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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프 스트림 G450, ‘도쿄·홍콩’ 연결속도 최고 기록

    걸프 스트림 G450, ‘도쿄·홍콩’ 연결속도 최고 기록

    최근 개발된 최신형 걸프스트림 G450 비지니스 제트기가 도쿄와 홍콩 두 도시간 연결속도 최고 기록을 세웠다.G450은 초대형 객실을 갖추고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것으로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현지시각)에서 지난 7일 오전 10시 50분에 이륙했다. 이 항공기는 1,694 해상 마일을 항해 평균 속도 마하 0.85로 3시간 38분을 날아 홍콩 국제공항(현지시각)에 오후 1시 48분에 도착한 것.승무원들에 따르면 첫 300마일은 100노트가 넘는 난기류 때문에 낮은 속도로 비행했다고 전했다.G450 조종은 수석 국제 조종사 Sean Sheldon과 Jaime Bahamon가 맡았다. 항공기 안에는 승무원 Joanne Dye 외에도 7명의 승객이 탑승해 있었다.미국항공연합(NAA)는 이번 비행을 미국 최고 기록으로 남기며 스위스에 있는 국제항공연맹 (FAI)에 세계 기록으로 등록해줄 것을 요청했다.2개의 롤스로이스 Tay Mk 611-8C 엔진을 장착한 G450은 마하 0.88가 넘는 속도로 4,350 해상 마일을 논스톱으로 비행할 수 있다. 4,350 해상 마일은 베이징에서 뉴델리나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다. G450은 이 항공기의 등급에서 가장 최신형 플라이트덱인 ‘PlaneView(R)’를 가지고 있고 ‘Gulfstream Enhanced Vision System (EVS)’을 기본 제품으로 사용한다.남미와중동지역(SAFE) 판매팀 부회장 Roger Sperry는 “G450은 12명의 승객을 위해 고안됐지만 최대 16명까지 탑승할 수 있다.”며 “이 항공기는 비즈니스 여행을 위해 공중사무실과 레저를 즐기기 위한 관광객들에게 휴식처가 될 수 있는 편안한 선실을 제공한다.”고 말했다.한편 G450은 지난 5월 7일 서비스를 시작, 그로부터 10일 후 시카고에서 런던행으로 평균 속도 마하 0.85, 3550 해상마일을 비행해 런던에 7시 19분에 도착, 첫 번째 최고 기록을 낸 바 있다.서울신문NTN 이빈 기자 judi@seoulntn.com
  • 피겨퀸 전설은 계속되나

    ‘피겨퀸’이 다음 시즌에도 ‘전설 만들기’에 나설까. 김연아(20·고려대)가 19일 돌아온다. 5월 말 캐나다 토론토로 떠났던 김연아는 23~25일 고양시 킨텍스 특설링크에서 열리는 아이스쇼(삼성 애니콜 하우젠 2010 올댓스케이트 서머)에 참가하기 위해 50여일 만에 한국 땅을 밟는다. 새 시즌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만큼, 김연아의 다음 시즌 행보도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2009년 세계선수권 챔피언에 올랐고, 올해는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하며 ‘꿈꿔왔던 모든 것을 다 이룬’ 만큼 힘겨운 선수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낄 만도 하다. 당연히 고민도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이상은 고민할 시간이 없다. 뭔가 결단을 내릴 시점이다. 10월 말 일본 나고야에서 2010~11시즌 그랑프리 1차대회(22~24일·NHK트로피)가 시작되기 때문. 김연아는 새 시즌 그랑프리 3차대회(11월5~7일·중국 베이징)와 5차대회(11월19~21일·러시아 모스크바)에 초청받은 상태다. 김연아는 아직 새 시즌 프로그램을 확정하지 않고, 갈라 프로그램으로만 훈련을 해왔다. 시즌이 끝난 뒤 쉬면서 살짝 붙었던 살들도 깔끔하게 빠졌고, 최근엔 점프 감각도 되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연아가 고독하고 냉엄한 승부의 세계에서 ‘한 번 더’를 외칠까. 그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된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Next 10년 신성장동력] 롯데백화점-해외진출 박차… ‘글로벌 톱10’으로

    [Next 10년 신성장동력] 롯데백화점-해외진출 박차… ‘글로벌 톱10’으로

    롯데백화점은 2020년 글로벌 유통기업이 되기 위해 과감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점포수 확장과 해외시장 확대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해외 선진기업과 견줘도 손색 없는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롯데백화점은 ‘2018 글로벌톱 10’을 모토로, 신규 출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8년까지 국내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를 구축하고 성공적인 글로벌화도 일궈 매출 목표 22조원을 달성하겠다는 각오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2월 부산 광복점을 오픈했고 오는 8월에는 청량리역사점, 광복점 신관, 아웃렛 대구 율하점 개점도 앞두고 있다. 내년에는 대구 봉무 LSC(라이프스타일센터), 2012년에는 김포스카이파크, 제2롯데월드와 수원점을, 2013년에는 인천 송도점 등을 오픈해 10여개의 점포를 추가로 확보한다는 생각이다. 해외에서는 중국 텐진점, 베트남 하노이점, 중국 선양점 오픈이 확정돼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 러시아 2호점 진출을 검토 중이다. 중국에서는 베이징, 톈진, 선양,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지역마다 1~2개씩 점포를 오픈하거나 거점지역과 가까운 주변 도시를 묶어 진출하는 등 집중화 전략을 펼친다는 계획이다. 중국에만 2018년까지 총 20개 백화점을 열기로 했다. 인도시장 진출을 위한 노력도 다각화하고 있다. 이미 2006년 11월 인도에 주재원을 파견하고, 2008년 1월에는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현재 시장조사 단계를 넘어 뉴델리, 뭄바이 등 인구 1000만명 이상 도시를 중심으로 부지 물색을 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통기업에서 더 나아가 세계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초우량 백화점’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이를 위해 국내 신규 사업을 강화하고 해외사업을 확대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사회공헌활동의 실천으로 존경받는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러시아 4세 소년, 韓주술사에게 엑소시즘 받다 사망

