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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직 인맥 열전] (11) 문화관광부(상)

    [공직 인맥 열전] (11) 문화관광부(상)

    문화관광부 공무원들은 “문화부엔 마피아가 없다.”고들 말한다.‘모피아’(Mofia·재정경제부(MOFE) 출신들이 산하기관을 장악하는 행태를 빗댄 표현)처럼 특정 파벌이 담합해 인사·승진 시스템을 장악하는 관행이 문화부에선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뜻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파벌이 없다는 게 오히려 약점처럼 이야기되면서 우리도 타 부처처럼 똘똘 뭉쳐 보자는 농담을 할 정도”라고 전했다. ‘비공식적으로 끼리끼리 관리해 주는 파벌문화’로부터 문화부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문화부의 태생 배경과 관련이 있다.1990년 신설된 문화부는 93년에 체육청소년부와 합쳐 문화체육부로 개편됐고,94년엔 다시 교통부의 관광국을 통합했으며,98년 폐지된 공보처의 일부 기능을 넘겨받아 현 체제를 확립했다. 융화되지 못하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조직구조였던 셈이다. 서로 다른 모태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한 식구가 되는 과정에서 초기엔 편가르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파벌 없는 정부부처’라는 조직문화가 안착됐다. ●관료출신 문화부장관 ‘특이한 이력´ 김종민 장관은 문화부 발족 이래 두 가지 면에서 ‘희귀한’ 장관이다. 각각 정치인과 전문예술인 장관을 선호한 김대중(신낙균→박지원→김한길→남궁진→김성재) 및 노무현(이창동→정동채→김명곤→김종민) 정부를 통틀어 유일한 관료 출신 장관이다. ‘문화부 차관 퇴임(98년 3월) 후 장관 신분으로 재복귀(올 5월)’도 김 장관이 첫 번째 테이프를 끊었다.7년 전 서울신문의 ‘문화부 공직인맥열전’(2001년 1월16일자)에 등장했던 당시 박문석 기획관리실장, 오지철 문화정책국장(현 한국관광공사 사장), 배종신 체육국장, 유진룡 공보관(현 을지대 여가디자인학과 교수) 등도 차관으로 문화부를 떠났지만, 김 장관이 닦은 길을 따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박양우 차관은 7년 전 기사에서 “문화부 차세대를 이끌고 갈 대표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됐고, 지금도 부원들 사이에서 ‘문화부가 배출한 최고 인재’로 꼽히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23회 행정고시 최연소 합격자로 실력과 리더십, 조직에 대한 애정도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위옥환 정책홍보관리실장은 문화부 내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고졸 출신으로 1급에 해당하는 고위공무원에 올랐고, 실력과 인품 면에서 고시 출신들로부터도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다.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광주 출신이란 이유로 승진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 ●박차관, 문화부가 배출한 최고인재 이보경 문화산업본부장은 문화부 조직 개편 직전 마지막 차관보(현재는 폐지)였다. 평소 부원들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으면서도 필요할 땐 자신의 주관을 관철시키는 소신파의 면모도 보인다. 김장실 종무실장은 ‘신정아 사태’ 때 문화부 연루설이 불거지자 관계 부서장으로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홍역을 치렀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실체도 확인되지 않자,“그만큼 처신이 깔끔했기 때문”이라며 부원들이 전보다 더 큰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병훈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장은 사업 진행을 위해 외부에서 영입된 인물로 친화력이 있고 정책의 맥을 잘 짚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주민지원본부장과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평가제도국장 등을 역임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자동차 ‘안전띠로 만든 가방’ 美서 인기

    자동차 ‘안전띠로 만든 가방’ 美서 인기

    자동차의 안전띠로 만든 가방이 미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제품은 ‘하비스 오리지널 시트벨트 백(Harveys Original Seatbelt Bag)’이란 이름으로 연예계 톱스타들이 애용하면서 일반인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LA 인근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디자이너 다나 하비는 10년 전만해도 아내와 함께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사는 가난한 젊은 부부였다. 그랬던 다나는 샌타애나의 임대주택에서 버려진 모피코트, 청바지 등으로 핸드백을 만들다 우연히 1950년산 뷰익 승용차의 빨간색 안전띠를 발견했다. 독특한 재질과 색감이 맘에 들어 이 안전띠로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단순한 발상이 대박을 터뜨려 다나의 안전띠 가방은 현재 북미 36개주의 700여개의 백화점에 입점, 30만개가 넘게 팔려 나갔다. 그의 샌타애나 집은 거대 가방회사의 본사로 탈바꿈했다. 이 안전띠 가방은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개성 있는 감각을 뽐내기에 충분해 패션을 선도하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추세. 가격대는 보통 90-130달러 정도이며 20-50달러 대의 작은 가방들도 나와 있다. 나우뉴스 명 리 미주 통신원 myungwlee@naver.com  
  • 롯데백화점 모스크바점 오픈

    |모스크바 김태균특파원|롯데가 2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백화점을 열었다. 국내 최초의 백화점 해외 진출이다. 아시아 지역의 유통기업이 서양에 백화점을 낸 것도 처음이다. 롯데백화점은 이날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모스크바점(현지 이름 롯데플라자) 개점식을 갖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지하 1층, 지상 7층에 연면적 3만 8530㎡ 규모로 모스크바의 신흥 번화가 노브이아르바트에 자리한 모스크바점은 식품부터 명품, 패션, 가전, 가구까지 갖춘 한국형 백화점으로 러시아 최초의 ‘원스톱 쇼핑’형 백화점이다. 모스크바점은 롯데의 서울 본점과 잠실점처럼 백화점과 호텔이 나란히 들어서는 구조다. 지하 4층, 지상 10층 규모(6만 4000㎡)의 호텔은 내년 하반기에 완공된다. 백화점과 호텔을 합한 총 투자금액은 4억달러다. 모스크바점에는 롯데제과,LG 오휘, 우단모피, 빈폴, 루이 카토즈, 장수돌침대, 쿠쿠 등 27개 국내 브랜드와 아르마니, 구치, 프라다,D&G 등 20개 명품 브랜드를 포함해 총 121개 브랜드가 입점했다. 롯데백화점은 “한국형 상품 구성과 마케팅, 서비스가 어우러진 한국형 유통의 수출시대가 열렸다.”면서 “점장을 포함해 현지 직원 중심의 인력 운용으로 철저하게 현지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올해 580억원, 내년 1400억원의 매출을 목표로 잡았다. 롯데 신 부회장은 개점에 앞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앞으로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으로 백화점 출점을 늘려나갈 계획이며 장기적으로 할인점 사업 진출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유통사업 외에 골프·호텔 등 리조트 사업을 위해 현재 모스크바시와 협의 중이며 연말쯤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windsea@seoul.co.kr
  • ‘검은 유혹’ ALL-Black 코디

