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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내 교섭권 확보 보수+진보 ‘궁여지책’

    원내 교섭권 확보 보수+진보 ‘궁여지책’

    23일 전격 성사된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원내교섭단체 합의는 정치권에 적지않은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제3의 교섭단체가 등장하면서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양당 중심 체제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자유선진당은 지난 4·9총선에서 교섭단체 구성 요건에 2석 모자라는 18석에 그쳐 청와대의 야당 대표 초청에서 배제되는 등 비교섭단체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창조한국당은 3석을 얻었지만 이한정 당선자의 구속과 문국현 대표의 검찰수사로 위기에 처했다. 결국 이들의 연대는 원내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은 18대 개원을 앞둔 상황에서 여야의 역학관계에 대규모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한나라 “위장결혼” 비판 야권은 나쁘지 않다. 이들의 연대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야당 의석은 102석(통합민주당 81석 포함)이 됐다. 개헌저지선과 국회 소집권을 요구할 수 있는 100석을 넘긴 것이다. 여야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쇠고기 파동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개원에 대비한 명분쌓기 성격이 짙다. 정치컨설팅업체 포스의 이경헌 대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확보해 여당의 강공 드라이브에 맞서는 견제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한나라당은 부담이다.18대 초반 원만한 원구성 협상은 물론 각종 현안에 대한 합의도출 과정이 녹록지 않다. 최근 재점화된 개헌논의 또한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전체 야당과 함께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강재섭 대표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끼리 자기 이익을 좇아서 위장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한 말에서도 불편한 심기가 녹아 있다. ●“정체성·지지세력 다르다” 장외 친박(親朴) 인사들의 복당 문제가 변수다. 한나라당이 조기·일괄복당 조치를 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연대를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면서, 중량감이 커진 야권을 제압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들의 연대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은 냉소적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창조적 진보와 정통 보수가 어색하게 만났다.‘잘못된 만남’을 예감한다.”면서 “정체성과 지지세력이 전혀 다른 두 당의 만남은 ‘당리당략’적 조합 이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들의 조합을 ‘정치적 기형’이라고 꼬집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당원도 몰래 지도부들이 극비리에 추진해서 연대체가 이뤄진 것만으로도 정당정치의 심각한 훼손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차제에 원내교섭단체 중심의 의회정치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정당 득표율에 따라 참여가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인조는 나름대로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자책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를 반포하여 실책을 사과하고, 내외 신료들에게 구국의 방책 마련을 위해 협조를 당부했다. 신료들도 인조의 호소에 답하여 이런저런 개혁안과 방책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는 노비의 수를 줄여 군역에 충당해야 한다는 등의 근본적인 개혁안도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청과의 관계에 못을 박다 1636년 5월26일, 인조는 다시 교서를 내렸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넘치고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우리는 수천 리의 국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지난 번 용골대를 보니 겁 많고 꾀가 없는 것이 우리보다 더하더라.’ 인조는 이어 수령들에게 안민(安民)의 정치를 펼 것과 변방의 장수들에게 군졸들을 무휼(撫恤)하라고 촉구했다. 청렴하고 능력 있는 수령과 장수들은 상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 내탕(內帑, 왕의 개인 금고)에서 목면 1000필을 풀어 평안도에서 장졸들을 선발하는 비용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평소 내수사(內需司)와 관련된 비판만 나와도 고개를 돌리던 그가 스스로 내탕을 푼 것은 이례적이었다. 6월17일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격문(檄文) 형식이었다.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지게 된 것은 조선 탓이 아니라 청나라 탓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귀국은 군사강국이지만 우리는 궁벽진 곳에 위치한 농업국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시작되는 국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먼저 조선이 명을 섬겨 배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묘 당시 합의된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이 한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문제삼는 청의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은 이어 변방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청 영내로 몰래 들어가 산삼을 캔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차하르(察哈爾) 버일러들은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들이니 청과 똑같이 예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조선은 ‘명나라의 동번(東藩)’으로서 강약(强弱)과 성패(成敗) 때문에 신하의 절개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지막 내용이 흥미롭다.‘군사도, 재물도 없는 우리는 오로지 대의와 하늘만을 믿는다. 과거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말로를 보라. 자중지란이 일어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조선을 침략했던 그의 부하들은 다 죽었다. 반면 우리와 우호를 유지한 도쿠가와씨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도 청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황손무의 충고 방어 대책 마련을 위해 분주하던 7월, 가도에서 명군 부총병(副摠兵) 백등용(白登庸)이 서울로 들어왔다.7월27일 인조는 남별궁(南別宮)으로 직접 거둥하여 그를 만났다. 평소 같으면 아무리 명나라 관원이라도 부총병 급의 인물을 국왕이 숙소까지 직접 찾아가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 답답한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침략은 예고되어 있는데 신료들의 의견은 분분하고, 대책 마련은 여의치 않았다. 백등용은 인조에게 조선이 비록 오랑캐와 절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들을 기미(羈)하는 차원에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면 노력하라고 충고했다. 조선의 사정이 딱하게 보였던 것일까? 사실 조선은 청에 대해 공식적으로 절화(絶和)를 선언했지만 일각에서는 다시 화친을 도모하는 것에 미련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실마리를 과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것인가? 8월27일 주강(晝講)이 끝난 직후, 지경연(知經筵)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병법에는 권모술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추신사(秋信使)는 보내지 않더라도 우선 역관을 들여보내 청 내부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단 역관이라도 보내 대화 재개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시독관(侍讀官) 조빈이 당장 제동을 걸었다. 그는 ‘정묘호란을 겪은 뒤 자강(自强)하지 못한 것은 화의(和議)가 병이 되었기 때문이며, 강화를 하더라도 어차피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대의를 밝히고 절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명길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9월1일, 명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입경했다. 인조는 인정전(仁政殿)에서 황제의 칙서에 절을 올렸다. 칙서는 조선이 청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것을 찬양한 뒤, 속히 명과 협력하여 오랑캐를 토벌하라고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틀 뒤 황손무는 인조에게 글을 보내 이런저런 훈수와 요구를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이 청과 가까운 몽골 세력을 회유할 것과 간첩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 조선은 수천 리나 되는 큰 나라라고 강조한 뒤, 의주의 옛 성을 다시 쌓고 가도의 동강진과 협조하는 태세를 유지하면 오랑캐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슬쩍 청에서 귀순해 오는 한인들을 조선이 받아줄 것과 명에 말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황손무에게 조선이 군사력이 약해 오랑캐를 막기 어려우니 ‘부모의 나라’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황손무는 조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선이 지독한 숭문주의(崇文主義)에 빠져 무비(武備)를 갖추는 데 소홀했고, 병농(兵農)이 구별되지 않아 군사력이 약해졌다고 진단한 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힘쓰라고 촉구했다. ●최명길, 평안도에 지휘본부 설치를 촉구 9월5일, 최명길이 차자를 올렸다. 그는 사간원 관원들이 ‘청과 척화하되 직접 나가서 싸워 이길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인조에게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쟁을 피할 계책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사간원 신료들의 주장대로 직접 나가서 싸울 계책을 마련하든지 속히 택일(擇一)하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하면서 적의 침략을 맞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경고했다. ‘하루아침에 적의 기마병이 휘몰아오면 체찰사는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고, 원수는 황주(黃州)의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물러날 것이니 청천강 이북의 모든 고을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안주성도 온전할 수 없으니 생령(生靈)은 어육이 되고, 종사는 파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명길의 예측이었다. 당시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적의 진격 루트 가운데 방어 준비를 그나마 갖추고 있는 곳이 안주성이었다. 하지만 전쟁 지휘부가 강화도로 들어가고, 도원수가 산성으로 들어갈 경우 안주성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명길의 생각이었다. 실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최명길의 예언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았다. 최명길은 이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계책을 진언했다. 먼저 도체찰사와 도원수를 평안도로 보내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평안병사를 의주로 들여보내 장졸들에게 오로지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는 결의를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그런 다음 심양에 국서를 보내 군신의 대의를 밝히고, 추신사를 파견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주고, 청 내부의 정황을 탐지하라고 건의했다. 만일 그들이 혹시라도 답장을 보내오면 그 내용을 살핀 다음 우리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자고 했다. 청이 우리의 충심을 받아주면 관계를 계속 유지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국경에서 결전을 벌여 승부를 내자는 주장이었다.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전진하여 승부를 내는 것이 겁났던 것일까? 인조는 입을 다물었고, 삼사 관원들이 들고일어났다. 절체절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형준 정치비평] 이명박 정부에 필요한 ‘소통의 기술’

    [김형준 정치비평] 이명박 정부에 필요한 ‘소통의 기술’

