위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 신비의 고도는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되었던가,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94 타임캡슐(외언내언)

    1971년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은 허전하던 백제문화·예술연구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았다.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은 처녀분으로 1백8종 2천9백6점의 귀중한 백제시대유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무덤의 주인공과 확실한 연대를 적은 지석을 비롯,왕과 왕후가 사용했을 각종 장신구와 생활용품들이 1천4백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왕릉이나 고분의 부장품들은 이렇듯 당시의 생활상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고대의 타임캡슐」이라고나 할까. 현재의 생활과 문화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타임캡슐.갖가지 생활용품과 한시대를 상징하는 자료들을 캡슐에 수장하여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다.세계최초의 타임캡슐은 1939년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가 뉴욕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플러싱메도공원에 묻은 것.카메라·만년필·깡통따개·시계·화장품등 1백10개품목을 넣었으며 개봉시기는 5천년뒤인 서기 6939년으로 정했다.그러나 25년이 지난 뒤 문명이 몰라보게 발전하자 웨스팅하우스사는 64년 두번째 타임캡슐을묻었다. 그뒤 67년 캐나다에서 몬트리올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70년에는 일본에서 「엑스포70」을 기념하여 타임캡슐을 묻은 일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85년 남산 팔각정옆에 매설한 것이 처음. 서울정도 6백년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94타임캡슐」은 6백종의 물품을 수장하여 남산의 옛수방사터 광장에 묻기로 했다.정도 6백년이 되는 11월29일에 맞춰서.개봉시기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4백년 뒤인 2394년,바로 서울정도 1천년이 되는 해다. 타임캡슐은 흔히 어뢰형이나 항아리모양인데 서울시는 보신각종모양으로 결정했다고 한다.조선시대 장안의 도성문을 여닫게하던 명물 보신각종이 캡슐의 모형으로 선정된 것은 뜻깊은 일이다.원래의 종은 노쇠해 국립박물관으로 은퇴했고 새 종은 서울신문사가 85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주조한 것이다.
  • 전환사채 발행 급증세/올들어 1조2천억원/사상최대기록 깰듯

    증시 활황에 대한 기대로 일정 기간 후 주식으로의 전환이 가능한 전환사채(CB)가 올해 사상 최대의 발행실적을 기록할 전망이다.또 CB의 발행 및 청약에 중소기업과 개인투자자들이 참여하는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5일 증권감독원과 금융계에 따르면 올 들어 5월까지 CB 발행실적은 작년의 3천9백37억원보다 2.6배 많은 1조2백43억원으로,사상 최대였던 89년의 1조1천7백84억원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지난 3월 CB를 증권거래소에서만 매매토록 한 장내집중 의무화 조치 및 개인투자자 우선배정 조치로 일반투자자의 참여가 늘어난 데다 ▲주식전환으로 차익을 올릴 수 있고 ▲발행사도 금융기관 차입이나 일반 회사채보다 싼 값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CB 발행이 호조를 보이면서 회사채 발행물량 중 CB가 차지하는 비중도 89년 16.9%,90년 6.2%,91년 1.5%,92년 1.3%,93년 2.5%에서 올해는 14.5%로 높아졌다.기업공개·유상증자·회사채 발행 등 직접금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89년 5.6%,90년 4.9%,91년 1.2%,92년 1.1%,93년 2.1%에서 올해 11.4%로 껑충 뛰었다.이 중 중소기업의 발행물량은 작년에는 3.6%(1백40억원)에 불과했으나 올해에는 10·8%(1천1백3억원)로 늘었다. 또 지난 3월의 개인청약자 우선 배정 및 장내집중 의무화 이후 개인투자자의 CB 청약이 급증하고 있다.작년의 세풍과 삼미특수강 CB에 대한 개인청약은 1백13명·청약액 24억원이었으나 올 들어서는 5개월 동안 5천2백48명에 7백75억원으로 늘었다. 전환사채는 지난 63년 최초로 쌍용시멘트가 비공모로 발행했으며,공모형식은 72년8월 삼성전자가 만기 2년·표면금리 21%로 3억원어치를 발행한 것이 처음이다.이후 79년까지 총 9건·1백16억5천만원어치가 발행됐으나 80∼84년까지는 증시침체로 한건도 발행되지 않았었다.