    ‘검은 유혹’ ALL-Black 코디

    올 블랙, 올 가을·겨울 여성들의 패션 코드다. 미니멀리즘의 영향이 유효한 이번 시즌 블랙은 유난히 강세를 띨 전망이다. 블랙의 인기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 시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블랙으로 치장하는 ‘올 블랙 코디네이션’이 유행할 전망이다. 이에 반해 남성은 한층 부드러워진 그레이(회색)가 눈에 띈다. ●여성은 강인한 ‘올 블랙´ 최근 드라마에서 강한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 탓일까. 여성들의 옷입기도 ‘세진다’.LG패션의 여성복 컬러리스트인 한승희씨는 “이번 시즌은 무엇보다 블랙과 블랙에 가까운 어두운 색상이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짙은 감색, 회색이나 어두운 펄 컬러, 차콜 그레이 등 블랙에서 파생된, 주로 어두운 색상이 사랑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디자인은 단순, 간결을 선호하고 여기에 블랙까지라면 자칫 밋밋하고 고루해 보이지 않을까. 이질적인 소재를 믹스매치하거나 ‘톤온톤 코디(색감의 차이를 이용한 옷입기)’를 통해 블랙을 변주해야 한다. 이를 위해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소재 개발에 열을 올렸다. 실루엣과 디테일이 단순해짐에 따라 어느 시즌보다 소재가 중요하게 대두됐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플라스틱 소재를 이용해 만든 장식인 시퀸이나 페이턴트 가죽(가죽에 에나멜 코팅 처리), 울, 실크 오간자 등을 가공하여 광택을 준 소재들이 사랑받고 있다. 모스키노는 재킷과 코트의 소매와 칼라에 시퀸을 달아 인조 모피 같은 효과를 주었다. 최근 전면에 시퀸이 수놓아진 블랙 미니드레스를 입은 여자 연예인들의 발빠른 감각에서 유행을 인지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소재를 믹스매치해 한 벌로 만들어 ‘이중효과’를 준 의상들도 많다. 울 소재 코트에 실크 스카프를 붙이거나 블랙 페이턴트 가죽과 울을 짝짓고, 새틴과 벨벳으로 된 블루마린의 ‘올 블랙 수트’도 눈길을 끈다. ●남성은 ‘젠틀한 그레이´ 지난봄 영화배우 유해진은 과도하게 번쩍거리는 회색 양복을 입고 시사회장에 나타났다.“갈치 같죠?” 그의 한마디에 다들 배꼽을 잡았다. 이번 시즌 남성 양복은 한결 자제된 느낌이다. 진주처럼 은은한 빛을 띠는 소재에 색상은 블랙의 영향을 받아 진회색(차콜 그레이)이 강세를 띤다. 전체적인 디테일이 축소되는 경향도 강하다. 재킷의 라펠(재킷의 접은 옷깃)과 셔츠 칼라 모두 폭이 좁아진 것이 대표적이다. 여성복의 영향을 받아 갈수록 날렵해지고 있는 실루엣은 더욱 슬림해진다. 허리뿐 아니라 어깨의 여유도 사라져 더욱 밀착돼 몸매를 강조했다. 상의는 좀더 짧아져 다리가 길어 보인다. 바지는 허리에 주름을 없애 하체가 날씨해 보이는 ‘노턱(No Tuck)’ 팬츠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밑위 길이 또한 1∼1.5㎝ 줄어 들었다. 아저씨들의 전유물인 ‘배바지’를 탈피해 감각을 높였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Local] 당진, 공해업종 공장입지 제한

    충남 당진군은 난개발 방지와 환경보호 등을 위해 ‘공장입지제한처리 기준고시’를 마련,110개 공해 우려 업종의 입지를 제한키로 했다. 입지 제한대상 업종은 ▲음·식료품 제조업군에서 도축업 등 6개 업종 ▲섬유제품 제조업군 중 염색 가공업 등 4개 업종 ▲원모피 가공처리업 ▲가방 및 신발 가공업 중 원피 가공업 등 2개 업종 ▲목재 및 나무제품 제조업 중 방부처리업 등 2개 업종 ▲펄프 제조업 ▲코크스, 석유정제품 및 핵연료 제조업군 5개 업종 등이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2) 모문룡의 작폐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2) 모문룡의 작폐 Ⅱ

    인조반정 이후 조선 조정이 모문룡을 ‘은인’으로 여겨 송덕비까지 세우게 되자 모문룡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조선에 군량을 비롯하여 전마(戰馬), 조총, 병선 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더 큰 문제는 그 휘하의 장졸(모병:毛兵)과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였다. 모병과 요민들은 청북으로 밀려들었고, 후금을 자극했다.1627년의 정묘호란은 그 같은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밀려드는 遼民과 毛兵들 조선 조정은 모문룡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두 가지 난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모문룡의 진영에 막대한 양의 군량을 보내주어야 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시로 조선으로 들이닥쳤던 모문룡 휘하의 명군과 요민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모문룡은 수시로 차관을 서울로 보내 양곡을 공급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반정 직후 조선 조정은 그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다. 책봉 과정에서 모문룡의 ‘은혜’를 입었던 데다 그가 내세운 ‘요동 수복’이라는 슬로건에 공감했기 때문이다.1623년에만 6만석 이상의 양곡이 가도로 운반되었다. 조선을 길들여 모문룡을 지원하는 배후기지로 삼으려 했던 명 조정의 계산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 요동의 한인들은 계속 가도로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철산 등지로 상륙했다.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청북 지방의 방어가 허술해지자 요민들의 유입은 극에 이르렀다. 요민들 가운데는 가재도구나 청람포(靑藍布) 등을 가져와 조선 사람들과 식량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빈 손으로 무작정 몰려왔다. 조선은 후금을 탈출해온 요민들을 가달(假 )이라 불렀다.‘가짜 달자( 子-오랑캐)’를 줄인 말로 한족 가운데 후금에 귀순하거나 포로로 잡혀가 머리를 깎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고향을 떠나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그들은 거칠고 난폭했다. 1624년 3월 의주부윤(義州府尹) 유비(柳斐)의 보고 내용은 끔찍했다. 당시 날마다 수많은 가달들이 청북 지역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수십명씩 떼를 지어 들녘에 흩어져 봄갈이 한 곡식과 보리 싹을 죄다 캐 먹었다. 마을로 들이닥쳐서는 약탈하거나 밥을 지어달라고 떼를 썼다. 어느 가난한 백성이 음식을 내어주지 못하자 그들은 가달의 시체를 가져다가 그 집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조선인들이 그를 때려죽였다.’고 한 뒤 온 마을 사람을 죄다 묶어놓은 뒤 재물을 빼앗아 갔다. 유비는 심지어 ‘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면 서로 뜯어먹는다.’는 내용도 보고했다. 철산, 가산, 선천, 정주, 곽산 등 청북 지역은 몸살을 앓았다. 가달뿐 아니라 가도에서 상륙한 모문룡 휘하의 장졸들이 끼치는 민폐도 심각했다.1625년 2월, 모병들의 작폐를 참다 못한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실력 행사에 나섰다. 그는 난동을 피운 모문룡의 부하 주발시(朱發時) 등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모문룡의 부하들은 ‘이완이 상국인을 몰라보고 재조지은을 배신했다.’며 그를 잡아가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조선 조정은 결국 이완의 직급을 한 단계 강등하는 조처를 취했다. ●모문룡의 불장난 모병들은 때로는 청북 지역을 벗어나 함경도 지방까지 몰려들었다.1623년 4월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사람을 보내 ‘회령(會寧)을 경유하여 오랑캐 지역으로 원정할 것’이라며 군량을 제공해줄 것과 길 안내를 위한 향도(嚮導)를 붙여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회령 너머 두만강 건너편의 여진 부락들은 거의 비어 있었다. 일찍이 누르하치가 조선과의 접경에 살던 여진인들을 포섭하여 내지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건너 며칠 동안 깊숙이 들어가야만 여진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문룡이 그럼에도 원정 운운했던 것은 진짜 후금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제스처’이자 ‘쇼’였다. 당시 명 조정에서 조선으로 사신이 올 것이라고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문룡은, 가도에 들를 사신 일행에게 자신이 가만히 앉아 군량만 축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후금 원정’을 내세워 조선으로부터 군량 등을 얻어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함경도 지역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어 모병들을 접대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군하는 도중에 민폐를 자행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장만(張晩) 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의 함경도 행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우려에 귀 기울일 그들이 아니었다.4월16일, 이미 모병들이 함흥까지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5월15일에는 군량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경도 수령들을 포박하고 구타까지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 수령들은 그들의 협박에 못 이겨 민간에서 곡물을 징색하고, 승사(僧舍)까지 뒤지는 형편이었다. 조선 조정의 예상대로 모병들은 후금 지역으로 원정은커녕 함경도 각지에서 노략질만 자행했다. 그들이 왕래했던 행군로 주변에 거주하는 조선 백성들은 민폐 때문에 몸서리를 쳤다. 모문룡 휘하들이 보였던 이 같은 행태는 1637년 가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오랑캐 지역 정탐’ 등을 내세워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점령 지역까지 출몰했고, 그곳에 살던 요민들을 불러모았다. 더욱이 청북의 곳곳에는 모문룡이 설치한 둔전까지 널려 있었기 때문에 요민들은 계속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후금의 보복을 우려했지만 모문룡을 견제할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 ●‘해외천자(海外天子)’의 사기 행각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표방했지만 사실 그는 그럴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다. 그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후금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산해관(山海關)의 울타리’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모문룡은 그저 ‘군량을 축내는 존재’,‘밀수 왕초’로 변해갔다. 가도는 척박한 섬이었지만 해상 교통의 요충이었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산동(山東), 절강(浙江) 등지에서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해로는 험난했지만 명 조정이나 조선 조정의 감시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이는 밀무역의 이익이 짭짤했기 때문이다. 조선 상인들은 가도에서 은과 인삼으로 비단과 생사(生絲), 청람포 등 중국 물화를 구입했다. 조선 상인들은 그것을 후금 상인들에게 넘기거나, 부산의 왜관으로 가져가 일본 상인들에게 전매하여 이득을 챙겼다. 한족 상인들과 후금과의 사이에 밀무역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문룡은 가도에 세관(稅關)을 설치하여 왕래하는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했다. 때로는 그 자신이 직접 무역을 벌였다. 모문룡의 창고에는 은을 비롯하여 중국의 비단과 직물, 조선 인삼, 후금의 모피 등 온갖 물화들로 넘쳐났다.1624년 3월, 모문룡은 사람을 보내 이괄의 반란이 평정된 것을 축하했다. 그런데 그가 인조에게 보낸 예물 가운데는 춘의(春意)라 불리는 여인의 나체상도 있었다. 조선은 그것을 도로 반송했지만 당시 가도로 온갖 물건들이 유입되고 있었던 실상을 보여준다. 모문룡은 때마다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두둑한 뇌물을 보냈다. 천계(天啓) 연간 명의 실권자나 마찬가지였던 위충현은 그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모문룡은 한 번에 오륙십 가지로 차려진 성찬(盛饌)을 들고, 식사 때마다 여덟 아홉 명의 미희(美姬)들로부터 시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바다 밖의 천자(海外天子)’였다. 명 조정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었고, 수군을 갖추지 못한 후금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했다. 더욱이 조선은 그를 ‘은인’으로 섬기고 있었으니 그의 ‘현실 안주’는 어쩌면 당연했다. 모문룡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평소 안락을 즐기다가도 명 조정으로부터 ‘모문룡을 감사(監査)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움직였다. 조선 땅에 상륙하여 후금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에 민폐를 끼쳤고, 궁극에는 후금을 자극했다. 정묘호란 직전, 모문룡은 분명 후금의 침략을 불러들이는 ‘인계철선’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재경부 인사·조직문화 확 바꾼다