    이명박 정부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졸속 협상에 대한 국민의 비난 여론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박근혜 전 대표와의 신뢰 회복을 위한 실마리도 풀리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경제침체, 고유가와 고물가 등으로 경제회생을 위한 묘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20%대로 급락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48.7%의 득표율로 1150여만표를 얻은 것을 감안하면 대선 후 다섯달만에 250만표 이상이 이탈한 것이다. 여론이 악화되고 민심이반이 가속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꺼내 들었다. 최근에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은 “국민과 역사 앞에 교만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더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일단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아무리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하더라도 소통할 내용과 자세가 잘못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지적대로 정부가 불량한 제품을 만들어 아무리 포장을 잘해서 소통하려고 해도 ‘국민은 물건이 제대로 됐나, 진짜인가’를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약해지면 그만큼 정부와 국민간의 소통은 멀어진다. 그런데, 정부의 신뢰에 영향을 주는 핵심 요인은 정직, 겸손, 배려이다. 정부가 잘못한 것을 국민에게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거나, 오만한 자세로 국민들을 끊임없이 꾸짖고 무시하거나, 야당과 정치적 경쟁자를 배척하면 국민은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소통은 끊기게 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국민과의 진솔한 소통을 통해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직성을 회복해야 한다. 대통령이 대국민 기자회견을 해서라도 왜 쇠고기 협상을 조기에 성사시켜야만 했는지, 협상에서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을 간과했는지 국민에게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이를 계기로 “한·미 FTA가 체결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통령직을 걸고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겠다.”는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둘째, 민심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겸손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울신문과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가 지난 3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미 민심 이반의 징조가 발견되었다.‘이전에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현재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이명박 이탈층’이 12.5%나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나빠졌다.’는 비율도 34.0%로 ‘좋아졌다.’(14.9%)는 응답보다 2배 이상 많았다. 핵심 지지층이 이탈하고 대통령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현상이 발생한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사전에 대처했다면 국민과의 소통 부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여론에 밀려 마지못해 하는 영수회담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의 예우를 갖추고, 야당의 기능과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1992년 미국 대선에서 경제 살리기를 화두로 집권한 클린턴 대통령도 집권 초기에 군대 동성애 허용, 미숙한 의료 개혁 추진 등으로 지지율이 곤두박질했지만,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더구나, 집권 6년 동안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업무시간의 70%를 야당 인사와 만나 국가 현안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결과적으로 퇴임 직전 지지도가 정권 출범 직후 지지도보다 높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도 집권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세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국정 쇄신책이 필요 없다.”는 편의주의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청와대와 내각을 대폭 교체해서라도 국민과의 소통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몽골 버일러들을 이끌고 왔던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청과 관계를 끊겠다는 인조의 유시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뒤 조선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나덕헌과 이확이 홍타이지에게 배례(拜禮)를 거부하여 청을 자극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빨리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묘 이후 우여곡절 속에서도 이어져온 ‘10년의 평화’에 익숙했던 조정이었다. 급작스럽게 내놓은 방어 대책의 실효성을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빚어졌다.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쳐라” 홍타이지의 즉위식장에서 나덕헌과 이확이 보였던 행동은 어쨌든 대단한 것이었다.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나덕헌 등이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자 격분한 청나라 관원들은 두 사람을 마구 구타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머리 숙이기를 끝내 거부하자 식장에 있던 한인(漢人) 신료들 가운데는 부끄러워 눈물을 보이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청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이 안팎으로 충격을 주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나덕헌과 이확은 심양을 떠나 서울로 향할 때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오랑캐‘ 홍타이지의 즉위식장에서 목숨을 걸고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과연 조선 조정의 신료들이 자신들이 보였던 ‘기상’과 ‘절개’를 곧이곧대로 믿어 줄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더욱이 홍타이지에게서 받은 국서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홍타이지의 국서는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협박, 조롱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국서를 그대로 가져갈 경우, 조정의 명분론자들로부터 어떤 비판이 날아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귀국 길에 만주 통원보(通遠堡)란 곳에 이르러 홍타이지가 준 국서를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머물던 숙소에 몰래 던져 놓고, 대신 내용을 등사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들이 의주에 도착하자 당장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상소했다. 그는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통곡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덕헌 등이, 참람하고 말도 되지 않는 오랑캐의 서신을 받은 즉시 던져 버렸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빨리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베어 그것을 홍타이지에게 보여 주라고 촉구했다. 추상(秋霜) 같은 일갈(一喝)이었다. ●명분론이 높아지고,決戰論이 대두하다 홍명구의 상소를 통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조정은 다시 들끓었다. 비변사 신료들도 나덕헌과 이확이 자결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 그들이 통원보에 이르러서야 국서를 몰래 버리는 바람에 홍타이지에게 ‘조선 사신이 국서를 기꺼이 받아갔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다고 통박했다.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두 사람은 이제 자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덕헌과 이확을 성토하는 조정 신료들의 명분론은 극에 이르렀다.‘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의 국서를 받고서도 멀쩡하게 가지고 돌아온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비변사는 통원보의 청나라 관리에게 나덕헌 등의 명의로 서신을 보내자고 주장했다. 나덕헌 등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중도에서 뜯어 보고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자는 것이었다. 대사성(大司成) 이식(李植)이 붓을 들었다. 이식이 쓴 국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우리들은 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졸지에 갖은 곤욕을 다 당했다. 우리가 귀국하려 할 때 굳게 봉함된 국서를 받았다. 우리는 전례에 따라 뜯어 보려 했지만, 용골대와 마부대가 방해하여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한참 말을 달려 중도에 이르러 뜯어 보니 서면(書面)의 칭호와 말미에 찍힌 인문(印文)이 과거와는 크게 달랐다. 또 우리나라를 ‘이국(爾國)’ 운운하며 공경하기는커녕 노예처럼 여기고 있었다. 조선의 신하된 도리 상 차마 볼 수 없어 통원보에 이르러 숙소의 잡물 속에 던져 놓고 왔다. 원컨대 그 것을 가져다가 홍타이지 한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요컨대 조선은 이식이 쓴 국서를 통해 홍타이지가 칭제건원(稱帝建元)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했던 셈이다. ‘황제’ 홍타이지와 ‘제국’ 청을 인정할 수 없다고 거듭 못을 박은 이상 이제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이미 용골대 일행이 도주했던 직후부터 청의 침략에 대비한 대책들은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사람은 단연 부제학 정온(鄭蘊)이었다. 그는 용골대 등이 도주한 직후 올린 상소에서, 원수(元帥)를 선발해 보내고 빨리 압록강을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또 인조에게 개성까지 나아가 신료들을 독려하고 군율(軍律)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압록강을 방어하고 개성으로 진주(進駐)하라? 여차하면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는 것만 생각하고 있던 다른 신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이었다. 정온은 그러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린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農莊)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扈衛)를 핑계로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 싸움은 포기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정온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사병(私兵)처럼 편제되어 있는 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정쩡한 인조의 태도 정온과 사헌부 신료들의 주장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훈신(勳臣)들이 ‘호위’를 핑계로 정예병을 사병처럼 틀어 쥐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실제 당시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금군(禁軍) 가운데 10명을 데려가 군관으로 삼으려 했는데 호위청(扈衛廳)에서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사간원 신료들은 “변방 방어가 충실하면 서울이 편안해지고 서울이 편안하면 굳이 호위하는 무사가 많을 필요가 없다.”며 호위청 군관 가운데 500∼600인을 뽑아 변방으로 내려 보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마뜩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호위하는데 중요한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병력을 덜어 내자는 주장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개성으로 전진하고 정예병을 과감하게 내어 주라.’는 정온의 요청에 대해 “그대의 차자(箚子) 내용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 같다.”고 답변했다. 또 사간원 신료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연소한 대간들이 사체도 모르면서 군사와 군량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시가 엄청난 위기 상황이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인조는 여전히 안이했다. 강화도로 들어가, 수많은 정예병들을 시켜 자신의 주변을 호위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병자호란 직전 인조는 분명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636년 4월25일, 스스로를 통렬히 비판하는 하교를 내렸다.‘내가 용렬하여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못했고, 게으른 데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이제 노력하겠으니 모든 신료들도 난국을 타개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눈물겨운 호소였다. 하지만 근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실제로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황제가 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황제가 되다

    평소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금의 힘이 이미 명마저 넘어선 상황에서 조선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대응이 필요했다. 하지만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인조의 유시문(諭示文)을 조선 영토 안에서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운영 체계에 나사가 풀려 있다는 방증이었다. 반면 조선의 ‘본심’을 간파한 홍타이지는 느긋하게 조선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1636년 홍타이지,帝位에 오르다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정묘년에 부득이 하여 강화를 맺은 것도 부끄러운데 지금 그들이 황제를 칭하려 하니 존망을 돌보지 않고 절교(絶交)할 수밖에 없다. 팔도의 관찰사들은 이 소식을 들으면 죽기를 맹서하고 싸워 원수를 갚을지어다. 각처의 백성들에게도 알려 용사들을 격려시키고 서로 도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용골대가 가져온 인조의 유시문을 보았을 때 후금의 여러 버일러들은 당장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섬멸하자며 흥분했다. 홍타이지는 차분했다. 그는 버일러들을 만류하며 먼저 조선에 사람을 보내 속내를 떠보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1636년 4월11일 여명,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의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홍타이지는 대신들과 함께 제단에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홍타이지가 북쪽을 향해 꿇어 앉은 상태에서 제관이 축문을 읽었다. ‘유세차 병자년 4월11일, 만주국 황제 신(臣) 홍타이지는 황천후토신(皇天后土臣)에게 고하나이다…. 제가 대위(大位)를 이은 지 10년, 하늘의 도움으로 조부의 기업(基業)을 어깨에 메고 조선을 정복하고 몽골을 통일하여 다시 옥새를 얻었습니다…. 이제 내외 신민의 추대를 받아 천자(天子)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청(大淸), 연호를 고쳐 숭덕(崇德) 원년으로 삼았음을 삼가 아뢰옵니다.’ 연호를 천총(天聰)에서 숭덕으로 고치고 대청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만 ‘조선을 정복’ 운운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직 병자호란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조선은 명분상 분명 형제국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을 정복’했다고 한 것은 당시 조선이 이미 자신들의 수중에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들에게 도무지 고개를 숙이려 들지 않는 조선에 대해 그만큼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사신, 황제즉위식서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다 천지에 고하는 의식을 마친 뒤 천단 동편에 즉위 식장이 꾸려졌다. 홍타이지는 단상에 놓인 금 의자로 올라가 앉았고 여러 버일러들과 대신들은 좌우로 줄을 지어 늘어섰다. 이윽고 찬례관(贊禮官)의 외침에 따라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은 일제히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뒤 꿇어 앉았다. 곧이어 만주, 몽골, 한인들을 대표하는 신료들이 각각 만주어, 몽골어, 한문으로 된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받들고 단(壇)의 동쪽에 섰다. 여러 무리들을 향해 표문의 내용이 낭독되었다.‘우리 황상께서는 하늘의 뜻과 백성의 여망을 따르고, 덕을 닦아 조선을 복종시키고 몽골을 통일하여 다시 옥새를 얻으셨다…. 큰 이름과 업적이 천하에 드날리니 한마음으로 추대하여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낭독이 끝나자 신료들은 다시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뒤 기립했다. 여기서도 ‘조선을 정복’했다는 내용이 반복되었다.‘관대하고 따뜻하며 어질고 성스러운’ 황제의 조선 출병이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당시 식장에는 조선에서 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형제국이지 청에 신속(臣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홍타이지 “째째하게 사신죽이지 않겠다” 같이 도열해 있던 청의 신료들이 발끈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을 죽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만류했다. 그는 ‘이 일은 조선 국왕이 양국 사이에 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꾸민 것이다. 내가 만일 사신들을 죽이면 조선 국왕은 내가 맹약을 어겼다고 할 것이다. 나는 한 때의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신료들을 다독였다.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은 나덕헌과 이확의 용기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조선에 먼저 절교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지 않으려 했던 홍타이지의 외교적 안목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두 사신이 귀국할 때 인조에게 선사하는 초피(貂皮)를 비롯하여 은과 인삼 등을 들려 보냈다. 의외였다. 군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예의를 차리려는 수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확과 나덕헌에게 들려준 국서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 갔을 때, 조선이 몽골 출신 버일러들을 만나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갔던 사람들을 만나 주지 않은 것은 두 나라 사이에 틈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두 나라 사이에는 본래 원한이 없었는데 1619년 조선이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하는 군대를 파견했던 것, 이후 명나라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식량을 준 것 때문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또 정묘호란 당시 가짜 왕제(王弟)를 진짜인 것처럼 속여 볼모로 보낸 것, 자신이 강홍립과 함께 돌려 보낸 한인들을 명으로 압송해 버린 것, 맹약을 맺은 이후에는 명나라 사람들을 조선 영토로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것을 어긴 것 등등. 홍타이지의 불만은 이어졌다. ●“인조 자제 볼모로 안 보내면 공격하겠다” 홍타이지가 특히 맹렬히 비난한 것은 공유덕, 경중명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들이 귀순해 올 때 조선이 명을 도와 그들을 차단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전쟁의 단초를 여는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점이었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을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들 서생(書生)들이 10년 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작심한 듯한 홍타이지의 발언은 이어졌다.‘왕은 지금 덕과 의리를 닦지 않고 해도(海島)의 험준함만 믿고 있으며 서생들의 말을 듣고 형제의 화호를 깨뜨리고 있다.’ 홍타이지는 훈계를 늘어 놓았다.‘몽골의 차하르(察哈爾) 한도 덕을 닦지 않고 간신들의 말에 따라 내게 전쟁을 걸었다가 쫓기는 몸이 되고, 끝내는 신료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이어 조선이 ‘후금을 원수’라고 한 이상 자신은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들을 죽이는 쩨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 가겠다고 협박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이 군대를 움직이는 날짜까지 명시했다. 사실상의 최후 통첩이었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요구대로 볼모를 보내지 않는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말고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던 조선, 그나마 그 계획조차 이미 청에 읽혀 버린 조선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환경] NGO ‘황막사’와 함께 간 황사 발원지 中 카얼친沙地

