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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뇰레 국제안무 서울대회

    프랑스 바뇰레 국제안무대회 본부와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이사장 육완순)가 공동주최하는 ‘제8회 바뇰레 국제 서울안무대회’가 18∼20일 오후 7시30분 서울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다. 바뇰레 국제안무대회는 심사위원들이 20여 참가국을 돌며 심사해 오는 4월 대상 수상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서울안무대회는 나라별 본선대회의 하나이다. 올해 공식 참가작은 김정은 안무의 ‘히아신스,히아신스’,이경은의 ‘모모와 함께-동행버전’,박해준의 ‘그게아니야!’(이상 19일),노현식의 ‘오래된 알’,최경실의‘나무의 미소’,이윤경-류석훈의 ‘Double Way-Blue’(이상 20일) 등 모두 6편. 개막 축하공연으로 18일 김지욱 안무의 ‘Behind’,오민정의 ‘등대-빛 속으로’,최두혁의 ‘착한 늑대와 나쁜…’,대만 안무가 밍렁 양의 ‘Colors In The Fall’이 선보인다.20일 오후 3시 대학로 한국예술인총연합(예총) 회관에서는 심사위원과 국내 무용 관계자,안무가 등이 한자리에 모여 세계 무용의 흐름과 한국 현대무용의 발전 방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좌담회도마련된다. 김성호기자 kimus@
  • 금강산관광 與 “확대를 ”野 “재검토”

    8일 통일·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대정부질문에서 여야 의원들은 금강산관광,미국의 MD정책,북한상선 영해침범 문제등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금강산 관광=여당 의원들은 육로관광,관광특구 지정 등 사업 확대 및 활성화를 촉구한 반면 야당 의원들은 사업대금이 북한의 군사비로 전용된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민주당 심재권(沈載權) 의원은 “금강산 사업은 상징적 의미와 향후 남북관계 발전 등을 위해 반드시 지속돼야한다”고 촉구했다.반면 한나라당 윤경식(尹景湜) 의원은 “금강산 사업은 2001년 5월 현재 4억달러이상의 적자를 기록했고 미납금이 4,600만달러에 이른다”며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MD(미사일방어)체제 대응=민주당 소속인 유삼남(柳三男) 의원과 심재권 의원이 MD체제 구축과 관련해 각각 다른 의견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해군참모총장 출신인 유 의원은“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MD체제 참여를 요구할 경우에 정부는 충분히 대비해야한다”며 국익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촉구했다. 그러나 심의원은 “MD체제는 핵무기 보유국들 상호간 기존의 핵사용 억지전략을 무너뜨린다”며 한국의 참여에 반대입장을 보였다. ●북한상선 영해침범 논란=한나라당 윤경식 의원은 “남과북은 정전상태에 있는 만큼 군은 북한선박에 대해 유엔사 교전규칙에 따라 즉각 정선명령과 임검을 실시하고 선박을 나포했어야 했다”며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의 문책해임을거듭 촉구했다.민주당 심 의원은 “이번 사건은 우리 선박의 북한지역 무해통항권 확보,해운합의서 체결 등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계기로 승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경식 의원 발언 파문=윤 의원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검증안된 월간지 기사를 무책임하게 인용한 질문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김정일이가 김모모씨고,김모모씨가 정치자금을 줬다고 밤낮 얘기했어요.…”라는 한 월간지의 신상옥(申相玉)씨 인터뷰 기사를 일부 낭독하면서 “이렇게 신세진 것이 있기 때문에 햇볕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퍼다주고 끌려다니고 있는 것 아니냐는 국민적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이어 이 총리에게 “김모모씨,김모모씨가 누구인지 밝히라”고요구했다. 이에 민주당 전용학(田溶鶴) 대변인은 성명을 내 “발언을묵과한 한나라당과 이 총재의 사과를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이종락 홍원상기자 jrlee@
  • 노원·양천·강남구 쓰레기소각장 市 ‘광역시설’활용 추진

    현재 평균가동률이 34%인 서울의 노원·양천·강남구 등 3개 지역 쓰레기 소각장을 광역시설로 활용할 경우 쓰레기량이 45%나 줄어 김포 수도권매립지의 사용기간이 최소 20년쯤 늘어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각장 광역화계획을 적극 추진하기로 하고 주변 부동산 가격의 하락분을 보전하는 등 대책을 검토중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시정개발연구원이 합리적 지원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자원회수시설 주변지역의 경제적 영향 평가방법을 조사, 연구하고 있다””며 “”부동산가격 하락분에 대한 해소방안이 마련되면 광역화에 대한 주민들의 입장도 상당부분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자는 “”3개 시설의 여유용량을 활용할 경우 소각장 신규설치에 따른 중복투자를 막아 2,000억원 가량을 절약할 수 있고 이들 소각장의 운영수지도 지난해 23억원 적자에서 1억원 정도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시는 이런 점을 감안, 1일 처리용량이 800t인 노원소각장은 도봉·강북구 등과, 400t인 양천소각장은 영등포구와, 900t 규모모 건설중인 마포소각장은 용산·중구 등이 함께 사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다음달 2일 소각장 주변 주민대표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뒤 소각장 광역이용과 관련한 세부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심재억기자
  • [대한칼럼] 自虐하는 사회, 숲을 보자

    동방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 사건은 다시 한번 절망감을 안겨준다.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가 위험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갖게 하기 때문이다.한 벤처 기업인의 부도덕한 범죄에 금융감독원직원까지 연루됐고 금감원이 이를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니 생선가게를 맡은 고양이의 먹이 사슬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참담한 느낌이다. 게다가 이 사건을 둘러싼 정치권의 구태의연한 정쟁은 “대한민국을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씨랜드 화재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한국사회에 절망해 이민을 떠난 이후에도 똑같은 안전불감증에 의한 사고가 잇따르는 나라,전문직종에종사하는 20∼30대가 ‘삶의 질’을 찾아 외국으로 떠나는 나라-이나라를 더욱 절망스럽게 하는 정치인들을 보지 않는 방법으로 이민이고려될 수도 있을 듯 싶다.그뿐인가.“사고가 터지면 절대로 돈은 내놓지 말고 감옥에 가서 1∼2년 정도 몸으로 떼우는게 낫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 경제인들도 있다 한다.서민들에게서도 국제통화기금(IMF)위기 초기의 ‘금 모으기’같은 애국심은 이제 기대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절망감은 잘못된 것이다.자신의 품위와 나라를 포기하려면 사실 지금보다 훨씬 더 일찍이 했어야 한다.하나 하나의 사건만 바라보면 희망이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그것도 놀라운 속도로 말이다. 나이든 세대들은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말을 자주 한다.50년대중반 미국 유학길에 호텔 욕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보고 불이 난 것 아닌가 걱정했다는 이호왕(李鎬汪) 학술원 회장의 회고는 미소를 자아낸다.그러나 가슴이 서늘해지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도 많다.생때 같은 젊음들이‘의문사’로 스러져갔던 저 암흑의 시대를 생각해 보라.많은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그 시대의 어둠에 지난 2월까지 갇혀 있었던 해직교사들도 있었다.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사실상 100% 찬성률로 선출한 형식적인 선거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비판적인 답변을 했다고 해서 교단에서 쫓겨난 이한옥교사,그리고 유신 체제 지지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직돼“안사람이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식당에서 설거지 하며 겨우 생계를이어 온” 강구인교사의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그리먼 옛날이 아님을 일깨운다. 그 엄혹한 시절을 통과하며 우리가 이루어낸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가져야 한다.우리는 확실한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이루어냈고 급진전한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미관계와 동북아 질서에 변화가 오고 있다.그 변화의 중심축에 서 있었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세계적 공인을 받은 우리의 저력을 평가하는데 우리자신은 너무 인색한듯 싶다. 한국에 오래 산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장점을 모른다고 얘기한다.더 타임스 서울특파원을 지낸 영국인 마이클 브린씨는 “한국인들은 배울점이 많은 국민임에도 그들 자신은 스스로에게 비관적이다”고 말한다.‘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책을 쓴 일본기업인 모모세 타다시씨는 “한국인이 지금까지 성취한 것에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하는 한국인을 보지 못했다.한국은다른나라가 100년 걸려 만든 제철소를 30년 만에 만든 나라다.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도 필요한 덕목이지만 그것이 지나쳐 자기비하로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지금 우리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도 밖에서보다 안에서 더욱 심각하다.지나친 위기의식이 외화도피로 나타날경우 “위기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상황을 자초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전문가들도 있다.비관론자가 낙관론자보다 성공하기 힘들듯이 자학하는 사회는 발전하기 힘들다.간혹 도려내야 할 썩은 나무도 있지만 한국 사회의 숲은 건강하다.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고 자신감을가져야 겠다. 임영숙 논설위원실장 ysi@
  • 모모세 ‘한국은 변했다‘새저서 출간