  • 한총련출범식 북선전물 전시/대학생 2명 긴급구속

    【광주=최치봉기자】 「한총련」의 이적·용공행위를 수사하고 있는 경찰은 4일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전편집위원 김연식씨(22·환경공학과3년)와 이현화씨(20·생물학과3년)등 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긴급구속했다. 경찰이 한총련에 대한 전면수사방침을 발표한 뒤 관련 학생이 검거,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지난달 27일부터 조선대에서 열린 제2기 한총련 출범식 기간동안 「통일의 광장」에 평양시가지 모형과 만수대 의사당,유경호텔등 북한 관련 조형물과 김일성 항일투쟁사를 소개하는 패널등을 제작·전시한 혐의를 받고있다. 경찰은 한총련 핵심간부는 물론이고 「통일광장」에 선전조형물을 제작·전시했거나 이적·용공성유인물을 제작하는데 배후조종 또는 관여한 학생들에 대해서도 전원 검거해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 한총련 핵심 37명 검거령/이적·용공혐의

    ◎명단 확보… 연고지 수사반 급파 한총련의 이적·용공행위를 수사하고 있는 경찰은 1일 한총련 출범식에서 선언문과 전시물등의 채택·제작과장에 깊이 관여했을 한총련 핵심간부및 배후세력 37명의 명단을 확보,이들에 대한 검거에 주력하고있다. 경찰은 이미 수배를 받고 있는 한총련 의장 김현준군(25·부산대 총학생회장)과 조국통일위원장 양동훈군(22·조선대 총학생회장)등을 비롯해 「남총련」등 9개지역 총련의장과 조국통일위원회의장,주동세력,만수대 의사당등 북한 건축물 모형을 만든 K대 건축학과 학생,김일성 사진등 전시에 가담한 C대 학생등 37명의 명단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연고지에 수사전담반을 보내는 한편 검거 즉시 구속할 방침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한총련의 핵심간부들이 이른바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남측본부」의 의장단을 맡고 있다』면서 『따라서 수사대상은 한총련의 핵심간부를 포함,출범식때 나온 이적·용공행위의 유인물등 제작등에 적극 개입한 학생등이 될것』이라고 밝혔다.
  • 「미국제」 가족·우리가정(송정숙칼럼)

    수절도 못했지만 재클린은 현직 대통령의 추도사를 헌정받으며 전대통령 영부인으로 미국국립묘지에 묻혔다.역대 어느 대통령부인보다 많은 국민의 칭송속에서 「영원의 불」밑에 누운 것이다.이로써 알링턴묘지에는 케네디대통령 가정이 하나 이뤄졌다.대통령부부와 사산한 딸,생후 사흘만에 잃은 아들을 자녀로 손색없는 가족이다. 진작에 미국국민들은 가임여성으로 백악관에 들어온 재클린과 케네디대통령에게 이런 가족모형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중도에 좌절한 케네디 대통령가의 비극이 더욱 한스러웠을 것이다.재클린이 죽자 오래 홀로 누워있던,그들이 사랑하던 케네디에게 그 부인을 돌려주는 일에 온국민이 그토록 관심을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케네디시대 이후 미국인들의 가족모습은 옛날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별로 없게 되었다.원로 ㄱ시인은 지난 70년대초에 미국에 초빙교수로 다녀온 적이 있다.그때 부부끼리 친교를 나눴던 교수들이 있었다.10여년만인 80년대에 ㄱ시인은 그곳엘 들러 옛친지들을 한자리에 모아보았다.그랬더니 5쌍중한쌍도 그대로 부부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비교적 안정되고 다소 보수적인 교수사회도 그런 것이 미국이다. 내가 아는 한 시어머니가 최근에 미국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내외를 보러갔다.아들도 며느리도 대단히 우수하다고 자랑하던 분이다.그런 그분이 의외로 예정을 당겨 일찍 돌아왔다. 『며느리는 다리를 척 꼬고 앉아 책을 보고 아들아이가 커피를 끓여바치더라.아침도 아들이 토스트굽고 우유랑 채소랑 식탁에 차리면 며느리는 먹기만하고 설거지도 아들이 하더라.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꼴 못보겠더라』는 것이 연유였다.논문을 먼저 끝낸 아들이 며느리를 그렇게 돕기로 약속했다지만 시어머니로서는 도저히 참고 보아 줄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한 여자대학에서는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을 놓고 사제간에 지상논쟁이 벌어졌다.