    [환경] NGO ‘황막사’와 함께 간 황사 발원지 中 카얼친沙地

    |간치카(네이멍구) 이경주특파원|끝없는 모래(沙)땅(地)이었다. 눈 앞에서 지평선까지 온통 누런 모래가 뒤덮고 있었다.1435㎞.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네이멍구(內蒙古區)에 걸쳐 있는 커얼친 사지(科爾泌 沙地)는 말 그대로 뿌연 모래의 물결이었다. 물결이 한번씩 출렁일 때마다 미세한 모래들이 돌개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사막화를 막기 위해 심어 놓은 나무도 어느새 누렇게 물들고 있었다.‘황사를 막는 사람들’(황막사) 회원 32명과 지난달 24일부터 나흘 동안 황사발원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올해로 10년째인 황사방지용 나무심기 행사를 위해서였다. 박준호(59·명지대 부동산 대학원 교수) 회장은 “태양마저 가릴 정도로 짙은 황사바람이 불 때면 차량을 세운 채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황막사는 지난해 8월 서울시에 등록된 비정부기구(NGO)다. 지난달 26일 지린성 퉁위에를 출발해 버스로 5시간,495㎞를 달려 정오쯤 네이멍구 퉁랴오(通遼)시 간치카에 도착했다. 커얼친 사지 중에서도 초원이 황무지로 바뀌는 황막화(荒漠化)현상이 가장 심한 곳으로 꼽힌다. 황막사는 2006년부터 이곳에 나무를 심어 왔다. 끝없는 모래 언덕 사이로 모래 바람이 일 때면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손으로 부순 모래덩어리는 가는 입자로 나뉘어 바람을 타고 금방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박 회장은 “강한 알칼리성 토지와 한해 300㎜도 안되는 강수량 때문에 2006년에 심은 나무의 90%와 2007년에 심은 나무의 85%가 고사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강한 알칼리성 토지·가뭄의 악조건 올해는 중국에서 발생한 황사가 황해를 넘어 한국에 영향을 거의 주지 않고 있는 이유를 이곳에 와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상청은 황사 발원지에서 우리나라로 향하는 북서풍이나 서풍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머나먼 중국 커얼친 사막에서 나무를 심는 황막사의 외로운 작업 탓과도 무관치 않은 듯하다. 황막사는 3년간 간치카에서 1500무(1무=667㎡)의 토지에 15만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 2만여 그루밖에 되지 않는다. 박 회장은 네이멍구 간치카를 거점으로 요녕성의 장구타이(章古臺)·캉핑(康平), 네이멍구의 나이만(奈曼)·치펭(赤峰)에 나무를 심어 띠를 만든 뒤 차츰 북쪽으로 올라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치펭을 제외한 곳에는 조금이나마 나무를 심어 왔다. 내년에는 치펭 지역에 식수를 진행할 예정이다. 엄청난 계획이지만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북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오는 황사를 막기 위해서는 황막화가 진행되는 남쪽부터 우선 황사방지용 나무를 심는 것이 급선무라는 게 박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간치카는 북한의 신의주까지는 500㎞ 거리에 불과해 직접적으로 한국의 황사에 영향을 주는 곳”이라면서 “나무는 계속 죽어가고 있지만 해마다 토양이 조금씩 촉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무를 심는 작업은 악조건과의 싸움이다. 관목(灌木)은 1m도 안 자라지만 굵은 나무 뿌리가 흙속으로 2∼3m씩 파고 드는 특징이 있다. 생존율도 거의 95%에 이른다. 퉁랴오시 장다리(張大力) 임업국장은 “전체 1700만무의 토지 중 1000만무의 토지가 사막으로 변했지만, 시 정부의 노력과 한국의 도움으로 600만무에 식수를 마친 상태”라고 밝혔다. 지린성 샹징민(尙靜敏·56) 임업청 부청장은 중국인들이 방목을 하면서 풀을 잘라 내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 나무를 잘라낸 게 황막화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정부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녹지화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황막사의 노력이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27일 오후 늦게 나무를 심은 랴오닝성 푸신(阜新)시 장위(彰武)현 장구타이향 역시 간치카와 마찬가지로 사지의 연속이었다.2002년부터 식수를 한 이곳은 백양나무들이 이미 5m 이상 자라 있었다. 하지만 모래 언덕에 올라서니 어김없이 황토 언덕이 펼쳐졌다. 이에 비해 25일 나무를 심은 지린성 퉁유(通楡)시 퉁파(同發)와 향하이(向海)는 성 정부의 직원 열 명이 계속 관리를 한 덕분인지 나무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하지만 퉁파에서 향하이로 가는 길에는 물은 사라지고 갑문만 남은 거대한 웅덩이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의 꾸준한 방문이 큰 격려 27일 오전 랴오닝성 푸신시 장위현 따령향의 백양나무 식수에는 따령소학교 학생 열 명이 동참했다. 황막사 최연소 참가자인 경기 파주시 봉일천초등학교 김신웅(12)·이승욱(12)군은 동갑내기인 신팡페이(辛芳菲)·샤오훙유에(肖紅月)양과 함께 나무를 심으면서 “우리나라를 위한 일이어서 뿌듯하고 중국 친구까지 생겨 즐겁다.”고 말했다. 신팡페이는 “한국의 드라마나 가요를 좋아하는데 친구들을 보니 꼭 한국에 유학가고 싶다.”고 웃었다. 담임 교사인 바이슈에메이(30·여·白雪梅)씨는 “최근 중국의 청소년들 사이에 반한 감정이 많아졌는데 이곳은 식수행사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다.”면서 “민간외교의 끈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학생들은 몽골어로 쓴 감사의 편지를 황막사에 전달했다. 황막사는 나무 사이에 땅콩 등 곡식을 심을 수 있도록 150무의 토지에 백양나무를 8m 간격으로 심었다. 푸신시 임업국 뤼쥔쥔(呂俊軍) 부국장은 “이곳은 커얼친 사지의 남쪽 끝으로 몇 년 전만 해도 4월이면 눈을 못뜨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나무를 심으면서 황사도 줄고 토양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의 꾸준한 방문이 힘든 황사와의 싸움에 큰 격려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화성시 발안에 사는 안효선(57)·김윤순(54·여) 부부는 “한 그루 나무의 귀중함을 새삼 느꼈다. 중국 전체로 보면 작은 양의 나무지만 그들의 마음에서 큰 거목으로 자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번 10주년 행사는 황막사가 주관하고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웅지 세무대학이 주최했다. kdlrudwn@seoul.co.kr ■ “몇차례 고비속 벌써 50만그루 심어” 황사방지용 나무 심는 ‘황막사’ 박준호 회장 |간치카(네이멍구) 이경주특파원|“나무를 심어도 죽는 땅에 왜 심느냐는 주위의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어느새 10년이 되었습니다.” ‘황사를 막는 사람들’의 박준호(59) 회장은 1999년부터 중국 네이멍구 커얼친 사지 등에 나무를 심어 왔다. 그동안 심은 나무가 50만 그루나 된다. 박 회장은 1997년 사업차 이곳을 방문했다가 거친 ‘황사의 땅’을 목격하고 나무를 심기로 결심했다. 그가 1999년에 네이멍구 나이만(奈曼) 사막에 심은 나무는 2000그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10년간의 노력은 주위의 많은 사람을 움직여 올해는 18만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었다. 부동산 분야에서 명강사로 통하는 박 회장은 현재 명지대와 공인중개사협회, 부동산TV 등에서 부동산 법규 및 투자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료 일부로 묘목 값을 충당해 왔으며, 올해 식수 비용 2700만원 역시 박 회장과 황막사 회원들이 마련했다. 시행착오도 겪었다.1999년에는 기념식수 후 나이만 지방정부가 나머지 나무를 추후에 심겠다고 약속했지만, 확인차 방문해 보니 실제로는 식수가 이뤄지지 않아 당황하기도 했다.2000년에 방문했을 때는 2년간 나무를 심은 나이만에 중일우호림(中日友好林)이라는 푯말이 만들어져 있었다. 주위의 편견도 심했다. 일부 네티즌은 “죽는 나무 뭐하러 심냐. 중국 좋은 일만 시킨다.”며 비난했다. 가족의 시선도 처음에는 곱지 않았다.2006년에는 사업에 실패하면서 38억원의 빚을 지고 식수행사를 더 이상 못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년 노력은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다.2006년 당시 주한 닝푸쿠이(寧賦魁) 대사가 그를 만나면서 신화통신에 소개됐다. 이후 중국의 지방정부는 그의 방문을 중요한 연례행사로 여기게 됐다. 그의 가족도 2005년 중국을 방문한 이후 후원자가 되었다. 박 회장은 “한국이 황사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녹지화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면서 “양국 우의를 증진하는 가교역할도 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kdlrudwn@seoul.co.kr
  • 黨政靑정책조정 ‘마비’ 禍키운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연이어 열리는 등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새 정부 초기부터 민심이반 현상이 심해지는 이유는 단순히 광우병 논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책조정 시스템 구축 미비에 따른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광우병 논란과 함께 대운하 공방, 혁신도시 재검토, 경제정책 기조를 둘러싼 당·정·청간 엇박자 등 정부발 정책들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나오면서 정책 불신을 더욱 키웠다는 것이다. ●‘괴담´ 난무해도 내각차원 조치 없어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밀어붙이기 식으로 정책을 추진한 것도 민심이 등을 돌리는데 한 몫하고 있다. 청와대가 독주함으로써 총리실이 과거처럼 범정부적 차원에서 정책조정이 불가피한 현안에 대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정부에서 총리는 매주 부처 장관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국정현안조정회의를 주재, 각 부처의 정책 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지금은 적극적인 조정에 나서지 못하고, 업무량이 과중한 청와대는 제대로 조율을 못함으로써 정책 부실을 낳고 있다. ●대통령 중심서 벗어나 분할통치 필요 정부 고위관계자는 4일 “현재 최대 쟁점인 광우병 논란 등에서 총리실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다른 부처도 청와대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기는 마찬가지다. 청와대만 쳐다볼 뿐 적극적인 정책 결정에 주저하고 있는 분위기다. 광우병 괴담설이 난무하는 데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지난 2일 뒤늦게 기자회견을 갖고 진화에 나선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행보가 그렇다. 청와대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지 못한 상황은 더욱 문제다. 청와대 정무와 홍보 라인이 정책현안 발생시 대응력에 허점을 보이는 것이 여러차례 도마에 올랐다. 자연 이 대통령이 정책현안 전면에 자주 등장하게 되고, 그 부담도 대통령에게 모두 쏠리고 있다. 이 대통령의 한 측근은 “각종 국정 현안에 대한 야당 및 시민단체의 공격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다.”면서 “총리를 비롯, 장관들이 대통령을 위해 장렬히 ‘전사’할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총리실 관계자는 “총리실의 역할을 자원외교 등으로 한정하다 보니 한 총리가 국정 전반에 대해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자신감이 오히려 정책 운영에 문제를 낳을 수 있다.”면서 “정부정책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해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과거 정부가 지역·이념적 지지기반이 확고한 것과 달리 현 정부의 지지층은 이해관계에 얽혀 있어 광우병 논란처럼 이해관계 문제가 발생하면 지지층이 응집할 수 없다는 점이 민심이반의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청와대의 정무·기획 라인을 정책경험 및 정치력이 있는 팀으로 보강해야 하며 청와대와 내각은 대통령 중심의 일처리 방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면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처럼 비서실장, 자문그룹, 정책실장 등을 중심으로 ‘분할통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통령은 ‘통합’, 총리는 ‘개혁’으로 역할분담을 해야 한다.”면서 “총리에게 과거처럼 부처를 통괄할 수 있도록 정책조정 권한을 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친박 복당’ 문제의 실천적 해법

