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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 60주년] 정치선진화 학자들 제언

    [건국 60주년] 정치선진화 학자들 제언

    대한민국 정치가 건국 이후 지난 60년 동안 민주주의의 ‘틀’을 형성해 왔다면 앞으로는 그 틀에 맞는 내용을 갖춰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학자들로부터 한국 정치가 풀어야 할 과제들에 대해 들어봤다. ●“국민이 정치 중요성 알아야”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이정희 교수는 정치 중심을 소수 엘리트에서 국민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인만 탓하기보다는 국민들이 일상생활하는 데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투명성’ 확보도 우리 정치의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정책 결정 과정을 투명화해 공론화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결국 정치 발전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시스템 정치’ 필요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지난 60년 동안 정치 발전을 위한 하드웨어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소프트웨어를 갖춰야 한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정치 선진화를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으로 ▲권력 분화 ▲정치 주체의 자율성 보장 ▲대화·타협 등 선진의식 문화를 꼽았다. 그는 “권력을 지방 아닌 중앙이, 정당보다는 청와대가 장악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특히 지방과 정당에 자율과 책임을 동시에 줘야 한다.”고 했다. 또 그는 “선거에서 조직 동원이나 네거티브를 통한 ‘한 방’이 통하지 않으며 유권자가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이에 맞춰서 정치가 인물 중심에서 벗어나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여의도 정치 괴리” 상지대 정대화 교수는 국민 의식과 여의도 정치의 괴리를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보고 있다. 그는 “국민은 이념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데 여의도 정치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의 경우 영·호남 1당 체제에서 벗어나 복수 정당 체제가 필요하다고 정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양당 구조에서 나아가 캐스팅 보트가 가능한 제3당이 필요하다.”면서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보수정당, 개혁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당 외에 좀더 진보적인 정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포위된 이후 남한산성 사람들은 바깥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근왕병이 근처까지 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면서 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날로 어려워지는 산성의 사정을 바깥에 정확히 알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청군이 산성 주변에 설치한 목책 때문이었다. 청군은 소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과 목책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하고 방울 등 쇠붙이를 매달았다. 조선군 전령이 목책을 넘으려 하면 어김없이 매복한 청군이 뛰쳐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책은 서서히 산성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었다. ●‘술과 고기’의 굴욕 12월27일 조정은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보냈다. 세시(歲時) 인사를 하면서 적정(敵情)을 떠보려는 깜냥이었다. 대사간 김반(金槃), 승지 최연(崔衍), 교리 윤집(尹集)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적진에 사람과 선물을 보내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김반 등의 주장을 일축했다. 대신을 보냈다가 혹시라도 억류될까봐 하급 관원을 한 사람 골랐다. 이기남(李箕男)이 그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서자인 그는 영리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10병을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영리한 그도 청군 진영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실언을 하고 말았다. 연말 인사차 왔다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날씨도 추운데 우리 전하께서 옛정을 잊지 못해 특별히 술과 고기를 보냈다.’고 했다. 청군 장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하늘이 조선 팔도를 우리에게 주었으니 술과 고기 등 모든 물자가 다 우리 것이다. 국왕은 지금 골짜기에 갇혀 있고 안팎이 가로막혀 신하들은 모두 굶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문득 획득한 물품을 국왕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지금 이 술과 고기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도로 가져가 굶주린 너희 신료들에게나 주어라.’ 그러면서 청군 장수들은 조선 근왕병들을 격퇴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성세(盛勢)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기남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적정을 엿보려고 갔다가 도리어 적이 산성 내부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기남이 돌아온 직후 독전어사(督戰御史) 황일호(黃一皓) 등이 인조를 뵙자고 청했다. 황일호는 인조에게 빨리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자고 촉구했다. 그는 당시 형세를 ‘주객(主客)이 뒤바뀐 상태’라고 진단했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황일호는, 병사들은 사기(士氣)를 먹고 사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만 보내다가는 가만히 앉아서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혹독한 추위 막을 가마니조차 부족 1636년 연말, 산성의 조선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군사들의 손이 곱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방한복’이라 할 수 있는 빈 가마니(空石)조차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황일호는 산성의 주민들에게 벼슬을 팔거나 면천첩(免賤帖)을 팔아서라도 병사들에게 군막(軍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사들이 얼어죽을 것이고, 아무도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자기 몸을 가리고,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산성 주민들에게 무슨 물자가 있을 것인가. 도무지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12월28일, 술사(術士) 몇 사람이 ‘오늘은 싸우든 화의(和議)를 하든 모두 길한 날’이라고 일진(日辰)을 뽑았다. 도체찰사 김류는 술사들의 얘기에 솔깃해졌다. 독전어사 황일호 등으로부터 빨리 결전해야 한다는 건의도 들었던 터라 병력을 뽑아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김류는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공격했다. 노살(勞薩) 등이 이끄는 청군은 골짜기 여기 저기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미끼’를 던졌다. 다름 아닌 포로로 잡은 조선인 노약자들과 가축들이었다. 그들을 본 김류는, 달려 내려가 공격하면 조선인 포로와 가축들을 구해올 수 있다고 여겼다. ●패전 책임 하위 무관에 전가해 원성 김류는 체찰부(體察府) 소속 장졸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장졸들은 ‘함정’일 수 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몸을 사렸다. 그러자 체찰부의 비장(裨將) 유호(柳瑚)가 군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김류에게 건의했다. 유호는 머뭇거리는 장졸들에게 김류가 건네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떠밀린 장졸들은 할 수 없이 달려 내려갔다. 매복한 청군은 처음에는 조선군이 포로와 우마(牛馬)들을 거두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진이 비어 있다고 착각한 조선군 수백 명이 쏟아져 내려오자 청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청군이 만든 ‘함정’에 빠져 당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갖고 있던 화약도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오판하여 애초부터 화약을 조금밖에 지급받지 못한 탓이었다. 화약을 더 달라는 고함과 아우성 속에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산성 쪽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김류는 조선군이 섬멸당하는 장면을 보고서야 초관(哨官)을 시켜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청군의 칼날 앞에서 유린되고 있는 장졸들이 가파른 오르막을 뛰어올라 퇴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극소수의 장졸들만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한마디로 ‘대형 사고’였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산성의 현실에서 이들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즉흥적이고 섣부른 작전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러나 패전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호는 전사자가 40명 정도라고 축소하여 보고했다. 김류와 유호의 책임이 제일 컸지만, 군사들을 제 때 물리지 못한 과오는 김류의 퇴각 명령을 전한 초관에게 전가되었다. 그는 참수되었다. 또 혼전 중인 조선군을 제 때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성장(北城將) 홍두표(洪斗杓)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홍두표는 신료들의 구원으로 죽음을 겨우 면했지만, 패전 책임이 엉뚱하게 전가되는 와중에 병사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홍타이지, 남한산성 압박 본격화 이 싸움을 계기로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누구도 나가서 싸우자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더욱이 12월29일, 남하하던 홍타이지는 휘하 장수들을 먼저 도성으로 들여보내 숨어 있는 사람과 가축들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자신은 직접 남한산성 근처로 나아가 인조를 더욱 압박할 심산이었다. 12월3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음산한 날이었다. 이날 하루 종일 청의 대군이 광나루, 마포, 헌릉(獻陵) 등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김류는 패전에 대해 사과하고, 적진에 사람을 보내자고 청했다. 패전을 계기로 다시 화의를 추진하려는 심산이었다. 김상헌이 당장 제동을 걸었다. 사간원 신료들도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이 날 행궁 근처에 까치들이 모여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길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선가 근왕병이라도 나타나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의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실의에 빠진 산성 사람들은 까치집을 바라보며 그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길조’가 나타난 이 날, 홍타이지는 탄천(炭川) 주변에 자신이 머물 진영을 설치했다. 1636년 12월30일, 남한산성 주변의 풍경은 스산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공정택-주경복 ‘엘리트 교육’ 설전

