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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입 정시모집 지원 전략] 우리대학 이렇게 뽑아요

    ■ 경희대학교 수능 비중을 확대했다.서울캠퍼스는 ‘가’군 모집인원의 50%를 수능만으로 우선선발하고,나머지 50%는 수능(70%)과 학생부(30%)로 선발한다. ‘나’군은 모집인원 전체를 수능만으로 선발한다. 국제캠퍼스도 서울캠퍼스처럼 ‘나’군에서 수능만으로 50%를 우선선발하고,나머지는 수능과 학생부로 선발하며,‘다’군은 수능만으로 선발한다. 수능 우선선발 외에 일반선발에서는 학생부와 수능으로 선발하고,논술고사를 실시하지 않는다.또 계열별 수능영역점수를 차등 반영한다. 인문계는 언어와 외국어를 각각 30%씩 반영하고,자연계는 수리와 탐구를 각각 30%씩 반영하며 나머지 두개 영역은 25%내지 15% 비율로 차등한다.수능반영 방법은 본교 변환표준점수로 반영한다. 서울캠퍼스의 경우 자율전공학과(인문,자연)를 모집하며, 글로벌리더전공,글로벌비즈니스전공,컨버전스 사이언스전공을 이수할 수 있다. 국제캠퍼스의 경우 자율전공학부를 모집한다.서울캠퍼스와 국제캠퍼스간의 전과가 허용되고,캠퍼스 내에서 학과간 전과도 재학 중 3차례의 기회가 주어진다. ■ 고려대학교 ‘가’군 일반전형에서는 우선선발과 일반선발로 나눠 진행한다. 우선선발에서는 수능을 100% 반영하여 논술에 응시하기 전 미리 일반전형 모집인원의 50%를 선발한다. 일반선발에서는 수능을 50% 반영하며 학생부는 계열에 따라 40~50%를 반영하고 인문계는 논술이 10% 반영된다. 수능에서 언어,수리,외국어영역은 표준점수를,탐구영역은 변환점수를 반영하여 합산한다.자연계는 논술을 보지않으나 의과대학은 논술 대신 면접을 본다.제2외국어·한문 영역은 필수선택은 아니나 응시했을 경우 탐구영역 한 과목을 대체할 수 있다. 일반선발에서 학생부의 교과성적은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교과에서 학년별로 학기·이수단위 구분 없이 석차등급 상위 1개 과목씩을 반영한다. 비교과성적은 봉사활동과 출결상황,수상경력,특별활동의 내용을 반영한다. 세종캠퍼스에서 4학기를 이수하고,안암캠퍼스의 다른 학과로 전공(제1전공)을 변경하여 학위를 이수하는 제도인 ‘캠퍼스 간 소속변경 제도’도 있다. ■ 국민대학교 ‘가’군 일반학생의 경우 수능(60%)+학생부(40%)로 일괄합산하여 선발하며,수능과 학생부의 실질 반영비율은 수능이 66.67%,학생부는 33.33%이다. ‘가·나·다’군 예체능계는 수능,학생부,실기고사 성적을 통하여 선발(일부 다단계)하고 ‘다’군 조형대학은 수능(100%)으로만 합격자를 선발한다. 수능성적 반영방법은 백분위 성적을 점수화하여 반영하고,모집단위별 반영영역은 인문계(경상·경영대학 제외)의 경우 언어(24%)+수리나형(21%)+사회탐구(22%)+외국어(33%)이며,자연계는 언어(21%)+수리가형(33%)+과탐(22%)+외국어(24%)를 각각 반영한다. 특이할 만한 사항으로 경상·경영대학의 수능반영 영역을 인문계 학생과 자연계 학생이 모두 지원할 수 있도록 변경하여,수리영역은 ‘가형(21%) 또는 나형(21%)’을,탐구영역은 ‘사회탐구(22%) 또는 과학탐구(22%)’를 본인이 선택(응시)한 과목에 따라 반영되도록 하였다. 학생부성적은 교과성적(90%)과 출결성적(10%)만을 반영한다. ■ 서강대학교 수능 응시영역을 기준으로 인문사회계열은 언어,수리(나형),외국어,사탐(3과목) 영역에 응시해야 지원가능하며 자연계열은 언어,수리(가형),외국어,과탐(3과목) 영역에 응시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전형방법은 다단계 전형으로 모든 지원자를 대상으로 1유형에서 수능 4개 지정영역 합산성적 순으로 모집단위별 모집인원의 50% 내외를 우선 선발한다. 1유형에 선발되지 않은 모든 지원자에게 2유형을 적용하여 나머지 약 50%의 모집인원을 뽑는데,수능 4개 지정영역 성적(70%)+학생부(30%)를 합산한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탐구영역은 성적이 좋은 3과목만 반영하며,인문사회계열 지원자는 제2외국어·한문 영역도 사탐영역의 한 과목으로 인정하여 선택 반영한다. 수능반영방법은 언어,수리,외국어영역은 표준점수를 기준으로,탐구영역은 백분위 자체변환점수를 기준으로 가중치를 부여한다. 모집단위별로 수능반영 영역별 가중치를 달리 적용하므로 해당 모집단위의 영역별 가중치를 꼼꼼하게 살펴 자신에게 유리한 모집단위에 지원하는 게 좋다. ■ 단국대학교 인문·자연계열은 모집단위별 모집인원의 20%를 수능 100%로 선발하는 수능 우선선발을 실시하며,나머지는 수능 50%,학생부 50%로 일괄합산하여 선발한다.수능성적은 백분위를 활용하며,수리 가형 선택 시 공연영화학부,인문계열,체육교육과는 3%,건축학과는 5%의 가산점이 주어진다. 학생부는 인문·예체능 계열은 국어,수학,영어,사회교과를,자연계열은 국어,수학,영어,과학교과 중 이수한 전과목을 반영하며 석차등급을 활용한다. 천안캠퍼스는 ‘나·다’군 분할모집을 실시하며 ‘나’군에서 인문·자연계열은 학생부 20%,수능 80%를,치의예과는 학생부 10%,수능 90%를 반영한다. ‘다’군에서 인문·자연계열 및 지역할당제 전형은 학생부 30%,수능 70%를,의예과는 학생부 10%,수능 90%를 반영한다. 수능성적은 표준점수를 활용하는 의·치의예과를 제외하고는 모두 백분위를 활용한다. 인문·예체능계열 지원자가 수리 가형 선택 시 5%의 가산점을,의·치의예과 지원자가 과학Ⅱ 선택 시 5%의 가산점을 부여한다. ■ 삼육대학교 신설된 ‘기초의약과학과’에서 기존 약학과의 모집정원인 30명을 모집하여 의·치학전문대학원 및 약학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교육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모집인원 30명 중 12명을 교과우수자(학생부 70%+수능 20%+면접 10%)로 우선 선발하며,18명은 수능우수자(수능 90%+면접 10%)로 선발한다. 최초합격 등록마감 후 우선선발 인원 중 미등록 인원은 수능우수자 기준으로 충원한다. 수학능력시험은 언어 20%,수리 30%,외국어(영어) 30%,탐구(사회·과학) 20%를 반영하며,학교생활기록부도 수학능력시험 반영영역과 동일한 교과를 반영한다. 기초의약과학과,신학과,예체능계 학과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수학능력시험 50%,학교생활기록부 40%,면접시험 10%를 반영하여 최종 선발한다. 수학능력시험은 백분위점수를 사용하여 인문·사회 계열의 모집단위는 주로 ‘언어,사회탐구,외국어’의 영역을 반영하며,자연계열의 모집단위는 ‘수리,사회·과학탐구,외국어’의 영역을 반영한다. ■ 동덕여자대학교 ‘나’,‘다’군 분할 모집한다.전형요소 및 전형요소별 반영비율은 나,다군 동일하다.인문·자연계열은 수능성적과 학생부 성적을,예체능계열은 실기고사 성적이 포함된다. 인문·자연계열 큐레이터과는 학생부 30%,수능 70%를 반영한다. 예체능계열 회화과,디지털공예과,디자인학부는 학생부 20%,수능 40%,실기 40%를,피아노,성악과,관현악과,무용과,방송연예과,실용음악과,모델과는 학생부 20%,수능 20%,실기 60%를 반영한다. 체육학과는 학생부 20%,수능 50%,실기 30%로 학생을 선발한다.농어촌,전문계 특별전형은 인문·자연계열만 모집한다.학생부 30%,수능 70%를 반영한다. 수능은 본교 반영영역의 백분위 성적을 활용해 반영한다.학교생활기록부 성적은 교과 성적 90%(석차등급 활용),출석성적 10%를 반영한다. 학생부 반영은 인문,자연,예체능계열 모두 국어교과,영어교과를 필수 반영하며 사회,수학,과학교과 중에서 성적이 좋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 명지대학교 전형방법은 일반전형 ‘가’군에서 음악학부만 75명을 학생부 및 수능 각 20%와 실기 60%로 선발한다. ‘나’군의 경우 일반전형에서 808명을 학생부 25%에 수능 75%로 뽑는다.‘다’군 280명은 수능으로만 선발한다. ‘나’군의 농어촌학생(39명) 및 전문계고교(47명) 특별전형은 학생부 12.5%+수능 75%+면접 12.5%로 반영한다. 수능은 가·나·다군에서 동일하게 준점수를 기준으로 언어·수리(가)·수리(나) 영역 중 표준점수가 높은 1개 영역을 자동 반영하고 외국어(영어)영역은 필수 반영하며 사회탐구·과학탐구·직업탐구 영역 중 수능 표준점수가 높은 2개 과목을 자동 반영한다. 학생부는 학년별로 1학년 25%,2학년 30%,3학년 45%를 반영한다.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의 과목별 석차등급을 기준으로 가·나군에 최고 200점,최저 160점을 반영한다. 수시2-1,수시2-2 모집전형 미등록으로 발생한 결원 또는 동점자 합격으로 인한 초과 모집인원은 해당 인원만큼 다군에서 가감하여 선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광운대학교 ‘가’군(일반학생 전형)은 수능 100%로 선발한다. ‘다’군(일반학생,농어촌학생,전문계고교출신자 전형)은 수능 70%와 학생부 30%를 합산하여 선발한다. 수능은 언어,수리,외국어,탐구(상위2과목) 영역의 4개 영역을 반영한다. 영역별 반영비율은 모집단위별로 차이가 있다.수능 반영지표는 언어,수리,외국어 영역은 표준점수,탐구영역은 표준점수(90%)와 백분위(10%)를 함께 사용한다. 가산점은 자연계열 모집단위 중 전자정보통신공학군,컴퓨터공학군,전기전자재료제어공학군,화학공학과,환경공학과는 수리 ‘가’형 응시자와 과학탐구 응시자에게 산출점수의 10%를 각각 부여하며,자연과학군은 수리 ‘가’형 응시자에게만 산출점수의 10%를 부여한다. 건축학과(5년제)와 건축공학과는 가산점을 부여하지 않는다. 일반학생 전형은 과학탐구와 사회탐구 응시자만 지원이 가능하다. 농어촌학생,전문계고교출신자 전형은 모든 모집단위에서 직업탐구 응시자도 지원이 가능하다. ■ 상명대학교 서울에서는 정원내(일반전형,예체능전형)와 정원외(농어촌학생,전문계고교졸업자)로 신입생을 선발한다. 정원내의 일반전형에서 50%의 학생은 수능점수만으로 선발하며,나머지 50%는 수능과 학생부교과를 반영하여 선발한다.인문계의 경우 수리영역 반영비율이 30%,자연계의 경우 언어영역 반영비율이 30%인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번 입시의 특징이라면 과거 대부분 학부제로 신입생을 선발하던 방식을 학과제(학과단위) 선발로 변경한 점이다. 특히,서울캠퍼스는 인문사회과학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의 경우 기존 학부를 폐지하고 대부분을 학과선발로 전형방식을 바꾸었다. 또 저작권이 중요시되고 있는 만큼 법적·기술적 전문가 양성을 위해 저작권보호학과를 개설하였다.정원은 25명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국제전문가 육성을 위해 경영 및 경제통상학부를 경영대학으로 승격했다. 정원은 215명이다.천안캠퍼스에서는 현실적으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어·한국어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영어 통·번역학 전공을 개설하였다. ■ 동국대학교 ‘가’군은 수능만 100% 반영하여 선발한다. 단,연극학부(실기)는 수능 30%,학생부 30%,실기를 40% 반영한다.‘나’군의 경우는 사범대학 및 예체능계열 학과를 제외한 전 모집단위에서 수능 60%,학생부 40%를 반영하여 선발한다. 수능은 인문·자연계 모두 언어,수리,외국어,탐구 등 4개 영역을 반영한다. 탐구영역은 3개 과목을 반영하며 제2외국어·한문의 경우는 탐구영역 1과목과 대체가 가능하다. 학생부는 인문계의 경우 국어 영어 수학 사회,자연계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 4개 교과를 각각 반영한다.과목은 학년별로 교과당 1과목씩만 반영해 총 12과목의 성적을 반영하게 된다. 체육교육과,문예창작학과에서는 일반면접을 실시하고,체육교육과를 제외한 사범대학은 교직적성 면접을 반영한다.교직적성을 테스트하는 교직적성면접은 면접카드를 토대로 인성,사회성을 평가하는 부분이 30%,교직적성을 평가하는 부분이 70% 반영된다.면접방식은 다수의 문제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답변하는 구술고사 형식으로 진행된다. ■ 덕성여자대학교 일반학생전형,수능 100% 전형과 농어촌학생 및 전문계(실업계)고교 출신자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일반학생 및 수능 100% 전형의 경우 가군에서 사회과학대학,자연과학대학,생활체육학과,정보공학대학을 모집하고,‘나’군에서 생활체육학과를 제외한 전 모집단위를 모집한다. 농어촌학생 및 전문계 고교출신자 특별전형은 ‘나’군에서 선발한다. ‘나’군 일반학생의 Pre-Pharm-Med 전공은 2009학년도 신설 전공이며,약학·의치학 계열이 아닌 이학계열로서 약학대학 및 의학,치의학 전문대학원 진학에 유리한 교육과정으로 편성되어 2학년 수료 후부터 우리 대학 또는 타대학 약학대학에 지원하거나 4학년 졸업 후 의학,치의학전문대학원에 지원이 가능하다. 수능 성적은 백분위 성적을 반영하며,수능 성적 가산점은 자연공학계열의 경우 수리 가형에 대하여 지원자가 취득한 백분위 점수의 10%를 부여한다. 또한 학생부는 비교과를 반영하지 않고,교과 성적으로만 100%를 반영한다.
  • [대입 정시모집 지원 전략] 수험생 지원전략 어떻게