    러시아 4세 소년, 韓주술사에게 엑소시즘 받다 사망

    러시아의 4세 소년이 한국인 주술사에게서 악령을 쫓는 엑소시즘을 받다가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고 러시아 영자지인 모스크바 타임즈가 전했다. 15일 보도에 따르면 사망한 소년은 폐렴을 앓고 있었지만 아이의 부모는 악령이 씌었다고 믿고 한국인에게 엑소시즘을 의뢰했다. 이 소년은 밀폐된 방에서 주술사와 단 둘이 의식을 행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주술사는 의식을 위해 아이에게 최면을 걸었으며, 숨을 거두는 장면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또 시신에서 어떤 폭행의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이를 조사중인 경찰은 “의식 도중 폐렴이 악화돼 호흡곤란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사망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사 위원회 측은 “이번 사망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과실치사로 판정돼 최대 3년 형을 선고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엑소시즘을 행한 한국인 주술사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공개되지 않았다. 사진=사망한 러시아 소년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日 축구스타’ 혼다, AC밀란서 20억엔 러브콜

    일본 축구 스타 혼다 케이스케(24)가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13일 이탈리아의 가제타지 온라인판은 현재 러시아 CSKA모스크바 소속인 혼다 케이스케가 이탈리아 세리에 명문 AC밀란으로부터 약 20억엔의 고액 제의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7월 초 밀란은 CSKA측에 1000만 유을 제시했지만 CSKA측은 최소 2000만 유로를 주장해 양쪽 간 협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13일 일본의 산케이신문 인터넷판은 혼다 케이스케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의 토트넘으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CSKA 측은 이 교섭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과거 스페인 리그 바로셀로나가 이적금 1300만 유로로 협상에 성공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혼다 케이스케는 2010 남아공 월드컵 카메룬전에서 결승골을 넣은데 이어 덴마크전에서는 무회전 프리킥의 주인공으로 일본에서는 현재 ‘제2의 나카타’로 불리는 축구스타.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美-러 냉전이후 첫 스파이 맞교환

    美-러 냉전이후 첫 스파이 맞교환

    미국과 러시아가 8일(현지시간) 각각 자국에 수감 중인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 최근 불거진 미국 내 러시아 스파이 사건을 11일 만에 속전속결로 매듭지었다. 과거 동서로 분단돼 있던 독일 베를린에서 스파이를 교환하는 대신 스파이들을 유죄 판결한 뒤 사면을 통해 해외로 추방한 형식을 빌렸다. 맞교환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졌다고 미국 법무부가 밝혔다. 양국 언론들은 미국 전세기와 러시아 정부 비행기가 9일 빈 국제공항의 활주로 외곽 구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스파이가 맞교환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비행기는 이날 오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미국 전세기는 영국에 착륙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종 행선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과 러시아는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 등 미국에서 활동하다 지난달 27일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 전원과 러시아에서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정보기관을 위해 암약한 혐의로 감옥에 있는 러시아인 4명을 각각 풀어 주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대규모 스파이 맞교환은 20여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 동서냉전이 종결된 이후 처음이다. 풀려나는 러시아인 4명은 핵잠수함 기술 등 군사기밀을 미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이고르 수티아긴 박사, 영국을 위한 첩보활동으로 13년 형을 받은 세르게이 스크리팔, 알렉산데르 자포로즈스키, 제나디 바실렌코 등이다. 4명 가운데 3명은 러시아 군인과 정보기관원이다. 미·러 양국은 신속한 합의 이행을 위해 폴리바게닝(유죄인정조건 형량 감경)과 대통령 사면 형식을 취했다. 실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이 맡았다. 미국 뉴욕 법원은 이날 ‘러시아 정보원으로 활동한 죄’로 기소된 스파이 10명이 스스로 혐의를 시인하자 체포된 이후 구금된 날짜만큼만 형을 선고한 뒤 즉각적인 추방 및 재입국 금지를 명령했다. 러시아 정부도 이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자국민 수감자 4명을 사면했다고 발표했다. 마크 토너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국가안보와 인도주의 차원에서 신속하고 포괄적인 해법을 찾기 위한 결정이 이뤄졌다.”면서 “러시아 스파이 10명을 장기 구금해서 얻을 수 있는 중차대한 국가안보상 이익이 없다.”고 밝혔다. 합의에 대해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 주요 현안들에서의 협력을 위해 성사시킨 정치적 거래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대(對) 러시아 관계 재설정, 핵무기 감축, 이란 핵프로그램 저지 등과 관련해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한 미국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때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는 러시아가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대러시아 외교에서 유약하다는 공화당 측 비난을 야기할 수 있고, 법적 안정성을 해쳐가며 나쁜 전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 미국에서 불법적으로 활동하는 외국 스파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관측도 없지 않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16강 프리뷰]네덜란드 - 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 전통 강호였다. 1934년 이탈리아·1962년 칠레월드컵 준우승, 유로76 우승,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금메달에 빛난다. 그런데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됐다. 체코는 이후로도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2위까지 오르는 등 강호의 면모를 이어갔지만 최근 1~2년 사이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다. 슬로바키아는 1998년 프랑스 대회부터 월드컵에 도전했다. 4수 끝에 남아공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앞서 유럽 예선에서 체코를 탈락시키고 당당하게 조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본선 조별리그에서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를 꺾는 대이변을 일으키며 16강에 진출했다. 28일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와 8강 티켓을 놓고 한판 승부를 펼친다. 네덜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다. 역대 전적에서 2승1무7패로 뒤졌다. 1986년 마지막으로 친선 경기를 가졌을 때도 0-1로 졌다. 체코와는 네 차례 만나 1승2무1패를 거뒀지만 슬로바키아와는 처음 격돌한다. 슬로바키아는 플레이메이커 마레크 함시크(나폴리)를 중심으로 탄탄한 조직력을 과시하는 팀이다. 이탈리아 격침의 일등공신 로베르트 비테크(앙카라 구주)도 돋보인다. 다만 조별리그 3경기에서 5골을 내주는 등 수비가 취약하다. 네덜란드는 로빈 판페르시(아스널)를 비롯해 클라스얀 휜텔라르(AC밀란), 디르크 카위트(리버풀), 베슬러이 스네이더르(인테르 밀란) 등 득점포가 고르다는 게 장점. 부상을 당했던 아르연 로번(바이에른 뮌헨)까지 돌아와 사기가 올랐다. 슬로바키아가 상승세를 이어갈까, 아니면 네덜란드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까. 28일 밤 11시에 결정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일본 “亞 자존심 우리몫”

