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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인의 망명과 체제의 행방」/기무라 히로시(해외논단)

    ◎황장엽 비서 탈출은 북한체제 격변의 예조 황장엽의 망명은 옛소련의 선례에 비추어 볼때 북한의 격변 조짐이 일 가능성이 있다고 기무라 히로시(목촌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가 24일 도쿄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주장했다.「지식인의 망명과 체제의 행방」이라는 제목의 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우리는 반드시 귀국하고 말겁니다!』 1974년 말 솔제니친 부인이 모스크바공항에 마중나온 러시아 군중을 향해 외친 말이다.그녀는 이미 시민권을 박탈당해 스위스에 사실상 국외추방돼 있던 반체제작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스스로 자녀를 데리고 조국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당시 소지하고 있던 외교관여권 덕분에 그녀의 바로 옆에 서서 따라가면서 말을 걸기도 하면서 기내로 사라지는 그녀를 떠나보내는 서방측 최후의 사람이 됐었다. 당시의 소련 정세로 보아서 나는 그녀가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고는 솔직히 말해 상상하지 못했었다.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공산주의의 붕괴,냉전의 종료,소련 연방의 해체라는 생각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발생후 94년 여름 솔제니친 일가는 20년만에 러시아에 돌아왔던 것이다. 또 하나의 예.올해 1월말 나탄 샤란스키씨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샤란스키씨는 브레즈네프시대의 소련에 있어서 저명한 반체제 지식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통산장관이다.이스라엘로 돌아온 유태인중 최상급의 지위에 오른 옛소련인으로서 70명이나 되는 대규모 실업가 대표단을 이끌고 11년만에 조국에 「귀향」했다. 샤란스키 통산장관은 반체제운동의 별 사하로프 박사의 묘앞에 꽃을 바치면서 말했다.『박사는 수소폭탄의 발명자였다.그러나 그 폭탄이 결코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유 인권옹호의 투사가 됐다.그러나 어떤 독재자라도 박사가 들이댄 「폭탄」으로부터 소비에트체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 샤란스키씨는 모스크바 체재중 레폴도브감옥에도 들렀다.바로 20년전 이 감옥의 47호실에서 샤란스키씨는 구금돼 있었다.샤란스키씨는 시간의 경과가 불러 일으킨 변화의 격렬함을 믿을수 없는 듯 『내가 앞서 필사적으로 싸움을 해왔던 체제 그 자체가 붕괴돼 이미 존재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했다.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비서는 왜 평양을 떠날 결심을 굳혔는가.자신이 지도하고 체계화에 노력한 주체사상이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독재자에 의해 인민억압의 도구로 왜곡돼 이용당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에 따라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동포에 미안하다고 하는 사명감등이 황비서의 망명동기로서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인 듯하다.이같은 황비서의 의도 내지는 희망은 실현될 것인가. 황비서는 이미 74세.과연 황비서는 살아서 북한체제의 붕괴를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는 귀향을 행할수 있을 것인가.그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북한 체제의 존속은 대단히 많은 변수에 의해 규정되는 다원연립방정식이다.황비서가 망명한 결과로서 국내에서는 단속이 강화돼 결과적으로 북한 체제의 연명에 이바지할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다.나라 사정이 다른 옛소련의 경우와 안이하게 비교하는 것은 금물일 것이다. 하지만 철벽의 관리를 과시하던 북한체제로부터도 황씨와 같은 고위간부의 망명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의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옛소련 등의 선례에 비추어 생각하면 이는 가까운 장래에 있어 북한의 격변의 예조가 아닌가 생각된다.소련 및 동유럽제국의 최근 격변은 어떤 체제라도 미래영겁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특히 딱딱한 구조의 체제는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면 중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붕괴에 이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북 권력 내부물갈이 가속화/황장엽 망명·최광 사망이후의 움직임

