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명청
    2026-01-21
    검색기록 지우기
  • 시민
    2026-01-21
    검색기록 지우기
  • 무역
    2026-01-21
    검색기록 지우기
  • 무덤
    2026-01-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08
  • 동양의 베니스 중국 항저우

    동양의 베니스 중국 항저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杭州)가 있다.’중국의 7대 고도 중 하나이자 저장(浙江)성의 성도인 항저우. 북송시대 대문장가인 소동파는 일찍이 “물빛 반짝이는 청명한 날도 좋고 비오는 날의 안개 낀 산빛도 좋은 천하명승”이라고 칭송한 천예 절경이다. 특히 3∼5월은 항저우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 창밖으로 이어지는 노란 유채꽃과 길가에 즐비한 뽕밭에서는 싱싱함이 느껴진다. 습기로 가득 찬 공기마저 상쾌하다. 동방의 베니스 중국 항저우로 안내한다. 항저우 오명숙기자 oms30@seoul.co.kr ●빼어난 절경에 취해 항저우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서호는 면적 5.6㎢, 둘레 15.5㎞로 중국의 호수치고는 별로 크지 않다. 그럼에도 서호가 중국 제일의 명승지로 꼽히는 것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시를 읊을 만큼 풍치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서호는 월나라 임금 구천(九踐)이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에게 바친 미녀 서시(西施)를 기념하여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호 주변에는 서호10경을 비롯해 100여곳의 명승고적과 영은사, 비래봉석굴, 육화탑 등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뇌봉산 정상에 있는 뇌봉탑에 오르면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호는 사계절의 경치가 다르고 낮과 밤, 맑은 날과 흐린 날, 안개 낀 날과 눈오는 날의 풍치가 제각각이다. 그 중에서도 봄은 지상의 천국으로 불릴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다. 호수에 비친 연둣빛 버드나무와 흰 매화는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꽃으로 뒤덮여 화사한 분위기와 달리 항저우에는 차고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이 때문에 항저우시 교외의 룽징(龍井)은 차의 나라 중국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차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차나무는 본디 사시사철 얇은 운무가 있는 곳에서 최고의 품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룽징차와 더불어 중국 8대 요리 중 하나로 꼽히는 항저우요리는 주로 담수어와 새우, 양념에 절인 육류와 채소를 주재료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전통요리로는 소동파가 즐겨 먹었다고 해서 유명한 ‘동파육’이 있다. 삼겹살을 토막내 간장, 소주, 설탕으로 양념한 뒤 쪄낸 요리로 기름기가 많은 여느 중국요리와 달리 느끼하지 않고 아주 맛있다.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항저우에서 호항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60여㎞를 가면 윤봉길 의사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관원에 쫓기던 김구 선생이 2년간 피신해 있었다는 자싱(嘉興)의 민가와 하이옌(海鹽)의 남북호 재청별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10여㎞ 떨어진 하이닝의 전당강가에는 김구 선생이 강물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해내던 ‘김구관조처’가 있다. 중국 정부는 최근 이 모든 것을 유적지로 새롭게 정비했다. 자싱에서 북쪽으로 22㎞(상하이에서 2시간 거리)를 가면 중국인들의 옛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산(嘉善)시 ‘시탕(西塘)’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1만 3000명이 살고 있는 시탕은 운하가 발달한 중국 내에서도 첫손 꼽히는 물의 도시로 아침이면 옅은 안개가 비단처럼 내려앉고 저녁이면 운하를 따라 홍등이 불을 밝힌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운하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때 초나라에서 온 오자서가 만든 것이다. 마을 안의 건물들은 명청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높은 가치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건물들은 랑자(길 위에까지 나 있는 지붕으로 우리의 처마와 비슷)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무역과 상업활동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기도 했다. 랑자의 너비는 보통 2∼2.5m, 길이는 약 1000m에 달한다. 나룻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전통악기 연주가 뱃길을 즐겁게 한다.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만날 수 있다. 