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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 흑해함대 이견해소/러­우크라 정상회담

    【소치(러시아) 로이터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9일 레오니트 쿠츠마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흑해함대 관할권 분리및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항 이용권에 대한 이견을 완전히 해소했다고 밝혔다. 옐친 대통령은 이날 모스크바 남쪽 1천㎞상의 흑해 휴양지 소치의 한 호텔에서 쿠츠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뒤 『러시아 흑해함대의 장래문제에 관한 양국간 마찰을 일거에 그리고 완전히 제거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 도쿄 물가 최고 비싸다/뉴욕기준 1백25개 도시 조사

    ◎서울,뮌헨·대북과 함께 13위/가장 낮은 곳은 멕시코시티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높은 도시는 일본 도쿄,가장 낮은 곳은 멕시코시티다. 스위스에 있는 기업자원그룹(CRG)이 7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 뉴욕을 기준으로 세계 1백25개 도시의 물가수준을 조사한 결과,도쿄와 오사카가 각각 1,2위를 차지,일본의 물가가 세계 최고수준임을 실증했다. 3월초에 실시된 이 조사에서 뉴욕(1백점)과 비교한 도쿄의 물가지수는 2백20점,오사카는 2백6점을 기록,멕시코시티(63점)보다 무려 3.5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은 1백24점으로 독일 뮌헨 및 대북과 함께 공동 13위에 올랐으며 다른 아시아권 도시로는 북경(11위·1백27점)과 홍콩(공동12위·1백25점) 등이 높은 점수를 기록해 상위권에 랭크됐다. 한편 10위권내에는 취리히(1백43),제네바(1백41) 등 유럽의 7개 도시와 모스크바가 포함된데 반해 미국과 캐나다의 대도시들은 단 한개의 도시도 포함돼지 않았다. 멕시코 다음으로 물가수준이 낮은 도시는 이란의 테헤란(66점),캐나다의 캘거리(74점)와밴쿠버(77점),몬트리올(78점) 등이다. CRG는 북미 지역 도시의 물가수준이 비교적 낮게 평가된 것은 미 달러화의 약세 탓이며 멕시코가 최하위로 기록된 것은 페소화의 대대적인 평가절하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CRG의 물가순위는 1백55개 상품 및 서비스비용(주택·교육비는 제외)을 계산한다음 환율을 적용,뉴욕을 기준으로 한 상대평가치를 매긴 것이다. 지난해 유럽에서 가장 물가가 높은 도시로 기록됐던 모스크바가 이번에 1백32점을 기록,유럽 지역에서 6위,세계전체로는 8위로 떨어진 것도 최근 모스크바 시에서 달러화 시세가 안정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 카를로스 메스테러 CRG연구원은 이번 조사가 각 도시의 생활비를 짚어볼 수 있는 「스냅사진」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현실적 측면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유럽 기업인이 미국에 출장간다면 상품값이 싸다고 느끼겠지만 미국관광객이 유럽을 방문한다면 마음이 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 노보시비르스크 발레학교(시베리아 대탐방:14)

    ◎“「러」 3대 명문” 매년 수천명 오디션… 20명 엄선/학생전원 무료교육… 8년과정 특수교/세계적 무용콩쿠르서 상위입상자 배출/문화수준 과시하듯 오페라 하우스엔 연일 초만원 노보시비르스크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하우스」는 평일에도 관객이 만원사례를 이루는 유명한 극장이다. 공연시간 2시간전인 목요일 하오 5시.취재팀은 이 극장 예매창구를 찾아 입장표 3장을 달라고 했다.대답은 「니옛」.3일전에 이미 매진됐다는 창구직원의 설명이었다. 취재팀은 다시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설명하고 『돈을 더 주고라도 표를 살 수 없느냐』며 사정했다.40대로 보이는 창구의 아주머니는 취재팀을 좁은 창구로 훑어본 뒤 잠시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냈다.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표값을 달라』고 했다.한 사람당 입장료는 5천루블(8백원정도).입장료를 건네주자 「로열박스」에 해당하는 자리가 주어졌다.그녀는 『오페라 극장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온 기자들이기 때문에 일종의 「배려」를 했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서울손님」 특별배려 공연 30분전.취재팀은 극장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다 경비원들의 「제지」를 받았다.외투를 벗어 카운터에 맡기라는 것이다.러시아는 학교·공공건물·식당·극장등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외투를 벗어 맡기는 것이 관습처럼 돼 있었다. 극장안으로 들어서자 평일인데도 빈 좌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관객들은 공연에 대한 팸플릿을 사들고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3천여명의 관객들이 들어찼는데도 별다른 소음이 없을 정도로 질서정연했다.이날 공연은 실력이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감히 무대에 올리지 못한다는 발레 「지젤」이었다. 이 극장의 공연 레퍼토리는 하루는 콘서트,다음날은 발레,그 다음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식으로 일주일 내내 매일 다른 종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다.다음날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공연한다고 예고돼 있었다.지젤공연은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의 공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공연장에서 만난 나탈리아양(22·은행원)은 『생활수준은 만족스럽지 않아도 문화생활만큼은 다른 큰 도시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자신들의 문화 「수준」을 과시했다. 이곳 시민들의 문화수준은 하루아침에 높아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문화를 중요시하는 국가정책,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시베리안의 감정,훌륭한 문화·교육시설등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이뤄놓은 것이다. ○「명예」 칭호 교수6명 노보시비르스크 카멘스카야 36번가에 자리잡은 노보시비르스크발레학교만 봐도 그렇다.미국이나 영국처럼 학교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도 지도교수의 수준,엄선된 학생,훌륭한 시설과 교과과정,배출인물들 모두가 그 「수준」을 짐작하케 한다.이 학교가 생긴 것은 지난 57년.이곳 오페라하우스에 소속된 발레단원들이 뜻을 모아 발레학교를 조직했고 곧 이어 모스크바·레닌그라드발레 학교와 함께 러시아 3대발레학교로 발돋움했다.러시아의 발레학교는 모두 9곳.이 가운데 이들 3대발레 학교는 부족한 정부예산에도 불구,매년 연방정부가 보조금을 줄 정도로 러시아의 「보배」로 여겨지고 있다.때문에 학생들은 전원이 무료로 교육혜택을 받고 있었고 지방의 학생들은 실비의 기숙사비용만 지불하면 훌륭한 선생님들의 지도아래 공부를 할 수 있다. ○교수 1명에 학생 3명 학생은 남자가 60명이고 여자가 1백명.선생님수는 54명으로 학생 3명당 한명의 교수가 맡고 있는 꼴이다.선생님들 가운데 6명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명예」칭호를 받은 쟁쟁한 실력자들이다.이 학교는 국민학교 3년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엄격한 오디션을 받아 입학하는 8년과정의 특수학교다.일반 발레단원은 이 학교의 졸업만으로 충분하다.그러나 발레 선생님이 되려면 이 과정을 마친뒤 반드시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종합대학을 다시 거쳐야한다.이 학교의 나데그나 스니트키나 교장(여·53)은 『매년 전국에서 수천명의 지원학생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찾아와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이들 가운데 20명만이 합격할 정도』라며 학교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녀는 『다른나라의 발레학교와는 달리 이 학교는 교양도 중요시 한다』면서 『학년수준에 맞춰 영어·수학·과학등 일반학교 교과과정도 병행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소개했다.교장의 자랑을 뒷받침하듯 매년 스위스 로사나콩쿠르등 세계적인 무용콩쿠르 입상자 가운데는 꼭 이 학교 학생 몇명이 포함돼 있다.올해에도 이 학교의 아나 츠칸코바양이 당당히 2위에 입상,영국의 로열발레학교측의 장학금을 받으며 유학을 하고 있다.외국에서 유학온 학생들도 전체 학생의 50%인 80여명이나 된다.주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등 옛 소련국가에서 온 학생들이지만 일본과 중국에서 온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에 대한 학비는 학생이 소속된 나라의 경제사정에 맞물리고 있다.그러나 돈만 많이 낼 수 있다고 입학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스니트키나교장은 『일단 학생들의 몸매와 가능성,무용수로서의 자질테스트에서 떨어지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학교규율 매우 엄격 학교시설도 일류다.7개의 발레실외에 운동실이 따로 있다.도서관에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발레·발레사와 관련된 각종 서적들로 채워져 있다.최근에는 연방정부의 도움으로 영화촬영세트가 구비된 자체극장도 한창 공사중에 있다. 18세까지의 장성한 남녀가 「득실거려」학교규율도 무척 엄격하다.특히 남학생은 남자선생님들이,여학생은 여자선생님들만이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다.남녀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학교측으로서는 「당연한」 규율인지도 모른다.
  • 북 「38선 퇴각」 전후(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1)

