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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방선문·포천 화적연 ‘명승’ 지정

    문화재청은 3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역사문화적 보존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 제주 방선문과 경기 포천 화적연이 국가지정문화재의 일종인 명승이 된다고 밝혔다. 4일 자로 명승 92호로 등재될 방선문은 한천 중류 한가운데 커다랗게 아치형 문처럼 솟은 기암이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만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선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을 지닌 방선문에는 이곳을 다녀간 시인 묵객이 새겨 놓은 글이 곳곳에 있어 자연경관뿐 아니라 역사문화의 요소를 간직한 복합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명승 93호 화적연은 한탄강이 휘돌아가며 형성된 깊은 연못과 그 위로 13m 높이로 솟은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주변 생태 환경 또한 가치가 높다. 한편 조선 후기 8대 명창 가운데 한 명인 정창업 선생의 증손녀 정의진(66) 명창이 서울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서울시는 정 명창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2호인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해 이날 고시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세밑 ‘음악 선물세트’

    세밑 ‘음악 선물세트’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특별하게 보낼 좋은 방법을 꼽으라면 제야 음악회도 있다. 서울의 주요 공연장들은 저마다 장르별 특색을 갖추고, 다양한 부대행사를 마련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은 제야 음악회를 30일과 31일에 연다. 30일에는 소프라노 조수미와 뮤지컬 배우 바다·최재림이 출연해 조수미의 새 음반에 수록된 곡을 중심으로, ‘엘리자벳’과 ‘오페라의 유령’ 등 유명 뮤지컬 음악을 선사한다. 31일 음악회는 1부 ‘고맙다 2012’(오후 6시 30분)와 2부 ‘설렌다 2013’(10시 30분)으로 나누었다. 1부에서는 이소라가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귀를 사로잡고, 루시드폴과 남성 듀오 바이브가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준다. 이소라는 2부에도 출연해 1부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작곡가·가수·영화음악 감독으로 활약하는 정재형을 비롯해 가수 이정,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 기타리스트 이상순이 무대에 오른다. (02)399-1114. ●예술의 전당 31일 클래식 무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는 정통 클래식 무대가 31일 오후 9시 30분에 준비됐다. 지휘자 정치용과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 김원,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 테너 김재형이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을 선사한다. 베르디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인 2013년을 앞두고,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서곡과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으로 1·2부를 연다. 사라사테의 카르멘 환상곡·지고이네르바이젠, 슈트라우스 가곡,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등을 한자리에서 들을 수 있다. (02)580-1300. ●장충동 국립극장선 장르별 음악 무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은 2012년 마지막 날 오후 8시부터 밤 12시까지 국악·뉴에이지·뮤지컬 등 각 장르의 대표 음악가들이 고급 종합선물 같은 무대를 만든다. 안숙선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눈대목을 제자들과 함께 부르고,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대표곡인 ‘침향무’를 연주한다. 크로스오버 음악가 양방언은 ‘아리랑’을 편곡해 처음 공개하고,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은 뮤지컬 배우 최재림과 다양한 뮤지컬 음악을 들려준다. 원일 예술감독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관현악곡 ‘깨어난 초원’과 ‘신뱃놀이’를 준비했다. 공연 후 타악그룹 ‘들소리’의 야외공연과 대형 불꽃놀이 등이 펼쳐진다. (02)2280-4115.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의 제야음악회는 재즈, 대중음악, 성악, 뮤지컬 등으로 구성한 축제 같은 시간이다. 오후 10시 부터 충무아트홀이 처음 자체 제작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의 주요 장면을 선보인다. 임학성 재즈밴드와 뮤지션 류복성, 포크그룹 해바라기 등이 흥겨운 무대를 꾸민다. 장애를 딛고 세상과 소통하는 허지연이 클래식 기타를 연주한다. 공연 후에는 야외광장에서 새해 카운트다운과 소망풍선 날리기, 새해 덕담 나누기 등 부대행사를 연다. 무료. (02)2230-6613.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009년 새 주소로 탄생한 ‘권삼득路’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009년 새 주소로 탄생한 ‘권삼득路’

    권삼득로는 전주가 ‘판소리의 고장’임을 일깨워 준다. 조선시대 전주의 명창 권삼득을 기념해 새 주소사업을 계기로 명명됐다. 향토사학자, 국어학자, 지역 토박이 등이 망라돼 1년여의 조사와 회의 끝에 2009년 남북로로 쓰이던 길을 개명했다. 다른 지역 개명 작업이 한달 정도 걸린 것과는 비교된다. 전통과 양반의 고장이라는 전주의 정체성 찾기에 초점을 맞췄다. 권삼득이 길 이름으로 부각된 것도 역사성과 전통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전주는 민속음악경연대회인 대사습놀이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이 길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도립국악원 앞에는 권삼득을 기념하는 ‘권삼득 기적비’가 우뚝 서 있어 길 가던 객의 발걸음을 잡는다. 권삼득 기적비는 판소리 때 쓰는 북 모양을 돌로 조각해 만들었다. 글은 석전 황욱이 썼다. 돌 북의 한쪽 면에는 ‘國唱(국창) 權三得 紀績碑(권삼득 기적비)’란 글자가, 다른 면에는 권삼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기적비 앞에는 별도로 대리석 기단에 까만 오석을 세워 비를 세우게 된 연유를 적고 있다. 권삼득은 양반 출신의 전설적인 판소리꾼이다. 소리꾼들을 쫓아다니며 창을 배우다 가문에서 쫓겨났지만, 19세기 전반인 순조 때에는 8대 명창에 올랐다. 본명은 권정. 사람소리, 새소리, 짐승소리의 세 소리를 얻었다고 해서 삼득(三得)이라 불렸다. 1771년 (영조47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하은담 등으로부터 소리공부를 시작, 전주 근교 산과 계곡 등을 떠돌며 소리를 익혀 득음을 했다고 전해진다.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 ‘판소리 설렁제’의 개척자로 ‘흥부가’ 등이 장기였다. 조선후기 판소리 이론의 비조 신재효는 그의 소리를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비유한 바 있다. 흥부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의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은 그의 씩씩한 가조의 전형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국립창극단의 ‘무한변신’

    국립창극단의 ‘무한변신’

    “외면받는 창극은 의미를 잃는다. 전통의 전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에게서 멀어지면 그 전통이라는 것이 남아 있겠는가.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관객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고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성녀(62)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창극단 변화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김 감독이 자신에게 준 임무이자, 창극단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그 첫 시도가 지난달 말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린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이다. 무대 위에 객석 600여석을 ㄷ자 모양으로 올리고, 무대 끝에는 장화와 홍련이 빠진 호수를 만들었다. 어두컴컴한 무대, 서늘한 느낌을 골라내는 국악 소리, 버들나무가 음산하게 드리운 호숫가. 여기에다 괴이한 얼굴이 떠다니는 영상이 어우러지면서 섬뜩함을 배가시켰다. ●소리꾼의 창 거의 없이 섬뜩함 배가 두 자매가 억울하게 죽은 한을 풀어 달라며 나타나는 고전소설 ‘장화홍련’을 바탕으로, 자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웠다. 무능한 아버지 배무룡과 장화와 홍련에게 친절했던 새엄마 허씨, 철없는 남동생 장수. 끝없는 좌절과 배신감, 모멸감을 겪으면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폭발하는 인간의 파괴적 성향을 그렸다. 간결한 무대와 집중력 있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한태숙 연출의 특징을 살리면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창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도창이 있으나, 이야기를 설명하고 관객의 흥을 돋우는 역할이 아니라 괴기함을 배가시키는 역할이다. 해학이나 풍자 대신 섬뜩함이 도사린다. 그래서 창극에서 나올 법한 ‘얼쑤’, ‘그렇지’ 같은 추임새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소리꾼의 창이 거의 없다. 김 감독은 이 작품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익히 알려진 창극 형식이 아니라 연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얻은 것이 있다. “그동안 일정한 틀 안에 갇혀 있던 창극단 배우들이 연극식 연기를 경험했다는 것,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는 설명이다. ●객석과 소통하고 즐기도록 꾸며 반면 국립창극단이 오는 16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올리는 ‘배비장전’이야말로 창극에 가깝다. 이번에는 사라진 판소리 일곱 바탕을 창극으로 만드는 작업 중 하나다. 고고한 척 위선을 떨던 배비장이 기녀 애랑의 유혹에 본색을 드러내는 과정을 담은 ‘배비장타령’이 원작이다. 안숙선 명창이 창을 만들고 작곡가 황호준이 작곡했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대모인 오은희 작가, 2008년 대한민국연극대상 등을 휩쓴 연극 ‘리어왕’의 연출자로 명성이 높은 이병훈 연출도 손을 잡았다. 배우들이 극장 사방에서 나타나 객석과 소통하고 낄낄대면서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창극단 간판 배우 남상일과 박애리, 신예 김준수와 이소연이 다른 색깔의 배비장과 애랑을 연기한다. ●내년에도 ‘다양한 창극’ 선보일 것 김 감독의 머릿속은 내년 계획으로 가득차 있다. ‘강릉매화타령’, ‘숙영낭자전’처럼 알려지지 않은 판소리 일곱 바탕을 꾸준히 발굴해 선보이면서 내년 3월에는 윤호진 연출가와 함께 ‘서편제’를 올리고, 5월에는 그리스 비극 중 하나를 창극으로 만들어 공연할 예정이다. 김 감독은 “창극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우리 소리를 기반으로 연극적 요소를 넣어보고, 오페라와 접목시키는 시도를 해 볼 생각”이라면서 “관객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창극의 모습을 만나면서 창극의 변화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전주-선비처럼 놀고 한량처럼 마시다