뱃삯은 승선 인원에 관계없이 한척당 80위안이다. ■미리 알고 떠나세요 항저우는 저장성 성소재지로 상하이에서 남으로 150㎞ 떨어져 있다.기후는 아열대 계절풍 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다.1월은 영하 8도,7월은 39도까지 올라가 봄 가을이 여행하기에 적합하다.인구는 640만명 정도로 거주민 대부분이 한족이고, 조선족과 몽골족 등 23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가는 길은 소산공항∼인천·부산공항간 직항로가 월∼토요일 6편 운항(2시간쯤 소요) 중이며 상하이 푸둥공항에서 항저우까지는 버스로 3시간30분 정도 걸린다.여행문의는 주한 중국대사관 여유국 (02) 773-0687.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열린세상] 자유무역협정 조속 매듭을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흔히 자기를 든다.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작 탐낸 것이 조선의 도공들이었다고 우리는 자랑스레 말하기도 한다.이때 데려간 조선 도공들이 결국 일본의 화려한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고,오늘날 전 세계의 앤틱 수집가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는 가키에몬,이마리,노리다케와 같은 채색 자기를 만들어 냈다.가키에몬과 이마리는 이미 17세기 명청 교대기에 자기 수출이 마비된 틈을 타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시장에 팔려 나갔다.하지만 앤틱 가이드 북을 아무리 훑어도 조선의 백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애써 자위하는 ‘고졸한 맛,단아한 맛’을 서양 사람들이 모르는 것일까.결국 우리의 백자 자랑은 채색자기의 핵심기술인 유상채(釉上彩)기술의 부재를 애써 위안하는 자위에 불과하다.그 좋은 기회였던 명청 교대기에 우리 선조들은 서양 상인들에게 자기 한 점 팔지 못했다.쇄국은 조선의 기술과 국력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난 40년간 한반도는 수출입국으로 단군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자동차,반도체,철강,백색 가전제품에 버금가는 것을 전 세계로 수출한 적이 한국 역사에 어디 있었고,또 코리아 이름을 만방에 더 높인 적이 언제 있었느냐고 자문해보자.개방이 보호주의보다 복지효과가 높다는 것은 우리와 중남미를 비교해 보아도 잘 알 수 있다.우리는 중남미 국가들보다 산업화의 역사가 훨씬 짧지만,지금은 앞서 있다.그 까닭은 중남미가 수입대체산업화와 보호주의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비한 반면,우리는 일찌감치 수출산업화에 매진하여,외부 기술과 규범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환경은 또 바뀌어 세계무역기구와 자유무역협정의 개방경제 시대로 이행했다.바깥의 환경은 우리나라 같은 약소국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약소국은 적응을 강요당하고,적응할 수밖에 없다.이제 자유무역협정이 없으면 당장 공산품 수출시장이 적지 않게 타격을 입는다.그렇다면 울며 겨자 먹기라도 빨리 국내적 조정을 마무리하여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복수의 협정을 체결해야만 한다.전임 정부 때부터 추진해온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우여곡절 끝에 협상을 끝내고,이제 국회비준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이 협정 비준 반대에 서명을 했다는 보도이다.농업부문에 대한 우려와 농민단체들의 반대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많은 국회의원들이 국가 차원의 셈을 버리고,특정 부문의 이익에 매몰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국회의원들의 임무는 국익 극대화 차원에서 수혜집단과 피해 집단의 이해갈등을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조정하는 것이다.정부가 애써 만든 협정안을 국회가 무위로 돌린다면,이는 시대의 방향에 역행하는 것이고,나아가 개방 한국의 기운을 꺾는 것이다. 정부는 일본과 싱가포르와도 자유무역협정을 조기에 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멕시코와의 협정도 중기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그나마 확고한 방향을 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아쉽기 짝이 없다. 전임 정부 말기에 멕시코의 폭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협정에 큰 관심을 보였다.하지만 20억달러가량 무역흑자를 보이고 있던 우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칠레에 비해서 멕시코와의 협정이 줄 혜택은 대단히 클 뿐 아니라,구조조정의 부담도 훨씬 작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현 정부가 뒤늦게 멕시코에다 러브 콜을 보내고 있지만,이번에는 그쪽 기업인들의 태도가 싸늘하고,정부측 인사들도 무뚝뚝하게 반응한다고 한다.멕시코는 올해 말까지 일본과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완료할 계획이다.이 협정이 이뤄지면 우리의 철강,타이어,석유화학 및 섬유 제품의 수출은 물론 건설수주도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멕시코에서 무역을 하는 세일즈맨들의 한숨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진정 세련되고 수준 높은 통상외교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회가 참으로 아쉽다. 이 성 형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위원