    25일 생중계로 진행된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첫 합동TV토론회에서는 6명의 후보가 참석해 학교정책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공정택 후보와 주경복 후보는 교육의 수월성(엘리트주의)과 평등문제를 놓고 확연한 입장차를 보였다. 공 후보는 “경쟁이 치열한 세계적인 교육흐름에 발맞춰 초등학생도 수월성을 위해 경쟁논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맞서 주 후보는 “한국교육이 수월성에 너무 치우쳐 있으며 과잉경쟁의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자사고 대신 공립형 대안학교 등을 통해 이를 완화해 가겠다.”고 말했다. 김성동·박장옥·이영만 후보도 수월성을 위해 교원 평가제와 학교 선택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도로 분류되는 이인규 후보는 자사고를 ‘창의형 자율학교’로 전환해 과잉경쟁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신율 명지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는 시간 부족과 후보자간 인신공격이 이어지면서 깊이있는 토론은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상대 후보에게 제기된 ‘의혹’에 대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공 후보는 “주 후보는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말한 적이 있고, 또 교수 시절 학교 규정을 어기고 A학점을 남발했다.”고 비판했다. 주 후보는 이에 대해 “6·25 발언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정치학계에 이런 설이 있다.’고 소개했을 뿐이며 재량권을 가지고 높은 점수를 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형준 정치비평] 헌법은 문서가 아니라 정신이다

    [김형준 정치비평] 헌법은 문서가 아니라 정신이다

    18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제헌절 경축사에서 “민주법치국가에 맞는 헌법체계를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국회내에 개헌특위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의원 167명으로 구성된 ‘미래한국헌법연구회’도 발족되었다. 헌법 개정론자들은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개정의 핵심 이유로 지적한다.5년 단임 대통령은 “마라톤이 아닌 단거리 달리기처럼 국정운영을 하게 되어, 집권초기 2년에는 개혁 조급증에 시달리고 3년차부터는 급격히 보수화, 무기력화되는 주기적 사이클을 반복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에게 제도적 권력이 집중되는 문제와 여소야대의 분점 정부가 만들어내는 교착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제도적 결함도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통령 중임제, 대선과 총선의 주기 일치 등 권력구조 개편을 제기한다. 개헌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개헌 논의가 정략적이고 졸속적으로 전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의 사항이 준수되어야 한다. 첫째,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를 최소 1년간 유보해야 한다. 개헌은 폭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단 논의가 시작되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된다. 경제는 없고 개헌만이 판을 치며 조기 레임덕으로 국정운영의 불안정을 가져 올 수 있다. 최근 서울신문이 실시한 창간 특집 여론조사에도 국민의 72.4%가 ‘민생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일이 많으므로 헌법 개정 논의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것이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둘째, 대의 정치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정치 개혁의 대장정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 중임제 등의 권력구조는 민주 정치 운영을 위한 하드웨어에 불과하다. 다수결 원칙의 존중, 소수자에 대한 관용, 대화와 타협 등이 성숙한 대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소프트웨어이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권력구조 개편도 그 효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한국 정치에서 국민통합 실패, 여야간 갈등 고착, 대선 경쟁 구도의 조기화 등과 같은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5년 단임 대통령제와 같은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대통령의 미숙한 국정운영, 한국의 전근대적인 정당구조, 배타적 지역주의 등이 핵심 요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셋째, 개헌의 정치적 효과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대선과 총선의 주기를 맞추는 것이 과연 정치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대선·총선 주기가 일치할 경우,‘묻지마식 투표’로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의회마저 석권하는 무소불위의 공룡 여당이 언제나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성공적인 대통령제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쉽게 무너지게 된다. 이런 내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대선·총선 주기를 맞추면서도 하원 의원 임기를 2년으로 해 정부를 평가하기 위한 중간 선거를 허용하고 있다. 여하튼, 제도만 바뀌면 효율성은 저절로 담보된다는 ‘제도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헌법은 언제든지 수정되고 변경될 수 있는 단순한 종이 문서가 아니라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정신이다. 문서로 보관될 때가 아니라 헌법 정신을 지켜 나갈 때 빛을 발휘한다. 권력구조보다는 헌법에 스며있는 역사를 음미해야 한다는 뜻이다. 1987년 체제의 부산물로서의 ‘5년 단임제’는 실패한 대통령만을 양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 이외에 민주와 반독재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국민의 힘으로 독재와 장기집권의 폐단을 막는 데 기여한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따라서, 헌법 개정과 같은 국가 중대사는 이분법적 사고와 정치적 편의주의에서 벗어나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명지대 정치학 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명예군수 25년 가수 정광태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명예군수 25년 가수 정광태 씨

    독도는 ‘돌섬’이다. 전라도에서는 ‘돌’을 ‘독’이라고도 한다. 원래 울릉도와 독도에는 경상도보다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돌섬’의 의미인 ‘독도’라 불렀다. 하여, 이곳에는 풀이나 자랄 수 있을 뿐이지, 대나무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자꾸 생떼를 부리는지 원…. 이참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홍순칠,1929년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한테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6·25 참전 직후 1953년 4월 45명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그해 7월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쫓아내는 등 독도에 근접하는 일본 함정과 항공기를 여러 차례 격퇴시켰다. 그것도 6·25 때 쓰다 버린 소총과 박격포 등으로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일본의 야욕을 미리 짐작한 그는 독도의 동도(東島) 바위 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크게 새겨 넣어 대한민국 영토임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그러던 1956년 12월, 무기와 독도수비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가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 작고했다. ●노래 인연으로 의용수비대장과 운명적 만남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3년 7월25일.‘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해진 가수 정광태(53)를 울릉도에 초청했다. 평소 이 노래를 자주 불렀던 그는 정씨를 무척 좋아했다. 둘은 ‘독도’라는 공통점으로 운명처럼 뜨겁게 만났다. “이런 훌륭한 노래를 불러줘서 너무 고맙소. 당신 같은 사람이 독도군수를 맡아야 해요.” 그러면서 홍순칠은 마지막 독도의용수비대장 자격으로 감사패와 함께 정씨를 명예군수로 임명했다. 이후 정씨는 25년째 무보수 군수로 장기 집권(?)하게 된다. 뗏목탐사와 수영종단 등 울릉도와 독도를 수십차례 다녀오면서 나름대로 명예군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뗏목탐사·수영종단 등 수십차례 독도 방문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과목 지침서인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를 감행했을 때에도 “대한민국에 대한 재침략이 시작된 것”이라고 분노하며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 등과 함께 경찰청 소속 헬기를 타고 독도를 방문했다.4일 뒤인 18일 오후에는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롯데 전에서 LG의 초청을 받아 시구자로 나섰고 5회말 종료 후 응원석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소리 높여 불렀다.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정씨를 만났다. 그에게 ‘군수님’이라고 호칭하자 “무슨 말씀,1984년 독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예포를 발사하는 등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군수가 아닌 대통령인 셈이다.”며 웃는다. 이어 “우리나라 대통령이 아직까지 독도에 한번도 간 적이 없다.”면서 “우리나라 영토인데 한번쯤 방문해서 주민이나 근무자들에게 격려하고 그러면 얼마나 모양이 좋겠느냐.”고 했다. 그는 또 8년 전쯤 금강산에 갔을 때 북한 안내원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여자 안내원이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가수가 아니냐.”고 먼저 알아보자 옆에 있던 남자 안내원은 “그 노래 부른 지 얼마나 됐습네까. 노래만 불러서 독도를 찾갔시요.”라고 하더라는 것.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선수 정대세도 최근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자주 부른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기분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일본의 만행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를 들어 부인이랑 함께 즐겁게 나들이를 하는데 일본사람이 대뜸 ‘내 아내’라고 주장하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일본의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며 ‘무대응’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기꾼들이 사기를 치려면 얼마나 노력하고 궁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다니요. 이번 일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재침략하려는 술수를 드러낸 첫 단계입니다.” ●역사 등 근거 정부차원 장기 대응책 마련을 ▶그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일본은 역사학자를 정부차원에서 지원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일본이 떠들면 반짝 언론을 통해서 요란을 떨다가 금방 사그라집니다.1954년 무렵 홍순칠 독도수비대장은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을 총칼로 물리쳤고 당시 외무장관은 전투기로 공격하겠다고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일본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도에는 왜 못 갑니까. 앞으로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에게 수학여행을 권장해 독도를 꼭 가슴에 두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 비자를 요청했을 때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12년째 일본 입국비자 거부자로 살고 있습니다.1996년 일본 고위 관료의 망언으로 독도 영유권 논쟁이 촉발된 뒤 SBS와 함께 독도 관련 추석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키로 했지요. 한국인과 일본인의 독도에 관한 인식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를 맡았는데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비자 발급에 결격 사유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참다 못해 저는 대사관으로 찾아가 욕이란 욕을 다 퍼부으며 비자관련 서류를 돌려받아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버렸지요.” ▶‘독도는 우리 땅’ 노래는 어떻게 해서 부르게 됐습니까. “그 노래는 1982년도에 발표가 됐지요. 당시에 ‘유머 1번지’라는 개그 프로에서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포졸복을 입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코믹하게 불렀어요.TV 방영 직후 레코드 제작자가 우리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우리 넷이 약속장소에 갔는데 제작자가 너무 늦게 나왔어요.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는 너무 바빠 먼저 자리를 떴지요. 나중에 제작자가 오더니 기다리던 저를 보고는 ‘혼자라도 취입하자.’고 했어요. 얼마후 ‘젊음의 행진’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담당 PD의 주문으로 큰칼 옆에 차고 이순신장군 복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요.” ●5공화국 땐 ‘독도는 우리땅´ 금지곡 아픔도 ▶방송금지된 적도 있었지요. “5공화국 때였습니다. 왜 금지시켰냐고 따질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당시 실세였던 허문도 문공부 차관이 하루는 저를 부르더군요. 녹차 한 잔을 주면서 자기는 독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애로사항이 뭐냐고 하더라고요. 노래가 금지돼 방송에서 안 틀어준다고 했지요. 다음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게 좋은 노래를 누가 금지를 시켰냐고 오히려 저한테 물어보더군요.” ▶독도는 언제 처음 갔나요. “1984년에 해양경찰청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접안 시설이 없어서 1987년 돌아가신 독도 최초의 주민 최종덕 할아버지가 마중나온 작은 배에 뛰어내려서 독도에 들어갈 수 있었죠. 최 할아버지의 아들, 딸, 그리고 어부들이 7∼8명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미역 등 해산물 선물을 많이 주셨지요. 또 독도 경비대에도 갔는데 예포를 발사하며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현재 뮤직라이프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있으면서 가끔씩 방송출연도 한다. 요즘에는 독도 관련내용이 많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 서울 YMCA에서 열린 ‘만우절 거짓말 대회’에 출전,1등을 차지하는 등의 경력을 쌓으며 개그맨으로 출발했다. 그가 199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디오방송국을 경영하는 친구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으며 6년 후 귀국한 뒤 본격적인 독도사랑에 나섰다.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며 ‘기러기 아빠’로 경기도 탄현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를 두고 개그맨 전유성씨는 “너는 항상 그 자리에서 독도처럼 사는구나.”라고 표현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5년 서울 출생. 본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번지 ▲74년 서라벌고 졸업.KBS-TV ‘젊음의 행진’ 데뷔 ▲75년 TBC-TV ‘살짜기 웃어예’ 등 출연 ▲78년 수도경비사 병장 전역 ▲81년 명지대 무역학과 졸업 ▲83년 KBS 남자가수 신인상 수상(독도는 우리땅) ▲84년 독도 첫방문.KBS 가사대상 동상수상(도요새의 비밀) ▲85년 김치주제가 발표 ▲90년 미국이민. 샌프란시스코 한미라디오 ‘오후의 희망가요’ 5년 진행 ▲2000년 8월 독도수호대와 울릉도∼독도 뗏목탐사 ▲04년 8월 45명의 애국인사와 울릉도∼독도 수영종단 ▲07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이사 ▲08년 현재 동협회 부회장, 독도명예군수. 독도홍보대사. ●주요 히트곡 독도는 우리땅, 도요새의 비밀, 힘내라 힘, 김치 주제가, 화랑관창, 의병대장 곽재우, 계백장군, 광개토대왕 등.
  • [日 독도영유권 명기 파장] ‘대일 강경외교’땐 MB지지 오를까

