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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세 소년 설교자 신드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13세 소년 설교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이스라엘 일간 예루살렘포스트 인터넷판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주인공은 하마스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40여개 모스크(이슬람사원)를 중심으로 순회 설교를 하고 있는 이슬람재단학교 8학년생 아므자드 아부 시이도. 신도들은 이슬람에서 종교지도자 이름 앞에 붙이는 ‘셰이크’란 단어를 써서 그를 ‘젊은 셰이크’ 또는 ‘하마스 원더보이’로 부르고 있다. 금요 예배 때면 수천명의 신도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시이도가 처음 모스크에서 설교를 한 것은 불과 한두달 전. 우연한 기회에 설교 기회를 얻은 그는 친구가 만든 원고를 외운 뒤 모스크로 가서 설교를 했고, 신도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처녀 설교’에 감명을 받은 하마스 고위 간부가 하마스가 이끄는 다른 모스크들에서도 설교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순회 설교에 나섰고 가자지구에서 가장 인기있는 설교자 가운데 한명이 됐다. 하마스가 이달 초 실시된 가자지구 지방선거에서 최대정파 파타의 ‘텃밭’ 3곳까지 차지하며 압승하는 등 지지세를 확대한 이유 중 하나가 시이도의 유명세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학교 선배들이 설교 연습하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자신만의 설교 방법을 익혔다는 시이도는 주로 이슬람 선지자 무하마드(마호메트)의 죽음과 그의 삶을 주제로 설교를 한다. 가자지구 청소년에게 코란을 가르치는 팔레스타인자선협회는 시이도의 성공에 고무돼 최근 청소년 대상 설교 기법 교육을 전담하는 부서까지 만들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한국계 러 요절가수 빅토르 최 동상건립

    |모스크바 연합|1980년대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한국계 러시아 록가수 빅토르 최의 동상이 모스크바 국립대학 부근에 세워진다. 모스크바 시의회 기념물위원회는 17일(현지시간) 빅토르 최 사망 15주기인 올해 모스크바 남부 베르나드스키 도로와 우니베르시체트 거리 교차 지점에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빅토르 최는 록그룹 ‘키노’를 결성,1980년대 러시아 청년들의 자유와 반항 정신을 대변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1990년 8월15일 29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이번 동상 건립은 ‘전러시아 청년연합’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동상은 빅토르 최가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미 완성된 상태다.
  • 우즈베크 내무 “민간인108명 사망”

    |모스크바 연합|자키르 알마토프 우즈베키스탄 내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안디잔 사태로 민간인 108명을 포함해 모두 170명이 숨졌다고 밝혔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전했다. 알마토프 장관은 이날 타슈켄트 주재 외교관과 언론인들로 구성된 외국인 조사단이 안디잔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민간인 108명과 정부군 32명이 반군 공격을 받아 숨졌다고 말했다. 그외 사망자 30명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민간인 사망자가 100명이 넘었다는 알마토프의 발언은 전날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무고한 시민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밝힌 것과 상충되는 것이어서 논란을 낳고 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당시 사망자 주위엔 모두 총이 놓여 있었다면서 반군들만 사망했다고 말했다. 알마토프 장관은 또 이번 사태를 주동한 인물이 안디잔주(州) 농무부에서 일했던 카불 파르피예프라고 밝혔지만 진압 작전을 통해 그를 체포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파르피예프에 대한 자세한 신원이나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한편 키르기스스탄 당국은 18일 우즈베크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탈출하기 위해 몰려드는 우즈베크 도시 카라수와 연결된 자국 국경을 개방했다. 한편 국경도시 코라수프를 장악하고 있는 반군 지도자 바크티요르 라키모프(42)는 이날 자신과 지지자들은 이슬람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며 정부가 진압을 시도하면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 [화제의 CEO]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前회장

    [화제의 CEO]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前회장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를 호령하던 신흥 재벌에서 통치자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 만으로 하루 아침에 영어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42)에 대한 러시아 법원의 선고 공판이 또다시 18일로 연기됐다. 모스크바의 메슈찬스키구(區) 법원 재판부는 지난 16일부터 시작한 판결문 낭독을 17일에도 매듭짓지 못해 선고를 하루 미루기로 했다고 이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이 호도르코프스키에 대해 제기한 탈세 등 7가지 항목 모두 유죄로 인정된 것으로 보여 10년형의 중형이 선고될 것으로 예상된다. 1963년 모스크바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호도르코프스키는 모스크바 멘델레예프 화공대를 졸업한 뒤 86년 컴퓨터, 브랜디 등을 수입·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3년 뒤 훗날 유코스의 지주회사로 거듭나는 메나텝(Menatep)은행을 세웠다. 메나텝은 91년 옛 소련이 붕괴할 무렵까지 각종 정부 기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민간은행이다. 90년대 국영기업 민영화에 참여해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한 그는 95년 신흥 청년 사업가들과 함께 선거자금을 지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재선을 도우면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국영기업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대출해 투자하는 거래로 유코스 지분 78%를 3억 900만달러에 인수했다. 2000년 ‘정치적 자유는 제한하지만 경제 지원은 확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 출범 이후 유코스는 시가 350억달러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의 재산도 150억달러로 불어났다. 그의 몰락은 정치적인 측면이 많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야당측에 정치자금 수백만달러를 제공한 것이 결정적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대선과 총선을 2개월가량 앞둔 2003년 10월 탈세 등 7개 혐의로 러시아연방보안국에 체포, 구속됐다. 유코스는 세금 체납을 이유로 275억달러를 추징당했고 지난해 11월 핵심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트 가스를 국영 가스회사에 매각하면서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송유관을 소유하고 민간 석유회사들을 좌지우지해온 러시아 정부에 맞서 시베리아와 중국·러시아를 잇는 송유관 건설에 나선 것도 푸틴의 미움을 산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지적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6자’틀내 北美 양자회담