  • 한광옥씨 구속/ 나라종금서 수뢰혐의 정학모씨도 소환조사

    공적자금비리 특별수사본부(본부장 安大熙 대검 중수부장)는 14일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의혹과 관련,LG스포츠단 정학모(61) 고문이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과 안상태 전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구명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받은 단서를 포착,정 고문을 자택에서 임의동행 형식으로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정 고문의 혐의사실을 확정짓는 대로 이르면 15일 중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관련기사 10면 정 고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 장남 김홍일 의원과 친분이 깊은데다 목포상고 출신으로 구여권 인사들과도 깊은 친분을 맺었던 인물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검찰은 지난달 30일 구속영장이 기각된 노무현 대통령 측근 안희정씨도 이날 재소환,생수회사 처분자금 4억 5000만원의 사용처를 추궁했다.다음 주중으로 안씨를 다시 불러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검찰은 나라종금 로비의혹에 연루되어 있는 정치인 2∼3명을 추가로 소환조사,사법처리 여부를 결정지은 뒤 수사를 일단락지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검찰은 김 전 회장 등으로부터 1억 1000만원을 받은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수감했다. 이에 앞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한 최고위원은 대가성을 부인했으나 서울지법 최완주 영장전담판사는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조태성 정은주기자 cho1904@
  • 美, 탈북 김순희씨 망명허용

    지난해 4월 미 샌디에이고 국경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다 체포된,탈북자 김순희(38)씨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미국 이민법정에서 망명지위를 획득했다.김순희씨는 이날 샌디에이고 연방 이민법원 8호 법정에서 열린 망명청문회에서 존 윌리엄스 판사로부터 망명지위가 부여돼 1년 뒤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강혜승기자
  • 이런책 어때요 300자 서평 /역사와 환경중국 명청시대 ~-기존 동·서양 자연관 비판

    ”서양의 자연관이 자연에 대해 공격적이며 정복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중국의 자연관은 자연과의 친화를 강조해 환경에 우호적이다.” 지금까지 상식으로 통한 이같은 동·서 자연관을 이 책은 통렬히 비판한다.중국의 자연관과 환경관은 개발의 논리와 지속적으로 충돌해 왔다는 것.예컨대 양쯔강일대 둥팅호는 현재 면적이 5600㎢에 달하지만 명나라 때는 두배나 됐다.명중기 이후 그 상류지역에서 무분별하게 산지를 개발해 토사가 씻겨 내려간데다 호수 주변을 논밭으로 개간했기 때문이다.그러니 둥팅호 범람은 인재(人災)라는 것이다.4900원.
  • 브로커 김씨 “수사무마”거액받아

    부천시 신앙촌 재개발사업 비리 의혹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특수3부(부장 徐宇正)는 20일 기양건설산업측의 브로커로 알려진 김모(57)씨가 기양건설산업 김모(46)회장으로부터 검찰수사 무마 로비 명목 등으로 1억 7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확인,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특히 김 회장의 구명청탁을 받은 김씨가 현직 검찰 고위간부에게 로비를벌이며 수천만원을 건네려했다는 첩보를 입수,진위를 확인중이다. 검찰은 또 김씨가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이형택(李亨澤·수감중)씨 등을 통해 부도어음 회수를 도와주겠다며 기양측으로부터 추가로 돈을 수수했다는 단서를 포착,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김씨는 지난 2월 금융기관과 예금보험공사 임원 등에게 부탁해 부도어음을 싼 값에 매입하도록 해주겠다는 등의 명목으로 7억 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뒤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을 받고 있다. 김씨는 특히 기양건설산업 부회장 연모(50)씨에게서 이형택씨에 대한 로비 명목으로 3억원을 받아간 것으로 알려졌다.검찰은 이날 김씨에 대한 이틀째 조사에서 김씨가 받은 금품이 더 있고,이형택씨가 연루됐다는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연씨가 “김씨에게서 ‘이형택씨를 만났는데,일이 잘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하고 S종금이 보유한 91억원 어치의 부도 어음을 기양건설산업이 실제로 20억원에 매입한 점 등으로 볼 때 김씨가 이형택씨에게 실제로 금품을건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 기양건설산업 전 상무 이모(수배중)씨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뇌물지급 내역표를 분석한 결과,검찰 및 경찰 공무원 6명에게 금품이 건네진 것으로 의심되는 단서가 확보됨에 따라 이들의 소환 일정을 검토하고 있다. 검찰은 기양건설산업 회장 김모(46)씨도 금명간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