    재정경제부가 인사·조직문화에 대대적인 ‘메스’를 가하겠다고 나서 주목된다. 인사시스템은 국제통화기금(IMF)식으로, 조직문화는 휴렛팩커드(HP)와 제네럴일렉트릭(GE), 도요타 등 선진 글로벌 기업들을 벤치마킹하겠다는 구상이다.‘모피아(Mofia:재경부와 마피아의 합성어)’라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 버리기 위한 안간힘으로 풀이된다. 재정경제부는 6일 부처내 조직문화 혁신 프로젝트인 ‘Mofe Way’를 수립해 오늘 10월 하반기 혁신워크숍에서 발표한다고 밝혔다. 재경부는 이달 안으로 전문연구기관에 조직문화 혁신 방안에 관한 연구용역을 의뢰할 계획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금융기관, 재계, 시민단체 등 정책 고객별, 내부 직급별로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그동안 변화와 혁신의 몸부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직문화 등과 같은 근본적인 체질 개선보다는 부서와 직급 명칭을 바꾸는 형식적인 변화만 치중한 측면이 많았다.”면서 “이제 정책 고객인 국민의 피부에 와 닿도록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라고 밝혔다. 재경부는 우선 인사관리에 있어서 모범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되는 국제통화기금 모델을 도입하기로 했다.‘상호합의 및 구술형 인사평가제’가 그것이다. 이 시스템은 상급자가 하급자를 일방적으로 ‘하향평가’하는 게 아니라 상·하급자가 연초에 서로 협의해 업무목표 등을 정하고, 연말에 그 결과를 함께 평가하는 방식이다.무엇보다 개인의 능력을 수치화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서술해 평가한 뒤 연봉 및 보직 관리에 활용하게 된다. 재경부 관계자는 “현재 인사 시스템은 상급자의 일방적 평가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며, 부하 직원이 본인의 근무평정 결과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다.”면서 “이를 고치기 위해 부총리가 직접 IMF식 인사평가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재경부는 HP,GE, 도요타 등 글로벌 기업의 혁신 트렌드를 벤치마킹할 방침이다. 역시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경직된 조직문화에서 벗어나겠다는 복안이다. 재경부는 이미 이들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을 만나 기업문화를 배우고 벤치마킹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다. 미국의 대표적 정보기술(IT) 기업인 HP는 ‘회사가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구성원들은 훌륭히 일을 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상징되는 인본주의적 기업문화인 ‘HP Way’를 통해 세계적인 IT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지난달 취임 1년을 맞아 “재경부 고유의 생산적 조직문화를 의미하는 ‘The Mofe(재경부) Way’를 정립해 위상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재경부 관계자는 “정권 교체기 등에 되풀이되는 ‘무늬만 혁신’이 아닌 능력주의와 신상필벌의 원칙을 통한 합리적인 평가와 보상이 인사·조직 문화에 반영돼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공공기관장 고액연봉은 퇴임관료 배려용?

    공공기관장들의 높은 연봉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고연봉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이들을 감독하는 주무부처 고위공직자의 퇴임 후를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기관장 연봉 상위에 올라 있는 공공기관장 자리중 상당수를 퇴임하는 공직자들이 차지하는 마당에 굳이 고액연봉에 손을 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22일 기획예산처의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우리나라 296개 공공기관 기관장의 지난해 연봉 상위 30걸 가운데 14곳을 재정경제부 산하기관들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7억 4000여만원으로 1위인 한국산업은행을 비롯, 중소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등 상위 9위까지의 기관들이 모두 재경부를 주무부처로 하고 있다. 이들 기관의 기관장들은 대부분 4억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산업자원부도 한국수출보험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전력공사, 강원랜드 등 7개 산하기관이 연봉 30걸 안에 들어 있다. 이들의 연봉도 3억 안팎이다. 두 부처는 산하 공공기관이 많은데다, 소속 공직자가 기관장이나 임원으로 진출하는 비중도 높은 편이다. 재경부의 경우 고위관료들이 금융공공기관을 장악,‘모피아’에 의한 관치금융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두 부처 외에도 건설교통부가 대한주택보증·한국토지공사 등 4개 산하 기관이 30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과학기술부(한국과학기술원), 중소기업청(한국벤처투자), 행정자치부(대한지적공사) 등이 각각 1곳씩 연봉 30걸에 드는 산하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이에 대해 한 금융공기업 간부는 “연봉이 높은 공기업들은 대부분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업무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라며 “부처와는 직접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또 동종 민간업계에 비교하면 결코 고액이 아니라는 설명이다.하지만 모 부처 국장급 공무원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기관장 중 연봉이 낮은 곳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또 “고액 연봉 논란에도 불구하고 연봉이 깎인 적은 거의 없다.”면서 “고위 관료들의 산하기관 이직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냐.”고 반문했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정동일 중구청장 러 시장 개척 나서

    정동일(사진 왼쪽) 중구청장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6일 중구에 따르면 정 구청장은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9일까지 지역 상공인 대표들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와 몽골 울란바토르를 방문 중이다. 국내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시장 개척과 상공인의 교류 확대를 위해서다. 정 구청장은 지난 4일 바이다코프 모스크바 중앙행정구장과 두 도시간 우호 협력와 경제교류 협력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2001년 두 도시가 교류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본격적인 ‘협력의 장’이 열린 셈이다.정 구청장은 상공인들과 함께 러시아 국제 가죽 및 모피 제품 전시회와 의류, 액세서리, 스포츠용품 시장을 찾았다. 또 두 도시간 상공인 간담회도 두번이나 열어 모스크바 시장개척에 큰 힘을 보탰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외래 동식물의 습격