    ◎70∼80대 혁명원로 퇴진 1순위 관측/김정일 동년배·측근 대거 기용할 듯/모양새 고려 권력승계후 인사단행 가능성 높아 「황장엽 망명 쇼크」와 인민무력부장 최광의 사망이 지금까지 김정일이 내부적으로 추진해온 권력개편작업에 가속을 붙일 것으로 보인다.북한전문가들은 21일 밝혀진 강성산총리의 해임사실은 기왕에 물밑에서 이뤄진 물갈이작업의 한 단면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알려지지만 않았을뿐 북한 내부에서는 권력개편이 상당히 큰 폭으로 진척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같은 작업은 향후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강의 해임과 관련,이들은 해임사실이 황장엽 망명사건 직후에 확인된 점을 중시하고 『황비서 망명사건과의 연계성을 배제키 어렵다』고 지적했다.전문가들은 『황비서나 강총리 모두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한 혁명 1.5세대들로 나름대로 개혁.개방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면서 『이같은 분석이 맞는다면 북한에서 이미 권력개편작업이 상당 부분 추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의 총리해임배경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경제난,식량난,전력난 등 3난에 대한 인책과 비개방파와의 권력암투,건강악화,그의 사위라고 주장한 강명도씨(38)씨의 한국망명 등이 원인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기왕에도 북한전문가들은 김정일이 총비서직에 앉게 될 경우 세대교체 차원의 인사는 정해진 수순이며 이때 황장엽은 이미 김정일에게 밉보인 농업담당 서관희비서나 병중에 있는 강성산 총리 등과 함께 잘릴 대상에 들어 있었다고 말해왔다.최광 장의위원회위원명단에서 빠진 정치국원 서윤석 후보위원 연형묵,최영림과 당군사위원회 위원 차수 이하일과 대장 이봉원의 신상변화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결과적으로 황장엽의 망명과 최광의 사망은 때가 무르익기만을 기다려온 김정일로 하여금 권력개편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이며 북한권력 내부에서는 사상검토작업을 통한 광범한 숙청과 세대교체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군부의 경우도 인민무력부장 최광의 사망으로 인사요인이 발생,자연스러운 개편이 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그렇다고 김정일이 「황장엽쇼크」에 놀라 당장 공식적이고도 대대적인 세대교체인사를 단행할 것 같지는 않다.대부분의 북한전문가들은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 속성상 인사시점은 김정일의 공식권력승계후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당장 인사를 할 경우 황의 망명으로 동요하고 있는 치부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에 북한이 굳이 피할 것이란 이유에서다. 김정일이 권력승계후 단행할 인사에서는 맨먼저 황과 같은 혁명1세대 원로들이 함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노동당의 경우 현 정치국원이나 후보위원 그리고 비서들은 대부분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활동을 함께 한 70∼80대의 원로들이다.따라서 김정일로서는 이들을 부리는데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우선 부주석이자 당정치국 정위원인 이종옥 박성철 등은 김정일보다 연장자일뿐아니라 김일성과 항일혁명을 같이 한 원로들이기 때문에 김정일로서는 컨트롤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같은 맥락에서 버겁기는 사회안전부장 백학림 원수 이을설 등 군원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당·정·군 주요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70대 원로들에 대한 리더십행사도 김정일에게는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이런 점을 고려할 때 김일성과 혁명을 같이 했거나 김정일보다 10년 이상 연상인 원로들은 김정일의 대권승계와 함께 권력핵심부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렇다고 혁명원로를 마구잡이로 내칠수는 없는 일.따라서 이들에게는 극히 상징적인 자리,즉 위원회의 위원이나 자문위원,고문같은 한시적 자리가 주어질 개연성이 많다. 결과적으로 세대교체를 통해 김정일체제는 70∼80대 원로들인 항일혁명세대가 퇴조하고 김정일과 같은 50∼60대로 물갈이될 것으로 보인다.바로 여기서 중용될 것으로 보이는 인물로는 현재 대남담당비서를 맡고 있는 김용순과 장성택 당제1부부장,군에서는 군총정치국장 차수 조명록을 비롯하여 총참모장인 차수 김영춘 대장 현철해 대장 김명국 대장 박재경 대장 김하규 보위국장 원응희 등이 꼽히고 있다.이밖에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 최용해와 한동안 남북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김달현 등의 중용도 예상된다. 김정일의 공식권력체제가 출범할 경우 권력조직이 어떻게 개편될 것인가도 관심사다.그러나 이에 관한 대답은 그리 쉽지가 않다.북한체제가 합리적인 사고와 예측성을 갖고 조망하기에는 매우 여려운 이상성과 의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김정일이 아무리 의욕적으로 조직개편을 추진하려고 해도 기존의 당·정·군조직이 갖고 있는 기반을 단시간내에 무너뜨리거나 변화된 상황에 짜맞추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란 이유도 있다. 따라서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북한은 당분간 우리식 사회주의 불패성을 주창하면서 기왕의 대내외노선을 답습할 것으로 보인다.다만 주체사상이 붉은기 사상으로,김일성이 김정일로 대체되는 그런 변화는 나타날 것으로 관측된다.〈장수근 연구위원〉
  • 옐친 공개석상 첫 모습/각료와 무명용사묘 헌화

    【모스크바 DPA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폐렴으로 입원한 이래 처음으로 23일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였다고 이타르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옐친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현충일을 맞아 정부 각료들,의원 등과 함께 무명용사묘를 찾아 헌화했다.
  • 나토확대 합의 실패/올브라이트·옐친 회담

    【모스크바 AP AFP 연합】 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 확대에 대한 러시아측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21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석화·이반황제/볼쇼이 발레 대표작 안방서 본다

