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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카테린브르크(시베리아 대탐방:23)

    ◎「러」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일가의 슬픈역사 간직/4자녀·부부 함께 볼세비키들에 의해 처형 당해 비참한 최후맞은 통나무집 자리엔 추모비만/우랄산맥 벗어나 서시베리아로 다시 끝없는 평원이… 굳이 에카테린부르크를 찾은 이유중 하나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러시아 마지막 황제일가의 모습을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비록 왕정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어린 자녀 4명과 함께 유배지의 지하실방에서 처형당한 차르 니콜라이부부의 비극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택시기사는 이 비극의 장소를 쉽게 찾아냈다.그러나 황제일가가 최후를 맞았다는 2층 통나무집은 옐친대통령이 이곳 당제1서기를 할 때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작은 목조교회와○옐친이 건물 허물어 추모비가 들어서 있다.황제일가가 처형당했다는 지하실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흔적이 남아 있으나 쇠줄로 출입구를 봉쇄해놓았다. 추모비는 「순교비」로 명명돼 있었고 황제일가의 죽은 시각을 19 18년7월17일부터 18일 사이의 새벽으로 밝히고 있다.그리고 차르 니콜라이,차르비 알렉산드라와 함께 황태자 알렉시,공주인 올가·타치아나·마리아·아나스타시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왕정에 향수를 가진 미국·유럽인 사이에 아나스타시아공주가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외국으로 도피했다는 억측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이곳 사람들은 이를 터무니없는 낭설로 일축했다.미국영화 「아나스타시아」에 나오는 황제일가의 살해장소도 사실은 영화속같이 완전 지하실방이 아니라 우랄식 반지하방이었다. 당시 이곳 지방 볼셰비키들은 옴스크에 있던 백군 콜차크부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직후 튜멘주의 토볼스크를 거쳐 이곳에 유배돼 있던 황제일가를 서둘러 처형했다.이 처형을 레닌이 직접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그 수일 뒤 7월25일 에카테린부르크는 백군부대가 점령했다. 이외에 에카테린부르크에는 러시아기계공업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는 「우랄마시」가 있다.에카테린부르크가 자랑하는 것 두가지만 꼽으라면 이곳 사람들은 서슴없이 「우랄마시」와 우랄 돌을 꼽는다.우랄마시,즉 우랄중공업기계공장은 지난 28년 소련정부가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시작해 33년 완공한 러시아 최대 중공업공장이다.냉장고에서부터 탱크·우주선부품까지 다 만들어내는 공장인데 길이가 공장정문에서 맞은 편으로 5㎞,좌우로 각각 5㎞라니 공장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우랄마시와 관련,재미있는 것은 시내중심가에서 5㎞ 떨어진 이 공장정문앞의 「1차 5개년계획 광장」주위에 세워져 있는 노동자숙소다.공장을 세우면서 이곳에 노동자숙소를 함께 건설했는데 노동자수가 늘어나며 30년대·40년대·50년대의 전형적 아파트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당시 사회주의 건물양식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명물인 우랄 돌의 진수를 감상하려면 지난해 개통된 지하철역 구내 플랫폼의 장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각종 우랄석으로 바닥·벽·천장을 장식해 마치 우랄석 전시장에 온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그리고 역마다 실내장식을 다른 종류의 돌로 해놓았다. 우랄의 최고대학으로 꼽히는 키로프종합대학도 이곳의 자랑거리다.1916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 바르샤바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유서깊은 대학이다.정문앞에 서 있는 대형 키로프의 동상을 보며 늙수그레한 택시기사는 대뜸 이렇게 말을 거들었다.혁명 뒤 키로프는 레닌·스탈린과 함께 혁명의 심벌이었는데 스탈린이 그를 죽였다며 『그것은 물같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잘라 말했다.스탈린은 자기보다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모두 수용소로 보내거나 죽이고 아니면 망명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출발 3일째 되는 날 모스크바시간으로 하오8시30분 옴스크행 열차를 탔다.시베리아인을 뜻하는 「시베리야크」호였다.옴스크까지는 꼭 12시간이 걸려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게 된다. 여행중 신통하게 느껴지는 일중 하나는 기차칸의 좁은 침대가 안락한 호텔방보다 더 평안하고 깊은 잠을 가져다준다는 점이었다.그래서 중간기착지에 들러 호텔에서 밤을 지내노라면 어서 빨리 기차를 다시 타고 싶은 생각이 늘 따라다녔다. 기차여행에도 물론 맹점이 있다.가장 큰 문제는 밤중에 잠자는 시간에 지나가는 역이나 풍경은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낮에만 이동하고 밤에는 기차에서 내려 호텔신세를 지는 것도 여의치는 않다.구간별로 낮에만 이동하는 열차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떤 특정구간은 별도리없이 밤에만 지나갈 수밖에 없다.이날도 오일의 수도로 일컫는 튜멘주를 밤중에 통째로 지나가게 됐다. ○어느덧 서시베리아에 우랄산맥을 벗어나 서시베리아로 들어서면서 다시 끝없는 대평원이 이어지고 있다.어둡기 전 1905년 오데사혁명 때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의 유형지이던 카뮈실로프역이 지나갔다.인구 3만3천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우랄과 서시베리아간 옥수수의 주거래지로 이름높은 곳이다. 잠자는 도중 튜멘시와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이던 얄루토로프스키역등이 지나갔다.튜멘은 인구 50만명의 도시로 북부의 석유·가스전을 총괄하는 소위 시베리아석유의 수도다.16세기 이반 그로즈니시대때 서시베리아를 차례로 정복한 예르마크장군이 건설한 도시다.서시베리아 절반을 이 사람이 정복했다.그래서 당시 이곳에 살던 카자흐인은 지금도 그를 민족 최대의 적으로 간주한다.철도가 놓이기 전 이곳의 교역은 투라강을 오가는 증기선을 이용해 이루어졌다.튜멘을 출발,투라강을 따라 북동진하면 타볼강으로 이어진 다음 타볼스크시까지 갈 수 있다.이 타볼스크시는 19세기초까지 교역중심지로서 서시베리아의 수도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1885년 에카테린부르크에서 튜멘까지 철도가 놓이면서 이 도시의 역할은 끝났다.철도건설이 도시를 죽인 또 하나의 좋은 예인 것이다.지금은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길이 1천30㎞의 투라강은 우랄에서 발원해 타볼을 거쳐 이르티시강으로 연결된다.그리고 타볼강은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해 옴스크의 이르티시강까지 1천6백㎞를 흐르는 장강이다. 새벽 6시경 시끄러운 사람의 소리에 잠을 깨 창밖을 보니 우유·스메타나·빵 등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이 열차문 밖마다 새까맣게 모여들어 있다.나지바예프스카야역이었다.
  • 우랄산맥을 넘어(시베리아 대탐방:22)