    외래 동식물의 습격

    외래 동식물 확산으로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에 유입된 외래종의 목록과 개체수·분포 면적도 정확하지 않다. 식물은 얼추 300여종에 이르지만 동물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만 추측하고 있다. 산업 피해와 질병을 옮길 우려도 높아 철저한 외래 동식물 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5일 외래 동식물 11종을 정밀 조사한 결과 개체수가 생태계를 깰 수 있는 만큼 심각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외래동물은 배스나 황소개구리처럼 소득 증대를 목적으로 들여오거나 붉은가재 등과 같이 관상용으로 유입됐다가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널리 번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남해안에 비상이 걸린 뉴트리아가 대표적인 외래동물이다. 뉴트리아는 1985년 프랑스에서 축산용(육용, 모피용)으로 100마리를 들여오면서 번식이 늘었다.70여농가에서 15만마리까지 길렀으나 수익성이 떨어지고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야생에 버려져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수달과 비슷하나 몸체가 크고 번식력(1년에 1∼2회 임신,7∼8마리 출산)이 강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식욕이 왕성해 수변 생태계를 깨고 감자와 같은 농작물 피해도 늘고 있다. 하천·제방·연못에 구멍을 뚫기도 한다. 1990년대 초 주한미군이 관상·식용으로 들여온 붉은가재도 일부가 용산 미군기지 연못에 방사되면서 서울 양재천·탄천·안양천과 춘천 공지천 등으로 번졌다. 국립과학원 김종민 연구관은 “뉴트리아는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번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개체수가 늘어나 특별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학원은 서양금혼초와 양미역취, 미국미역취도 생태계를 교란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양미역취 분포도 제주도, 순천, 보성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1996년 제천∼영월 도로에서 발견된 쇠채아재비도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산, 대구, 일산 등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피부병을 일으키는 돼지풀은 동두천에서 발견된 이후 최근 비무장지대까지 번진 것으로 알려졌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지만 국왕 광해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장 그의 친형 임해군을 처리하는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사관(査官) 엄일괴 등을 은으로 구워삶아 위기를 넘겼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부터 신료들은 ‘역적’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즉위하자마자 혈육을 손봐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맞았다. 광해군은 거부했지만 끝까지 임해군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명과의 관계 또한 꼬여가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총명하고 능력 있다.’고 추켜세우더니 막상 책봉을 요청했을 때는 외면했던 명이었다. 즉위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광해군과 명의 관계는 분명 ‘악연’에서 출발했다. ●李成梁의 병탄 음모에 놀라다 즉위한 지 5개월 남짓 된 1608년 7월, 베이징으로 가고 있던 동지사(冬至使) 신설(申渫)로부터 비밀 장계가 날아들었다. 광녕총병(廣寧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조선을 정벌하고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자. ´는 내용으로 황제에게 주문(奏文)을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엄일괴 등이 돌아간 뒤 겨우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명이 조선을 직할령을 삼으려고 덤비는 것이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이성량의 혼자 생각이 아니라 도어사(都御史) 조집(趙)도 같이 상주(上奏)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형제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 ´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성량이 누구인가. 그는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자, 요동의 막강한 군벌(軍閥)이었다. 워낙 오랜 동안 현직에 있어 ‘리타야(李大爺)´로 불린 그의 영향력은 컸다. 요동이나 산동(山東)의 무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의 가정(家丁)이나 막객(幕客) 출신이었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의 내부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성량이 조선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땅이 비옥하고 인삼과 은이 생산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정구는 그러면서 이성량과 연결되어 있는 누르하치가 더 문제라고 했다. 이성량의 본심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조선을 공격할 경우 누르하치의 군대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정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누르하치의 땅과 잇닿아 있는 평안도 지역의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행히 이성량의 상주에 대한 명 조정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병과도급사중(兵科都給事中) 송일한(宋一韓)과 급사중(給事中) 사학천(史學遷)이 이성량의 주장을 일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이 비록 흠이 있지만, 연개소문(淵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명나라를 섬겨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으니, 이성량의 주청이 잘못되었다. ´는 내용이었다. 송일한은 이성량을 파직시켜 소환하라고 주장했다. 송일한 등의 반박 덕분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광해군이 둘째라는 이유로 명나라 신료들에게 계속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성량과 연결된 누르하치에 대한 경각심 또한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통성 시비´ 잠재우려 책봉 서둘러 광해군은 ‘이성량 사건´을 계기로 요동에 대한 정탐을 강화하는 한편,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冊封)을 받아내기 위해 서둘렀다. 비록 임해군은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차단하고 국왕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명의 책봉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즉위한 지 1년이 더 지난 1609년 3월까지도 명은 광해군을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았다.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에서는 ‘조선국 권서국사(權署國事) 광해군´이란 호칭을 썼다. ‘권서국사´란 ‘임시로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이윽고 1609년 6월, 명의 책봉사(冊封使)가 서울에 도착했다. 태감 유용(劉用)이 그였다. 태감이란 환관을 말한다. 내시(內侍), 초당(貂), 초시(貂侍), 엄인(人) 등 환관을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였다. 조선 전기에는 화자(火者)라는 호칭도 많이 썼다. 15세기 조선에 다녀간 명나라 환관들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았다. 워낙 뇌물을 밝히고, 요구 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 출신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더 위세를 떨었다. 세종 때의 윤봉(尹鳳)과 성종 때의 정동(鄭同)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유용은 더 ‘막강한´ 인물이었다. 수천명에 이르는 명나라 환관 가운데 서열 2위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조선에 도대체 왜 왔겠는가? 광해군은 그가 의주에 도착하여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바짝 긴장했다. 유용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공공연히 떠벌렸다.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 놓으면 기필코 10만냥의 은자를 얻으리라. ”라고. 그는 의주에 도착한 뒤 자신에 대한 접대는 오로지 은으로만 하라고 했다. 은만 주면 식사도 다례(茶禮)도 필요 없다고 했다. 은이 부족하면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거느린 수행원 중에는 한 밑천 잡으려고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 또한 이런저런 기완(嗜玩) 물품을 내놓고 강매했다. 유용은 결국 광해군을 책봉하는 황제의 칙서를 전하러 와서 6만냥의 은을 뜯어갔다. 조정의 언관들은 유용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를 우대하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해서든 정식으로 책봉을 마치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명의 貪風을 받아들이다 ‘오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고, 돌아가면 여기저기에 상납해야 한다. ´ 6만냥을 뜯어낸 유용이 했던 이야기다. 엄일괴와 만애민이 조선에서 한 밑천 잡은 뒤, 명의 환관들은 조선에 서로 나오려고 했다. 17세기 전반 명에서 불고 있던 탐풍(貪風)은 엄청났다. 그 배경에는 은의 유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산 생사(生絲)와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 은을 싸들고 명나라로 몰려들었다. 그 은은 대개 신대륙 남미(南美)와 일본에서 채굴된 것이었다. 해마다 밀려드는 수십만 킬로그램의 은은 명나라 구석구석으로 유통되었다. 그것은 인삼이나 모피의 구입 대금으로 누르하치가 일어난 만주 땅에도 뿌려졌다. 은은 운반이 편리해 뇌물로는 그만이었다. 사실 15세기에 왔던 윤봉이나 정동도 엄청나게 뇌물을 챙겼지만 그것은 대개 토산물이었다. 호피(虎皮) 등 짐승가죽과 세모시 등 직물류, 말안장, 구리 제품 등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운반하자면 엄청난 수의 궤짝이 필요했다. 뇌물 궤짝을 짊어진 행렬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눈초리가 좋을 리 없었다. 그것에 비하면 은을 운반하기란 너무 쉬웠다. 1610년에는 광해군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명사가 왔다. 염등(登)이란 인물로 역시 환관이었다. 그의 목표는 유용이 받아낸 액수보다 더 뜯어내는 것이었다. 개성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임진강의 다리가 홍수로 유실되자, 행차가 지체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은 1000냥을 받았다. 서울에 도착하여 보인 행태는 가관이었다. 은으로 된 사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천교(天橋)라 불리는 그것을 타고 남대문을 넘어가 책봉례(冊封禮)를 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결국 수만냥을 챙겼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염등을 가리켜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갔다. 무려 17년 동안이나 왕세자로 있었으면서도 명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전철을 되풀이하기 싫었던 것이다. 수만냥의 은을 마련하려면 엄청난 고혈(膏血)을 짜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명을 상대하기란 그만큼 버거웠다. 하지만 명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 명과 누르하치 사이에서 양단을 걸쳐야 하는 훨씬 더 버거운 과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이색거리 탐방] (12) 금천구 가산동 패션타운