    [대입 정시모집 지원 전략] 수험생 지원전략 어떻게

    2009학년도 대입 정시모집이 18일 원서접수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다.지난해보다 수능 영향력은 커진 반면 정시모집 비중은 줄어 치밀한 지원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과거 인기있던 법대와 약대 모집이 줄거나 없어진 반면 새로 생긴 자유전공학부나 신설 학과 등에는 수험생들이 몰릴 전망이다.이번 정시모집의 골격과 수험생 지원전략을 대학별 입학요강과 함께 안내한다.소개하는 대학은 가나다 순이다. 2009학년도 대입 정시모집 인원은 예년보다 다소 줄었다.2008학년도 17만 7390명(46.9%)에서 1만 3394명이 준 16만 3996명(43.3%)을 모집한다.일반전형으로 91%를,특별전형으로 나머지 9%를 선발한다.수시에서 못뽑은 인원은 정시에서 그만큼 선발한다.가·나·다군 중 어디에 추가되는지 살펴야 한다.로스쿨 등 전문대학원 도입으로 전통적으로 인기있던 법학과 의예과 등의 학과에서 모집인원이 크게 줄거나 아예 선발하지 않는 등 지원환경이 바뀐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자유전공학부나 생명과학 화학 미생물 생물 관련 학과가 인기학과로 부상할 수 있다. 전형요소별로는 논술 비중은 약해지고 수능비중은 높아졌다.논술고사를 실시하는 대학은 지난해 45곳에서 올해 13곳으로 뚝 떨어졌다.숙명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은 전 계열에서 모두 논술을 폐지했다.고려대 연세대 등은 자연계열 논술을 없애고 인문계열에서만 실시한다.학생부의 실질반영비율도 많이 낮아졌다. 반면 표준점수,백분위 등 점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하는 수능 비중은 더 높아졌다.수능성적이 우수하게 나온 학생들이라면 수능 중심 전형에 도전해볼 만하다. 수험생들은 지원하려는 대학이 백분위나 표준점수 등 어떤 점수를 반영하는지,가산점은 어떤 영역에 얼마나 부여하는지,영역별 반영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차근차근 따져봐야 한다.자칫 하다간 같은 표준점수를 받고서도 1~2점으로 희비가 엇갈릴 가능성이 많아서다. 올 정시모집에서 표준점수는 65개 대학,백분위는 121개 대학에서 활용한다.이 가운데 국민대 이화여대 홍익대 등 102개 대학은 백분위만을 활용하고 경희대 명지대 한양대 등 45개 대학은 표준점수만을 활용한다.경북대 서울대 포항공대 등 22개 대학은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함께 활용한다.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함께 활용하는 대학들은 대부분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은 표준점수로,사회 과학 직업탐구 영역과 제2외국어 한문영역은 백분위나 백분위를 활용한 변환 표준점수를 이용한다.이밖에 광주대 영산대 한국국제대 등 33개 대학은 등급을 여전히 활용한다. 그런데 같은 표준점수라 하더라도 영역별로 백분위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자신의 점수대에 많은 수험생이 몰려 있다면 백분위 점수가 내려갈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이번 수능시험에서 표준점수가 130점으로 같다고 하더라도 백분위는 언어 95 수리 가형 93, 수리 나형 91,외국어 95로 차이가 난다. 가산점 부여여부도 중대변수다.대학에 따라 모집단위별로 가산점을 부여하는 만큼 가산점을 부여하는 과목에서 좋은 점수가 나왔다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가산점 부여비율은 대학에 따라 최고 30%에서 1%까지 차이가 난다. 특히 서울산업대는 수리 가형에 30%의 가산점을 부여한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빨래터’ 진위 또 미궁속으로