이 책은 외국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며느리들에게 적어보낸 시어머니의 요리법편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이 대학에서 출판했다.이에 대해 여성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비판을 했다.『이 책은 「여성이 곧 음식담당자이고 요리가 곧 여성」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여성의 억압구조를 강화시켰다』는 주장이다.그런 책을 여성의 자존심을 지켜나가야 할 대학이 가장 보수적인 제목으로 낸것이 실망스럽다는 것이다.굳이 낸다면 책이름이라도 「자녀에게 주는 요리책」이었어야 했다는 것.지난해에 나온 이 책은 40일만에 5만권을 팔았다. 대표적인 갈등의 상징인 고부간이 요리법을 전수해가며 화평하게 지내는 미덕도 크게 평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만큼 요즘 여성들은 자아가 강하다.혼수니 지참금따위 시대착오적인 풍습이 사회를 퇴영시키는 한편으로 이처럼 진보적이고 맹랑한 여성들이 기성세대의 의표를 황당하게 찌르기도 한다.이들모두가 우리의 가족을 구성할 핵심세력이다.그들은 특수한 일부도 아니다. 현직 국민학교 선생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있다.요즈음 도시주변의 어려운 동네에는 의외로 편부가정이 많다고 한다.대개 엄마가 달아난 가정이다.그런데 이런 가정은 편모가정의 아이들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하고 지도할 방법도 없다.무엇보다 거칠고 희망이나 따뜻함 같은 것이 먹혀들지 않고 도무지 어째볼 수가 없다.이런 난감한 어린이가 날로 늘어난다고 한다.최근 그런가정의 아버지가 아이를 학대했던 일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일도 있었다.이런 현상은 여성의 자아가 강해지며 생긴 부작용같은 것이다. 몇년전 미국서 화제가 됐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는 편부가 아이를 키우며 헤어진 아내와 법정싸움을 벌이는 것이었다.『부자가 저녁을 함께 지어먹으며 인생을 이야기하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생활의 의미를 당신들이 알기나 하느냐』고 절규하는 부성애가 일품이다.아마도 그무렵이 그나라에서 편부가정이 한창 사회문제가 됐던 시기였을 것이다.최근 것으로는 「메이드인 아메리카」라는 영화도 있다.자아가 강한 흑인 여성이 정자은행에서 『좋은 종자』를 주문해다가 시험관수정을 하여 잉태하고 딸을 낳아 길렀다.머리가 기막히게 좋게 태어난 그 딸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미국식 코미디로 처리한 영화다.그러면서도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혈연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그러나 가족이란 인간에게 최후의 구원일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을 소란스런 미국식문화속에 보석처럼 묻어놓고 있는 영화다.이런「미제가족」과 유사한 가족은 이제 어디서나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가족구조가 변해가는 것은 지구촌 어디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공하한 도덕론으로는 대응이 어렵게 되었다.금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가정의 해」다.전통적 구호만으로는 별효과를 기대할수 없을 것이다.인간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현실은 어떤지,미래의 가족은 어떻게 예측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탐색하고 규명해야 할것이다.오늘처럼 절망스럽게 타락해가는 인성을 구하는 것은 결국 가정의 역할임을 생각해서도 우리의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러나 절대로 서로 떠넘기기식이 아닌 방법이어야 한다.