    [도쿄 연합]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저서를 통해 한국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던 모모세 다다시(百瀨格·62)전 한국 토멘 사장이 최근 일본에서 ‘한국은 변했다. 일본은 어떻게할 것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모모세씨는 이 책에서 1997년 ‘18가지 이유’를 펴낸 이후의 한국사회 변화와 새 한일관계를 조명,양국이 함께 손을 잡을 경우 동아시아의 ‘새로운 번영’을 일궈낼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반일 교육을 많이 받았던 50,60대의 한국인이 변했음을느낀다며 특히 이같은 경향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지도층에서 두드러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러나 이 책에서 한국이 한때 “대일(對日) 카드의 하나로 이용했던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한국에서 과거의 일로 돼 버렸다”고지적하는가 하면 한국을 국제관계나 안보면에서 일본을 지원해 줄 가장 유력한 ‘응원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등 다분히일본 중심적인 사고도 드러냈다.
  • 고급호텔 ‘송이버섯 축제’ 한창

    가을이슬 머금은 송이버섯이 제철을 맞았다.김정일 위원장이 추석선물로 보낸 칠보산 송이로 이래저래 송이가 화제다.비싼게 흠이지만쫄깃하면서도 향긋한 솔내음이 일품인 송이버섯.고급호텔 식당가에선독특한 요리를 내놓고 ‘송이버섯 축제’가 한창이다. 호텔롯데 소공점의 한식당 무궁화(02-317-7061)와 일식당 모모야마(02-317-7051)는 31일까지 천연송이요리 특선 행사를 열고 대나무통 송이밥 정식,송이 소금구이 등을 선보인다.서울힐튼 중식당 타이판(02-317-3277),일식당 겐지(02-317-3240)도 송이튀김,전골 등을 내놓는다.또한 유명 송이산지인 경북 봉화군과 결연해 호텔로비에서 직접 판매한다.이밖에 프라자호텔 한식당 아사달(02-310-7258),호텔신라 서라벌(02-2230-3354),르네상스 서울호텔 사비루 (02-2222-8665),홀리데이인서울 이원(02-7107-266) 등에서도 다채로운 송이요리를 즐길수 있다. 허윤주기자
  • 일본 아이들은 어떤 인형 가지고 노나

    국내 최초의 일본 인형전이 부산,제주에 이어 9월 1일부터 23일까지서울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02-765-3011)에서 열린다. 일본은 인형왕국이라 불릴 만큼 많은 종류의 인형이 있다. 옛부터 이어져내려온 히나마쓰리(3월 3일 작은 인형을 장식하고 노는 여자 아이의 명절) 등의 풍습이 독자적인 인형문화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일본인형은 사랑과 기원의 결정체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자탈을 가지고 노는 천진한 아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와라베지시(童獅子)’,복숭아 속에서 태어난 소년이 나쁜 짓을 하는 오니가시마의 도깨비들을 퇴치한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옛 이야기 속 주인공을 소재로 한 ‘모모타로(桃太郞)’,연인을 사모하는아름다운 무희의 모습을 다룬 유명한 가부키무용‘도조지(道成寺)’등 70점이 소개된다. 일본인형은 고훙(胡粉,조가비를 태워서 만든 백색 안료)세공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특징.호분을 아교로 녹인 것을 인형에 두껍게 바른뒤 세부를 창칼로 조각하는 방법이다.
  • 자이모모나스 염기서열 해독

    생명공학 벤처기업인 마크로젠(대표 徐廷宣 서울의대 교수)은 알콜발효균주인 자이모모나스(학명 Zymomonas Mobilis)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세계 최초로 해독하는데 성공했다고 24일 밝혔다. 마크로젠은 인체 게놈을 해독한 미국 셀레라사의 ‘랜덤샷건’ 방식과 미 국립보건원의 포스미드 방식을 결합한 분석방법을 통해 자이모모나스 전체 염기서열 중 98.9%의 분석을 완료했으며,총 2,068개의유전자 및 그 위치를 밝혀냈다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브라질 등에 이어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생명체 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한 국가가 됐다. 서 교수는 “이번에 밝혀낸 2,068개의 유전자는 약 1,700개 정도의유전자로 구성됐을 것이라는 당초 학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라며 “연구결과를 곧 바로 미국 국립보건원이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에 공식 등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마크로젠은 연내 100% 해독을 위한 마무리 작업과 자이모모나스 칩개발,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유전자 742개에 대한 특허작업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자이모모나스는 포도당·과당·서당을 에너지원으로 살아가는 혐기성 세균이다.대체에너지산업분야에서 다각적으로 연구가 진행돼 온에탄올 발효균주로 발효조건에 따라 다양한 부산물을 생성시킬 수 있어 혈장 대용제,면역제 등 의약품 생산분야 등에 응용될 수 있는 미생물이다. 함혜리기자 lotus@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13)낯선 땅에서