    이명박 대통령은 대일(對日) 강경외교를 통해 주저앉은 지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이 14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명기와 관련해 단호한 대응을 지시하면서 외부와의 대립을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외교관계의 일반공식이 성립할 지가 일단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독도 문제와 관련해 강경한 자세를 선보임으로써 지지도를 끌어 올린 적이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일 관계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일본 정부가)지난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고 있다. 국수주의자들의 침략적 의도를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며 대일 강경외교를 천명했다.“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동원하기도 했다. 네오내셔널리즘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으나 이런 자세는 지지도 상승에 도움이 됐다. 대일외교에 대한 90% 가까운 찬성 여론 덕에 넉 달 전 20%대였던 지지도는 50%를 육박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 대통령의 경우 대일 강경자세가 지지도 상승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영남 보수진영의 민심이 가라앉은 데다 경기 침체로 수도권 자영업자들이 급속히 이탈한 상황이어서 당시와 같은 지지도 상승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특별행정기관 지방이양으로 기능중복 없애야”

    “특별행정기관 지방이양으로 기능중복 없애야”

    ‘2단계 정부조직 개편작업’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해법을 얻을 수 있는 의미 있는 토론회가 열렸다.9일 서울 한성대 에듀센터에서 한국조직학회 주최, 서울신문 후원으로 ‘이명박 정부 2차 조직개편’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학계 전문가는 물론 정부부처 관계자들도 참여하는 등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학술대회 주요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특행 주무부처 힘겨루기로 난항 사회를 맡은 유홍림 단국대 교수는 “1차 조직개편으로 통합된 부처들이 유기적 결합이 안돼 쇠고기 파동으로 대표되는 현상까지 이어진 것”이라면서 “중앙·지방 간, 정부·민간 간 기능 조정인 2차 조직개편은 이해관계자가 많은 만큼 갈등을 줄이고, 설득을 보다 치밀하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2차 개편작업의 핵심 중 하나는 특별지방행정기관(이하 특행)에 대한 지방이양이다. 개편작업을 주도하는 행정안전부는 당초 지난달까지 지방이양계획을 확정할 예정이었다.▲중소기업 ▲노동행정 ▲국토관리 ▲해양항만 ▲지방환경 ▲식약관리 ▲보훈 ▲산림 등 8개 분야가 우선 대상이다. 하지만 특행 지방이양을 주도하는 행안부, 이를 반대하는 특행 주무부처의 ‘힘겨루기’만 지속되면서 난항을 겪고 있다. 임승빈 명지대 교수는 “특행 기능 조정은 국가와 지방의 역할 재정립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과제”라면서 “지방의 역량에 따라 기능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자체와 특행의 유사·중복 기능은 인력·예산의 낭비를 불러올 수 있다. 예컨대 지방중소기업청의 중소기업 지원서비스의 경우 획일적 기준으로 일부 기업에는 중복 수혜를, 지원이 필요한 기업에는 지원 누락의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하나의 특행이 여러 개의 지자체를 관할하기 때문에 신속한 민원처리가 어렵고, 건설·환경·위생 등 행정의 연계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지자체의 종합행정을 가로막는 요인도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공서비스 독점은 비효율적” 임 교수는 “지자체는 주민불편을 이유로 특행 설치를 요구하고, 특행도 행정력 강화를 명분으로 조직·인력을 늘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면서 “특행 업무는 국가사무라 고객인 지역주민과 지방의회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감사의 사각지대’”라고 분석했다. 현재 특행은 6500여곳으로,20여만명이 근무한다. 이중 우선정비 8개 분야 인력은 1만 1000여명이다. 특행 지방이양은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지속된 해묵은 논쟁에 가깝다. 참여정부 당시에도 공약에 포함됐지만 무산됐다. 다만 충분한 협의 없이 지방이양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창원(한성대 교수) 조직학회장은 “노동행정 분야 고용지원센터의 핵심업무는 고용보험이며, 취업지원도 고용보험과 떼놓을 수 없는 만큼 사회보험 업무의 지방이양이 가능한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면서 “선진국에서도 사례가 없고,2006년 출범한 제주특별자치도도 고용지원센터를 이관 받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업무실적이 악화됐다.”고 평가했다. 중앙부처가 ‘원격 조종’하는 특행 외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속기관들도 도마에 올랐다. 박용성 단국대 교수는 “정부에 의한 공공서비스의 독점은 비효율이라는 문제를 낳았고, 그 해법으로 공공서비스 생산·공급에서 시장의 경쟁과 선택이 강조된다.”면서 “시장에 맡길 기능과 정부가 담당할 기능을 재설정한 뒤 민간이양, 민간위탁(아웃소싱), 지방이양, 책임운영기관화 등 공공서비스의 공급 주체를 다양화하는 방법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유적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에게 돌려줘 애정 갖게 하는 것”