  • 전쟁기념관/6·25전장 재현…산 교육장으로/10일개관…미리 가보면

    ◎「한국전쟁실」 등 6개 전시실 볼만/전쟁영웅 초상·전투모형도 전시 『나가자.나를 따르라­』 서울 용산구 용산동 옛 육군본부 터 3만5천여평에 자리잡은 전쟁기념관 4층 전쟁체험실. 20여평 남짓한 이 체험실에는 조명이 꺼진 어둠속에서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적군인 북한군,중국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4분30초동안 재연된다. 6·25당시 평양부근의 전선을 본떠 만든 이 체험관 속에 들어온 관중들은 귀청을 울리는 총성과 포성,코를 찌르는 화약냄새,부상병의 비명소리등으로 실전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상 4층·지하 2층규모의 기념관 내부의 각 전시실마다 모두 7천8백35졈의 전쟁기념물과 전쟁기록화,조형물,드라마등을 갖춘 전쟁기념관이 6·25발발 44주년을 앞두고 오는 10일 정식 개관한다. 이 기념관은 88년 특별입법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1천10억원을 투입,90년9월 착공된지 만 2년9개월만에 공사를 완료,선열들의 호국혼을 국민들에게 보여준다. 이 전쟁기념관은 한반도의 전쟁역사를 한눈에 조감하고 순국선열의애국심을 일깨울 수 있도록 모든 전시실마다 전쟁관련 자료와 전시물들이 입체적,역동적으로 전시한 것이 특징. 이 기념관은 우리나라의 군사유물을 비롯,세계각국의 무기·장비·복식·기치·문서·그림등을 주제별로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대형장비실등 6개 전시실에 나눠 전시해놓고 있다.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이 외침에 대항해 싸운 대외항쟁사를 주제로 삼고 있다. 살수대첩과 한산대첩 전투상황을 모형인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재현하고 안시성전투 행주대첩 청산리전투를 담은 기록화도 곁들여놓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로 남아있는 6·25전쟁을 재현한 한국전쟁실은 이 기념관의 핵심. 전시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이 전시실은 전쟁발발의 배경·남침과정·반격·중공군 개입·전선교착·휴전의 순으로 관련자료등을 배열해놓고 있다. 특히 6·25초기의 남북한 무기를 실물로 비교전시,전투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민간인들의 고통스런 생활상까지 담고 있다.전선의 아들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나 전장에 나서는 남편에게 준 부적,피난살이에 사용한 생활용품등도 전시하고 있다. 실전을 느끼도록 하는 전쟁체험실도 이 전시실의 일부이다. 기념관 안에 있는 대형장비실과 외부에 있는 옥외전시장에는 북한이 6·25당시 앞세운 T­34전차등 남북한 무기와 B­52미전략폭격기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전차·포·차량등 1백10여점이 전시돼있다. 또 삼국시대부터 월남전에 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영웅 1백32명을 선정,이들의 초상화,사진등을 기념관 양쪽 회랑과 전시실에 전시했다. 이 기념관은 개관이후 시민들에게 독립기념관이나 중앙박물관과 비슷한 수준의 입장료를 받는다. 전쟁기념 사업회(회장 이병형)측은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을 물리치고 오늘에 이르렀다』면서 『기념관이 전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의 산교육장이자 시민들이 문화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한총련은 북한대변 단체인가(사설)

    「한총련」이 제2기 출범식을 계기로 보인 각종 전시물과 유인물들은 한마디로 반국가적 불법행위였다.「한총련」은 행사기간중 북한정권의 성립과정을 정당화하는 사진과 설명을 게시하고 북한의 대외선전용 건물의 모형을 제작,전시해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데 열을 올렸다.더욱이 유인물을 통해서는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파쇼정권」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6·25를 「조국해방전쟁」으로 묘사했다.심지어는 「북한에 대한 부당한 핵사찰 압력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들의 이같은 행위는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걱정에 앞서 분노를 느낀다.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들은 누구인가.아무리 학생신분임을 감안한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시물이나 유인물의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니 정말이지 기가 찬다.전시물은 인공기가 게양된 만수대의사당등 하나같이 북한이 우월하다고 선전하는 것들이다.게다가 유인물 내용은 마치 북에서보내온 전단을 보는 것 같다.「미제국주의자들의 또다른 노예가 된 이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 조국해방전쟁을 벌여낸지 44년」「인간의 지위와 삶의지표를 독창적으로 밝힌 유일한 통치단결의 사상이 있다」는등 6·25를 「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하고 주체사상을 미화하는 것들이다. 더욱 한심한것은 문민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북한이 벼랑으로 끌고가고 있는 북한핵문제를 놓고 북한의 대남전략노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다시말해 「한총련」의 주장은 모두가 우리체제를 부인하고 북한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한총련」의 행동은 이미 용인할 수 없는 위험수위를 크게 넘어선 상태라고 본다.세상에 6·25가 「조국해방전쟁」이라니 어디 말이 되는가.지금은 공산주의를 내던져버린 종주국 러시아에서조차 「6·25는 북한의 남침」임을 입증하는 역사자료들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북한핵문제도 마찬 가지이다.정부와 온국민이 반대하고있다.국제사회도 유엔 안보이를 통한 성명을 내고 제재에 들어갈 태세를 갖추고 있다.그런 북한핵의 사찰을 반대한다니 말이 될 소린가.한총련은 북한대변 단체란 말인가. 당국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해 마지 않는다.대학생이란 자들이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노골적으로 미화 찬양하는 행위는 절대 좌시해선 안된다.북한의 마수가 배후에 뻗혀있을 가능성도 크다.차제에 그실체와 배후를 철저히 파헤쳐 다시는 이런 반국가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통일적인 행위가 재발하지 못하도록 해야할것이다.