    ◎김일성,전황 불리해지자 “소군 파병” 급전/“연합군 북진 저지할 공군력 지원 절실” 호소/소 국방,“서울이남 모든 병력 신속 철수” 명령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가운데 슈티코프 대사는 9월 30일 모스크바 본부에 대사관인원의 철수요청을 하기에 이른다.(N182sh.그로미코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미군기의 공습으로 북조선내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됐음.이런 상황하에서 업무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소련 군사고문단과 대사관 직원 거의 전부를 본국귀환토록 허락해주기 바람』 이에 대해 그로미코외상은 『평양에 불안감을 배가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철수는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지도부는 마침내 소련의 직접개입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준비했다.이 서한은 9월 29일자로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로 작성돼 이튿 날인 9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전달됐으며 슈티코프대사는 이를 같은 날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19 50년 9월 30일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슈티코프의 전문.전문번호 N60 03 08sh) ○박헌영과 공동명의 『스탈린 동지께. 조선노동당을 대신해 우리는 조선해방자이시고 전세계 노동자의 최고지도자이신 당신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신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들에게 끊임없는 동정과 원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서한을 통해 우리는 조선민족이 미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해방전쟁의 전선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인천(제물포)지역에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민군들은 진격하는 적부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그러나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합니다.적의 공군은 약 1천대에 달하는 각종 비행기를 갖추고서 공중을 완전장악해 우리의 저항을 용납치 않습니다.전선에서는 적의 기갑부대들이 전투기 수백대의 엄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작전을 펴 우리 병사와 장비에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있습니다.동시에 적의 폭격기들은 철도,도로,전화·전신망,수송수단등 모든 시설을 자유자재로 파괴하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아군은 정상적인 보급이 안되고 제때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런 어려움은 모든 전선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적이 서울을 완전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이 때문에 남조선 남부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은 북쪽에 있는 적에게 봉쇄당했습니다.남쪽전선에 있는 병력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탄약,무기,식량을 공급받지 못합니다.어떤 부대들은 부대간 통신도 안되고 적에게 포위됐습니다. ○보급로 끊겨 전선 마비 적들은 서울을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을 계속할 것이 분명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이런 불리한 상황이 계속돼 미군침략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습니다.병력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공군력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훈련된 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우리에게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한 작전으로 북조선으로 진격해온다면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적을 막을수 없습니다.따라서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지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시말해 적이 38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소련의 직접 무력원조가 정말 필요합니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국가의 군대내에 국제의용군 부대창설을 지원해 주십시요.그리하여 우리의 투쟁에 무력지원을 해주도록 하십시요.위의 요청에 대해 당신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존경을 표하며.조선노동당중앙위. 김일성·박헌영』 이 서한이 보여주듯이 김일성은 애당초 소련군 파병을 요청했다.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이 여러 구실을 달아 소련군파병을 거부하고 대신 중공군을 보내라고 모택동을 설득한 것이다. ○“6개사단 창설 지시” 한편 소련당국은 9월 27∼30일자로 마트베트 장군이 연이어 보낸 전문에 대한 답신을 9월 30일 평양으로 보냈다.마트베트 장군의 전문은 김일성이 인민군총사령관과 국방상직은 겸직하고 남조선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들고 싶으니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의 보고서였다.소련당국은 이 답신에서 김일성의 군직접통제를 위한 겸직과 남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소련공산당정치국 결정.전문번호 NP78­118).아울러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기타장비는 10월 5∼20일 사이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이 전문은 중국 운전병을 파견해주도록 소련이 중국에 말해달라고 한 부탁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그런 부탁을 중국동지들에게 직접 하는 것은 무방하되 소련을 핑계로 되지는 못하게 하라』고 못박았다. 한편 이 시기에 소련은 전황이 크게 불리해짐에 따라 한반도 전략에 있어 몇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검토하기 시작했다.이 시나리오는 크게 5가지로 나누어진다.ⓛ북조선에 전술적인 충고와 지원을 계속하는 것 ②북조선의 소련대표부 철수 ③북조선공산정권과 북조선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방안 ⑤철수후 반격을 위해 북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방법 ⑥중국이 전쟁에 개입토록 압력을 가하는 것.결국 마지막 ⑦의 방안이 채택되기는 했지만 당시 모스크바와 평양간 오간 전문들은 나머지 네가지 방안 모두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문서들을 근거로 이 방안들을 하나하나 재구성해본다. ⑧전술적 충고. 9월 28일 서울수복과 함께 소련은 서울 이남에 남아있던 인민군을 북으로 철수시키는 문제가 첫째 과제로 떠올랐다.이 전술적 충고에서 소련당정치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가능한한 신속하게 병력을 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군사고문단에 지시했다.50년 10월 2일 불가닌 국방장관은 평양의 마트베트 소련군사고문단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포위된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거듭 귀하에게 강조했음.남쪽에 포위된 인민군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간주할 것.남쪽에 남아있는 병력들,특히 지휘관들에게 그룹이든 개별적으로든 어떤 수를 쓰더라도 북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할 것.전선이 따로 없음.그들은 자기 영토에서 싸우는 것임.인민들도 그들을 지원하고 있음.중화기들도 미련없이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신속히 북으로 철수할 것.야음을 이용하고 적이 아직 점령치 않은 지역을 이용해 철수할 것.어떻게든 포위망을 벗어나 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만은 빼내올 것.이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 ○소 개입사실 탄로 우려 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10월 5일 상황이 긴박하니 대사관직원 및 그 가족,군사고문단등 소련에서 파견된 인원 모두를 본국으로 철수시키자는 긴급전문을 본부에 타전했다.이에 대해 당정치국은 같은 날 답신전문을 채택 이튿 날 이를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냈다.소련대표부를 철수시키라는 내용이었다.(당정치국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N14 05sh) 『①소련 대표부 파견 인원과 고문단들을 귀국시키는 결정은 10월 5일자로 보낸 전문 N18 909에 의해 이미 지시한대로임.②재소한인들의 가족을 귀국시키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사가 결정할 것.③공군기술자 가족과 군사고문단 가족은 조선영토에서 반드시 철수시킬것.④필요한 경우 재소한인을 포함,모든 소련시민은 소련과 중국영토로 철수시킨다는 대사의 제안에 동의함』소련군의 개입사실이 탄로날것을 두려워한 결정이었다. ◎새로 밝혀진 사실/소,국군38선 넘기전 「평양공관 철수」 거론/중국군 개입등 다섯가지 시나리오 검토 먼저 50년 9월30일 슈티코프가 모스크바 본부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인원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는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처음 밝혀진 것이다.10월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미군의 공습 때문이었다.그러나 평양의 불안감을 이유로 그로미코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진 것이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면서 소련이 다섯가지의 한반도전략 시나리오를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번에 밝혀진 많은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일 것이다.즉 여기에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지원의 계속,소련대표부의 철수,북한정권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반격을 위한 북한군 훈련,중국의 개입압력 등의 다섯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이는 앞으로 전체 내용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이번 자료에서 우선은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얻은 셈이다. 9월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소련 국방상 불가닌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가능한한 빨리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 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도 처음 밝혀졌다.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을 데려오기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10월1일 국군이 38선을 넘자 소련은 자국 소련대사관 인원과 군사고문단들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에는 소련 공산당이 최고위 수준에서 직접 개입하고 결정을 내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회의 연재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넘어가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소련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 이상 군사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박명림
  • 러­한 합작사 세무조사/연해주당국/업체선 “도저히 납득못해” 반발

    【모스크바 연합】 러시아 극동 연해주 세무당국은 해당지역에서 영업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러,러­중 합작업체에 대해 전면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가 6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연해주 세무당국을 인용,최근 세무신고를 접수한 한­러,러­중 합작사업체 가운데 영업흑자를 보인 것은 러­중 합작건설회사인 「두닌 신반」사 뿐이었다고 전하면서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세무당국은 적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고한 대부분의 합작업체들이 여전히 영업활동을 벌이면서 철수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을 의문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모스크바 외국기업에 토지 장기임대권 부여/루츠코프 시장

    【모스크바 연합】 모스크바시는 최근 장기토지임대권의 거래를 허용함으로써 외국기업체들에 시내의 토지를 임대해 이용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모스크바시당국은 유리 루즈코프 모스크바 시장이 지난달 24일 시로부터 장기토지임대권을 따낸 업자나 개인에게 그 권리를 내·외국인에게 재판매토록 허용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지난 5일 발표했다.
  • 러,「신속대응군」 창설 거부 시사/「지위」 등에 의문점 많아

    ◎인테르팍스 통신/유엔안보리승인때 반대할 듯/유럽주둔 미군 실전훈련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주둔 유엔평화유지군 보호를 위해 파견할 신속대응군 창설을 위한 유엔안보리 계획에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지 모른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5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정부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러시아는 NATO 주도의 신속대응군 파견 제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많은 의문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신속대응군의 지위에 대해 아직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NATO의 결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러시아는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프랑스,독일이 참여하는 NATO의 신속대응군 창설은 유엔안보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본 로이터 연합】 유럽주둔 미군 1천9백명이 4일 보스니아주둔 유엔군의 비상배치상황에 대비하는 10일간의 실전훈련을 개시했다. 유럽주둔 미 제5군은 이날 헬리콥터지원을 포함한 실전사격훈련과 재급유,재무장훈련등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번 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리처드 브리지스 미육군대령은 『우리는 보스니아로부터의 긴급출동명령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리지스 대령은 『우리는 아직 현지 배치명령이나 비상대기명령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보스니아에서의 가능한 비상임무에 대비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인천상륙작전 전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0)