  • 권노갑씨 보석신청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민주당 전 고문 권노갑(權魯甲) 피고인에 대한 첫 공판이 31일 오전 서울지법 형사10단독 박영화(朴永化) 판사 심리로 열렸다. 권 피고인은 이날 검찰과 변호인 신문에서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2차장으로부터 진씨 구명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권 피고인은 “당시 김씨는 내 비서로 있던 최규선씨가 김홍걸씨와 내 이름을 팔고 다니니까 최씨를 정리하라고 얘기했다.”면서 “최규선씨의 비리를 제보하러 온 사람이 진씨의 구명을 청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권 피고인은 고령과 지병을 이유로 이날 보석을 신청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사설] 꼬리무는 국정원 난맥상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이 1일 검찰에 소환되면서 ‘김홍걸씨와 최규선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국정원 김은성전 제2차장으로부터 2000년 7월 보고받았다.’고 한 발언은 숨이 턱 막히는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우선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되고 비밀을 누설해서도 안되는 국정원 간부가,권력 실세라면 사인(私人)인데도 집에까지 찾아가 보고를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권 전 고문은 당시 집으로 찾아온 국정원 김은성 제2차장으로부터 ‘홍걸씨와 최씨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있어 차단 조치가필요하다.’는 보고를 들었다는 것이다.권 전 고문은 이어 “김 전 차장이 가끔 찾아와 최씨와 거리를 두라는 취지의 보고를 했다.”고 말해 보고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뤄졌음을 분명히 했다.각종 게이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국정원이 권력 실세에게 보고까지 한 사실을 보면서 권력의사유화가 우심했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청와대·국정원·여권이 이미 2000년 7월 홍걸씨와 최씨의 문제를 알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그럼에도 불구하고청와대 등 권력 핵심에서 이들의 부적절한 처신을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기울였다는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보고를 한 김 전 차장에 대해 홍걸씨가 불만을 표시했다거나 권 전 고문이 질책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권력의 사유화가 아니고서는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이 점 청와대 등 권력 핵심의 정치적 도의적 책임은 매우 무겁다고 하겠다. 한편 국정원이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특수사업비 명목으로 진승현 MCI코리아 부회장에게 2억원을 거둬 여권에 전달했다는 국정원 정성홍 전 경제과장의 검찰 진술도 세간의 의혹을 받고 있다.그러나 국정원은 ‘특수사업’이라는 예산 항목도 없다며 전면 부인하고 있다.그렇다면 정전 과장이 왜 돈을 모았는지,어디에 썼는지 등 진상이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거듭되는 국정원의 일탈 행동을 막기위해선 국정원과 정치권 관계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국정원장 임명청문회를 도입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또 국정원 직원들의 불법행위에대한 처벌규정을 한층 강화해 간부들이 권력 실세의 주변을 기웃거리지 않도록 강력히 단속해야 할 것이다.
  • “최규선 로비현장 홍걸씨 동행”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3남 홍걸(弘傑)씨가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崔圭先·42)씨의 각종 이권개입 현장에 직접 동행했으며 최씨는 주변 지인들에게 홍걸씨와 동업자관계임을 과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의 한 측근 인사는 17일 “최씨는 자신에게 의뢰된 청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항상 홍걸씨를 대동했고,로비를 청탁한 인물들은홍걸씨의 얼굴을 보고 거액을 줬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홍걸씨는 방학때뿐만 아니라 매월 한차례 꼴로 입국해 4∼5일,길게는 1주일 정도씩 머물다 최씨로부터돈을 수금해 미국으로 돌아갔다.”면서 “최씨와의 동행한자리에서 홍걸씨는 사업 내용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자리만 지켰으며,최씨가 청탁을 성사시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말하며 자리를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또 “최씨가 지난해 ‘홍걸이와 동행해야 (사업이) 성사된다.’