    일본이 아쉽게 우루과이에 막혀 첫 원정 8강 진출에 실패한 ‘아시아의 맹주’ 한국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일본은 29일 오후 11시 프리토리아의 로프투스 페르스펠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남아공월드컵 16강전에서 남미의 강호 파라과이를 만나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파라과이는 남미 예선전에서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했던 살바도르 카바나스(팀내 최다 6득점)가 빠진데다 로케 산타 크루스(맨체스터 시티)의 공격력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무승부는 그렇다고 해도 뉴질랜드에 0-0 무승부에 그쳐 공격력의 부재를 드러냈다. 일본은 파라과이가 남미 특유의 현란한 개인기보다 힘과 높이를 앞세운 유럽식 축구를 하고 있다는 점에 유리할 수도 있겠다. 파라과이는 중원과 수비진이 강하지만 공격력이 떨어져 어려움이 예상된다. 일본은 조별리그에서 중원에서의 강력한 압박을 중심으로 탄탄한 수비력을 보이며, 공격에서도 ‘노란 머리의 이단아’ 혼다 게이스케(CSKA모스크바)를 앞세워 상당한 결실을 봤다. 다만 일본은 월드컵 본선에서 남미팀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에 0-1로 졌고, 2006년 독일월드컵 조별리그 F조에서는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만나 1-4로 대패했다. 파라과이와 6번 A매치를 치렀으나 상대 전적은 1승3무2패로 열세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한 주목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승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다. 북한군대가 남한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지 않다. 남한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과 합의한 38도선 파기를 소련이 주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공산군에 편입된 이른바 한인 3개사단을 1950년 1월까지 중국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보장받는다.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제기한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는 38선을 지킬 명분과 능력을 미국 스스로 없애고 있다.” “왜 우리가 38선에 얽매여야 하는가.”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 극동방위선 발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는 미국 불개입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김일성 동지의 불쾌감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남행동에 대해 “언제고 만나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이 전문이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문건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남침조건, 전쟁지원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미군개입의 철저한 평가, 중국의 남침승인, 소련의 직접 참전에 대한 기대 포기 및 철저한 전쟁준비이다. 5월 중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승인을 알리면서 마오의 승인을 얻는다. 미군 개입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는 데 합의한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북한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할 시 조약을 발효시킬 것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중국은 소련에 더욱 의존할 것이며 미국은 국력의 손실로 세계적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하게 이동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1950년 1월과 7월사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의 불참은 계획된 것이었다. 미국이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는 1950년 8월 체코 대통령 고트아트에 보낸 비밀전문에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부대 명칭을 중국인민 “지원군”으로 제시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한·만 국경지역에 한정하는 등 중·소동맹조약의 의무가 발동돼 미군과 군사분쟁에 들 수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만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르지만 개전시기를 소련 군사고문단이 주장한 7월서 6월로 앞당긴다. 개전계획도 옹진반도의 진격에 의한 단계적 확전에서 비밀누설 위험 때문에 전 전선 공세계획으로 바꾼다. 중국은 10월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간곡한 파병요청을 받으면서 참전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국원의 반대와 소련 공군력 지원이 불분명해지자 그 결정을 스탈린에 알리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협상사절로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을 재차 거부함을 알리면서 동북지역으로 조속히 퇴각할 것을 지시한다. 10월8일 미군이 북진하고 유엔이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설립을 결정하자 마오쩌둥은 서둘러 파병명령을 내리지만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에 장악될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만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중국군은 사실상 한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노력을 저지시켰다. 6·25전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산블록의 세력확장 기도에 적절한 억제책을 적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6·25는 억제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의 부재 때문에 발발했다. 휴전이후 한·미동맹과 주한 미군의 역할, 남북한 군사력 균형 및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억제의 취약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 억제를 넘어 한반도에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평화통일은 한국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44경기서 95골 펑펑… 빅리그별 득점 비교