    ◎유럽·아시아의 분수령… 정상엔 경계비 우뚝/모스크바 떠난지 30여시간만에 첫 기착/140만 인구 에카테린부르크에 여장 풀어/2차대전뒤 군수공장 대거 이전… 산업 중심지로 우랄의 역사는 곧 옛날 러시아 정복자들의 침략사다.침략은 15세기에 시작돼 16세기에 마무리됐다.철길 대신 카마강의 물길을 따라 동진해온 러시아 정복자들은 페름주와 스베르들로프주의 경계지대인 우랄 산자락까지 와서 그곳에서 산맥을 넘었다.그리고 우랄북쪽에서부터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도시는 카마강변의 솔리캄스크.「카마강의 소금채취장」이란 뜻을 가진 마을이다.우랄산맥을 넘어 에카테린부르그 북쪽에 베르하투라가 두번째로 건설됐다.「투라강 상류의 마을」이란 뜻.정복자들은 이후 투라강을 따라 동남진하며 70∼80여개의 도시를 건설해나갔다.피터대제는 메탈 매장량이 많은 이곳에 작은 금속공장을 계속 만들었다.튜멘주의 수도 튜멘은 투라강이 시베리아철도와 교차하는 지리적 요건 덕분에 융성한 대표적 도시가 됐다. ○피터대제 부인 이름 따 도시건설은 두 갈래 방향에서 추진됐다.하나는 메탈공장 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중심지를 만드는 것이었다.1720년대에만 17개의 새 공장이 우랄에 건설됐다.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두번째 도시 니즈니타길도 이때 건설됐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페르보우랄스크도 이때 세워졌다.그러다가 드디어 1723년 모든 우랄공장의 총괄본부로 에카테린부르그가 건설됐다.정숙한 피터대제의 부인 에카테리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에카테린부르그로 진입하기 전 만나게 되는 명물은 페르보우랄스크의 유럽·아시아 분수령에 서 있는 대리석 경계비. 우랄의 산정역 베르시나역을 지난 뒤 5㎞,모스크바에서 1천7백77㎞ 떨어진 지점에 이 오벨리스크는 서 있다.철로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높이 7∼8m의 수수한 돌조각물 상단에 「아시아·유럽」이라고 쓰인 선명한 글씨가 두 대륙의 경계를 알린다.승객들은 차창가에 몰려 이 역사적 기념물을 카메라에 담느라 법석이다. 러시아인들도 이 산정 경계를 우리와 똑같이 「바다라즈젤(분수령)」로 부른다.산정에서 물이 한쪽은 유럽으로 다른 한쪽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말뜻 그대로 분수령인 것이다.추사바야강은 왼편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고 타길·네바·살바·투라강 등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간다. 페르보우랄스크에는 유난히 금속튜브공장이 밀집돼 있는데 1920년대 우랄에서 첫번째 튜브생산품이 이곳에서 나오자 이를 기념해 「페르보우랄스크(우랄에서 첫번째)」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도시이름이 됐다. ○금속튜브 공장들 밀집 이곳에서 50㎞를 더 나아가 마침내 스베르들로프주의 수도 에카테린부르그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를 출발한지 꼭 29시간30분만에 처음으로 짐을 꾸려 기차에서 내렸다.이웃들이 모두 복도로 몰려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91년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에카테린부르그로 바꾸면서 주이름은 그대로 두어 다소 혼란을 일으킨다.이름을 바꾼 이유는 스베르들로프가 볼세비키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혁명 뒤 볼셰비키들의 총애를 받아 번창한 전형적 사회주의 행정·산업중심지이다.현재 인구가 1백40여만명에 이르는 우랄의 비공식 수도이다.1723년 이셰치강변의 작은 메탈공장으로 도시가 출범한 이래 우랄지역 각종 광산들의 관리소가 이곳에 들어섰다.그러나 혁명 전까지 우랄의 행정·지리적 수도는 페름이었고 이곳은 단순한 산업도시 기능만 했다.이를 볼세비키들이 혁명 뒤 모든 행정·문화중심을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그것은 옛 전통을 끊고 프롤레타리아의 새 전통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이곳은 반혁명부대인 체코백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혁명 뒤 23년 이곳을 우랄의 행정수도로 정하면서 볼셰비키들은 그 이듬해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로 바꾸었다.그 뒤 극장·박물관·대학·과학아카데미·연구소 등이 줄이어 들어서기 시작했다.2차 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 유럽쪽에 있던 군수공장들이 대거 이곳으로 피난와 본격적 산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소비예트 시절 시베리아에는 크게 두가지 타입의 도시가 존재했다.하나는 오랜 학문·예술전통을 가진 도시들로서 페름·옴스크·톰스크 등이 바로그들이다.이들은 혁명 뒤 볼세비키정권에 의해 무대 뒷전으로 밀려나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된다.다른 하나는 새로 각광받은 노동자 도시들이다.에카테린부르그·노보시비르스크·이바노바 등이 단적인 예이다.오랜 정치·문화·학문전통을 억누르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거역할 수 없는 판도의 역전이었다. ○옐친이 태어난 곳 지금 크렘린의 안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스베르들로프 마피아」들이다.옐친 대통령을 비롯해 일본의 옴진리교로부터 뒷돈을 받고 이들을 러시아로 진출시켜주었다는 로보프 안보위서기와 부르불리스 장관 등이 그 멤버들.이외에 15∼20명의 이곳 출신 인사가 현재 옐친 주위에서 일을 하고 있다.옐친 대통령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동쪽으로 1백㎞ 떨어진 스탈리차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에카테린부르그시당 제1서기,주당 제1서기를 거친 다음 고르바초프가 불러올려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에카테린부르그는 예부터 돈많은 광산주들이 많았던 탓에 대부호의 저택들이 유난히많이 남아 있다.또 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들도 곳곳에 보존돼 있다.이들 전통가옥들이 스탈린시대 때 건설된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과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만들고 있다.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은 보통 2층인데 1층은 반지하로 만들어 시멘트,돌 등으로 아주 견고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지반이 흔들리는데 대비하기 위함이다.거기다 창문주위에 갖가지 문양을 새긴 나무장식을 해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우랄사람들은 이 창문장식을 「날리치니키(얼굴)」라고 부른다.집의 얼굴이라는 뜻. 쨍쨍 내리쬐는 5월의 햇살 속에 거리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우리가 「여우비」라고 부르는 이 자연현상을 우랄사람들은 「버섯비」라고 불렀다.이 비가 지난 뒤면 숲의 버섯이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 한·러 트레이드센터 대표/선우영일씨 임명

    대한무역진흥공사는 11일 모스크바에 건립될 한·러 트레이드센터의 대표이사 부사장에 선우영일 모스크바 무역관장 겸 북방지역 본부장을 임명했다.
  • 예친 긴급입원/러 정부대변인 “직무수행 지장없다”

    ◎심장질환으로… 한때 의식 잃어 【모스크바 AP 로이터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11일 심장질환으로 긴급 입원했으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정부대변인이 밝혔다. 이날 심장질환으로 급히 입원한 옐친대통령은 곧 의식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검사결과 병세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됐다고 대통령대변인이 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일 심장질환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옐친 러시아대통령에게 위로전문을 보내 『한국민과 더불어 각하의 조속한 쾌유를 빈다』면서 『조속히 완쾌돼 예전과 같은 강인함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러시아의 발전과 셰계평화를 위해 계속 기여해나가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 「크렘린」 건강이상에 전세계 “긴장”/옐친 심장질환 입원 안팎

    ◎수일내 집무가능… 고령에 음주심해 안심 못해 크렘린 최고지도자의 건강문제로 모처럼 전세계가 잔뜩 긴장했다. 러시아는 어쨌든 지금도 대국인데다 워낙 정정불안으로 점철된 나라라 옐친대통령이 심장질환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은 전세계 외교,경제,정가를 잠시나마 미지의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입원했다는 최초보도가 나간지 3시간여만에 나온 크렘린대변인의 공식발표는 『심한 국소빈혈로 인한 심장질환』이었다.이는 심장에 혈액공급이 원활치 못해서 오는 것으로 호흡곤란,가슴의 통증등의 증상이 뒤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번에도 1차적인 증세는 가슴의 통증이었던 것으로 발표됐다. 이후 나온 발표로는 일단 심각한 고비는 넘겼고 수일 입원한뒤 정상집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그외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일단 위험한 상태는 아님이 분명한 것같다.하지만 옐친대통령의 심장질환 경력은 처음이 아니다. 최초기록은 87년 모스크바시 당제1서기에서 실각당한 직후 심장질환으로 수일간 입원했던 것으로 나와있다.91년9월 보수파들의 쿠데타기도 직후에도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그때도 여러 공식모임이 취소됐고 특히 미재무장관이던 니콜라스 브래디장관과의 면담이 갑자기 취소돼 억측을 자아냈었다. 심장질환 못지 않게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그의 음주벽이다.94년9월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일랜드공항에서 술에 곯아떨어져 공항영접나온 아일랜드총리를 트랩아래서 바람맞힌 일이 있다.그해 8월에는 독일방문길에 역시 낮술에 취해 환영밴드 지휘봉을 뺏아쥐고 지휘를 하고 환영군중들에게 키스세례를 퍼부어 역시 주위를 경악게 했다.진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지난해 12월 체첸침공을 시작해놓고는 경미한 코수술을 한다고 2주간이나 병원에 칩거해 역시 온갖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심장질환전문가들은 이번 소동이 현재 64세인 그의 나이면 스트레스나 과로를 인해 흔히 겪을 수 있는 증세라고 설명한다.그러나 심장관련 질환이라는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다.실제로 지난 9일 의원들간 축구시합을 관전하러 갔을때 옐친은 비교적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으로 텔레비전에등장했다.언제 갑자기 이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 러 미 상환차관 3억9천만달러/98년까지 현물상환키로

    ◎어제 협정 체결 우리나라와 러시아간에 경협차관 상환협정이 공식 체결됐다.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10일 하오 방한 중인 러시아 다비도프 부총리와 만나 지난 4월 가서명된 경협차관 상환협정에 서명했다.이 협정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우리측의 산업은행·수출입은행과 러시아 대외경제은행(VEB)간의 정산협정 ▲우리측 수입자와 러시아측 수출자간의 물품공급 계약도 했다. 양 장관은 또 93년 설치된 이후 러시아측 사정으로 한번도 열리지 못했던 양국간 경제공동위원회를 오는 12월 초 모스크바서 열기로 합의했다. 여기서 모스크바무역센터의 건립과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나홋카 한국기업 전용공단 개발 등 경협문제를 논의키로 했다.
  • 러 “무기업체 독자수출 허용”/판촉책 일환 수개월내에