  • 「이적·용공」 배후·주동자 검거 총력/한총련 수사 배경과 방향

    ◎북주장 수용,민주주의에 도전 규명/남총련 등 9개지역 의장 깊이 개입 경찰이 한총련 출범식에 나타난 이적·용공행위를 발본색원키로 한 것은 이들의 주장이 북한의 선전을 여과없이 받아들인데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김화남경찰청장이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한총련 출범식행사에는 용공·이적행위가 표출되어 왔지만 이제는 우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정면도전,파괴하려는 책동으로써 방치할 수 없다』는 말에서도 이번 한총련에 대한 수사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경찰의 수사방향은 먼저 제2기 한총련 출범식에 나타난 ▲한총련 출범 선언문등 6종류의 유인물 ▲북한 정권의 성립과정을 정당화하는 사진전 ▲북한이 선전용으로 이용하는 1백5층 유경호텔등 모형 건물전시 ▲북한의 생활상을 담은 비디오 상영 ▲북한 김책대학등과의 불법통신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로 규정,관련자 색출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경찰은 이같은 유인물과 전시물 제작등에 관여한 학생들을 유형별로 분류,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 김현준군(25·부산대 총학생회장)등 핵심간부 10여명에 대한 검거및 소재 파악에 나섰다. 이는 경찰이 한총련 출범식때 나온 유인물과 전시물등을 채택·제작·배포하는 과정에는 한총련의 핵심간부들이 반드시 관여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한총련 대의원대회 자료집에 따르면 모든 정책집행은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의장 김군과 전남·광주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남총련)등 9개지역 의장을 반드시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한총련의 핵심간부인 의장과 9개지역 의장은 이른바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의 「범청학련 남측본부」의 의장단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범청학련은 이미 92년과 93년 두차례에 걸쳐 서울지법으로부터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는데다 「한총련의 상급조직」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한총련은 범청학련과 접촉하며 북한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행위를 전혀 이적·용공행위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한총련 출범식 기간동안 범청학련 남측본부는 의장단회의를 개최하고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대축전」을 제의했다. 경찰은 한총련 핵심간부의 수사와 함께 한총련 산하 조직인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서부·동부·북부등 하부 조직 26개지구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의 한 고위간부는 이와관련,『한총련의 조직에 관여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적·용공행위를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그러나 이번 한총련 수사는 반국가적행위에 대한 사법적인 제재이기 때문에 주동자와 배후세력을 반드시 검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배후세력으로 한총련 출범식에서 수배중인 전 한총련의장 김재용군(25)이 학생들을 선동하는 연설을 한 것등으로 미루어 현재 국가보안법 혐의로 수배중인 93년도 한총련 간부 10명이 깊이 개입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편 경찰은 전시된 사진과 상영된 비디오테이프등의 입수경위에 대해 수사를 벌여 지난달 23일 조선대 교지편집위원장 차재덕군(25·경영학과 4년)등 2명을 검거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 “6·25는 조국 해방전쟁” 주장/한총련출범식 유인물 파장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파쇼정권」 규정/“대북 핵사찰압력 방관않겠다” 위협도 경찰이 한총련출범식과 관련,용공·이적행위 주동자및 연계·배후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 