    [김형준 정치비평] ‘친박 복당’ 문제의 실천적 해법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탈당한 친박 당선자들 복당 문제에 승부수를 던졌다. 기자간담회 형식을 통해 “당권을 위한 7월 전당대회에 나가지 않을 테니 친박 인사들을 전부 복당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당 일각의 선별 복당 주장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잘못된 생각”이며 “공당에서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을 골라 받을 수 없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전 대표의 요구에는, 친박 인사들의 복당을 반대하는 것은 공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총선에서 한나라당 복귀를 내걸고 국민 심판을 받은 이상 복당 거부는 민심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한편 강재섭 대표와 주류인 친이명박계는 “국민이 만들어준 총선 결과를 인위적으로 변경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권력투쟁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들여서 계파싸움을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복당 불가’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쪽 논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국민과 민생은 안중에 없고 오직 계파정치와 당권경쟁에만 몰두하는 한나라당에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친이·친박간의 소모적인 계파싸움은, 결국 정권이 교체된 지 두 달밖에 안 됐지만 마치 2년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솔직히 국민 눈에 친박 복당 문제는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나라당판 오만과 무능으로 비춰진다. 한나라당은 언제까지 칙칙한 친박 복당 논란을 벌일 것인가? 한나라당이 지난 대선에서 국민에게 약속한 경제를 살리고 집권당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계파 해체를 선언하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대통령은 “친이도 친박도 없다.”고 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분명 이번 총선 공천과정과 수도권 압승을 통해 한나라당을 명실상부한 ‘MB당’으로 전환시켰다. 박 전 대표는 “계파정치를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에게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용기를 주고, 친박 당선자 복당에 앞장서는 모습은 계파 수장으로서의 행보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대통령이 계파가 없다고 강변하고, 박 전 대표가 전당대회에 불참한다고 선언해도 있는 계파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대통령과 박 전 대표는 지금은 득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는 독이 되어 돌아올 추악한 계파정치의 늪에서 벗어나 큰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버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지금은 무엇을 얻을지 생각할 때가 아니라 무엇을 버릴지 고민해야 할 때라는 뜻이다. 계파해체 선언과 함께 두 사람은 이번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통합과 화합의 장으로 만드는 데도 합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하도록 당헌 당규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 당 대표는 원내인사에 구애받지 말고 화합형 인사로 합의 추대하고, 최고위원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출함으로써 당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안에 협조할 필요가 있다. 새롭게 선출된 당 대표는 최우선 과제로 친박 복당 문제를 해결하면 보다 완벽한 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성공의 길을 걷고, 박 전 대표는 국민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독립적인 헌법기관인 의원들을 계파가 아니라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의원들이 계파에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줄을 서서 소신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제는 그들을 놓아줘야 한다. 이때만이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회에 구속력 있는 법을 제정하는 회의체’인 국회가 정상화되고 한나라당의 공멸을 막을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릴 것이다. 명지대 정치학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다목적 사절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사절이자, 인열왕후의 죽음에 문상하기 위한 조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동참을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홍타이지 명의의 국서말고도 후금의 여덟 버일러(貝勒, 만주 팔기의 우두머리)들과 몽골 출신 마흔 아홉 버일러들이 작성한 서신을 각각 1통씩 소지하고 있었다. 서신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용골대 일행 명버리고 후금 선택 강요 후금의 버일러들이 보낸 서신은 먼저 몽골 각부의 버일러들이 심양에 모두 모여 홍타이지에게 복종을 다짐하고 존호(尊號)를 올리려 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후금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이미 천의(天意)와 민심이 후금으로 돌아갔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우인 조선국왕도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자제들을 보내 홍타이지를 추대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동참하라?’ 그것은 한마디로 ‘김칫국부터 마시는’ 행동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몽골 버일러들의 편지가 좀더 자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우리가 지금 200여년 동안 사귀었던 명과 결별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명의 관리들은 우리를 속였고, 나라에는 뇌물이 성행하고 간신들이 총명을 가려도 황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인심이 이미 해체되고, 장졸들은 유약하여 싸울 때마다 무너지고 있으니 명의 운명은 이미 다한 듯하다.’.‘하지만 우리 만주 황제는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갖추셨고, 법도와 기강이 엄숙하며 장졸들은 강하여 가는 곳마다 무적이다. 민심이 사모하니 천명(天命)이 장차 돌아가려 한다.’ 몽골 버일러들은 아예 ‘우리 황제’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면서 당시를 명이 망하고 후금이 떠오르는 혁명(革命)의 시기로 규정했다.‘지는 해인 명을 버리고 떠오르는 해인 후금을 선택하라.’ 몽골 버일러들이 조선에 보낸 편지는 대충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2월22일 용골대 일행이 입경하여 문제의 서신들을 내밀었을 때 조선 신료들은 접수를 거부했다. 후금의 버일러나 몽골의 버일러를 막론하고 신하된 자가 다른 나라의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용골대와 몽골 버일러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용골대는 ‘우리 한(汗)의 공업(功業)이 높아 안팎의 모든 신료들이 황제가 되기를 원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몽골 버일러들은 ‘조선이 형제국이라 금한(金汗)이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기뻐할 것으로 여겼는데 거절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따졌다. 조선 신료들이 군신의 대의를 내세워 계속 거부하자 용골대는 바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후금의 서신 거부 용골대 일행 쫓겨나 그럼에도 조선 신료들은 몽골 버일러들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맞섰다. 용골대 등의 입장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몽골 버일러들을 조선에 데려올 때는 조선이 그들을 극진히 대접해 주어 자신들의 낯을 세워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이 ‘명을 배신한 서달(西 )’ 운운하며 그들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자 용골대 일행의 낭패감은 컸다. 조정에서 회답하는 여부를 논의하려 할 때 삼사의 신료들이 들고일어났다. 대사간 정온(鄭蘊)은 서달은 부모 나라의 원수이니 사절단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지금 우물쭈물하는 자세를 보이면 조선도 홍타이지를 추대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균관 유생들도 빨리 용골대 등의 목을 베고 서신을 소각하라고 촉구했다. 안팎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진화에 나섰다. 그는 후금과 몽골 버일러들의 서신 내용이 문제지 홍타이지의 글에는 별 문제될 내용이 없다며 분리해서 대응하자고 했다. 버일러들의 서신에는 엄정히 대처하되, 그들을 박대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대의와 원칙에 따라 용골대 일행을 대하되 임시 방편으로 화를 늦출 계획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2월26일 용골대는 자신이 가져온 버일러들의 서신을 받아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궁궐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조정은 파장을 우려하여 역관 박난영(朴蘭英)을 모화관(慕華館)까지 보내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사였다. 한편 마부대는 같은 날 10시 무렵, 종자들을 이끌고 인열왕후의 빈소에 조문했다.‘승정원일기’에는 이들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조문했다고 되어 있으나 ‘병자록(丙子錄)’의 기록은 좀 다르다. 조선 조정이 전각(殿閣)이 좁다는 이유로 금천교(禁川橋) 위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조문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막 조문하려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 장막이 걷혀버렸다. 마부대 일행은 조선의 푸대접에 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불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훈련도감 포수들이 궁궐로 모여들었고, 인조를 숙위하는 금군(禁軍)들도 무기를 소지한 채 장막 근처에 있었다. 장막이 걷힐 때 마부대 일행은 무기를 든 병사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자신들을 해치기 위해 잠복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부대 일행도 놀라 허겁지겁 달아났다. 후금 사신들이 도성을 빠져나갈 때 구경꾼들이 길을 메웠다. 아이들은 일행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기도 했다. 청나라 기록에는 당시 용골대 일행이 너무 급한 나머지 민가에서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왔다고 적었다. 그것은 사실상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끝장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몽골 버일러들의 편지까지 들이밀며 조선을 협박하려 했던 후금의 오만도 문제였지만, 조선의 대응 역시 매끄럽지 못했다. 조문할 장소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것, 고의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조문 장소 부근에 병력을 배치하여 의심을 산 것 등은 분명 실책이었다. 더욱이 ‘호차(胡差)들을 참수하라.’는 주장까지 난무하는 상황에서 용골대 일행의 의구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평안행 전령, 용골대에 잡혀 방어대책 들켜 용골대 일행이 도주한 뒤 오히려 조선 조정이 공포에 휩싸였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긴장과 불안감이 엄습했다.2월29일,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윤방(尹昉)은,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침략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미리 강화도로 들어가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말을 끊었다.‘지금 마련해야 할 것은 방어 대책이지 피란 대책이 아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정은 방어 대책을 마련한다며 부산해졌다. 김류(金 )는 포수(砲手)가 아니면 오랑캐를 막을 수 없다며 어영군과 훈련도감의 포수를 뽑아 안주(安州)로 보내자고 했다. 화약을 증산할 대책이 제시되는가 하면 서쪽으로 방수(防戍)하러 간 병사들의 신역(身役)을 감해주라는 명령이 내렸다. 인조는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희성(文希聖)을 안주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했다. 일찍이 1619년 심하 전역에 참가했다가 후금군에게 항복했던 전력이 있는 장수였다. 인조는 반대하는 신료들에게 ‘지금은 장수로서 재주가 중요하지 과거 전력을 문제삼을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급박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3월1일, 인조는 팔도의 백성들에게 유시문(諭示文)을 내렸다.‘정묘호란 때는 부득이하여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하지만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强弱)과 존망(存亡)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나가자.’는 호소였다. 대의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까지도 걸 수 있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3월7일, 오랑캐와 단교한다는 사실과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서를 갖고 평안감사에게 가던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방어 대책을 마련한다며 부산을 떠는 와중에 서울에서 변방으로 이어지는 통신 체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조선은 속마음을 온전히 들키고 말았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부고]