    전주-선비처럼 놀고 한량처럼 마시다

    1,000년 역사의 자존심을 간직한 가장 한국적인 고장, 전주를 찾았다. 그리고 풍류를 마셨다. 약 700여 채의 한옥과 문화유적 등이 가득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 여행의 1번지라 할수 있다 전주 여행 1번지, 한옥마을 전주는 후백제 견훤이 도읍을 정하고 왕업의 바람을 일으켰던 곳이자,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건국을 위해 한나라 유방의 시 ‘대풍가’를 불렀던 왕조의 발상지다. 또한 숱한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역사의 바람을 다스리며 전통문화의 요람으로 꼿꼿이 자리를 지켜 왔다. 그래서 전주를 여행할 때 항상 1번지가 되는 곳은 완산구 교동과 풍남동 일대의 한옥마을이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해 사람들은 이곳에 한옥촌을 형성했다. 현재 전주한옥마을 내에는 약 700여 채의 도시형 한옥들과 경기전, 전동성당, 오목대, 향교 등 유명한 문화유적지와 한옥생활체험관, 전통문화센터, 전통공예방과 찻집, 카페, 음식점 등 다채로움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은 ‘경기전’이다. ‘왕의 사당’을 일컫는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로,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지만 광해군 6년에 중건되었다. 입구에서부터 하마비,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로 150cm, 세로 218cm의 태조 어진은 경기전 본전에 봉안되어 있는데 실물 100% 크기로 태조의 나이 60세 때 그려진 것이다. 경주와 평양 등지에 봉안했던 다른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전주 어진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화려하면서도 위엄이 살아있는 초상화에서는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6척 장신에 야전장수다운 태조의 기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경기전 내에는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史庫와, 태조어진박물관이 볼거리다. 2010년 건립된 어진박물관은 태조 외에도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조어진 봉안 때 사용하던 가마를 볼 수 있다. 또한 1872년 태조어진 봉안행렬을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한 ‘반차도(행렬 그림)’도 흥미진진하다. 전주한옥마을 | 주소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문의 063-232-6293 한옥마을에는 재미있고 이색적인 분위기의 카페들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한다 물맛 좋기로 유명한 전주에는 막걸리가 또한 유명하다 / 술보다는 현란한 안주에 입이 떡 벌이지는 전주막걸리골목. 주당과 함께라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소리가 아름다운 집 전주에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사셨던 양사재를 비롯해 풍남헌, 동락원 등 한옥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품격 있는 한옥 민박이 여러 곳 있다. 그 가운데 한옥마을 내에 자리한 학인당學忍堂은 전주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자 민가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백범 김구 등 정부요인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는 99칸이었지만 지금은 본채인 학인당과 별당채인 진수헌, 사랑채인 예지헌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전국 국악 명인 명창들의 무대였던 전주대사습놀이가 강제로 폐지되자, 인재 백낙중 선생은 판소리 명창들을 위한 무대로 1908년 학인당을 건립했다. 그후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임방울, 김소희 등 판소리 대가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펼치며 판소리의 맥을 이어 왔다. 평상시 응접실인 본채의 대청은 공연 때는 공간을 합쳐 1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공간이 된다. 마룻바닥의 널판은 폭이 좁아 소리가 빠져나갈 틈을 줄이고, 두께는 10cm 이상 두꺼워 소리의 진동으로 인한 떨림을 줄인다. 한지 또한 4겹을 발라 소리의 울림을 극대화했다. 학인당의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도 빼놓을 수 없다. 연못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끝에는 한여름 냉장고 대용으로 쓰였던 땅샘이 있다. 학인당 |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 문의 063-284-9929(전화예약만 가능) 5 한옥마을 민가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학인당 6 472년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다 7 경기전 내의 어진박물관에 전시된 반차도 8 태조의 초상화가 모셔진 경기전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소문난 잔치에 오시게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라는 명성까지 얻은 전주에는 비빔밥, 콩나물국밥과 함께 막걸리의 명성도 자자하다. 전주막걸리가 맛있는 이유는 물이 좋기 때문이다. 특히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은 예부터 청수정淸水町이라 불릴 만큼 좋은 물맛을 자랑했다. 게다가 전주는 김제와 만경 등 비옥한 전북의 쌀 생산지를 옆에 두고 있다. 전주에는 막걸리촌이 여러 곳 있다. 삼천동, 서신동, 경원동, 평화동, 효자동 등 권역별 막걸리촌마다 안주가 다르고 특색이 있지만 공통점은 막걸리 값만 내면 안주는 공짜라는 점이다. 3병이 들어가는 기본 한 주전자를 비우고 다시 한 주전자를 더 시키면 새로운 안주가 펼쳐지고 최대 여섯 번까지 새로운 안주판이 펼쳐진다. 전주막걸리골목의 원조는 삼천동이다. 가장 많은 막걸리집이 모여 있고 선택의 폭도 넓다. 최근 뜨고 있는 서신동은 기존 막걸리전문점과는 달리 푸짐한 안주로 인기다. 젊은 단골들이 많다. 안도현 시인의 단골집인 홍도주막은 효자동에 있다. 블로그나 현지민들에게 가장 입소문이 자자한 서신동 막걸리 골목의 옛촌막걸리는 최근 막걸리골목 업소들의 안주가 획일화된 것에 비해 안주의 수준에서 제일 낫다는 평을 듣는 곳 중에 하나다. 이곳은 기본 2만원에 부침개, 미니족발, 두부김치보쌈, 삼계탕의 기본안주 4가지가 첫 번째 상이다. 두 번째 주문부터는 꽁치양념구이, 꼬막, 계란부침, 세 번째부터 간장게장밥, 홍합탕, 산낙지, 홍어삽합, 전어구이, 떡갈비, 은행볶음, 새우구이 등 6차까지의 안주가 아주 현란하다. 많은 가짓수보다는 제대로 된 안주 서너 가지를 내놓는다. 주인장은 당일 제조한 신선한 막걸리와 좋은 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 오기에 푸짐하게 대접할 수 있다는 점이 인기 비결이라고 한다. 막걸리의 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탁주로, 머리가 아플 것이 염려된다면 가라앉힌 맑은 술로, 달달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탄산음료와 섞어 마셔도 좋다. 무엇보다 전주막걸리골목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배가 고플 때 주당과 함께 가는 것이다. 옛촌막걸리 | 주소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 843-16 문의 063-272-9992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한국관광협회중앙회 02-757-7485 ▶travie info 전주 서신동 막걸리골목 전주에서 가장 많은 막걸리집이 밀집한 대표적인 막걸리타운은 삼천동이지만 삼계탕이나 족발처럼 든든한 안주를 먹고 싶은 사람들은 서신동을 찾는다. 특히 이곳에는 삼계탕은 기본 안주로 하는 곳이 많다. 젊은 취향의 막걸리 집들이 야심차게 내놓은 퓨전 안주에도 도전해 보시라. 버스 노선은 서신동사무소 3-1, 3-2, 5-1, 5-2, 61, 105, 161 비사벌APT 5-1, 5-2, 61, 105, 161, 309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문단 데뷔 50주년 맞아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펴낸 황석영

    문단 데뷔 50주년 맞아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펴낸 황석영

    “자생적 근대화운동의 기점이 1894년 동학혁명인데, 내년이 동학에서 말하는 상원갑 120년의 마지막 해다. 동학은 상원갑이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하원갑이 120년간 지속된다. 길고 고통스러운 ‘근대’가 마감되고 어서 개벽의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올해로 문단 데뷔 50주년을 맞은 황석영(69)은 지난 22일 인터뷰에서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 펴냄)를 출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962년 단편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곰곰이 생각한 뒤 그는 “‘황석영 아바타’를 만들자, 자생적 근대가 좌절된 시대를 배경으로 19세기 이야기꾼으로 살아간 몰락한 지식인 ‘이신통’의 이야기를 풀어 써 보자.”고 맘을 먹었다. 이신통은 조선시대 패관문학에 나오는 장풍운이나 괴짜 선비 정수동(1808~1858)과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꼬박 7개월 동안 200자 원고지 1500장을 채워 나갔다. ●7개월간 200자 원고지 1500장 채워 ‘여울물 소리’의 화자는 박연옥이다. 어미인 구례네는 기생으로 시골 양반의 첩살이를 하다가 어린 연옥을 데리고 나와 색주가를 연다. 연옥도 어미의 삶을 닮은 듯 후처살이를 들어갔다가 아이 없이 3년 만에 도망 나와 구례네의 객주 일을 돕고 산다. 연옥에게 정인이 있었으니, 열 살이나 차이 나는 30대의 이신통이다. 20대 초반의 이신통은 어미가 종인 얼자 출신이었지만, 과거를 보겠다며 한양으로 도망치듯 집을 나와 전기수(소설을 읽어 주는 사람)로 살아가다가 1882년 하급 군인들이 들고일어나 도시 폭동으로 발전하는 임오군란을 겪고 그 와중에 동학 도인들을 만나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혁명적 사상에 빠져든다. 그러니까 소설은 임오군란에서 갑오농민 혁명기의 망국을 앞둔 격변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임오군란은 봉건왕조로 대표되는 일부 기득권층과 세도정치에 대한 저항이었고, 조선이란 나라의 정체를 파악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또 갑오농민운동은 자생적 근대가 좌절된 이야기라서 이런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과 도시 빈민, 하층 군인 등 중인 이하의 잡직에 종사하는 인물들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시대가 혼란하면 기층민은 삶의 무게에 시대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세월을 건너가야 했다. 황석영의 아바타 이신통을 제외하면, 여성 명창 심백화를 비롯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체로 실존 인물이다. 심백화는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1847~?)을, 김봉집은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을, 천지교의 1·2대 교주인 최성묵과 최경오는 각각 천도교의 1·2대 교주인 최제우(1824∼1864)와 최시형(1827∼1898)을 말한다. 서일수와 박인희·박도희 등 동학 도인들도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황석영은 “천도교를 천지교라고 하거나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살짝 바꾼 것은 역사적 사건을 피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시대 야담과 민담을 집대성한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패관문학과 역사책을 충분히 읽고 삭였다고 했다. ●서울 종로통 등 손바닥 보듯이 설명 ‘여울물 소리’를 읽는 또 다른 재미는 한성 도성 안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면서 서울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린낙지로 유명한 서울 종로통은 의금부와 서장옥이 있던 곳이다. 매운 낙지를 혓바닥을 호호 불면서 먹는 이유가 터가 센 곳인 탓 같다. 종로4가에서는 죄인을 효수했다. 홍제동에는 색주가가 많았고, 공덕동에는 주막이 많았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졸들은 이태원에서 주로 살았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나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는 ‘너는 서사가 많은 나라에서 살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는데 나는 ‘너도 한번 겪어 봐라. 얼마나 힘든데’라고 속으로만 응수한다.”면서 “서사가 많은 땅은 고통이 많은 땅인데, 이제 우리 민족도 고통스러운 근대를 마감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억압·고통 넘어 미래 맞이할 준비 필요 황석영은 “21세기를 포스트모던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동아시아 3국은 아직도 근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일본은 성공적으로 근대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적 상징인 천황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중국은 공산당이 독재하고 경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기형적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은 분단으로 근대적 민족국가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진단한 뒤 “근대의 상처가 대선 때마다 나타나고 있는데, 억압과 고통을 넘어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서편제’ 데뷔 20년 오정해