    위작 논란에 휩싸여온 박수근(1914~1965) 화백의 유화 ‘빨래터’의 진위가 가려지지 않았다.서울대학교 기초과학공동기기원은 12일 빨래터를 진품으로 판정했던 이 연구원 소속 윤민영 정전가속기연구센터장을 해임했다.“최종 검증 절차가 끝나지 않은 예비 분석 결과를 공개해 혼란을 야기하고 이 과정에서 서울대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의 신뢰를 손상시켰다.”는 게 이유였다.그러나 진위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연구원 이인성 원장은 “지난 7월 예비 결과와는 차이가 있지만 연대 해석은 과학자들의 계산 방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어디까지나 참고치일 뿐”이라고 말했다.공동기기원은 수정된 최종 결과 보고서를 분석 의뢰자인 서울옥션측에 발송했으며 해당 자료의 공개여부는 서울옥션의 결정에 달렸다고 설명했다.서울옥션 관계자는 “보고서에서는 17세기부터 1954년까지 4개 구간 중 어느 구간이 가장 가능성 있는 구간인지 확답하기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면서 “이번 조사에서도 제작연대가 최소한 1950년대를 넘어서지는 않는 것으로 밝혀진 만큼 오히려 진품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명지대 최명윤 교수는 “이번 보고서는 방사성탄소성분비에 대한 기초 데이터 값 자체의 조작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것이 문제”라며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빨래터는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의 형인 박연구(64) 삼호산업 회장이 서울옥션 경매에서 구입했으나 진위 논란이 일자 지난 10월 초 서울옥션 측에 되넘긴 것으로 지난 4일 확인됐다.문소영 박창규기자 symun@seoul.co.kr
  • [하프타임] 삼성증권 테니스단 감독에 김일순 코치 임명

    삼성증권 테니스단 감독에 김일순(39·여) 코치가 임명됐다.삼성증권은 10일 김일순 여자팀 코치를 감독으로,10월 말 은퇴한 조윤정(29)을 여자팀 코치에 임명했다고 밝혔다.안양여상과 명지대를 나온 김 감독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여자복식 은메달,1988년 서울올림픽 단식 16강,1991년 영국 셰필드 여름철유니버시아드 여자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1)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1)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②

    병자호란 직후 청으로 끌려간 수많은 포로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을까? 한마디로 그들 피로인(被擄人)들은 시종일관 끔찍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그들의 고통은 청군에게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심양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심양에 도착한 이후에도,도망이나 속환(贖還)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또 조선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요컨대 청군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한,온갖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로잡혀 끌려갈 때의 고통 포로들의 고통은 청군에게 붙잡히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도성이나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의 체포를 피해 달아나거나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죽음은 슬픈 것이지만,죽은 사람들은 그나마 처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1637년 9월,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속환에 몰두하라고 촉구했던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포로가 되어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고,그것이 화기(和氣)를 해치는 것 또한 죽음보다 더 심하다.’고 말한 바 있다. 청군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은 심양으로 연행될 때까지 청군 진영을 비롯한 주둔지 이곳저곳에 수용되었다.포로들이 사로잡혔던 시기는 한겨울이었다.당시 남한산성을 지키던 병사들 가운데서도 혹심한 추위 때문에 얼어죽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그런데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에게 적절한 식사와 잠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했다.결국 수많은 포로들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수용되어 있거나 심양으로 연행되고 있었던 시기에 포로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이미 언급했듯이 1637년 2월8일,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출발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전송하던 자리에서 청의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신신당부했다.심양으로 가는 도중 소현세자를 온돌방에서 재워 달라는 부탁이었다.인조는 그러면서 1월30일부터 시작된 열흘 남짓의 노숙 때문에 아들에게 이미 병이 생겼다고 호소했다.장차 조선의 지존(至尊)이 될 신분이라 상대적으로 우대 받고 있었던 소현세자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나머지 일반 포로들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포로들은 수백명 단위로 열을 지은 채,엄중한 감시 속에 심양을 향해 행군했다.청군 지휘부는 탈출을 우려해 포로들이 행군하는 연로에서 조선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행여 접촉이나 탈출을 시도하는 포로들에게는 곧바로 철퇴가 날아들고 처참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대오(隊伍)를 유지하면서 걷는 과정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당시 홍익한,윤집과 함께 척화(斥和)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던 오달제(吳達濟)는 ‘심양에 오기까지 60일 동안 옷을 벗지 못한 채 자야 했기에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성 포로들의 슬픔 포로들 가운데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특히 더 처참했다.그들은 우선 사로잡힌 뒤 능욕을 당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다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또 많은 여성들이 청군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특히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이 대거 피란해 있던 강화도의 비극이 처절했다.강화도 함락 직후,청군의 체포와 능욕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여인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워낙 많은 여인들이 몸을 던졌기 때문에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였다. 청군은 아이가 있는 여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젊고 예쁜 여자는 가리지 않고 끌고 갔다.당시 포로가 된 여인들 가운데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청군은 이들 여인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을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다.저항하는 여인들은 살해되었다.‘강도록(江都錄)’을 비롯한 실기류(實記類)에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는 처참한 표현이 나오는 것은 그 같은 상황을 방증한다. 심양으로 연행되는 과정에서도 여성 포로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당시 청군 장수들은 사로잡은 조선 여인들을 자신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예쁜 여인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강제로 빼앗는 사례가 있었다.또 만주족 출신 장수가 한족 출신 장수가 데리고 있는 여인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조선 여인을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던 셈인데,이렇게 자신을 최초로 사로잡았던 장수로부터 또 다른 장수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성 포로들이 어떤 수난을 겪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졸지에 청군 장수의 첩으로 전락하여 심양에 도착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뜻밖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청군 장수의 본처들이 자행하는 투기(妬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본처들 가운데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조선에서 온 여성 포로들을 참혹하게 학대하는 자들이 있었다.심지어 조선 여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거나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이 같은 사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1637년 4월,홍타이지는 도르곤 등 신료들을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조선에서 데려온 여성들에게 계속 그런 짓을 자행하는 본처들이 있을 경우,남편이 죽었을 때 순사(殉死)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홍타이지까지 직접 나서서 본처들의 악행(惡行)을 근절하라고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여성 포로들에게 닥쳤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속환(贖還)의 난맥상 청이 조선인 포로들의 속환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은 1637년 4월 이후였다.하지만 실제로는 청군이 철수 길에 올랐던 2월 초부터 이미 속환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청군이 철수에 앞서 자신들의 주둔지 부근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매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포로들을 직접 끌고 가는 것이 귀찮거나 돈이 필요했던 자들이 매매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항복했던 직후부터 청군이 철수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포로들의 몸값(贖還價)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청은 병자호란 이후 속환가를 은(銀)으로 계산했는데,당시 남자는 한 사람 당 은 5냥,여자는 3냥 정도였다.또 아무리 높이 잡아도 10냥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종전 직후 조선은 이성구(李聖求)를 사은사(謝恩使),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심양에 파견했다.사실상 최초의 속환사(贖還使)였다.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5월15일 이후 심양에서 ‘인간시장’이 열렸다.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많은 원속인(願贖人)들이 심양으로 모여들었다.하지만 그들은 곧 절망하고 말았다.속환가가 최소 수백냥에서 천냥 단위로 폭등했기 때문이다.그것은 인신매매로 한밑천 잡으려는 청인(淸人) 소유주들의 탐욕과 그에 놀아난 일부 조선 고관들의 조바심과 무책임 때문이었다.한 예로 이성구는 자신의 아들을 1500냥에 속환했다. 헤어진 혈육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하지만 그들의 조바심은 몸값을 폭등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뛰어버린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속환의 희망을 이룰 수 없었다.최명길은 한 사람의 몸값으로 100냥을 넘기지 말 것과 청인들이 100냥 이상을 부를 경우,속환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몸값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일부 고관들은 사적 통로 등을 이용하여 여전히 높은 몸값을 치르고 있었고,나머지 사람들은 은을 마련하기 위해 집과 땅을 팔고,빚을 내기 시작했다.그렇게 속환가를 마련한 사람들이 심양으로 달려가게 되면서 다시 값이 오르는 악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0)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0)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당시 서슬 퍼렇던 청의 위협 앞에서 조선 조정은 약조를 어기기 어려웠다.실제 조선으로 도망쳐 온 포로들 가운데 도로 붙잡혀 청 측에 넘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다.그들은 ‘도망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았다.끔찍한 일이었다.참혹하기 그지없는 ‘포로 문제’야말로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이자 인조정권을 계속 고민하게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被擄人)은 얼마나 될까.전쟁이 끝난 뒤,최명길은 가도(椵島)의 명군 지휘부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명으로 추정했다.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이다.조선이 청의 침략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 측에 강조하기 위해 포로의 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나만갑(羅萬甲)이 ‘병자록’에서 ‘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 가는 것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거나 ‘뒤 시기 심양(瀋陽)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사람’이라고 서술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최명길의 추정이 과장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50만명은 안 될지 몰라도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청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포로들을 끌고 갔을까.청은 일찍이 후금(後金)시절 이전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로들을 획득하는 데 골몰했다.후금은 전투,납치 등을 통해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을 잡아가곤 했다.그들은 후금으로 끌려가 농장 등지에서 노비로 사역되었다.신체가 건장한 자들은 군대에 편제되어 또 다른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여자들은 궁중에 들어가 시비(侍婢)가 되기도 했다.특히 철장(鐵匠),야장(冶匠)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포로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을 때,조선에 들어온 병사들 가운데는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던 조선 출신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영역은 날로 늘어나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후금은 이후에도 ‘포로 사냥’에 몰두했다.특히 1629년 이후 명을 수시로 공략하면서 매번 수만에서 수십 만의 한인들을 납치했다.그들은 후금의 새로운 인구가 되고,노동력이 되었다.따라서 병자호란 무렵에 오면,청은 이미 상당한 수의 한인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가 되었다.이제 조선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할 ‘무역 상품’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니게 되었다.   ●포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이미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선은 청(후금)과 ‘포로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특히 심각했던 것은 후금에 정착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포로(走回人)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후금은 조선에 대해 주회인들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거나,아니면 그들의 몸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청과 조선은 포로를 바라보는 개념과 인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청은 포로를 ‘혈전(血戰)을 벌여 얻어낸 정당한 성과’로 인식했다.말하자면 피를 흘려 얻은 일종의 ‘소유물’이자 ‘재화’였던 것이다.따라서 포로들이 달아나는 것이나,달아난 포로들을 숨겨주고 송환하지 않는 조선의 행위에 대해 극도의 불만과 분노를 표시했다.  조선은 달랐다.정묘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조선 신료들은 포로들이 도망쳐 오는 것을 ‘혈육과 고향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 때문에 이루어진 부득이한 행동’으로 여겼다.따라서 주화인들을 붙잡아 후금으로 도로 넘겨주는 행위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나아가 도망 포로들을 붙잡아 보내라고 독촉하는 청의 요구를 ‘짐승 같은 오랑캐들의 탐욕에서 나온 행위’로 매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포로를 송환해 왔던 경험이 있었다.1607년 이른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내 처음으로 데려온 이후 통신사가 갈 때마다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교섭했다.당시 대마도와 막부(幕府)가 포로들을 일부 돌려준 것은,조선의 원한을 다독여 국교를 재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어쨌든 일본과의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한 조선의 생각은 나름대로 굳어졌다.‘똑같은 오랑캐임에도 일본인들은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였는데,만주족 오랑캐들은 어찌 이렇게도 잔인하단 말인가’.  자연히 조선 조정은 주회인 송환에 극히 소극적이었고,청의 압박이 몹시 강해진 상황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몇몇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 입막음을 시도하곤 했다.실제 정묘호란 무렵까지만 해도 후금 또한 ‘포로 문제’ 때문에 조선을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아직 명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데다,그런 상황에서 조선을 다시 공략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통해 청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던 조선은,과거처럼 ‘혈육을 찾아 도망쳐온 포로들을 차마 잡아보낼 수는 없다.’는 식의 ‘호소’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홍타이지가 제시한 조건에서도 드러나듯이 ‘포로 문제’를 둘러싼 청의 압박이 정묘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속환(贖還)을 시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압박 때문에 주회인들을 숨겨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이 같은 상황에서 청에 끌려간 혈육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길은 속환(贖還)이 거의 유일했다.속환이란 포로의 몸값을 청 측 주인에게 치르고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포로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인간 시장’이 서게 되었고,몸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일종의 ‘상품’이 되었다.  청의 용골대는 1637년 4월,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에게 속환에 대한 청 측의 방침을 통보했다.그들은 속환과 관련하여 ‘청군이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뒤부터 심양에서 시작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즉 중간에서의 속환은 불가능하고,속환을 원하는 포로의 보호자가 직접 심양으로 올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소현세자는 이 내용을 4월13일 본국에 보고했고,조선 조정은 비로소 속환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속환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은,전란 시기 행방불명된 혈육을 갖고 있었던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그 단적인 사례로 대사간 전식(全湜·1563~1642)의 경우를 들 수 있다.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그는,아들이 죽은 것으로 치부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을 했다.하지만 속환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전식은 1637년 4월,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살아 있기만 하면 속환해 오는 데 드는 몸값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자식을 비롯하여 헤어진 혈육들이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그들을 속환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비원(悲願)이었다.하지만 그 비원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높은 관직에 있거나,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웠다.바로 거기에 ‘포로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빨래터’ 진위발표 지연 왜