것은 학생들의 노골적인 반국가적 불법행위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은 제2기 한총련출범식행사에서 화염병을 던지거나 쇠파이프를 사용하는 등의 폭력시위는 줄고 참가학생수도 지난해 5만명에서 2만5천여명으로 감소했으나 국가보안법위반 유인물및 전시물은 예년보다 훨씬 늘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총련출범식에서 드러난 ▲출범식선언문등 6종의 유인물내용 ▲북한정권의 성립과정등을 정당화하는 사진및 모형물전시 ▲범청학련과 통신을 통한 북한과의 연계활동시도등은 명백히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경찰은 이에따라 국가보안법상 찬양및 고무·이적표현물제작및 배포,회합통신,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등을 적용이 불가피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한총련출범식선언문에서 『한총련 백만청년은 현정권을 매국정권·대결정권으로 낙인찍어버리고 새롭게 자주적 민주정부수립투쟁에 다시 일어섰다…』등의 내용을 통해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친미 파쇼정권으로 규정한 것을 비롯,6·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한총련의 핵심조직중 하나인 조국통일위원회의 출범선언문에는 『주한 미군철수와 미군기지철폐를 위한 투쟁에 나서자』면서 이미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청학련」조직을 강화,95년까지 연방제통일을 이루겠다는 주장도 담고 있다. 이 선언문은 이와 함께 『이북에 대한 부당한 핵사찰압력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 또 한총련명의로 나온 유인물 「조국통일위원회에 새 돛을 달기 위하여」에는 『연공연북의식에 기반한 민족대단결의식을 확고히 다지는 장이 되어야 한다』면서 출범식에 참가한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 전남대 민족사랑학생연합의 「민족의 길 제8호」,「자주적 평화통일 원문」등에도 북한이 평소 주장해오고 있는 연방제통일안과 핵사찰의 부당성,주체사상 등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경찰은 출범식장내에 「조선인민해방군창설」 「타도 제국주의동맹결성」등 북한정권의 성립과정을 정당화하는 사진과 설명을 게시하고 북한이 대외선전용으로 만든 인민문화궁전등 각종 건물모형을 제작해 전시하며 북한체제와 사회의 우월성을 선전한 부분도 용공·이적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 한총련간부 전원 검거령/경찰/“출범식서 보안법저촉 유인물 배포”

    ◎「주체사상·연방제통일」 주장/최소 30명선 사법처리 방침 경찰은 30일 제2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출범식에서 한총련선언문등 6종류의 유인물과 전시물등이 국가보안법에 명백히 저촉된다고 밝히고 이 유인물등의 채택및 제작·배포·전시에 관여한 한총련과 전남대총학생회등 간부,외부 배후세력등을 전원 검거,사법처리하기로 했다.사법처리대상은 최소 30여명에 이른다. 김화남경찰청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광주 조선대에서 열린 한총련출범식에서 북한이 주장해오고 있는 주체사상선전,핵사찰부당성,연방제통일안등이 출범선언문과 조국통일위원회의 선동·주장을 담은 선언문등을 통해 각각 그대로 수용됐다』고 밝혔다. 한총련은 이 기간에 김일성·김책등 북한 주요인물 사진및 약력을 게시하고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조선인민해방군 창설」등 북한의 성립과정과 정통성을 부각시키는 해설문까지 전시했다는 것이다. 한총련출범식 선언문에는 「미제의 식민지 사슬을 끊고 반미 자주·조국통일로 나서는조국청년들」등의 내용과 조국통일위원회선언문에는 「민족분열공작을 획책하는 미제국주의와 친미매판세력인 파쇼도당의 죄악을 철저히 까발리는」등의 이적내용이 실려있다. 김청장은 『특히 한총련은 출범식에 앞서 이달초 북한의 김책공대,재일본 조선대등과 불법통신으로 자매결연을 맺은뒤 이 기간에 자매결연 채택선언문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한총련은 출범식에서 북한이 제작한 「북한주민 생활상」「임꺽정」등의 비디오를 상영했으며 북한이 대외선전용으로 만든 1백5층짜리 유경호텔·인공기가 게양된 만수대의사당·인민문화궁전등을 모형으로 제작,전시했다. 한편 서울 경찰청은 이날 김재용(25·전 한총련의장),김병삼(25·전 한총련 조통위원장),김기헌씨(25·전 서총련의장)등 한총련1기 집행부 간부 3명에 대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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