    ‘6자’틀내 北美 양자회담

    이봉조 통일부 차관이 16일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온다면 ‘중대한 제안’을 하겠다고 밝혀 그 내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중대한 제안은 북한을 6자회담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안임은 틀림없는 듯하다. 제안의 내용에 따라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낼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차관은 “중대한 제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관련국과 협의해서 전달할 것”이라고만 밝혔다.6자회담에서 다룰 의제의 내용일 수도 있고 형식일 수도 있다. 이 차관은 “3차 6자회담에서 우리측이 여러가지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관련국들과 협의해서 과거 1·2차와 달리 3차에서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뤄냈던 전례에 따라 그런 노력을 해나가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3차 6자회담에서는 ‘동결 대 보상’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번에는 제안 내용이 북한의 체제보장, 경제지원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최근 6자회담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 등의 움직임을 보면 의제의 내용 이외에 ‘새로운 형식’이 북한에 대한 ‘당근’으로 제안될 가능성도 높다.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북·미 양자회담은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발언들을 되돌아보면 양자회담에 집중된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북한이 앞으로 극단적인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바란다면서 “북핵문제는 6자회담의 틀 내에서 꼭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양자회담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고 부연해 설명했다. 중국의 류젠차오 외교부 대변인도 최근 “북핵문제의 주요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의견을 교환한다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6자회담의 틀 밖이든 안이든 북한과 미국 양자의 대화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 강연에서 북한과 미국이 먼저 합의한뒤 6자회담에서 합의내용을 실천하는 방안을 새로운 북핵 해법으로 제시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중대한 제안에 대해 “(주요국과)조율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말했다. 미국이 지난주 뉴욕에서 북한과 접촉을 가진 것도 북·미 양자회담 가능성의 시그널을 보낸 것일 수 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노 대통령과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새로운 변화’를 언급했다. 박정현 구혜영기자 jhpark@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⑤호찌민의 꿈과 ‘도이머이’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⑤호찌민의 꿈과 ‘도이머이’