    ◎스탈린,소 군사고문단에 “작전 실책” 추궁/“병력 이동­탱크사용 전술 결정적 과오” 격노/김일성,연합군 「38선 진격」 당황… “소 개입” 요청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시와 지원하에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50년 9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평양주재 슈티코프대사와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 마트비예프장군 앞으로 보내는 지시문 채택을 승인했다.이 지시문은 스탈린이 직접 작성해 서명한 것이었다.여기에서 스탈린은 서울을 비롯,남동부전선에서 전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중대한 작전변경을 결심했다. ○병력철수 작전 못마땅 스탈린은 작전부진의 주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의 실책으로 몰아붙였다.다음은 이날 당 정치국 회의록에 기록된 지시문의 내용.(19 50년 9월7일.당 정치국회의록 N78.조선전쟁문제회의록p.1) 『최근 수일간 전선상황이 심각해졌음(서울과 동남부전선 모두).이는 전선사령부와 군단사령부,병력지휘부 특히 전술분야의 병력구성분야에서의 중대한 실책으로 야기됐음. 소련군사고문단들은 이들 실책에 보다 큰 책임이 있다.우리 고문단들은 4개 사단을 주전선에서 서울외곽으로 철수시키는데 있어 총사령관의 명령을 제때 충실하게 이행치 못했다.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그 결과 7일을 허비해 미군이 서울 이남에서 큰 전술적 이득을 획득케 했다.만약 이들 사단의 철수가 제때 이루어졌더라면 서울 이남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임』 스탈린은 이와함께 탱크사용 전술이 크게 잘못됐다는데 대해 격노했다. 『탱크를 투입할 때는 사전에 박격포공격을 통해 탱크가 진격할 길을 치워야 하는데 최근 이 원칙도 지키지 않고 탱크를 투입했다.이 때문에 우리 탱크들이 쉽게 적에게 파괴됐다』 스탈린은 또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며 군사고문단들이 이에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슈티코프대사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프라우다신문 기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며 『이런 전략경험의 미숙,맹목성이 남부의 병력을 서울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의문을 야기시켰다』고 질책했다.이와함께 스탈린은 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장군에게 인민군사령부가 병력을 동남부로부터 신속하고 질서있게 이동시켜 서울 동·남·북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그는 병력이동시 작전수칙 8개항을 직접 지시했다. ○「8개 수칙」 직접지시 『①주력군 철수는 강력한 후방지원하에 시행할 것.경험많은 전투사령관들이 후방지휘를 책임질 것.대전차포부대,탱크가 후방방어를 지원할 것.②후방방어는 지뢰등을 이용한 장애물을 설치,이중삼중의 방어선을 만들 것.주력군 철수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후방방어는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돼야함.③주력사단은 분리이동이 아니라 전체가 이동해야 함.주력군 선두는 포,탱크부대를 앞세워 전투태세를 갖춘상태에서 나아가야 함.④탱크는 반드시 지상군과 함께 투입하되 사전에 포공격을 한 다음 투입할 것.⑤선두부대는 주력군이 도착하기 전 교량,교차로,주요도로 등을 점령해야 함.⑥철수시 정보수집과 부대간 통신유지에 특별히 신경을쓸 것.⑦방어선 구축시기에는 병력의 전선배치를 피할 것.공격작전 개시 전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함.⑧인민군사령부와 병력간 통신시 무선암호를 사용할 것.…중략…이미 지시한 바대로 군사고문단은 단 한명도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할 것』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전세는 북한측에 더욱더 어렵게 전개됐다.스탈린은 김일성과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의 긴급요청을 받고 마침내 소련공군 부대를 북한에 주둔시키기로 동의했다.즉각 관련부대에 대한 명령이 소련군지도부에 내려졌다. 50년 9월 21일바실리예프스키 원수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11 72SS)『①평양방어 임무를 맡은 「야크­9」전투비행여단의 전속에 관해 보고함.이 여단의 전속배치를 위해 연해주 보로실료프시 인근에 주둔중인 147비행사단 전력에 의존할 것을 제의함.전투기의 이동배치시 안동­평양지구에서 공중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중략… ②북조선내 비행단 정비인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위에 언급한 여단의항공기술대대 1개를 안동 경유 철도를 이용,평양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음.동시에 북조선이 탄약,연료가 부족하다면 이를 평양에 공급할 것임.③북조선이 공군관제기술과 공중경보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장비를 공급해 주어야 함.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공군기들이 활주로에서 적군기의 기습공격을 당할 우려가 높음.…』 이틀 뒤인9월 23일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위한 최종계획을 보고했다. 바실리예프스키 장군은 이 보고서에서 『아군 조종사들이 평양부근에서 1차 교전만 가지면 미군기들에 의해 즉각 정체가 탄로날 것임.왜냐하면 공중전에서 조종사들간 무선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임』이라며 이 부분에 각별한 신경을 써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소련공군기의 참전태세가 완료된 즈음,북한군의 전세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스탈린으로부터 전황파악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으로 간 마트베프 장군은 9월27일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60 0262sh) 『서부전선(서울)과 동남전선(부산 방향)의 전황이 인민군에게 매우 불리함.미군은 인민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고 있음.제물포에 상륙작전을 폈고 이곳으로부터 북쪽과 대구 북서방향으로 진격중임. ○김,6개사단 창설 계획 미군은 강력한 공군력의 지원을 엎고 인민군의 후방과 전방지역에 가공할 공습을 가하고 있음.미군은 수원 동쪽과 동남쪽 25∼30㎞까지 진격했음. 9월 25일 19:00,김일성은 서울일원과 북부전선과 동남방향의 제2군에게 최선을 다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음.9월 26일 소련군고문단들이 김일성을 만났음.이 면담에서 김일성은 전시 총사령관과,전쟁상 직을 자신이 모두 맡겠다고 밝혔음.김일성은 특히 남쪽으로부터 동원가능한 최대인력을 데려와 이들로 6개 보병사단을 창설하겠다고 말했음.중국철도가 조선으로 오는 군수품 때문에 크게 붐기기 때문에 이들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 수송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했음.이 면담에서 우리는 김일성과 다음 사항에 합의했음.①효율적인 병력통제체제 확립.②물자,기술공급,수송,도로이용을 원활하게 할 것.③방어선 구축.북조선군은 운전병이 부족함.김일성이 중국측에 운전요원 1천5백명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임.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전선상황을 브리핑했음. 슈티코프대사가 전한 바에 따르면 김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마트베프 장군은 9월 30일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를 계속했다.『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이같은 요청에 대해 자기는 현재 인민군의 정확한 위치,사정을 알지 못해 충고할 수는 없으나 38도선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함. 김일성은 본인에게 적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음.본인은 이에 대해 그것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38도선의 방어선 구축은 서둘러야 한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다시 한번 자력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싶다고 말하며 15개 사단을 창설해 전투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그러나 만약 적이 38도선 넘어 진격해올 경우 새로운 사단창설은 물론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고 말했음. ○모에도 공군지원 요청 김일성은 이와 관련,스탈린동지께 서한을 보내 충고를 듣고 싶다고 말했음.본인은 이와 관련,들려줄 충고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음.김일성은 이 서한에 공군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음.최근 모택동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같은 부탁이 포함돼 있었음.본인 판단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매우 초조해 있음.당황하고 비관적이었음. 상황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음.서울이 함락됐음.38도선을 향해 신속히 진격하는 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저항을 펼수있는 병력이 없음.정치상황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김일성은 마침내 강경한 어조로 소련군의 직접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9월초 “인천상륙작전 대비” 지시/「소 공군 투입계획」 중 공군 참전에 확정 9월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직접 지시문을 채택하였다는 점은 소련이 한국전쟁을 지도부 전체 수준에서 논의하였음을 보여준다.즉 그것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세계전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이날의 지시문에서는 작전 부재의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직접 묻고있다.서울부근에서 지체한 것도 소련고문단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심지어 사령부와 예하부대와의 협조 및 통신 연락미비 탱크사용전술에 있어서의 오류 등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점까지 직접 지시하고 있다.다른 한가지 새로운 점은 스탈린이 이미 9월초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서울부근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고까지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거대한 전쟁을 여러 번 치렀던 스탈린으로서는,특히 2차세계대전을 미국과 함께 치렀던 그로서는 이미 미국의 고전적인 상륙전술을 깊이 인지하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공산진영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거의 알고도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세번째로 소련공군의 참전방침이 이미 중국군의 참전 이전인 9월에 결정되었다는 점이다.이 역시 아주 새로운 사실로서 지금까지 소련공군참전결정은 10월에 중국군의 참전교섭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통설의 부정인 것이다.또한 흥미있게도 조종사들에 의한 러시아어무선교신의 위험성을 이미 지적하고있다는 사실이다.이는 실제로 소련공군이 참전한 후 위장을 위해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였던 점에 비추어 그러한 위장의 계획이 일찍부터 세워졌음을 알게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사할린 지진현장/전염병 우려/재해대책본부