    *우연히 맛 본 '홍탁' 오감 뒤흔든 맛의 혁명.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는 속담이 퍼지게 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유래가 있다.생물학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되,현지 사람들 말에 의하면 홍어는 ‘되다만 물고기’라고 한다.즉 물고기와 파충류의 중간치기라는 것이다.오래 전에 홍도에 갔을 때 섬 주위를 배를 타고 돌아보다가 물 밑 저 아래로 지나가는 거대한 물고기를 본 적이 있었다.그것은 거의 돗자리 한 장만한 크기였는데 유유히 물 밑으로 헤엄쳐 지나갔다.아마도 가오리일 거라고 뱃사람이 말했다.하여튼 가오리와 홍어는 얼핏 보아 구분이 잘 안간다.아마도 바닷 속 생물중에서는 한통속일 거라고 생각한다.홍어는 대개 방석 한 장만한 크기가 제일 맛있다.다시 ‘홍어 거시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홍어를잡으면 암놈과 수놈은 가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수놈 홍어는 암놈에 비하면 헐값이고 쳐주지도 않는다.실제로 찜해 놓은 것을 먹어보면 암놈은 지느러미 부근이나 속뼈가 흐물거리고오돌오돌 씹히건만 수놈의 것은 뻣뻣하고 딱딱해서 발라내야만 한다. 그리고 살 맛도 부드럽고 쫄깃하지 못하고 어딘가 퍽퍽한 느낌이다. 사가는 사람이야 겉모양만 보아서는 어느게 암놈이고 수놈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이 때에는 생선을 뒤집어 배 아래쪽을 보면 된다.물론암수의 성기가 다르기 때문이다.아니,물고기에 성기라니.홍어는 다른물고기들처럼 난생이 아니라 태생이다.따라서 다른 물고기들처럼 암놈이 알을 낳으면 그 주위에 정액을 뿌려서 수정 시키는 게 아니라직접 교미를 통하여 수태하고 새끼를 낳는다.어부들이야 그러지 않겠지만 중간상인들은 홍어가 들어오면 배를 뒤집어 살피고나서 수놈 홍어의 ‘거시기’부터 얼른 떼어낸다.암놈과 같은 가격을 받아내려는속셈에서다.그래서‘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가 되어 버렸다. 전라도 사람들은 홍어의 맛 중에 ‘목포 홍탁’을 제일로 친다.칠십년대 초반엔가 우연히 ‘홍탁’을 맛보고 진저리를 쳤던 적이 있었다.무슨 날고깃점 같은 것을 두툼하게 썰어 내오고,그와 크기가 비슷하게 돼지고기 삶은 것 몇점이 곁들여졌는데,묵은 김치가 찢어 먹기 좋도록 썰지도 않은 채로 한접시 따라 나왔다. 술은 주전자에 넘칠 듯 가득 들어있는 탁주 막걸리였다.상대방의 하는 짓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데 우선 날고기 비스무레한 것에 돼지 삼겹살을 겹쳐서 손으로 찢은 김치에 둥글게 싸서는 입 안에 넣었다.한 입 씹자마자 그야말로 오래된 뒷간에서 풍겨 올라오는 듯한 개스가 입 안에 폭발할 것처럼 가득찼다가 코를 역류하여 푹 터져 나온다.눈물이 찔끔 솟고 숨이 막힐 것같다.그러고는 단숨에 막사발에 넘치도록 따른 막걸리를 쭈욱 들이켠다.잠깐 숨을 돌리고나면 어쩐지 속이 후련해진다.참으로 이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혀와 입과 코와 눈과 모든 오감을 일깨워 흔들어버리는 맛의 혁명이다.말 그대로 어리떨떨하다가 정신이 번쩍 나는 것이다.이들 홍어,돼지 삼겹살,묵은김치를 전라도 사람들은 ‘삼합’이라고 부른다.‘홍탁 삼합’을 처음 먹는 사람들은 어찌나 독한지 입천정이 홀라당 벗겨져 버리기도한다. 이 지독한 별미는 홍어를 발효 시켰기 때문이란다.싱싱한 홍어를 사다가 그대로 뒤란 두엄더미속에 던져 둔다.다른 생선이나 육류 같으면 대번에 썩어 문드러질텐데 두엄 더미 속에서 사나흘 삭으면 홍어는 적당히 발효가 된다.살은 아직도 먹음직한 선홍색이다.이것을 두툼하게 썰어서 자연 그대로 먹기도 하고 얇게 저며서 고춧가루 섞은소금에 찍어 먹기도 한다.그뿐 아니라 찜을 하여도 맛이 독특하다.발효시킨 홍어찜은 날 것 보다는 덜해도 개스는 여전해서 코를 탁 쏘는 맛은 여전하다.삭힌 홍어를 갖은 양념하여 다른 물고기 찜을 하듯이 뭉근하게 쪄서 내는데 살과 뼈를 모두 함께 먹을 수가 있다.잔뼈가많이 들어있는 지느러미께는 마치 중국요리의 샥스핀처럼 부드럽고아작거리는 맛이 그만이다. 그냥 가자미처럼 잘게 썰어서 갖은 양념과 채썬 무에 미나리 등속과 버무린 홍어무침은 흔히 경조사의 주요 음식으로 나온다.충청도에서도 홍어찜을 쳐주는데 발효 시킨 것은 아니다.도회지 사람들, 특히서울 사람들은 거의가 삭힌 홍어를 처음 먹을 때에는 ‘다시는 먹지않겠노라’고 혼자서 속으로 은근히 결심을 하지만,십중 팔구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슬슬 조심하면서 먹게되고 한번 맛을 들이면 아예요즈음 말로 ‘마니아’가 되어 버린다.제법 맛을 아는 고참이 되면홍어찜을 먹다가 더욱 냄새가 고약한 홍어애를 서로 먹겠다고 다투게된다. 옛날에도 홍어는 가짜가 많았다.흔히 조기를 말린 굴비가 그렇듯,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굴비를 영광 법성포에서 말린 것이 영광 굴비이듯이 홍어도 흑산도에서 잡은 것이 진짜 노릇을 하는 셈이다.흑산 홍어는 지느러미에 부드러운 가시가 있고 몸빛이 조금 더 진하고 검붉은 기가 도는데 살이 단단하고 차지다고 한다.뾰족하게 솟아난 코를둥글게 구부려 보면 다른 홍어는 쉽게 부러지지만 흑산 홍어는 유연하게 구부러질뿐 부러지지 않는다. 요즈음에는 흑산도는 물론이고 인근 서해에서 홍어가 잘 잡히지 않으니 진짜배기 흑산 홍어는 부르는게 값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저 남반구의 반대편쪽에서 잡힌 칠레산 홍어가 흑산 홍어로 둔갑을 하게끔 되었다.외국산 홍어는 날개살의 뼈를 씹어보면 딱딱하고 거세어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그래서 부드럽게 하려고 온갖 조리법에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회는 살만 저며내니 그렇다치고 통째 찜으로 낼때에도 잘 삭히고 오래 쪄내면 구별이 안되기도 한다. 요즈음 진짜 홍어 먹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는 시정의 뒷말이 있다.모모 당의 원로 되시는 이가 진짜 흑산 홍어를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어느 음식점에서 홍어를 먹어 보고는 자신있게 ‘이건 진짜’라고 점수를 매겼다.그는 한 고장 출신으로 홍어를 좋아하는 대통령에게 자랑하려고 포장해달라며 다시 한 접시를 주문했더라고 한다.사정을 알게된 주방장이 급해졌는지 달려나와 속내를 털어놓는데 진실을 밝히자면 ‘이건 가짜’라는 것이다.즉 아무리 높은 어른도 구해먹기가 어려워졌다는 농담일 것이다. 내가 해남 가서 처음으로 후배를 사귀어 선물을 받은 것 두 가지가있으니 그중 첫 번째가 ‘어란’이다.작은 항아리에 무슨 훈제 소시지 같은 것이 채곡채곡 들어 있었다.큰 아이가 아직도 해남 토박이인 그를 부를 때면 동섭이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살구 아저씨’라고 부르는 연유가 있다.해남 내려가서 자리를 잡았던 집 안에 수백년묵은 느티나무와 동백나무가 있었다는 얘기는 나왔는데 백 오십여평남짓한 마당 안에 또한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해마다 가지가휘도록 살구가 열려서 초여름만 되면 내 아이들이바구니 가득 따고는 했다.동섭이는 병원 집 장남인데 도시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뜻을 잃고 낙향해서 집안 일을 거들던 청년이었다. 그가 집에 올 때마다 아이들에게 ‘내 살구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아서 농담 치고는 좀 괴이쩍게 생각했더니 한참 뒤에 내가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성님이야 유명한 사람이고 나는 촌 구석 사람인디 금방이사가뿔면 저놈들이 내를 알것소.내가 이렇게 해둬야 낭중에 날 기억하지 않것소,하는 것이 그럴듯한 그의 대답이었다. 황석영. @
  • 새 영화/ 개 달리다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로 알려진 재일교포 2세 최양일 감독의 ‘개 달리다’는 극중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영화내용의 절반은 암시해준다.타락한 형사와 야쿠자에 창녀.제목이 은유하듯 영화는 ‘개같이’ 살아가는 바닥인생들의 이야기를 역설적일 만큼 코믹하게 얽어매고 있다. 무대는 도쿄 신주쿠.신주쿠경찰서의 형사 나카야마(기시타니 고로)는 야쿠자에게 마약단속 정보를 빼주고 뒷돈이나 받아먹는 파렴치한이며,히데요시(오스기 렌)는 그에게 빌붙어 사는 한국인 정보원이다. 나카야마와 한국계 야쿠자 조직 두목을 오가며 정부 노릇을 하는 모모는 상해 출신의 창녀.그런 모모를 나카야마 몰래 히데요시가 짝사랑한다. 형사와 야쿠자 정보원이 내내 함께 엉켜 이야기를 이어가는 버디 무비다.모모가 변사체로 발견되기까지는 키득키득 긴장없이 웃게 만들던 영화가, 히데요시와 모모의 내통관계가 탄로나면서 일순간 스릴러로 급반전하는 느낌이다. 신주쿠 골목골목을 돌며 히데요시와 나카야마 일행이 쫓고 쫓기는 후반부가박진감 넘친다. 비밀도박,폭력,사기,매춘,마약 등 일본사회의 구린 부분을 들쑤시며 길게 호흡하던 카메라는 질주하는 두 남자를 따라잡느라 정신없이 흔들린다. 하드보일드 소재의 영화가 관객을 흡인하는 힘은 따로 있다.알쏭달쏭 감독의자의식만 출렁대는 많은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근래 보기드물게 리얼리티를견지하고 있어서다. 비루한 사회와 음울한 삶에 대해 빙빙 둘러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표현해낸 감독의 솔직담백함,그게 이 영화의 힘이다.김덕수 사물놀이 음악이 엔딩타이틀곡에 삽입됐고,인기 듀오 클론의 구준엽이 랩송을 했다.일본에서는 98년 개봉됐다. 10일 개봉.
  • 美연구팀 원숭이복제 성공 의미