    베트남은 이미 외국인들 생각처럼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베트남정부가 발표한 2005년도 예상 경제성장률은 8.5%다. 지난 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넘어선 다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베트남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금년 1월부터 4월까지 베트남은 96억 5000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2%가 늘어났다.1·4분기 동안 베트남에 유입된 외국자본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늘어난 15억 6000만달러였다. 경제발전에 따른 내수시장의 성장도 두드러진다.1·4분기 베트남의 자동차 내수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가 늘어난 6930대에 달했다. 관광산업 성장도 폭발적이다. 특히 미국 관광객의 숫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3%가 늘어난 9만 5000명을 기록했다. 총 대신 달러를 들고 돌아온 미국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베트남은 새로운 전선, 수출전선에 무역전사를 대거 투입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베트남은 미국을 2004년도 최대 수출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베트남은 단순 투자대상국에서 해외 투자국가로 변하고 있다.2억 3000만달러를 해외에 투자한 베트남은 97만달러를 들여 한국에도 농기계부품을 생산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2005년 베트남 국가운용계획의 핵심은 8.5%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 국영기업의 구조조정에 맞추어져 있다. 국제기준에 맞지 않는 법령을 개정하고 내·외국기업에 통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법을 마련 중이다. 2002년 1월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발효시킨 베트남은 2006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유럽연합(EU)에 이어 일본도 베트남의 WTO 가입에 지지의사를 표했다. 베트남의 변화는 경제분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4월30일, 항미 승전 30주년을 맞아 베트남 국영TV는 특집 방송의 일환으로 사이공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 화면을 내보냈다. 즈엉반민은 2001년 미국에서 죽은 사람이니 그렇겠거니 했던 사람들도 이어지는 인터뷰화면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응우옌까우끼가 국영TV에 등장한 것이다. 응우옌까우끼는 사이공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이미 시장경제가 일상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매우 완고했던 베트남이다.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를 엄연한 국가체제로 삼고 있는 베트남이 종전 30주년을 맞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변화를 예상케 하는 것이다. 지난 뗏(설)에는 20여만명의 재외동포들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응우옌까우끼와 열렬한 반공주의 작곡가였던 팜주이 등이 있었는데 이들 다수는 프랑스와 미국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가 호찌민사상이 아닌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베트남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이공 당 서기장을 지낸 쩐박당은 전쟁 후에 베트남이 비교적 적은 후유증을 앓으며 민족통합을 이루고 도이머이를 통해 경제재건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호찌민사상에 있다고 단언했다.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호찌민만이 베트남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호찌민의 사상만이 베트남을 다 담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은 말입니다, 절대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정신과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1975년 개방한 호찌민영묘를 참배한 사람이 지난해 연말 집계로 4000만명에 달한다.1990년 개관한 호찌민박물관을 관람한 관광객의 숫자는 1500만명이다. 지난 한 해 동안 250만명을 불러들인 베트남 관광사업의 성공은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자연이나 기반시설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비록 부자나라는 아니지만 자부심을 가진 나라다. 베트남은 그들의 자부심을 문화적 매혹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해왔다. 문화는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무엇보다 인간의 수준과 품격에 관계하는 것이다. 호찌민은 여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부자는 아니지만 자부심이 있는 나라인 이유를 호찌민박물관 우옌티딘 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호찌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호찌민 자체가 문화니까요. 호찌민은 단순히 정치, 사상적인 차원이 아닌 우리의 문화적 차원에서 존재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할 때 생각하게 됩니다.‘호 아저씨였다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말이죠.” 호찌민은 죽었지만 그가 추구했던 삶의 양식은 오늘날 베트남 문화의 일부로 수용되어 있다. 베트남인들의 가치판단 과정에서 호찌민의 생애는 어떤 형태로든 관계한다고 우옌티딘 관장은 덧붙였다. “호찌민이 만약 단순히 정치·사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했다면 이미 잊혀졌을지 모릅니다. 그의 삶은 어떤 정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바쳐진 것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품격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 사상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것도 독창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호찌민의 그런 면모는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부터 나타난다.1924년 6월23일, 제5차 국제공산당대회 제8차회의에서 호찌민은 식민지문제에 무관심한 서구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구사회는 공산주의 운동의 요람이기도 했지만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이기도 했다. “동지들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최대한의 기회를 이용해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반드시 동지들을 각성하게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호찌민의 맹렬한 비판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세계 공산주의 진영의 막강한 지도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한 무명 아시아청년이 보여준 당돌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차이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들은 식민지 문제에 아무런 견해도 없었기에 더욱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 총서기장이었던 엠 토레는 훗날, 그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문제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호찌민이었다고 고백했다. 1924년 모스크바에서 독일혁명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호찌민은 한층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인도차이나 사회는 서구와 다르다. 현재 인도차이나의 계급투쟁은 서구처럼 격렬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뛰어난 이론으로 자기 학설을 세운 사람이지만 그 학설은 일정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란 어떤 역사인가. 유럽의 역사다. 유럽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유럽이 인류 전체는 아니다.” 이런 호찌민의 견해는 그가 창당한 베트남공산당에 반영됐다. 그가 직접 기초한 강령과 노선은 레닌 이후 코민테른을 장악한 스탈린이나 그의 정적 트로츠키 어느 쪽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호찌민은 당시 식민지 베트남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자와 반민족세력을 제외한 모든 계급 및 정파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찌민의 대통합노선은 반공주의자들의 폄하처럼 전술적 차원의 ‘술수’가 아닌 확고한 원칙이었다. 호찌민은 많은 혁명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통합의 가치와 기능에 대해 깊이 주목했다.1941년,3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호찌민이 까오방성의 팍보에서 창건한 반외세 통일전선조직인 베트민. 통합을 지향하는 확고한 원칙 없이 술수적인 차원에서 베트민을 운영하였다면 단일한 항불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단결 단결 대단결, 호찌민은 그 슬로건의 상징이고 증거였다. 단결을 지향하는 호찌민의 지도력은 베트남 통일의 정신적 토대였다. 그러나 소망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운명이 일치한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단결할 수 있다. 너의 행복이 나의 불행일 때,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일 때 단결은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울 때 네가 웃고, 내가 웃을 때 네가 울어야 한다면 절대 뭉칠 수 없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한국보다 50년 전에 호찌민이 벌인 금 모으기 운동이다. 1945년, 호찌민은 독립국가를 출범시켰지만 베트남 경제는 완전히 피폐해 있었다.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을 차지한 일본의 착취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통킹델타와 메콩델타라는 세계의 곡창지대가 있었지만 여기서 나온 쌀과 곡식은 모조리 수탈당했다.1944년에서 1945년까지,1년 남짓한 일본의 통치기간 동안 굶어죽은 베트남인들은 무려 200만명이었다. 그러니 독립을 얻었어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인민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끔찍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인민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굶주리며 죽어갔다. 이 참담한 때에 독립정부를 만든 호찌민은 민생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두 가지 운동을 궁리해냈다. 금식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이다. 일주일에 하루 굶기 운동을 통해 아사자 구제에 나섰고, 호찌민은 그 운동을 제일 앞에서 실천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금 주간’을 선포하고,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모으자는 호찌민의 호소에 인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굶주리고 있는 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이 운동에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참여했다. 대를 물려온 반지를 내놓은 농촌의 가난한 부인네, 끼니를 굶으면서도 처분하지 않았던 결혼 패물을 내놓은 중년의 노동자 부부…. 금 기부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놀랄 만한 기부자들이 나타났다. 참파왕조의 공주 출신인 우옌티템은 황금관과 황금목걸이를 모두 내놓았다. 포쩐짱 왕의 마지막 후예인 우옌티템 공주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으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하노이의 한 부자는 수백 돈이 넘는 금덩어리를 기꺼이 내놓았다. 이때 걷힌 금은 이제 막 출범한 독립정부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재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항불·항미항전의 마지막 시기까지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금 모으기 운동의 최대성과는 50년 뒤 한국에서처럼 모아진 금붙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자는 전국민적 결의와 연대감의 확보,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의 회복이었다. 베트남인민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조국이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가 있는 공동체라고 느낄 수 있었다. 호찌민의 지도력은 이러한 통합의 힘을 바탕으로 한 결단과 선택을 통해 발휘되었다.8월혁명 당시 남부베트남혁명위원장을 지낸 쩐반이유는 호찌민의 가장 탁월한 능력을 인내와 결단력으로 꼽았다. “너무 큰 나라와 붙어지내며 세계 최강대국과 싸워야 했던 베트남이 가장 잘하는 일은 우리가 언제 강해져야 하는지, 또 언제 싸워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호찌민은 우리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르쳤고, 우리가 싸워야 할 때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심어준 지도자지요.” 변화하는 베트남이 어떻게 호찌민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남부베트남 혁명의 최고지도자였던 쩐반이유는 이 한마디로 대답했다. “내 안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하라(以不變 應萬變).” 이 말은 호찌민이 협상을 위해 프랑스로 떠날 때 후인툭캉에게 주석직 대행을 맡기면서 한 말이었다. 여러 문제점이 뒤따르고 있지만 베트남은 지금 만변하는 세계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호찌민이 지니고 있었던 ‘내 안의 불변’하는 정신을 지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주이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北, 중·러 지원에 ‘초강수’ 모험