    ◎미발굴 시체 5백구 급속 부패 【모스크바 로이터 AFP 연합】 사할린지진현장의 무너진 건물잔해속에 묻혀있는 희생자시체가 급속히 부패하면서 전염병이 창궐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러시아 비상재해대책부가 4일 경고했다. 비상재해대책부의 바실리 유르추크대변인은 사할린 네프테고르스크 지진참사현장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희생자시체들이 낮시간의 더운 날씨때문에 빠르게 부패하고 있다면서 『구조요원들이 소독약을 뿌리고 있지만 전염병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또 집잃은 많은 개들이 아직 처리되지 않은채 참사현장에 방치된 시체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어 전염병에 대한 우려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모스크바 네프테고르스크 AFP 연합】 사할린 지진으로 인한 확인된 사망자는 5일 현재 1천2백36명으로 늘어났다고 러시아 정부 관리들이 이날 밝혔다. 재해대책부의 한 관리는 지난달 27일 사할린을 강타한 지진으로 숨진 사람은 이날 하루 1백87구의 시체를 발굴함에 따라 모두 1천2백36명,그리고 구조된 사람은 4백6명이라고 말했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재해대책부 관리의 말을 인용,리히터 규모 7.5의 강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낸 네프테고르스크에는 아직도 1천6백명이상의 구조대원들이 건물잔해를 헤치며 실종자 및 생존자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 미­러 보스니아 파병 놓고 대립/옐친 “미군 도움 안된다” 반대

    ◎영선 「전술전투단」 구성… 독 파병시사/“유엔군석방 국적통핵 세계와 협상”­영 외무 【런던·모스크바·본·콜로라도스프링스·사라예보 외신 종합】 미군의 보스니아 파견을 들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도 1일 군대를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보스니아에 주둔중인 영국군은 전술전투단구성에 착수,본격적인 전투준비테세에 돌입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31일 미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 연설에서 『곤경에 처한 유엔평화유지군 지원을 위해 미 지상군을 보스니아에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미군의 파병은 사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 보스니아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군대파견움직임에 이어 클라우스 킨켈 독일 외무장관도 1일 『유엔병력 재배치를 지원하기 위해 보스니아에 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독일이 보스니아에 지상군을 보낼 경우 2차대전후 처음으로전투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된다. 【사라예보·런던·파리 AP·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1일 또다시 유엔 민정관리 1명을 인질로 잡고 평화유지군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서방권에 대한 도전을 강화하고 있으나 인질 석방문제를 싸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양측을 오가며 직·간접 접촉을 가졌다.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영국기자들과의 회견에서 ICRC가 유엔을 대리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와 『직·간접 접촉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 파병 발언 왜 나왔나/세계 위협용… 결행 미지수/대보스니아 정책 전환 시도… 러 반발 무마 과제 클린턴 미대통령이 31일 보스니아전쟁 개입 가능성을 발표,민족분쟁에 따른 영토확장 전쟁으로 3년여를 끌어온 보스니아내전은 새 국면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보스니아내전 불개입」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침묵을 지켜왔다.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보스니아 사태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같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프랑스,영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계에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을 외면하면 이들 우방들과 군사·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유엔평화유지군을 인간방패로 삼아 나토와 유엔에 일격을 가하고 있는 세르비아계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체면을 크게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린턴의 발표는 평화유지군이 철수하기 전이라도 전략상 필요하다면 미지상군을 투입하겠다는 쪽으로 파병 조건을 완화함으로써 세르비아계에 위협을 줘 행동을 제약시키는 동시에 보스니아 사태를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미지상군이 실제로 보스니아로 파병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국내외의 난관을 넘어야 한다.무엇보다 공화당이 우세한 미 의회와 제2의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 큰 문제다. 오는 96년 대선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클린턴으로서는 단시일내에 끝날 것으로기대하기 어려운 보스니아전쟁에서 명분없이 많은 희생자를 낼 수 있는 파병을 선뜻 단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클린턴의 외교정책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딜레마인 셈이다. 클린턴의 발언이 있은 후 공화당은 예상했던 대로 일제히 클린턴에 대한 비난에 나섰다.공화당원들은 클린턴의 가장 취약한 점,즉 외교정책의 실패를 또 한번 보게 됐다며 비꼬았다.96년 대선의 공화당 후보에 나설 보브 돌 상원 원내총무는 『클린턴의 보스니아 전쟁 개입 정책은 의회와 협의없이 이루어 진 것』이라며 『클린턴 행정부가 이 문제로 의회의 승인을 얻기는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미국의 지상군 투입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옐친은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어떤 나라의 무력사용도 반대한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인질들이 워낙 넓게 산재해 있어 몇백명의 군병력이 투입된다고 해서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전쟁초기의 작전 양상(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9)

    ◎스탈린이 사실상 남침작전 총지휘/침략개시일 승인·김일성에 일일이 작전지시/“미 군사개입 공개항의 하라” 평양에 비밀전문 6월22일에는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암호전문의 해독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이후 일체의 암호전문 해독을 금지한다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하달됐다.그뒤 평양대사관과 본부 외무부간 전문교신은 연말까지 중단됐다.대신 크렘린은 전시통신을 전담하는 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대사관과의 교신을 계속했다.이 교신내용은 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전쟁개시와 함께 스탈린은 사실상 작전의 총지휘권을 행사했다.작전개시일을 승인했고 김일성의 작전명령에 일일이 간섭했다.중국·북한군 사령부에 작전지시를 일일이 내려보내기도 했다.그러나 전쟁초기 이러한 일사불란한 협력관계는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며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50년 7월1일 스탈린은 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의 소련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34681sh). ○“계속 진격해야” 독려 『① 귀하는북조선군당국이 갖고 있는 계획에 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전진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진을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두말할 것없이 계속 진격해야한다.남조선 해방이 앞당겨질수록 개입(미국의 개입을 지칭)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② 미군기들이 북조선 영토를 공습하는데 대해 북조선 지도자들의 반응을 보고하라.이 공습으로 겁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③ 북조선 지도자들이 미군의 공습과 군사개입에 대해 공개항의할 의사는 없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 공개항의를 해야한다. ④ 북조선이 탄약과 기타 군수품들을 공급해달라고 한 요청에 대해 7월10일까지 이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알릴 것』 이튿날인 7월2일 슈티코프대사는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이 북한지도부의 분위기를 전했다.『6월28일 서울을 함락함으로써 북조선지도부의 사기는 매우 높음.그러나 미군기의 공습이 잦아지고 라디오방송을 이용한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악선전이 가열되면서 북조선지도부의 분위기가 다소 악화되고 있음』 일부 지역에서는 최종 승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일부 「해방지역」에서는 사태를 관망하려는 움직임이 주민들 사이에 일고 있다고 이 전문은 보고했다.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박헌영이 미군개입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인식하고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일성은 위기타개를 위해 보병부대,탱크,해군부대의 추가창설 계획을 밝히고 군사총동원령을 발동시킬 계획이라며 슈티코프의 의견을 물었다. 이와함께 김두봉,홍명희는 인민군만으로는 미군과 맞서 싸우기 힘들다며 조심스레 소련의 입장을 타진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같은 입장타진은 김일성의 개인비서 한사람이 소련대사관을 찾아와 전달했다고 전문에서 밝혔다. 7월4일 슈티코프소련대사는 역시 총참모부 8참모부를 통해 스탈린앞으로 7월3일 김일성,박헌영과의 면담결과를 보고했다(전문번호 N405840). 『김일성은 군사작전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고 불평했음.특히 중부전선에서 너무 느리다고 했음.도하작전은 민족보위상이 현장에서 직접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수행이 제대로 안됐다고 지적.김일성은 자기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자탄했음.김일성은 전선과 해방지구 모두 사정이 심각하다고 강조.그는 미군 상륙부대가 북조선의 항구나 공정낙하산부대를 이용해 북조선군 후방에 침투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김은 이같은 가능성에 대비키 위해 많은 양의 추가 무기지원을 요청.2개 사단,12개 해병대대,해양경찰대 수개부대를 무장시킬 양의 무기임.김은 북조선지역의 철도역들이 미군공습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무기들을 만주를 경유,안동­신의주­평양으로 신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김은 북조선이 예비연대와 탱크여단 2개의 창설을 시작했다며 무기와 탱크가 필요하다고 했음.김일성은 한 보좌관에게 이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작전통제 능률을 높일 방안을 물었음.김은 앞으로 미군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며 북조선군의 지휘능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그는 총참모부를 전투병력에 보다 가까이 옮겨가기 위해 작전통제와 지휘조직을 도와줄 소련 군사고문관 1명의 파견을 요청했음』 슈티코프대사는 평양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바실리예프장군과 공동으로 다음사항을 김일성에게 건의한 것으로 이 전문은 밝히고 있다.『① 총사령관 참모총장 군사위원회 총참모장으로 구성되는 군사평의회가 이끄는 2개의 군사그룹을 창설할 것.각 군사그룹은 휘하에 4∼6개의 하급부대를 둘 것.② 전선사령관 총참모장 전선군사평의회가 이끄는 전선사령부를 창설할 것.이 전선사령부는 총참모부 책임하에 구성.③ 민족보위성은 이미 소규모이기 때문에 그대로 존속시킬 것.민보성은 전투병력에(식량,연료,탄약등)모든 필요한 보급품을 공급하는 외에 예비병력,신병 훈련,공화국 북부에 상륙방어부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는다.④ 김일성을 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무기 대량지원 요청 김일성은 슈티코프대사의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두사람은 군병력 조직개편이 전선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합의했다. 슈티코프대사는 마지막으로 『병력편성 분야의 소련군사고문관 2명을 파견해줄 것(1명은 편성사령관 고문관,1명은 포병사령관 고문관).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장군과 전선사령부에 파견된 소련군장교들이 서울로 함께 이동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망함』이라는 것으로 이 전문을 끝냈다. 8월28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격려의 뜻을 담은 전문을 전달했다.그러나 이 전문의 진짜의도는 김일성에게 새로운 작전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전문번호 N75021,소련군총참모부 제8참모부). 『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는 김일성동지와 그의 동료들이 남조선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위대한 투쟁을 벌이는데 찬사를 보낸다.김일성동지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다.소련공산당 중앙위는 조만간 침략자들이 치욕속에 조선반도에서 쫓겨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② 김일성동지는 외세개입자들과 맞서 싸우는 이 전쟁에서 항상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당황해선 안된다.일부에서 진격이 지연되고 국지적인 패배를 겪는다고 낙담해선 안된다.이런 전쟁에선 누구도 계속 승리만 거둘수는 없다.러시아 내전 때는 더 심했고 독일과의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조선인민들이 거둔 성공은 바로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 됐고 제국주의의 멍에를 벗으려는 아시아 해방운동의 기치아래 들게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지금부터 모든 피착취 인민의 군대들은 조선인민들로부터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해야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김일성동지는 조선이 이제 혼자가 아니라 동맹국들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동맹국들이 당신을 도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1919년 영·불·미 외세와의 전쟁당시 러시아는 지금 조선동지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소 군사고문 파견 전문 ③ 김일성동지에게 공군력을 산개시키지 말고 전선에 집중시킬 것을 충고한다.전선에서 공격은 반드시 적진에 결정적인 공습을 가하는 것과 함께 시작돼야한다.인민군 전투기들은 적기로부터 인민군을 방호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해야 한다.필요시 우리가 폭격기,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 8월29일 슈티코프대사로부터 이 편지를 전달받은 김일성은 크게 감동,이튿날 노동당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소집해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식답장을 채택했다.『우리의 경애하는 교사이신 스탈린동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구절로 이어지는 이 답장은 스탈린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감사의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 밝혀진 사실/김일성 “전진속도 느리다” 자책/서울 제한점령설 허구 입증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의 상황을 다룬 이번 9회에는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들어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전쟁의 결정과정보다 전쟁의 전개과정에 훨씬 더 깊숙이 개입,『남조선해방이 앞당겨질수록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는등 사실상 초전부터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동의 전쟁이었음이 이번 문서에서 확인된 것이다. 두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항상 소련의 의사를 문의하고 소련은 그에 상세히 답변하는가 하면,어떤 것은 문의에 앞서 미리 지시하는등 이번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1950년 11월 공군이 개입하기 이전부터 소련이 이 전쟁에얼마나 깊숙이 개입하였는지 확인하게 된다. 세번째는 김일성은 초기에 전진속도가 너무 느린것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자책하고 있음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이는 김일성이 서울까지만 점령하려했다는 제한전쟁설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번째는 김일성이 이미 전쟁 초기부터 미군의 상륙부대나 공정부대가 북한후방으로 침투할 위험이 높다고 인식,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다섯번째는 스탈린·김일성과 같은 고위수준에서의 전쟁수행방식의 공동결정 뿐만 아니라 현지전쟁수행에서도 소련과 북한은 긴밀하게 협의,공동수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끝으로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이 곤경에 처했을때 스탈린은 오히려 『폭격기와 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고까지 말하면서 고무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자료를 통해서 밝혀졌다.
  • 「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 시리즈를 읽고