    [김문이 만난사람] ‘서편제’ 데뷔 20년 오정해

    ‘큰 소리꾼이 되어라, 마음의 한을 품어라, 큰 소리꾼이 되어라.’ 20년 전 영화 ‘서편제’는 그렇게 심금을 울렸다. 아버지가 딸을 진정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다. 앞이 안 보이는 딸은 ‘이제는 소리밖에 할 수 없지요.’라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 영화 최초 100만 관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그야말로 영화의 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판소리와 소리꾼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 그만큼 사회적 이슈였고 눈부신 영상에 녹아든 여주인공 송화의 목소리에 울고 감동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와 한을 토해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 영화는 1993년 상하이영화제 최우수감독상(임권택), 최우수 여우주연상(오정해), 제3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 제1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남우주연상(김명곤), 제4회 춘사영화예술상 대상·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오정해), 청룡영화제 최다관객상·대상·작품상·촬영상·신인여우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오정해(41)씨에게는 요즘 ‘서편제’(아래 사진)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20년 전 미스 춘향 ‘진’으로 뽑히면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서편제’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얼떨결에 출연했지만 영화가 대박을 터뜨릴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울면서 연기를 했던 기억이 선하다고 말한다. 연기 생활 20년을 맞은 그를 만났다. 지난 13일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경기 안양의 한 중국집 2층에서 마주 앉았다. 중국집은 ‘퓨전 중식’ 메뉴로 남편이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남편을 도와 중식당에 가끔 나왔지만 지금은 바빠서 거의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오씨와는 구면이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이 좀 지났는데도 얼굴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자 “저는 숫자를 잘 몰라요, 나이를 세면 뭐해요.”라며 웃는다. 그는 원래 솔직 털털한 성격이다. 책 읽는 것, 조근조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지난주 토요일 경기 광주에서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부제,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관객들과 편하게 만났습니다. 그때 그랬지요. 지난 세월을 살아오면서 데뷔 20주년이라는 말을 처음 꺼냈습니다. 전화를 주시지 않았으면 그조차도 잊고 살았을지 몰라요(웃음).” 원래부터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나이든 몇 월 며칠 세는 것이 중요한지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얼마 전 결혼 15주년인 것도 잊었었고 생일도 가끔 ‘까먹는’ 경우가 있단다. 정말 그렇게만 지냈을까. 따지고 보면 세월의 무게, 세월의 힘이란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철학박사 학위를 땄고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라는 새로운 무대도 시작했다. 또 판소리 다섯 마당과 아리랑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자료수집 등 책자 발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씨와 만나면서 ‘서편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떠올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서편제는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아요. 자기 안에서 찾는 영화의 장면이 달라요. 화면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영상과 음악이 아주 잘 어울리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잘 함축된 음악, 그리고 북을 치는 동호와 회포 푸는 장면 등 제가 불과 22살 때 겪었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는 당시가 더 어른스러웠다며 웃는다. 지금은 아이 낳고 엄마가 되었지만 그때는 뭣도 모르고 자신만만하게 모든 일을 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또한 주위에서 많이 이끌어 주었기에 더욱 그랬단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미스 춘향’ 시절로 돌아갔다. 타고난 노래 솜씨를 보이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판소리를 시작했다. 13살 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에서 최연소로 장원을 하면서 명창 김소희(1995년 작고)의 제자가 됐다. 이후 KBS 국악마당에 두 번 출연하면서 한복 연구가 허영(2000년 작고)과 인연을 맺었다. 결국 한복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미스 춘향’ 대회에 나가게 되면서 ‘서편제’를 찍게 됐다. “어디 대회나 무슨 행사에 나갈 때마다 주위에서 제 손을 꼭 잡아 주셨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엄청난 행운이었죠. 도움을 많이 받았고 따라서 책임감 또한 컸습니다. 소리꾼 오정해로서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왔다고나 할까요. 또 ‘서편제’라는 명찰이 붙어 있으니 부담이 없어요. 어떤 무대든, 어떤 장소든 그 명찰로 100% 편하게 다가갈 수 있어요. 관객들의 기대치도 그런 것 같고요.” 그는 지난 20년 세월을 돌아보면서 아이 낳고 딱 한 달 집에서 쉰 것 외에는 거의 매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것 같다고 회고한다.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는 라이브 무대를 꾸준히 가졌다. 월요일에 한복을 입으면 이튿날에는 드레스를, 또 그다음 날에는 연극 무대복으로, 일주일 동안 매일 옷을 갈아입으며 관객들과 만났다. 그럴 것이 ‘서편제’ 이후 영화,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학생, 선생으로 살아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박사학위까지 땄다며 수줍게 웃는다. 내용을 묻자 대단한 일은 아니라면서 부각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래도 연기자 중에는 보기 드믄 철학박사가 아니냐고 거듭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원래 저는 다도(茶道)에 취미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엄마문화가 없잖아요. 교육문제도 그렇고 아이를 학교에만 맡긴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음식, 예절, 꽃, 그릇,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갖다 보니 원광대에 계신 교무님을 알게 되면서 원광대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됐고 7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그의 논문 제목은 ‘판소리 심청가의 예술성 연구’이다. ‘심청가’를 모성애적 차원에서 새롭게 풀어 써 관심을 끌었다. 인당수 자체가 곧 ‘모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문을 쓰고 나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많은 자료들을 모았지만 논문에 다 풀어내지 못해 좀 더 연구하면서 책으로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내친김에 심청가에 이어 판소리 다섯 마당까지 접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 있다. ‘아리랑’을 연구하겠단다. “외국 사람들이 ‘아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잘 못합니다. 지방마다 다르고 외국 교포사회에서의 아리랑도 다르고 그렇잖아요. 누군가 쉽게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새삼 더 생겼다고나 할까요.” 공부하면서 느꼈던 고충도 털어놓는다. 익산까지 오고 가느라 직접 운전(지프 형식의 SUV 차량)을 하는 것도 그렇고 멀미하는 것, 방송과 무대 출연하는 것, 특강 시간을 쪼개 가며 공부하는 것 등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늘에 충실하려는 버릇’ 때문에 무사히 공부를 마친 것 같다며 웃는다. “저는 단기 기억상실증처럼 살자는 주의입니다. 오늘에 충실하는 것이지요. 과거는 흘러간 것이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 미리 불안해할 필요도 없잖아요. 또 어느 순간 일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냥 놔 버려요. 오늘 다 움켜쥘 필요가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놔 버렸던 것이 다시 오거든요. 20년 전에는 책임감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놔 버릴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겨울이 되면 길가의 가로수가 나뭇잎조차 내려놓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는 20년 전에 입었던 옷을 지금도 입는다고 했다. 중간에 ‘돼지’처럼 살찌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시에 직접 만들었던 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의 집에는 애지중지하는 재봉틀이 있다. 본인의 옷은 물론이고 아들 옷, 조카들 옷까지 손수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시간이 되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원단을 직접 고른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머릿속으로 20년을 다시 정리했다. 소리꾼 오정해는 판소리를 예술적으로 접근하는 일을 시작했고, 또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라는 특별한 무대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으며 내년에는 본인이 작사한 노래로 음반을 낸다. 아울러 집착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편안하게 ‘오늘주의’로 홀가분하게 살아가고 있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행복한 오정해가 되는 것이며 오늘이 행복해야 미래가 있는 것 아니냐. 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대답이 모호해진다.”며 웃는다. 동갑인 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낸다. 영화, 독서 등 취미도 비슷하다. 17년 전 뮤지컬 ‘쇼 코미디’에 출연했을 때 동료 배우 최정원씨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슬하에 중학생인 아들이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판소리 신동 오정해 철학박사 되기까지 197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6살 때 고전무용을 시작했다. 한복을 뒤집어쓰고 사극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후 주위의 권유로 국악과 판소리, 가야금을 배웠다. 13세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최연소로 장원, 주목을 끌었다. 이때 인간문화재 김소희 선생의 직계 제자가 됐다. 중학교 2학년 방학 때부터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판소리를 공부했다. ‘춘향가’ 이수자인 그는 학창시절부터 국악경연대회나 명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1992년 미스 춘향 ‘진’으로 선발되면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 ‘서편제’(1993년)로 데뷔했다.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서울관객 100만명 돌파 등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서편제’로 스타가 된다. 이후 영화 태백산맥(1994년), 축제(1996년), 천년학(2007년) 등에 출연했다. 2008년에는 마당극 ‘학생신위부군’에 출연, 호평을 받았다. 중앙대 국악예술학 석사를 거쳐 최근 원광대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방송 진행, 특강, 연극, 뮤지컬 등에 출연하고 있다.
  • 명무 한성준·명창 심정순 부활

    명무 한성준·명창 심정순 부활

    한성준(1874~1941)은 100여종에 이르는 전통춤을 집대성하고 무대에 올리면서 한국춤의 새로운 공연미학을 정립했다. 10대에 춤과 농악, 줄타기 등을 익히고, 이동백·김창환 등 명창들의 북장단을 도맡으면서 당대 최고의 명고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1938년에는 근대 전통춤 교육의 산실인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으며, 신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에게 전통춤을 전수했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지켜낸 우리 춤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숨쉬고 있다. 춤전문자료관 연낙재는 한국춤문화시리즈 ‘내포제 전통춤의 재발견’을 준비하고, 첫 번째 시간으로 민속무용가 한성준을 재조명한다. 14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헌정기념관에서 학술세미나 ‘한성준 춤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현대적 계승방안’을 열고, 19일에는 충남 홍성에서 한성준의 영향을 받은 후대 무용가가 공연을 연다. 이애주 서울대 교수의 승무, 정재만 숙명여대 교수의 살풀이춤, 이흥구의 춘앵전, 조흥동의 한량무, 김매자의 산조춤으로 구성했다. 28일 서산문화원에서 열리는 두 번째 시간에는 명창 심정순(1873~1937)을 집중조명한다. 전통적인 가야금 명인이자 판소리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심정순은 경기·충청의 소리인 중고제의 마지막 계승자이다. 대를 이어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큰아들 심재덕은 각종 우리 악기에 능통해 이화여대에서 국악을 가르쳤고, 가수 심수봉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심정순의 딸 심화영은 충남무형문화재 제27호로 승무의 대가이다. 이날 학술세미나와 함께 펼치는 공연에서는 이애주·이현자·정재만·조흥동의 춤사위에 이어 심화영의 손녀 이애리가 승무를 선보인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임직원들 판소리 뗐으니 이젠 아리랑에…”

    “임직원들 판소리 뗐으니 이젠 아리랑에…”

    “올해에는 판소리에 도전했고, 내년에는 민요 아리랑, 후년에는 경기창을 시도할 겁니다.”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 얘기냐고? 아니다. 크라운해태 임직원들의 이야기다. ‘예술 경영’, 유별난 ‘국악 사랑’으로 이름난 윤영달(67) 회장이 지난 7개월 동안 임직원 100명과 함께 연습한 판소리 단가 ‘사철가’(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노래) 떼창 공연(세종문화회관 3~4일)을 마치기도 전에 앞으로의 계획부터 풀어놓았다. 내년에는 아예 조각 부문 ‘아리랑 어워즈’를 만들어 아리랑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중국과 벌이는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속내도 비쳤다. ● 3~4일 임직원 100명과 ‘사철가’ 떼창 공연 사철가 공연에 앞서 최종 리허설 준비로 바쁜 지난달 31일 서울 남영동 본사에서 윤 회장을 만났다. “국창 조상현 선생과 수제자인 이숙영 명창에게 매주 하루 2시간씩 7개월 동안 소리 지도를 받았다. 소리를 처음 해 보는 임직원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어디서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은근히 실력을 자랑했다. 회장이 배우라니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연습장에 나오던 임직원들이 점점 국악에 빠져 변해 가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알기 쉽게 나름의 악보도 직접 만들었다. “사철가를 부르지 않을 거면 회사도 그만둬야 하느냐는 직원들의 우스갯소리에 빼줄 테니 회사까지 그만두라고 농담을 했다.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겠죠. 하지만 내 신조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겁니다.” 윤 회장의 국악 프로젝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년에는 전국 100개 영업소 직원들을 ‘아리랑 앓이’에 빠지게 할 계획이다. 크라운해태 후원으로 5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제3회 ‘조각 페스타’를 아예 아리랑 축제로 치를 생각이다. “전국에 모두 127곡의 아리랑이 있다고 한다. 100개 영업소에 그 지역의 아리랑을 찾아 배우게 한 뒤 경연을 거쳐 10개팀을 선발하고, 내년 5월 조각 페스타에서 공연과 함께 우승팀을 가릴 것”이라고 했다. 또 페스타에 참가할 전 세계 조각가 200여명에게 아리랑을 듣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제출하도록 했다. “어떤 아리랑을 들었는지 명시토록 했으니 자연스럽게 아리랑의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직원들에게 국악과 조각, 시를 배우게 하는 게 경영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자 “요즘은 제품 품질이 비슷해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관건”이라며 “몇 개월씩 함께 판소리를 배우고 조각을 하다 보면 가까워지고 이 모든 게 언젠가 제품과 서비스에 묻어날 것”으로 확신했다. “이게 바로 엔터테인먼트 경영”이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내년에는 조각부문 ‘아리랑 어워즈’ 만들 것” 윤 회장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국악과 시, 조각을 지원하고 있다. 2007년 전통 국악단인 ‘락음국악단’을 창단했다. 송추아트밸리 근처 모텔을 개조해 무명 조각가들에게 작업장 겸 거처로 제공하고 있다. 김균미 문화에디터 kmkim@seoul.co.kr
  • [새 음반] 중견 대금연주자 박상은 첫 정규 앨범