    ◎EBS,오늘·새달1∼2일 잇따라 선봬 EBS­TV가 옛 소련의 볼쇼이발레단 공연의 진수를 영상으로 전한다.「로미오와 줄리엣」(22일 밤12시10분),「석화」(3월1일 밤12시10분),「이반 황제」(3월2일 하오7시20분)등 볼쇼이가 자랑하는 인기 레퍼토리 세편을 잇따라 방송하는 것. 이 필름들은 러시아 발레곡의 대표 작곡가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해 지난 91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선보였던 공연작. 세익스피어 원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프르코피에프의 음악에 레오니드 라브로프스키가 안무를 맡아 1940년 레닌그라드 키로프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전세계 발레팬의 사랑을 받아왔다.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이 몸담은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내한공연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졌다. 프로코피에프가 작곡하고 대본을 완성한 「석화」는 우랄산맥 지방에서 전해오는 공작석을 둘러싼 석공과 약혼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작품.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석화」는 발레 특유의 환상적 세계를 고전적발레기법으로 최대한 살렸으며,우랄지방의 민속음악이 덧붙여져 웅장한 스케일로 펼쳐진다. 「이반 황제」는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면보다는 정치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로 1975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한 2막짜리. 16세기 러시아 모습을 18개 장면으로 형상화했으며,볼쇼이발레 특유의 역동적인 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 등소평 사망­중 정부의 치적 평가

    ◎대륙 통일·중국적 사회주의 이론 확립/「모 절대무오류」 비판… 실사구시사상 체계화/일국양제 제시… 홍콩주권반환 결정적 기여 【북경 연합】 중국당국은 당·전국인민대표대회(전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등소평 사망발표에 관한 서한에서 등소평의 일대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등소평 동지는 초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1차 국·공내전기간중 처음으로 북서 중국에서 혁명군의 정치공작임무를 맡았다. 등은 이어 국민당과의 무장투쟁을 결정한 1927년8월9일의 무한긴급회의에 참석한 후 홍군의 제7군과 제8군을 조직,무장봉기에 본격돌입했다. ○모택동과 대장정 참가 그는 이후 중앙혁명기지에서 당시의 좌파로부터 모택동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됐으나 홍군 총정치부에 복직한 후 장정에 참가했다.등은 장정기간중 중국공산당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은 존의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항일투쟁에서 주로 북중국에서 홍군의 여러 요직을 거친후 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7전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중·일전쟁기간중 그는 야전군의 정치위원 등을 맡으면서 전투를 내부지역에서 외부로 전환하는 모택동의 전략적 결정을 혁명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어 총전선위원회의 서기겸 당 동부지부 제1서기로 양자강 도강작전 등에서 승리,남경·상해 등 남중국의 여러 지역을 해방시켜 국민당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이어 남서중국으로 진출,티베트 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방,중국대륙통일과 새 중국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등소평은 대륙통일이후 공산당 중앙위 남서지부 제1서기를 맡아 이 지역의 정치권력·사회개혁과 경제회복을 주도했다. ○56년 당총서기에 선출 곧 이어 북경의 중앙지도부에 진출한 그는 1954년 당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1년후인 1955년 중앙위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1956년 8전대회에서 당헌 개정보고를 하고 공산당의 통치능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선도했다. 8중전회 1차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임위원 겸 중앙위 총서기에 선출된 등소평은 모택동과 함께 중국 집단지도체제의 핵심멤버대열에 합류했다. 등소평은 10여년동안 당 총서기로 재직하면서 서기처를 관장,▲사회주의체제 확립과 사회주의건설 ▲중국실정에 맞는 사회주의자의 길을 증명하고 ▲경험을 종합,정책을 조정하고 난관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이어 소련 공산당과의 협상을 위해 수차례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중국 공산당의 자주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당과 당관계에서 일체의 불공평에 반대했다. ○문혁중 실각·73년 복권 문화혁명기간중 그는 부당하게 비판을 받아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는 박해를 받았다. 지난 73년 복권된 등은 2년후인 75년 당 중앙위 부주석,국무원 부총리,중앙군사위 부주석,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당·정·군의 일상업무를 관장했다. 등소평은 당시 중국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력적인 조정노력을 기울이면서 4인방과 투쟁을 벌였다. 등의 이같은 조정노력과 투쟁은 당간부와 일반인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당의 올바른 지도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등의 노력은 전국적으로 지지를 받아 단기간에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그는 다시 부당하게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당했으나 당내에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굳혀 4인방을 타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등소평은 4인방을 타도하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당원과 인민의 긴박한 요구에 따라 모든 공직을 다시 맡았다.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이같은 대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됐고 역사적인 경험과 교훈의 집대성이 필요했다.중국은 국제정세의 진전에 따라 사회주의 발전전략을 재검토하고 미래발전전략의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등소평은 당과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그는 무엇보다도 당 사상과 노선을 바른 궤도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키를 제대로 잡았다. ○4인방 타도계기 마련 그는 실사구시가 모택동사상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면서 『모택동이 내린 결정은 무엇이든지 옳고 모가 시달한 지침은 반드시 고수한다』는 이른바 2개의 절대무오류이론에 반대했다.등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토론을 지지하고 마음을 해방시키고 실사구시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재확인했다.잘못된 사상과 정치노선의 수정은 11기 3중전회의 지도적인 지침이 됐다. 이 회의는 새로운 중국건국이후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면서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새시대 도래를 가져왔다. 등소평이 제2기 중앙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이 된 것은 바로 이 회의이후였다. 이 새로운 시대에 등소평동지는 다른 집단지도부 멤버와 함께 당과 국가의 장래와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그 하나는 중국건국이후 모든 역사적 경험을 종합,당을 이끌면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시정하고 모택동사상을 과학적으로 이해,체계화시킨 점이다. 둘째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건설이론을 제시,발전시킨 점이다.사회주의 초기단계에 「1개 중심,2개 기본축」이란 노선을 당의 방침으로 공식화하고 경제·정치·외교·교육·고학기술·문화·군사·통일문제·당건설 등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당의 원칙과 정책을 확정,개혁과 개방을 통해 사회주의 현대화발전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발전시켰다. 등소평은 통일을 위해 일국양제 이론을 제시,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오는 7월 홍콩주권을 반환받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만과의 통일문제도 이 원칙에 따라 결국 해결돼 완전한 조국통일이 완성될 것이다.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이론은 국제정세변화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한데서 비롯됐고 이는 미국과 일본·옛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인접국 및 제3세계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중국이 현대화에 주력할 수 있는 국제적인 여건을 조성했다. ○종신제 반대·공직 은퇴 등소평은 또 13전대회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종신제폐지를 주창함으로써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제2세대에서 3세대로 세대교체의 길을 열었다. 등은 생애 마지막 공식활동으로 지난 92년 심천을 포함한 남부지방을 방문,남순강화를 통해 당의 새로운 기본노선을 총정리했다.
  • 러군 20만 감축/연내 150만 수준으로