    ◎한국전 배경·전개과정 밝혀냈다/러 강도 자료보다 다양… 역사 재구성 기여 기대 우리는 왜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자료를 발굴하고 그것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최근에 「서울신문」에 집중 연재되고 있는 한국전쟁관련 구소련자료를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거듭 던지게 된다.이 자료들은 일부는 과거에 알려진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에게 더욱더 새롭게 역사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특히 19 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약 반세기 전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왜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이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노력하는가?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첫번째는 이 사건의 크기 때문이다.이 사건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었고 또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두번째는 그 영향의 크기 때문이다.이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분단상태를 지속하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세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진실이 아직도 완벽하게 밝혀져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바로 이점에서 이번 자료의 발굴은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의 추적은 그 사건을 기록한 자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자료는 진실의 보관자이자 전달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은,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자료조차도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거기에는 기록자의 주관이 들어가며 공개될 때에도 역시 정치적 판단이 게재된다. 이점에서 냉전의 해체는 현실의 변화 뿐만 아니라 역사해석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지않을 수 없었다.그것은 두가지 점에서 그러하였는데 하나는 그것이 역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방대한 구소련의 자료들이 공개됨으로써 냉전시기의 사태들을 재해석 하게하였다는 점이다. 세계의 많은 학자와 대학,연구기관들이 냉전의 해체이후 구소련의 자료를 발굴하려 노력하고 있고 이 자료들은 냉전시대 현대세계사의 비밀을 밝혀줄 『마지막 보고』로 불렸다.우리에게 구소련의 자료들은 특히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그것은 분단,북한정권수립,전쟁 등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 고비들이 스탈린시기 소련의 정책과 밀접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정책은 이 두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측면이 아닐 수 없었다.사실상 분단과 초기 북한정권수립에 대해서는 그동안 국내외 학자와 언론,여러 기관들의 노력으로 상당부분이 밝혀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아직도 한국전쟁에 관해서는 다른 시기에 비해 소련부분의 역사적 사실이 훨씬 덜 알려져 있었다.이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는 지난해 김영삼 대통령이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번에 「서울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자료들은 앞의 옐친문서와 몇가지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첫번째는 우선 양적인 측면이다.지난번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된 문서의 양은 기본문헌 100건 279페이지와 보충문헌 116건 269페이지였다.그러나 이번 발굴,공개된 자료는 950건에 3천여 쪽에 달한다.약 6배에 달하는 양인 것이다.우리는 멀지않은 시기에 이 문건 전부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그럴 경우 이는 한국전쟁과 초기 북한,소련의 대한정책의 규명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자료의 출처이다.지난번에 대통령에게 전달된 문서들은 러시아 외무성문서 중심이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외무성문서뿐만 아니라 대통령문서보관소,구소련공산당중앙위,국방부문서가 포함되어 있어 훨씬 더 다양한 자료를 담고 있다. 세번째는 자료발굴의 주체이다.이점이야말로 앞의 두가지 차이보다 더 큰 차이일 것이다.지난번 대통령에게 전달된 문서들은 전부 러시아측이 선정하여 전달한 것이었다.우리는 러시아가 스스로 선정한 자료만을 전달하였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지는 않지만,그러나 자료의 공개는 공개자의 판단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지난번 자료는 이점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외교문서는 전달하였지만 정작 중요한 내부정보문서와 정책결정·내부토론문서는 거의 전달하지 않았다.이번 「서울신문」의 자료도 후자를 전부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점에 관한한 옐친이 전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이를테면 이 두 문서는 전쟁의 결정과 전개과정에 있어 스탈린의 역할에 대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 자료를 보면서 누가 방화자냐,누가 더 주도적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고 본다.그점은 사실 더이상 규명치 않아도 될만큼 분명해진 것이기 때문이다.필자가 판단하기에 스탈린과 모택동·김일성은 각기 제각각의 국가적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이점을 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소모적인 논쟁에 빠질 뿐이다.김일성·박헌영이 주도하였다고 해서 마치 스탈린·모택동의 역할과 책임이 축소되거나 면제되는듯한 논의는 전혀 옳은 것이 아니다.그들 역시 자기 국가의 관점에서 동의를 하고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에 보관되어있는 북한의 방대한 당시 자료들,우리의 자료들,그리고 이미 대부분이 공개된 미국의 자료,아직 거의 공개되지 않고 있는 중국의 자료와 함께 이번의 러시아자료를 총체적으로 종합 검토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시대에 가장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던 한국전쟁에 대해 그 완벽한 재구성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이번 자료가 그에 큰 기여를 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 사할린 지진 구조대/사체 3백77구 발굴

    【모스크바 AFP 연합】 최소한 2천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우려되는 사할린 북부 네프테고르스크의 지진발생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는 구조팀들은 건물잔해등에서 현재까지 3백77구의 사체를 발굴했고 3백72명의 부상자들이 구조됐다고 러시아 비상대책부가 30일 발표했다. 인테르팍스통신은 구조팀이 건물잔해 등에서 끌어낸 3백77구의 사체가운데 1백27명의 신원이 확인됐고 이중 39명은 어린이이며,상당수의 사체들이 훼손돼 신원확인이 매우 어렵다고 전했다.
  • 본격적인 전쟁준비(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8)