    ‘유적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입을 막고 보존하기보다 활용방안을 세워 시민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경기도 고구려 유적 보존과 정비를 위한 심포지엄’에 나서는 주제발표자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다. 경기도 지역 고구려 유적의 보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이 심포지엄은 10일 경기 수원시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열린다. 경기도의 고구려 유적은 서울시 광진구 및 중랑구와 맞닿은 구리시의 아차산보루와 용마산보루, 망우산보루를 비롯하여 모두 63곳에 이른다. 고양 고봉산성과 의정부 사패산보루, 양주 천보산보루, 파주 덕진산성, 연천 호로고루, 포천 성동리산성 등 경기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475년부터 이 지역을 백제에 다시 내준 551년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세워진 군사시설이다. 미리 공개된 발표문에서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는 대부분 전망 좋은 등산로에 위치하여 지속적이고 심각한 훼손 위험에 직면해 있다.”면서 “하지만 등산로를 폐쇄하여 접근을 막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활용을 전제로 하는 현대적인 유적의 보존 개념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각의 보루를 하나의 역사 유적으로 통합하는 공원 개념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면서 “발굴조사가 끝난 홍련봉1보루는 복원하고 이웃에는 유적전시관을 건립하여 ‘고구려 유적 수학여행 및 역사유적 답사코스’ 등 구체적인 목표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김홍식 명지대 교수는 “임진강 유역의 군사요새인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면서 “특히 뱃길로 세 유적을 이어 고구려가 임진강·한탄강 일대에 군사시설을 세운 이유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허미형·신명종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 연구원은 “양주지역에는 29곳의 고구려 보루가 있지만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고, 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어 접근도 쉽지 않다.”면서 “하지만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는 만큼 안내판을 세우고 등반지도에 유적의 위치를 표시하는 한편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하여 고구려 변방의 군사유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허미형 연구원은 “고구려 유적이 훼손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사유지에 위치하고 있고, 비지정문화재여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보호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시민들이 즐겨찾을 수 있는 활용방안이 마련되어 유적에 애착을 갖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본격적인 예산지원도 뒤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9) 남한산성의 나날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79) 남한산성의 나날들 Ⅲ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1636년 12월17일 청군이 성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음에도 도체찰사 김류는 발포하지 못하게 했다. 행여 청군을 자극하여 화친 시도를 망칠까봐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조선 편이 아니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갈팡질팡할 경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군량 고갈·동상환자 속출로 지구전 불가 포위가 길어지면서 남한산성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고단해졌다. 성을 에워싼 청군의 압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러 가지 물자들이 고갈되고 있었던 점이었다. 남한산성에 몰아친 한파는 혹독했다. 갑자기 소집되어 들어왔던 병사들이 방한(防寒) 장구를 제대로 갖췄을 리 없었다. 그저 빈 가마니 하나를 방한복 삼아 두른 채 밤새도록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이미 12월17일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위 때문에 손과 발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동상에 걸리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군량이 고갈되는 와중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동상에 걸리는 병사가 속출하자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군량을 비롯한 물자가 부족해지자 후유증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왔다. 당장 먹이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전마(戰馬)들이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굶주려 늘어져 버린 말을 타고 무슨 전투를 치를 것인가? 성으로 들어온 지 닷새도 되지 않아 극심한 추위와 물자 부족 때문에 전쟁을 치르기가 도저히 곤란하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었다. 지구전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퍼져가자 결전론(決戰論)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적과의 화친을 성공시키려면 전투를 치러 아군의 힘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었다. 시간은 이미 홍타이지와 청군 편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 어느 정도 타격을 주어야만 청군도 화친을 고려할 것이고, 화친의 조건 또한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청군과의 화의(和議)를 주도하던 최명길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은을 상으로 내걸어 용사들을 모집한 뒤, 그들을 시켜 적을 기습하자고 주장했다. 타격을 주어 곤혹스럽게 만들어야만 청군이 다시 강화를 청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명길은 더 나아가 적정을 세밀하게 정탐한 뒤 광주(廣州)와 이현(梨峴)에 있는 청군 주둔지를 급습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안팎으로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인조는 두 사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기습작전을 벌일 장사들을 빨리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규모 작지만 수성 뒤 첫 승리 거둬 사기↑ 싸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인조는 성을 사수하며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12월18일 인조는 친히 산성을 순시하면서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서장대(西將臺-守禦將臺)까지 돌아본 인조는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조처를 내렸다. 엄동설한에 분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중군(中軍) 이하 장졸 가운데 6품이 안 된 자는 6품 실직(實職)을 주고,5품 이상은 순서대로 승진시키라고 지시했다. 또 성첩 수비군들에게 향후 10년 동안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인조는 이어 행궁(行宮) 주방에서 사용하던 은기(銀器)를 모아 병사들에게 상을 내리는 데 쓰라고 지시했다. 인조는 남문으로 거둥하여 대소 신료들과 장졸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유시문을 내렸다.‘정묘년에는 종사(宗社)와 생령(生靈)들을 위해 임시로 화친을 허락하고 치욕을 감수했다. 지금 오랑캐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므로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 사신을 배척했다가 이 같은 환란을 만났다. 이제 화의는 이미 끊어졌고 오로지 결전이 있을 뿐이다. 이기면 상하가 모두 온전할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상하가 모두 망할 것이다. 저 오랑캐가 외로운 형세로 깊숙이 들어왔으니, 사방의 원병이 이어 달려오고 하늘이 돕는다면 우리는 이길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구하고 자식이 아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싸운다면 병력이 비록 적어도 적을 물리칠 수 있나니, 하물며 지금 우리는 많고 적들은 적음에랴!’ 인조는 유시문에서 결연한 자세를 드러냈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의지는 결연했지만 청군에 대한 인식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적군이 깊숙이 들어온 것은 맞지만 그들의 병력이 조선군보다 적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12월15일 남한산성 부근에 도달했던 마부대 일행의 병력은 4000여명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산성으로 몰려드는 적병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이 증강되고 있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고립된 상황에서 적정(敵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인조가 유시문을 내린 것을 계기로 성안의 분위기는 결전의 방향으로 돌아선 것 같았다. 더욱이 인조가 남문으로 갔을 때 전 참봉(參奉) 심광수(沈光洙)가 ‘최명길을 참수하여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입장이 곤란해진 최명길은 거둥 행렬에 있다가 자리를 피했다. 이날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정예병 50여명을 이끌고 북문을 열고 나아가 적을 기습했다. 청군은 당황했고 조선군은 처음으로 적 6명을 살해했다. 산성으로 들어온 이후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아쉬운 것은 그들의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을 획득하지 못한 점이었다. 당시 청군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져가는 데 결사적이었다. 동료의 시신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두표 군의 승리는 성안의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청의 대군 몰려와도 깜깜한 조정 12월19일부터 23일까지 조선군은 성밖으로 나가 기습작전을 벌이는 등 소소한 전투를 계속 치렀다. 총융사(摠戎使) 구굉(具宏)과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 등이 출전하여 전후로 청군 100여명을 죽였다.23일에는 어영군이 청군의 수급을 가져와 성 안에 높이 매달기도 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청군에 비해 조선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전후의 전투에서 10명 이내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각각 발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수시로 성을 순시하며 장졸들을 위로하고, 전사한 장졸에게 휼전(恤典)을 베풀 것과 그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라고 지시했다.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통해 청군과 싸워 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은 분명 큰 수확이었다. 또 몇 차례 당한 기습에 영향을 받았는지 12월20일과 22일에는 청군 지휘부가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을 보내와서 다시 화친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12월19일 오후, 청군의 좌익(左翼) 주력군 2만 4000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성안의 조선 조정은 이 같은 바깥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산성 주변에 포진한 청군 진영에서 불길이 오르고, 산성 서쪽의 먼 곳에서도 불길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상황을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조선 조정은 여전히 근왕병이 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시백(李時白)은 인조에게 열흘 정도만 버티면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지방에서 근왕병이 올라올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발언이었다.12월19일 인조는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과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에게 납서(蠟書·밀랍으로 감싼 비밀 문서)를 보냈다. 도원수와 여러 지방의 관찰사, 병사(兵使)들에게 연락하여 근왕병을 이끌고 빨리 산성으로 오게 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강화도는 남한산성과 달리 물길을 통해 다른 지역과 통신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한 조처였다. 근왕병은 과연 올 것인가?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근왕병을 학수고대하는 사이 어느덧 병자년이 저물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Metro] 녹사평역서 발명 전시회