    [새 음반] 중견 대금연주자 박상은 첫 정규 앨범

    대금 소리는 가까이서 들을수록 매력적이다. 입에서 대금으로 들어간 바람이 한편에서 새어나고 한편으로는 대금의 중후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가을바람 같은 소리는 잡념을 날린다. 화려한 기교가 들어 있지는 않지만, 지루하지 않고 정신을 맑게 한다. 중견 대금 연주자 박상은(37)의 첫 정규 앨범 ‘박상은의 대금-바람에 젖다’가 꼭 그렇다. 열다섯에 국악계에 입문한 박상은은 KBS 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프레이즈 인 국악’ 진행자로, 드라마 OST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음반에는 지난 3~4년간 연주한 곡 중 호응이 좋았던 것을 골랐다. 1950년대 김소희 명창이 작창한 ‘상주아리랑’은 은은한 대금 소리와 명쾌한 피아노 선율이 잘 어우러진 대금 연주곡으로 태어났다. 재즈가수 말로가 참여한 ‘파랑새’, 바이올린·비올라·첼로와 협연한 ’경풍년’ 등도 귀 기울이게 하는 연주곡이다. 박상은의 기교는 ‘타래’에서 발산된다. ‘국악관현악을 위한 대지 2번’ 1악장을 재구성한 ‘타래’의 세 악장에 강약과 장단, 고저를 다양하게 녹인 대금 연주를 선보인다. 대금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소니뮤직.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27일 세종문화회관서 ‘광대인생 60년 기념 공연’ 김덕수 한예종 교수

    [김문이 만난 사람] 27일 세종문화회관서 ‘광대인생 60년 기념 공연’ 김덕수 한예종 교수

    ‘신명으로 승부를 걸어라.’ 이 외침은 철학이요 존재의 이유였다. ‘신명’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저절로 신이 난다. 그런데 직접 보고 느끼면 어떻게 될까.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잠자는 ‘신명’을 들춰낸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 ‘신명’과 만나는 사람은 다들 흥이 절로 나 그만 ‘신병’에 걸리고 만다. 인간의 혼을 두들겨 기어코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박자측정기로는 도저히 파악이 안 되는 사물놀이, 그것은 ‘신명’으로 몸 구석구석까지 카타르시스로 파고든다. ‘신명’으로 지구촌을 누비는 김덕수(60)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아호가 ‘신명’이다. 하여 신명으로 태어나 신명으로 승부를 걸며 살아가고 있다. 되돌아보니 벌써 60년 세월이 흘렀다. 오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흥, 김덕수 광대인생 60년기념공연’을 갖는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학교에 강의 나온 지 얼마나 됐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리에 앉았다. 15년 전 (이 학교에)연희과가 생기면서 지금까지 계속 학교에 나오고 있다며 학생들과 만나는 게 아주 즐겁다고 웃는다. 공연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묻자 “그럼요. 이번 공연은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꼭 보러 오세요.”라고 말했다. 일단 출연진만 해도 화려하다. 명창 안숙선, 판소리 오정해, 한국무용가 김리혜(김덕수의 부인) 등을 비롯해 외국 대표로 볼프강 푸쉬닉, 자말라딘 타쿠마 등도 참가한다. 제자 60명이 모처럼 모이는 뜻깊은 자리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60은 이제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지요. 연희와 사물놀이의 탄생, 그리고 제가 5살 때, 그러니까 처음 무동이 됐을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 등 사물놀이와 김덕수의 과거, 현재, 미래 등을 함께 버무린 신명나는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오랜 세월 김덕수를, 그리고 사물놀이를 사랑해 준 국민들에게 바치는 헌정무대입니다.” 김 교수는 또 “이번 무대의 특징 중 하나가 흑인대표(자말라딘 타쿠마, 뉴욕), 백인대표(볼프강 푸쉬닉, 오스트리아), 한국대표(김덕수와 제자들) 등이 나와 서로 신명나게 난장판을 벌일 것”이라며 자신 있게 웃는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진지했다가 크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때로는 악동 같아 보이기도 했다. 광대인생 60년 기념공연을 갖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인생이든 사물놀이든 어떤 정리는 또 다른 시작의 근원이 아니냐.”고 몇 번 강조한다. 이때 미국에 있는 제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사물놀이로 지구촌 곳곳 안 가본 데가 없다. 제자들이 어느 정도일까. “외국무대 진출 35년 동안 5대양 6대주를 다니다 보니 현지 제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물놀이를 창단한 목적은 사물놀이가 전통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리듬의 언어이며 자연의 울림이지요. 어느 민족이라도 그들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리듬에 우리의 신명을 불어넣어 주면 저절로 우리를 따르고 좋아합니다. ‘덩더쿵’이라는 신명으로, 말 없이 몸으로 선생과 제자들이 만납니다. 그렇게 35년이 되다 보니 이제 세계 각국의 음악대학에서 고정적으로 학점을 줄 정도가 됐습니다. 제가 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 학교에 악기를 선물로 주고 우리의 신명을 가르친 결과이지요. ” 1984년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사물놀이를 가르치기 시작해 미국의 하버드대와 예일대, MIT공대, 인디애나주립대 등에서도 여러 차례 강의했다. 최근에는 영국의 케임브리지대 개교 800주년 행사 때에도 사물놀이에 대해 감동 깊게 설파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학 교수 제자들이 세계 곳곳의 대학에 포진해 있습니다. 이제는 현지 제자들이, 그곳에서 자주 공연을 합니다. 60년 세월에서 이게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지요.” 세계를 향한 그의 사물놀이 전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달 9~11일 충남 공주에서 ‘세계 사물놀이 대축제’가 열린다. 세계 각국의 인종이 참여한다. 벌써 20년째다. 여기에서도 그는 제자들을 연수시키고 가르친다. “외국인들은 하체가 약합니다. 우리는 다리는 짧지만 하체가 강하거든요. 우리 문화는 곡선이며 감아싸는 멋과 감기는 맛이 있습니다. 외국인들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생활속에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된장비빔밥을 그들의 것과 합류시키는 것이지요. 외국 작곡가들도 우리의 신명에 대해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 업그레이드시켜야 합니다. 선진문화로 가려면 그동안 먹고사느라 잊었던 문화를 살려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산층을 구분할 때 아직도 중형차와 아파트 평형을 기준으로 합니다. 선진국은 그게 아닙니다. 집에 어떤 악기를 가지고 있는지, 외국어는 어느 정도 구사하는지 등을 따집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문화적으로 한 단계 올라서야 선진국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사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문화만큼은 우리에게 꼼짝 못합니다. 가수 싸이의 말춤을 보세요. 우리의 신명입니다. 마당에서 신명나게 추는 막춤입니다. 기마민족의 후예로 말춤을 만들어내는 것도 우리 신명의 비결입니다. 도약과 감기는 것, 사물놀이도 그 같은 신명의 막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말도 신명의 씨앗이듯 그 신명을 살려야 할 때가 비로소 도래했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문화를 살리기 위해서는 학교 다닐 때 1인1기의 풍류를 가르치는 등 교육체계도 재점검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이유로 우리 문화를 잊었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되찾아 ‘덩더쿵’ 신명이 세계문화의 근본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사물놀이 악기가 있는 것입니다. 서양악기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100년밖에 안 됩니다. 학교마다 서양악기가 다 있잖아요. 우리라고 못할 것 없지요. 이미 터전을 닦아놨으니 30년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남사당인 아버지(벅구놀이의 명인)를 따라 장구를 다루며 놀았다. 다섯 살 때 무동으로 전통예술무대에 올랐고 1959년 불과 7살의 나이로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가, 대통령상을 받아 일찍부터 ‘장구의 신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구와 쇠가락은 양도일, 송순갑 선생 등을 사사하고 김소희, 정권진, 진영희 선생 등 민속악계의 명인들로부터 넓은 음악세계를 접했다. 아울러 국악예술고에 진학하면서 체계적인 국악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국악예고 시절에는 2년 선배인 박범훈 전 중앙대총장과 함께 자취하다시피 지내며 음악적 우정을 쌓기도 했다. 국악예고 졸업 후 전통예술공연단체의 일원으로 전 세계 순회공연을 다니며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78년 ‘사물놀이’를 창단, 국악으로 세계를 누비는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일본 등 1년에 150여회씩 순회공연을 펼쳤다. 또한 그는 ‘전통을 붙잡느니 차라리 이단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전통을 변용해 다양한 장르와의 퓨전공연을 시도했다. 힙합가수와도, 바이올린과도 척척 호흡을 맞췄다. 까닭에 한국문화 발전과 성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으며 해방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는 한울림예술단을 구성해 제자들과 함께 강원도 오지 5일장, 육군훈련소 등 전국 곳곳에서 연 100회가 넘는 공연을 펼치고 있다. 김 교수는 일찌감치 경기도 양평에 악기공방을 차렸다. 품질 좋은 전통악기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다. 무용가인 부인과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가수와 MC로 활동하는 수파사이즈이며 둘째는 금융계통에서 일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도 그는 “한국이란 좁은 땅에서 세계를 감동시키는 것은 문화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덕수 교수는 7살때 대통령상… 세계공연 年 150회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5살 때 남사당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장구와 놀며 무동(舞童)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7살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장구와 쇠가락은 양도일, 송순갑 선생 등을 사사했다. 1970년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78년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창단했다. 이후 1년에 150여회 세계공연을 다녔다. 1982년 미국 댈러스 세계 타악인대회, 1984년 캐나다 밴쿠버 월드드럼페스티벌,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 축하공연 등을 통해 사물놀이의 신명을 세계에 알렸다. 1995년 사물놀이패 한울림을 창단했다. 2001년 전통문화벤처기업 난장컬처스 대표,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통예술위원을 거쳐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음반으로는 ‘난장-뉴호라이즌’(1995), ‘김덕수 사물놀이 결정판’(1996), ‘풍물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미스터 장구’(1997), ‘김덕수 예인인생 50주년 길’(2007) 등 다수가 있다
  • [심재억 전문기자의 건강노트] 판소리 한토막의 행복