    [이색거리 탐방] (12) 금천구 가산동 패션타운

    “창고같은 아웃렛은 가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서울디지털산업 2단지 일대 금천패션타운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유명브랜드의 의류를 반값이하에 살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 ‘쇼핑의 편리함+고급화’ 바람까지 불고 있다. 상인들은 이 같은 고급화가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백화점이야 아웃렛이야?” 2001년 7월 문을 연 후 4000만명의 고객이 매장을 찾았다는 마리오 아웃렛은 금천패션타운의 고급화를 이끈 강자다. 하루평균 내점객도 2만 5000명. 폴로랄프로렌부터 노티카, 토미힐피거, 버버리 등 국내외 내로라는 유명 의류브랜드는 대부분 입점해 있다.2004년과 2006년 마리오 Ⅱ·Ⅲ를 잇따라 오픈하는 등 ‘거침없는 투자’를 진행 중이다. 전체고객 중 65%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20∼30대 여성고객으로 물건이 많고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독특한 건물외관, 넓은 주차공간, 패밀리 레스토랑형 푸드코트 등으로 금천패션타운의 경쟁력 강화를 이끌고 있다. 올 2월 초 문을 연 ‘더블유몰(W-mall)’은 층마다 고객층을 달리하는 백화점식 매장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과거 아웃렛 매장에서는 볼 수 없는 전략이다. 금천패션타운 내 유일한 상업전용시설로 지하 4층, 지상 14층에 국내 300개 브랜드가 입점해 규모도 메머드급이다. 아웃렛은 1층부터 6층까지. 지하 1층엔 대형마트와 푸드코트,7층엔 전문식당가를 유치했다. 이외에도 클리닉센터와 스포츠센터, 뷰티센터, 스카이라운지까지 아웃렛인지 백화점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 문을 연 여성 캐주얼메이커 타임과 시스템, 마인 등으로 유명한 한섬의 팩토리스토어는 건물의 심플한 디자인이 흡사 청담동의 유명디자이너의 매장을 옮겨놓은 듯하다. 하지만 가격은 ‘콧대’가 높지 않다. 대부분의 제품이 60∼70%세일이지만 일부품목은 이미 세일된 가격에서 다시 30%까지 추가세일을 한다. 길건너 진도매장은 모피와 가죽제품을 정상가의 40%(비시즌에 한함)까지 싸게 살수 있는 보기드문 매장이다. 진도모피, 엘페, 진도옴므, 우바 등을 일반매장에 비해 5% 이상 추가할인한다. 나이키부터 필라, 아디다스 등 스포츠 의류 매장이 많은 만승아웃렛은 남성들과 10대들이 많이 찾는다. ●금천패션타운은 금천패션타운은 구로공단 2단지를 중심으로 지난 97년부터 자생적으로 커져갔다. 당시 IMF로 경쟁력을 잃은 의류제조업들 사이에서 할인매장은 생존전략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장터에 최소한의 인테리어와 판매대를 만들어 싼값에 의류를 판매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유명메이커를 반값이상으로 살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줄을 이었고 매장도 늘어갔다. 특히 2000년 마리오를 시작해 패션아일랜드, 더블유몰 등 대형 전문아웃렛 등의 등장은 이곳 패션타운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는 1㎞정도의 ‘패션의 거리’ 안에 570여개업체가 자리잡고 있다. ●발전 가로막는 걸림돌 하지만 패션단지의 발전을 가로막는 규제도 적지않다. 사실 이곳 공단은 국가가 수출산업을 육성을 위해 1964년부터 73년까지 10년여에 걸쳐 조성한 수출산업공업단지다.‘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산집법)’에 따라 단지 내의 건물은 건물 면적의 20% 정도만 매장을 만들 수 있다. 이런 탓에 대부분 아웃렛들은 1∼2층만을 의류매장으로 쓰고 3∼4층은 비워두는 일이 많다. 또 원칙적으로 건물 내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만 건물에 매장을 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A건물 1층에서 폴로와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등을 팔려면 건물 내에 해당되는 4개사의 공장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수십억원의 벌금을 물어가며 불법영업을 감행하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되풀이되고 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마리오’ 박계홍 팀장 실속쇼핑법 고수들은 어떻게 쇼핑을 할까.‘대충 사도 반값’이라는 아웃렛 매장에서도 쇼핑고수들의 ‘내공’은 빛나게 마련이다. 여성의류 구매 10년 경력의 마리오 아웃렛 박계홍(49)팀장이 권하는 실속 쇼핑법을 정리해봤다. ▲1∼2개월 전에 구매하라 물건이 들어오는 시즌 1∼2개월 전에 미리 쇼핑을 하면 물량이 풍부하고 선택의 폭이 넓다. ▲같은 브랜드도 매장마다 가격이 다르다 업체만 500개가 넘는 만큼 곳곳에 동일 브랜드가 많다. 하지만 같은 브랜드 같은 제품도 매장마다 할인율 차이가 있다. 결국 발품은 필수다. ▲베이직 스타일이 안전하다 특성상 시즌이 끝난 상품이나 이월상품이 많아 잘못하면 유행이 지난 옷을 구입할 수 있다. 유행에 민감한 스타일은 옷장만 차지할 위험이 높다. ▲환불·교환 여부 확인을 모든 매장에서 환불이나 교환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매장에서 반드시 물어봐라. ▲입어보고 꼼꼼히 살펴라 아무리 싸도 자신과 어울리는지는 별개문제다. 또 아웃렛 제품 중엔 일부엔 경미한 하자가 있는 제품도 있다. 제조일자, 원단, 재봉질, 때나 얼룩까지 매장보다 더 꼼꼼하게 살펴라. ▲두 번 생각하되 맘에 들면 바로 사라 좋은 제품은 남의 눈에도 좋다. 두세 번 생각해본 후 충동구매가 아니란 확신이 들면 사이즈와 해당제품이 있을 때 지체 말고 구매하는 것이 좋다.
  • [북 리뷰] 컨닝, 교활함의 매혹/돈 허조그 지음

    ●교활함(Cunning):(명사) 강한 동물이나 사람을 약한 동물이나 사람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기능.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강한 정신적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상당한 물질적 광고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이탈리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모피 장수는 당나귀 가죽보다 여우 가죽을 더 좋아한다.”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인 앰브로즈 비어스가 교활함에 대해서 내린 정의다. 흔히 시험을 치를 때 부정행위란 의미로 사용되는 커닝이 14세기만 해도 박식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컨닝, 교활함의 매혹(돈 허조그 지음·이경식 옮김·황소자리 펴냄)’은 교활함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 세계는 온갖 문제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매혹적인 미궁이다. 도덕성과 규칙, 그리고 합리성의 여러 갈래들이 난마처럼 뒤얽혀 있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법률과 정치철학을 강의하는 교수인 저자 돈 허조그는 예리하고도 장난기 넘치는 문체로 교활함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혐오를 탐구한다.16세기의 목사 존 켈로는 아내를 살해하고 교수형을 당했다. 아내의 목을 조른 뒤 자살인 것처럼 꾸미고,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 한다. 신도를 집으로 초대한 뒤 허공에 매달린 아내를 발견하고는 기절하는 척까지 했다고 한다. 이처럼 교활함의 표본과도 같은 목사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면서 저자는 선한 것의 감동적인 환상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언한다. 지혜로움을 뜻하지 않고 영리함을 뜻하는 교활함의 기본적 개념은 오디세우스 이야기나 마키아벨리 저작물을 통해 탐구한다. 교활함은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필수 항목일 수도 있다. 전혀 교활하지 않은 포커 플레이어,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 같은 정치가는 상상하기 힘들다. 예나 지금이나 교활한 생각과 행동은 개인의 삶과 법과 정치에, 심지어 학문과 사상 속에도 체계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면 교활함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스스로의 교활함에 당혹스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교활함의 영역에서 합리성과 사회적 역할, 그리고 도덕성이라는 3개의 개념은 분리되기 힘들기 때문이다.2만 3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비하인드 뉴스] 재경부 출신 ‘세피아’를 아시나요