    “진상조사 결과 발표는 안 하는가,못 하는가.”벌써 한 달을 넘겼다.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이 박수근(1914∼65)의 작품 ‘빨래터’에 대한 과학감정서 조작 여부 조사에 착수한 건 지난 10월 말이다.애초 “11월 안에 조사 결과를 발표하겠다.”던 게 연구원측 입장이었다.그러나 연구원 이인성 원장은 “성급하게 날짜를 못 박을 순 없다.”고 태도를 바꿨다. 그러는 사이 빨래터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한 미술 전문가는 “이제는 서울대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왜 이렇게 발표가 늦어지고 있는 걸까. 이 원장은 2일 “지난 7월 진품 판정 보고서의 수치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고 해명했다.그러면서 “예민하고 복잡한 작업이라 간단하지가 않다.”고 덧붙였다.그러나 “직접 시료를 가지고 연대 측정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대 보고서의 문제점을 처음 지적했던 명지대 최명윤 교수도 “보고서가 조작인지 아닌지 밝히는 작업은 서두르면 하루도 안 걸린다.”면서 “전체 과정을 되짚어서 수치가 정확히 나왔는지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발표가 늦어지자 “서울대가 사회적 혼란을 의식해 수위조절에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왔다.한 사립대 미대 교수는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최 교수도 “결과는 명백히 드러났는데 그걸 가릴 수 없으니 이것저것 조절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서울신문 탐사보도-기록 외면하는 정부] 권력기관일수록 기피… 정부기록 ‘빈껍데기’

    [서울신문 탐사보도-기록 외면하는 정부] 권력기관일수록 기피… 정부기록 ‘빈껍데기’

    “국무회의와 차관회의조차도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는데 왜 우리 위원회만 이를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위원회를 담당하는 한 공무원은 국가기록원의 속기록 대상회의 지정에 대해 이 같은 불만을 쏟아냈다.속기록 작성 중요도를 떠나 힘없는 위원회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기록원이 추진하려다 중단한 ‘속기록 등 작성대상회의 지정 확대 계획’에 따르면 70개 위원회 회의 가운데 권력기관 위원회 상당수가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또 권력기관일수록 지정불필요 의견을 제시하는 등 반발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계획안에 따르면 70개 회의 가운데 국무회의와 차관회의 등 5개 회의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등은 국가기록원에 ‘지정 불필요’ 의견을,공적자금관리위원회와 대외경제장관회의 등 4개 회의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등은 ‘지정 어려움’을 각각 이유로 들었다.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는 의견을 제출하지 않았고,경찰위원회는 ‘발언자의 신상은 비공개로 하겠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행정안전부는 ‘국무회의는 법령안 등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 정책을 심의하는 기관으로 정보공개 등에 대한 보호근거 등이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정책 결정 이전에 주요 논의과정이 공개될 경우 국가 및 사회적 혼란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속기록 대상회의로 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국가기록원에 ‘지정 불필요’ 의견을 통보했다. 또 시민·사회단체들이 속기록 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와 검찰청 검사장회의,국방부 전군지휘관회의 등은 계획안에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반면 나머지 2004년 한 번 개최된 사회보장심의위원회와 2006년 한 번 개최된 국가우주위원회,2002년과 2005년 한번씩 열린 기후변화협약대책위원회,2006년 각각 1회 열린 국가보훈위원회와 국제개발협력위원회 등은 속기록 작성 대상 회의에 포함됐다. 국가기록원은 2001년 12월 기획재정부 기금정책심의위원회 등 12개를 속기록 작성 대상회의로 지정한 데 이어 2005년 3월 5개 등 모두 17개 회의를 속기록 작성 회의로 지정했다.그러나 이후 3년간 속기록 지정 회의 확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추가 지정된 속기록은 한 건도 없었다. 국가기록원은 지난해 본보의 ‘국가 주요회의 속기록 작성 말뿐’(2007년 7월4일 1면 보도)에 대해 당시 주요회의에 대한 현황조사를 마쳤고,2007년 말까지 속기록 또는 녹음기록 작성 타당성 검토를 거친 후 추가지정을 추진하겠다고 해명했었다. 국가기록원이 1688개 위원회 회의 가운데 70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선정기준이 불명확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외부용역에 참가했던 교수들을 취재한 결과 이들은 “국가기록원에서 70개 위원회를 선정한 뒤 타당성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면서 “속기록 작성 대상회의 선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이어 “ 그 이후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고 전했다.국가기록원이 자체적으로 70개를 선정한 뒤 이 회의들에 대해서만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한 것이다.결국 외부 전문가들은 70개 회의 모두에 대해 ‘속기록 작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나머지 회의의 선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외부 전문가들은 국무회의에 대해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주요 정책을 심의하는 최고 정책 심의회의로 정책결정의 투명성 확보와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속기록 등 작성대상회의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관리대학원 교수는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기록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이 보장돼 있지 않고,국가기록원장을 행정안전부에서 임명하는 것”이라면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기록물 관련 전문가가 주요 보직에서 배제되고,그 자리가 행정 공무원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국가기록원을 외청으로 하고 원장의 임기를 보장해야 기록관리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정치적 압력을 막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탐사보도팀
  • “경제기사,더욱 쉽고 유익하게”