    오랜만에 보건복지부를 찾았다. 명색이 출입처라면서 다른 일에 바빠 근래 얼굴 한번 내밀지 못했던 터라 낯설었다. 두루 인사를 나누자니 뜻하지 않게 저녁 자리로 이어졌다. 생일을 맞은 동료에게 ‘조공’ 삼아 출세(出世)를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일단 멍석이 펼쳐지자 회포가 몇 길이라도 되는 양 소주잔이 가쁘게 돌았다. 취기가 돌아 다들 귓볼이 달아오를 무렵 누군가가 기막힌 제안을 했다. 동석한 인사 중에 소리꾼 반열에 드는 ‘천하의 가객’이 있으니 소리 한 토막 청해 듣자는 것이었다. 그 분위기에 누가 그걸 마다할까. 박수로 소리 한 토막을 청했다. 쑥스러운 듯 목을 가다듬은 그 인사는 이윽고 물꼬를 밀어낸 봇물처럼 소리를 터뜨렸다. 수궁가의 고고천변(皐皐天邊) 대목이었다. 수궁의 별주부가 토끼 간을 구하러 세상에 막 나와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읊조리는, 명창 송만갑 선생이 잘 불렀다는 그 대목이다. 우렁한 소리가 활달하고 경쾌하게 술자리를 휘어잡았다. 판소리라는 게 이제는 ‘꼰대들 노래’가 되어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어가지만 어쩌랴, 그 소리에는 우리의 민족 정서를 깨우는 각성의 묘약이 들었으니…. 다들 기이하다, 신통하다는 듯 소리에 빠져들었다. ‘고고천변 일륜홍(日輪紅) 부상(扶桑)에 높이 떠 양곡(凉谷)의 깊은 안개 월봉(月峯)으로 돌고 돌아 어장촌(漁場村)에 개 짖고 회안봉(廻雁峯)에 구름이 떴구나.’ 그 후로도 한동안 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배부른 세상에 구곡간장을 끊을 듯 내뱉는 그 절창이 어울리지 않는다지만 예전의 신산했던 시절에 비해 영혼의 주림이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세상임을 안다면 그렇게 재단할 일도 아니다. 요즘 아이돌의 얼치기 노래, 음미할 여지조차 없는 맹탕 사랑타령에 지친 내게 그 고고천변 한 토막이 준 울림은 컸다. 나야 그 소리 한 토막에 뿅, 갔지만 사람마다 정서의 층위와 색깔이 다를 터이니 굳이 그것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겠다. 무엇인들 상관있으랴. 위태로운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가끔 그런 도락이라도 즐기며 살 일이다. jeshi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75년…‘배뱅이굿’ 무형문화재 이은관 옹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75년…‘배뱅이굿’ 무형문화재 이은관 옹

    거침이 없다. 결코 쉬는 일도 없다. 남성의 바리톤 같은 저음에서 여성의 소프라노 목소리까지 시공을 뛰어넘으며 우리 가락을 잘도 버무려 낸다. 때로는 웃음과 슬픔, 때로는 깊은 곳에 묻혀진 회한을 꺼내 달래고 어루만진다. 희로애락, 그 가슴을 후벼파고 쥐어짜기도 한다. 95살, 5년 후에는 100살이 된다. 서도소리 명인 이은관(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배뱅이굿’을 가장 잘 부른다. 현재까지 ‘배뱅이굿’에 관한 한 그를 따를 자가 없는 명창이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제자를 가르치고 매달 4~5회씩 공연을 하는 등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 주변에 위치한 ‘이은관 민요교실’을 찾았다. 이 선생은 제자 전옥희(배뱅이굿 이수자)씨와 함께 앉아 다음 공연에 대해 얘기하다가 “내가 다리가 조금 불편해서 일어서지 못해 미안하다.”며 앉은 채로 반긴다. 빨간 티셔츠에 짙은 회색 상의 차림이어서 그런지 한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오늘은 한복을 집에 두고 왔으니 뭐 어때. 이런 모습도 좋지 않아요?”라며 사진 촬영에 응했다. 대신 장구를 잡더니 공연 때 하는 것처럼 배뱅이굿 중 한토막을 즉석에서 흥겹게 읊어댄다. “옛날 서울 장안에 이 정승 김 정승 최 정승 삼 정승이 재산은 많으나 아들 딸이 없어서 명산 대찰에 불공을 드려서 아들 딸 좀 낳아 보겠다고 삼 부인 삼 정승이 명산 대찰을 찾아가는데 삼 부인이 그냥 매일같이 아들 딸 낳게 해 달라고 빌고 정성을 드렸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삼 부인이 아마 그달부터 뱃속에 뭐 하나씩 생겼던가 봐요. 하루는 말이요. 삼 부인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서 꿈 야기판이 벌어졌어요. 제일 먼저 이 정승 부인께서 한마디 해보이는데 아이고 난 저번에 꿈을 꾸었는데 그저 꿈에 하얀 백발 노인이 머리달비 한쌍을 주길래 그 달비 받아서 치마폭에다 배배 틀어연 꿈을 꾸었는데 어찌 그런지 요즘은 그저 머리가 자끈자끈 아픈게 그저 시큼털털한 개살구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어~” 이 선생은 “이제 그만 됐습니다.”라고 할 때까지 한 호흡도 쉬지 않고 계속 이어나간다. 10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도대체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여 건강에 대한 얘기부터 나왔다. 이 선생의 웃음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해맑고 환하다. 그 자체만 해도 건강 유지 방법 중 하나이다. “나 말이오? 건강하죠. 그러니까 이때까장 노래부르잖아요. 전화 목소리는 잘 안들리고 가끔 다리가 아파서 걷는 것을 조심하고 있어요.” 병원에 입원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다만 건강검진을 위해 3일 정도 입원한 적이 있다고 옆에 있던 제자가 거들었다. 그렇다면 75년의 소리인생을 살아오면서 지금도 무대를 휘어잡는 진짜 건강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말이에요. 생활이 규칙적이죠. 식사를 하루에 다섯 번 해요. 먹고 싶을 때 조금씩 다섯 번을 먹는 습관이 있어요. 소식이지요. 하루 세 끼가 아니라 다섯 끼이기 때문에 혼자서 해먹지요. 기본 반찬은 며느리가 갖다 주는데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동네 슈퍼에 가서 미리 사놨다가 혼자 요리를 해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선생의 자택은 서울 황학동이다. 사업을 하는 아들 부부가 2층에서 살고 이 선생은 아래층에 혼자 산다. 주로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원래 고기를 좋아해요. 소고기도 좋아하는데 돼지고기 사다가 김치에다 라면을 넣고 끓여 먹으면 아주 맛있어요. 그래저래 고기는 한 달에 20일 이상 먹는 편이지. 소식으로 여러 번 먹고, 또 고기를 자주 먹는 그런 습관이 30년이 넘었어요. 요즘에는 잠을 잘 자요. 낮이건 밤이건 자고 싶을 때 1시간이나 3시간씩 여러 번 잠을 자요. 밤에 자다가 일어나 출출하면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도 해 먹고 다시 자고 아주 편해요. 잠이 안 오면 악보 그리고 작사하고, 심심할 시간이 전혀 없어요(웃음).” 그는 지금도 작사 작곡을 한다. 세상에 드러내놓지 않는 자작곡(신민요와 민속민요)만 100여편에 이른다. 또 색소폰, 전자오르간, 아코디언 등 서양악기는 물론이고 피리, 가야금 등 대부분의 국악기도 다룬다. 이 선생의 말대로 ‘심심할 틈’이 도저히 없다. 올해는 어떤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까. 이 선생은 “나는 잘 몰라요. 우리 제자한테 물어보세요.”라고 대답한다. 옆에 있던 제자 전씨가 얼른 얘기한다. “10월 9일 소월아트홀(서울 행당동)에서 공연이 있어요. 제자들과 함께하는 무대이지요. 그리고 10월 16일 밀양에서 있고, 연말까지 10회 정도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선생님(이은관)의 열정은 정말 대단해요. 지금도 한 달에 큰 행사만 2~3회 정도 합니다.” 화제를 옛날 얘기로 돌렸다. 어떻게 소리를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이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신불출(만담가이자 연극인)의 ‘대머리 영감’이나 ‘엉터리’, ‘견우직녀’, ‘홍길동’ 같은 ‘유성기’를 동네 사랑방에서 어른들과 함께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농부였던 부친이 노래를 잘 불렀다고 회고한다. “아버님 따라 밭에도 가고 산에도 갔지요. 그때마다 아버님이 ‘나무하러 가세 나무하러 가세, 상상 마루에 올라가세’ 하는 산타령을 지게 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면서 아주 잘 불렀어요. 내가 그걸 따라 부를 때마다 흥이 납디다. 아마 내 노래 소질은 아버님을 닮은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 배운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라는 창가,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 등의 동요를 불러 학예회에서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17살 때 강원도 철원극장에서 콩쿠르가 열렸다.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 출전해 ‘창부타령’과 ‘사설난봉가’를 불러 일등상을 받았다. “그때 상을 받는 바람에 얼씨구나 하고 좋아했지요. 이젠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갔어요. 왜냐하면 서울에는 방송국도 있고, 서울에 가면 출세하는 줄 알았지요. 결국 어떻게 해서 경성방송국에 출연했어요. 그게 소문이 나서 더욱 우쭐했지 뭡니까. 고향에 다시 갔더니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더군요.” 하지만 그는 노래실력을 탐탁잖게 생각했다. 수소문 끝에 황해도 황주에 있는 이인수 명창에게 찾아가 배뱅이굿과 서도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그는 “3개월 동안 스승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며 노래를 배웠는데 아주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셨다.”면서 “재담이 아주 길고 다양하셨다.”고 술회한다. 이후 이 선생은 서울로 다시 와 조선가무단에서 유랑극단 생활을 했다. 이때 특유의 높고 고운 소리의 구성진 창법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57년 양주남 감독의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해 배뱅이굿 1인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원래 배뱅이굿은 굿이 아니라고 이 선생은 강조한다. 남도의 판소리처럼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소리로 풀어내는 1인 창극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탁발 나온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 정승의 딸 배뱅이가 상사병을 앓다 죽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팔도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건달 청년이 거짓 무당 행세로 횡재한다는 줄거리다. ‘배뱅이굿’은 경쾌하고 장조가 많은 특징이 있으며 이 선생이 이런 장단을 처음으로 정립했다.1984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16살 차이 나는 맏딸만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족 얘기가 나오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소학교 시절이었지요. 하루는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해서 선을 보러 말타고 20리를 갔습니다. 얼굴도 제대로 못봤는데 방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신부 목소리가 아주 곱더군요. 아이 셋 낳고 먼저 갔습니다. 내가 자식들 공부를 제대로 못 시켰어요. 그게 한이 됐지요. 출세하려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고 나중에 돈이 생기니까 ‘공부값’으로 자식들한데 얼마씩 주었습니다.” 그는 가족들과 매년 초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난다. 증손자까지 모두 20여명이라며 웃는다. 다복하지 않으냐는 표정이다. 인간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꿈이 있기 마련이다. “5년만 있으면 100살입니다. 남은 인생 잘 마무리해야지요. 뒤돌아보면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고 먼저 세상을 떠난 처가 생각납니다. 내가 제자를 많이 받아들이는 것도 그런 한이 있어서 그래요. 정신이 또렷할 때까지 열심히 가르치고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민속악도 그냥 소리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악보를 보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일어섰더니 “추석 잘 보내시고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요.”라며 파안대소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은관 옹은 고교시절 마을 콩쿠르서 1등 후 소리공부…‘배뱅이굿’은 이인수 명창에게 배워 1917년 11월 27일 강원도 이천에서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나온 뒤 철원고등학교 시절 마을 콩쿠르대회에 나가 ‘창부타령’과 ‘사설난봉가’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과 황해도를 오가며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했다. 14살 때 4살 연상과 결혼했지만 떠돌이생활로 소리인생을 시작했다. ‘배뱅이굿’과 ‘서도명창’은 황해도 황주에서 스승 이인수 명창에게 배웠다. 1957년 양주남 감독의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1984년 배뱅이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29호로 지정받았다. 2002년 제9회 방일영국악상, 1990년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지금도 한 달 평균 큰 행사만 2~3회를 치를 만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며 서울 황학동에서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다.
  • [저자와 차 한 잔] 사설집 ‘이순신歌 펴낸 소리꾼 김영옥