    ●재무부 출신 ‘모피아’와 차별화 ‘세피아’? 자동차 이름이 아니다. 최근 개방형 공모제로 금융감독위원회에 들어온 권혁세 전 재경부 재산소비세국장은 자신을 세피아라고 소개했다. 과거 재무부 출신을 ‘모피아’라고 부르는데 빗대어 재경부 세제실 출신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세피아’들은 매년 춘삼월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데, 이때 건배사도 ‘세피아!’라고 한다. 올해 모임에 참석한 ‘세피아’들의 면면은 특히 화려했다고 한다. 현직 이용섭 건교장관, 윤증현 금감위원장, 윤용로 금감위 부위원장, 장태평 국가청렴위 사무처장, 김용민 조달청장, 김영룡 국방부 차관 등이다. 전직도 이근영 전 금감위원장, 김진표 전 부총리가 참석했다.●외국계 IB행 한은 직원 ‘6개월 페널티’ 요즘 한국은행 젊은 직원들 사이에 외환자금국 지망자들이 적지 않다. 조사국에서 머리 싸매고 밤늦게까지 자료를 분석하기보다는, 시장에 뛰어들어 외환을 운용해 보겠다는 직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이직의 유혹이 뻗치기 마련이다. 최근 외환자금국의 직원 여러명이 외국계 투자은행(IB)에 스카우트됐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일부는 ‘한은 외환보유고 담당’으로 발령이 났다. 인력 유출을 고심하던 한은은 “전 한은 직원이 IB로 이직, 한은을 담당할 경우 그 IB 이직자에게는 6개월간 신규 외환운용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부 룰을 만들었다. 그 뒤에는 이직이 뜸해졌다고.●‘내공’ 쌓은 농림부, 협상력 최고 한·미 FTA 협상에서 농림부가 상대적으로 뛰어난 교섭력과 배짱을 발휘한 것과 관련, 정부내 한 관계자는 “우루과이라운드(UR)와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을 거치면서 농림부의 ‘내공’이 깊어진 결과”라고 설명. 반면 산업자원부는 통상 부문을 외교부에 넘겨 준 뒤로 대외 협상 경험이 거의 없어 협상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평가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도 이번 협상에서 농업과 금융분과가 아주 잘했다고 칭찬했다. 산자부는 “섬유·자동차·무역구제 등을 놓고 공격과 방어를 한꺼번에 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섭섭함을 표시. 그러자 권 부총리는 5일 “산자부도 마지막에 분발했다. 특히 이재훈 2차관이 잘 해 빼낼 것은 다 빼냈다.”고 뒤늦게 칭찬.●정부 정책 혼선으로 기자실 운영 혼란 정부청사 브리핑실 운영체제를 개편하려는 국정홍보처의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과천 건설교통부 기자실의 ‘이사계획’이 주춤해졌다. 당초 건교부 기자실은 재정경제부와 농림부 등의 브리핑실이 있는 과천청사 1동 건물로 옮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홍보처가 기자실을 아예 없애려 하자 건교부는 기자실 이사계획을 보류했다. 앞서 행정자치부 과천청사관리소 운영과는 기자실이 온다기에 1층 사무실을 빼 주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정부 관계자는 “국정홍보처의 일관성없는 방침 때문에 운영과만 지하생활을 하고 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꼬집었다.●기업은, 중기대출 ‘리딩뱅크’ 유지 이유는 의리 때문 시중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새로운 시장으로 공략하고 있는 요즘, 기업은행은 여전히 중소기업 대출 분야의 ‘리딩뱅크’ 자리를 지키고 있다.비결은 97년 외환위기 직후 도산에 직면했던 중소기업들에 어음 할인 등으로 큰 혜택을 준 것이라고 은행측은 해석. 당시 모든 시중은행들이 중소기업 어음을 외면했지만 기업은행은 두 말 하지 않고 어음을 할인해 줬다. 할인율도 6∼7%에 불과했다. 현병택 기업고객본부 부행장은 “90년대 말 기업은행의 어음할인을 통해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회생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기업은행이 2000년대 들어 큰 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2세에게 경영권이 인계된 뒤에도 당시 인연을 맺은 기업들과의 거래는 계속되고 있다. 현 부행장은 “2세 경영자들이 낮은 금리를 내세우는 다른 은행으로 주거래은행을 바꿨다가 이를 알게 된 아버지의 성화로 다시 기업은행을 찾곤 한다.”면서 “이들을 위한 홈커밍(Home Coming)론도 판매할 정도”라고 덧붙였다.경제부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했던 종족은 해서여진이었다.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 등 네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무렵까지 가장 강한 부족은 예허부였다. 이렇게 여진족이 서로 갈라져 있던 상황 아래서 명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진 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패자(覇者)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던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라는 ‘패자’가 등장하자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와 해서여진의 격돌로 나타났다.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지배자였던 부자이(布齊)와 나림불루(納林布祿)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누르하치가 불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지배자 멩게불루(蒙格布祿),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萬泰), 호이파부의 지배자 바인다리(拜音達 )를 끌어들였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에는 해서여진 뿐 아니라 몽골의 코르친(科爾沁)부족 등도 가담했다. 모두 아홉개 나라, 대략 3만 가까운 병력이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누르하치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한창 뻗어 오르고 있었던 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자카( 喀)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쳤던 누르하치의 건주군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부자이를 비롯하여 연합군 4000여명을 죽이고, 말 3000필, 갑주 1000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布占泰)를 생포했다. 아홉개 나라의 연합군으로도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족 가운데서 누르하치에게 귀부(歸附)하는 종족이 나타났다. 연합군에 가담했던 코르친 부족과 다른 몽골부족 칼카부(喀爾喀部)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코르친과 칼카 몽골의 귀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몽골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성장하여 후금(後金), 청(淸)으로 변신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몽골과의 제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훗날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산하이관(山海關)을 우회하여 베이징의 명나라 황궁(皇宮)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협조 덕분이었다. 곧 몽골 부족이 만리장성 외곽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킨 이후 청은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고, 열하(熱河)에 행궁(行宮)을 두어 몽골족을 우호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단초는 바로 누르하치 시절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해서여진,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다 해서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 누르하치는 만주 전체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친 누르하치는 1595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호이파부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부잔타이를 주물러 울라부의 내정(內政)에까지 관여했다. 1596년 7월, 울라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만타이와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억류하고 있던 부잔타이를 송환했고, 부잔타이는 형의 뒤를 이어 울라국의 국주(國主)로 즉위했다. 누르하치에게 은혜를 입은 부잔타이는 누이 후나이를 건주여진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녀를 동생 스르가치(舒爾哈齊)와 혼인시켰다. 당시 누르하치는 해서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 부족과 혼인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폈다. 실제 누르하치의 첫째 부인인 나라씨(納喇氏)는 예허 출신이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모두 16남8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바로 혼인정책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해서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1597년 예허, 울라, 하다, 호이파부는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부도했음을 사과한 뒤 우호를 다시 맺자고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느긋하게 이들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바야흐로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로 떠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명은 개입하여 누르하치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바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잠시 랴오양(遼陽), 광닝(廣寧) 등지로 물러나 있던 명군은 대거 조선으로 들어갔고, 명 조정의 관심은 온통 일본군에게 쏠렸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벌렸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해서여진과 화약을 맺어 여유를 얻은 누르하치는 1598년 1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몽골의 안출라쿠(安楚拉庫)를 공격하여 1만여에 이르는 인축(人畜)을 획득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인구도 늘고, 재물도 늘었다. 임진왜란 시기 누르하치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 내실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조하다 이미 말했듯이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모피와 인삼의 유통로를 장악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명나라라는 대시장(大市場)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명 상인들을 통해 소금, 직물 등 생필품이 유입되다가 점차 은(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은 여진족 내부에서 화폐로 유통되었고, 유통경제에 눈을 떴던 누르하치는 1599년 만주 지역에서 금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여진족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고, 화폐의 확보를 위해서 주변국과의 무역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집단이나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자의식도 따라서 커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이 통일한 건주 부족을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문수(文殊)’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만주는 ‘문수보살의 도(徒)’를 의미한다. 누르하치는 이제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해서나 야인여진은 물론 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은 문자(文字)를 만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났다.1599년 누르하치는 만주 문자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까지 만주는,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명이나 조선 등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이같은 현실에서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석촌동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만주어, 한문, 몽골어 등 3개국 문자가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명군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명은 다시 만주로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좋은 시절’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명의 압력이 누르하치에게 미칠 기미가 보이자 당장 세력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약을 맺은 이후 잠시 잠잠했던 하다와 예허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만주와 하다, 예허, 명 그리고 궁극에는 조선까지 얽힌 격변의 또 다른 막이 올랐던 것이다.
  • 4309만원짜리 루이뷔통 핸드백