    ‘프리메라리가, 프리미어리그 자존심 다툼’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48경기 가운데 25일 오전까지 열린 44경기에서 95골(자책골 2골 포함)이 터졌고, 77명이 골을 기록했다. 한국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작성한 아르헨티나의 곤살로 이과인(레알 마드리드)과 이탈리아 침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비테크(앙카라 구주)가 득점 공동 선두. 스페인의 다비드 비야(FC바르셀로나)와 한국의 이정수(가시마),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을 비롯한 12명이 2골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빅리그별로 터뜨린 골을 살펴보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경쟁이 치열하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각종 대회 성적을 종합해 2010~11시즌 빅5 리그를 프리미어리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스 르샹피오나 순으로 꼽고 있다. 이번 대회 60명의 선수를 출전시킨 프리메라리가가 16골로 자존심을 곧추세우고 있다. 선수당 0.27골. 특히 다득점자 14명 가운데 6명이 프리메라리가에서 나왔다. 이과인과 비야, 포를란, 브라질의 루이스 파비아누(세비야), 포르투갈의 티아구(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나이지리아의 칼루 우체(알메리아)다. 무려 118명의 선수를 출전시키며 세계 최고 리그의 면모를 과시한 프리미어리그는 15골을 넣으며 1위를 바짝 뒤쫓고 있으나 선수당 0.13골로 프리메라리가에 견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는 편. 세리에A가 9골로 3위, 분데스리가가 8골로 4위, 르샹피오나와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가 각각 6골로 공동 5위를 달리고 있다. 터키 슈페르리그가 5골로 분전하는 것이 눈에 띈다. 클럽별로 따져 봐도 프리메라리가의 강세다. 프리메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5골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와 세리에A의 인테르 밀란이 4골로 뒤를 잇고 있다. 프리메라리가의 바르셀로나, 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른 뮌헨, 에레디비지에의 아약스, 러시아 프리메르리그의 CSKA모스크바, 슈페르리그의 앙카라 구주가 3골 그룹을 형성한 상태다. 자국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이 터뜨린 골은 모두 28골. 역시 해외파의 활약이 대세였다.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기록한 5골 모두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책임졌다.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와 개최국 남아공도 자국리그 선수들이 각각 4골, 3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노랑머리 이단아’가 영웅으로

    ‘노랑머리 이단아’가 영웅으로

    “일본의 큰 승리다. 이겨서 기쁘지만 만족하지 않는다. 다음 경기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25일 남아공월드컵 E조 3차전 일본-덴마크전이 열린 루스텐버그 로열 바포켕 스타디움. 전반 17분 미드필더 혼다 게이스케(24·CSKA 모스크바)가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골문에서 25m 떨어진 페널티지역 외곽에서 가볍게 왼발 인사이드로 찬 공은 그대로 왼쪽 골망에 꽂혔다. ●英 “무회전 프리킥… 호날두 같다” 혼다는 일본을 한국과 함께 원정 첫 16강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 됐다. 지난 14일 카메룬과의 E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전반 39분 결승골을 터뜨리며 일본에 원정 첫 승을 안긴 뒤 두번째 쾌거였다. 유럽에 비해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공격진으로 E조 최약체로 꼽히던 일본은 유럽과 러시아 등 해외 경험이 풍부한 혼다의 맹활약으로 덴마크를 3-1로 제압, 16강행의 티켓을 거머쥐었다. 경기 뒤 혼다의 무회전 왼발 프리킥이 온통 화제였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혼다의 무회전 프리킥은 그가 2005년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에 입단할 당시부터 유명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도 혼다의 프리킥에 대해 “마치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다.”며 극찬했다. ●“불가능없다는 것 알리고 싶었다”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인 혼다는 좀처럼 겸손한 자세를 보이지 않아 ‘노랑머리 이단아’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실력으로 그에 대한 논란을 확실히 잠재웠다. 혼다는 덴마크전에서 승리한 뒤 “일본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韓·日 퓨전축구 포효… 월드컵 80년史 ‘변방의 반란’

    韓·日 퓨전축구 포효… 월드컵 80년史 ‘변방의 반란’