    ◎1차로 미그29기 제조사에 계약권/10여개사도 허가할듯 【모스크바 AFP 연합】 러시아는 무기수출촉진책의 일환으로 수개월안으로 주요 무기생산업체들이 외국과 무기수출계약을 독자적으로 체결할 수 있도록 허용할 계획이라고 러시아 무기수출업계 전문가가 9일 밝혔다. 미그29기를 생산하는 대형 국영업체인 미그­마포사의 알렉산드르 아게예프 사장은 미그­마포사가 외국 고객들과 미그 29기 판매계약을 체결할 권리를 정부로부터 획득했다면서 다른 10여개 무기 제조업체들도 독자적으로 외국고객들과 무기판매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무기거래 담당 보좌관인 보리스 쿠지크는 최근 방공무기 생산업체인 안테이사가 이와같이 독자적으로 외국고객들과 무기거래를 허용받는 첫 업체가 될 것이라면서 실질적인 무기수출 잠재력을 가진 무기수출업체는 몇개가 더 있다고 밝혔었다. 쿠지크 보좌관은 러시아의 무기수출액수는 지난 1·4분기중 15억 달러이며 올 한해 전체 수출액수는 25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가 연간 2백대의 군용기를 수출할 계획이며 미그­마포사는 강력한 다국적기업으로 전환중이라고 덧붙였다.
  • 김정일 통치구도 균열 가능성/최평길 연세대교수·행정학(기고)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려면 먼저 국가를 이끌어가는 통치이념을 확립해야 한다.그리고 그 통치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를 구축해서 경제발전같은 체감정책으로 혜택을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복지배분까지 도달해야 한다. 북한도 공산주의 이념과 노동당을 주축으로 한 지배체제로 그간 경제발전에 전력하여 3차7개년 인민계획까지 이끌어 왔다.그리하여 90년대 이후부터는 복지배분등을 통해서 남한에 이겨보려고 시도했으나 군수산업 위주의 중공업과 김일성 유일 일당독제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쩌면 고산준령에 고립된 남미의 마야나 잉카족처럼 북한의 현체제는 멀리 떨어진 산에서 김일성 왕족만 신비한 하나님 계시로 살아가는 현대판 카리스마 신정체제로 말로만 배부른 선동 사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심장발작으로 교주는 사라지고 그런 와중에 김일성 가문 친·인척 9촌 겹사돈까지 포함한 가신그룹이 대부분인 북한지배체제의 핵심인 노동당 중앙위원 1백56명은 김일성 아들 김정일을 차세대 신주로 받들고 있다. 키 168㎝에 몸무게86㎏으로 심부전증,고혈압,당뇨병등 합병증세로 건강이 좋지 않은 김정일은 북한선전이 말하는 인덕의 상징이기 보다는 광폭·예측불가능의 정치창업 2세대로 검증받지 않은 정치 인물이다.김정일은 아버지 장례식 일주기 추도기간이 끝나고 북한 정권 창건 기념일인 9·9절과 노동당 창립기념일인 10월10일을 전후해서 당총비서에 취임할 것 같으나,대통령에 해당하는 주석식은 나중에 승계하거나,아니면 다른 지도자에게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총비서와 주석직을 독식하든,배분하여 가지든 간에 아버지만 못한 권력행사,권력분산으로 독재관료 조직의 통치도구는 균열이 올 수 있다.최근 평양 대사관에서 근무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제니소프공사나 파제이예프 대사 모두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것은 김일성­김정일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라 사회안전부·당·군의 3중 4중의 주민감시 통제인 것 같다고 말한다. 느슨해지는 독재관료 통제,식량난,제휴하는 지도부의 이탈,조여오는 한국의 포위작전,미국과의 관계속에 스며드는 개방화등은 불가불 김정일에게 총체적 자유시장 개혁의 한계성에 속죄양의 직격탄을 퍼부을 것으로 전망된다.지도자 교체,주민봉기,집단지도제휴의 와해,군의 정치개입,재야민중지도자 부상은 먼 옛날 얘기가 아니다. 김일성이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리라던 남북한 모두의 예측은 맞지 않았으나 한국으로서는 자연스럽고 체계적이고 내밀성이 있는 냉정한 북한 관찰을 하여야 한다.한국은 5∼6년 후인 21세기 여명기에 북한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하에 북한살리기 접수계획을 세워 온국민이 실질적인 재난 구호대책 훈련같은 피부에 닿는 통일연습을 시작해야 한다.이것만이 김일성이후 김정일 제휴정권 부상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 막오른 휴전협상(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21)

    ◎모,김일성에 「화·전 2중전략」 제시/공산측,회담초 위약한 공군력 보강에 안간힘/스탈린,부담 피하려 모의 「협상지휘」요청 거절 전쟁이 계속되는 내내 마찬가지였지만 휴전협상에 임하는 마당에서도 김일성은 스탈린·모택동 두 사람의 뜻에 철저히 모든 것을 맡겼다.김일성으로부터 긴급히 휴전협상 전략을 마련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택동은 일단 두가지 기본전략을 마련해 주었다.한편으로 전투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협상제의를 해올 경우 대표를 보내 협상에 임하라는 이중전략이었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 기본전략을 즉시 스탈린에게 보고해 그의 의중을 물었다.김일성이 협상자문을 구하며 보내온 전문 등을 첨부한 이 전문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6월30일자 전문.전문번호 N21334). 『리지웨이가 제시한 협상조건이 입수되면 그 내용을 검토한 뒤 우리의 입장을 정해야함.일단 협상이 시작되면 스탈린동지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가 난처한 입장에 빠지지 않도록 협상 전과정을 총지휘해 주시기 바람』. ○“김에 회담 직접 지시” 같은날 6월30일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협상을 제의했다.모택동은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을 띄어 구체적인 협상전략을 새로 제시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협상장소·시기·구체적인 방안등을 조목별로 열거했다(전문번호 N 21340). 『리지웨이가 협상제안을 해왔음. 본인의 의견은 다음과 같음. 1.김일성동지는 7월2일 혹은 3일중에 리지웨이의 휴전제의에 응하는 답을 보낼 것.그리고 시간·장소·대표자 수를 제시할 것. 2.협상장소로 리지웨이는 원산을 제시했으나 이곳이 북조선의 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응하지 말것.38도선 부근의 개성을 제의하는 것이 어떨지. 3.협상개시 시기는 7월15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됨. 4.시간이 촉박하고 회담의 중요성에 비추어 스탈린동지께서 직접 김일성과 연락을 취하고,회담을 직접 지시해 줄 것을 요청함.동시에 본인과도 연락을 유지해 주기 바람』. 그러나 협상 전과정을 총지휘해달라는 모택동의 이 요청을 스탈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대신 협상의 모든 책임을 맡으라고 요구했다.그러면서도 회담 장소·시간·기본전략에 대해 스탈린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다음은 6월30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답전(전문번호 N 3917). 『리지웨이의 휴전제의에 대해서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답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즉시 내보낼 것.이 답신은 김일성과 팽덕회의 이름으로 내보낼 것.만약 중국 의용군 사령관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으면 미군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임.회담장소는 38도선 개성을 절대 고수할 것. 귀하는 전문을 통해 모스크바가 휴전협상을 지도토록 요청했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필요한 일도 아님.협상을 지도할 사람은 바로 모택동동지 당신임.우리는 기껏해야 몇가지 사안에 대해 조언이나 해줄수 있음.김일성과는 직접통신도 안됨.동지가 김일성과 직접 통신을 유지하기 바람』. 이어서 모택동은 7월2일 전선의 팽덕회·고강·김일성 3인에게 전문을 보내 협상시작 전 전선에서의 주의사항을 단단히 주지시켰다.그 주의사항은 첫째로 제1차 방어선 병력을 증강배치시키고 무기·탄약을 충분히 확보할 것.둘째,최상급 비상경계령을 발동할 것.제1차 방어선 부대들은 적의 대규모 공격과 협상을 전후해서 아군 후방에서 있을지 모를 적 공군기들의 치열한 공습에 대비할 것.셋째,서해안에 적이 상륙작전을 벌일 가능성에 대비,이를 격퇴할 준비를 갖출 것등이었다. 모택동은 이 지시문을 이튿날인 7월3일 스탈린에게 그대로 보고했다(전문번호 N 21412). 1951년7월10일 개성에서 마침내 휴전회담이 시작됐다.그러나 협상에 임하면서도 중국·북한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유엔군에 대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협상 시작 뒤 군사력강화방안에 대해 모택동은 7월18일 스탈린에게 다음과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 21646). ○대공포망 강화 제의 『전선에서 적극공격을 펴지 않고 방어전략만 계속하면 적은 우리에게 군사적 압력을 넣기 위해 계속 엄청난 공습을 해댈 것임.따라서 다음 사항을 제의함. 1.대공포 망을 강화할 것.2.공중전 강화.3.공군 지휘부 강화.4.공군기 작전반경을 압록강에 국한시키지 말고 평양까지 남진시킬 것.5.잘 훈련된 폭격기 편대를 적의 후방에 침투시킬 것,적극적인 공중전을 펼 것,여러 공항·군수창고·적군 막사를 적극적으로 공습할 것. 6.지상에서도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지전 성격의 공격작전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감행할 것』. 그러나 이같은 적극적인 군사작전 구상은 오히려 강화된 유엔군의 공습 때문에 큰 차질을 빚었다. 51년 8월11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사정이 매우 어려워진다고 호소하고 세만회를 위해 평양북쪽에 비행장 건설과 소련의 추가지원을 긴급요청했다(전문번호 N 22764). 『현재 활주로를 건설하고 있으나 밤낮으로 계속되는 적의 공습 때문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가 없음.우리의 대공포는 8천m 상공에 있는 적 폭격기에 미치지 못함.공습을 받아 새로 보수해 놓으면 또 폭격을 받고…이런 식으로 계속 되풀이되고 있음.따라서 중국·조선군 비행단과 소련항공여단 4개 여단을 동시에 조선으로 이동시키기로 한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음.9월로 예정됐던 이들 비행단의 적전계획은 연기돼야함. 우리는 중·조선군 항공단의 조선진출 전초기지로 평양 북쪽에 비행장건설을 제안 함.이곳은 적공군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적 폭격기가 접근해도 쉽게 격퇴할 수 있음.소련정부에 대해 중국 안동에 주둔하고 있는 3개 대공포 여단을 조선으로 이동시키는 방안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 함.이는 중국국경 지역 안수에 건설중인 비행장 방어를 위해서 임.동지의 지시를 기다림』. 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은 8월17일 모택동에게 답전을 띄웠다(전문번호 N 4757.대통령문서보관소).스탈린은 이 전문에서 안수지역 비행장건설을 10월20일까지 완공해 늦어도 11월 이전에 중·조 공군이 이곳으로 이동해 작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스탈린은 이를 위해 소련의 2개 대공포 여단을 안수지역으로 보내 비행장 건설을 방어케 하겠다고 약속했다.스탈린은 이 대공포 여단은 안동지역에 배치돼 있는 병력을 빼내오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 모택동은 미군의 공습에 거의 속수무책이었다.모는 이밖에도 소련군사고문단의 추가파견을 줄기차게 스탈린에게 요구했다.그러나 스탈린은 고문단파견에 동의하면서도 가능한한 숫자를 줄이려고 해 두사람간 줄다리기가 계속됐다.다음은 9월8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전문번호 N 23703). 『51년 7월27일자 전문에서 본인은 스탈린동지께 조선에서 싸우는 중국의용군부대에 소련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음.이 문제와 관련,소련군사고문단장 크라소프스키동지와 협의한 결과,83명의 군사고문관이 필요 함. 1.의용군사령부에 10명의 고문관이 필요.인원내역=고문단장(1)참모총장고문관(1)작전분야(1)정보분야(1)통신분야(1)후방(1)탄약(1)포(1)탱크(1)엔지니어고문(1).이밖에 5개군에 각2명씩 총10명.그리고 21개 병단에 모두 63명. 이들 고문관들은 51년9∼10월 사이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보내주면 좋겠음』. ○「고문관 파견」 실랑이 9월12일 스탈린은 모택동의 군사고문단 파견요청을 숫자를 줄여 일부만 충족시켜 주었다.6억 루블의 추가군사차관 요청은 그대로 집행해주었다.스탈린은 중국의용군 사령부에 고문관 5명만 파견하겠다고답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9월20일 스탈린앞으로 전문을 보내 5개군에 각각1명씩 모두 5명의 고문관을 보내달라고 재차 요청했다.당초에는 각2명씩 모두 10명의 고문관 파견을 요청했다.모택동은 이들을 9월말 혹은 10월초순까지 북경에 도착토록 해주면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하겠다고 말했다.군사지원을 둘러싼 두 사람간의 줄다리기는 휴전협상 내내 이런 식으로 계속됐다. ◎새로 밝혀진 사실/중·소 협상장소·날짜까지 지시/김일성에 명령조로 전문 보내 19회에 나간 전쟁중의 김일성의 모스크바·북경방문 사실부터의 내용은 사실상 거의 전부가 새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새로운 발견사실의 의미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검토해 나가보자.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도 김일성은 주요전략을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자문하였고 모택동은 항상 스탈린과 상의하였다.따라서 한국전쟁에서의 휴전협상은 사실상 자본주의 최고 지도부와 사회주의 최고 지도부와의 전체 대 전체식의 협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실상의 주도자였으면서도 모택동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다.그는 상세한 사항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도 구체적인 협상의 과정에서 오는 책임과 부담을 지지않으려 하였던 것이다.스탈린은 또한 전쟁 진행중 모택동이 요구하는 군사고문단의 배치에 계속 신중하였다. 김일성에 대한 모택동이나 스탈린의 권고사항은 주권국가에서 제안하는 권고사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구체적이고 명령적인 것이었다.즉 그들의 지시는 김일성이 움직이거나 변경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휴전협상의 응답 날짜,장소,개시시점까지 지시,마치 군대의 상관이 부하에게 내리는 지시와 같았다.(실제로 그들의 용어 역시 「지시」였다)이점에서 오늘에 반추컨대 미국과 유엔의 협상전략이 모스크바와 북경을 향했던 것은 틀린 전략이 아니었다.종전후 김일성이 주창한 주체사상과 제제는 사실상 이러한 극단적인 반주권성과 종속성의 역설적 반발이었다.
  • 한반도정책 급선회(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20)