    북한이 기어이 ‘벼랑끝’으로 한 걸음 더 내딛고 말았다.11일 북한의 핵 연료봉 추출 선언은, 생존을 담보로 한 극단적인 방법을 불사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모험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최근 모스크바에서 이뤄진 6자회담 참가국 정상들의 연쇄회동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맹방이 미국의 대북 강경조치 시도에 제동을 걸자 상황을 더 끌 수 있다고 판단, 강수를 치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몸값 올리기 전략인가, 핵 보유 수순인가 상당수 전문가들은 일단 북한의 이같은 ‘도발’이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몸값 올리기 차원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2003년 2월 참여정부 출범 직후에도 영변 원자로 재가동 카드를 던져 상황을 악화시켰고 그 이후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국무원 부총리의 극비방북을 통한 삼지연 담판으로 북핵 위기를 북·중·미 3자회담이라는 협상국면으로 바꾼 바 있다. 하지만 정말로 ‘핵보유국 수순 밟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아 6자회담보다 더 나은 협상조건을 만들기 위해 핵무장 수순을 진행시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성균관대 김태효 교수는 “폐연료봉 추출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라면서 “아예 핵 보유국의 위상으로 협상에 임하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지난 7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 인터넷판을 통해 “핵무기 보유국의 지위에 걸맞은 조선의 행동계획은 이미 책정돼 있다.”며 은근히 핵실험 강행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만일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지하핵실험까지 진행한다면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다고 미국도 호락호락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미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달 18일 “북한이 원자로를 가동하든 않든, 연료봉을 재처리하든 않든, 북한이 처한 난국의 해법을 북한측에 안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의 성향은 1994년 북핵 위기때의 클린턴 행정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지적도 엄연하다. ●파국이냐, 극적 해결이냐 이번 북한의 연료봉 추출 선언으로 상황은 점점 막바지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6자회담 재개 등 평화적 해결 국면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위기가 깊어진 이후 타협이 뒤따른 전례에 비춰, 극적 해결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북한에 결정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은 더욱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야 하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향후 절차는 어떻게 북한의 이날 발표가 즉각적인 핵보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연료봉 냉각 등 결정적 수순을 거쳐야 된다. 이 기간은 통상 9개월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북한의 이날 발표가 사실이라면, 향후 절차가 훨씬 빨라질 수도 있다. 당초 북한은 지난달 초 평양을 찾은 셀리그 해리슨 미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에게 인출작업 기간에 대해 “이달(4월)부터 연료봉 제거작업을 시작,3개월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해 인출작업이 6월은 돼야 끝날 것으로 예측됐는데, 훨씬 당겨졌기 때문이다. 서울대 원자력연구센터 강정민 박사는 “북한이 모방한 영국의 칼더홀 원자로는 연료봉 인출 속도가 하루 120개(0.75t) 정도지만 북한의 기술을 감안할 때 그보다 더딜 것으로 봤다.”면서 “하지만 오히려 하루에 120개가 넘는 양을 뽑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북한이 작업을 끝내지 못하고도 최근 정세를 감안해 이미 완료를 한 것처럼 발표했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④ 호찌민 떠나던 날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④ 호찌민 떠나던 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패한 프랑스가 물러간 다음 베트남 북쪽에서는 총성이 멈췄다. 호찌민은 즉시 ‘먹고 사는’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모든 정책과 사업은 현장에서 결정됐다. 호찌민 노선이 대중의 감정과 현실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언제나 대중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찌민의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까오방 사람들은 호찌민이 주석이 된 다음 다시 찾아왔을 때를 잊지 못한다. 까오방의 당 서기장은 성대한 음식으로 호찌민을 대접했다. 그러나 호찌민은 화를 내며 “당신이 다 먹으라.”고 자기 앞의 음식 접시를 모두 당서기장에게 밀어주었다. 그리고 물었다.“지금 까오방성의 인민들이 어떻게 먹고 있느냐.” 밖에서는 기근으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 뒤 호찌민은 지방시찰 때마다 도시락을 싸갔다. 예정된 코스를 불쑥불쑥 벗어나서 방문에 대비한 어떤 준비도 헛수고로 만들어버렸다. 가뭄이 든 남딘성 이옌마을을 예고없이 찾은 호찌민은 갈라터진 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몇 바가지의 물이라도 대려고 바닥이 보이는 개울을 바가지로 긁고 있는 아낙네를 비키게 한 호찌민은 직접 물을 펐다. 그러나 갈라진 논의 틈새조차 채울 수 없었다. 이 때 호찌민은 관개수로사업을 구상했다. 하노이 북부 3개성에 걸친 ‘박흥하이 관개수로사업’이 시작된 것. 삽과 들것, 수레에 의존한 이 건설운동은 디엔비엔푸에 이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이 공사과정에서 수동식 컨베이어벨트를 비롯한 수많은 운반도구들이 발명됐다. 호찌민은 전쟁에서 발휘되었던 베트남인의 창의성과 애국심을 생산운동으로 이끌어냈다. 하노이 북부 3개성을 가뭄에서 해방시킨 이 공사과정이 담긴 기록영화 ‘박흥하이에 물이 들다’에 1959년 모스크바영화제는 다큐부문 최고상을 안겼다. 이 영화의 감독 부이딘학은 현장을 방문한 호찌민을 네 차례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한 번은 물이 들어오는 것을 찍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 돌아보니까 호 아저씨가 오고 있었어요. 카메라를 돌려서 아저씨를 찍으려는데 갑자기 난리가 났어요. 일하던 사람들이 아저씨를 알아보고 마구 몰려드는 거예요. 곡괭이, 삽을 든 채로 말입니다. 당황한 경호원들이 놀라서, 연장을 들고 달려들면 아저씨는 어떻게 하느냐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어요. 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달려오는데, 가까이 올수록 더 빨라지는 거예요.” 하노이의 한국식당 춘하추동에서 만난 부이딘학은 마치 어제 일처럼 말했다. “이때 호 아저씨가 재빨리 옆에 있던 나무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손을 흔들면서 이렇게 소리쳤어요. 호 아저씨 여기 있다. 다들 봤지. 봤으면 이제 자기 자리로 가서 일하자.” 그러나 호찌민의 인민생활 향상정책은 10년이 지난 1964년이 되면서 중대한 도전에 처했다. 미국은 이미 국민들조차 등을 돌린 사이공정권의 응오딘지엠을 제거한 뒤 직접 베트남에 개입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미국과의 전면전이 불러올 ‘재앙’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던 호찌민은 이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1964년 8월, 통킹만을 항해하던 미국항모가 공격당했다는 이유로 미국은 북폭을 감행했다. 이 때 국제정세도 좋지 않았다.‘수정주의’ 논쟁으로 등을 돌린 소련과 중국은 베트남에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호찌민은 국제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호소하며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 당시 반소파였던 서기장 레주언을 비롯한 당의 실세 그룹은 의견이 달랐다. 호찌민의 오른팔 보응우옌잡은 대중적 지지와 호찌민의 적극적인 변론으로 무사했지만 그외 측근들은 레주언 그룹에 밀렸다. 그의 뜻과 달랐음에도 ‘항미전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인민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은 여전히 호찌민의 몫이었다. 호찌민이 처음 유서를 쓴 것은 1965년 5월19일,75회 생일 때였다. 