    월드컵 역사 80년 동안 변방에 있던 아시아 축구가 포효하고 있다. 지난 23일 한국이 나이지리아와 무승부로 B조 2위(1승1무1패, 승점 4)로 16강에 진출한 데 이어 25일 한국의 영원한 라이벌 일본이 덴마크를 3-1로 누르고 G조 2위(2승1패, 승점 6)로 16강 진출을 확정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제외하고 한국은 7번째, 일본은 3번째 도전 만에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수십년 동안 서로 자신이 ‘아시아의 맹주’라며 으르렁거렸던 한국과 일본. 하지만 두 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나설 때마다 ‘승점 자판기’였다. 늘 세계축구의 높은 벽을 느끼고 돌아오기 바빴다. 머나먼 이국땅의 낯선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 약속한 듯 얼어붙었고 끌려가는 경기만 했다. 유럽팀을 만날 때는 체격과 전술이 약해서 졌고, 아프리카나 남미팀을 만날 때는 개인기가 약해서 졌다고 변명하기 바빴다. 오로지 투지로 싸우는 모습까지 비슷했다. 그런데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 두 나라는 사이좋게 ‘닮은꼴’로 16강에 진출했다. 최강팀인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에는 졌지만, 유럽의 복병 그리스와 덴마크를 완벽히 제압했다. 또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을 상대로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세계는 깜짝 놀랐지만 지난 10년 동안 두 나라의 축구 발전을 돌아보면 결코 놀랄일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선수들은 유럽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혼다 게이스케(CSKA모스크바)로 대표되는 유럽파는 대표팀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또 K-리그와 J-리그가 뜨거워지면서 두 나라의 선수층도 두꺼워졌다. 자국리그와 유럽 빅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각자의 경험을 공유했다. 정신력과 조직력에 스피드와 기술이 더해진 것. 결국 두 팀의 플레이 스타일은 아시아에 유럽의 장점을 보탠 이른바 ‘퓨전축구’가 됐다. 체격과 기술 부족은 협력플레이로 채웠다. 상대팀 선수들은 중원에서 공을 잡는 순간 몰려드는 2~3명의 선수들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압박’이다. 1대1로는 상대하기 힘들지만 2명이 달려들면 드리블이 불가능하고, 3명이 달려들면 패스를 못한다. 협력플레이는 넓은 활동폭을 전제로 하고, 결국 체력소모가 심해진다. 그래서 두 팀은 선수들의 체력증강을 제1의 과제로 삼았다. 자신감도 동시에 올라갔다. 고유의 희생정신과 높은 충성심은 전술 수행능력을 높였다. 오로지 팀의 승리를 위해 비록 자신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다. 지고 나면 서로 싸우기 바쁜 유럽, 아프리카팀과 정반대다. 한국, 일본 두 팀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축구로 세계축구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남한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평가받을까.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논하는 장에서 반짝 등장하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언급이 미미하다. 존재감이 없다. 러시아나 중국, 심지어 미국 자료들도 한국전쟁의 주역으로 이승만을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남한 정부와 이승만은 단지 전쟁을 획책한 북한 김일성과의 비교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휴전협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승만의 극렬한 휴전반대가 주요 변수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오간 각종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이라는 이름 석 자의 등장 빈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특히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의 전격적인 석방이 준 충격파는 컸다. 휴전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은 물론 평양이 발칵 뒤집혔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아침에 면도하다 이 소식을 보고받고 얼굴을 벨 정도였다. ●‘미국의 남자’ 이승만 美와 애증 미국은 진퇴양난이었다. 미국 국내의 들끓는 휴전여론과 달리 중국과의 휴전협상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이승만의 휴전반대로 말미암아 담벼락 위를 걷는 아찔한 상태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간행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운 이승만 정부의 자세와 행동이 특별히 어려웠다. 이러한 것들은 회담에 역기능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협상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이 대통령의 조치는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적 입장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휴전협정도 반대했다.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오로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그는 ‘중국군의 완전한 철수, 북한 공산당 해체, 인민군 무장해제’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은 1951년 7월 “유엔군이 한국의 분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장해 달라.”라는 서한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트루먼은 이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협조를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다.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합참보고서는 1952년 초 뉴욕 출신의 저명한 천주교 인사인 스펠만이 한국을 방문, 무초 미 대사와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이 함께한 자리에서 이승만이 “미국의 모든 천주교인이 한국에 휴전이 없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정보를 싣기도 했다. 미국입장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무리한 요구였다. 미국이 한국의 지도자로 선택한 ‘가장 미국적인 한국인’인 이승만은 그를 키워준 미국을 거역하고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지목한 것처럼 이승만도 미국에 의해 선택되고 키워졌다. 이 시기 이승만을 묘사한 미국 측 자료는 온통 노회, 변덕, 아집, 독선 같은 단어로 도배돼 있었다. 전쟁발발 이전 이승만을 접촉한 한국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야비하고, 부패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악평했다. 이승만을 바라보는 미국의 우려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남자’였다. 1905년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선발돼 백악관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해 인연을 맺었다.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중단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랐지만, 그때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으려고 작업 중이었다.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재량권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고 나서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훗날 대통령이 된 윌슨의 제자가 됐다. 윌슨은 이승만을 ‘미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구세주’라고 부추겼다. 이승만은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 국무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이승만과 미국은 애증의 관계였다. 미국 지도부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기독교인인 이승만이 미국식 종교와 정치 기조를 따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마음속에는 미국에 대한 배신과 위선, 불신의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이승만 ‘북진통일’ 정치적 구호 이승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북진통일’은 남한주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았지만 득보다 실이 컸다. 김일성의 남한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구실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스탈린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와 군수물자로 완전무장한 북한 인민군과 비교하면 남한의 군사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발발 당시 한국군은 자신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상태였다. 전쟁 열흘 전인 1950년 6월15일 미 국방부에 보고된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한국군은 가까스로 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장비와 무기 대부분은 쓸모가 없었고, 방어능력도 기껏 보름 정도’라고 기술돼 있다. 실제 인민군이 보유한 소련제 T34전차의 위력 앞에 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구형 바주카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준비한 김일성의 남침에 비해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종결을 향해 달려갔다. 미국 공화당이 1952년 7월 아이젠하워를 대통령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대세는 군사적 종결이 아닌 정치적 종결, 즉 휴전 쪽으로 기울었다. 대통령 후보자 아이젠하워는 같은 해 10월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명성을 걸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명예롭게 종결짓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은 한국전쟁을 끝내는 일에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그는 12월2일 극비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미 행정부 수뇌부는 남한의 정치적 위기는 전적으로 이승만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 같은 위기가 휴전협상뿐만 아니라 38도 상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 실제 이승만은 1952년 국회 간선을 통한 재선이 어렵게 보이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을 꾀했다. 임시수도인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한국군 전투부대를 철수시켜 계엄군으로 사용하려 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나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군대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전쟁을 끝내고 싶은 미국에 이승만은 골칫거리였다. 1953년 미국과 중국의 협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부와의 사이는 또 다른 고비를 향해 뒤틀려 갔다. 이승만은 4월5일 “판문점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관계없이 우리의 목표는 똑같다. 우리의 변함없는 목표는 한국을 남으로부터 압록강까지 통일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유엔군사령부가 중국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킬 것이며 단독으로 싸울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장을 보냈다. ●아이젠하워 한때 李 제거 계획 워싱턴은 이승만을 휴전협상의 훼방꾼이자 위협세력으로 간주했다. 특유의 허세라고 판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조치로까지 몰고 갈 것으로 예측했다. 달래기에 나섰지만 이승만은 클라크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 모든 경제원조를 철수시킬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승만은 6월6일 ‘선(先) 한미방어조약 체결, 후(後) 유엔군과 공산군의 상호철군’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반쪽 휴전이나 평화보다는 싸움을 택한다.”라는 예의 벼랑 끝 외교전을 펼쳤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 대통령은 송환 불원 한국인 포로를 경고 없이 석방할 수 있다.”는 예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워싱턴에 보냈다. 포로경비부대 대부분이 한국군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유엔군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클라크 사령관의 예언대로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 미국 수뇌부는 당시 한국에 임시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극비의 군사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19일 자 미국 국가안보회의 비망록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위험을 없애는 가장 빠르고 유일한 길은 쿠데타”라면서 “이는 확실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군사자문 기구인 합참은 1952년부터 쿠데타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합참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6월27일 벤플리트 장군에게 이 계획을 통보했다. 한국육군과 참모총장은 유엔군사령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밀해제된 미국 합참보고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을 어떤 구실을 붙여 서울로 초대한다.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주요 지지자들을 체포하고, 주요시설을 방호하며 한국육참총장을 통하여 기존 계엄령을 장악한다. 이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종결토록 요구한다. 만일 거부하면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한 채 연금하고, 요망되는 포고령은 협조적인 것으로 예상하는 국무총리가 발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李 재선 이후 美와 화해모드 다행히 워싱턴의 친위 쿠데타계획은 불발됐다. 현실론을 내세운 참모들의 설득으로 강력한 경고수준에서 그쳤다. 한국 국회도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을 승인했다. 계엄령은 해제됐고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화해모드로 전환됐다. 미국은 손을 들었다. 미국은 휴전동의를 얻고, 이승만은 그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보호우산을 제공받는 선에서 양국의 갈등은 마무리됐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의 통일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계속 추구한다. 휴전협정 수락 직후에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한다. 전후 경제원조를 계속한다.”라는 세 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이승만은 극단적인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허물도 컸지만,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주춧돌을 놓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전쟁의 산물인 한·미동맹은 단순한 양자동맹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지역동맹”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를 저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동맹이라는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기자 joo@seoul.co.kr
  • 日혼다, ‘프리킥’ 이어 ‘얼짱아내’로 유명세