며 동업자 관계임을 과시했다.”면서도“최씨는 홍걸씨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생색을 내는 수준의 금전만 주며 자기 뜻대로 이용했던 측면이 더 많았으며검찰도관련자 소환 조사에서 이같은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최씨의 이권개입을 폭로한 전 비서 천호영(千浩榮ㆍ37)씨도 검찰 조사에서 “지난해 2∼3월 강남의 M호텔과 평창동의 O호텔 등에서 최씨가 홍걸씨와 동행해 그 자리에서 거액을 함께 건네받았다.”고 진술했다. 이에 따라 서울지검 특수2부(부장 車東旻)는 전날 출두한최씨를 상대로 홍걸씨와의 돈 거래 내역과 홍걸씨의 이권개입 현장 동행 여부에 대한 조사를 강도높게 벌이고 있다. 검찰은 또 천씨로부터 “최씨는 평소 주요 인사와의 대화를 소형 녹음기로 녹음했고,수백개의 테이프가 최씨에게있었다.”는 진술을 확보,최씨와 홍걸씨의 유착 관계를 밝혀줄 녹음테이프 확보에 나섰다. 한편 최씨는 지난 10일부터 12일까지 서울 강남의 R호텔과 O호텔에서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갖던중 휴대전화로 신건(辛建) 국가정보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김 이사’라고 소개하며 구명을 청탁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대통령의 아들 문제라고 해 신 원장이 전화를받았으나 최씨가 구명청탁을 해,‘나와 상의할 문제가 아니며 검찰에 출두해 떳떳하게 대처하라.’고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최씨가 관급공사 등 수주 대가로 수억원대의 금품을 받은 사실을 확인,18일중 최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박홍환 안동환기자 stinger@
  • 신승환씨 오늘 영장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 중인 차정일(車正一) 특별검사팀은 10일 G&G그룹 회장 이용호(李容湖·구속기소)씨의 계열사에 영입되면서 6,600여만원의 돈을 받은 신승남(愼承男)검찰총장의 동생 승환(承煥)씨를 긴급체포한 뒤 밤샘조사를 벌였다. 특검팀은 신씨가 월급 명목으로 받은 1,600여만원 부분을 제외한 스카우트 비용 명목으로 받은 5,000만원 부분에대해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11일구속영장을 청구키로 했다.특검팀은 이씨로부터 구명청탁을 받은 신씨가 공무원이나 경제단체 등에 구명 로비를 벌인 정황을 상당수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신 검찰총장에 대한 특검팀의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으나 특검팀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신씨는 이씨 구명로비를 펼쳤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지난해검찰 수사에서는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국정원 前국장 재소환

    ‘수지김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외사부(부장 朴永烈)는 30일 지난해 경찰의 수사중단과 관련,당시 국정원대공수사국장 김모씨(1급)를 재소환,이무영 전 경찰청장을만나 수사중단을 요청했는지 집중추궁했다. 이에 대해 김 전 국장은 “지난해 2월15일 이 전 청장을 만나 사건내막을 설명한 뒤 ‘참고하라’고만 했을 뿐 수사중단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종전의 진술을 반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전 청장이 전날 배포한 경위서에서 “김 전 국장을 만난 적은 있지만 바빠서 ‘실무자들과 협의하라’고만했다”고 밝힘에 따라 금명간 이 전 청장을 소환,김 전 국장과 대질심문하기로 했다. 검찰은 또 이 전 청장이 “지난 15일 김 전 국장이 ‘고 엄익준 차장이 전화해 처리한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제기한 김 전 국장의 구명청탁 의혹의 진위도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해 경찰 수사중단의 윤곽은 거의 나왔다”면서 “이 전 청장에 대한 조사가 사실상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정원은 87년 당시 수지김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검찰측 주장에 대해 “지난달 16일,30일 두 차례에 걸쳐 윤씨에 대한 피의자 진술조서일체 등 수사자료를 전달했다”고 반박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
  • 보험급여 허위청구 의사자격 영구 취소

    앞으로 건강보험 급여비를 허위청구하는 의사는 면허를영구 취소당하게 된다.또 ‘자율심사청구기관 인증제도’가 도입돼 이 인증을 받은 요양기관은 2년 동안 급여비 심사가 면제된다. 김원길(金元吉)보건복지부장관은 27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급여비 허위청구를 막기 위해 허위청구를 한 의사는 면허자격을 영구 취소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의원입법으로 준비중에 있다고 밝혔다.현행 의료법에는 면허가 취소된 의사는 그 원인이 소멸되거나 개전의 정이 있을 때 면허를 재교부할 수 있게 돼있다.그러나 개정안에 대해 의료계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김 장관은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 대책의 일환으로 다음달 초부터 자율심사청구기관 인증제도를 도입,의료기관이 급여비를 청구할 때 진료비 심사지침에 맞는지를 스스로 점검해서 성실히 청구하겠다는 신청을 하면 이 인증을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현재 EDI(전자문서교환)를 통한 진료비투명청구 의료기관이 전체 6만2,000여개 중 57%에 이르기때문에 60% 정도가 인증을 받으면 나머지 40%의 요양기관에 급여비 심사평가 인력을 집중 투입,부당·허위청구를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용수기자 dragon@