자신의 건강이 미국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견뎌낼 수 없다고 예감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 민족 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 많은 역경과 희생이 따른다 해도 우리가 승리할 것임은 분명하다.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나는 우리의 동지들, 전사들과 함께 남쪽에서 북쪽까지 순회하며 노인들과 젊은 청년들을 만나려던 참이었다. 국민을 대표해서 우리의 우호국을 방문하여 미국과의 전쟁에서 우리를 지지해준 그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할 작정이었다.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두보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올해 나는 일흔다섯이다. 나는 그 얼마 되지 않는 ‘자고로 드문’ 사람에 속한다. 마음은 아직도 거뜬하지만 육체는 갈수록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 그야말로 자연의 섭리다. 그러니 그 누가 혁명을 위해 더 오래 살라고 내게 말할 수 있겠는가.” 호찌민은 죽음을 예감한 뒤 남부지방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미국과 전쟁이 한창이던 남부에 꼭 가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남부전선 방문은 제지당했다. 그러자 1968년 레주언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레주언 동지! 동지들은 내 건강을 생각해서 나를 멀리 보내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바꾸어 바닷바람을 마시고 투쟁하는 인민들 속에서 생활한다면 오히려 내 건강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입니다.10일간 준비해 6일 동안 해로를 통해 남부에 닿은 다음 육로로 3일을 가면 남부전선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언제쯤 출발할 수 있는지 내게 알려주기 바랍니다.”- B(Bac/아저씨)로부터- 호찌민이 레주언에게 애걸에 가까운 편지를 쓰면서까지 남부에 가려 했던 이유는 남부 민중들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자 남부혁명가들은 호찌민이 있는 북을 선택했다. 사이공 정권은 남부에 남은 이들의 가족을 줄줄이 처형했다. 미국과의 전쟁이 터진 뒤 북부 청년들은 그 유명한 ‘호찌민 루트’를 타고 남부전선으로 내달렸다. 수많은 북부청년들은 호찌민루트에서, 남부전선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 모두가 ‘호찌민’이라는 이름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때에 일흔이 넘은 나이를 이유로 후방에서 자연사한다는 것은 호찌민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레주언은 끝내 호찌민의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9년 호찌민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79회 생일을 며칠 앞둔 5월10일, 호찌민은 해마다 손을 보아온 유서를 다시 꺼내 마지막으로 가필했다. 그 내용은 세금감면을 비롯한, 전쟁이 끝났을 때 농민·노동자들에게 주어져야 할 민생대책들이었다. 전선에서 싸운 전사들에 대한 예우도 매우 구체적으로 썼다. 전쟁은 막바지에 다다랐지만 자신이 그 때까지 살아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호찌민의 유서 최종본에는 20년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을 견디고 있는 인민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무거운 책임감이 담겨 있다. 베트남 인민들은 수십년 동안 프랑스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와 미국 폭격기의 굉음, 이웃과 친척 중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살아야 했다. 인민들은 단 하루도 따뜻한 밥을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항전을 이끌어온 호찌민은, 미안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항전은 참으로 위대했으나 위대함을 감당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베트남 인민들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혹한 것이었다. 그 희생은 베트남 인민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희생해서 싸우자고 호소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찌민이었다. 그해 8월12일 호찌민의 건강은 더 악화됐다. 당과 정부, 군대의 핵심부는 이미 호찌민의 죽음에 대비하고 있었다. 남부의 전선사령부가 파견한 대표단은 호찌민루트를 타고 하노이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8월18일 호찌민은 비서 부끼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주석관저,10평짜리 목조주택의 계단을 올라갔다. 마지막 걸음이었다.8월24일, 호찌민의 방은 병실로 변했다. 당의 정치위원들과 군사지도자들이 병문안을 왔다.5평도 채 안 되는 호찌민의 방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장 무더운 8월이었고 에어컨은 없었다. 비서 부끼는 호찌민의 머리맡에 앉아 계속 부채질을 했다. 호찌민은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먹고 마시려 했다. 간호사 오안이 시중드는 것도 사양했다. 대신 다른 것을 부탁했다. “노래나 하나 불러줘.” 호찌민이라고 외롭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단 한 점의 혈육도 없었다. 라디오 소리만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호찌민은 라디오를 계속 켜두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은 다가오고, 호찌민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호찌민이 겨우 잠깐 잠이 든 것을 보고 비서 부끼는 라디오를 끈 다음 그도 잠깐 눈을 붙일 요량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힘겹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끼 어이.(부끼야)” 놀라 몸을 돌렸을 때 호찌민은 라디오를 다시 켜라고 손짓했다. “아저씨, 왜요? 오랜만에 눈을 붙이시기에 쉬시라고 껐는데요.” 호찌민은 손을 저었다. “그래도 사람소리가 들려야지…….” 9월2일 오전 9시45분, 호찌민은 숨을 거뒀다.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비서 부끼와 보응우옌잡 장군이 그 곁에서 울고 있었다. 호찌민은 이미 임종과정을 찍지 말고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창밖에서 몰래 호찌민의 최후를 찍고 있었던 군대영화사 팜꾸옥빈의 촬영팀은 호찌민이 눈을 감은 뒤에야 방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소령으로 예편한 팜꾸옥빈은 호찌민이 자리에 누운 순간부터 임종하는 때까지 전 과정을 비밀리에 촬영했다는 사실을 집으로 찾아간 필자에게 밝혔다. 호찌민의 시신은 영구 보존처리되었고 그 장면도 모두 기록됐다. 장례절차까지 담은 이 필름은 최고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편집하지 않은 원본 그대로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 공개된 부분도 있지만 원본 가운데 20분 분량도 채 안 되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베트남의 당과 정부는 호찌민 서거일도 9월2일에서 하루 늦춘 3일이라 발표하고, 이 사실을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왔다. 팜꾸옥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9월2일은 1945년 호 아저씨가 베트남독립정부를 수립한 날이었어요. 호 아저씨가 돌아가신 것만도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인데 거기다 날짜가 9월2일이라고 하면 9월2일에 호 아저씨가 세운 나라도 뒤따라 망한다는 적의 심리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호찌민이 눈을 감은 뒤 베트남에는 사흘 밤낮으로 비가 내렸다. 베트남 전역에서 울음소리와 눈물이 이어졌다. 남부 정권의 수도 사이공에서도 모든 상가가 철시했다. 장례기간 동안 베트남 전역에서 절도사건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남부의 대통령 우옌반티우조차 정중한 조의를 표해야 했다. 그토록 호찌민을 헐뜯었던 미국 언론들도 애도를 표시했다. 뉴욕타임스는 호찌민을 표지인물로 세우고 장문의 조사를 내보냈다.‘지금 살아있는 민족주의자 가운데 그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사람은 없다.’고. 그런 호찌민이 죽어서 남긴 것은 10평 남짓한 목조주택 한 채와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다가 무엇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주이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盧 “北 극단 행동 말아야”