    【모스크바 AFP 연합】 러시아는 올 연말까지 병력을 20만명 감축할 계획이라고 이고르 로디오노프 국방장관이 18일 발표했다. 로디오노프 장관은 현재 러시아 병력이 1백70만명이라면서 내년에도 병력을 추가 감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나토 확대대응 안전장치 요구/옐친,새달 연두교서

    【모스크바 AFP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새달 6일 발표할 연두교서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유럽 확대에 대응한 법적인 안전보장장치를 요구할 것이라고 인테르 팍스 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옐친 대통령 측근의 말을 인용,옐친 대통령이 변화하는 안보 환경에 부응해 유럽의 새로운 안보체제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할 것이라고 전했다. 옐친은 또 냉전 이후 시대의 전략 변화에 적응하고 군비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의 유럽재래식무기협정의 개정도 요청할 것이라고 이 통신은 밝혔다.
  • 북,대중교섭에 한계 느낀듯/「황 망명」 수용시사 배경

    ◎미 식량지원도 겨냥 “현실적 선택”/체제수호 위해 「변절자」로 몰아 북한 황장엽 노동당비서 망명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의 외교부대변인은 17일 조선중앙통신과의 회견에서 『황비서가 망명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변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절자는 어디든 가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밝혔다.황비서의 망명요청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를 수용할 수도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같은 북한의 반응은 이번 사건을 「한국측의 납치」로 규정,「응당한 조치」를 호언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 사건의 성격을 새로이 규정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즉,이번 사건을 자신들의 체제위기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 개인적인 「변절」에서 비롯된 일로 몰고가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곧 이번 사건이 장기화될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북한이 인식한데 따른 변화로 보인다.통일원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중국정부와 벌여온 외교교섭에서 뭔가 한계를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이 당국자는『북한이 계속 지금과 같은 강수를 둔다면 미국 일본및 중국에 더이상 접근하기가 어려운 위기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의 식량지원 등을 노린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게 아닌가 분석된다』고 평가했다. 외무부측은 북한의 태도변화가 지난 67년 3월에 발생했던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미국망명 사건과 유사하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비동맹권인 인도를 극비리에 여행하던 스베틀라나가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직전 뉴델리주재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자 소련은 즉각 CIA납치설을 주장하며 반발했다.그러나 곧이어 스베틀라나가 자의에 의한 망명임을 명백히 밝히고 나서자 소련은 그녀를 CIA에게 돈을 받고 조국을 배신한 여자로 매도해 버렸고 이로 인해 사태수습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었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몰고가기 보다는 「변절자」의 「한심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소련의 판단덕분에 조기수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과연 북한이 이같은 소련의 사건처리 수순을 밟고있는 것인지는 속단하기 이르다.북한의 명확한 진의는 앞으로 북경에서 전개될 한·중,북·중 외교교섭을 통해 드러날 전망이다.다만 북한이 처음으로 「망명요청」을 전제로 한 입장을 피력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향후 황비서 사건을 푸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북한의 이같은 변화가 향후 남북한과 중국의 삼각외교교섭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낼지 주목된다.
  • 북 감시차량 철수 관심 증폭/황장엽 망명 6일째 북경표정