    ‘미래의 에디슨’들의 발명 작품과 세계적인 발명가들을 도심 속 지하철 역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는 도시철도공사는 4일부터 6호선 녹사평역 특별전시장에서 제7회 대한민국 청소년 발명 아이디어 경진대회 시상식 및 전시회를 연다. 한국대학발명협회, 한양대, 명지대, 한국폴리텍Ⅰ대학이 주최하고 도시철도공사가 후원한 이번 대회에서 최다 출품과 최다 수상을 한 용인 석성초등학교가 대상, 인천 목향초등학교가 금상을 받는다.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Metro] ‘한강문화포럼’ 공식 출범

    한강의 역사와 문화적인 모습을 되살리고 수변문화 활성화를 모색하는 민간단체 ‘한강문화포럼’이 생긴다. 3일 공식출범하는 한강문화포럼은 학계와 문화계, 시민단체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장파 전문가 68명으로 구성됐다. 초대 대표는 소설가인 박범신 명지대 교수가 맡는다. 서울시가 행정적 지원을 하는 이 포럼은 앞으로 한강의 역사·문화를 토대로 한 축제와 이야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연과 스포츠, 물놀이 등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한강을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사업 등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된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한나라당 새 대표의 실천적 과제

    [김형준 정치비평] 한나라당 새 대표의 실천적 과제

    한나라당 새 대표를 선출할 전당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10년만에 집권 여당으로 탈바꿈한 이후 처음 실시되는 경선인 만큼 많은 국민들이 대회를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로 어수선한 정국을 감안해 조용하게 치르자는 당초 의도와는 달리 선거가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과열 혼탁 양상이 뚜렷하다. 심하게 평가하면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국민은 없고 오직 계파간의 다툼만 부각되면서 실패의 독배를 마시고 있는 듯하다. 국민들에게 희망과 변화, 미래를 보여주지 못한 채 어두운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책을 논의해야 할 때 상호 비방에 매몰되고, 통합과 화합을 추구해야 할 때 분열과 갈등이 난무하고 있다. 준법을 실천해 모범을 보여야 할 때 탈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의원 선거 운동 금지’ 당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파별로 노골적인 줄 세우기가 판을 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나라당이 계파 싸움에 탐닉하고 있는 동안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최근 한국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지지도는 3년 6개월만에 30%대 아래로 떨어졌다. 더구나,20∼30대 젊은 세대층에서는 민주당의 지지도가 한나라당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변화를 거부한 채 오로지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나타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여진다. 한나라당이 집권 여당으로서 성공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과거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기치로 창당한 우리당은 탄핵 역풍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몇 가지 치명적인 실패로 4년도 안 돼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첫째, 청와대는 당권분리라는 어설픈 명분으로 우리당을 철저하게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유력 대선 후보를 내각에 조기 포진시킴으로써 당의 청와대 눈치 보기를 강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대통령과 우리당 지지도가 동반 하락하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나라당 새 대표는 이러한 실패를 답습하지 않도록 당의 위상과 권위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주례 회동이라는 형식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관행에서 탈피해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꼿꼿함을 보여야 한다. 둘째, 우리당은 친노-반노의 계파간 이전투구로 변화를 주도하지 못했다. 한나라당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났지만 친이-친박의 내전은 종식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새 대표의 최대 과제는 계파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대담한 변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정보 기술(IT)의 황제 빌 게이츠는 퇴임식에서 “큰 변화를 놓치고 뛰어난 인재들을 그 기회에 기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새 대표는 빌 게이츠의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여 “한나라당은 변화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각오로 충격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계파와 지역을 뛰어넘어 각계각층의 뛰어난 인재를 영입하고, 당의 운용 체계를 선진화할 필요가 있다. 의원들이 강제적 당론의 구속에서 벗어나 소신에 따라 의정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인 국고보조금이 아니라 당원들이 내는 당비에 의해 당이 운영되도록 하고, 사무총장직 등 주요 당직을 외부 인사에게 개방해 인재 풀을 넓혀야 한다. 셋째, 우리당은 4대 개혁 입법으로 상징되는 이념 과잉에 빠졌다. 이념적으로 아무리 좋은 법안이라도 국민이 필요성을 인정하고 체감하지 못하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한나라당 새 대표는 이념성이 강한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국민과 야당의 목소리를 듣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윈-윈 정치’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거리의 정치가 대의 정치를 대신하는 일이 없도록 국회와 정당을 정상화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枯死)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여 돈대(墩臺)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는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祖大壽)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김류, 인조의 탈출을 건의하다 청군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는데, 구원군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립된 산성에 갇힌 인조와 신료들은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청군 진영을 다녀온 사절들이 들고 온 소식에 조정의 분위기는 극과 극을 달렸다. 능봉수 일행이 ‘이제 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을 논의할 수 없다.’는 소식을 가져오자 조정의 분위기는 다시 침울해졌다. 화친이 물 건너가고 말았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화친이 불가능하다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산성의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1636년 12월17일 도체찰사 김류는 성첩(城堞)을 지킬 병력이 부족하다며 상을 내걸어서라도 병사들을 빨리 모집하라고 촉구했다.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은 도대체 그 많은 병력을 이끌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와 산성 방어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 아닌가? 인조는 답답했다. 급히 두 사람에게 교서(敎書)를 보냈다.‘거가(車駕)가 바야흐로 포위된 성안에 있는데 안으로는 믿을 만한 형세가 없고 밖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는데 화사(和事)는 이미 끝장났다. 경은 속히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구원하라.’ 하지만 김자점 등은 오지 않았다. 초저녁 무렵 김류를 비롯한 중신들이 인조에게 뵙기를 청했다. 김류는 인조에게 이제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날랜 병사들을 뽑아 적을 기습하여 길을 열고, 인조가 옷을 갈아입고 탈출하자는 복안이었다. 인조는 반대했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도 화살 1발 제대로 쏴보지 못한 처지에 탈출 작전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류는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고사를 들고 나왔다. 고종은 1126년 금군(金軍)이 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유린했을 때(정강의 변), 탈출에 성공했던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가리킨다. 당시 포로가 되어 금으로 끌려갔던 휘종(徽宗)의 아홉째 아들이었던 그는 이후 제위에 올라 양자강 남쪽에서 송의 종사를 잇는 데 성공했다. 김류는 고종의 고사를 강조하면서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주화, 척화 논쟁이 다시 가열 인조는 다시 난색을 표했다. 청군의 복병이 곳곳에 깔려 있어 섣불리 시도할 경우 위험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자 장유(張維)가 화친을 다시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군이 ‘왕세자 운운’ 한 것은 그들에게 화친할 의사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다. 화친을 포기하면 고립된 성에 앉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장유도 이제 공공연히 주화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장유의 발언을 계기로 대신들의 분위기가 다시 바뀌는 조짐을 보였다. 김류는 인조에게 종사를 위해 화(禍)를 완화시킬 계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백관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은 이미 다했다. 이제 대책은 경들에게 달렸다.”고 응수했다. 마치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인조가 다시 대책을 묻자 장유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일’이 있다고 했다. 왕세자를 인질로 보내자는 내용이었다. 김류는 ‘인질을 보내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일이고, 설사 세자를 적진에 보내도 심양으로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인조는 한숨을 내쉬며 신하들의 뜻이라면 세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왕세자 입송론(入送論)이 제기된 뒤 홍문관과 시강원(侍講院) 신료들이 인조에게 달려왔다. 이시해(李時諧)는 적은 지구전을 획책하려 들지 결코 화친을 꾀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인조를 만류했다. 그러면서 딴생각하지 말고 성을 지키며 적과 싸울 의지를 다지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은 왕세자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라고 주장한 자를 색출하라고 촉구하며 일제히 통곡했다. 그들은 예로부터 간신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은 화의(和議)에서 비롯되었다며 주화론자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국사를 망칠 것이라고 극언했다. 인조는 홍문관과 시강원 신료들이 물러간 뒤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인조는 울음을 터뜨렸다.‘재덕이 변변치 못한 내가 본래는 잘해 보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인조반정을 언급했다.‘아, 폐조(廢朝) 시절에도 없었던 일을 당하고 말았구나! 나라의 윤기(倫紀)가 사라졌을 때,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반정하여 보위에 오른 지 이제 14년인데 끝내는 견양금수(犬羊禽獸)의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변변치 못한 나 때문에 망극한 일이 벌어졌으니 경들은 어찌할 것인가?’라며 울먹였다. 김류를 비롯한 신료들도 같이 통곡했다. ‘폐조’란 광해군 시절을 가리킨다.‘명에 대한 의리를 외면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쳤다.’는 것을 빌미로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인조였다. 그런데 이제 ‘패륜아’라고 매도한 광해군조차 겪지 않았던 ‘견양금수의 늪’에 자신이 빠지게 될 줄이야? 인조가 무엇보다 뼈아파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감정이 북받친 인조는 척화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연소한 자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과격한 논의로써 끝내 이같은 화란을 부른 것이다. 당시에 만약 저들의 사자를 박절하게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화란의 형세가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시에는 자신도 척화신들의 주장을 정론(正論)으로 여겼으니 누굴 원망하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인조의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인조 “왕세자 보낼 수 있다” 인조는 홍서봉에게 청군 진영에 가서 적장을 만나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전날의 일을 사과하고, 청군이 조금 물러나면 왕세자라도 보낼 수 있다고 제의하라고 했다.‘왕세자를 보낼 수도 있다.’는 인조 발언을 계기로 화친론이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성구(李聖求)가 인조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입장을 제시했다. 사방의 근왕병을 불러들여 적과 결전을 벌일 태세를 갖춰야 적도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고 말로만 화친을 청할 경우 오욕이 있을 뿐이니 군신 상하가 결사항전의 태세부터 갖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상헌 또한 결전이 없이는 화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동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고립무원에 군량마저 고갈되어 가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청군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었다. 이성구 말대로 이쪽에서 적을 위협할 만한 최소한의 ‘카드’가 있어야만 적을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무장들이 화의에 미혹되어 군량 걱정만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미 부귀가 극에 이른 무장들에게 적진을 함락시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질타했다. 12월17일 조정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적이 성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음에도 조선군은 발포하지 않았다. 어쨌든 화의를 추진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적진에 갔던 홍서봉 일행이 돌아와 화의를 추진하기가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청군이 증강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인조는 그만하라고 역정을 냈다.“방바닥이 너무 차서 늙고 병든 자들이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인조의 짜증처럼 산성의 하루하루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국회 한달째 공전