    日혼다, ‘프리킥’ 이어 ‘얼짱아내’로 유명세

    2010 남아공월드컵 일본 대표팀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혼다 케이스케(CSKA 모스크바)의 얼짱 아내가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혼다 케이스케는 카메룬전에서 결승골을 넣은데 이어 덴마크전에서는 무회전 프리킥의 주인공으로 일본에서는 현재 ‘제2의 나카타’로 불리는 축구스타. 혼다의 인기에 그의 얼짱 부인에까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혼다의 아내는 혼다가 네덜란드 펜로에서 현재 소속팀인 러시아 CSKA 모스크바로 이적할 당시 찍은 네덜란드 방송국의 특집 프로그램 ‘안녕 혼다’ 에서 처음 공개됐다.영상 속 혼다의 아내는 긴 생머리에 수수한 차림으로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일본 팬들은 “혼다의 아내가 너무 깜찍하다.”, “다른 축구스타 부인들과는 달리 단아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며 환호하고 있다.보통 모델이나 유명인 등과 결혼하는 여느 축구스타와 달리 혼다의 아내는 보육원에서 일하는 일반 교사로 일본에서도 베일이 가려진 ‘스타의 아내’ 중 한 명. 이들은 지난 2008년 7월에 웨딩마치를 울렸다.한편 일본은 덴마크를 꺾고 한국과 함께 원정 월드컵 사상 첫 16강에 진출했다.사진 = ‘안녕 혼다’ 동영상 캡처서울신문NTN 김민경 인턴기자 cong@seoulntn.com
  • 날개 꺾인 ‘천리마’의 꿈