    14일 공개된 밝은 빛 눈을 가진 붉은 원숭이 테트라의 복제과정은 정상적생식과정에 있는 수정란을 이용한 복제라는 점에서 기존의 체세포 복제보다진일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즉 한쪽 세포핵만 이전받아 아버지가 없었던 돌리와는 달리 테트라는 부모모두의 형질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번에 사용된 ‘배아분리’기법은 쉽게 말해 네쌍둥이 출산과정을 실험실에서 재현한 셈이다.8세포기 단계의 수정란을 네조각으로 잘라 그 하나씩을별개의 개체로 배태시킨 것. 이렇게 만들어진 배아중 3개는 살아남지 못했고 네번째 배아만이 157일만에 원숭이로 태어나 4분의 1이라는 뜻의 ‘테트라’로 이름지어졌다. 그간 배아분리기법으로 소 등 포유류를 복제한 사례는 있었으나 원숭이같은영장류 복제가 공식 보고되기는 처음이다. 연구팀은 현재 생후 4개월된 테트라 외에도 5월 추가로 4마리의 복제원숭이가 더 태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영장류 배아복제 성공은 인간복제도 시간과 의지 문제라는 점을 재확인시켜줘 또다시 이를 둘러싼 논란을 확산시킬 것으로보인다.지난 97년 돌리 복제가 보고되고 나서 빌 클린턴 정부는 이 문제가 불러올 윤리적 파장을 의식,인간복제 프로젝트에 대한 연방기금 지원금지 등의 규제책을 마련했다.실제로 98년 시카고의 한 과학자가 체세포 복제를 통한 인간복제 연구착수를 공언했다가 강경한 정부방침에 밀려 좌절되기도 했다. 연구결과가 몰고올 민감한 파장을 의식한듯 셰튼 교수도 이번 연구의 용도를 인간의 유전적 질병 치료를 위한 실험용으로 한정했다.하지만 현단계의생명과학기술 수준으로도 인간복제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되고 있는 만큼 국제사회가 인간복제를 둘러싼 윤리적·기술적 기준마련에 서둘러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손정숙기자 js
  • 도시지역 문화보존 고단위 처방책 나온다