    현해원(전 대림수산 전무)씨 별세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30분 (02)3410-6901 김재영(전 KBS 아나운서)씨 별세 두호(한국신용평가정보 팀장)씨 부친상 정건채(명지대 음대 교수)씨 빙부상 25일 일산 장례식장, 발인 28일 오전 (031)908-8612 류영한(전 영덕군수)씨 별세 세호(전국고택문화재 소유자협의회 이사)선호(한국브랜슨 대표이사 사장)씨 부친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7일 오전 5시 (02)3010-2263 유선모(원당교회 담임목사·총신대 총동창회장)씨 부친상 25일 경희의료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958-9551 민재훈(아카넷TV 마케팅팀장)씨 부친상 박치용(엠허브 매체팀 국장)씨 빙부상 2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7일 오전 8시 (02)3410-6933 김정훈(성민수양관 원장·축복교회 목사)광용(강도사)씨 부친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9시 (02)3410-6916 조장욱(현대기아자동차 기획조정실 차장)성욱(현대H&S정보기술 대리)씨 모친상 강치구(안산공과대학 교수·학생처장)김양(현대성우리조트 부사장)양승언(SAD Korea 전략영업본부 이사)씨 빙모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30분 (02)3010-2292 이상선(현대증권 홍보실장)상원(사업)상길(에스텍시스템)씨 부친상 25일 부산 동의대의료원, 발인 27일 오전 6시 (051)852-5201 우용희(세무사)석희(세무사)씨 부친상 이은종(재미목사)조성하(전 전경련 상무)이진석(율곡법률사무소)방기영(스텝스휴먼택 대표)씨 빙부상 25일 서울 강북삼성병원, 발인 27일 오전 (02)2001-1081∼2
  • 명동학교 100년… 다시 본 ‘북간도 한인사회’

    명동학교 설립 100년을 기념해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과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한시준)가 24,25일 국립민속박물관 강당에서 학술대회를 연다. 제목은 ‘북간도 명동촌 개척 및 명동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 북간도(현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에 명동촌과 명동학교가 세워진 것은 각각 1899년 2월과 1908년 4월이다. 북간도 지역 민족운동의 근거지이자 시인 윤동주와 영화감독 나운규, 고 문익환 목사가 동문 수학했던 명동학교는 김약연 등이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의 정신 계승을 표방하며 명동촌 한인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북간도 간민회(墾民會)의 조직과 활동’이란 최봉룡 중국 다롄대 교수의 논문이다. 그간 간민회는 북간도 지역의 민족운동 단체로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해산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 교수는 간민회가 중국 지방정부의 보조기관 성격을 띠고 있었고, 해산 원인도 한인사회 내부의 반발과 갈등, 중국 지방정부의 자치정책 폐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김보희 숭실대 강사는 ‘북간도지역 한인의 노래’란 논문을 통해 북간도 지역 독립군가 중 상당수가 일본군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당시 한인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절절히 일본군가를 독립군가로 바꿔 불렀다는 설명이다. 김홍식 명지대 교수는 건축학과 풍수의 측면에서 북간도 한인들의 민가를 중국인 민가와 비교분석(‘북간도지역 한인의 주거생활’)하고, 김시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새로 발굴한 한인들의 각종 사진을 통해 당시 지역 사회의 내부풍경을 고찰(‘사진으로 보는 북간도 지역 한인의 민속’)한다.(041)560-0402.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자유기업원 “상속세, 자본이득세로 전환해야”

    자유기업원은 22일 “한국의 상속세 세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로 전환하거나, 폐지가 불가능할 경우 최고세율을 소득세와 같은 35%로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배주주 지위를 상속하는 경우에는 할증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물론 감면 대상이 돼야 한다.”면서 상속세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자유기업원은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한국의 상속세율은 50%로 세계에서 가장 가혹하며, 경영권에 대한 할증률을 고려하면 실질적 상속세율은 65%에 달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총 123개국의 상속세 현황을 살펴본 결과 71개국은 상속세가 없었고, 상속세가 존재하는 52개국의 경우에도 최고 세율이 평균 21%에 불과하다는 게 자유기업원의 설명이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원장은 “지난 2006년 재산을 상속한 사람은 30만명이지만 0.7%인 2200명만이 상속세를 냈다.”면서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상속세는 경영권을 상속하는데 대한 세금이 됐다.”고 주장했다.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상속세는 일부 부자들에게 관계된 세금으로, 무엇보다 상속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해소돼야 한다.”며 “소비자와 투자자로부터 선택받은 기업들은 계속 발전해야 하고, 상속 문제는 계주경기에서 원활한 바통 터치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다.42세, 아까운 나이의 죽음은 애처로웠지만 인열왕후는 정확히 1년 뒤 조선으로 밀어닥쳤던 전란의 소용돌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금이 그녀의 상에 조문사(弔問使)를 보내 문상(問喪)하는 과정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끝내 파탄을 향해 치닫게 된다. ●이상한 조문 사절단 국상(國喪) 때문에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636년(인조 14), 연초부터 흉흉한 소식들이 보고되었다.1월, 대구에서는 황새들이 서로 패를 갈라 진을 치고 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월 초에는 안산에서 황당한 보고가 올라왔다. 바다 속에 있던 바위 세 개가 저절로 움직여 육지로 옮겨왔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위들이 지나온 곳에 거의 40여 보(步)나 되는 길까지 만들어졌다고 했다. 2월8일과 10일, 대사헌 윤황(尹煌)은 연달아 인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나라가 망하려면 요상한 변고(요변·妖變)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나라 상황은 망하기 직전’이라며 인조에게 자세를 낮추고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요변’의 경고가 맞아들어가는 것이었을까? 2월16일,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조선의 국상에 조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사절단의 구성이 이상했다. 후금의 여진족 말고도 서달(西 )이라 불리던 몽골인 지휘관들이 77인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의주부윤 이준(李浚)에게 용골대는 까닭을 설명했다.‘우리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몽골의 여러 왕자들이 우리 한(汗)에게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조선과 의논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대원을 획득했다는 것은 후금이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복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옥새는 바로 차하르 몽골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릭단 한(林丹汗)의 옥새를 말하는 것이다. 대호를 올린다는 것은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준의 보고를 들은 조정 신료들은 경악했다. 사간 조경(趙絅)은 몽골인들을 국문(國門)으로 들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장령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통해 인조를 통박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정묘년에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르는 바람에 지금 저들이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삼으려고 덤비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는 더 나아가 용골대 일행을 처단하여 그 목을 함에 담아 명나라로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문관 신료들도 서달을,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반역자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속히 의주의 감옥에 가둬 상경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골을 복속시킨 후금의 자신감 후금이 용골대 일행을 조선에 조문사로 보내면서 몽골인들까지 대동시킨 것은 무슨 까닭일까? 거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1634년 6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명을 공략하는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공격 목표는 주로 선부(宣府)와 대동(大同) 지역이었다.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에 속하는 선부와, 산시성(山西省)에 속하는 대동은 모두 몽골로부터 북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 요충이자 중진(重鎭)이었다. 홍타이지는 당시 명을 공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부와 대동 주변의 차하르 몽골 부락들을 초무(招撫)했다. 후금이 일찍이 1632년 차하르 몽골을 공격했을 때, 릭단 한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도주하면서 차하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634년 5월, 원정 출발에 앞서 홍타이지는 명 변경에서 유목하고 있던 차하르 몽골 부락들에 유시문(諭示文)을 보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촉구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몇몇 성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던 사이 후금군은 주변 지역을 자유자재로 유린, 약탈했다. 당시 홍타이지의 원정에는 후금에 우호적인 코르친(科爾沁), 나이만(柰曼) 몽골 등이 동참했다. 선부와 대동 주변 차하르 몽골의 잔당들도 원정 기간 동안 속속 투항해 왔다. 더욱이 1634년 윤 8월, 도주했던 릭단 한이 사망했고 이후 그 아들들과 대신들이 나머지 국인(國人)들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해 왔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사실상 몽골을 평정했다.1634년 12월, 원정군이 개선했던 직후 홍타이지는 태조 누르하치의 사당을 찾아 자신의 승첩 사실을 고했다. 그는 직접 읽은 축문에서 ‘누르하치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자신이 차하르를 비롯한 몽골 부락들을 모두 복속시켰다.’고 보고했다. 또 ‘조선도 과거에는 성의를 보이지 않다가 이제 아우를 칭하며 납공(納貢)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남은 적은 이제 명나라뿐이라고 했다. 13세기 이래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던 몽골을 정복하게 되면서 후금의 자신감은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더욱이 1635년에는 ‘칭기즈칸의 정통 후계자’였던 릭단 한의 옥새를 손에 넣었고, 요양(遼陽)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금불상까지 획득했다. 불상은 쿠빌라이 칸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릭단 한에게 돌아갔고, 다시 홍타이지의 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여길 법도 했다. 실제 금불상을 얻은 직후,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 안료(顔料)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사찰을 새로 지어 불상을 봉안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홍타이지의 오판 후금의 넘치는 자신감은 조선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1635년 11월, 홍타이지는 릭단 한의 옥새를 조선 사신에게 보여주면서 은근히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다. 청 측 기록에는 조선 사신 박로가 옥새를 보고 ‘진정 하늘이 내린 보물’이라고 감탄했다고 되어 있다.1636년 1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하늘의 돌보심으로 우리 대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공경(孔耿)이 귀순했으며, 차하르 몽골이 복속하여 주변이 모두 우리 소유가 되었다.’고 과시했다. 홍타이지는 그런데도 조선은 자신들을 공경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이윽고 1636년 2월, 후금의 여러 패륵(貝勒)들은 홍타이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상주(上奏)하기로 의결했다. 그들은 ‘차하르 한의 아들이 투항해 오고, 대대로 전해오던 몽골의 국새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진 것’이라며 속히 황제가 되어 신민들의 여망에 부응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신료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아직 대업(大業)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강조하고, 그런 상황에서 먼저 황제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타이지가 고사하자 여러 패륵들을 비롯하여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이 모두 나서서 속히 대호(大號)를 정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의 강청은 이틀 동안 계속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홍타이지의 친형인 대패륵(大貝勒) 다이샨(代善)까지 나섰다. 그는 여러 패륵들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맹서했다. 고사와 강청이 거듭되는 와중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거론했다.‘만몽한 출신 신료들이 한목소리로 권하니 거부하기 어렵다. 조선도 형제의 나라이니 마땅히 같이 의논해야 한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에 앞서 조선의 동의를 받고 싶어했고, 그 때문에 용골대 일행에게 몽골인들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오판이었다. 조선은 후금과 화친하고 형제관계를 맺었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선의 추대를 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순진했던 것일까? 조선이 무모했던 것일까? 양국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박성화호 올림픽 본선 ‘가시밭길’