    날개 꺾인 ‘천리마’의 꿈

    44년 전의 데자뷔였다. 더 심한 악몽이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의 8강 신화를 잠재웠던 포르투갈이 이번에도 북한의 발목을 잡았다. 포르투갈은 21일 케이프타운의 그린포인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G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북한을 7-0으로 제압했다. 1승1무(승점 4)에 골득실(+7)도 넉넉해진 포르투갈은 ‘죽음의 G조’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진 반면 북한은 2패(승점 0)로 16강행이 좌절됐다. 북한은 1차전에서 패(1-2)했지만,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FIFA랭킹 1위)을 상대로 만만찮은 경기력을 뽐냈다. 종료 직전 지윤남(4·25체육단)의 벼락 같은 슈팅은 북한을 ‘승점자판기’로 보는 시선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언뜻 투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수비도 발군이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전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전반까진 잘 풀렸다. 브라질전에서 ‘벌떼수비’로 재미를 본 북한은, 이날은 공격지향적으로 나섰다. 최종 수비라인은 좀 더 높은 곳까지 올라왔고, 허리는 두꺼웠다. 세밀한 패스워크와 감각적인 스루패스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3위인 포르투갈에 뒤지지 않았다. 공 점유율도 포르투갈 53%, 북한 47%일 정도로 대등했다. 포르투갈은 전반 7분 히카로두 카르발류(첼시)의 헤딩슛이 골대를 맞히며 기지개를 켰다. 이에 질세라 북한도 홍영조(로스토프), 박남철(4·25체육단)의 슈팅으로 균형을 맞췄다. 차정혁(압록강 체육단)과 정대세(가와사키), 안영학(오미야)의 연속 슈팅으로 오히려 포르투갈을 압도했다. 그러나 전반 29분 하울 메이렐르스(FC포르투)의 선제골이 터졌다. 티아구(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각적인 패스에 북한 수비벽이 단숨에 무너진 것. 전반은 0-1로 그나마 ‘선방’했다. 그러나 후반이 문제였다. 전반에 힘을 너무 많이 뺀 북한 선수들은 후반 들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수전환이 안 됐고, 상대 공격수를 따라잡지 못했다. 오프사이드 트랩을 노렸던 수비라인은 오히려 ‘독’이 됐다. 후반 8분 시망(아틀레티코 마드리드), 3분 뒤엔 우구 알메이다(베르더 브레멘), 또 4분 뒤엔 티아구가 연속골을 넣었다. 후반 36분엔 교체로 들어간 리에드송(스포르팅 리스본)이 골맛을 봤고, 6분 뒤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가 이번 월드컵 첫 골을 사냥했다. 2분 뒤엔 티아구가 대미를 장식했다. 7-0. 이번 월드컵 최다골이었다. 44년 만에 본선 무대에 나온 북한은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절감했다. H조 칠레는 마크 곤살레스(CSKA모스크바)의 결승골로 스위스에 1-0 승리를 거뒀다. 2승(승점 6)으로 16강행이 유력해졌다. ‘무적함대’ 스페인을 잡았던 스위스는 전반 퇴장당한 발론 베라미(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결국 패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굿모닝 닥터] 암 치료, 상상의 힘을 더하라

    수준에 오른 골퍼들 말을 듣자면 스크린 골프라도 연습과 실전은 많이 다르다고 한다. 심리적 요인이 성적을 좌우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상당한 수준의 골퍼로부터 상상훈련을 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운동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상상하면서 시연하면 기능을 향상시키고 불안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즉, 가장 성공적인 운동 장면, 이기거나 우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함으로써 운동 중 자신감 부족이나 심리적 압박을 없애는 것이다. 실제로 잭 니클라우스는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요인에 대해 기술 10%, 정확한 위치 선정 40%, 나머지 50%는 공을 어떻게 칠 것인가를 상상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미국 근대5종 국가대표였던 마릴린 킹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1년 앞두고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머리와 척추를 크게 다쳐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자신의 경기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보았고, 자신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그 뒤, 그는 기적처럼 재기해 결국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는 인간 승리를 일궜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상상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 것이다.”고 조언했다. 월드컵 대표팀의 이동국 선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골을 넣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데,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많은 암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좌절과 불안감 속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암 완치 후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미국에서 폐암이 완치됐던 폭스 환자는 “의사가 ‘이제 다 나았습니다.’고 말하는 상상을 매일 했다. 그리고 암세포라는 벌레들을 방사선을 쪼여 죽이는 장면을 상상했다.”고 고백했다. 행복한 상상의 힘. 분명 암 치료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금기창 연세대 의대 방사선종양학과
  • [글로벌 시대] 글로벌 코리아/아르촘 산지예프 로시스카야 가제타 서울특파원

    [글로벌 시대] 글로벌 코리아/아르촘 산지예프 로시스카야 가제타 서울특파원

    몇 달 전 나는 흥미로운 광고 하나를 받아본 적이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글로벌 인턴십 프로그램’ 참가자를 공모한다는 광고였다. 한나라당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당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당원들의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외국인 대학생들을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한다는 것이 광고의 요지였다. 현재 세계화라는 말은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말을 신문과 TV에서 자주 접할 수 있으며, 거리에서도 ‘글로벌’이라는 말이 들어간 광고 현수막을 자주 볼 수 있다. 세계화의 물결은 한국의 정치와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음식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한 번이라도 한국에 와본 사람이면 쌀로 빚은 막걸리를 맛봤을 수 있을 것이다. 막걸리의 독특한 맛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 때문에, 다시 한국을 찾을 때면 한번 더 막걸리 잔을 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세계화는 막걸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막걸리에 대해 광고도 하고 다양한 기사도 쓰고 있으니, 조만간 막걸리를 찬양하는 노래도 나올 것이 분명하다. 오미자 막걸리 등 다양한 새로운 막걸리도 등장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이 막걸리를 해외로 수출하는 마케팅 전략을 펴고 있는 만큼, 우리가 조만간 초콜릿 막걸리나 오렌지 막걸리를 맛볼 수 있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막걸리가 콜라나 환타를 대체할 수 있을까. 외국인들이 햄버거, 핫도그와 더불어 막걸리를 마시게 될 가능성이 있을까. 그런 질문에는 곧 답변할 수 있다. 막걸리는 다른 한국음식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사의 일부분이지 대규모 수입을 얻기 위한 상업적 프로젝트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이다. 막걸리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막걸리를 모스크바, 뉴욕, 베이징 등지에서 마실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막걸리를 작고 허름하지만 안락한 주점에서 인심 좋은 주인 아주머니가 내주는 파전이나 고추튀김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화가 얼마나 지속될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상태가 도래할지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 여당 지도부는 국제사회 내에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 형성에 대해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다. 나는 지난 2월에 ‘Global Korea-2010’이라는 대규모 포럼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한국과 외국 전문가 수십명이 어떻게 하면 한국을 보다 더 세계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한 포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 포럼에 참석해 연설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국익에 부응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무에서 시작하여 조선업·자동차산업을 일궈낸 국가, 기타 여러 분야에서 세계 국가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노하우가 축적된 국가에도 과연 새로운 길이 필요할까. 이 대통령은 연설에서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데이비드 란데스의 말을 인용했다. 란데스 교수는 국민의 근검절약, 근면성실, 불굴의 의지, 인내력과 국가의 경제적 번영 간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입증한 학자이다. 물론 한국 국민은 그런 품성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인의 노동의 성과는 전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삼성’ ‘현대’ ‘LG’ 등의 기업은 바로 불굴의 의지와 근면을 통해 세계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존경을 받고 있다. 그 누가 광고를 하거나 그렇게 되도록 몰아가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기업들이 유명해진 것은 평범한 시민들의 성실한 노동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했을 대단한 성과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지난 150년간 많은 한국인들이 여러 나라로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일본으로, 어떤 사람은 중국이나 미국으로, 러시아로 보다 낳은 인생을 위해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곳에서 근면성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바로 그들의 그런 노력이 현재 글로벌 코리아의 가장 명백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무라이의 검 오렌지도 벨까