    도시화 지역의 문화보존 처방책이 얌전한 ‘문화의 거리’에서 고단위의 ‘문화지구’로 크게 강화될 전망이다.문화관광부는 현행 ‘문화의 거리’ 체제로는 상업적 시설·활동에 압도당해 갈수록 위축되고 약골화하는 도시의‘문화’를 제대로 지킬 수 없다고 보고 법적 장치가 구비된 ‘문화지구’개념을 도입,법제화할 방침이다. 여기엔 지금의 ‘문화의 거리’는 이름만그럴듯할 뿐 불가사리같이 먹성좋은 상업성과 경제논리를 적절히 제어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신사적이지만 실제적 수단이 미비된 ‘문화의 거리’에다 마냥 도시의 문화를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위기의식이 엿보인다. 최근 문화부의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 발표와 함께 주목되고 있는 ‘문화지구’와 ‘문화의 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문화의 거리’가 이 거리바깥 사람들에게 울리는 홍보용 종이라면 ‘문화지구’는 주로 지구 안 건물주 및 상업 활동자에게 보내는 격려성 경고음이다.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문화의 거리’는 지난 97년4월부터 지정해와 현재 서울 21개 등 전국적으로 73개소에 달한다.서울의 대학로 문화예술의 거리와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부산 해변 문화예술의 거리,충남 백제문화의 거리,경남 김해문화의 거리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정식 지정·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대외에 과시하는 명함용인 문화의 거리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어 운영상에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서울 대학로의 경우 2년여전 문화의 거리로 지정될 당시 50개를 넘었던 공연장이 40여개로 줄어든 대신 식당,노래방,비디오방,PC방 등 유흥시설은 그 사이 배 이상 늘어나 500여개에 이른다.차분하고 드려다 볼수록 끌리는 문화의 거리가 아니라 얄팍한 상혼과 즉흥적인 재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로 붐비는 유흥가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대학로에서 멀지않은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도 그렇게 변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지적된다. 행정기관은 문화의 거리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는 이곳에 문화적 배려보다는경제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있고,건물주나 주민들 또한 조금만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는 인기가 있다 싶으면 급속히 상업지구화해 거리 특유의 문화를 소멸시켜 외래객의 방문을 감소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의 거리’ 지정제는 본래부터 뭔가를 할 수 있는 제도적장치가 없지만 도시내 건축·시설에 ‘막강한’ 힘을 가진 도시계획법도 문화에 관한 한은 속수무책이다.문화의 거리를 ‘문화적’으로 유지할 인센티브(장려)나 레드테이프(규제) 조항이 없는 것이다.그래서 이 두 무기를 갖춘 ‘문화지구’ 안이 나왔다. 문화지구로 지정되면 조세감면,부담금 면제,국·공유재산 무상 대부,건축기준 완화,국고보조 등의 인센티브가 부여되는 한편 문화지구 지정목적에 저해되는 영업을 시·군·구의 조례로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이 개정안에 나란히 들어 있다. 안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문화지구 조성계획상 설치가 권장되는 문화시설과 문화업종에 인센티브가 부여되는데 각 지역의 조례에 따라 구체적인 내역이 정해지겠지만 공연,전시,도서출판,문화보급,전수,문화복지,문화산업 등의 시설과 문화적요소가 많이 결합된 종류의 영업 업종이 주대상으로 예상된다. 인센티브 제도도 새롭지만 국내법에선 처음인 업종제한의 규제권이 ‘문화지구’ 조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지구 지정당시의 주민이 행하고 있는 영업은 기득권과 재산권보호 원칙에 의해 제한 대상에서 자동적으로 제외된다고 개정안은 명시하고 있다.그러나 입법예고와 동시에 실시되고 있는 문화의 거리 주민의견 수렴과 이후의 공청회 등의 절차에서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법적 성격이 판이한 만큼 문화의 거리가 그대로 문화지구로 변환된다고 보기 어렵다.시장·군수·구청장이 당해 주민의 의견을 들은 후 시·도에 신청하고 시·도지사가 지정권을 갖도록 되어 있지만 지정후 3년내에 조성계획을 세워 승인을 받아야 하고 운영평가에 따른 지정취소제가 첨부되는 등 ‘문화지구‘는 공을 들여야 이름을 유지할 수 있다. 이달말 열릴 공청회와 함께 문화지구가 한층 주목을 끌 전망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 선진국들의‘문화지구’육성 사례 문화 선진국들은 어떻게 ‘문화지구’를 육성하고 있는가. 우선 문화예술을 활용,도시 전체의 이미지를 개선해 ‘도시의’ 경쟁력을제고하기 위해 전 도시를 문화도시로 선포하는 곳이 적지 않다.네덜란드의로테르담,독일의 프랑크푸르트,프랑스의 렌느·몽펠리에,영국의 글래스고우등이 그런 곳으로 문화시설,예술축제와 더불어 도시설계,도시색채,교통정책등을 연계한 복합개발을 적극 실행하고 있다. 또 도시재개발과 신도시 개발 때 상업,주거 시설에다 문화시설을 계획적으로 섞는 지역개발 방식도 있는데 일본 후쿠오카 해안 모모치 신도시의 로코 아일랜드나 미국 볼티모어시 해안지역 재개발의 이너하버 프로젝트 등이 좋은예다. 문화적·예술적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내 일정 지역을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규제와 인센티브제의 조화를 통하여 도시의 명소로 육성하는 케이스가미국의 여러 도시에 흔한데 우리의 ‘문화지구’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뉴욕시를 예를 들면 링컨스퀘어 지구,맨하튼 남단거리 지구,극장특구등 20여 곳이 있다. 뉴욕의 ‘문화지구’를 더자세히 살펴보면 극장특구의 경우 맨하튼 브로드웨이의 극장환경을 보존하고 상업건물 및 음식점의 유입을 막기 위해 극장특구법을 제정,특구내 토지이용을 통제하면서 건축법규 상의 건폐율·용적률완화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인근 빌딩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수익사업과 연계해 극장 유지비용으로 충당한다.도시계획위원회와 건물주 간의 협상을 통해 개발비용 등을 결정했다. 맨하튼 남단거리 지구는 역사적 건물 등을 보존하면서 박물관과 상업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상업시설과 문화예술시설로 구분 개발했다.특별재생지구로 지정하여 건물증축과 고도에 제한을 두었으며 상가·사무실 등은 복합용도로 개발하여 운영 수익금을 박물관거리의 환경조성에 재투자하였다. 이같은 외국 사례들은 ‘예술과 경제의 조화’ ‘인센티브와 규제의 조화’를 특징으로 한다고 이번 개정안의 문화부 실무자인 최종학(崔鍾學) 서기관은 지적하고 있다.문화지구 내에 문화관련시설과 상업시설을 복합적으로 조성하여 방문객을 유치하고 상업시설에서 나오는수익금을 문화환경 조성에투자하면서도 문화환경 및 미관을 저해하는 유해업종에 대한 규제를 소홀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재영기자
  • [외국인 참정권](1)특례법 왜 추진하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2002년 3기 지방자치선거부터 선거권을행사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정부가 최근 ‘장기거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선거권 등의 부여에 관한 특례법안’을 제정하기로 발표했기 때문이다.우리가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주는 것은 인권보호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다.이번결정은 국내 인권 신장에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재일동포의 참정권 획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혈통주의와 민족주의가 강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해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대화와 평화,공생(共生)의 움직임에 커다란 힘을 불어넣어주게 될 것이다.정부는 원칙을 천명한 이후 외교통상부,법무부,행정자치부등을 중심으로 관련 사항을 검토하고 있다.지방참정권 부여의 의미,재일교포들의 지방참정권 요구의 배경과 전망,외국의 사례 등을 차례로 알아본다. 정부가 특례법으로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로 한 것은 양면성을 갖는다.한편으로는 외국인의 인권 신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또 한편으로는 외국인에 대한 참정권 부여가 매우 예외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관련법 개정보다는특례법 제정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참정권 부여는 세계화와도 직결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한국인이 죽어도 일본인을 따라잡지 못하는 열여덟가지 이유’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모모세 다다시씨는 “대부분의 일본인이 5년이내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현실에서 참정권을 준다해도 일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면서도 “한국의 선진적인 조치는 일본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5년 이상 살고 있는 20세 이상의 외국인은 참정권을 갖는 동시에 후보자 추천권,선거운동원,투·개표 참관권 등도 갖게 된다.시장·군수나 의원에 선출될 피선거권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참정권을 갖게 될 5년이상 체류 외국인은 1만6,500여명.90일 이상장기체류하는 외국인 약 16만명의 10분의 1에 해당된다.참정권을 갖게될 외국인의 대부분은 1만6,000여명의 화교이다.나머지는 일본인 300명,미국인 50명 등이다. 일본인들과 미국인들이 표를 행사하더라도 거주지가 분산돼 있고 소수인 점을 감안하면 지방선거의 판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화교들의 경우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반응들이다. 하지만 화교들의 반응은 다르다.아직 피부로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다른 차별이 많다는 얘기다.인천에 사는 화교 장의량(張義亮·58)씨는 “화교들은흩어져 살고 있어 선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옛날에 집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던 시절에 비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직장에서 승진이 제대로 안되는 차별,핸드폰과 승용차를 사도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불이익들은 여전하다는 것이다.참정권 부여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인권을 보호하는 시작인 셈이다. 박정현기자 jhpark@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새 정당 새 인물](1)미래의 정치일꾼 그룹

    국민회의가 30일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함에 따라 여야 정치권의 인물 영입경쟁이 가속화될 전망이다.정치권을 노크하는 각계 전문가들의 행보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주목되는 ‘후보군(群)’을 분야별로 분석하고 이들이 지향하는 정당의 바람직한 모습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노·장·청’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새 정당의 이미지를 가장 잘 부각시킬수 있는 세대는 ‘386세대’로 대변되는 ‘청(靑)’그룹을 꼽을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법조·문화계 등 각 분야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는데다 ‘젊음’ 때문에 21세기 정치와 쉽게 접목되기 때문이다.신당이추구하는 ‘참신함’과 ‘전문성’을 겸비하고 있는 그룹인 셈이다. 신당의 ‘+α’가 젊고 참신한 전문가 집단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각 분야의 ‘386 선두주자’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누가 새 정당에 참여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시기상조다.아직까지 “나요”하는 사람이 쉽게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기존정치에 발을 내딛는 것을꺼려하는 층이 많다.때문에 지금은 386세대에서 ‘뜨는 사람들’이 정치권주변에서 회자(膾炙)되는 수준이다. 80년대 전대협 초대의장 출신인 이인영씨는 국민회의 김근태(金槿泰) 부총재가 “미래의 정치일꾼”이라며 무척 아끼는 386세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부총재는 “정교하면서도 폭이 큰 사고력 때문에 정치에 새바람을 넣어줄인물”이라고 평했다. 역시 전대협의장 출신인 오영식 임종석 강동규씨(국민회의 보좌진협의회 부의장)도 같은 맥락에서 자주 거명된다.국민회의 기조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쳤고 민화협 청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구해우씨도 미래 정치권의 인재군에 들어온다. 노동운동을 해온 서울시 재선의원인 이강진씨,도봉구의회 강정구의장,민화협 김창수 정책실장 등도 신당추진인사들이 탐을 내는 인물군에 속한다. 재계에서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장영승씨에게 시선이 집중된다.벤처기업인 ‘나눔기술’사장인 장씨는 회사를 뉴욕 나스닥시장에 상장시키며월가의 주목을 받고 있다.서울대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벤처기업 ‘바이어블코리아’대표인 이철상씨와연해주에 식량기지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 남양알로에 이병훈사장,새턴투자자문회사 김석한 대표,한겨레 정보통신 이정근 사장 등도 ‘미래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법조계는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을 지내며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었던 김주영 변호사와 법무법인 ‘한미’의 고훈 변호사 등이 리더그룹이다.임영화 변호사 등 민변 출신 변호사들도 대거 포진해 있다. ‘여성 386’도 영입대상이다. 열린정치포럼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김현 국장이나 나라사랑청년회 조직국장 출신으로 디자인전문 모모재인의 오은주 대표가 정치권의 주목을 받는다. 우진무역개발 대표이사인 고연호씨도 마찬가지.전 KBS앵커 출신으로 동아방송대 겸임교수를 하고 있는 유정아씨,미 스탠퍼드대 로스쿨 출신으로 금호그룹 고문변호사인 김미형씨도 자기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영화 ‘서편제’의 배우 오정해씨는 일찌감치 주목받고 있는 문화예술인이다. 이들 ‘미래정치주자’들은 21세기 새 시대의 지향성에는 부합하지만 상당수가 ‘정치현실’에 부딪혀 검증받은적이 없다는게 숙제다. 이지운기자 jj@ * 386세대의 기대/“개혁·미래지향 정당 통일의 디딤돌 돼야” 21세기 한국 정치를 이끌 주역인 ‘386세대’는 여권의 신당 창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신당에 대한 이들의 기대의 공통적인 화두는 ‘개혁’이다.여기에 더해 미래지향적이며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정당,통일을 위한 디딤돌을 놓는 정당이어야 한다는 반응이다.이러한 조건이 갖춰지면 참여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도 갖고 있다. 이인영(李仁榮)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개혁적 정당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개혁세력이 결집,신당을 만드는 동력이 돼야 한다고 주문한다.그는 “신당 참여 및 총선 출마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종석(任鍾晳) 전 한양대 총학생회장은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는 정당,기득권을 포기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강조했다.이를 위해서는 “국민회의가 뼈를 깎는 자기희생이 필요하다”고지적했다.이어 “바깥에서 (α세력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하지만 힘이 없어못미더워하는 정서가 깔려 있다”면서 “앞으로 신당 창당 과정을 지켜보고동료들의 의견을 집약,젊은 세대의 의견을 개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신당참여를 검토할 수 있지만 ‘들러리’가 되지는 않겠다는 신중한 자세다. 구해우(具海祐) 민화협 청년위원장은 “개혁적 국민정당에 21세기 통일의가교를 담당하는 정당을 표방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김현(金玄)푸른정치 모임 정책실장은 “20∼30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인들을 많이 받아들여 개혁에 탄력을 붙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386세대’는 무리를 지어 신당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적당한 시기에 자신들의 집약된 의견을 개진하는 방안을 논의중이다. 강동형기자 yunbin@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 (32회)-’미친 새’(상)