    |모스크바·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박정현특파원|러시아를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9일 “북한이 앞으로 극단적인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언급은 북한의 핵실험설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노 대통령은 이날 모스크바 시내 메트로폴 호텔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같이 밝히고 “(북핵문제는) 6자회담 틀 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이 전했다. 노 대통령은 아난 사무총장으로부터 ‘6자 회담틀 밖의 북·미 양자회담 개최’ 의견에 대한 질문을 받고 “6자회담의 틀이 만들어져 있고, 명분이 있기 때문에 북핵문제 해결에 양자회담보다 6자회담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난 사무총장은 “6자회담 틀 안에서 (북·미) 양자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며 “중요한 것은 양측 모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를 갖고, 모두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10일 타슈켄트에 도착해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설명했으며, 카리모프 대통령은 전적인 지지를 표시했다. jhpark@seoul.co.kr
  • ‘6자틀내 해결’ 5자 재확인

    |모스크바 박정현특파원|제2차 세계대전 전승 6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열린 북핵 정상외교의 성과는 외형적으로는 6자회담의 틀 내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의견을 모았다는 점이다. 아울러 6자회담에 하루빨리 복귀하도록 결단을 촉구하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개별 교차회담을 갖고 북핵문제의 상황 악화를 막았다. 사실상 북한을 제외한 5자간의 교감이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불투명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데 우려를 표시하면서, 지체없이 6자회담에 복귀하라고 북한에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양국 협력강화 의지를 다졌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6자회담의 틀을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데 합의했다. 푸틴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회담도 마찬가지다. 북한 핵실험설과 유엔안보리 회부 가능성을 감안한 허심탄회한 대화도 오갔을 것으로 관측된다. 5자간의 의견 접근이 언제까지 유효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북핵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6자회담 당사국 정상간 회담은 본격적인 북핵협상을 앞둔 서곡에 불과하다. 북한이 회담에 복귀할 시간 여유를 준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은 북한 복귀를 유도하는 중국의 지렛대 역할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다음달 한·미, 한·일 정상회담이 중대 고비가 될 전망이다. 그때쯤이면 경고음은 더욱 높아지면서, 대북제재 방안도 보다 구체적으로 거론될 것 같다. jhpark@seoul.co.kr
  • 北 6자회담 복귀하면 美 “양자대화 가능”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북한의 핵 실험설로 한반도 주변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북한에 대해 강경 태세를 견지해오던 미국 정부가 돌연 ‘유연한’ 입장을 보여 주목된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수행해 모스크바를 방문 중인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9일(현지시간)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주권국가인 것은 명백하며,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 또 톰 케이시 미 국무부 공보국장도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이 주권국가임을 인정하며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그 안에서 양자 대화를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라이스 장관과 케이시 국장의 발언은 전날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발언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다. 북 외무성 대변인은 8일 “우리는 6자회담과 별도의 조(북)·미 회담을 요구한 것이 없다.”면서 “있다면 미국이 우리를 주권국가로 인정하며 6자회담 안에서 쌍무회담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보도들이 전해지고 있기에 그것이 사실인가를 미국측과 직접 만나 확인해보고 최종결심을 하겠다고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마주보고 달리던 기차처럼 위기를 고조시켜 오던 미국과 북한이 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분위기 조성을 위해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dawn@seoul.co.kr
  • 뻔뻔한 日 과거사 인식

    |도쿄 이춘규특파원|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본은 2차대전에 대해 충분히 반성했다.”고 말한 데 이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후지오카 노부카스 부회장이 10일 “‘난징(南京)사건’에서 증언에 의해 확인된 일본군의 민간인 살해는 단 1건뿐”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후지오카 부회장은 이날 일본 주재 외국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 일각에서는 1937년 발생한 난징사건 때 중국인 30만명 이상이 살해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같은 대량 죽음은 없었으며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새역모는 역사왜곡으로 비판받은 후소샤 교과서를 집필한 단체다. 그는 후소샤 역사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표현이 사라진 것이 역사의 비극을 숨기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는 질문에 “일본 교과서에는 97년 종군위안부 표현이 등장했지만 한국 교과서에는 그 이후 나왔다.”며 “그러면 한국은 그 이전까지 사실을 숨긴 것이냐.”고 반문했다. 후지오카 부회장은 후소샤 교과서의 집필 의도에 대해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찾아내 그에 입각한 기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가마다 고유의 관점이 있으며 출판사마다 다른 견해가 있는 만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 중인 고이즈미 총리는 9일 현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전후 일본이 걸어온 모습을 보면 전쟁을 충분히 반성하고 평화국가로서 노력해온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를 설명하면서 “야스쿠니문제에 국한할 것이 아니며 일면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전제,“세계 각국이 일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는 이날 도쿄 시내에서 가진 연설을 통해 중국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단을 요구한 데 대해 “중국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본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면서 “총리가 올해에도, 내년에도 참배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베 간사장 대리는 이날 도쿄(東京) 시내에서 열린 자당 소속 중의원 의원의 후원파티에 참석, 연설한 자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편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밤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일본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으며 푸틴 대통령은 “일본 방문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일 시기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영토 분쟁 중인 북방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ㆍ러시아명 쿠릴열도)에 대한 협의 내용에 대해서도 고이즈미 총리는 “밝힐 단계가 아니다.”라고만 말했다. taein@seoul.co.kr
  • 訪北 망설이는 후진타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연초부터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던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설이 급격하게 냉각되는 분위기다. 한때 후 주석의 ‘5월 방북’이 유력하게 거론되면서 지난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승 60주년 기념행사 참석 직후 귀국길에 평양을 전격 방문할 것이란 그럴듯한 시나리오까지 등장했었다. 하지만 후 주석은 10일 오전 행사를 마치고 곧바로 귀국했다. 따라서 후 주석의 상반기 방북 가능성은 사살상 ‘물 건너 간’ 셈이다. 중국 외교부도 후 주석의 ‘연내 방북’이란 스케줄 이외에 ‘현재로선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후 주석의 행보가 이처럼 뜨거운 시선을 모으는 것은 후 주석의 방북 자체가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북핵 문제의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후 주석의 방북이 현재로선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베이징의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한때 후 주석의 방북과 북핵 문제 해결을 연결, 중국의 위상 제고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면서 “그러나 국제사회의 기대치가 높은 시점에서 후 주석이 빈손으로 돌아올 경우 중국이 적잖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후 주석의 방북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초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의 ‘극비 방중’ 이후부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밀명을 받고 특파된 강 부부장은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과 6자회담의 성격 변화 등을 놓고 중국 지도부와 깊숙한 논의를 시도했지만 중국의 부정적 반응에 직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 당국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문제가 가닥이 잡히고 동북아 정세가 안정국면으로 접어드는 올 하반기쯤 후 주석의 ‘방북 카드’를 꺼내들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중국 외교부가 “후 주석의 연내 방북은 변하지 않는 상수”라고 강조한 만큼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후로 남북한 동시 방문이 추진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oilman@seoul.co.kr
  • 盧대통령-아난총장 유엔개혁 ‘설전’