    |파리 이종수특파원|‘날개 돋친 핸드백 가격?’ 고급 핸드백 브랜드인 루이뷔통이 1개에 4000만원이 넘는 핸드백을 영국에서 출시했다고 선데이 타임스가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가격이 2만 3484파운드(약 4309만원)인 이 트리뷰트 패치워크 핸드백은 가죽·모피·데님 등 그동안 루이뷔통이 출시했던 15가지 종류의 핸드백에서 잘라낸 조각들을 이어붙인 것. 또 어깨끈에는 가죽을 중심으로 황금 체인을 이어 붙였다. 영국에 1개만 내놓은 이 핸드백의 가격은 2만 630파운드(약 3785만원)를 호가하는 호화 승용차 메르세데스 C 180K 쿠페보다 비싸다. 또 다른 브랜드인 펜디는 친칠라와 담비 가죽 소재로 만든 2만파운드(약 3670만원)짜리 고가 핸드백을 내놓았다. 한 단계 낮은 명품족을 겨냥한 마크 제이콥스는 1만 3000파운드(약 2385만원)짜리 악어 가죽 핸드백을, 발렉스트라는 1만 1160파운드(약 2048만원)짜리 악어 가죽 핸드백을 각각 내놓았다. 신문은 최근 영국에서 일기 시작한 명품 핸드백 붐 때문에 고급 핸드백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있다고 우려했다.viele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1405년 퉁밍거티무르가 입조(入朝)해 건주위도지휘사에 임명된 이래 명의 여진족에 대한 포섭작업은 가속이 붙었다. 영락제(永樂帝)는 1409년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의 광활한 지역을 총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퉁밍거티무르를 비롯한 여진족 추장들은 노아간도사 아래 편제된 수많은 위소(衛所)들의 장(長)으로 임명돼 명의 신하가 되었다. 명은 위소 우두머리의 임명과 위소 상호간의 분쟁에는 개입했지만 위소의 통치는 여진족의 자율에 맡기는 체제를 만들었다. 만주에 대한 명의 지배는 점차 확고해져갔다. 이제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명 견제하의 조선-여진관계 영락제가 만주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했던 뒤에도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조선은 여전히 오도리, 오랑캐, 우디캐 등 여진 종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한양에 와서 조공했다. 조선은 입조했던 추장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사(回賜)라는 명목으로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태조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여진족들의 조공 횟수는 거의 1100차례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여진족 가운데는 아예 조선에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귀화한 여진인들을 향화인(向化人)이라 부르며, 그들을 내지로 이주시켜 집과 땅 등의 생활기반을 제공했다. 조선은 1406년 경원(慶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해 여진족들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여진족들은 말, 모피, 진주 등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져와서 면포, 소금, 솥, 농기구, 소(耕牛) 등을 바꿔갔다. 주로 수렵이나 유목에 종사하다가 점차 농경의 필요성에 눈떠 가고 있던 여진족들에게 조선에서 구입한 소나 농기구는 매우 소중했다. 조선과 여진 사이의 이같은 교류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조선과 여진의 교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명은 1458년(세조 4), 건주좌위 도독 동창(童倉)이 조선에서 벼슬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 되자 양자의 접촉을 엄금했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컸던 조선과의 관계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 또한 여진족들을 일종의 ‘울타리’로 생각했고, 그들을 초무(招撫)하여 몽골 침략 이래 보전하지 못했던 북방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세종 연간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설치해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강역을 확보했던 것은 그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조선은 또한 여진을 회유하여 스스로를 ‘상국’으로 자부하며 문화적 우월의식을 나타냈다.‘조선의 문물(文物)과 교화(敎化)를 사모하여 귀화한 여진인’을 뜻하는 ‘향화인’이란 말 속에 그같은 의식이 담겨 있었다. ●왜란시 절감한 누르하치의 위협 16세기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관심은 15세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명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조선의 여진 접근을 견제했던 영향이 컸다. 또 여진세력 자체가 조선 안보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이성량(李成梁)이 활약하던 16세기 후반까지는 여진족 내부에서 조선을 위협할 만한 유력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이 간헐적으로 침략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정도였다.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의 권력은 사림파(士林派)에게 돌아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던 그들은 ‘고구려 고토의 회복’과 같은 대외적 팽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명에 대해 공손히 사대(事大)만 잘하면 대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여진이나 일본은 그저 교화시켜야 할,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당시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누르하치에 대해 정확한 정보나 인식을 가질 리 없었다. 정확하지 못한 대외인식의 귀결은 먼저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1592년 9월,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를 받은 조선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한 바 있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지휘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누르하치 군대의 ‘위력’을 이야기했다. ‘그들 기마군단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일본군에게 밀리면 도주하면 되지만, 누르하치 군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선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그 와중에 1595년(선조 28), 산삼을 캐기 위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잠입했던 건주 여진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조선 영내에서 소를 훔쳐가자 위원 군수 김대축(金大畜)이 여진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 때문에 누르하치가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격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해 10월, 선조는 신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서북변 방어는 거의 방치돼 있었다. 그렇다고 남방의 병력을 빼서 서북쪽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충일(申忠一) 허투알라로 보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고육지책을 생각해냈다. 명의 권위를 빌려 누르하치의 침략을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 계책은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주도했다. 이덕형은 명나라 장수 호대수(胡大受)를 움직였다. 호대수의 참모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 지역으로 들여보내 누르하치를 선유(宣諭)하도록 했다. 조선 관원에게도 중국인 옷을 입혀 동행시켰다. 1595년 11월, 여희원은 누르하치의 부장(副將)을 만나 여진인들이 조선 영내로 잠입한 것을 힐책하고, 조선에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은 여희원을 통해 응급조치를 취한 후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선조는 누르하치를 회유하기 위해 비단을 제공하고, 이후 산삼을 캐기 위해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 들판을 완전히 비우고 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조선은 나아가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란 인물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냈다. 조선인의 눈으로 누르하치 진영의 상황을 직접 정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다. 신충일은 1596년 1월, 허투알라를 다녀온 뒤 선조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가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청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신충일의 보고서를 본 뒤 선조는 “천지의 기세가 바뀌고 있다.”며 탄식했다. 이어 신료들에게 누르하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북쪽의 ‘오랑캐’, 남쪽의 ‘왜구’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의해 포위된 조선의 현실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세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임진왜란을 불렀던 것은 과오였지만, 선조 정권의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를 견제할 만한 자체 역량이 없는 현실에서 명의 권위를 이용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역설적이지만 조선은 외교적 감각을 키웠던 것이다. 6자회담이 어렵사리 타결됐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아직 갈길이 먼 오늘날, 선조대의 누르하치 정책은 소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모피아’ 금융권 점령하나