    ◆ 박양호의 우화소설 '미친 새'(상) 유신통치 시기의 민주화운동은 편의상 긴급조치 1호(1974년 1월8일 선포.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 비판 금지 및 유언비어 금지),4호(4월3일 선포.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 활동 금지) 시대를 그 전반기로 구분할 수 있다.1·4호에 의한 구속자들이 대폭 석방된 1975년 2월15일 직후인 5월13일 박정희 전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 일체 금지)를 선포하여 독재권력의 마지막 유지에 매달리고 있었는데,이후를 긴급조치 9호 시기,즉 유신통치 후반기로 볼 수 있다. 이미 독재의 고삐가 풀어져 가던 1976년 3월1일,윤보선·김대중·함석헌·함세웅 등 20명이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 선언문’을 전격 발표하여 구속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인 3월10일이었다.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세계적 지평으로 떠올라 고조되고 있었다.그러나 국내에서는 오히려 지식인·언론에 의한 박대통령과 유신통치의 찬양 논조가 늘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명동성당의 3·1구국사건을 “시대착오적인 반국가적 파괴음모”라고 맹비난을퍼부었던 당시의 주요 신문 사설이나, 유신통치를 “민족주체 사상”이라고추켜 세웠던 모모한 어용교수들의 글은 역사의 영원한 반사교훈으로 남을 것이다(자세한 사항은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참고). 바로 이 어수선한 시절에 작가 박양호는 중앙대 예술대학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열심히 창작에 전념하며 지냈다.그는 인간이 생존 조건의 변화에 대하여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관심있게 추구하던 중 ‘생각하는 개’란 우화소설을발표한 바 있다.항상 묶여있는 개와 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의 우화는 인간의 자유 문제로 비약한다. 1977년 여름 밀양 표충사에 한 달 가량 머물면서 박양호는 다른 중편과 함께,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가진 모든 존재는 자유를 지향한다는 취지에서소품 ‘미친 새’란 우화소설을 썼다.상경 즉시 그 원고는 ‘현대문학’에넘겨졌고,10월호(통상 9월 하순이면 발매)에 게재되어 독자들의 시선에 들어갔다. 그런데 작가는 주변에서 뭔가 이상하게 조여오는 느낌이었다.호적상 본적지로 되어있는 동빙고동에서 약국을 하던 누님의 집 주변부터 형제들,그리고작가가 살고있던 남가좌동 주변과 강의를 나가는 대학에 이르기까지 철저한배후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경찰관을 지냈던 아버지여서 집안의 신원조회는그럭저럭 넘어간 듯 했으나 교우관계부터 여성문제, 돈 등 온갖 사항을 두루파고드는 낌새 속에서 작가는 일말의 불안에 싸였다. 마침 조치원의 한 친구에게 문상 갈 일이 생겨 옷과 돈을 여유있게 챙겨 나간 10월15일 그는 전격경찰에 연행당해 피신을 준비했다고 뜻밖의 추궁을 견뎌야만 했다. 어떤 필화사건도 그 첫 심문은 반국가적인 조직과의 연관 여부에 대한 추궁이다.박양호에게 집요하게 추궁한 것도 ‘미친 새’가 “너의 머리 속에서나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인물과 접촉하여 이런 이야기를 쓰라고 해서쓴 것이냐”는 질문이었다.작가 나름대로의 진지한 문학론과 상관없이 수사기관에서는 이미 소설보다 더 긴 소설을 써두고 거기에 맞춰 나가는 것이 필화의 상례인데,박양호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절차와 수순에 따라 박양호는 적당히 얻어맞으며 인격적인 모독을 열흘 동안이나 견뎌야 했는데,경찰 유치장 기록에서는 그를 ‘특수절도’죄로 분류하고 있었다.취재진이나 외부인에게 긴급조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조처였다.10월25일 구속영장이 떨어져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진 박양호는 그 당시로서는 실로 운좋게 한 달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초등학교 5학년 애니메이션…우리가 바라는 세상