    [저자와 차 한 잔] 사설집 ‘이순신歌 펴낸 소리꾼 김영옥

    ‘그때여 이순신은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세월의 흔적을 뒤돌아보니/ 인생의 그림자에/ 얼룩진 상흔들이/ 가슴을 꽂는구나.’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야기는 이렇게 아니리(이야기하듯 줄거리를 말하는 것)로 시작하고요. 옥포해전에서 왜적을 소탕할 때는 휘모리장단(아주 빠른 장단)으로 흥겹게 몰아치죠.” ‘난데없이 돌격하라/ 호령하고 외쳐 댄다./ 쥐새끼 같은 왜놈들/ 허둥지둥 허겁지겁/ 우왕좌왕 좌왕우왕/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저리 갔다 이리 왔다/(중략)들쑥날쑥 지랄 염병/ 천병을 치고 자빠졌다/ 오매 오매 오매 오매.’ 지난 20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에서 만난 소리꾼 김영옥(65·남도전통음악연구소 이사장)은 직접 만들고 부른 ‘이순신가’의 대목을 쏟아냈다. 그는 최근 충무공의 출생부터 학문 과정, 벼슬기와 시련기, 옥포·부산·한산도·노량해전 등 임진란과 죽음까지 모두 담아 동명 사설(가사)집 ‘이순신가’(SNS 펴냄)를 냈다. 판소리 ‘이순신가’의 시작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여수시에서 시립국악단을 만들면서 초대 예술감독직을 제안했다. 서라벌예대에서 가야금을 전공한 그는 ‘서편제 심청가의 전형’이라고 불리는 한애순(88)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고, 한농선(1934∼2002) 명창에게는 동편제 ‘흥부가’를 전수받았으니 자격은 충분했다. 다만 1968년부터 순천여고, 순천대, 부산대 등에서 줄곧 가르치기만 했던 터라 행정직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한번 해보자.’며 수락했지만 쉽지 않았다. 직원은 단장과 예술감독, 딱 둘이었고, 단원은 모두 비상임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전남 여수의 브랜드가 될 창무극을 만들어 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는 우리 민족의 감성인 애정, 의리, 우애, 효심, 충심이 모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적벽가’만 중국 삼국지가 바탕이에요. 우리에게도 자랑스럽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데 말이죠.” 그래서 그가 집중한 인물이 충무공이다. “여수는 충무공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그는 “여수는 전라 좌수영의 본영이 있었고, 거북선을 만든 곳인 데다 임진란 내내 어머니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면서 충무공과 여수와의 관계를 술술 풀어냈다. 2004년에는 충무공의 충효·충절을 조명해 ‘성웅 그리고 어머니’를 올렸다. 30분짜리 단막극이었지만 여수시민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이 공연 후 이순신연구소의 정광수 소장이 찾아와 완창본을 제안했다. 솔깃했다. “난 소리를 하는 사람이지 국문학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는 더더욱 아닌 탓에 덜컥 겁이 나긴 했다.”는 그는 “소리꾼으로서 제 역할을 해보자는 생각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난중일기’는 물론이고, 충무공 관련 문헌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글을 써내려갔고, 국문·역사 학자들에게 자문을 얻었다. 3년 만에 4만자에 육박하는 판소리 사설을 만들어 2007년에 처음 여수에서 완창을 했다. 무려 3시간 40분짜리 공연이었다. 그해 미주국악경연대회 심사위원으로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현지 원각사 부주지 지광스님에게 ‘이순신가’ 공연을 요청받았다. 워낙 갑자기 받은 터라 “카네기홀이라면 몰라도….”라고 농을 던졌는데, 공연이 잡혔다. 이듬해 10월, 뉴욕 카네기홀 웨일 리사이틀홀에서 4시간에 걸친 ‘이순신가’가 울려 퍼졌다. “소극장 규모였지만 내게는 그 무대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그저 빨리 끝내고 싶었어요. 마무리하자마자 분장실로 달려 들어갔는데, 관리인이 오더니 어서 무대로 나가보래요. 객석에서 박수가 끊임없이 나오더라고요.” 뉴욕에 처음 ‘이순신가’를 전한 보람과 함께 책임감이 다가왔다. 국립국악원, 전주소리축제 등에서 여러 차례 공연하면서 꾸준히 다듬어 드디어 ‘후회 없는’ 완창본을 내놨다. 이제 바람이라면 이 책이 토대가 돼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 마음에 충무공을 심는 것이다. 이 시대에 충무공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충무공이 어릴 적 생계를 위해 남의 집 일을 도왔던 것을 예로 든 그는 “요즘으로 말하면 ‘알바생’이었다. 그래도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결국 성웅이 된 충무공은 요즘 어려운 시기를 겪는 청소년들에게 멘토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정치인들은 충무공의 강직과 청렴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임진란 420주년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 더욱 충무공 리더십을 되새겨야 한다.”는 그는 “올해가 가기 전에 서울 세종로 충무공 동상 앞에서 많은 이들에게 ‘이순신가’를 들려주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글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종합불교예술제 해남 미황사서 새달 13일 열려…불교회화·음악·음식 체험 기회

    종합불교예술제 해남 미황사서 새달 13일 열려…불교회화·음악·음식 체험 기회

    다음 달 13일 ‘땅끝 마을 아름다운 절집’으로 소문난 전남 해남 미황사에서 종합불교예술제가 열린다. ‘미황사의 소리’라는 타이틀 아래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괘불재가 그것. 불교회화와 불교음악에 곁들여 불교음식을 함께 체험하고 싶은 이에겐 놓칠 수 없는 자리다. 행사는 괘불재와 음악회로 나뉘어 열릴 예정. 먼저 있을 괘불재는 원래 백성들의 한을 달래고 고혼을 천도하기 위해 열렸던 행사의 재연이다. 미황사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은 이 괘불재가 임진왜란(1592년) 이전부터 미황사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지난 4월 미황사 약사여래불 복장에서 1568년 판본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바다와 육지의 고혼들을 달래기 위해 평등하게 공양하며 재를 올릴 때의 의례서)가 발견돼 그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보물 제1342호인 미황사 괘불탱화는 높이 12m, 폭 5m의 대형불화. 1727년 스님 7명이 조성한 이 괘불은 1년에 단 한번 이 괘불재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이 괘불은 예전부터 큰 법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일본 규슈박물관에 미황사 괘불재가 초대되어 1달 동안 토픽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날 괘불재에선 전통방식으로 불단을 차려 무려 1500여명이 이운, 고불문 낭송, 만물 공양, 통천, 법어, 음악 공양 등에 참여한다. 이 가운데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보선 스님의 법어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박송희 명창의 음성공양이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괘불재를 마치고 오후 6시부터는 ‘미황사 음악회’가 이어질 예정이다. ‘미황사 음악회’는 사실상 국내 산사 음악회의 시초나 다름없는 행사. 2000년 가을 시작한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줄곧 열려왔다. 올해 행사는 해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음악인과 남도 들 노래를 발굴해 소개하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문화재 박양애씨의 강강술래, 이인자씨의 민요며 동네 소리꾼들의 무대가 차례로 펼쳐질 예정이다. 가수 백창우와 굴렁쇠아이들이 초청됐으며 관람객들이 동참할 만한 프로그램도 준비됐다. (061)533-3521.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소리 진면목 즐기고… 국악 풍류 배우고