    금융권이 또다시 ‘낙하산’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금융기관 수장에 재정경제부 출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금융 등은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며 현 회장과 행장이 연임 의사를 강하게 밝히고 있지만 재경부 출신 고위 관료들이 사실상 후임으로 정해졌다는 후문이다.●우리·기업銀 최대 실적 불구 연임 희박 8일 현재 인사를 앞두고 있는 자리는 모두 4곳. 우리금융 회장과 행장, 주택금융공사 사장, 기업은행장 등이다. 우리금융 회장과 주택금융공사 사장은 공모가 마감됐고, 우리은행장과 기업은행장은 공모가 진행중이다. 우리금융 회장에는 박병원 전 재경부 제1차관이, 주택금융공사 사장에는 유재한 재경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이 출사표를 던졌다. 우리금융 회장의 경우 현 황영기 회장 겸 우리은행장이 공격적인 경영을 앞세워 임기 동안 국내 최대 금융그룹으로 일궈냈다. 강권석 기업은행장도 지난해 기업은행을 ‘순익 1조원 자산총액 100조원’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정부가 대주주이거나 국책은행의 경우 수장이 연임을 한 사례가 없다. 우리금융 회장에 지원한 박 전 차관은 사전조율을 통해 사실상 차기 회장에 정해졌다는 관측이다. 기업은행장에는 장병구 수협 대표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당초 후보군에 속했던 진동수 재경부 제2차관은 현직을 지키고, 이우철 금감원 부원장은 나머지 국책은행인 산업·수출입은행장이 금감위(금감원) 출신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낙하산 인사 성과 무산 우려 금융권은 못마땅한 기색이다. 재경부 출신들의 경영 능력과 판단력 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고위 관계자는 “국내는 물론 동남아 등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도 날로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재경부 출신 수장이) 시장에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박완기 정책실장은 “객관적인 절차를 거쳐 자리에 걸맞은 인재를 뽑는다는 공모제의 정신이 실종된 사례”라면서 “무분별한 관료들의 재취업을 막는다는 측면에서도 우리금융 등에 낙하산 인사가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금감위도 큰폭 인사 8일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 재정경제부 1차관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금융감독당국에도 연쇄적인 승진 인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금감위 부위원장에는 윤용로(행시 21기) 증권선물위원회 위원이 내부 승진했다. 금감위 상임위원에는 박대동 감독정책1국장이, 공석이 된 증선위원에는 김용환 감독정책2국장이 각각 승진할 예정이다. 감독정책2국장에는 정채웅 홍보관리관이 승진해 임명되고 홍보관리관에는 홍영만 증권감독과장이 승진할 전망이다. 문재우 금감위 상임위원은 5월 임기가 만료되는 방영민 금융감독원 감사의 후임으로 유력하다. 이외에 재경부 국장급 1명이 금감위로 자리를 옮겨 감독정책1국장을 맡는다는 후문이다.문소영 이두걸기자 symun@seoul.co.kr
  • “관치금융 대표주자의 금의환향” 기수파괴 예고… 과천 엑소더스?

    김석동 신임 재정경제부 1차관만큼 다양한 별명을 가진 관료도 드물다. 각종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현장에서 실무를 지휘해서 생긴 ‘대책반장’은 아예 꼬리표가 됐다. 외환위기 때에는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놓고 숙식을 하며 환율 방어에 나서 ‘외환사령관’으로 통했다. 이런 별명들은 주로 그를 좋게 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그 스스로도 비밀유지 때문에 호텔에서 일한 날짜만 따져도 족히 1년은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반면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2003년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에 있으면서 ‘4·3 카드대책’을 내놓을 때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관치금융의 바통을 잇는 ‘마지막 모피아(옛 재무부의 모프에 마피아를 빗댄 말)’의 부활이라는 비난이 잇따랐다. 탁월한 순발력과 화술로 언론 플레이에도 능하지만 오히려 지나치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번에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또 다르다.‘행시 23회’의 재경부 1차관은 관가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산업자원부에서도 23회 차관이 나왔지만 경제부처 수석 차관이라는 점에서, 또한 다른 부처에 비해 재경부의 승진 기수가 늦었다는 점에서는 파격이다. 지난해 차관급인 금감위 부위원장으로 갈 때에도 ‘고속승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내에 ‘금의환향’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김 차관의 기용은 관가에서 ‘세대교체’와 ‘기수파괴’를 예고한다. 물론 김 차관이 53년생으로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기수로 따지면 재경부에선 한참 밀린다. 권오규 부총리의 요청으로 유임된 진동수 2차관만 해도 17회이다. 박병원 전 1차관 역시 17회로 행시기수로 김 차관은 6단계를 건너 뛴 셈이다. 현재 재경부 1급은 행시 19∼22회, 보직국장들은 20∼23회가 대부분이다.23회 동기 가운데 재경부에선 1급이 없고 김교식 홍보관리관, 조원동 경제정책국장, 노대래 정책조정국장, 임승태 금융정책국장, 권혁세 재산소비세제국장 등이 전부이다. 따라서 채수열 국세심판원장(17회), 유재한 정책홍보관리실장(20회), 조성익 경제자유구역기획단장(20회) 등이 지난 7일 사표를 낸 것처럼 고참급의 ‘과천 엑소더스’가 적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재경부내 과장급 이하 실무진들은 김 차관에 호의적이다. 보고할 때 형식을 갖추지 않고 격의없이 대화하며 업무이해가 빠른데다 장기적으로도 인사적체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김 차관은 부산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김 신임 차관 약력 ▲재정경제원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 총괄반장·부동산반장 ▲재경원 외화자금과장 ▲재정경제부 경제분석과장 ▲금감위 조정총괄담당관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 ▲재정경제부 차관보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수달·구상나무 우리가 지킬래요”

    여고생 5명이 멸종 위기에 처한 수달과 구상나무를 지키는 환경지킴이로 나섰다. 이들은 홍보물을 목에 걸고 서울대공원·국립중앙박물관·영풍문고·서울역·코엑스몰을 종횡무진 누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블로그를 제작, 수달과 구상나무의 사연을 뮤직비디오와 만화, 창작동화로 전했다. 권누리(18·중경고 2학년), 임수진(18·〃), 최예인(18·〃), 차형원(18·청담고 2학년), 진윤경(17·은광여고 1학년)양은 고등학생 환경모임 ‘휴나(HU&NA)’의 맴버들이다. 휴나란 인간(HUMAN)과 자연(NATURE)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에서 만든 조어다. 휴나는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동물을 좋아해요. 토끼 강아지 병아리 거북이…. 다 키워봤어요. 미국 유학갔을 때에는 애벌레가 가장 좋은 친구였죠.”(최예인) “할머니가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시는데 식물이 자라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아빠가 만든 아파트 베란다 정원을 자주 돌봐요.”(임수진) 관심이 환경보호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지난해 11월. 대한민국 생물자원보전 청소년홍보대사로 임명되면서부터다. 환경부는 우리나라 생물자원보존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교생에게 제출받아 홍보대사 100명을 선발했다. 수달과 구상나무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를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천연기념물 제330호인 수달은 중부·부산 장림·강릉·지리산에서 서식한다. 물속에서 생활하는 포유류라 털이 윤기 있고 방수처리가 뛰어나다. 때문에 모피용으로 남획됐고 멸종위기를 맞았다. 구상나무는 제주도 한라산에서 자라는 특산종 식물이다. 그러나 100년 전 독일이 종자를 불법 반출했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다. 우리 생물자원을 외국에 억울하게 빼앗긴 것이다. 수달과 구상나무의 애달픈 사연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알렸다. 기초자료는 서울대 장진성 교수와 서울대공원 엄기용 사육사에게서 얻었다.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블로그 방문자 수가 2달 만에 4만 5000명을 넘었다. 히트작은 이야기 릴레이. 댓글을 활용해 창작동화를 완성했다.‘구상나무가 울창한 깊은 숲에 수달형제가 살았습니다.’로 시작한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했다. 수달형제는 사냥꾼이 기르는 늑대에 목숨을 빼앗길 뻔했지만, 한 소년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수달을 보호하는 환경지킴이로 살기로 결심한다. 휴나는 이야기를 구연동화로 각색, 구립 어린이집을 찾았다.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동화를 경청하는데 가슴이 벅차 올랐어요.‘환경을 보호해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줘야겠구나.’ 생각했죠.”(권누리)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 법이다.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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