    박성화호 올림픽 본선 ‘가시밭길’

    올림픽 2회 연속 8강행을 노리는 한국 축구가 8월 베이징올림픽 본선에서 이탈리아, 카메룬, 온두라스와 한 조에 묶여 8강 길이 험난해졌다. 한국은 20일 국제축구연맹(FIFA)이 중국 베이징 리젠트호텔에서 개최한 베이징올림픽 남자축구 본선 조추첨에서 이 세 나라와 함께 D조에 편성됐다.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은 대회 개막 하루 전인 8월7일 허베이성 동쪽 랴오둥만의 항구도시 친왕다오에서 시작되는 조별리그에서 2위 안에 들어야 2004년 아테네대회에 이어 2연속 8강에 오를 수 있다. 한국은 8월7일 오후 8시45분 친왕다오에서 카메룬과 조별리그 첫 경기를,10일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이탈리아와,13일 오후 6시에는 상하이에서 온두라스와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박성화 감독은 조추첨 뒤 “우려했던 네덜란드, 브라질, 나이지리아 등과 만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며 “대체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예선 우승국인 카메룬(국제축구연맹 세계 랭킹 17위)이 전통의 강호 이탈리아(세계 3위)보다 더 두려운 상대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연령 제한이 있는 대회에선 어김없이 아프리카팀의 돌풍이 매서웠다.”며 “공격 조직력이 월등히 앞선 카메룬을 막는 비법을 치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는 수비가 좋아 우리의 단조로운 공격 패턴으론 골을 넣지 못한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그나마 본선 진출국 중 최약체로 지목된 온두라스(세계 38위)와 한 조가 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온두라스 역시 한국(50위)보다 12계단이 높다. 한국은 역대 올림픽대표팀끼리의 전적에서 이탈리아와 한번 싸워 졌고 카메룬과는 맞붙은 적이 없다. 다만 온두라스는 한 차례 싸워 이긴 적이 있다. 일본은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미국과 B조에, 개최국 중국은 브라질, 벨기에, 뉴질랜드와 C조에, 호주는 코트디부아르, 아르헨티나,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A조에 포함돼 역시 8강행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앞서 열린 여자 12강 조별리그 추첨에선 북한이 남미의 강호 브라질과 전차군단 독일, 아프리카의 복병 나이지리아와 함께 ‘지옥의 조’인 F조에 편성됐다.E조에는 중국, 스웨덴, 아르헨티나, 캐나다가,G조에는 노르웨이, 미국, 일본, 뉴질랜드가 포함됐다. 한국은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베이징 올림픽 D-110일’ 태릉 선수촌 이에리사 촌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베이징 올림픽 D-110일’ 태릉 선수촌 이에리사 촌장

    가끔 이런 말을 한다.‘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금의환향, 개선장군이 읊으면 더욱 ‘멋져부러’다. 원래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처음 말했다. 적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뒤였다. 카이사르는 또 루비콘강을 건널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비장한 심정을 역사에 남기기도 했다. 짧고 강한 멘트가 인상적이어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회자된다. 오늘날 올림픽대회 같은 큰 결전을 앞둔 상황, 그리고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와 축배의 잔을 들 때도 종종 인용된다. 언제부터인가 올림픽경기에서 우리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TV화면에 선수 프로필과 함께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우리들은 대한 건아 늠름하고 용감하다/기른 힘과 닦은 기술 최후까지 떨쳐보세/이기자 이겨야 한다∼’라는 노래(모기윤 작사·김희조 작곡)가 흘러나왔다. 지켜보는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스트레스 해소로 막판 컨디션 관리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109일(8월8∼24일) 남았다. 티베트사태로 성황봉송 레이스에 일부 차질이 빚어지고는 있지만 내로라하는 세계적 선수들이 다 ‘베이징시계’에 맞춰 놓고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13억 인구의 중국은 자국 개최라는 이점을 최대한 이용, 금메달 40개로 미국을 누르고 종합 우승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10개를 따내 10위권 안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양궁, 태권도, 레슬링, 핸드볼, 수영, 역도, 유도, 남자체조 등에서 금메달을 기대한다. 하지만 다른 올림픽 때와는 달리 가장 어려운 대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대규모의 투자 등 이번 대회에 ‘올인’하는 만리장성의 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관중의 광적인 응원이나, 경기장 곳곳마다 간단치 않은 텃세가 우리 선수들을 괴롭힐 것이 불보듯 뻔하다. 이같은 상황을 가장 우려하고 걱정하면서도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120% 발휘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에리사(54) 태릉선수촌장이다. 그럴 것이 올림픽에 출전할 우리나라 대표선수들 대부분이 현재 태릉선수촌에서 마지막 비지땀을 쏟아내고 있다. 이 촌장 또한 ‘대한 건아’들의 큰언니, 큰누나, 혹은 어머니로서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사라예보의 전설’처럼 세계를 제패한 ‘영웅’으로 그 누구보다 선수들의 심정을 가장 잘 알 터. 이 촌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선수들과 마주쳤지만 폭풍전야의 정중동처럼 어떤 비장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태릉선수촌에서는 현재 360명 정도가 맹훈련 중이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 10개를 획득하고 ‘톱10’ 진입이 무난할까요. “선수들을 볼 때마다 제 마음 같아서는 금메달을 팍팍 찍어내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 베이징올림픽은 다른 대회보다 무척 어렵습니다. 각 종목마다 중국선수와 맞닥뜨려야 하고 시합장 분위기도 중국에 유리하게 만들겠지요.88서울올림픽때 우리가 4위, 중국이 11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역전이 되는 것이지요. 또 같이 10위권 진입을 다툴 일본도 우리에 비해 메달 가능 종목이 넓은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끈질긴 정신력과 저력이 살아나면 기대 이상의 결과도 나올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금메달 가능 종목은 어떤 것인가요. “현재로선 양궁(2), 태권도(2), 유도, 여자역도, 남자수영, 레슬링, 남자체조 등에서 8∼10개를 금메달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계 톱권인 (박)태환이와 (장)미란이가 경기를 잘 뛰어주길 바라고 있지요.” ▶올림픽 100여일을 앞두고 요즘 선수들은 어떻게 보냅니까. “선수든 지도자든 다 베이징에 올인해 있지요. 모든 것이 정해진 스케줄에 의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이들에게 잘 먹게 하고, 쉴 때 잘 쉬게 하고 또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선수나 지도자나 사기가 매우 중요할 때입니다. 컨디션 조절도 물론입니다. 그래서 식당 등에서 선수들을 볼 때마다 항상 탈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혹 짧은 바지라도 입었으면 ‘이 녀석아 환절기 때 감기 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다 아들딸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이 촌장은 요즘 하루 정해진 공식일정 외에 틈나는 대로 식당의 주방장과 요리사 등을 만나 ‘좋은 음식’을 자주 주문한다. 또 종목별 지도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선수들의 건강상태나 어려운 문제 등 이런저런 얘기를 터놓고 하는 일도 더욱 많아졌다. 이때마다 후배들에게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 후회하지 않을 결과가 나온다.”라고 강조한다. ▶촌장에 취임한 지 만 3년(임기 4년)이 됐습니다. 여성으로서 소회가 남다를 텐데요. “너무나 힘든 3년이었지만 동시에 아주 값진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무나 와서는 안 되는 자리라는 것도 실감했지요. 고통도 뒤따랐고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1년 남았지만 우리의 체육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는 체육인이자 여성으로 첫 선수촌장을 맡아 화제가 됐다. 당초 주위에서 일부 우려도 있었지만 지난 3년 동안 뛰어난 행정역량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런 등등의 이유가 덧붙여져 올초 역대 올림픽메달리스트 168명으로부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도전하라는 추대를 받고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IOC 위원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IOC 위원에 뽑힐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전체 IOC 위원 중 여성몫이 20%(23명)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16명밖에 안 돼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추천을 받았다는 것은 일단 명분은 세웠다고 봅니다. 또 우리나라도 이젠 선수 출신도 (IOC 위원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2006년 3월 IOC로부터 ‘아시아 여자선수상’을 수상한 것도 이롭게 작용할 것입니다. 여기에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 등등을 고려할 때 낙관적으로 기대하고 있지요. 시기가 언제라고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IOC 자격심의위와 집행위를 통과하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요.” 현재 공식적으로 IOC 위원에 도전한 국내 인사로는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가 유일하다. 문대성 동아대 교수의 경우는 선수분과위원이기 때문에 영역이 약간 다르다. 이 촌장의 경우 비어 있는 ‘여성몫’을 노리고 있는 것. ●여성 몫 IOC 위원에 도전할 것 꼭 45년 전 이맘 때였다. 대부분의 국내신문은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만리장성 중국을 꺾었다’ 그러면서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이에리사 등 한국 여전사들이 일본은 물론 세계 최강 중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고 대서특필했다. 바로 이날은 건국 이후 첫 국제대회 금메달이자 한국 구기종목이 세계를 처음 제패한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사라예보의 전설’이 IOC 위원 도전은 물론 이번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이 촌장은 아직도 독신이다. 까닭을 묻자 “수다 떠는 친구들도 있고, 집에 가면 솔직히 씻고 자기도 바쁘다. 휴일에는 가끔 혼자 산에 올라 심호흡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면서 “이제 와서 뭘….” 하며 미소만 짓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4년 보령 출생. ▲70년 제10회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개인단식 우승. ▲71년 국내대회 8관왕. ▲72년 제15회 스칸디나비아 오픈탁구대회 개인전 단·복식 우승. ▲73년 서울여상 졸업, 제32회 세계 탁구대회(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단체전 우승. ▲76년 제28회 독일 국제오픈탁구대회 개인전 단·복식 우승. ▲97년 명지대학교 체육학 박사. ▲99년 용인대학교 교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탁구대표팀 감독. ▲05년 태릉선수촌장. ▲06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여성과 스포츠 트로피’ 수상. #주요 저서 ‘2.5g의 세계’‘탁구훈련지도서’외 다수.
  • 아웃사이더들, 학문현실에 비판의 칼