  • 페이 베이징박물원 부원장 “”중국 6,000년 도자기史 한눈에””

    “고궁박물원 도자기 대여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협력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길 바랍니다.오는 8월 한국의 세계도자기엑스포에서 선보일 중국 도자유물은 신석기시대에서 최근까지 6,000년간의 중국 도자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명품들입니다.” 세계도자기엑스포조직위원회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페이 후안 루(裵煥祿·60) 베이징고궁박물원부원장은 10일 김종민 세계도자기엑스포조직위원장과 도자유물 대여협정을 맺은 뒤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이번에 들여올 도자기는 송대의 ‘관요대병(官窯大甁)’과 명대의 ‘두채보상화문개관(斗彩寶相花文盖罐)’등 국가지정 1급유물 14점을 비롯해 용산문화의 흑도,상나라의백도,명·청시대의 채색도자기 등 70점.페이 부위원장은“중국 전체에 1급 유물이 1,100점 가량 된다”면서 “대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고궁박물원 유물이 이처럼 대규모로 해외 나들이에 나서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1925년 명·청시대의 궁전인 자금성 안에 세워진 베이징고궁박물원은 소장유물이 100만점에 달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박물관.도자기 소장품만 30만점에 이르는 중국 도자기의 보고다.고궁박물원 전시는 크게 자금성 시설전과 명청황제소장품전으로 나뉜다.페이 부원장은 “베이징고궁박물원의 11개 전시관에서는 유물 1만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으며,매년 70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다”고 소개했다. 김종면기자 jmkim@
  • 행자부, 전산화작업 본격화… 내년 하반기 시행

    앞으로 인감증명을 주소지 읍·면·동사무소가 아닌 전국 어디에서라도 발급받을 수 있게된다. 행정자치부는 20일 인감증명의 전국 온라인처리를 위한 인감전산화사업방침을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자치단체는 신고 인감이 날인된 인감대장을 일제히 확인하고 인감대조 소프트웨어를 개발 보급함과 동시에 인감의 컴퓨터 화상입력 등 내년 5월까지 인감업무전산 시스템 구축을 완료하게 된다. 행자부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 전산시스템을 완료,하반기부터는 인감증명서를 전국 어느 증명청에서나 발급 받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인감증명을 받기 위해 주소지 증명청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인감증명 전산시스템이 구축되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함은 물론 행정의 생선성도 향상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추기자 sch8@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삼성전자·SK텔레콤 주주총회

    참여연대가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소수주주를 대신해 오는 20일 주총에서이사선임시 집중투표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해 논란이 예상된다. 참여연대는 10일 금융감독위원회에 삼성전자와 SK텔레콤 주주의 의결권 대리행사를 위한 위임장과 주총에서의 대응방안 제출했다. 금감위의 승인 사항은 아니나 금감위가 대리행사 등에 시정명령을 내릴 수있기 때문에 위임장을 미리 냈다.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이 이미 참여연대가 요구한 회사경영권에 관한 소수주주의 설명청구권 등을 일부 수용했으나 참여연대는 미흡하다고 판단,새로운안을 제시한 것이다. 참여연대는 특히 이사를 선임할 때 소수주주들이 표를 한사람에게 전부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 실시를 요구했으나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은 여전히적용을 배제하고 있다. 설명청구권의 경우도 삼성전자는 특별한 이유를 붙여 서면으로 청구하거나3% 이상의 지분을 가진 주주나 0.5% 이상의 지분을 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에게만 허용한 반면 참여연대는 모든 주주에게 제한없이 허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주 이외의 사람에게 신주를 발행하는 방안도 삼성전자는 30% 이내에서 이사회 결의로 가능토록 했으나 참여연대는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SK텔레콤은 배당금 5.01%를 제시했으나 참여연대는 더 많은 배당을 요구하고 있다.