    “경제기사,더욱 쉽고 유익하게”

     “경제기사는 독자와 전달자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쉽게 쓰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또한 최근의 악화되는 경제지표가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소개해 줘야 하지 않을까.”  26일 오전 7시30분 서울 중구 태평로1가 서울신문사 6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회(위원장 최현철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제24차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그리고 국민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경제 정보 제공을 주문했다.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 상세히  회의의 초점은 최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 관련 보도.참석자들은 독자들에게 좀 더 다가가는 경제 기사를 주문했다.최근 금융위기가 파생상품 등 전문적인 분야에서 시작된 만큼,독자들이 경제기사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일상 생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 보다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용조(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수석부회장) 위원은 “경제 기사가 전문적이다 보니 독자들이 조금 읽다가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만큼,쉽게 기사를 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형준(명지대 정치학과 교수) 위원은 “종합지에서는 사안에 대해 진단을 많이 하지만,대체 갖고 있는 펀드를 빼야 하는 건지,환전은 언제 해야 하는지 등 국민들이 정말 원하는 정보는 전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실제로 국민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가이드라인을 함께 제시하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비판만이 아닌 대안 제시 중요  비판만이 아닌 대안 제시도 주문했다.이문형(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위원은 “환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50% 정도 상승했다면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시리즈로 일관되게 제시한다면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경은호(전 대한한의사협회 회장) 위원도 “향후 1,2년 안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 예측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제시한다면 더욱 유익한 기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폭등’,‘폭락’ 등 극단적인 단어의 기준을 만드는 작업도 제안했다.박연수(소방방재청 차장) 위원은 “증시와 환율 등이 계속 요동치면서 폭등이나 급락 등의 극단적인 단어가 많이 나오지만 어떤 기준으로 사용하는지 궁금하다.”면서 “이에 대한 기준이 제시된다면 독자들이 일방적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했다.김형준 위원도 “서울신문이 독자적으로 경제지표를 만들고 이를 제시하면 독자들이 좀더 쉽게 경제 상황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이밖에 인터넷 경제 논객 미네르바 등 재야 경제전문가의 목소리를 지면으로 소개하는 것도 신선한 시도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신문발전위원회의 후원으로 열린 이날 회의에는 최 위원장과 경은호·김형준·박연수·박용조·이문형·주용학 위원,서울신문에서는 노진환 사장,김명서 상무이사,염주영 이사,오병남 편집국장,임태순 부국장,오승호 경제부장,류찬희 산업부장 등이 참석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무당층 10개월새 2배 증가… 국민 정치단절 심화

    무당층 10개월새 2배 증가… 국민 정치단절 심화

     ‘국민의 절반 이상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  특정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무당(無黨)층이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의 11월 조사에 따르면 무당층이 52.8%나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지난 9월과 10월엔 각각 39.0%와 47.5%였다.이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만 보더라도 17대 대선 직후인 지난 1월(26.6%)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는 무관심 차원을 뛰어넘어 국민들의 ‘정치 단절선언’에 가깝다.”고 분석한다.정치권 안팎에서 정계개편과 대안정당의 필요성이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권을 향한 국민들의 냉소가 만성화됐다는 지적은 그동안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무당층이 50%를 넘어섰다는 것은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정치컨설팅업체 포스의 이경헌 대표는 26일 “이명박 정부의 대국민 소통 부재현상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여야 모두 민심의 입안자라는 본래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이는 쇠고기 정국에서 드러났듯 국민들이 원하는 생활이슈에 정당들이 해결사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의견과도 연결된다.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미래지향적 가치 정당으로 탈바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시대 이후의 총체적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정당정치가 ‘포스트 노무현’에 걸맞은 의제와 정치행위를 내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지난 16대 대선 때는 국민들이 노무현식 개혁가치에 열광했지만 이후 현 상황에 맞는 정치적 프레임을 형성하지 못한 것이 우리 정당정치의 현주소”라고 평가했다.이번 조사에서 20~30대의 무당층 비율이 60%대에 이른 것이 이를 방증한다.무당층 급증에 대한 우려는 정당 지지도 추이에서 드러난다.한나라당은 30%대,민주당은 15%대 박스권 지지율에서 맴돌고 있다.여야의 대립전선이 각각의 지지층과 소통하기보다 정당 내 권력투쟁의 산물로 형성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기간 대국민 신뢰회복은 요원하다는 지적이다.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고정 지지층은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에 머물고 있는 현상과 비교해도 그렇다.이 대통령의 계속되는 ‘헛발질’이 당 지지율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하지만 무당층이 늘수록 여권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는 과거 관례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이 대표는 “청와대의 국정 강경노선이 지속되고 여당의 종속성이 심화되는 상황에선 집권세력의 통치기능이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대적으로 민주당의 타격이 심한 편이다.민주당의 지지율은 10~15%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이슈 대응력이나 당의 좌표설정,쇄신노력 부재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제1야당의 존재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다 보니 여권에서 이탈한 국민들이 민주당을 대안정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당층에 머물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국립중앙극장·중앙박물관 등 효율적 운영위해 법인화 필요”

    “국립중앙극장·중앙박물관 등 효율적 운영위해 법인화 필요”

     우리나라 국민들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향유 공간인 국립중앙극장과 국립중앙박물관,국립중앙과학관,국립현대미술관 등을 공공법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지금은 중앙부처의 부속기관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조직학회 주최,서울신문 후원으로 26일 서울 명륜동 한성대에듀센터에서 열린 ‘2차 정부조직개편 토론회’에서 임승빈 명지대 교수는 “문화행정기관 개혁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대중의 활용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면서 “투명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법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행정안전부는 지식경제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와 41개 국립대학,157개 중앙부처 부속기관 등을 대상으로 법인화 또는 공공기관화를 검토하고 있으며,우선 대상기관을 선정한 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임 교수에 따르면 국립현대미술관은 행정직 위주의 운영 방식으로 전문성 저하는 물론,상대적으로 낮은 보수를 받는 전문인력들이 근무를 기피하는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이같은 경직된 조직 운용 등으로 관람객 수는 1999년 89만명에서 지난해 43만명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국립중앙극장도 국민들의 문화예술 기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1998년 57만 1000명이던 관람객 수가 2006년 49만 9000명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임 교수는 또 박물관 운영과 관련, “미국과 영국의 박물관은 법인이사회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반면,우리나라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관리·감독체계로 지방박물관 활성화를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부처 부속기관을 법인화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로는 정부와 해당 기관간 갈등이 꼽혔다.임 교수는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법인화 초기에는 경영합리화를 전제로 국가가 재정지원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앙정부 기능을 지방자치단체로 효율적으로 이관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됐다.앞서 행안부는 특별지방행정기관 중 국토·하천,해양·항만,식·의약품 등 3개 분야의 기능을 올해 안에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하고,내년에는 중소기업과 환경,보훈 등 5개 분야 이관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김재훈 서울산업대 교수는 “지방이관을 추진할 때 조직과 인력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표준안을 제시하고,예산 역시 지자체에 대한 지원 기준을 마련해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김 교수는 또 “지방이양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평가를 거쳐 우수 지자체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미흡한 곳에 대해서는 권한을 다시 회수하는 ‘부분선점제’ 도입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한국 정당들의 ‘슬픈 자화상’

    [김형준 정치비평] 한국 정당들의 ‘슬픈 자화상’