    18대 국회가 공식 임기를 개시한 지 30일로 한달째를 맞는다. 한나라당은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 발효를 계기로 국회를 조속히 정상화하자며 단독 개원을 시사하는 등 야권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통합민주당 등 야권은 고시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장외 투쟁을 가속화하고 있어 정국 경색이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날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가 통합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와의 회동에서 국회 정상화를 위한 14개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양당의 전격적인 합의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도 여당은 야당에 등원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야당은 원구성 협상 등에서 실리를 얻은 뒤 국회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18대 국회가 첫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다음달 4일까지 개원이 안 될 경우 국회 사상 최초로 첫 임시회 기간에 의장단이 선출되지 못하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국회는 국회법(5조 및 15조)에 따라 임기 개시 후 7일 내에 첫 회의를 열어 국회의장단을 뽑아야 한다. 국회의장에는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이 내정됐으나 야권의 등원 거부로 공식 선출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다음달 17일 제헌절 60주년 기념식 행사를 위해 100여개국 귀빈에게 초청장을 발송해야 하지만 국회의장이 선출되지 않아 초청장 발송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장기 공전함에 따라 각종 폐해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7월 시행을 목표로 국회에 제출한 고유가 극복 민생종합대책을 비롯해 각종 경제살리기 법안 처리 지연이 불가피한 실정이다.18대 개원 이후 지난 25일까지 총 88개 의안이 발의됐으나 상임위원회 회부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문 못여는 국회… 폐해 속출 여기에다 유엔 레바논 평화유지군의 파견 시한이 다음날 18일로 끝나 국회가 파견 연장 동의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평화유지군 주둔 자체가 위헌이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29일 오전 원혜영 원내대표와 국회 농성장에서 한시간 반 정도 얘기했다.”며 “이번주 초에 다시 만나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기로 했다. 임시국회 회기 마지막날인 다음달 4일까지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며 여야 합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원혜영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국회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명분과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등원한다. 등원은 여당의 결단에 달렸다.”고 한나라당을 압박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는 조기 등원론에 여전히 부정적이다. 지난 27일 안민석 의원이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폭행을 당한 데 이어 28일에는 강기정 의원이 경찰에 곤봉으로 허리 부위를 얻어 맞고 김재균·이용섭 의원도 소화기 분말 세례를 받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차영 대변인은 이날 어청수 경찰청장의 사퇴와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전문가들 “여야 지혜 모아야” 정치학자와 전문가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대타협을 통해 국회 정상화를 조속히 이뤄낼 것을 주문한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여당은 야당에 명분을 줄 부분을 세세하게 고민해야 하고, 야당은 적당한 명분이 있으면 받아야 한다.”며 양측의 성의 있는 협상을 촉구했다. 김 교수는 “국회 개원 여부는 한나라당이 키를 쥐고 있는 만큼 대폭 양보해야 한다.”며 “가축전염병 예방법과 관련해 자유투표를 한다고 했으면 진정한 자유투표가 이뤄지도록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 컨설턴트업체인 폴컴의 윤경주 대표는 “한·미 쇠고기 수입 추가협상 이후에 장관고시, 관보게재 과정에서 정부와 여당이 전략·전술적으로 무리수를 둔 측면이 있다.”며 “야당과의 협상과정에서 법사위원장을 양보하는 등의 성의를 보이면 개원 협상의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제안했다. 김윤재 변호사도 “청와대가 국회 개원의 키의 많은 부분을 쥐고 있는 만큼 야당에 해줄 수 있는 몫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종락 홍희경 한상우기자 jrlee@seoul.co.kr
  • [사고] 오피니언 필진 일부 바뀝니다

    [사고] 오피니언 필진 일부 바뀝니다

    서울신문 오피니언면의 ‘특별칼럼’과 ‘열린세상’의 필진 일부가 7월1일부터 바뀝니다. 남북문제 전문가로 통일부장관을 지낸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통일산책’이라는 고정칼럼을 신설합니다. 열린세상에는 새로 12명의 필진이 합류해 모두 23명이 앞으로 6개월 동안 분야별로 날카로운 진단과 해법을 내놓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바랍니다. ●기명칼럼(무순) 박재규(경남대 총장) 신경림(시인) 정종욱(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김형준(명지대 교수) ●열린세상 정종섭(서울대 교수) 이필상(고려대 교수) 방은령(한서대 교수) 이해영(한신대 교수) 이원덕(국민대 교수) 강미은(숙명여대 교수) 신은종(단국대 교수) 이성형(중남미전문가) 김정식(연세대 교수) 강지원(변호사) 이준한(인천대 교수) 금태섭(변호사) 하승수(제주대 교수) 황기돈(한국고용정보원 연구개발본부장) 김혜영(중앙대 교수) 현진권(아주대 교수) 박성민(민기획 대표) 최창일(시인) 박준철(한성대 교수) 김충현(서강대 영상대학원장) 윤재근(문학평론가) 이도흠(한양대 교수) 김무곤(동국대 교수)
  • [Local] 부산 남항대교 새달 9일 개통