    ◎모·스탈린 “휴전협상” 합의… 김일성 당황/중,말리크 소 대사의 「유엔 제의」 전폭 지지/평양측,북경에 「미국 호응때의 전략」 문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보낸 51년 6월13일자의 이 전문에서 중국공군 8개 비행사단의 전선투입을 최우선 요구로 내놓았다.다음은 이 전문의 계속.『최소한 8개 중국군 전투비행사단의 투입이 시급함.2∼3개의 미그 15 비행사단과 중국 중남부에 배치돼 있는 5∼6개의 미그 9 비행사단을 투입시켜주기 바람.특히 미그 9기는 적폭격기에 맞설 최고기종임.이 8개 사단만 출정하면 전선사정이 호전될 것임』.스탈린은 이 비행사단들이 이미 출격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가능한한 조기출격시켜 줄 것을 모택동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아울러 스탈린은 영·미군이 남조선을 위해 참전중인 16개국 군대를 대표해 휴전제의를 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주고 미확인 첩보임을 전제로 『이들이 휴전협상 제의 직전 대규모 공격작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에 대비하라』고 모택동에게 당부했다. 이 전문을받은 모택동은 같은 날 즉시 답전을 띄웠다.(51년 6월13일.전문번호 N20772.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 ○“미 휴전제의 가능성” 『스탈린동지의 전문을 받은 날 고강,김일성동지로부터도 전문이 당도했음.우리의 휴전협상 전략은 고강동지가 스탈린동지께 직접전달한 그대로임.전선의 팽덕회동지는 소련군사고문단 파견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음.가능한 빨리 이들을 파견해 주기 바람.8개 비행사단 투입은 출정계획을 세울 것을 이미 총참모부에 지시했음.팽덕회에게는 제2,제3의 방어선을 확고히 사수할 것을 지시하고 아울러 새방어선 구축을 지시했음.6월에 아군전력은 적에 비해 약했음.하지만 7월이면 6월보다는 호전될 것이고 8월이면 더 강해질 것임.8월중 적에게 매우 강력한 타격을 가할 준비를 세우고 있음』. 이 전문이 오간 바로 이튿날인 6월14일,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김일성은 고강과 연명으로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제출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모택동동지가 보낸 답전을 스탈린동지께 전달하고자 함.시간이 허락한다면 오늘 스탈린동지를 면담하고 싶음.그게(면담이) 가능하다면 우리 일행은 동지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내일 귀국하고자 함. 공산주의의 인사를 전하며. 고강 김일성』 그리고 두사람은 이 서신에다 모택동이 6월13일자로 자기들 앞으로 보낸 전문사본을 첨부했다.앞으로 휴전협상에 임할 중국의 입장을 상세히 담은 내용이었다.구체전략으로 모는 다음의 5가지 방안을 지시했다. 『1.적이 휴전제의를 할 때까지 기다릴 것. 2.단 소련정부가 미국정부를 상대로 휴전협상 제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함.즉 두가지 방향에서의 동시접근이 가능함.한편에서는 소련정부가 휴전제의를 하고 또 다른 한편,적이 휴전제의를 먼저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북조선과 중국정부가 이에 응하는 것임.이와 관련,필리포프동지의 의견과 지시를 받을 것. ○“38선을 국경으로” 3.휴전의 조건:38도선을 국경으로 회복할 것.38도선 양측에 소규모의 중립지대 설치.북쪽에만 중립지대를 설치하는 것은 절대반대.중국의 유엔가입이 휴전협상의 전제조건은 아님.왜냐하면 중국정부는 유엔이 사실상 침략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유엔가입문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음.협상전략상 대만문제는 제기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함.만약 미국이 이 문제를 분리처리하자고 제의하면 우리도 적절한 양보를 하겠음. 4.현전선 사수명령을 내렸음.만약 적이 추가병력을 파견하거나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8월중 아군전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임. 5.비행사단은 즉시 전선으로 투입하겠음. 모택동』.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모택동은 당시 휴전협상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할 자세를 보였다.스탈린은 무엇보다 중국군 비행사단의 투입을 최우선 목표로 기다리고 있었다.이것이 차일피일 늦어지자 스탈린은 6월 16일 북경에서 중국공군을 지도하는 소련고문단 앞으로 매우 신랄한 질책을 담은 전문을 보냈다. 고강으로부터 스탈린과의 면담결과를 보고받은 모택동은 추가지원 무기의 조속한 인도를 스탈린에게 요구했다.다음은 6월21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내용.(전문번호 N21039). 『1.귀국한 고강동지로부터 여러 문제에 대한 스탈린동지의 견해를 전해들었음.동지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함. 2.8개월동안 조선에서 전투를 해본 결과 중국군은 장비면에서 적과 비교해 현격한 열세에 있음을 알게 됐음.우리 군의 장비개선이 절실함.고강동지를 통해 스탈린동지께 60개 사단에 필요한 무기공급을 요청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임.이는 동지께서 동의한 바 대로임.이는 조선에 나가 있는 우리 군대가 금년도에 필요한 최소분의 무기임. 3.북조선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소련 총참모부에서는 금년도에 16개 사단분 무기만 인도하고 나머지 44개 사단분은 1952­53년중에 인도할 예정이라고 함.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량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임. 4.본인은 동지께 7월부터 금년말까지 우리가 요청한 무기를 매월 6분의 1씩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함. 물론 수송문제 등에 있어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나 가능한한 빨리 무기를 인도해줄 것을 요청함』. 그러나 이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그해말까지 60사단분 무기를 다 인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적어도 53년도 이전에 무기인도를 완결짓기는 어렵다고 분명히 밝혔다.다음은 6월24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35177). 『1.우리가 제기한 휴전협상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음.우리는 말리크대사(유엔주재 소련대사)가 유엔에서 휴전협상을 제의함으로써 이 문제를 제기하기로 한 귀측과의 약속을 지켰음. 2.60개 사단 무기공급건은 솔직히 말해 이를 금년중에 마무리짓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우리 산업체 종사자들과 군사전문가들은 51년중 10개 사단분 이상을 공급키는 불가능하다고 말함.60개 사단분을 모두 보내는 것은 워낙 어려운 일이고 열심히 해도 54년도 상반기는 돼야 완료될 수 있을 것임』. ○의견 긴급통보 간청 모택동은 무기인도에 관한 스탈린의 이 주장을 이의없이 받아들였다.그러나 말리크대사의 유엔발언과 때를 맞춰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인의 주관심은 휴전협상쪽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다.위 전문에서 모택동은 휴전협상대표는 정부대표나 군사령관들이 돼야한다는 말리크 대사의 제의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동의했다. 스탈린,모택동양자간 사전합의에 의해 분위기가 휴전협상쪽으로 급선회하자 가장 당황한 것은 김일성이었다.김일성은 휴전협상에 임할 전략자문을 구하기 위해 모택동에게 긴급전문을 띄었다.다음은 51년 6월29일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내용.(전문번호 21336) 『6월 26일 말리크대사의 연설로 미국도 휴전협상에 관심을 갖게됐음.…중략…뉴스보도에 따르면 리지웨이장군은 미국방부의 지시가 내려지는데로 북조선군 사령관과 휴전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함.만약 리지웨이가 휴전협상제의를 해올 경우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동지의 구체적인 의견을 긴급히 통보해 주실 것을 간청함. 김일성』. ◎새로 밝혀진 사실/휴전협정의사 모택동이 먼저 제기/소선 소극적… 스탈린 사후에야 종전 이번 자료에는 1951년 소련이 휴전협상을 제의하게 되는 과정이 나와있다.우선 모택동이 이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소련의 의사표시에 앞서 모택동이 먼저 적극적으로 휴전협상의사를 표현하고 있음이 밝혀져 있다.우리는 이에서 하나의 논쟁적인 사실에 대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왜 한국전쟁은 3년이나 끌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야 종전이 되었느냐는 점이다(스탈린의 사망은 1953년 3월,한국전쟁의 종전은 1953년 7월).이는 곧 스탈린이 이 전쟁의 종결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자료적 뒷받침을 이번 자료에서 볼 수 있듯 휴전협상의 개시여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모택동은 소련의 군사지원이나 휴전협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 비해 스탈린은 중국군 비행사단의 투입에 더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점도 밝혀져 있다.스탈린은 중국군 비행사단의 투입이 늦어지는 데 대해 신랄한 질책을 가하고 있기 까지 하다.스탈린은 모택동의 지원요청에 대해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이번 자료를 통해볼 때 중국과 소련간의 중소갈등의 뿌리가 한국전쟁에서 놓여졌다는 그동안의 해석은 전적으로 옳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미국이 소련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이자 김일성이 이에 당황하여 모택동에게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문의하는 장면도 흥미롭다.이는 이미 언급한대로 전쟁이 김일성의 손을 떠났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러 내각/화학무기 전량 폐기 승인/모두 4만t… 의회비준 거쳐야