    한국 정당이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이 국민의 절반 이상(52.8%)을 넘어섰다는 한 여론조사 기관의 발표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에서조차 무당층이 57.7%로 전국 평균보다 높게 나왔다.경기 침체와 대통령 국정 운영 지지도 하락으로 정부 여당이 집권 초기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민주당의 지지도가 10%대의 부진 현상을 겪는 이유를 알 것 같다.그렇다면 왜 한국 정당들이 국민의 불신을 넘어 공멸의 위기에 처하게 됐을까. 근본 이유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시대가 요구하는 과제가 무엇인지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없기 때문이다.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정권교체와 18대 총선 승리로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내재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특히 정권교체라는 목표를 달성한 후 추동력과 방향 감각을 잃는 성공의 위기와 계파간에 ‘파국적 균형’이 노출되는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다.  한마디로 미래지향적 가치 정당으로서 탈바꿈을 하는 데 실패했다.자신들의 과거 업적에 대한 자긍심도 없고,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으며,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미래에 실현될 수 있다는 자기 확신도 없다.또한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혁신의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당헌 당규 전문에는 버젓이 “새로운 한나라당은 구각을 깨고,공동체 자유주의와 나라 선진화의 비전을 실현하는 정책정당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했지만 백년하청일 뿐이다.  한편,민주당의 위기는 대선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정체성의 위기와 동시에 리더십의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대선에서는 ‘묻지마 투표’ 때문에 패배했다는 자위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혹자는 “민주당의 거품이 덜 빠졌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민주당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구성원들이 과거와 같은 치열함과 열정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권교체,민주화,국가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를 관철시키려는 치열함이 있었지만 현재는 그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렵다.국민을 설득하고 감동을 주는 아이디어는 열정에서 나오는 법인데 결과적으로 이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왜 정권을 다시 찾아와야 하는지 명쾌한 논리로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최소한의 도덕성마저도 흔들리고 있다.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영장이 발부된 최고위원을 야당 탄압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로 영장 집행을 저지하는 촌극까지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정당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최소한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자신들의 가치가 왜 중요한지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상품이 나쁘니까 내 상품을 사라.”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수 정당은 무슨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지,진보 정당은 무엇을 변화시키려고 하는지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더불어,자기 성찰을 토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 정당간에 치열한 가치 경쟁을 펼쳐야 한다.  그런 다음 국민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실천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이제 한국 정당들에 더 이상 많은 시간을 부여할 수 없다.만약,이들이 구태와 국민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국민들은 응징의 칼을 뽑아야 한다.일차적으로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정당들에 매년 수십억원을 부여하는 현행 국고보조금 제도를 폐지시키기 위한 투쟁을 펼칠 필요가 있다.그때만이 “국민 혈세에는 공짜가 없다.”는 단호함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 정당들에 더 이상 많은 시간을 부여할 수 없다.만약,이들이 구태와 국민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국민들은 응징의 칼을 뽑아야 한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9) 조선,혼돈 속 청의 번국 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9) 조선,혼돈 속 청의 번국 되다

     청군의 철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조정에서는 또 다른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그것은 전란을 불러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놓고 불거졌다.인조는 그 책임을 온전히 척화파들에게 돌렸다.‘그들이 명분만 앞세워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임금과 종사(宗社)를 불측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인조는 척화파들을 조정에서 내쫓고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 대신들을 중용했다.척화신들을 옹호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주화파 대신들 가운데도 척화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었는데,이제 와서 척화신들만 희생양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논리였다.하지만 ‘책임 공방’에만 몰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엄혹했다.청측의 서슬은 여전히 시퍼랬고,감시의 눈길은 여기저기서 번뜩이고 있었다.조정은 결국 혼돈 속에서 점차 청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전란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  1637년 3월21일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나섰다.그는 조정에서 쫓겨난 윤황(尹煌)이나 조경(趙絅) 등의 이야기가 부당한 듯하지만,실제로는 국가의 대의(大義)를 지키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선처하라고 촉구했다.사간 김세렴(世濂)은 ‘윤황 등이 죄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며 그들을 복직시키라고 촉구했다.  인조도 물러서지 않았다.‘작년에 윤황 등이 헛된 명분에 매몰되어 실사(實事)를 도외시하는 부박(浮薄)한 행동을 저질렀다.’며 사면 요청을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3월26일 부제학 윤지(尹?),교리 정치화(鄭致和),윤강(尹絳) 등이 다시 들고일어났다.그들은 ‘윤황 등이 망령된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어찌 유독 윤황 등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묘당(廟堂)의 책임입니다.’라고 비변사와 대신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인조는 다시 격앙되었다.‘작년 용골대 등이 왔을 때,그들이 우리에게 바로 표(表)를 받들고 칭신(稱臣)하라고 강요했다면 척화신들의 언동이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척화신들이 망령되이 들고일어나 용골대의 목을 치라고 주장했다.그 이후 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국가를 도모하기 위한 권도(權道·임시 방편)였는데 이들이 한갓 큰소리로 저지하여 나랏일을 혼미하게 만들었다.’고 일갈했다.인조는 척화파들이 앞뒤를 따져 보지도 않고 ‘참수(斬首)’ 운운하면서 ‘오버’했던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궁극에는 자신과 백성들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신료들도 다시 반격에 나섰다.6월21일 유백증(兪伯曾)은 영의정 김류(?) 등 주화파 대신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작년 가을 이전에는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하여 ‘청국(淸國)’이란 말을 쓰지 말고 사신을 보내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그런데 전하께서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다.’고 하자마자 주화(主和)로 돌아서 윤집(尹集) 등을 묶어 보내고 윤황 등의 죄를 다스리자고 했습니다.자신이 모든 책임을 맡아 임금이 성을 나가게 하고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유백증의 반박에 인조는 입을 다물었다. ●주화파 최명길,인조를 위로하다  병자호란 직후 김류는 분명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였다.전쟁 수행의 총책임자인 영의정이자 체찰사로서 김류가 보여준 난맥상이나 그의 아들 김경징의 과오를 생각하면 김류를 당장 내치는 것이 정상이었다.실제 삼사 신료들은 ‘종사를 망친 죄’를 들어 김류의 관작을 삭탈하고 조정에서 쫓아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에게 김류는 분명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일개 왕손에 지나지 않았던 인조를 보위(寶位)에 추대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원훈(元勳)이었다.김류가 없었다면 ‘국왕’ 인조도 있을 수 없었다.인조는 끝내 그를 버릴 수 없었다.더욱이 당시 인조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원죄 때문에 권위가 말이 아닌 상태였다.위기 상황이었다.위기 상황일수록 무조건 충성을 다하는 측근이 필요했다.인조는 결국 유백증 등의 탄핵을 무시하고 김류를 감싸주었다.  호란 직후 전란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는 와중에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한 사람은 단연 최명길이었다.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관 주화론을 견지한 데다,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자연히 인조는 그를 신임했고,최명길은 전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5월15일 장문의 상소를 올려 인조를 다독이려고 시도했다.그는 상소에서 ‘지난번의 호란은 천지 개벽 이래 일찍이 없던 병란(兵亂)입니다.전하께서 융통성 없이 필부(匹夫)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셨다면 종묘사직은 멸망하고 백성들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다행히 전하께서 묘당의 의견을 받아들이시고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종묘사직의 혈식(血食)을 연장하게 되고 생령이 어육(魚肉)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전하의 지극한 어짐과 큰 용맹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최명길은 인조가 순간의 굴욕을 참음으로써 종사가 유지되었으니 항복은 ‘치욕’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찬양했다.  최명길은 이어 ‘전하께서는 이 일로 속상해하지 마십시오.하늘의 운세는 돌고 돌아,흘러가면 되돌아오기 마련이며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회생하고 비(否)가 극에 달하면 태(泰)가 오는 법’이라며 인조를 위로했다.‘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울해져 있는 인조를 격려하고,그를 움직여 전란 후의 난제들을 풀어가 보려는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인조,홍타이지에게 다시 책봉 받아  사실 당시 조선의 처지는 ‘책임 공방’에 몰두할 겨를이 없었다.당장 폭주하는 청의 압박과 이런 저런 요구 사항을 처리하는 데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병력을 뽑아 보내라.’ ‘대신들의 자제를 빨리 들여보내라.’ ‘도망친 포로들을 잡아 보내라.’ ‘처녀를 뽑아 바쳐라.’ 등등 요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미 1637년 3월21일 의주부윤 임경업이 장계를 올렸다.내용은 청이 곧 용골대에게 어보(御寶)를 들려 조선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인조를 다시 책봉한다는 소식이었다. 용골대는 이제 ‘상국(上國)’의 책봉사(冊封使)로서 조선에 오는 것이었다.조정은 비상이 걸렸다.원접사(遠接使)와 관반(館伴)을 선발하고 각 지점에서 그를 접대하는 문제를 놓고 법석을 떨었다.바로 과거 명사(明使)들이 왔을 때 접대를 준비하던 방식이었다.  이윽고 11월20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칙서를 갖고 서울로 들어왔다.인조는 서쪽 교외까지 거둥하여 용골대 일행을 맞았다.칙서의 핵심은 간단했다.‘왕이 전의 잘못을 뉘우쳤으니,이제부터는 네가 새로워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것이다.이미 번봉(藩封)을 정하였으므로 전국(傳國)의 인(印)을 만들어 너를 조선 국왕으로 봉한다.이제 우리의 번병(藩屛)이 되었으니 황하(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닳도록 변하지 말라.’  ‘옥새를 내리나니 황하가 띠가 되고 태산이 숫돌이 될 때까지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이었다.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할 때,명으로부터 받은 옥새를 청측에 넘겨 주었었다.그리고 열 달이 지난 지금,청은 조선 국왕의 옥새를 새로 만들어 가져온 것이다.  인조는 ‘칙사’ 용골대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뒤 홍타이지의 칙서를 받았다.홍타이지는 인조를 다시 조선 국왕으로 책봉한 것이고,조선은 청의 번국(藩國)이 되기로 다시 맹세하는 순간이었다.청은 철저히 과거 명의 행태를 흉내내고 있었다.  이튿날 신료들은 인조에게 하례를 올리고,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황제의 칙서가 내린 것을 축하하는 조처였다. 하지만 조정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침울했다.‘ 책봉’을 마친 용골대 일행은 다시 요구 조건들을 쏟아냈고,자괴감과 부담감 때문에 조선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Local] 하멜동상 새달 3일 제막식