    |모스크바 박정현특파원|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면담하면서 유엔개혁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아난 사무총장은 먼저 “유엔은 1945년 창설 이래 수많은 회원국이 생겼고 지정학적으로 현실이 많이 변했다.”면서 “안보리를 보다 민주적으로 대표성 있게 개편해야 정당성이 더 증대될 것이 아니냐는 생각들을 많은 회원국들이 갖고 있다.”고 이사국 증설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日 이사국진출 반대 뜻 분명히 해 이에 노 대통령은 “지금 새롭게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는 국가들의 경우 세계 평화를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렀고, 어떤 도덕적 정당성을 가졌는지에 대해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역의 대표성과 결격사유가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발언은 사실상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노 대통령 발언 가운데 ‘일본’이란 단어는 한마디도 없었다.”고 소개했다. ●아난 “개도국 의견 반영” 日 지지 시사 아난 사무총장은 “평화유지군이나 재정적 기여도 등도 중요하다.”면서 “유엔 체제내 안보리 확대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 특히 개도국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고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쪽에 무게를 뒀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변화된 세계에 맞는 새로운 지도체제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면서 “하지만 기여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는 것이 전부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아난 사무총장은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하면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는 데 좋고 중요하다.”고 말해 설전을 일단락지었다. jhpark@seoul.co.kr
  • [씨줄날줄] 인공하늘/육철수 논설위원

    지금이 제아무리 첨단 과학시대라 해도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거역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아주 옛날에는 고약한 날씨 탓에 애꿎게 희생된 왕들도 꽤 많았던 모양이다. 고대 이집트의 농경사회에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부족장이나 왕을 죽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었다고 한다. 하늘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자가 자연현상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조선시대의 왕들도 가뭄·홍수 때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근신하거나 기우제 등을 지냈는데, 연산군만은 “자연재해는 자연재해일 뿐 통치행위와는 무관하다.”며 신하들의 근신요청을 용감하게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날씨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활 대부분을 지배한다. 경제적으로는 ‘날씨경영’이란 말도 생겨났을 정도다. 우리 경제는 국내총생산(GDP)의 50% 이상이 날씨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영향받고, 미국·일본에서는 GDP의 70∼80%가 날씨의 영향권에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세계적 대행사에서도 날씨는 가장 신경쓰이는 요소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엊그제 모스크바에서 열린 2차 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에서 붉은광장 군사퍼레이드 직전 러시아 공군이 장대비를 뿌린 구름을 걷어내고 화창한 하늘로 바꿔놓은 것은 압권이었다. 하기야 내로라하는 세계 60여개국의 정상들과 5000여명의 국제 귀빈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어느 하늘이라고 감히(?) 비를 내려서야 되겠는가마는…. 러시아 공군은 이날 새벽부터 비행기 11대를 투입해 모스크바 외곽 50㎞ 지점에서부터 150㎞까지 10개 구간으로 나눠 3000∼8000m 상공의 ‘구름제거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기술 또한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46년 미국 시카고에서 첫선을 보인 인공강우(人工降雨)는 이미 보편화됐지만 구름을 소산(消散)시켜 쾌청한 하늘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구름소산도 인공강우처럼 요오드화은(AgI)이나 드라이아이스를 구름에 뿌리는 점은 같지만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구름의 온도와 양, 높이와 깊이, 얼음덩어리의 수, 여기에다 바람의 속도 등을 정밀하게 측정해서 드라이아이스 등으로 구름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자연 바람에 의해 구름이 흩어지도록 하는 원리라고 한다. 모스크바의 푸른 ‘인공하늘’은 자연현상에 도전한 과학기술의 작은 승리이자 각국 정상들에겐 최고의 예우였을 것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사설] 北核, 국회라도 함께 고민하자

    북핵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최근 한·미·일·중·러 5개국 정상들은 모스크바 연쇄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을 통한 북핵해결에 뜻을 같이했다. 또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을 주권국가라고 재확인하고 6자회담 틀 속에서 북·미 양자회담도 할 수 있다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6월위기설이나 북한의 핵실험설 등 비관적인 전망도 상존하고 있다. 북핵의 위험성은 한번 충돌이 빚어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 파괴력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6자회담만 강조했지, 어떻게 북한을 설득하고 주변국들과 협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전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나 북한의 태도가 변할 때마다 뒤따라 가는 형국이다. 그동안 강조했던 중재자 역할도 잘해내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모든 상황에 대비한 우리 정부의 북핵 프로세스도 모호하다. 정부가 이러다 보니 국민들도 북핵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도대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북한의 핵실험설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현재까지 북한이 핵실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징후를 포착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핵실험설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당연히 우리 정부의 말을 믿어야 하겠지만 불안함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야당이 국회에서 북핵청문회를 하자고 주장한 것도 정부대책이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 여야가 한목소리를 냈다. 열린우리당은 국회 관련상임위를 공동으로 열어 북핵문제를 논의하자고 했고, 한나라당도 북핵관련 여·야·정 정책협의회를 제안했다. 북핵은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정부가 북핵대책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고 국회도 힘을 보태야 한다.
  • “후진타오, 北核에 새 변화”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8일 모스크바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요즘 한반도 핵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고 밝혔다고 인민일보가 9일 보도했다. 후 주석은 노 대통령과 동북아 정세 및 한반도 핵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중국은 줄곧 대화를 통해 한반도 핵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관련국들의 공동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해왔다.”고 강조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인민일보는 그러나 후 주석이 언급한 ‘한반도 핵문제의 새로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oilman@seoul.co.kr
  • 韓·러 정상 “북핵 평화해결” 합의