  • 민주열사열전:17/88년 투신·분신3명의대학생(정직한역사되찾기)

    ◎‘허울뿐인 민주’ 항거… 생명의 불꽃 살라/조성만­민주화운동 통일논의 새장 열어/최덕수­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 요구/박래전­“양심수 석방… 죽음 더 없어야” 유서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함께 1988년 6공화국이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민주정부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직선제란 모양을 갖췄을 뿐 6공 盧泰愚 정권은 5공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다. 6공은 공식 출범 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민주화’ 정책을 차례로 발표했다.군사독재 정권인 5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인 셈이었다.그러나 6공 출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부터 20일간에 걸쳐 3명의 대학생들이 ‘노태우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젊은 목숨을 잇따라 내던졌다. 87년 12월 대선 때 문민정부의 도래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함께 6공 출범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나아가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80년 5·18 광주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민주화추진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그러나6공이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내놓은 민주화정책들은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정권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진정한 개혁이 절실한 때에 어설픈 개랑주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모습이었다.세 젊은 학생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대학생의 잇따른 투신·분신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운동권의 좌절감과 방향감각 상실을 웅변해준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정권도 이런 쪽으로 몰고갔다.그러나 수십,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세 학생은 직선제 정부의 출현에 만족해하려는 현실순응의 추세를 질타하면서 우리에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민주 현안이 산적해있음을 죽음으로 일깨웠다.이에 많은 국민들이 각성하고 공감을 표한 것이었다. ○시청앞 장례식 노제 30만 인파 운집 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 등 재야 민주단체 주최로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다른 한쪽에서는 100여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 주최 ‘광주항쟁계승 마구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출발신호를 기다리던 오후 3시38분.서울대생(화학과 2년)으로 명청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인 趙城晩이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사이렌을 울린 뒤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1분여 동안 외쳤다.이어 흰색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은 오른손에 든 칼로 복부를 찌르고 몸을 뒤로 날려 마당으로 떨어졌다.투신 직후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진 조성만은 이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5월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뤄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 3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1년전 시민항쟁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는 군중모임으로 4월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당시 야당의 金大中 평민당총재와 金泳三 민주당총재도 참가했다.조성만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주 도심을 지날 때와 망월동 묘역으로 떠나기 전 광주 도청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조성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신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그는 투신 오래전에 일기에서 ‘10년 세월에 휼륭한 사제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한순간에 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했다.조성만은 투신 당일 아침 작성한 유서에서 특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논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 전사’로 불리는 조성만은 유서 말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어머님 얼굴,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오월항쟁 계승 군부독재 타도” 외쳐 조성만의 장례식이 있기 하루전인 5월18일 오전 10시30분 단국대 천안 캠퍼스 시계탑 밑에서 이 학교 법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중인 崔德秀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했다.성명서를 통해 ‘광주학살 비리주범 노태우를처단하자’‘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을 발동하라’고 주장한 최덕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이어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9일만인 26일 운명했다. 빈한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쉬고 공장과 고향 농촌을 오르내려야 했던 최덕수가 분신할 당시 정가는 4월 총선후 국회개원을 앞두고 광주항쟁 진상조사 특위구성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그의 30일 서울역 노제에는 1만5,0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도청 분수대 노제에는 3만여명이 모였다.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 호소 그리고 6월4일 오후 4시30분 대학생들의 통일논의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가운데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朴來佺(국문3)이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했다.