    전남 강진군 병영면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에 하멜동상이 세워진다.하멜의 조국인 네덜란드의 조각가 얍 하트만이 제작한 대형 하멜동상이 12월3일 하멜기념관에서 개관 1주년에 맞춰 제막된다.동상은 높이 2.5m에 무게 3t이다.강진군은 30억원으로 395㎡에 하멜기념관을 지어 하멜 관련 유물 100점과 아시아 고지도 2점(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기증),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300주년 기념 청화백자 1점(이태호 명지대학교 박물관장 기증)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하멜 등 일행 36명은 1656년 태풍으로 표류하다 붙잡혀 전라병영성에 13년동안 억류됐으나 1668년 탈출해 귀국했다.   강진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사실묘사 탁월 조선후기 초상화 서양의 광락기계 이용해 그렸다

    사실묘사 탁월 조선후기 초상화 서양의 광락기계 이용해 그렸다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였다.왕의 초상인 어진을 비롯해 고위 관료의 초상화가 넘쳐났다.현존하는 어진은 2점에 불과하지만,사대부의 초상화는 1000점 이상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초상화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는 관념으로 사실 묘사의 진실성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았다.초상화를 외모를 닮게 그릴 뿐만 아니라 대상인물의 정신까지 묘사한다고 해서 ‘전신사조(傳神寫照)’라고 했다.너무 사실적이라서 검은 반점,마마자국,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백반증 등 주인공 얼굴의 약점까지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조선시대 초상화를 자료로 피부병 관련 질병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될 정도였다.중국과 일본은 우리처럼 사실적인 예가 거의 없었다. 1392년 개국부터 ‘사실의 진실성’에 입각해 꾸준히 그려왔던 초상화는 17~18세기 작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난다.평면적으로 처리되던 얼굴과 옷에서 두드러진 입체화법이 나타나고,바닥처리에서 투시도법이 나타난 것이다.서양화의 영향이다.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이같은 서양화적 기법이 조선 초상화에 등장하게 된 것을 ‘카메라 옵스쿠라(어둠 상자)’가 중국을 거쳐 조선에 도입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그는 이런 내용을 담은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 나무 펴냄)를 최근 펴냈다. 이 교수는 “500년 동안 그린 초상화를 일괄해보면 정조시절인 1780년을 전후로 변화의 폭이 컸는데,전신의 사실묘사 기량이 한 단계 발전한 것은 1780년에서 1800년 사이”라고 말한다.즉 사실묘사 기량이 한단계 발전한 데는 이 광학기기의 사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사실묘사에 탁월한 김홍도와 이명기의 작품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직전의 광학기계다.이 교수는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이기양이 칠실파려안,즉 카메라 옵스쿠라로 초상화를 그렸다.”고 증언했다고 고증했다.이 밖에도 조선후기의 학자인 이규경 최한기 박규수 등도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이 광학기기는 조선후기의 화가뿐 아니라 유럽의 화가들도 16~19세기 원근법과 입체감을 묘사하기 위해 이 기기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특히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실험하고 그것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던 증거를 구체적으로 남긴 것은 세계 과학사나 회화사에도 소중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98) 인조, 백성에 사죄하다

    [병자호란 다시읽기] (98) 인조, 백성에 사죄하다

    전란은 끝났지만 인조 정권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도성 안팎에 버려져 있는 시신들을 치우고, 하나 둘씩 모여드는 생존자들을 구휼(救恤)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또 전쟁을 불러오고, 임금으로 하여금 일찍이 없던 치욕을 겪게 만들었던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것도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장 척화신들의 ‘경거망동’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척화신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흉흉한 민심을 달랠 수는 없었다. 백성들은 청군에게 죽고, 붙잡혀 끌려가고, 삶의 터전까지 잃어버렸다. 그들의 아픔과 분노를 다독이려면 결국 인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화약이 맺어지고 인조가 환궁한 직후 조정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우선 무신들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병조판서 신경진(申景 )은 회의석상에서 문관들을 매도했다.“쥐새끼 같은 자들이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며 목청을 높였다.‘쥐새끼 같은 자들’이란 문관들, 그 가운데서도 척화신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구굉(具宏) 또한 척화신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인조의 인척이자 반정공신이기도 했던 그는 “윤황(尹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목을 베어야만 한다”고 일갈했다. 일찍이 정묘호란 당시부터 후금(청)과의 화친 시도를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던 윤황을 정조준했던 것이다. 나만갑은 ‘기세가 오른 무인들이 문신들을 종이나 하인들처럼 여기고,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것이 마치 무슨 중흥의 계기나 된 것처럼 여긴다.’고 귀경 직후의 조정 분위기를 적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척화신들 호전될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위기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점차 답답한 현실에 짜증을 내게 되고 편안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더욱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병사들을 이끌고 산성의 방어를 담당했던 무신들이 보기에 문신들, 그 가운데서도 척화신들은 목소리만 컸을 뿐, 성을 방어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이미 1637년 1월,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척화신을 묶어 보내라.’는 시위가 일어난 바 있었다.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던 그들에게는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당장 따뜻한 밥 한 그릇과 편안한 잠자리가 더 절실했다. 그럼에도 ‘전원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척화신들의 주장이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우활(迂闊)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항복이 다만 ‘시간 문제’가 되고, 청이 전쟁의 책임을 척화신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묶어 보내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판에 척화신들의 결사 항전 주장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조가 항복했던 직후, 도성의 민심은 척화파에게 부정적이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백성들 앞에 보이는 것은 시체가 나뒹굴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처참한 모습뿐이었다. 절망 속에 눈에 핏발이 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자신들을 유린한 청군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대의명분을 앞세운 척화신들의 ‘경거망동’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망가졌다는 원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2월19일 김류, 홍서봉, 이성구, 신경진, 최명길 등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따지는’ 자리였다. 윤황, 이일상(李一相), 유황(兪榥), 홍전(洪 ), 조경(趙絅), 유계(兪棨) 등 척화신들의 ‘과오’가 도마 위에 올랐다. 논의 결과를 보고받은 뒤, 인조는 이들 모두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조경은 문외출송(門外黜送), 윤황·유황·홍전·유계 등은 유배, 이일상은 가장 무거운 절도(絶島) 정배의 명령을 받았다. 척화신 대부분을 조정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야흐로 척화신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인조, 백성 원성에 위기감 척화신들을 처벌했지만 인조 또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2월8일, 심양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인조는 한 노파의 원망 섞인 통곡 소리를 들었다.‘여러 해를 두고 강화도를 수리하여 백성들을 의지하게 했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더냐. 나라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아 백성들을 모두 죽게 했으니 이것이 누구 탓인가? 자식 넷과 남편이 모두 죽고 다만 이 몸만 남았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이런 원통한 일이 있단 말인가.’ 가족을 모두 잃은 노파의 한탄은 사실 인조를 향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번 전란 때문에 삶이 망가진 모든 백성들의 원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월19일 인조는 내외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내리는 교유문(敎諭文)을 발표했다. ‘덕이 부족한 내가 대위(大位)에 있은 지 15년에 오직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뜻밖의 화를 만나 외로운 성에서 포위 당한 채 봄을 맞았다. 나는 지금 해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천성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북쪽으로 떠나보냈다. 돌아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군사들은 전장의 원혼(魂)이 되게 했고, 죄 없는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는 듯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솔직하고 처절한 내용이다.‘나의 죄’ 운운하면서 전란 발생과 백성들의 고통이 모두 자신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인 국왕은 일찍이 없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다짐했다.‘이제 묵은 폐단과 가혹한 정치를 모두 없애며, 사당(私黨)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회복하며, 농사에 힘써 남은 백성들을 보전하려 한다. 그대 팔도의 신민들은 지난날의 잘못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말고, 상하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할지어다.’ 이제 잘 해보겠으니 도와달라는 당부이자 호소였다. ●의심받는 인조의 진정성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과 성명’을 읽으면 인조는 분명 병자호란을 계기로 대오각성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성명 발표 전후 인조가 취한 조처들을 보면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빼앗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을 죽거나 포로가 되게 했던 장수들에게 군율 적용을 기피하려 했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637년 2월 삼사 신료들은, 특히 죄가 무거운 김자점·김경징·장신 등에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라고 촉구했다.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수많은 생령들을 죽거나 끌려가게 만들었느니 복주(伏誅)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김경징과 장신에게 극형을 내리는 것을 꺼려했다. 신료들의 채근에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며 두 사람을 비호했다. 강화도를 방어할 준비를 내팽개쳤고, 함께 싸우자는 부하들의 호소도 묵살하고 달아났던 두 사람의 실제 행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인식이었다. 인조는,‘제대로 정죄(定罪)하지 않으면 종묘사직의 영혼을 위로할 수 없고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수 없다.’는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에 밀려 마지못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김자점은 끝내 유배형에 그치고 말았다. 김경징과 김자점이 모두 인조를 왕위에 올려놓는 데 앞장섰던 공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조의 태도가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비호하려 했던 인조의 자세는 ‘사당을 없애고 공도를 회복하겠다.’던 교유문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Seoul In] 대학·경찰청에 자전거 보관대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자전거 이용을 늘리기 위해 지역 내 대학과 경찰청에 보관대를 설치했다. 연세대, 명지대, 감리교신학대, 명지전문대 등 4곳에 600대와 미근동 소재 경찰청에 60대를 보관할 수 있는 최신 보관대를 설치했다. 자전거 주차 구획면을 축소·설치함으로써 차량이용 억제와 자전거 이용 확대를 유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통행정과 330-8708.
  • ‘수능100% 반영’ 11곳→71곳