    ◎새로 밝혀진 사실들/김,방중전에 “6월말 공격개시” 확정/조작논란 「3단계 작전」 6월 15일 수립 한국전쟁 발발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이번 8회에는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이 포함돼 있다.특히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정부에 넘겨준 문서에는 19 50년6월 상황을 담고 있는 문서가 거의 빠져있는 사실을 감안할때 긴박한 순간의 상황을 담고 있는 이번 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중의 하나는 김일성이 50년5월중순 모택동을 만나기위해 중국을 방문하기전부터 공격개시일을 6월말로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는 남침에 임박해서야 전쟁개시일을 7월에서 6월로 앞당겼다는 그동안의 일반적인 주장과 해석을 뒤엎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또하나의 사실은 6월15일에 확정된 3단계작전이다.그동안 오랫동안 조작논쟁을 불러일으켰던 3단계작전이 진실임이 밝혀졌다.일부에서는 전쟁후 한국과 미국에 의해 공개되어 남침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 3단계작전이 조작됐다는 주장이 있었다.그러나 3단계작전은 지금 워싱턴에 보관중인 러시아어로 된 인민군 작전명령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이번 회의 내용으로 볼때 위싱턴에 있는 자료가 조작되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졌으며 6·25는 남침임이 결정적으로 증명됐다. ◎작전개시직전 국지전서 전면전으로 전환/김일성,50년 5월12일 방중전 공격일 소 통고/북­소 49년 6월4일 무기지원 「특별협정」 체결 전쟁개시에 대한 3자간 합의가 마무리되자 막바지 전쟁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전쟁준비의 두 축은 소련과 북한이었다.하지만 김일성의 전쟁준비는 이미 1년전부터 본격화됐다.소련에 대한 무기지원요청이 이어졌고 소련역시 이를 충실히 도와주었다.김일성은 49년5월1일자로 추가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전문을 스탈린앞으로 띄웠다.그는 49년5월까지 기계화부대 증설을 비롯,공군을 제외한 모든 군의 개편문제를 마무리짓고 9월까지는 공군개편을 끝내고 싶다며 추가무기지원을 요청했다. ○추가 무기지원 요청 슈티코프대사가 보낸 이 전문에 의하면 김일성 ⓛ2개 탱크연대를 거느린 탱크여단 ②독립 탱크연대③각 사단에 박격포부대 추가창설 ④공군사단 ⑤엔지니어링 대대 ⑥박격포 여단의 창설을 건의했다.이와 함께 장문의 필요한 무기목록을 덧붙였다.스탈린은 이 요청을 90%정도 집행해 주었다.이를 위해 북한·소련 양국은 49년6월4일 『소련은 북조선정부의 무기 및 군사기술장비 지원요청을 전부 만족시키는 데 동의한다』는 요지의 특별협정을 체결했다.이 특별협정에는 북한에 제공될 소련무기 목록이 첨부됐다.주요목록은 다음과같다. ▲공군장비:IL­10기(30대) WIL­10기(4대) YAK­9기(30대) PO­2기(4대) YAK­18기(27대) YAK­11기(6대) ▲기갑장비:탱크 T­34(87대)장갑차 BA­64(57대)장갑차 SU-76(1백2대)모터사이클 M­72(1백22대) 이외에도 소련은 각종 포탄·대구경총·자동화기·저격용 소총·전함·상륙정·지뢰·도하장비·무전기·전화선·어뢰정·대잠함을 비롯,북한이 요청한 탄약 일체를 인도키로 약속했다.이들 무기원조에 대해 북한은 쌀을 비롯한 곡물과 광물로 갚기로 동의했다. 김일성은 49년12월말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50년도분 추가무기지원 1억1천2백만루블어치를 소련정부에 요청했다.상환방법은 보석류 및 비철금속으로 갚는다고 했다.슈티코프 대사가 50년1월1일자로 본국에 보낸 전문에 나타난 추가요청내역은 다음과 같다.1개 모터사이클연대 창설,기존 1개 보병여단을 사단에 편입시키고 무기보강,최근 창설한 해군보강을 위한 전함 2척. 50년3월14일 김일성은 51년분 차관을 50년도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모스크바에 요청했다.전용목적은 무기·탄약 및 군사기술장비 구입이었고 필요한 무기목록을 전문 뒤에 별첨으로 보냈다.육해공군의 각종장비,탄약을 망라,수백종에 이르는 물품이었다.김일성은 전문에다 별도로 『북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소련정부가 신생국 조선공화국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요청한 물품을 조속한 시일내에 보내줄 것을 기대합니다』라는 서신을 첨부시켰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50년4월3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은 남조선에서 빨치산으로 활약하던 김달삼이란 사람이 평양으로 넘어왔다는 전문보고를 본부에 보냈다.이 전문은 『남조선언론들이 정부군의 토벌작전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그는 지금 평양에 와있으며 방문목적은 남조선내 빨치산활동 계획을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남침개시를 앞두고 남한내부 혼란을 가속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북경방문 출발 하루 전인 5월12일 슈티코프 대사를 불러 전쟁개시일을 6월로 잡겠다는 최초의 언질을 주었다.『본인은 이미 남조선에 대한 공격준비 명령을 총참모장에게 내렸음.전쟁계획은 이미 짜여졌음.준비가 예정대로 마쳐질지 모르지만 공격개시일은 6월로 잡겠음』.슈티코프대사는 즉각 이 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북경방문을 마치고 온 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예정대로 진행시켜나갔다.5월29일 슈티코프 대사는 스탈린에게 전쟁준비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6월8일 병력이동 『김일성은 공격준비상황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음.모스크바회담에서 지원키로 합의한 무기 대부분이 도착했다고 함.김일성은 새로 창설한 사단을 시찰한뒤 6월말 공격개시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함.김일성의 명령을 따라 인민군총참모장이 공격작전을 수립했음.인민군 총참모장과 소련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장군이 이 작전계획을 김일성에게 보고,승인을 받았다고 함.군편성은 6월1일까지 완료예정.6월 전투개시에 아무런 차질이 없다고 함.김일성은 작전개시일을 6월말로 잡고있다고 함.더 늦출 경우 첫째 작전계획이 남조선측에 유출될 우려가 있고 둘째 7월이면 장마가 시작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음.김일성은 6월8∼10일 사이 병력이동을 시작하겠다고 했음』. 같은날 슈티코프 대사는 소련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포스트니코프 장군과 만나 의견을 듣고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두 장군은 처음에 김일성의 6월말 공격개시에 반대했다.작전준비가 제대로 갖춰지려면 7월이라야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이 두사람도 결국은 장마 때문에 6월말외에 다른 방안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슈티코프 자신도 장마철 공격개시는 너무 위험하다며 김일성의 생각이 옳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이렇게 해서 공격개시일은 6월말로 확정됐다. 마침내 운명의 6월이 왔다. 북한은 3단계작전중첫번째인 평화공세를 시작했다.6월10일 북한은 남측에 대해 평화통일방안을 논의키 위해 전조선민주연합전선 중앙위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슈티코프는 이튿날 6월11일 남한의 반응이 나오자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남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했음.공격계획을 예정대로 진행시켜 나가야겠음.병력을 38도선부근으로 이동시키고 추가 평화통일제의를 하겠음』. 6월12일 슈티코프는 13일부터 38도선 10∼15㎞지역으로 인민군의 병력이동이 시작된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총참모장 주재로 사단장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 회의가 열려 구체적인 임무가 하달됐다.6월15일 3단계로 나누어진 최종작전계획이 확정됐다.슈티코프는 6월15일 이 작전계획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작전개시는 6월25일 이른새벽에 시작됨.1단계작전은 옹진반도에서 국지전형태로 시작한 뒤 주공격선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감.2단계 작전은 서울과 한강을 장악함.동시에 동부전선에서 인민군은 춘천과 강릉을 해방.이에 따라 남조선군 주력은 서울일원에서 포위당해 궤멸됨.마지막 3단계작전에서는 여타지역 해방.적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주요 인구밀집지역과 항구를 점령함』. 여기서 알수있듯이 김일성이 세운 당초 작전계획은 전전선에 걸친 전면공격이 아니라 옹진반도를 시작으로하는 단계적 공격이었다.이것이 그뒤 작전계시직전에 전면남침으로 바뀐 것이다. ○소련병력 승선거부 이렇게 최종작전계획을 수립해놓은 뒤에도 북한은 평화선전공세를 계획했다.6월16일 북조선인민최고회의가 남한국회앞으로 평화통일 제의를 내놓았다.이 평화제의의 허구를 그대로 드러내는 슈티코프의 전문보고를 인용해본다. (19 50년6월16일.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조선동지들은 이 평화제의와 이에 대해 남조선이 보일 부정적인 반응(반대할 것이 쉽게 예상됨)이 갖는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예의주시하고 있음』. 6월20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상륙작전에 쓸 전함의 추가지원을 소련측에 요청했다.동서해안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감행,적을 포위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었다.김은 전함을 보내면서 『인민군내에 전함운용 요원이 없기 때문에 상륙선을 운행할 소련해군 요원을 함께 보내줄 것』도 요청했다.스탈린은 21일 답전을 통해 전함추가지원은 받아들이되 적에게 개입명분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소련병력 승선은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21일 김일성은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중대한 메시지를 스탈린앞으로 보냈다.작전변경에 관한 건의였다. 『김일성은 남조선 방송청취 및 정보보고에 의거,남측이 인민군의 작전계획내용을 입수한 것같다고 말했음.이에 따라 남측이 전투력 강화,방어선 강화,옹진반도 방향에 병력추가배치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함.이같은 상황변화로 인해 원래의 작전계획변경이 불가피하다고 함.김일성은 전면공세 전 옹진반도를 기점으로한 국지전 시작 대신 6월25일 전전선에서 전면공격을 감행하자고 제의했음』. 스탈린은 이 작전변경 건의를 이의없이 승인했다.6월25일 새벽 전전선에서 공격개시로 최종확정된 것이다.
  • EU,외교적 해결 촉구