    사무라이의 검 오렌지도 벨까

    사무라이, 아시아 팀 2연승의 검 휘두르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45위 일본이 19일 남아공월드컵 E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4위)와 맞닥뜨린다. 각각 4강과 우승이 목표라고 큰소리치던 일본 오카다 다케시 감독과 네덜란드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감독이 만난다. 카메룬전에서 결승골을 낚아 일본에 월드컵 원정 첫 승을 선물한 혼다 게이스케(왼쪽·CSKA 모스크바)를 비롯해 엔도 야스히토(감바 오사카), 하세베 마코토(볼프스부르크), 마쓰이 다이스케(그르노블) 등으로 구성된 탄탄한 미드필더진이 일본의 강점이다. 일본은 정신력이 처진다는 평가가 많았으나, 카메룬전에서 이전과는 다른 투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덴마크와의 1차전에서 이겼지만 시원한 경기를 보여주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일본을 상대로 아쉬움을 털어버린다는 각오다. 네덜란드는 행운의 자책골이 나오기 전까지 덴마크의 견고한 수비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일본도 선수비 후역습으로 나올 가능성이 짙어 네덜란드 공격진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유럽 예선에서 8전 전승에 17골을 뽑아내며 단 2골만 내줬다. 공격과 수비가 모두 안정됐다는 이야기다. 네덜란드는 베슬러이 스네이더르(인테르 밀란)가 조율하고 로빈 판페르시(아스널), 디르크 카위트(오른쪽·리버풀)가 버티는 공격진이 언제나 위협적이다. 덴마크전에서는 측면 공략이 2% 부족했는데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하며 상대를 흔들어 놓는 아르연 로번(바이에른 뮌헨)이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일본으로서는 무척 힘든 경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그리스 16강 기사회생

    그리스 16강 기사회생

    직전 경기에서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대패를 당했기 때문에 그리스와 나이지리아의 눈빛은 더욱 격렬하게 빛났다. 1차전에서 각각 한국과 아르헨티나에 패했던 터라 16강 진출의 교두보를 쌓기 위해 승리가 절실한 두 팀이었다. ‘지중해 해적선’ 그리스가 힘차게 닻을 올렸다. 17일 블룸폰테인 프리스테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B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그리스(FIFA 랭킹 13위)가 디미트리오스 살핑기디스(파나티나이코스)와 바실리오스 토로시디스(올림피아코스)의 연속골에 힘입어 나이지리아(21위)에 2-1로 역전승했다. 그리스는 1승1패를 이루며 한국과 승점 3으로 동률을 이뤘지만, 다득점에서 밀려 조 3위를 달렸다. 2패를 당한 나이지리아는 벼랑 끝에 몰렸다. 역대 전적에서 1승1패로 팽팽하던 두 팀은 탐색전으로 출발했다. 먼저 웃은 팀은 나이지리아였다. 전반 16분 그리스 진영 오른쪽에서 피터 오뎀윙기에(로코모티프 모스크바)가 그리스 수비수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로스(제노바)의 반칙으로 프리킥을 얻었다. 키커로 나선 칼루 우체(알메리아)가 오른발로 감아올린 공은 문전 앞에서 크게 튀기더니 그대로 그리스 골망을 흔들었다. 그리스 수문장 알렉산드로스 조르바스(파나티나이코스)가 문전쇄도하던 오뎀윙기에의 헤딩을 예상하고 역방향으로 몸을 튼 것이 화근이었다. 돌발 변수가 생긴 것은 17분 뒤. 나이지리아의 미드필더 사니 카이타(알라니야)가 그리스의 토로시디스와 공을 다투다 상대에게 발길질을 하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 주심은 즉시 레드카드를 뽑아들었다. 숫적 우위를 점한 그리스는 파상 공세 끝에 전반 44분 균형을 맞췄다. 살핑기디스의 오른발 강슛이 상대 수비수 루크먼 하루나(AS모나코)의 몸에 맞고 나이지리아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 것. 하지만 승부의 추는 그리스로 쉽게 기울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수문장 빈센트 에니에아마(텔아비브)의 ‘슈퍼 세이브’가 번번이 빛났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나이지리아의 골문을 열어젖힌 것은 후반 26분. 알렉산드로스 지올리스(시에나)의 대포알슛을 에니에아마가 놓치자 토로시디스가 달려들어 마침표를 찍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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