    【모스크바 AP 연합】 러시아 내각은 6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화학무기 4만t 전량을 폐기하기 위한 법안을 승인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직속 화학무기폐기위원회의 파벨 슈트킨 위원장은 이 법안이 내각에서 승인됨으로써 러시아의회가 지난 93년 체결된 화학무기에 관한 파리협약을 승인할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이 법안은 ▲화학무기 폐기를 위한 특수시설 건설 ▲폐기과정에서 인근 주민 및 환경보호 등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데 아직 의회와 대통령의 최종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러시아 정부는 파리협약에 서명했으나 의회가 아직 이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 러­체첸 평화협상 재개/반군측 “실패땐 테러” 경고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러시아와 체첸 반군은 6일 양측 병력간에 교전이 벌어지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수도 그로즈니에서 3일만에 평화협상을 재개했다. 이타르타스통신은 비아체슬라프 미하일로프 신임 민족문제장관이 이끄는 러시아측 3인 대표단이 이날 하오 2시30분(한국시각 하오 7시30분) 그로즈니에서 체첸반군 사령관인 아슬란 마스하도프 일행과 회동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회담은 그러나 러시아측에서 반군이 요구하는 주요 조건가운데 하나인 독립국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방침임을 고수하고 있어 잠정적인 휴전을 대체할 평화협정이 마련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한 실정이다. 한편 지난달 부됴노프스크에서 대규모 인질극을 주도한 체첸 반군 지휘관 샤밀바사예프는 이날 AFP통신과의 회견에서 이번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는 생물무기나 방사능 물질을 사용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 「남한 쌀」 수용은 북한변화 의미/예브게니 바자노프(지구촌칼럼)

    김일성 사후 1년동안 북한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정리해보면 4가지의 특기할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첫째는 김정일이 북한의 정치,이념적 최고위직인 주석직을 승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둘째는 북한과 미국의 접근이다.그리고 셋째는 북한이 남한에 쌀원조를 요청한 것.넷째로 북한지도부가 새 경제정책을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많은 관측통들은 그의 아들이 즉각 권력의 공백을 메울 것으로 생각했다.후계문제는 신속히 해결하는 게 좋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의례적인 관행이다.어떤 국가든 분명하고 정통성 있는 지도자를 갖는 게 중요하다.그렇지 않으면 그 국가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갖은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권력이란 잡아야될 사람이 빨리 잡지 못하면 누군가 눈독을 들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국가에서는 권력승계가 법절차에 따라 공개리에 이루어진다.그리고 아주 신속히 처리된다.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뒤 후임대통령은 불과 수시간만에 취임했다.반면 전체주의국가에서는 이것이 비밀리에 신비스런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하지만 이 경우에도 시간적으로는 민주국가보다 더 빨리 이루어진다.소련에서 안드로포프 사망 뒤 고르바초프의 당서기장 승계는 1시간 반만에 결정됐다.이런 권력승계과정의 신속성은 역사적으로 중국·폴란드·브라질·모로코등 여러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부모 상중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전통을 이유로 이와 전혀 다른 행동을 취했다.그러나 이 이유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첫째 진정으로 부모 애도를 국사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최고지도자 자질에 문제가 있다.실질적으로 김정일은 부모 애도를 하면서 국가최고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당·정부기구도 그가 장악하고 있다.「이상한 애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김일성 부자는 한국적인 전통가치보다도 권력을 더 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이다.무소불위의 권력을 확보키 위해 김일성은 모든 정적,심지어 친구까지도 제거했다.더구나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까지했다.온갖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권력을 겸양하는 사람이 김정일 자신인가.아니면 주위의 어떤 세력이 이를 방해하고 있는가.있다면 그 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지난 1년간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 중 김정일의 주석직 미취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미국과의 관계개선 움직임이다.최근 필자의 친구 한사람이 북한방문을 위해 모스크바의 북한대사관에 비자신청을 했다.그러면서 그는 여권에 미국방문 스템프가 여러번 찍혀있는 게 마음에 걸려 북한대사관의 직원에게 비자발급에 문제가 없겠느냐고 문의를 했다고 한다.그랬더니 그 창구직원은 반대로 미국을 자주 방문한 것은 북한비자를 얻는 데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지금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중요한 외교성과로 생각하고 있다.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안보면에서도 유익하고 미국의 경제,기술원조를 얻을 수 있게돼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소득으로 간주하고 있다.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회생기회를 잡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다.북·미 두나라가 물밑거래를 통해 한국의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까 우려하는 것이다.러시아에도 북·미거래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정치인들이 많다.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미·북거래 때문에 손상을 입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이런 우려들을 불필요한 기우로 생각한다.미·북 관계개선은 한국·러시아 모두 환영할 일이다.양국의 관계개선은 한반도의 긴장완화 뿐 아니라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어내고 이들을 보다 개방되고,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분권화되고 외국의 사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한국측에 쌀을 원조해달라고 한 일도 이런 조류변화의 한 결과로 보고 싶다.물론 쌀원조 요청은 일차적으로는 북한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그러나 북한경제가 어려운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그러면서도 그들은 지난 수십년간 남한에 경제원조를 요청한 예가 없었다.오히려 북한정권은 노동자들의 기본 생필품을 공급하는 데 있어 자기들이 남한보다 훨씬 앞서있다고 선전하는 데 급급해왔다. 따라서 북한정권으로서는 남한에 쌀원조 요청을 하는 일이 큰 패배를 인정하는 일일뿐 아니라 수치이고 사회주의 노선을 배신하는 셈이된다.이전 같았으면 북한당국으로서는 인민들을 굶겨죽게 만들지언정 남한에 쌀원조 요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북한은 남한에 손을 벌렸다.이는 북한 내부의 변화를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북한의 외교노선에도 변화를 몰고올 전조로 볼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남한에 대한 쌀원조 요청은 북한의 일반적인 경제개혁 노력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북한정권은 이미 시장경제 개혁을 시작하기로 정책결정을 내린 것같이 보인다.물론 그 과정은 신중하고 천천히 진행될 것이다.이는 이들이 옛소련,동구의 부정적인 예를 잘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개혁과정에서 절대로 국가의 통제력을 늦추지는 않으려고 할 것이다. 북한이 경제개혁을 시도하면 외부세계도 이를 크게 환영하고 지원할 것이다.지금의 북한지도부가 어떤 의도를 진짜 마음속에 품고 있든 일단 개혁이 시작되면이 사회는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이는 남북한의 성공적인 통일에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 옐친,올 가을 중·인니·호 방문/부총리 잇따라 방한