    【브뤼셀·모스크바 로이터 AFP 연합】 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은 29일 회의를 열고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상호승인을 이룩하기 위한 5개국 접촉그룹의 외교적 노력에 전폭적 지지를 표시했다. EU 15개 회원국 외무장관은 이날 브뤼셀에서 회의를 가진 뒤 발표한 성명에서『EU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공화국의 상호승인을 이루기 위해 현재 이뤄지고 있는 외교적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 사할린 3천여명 매목·사망/강진 대참사

    ◎건물더미속 6백명 생존 추정/송유관 15곳 균열… 오염 우려 【유즈노사할린스크·블라디보스톡·모스크바 외신 종합】 사할린 북부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통신마다 저마다 다르게 집계해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비상재해장관은 29일 이번 지진의 사망자수가 최소한 2천명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이타르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그러나 구조작업을 총지휘하고 있는 올레그 소스코베츠 러시아 제1부총리는 러시아사상 「최악의」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3천명을 넘을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현장 목격자의 말을 인용,아파트가 무너져내리면서 콘크리트더미에 깔렸던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6백50명은 아직 살아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인테르팍스통신은 네프테고르스크와 역시 사할린 북부지역의 오하간을 잇는 90㎞의 송유관중 15군데에 균열이 생겼다고 사할린석유가스회사측이 당국에 보고 했다면서 석유유출 가능성의 우려를 낳고 있다고 전했다. 외무부는 사할린 지진에 한국인 피해자가 있는지의 여부를 외교채널을 통해 파악하고 있으나 29일 현재 사고지역의 통신이 두절돼 피해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 모­김 북경 비밀회담(모스크바 새 증언:7)

    ◎모택동,김일성에 남침 세부작전 일일이 지도/모택동/“평화통일 불가능… 무력침공 밖에 없다”/미 개입땐 중국 지원병력 파병 재확인 □모 충고사항 장병에 구체적 임무 부여 모든 작전 신속하게 전개 대도시는 우회공격 할 것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 스탈린이 모택동앞으로 보낸 전문은 스탈린·김일성 두사람이 무력남침을 결행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전문번호N8600·1950년 5월14일). 『모택동 동지앞.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인들의 통일제의에 동의했음.이와 함께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종결정은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 함.조선동지들이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귀하에게 통보할 것임.­필리포프』 ○스팔린 가명 사용 스탈린은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확정지은 뒤 이같이 모택동에게 뒤늦게 통보,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체하면서 개전의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다.재미있는 것은 남침결정 사실을 문서화한 이 전문에서부터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후 그는 필리포프외에 「환시」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이보다 이틀전인 5월12일 평양의 슈티코프대사는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띄웠다.『5월12일 김일성의 요청으로 그와 박헌영을 면담.김일성은 북경주재 대사 이주연이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주재로 모택동·주은래를 만났다고 했음.주은래는 이 방문을 공식방문으로 하자고 주장.반면 모택동은 언제 북조선이 통일작전을 개시할 계획이냐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군사작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라면 비공식 방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함. 모택동은 또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며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함.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그런 작은 나라에서 3차세계대전을 시작할 리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함.김일성은 이에 덧붙여 이주연대사는 자기와 모택동간의 회담을 논의할 권한이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래서 그를 소환해 견책한 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음.5월10일 이주연대사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모택동을 만나 정식으로 김일성의 접견승인을 받았다고 함.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월13일 아침 출발예정임.김일성은 그때까지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음.이에 대해 본인은 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문제를 당중앙위에서 토의하지 않고 김책(정치국원)과만 의논했다고 함』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신경을 썼다.이주연 대사를 소환해 견책한 것도 스탈린을 의식한 쇼였다.모택동과의 회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다음과 같이 슈티코프 대사에게 통보했다.다음은 슈티코프가 보낸 보고전문의 계속.『김일성은 모택동과 다음의 문제들을 토의할 계획이라고 함. 1,무력통일 의향을 알리고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통보. 2,조만간 북조선과 중국간 무역협정체결과 통일 후 양국간 우호조약체결을 희망.3,중국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간 교류문제.4,북조선 수력발전소 건설,중국거주 조선인문제등 상호관심사 논의』 이와 함께 김일성은 중국거주 조선인군 부대가 갖고 있는 일본제 및 미제 무기에 쓸 탄약공급을 중국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총참모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일성은 이 물건들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군이 사용할 3벌 분량의 탄약이 이미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김일성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이미 필요한 원조는 다 받기로 합의됐기 대문에 실제로 모택동으로부터 원조받을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예정대로 북경으로 날아갔다.도착 당일 저녁늦게 모택동과의 1차회담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주은래는 로신 북경주재 소련대사를 불러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로신대사는 이를 곧바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다음은 로신대사가 보낸 5월13일자 전문. 『1,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에 도착했음.2,조선지도자들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상황이 바뀌어 북조선이 작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사항을 설명했음.이 문제는 조선지도자들과 중국,특히 모택동과 의논해야 된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도 전달됐음.3,조선지도자들은 이틀간 북경체류예정임.…중략…모택동 동지는 이 문제에 관해 필리포프 동지가 직접 설명해주기를 원함.중국동지들은 신속한 답을 원함』 ○개전땐 승리 보장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대사는 스탈린·김일성의 모스크바 회담결과에 대해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그리고 로신 대사는 같은 날 모택동의 반응을 본국으로 타전했다.이 전문내용에 의하면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북한지도부가 내린 현 남북한 정세와 남북한 군사력 균형에 대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모는 또한 통일 뒤 중소조약과 유사한 우호동맹조약 및 상호원조조약을 북조선과 체결할 것을 북조선지도자들에게 제의했다고 밝혔다.물론 이같은 조약체결은 스탈린동지의 의견을 들은 뒤에 추진할 것임도 덧붙였다. 5월15일 2차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무력남침에 대해 상세한 입장교환을 했다.회담 뒤 로신대사는 양측(주은래·박헌영)으로부터 별도 브리핑을 통해 회담결과를 전해 들었다.회담결과의 대한 양측의 설명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다음 사항은 양측 브리핑내용이 일치한다.김일성이 먼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합의한 남조선 침공계획을 모에게 설명했다.즉 1단계 준비 및 병력집중배치.2단계 북조선이 수차례 평화통일 공세를 펼칠 것.3단계 남측이 이 평화통일제의를 거부하는 즉시 군사작전 개시.모택동은 이 3단계 작전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택동은 작전과 관련,몇가지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우선 모든 병사와 지휘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할 것.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대도시는 우회할 것.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됨.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두어야 함.이미 알려진 대로 후일 김일성은 모택동의 이 「귀중한」 충고를 제대로따르지 않아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3단계 계획」 동의 그 다음 모택동은 일본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김일성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만 미국이 2만∼3만의 일본군을 파병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말했다.하지만 그 경우 북조선군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자신했다. 주은래가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짜 개입위험이 큰 쪽은 일본보다 미국이라고 모택동은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지적에 대해 『미국은 극동에 군사적 개입의사가 없다』고 미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 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후일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2일에도 주은래는 로신 대사에게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반면 김일성은 끝내 미국의개입가능성을 과소 평가했다. 박헌영이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주은래의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다음은 로신이 본부에 보고한 박헌영의 브리핑부분.『50년 5월16일.박헌영의 발언.모택동은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음.미군개입시 중국이 병력을 보내 북조선을 지원하겠음.모택동은 또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음.반면 중국은 그같은 의무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확대할수 있음』 5월15일 저녁 공식일정을 끝낸 김일성 일행을 위해 모택동은 만찬을 베풀었다.만찬시작 전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했다.『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로웠다.모동지는 해방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모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있은 스탈린동지와 본인사이의 합의사항을 모두 지지했다』 이튿날 5월16일 스탈린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통일 뒤 중국·북한간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우여곡절끝에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간 무력남침에 대한 합의는 이렇게 마무리됐다.이제 남은 것은 공격개시의 택일뿐이었다.
  • 사할린 진도 7.5강진/“2천5백명 사망”

    ◎네프테고르스크시 완전 폐허/러 통신 보도/러,즉각 재난지역 선포… 구조반 급파/우리동포 3만명 거주… 큰 피해 우려 【모스크바·유즈노사할린스크·런던 외신 종합】 28일 새벽(한국시간 27일 밤) 사할린섬 북부지역을 강타한 리히터 규모 7·5의 강진으로 최고 2천5백여명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28일 이 지역 민방위본부 책임자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타스통신은 이번 지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할린 북부 네프테고르스크는 도시 전체가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사할린 주정부 당국은 지진으로 19층의 건물 한채와 20개동의 아파트가 붕괴되면서 70명이 숨지고 2천명 이상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있다고 밝혔었다. 한편 인테르팍스 통신도 비탈리 고밀레프스키 사할린 부지사의 말을 인용,총인구 3천5백여명의 네프테고르스크에서 즉각 구조된 사람은 5백여명에 불과하며 지진발생 지역이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로 덮여 구조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해 나머지 3천여명은 구조가 어려운 상태라고 전했다. 네프테고르스크를 탈출한 목격자들은 지진이 일어나면서 5층짜리 건물 16개동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으며 아파트 창문이 모조리 깨지고 벽에 금이 가면서 건물 전체가 무너졌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이날 지진으로 오하시와 네프테고르스크시 근처 모스칼보 마을 등 일부 지역의 통신이 두절됐다.한편 러시아 극동재해대책센터는 지진피해 지역을 즉시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긴급구조반을 현지에 파견했으나 현지의 도로사정이 나빠 현장도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하바로프스크와 모스크바에서도 구조팀이 급조돼 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날 지진은 지난 1월 일본 고베지역을 강타한 리히터 진도 7.2의 지진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진앙지는 오하시 북쪽 70㎞ 떨어진 엘리자베타곶 인근 바다속인 것으로 관측됐다. ◎총인구는 75만 사할린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사할린섬과 쿠릴열도 등 섬으로 구성된 행정구역으로 면적은 8만7천1백㎦이며 전체 인구는 75만여명.이 가운데 2,3세를 포함한 우리 동포는 3만5천2백여명(94년 통계)에 이른다. 우리 동포들은 현재 주도인 유주노 사할린스크를 비롯한 사할린 각 지역에 산재해 거주하고 있어 이번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김 대통령 위로전문 김영삼 대통령은 28일 하오 러시아 사할린지방 네프테고르스크시에서 발생한 지진참변과 관련,러시아 옐친대통령에게 위로전문을 보냈다.
  • 중국의 남침지원(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6)