    ◎우리측 영사업무 마비로 민원 지체/“기업도 몰래 촬영” 한국주재원 불안 황장엽 비서의 북경주재 한국영사관 망명사건으로인한 삼엄한 경비때문에 영사 업무가 6일째 완전 마비되고 있다.이 때문에 17일 아침부터 영사관 건물 밖에는 여권을 잃어버린 한국여행객,서울행 조선족,국제결혼하려는 한국인과 중국인 등 1백60여명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다. ○24일께 업무재개 검토 특히 대사관측은 앞으로 1주일후인 24일에나 아시아선수촌에 있는 공보원에서 업무를 재개할 수 있도록 검토하고 있으나 북한의 테러위협과 중국 당국과의 협의때문에 그것도 장담할수 없다고 밝혀 갈길 바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하고 있다. 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영사업무 중단으로 1백50여건의 결혼업무와 2천여건 정도의 비자가 발급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왔다는 박모씨(여·23)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날짜까지 받아놓았는데 더이상 늦춰지면 결혼식을 연기해야 할 판이라고 울먹였다. ○…북한은 17일 하오늦게 한국영사부 외곽에 대기해있던 북한대사관차량을 별안간 모두 철수,대사관으로 복귀.북한은 지난12일 하오부터 황장엽 비서가 귀순해 있는 삼리둔 동3가 한국영사관 외각에 요원들이 승차해 있는 5∼10대의 북한대사관소속 차량을 배치,한국측의 동태를 밀착 감시하며 압박해왔으나 이날 하오 늦게부터 돌연 차량들을 대사관으로 모두 귀환시켜 이같은 결정에 관심을 집중케했다.이날 북한대사관 대강당 등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있는 등 모종의 대규모 회의 및 모임을 가졌다고 한 조선족 기업인이 전언.이날 상오 북한의 주창준대사는 당가선 중국외교부 부부장과 면담을 가졌다. ○…북한대사관측은 이번 사태와 관련,모스크바·유럽 등지의 공관으로부터 인력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북한대사관 앞에 있던 40대 중반의 한 북한남자는 14일 주 모스크바대사관에서 북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영문도 모른채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또 외교관으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도 유럽에서 왔다고만 짤막하게 소개. ○쓰레기 2t 나와 눈길 ○…이날상오 9시25분쯤 영사부 건물 앞에 청소용 트럭이 도착,4명의 인원을 동원해 10분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운반.쓰레기는 2t트럭 한대분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아 12일부터 영사부 건물에 상당수 인원이 24시간 비상근무했음을 입증. 이어 상오 11시쯤 한진의 컨테이너 차량1대가 이 건물에 도착,이번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해 필요한 집기 등을 들여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냈다. ’○…북한사람으로 보이는 3명이 카메라로 한국기업 사무실 출입구를 몰래 촬영하고 사라졌다. 이들 3명은 이날 상오 10시30분쯤 대사관이 있는 북경시 조양구 건국문외대가 국무빌딩 12층의 모 한국회사 북경사무소의 출입문 사진을 찍은후 이 회사의 중국인 여직원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아무런 대꾸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회사는 북한의 K무역회사와 화학섬유 등의 임가공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한국기업으로 북한측이 한국기업에 대해서도 불안감과 심리적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에서 이같은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 북 통제불능 상태… 대비책 세우자(해외사설)