    “예체능교육이 좋다” “아니다.EQ교육이 유행이다” 등등 어린이 교육을둘러싸고 여러가지 말이 많지만 이런 교육은 어떨까? EBS ‘난 할 수 있어요’는 8월 3일‘수린이의 만화세상’에서 서울 안산초등학교 5학년 김수린양의 애니메이션 만들기를 보여준다. 지난해 ‘아름다운 나라’에 이어 두번째 애니메이션 작품 ‘우리가 바라는세상’을 연출한 이 ‘꼬마 애니메이션 감독’은 혼자 이야기를 만들고, 종이를 오리고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수린이는 미술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다.지난해 영상그룹 모모에서애니메이션 제작에 관한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 아이가 조금만 잘해도 ‘천재’라고 흥분하는 여느 부모와 달리 “별로 그림을 잘 그리는 편도 아닌데…”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어머니에게 “애니메이션의 작품성은 그림이 아니라 내용이예요”라고 어른스럽게 설명하는 이소녀의 이야기는 부모들에게 좋은 예능교육과 가정교육의 모델로 다가선다. 수린이는 두달에 걸쳐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란 페이퍼 애니메이션물을혼자 제작했다.주인공남자 드라큘라 ‘큘라보이’는 착한 여자의 피를 빨아먹는 것을 즐긴다.이 큘라보이가 시공을 초월해,현재 세계로 와서 거리의 아름다운 여자들의 피를 빠는데 겉보기와 달리 아름답지 못한 여성들이라 피는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내용이다. 당초 ‘하얀 마음 까만 마음’이란 제목에서 ‘큘라보이’로,다시 ‘우리가바라는 세상’으로 이름을 바꾸고 캐릭터 등을 거듭 수정하는 등 2달동안 쉴틈없이 작업했다. 스토리 보드에 그림을 옮겨그리고 캐릭터를 종이로 만들어서 오리고, 배경을 촬영하고 음악을 녹음하는 긴 과정을 거쳤는데 촬영과 녹음과정을 뺀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해냈다. 4분길이의 이 애니메이션은 지난 26일 서울 남산 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린드림애니메이션 워크샵 작품발표회에서 공개됐다. 오는 10월 시카고국제어린이 만화 영화제에도 출품된다. “재미있죠.내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데 당연히 재미있지요” 수린이의 말에 어머니 김복례씨(37)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해내는 것이 아이에겐 무척 좋은 공부가된다”고 말한다.물론 수린이는 공부도 잘한다. 허남주기자 yukyung@
  • “한국 게놈연구 美의 1,000분의 1 수준”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96년부터 미래원천기술사업의 일환으로 게놈 연구가본격화됐다.연간 10억원씩 투자해 오는 7월 말 3년차연구결과 발표가 예정돼 있다. 우리나라의 유전체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병하는 위암의 원인유전자를 찾는 것을 목표로 시작돼 약 1만개가량의 종양관련 유전자를 선별해 냈다.현재 대규모 염기서열 시스템 구축을 위한 전산데이터베이스와 세포내에서의 DNA증폭기술,돌연변이 염기쌍 분석기술 등 1차적인 기술을 확보했다.유전자 정보를 담는 DNA칩의 자체 개발도 한양대 생화학과 황승용교수 등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인간의 유전정보 탐색과는 별도로 국내 학자들은 환경미생물인 ‘자이모모나스(Zymomonas)’와 화산온천에서 자라는 ‘서무스(Thermus)’균주에 대한유전체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다.생명공학연구소는 서울대,경북대,기초과학지원연구소 등가 함께 ‘자이모모나스 컨소시엄’을 구성해 약 200만개의 DNA염기쌍을 분석 중이며 현재 약 30%를 규명했다.자이모모나스의 유전체 지도가 완성되면 산업적 발효균주로 활용될 수 있다. 서무스는 섭씨 75∼80도의 고온에서 자라는 극한호열균으로 20%정도 규명된 상태다.상온에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일반 효소보다 훨씬 반응이 빠른 내열성효소 개발과 정밀화학산업 대체기술 개발에 활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연구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생명공학연구소 유전체사업단장 이대실박사는 “우리나라의 유전자정보 산출능력을 알기쉽게 계량화한다면 유전자 연구가 가장 활발한 미국의 1,000분의 1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미국의 생화학자들이 일년에 규명해 내는 염기서열이 20억쌍이고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은 2,000만 쌍 정도를 규명해 낸다는 얘기다.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유전체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액은 미국 투자액의 0.1%에 해당한다.이 박사는 “투자액수는 곧 바로 연구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21세기 생명공학과 생물공학의 원천정보를 제공하는 유전체 연구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함혜리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6) 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中)

    초대 주미대사로서 큰 공을 세운 장면(張勉)은 1951년 1월28일 귀국해 2월3일 국무총리에 취임한다.이 무렵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국회는 상극이라할 만큼 알력이 심해 장면 총리는 양쪽을 융화·조정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아울러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학살 사건’ 해결에 앞장섰고,그해 11월에는 파리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장면이 이승만 아래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그렇지만 정치적 위상은 한층 높아져,이승만을 몰아내고 그를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50년 6월19일 개원한 2대 국회는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됐다.자유당 창당 전이라 공인된 여당이 없었고 친(親)이승만 계열 의원은 대한국민당 24명을 비롯해 57명에 불과했다.반면 야당의원은 27명,무소속은 의원 정수의 60%인 126명에 달했다. 2대 국회는 개원 엿새 만에 6·25를 맞아 사망·납치·행방불명된 의원이 35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의원 대다수가 이승만의 ‘서울 사수(死守)’ 발언을 믿었다가 큰 곤욕을 치른 데다 이승만의 독재 성향이 이미두드러져 의회에서는 반(反)이승만 기류가 주를 이뤘다. 당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고 이승만의 임기는 52년 7월23일까지였다.국회에서 재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이승만은 51년 말두 가지 방안을 추진한다.하나는 여당을 만드는 것이고,또 하나는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는 것이었다. 여당 창당작업은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눠졌다.무소속 의원 중심의 원내자유당과 5개 사회단체를 뼈대로 한 원외자유당이 별도의 정당으로 등록했다.이가운데 원내자유당은 이승만의 뜻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은밀히추진하면서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기로 야당과 합의한다. 당시 원내자유당을 이끈 오위영(吳緯泳)은 회고록에서 “일부 정치인들이이박사의 영구집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실정에서 재야의원들은 대부분강력한 야당을 조직해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적인 지도자를 추대하자는 중론이 대두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회는 이승만정부가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52년 1월18일 찬성 19,반대 14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했다.이어 개헌 정족수에 맞춰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4월 이 무렵 장면도 총리를 사임했다. 국회는 6월2일 제2대 대통령을 뽑기로 계획을 세웠다.그 날이 되면 장면은새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터였다. 하지만 반격이 시작됐다.‘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한 것이다.이승만이 경남과 전남북에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인 5월25일 계엄군은 버스로 등원하는의원들을 연행했다.그리고는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이때 개정한 헌법이 ‘발췌개헌’이다. 부산정치파동후 장면은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고문으로 들어앉아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그러다 55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오위영을 비롯해 김영선(金永善)·홍익표(洪翼杓)·이상철(李相喆) 등 신파의 핵심세력이 52년 그를 대통령으로추대하려던 원내자유당계였다. 장면은 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됐다.국민의 투표로 검증받은 권력서열 2위가 된 것이다.더구나 이승만이 81세의 고령이어서 유고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부통령이란 위치는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부통령 재직 4년은 장면이 회고록에서 ‘죄없는 죄인’이라고 표현할 만큼 험난한 세월이었다.이승만은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그를 견제하느라 상식 밖의 행동을 예사로 했다.가령 56년 8월15일 열린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내외 귀빈을 전부 소개하면서 정작 그 자리의 공동 주인공인 장면을 무시했다.남산 국회의사당 기공식에서는 다른 초청객의 자리는 준비하고도 부통령 좌석은 마련하지 않아 장면이 그냥 돌아갈 정도였다. 이 시기 장면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그에대한 암살 기도와 외국 원수와의 만남을 방해한 사례다. 부통령 취임 한달여 만인 9월29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은 김상붕(金相鵬)이 쏜 총에왼손을 맞았다.이 저격사건의 배후는 김종원(金宗元)치안국장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훗날 장면정부 아래서 속개된 재판에서도 관련자는 김상붕,그에게 총을 준비해 준 이덕신(李德信·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준 최훈(崔勳) 등 세 사람으로 한정됐다.장면은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대신이들을 감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고 딘 디엠 베트남대통령이 공식 방한한 날은 57년 9월18일이었다.디엠의맏형은 가톨릭 사이공교구 대주교였고 본인도 독실한 신자였다.게다가 장면과는 미국에서 만나 돈독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디엠은 장면을 만나려고 했으나 이승만정권은 그의 방한 사실조차 장면에게 알리지 않았다.디엠은 개인적으로 노기남(盧基南)대주교에게 전화해 일요일 첫 미사때 명동성당에 들르겠다며 장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장면과 디엠은 결국 주교관 2층 노대주교 방에서 몰래 만나 우정을 재확인할수 있었다. 외국원수에 대한 의전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장면을 철저히 배제한 이승만의 폭거는 4월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됐다. 장면이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던 그 무렵을 이철승(李哲承)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민주 염원의 상징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회상하면서 “장박사가 사실은 남달리 외유내강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장면은 총리·부통령을 거치면서 국가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그런 까닭에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물러나자 민심은 당연히 장면에게로쏠리게 됐다. 이용원기자 ywyi@**前비서관 李聖模·李泓烈씨가 본 장면 장면(張勉)에게는 10여년 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한 비서관이 두 사람 있다. 이제는 70대가 된 이성모(李聖模·72)씨와 이홍렬(李泓烈·77·미국 거주)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장면이 주미대사로 활동한 50년대 초부터 66년 타계하기까지 때로는 함께,때로는 엇갈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이들이야말로 가족이나 정계의 동료보다도 장면의 모든 것을 더 가깝게,더 오랫동안 지켜본 증인들이다.그들이 밝힌,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몇 토막을 소개한다. 이성모씨는 1951년 초 피난지 부산에서 장총리를 만난다.경찰관으로 경호업무를 맡은 그는 인품에 감화해 곧 경찰복을 벗고 비서로 들어간다.그가 직접 본 부산 피난 시절 장면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다. “장총리는 꼭 집에서 점심을 들었다.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가 모친(黃누시아)이 등 찢어진 삼베옷을 입은 것을 보고 흉하니 갈아입으라고 말씀드렸다.그랬더니 모친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네가 이 나라 총리 맞는가. 지금 피난민이 곳곳에 우글거리는데 잘먹고 편히 있는 내 걱정할 땐가.’장총리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이나 빌었다.모친 지시대로 범일동 고아원에 가아이들을 돌본 다음에야 용서받았다.장총리 부모도 매우 훌륭한 인격자였고,그는 부모 말씀에 절대 복종했다.” 이홍렬씨는 50년 4월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 부영사 때 장면 주미대사를 알게 된다.51년 총리로 내정된 장면의 부름으로 함께 귀국해 총리실 파견근무를 했고 그 인연으로 비서관이 된다. “장총리를 10여년 모셨는데 화내는 모습을 딱 한번보았다.60년 12월이었다.청와대로 전화하라고 해서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비서실장인 이재항(李載沆)씨를 바꿔주었다.장총리가 통화를 몇분 하더니 화난 표정에 목소리가높아졌다.대통령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재항씨가 자꾸 핑계를 대며 안바꿔주는 모양이었다.전화를 끊은 장총리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로군’하고혼잣말을 했다.그것이 그분이 할 줄 아는 가장 험한 욕이었다.” 이홍렬씨는 장면이 돈 문제에도 담백했다고 밝혔다. “51년 총리 시절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게돼 있었다.떠나기 열흘 전쯤 한국은행 총재가 나를 불렀다.‘외교활동을 하려면 가외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면서 돈가방을 주었다.얼핏 봐도 100달러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일단 거절하고 돌아와 말했더니 ‘잘했다’는 한마디뿐 더는 말이 없었다.돈을 챙기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어 쿠데타후 명륜동자택으로 돌아가서는 생활비가 없을 정도였다.” 이성모·이홍렬 두 비서관은 군사정권 아래서 고된 삶을 살았다.이성모씨는 장면 집안일을 돌보는한편 정치에도 뛰어들었다.민주당 재건에 참여,섭외부장·조사부장을 역임했고 경북 영주·봉화 지구당위원장으로서 6·7대 총선에 출마하지만 거듭 실패했다.이후 사업을 하면서 장면 추모모임인 ‘운석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이홍렬씨도 5·16쿠데타후 장면을 곁에서 모시다가 그의 타계후 정치에는일절 발을 끊고 생활인으로 돌아갔다.지난 88년 도미해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그는 본지에 ‘제2공화국과 장면’ 연재가 시작되자 일부러 두 차례 귀국해 증언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용
  • [金三雄칼럼] 북한, 白凡자료 협력을