    ◎모택동 “2개 조선인 사단 파병”약속/모­김일성 친서받고 탄약·식량지원 승낙/장교 200명 훈련… 전투력 증강 주문/“장기전은 불리”… 일 개입 대비 당부 김일로부터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받은 모택동은 먼저 조선인 사단의 전출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3개 사단중 2개는 현재 목단과 장춘에 주둔하고 있고 1개는 공격작전에 참가중이다.따라서 앞의 2개 사단은 언제든지 조선정부에 돌려줄 수 있다.하지만 나머지 1개는 전투가 끝나야 하기 때문에 1개월 전에는 곤란하다』며 흔쾌히 전출을 승낙했다.이와함께 모는 이 조선사단들이 정규군이 아니라서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전투력이 약하다면서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훈련된 장교를 배속시켜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중국군 보낼수도 김일은 또한 조선인 사단이 일본군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중국이 탄약을 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모택동은 『중국에서도 그런 탄약을 생산한다.얼마든지 주겠다』고 답했다.남침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모택동은『군사작전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게 됐다.김일성은 이 점을 감안해 신중하게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고 주문했다.모택동은 이와함께 일본의 개입에 우려를 표시했다.『전쟁은 신속히 끝날 수도 있고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장기전은 귀측에 불리하다.왜냐하면 그럴 경우 일본이 전쟁에 개입해 남조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지근에 소련이 있고 만주에는 우리가 있다.필요하면 귀측을 위해 중국군을 보낼 수 있다.우리는 모두 검다.미국 사람에게는 구별도 잘 안된다』 모택동은 이렇게 적극적인 지원의사를 밝히는 한편 가까운 시일내에 남침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덧붙였다.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국제정세가 좋지 않다.중국공산당은 장개석군과 싸우기에 바빠서 북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없다.그러니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중국이 공산당 기치아래 통일될 때까지 남침을 기다려달라』 ○“개전 보류”요구 이와함께 모택동은 김일성의 북경방문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고 물었다.모는 또한 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차이나 등지의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아시아제국 코민포름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김일에게 말했다.하지만 아직 코민포름 출범은 시기상조라고 모는 말했다.중국내전이 진행중이고 조선에 긴장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코민포름 창설이 자칫 군사동맹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5월 17일 모택동은 소련대표단에게 김일의 중국방문에 대해 브리핑했다.당시 북경주재 소련대표부의 코발료프대사는 5월 18일 스탈린앞으로 모의 브리핑내용을 보고했다.다음은 코발료프가 보고한 모택동의 발언내용.『북조선에 장교와 무기지원을 약속했음.만주에 1백50만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는데 이들로 2개 사단(사단병력은 1만명)이 구성돼 있다.이중 1개 사단은 전투경험이 있음.만주에서 국민당과 적극적인 전투를 벌였음.이들 2개사단은 북조선의 요청만 있으면 즉각 투입가능함.북조선이 투입요청을 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훈련시키고 모든 보급품을 계속 제공하겠음.이외에도 우리는 장교 2백명을 훈련시키고 있음.1개월이내에 이들은 조선에 보낼 예정임.만약 남북조선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앞서 언급한 조선인 사단에 대한 식량·무기지원은 물론 모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 북조선동지들은 조만간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할 것으로 믿고 있음.하지만 대신 일본군이 들어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음.일본군의 도움을 얻어 남조선이 북침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남조선이 침공해올 경우 대응공격을 하되 남조선군에 일본군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주의깊게 살피라고 했음.만약 일본군이 들어있고 적의 전투력이 우세할 경우 영토일부를 내주더라도 귀측의 전투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했음.그래야 상황이 좋아질 때 적을 격퇴시킬 수 있기 때문임. 우리는 또한 이런 후퇴시에 대비해 당·군·인민들을 이념적으로 교육시킬 것을 북조선측에 권고했음.그런 후퇴가 민주조선의 완전한 패배가 아니라 일시 전략적인 후퇴라는 점을 주지시키라고 했음.설사 미군이 철수하고 일본군이 대신 들어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동지들이 너무 서둘러 남침을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음.왜냐하면 맥아더장군이 신속하게 일본군 병력과 무기를 남조선에 들여보낼 수 있기 때문임.반면 우리는 주력병력 대부분이 양자강 너머에 가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지원을 북조선에 해줄 수 없음. 따라서 남침은 1950년초,국제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려서 시작하는 게 좋다는 생각임.그 때는 일본군이 침공해와도 중국군 엘리트부대를 보내 일군을 격퇴시킬 수 있음』 ○소련과 긴밀협조 이같이 말한 뒤 모택동은 『이 모든 조치는 모스크바와 협의하에 취해 나가겠다』고 코발료프 대사에게 약속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불가를 통보한 직후인 49년 4월,5월.모택동과 김일성 두사람 사이에는 이미 남침시 병력지원에 대한 깊숙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50년 4월 김일성의 모스크바방문에서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점을 상기한다면 모­김 두사람간 남침에 대한 교감은 이보다 무려 1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전쟁의 해인 50년 1월 1일.날이 밝자마자 스탈린은 평양주재 소련대사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 1통을 보냈다.『임표가 모택동앞으로 다음과 같은전문을 보냈다.중국인민해방군 안에 1만6천명의 조선인 병력이 있는데 순수 조선인 부대도 있다.순수 조선인부대는 4개 대대,27개 중대,9개 소대임.중국군내에 3개의 조선인 지휘부가 있으며 그중 2명은 사단장급이고 5명은 여단장,대대장급 87명이다.중대장 5백78명,소대장1천4백명,분대장 1천9백명이다. 중국군이 중국남부로 이동했을 때 조선인 병력사이에서 조국으로 돌려보내달라며 소요가 있었다고 함.임표는 내전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조선인 병력을 1개 사단 혹은 4∼5개 여단으로 묶어서 모두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임표의 건의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들어볼 것』 그러나 김일성은 평양주재 중국무역대표부를 통해 보낸 중국정부의 서신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알고 1월 9일 슈티코프 대사를 불렀다.다음은 슈티코프 대사가 1월 11일 스탈린 앞으로 보낸 보고전문.『김일성은 중국정부가 내전이 끝나가고 있어 중국군내 조선군 부대를 해산시키고 북조선이 원하면 모두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고 했음.김일성은 이들을 모두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음.김일성은 ⑴이들로 1개 지상군 사단,2개 지상군 연대,그리고 1개 모터사이클 연대,기계화 여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함.⑵김일성은 이 조선인 병력을 50년 4월까지 중국영토에 두고 싶다고 했음.북조선에 이들을 배치하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함』 ○회담의제 “통일”로 중국군내 조선인 부대를 놓고 북한·중국간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그런데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전에 모택동에게도 면담신청을 해놓았다.김일성이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4월 10일 이그나티예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대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크렘린으로 보냈다.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에 관한 건이었다.『북경주재 이주연 북한대사가 3월말 모택동을 만났음.이주연대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이 면담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문제가 협의됐음.모택동은 회담개최를 받아들이고 회담시기를 금년 4월말이나 5월초로 제의했음.모택동은 회담의제를 조선통일로 못박았음.그리고 김일성이 통일에 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비밀방문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공식방문으로 하라고 말했음.이주연대사는 회담시기나 회담의제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현재 병치료중이라는 핑계로 구체적인 답을 피했음.(편집자 주: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중국지도자들에게도 모스크바방문을 비밀로 했음)』 김일성이 모스크바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간 뒤인 5월 3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김과의 회담사실을 통보했다.『조선동지들이 최근 우리를 방문했음.회담결과에 대해서는 조만간 알려주겠음』북경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보낸 짤막한 전문통지문이었다.그리고 나서 10일이나 지난 5월 14일 스탈린은 회담결과를 모택동에게 통보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남침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스탈린과 모택동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그의 능란한 처세술을 읽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그는 두 사람간의 코뮤니케이션을 가능한한 차단시켜 때로는 서로 경쟁시키고 때로는 협력시키며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나간 것이다.반대로 스탈린­모택동 두사람의 이러한관계는 전쟁의 이니셔티브를 김일성으로부터 뺏어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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