    소리 진면목 즐기고… 국악 풍류 배우고

    국악의 풍류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새달 나란히 열린다. 우리 소리를 제대로 즐길 수 있거나, 가족과 함께 국악을 배우는 시간이다. 올해로 12번째를 맞는 전주 세계소리축제가 ‘소리 한 상 가득’이라는 주제로 새달 13~17일 전북 전주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한옥마을 등에서 열린다. 중견 명창들의 판소리 다섯 마당부터 판소리극, 창극, 해외초청작 등 42개 공연이 200여회 오른다. 작곡가 김형석과 함께 집행위원장을 맡은 박칼린 연출가는 “대중성을 이어가면서 정통성도 확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꾸몄다.”면서 “정통 판소리, 퓨전음악, 세계음악 등 다양한 공연에서 소리축제의 진면목을 두루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판소리극 ‘2012 광대의 노래’는 올해 소리축제의 브랜드 공연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다룬 ‘동리-오동은 봉황을 기다리고’를 준비했다. 문순태 작가의 소설 ‘도리화가’가 원작이다. 14~16일 한옥마을 학인당에서 열리는 3개 기획공연은 가을밤 풍류가 묻어난다. 즉흥의 멋이 돋보이는 기악독주곡으로 꾸민 ‘산조의 밤’(14일)에서는 원장현 대금 명인과 김일구 아쟁 명인이 깊이 있는 음악을 선사한다. 가곡·가사·시조 등 한국 전통성악곡을 다양하게 듣는 ‘정가의 밤’(15일)에서는 조순자·조영숙 명인이 품위 있는 정가를 소개한다. ‘옛 소리로의 초대’(16일)는 판소리 연구가 이규호의 해설로 옛 판소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간이다. 어린이를 위한 공연도 많다. 제주도 설문대할망 설화를 바탕으로한 창작극 ‘공작새의 황금깃털’을 비롯해 국악방송과 함께하는 공개방송 ‘국악은 내 친구’, 심청가·홍보가를 콘셉트로 한 체험전시 ‘판소리 스토리박스 & 체험놀이’가 펼쳐진다. 다채로운 세계 음악도 만날 수 있다. 창단 50주년을 맞은 살사밴드의 최고 거장 ‘엘 그랑 콤보’가 첫 내한공연을 갖고,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포르투갈의 전통 성악 ‘파두’도 이번 축제에서 들을 수 있다. 1577-4052. 국립국악원은 가족과 함께 국악을 직접 배우면서 만끽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새달 15일부터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가족국악강좌에서는 자녀 연령별로 장구, 단소, 가야금 등을 배울 수 있다. 7~10세를 대상으로 ‘장구와 전래동요’와 ‘어린이 사물북’을, 10~16세를 위해서는 단소·해금·가야금 강좌를 운영한다. 5~6세 미취학 아동이 있는 가족들은 무료 과정인 ‘놀이와 전래동요’를 수강할 수 있다. 강좌 마지막 날인 11월 24일에는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그동안 배운 내용으로 공연을 한다. 수강신청은 30일까지 국립국악원 국악교육전문 사이트인 e-국악아카데미(www.egugak.go.kr)에서 받는다. 참가비는 1인당 2만 5000원. (02)580-3054.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60년’ 국악인 신영희씨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60년’ 국악인 신영희씨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후회하지 않을까. 그게 처절하든 아니든 말이다. 그런데 후회라는 단어를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고 외길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온 한 여인이 있다. 지난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신영희 국악 연습실’에서 20여명의 젊은 여인들이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저 처량한 새 울어 울어, 평생 낭군을 못잊어 이팔 청춘 과부되어, 공방 적적 홀로 뚝~’ 가만히 들어 보니 새타령 가락이긴 한데 처음 듣는 가사내용이었다. 하지만 곱디고운 목소리에 내면 깊숙한 한이 곳곳에 서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새달 15, 16일 이틀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신영희 소리인생 60주년 콘서트’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다. 국악인 신영희(70)씨는 2002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50주년 기념공연을 한 이래 10년 만에 대형무대를 마련한다. 함께 연습 중인 신씨와 잠시 만났다. 방금 전 불렀던 노래에 대해 먼저 물었다. “조선 말기 5명창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전설의 소리꾼 이동백 선생의 새타령입니다. 1900년 고종 황제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슬을 얻었지요. ‘춘향가’, ‘적벽가’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새타령’은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새타령에는 온갖 상상의 새들이 다 등장합니다. 가사나 가락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소리 인생 6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터. 소감을 물었다. “세월이 무상하지요. 10살 때 소리를 시작했는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하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본분에 충실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지요. 뒤돌아보니 그동안 고생도 있었지만 많은 제자를 길러낸 것을 가장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60년 국악인생’ 처음으로 무대 올려 제자 자랑이 계속 이어진다. 지금까지 대통령상 수상자 8명, 국무총리상 수상자 20여명, 장관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며 웃는다. “저는 제자들에게 항상 주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돼라. 그 다음에 소리다’라고 말입니다. 소리가 조금 부족하면 연습해서 도달하면 되지만 인간이 안 되면 연습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효제사상, 그러니까 덕을 갖추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라고 늘 강조합니다. 이런 관계로 20년, 아니 30년된 제자들도 여럿 있지요.” 다시 공연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신씨는 “이상벽(방송인)이랑 누나 동생하며 지내는 사이인데 이상벽이가 그래요. ‘누나, 올해가 60주년인데 그냥 있으면 되겠습니까. 멋진 공연 한번 해 보시지요. 송해 선생님도 하는데 못할 게 뭐 있습니까’라고 해서 이번 무대를 마련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하여 이씨가 사회를 보고 친구인 배우 사미자, 김형자, 윤문식씨가 함께 출연한다. 한때 개그 프로그램에서 명콤비를 이루었던 ‘쓰리랑 부부’의 김미화와 김한국씨도 무대를 빛낸다. 김미화씨는 신씨의 딸과 오랜 친구이다. 신씨의 애제자 30여명도 함께 출연한다. 60주년인 만큼 퓨전 국악무대로 꾸민다. 1부에서는 신씨의 60년 일대기가 드라마 형식으로 펼쳐진다. 사미자, 김형자씨가 어머니 역할로 번갈아 출연하고 명창 김일구씨가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신씨의 제자 둘이 10~30대 연기를 하고 40대 이후 역할은 본인이 직접 맡는다. 2부에서는 쓰리랑 부부와 함께 흥겨운 마당놀이로 꾸며지며 옹헤야, 뱃노래, 새타령, 물레타령 등 신나는 노래를 직접 들려준다. “지난 60년 세월, 그러니까 제 인생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영민, 이주희 작가가 대본을 썼는데 그걸 읽고 세번이나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와 제가 소리하면서 고생했던 대목에서 울었지요. 이래저래 이번 무대에서 진정한 저의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잠긴 듯했다. 몸 상태를 물었더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빼고는 컨디션이 좋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저녁에는 올림픽 공원에서 걷기 운동으로 컨디션을 조절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자신에게는 식지 않는 패기와 정열, 그리고 용기가 있으니 좋은 무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악은 내 팔자이자 생명 그 자체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국악을 할 것입니다. 국악이 서양음악에 비해 훌륭한 이유를 아시나요. 서양음악은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바리톤, 테너 등으로 나눠 부르지만 국악은 이 모든 것을 함께 아우르며 고저 장단의 음을 다 소화해내지요. 외국에 공연가면 서양음악인들은 바로 이런 점을 매우 놀라워합니다.” 그가 국악을 하게 된 계기는 판소리 명인 아버지(신치선)의 영향을 받았다. 10살 때인 어느 날 아버지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제자들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배우겠다고 아버지한테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살림이나 하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노래 솜씨가 영 없는 것은 아니니 한번 가르쳐 보라.”고 설득해 그날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은 것이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반대하셨지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어느덧 60년이 됐네요.” 신씨가 16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소녀 가장이 됐다. 고등학생인 오빠, 그리고 초등학생인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열심히 판소리를 했다. 권투를 하는 오빠와 공수도를 하는 남동생 사이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권투와 역기, 아령 등을 익힌 것도 이때였다. 이에 대해 신씨는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교육자로 살아가는 오빠를 볼 때마다 늘 자랑이고 보람을 느낀다.”고 술회했다. 고생했던 일도 기억한다. “15살 때인가 그래요.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어혈이 심하게 생겼습니다. 목과 배가 너무 아파 식초와 섞은 계란 흰자를 1년 넘게 먹으면서 견디기도 했지요. 좀 고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소녀 가장이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무대예술을 전공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출연하는 무대는 대부분 직접 무대감독과 안무까지 한다. 국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우리 국민들이 우리 것을 외면할 때, 남의 나라 음악을 추구할 때였다.”고 말한다.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국악 중의 꽃은 바로 소리입니다. 장단과 몸놀림까지 합쳐진 종합 예술이지요. 그런 자부심으로 1979년부터 유럽, 미국, 일본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녔습니다. 특히 독일 공연 때 함성소리와 함께 기립박수를 받았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리의 판소리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임을 실감했지요.” ●“국민들이 국악 외면할 때 가장 힘들어” 우리 문화가 살아야 나라도 산다고 강조하는 그는 세 가지 실천 덕목을 지킨다.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고, 꾸준한 운동으로 몸관리를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봉사활동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그는 1976년부터 교도소와 수녀원 등을 다니면서 36년째 매년 남 모르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 6월에는 육군교도소와 영월교도소에서 1시간 넘게 공연을 했고 7월에는 나자로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국악하는 지인,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간다. 이럴 때면 좋은 쌀을 사다가 절편 등 직접 떡을 만든다. 대개 1시간 20분 정도 무료공연을 하는데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 등을 곁들인다. 올가을에만 4곳에서 예정돼 있다. “제가 국악인의 딸로 태어나 국악인으로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사회에 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무대의 수익금도 봉사활동을 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나이 70인 제가 늙지 않는 것도 이런 즐거움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지요(웃음).” 선임기자 km@seoul.co.kr [신영희씨는] 박봉술·김소희 선생 등에 익혀… 판소리 준문화재 지정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판소리 명창인 아버지한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6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판소리를 불러 오빠와 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이후 안기선, 김준섭, 박봉술, 강도근, 김상룡, 김소희 선생한테 판소리를 익혔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김소희 선생 전수장학생에 선정됐다. 1976 중앙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으며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준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무대예술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 판소리보존회 이사와 원광대학교 국악학과 교수 등을 맡고 있다. 남원 춘향제 명창부 최우수상(1977)과 2005년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저자와 차 한 잔] ‘한국 음악의 거장들’ 펴낸 서울대 한국학연구원 송지원

    [저자와 차 한 잔] ‘한국 음악의 거장들’ 펴낸 서울대 한국학연구원 송지원

    오선지에 익숙하다. 음악가 이름을 대라면 모차르트와 베토벤, 바흐 등 서양음악 작곡가가 튀어나올 것이다. ‘한국 음악의 거장들-그 천년의 소리를 듣다’(태학사 펴냄)는 이와 다른 우리 음악이 있음을 보여 준다. ●국악 이야기 쉽게 풀어내 “산책을 하듯 썼어요. 산책을 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어느 날 안 보이던 것을 발견할 때도 있잖아요. 국악연구는 그런 경험과도 같아요. ” 지난 1일 서울 태평로 서울신문 본사에서 만난 송지원(53)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책에 차곡차곡 담은 음악가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음악가를 빠끔히 들여다보다가 그들에게 인생역정을 듣는 듯 몰두하게 됐다고 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런 내 이야기를 해 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면서 살포시 웃었다. ‘한국 음악의 거장들’은 2009년에 출간한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의 확장판이다. ‘마음은 입을 잊고’에는 세손 시절부터 악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정조와 절대음감의 소유자 세조, ‘악학궤범’을 남긴 성현, 해금 명인 유우춘, 여성 음악가 계섬과 석개, ‘오디오형 가수’ 남학 등 음악가 28명을 담았다. 이번 책은 여기에 24명을 덧댔다. 저자는 “군주나 사대부 출신은 기록이 많지만 대다수 인물들은 고서에 한두 줄 정도 흔적만 있다. 그런 기록들을 모아 음악학적으로 해석하고 당시 사회상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풀었다.”고 설명했다. 책은 새로 추가한 조선 후기의 문인 오희상으로 시작한다. 거문고 연주를 “삿된 마음을 금하고 자신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여긴 인물이다. 거문고를 탈 때는 안정된 자세와 고정된 시선, 한가로운 생각, 맑은 정신, 견고한 지법을 유지하는 오능(五能)을 강조했다. 거문고를 연주하지 말아야 할 조건(오불탄·五不彈)도 지켰다. 그가 연주를 마칠 즈음이면 “고니가 조용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했고, 고요하고 한가로워” 사람이 절로 빠져들었다고 전해진다. 손가락 끝이 아닌,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음악을 한다고 평가받은 오희상은 송 연구원이 우리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선비들은 학문을 닦다가 마음이 답답하면 거문고를 타면서 어지러운 생각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음악을 생활의 일부, 삶의 포괄적 개념으로 본 풍류가 있었죠.” ●거문고 연주에 고니 날고 노랫소리에 학 춤춰 학이 움찔움찔 춤추고 싶도록 노래한 가객도 있다. 김수장의 ‘해동가요’에 열거된 명창 56인에 속한 김중열(숙종~영조 대)이다. 거문고 실력도 “덤불 속의 난초, 까마귀와 까치 속 봉황새”라고 칭찬받을 만큼 출중했던 그는 18세기 가객으로 활약했다. “궁상각치우를/ 주줄이 잡혔으니/ 창밖에 엿듣는 학이/ 우줄우줄하더라.”는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장가 먼저 들고 가야금을 배워라.” 하던 스승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평생을 홀로 산 가야금 명인 민득량이 있는가 하면, 젊은 시절 인기를 누리며 아내를 멀리했다가 “늘그막에 비로소 짝이 있는 즐거움을 알았노라.”고 노래한 거문고 거장 이원영도 있다. 정간보 창안이나 편경 제작법을 이룬 세종부터 소현세자를 따라 망국의 한을 안고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사람 굴저까지 신분과 성별을 초월해 우리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을 줄줄이 만날 수 있다. 석사까지 서양음악을 전공했지만 저자는 서울대 음대에서 한국음악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양 음악과 문학을 폭넓게 넘나드는 이유다. 산책하듯 연구했다더니, 산책길의 수다처럼 책도 재미있다. “1990년대에 KBS 국악 프로그램에서 대본을 쓰고 진행하기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듣고 나니 과연 그 ‘글솜씨’를 제대로 녹였구나 싶다. “우리는 서양음악을 많이 알고 있지만 국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요. 우리 음악을 만들고 발전시킨 음악인을 계속 발굴하고 흥미롭게 풀어내면 우리 문화를 보는 시선도 자연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우리 음악인들과 함께하는 산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글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부고] 여성국극 최고스타 조금앵씨 별세