    【모스크바 이타르타스 연합】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오는 가을 중국방문에 나서는등 러시아의 아시아·태평양 중시정책에 따라 러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국가들간의 외교접촉이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국 주재 러시아 공관장 회의 자료에 따르면 옐친 대통령은 중국 방문에 이어 인도네시아나 호주 등지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밖에 총리와 부총리,외무장관등 정부 고위관리들은 물론 의회지도자들도 역내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옐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앞서 양국 외무장관들의 회합이 있을 예정이다. 이와 함께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조만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을 방문하며 유리 야로프 부총리는 4일 인도 방문길에 올랐다. 또 비탈리 이그나텐코 부총리와 올레그 다비도프부총리는 이번주와 다음주 각각 한국을 방문한다. 러시아 하원인 국가두마의 이반 리프킨의장도 8월초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며 상원의 블라디미르 슈메이코의장은 다음주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을방문한다.
  • 우랄의 옛도시­페름시(시베리아 대탐방:21)

    ◎인구 1백만…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러」 3대 발레극장·베르샤긴 미술관이…/실바강 따라 1시간동안 절경 펼쳐/별장 지붕위 “매물” 페인트 표시 눈길끌고 페름시에 도착하면서 여행출발 이후 처음으로 인구 1백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밟아보게 된다.이곳은 프리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로 혁명전까지 우랄의 행정수도는 에카테린부르크가 아니라 페름이었다.우랄의 공장지대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들은 육로로 이곳까지 와서 배로 카마강∼볼가강을 따라 러시아중부의 각 도시로 운반돼 나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발레단(키로프발레단의 새이름),모스크바의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극장으로 꼽히는 페름발레단이 이곳에 있다.그러나 너무 추운 환경탓에 우수한 발레리나들이 서쪽도시로 빠져나가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바랬지만 전유럽에 명성을 날렸던 발레학교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그리고 20세기초 화가 베르샤긴의 작품 60여점을 소장한 베르샤긴미술관을 자랑한다.특히 이 도시는 카마강변의 언덕위에 건설돼 체코의 프라하 같이 언덕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정경이 일품이다. ○5㎞ 얼음동굴로 유명 페름은 또한 역대 소련 외상들 중 가장 유명했던 몰로토프가 이곳에서 혁명운동을 한 인연으로 40년부터 57년까지 시 이름이 몰로토프였다.러시아 전역에는 유명한 볼셰비키라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을 딴 도시·대학이 5∼6개는 되는 게 보통이다.57년 도시 이름이 페름으로 바뀐 것은 몰로토프가 카가노비치·쉬필로프등과 함께 반흐루시초프 음모에 가담했다가 실각했기 때문이다.카가노비치는 스탈린 때 철도상을 지낸 스탈린의 최고 심복중 한명으로 이름난 킬러.러시아인들은 지금도 그를 가리켜「아이언(철혈) 카가노비치」라고 부른다. 페름역을 출발해 조금 나아가면 실바강이 나오고 강과 철길이 만나는 지점에 쿵구르역이 있다.쿵구르인들은 러시아에서도 손재주가 좋기로 이름난 사람들이다.쿵구르 구두·쿵구르 케이크·쿵구르 악기등 손재주가 필요한 정교한 제품들로 이름난 도시다.1759년까지는 우랄전체자보드(공장)의 행정본부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도시였으나 이후 시베리아철도가 건설돼 다른 도시가 커지며 상대적으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이곳을 제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쿵구르스키 리제나야 피쉐라(쿵구르 얼음동굴)」라는 지하동굴이다.길이 5㎞가 넘는 동굴안에 60여개의 호수가 서로 연결돼 있는데 항상 영하의 기온으로 얼어 있는 곳이다. ○야생능금꽃 눈부셔 길이 5백㎞의 실바강을 따라 1시간여 동안 그림같은 우랄의 절경이 펼쳐진다.강,강안의 바위,그위의 나무숲….페름주에서 우랄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역은「코르간」이다.입산신고대란 뜻의 이름인데 숲이 많은 우랄지대라 이런 마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왼편 차창밖으로 맑게 내리쬐는 5월 햇살아래 폭 1백여m의 실바강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우랄산맥의 정점에 있는 유럽·아시아 분수령에서 발원해 유럽쪽으로 흘러내리는 강이다.시베리아횡단열차구간중 최고로 꼽히는 절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강변에는 잎이 갓 돋아나 연두색을 띤 베료자와 겨울을 지나 검붉게 뻗은 소나무·옐나무들이 같은 비율로 뒤섞여 고도로 세련된 색의 하모니를 연출해내고 있다.강변에 늘어선 별장 지붕에 흰 페인트로 커다랗게 「프로다유(팔겠다는 뜻)」라고 써놓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기차가 산정을 향해 숨가쁜 행진을 계속해 본격적으로 우랄의 수중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수종들이 나타났다.야생능금꽃이 눈꽃을 덧씌운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1시간여를 달린 뒤 스베르들로프 경계를 넘어 첫번째 역인 샬랴역을 지나갔다.갑자기 잎을 달지 못한 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나 산 곳곳이 민둥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우랄은 아직 봄의 첫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우랄산맥은 서쪽으로는 페름주의 쿵구르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에카테린부르크시 직후 산세가 끝이나며 동서거리의 최장은 2백㎞,남북길이는 2천㎞에 이른다.전체적으로 완만한 산세를 보이지만 북쪽 코미공화국에 있는 최고봉 나로드나야산은 해발 1천8백95m에 이른다. 페름에서 에카테린부르크로 연결되는 현재의 직선노선은 1905년에 건설됐다.그 전에는 1875년에 건설된 북쪽 우회도로가있었을 뿐이다.이 직선노선이 건설되기전 우랄과 모스크바를 잇는 노선은 에카테린부르크에서 남으로 첼리야빈스크를 경유해 서쪽으로 사마라를 거쳐 모스크바로 연결됐다.따라서 시베리아횡단열차노선도 첼리야빈스크에서 동쪽으로 쿠르간∼페트로파블로프스크(카자흐영토)∼옴스크로 이어졌다. 현재 이 북부 카자흐경유 노선은 매우 아름다운 절경을 지나긴 하지만 승객들이 기피하는 노선이다.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양국 국경세관에서 거의 1시간 이상씩 짐검사를 해 승객들을 귀찮게 굴기 때문이다.러시아인들은 노비자이지만 외국승객의 경우 이 노선을 이용하자면 미리 카자흐정부로부터 통과비자를 얻어야한다. ○희귀금속 무진장 매장 마침내 러시아 최대 산업지구 우랄지구로 들어섰다.우랄은 최대 공업지대이면서 메탈·희귀금속의 최대 매장지다.이 금속들을 발달된 기계공업기술로 묶어 아주 밀접한 단일 경제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현재 우랄로 통칭되는 이 산업지대에는 페름주·코미자치공·스베르들로프주·첼리야빈스크주를 비롯해순수농업지대인 쿠르간주·바시코르토스탄주·우드무르티공화국등이 속한다. 우랄의 가장 큰 자랑은 역시 무궁무진한 금속이 매장돼 있다는 것이다.지질학적으로 오래된 산은 완만하지만 희귀석·메탈·알루미늄 등 귀중한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고 반면 지진대로 분류되는 신생 산맥은 산세가 가파르고 아름다운 반면 자원이 매장돼 있지 않다.우랄은 전자의 전형적인 예이다.
  • 우랄의 시작(시베리아 대탐방:20)