    북한 노동당 중앙위비서 황장엽이 아직도 북경의 한국총영사관에 머물고 있다.중국 공안당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총영사관 출입자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고 무장경찰들을 시켜 영사관주변을 철저히 경비하고 있다.앞서서 일단의 북한인들이 영사관진입을 시도하다 제지당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황의 망명과 관련,황이 그의 보좌관과 지난 12일 스스로 한국 총영사관을 찾아 정치적망명을 요청했다고 밝혔다.북한측은 맞서 한국측이 그를 납치했다고 주장,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며 중국측이 황을 한국에 인도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그러나 성명형태의 북한측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중국측은 입장이 어려운듯한 상황이다.황장엽은 당중앙위 서열 11위,북한의 권력서열 25위의 거물이다. 황의 망명요청 사건과 관련,분명한 사실이 있다.이번 사건으로 뒤늦게나마 안정을 취한 한반도의 상황이 다시 악화될거라는 거다.한국은 지난 수요일부터 군경계태세강화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번 사태는 한반도 분단이후 남북한간의 최대사건으로 여겨진다.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종말에도 관심을 갖지만 이 보다는 현재의 북한상황에 더 관심이 크다.북한은 김일성이 사망한 뒤 상황이 무척 어려워진 것으로 알려진다.모스크바와 북경으로부터의 물질적인 지원도 끊겼다. 더욱이 최근의 홍수는 북한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었다.이런 상황하에서 황장엽의 탈출은 북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음은 분명하다.평양측의 주장,즉 황이 납치당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북한의 특수군이 요인을 납치한 적은 있어도 한국은 그런 적이 없다.우리는 황의 행동이 그가 만든 주체사상에 염증을 느꼈거나 체제에 실망을 해 나온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아니 황장엽은 보다 일찍 그것을 깨달아야만 했다.나아가 더 큰 탈출이유가 있을 것이다.김정일 통치방식에 염증을 느꼈거나 혹은 반김정일음모에 가담하다 망명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어쨌든 황의 망명은 북한의 정치·경제가 위기에 들어선 결과의 하나다.현단계에선 북한이 통제불능상태가 됐을때 어떤 나라도 구체적인 대책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북한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고 이 점이 현재 가장 큰 문제다.
  • “3년내 개혁 안되면 러시아군 완전 자멸”/민간단체 경고

    【모스크바 AP 연합】 러시아군대는 현재 비참한 상태에 있으며 군이 자멸하는 것을 막으려면 대대적인 개혁이 시급하다고 정치인·언론인·기업인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한 민간단체가 14일 경고했다. 러시아 일간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지)는 이날 비정부기구인 외교·국방정책협의회 소속회원 30명이 서명한 성명을 인용,『러시아군의 현재상태는 완전한 파국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며 정부가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군은 붕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성명은 『개혁거부는 결국 국가를 파국으로 이끈다』면서 『앞으로 3년이내에 군이 개혁되지 않으면 군은 자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경고는 이고르 로디오노프 러시아국방장관이 군대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재원의 일부만을 받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 지 1주일만에 나온 것이다.
  • 김정일 동거녀 성혜림의 조카/이한영씨는 누구

    ◎82년 귀순후 북 테러 피하려 성형수술까지 받아/유창한 러시아어로 한때 KBS PD로 일해 이한영씨(37)는 지난해 김정일의 전 동거녀 성혜림의 망명사건이 보도되면서 그 존재가 공개됐다. 이씨는 지난 82년 귀순이후 북한의 테러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얼굴모습조차 완전히 바꾸는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지난 60년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아파트에서 태어났다.군인출신인 부친 이태순씨는 53년경 연형묵 전 북한총리,허담 전 외교부장,김영남 외교부장 등과 함께 모스크바 유학생 1기로 선발돼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이씨는 이같은 가정배경과 이모 성혜림씨가 김정일의 동거녀인 덕에 북한 최고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에 진학했다.북한에서 가장 성분이 좋은 집안의 자제가 다니는 이 학교는 유치원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 등 11년제다. 그러나 이씨는 건강때문에 고교 1년때 중퇴하고 76년 모스크바종합대로 유학,81년까지 노어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유학기간중 틈틈이 동구권 국가를 여행하면서 얘기로만 듣던 미국여행을 꿈꾸게 됐다. 81년 평양으로 돌아간 이씨는 82년9월 1년간의 프랑스어연수를 위해 모스크바를 거쳐 스위스로 나왔다.제네바 레만호부근 아파트에 여장을 푼 이씨는 미국여행을 수소문했으나 북한여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스위스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한국대사관 직원과 만난 이씨는 9월28일 승용차에 올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음날 탄 비행기가 서울행.서울에 온 이씨는 유창한 러시아어 덕에 KBS에 입사,국제방송 러시아어담당 PD로 일했다.90년 KBS를 그만둔 뒤 건설업에 손을 대 조합주택 등을 건설하기도 했으나 95년 부도를 내 복역하기도 했다.KBS 재직시절 결혼한 부인과 딸 하나를 두고 있다.
  • 모스크바 유학 북 엘리트 출신/피격된 이한영씨는 누구인가