    백범(白凡)김구(金九)선생 사후 50년만에 남북한의 추모행사 관련 논의는만시지탄이지만 퍽 다행한 일이다.북한이 지난달 30일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를 통해 평양에서 ‘김구선생 회고모임’을 갖자고 제의한 것을 한국의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는 7일 김구선생 추모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수정제의했다. 이수성(李壽成)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장은 백범의 묘소와 유가족,비서진 대부분이 생존한 서울에서 추모모임을 갖는 것이 고유의 전통으로 봐도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수정제의 배경을 밝혔다. 우리는 민족 지도자 백범 50주기를 앞두고 남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을 높이평가하면서 양측이 민족지도자를 추앙하는 대승적 입장으로 기일인 6월26일에는 반드시 성사되기를 바란다.아울러 북한당국에 한가지 협력을 제의하고자 한다.다름아닌 백범 관련자료다. 대한매일신보사는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와 함께 백범전집 출간을 준비중이다.국내 자료는 물론 중국·대만·미국·일본에 산일되고 묻혀있는 각종 자료를수집하여 12권짜리 전집을 발간한다. 그동안 남북한에서는 친일파들을 포함하여 각급 인사들의 각종 전집이 출간되었다.반면에 젊어서는 반봉건·반외세투쟁,청장년 시절에는 항일독립전쟁,노후에는 통일정부수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비명에 가신 20세기 한민족의 대표적 지도자요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백범의 전집이 아직까지 발간되지 못한것은 남북한이 함께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연유에서 백범과 연고가 각별한 대한매일신보사가 전집을 준비중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백범전집은 실국(失國)시대와 독립운동과 해방과 분단과정에서 항상 의롭고 정도를 걸은 민족지도자의 삶의 궤적을 집대성하는 것은 물론 민족의 근현대 정신사를 정리하는 의미가 새롭다.따라서 이번에 편찬되는 전집에는 백범과 관련되는 모든 자료가 망라돼야 한다.그런데 임시정부와 관련된 많은 자료가 6·25한국전쟁 과정에서 분실되고 그 중 상당 부분이 북한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진다.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 임정문서의 책임자는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趙擎韓)선생이었다.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11월 중국 중경(重慶)으로부터 귀국할 때 큰 가죽가방 13개에 임시정부 문서와 임시의정원자료를 간추려 가지고 귀국했다.그 다음해까지는 경교장(백범자택)에 두었으나 정국이 불안해 관계자들의 집으로 자주 옮겼다고 한다.그러다가 임정비서처 서무위원회 용도과장이던 조남직(趙南稷)씨의 집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6·25 때 조씨가 납북되고 그의 부인이 문서들은 모두 타버리고 없다고 했지만,조경한 선생은 보관된 창고나 집에 불탄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란통에 북한으로 옮겨졌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이 증언이 아니라도 북한에는 백범과 임정 관련의 상당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터이다.북한 당국은 이 기회에 이들 자료(복사본이라도)를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넘겨서 전집발간에 협력했으면 싶다. 백범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라고 가르쳤다.오늘 남북한이 크게는 민족문제 해결에서 작게는 백범추모모임문제에있어서 이같은 정신으로 접근한다면 쉽게 풀리지 않을까 한다. 북쪽에서 태어나 제3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남쪽에서 숨진 인물,분단과정에서 그는 남쪽을 택했고 지금 효창원에 잠들어 계시다.그의 추모모임이 북쪽에서 열리면 어떻고 남쪽에서 개최되면 어떤가.장소가 타협이 안되면판문점에서 열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혹은 소급하여) 민족이 함께 존경하는 인물의 추모모임이 50주기에는 꼭 열려야 한다는 겨레의 소망이다.그에 앞서 북한당국이 백범의 자료를 보내주어 완결된 전집을 놓고 남북의 관계자들이 해주의 생가(터)와 서울 효창원 묘소를 교환 방문하면서 그를 추모하고 그의나라사랑 정신과 통일정부수립의 의지를 이었으면 한다. 50주기와 20세기가 저물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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