    ◎하루 넘게 달려도 평원과 숲의 행진이…/지역주민의 절반이 우그리언 혈통/열차내 용수,중간역서 새 물로 교환/달리는 화물열차 1백량엔 석탄이 가득가득 늦은 아침을 들기 위해 글라조프역에 내려 먹을 것을 샀다.갓 구워낸 빵,오이,토마토,삶은 감자,그리고 가장 인기품목으로 찐만두의 일종인데 상할 것을 우려해 속을 고기 대신 감자로 채워넣은 「피로시키」라는 것이 있다.잠깐씩 플랫폼에 내려 신선한 공기를 쐬며 먹을 것을 구하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중 빼놓을 수 없는 재미중 하나이다. 우드무르치족은 아주 옛날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는데 타타르의 지배를 받다가 1558년 러시아에 점령당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옛이름은 보티야키였으며 1920년 자치주 지위를 얻었다가 36년 스탈린 때 우드무르티공화국으로 승격됐다.지금은 자치기운이 드높아 자체 국기,언어,대통령까지 뽑아놓고있다.현재 러시아전역에 모두 71만명의 우드무르티인들이 있으며 이중 50만명이 이 공화국에 살고 있다. ○핀­우그리어 민족 많아 이들 우르무르티인들은 핀­우그리 어족으로 핀어와 매우 흡사한 언어를 사용하고있다.프리 우랄지역에는 이 핀­우그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특히 많은 것이 특색이다.옛소련 지역에서는 에스토니아를 비롯해 몰도바,마리아,북쪽의 한티­만시족,카렐리아,코미족들이 이 핀­우그리어족에 해당한다.같은 발트3국이면서도 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랩란트어족으로 에스토니아와 전혀 다른 언어구조를 갖고있다. 옛소련지역에는 이 핀­우그리어족 외에도 크게 슬라브어족과 터키어족등 3대 어족이 살고있는데 슬라브어족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인이 있고 터키어족에는 카자흐,키르기즈,우즈벡등 중앙아시아인 대부분이 해당된다. 모스크바도 사실은 9세기에 러시아인들이 점령하기 전까지 핀­우그리인들의 땅이었다.당시 러시아인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8,9세기에 걸쳐 북동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었다.9세기에 모스크바를 점령한 러시아인들은 11 47년 모스크바를 도시로 정식 출범시켰다.그래서 오는 97년은 모스크바시 건설 8백50주년이 되는 해이다.금년 2차대전 승전 50주년식에 이어 또 한바탕 요란한 잔치가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글라조프역에서는 우랄산맥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 제2의 도시 니즈니타길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가 반대편 선로에 정차해있었다.우랄산 보석이름인 「말라히트」라는 열차이름이 우랄의 분위기를 한껏 전해준다.글라조프를 출발해 남부 이조프스크시로 연결되는 교차점을 지나 곧바로 쳅차강을 넘으면서 기차는 페름주로 들어갔다.쳅차강은 불과 폭10m의 작은 강이었다.페름주부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2시간으로 늘어났다. ○열차비품 승객에 팔아 남자 승무원이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쇠로 만든 유리잔 받침대를 사라고 한다.「티탄」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차이(다)나 커피를 타마시는데 꼭 필요한 물건이어서 3만 루블을 주고 2개를 샀다.사고 보니까 받침대는 여기저기 우그러져있고 함께 산 유리잔은 온통 금간 투성이다.승객들에게 나누어주어 쓰게 한 다음 내릴 때 회수토록 돼있는 물건을 이렇게 팔아치우는 것이다.승무원들의이런 크고 작은 비행은 여행 내내 지겹도록 계속됐다.어쨌든 이렇게 안면을 튼 덕분에 모스크바에서 가지고 간 전기솥으로 승무원방에서 편법으로 라면까지 끓여먹을 수 있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상오 10시 15분 페름주의 첫역 바라둘리노에 도착하면서 마침내 프리(pre) 우랄이 시작됐다.페름 역시 「먼 땅」이라는 뜻의 핀­우그리어에서 유래된 이름이다.페름과 스베르들로프주등 우랄 일대에 사는 주민들 절반은 우그리언 혈통이 섞여있다고 한다.플랫폼에 오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니 일리가 있는 말같기도 하다.스베르들로프주 출신인 옐친 대통령의 얼굴에도 우그리언의 얼굴형태가 남아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페름 도착 전 「크라스노 캄스크」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역을 지났다.「카마강변의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이다.주민 6만명 미만의 소읍이지만 러시아화폐용지를 찍어내는 유명한 셀룰로스 콤비나트가 있는 마을이고 거기다 매년 러시아씨름인 삼보 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반대편 선로에 화물열차가 지나가는데 매달고 가는 화차수를 세어보니 1백개가 넘는다.모두 석탄을 가득 싣고있다. 러시아의 최대 산업지대,우랄의 위력을 알려주는 전초같이 느껴졌다.아울러 우랄로 접근하며 스위스 못지 않은 절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만 하루 넘게 계속되던 평원,숲의 행진이 마침내 끝이 나고 있었다.시베리아철도여행의 참맛은 관광을 위해 굳이 중간에 내릴 필요가 없다는 데도 있다.여행 내내 자석처럼 차창에 붙어앉아 철로변을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산천풍경,나무,그리고 사람들을 보고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조금 과장한다면 단지 샤워를 하고 제대로 된 더운 음식을 먹기 위해 중간도시에 내려 호텔신세를 질 필요가 있을 뿐이다. 현지시간 낮 2시20분 페름역에 도착했다.페름시로 진입하며 철길위에서 내려다본 카마강은 한때 이름높던 푸른 강물이 아니라 다소 흙탕물이다.교각이 8개에 철교길이 1㎞가 넘는 큰강이다. ○푸른 카마강은 흙탕물 페름역에서는 35분간이라는 비교적 장시간 정차를 하는데 열차내의 물을 교환하기 때문이다.식당칸이나 화장실에서 쓰는 물을 비롯해 열차내모든 물을 기차밖으로 쏟아내고 대신 카마강에서 길어올린 신선한 새물을 기차에 가득 채워넣는 것이다.플랫폼을 따라 설치돼있는 쇠파이프에 두개의 구멍이 달려있는데 그곳에 고무 호스를 끼워서 한쪽으로는 물을 뽑아내고 다른 한쪽으로는 새물을 채워넣는다. 이 시간을 이용해 잠시 역사 바깥으로 나가보았다.모스크바도 마찬가지이지만 러시아의 철도역은 역개찰구에서 표검사를 하지 않는다.대신 객차마다 배치된 승무원이 승객의 타고내리는 것을 체크하는 것은 물론 여행중 모든 사항을 책임지도록 돼있다.그래서 역사를 드나드는 것은 자유다.역사에는 러시아의 공통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술취해 긴나무의자에 쓰러져 자는 노인,그옆에 쪼그리고 앉은 손녀인듯한 여자아이등,3층짜리의 제법 규모있는 역사이지만 내부는 완전 슬럼,쓰레기 천지였다.
  • 옐친,“러군 체첸 상주” 포고령/의회의 「파병 위헌」 소송에 대응

    ◎양측 평화회담 결렬 우려 【모스크바 AP AFP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4일 체첸공화국에 러시아군을 상주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날 포고령은 러시아의회 의원들이 체첸에 대한 군병력 파견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않고 이뤄진 위헌행위라며 법원에 제소한데 대한 대응조치로 이뤄진 것이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휴전을 선언하고 체첸 지도자들과 평화회담에 나섰으며 지난 2주간의 회담에서 러시아군 철수와 체첸저항군 무장해제,신정부 구성등에 관한 임시합의를 도출해 낸 바 있다. 파벨 그라초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이날 평화회담과 관련,인테르팍스 통신과의 회견을 통해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전쟁만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면서 평화회담 성공을 낙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의회 의원들은 러시아군 상주를 허용한 포고령으로 인해 평화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발레리 보르쉬초프 두마(하원)의원은 『현재 진행중인 평화회담이 실패로 끝난다면 책임은 러시아측에 있다』면서 『옐친 대통령의 조치는 체첸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긍정적인 정책변환을 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 구 소 90억달러 재산/러,외국에 반환 요구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러시아는 전 세계에 널려 있는 90여억달러규모의 과거 제정러시아 및 소련의 해외 재산을 반환받으려 애쓰고 있으나 소유권입증이 쉽지 않다고 3일 발레리 파테예프 관재위원회 부위원장이 밝혔다. 파테예프 부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가족·귀족 및 옛소련 귀속 해외재산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첫 단계로 대사관을 제외한 토지,건물,주식등 이들 해외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오늘의 러시아에 있음을 입증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 미의 대중정책 일관성 있어야(해외사설)

    중국의 이붕 총리는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으스대는」 미국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의 공동대응을 촉구했다.닉슨 전 미국대통령이 옛소련 억제용으로 대중국 유화정책을 쓴 지 25년만에 중국은 대미 지렛대역할을 하기 위해 삼각외교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한때 미국외교의 자랑거리였던 미·중관계가 매우 껄끄러워졌다는 증거다.클린턴대통령이 미국국익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인내와 단호함이 요구된다. 미국이 북경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미국에게 확실한 이익이다.중국은 핵강국의 하나이고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경제국이며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사는 나라다.미국 회사들은 지난 79년이후 70억달러 이상을 중국에 투자했으며 매년 90억달러어치의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또 미국은 4백억달러에 가까운 중국상품을 수입함으로써 중국을 미국의 6대 무역국으로 자리잡게 했다. 그러나 양국관계 유지는 수월하지가 않다.부시 전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의 민감성을 수용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중국 지도자들은 협력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더욱 신랄한 태도를 보였다.현재 그들은 등소평이후를 위한 정치적 기반확장에 몰두,모든 계파가 이념적으로 엄격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미·중 관계는 89년 천안문사태이후 악화됐지만 정확히 말해 워싱턴정부가 이등휘 대만총통에게 모교인 코넬대학 방문을 허용한 뒤 최근 몇주 사이에는 아예 무너져 버렸다.중국은 워싱턴주재 중국대사를 소환하고 미국의 짐 세서 신임 북경대사의 승인을 유보했다.이란·이라크와 두드러지게 관계개선을 추구했다. 닉슨이 냉전시대의 모스크바 대응수단으로 북경과 관계를 맺은 이래 중국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변했다.오늘날 미국은 핵확산과 지역분쟁을 억제하고,역동적인 세계최대시장에의 접근을 보호하며,반체제 지식인 및 소수민족등 중국인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촉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년동안 중국은 무기판매서부터 교도소 노동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약속과 국제적 합의를 위반했다.워싱턴정부는 중국이 경제개혁에 전념하는데 만족했었다.그러나경제재건은 정치적 억압과,미국이 보다 강하게 항의해야 하는 국제적 호전성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북경정부는 최근 남사군도에 대한 자국의 권리를 믿기위한 명목에서 군함을 파견했다.최근 민주적 지식인들의 재구속과 미국시민권자에 대한 영사접근 거부를 비롯한 중국의 인권문제 악화에 대해 미국은 중국이 분명히 원하는 각료레벨의 방문과 양국 정상회담 등의 조치를 보류시키는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이달말 연례 동남아 외무장관회의에서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면 중국이 남사군도에서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지역안정에 가해진 위험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시해야 한다. 워싱턴정부는 중국의 외교적 도발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그러나 중국의 민감성에 대한 과도한 우려는 정책의 마비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북경정부의 과도기는 순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미국의 대중국 처리자세는 명확하고 일관돼야 할 것이다.
  • 떠오르는 휴전론(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9)