    ◎82년 귀순… 테러피해 얼굴수술/올부터 월간 여성잡지 기자로 재직 15일 밤 괴한으로부터 권총 피격된 이한영씨(37)는 지난해 김정일의 전 동거녀 성혜림의 망명사건이 보도되면서 그 존재가 공개됐다. 이씨는 지난 82년 귀순이후 북한으로부터 있을지도 모를 테러를 피하기 위해 얼굴모습조차 완전히 바꾸는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지난 60년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아파트에서 태어났다.군인출신인 부친 이태순씨는 53년쯤 연형묵 전 북한총리,허담 전 외교부장,김영남 외교부장 등과 함께 모스크바 유학생 1기로 선발돼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역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이씨는 이같은 가정배경과 이모 성혜림씨가 김정일의 동거녀였던 덕에 북한 최고 교육기관인 만경대 혁명학원에 진학했다. 북한에서 가장 성분이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는 이 학교는 유치원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 등 총 11년제.그러나 이씨는 건강때문에 고교 1년때 중퇴하고 76년 모스크바종합대로 유학,81년까지 노어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유학기간중 틈틈이 동구권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얘기로만 듣던 미국여행을 꿈꾸게 됐다. 81년 평양으로 돌아간 이씨는 82년9월 1년간의 프랑스어 연수를 위해 모스크바를 거쳐 스위스로 나왔다.제네바 레만호부근 아파트에 여장을 푼 이씨는 미국여행을 수소문했으나 북한여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한국대사관 직원과 만난 이씨는 9월28일 승용차에 올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음날 탄 비행기가 서울행.서울에 온 이씨는 유창한 러시아어 덕에 KBS에 입사,국제방송 러시아어 담당 PD로 일했다.90년 KBS를 그만둔 뒤 건설업에 손을 대 조합주택 등을 건설하기도 했으나 95년 부도를 내 복역하기도 했다.이씨는 사업에 실패한 뒤 북한실상과 자신의 체험담을 언론을 통해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이씨는 KBS 재직시절 결혼한 부인과 딸 하나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 황장엽 망명­북서 사상비판 받은 이유

    ◎작년 2월 “전쟁반대” 연설로 미운털/5월 노동신문서 “음모가” 공개 포문/김정일도 7월 논문통해 직접 비판 한국에 망명을 신청한 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는 지난해 7월 김정일로부터 논문을 통해 비판을 받았다고 아사히신문이 15일 보도했다. 관계소식통의 말에 따르면 황비서는 지난해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세미나에서 어떠한 전쟁도 해서는 안되며 인민의 생활을 우선 향상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 직후부터 비판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지난해 5월10일자 북한 노동당기관지 노동신문에는 「야심가,음모가들의 비열한 본성」이라는 기사가 게재돼 황비서그룹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황비서가 한국언론에 보도된 서한에서 북한당국이 95년5월9일을 계기로 자신의 사상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고 밝힌 부분과 부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특히 결정적이었던 것은 같은 해 7월26일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 선전부 담당자에게 제시한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는 제하의 논문으로 김은 이 논문에서『주체사상은 북한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것』이라면서 일부 사회과학자가 주체사상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김의 논문은 황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으나 관계자에게는 이 논문이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토대로 발전시킨 것으로 규정해온 황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주체사상 독창성관련 황 비판/지난해 7월 북 월간지 「근로자」서 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는 지난해 북한의 「근로자」라는 이념잡지로부터 자신이 체계화한 주체사상에 대해 비판을 받는 등 사상적 마찰을 빚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출신인 자민련 이동복 의원(전국구)은 15일 『황비서가 지난해 7월 북한의 월간 간행물인 「근로자」로부터 우회적으로 비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 간행물은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옹립하는데 기여한 중요한 이론지로서 그런 잡지가 주체사상 대부인 황비서를 비판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의원은 『이 잡지는 일본의 구월서점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입수돼왔으나 북한이 재작년부터 해외반출을 금지,현재 황비서를 비판한 논문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 「해결사 올브라이트」 첫 시험대에/미 국무의 내한 중재