    아웃사이더들, 학문현실에 비판의 칼

    “지금의 우리는 선배 학자들과 다르고 앞으로도 달라야 한다. 우리 세대와 앞 세대의 학술운동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세대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7명의 젊은 연구자들이 최근 ‘대안지식연구회’란 이름으로 모였다. 김원(성공회대 노동사회연구소 연구원), 이명원(전 서울디지털대 교수),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 연구교수), 김윤철(전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이승원(전 국회외교통상정책 보좌관), 이영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연구원), 김정한(‘대중과 폭력’ 저자)이 그들이다.1989년 혹은 90년 대학문을 들어선 ‘포스트 386’이자, 마흔이 채 되지 않은 학계의 막내들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학계 선배들과 적극적으로 차별화한다.1970∼80년대를 헤치며 선배들이 땀 흘려 일궈온 학술운동단체에 비판의 칼날을 서슴없이 들이대고, 학계의 관료화된 지식생산 시스템에 거침없는 분노를 표시한다. 대학에 안정적 터를 마련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기에 가능한 비판이지만, 대학에서 생존기반을 닦아나가야 할 비정규직 연구자들이기에 무모한 비판이기도 하다. ●뚜렷한 세대의식 표출로 지식사회 비판 대안지식연구회는 구성원들간의 오랜 인연에 뿌리를 뒀다.2001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사망으로 촉발된 1991년 ‘5월 투쟁’의 10주년을 준비하며 서로를 알게 됐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그들은 7년이 흐르는 동안 반수 이상이 박사학위를 받았고, 각자의 전문영역도 확보했다. 김원은 노동사를 중심에 둔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 연구로 거대서사에 가려진 ‘사회적 약자들’을 복원하는 데 주력했고,2000년 당시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논문표절을 비판해 문단을 발칵 뒤집었던 이명원은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을 통해 기성 평단에 전투적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윤철은 진보정당에 몸담아 새로운 정치를 꿈꿨고, 하승우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가능성을 탐색해왔다. 자기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지난해 가을 다시 한 자리에 앉았고, 한국 지식사회를 향한 공통의 문제의식을 확인했다. 선배 학자들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신진 연구자들의 날 선 세대의식엔 학문후속세대로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실존적 고민이 투영돼 있다. 독재 시기 관제학문에 반발하며 비판적 학술운동의 전성기를 열었던 선배들의 현재를 바라보는 실망감도 반영돼 있다. 연구회 김원 대표는 “우리 세대 연구자들이 학문적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사회적 발언의 장에서 소외되고 있는 동안, 제도권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 선배들은 학문공동체의 역동성을 강화하기보다 현실인식과 실천방식에서 후속세대들과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켰다.”고 지적했다. 단적인 예가 학술진흥재단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학문지원 및 개입정책에 대한 시각차다. 선배세대 학자들이 학진의 연구 프로젝트에 적극적·소극적 참여를 통해 제도권 지식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정립해간 반면, 연구회는 학진 프로젝트를 ‘학문 부르주아’와 ‘학문 프롤레타리아트’로 양극화시키는 관료화된 지식생산 메커니즘이라고 비판한다. 영어로 쓰인 SCI(과학논문인용지수) 논문에 가중치를 주는 국내 대학들의 교수 승진·재임용 심사 정책 또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행태”라고 혹평한다. 김 대표는 “앞 세대 학술운동을 주도했던 선배들이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장주의적 학문정책에 너무 안이하게 대응했다.”면서 “결국 선배들과의 소통이 단절된 후배들은 대안적 학문공동체를 구성하기보다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자기 학문에만 몰입하는 현상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연구회가 향후 활동의 초점을 ‘제도권과 비제도권, 선배세대와 후배세대간 소통 모색’에 맞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계 내·외부와 위·아래 소통 매개 연구회는 지난달 31일부터 매주 1회씩 연구자들이 돌아가며 사회 현안에 대해 논평하고, 이를 이메일로 구독자들에게 발송하는 ‘정치사회비평’을 시작했다. 같은 달 29일엔 ‘대안정치 실험의 성과와 한계’란 주제로 연구회의 첫 번째 월례토론회를 열었다. 특정 텍스트를 정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텍스트비평도 매달 진행된다. 모두 학문후속세대로서의 자의식을 분명히 표출하면서도 지식사회의 내·외부와 위·아래를 소통시킨다는 목적의식 하에 고민된 기획들이다. 김 대표는 “지금 당장 이거다 하고 제시할 만한 대안은 우리도 갖고 있지 않다.”면서도 “오늘의 학문현실에 대해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소장 연구자들이 공동의 논의 테이블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외교승 겐포(玄方)를 곁에서 떠나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건부 승리’이기도 했다. 바쿠후(幕府)는 요시나리를 선택하면서 그의 역량을 시험하고, 동시에 조선을 떠보는 조건을 달았다. 조선은 쓰시마의 소오를 다독거리며 바쿠후와의 관계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했다. ●바쿠후의 의도 ‘조선과 주고받은 국서를 멋대로 고쳤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처벌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바쿠후는 점차 쇄국(鎖國)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長崎)로 집중시키고, 동남아 등지로 가는 무역선(朱印船)의 출항과 일본인의 도항(渡航)을 금지시키는 조처를 구상했다. 바쿠후는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조선과의 관계도 다시 정비하려고 했다. 무역을 유지하면서도 유럽 국가들을 통한 기독교 유입을 차단하려 했던 바쿠후에게 조선과의 관계는 중요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유일하게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였다.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과 국교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데 필수적이었고, 조선과의 교역 또한 매우 중요했다.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선택’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가까스로 재개시켜 놓은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에 대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진 데다, 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는 조선을 상대해 왔던 소오 가문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쿠후는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주면서 ‘1636년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通信使)를 초치(招致)하라.’고 명한 것은 요시나리의 조선에 대한 교섭 역량과 조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조건이었다.1635년 8월, 바쿠후는 향후 겐포를 대신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할 승려들을 직접 선택했다. 교토(京都) 동복사(東福寺)의 승려 인서당(璘西堂)과 소장로(召長老), 천룡사(天龍寺)의 승려 선장로(仙長老)가 그들이었다. 이제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 쓰시마로 들어가 머물면서 조선으로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을 맡게 되었다. 교토에서 온 외교승들이 바쿠후의 지휘 아래 쓰시마의 대조선 외교를 직접 관장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야나가와 이켄’이 종료된 뒤 인서당이 맨 먼저 쓰시마로 건너왔다. ●‘일본위협론’이 다시 제기되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나가와 이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바짝 긴장했다. 후금의 위협과 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또한 소오 요시나리를 매개로 유지되어 왔던 조일(朝日)관계에 변동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퍼지고 있었다. 특히 1635년 연말에 재이(災異)가 거듭되면서 ‘일본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창덕궁 정전(正殿)에 벼락이 내리치고, 한성부 연못의 물빛이 붉게 변하는 변고가 나타났다.11월6일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사간 민응형(閔應亨)은 “옛날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괴상한 변고가 이어지는 법”이라며 “선조의 능침(陵寢)이 무너지고, 큰바람 때문에 나무가 뽑힌 것은 장차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무렵을 예로 들었다. 신묘년(1591년)에 풍재(風災)가 극심하더니 이듬해 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재이가 거듭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는 민응형의 발언에 조정은 술렁였다. 누가 쳐들어 온다는 것인가? 민응형을 비롯한 삼사(三司) 신료들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목했다.11월7일, 인조는 비변사 당상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일본이 과연 위험하냐고 물었다. 오윤겸(吳允謙)은, 뚜렷하게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성정(性情)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만일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조선이 일본보다 후금을 우대하고 있다.’고 쇼군에게 참소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계했다. 또 시게오키가 비록 패했지만 쇼군 주변에 시게오키를 두둔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이홍주(李弘胄)와 신경진(申景 )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수군을 잘 정비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했다. 11일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차자(箚子)를 올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거론했다. 그는 조정이 오로지 서변(西邊)을 막는 데만 급급하여 남변(南邊)의 방어는 거의 팽개쳐 버렸다고 비판했다. 남쪽의 군병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무기도 엉성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 조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백성들을 유사시에 전장으로 내모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상헌은 남변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통제사영(統制使營), 경상 좌수영(左水營)과 우수영(右水營)에 감군어사(監軍御史)를 파견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위협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조정은 후금의 동향이 불온하다고 느낄 때마다 주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삼남에서 수군과 전선(戰船)을 차출해 강화도 방어에 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사(明使) 노유녕(盧維寧)을 접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 수군의 입방(立防)을 면제해 주고 대신 포(布)를 받기도 했었다. 일본의 위협을 고려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방책이었다. ●신료들과 달리 인조는 日에 대해 낙관론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일본에 대해 대체로 낙관론을 폈다. 그는 ‘관백(關伯)이 전쟁에 싫증을 내서 백성들에게 총포를 쏘지 못하게 하는 데다, 반란을 걱정하여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고 있으니 다른 나라를 넘볼 근심은 없다.’며 ‘일본위협론’을 일축했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조정은 수군을 점검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하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거의 모든 신경이 서북변 쪽으로 가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고식책(姑息策)이었던 셈이다. 이제 일본에 대한 대책은 유화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아 차렸는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왔다. 겐포를 대신하여 쓰시마에 부임한 인서당은 1635년 12월,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분은 ‘일본은 명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 연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쓰시마가 조선의 예조를 ‘합하(閤下)’라고 부르던 것도 ‘족하(足下)’로 바꾸겠다고 했다.‘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나라이고 쓰시마 역시 예조와 동등하니 합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인서당이 기초한 문서를 받지 않으려 했다. 쓰시마는 ‘합하’문제를 거론하여 조선이 자신들을 ‘족하’라 부르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변사 신료들은 일본과 사단이 생길까 우려하여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조선은 결국 이후부터 쓰시마 도주를 ‘족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도 수락하고, 바쿠후가 요청한 마상재(馬上才·말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유희)를 벌일 인원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측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 준 것이었다. 모두 소오 요시나리의 낯을 세워 주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4·9 총선 이후] “여도 야도 모두 패자… 정당정치 뒷걸음질”

    [4·9 총선 이후] “여도 야도 모두 패자… 정당정치 뒷걸음질”