    韓·러 정상 “북핵 평화해결” 합의

    |모스크바 박정현특파원|“큰 진전은 없다. 밝은 전망이라기보다는 어려운 상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 노무현 대통령과 회동에서 전한 얘기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북핵문제에 대해 많은 시간이 할애됐으며, 여기서 주고받은 발언 내용을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어려운 상황’이란 진단이 푸틴 대통령의 판단인지 부시 대통령의 발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두 정상의 공감대로 봐야할 것같다. 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통역만 참석한 가운데 10분 동안 가진 짧은 회동에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양국간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이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6자회담 재개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양국이 관계국과 계속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부시 대통령과 조우를 했다. 크렘린 궁에서 푸틴 대통령이 주최한 오찬이 시작되기 전후에 부시 대통령과 가벼운 인사를 교환했으며, 두 정상은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6자회담을 놓고 직접적인 대화를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부시 대통령과 전화 통화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개별 회담을 가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대화 내용을 전달받음으로써 간접적인 한·미간 북핵관련 회담을 한 셈이다. 후 주석은 통화 내용을 전하면서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은 이어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개별 면담을 갖고 북핵문제와 유엔개혁 등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10일 모스크바를 출발해 우즈베키스탄에 도착, 카리모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jhpark@seoul.co.kr
  • “21세기엔 전쟁 참화 없어야”

    각국 정상 53명이 한꺼번에 참석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러시아 전승 60주년 기념행사가 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전날에는 영국과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같은 행사가 열려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패전국인 독일도 정부 인사들이 앞다퉈 과오를 반성하고 희생자들의 용서를 빌었다. ●대(大)러시아 위상 부각 이날 오전 9시(한국시간 오후 2시) 시작된 기념행사는 한때 미국과 패권을 다퉜던 옛 소련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세계적인 지도자 반열에 올리기 위해 마련된 이벤트라는 점이 철저히 부각됐다. 각국 정상 내외는 러시아 알파벳 순서에 따라 푸틴 대통령 부부가 서 있는 곳까지 50m 가까운 거리를 걸어가 악수를 나눠야 했다. 이어 군인 7000여명, 참전용사 3000여명 등 1만여명이 참가한 군사 퍼레이드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낮 12시부터는 크렘린 내 6000석 규모의 대궁전에서 각국 정상 등 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 가량 오찬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은 직접 참전한 그리스·알바니아·크로아티아 대통령 등 6명에게 기념 메달을 수여했다. 푸틴 대통령은 기념연설에서 “정의와 안보를 기반으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문화 속에서 어떠한 전쟁도 다시 일어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푸틴, 미국식 민주주의 비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8일 푸틴 대통령과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반테러 공조와 여러 안보 이슈들에 대한 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회담 내용을 브리핑하면서 두 정상이 이란, 북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상황에 대해 논의했으며 핵확산 방지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은 푸틴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당신(이)’이 아니라 ‘너(틔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과시하는 등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담이 진행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로이터통신은 두 정상이 민주주의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푸틴 대통령은 9일 미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이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이는 미국식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절차”라고 지적했다. 또 “북핵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북한을 교착상태로 몰고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후 주석이 오는 7월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당초 예상과 달리 북핵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만모한 싱 인도 총리 등 10여개국 정상들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베를린에선 친·반 나치 시위 동베를린에선 국가민주당(NPD) 소속 2600여명의 친나치 시위대와 6000명의 반나치 시위대가 같은 장소에서 시위를 벌였다. 친나치측은 ‘독일이 해방됐다는 60년간의 거짓말-죄의식 숭배를 그만둘 때’라는 플래카드를 든 채 행진했다. 반면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은 하원 연설에서 독일은 나치 지도자들에 관한 두려운 기억을 간직해 후세에 경종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임병선기자 외신종합 bsnim@seoul.co.kr
  • 北에 ‘제재 가능성’ 경고

    |모스크바 박정현특파원|8일 노무현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는 ‘북핵문제의 평화적·외교적 해결’이라는 외교적 수사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깊은 우려’나 ‘지체없이 6자회담 복귀’라는 매우 직설적인 언급으로 채워졌다. 그만큼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상황이 긴장감과 위기감으로 팽배해 있다는 두 정상의 판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후 주석이 지적한 ‘불투명한 상황’은 북한 핵실험설이 퍼져나오고, 유엔 안보리 회부 목소리가 커지는 현상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북·미간 설전을 교환하면서 북·미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점도 감안한 것 같다. ●북핵 위기감 반영 직설법 사용 후 주석은 노 대통령과 회담을 갖기에 앞서 최근 부시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갖고 북한 핵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후 주석은 통화과정에서 체감한 북핵문제에 접근하는 미국의 입장을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두 정상이 안보리 등을 거론했는지에 대해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설명에 함축돼 있고, 구체적인 단어가 없어도 대화가 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 안보리 등을 거론하지 않고 ‘불투명한 상황’이란 표현으로 에둘러 설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핵문제의 평화적·외교적 해결보다는 제재 가능성이나 ‘억지력’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듯하다. 두 정상이 북한에 지체없는 6자회담을 촉구한 것은 이런 심각한 상황을 북한이 인식해야 한다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對北 설득작업도 병행할듯 하지만 노 대통령과 후 주석이 현재의 상황 타결을 위해 외교당국간 고위실무협의를 한층 강화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양국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도록 설득작업을 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관측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어 중국의 지렛대 역할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는 미지수다. 노 대통령과 후 주석의 회담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정상외교의 시작에 불과하다. 노 대통령은 9일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데 이어 6월엔 조지 부시 미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아울러 9일에는 6자회담 당사국인 미·러, 러·중, 러·일 정상회담도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8일은 6자회담이 중단된 지 꼭 1년이 되는 오는 6월27일까지 50일을 앞둔 시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북핵문제 해결을 둘러싼 회담 당사국 정상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것 같다. jh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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