    ◎주말 한중일 순방/황장엽 망명 원만한 해결 위해 적극 중재 표명 15일 하오(한국시간 16일 상오)첫 순방국인 이탈리아 로마를 향해 출발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이번 여행은 신임 국무장관으로서 주요 우방국들에 대한 상견례를 위한 의례적 방문이라는 본래 목적보다는 훨씬 중요한 실무적 여행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5일까지 10일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9개 동맹국을 순방하는 올브라이트 장관의 이번 여행은 때마침 발생한 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의 망명 처리 문제를 놓고 중국과 남북한간에 벌어지는 치열한 외교전과 때를 같이해 서울과 북경을 모두 방문하는 그녀의 중재 노력에 큰 기대가 쏠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미국무부는 14일 황비서의 망명처리는 한국과 중국간에 해결돼야 할 문제라고 강조하면서도 그러나 올브라이트 장관이 아시아 3개국을 순방할 때까지 한·중 양국간에 황의 망명 문제가 원만하게 매듭되지 못하면 미정부가 적극적인 중재 노력을 기울일수도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특히 그녀가 22일부터 순방하게 되는한·일·중 아시아 3국은 클린턴 2기 행정부가 정책의 우선권을 두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저지와 4자회담 참석 등을 지원할 수 있는 국가들로 황의 망명 이후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북한문제들이 집중거론될 것으로 보인다.그녀의 바쁜 한국방문 일정 가운데 판문점·DMZ 방문이 포함된 것에서도 그 단면을 엿볼수 있다. 이에 앞서 올브라이트 장관은 첫 도착지인 이탈리아 방문 후 독일·프랑스·벨기에·영국에 이어 러시아를 방문하게 된다.벨기에의 경우는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럽연합(EU)과 나토(NATO)를 방문하는 것으로 유럽의 전통적인 우방들과 나토 확대 등 유럽의 향후 안보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서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만나 시장경제로의 이행과정에서의 상호협력 방안들이 논의될 것이며 특히 모스크바에서 인터넷을 활용,지상의 수천개 학교들과 연결시켜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대담을 주고받는 인터넷 타운미팅을 시도할 예정이다.또 중국과는 북한문제 이외에 인권문제와 미기업체의 진출문제 등 실리적인 문제들이 함께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이번 순방이 단순한 의례적 행사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은 수행취재 신청 언론들의 쇄도에서도 짐작되고 있다.미 국무장관의 첫 해외순방때는 신청사가 별로 없던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40여개사가 신청,전용기의 좌석관계로 12개사만 수행취재가 허용됐다는 것이다.
  • EU­러시아 정상회담/새달 3일 모스크바서

    【브뤼셀 AFP 연합】 유럽연합(EU)과 러시아는 오는 3월3일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유럽 집행위원회의 대변인이 14일 밝혔다. EU는 현의장국인 네덜란드의 빔 보크 총리와 자크 상테르 집행위원장및 러시아담당 집행위원 등이 대표로 나서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만나게 된다. 양측 정상회담은 앞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옐친의 건강 문제로 취소된 바 있다.
  • 옐친 탄핵 결의안 승인/러시아 두마평의회

    【모스크바 AP 연합】 러시아 하원(국가두마)지도자들은 3주일전 건강이 좋지 않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대한 탄핵결의안이 하원에서 부결됐음에도 불구,14일 또다시 새로운 탄핵결의안을 승인했다. 지난달 탄핵결의안 논의를 주도했던 빅토르 일류힌 의원은 13일 국가두마평의회에서 승인된 탄핵결의안이 하원전체회의에서 가결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두마가 탄핵 결의안을 채택한다 해도 그 영향은 상징적인 의미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 북서 첫손 꼽히는 인텔리가/눈길끄는 황장엽 가계

    ◎부인 박승옥씨 김정일 가정교사 출신/아들 김일성대 교수… 딸은 유명한 의사 한국 망명 절차를 밟고 있는 황장엽 북한 노동당 당비서는 북한내 최고 인텔리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북한내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황비서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시절인 지난 70년대 중반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던 C씨(96년 제3국에서 망명)는 13일 『황총장은 북한이 자랑해온 전형적인 인텔리로서 고지식한 학자적 기풍을 지닌 것으로 학생들에게 알려져 평가가 좋았다』고 말했다. 관계당국에 따르면 황비서는 북한에 부인 박승옥씨와 2남2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씨는 그러나 『황비서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선희·노선·선옥 등 딸 셋과 막내인 아들 경모를 두고 있고 자식들은 모두 수재들』이라고 말했다. 황비서는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유학했고 59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맡아왔으며 87년부터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최고 이론가로서 20여차례에 걸쳐 30개국을 방문,주체사상을 강론해 온북한 지식층의 대표적 인물. 또 모스크바 유학시절 황비서와 만나 연애결혼한 부인 박승옥씨는 남편 못지않은 인텔리로 김일성의 딸인 경희(김정일의 친동생)와 경진(김정일의 이복동생)의 가정교사를 지냈으며 남편과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가정교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박씨는 특히 영어·러시아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통,최근까지 평양외국문종합출판사에서 번역업무를 담당해왔다고 C씨는 밝혔다. 황비서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사람은 외아들인 경모씨.그는 아버지의 모습과 인품·지적능력 등을 꼭 빼닮은 인물로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한 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김정일의 최측근인 장성택 누나의 사위라고 C씨는 말했다. 첫째딸인 선희씨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둘째딸인 노선씨는 평양의학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북한 의학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의료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셋째딸 선옥씨는 C씨의 남산인민학교 1년후배로서 남편은 외교부 참사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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