    2009학년도 정시모집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 비중은 커지고 논술 비중은 대폭 준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17일 이런 내용의 ‘전국 200개 대학의 2009학년도 정시모집 대학입학 모집요강’ 주요사항을 발표했다. 대교협 발표에 따르면 올해 수능만으로 신입생을 모집하는 대학은 일반전형 기준으로 71개교(지방분교 포함)였다. 지난해에는 11개교였다. 이는 올해 수능이 점수제로 바뀌면서 지난해 등급제에서 논란이 됐던 변별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논술고사를 폐지한 대학은 늘어났다. 올해 정시 논술고사 실시대학은 단 13곳이다. 지난해의 경우, 45곳이었다. 백분위, 표준점수, 등급을 모두 반영하는 대학은 고려대, 광주대, 서울기독대 등 3곳이다. 백분위와 표준점수를 반영하는 대학은 서울대, 서울시립대, 건국대, 중앙대, 포항공대, 전주교대 등 20곳이다. 표준점수만 반영하는 대학은 경희대, 서강대, 성균관대, 연세대, 한국외대, 한양대, 서울교대 등 62곳이다. 학교생활기록부의 경우 일반전형 인문사회계열 기준으로 서울대가 50%, 한양대·부산교대 등이 40%를 반영한다. 나머지 대학들은 30% 이하로 반영한다.30% 미만 반영하는 대학은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동국대, 명지대, 서강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인하대, 중앙대 등 139개 대학이다. 정시모집은 모두 200개 대학에서 전년도에 비해 1만 4444명 감소한 16만 6570명을 선발한다. 이는 전체 모집인원 37만 8625명의 44%에 해당하는 것이다. 현재 수시2학기 전형이 진행 중이어서 합격자 등록결과에 따라 정시 모집인원이 다소 늘어나는 등 변경될 수 있다고 대교협은 밝혔다. 대학 설립별 모집인원을 보면 국·공립대학이 41개 대학 4만 5289명을 뽑고, 사립대학이 159개 대학 12만 1281명을 모집한다. 전형유형별 모집인원은 일반전형이 200개 대학 15만 2344명, 특별전형이 1만 4226명이다. 수시모집에 지원해 합격한 학생은 등록 여부와 관계없이 정시모집에 지원할 수 없다. 정시모집에서 모집기간 군이 같은 대학간 또는 동일 대학 내 모집기간 군이 같은 모집단위간 복수지원이 금지된다. 그러나 모집기간 군이 다른 대학간 또는 동일 대학 내 모집기간 군이 다른 모집단위간에는 복수지원이 가능하다. 정시모집 원서접수기간은 12월18~24일이며 가군은 12월26일~1월9일, 나군은 1월10~19일, 다군은 1월20일~2월1일에 각각 전형이 실시된다.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단독]수능 아랍어 열풍,3만여명 최다

    “아랍어 응시자는 늘고 있는데, 배울 곳은 없다?” 지난 13일 치러진 2009학년도 수능시험의 제2외국어 영역에서는 일본어를 제치고 아랍어 응시자가 3만여명으로 8개 과목 중 가장 많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아랍어를 선택한 응시자는 1만 3588명(15.2%)으로 전체에서 네번째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능운영부 정수백 차장은 “아랍어를 선택하는 응시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올해는 더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대략 3만명 이상이 응시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랍어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른 제2외국어에 비해 문제가 쉽게 출제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입시전문 학원에서도 아랍어 응시자 증가 현상을 ‘점수 따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수능에 유리한 아랍어를 선택한 응시자는 갈수록 늘지만 현재 전국 고등학교 가운데 아랍어를 가르치는 학교는 단 한 곳도 없다. 엄연히 교육과정에 들어가 있고 수능에 출제되고 있지만 공교육을 통해 아랍어를 배울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이종화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는 “7차 교육과정의 요점은 수요자 중심 교육을 하자는 건데 이렇게 많은 수요가 있어도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건 큰 문제”라면서 “아랍어 응시자 수가 많아지는 현상을 단순히 수능점수 때문에 벌어지는 기현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대학 관계자는 “입시에 유리해서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두바이 발전이나 석유자원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아랍에 대한 관심이 확연히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타이푼 새멤버 ‘하나’ 첫무대… ‘감격의 눈물’

    타이푼 새멤버 ‘하나’ 첫무대… ‘감격의 눈물’

    타이푼(Typhoon)의 새 멤버 ‘하나’(22)가 첫 신고식 무대를 내려오며 울음을 터뜨렸다. 생애 첫 방송 무대를 가진 하나는 벅찬 감회에 애써 참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솔비의 탈퇴에 따라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며 팀을 재정비한 타이푼은 14일 KBS 2TV ‘뮤직뱅크’를 통해 첫 음악방송 무대를 치뤘다. 타이푼은 지난 8일 휘성 콘서트의 게스트로 출연해 새 멤버를 선공개했던 바 있지만 공식적인 방송 무대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나는 생방송에 임하기 직전 떨리는 음성으로 “만감이 교차한다.”는 짧은 소감을 밝히며 무대를 향했다. 반주가 울려 퍼지자 관객들의 시선은 하나에게 집중됐다. 지난 달 솔로활동으로 타이푼 활동에 차질을 빚게된 솔비의 탈퇴 소식을 접한터라 타이푼의 새 얼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연유였다. 기존 댄스그룹 이미지를 완전히 벗은 타이푼은 미디엄 템포의 감성적 발라드 곡 ‘널 사랑하지 않았어’로 인사를 건냈다. 하나는 다소 긴장감이 맴도는 얼굴이었지만 기존 멤버 우재, 지환와 하모니를 맞춰가며 안정된 가창력 실력을 발휘했다. 곡의 말미, 2절 후렴구를 마무리 짓던 하나는 애써 누르던 감정이 복받쳐 오는 듯 끝내 눈물이 차올랐다. 라이브 무대는 깨끗이 마무리 됐지만 눈물 고인 하나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하나는 복잡한 심경에 울음을 터뜨렸다. 인터뷰 요청에 하나는 “꿈에 그리던 첫 무대였다. 꿈이 현실이 된 듯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며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어릴 적 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지만 오늘 같은 날이 올지 몰랐다.”며 말문을 연 하나는 “그토록 많은 연습을 했는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눈 앞이 깜깜해 지더라. 지난 2년간의 고된 연습생 시절과 타이푼의 새 멤버로 발탁된 기쁨 등이 뒤범벅 되어 눈물로 흘러 내렸다.”고 쑥쓰러운 듯 웃어 보였다. 3년째 타이푼을 꾸려 온 우재와 지환도 하나의 어깨를 감싸며 서로를 격려했다. 팀의 리더 우재는 “멤버들 모두 연습하던 만큼만 보여주자는 담담한 각오로 무대에 올랐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던 컴백이라 타이푼 멤버 모두에게 감회가 남다른 무대였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타이푼의 새 여성멤버로 발탁된 하나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이미 싱글 음반을 발표했었던 실력파 ‘중고신인’이다. 소속사 측은 “지난 싱글 발매 당시에는 방송 활동이 없어 ‘뮤직뱅크’ 첫 무대에 대한 감격이 컸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명지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하나는 지난해 9월 디지털 싱글 ‘잊었니’를 발표했으며 솔로 가수를 준비하던 중 타이푼의 새 멤버로 영입되어 활동하게 됐다. 타이푼은 정규 3집 ‘랑데뷰’를 발표하고 타이틀 곡 ‘널 사랑하지 않았어’로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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