    부산시는 25일 서구 암남동과 영도구 영선동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이 1.9㎞, 왕복 6차로의 남항대교 건설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7월9일 개통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착공 10년여 만이다. 남항대교 건설에는 시비 2518억원과 국비 1032억원 등 총 3550억원이 투입됐다. 남항대교는 명지대교∼남항대교∼북항대교∼광안대교∼경부고속도로로 이어지는 부산 해안 순환도로의 한 축이다. 시는 남항대교가 개통되면 강서구 녹산국가산업단지 등 서부산권에서 영도구를 오가는 거리가 종전보다 8㎞가량 단축되고 운행시간도 30분 정도 줄어든다고 밝혔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은데다 주요 길목을 청군이 모두 봉쇄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강화도 행을 시도하다가 청군에게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 강화도 행을 계속 고집할 경우, 산성을 지키는 장졸들의 사기가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12월15일, 도체찰사 김류가 인조에게 계속 강화 행을 채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산성에 모여든 병사들이 수성(守城)을 거부하며 술렁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제 죽으나 사나 남한산성에 운명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인조, 군량 부족한데 지구전 계획 지시 당시 남한산성에 있던 병력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최소 1만 2000에서 최대 1만 8000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비교적 훈련이 잘 된 어영군(御營軍)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광주(廣州), 수원, 여주, 양주(楊州) 등지에서 끌어 모은 병력이었다. 조선 침략에 동원된 청군 병력은 대략 12만 정도로 보고 있다. 조선군은 이제 외로운 성에서 거의 10배 가까이나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할 운명이었다. 비록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들이 많았지만, 농성 초기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이 컸던 와중에도 산성의 형세가 몹시 험준하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험준한 산성을 굳게 지키며 근왕병을 기다리다가 여의치 않을 경우 성을 등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자.’라는 주장도 분명히 있었다. 12월15일, 인조는 장수들에게 방어할 지역을 할당했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에게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호위대장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북성(北城)을,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에게 서성(西城)을 맡겼다. 문제는 군량이었다.1637년 1월8일, 관량사(管粮使, 군량 담당관) 나만갑(羅萬甲)은 ‘애초 군량이 6000 석 정도였는데 이제 2800여 석이 남았다.’고 보고했다. 인조가 입성한 다음날인 12월15일 아침부터 계산하면 24일 동안 대략 3200여 석의 양곡이 소비되었다. 하루 평균 130석가량의 군량이 없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12월15일을 기점으로 따져볼 때,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45일 남짓이었던 셈이다. 물론 갑자기 격변이 생겨 청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사태나, 외부로부터 군량을 끌어올 수 있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 경우에 말이다. 군량이 고갈될 날짜를 빤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며 지구전을 펼치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만갑도 인조에게 보고할 때 그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인조는 “군량을 담당하는 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고 지구전을 벌일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군량을 이어댈 방도가 여의치 않았던 나만갑의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 등은 다시 화친을 모색 남한산성에 들어온 직후부터 최명길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산성과 청군 진영을 오가면서 꺼져가던 화의(和議)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부심했다. 무악재 부근에서 최명길을 만났을 때, 마부대 등은 강화를 다시 맺으려거든 왕의 동생과 대신(大臣)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최명길의 보고를 들었을 때, 조정은 종친 능봉수(綾峯守) 칭( )의 품계를 군(君)으로 올려 인조의 아우로 칭하고 형조판서 심집(沈 )에게 대신의 가함(假銜)을 주어 적진으로 보내기로 했다. 임기응변이었다. 하지만 너무 안이하고 위험한 대처 방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심양을 출발하기 전에 내린 유시에서 ‘정묘년에 화약을 맺은 이후 조선이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을 침략 명분으로 내걸었다. 실제 그들은 정묘호란 당시에도 가짜 왕자를 내세워 자신들을 속인 것 때문에 조선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정에서는 ‘가짜 왕제(王弟)’와 ‘가짜 대신’을 보내는 것의 위험성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다. 남한산성 농성 초기, 조정에는 ‘청군은 화약만 맺으면 곧 철수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퍼져가고 있었다.12월16일, 심집 일행은 청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심집은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청군 진영으로 가기 전 “나는 평소 말을 신실하게 해왔으니 오랑캐라고 해서 속일 수는 없다.”고 자신의 ‘소신’을 말한 바 있다. 실제 마부대가 왕제와 대신의 진위(眞僞) 여부를 물었을 때, 겁먹은 심집은 숨기지 못하고 자신과 능봉수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능봉수는 자신이 왕제라고 강변했지만 청군 지휘부는 믿지 않았다. 심집의 실토는 예기치 않은 희생과 부작용을 낳았다. 당시 역관 박난영(朴蘭英)이 청군 진영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마부대는 박난영에게 ‘심집의 말이 맞느냐.’고 물었다. 박난영이 ‘능봉수의 말이 맞다.’고 하자, 뒤에 속은 것을 깨달은 마부대는 박난영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박난영의 비명횡사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광해군 말년부터 조선과 후금을 수없이 오가며 양국의 입장을 조율했던 ‘베테랑’ 역관이자 외교관이었다. ‘가짜 왕제’ 때문에 격분한 청군 지휘부는 심집 일행을 퇴짜놓았다. 놀란 조선 조정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을 청군 진영에 보내 ‘봉림(鳳林)과 인평(麟坪) 두 대군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겠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강화도에 있으니 미처 보낼 수 없다.’고 다시 제의했다. 역시 임기응변 책이었다. 그러자 청군 지휘부가 역공을 취했다. 마부대는 ‘이제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없다.’고 했다.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격이었다. 조선은 봉림대군 등이 강화도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청군 지휘부가 ‘왕자 카드’를 접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소현세자(昭顯世子) 카드’를 빼들었다. 섣부른 임기응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선 조정은 다시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청군은 삼남지역 길목까지 차단하고 왕세자를 보내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는 ‘화친이 곧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낙관적인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더욱이 12월16일 청군은 산성을 포위했고, 일부는 판교(板橋)까지 나아가 삼남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화친이 물 건너간 듯이 보이는 상황에서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자 이런저런 추측과 대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청군 진영을 다녀온 윤휘(尹暉)는 청군의 행태와 관련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의문점을 인조에게 토로했다.“신이 생각건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오랑캐의 성품은 몹시 탐욕스러운데 어찌 된 일인지 피란민들의 물건을 일절 약탈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오는 아주 잘 정돈되어 있고, 전마(戰馬)는 멀리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괴이하고 흉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휘는 다른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화이론(華夷論)의 입장에서 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이론의 눈으로 보면 청군은 당연히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오랑캐답게’ 행동을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대오도 정제되어 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 신료들이 화친을 다시 추진하는 와중에 이경석(李景奭)은 적과 결전을 벌일 것을 강조했다. 상놈 가운데 적의 목 1개를 벤 자는 양반으로 삼고 은 20냥을 주고, 목 10개를 벤 자에게는 첨사(僉使) 벼슬을 주자고 했다. 영의정 김류가 당장 제동을 걸었다.‘고립된 성의 얼마 되지 않는 약졸(弱卒)들로써 싸움을 걸었다가 패할 경우 대책이 없다.’는 이유를 내걸었다. 김류는 이어 최명길, 장유(張維) 등과 함께 인조에게 ‘세자를 적진으로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식을 들은 예조판서 김상헌이 비변사에 나타나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인조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과연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가? 남한산성에서의 사흘은 정신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사회문제 대안까지 제시를”

    “사회문제 대안까지 제시를”

    “언론은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점 분석은 물론이고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회(위원장 최현철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6월 회의가 18일 오전 7시30분 본사 6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군 촛불집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슈를 놓고 언론의 역할을 주문했다. ●조사연구 기능 강화… 심층 점검 기사를 이문형(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위원은 “촛불문화제 및 고유가, 세계금융시장의 불안, 저성장과 같은 경제 문제에 대해 언론이 좌담회를 갖는 등 전문가들의 분석 시리즈물을 통해 사회현상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형준(명지대 정치학과 교수) 위원은 “지난 한달은 ‘촛불 한달’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언론이 촛불문화제에 집중했음에도 불구, 해결책을 제시한 언론사는 한 곳도 없었다.”면서 “80% 이상의 국민이 재협상을 원하는 데도 왜 정부는 재협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분석하고, 재협상이 가능한 조건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마 등 매년 반복되는 시점에 나오는 기사에 대해선 언론사가 미리 준비하고 분석해 심층적인 점검 기사를 독자에게 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주용학(여의도연구소 연구위원) 위원은 “대부분의 언론사가 최근에 일어난 촛불문화제 및 화물연대 파업을 통해 정부와 국민간의 신뢰와 의사소통 부재의 문제점만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면서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정부와 국민이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도 ‘생각´ 반영을 권성자(책을만들며크는학교 대표) 위원은 “독자로 하여금 참여를 이끌 수 있는 정보기사는 해설기사와는 별도로 구별이 가능하도록 엠블럼을 만들어 지면에 넣어 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최현철 위원장은 “스트레이트 기사나 단순사건 기사의 경우 대부분 각 언론사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고 동일한 경향이 있다.”면서 “스트레이트 기사에도 언론사의 입장이나 기자의 생각이 드러나도록 차별화 전략을 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언론사가 조사연구기능을 강화해 예측 가능한 기사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차별화의 한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강석진 편집국장은 조사연구기능을 강화해 심층적으로 분석기사를 준비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반영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신문발전위원회 후원으로 열린 이날 회의에는 최 위원장과 이문형·김형준·주용학·권성자 위원, 서울신문에서 노진환 사장·강석진 국장·황성기 편집국 부국장·박정현 사회부장·박현갑 기획탐사부장·이도운 정치부 차장 등이 참석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6) 남한산성과 강화도