    [부고] 여성국극 최고스타 조금앵씨 별세

    한국 전통 뮤지컬인 여성국극계의 최고 스타였던 국악 원로 조금앵씨가 별세한 소식이 뒤늦게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한다. 8일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등에 따르면 조씨는 지난 3일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82세. 고인은 1930년 8월 서울 종로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첫째 언니가 광복 전 여성국악동호회를 이끈 판소리 명창 중 한 명인 조농옥, 살풀이춤으로 유명한 조농월이 둘째 언니다. 셋째 언니 조귀인은 창극 배우로 유명했고, 배우 조춘이 막내 동생이다. 고인은 셋째 언니를 따라다니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1943년 동일창극단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고, 광복 후에 본격적으로 남장 주연 배우로 자리 잡으면서 1950~60년대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국극은 창, 전통무용 등으로 구성된 전통극으로, 창극이라고도 불린다. 여성국극은 모든 출연진이 여성으로, 남성 역할도 여성이 맡았다. 고인은 젊은 시절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를 연기하고 강렬한 눈빛으로 거친 싸움 장면을 소화하면서 요즘 한류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무대에 서면 공연장 주변이 관객들로 미어터졌고, ‘남장 배우’에게 반한 광팬들이 혈서를 써서 보내는 일도 잦았던 시절이다. 그를 흠모한 한 극성팬의 간청으로 가상 결혼식을 올린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여성팬이 기혼자였던 터라 남편이 찾아와 항의했다가 조씨가 여성 배우라는 것을 알고 화를 풀었다고 한다. 고인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무대에 올랐고, 여성국극 배우로는 처음으로 1996년 화랑문화훈장을 받았다. 평소 “무대 위에서 공연하다가 죽겠다.”고 말했던 그는 ‘은퇴를 모르는 여배우’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몇년 전 골절 사고를 당해 불가피하게 무대를 떠났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

    [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

    쇼팽과 바흐, 베토벤 등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양과 품격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외국인이 우리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부르는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대부분 의아해하거나 놀라워할 것이다. 특히 한평생 직업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해의만(81·본명 알렉 헤이먼)씨는 29살 때부터 한국에서 우리의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익히며 연구해 온 보기 드문 원로 국악학자이다.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53년 위생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할 당시 국악과 처음 접한 것이 인연이 돼 우리의 전통음악에 푹 빠져 살아오고 있다. 국악 연구는 물론 가야금, 단가, 민속장고와 북, 거문고, 태평소, 설장고 등 우리의 전통악기를 대부분 아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그동안 뉴욕과 파리 등에서 ‘삼천리 나라 무용’, ‘한국 판소리 해설’, ‘한국 민속음악과 무용’, ‘한국음악, 음악대사전’ 등을 직접 펴냈으며 ‘한국 무가’, ‘한국 무속’, ‘한국 가면극’, ‘한국 민속무용 해설’, ‘한국 전통무용과 탈춤’, ‘한국 전통악기’ 등 수십 권을 영문 번역해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해 4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한국외국어대학과 국민대, 한세대 등에서 학생들에게 영어와 전통음악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 아들과 딸을 두었으며 ‘서울 해씨’의 시조가 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음악에 빠진 그를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자택에서 만났다. 부인이 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에어컨이 고장나서 좀 더울 텐데….”라고 친절하게 맞이한다. 해씨도 “어서 와요.”라고 말한다. 몸이 약간 불편했던지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옆에 놓인 가야금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악기를 다루는지 먼저 물었더니 가야금은 홍원기 선생, 민속장고와 북은 지영희 선생,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 선생, 태평소는 최인서 선생 등에게 배웠다는 대답이 나지막이 돌아온다. 그는 요즘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하고 있다. 대신 집에서 전화로 영어를 가르치면서 국악자료를 번역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몸이 불편해 부인이 항상 옆에서 도와 주고 있다. 가끔 제자들이 찾아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다. 부인한테 이런 얘기를 잠깐 들으며 거실 벽에 세워진 한문 글씨의 병풍을 바라봤다. 글씨 끝 부분에 그의 이름 ‘해의만’(海義滿)이라고 적혀 있었다. 성씨를 왜 바다 해(海)라고 했을까. “원래는 내가 좀 더 일찍 (한국에)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1950년대 말) 민간인 신분이라 입국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좀 기다렸다가 입국허가가 풀리는 1960년에 한국행 배를 탔습니다. 일본을 거쳐 왔지요. 그때 배 안에서 선교사를 만났는데 한국식 이름을 지어 주더군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뜻의 바다 해(海)와 옳은 일로 가득 차라고 해서 의만(義滿)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양(서울) 해씨의 시조가 됐지요(웃음).” 슬하에 자녀가 있으니 서울 해씨가 새로운 성씨로 대대손손 쭉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해서 그가 국악을 좋아하게 된 사연을 듣기로 했다. “강원도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중국군과 북한군 빨치산들이 산속에 있었는데 새벽 2~3시만 되면 북, 태평소, 징,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잠을 못 자 아주 싫어했지만 저는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소리가 있었어요. 다른 군인한테 물어봤더니 태평소 소리라고 하더군요.” 정전협정 이듬해인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서 들었던 국악 소리를 늘 잊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궁금했던 차에 한국음악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됐다. 한국에는 50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악기가 많을 뿐 아니라 다양한 국악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른바 ‘필이 꽂혔다’라는 말처럼 무작정 한국 전통음악을 배워 보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때 수소문해서 인사동 근처에 있는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무작정 찾아갔지요. 교장 선생님한테 ‘전통음악을 배우고 싶다. 공부하게 해주면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오선보 사용법도 동시에 가르쳤습니다. 그때 여류 명창 박녹주 선생 등 훌륭하신 분들과 만나게 되면서 국악을 열심히 배웠지요.” 이와 동시에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펴낸 교재를 구입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1963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아시아학회’에서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발표와 함께 바라춤을 직접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우리 전통공연예술단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현지 대학과 대학원 등을 포함, 27곳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등 유럽에 한국전통음악을 알리는 데에도 노력했다. 영국의 음악가 존 레비(1910~1976)가 1964년 우리나라에서 50일간 머물렀을 당시 가곡, 판소리, 기악연주, 궁중음악, 민속음악 등의 전통음악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주선했던 것. 레비는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스위스제 녹음기 나그라를 사용, 모두 10장의 CD에 담았는데 지금도 중요한 음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씨는 또 전국을 다니며 귀중한 국악 자료를 수집, 연구하면서 국악강연과 번역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지난해 말에는 그가 평생 모아 온 국악 자료 중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서애악부’(1504), ‘정축진찬의궤’(1877), ‘설중회춘곡’(1905년 추정) 등을 비롯해 200여점의 고서적과 녹음자료를 국립국악원에 기증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해씨는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증하게 됐는데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한국음악을 듣는다. 밤중에는 가끔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 옆집에서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에게 한국의 전통음악이 왜 좋은지 다시 물었다. “한국음악은 아주 즉흥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혼이 담겨 있어요. 서양음악은 4분의3박자인 경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똑같이 반복되지만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복 없이 진행됩니다. 넓은 사상이 있어요. 각 지역의 서민들의 삶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도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때문에 대학강의나 초청 강연 때에는 전통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단다. “국악은 중요한 것입니다. 결코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세월이 갈수록 잊어버리는 가락이 많습니다. 그런 가락들을 악보로 써서 남겨야 하는데…. 가야금 악보도 써야 하고, 요즘 들어 기력이 별로 없어요.” 푸른 눈의 백발, 국악학자의 길을 오롯이 걸어온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국악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만큼은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전국민속예술축제 50년사’를 번역하고 있다. 기력이 떨어지고 불편한 몸에도 여전히 국악사랑에 대한 열정은 변치 않고 있다. 어쩌다 가끔 집에서 염불하며 바라춤을 추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염불은 최인서 선생에게 배웠다. 바라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춤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부인과 어떻게 만나 결혼했느냐고 하자 “머릿결이 곱고 아주 길었다.”며 웃는다. 옆에 있던 부인이 “간호사로 독일 가려고 학원에서 공부할 때 남편이 영어 선생이었다. 3년 동안 사귀다가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고 거들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He is ~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952년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음악학사를 받았으며 1953년 6·25 전쟁에 참전, 위생병으로 근무할 당시 국악을 처음 접했다. 1959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석사를 마친 뒤 1960 다시 한국으로 와 4년 동안 한국국악예술학교에서 전통음악을 공부했다. 이때 홍원기, 박녹주, 지영희, 신쾌동 선생에게 가야금과 시조, 단가, 민속장고와 북, 거문고 산조 등을 익혔다. 이후 태평소(취타와 염불), 태평소 시나위, 범패와 작법, 설장고 등을 배웠다. 국립국악원 장기과정(1990~1994)을 수료했다. 주요 저술은 삼천리 나라의 무용(1964), 한국 판소리 해설(1972), 한국 민속음악과 무용(1974) 등 5권이 있다. 영문번역으로는 한국가면극(이두현·1974), 한국민속무용해설(성경린·1974), 한국전통악기(이혜구·1982) 등 수십권이 있다. 이 밖에 1964년 한국삼천리가무단을 인솔해 미국 27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 공연 및 강의를 통해 한국 전통음악과 무용을 소개했다. 1973년 국립국악원연주단과 함께 이란, 프랑스, 서독 등 여러 차례 공연 및 강의를 통해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렸다. 주요 수상으로는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1982), 국악의 해 유공표창(1995), 한국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1991), 은관문화훈장(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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