박래전은 이미 분신 이틀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학살원흉 노태우 처단’ ‘통일논의 자유보장’ ‘양심수 즉각석방’ 등을 주장했다.그는 특히 학생들과 사회인 모두에게 안일과 무감각 그리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의 투쟁 대오를 갖추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손실일 뿐입니다.”“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개량의 환상,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지금은 슬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날이 오면,두분 부모님,아니 그날이 오기까지 힘드시더라도 눈감지 마세요.” 분신 이틀 뒤인 6일 운명한 박래전의 장례식은 12일 수천명이 참가한 시청앞 노제와 함께 치뤄졌다. ◎박래전의 형 박내군씨/인권운동 사랑방 사무국장 활동/동생보다 먼저 민주화운동 투신/유가협 일맡아 희생자 50여명 처리 인권 ‘지킴이’로 이름높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朴來群 사무국장(37세·연세대 국문과졸)은 분신자살한 숭실대생 박래전의 바로 윗형이다.민주 열사 가족들 가운데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그러나 박래군 사무국장은 동생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의식화(?)한 것은 전연 아니다.그는 “대학 학회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뿐이며 동생은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수원에서 버스로 한시간 달려가야 하는 남양반도 끄트머리 시골 출신으로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어렵게 대학에 보낸 두 아들이 모두 민주운동을 한다면서 감옥에 가고 그러다 끝내 분신하는 아들까지 나오게 된 시골 부모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박래전이 유서에서 염려했던 부모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래전이 대학 1학년 때인 82년 가을부터 가두 시위에서 형제는 서로 마주치곤 했다.박 사무국장이 86년부터 2년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87년 6월 항쟁으로 석방돼 나온 뒤에 형제는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래전이는 특히 몇몇 운동한다는 사람들의 불성실 무책임에 가슴아파했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유가협 일을 맡아 5년동안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50구가 넘는 민주화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동생의 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같은 무렵 통일논의에 물꼬를 튼 조성만의 분신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보 ◆박래전 63년 경기 화성 출생 82년 숭실대 국문과 입학 83년 휴학,입대 86년 제대 87년 복학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선전국장 88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88년 6월4일 학생회관 분신 88년 6월6일 운명 ◆최덕수 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87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88년 휴학 88년 5월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 낭독 88년 5월18일 분신 88년 5월26일 운명 ◆조성만 64년 전북 김제 출생 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84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 85년 군입대 87년 제대,복학,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87년 12월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데모 관련 구류 10일 88년 5월15일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 투신,운명
  • 풍류정신으로 보는 중국문학사/감상자의 시각서 본 中 문학

    ◎단일한 잣대로 각 시대의 특성 고찰 【金鍾冕 기자】 “이슬 맞으며 누런 국화를 따고/서리를 맞으며 푸른 게를 먹고/술을 데우며 붉은 낙엽을 태웠네/생각하면 인생은 빈 술잔인데/중양절마다 술을 마신들 그 얼마나 마시겠는가!” 중국 원나라의 잡극(雜劇)작가 마치원의 산곡(散曲) ‘야행선(夜行船)’에 나오는 구절이다.또 선진시대 ‘시경’의 관저(關雎)편을 보면 남녀간의 상열지정(相悅之情)이 소박한 언어로 표현돼 있고,이백의 ‘장진주(將進酒)’에는 인생과 세상을 초월하려는 적극적인 낭만주의 사상이 담겨있다.장강대해(長江大海)를 이루는 중국문학,그속에는 진정 면면히 이어지는 멋과 정신이 깃들여 있다. 최근 안동대 중문과 최병규 교수가 펴낸 ‘풍류정신으로 보는 중국문학사’(예문서원)는 이같은 중국문학의 특성을 ‘풍류정신’이란 한 마디로 아우른 색다른 시각의 중국문학사다.지금까지의 문학사는 주로 시대나 작자 등을 기준으로 서술한 것이 대부분이다.그러나 이 책은 개별 작품의 심미적인 요소들을 들춰내며 감상하는 형식을취한다.때문에 중국문학의 정신을 보다 가까이서 친숙하게 호흡할 수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문학은 크게 유가문학과 도가문학으로 나뉜다.유가와 도가는 중국 문화의 양대 지주이자 중국 문학의 사상적 근원을 이룬두 흐름이다.유가가 중국 북방의 기질을 대표하는 문화라면,도가는 중국 남방의 기질을 대표하는 문화다.공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유가문학이 대개 현실적이고 복고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반면 도가문학은 노장(老莊)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양상을 띤다.중국문학은 세상이 편안할 때는 유가의 사상이 지배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도가의사상이 득세하는 유(儒)·도(道)문화의 순환 속에 성장·변환해갔다.이러한 중국문학의 특성을 감안할 때 풍류정신은 당연히 도가사상이 풍미하던 시기에만 성했던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그러나 중국문학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풍류정신이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선진(先秦)문학에서부터 명청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로 풍류정신의 흐름을 살핀다.최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소박하고 원초적인 낭만세계가 주를 이뤘던 선진시대 문학은 풍류정신의 맹아기,통일국가의 기상을 작품 속에 드러낸 한대(漢代)문학은 풍류정신의 발아기에 해당한다.또 ‘위진풍도(魏晉風度)’와 ‘명사풍류(名士風流)’를 탄생시킨 위진남북조 문학은 풍류정신의 개화기,문화의 번성기였던 당대(唐代)문학은 풍류정신의 절정기에 속한다.그는 또한 금욕주의적인 도학이 문학을 지배했던 송대(宋代)문학을 풍류정신의 억압기로,이민족의 침략으로 대중문학이 위축됐던 원대(元代)문학을 풍류정신의 침체기로,당대의 인성해방 사상이 반영된 명청대(明淸代)문학을 풍류정신의 부흥기로 본다. 이같은 문학사적 시대규정에는 도식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풍류정신이라는 단일한 잣대로 각 시대 문학의 구체적인 특성을 살피고 있는 점은 지적인 신선함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