    ◎“전세 불리”… 김일성,중·소 극비 방문/북경 이어 모스크바서도 “휴전유익” 의견 일치/소,대미협상 우위 노력 중 비행사단 투입 요구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는 가운데 모택동은 전선이남으로 불시공격을 가해 적에게 타격을 가한 뒤 신속히 북으로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전법을 써보자고 스탈린에게 제의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 전법이 한두번은 써먹을 수 있으나 위험부담이 커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답했다.『영·미군은 금방 이 작전을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으로 후퇴하기 전 큰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스탈린은 한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총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스탈린이 51년 5월29일자로 모택동에게 보낸 이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전문번호 N3282.소련군총참모부 제8총국.대통령문서소 보관). ○“대규모 작전 필요” 이런 전술은 공격작전완료 뒤 주력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후방방어를 훌륭하게 해줄 전력을 갖추었을 때 가능함.그러나 본인이 아는 한 인민군은 그런 전력을 갖추지못했음.영·미군은 북진하면서 차근차근히 새로운 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할 것임.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며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님.모동지가 중국공산당이 장개석군대를 상대로 이 전술을 구사했음을 참고로 든 데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음.영·미군은 장개석군대 같은 오합지졸군대가 아님을 명심하기 바람.그들은 모동지가 임의대로 자기들의 병력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도록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만약 평양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이는 조선인민군의 사기저하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적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작전을 준비해야 할 것임. 6월에 접어들며 전황이 점차 더 인민군에 불리해지고 있는 가운데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6월4일자로 팽덕회가 모앞으로 보내온 전황보고서였다.특기할 것은 이 보고서에서 팽이 전력의 열세가 점차 뚜렷해져 정면대결의 승산이 희박하다고 보고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이다(전문번호 N20406). 적은 다량의 포·탱크·항공기를 동원해 공세를 계속하고 있음.반면 아군은 이에 맞설 확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지 못했음.7월말까지 소총·대전차포·대공무기를 추가공급받으면 적극적으로 게릴라투쟁을 전개하겠음.적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가시키지 않고 아군이 예측치 못한 작전미스를 범하지 않는다면 전선을 평양이남에서 저지할 수 있음.…중략… 적이 대규모의 병력·항공기·탱크·막강한 포를 보유한데다 사기까지 드높아 현상황에서 적을 차례로 격파하기는 쉽지 않음.따라서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전력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음.적이 전진할 때까지 당분간 기다렸다가 전진하면 후방에 게릴라부대를 투입시키겠음. 그러나 바로 같은 날 팽덕회는 전병력에게 총퇴각명령을 하달했다.이 명령문은 『전선이 너무 확대됐다.수송수단이 부족해 식량·탄약보급조차 힘들다.병력은 지쳤고 이제 남으로 더 진격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제5차 공격작전의 제2단계를 예정보다 앞당겨 종결짓고 병력을 제5차 작전의 제1단계를 시작한 지점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그곳에서 1개월 반 내지 2개월동안 병력을 재정비,강화한 다음 새로운 전투에 대비,훈련을 쌓도록 하겠다』는 비장한 어투를 담고 있다. ○휴전추진 모에 맡겨 팽덕회로부터 이 퇴각명령문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이의 사본을 같은 날 즉각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 N20412.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 명령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휴식기간에 중국의용군사령부는 다음 사항을 이행한다.…중략… (2)우리군 내부에 심각히 만연된 우익풍조를 일소함.…중략… (4)항공기·대전차예비병력·대공포부대를 전선에 투입시킬 준비를 갖춤.(5)적의 후방에 게릴라부대 투입,전선을 확장해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그렇게 해서 향후 아군 주력군이 작전을 펼치는 데 용이하게 함.아군병력은 6∼7일간 진격하고 나면 식량·탄약이 부족해지고 병력은 지치기 시작했음.반대로 적은 미리 대규모 기계화병력을 준비해 아군의 공격작전시 진격과 퇴로를 모두 중도에서 차단했음.우리는 이런 점을 미리 고려치 못했음.도보로 걷는 아군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적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음. 이런 이유 때문에 공세작전 수행시에도 1차·2차·3차의 방어선을 만들어야 했음.새로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은 훌륭한 장비를 갖춘 적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없었음.특히 방어전경험은 전무했음.하급지휘관들의 질이 특히 형편없었음.기술적으로 잘 무장된 적을 상대로 용기 하나만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음.용기와 합리적인 리더십이 함께 갖추어져야 함.모택동 동지는 소규모전투에서 적을 패배시킴으로써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나아가 대규모패배를 안겨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주문했음.지금같이 모험적인 공세를 계속하는 적을 상대로 해서는 이같은 전술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 이 명령문은 게릴라식 소규모전투를 통해 적을 괴롭히자는 전술변화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총퇴각결정이었다.이후 중·조선연합군은 적극적 방어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같은 상황악화로 인해 중공·인민군은 마침내 탈출구를 모색하기에 이른다.휴전문제가 북조선·중국 양측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스탈린도 이를 무시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물론 휴전협상을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전력을 강화하고 한치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전투를 계속 수행해나갔다.아울러 이들이 내건 휴전협상조건도 매우 비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자신이 직접 휴전협상에 나서기를 거부하고 이를 모택동에게 맡겼다.아울러 전쟁이 파장기미를 보이며 스탈린과 모택동 두 사람 사이에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군사고문단 추가파견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졌다.모택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원조요청을 내놓았고 스탈린은 갖은 이유를 달아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팽덕회의 철수명령이 떨어진 바로 이튿날인 51년 6월5일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웠다(대통령문서소 보관.전문번호 N20448.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 ○“최소 8개사 보내라” 필리포프 동지께.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정문제,바로 우리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는 문제,적이 바로 우리 영토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는 등 여러 심각한 문제를 겪었음.조만간 고강 동지를 모스크바로 파견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지의 지시사항을 듣고자 함.현재 김일성 동지가 북경에 와 있음.김일성동지도 고강 동지와 함께 스탈린 동지를 찾아가 이 문제들을 의논하고 싶어함. 이 전문에 이어 김일성은 고강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전쟁중 고위지도자의 동정과 관계되는 일은 모두가 극비였지만 특히 이 당시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을 만났고 이어서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을 만난 사실은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극비사항이다. 김일성·고강의 방문을 받은 뒤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방문결과를 통보해주었다(51년 6월13일.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3557). 오늘 본인은 모택동 동무가 보낸 대표단과 조선대표단(김일성과 고강)을 만났음.이 자리에서 3가지 문제가 제기됐음.첫째 휴전문제.현상황에서 휴전은 유익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음.둘째군사고문단문제.군사고문단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보내주겠음.셋째 60개 사단에 필요한 무기공급문제.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음.대표단들이 귀국즉시 동지께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상세한 사항은 이 전문에서 언급치 않겠음. 이와 함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중국 비행사단 16개중에서 최소 8개 비행사단을 신속히 전선에 투입해줄 것을 요청했다.조만간 시작될 휴전협상에 앞선 일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력강화의 일환이었다. ◎새로 발혀진 사실/김,51년 6월초 모·스탈린과 연쇄 대좌/휴전협상 문제 북·중·소 협의사실 판명 우리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전술적 이견이 단순치 않았다는 점을 이번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모택동은 장개석군대와의 내전때와 같은 게릴라전술을 주장하였으나 스탈린은 영미군은 장개석 군대가 아니라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적인 작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⑴전쟁의 결정 ⑵중국군의 참전문제 ⑶전세 역전 후의 북한정부의 구제여부 ⑷참전중국군에 대한 지원문제등한국전쟁과 관련한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주 이견을 보여온 스탈린과 모택동이 휴전회담의 개시를 놓고 다시 한번 의견의 차이를 보였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병력으로 싸우기 때문에 모택동은 제한적인 전쟁을 하려했던데 반해 배면에 숨어서 중국군과 북한군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있는 스탈린은 대규모의 전쟁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회의 내용에서 밝혀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전쟁중 김일성의 북경과 모스크바 방문사실이다.전쟁중 김일성이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모택동과 스탈린을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그것이 휴전협상의 개시를 앞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중의 휴전협상의 개시가 이들 공산3국의 깊숙한 논의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전쟁을 결정할 때와는 달리 김일성은 이번에는 모택동을 먼저 방문하고 그다음에 스탈린을 방문하는 순서를 밟았다.아마도 스탈린의 결정을 수용하여 그대로 전쟁을 수행하기보다는 직접 참전하여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모택동의 견해를 먼저 들어 둘의 의견합치를 본 뒤에 이를 갖고 스탈린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한의 전쟁 결정과 진행이 중국 및 소련과의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들어 전쟁중 언젠가 김일성이 모택동과 스탈린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추론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이를 증명할 자료는 물론 이러한 사실조차 한번도 증명되거나 공개된 적이 없었다.따라서 이번에 공개된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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