    18대 총선을 통해 표출된 민심은 무엇일까? 또 총선 결과는 앞으로 정치권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가? 서울신문은 총선 결과를 진단하고 향후 정국을 전망하기 위한 긴급 전문가 좌담을 개최했다.4·9총선의 결과가 확정된 10일 오전 한국선거학회장인 이남영 세종대 교수와 김형준 명지대 교수, 김욱 배재대 교수가 서울신문에 모였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를 이끄는 세 교수는 이번 선거기간 동안 여론의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해왔다(사진 왼쪽부터 김욱·이남영·김형준 교수). 정리 박창규 구동회기자 nada@seoul.co.kr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이남영 교수 총선이 끝났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결코 승리한 게 아닌 걸로 보인다. 총선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김형준 교수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안정과 견제의 혼합이다. 그런데 견제의 성격이 좀 특별하다.17대 의회에서 열린우리당은 응집된 여대야소의 구조를 가졌지만, 한나라당은 분절된 여대야소의 형국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갈등 속에서 박 전 대표가 빠지면 여대야소는 금방 무너지게 된다. 이번 표심을 세부적으로 보면 세 가지가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MB 브랜드 파워가 힘을 발휘한 수도권은 경제 살리기 심리가, 영남에서는 박근혜 살리기 심리, 그리고 기존의 지역주의에 충청의 자유선진당 바람이 추가됐다. 따라서 이번 총선은 삼국지가 아니라 사국지의 양상을 보였다. ●김욱 교수 이번 총선은 ‘시기’가 좌우한 것 같다. 대선을 치르고 4개월만에 치러진 선거였다. 선거 결과도 복합적이다. 과거 정권에 대한 심판 성격에다 새 정부에 대한 견제 심리까지, 어정쩡하고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한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가 단순하지 않다. 뚜렷한 승자가 없는 선거였다. 1 보수는 정말 승리했나 ●이 교수 보수진영이 200석을 넘겼다. 내부적으로 권력 분절현상은 있었지만 진보에 대한 보수의 승리로 봐도 되는 될까? ●김형준 교수 결과적으로 보수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보수 편향 사회로 회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유권자들의 이전 이념 성향은 진보와 보수가 강하고 중도가 약한 ‘쌍봉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도가 강화되는 이념적 지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즉, 이번 선거에서는 중도가 보수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중간 평가 성격이 짙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중도가 보수를 선택한다는 확신은 없다. 중도의 표심은 언제나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김욱 교수 같은 의견이다. 유권자의 이념이 몇년 새 갑자기 변하는 건 아니다. 보수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의미는 다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이념이 반짝 중요해졌다. 진보-보수 대립양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은 이념의 중요성이 약화됐다. 진보층은 노무현 정부가 끝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울 만한 이슈가 없어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보수로 움직인 걸로 보인다. 2 한나라민주당의 앞날은 ●이 교수 주요 정당들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내홍이 크게 표출됐고, 친박연대도 출연했다. 한나라당의 앞날에 대해 전망해달라. ●김형준 교수 한나라당에 유력한 비주류가 생겼다. 지금까지 한나라당에는 비주류가 없었다. 박 전 대표측에는 자원이 풍부하다. 다선 의원부터 초선까지 경력과 연륜이 있는 당선자가 많다. 하지만 친이측은 이재오·이방호 등 계파 핵심부가 무너졌다. 이 상태에서 전당대회를 열면 친이측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친박세력이 복당은 되겠지만 시점으로 보면 7월 전당대회 전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몽준 당선자보다는 두 진영을 아우르는 중립적 인사가 양 진영의 타협으로 당권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차원에서 한나라당 차기 대표는 김형오 의원이 유력시된다고 본다. 박 전 대표와도 관계가 있고 인수위 경력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나라당에 국회의장 감이 없어 5선의 김 의원이 유력시된다는 데 있다. 이럴 경우 전통적 야당에서 있었던 집단지도체제와 유사한 형태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 교수 마찬가지로 민주당도 계파간 내홍이 만만찮을 거 같은데. ●김욱 교수 민주당의 경우 손학규 대표 체제가 유지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번 선거결과가 좋지 않았고 손 대표의 당내 장악력도 낮은 편이다. ●김형준 교수 손 대표 체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수도권이 몰락했기 때문이다.81석은 의미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손 대표를 받치고 있었던 수도권에서 참패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면에서 민주당의 차기 당권 주자는 추미애 당선자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구 민주계의 상징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수도권 의원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정통성 있는 뿌리를 가진 사람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서 강금실 전 장관은 힘이 빠진다. 열린우리당 출신이기 때문이다. 추 당선자를 관심있게 지켜봐야 한다. 또 민주당은 결국 창조한국당과 결합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조한국당의 간판인 문국현 당선자는 지난 대선에서 5.8%를 얻었다. 둘이 합치면 떠나간 20∼30대를 끌고 가는 힘이 생길 수 있다. ●이 교수 분열된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통합할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김욱 교수 통합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떨어져 나온 과정이 워낙 험악했다. 구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진보진영의 입장은 좀더 두고 기다리면서 상황을 관망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3 낮은 투표율 이유는 ●이 교수 감정이 지배했던 뜨거운 선거였는데 오히려 투표율은 너무 낮았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김형준 교수 안정과 견제는 슬로건일 뿐 선거에는 쟁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야당의 실수다. 대운하와 대북문제는 가능한 쟁점이었다. 하지만 가다가 주저앉았다. 우리 정치의 특징은 정당에 대한 일체감보다는 정당 지도자에 대한 일체감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국민과 당 대표들간의 정서적 일체감이 없었다. ●김욱 교수 민주화 이후 투표율이 낮아지고 있는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거 동원투표로 투표율을 높인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유권자를 이끌어낼 동인이 부족했다. 선거의 복합적 특성도 부정적인 면만 부각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견제 등 네거티브한 주제들로 선거판이 채워졌다. ●이 교수 친박연대 등 일회성 선거정당이 출현해 정당정치의 기본을 훼손했다는 지적이 있다. 세계사적으로 드문 경우다. ●김욱 교수 정당정치라는 차원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우리 정치가 인물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우선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소선거구제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인물중심 구도를 만든다.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것도 찬성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고, 선거제도를 비례대표 의석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김형준 교수 나는 생각이 다르다. 비례대표 때문에 친박연대가 강화된 것을 보라. 비례대표를 늘리면 감정적 투표가 성행할 가능성이 커진다. 비례대표제는 폐지해야 한다. 정치인들의 철학이 빈곤하다. 이번에 성행한 박근혜 마케팅이 오히려 박근혜를 죽이는 것이다. ●이 교수 거물들이 쓰러졌다. 민주당 손 대표와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 김근태 의원, 한나라당의 이방호·박희태 의원 등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거부당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또 이들의 재기가 가능할까? ●김형준 교수 이명박계의 핵심 4인방이 떨어졌다. 이재오·이방호·정종복·박형준, 더 나아가 김해수까지. 박근혜 전 대표가 ‘사적 감정이 개입된 공천’이라고 몰아붙인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손 대표는 여전히 정치 재개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게 나을 듯싶다. 지난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의 득표율을 토대로 시뮬레이션해 보면 40∼50석밖에 안 됐는데, 이것을 80석까지 올려놓았다. 손 대표가 종로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조금 다르다. 본인이 지역적 연고에 비중을 두었고 참여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책임론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 교수 선진당이 충청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두 석만 더 끌어오면 교섭단체 구성도 가능하다. 4 지역주의로 회귀했나 ●김욱 교수 과거 지역주의가 부활한 것 아니냐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확연히 차이가 있다. 충청 유권자가 갈 곳이 없어진 게 성공 요인이다. 갈 곳 없는 마음을 선진당이 파고든 것이다. 과거 지역주의는 특정 지도자와의 감정적 유대감이 중요했다면, 지금의 지역주의는 이회창 총재에 대한 유대감이나 애정보다는 충청지역이 홀대받는다는 반감의 표현이다. 서울도 신지역주의가 나타난다는데, 그것도 감정적인 유대보다는 실리적 이익, 아파트 가격 폭등과 같은 경제적 변수에 의해 서울지역 유권자들이 움직인 걸로 보인다. ●김형준 교수 실리적 지역주의다. 하지만 자꾸만 충청도를 자유선진당의 압승으로 언론에서 다뤄가는데, 충북에서는 민주당이 8석을 차지했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선진당이 충남·대전을 중심으로 승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선진당의 두번째 포인트는 정당 득표율이 낮다는 것이다. 친박연대는 13%였지만 선진당은 7%에 불과해 이회창 총재가 지난 대선 때 얻은 15%의 반토막이 났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선진당에 있는 사람들을 영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교섭단체가 안 되면 이탈 가능성 높아진다. 한나라당에서 충청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 등이 마련되면 선진당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 [4·9 총선 이후] 판사 16명·검사 22명·변호사 20명

    [4·9 총선 이후] 판사 16명·검사 22명·변호사 20명

    이번 18대 총선에서 당선된 법조인이 58명에 달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로 119명이 출마해 거둔 성과로 당선율도 역대 최고인 48.7%로 나타났다. 지난 17대 총선에 131명이 출마해 당선자 54명(41.2%)을 배출하면서 세운 ‘역대 최대’기록을, 이번에 모두 갈아치운 것이다. 정당별로는 한나라당 33명, 통합민주당 15명, 무소속 6명, 자유선진당 3명, 민주노동당 1명 순이다. 검사 출신이 22명, 판·검사 경력이 없는 변호사 출신이 20명, 판사 출신이 16명이다. ●법조인 vs 법조인 법조인끼리 승패가 갈린 지역구도 8곳이나 됐다. 서울 광진을의 추미애(통합민주당)·박명환(한나라당) 변호사간 승부에선 정치 관록에서 앞선 추 변호사가 이겼다. 인천 계양을에서는 송영길 통합민주당 의원이 같은 변호사 출신인 이상권 한나라당 후보를 눌렀다. 경기 고양덕양갑에서는 변호사 출신인 손범규 한나라당 후보가 검사 출신의 이국헌 자유선진당 후보를 이겼다. 강원 철원에선 검사 출신 변호사끼리 맞붙어 이용삼 통합민주당 후보가 한나라당 박세환 의원을 꺾었다. ●눈에 띄는 법조인 당선자 국정원 도청사건 주임검사라는 특이 경력과 한나라당 부산 북·강서갑 공천에서 정형근 의원을 제친 변호사 출신의 박민식 후보는 57.3%의 득표율로 거뜬히 당선됐다. 또 지난해 대선에서 불거진 ‘BBK 의혹’의 소방수로 기용됐던 판사 출신의 고승덕(서초을)·검사 출신의 박준선(용인-기흥) 한나라당 후보는 무난히 당선된데 반해 검사 출신인 오세경(부산 동래) 한나라당 후보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서울고법 판사 출신의 한나라당 여상규 후보는 경남 남해·하동에서 무소속 김두관 후보를 누르고 금배지를 달게 됐다. 여성 판사 출신으로 법원내 온갖 1호 기록을 보유한 자유선진당 이영애 후보는 비례대표에 당선돼 지난 15대 당시 신한국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남편 김찬진 변호사의 뒤를 잇게 됐다. 석동현 서울고검 송무부장의 부인 박영아 명지대 물리학과 교수는 서울 송파갑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무난히 당선됐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이명박 정부의 과제’ 토론회

    ‘이명박 정부의 과제’ 토론회

    광화문문화포럼(회장 남시욱)은 11일 오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김형준 명지대 교수를 초청해 ‘총선 이후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주제의 강연을 듣고 토론회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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