    [병자호란 다시 읽기] (76) 남한산성과 강화도

    남한산성은 천험(天險)의 요새였다. 성곽의 가장 높은 누대에서는 도성과 살곶이(箭串場)가 한눈에 들어왔다. 더욱이 인조가 들어갔던 무렵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기온이 몹시 떨어져 성으로 오르는 길이 온통 얼어 붙었다. 청군의 선봉이 제 아무리 ‘강철 같은 기마대(鐵騎)’였다고 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는 험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황망한 와중에 갑작스레 들어온 터라 수비할 군병도, 그들을 먹일 군량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고립된 성 위험” 강화도행 주장 나와 일부 신료들이 남한산성에 들어오자마자 강화도로 가자고 주장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산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김류와 이식(李植)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김류는 고립된 성에 계속 있으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강화도 행을 강조했고, 이식은 오히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 적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의견 대립은 서로에 대한 인신 공격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식이 먼저 “김류는 문재(文才)로 발신한 사람이라 일을 도모하는 것이 시원찮다.”며 자극했다. 김류는 발끈했다.“이식은 서생(書生)이라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다.”며 맞받아 쳤다. 강화도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를 앗아가 버린 장수들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장령(掌令) 이후원(李厚源)은 도원수 김자점을 군율로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적과 접전 한 번 제대로 시도하지 않고, 보고조차 소홀히 하는 바람에 적이 서울로 직행할 수 있었다고 비난했다. 사헌부 신료들은 적을 막는데 실패한 부원수 신경원(申景瑗), 평안병사 유림(柳琳),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 등과 도원수 김자점을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인조는 김자점 등을 군율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 적과의 싸움을 회피하는 장수는 엄벌하겠다던 엄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성을 겨우 빠져 나와 어렵사리 산성으로 들어 왔던 후유증 때문인지 인조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인조는 김류 등의 강청에 못 이겨 15일 새벽, 강화도로 가기 위해 산성을 나섰다가 발뒤꿈치에 동상까지 걸렸다. 수행하던 신료들은 부랴부랴 인조를 털방석으로 감싼 채 남문을 통해 성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남문에서 교자를 타고 행궁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인조가 동상이 걸린 이후, 강화도로 가자는 주장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고립된 산성에 대한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일부 신료들은 세자라도 강화도로 보내야 한다고 했고, 일부는 강화도 대신 남쪽으로 내려가자고 주장했다. 채유후(蔡裕後)는 국가의 회복은 오로지 영남과 호남에 달려 있다며 동궁(東宮)을 양남으로 보내라고 촉구했다. 동궁이 내려가면 군사를 모으는 것은 물론 사대부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며 호남으로 가는 것이 상책, 영남으로 가는 것이 중책, 강화도로 가는 것이 하책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청군의 의도를 오판하다 최명길이 마부대를 만난 뒤 올린 장계가 산성에 도착하자 조정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부대는 최명길에게 자신들이 깊숙이 들어온 이유를 조선과 화친을 다시 맺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김류는 최명길의 장계를 토대로 상황이 정묘호란 당시와 비슷하고 ‘청군의 의도는 서약을 다시 맺는데 있는 것 같다.’며 낙관론을 폈다. 김신국(金藎國)은 “그들 뒤에 후군(後軍)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로지 화친에 뜻을 두고 있는 것 같다.”며 김류의 의견에 동조했다. 마치 화약을 맺기 위해 선봉대만 내려온 것처럼 가장하려 했던 마부대의 기만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최명길이 마부대에 속은 것 같다며 김류 등의 낙관론에 대해 찜찜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주변에서 ‘화친’을 운운하자 청군의 사자(使者)가 올 경우, 그들을 산성 안으로 들일지의 여부를 물었다. 사자 이야기가 나오자 이경증(李景曾)은 “청사(請使) 접대에 필요한 소는 구할 수 있는데 술을 구할 수 없어 고민”이라며 그들과의 화친을 아예 기정사실로 여기는 발언을 했다. 청군의 침략 의도와 관련하여 이성구(李聖求)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명을 공격하려는 홍타이지의 의도가 바뀌지 않았다면 청군이 평양 이남까지 내려올 이유가 없다.’며 낙관론을 경계했다. 1636년 12월15일 저녁, 청군의 사자가 산성 근처에 나타났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적이 코앞에 와 있다는 현실을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김류는 인조에게 강화도로 피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이성구도, 신료들을 산성에 두고 대장 10여인을 거느리고 빠져 나가면 남양(南陽)에서 배를 탈 수 있다고 인조에게 강화도로 가라고 채근했다. 인조의 표정은 어두웠다.“경들은 모두 어진 사대부들인데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니 개탄스럽다.”며 탄식을 내뱉었다. 잠시 후 신경진이 새로운 정보를 들고 나타났다. 청군이 이미 한강을 건너와 봉은사(奉恩寺) 근처에 진을 쳤다는 소식이었다. 인조는 갑자기 ‘국운이 이미 다했으니 치욕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올바르게 죽고 싶다.’며 결연한 자세를 보였다. 어느 순간 강화도로 가자는 논의는 다시 가라앉고 있었다. ●김경징의 ‘멸공봉사(滅公奉私)’ 신료들 가운데는, 영의정이자 도체찰사(都體察使)인 김류가 산성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강화도 행을 계속 고집하는 것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 12월15일, 사간 김홍욱(金弘郁), 주서 이도장(李道長) 등은 ‘김류는 가족들이 모두 강화도에 있기 때문에 대가를 옮기자고 청하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12월13일, 강화도를 책임질 검찰사(檢察使)로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추천되었을 때 인조는 김류에게 의견을 물었다. 김류는 자신의 아들이 직책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인조는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했다.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인조는 인조반정의 원훈(元勳)이자 영의정인 김류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조의 이 결정은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무렵, 도성 안팎의 모든 사람들은 강화도로 들어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강화도로 가려면 양화진 등지에서 배를 타고 김포까지 간 다음 다시 배를 타고 갑곶 등지로 상륙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강이 얼어 있던 상황에서 배를 이용하여 김포로 가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자연히 육로를 통해 김포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문제는 이들을 강화도로 실어 나를 배편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김경징은 검찰사로서 배를 차출하고 그 배에 누구를 먼저 태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거머쥐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이 생사여탈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김경징은 도성을 출발할 때부터 철저히 ‘멸공봉사(滅公奉私)’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인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자신의 모친과 처를 옥교(屋轎)에 태우고 집안의 재물을 운반하기 위해 인부들을 동원했다.‘양구기사(陽九記事)’등에는 김경징 집안의 가솔과 50개나 되는 재물 궤짝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도의 마부들이 거의 모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경징은, 말을 타고 가던 자기 집안의 비녀(婢女)가 말에서 떨어지자 노상에서 마부에게 매타작을 퍼부었다. 강화도로 가는 배에도 당연히 가족들을 비롯하여 자신과 친한 사람들을 먼저 태웠다. 왕세자빈조차 우선순위에서 밀려 나루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하물며 일반 사족이나 백성들은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김경징은 강화도의 방어와 그 섬으로 들어간 왕실 인척들의 안위를 책임질 그릇이 아니었다. 만몽한(滿蒙漢)의 정예들을 끌어 모아 침략해 온 청군 앞에서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당국자들 가운데는 김자점이나 김경징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비극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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