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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선열 유해 5위 봉환/내일 중국서

    ◎이화일·손병헌·강백규·김기선·윤희순선생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중국 길림성 일대에서 서거한 독립군 출신의 이화일선생 등 중국안장 독립유공자 유해 5위가 17일 봉환된다. 보훈처는 15일 이들 다섯분의 유해가 17일 하오 김포공항으로 환국,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가 이화일·손병헌·강백규·김기선선생등 네분은 18일 대전국립묘지에,윤희순(여)선생은 20일 강원도 춘천 소재 선영에 각각 안장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외안장 선열 1백24기의 유해중 국내에 봉환된 독립유공자는 모두 38위로 늘어나게 됐다. 정부는 국외안장 선열들에 대한 유해 봉환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중국 현지 묘소 실태조사를 벌여 소재지가 확인된 다섯분의 유해를 먼저 국내에 봉환키로 결정,지난 11일 유해봉환반을 현지에 파견했었다.이번에 봉환되는 독립유공자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화일선생(1882∼1945)=함북 경성 출생으로 1920년 6월 홍범도장군이 지휘하는 봉오동전투에 참전,일본군 1백20명을 사살하는 등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큰 공을 세웠다.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손병헌선생(1870∼1946)=경북 영천 출생으로 1922년 통군부등 8개 단체가 통합 결성한 통의부에 가입,참모로 활동했으며 1926년부터는 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교사로 민족교육에 헌신했다.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강백규선생(1878년∼미상)=1920년 3월에는 간도지역청년회부회장으로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24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제1회 국민위원회 10인 후보중 한사람으로 선출돼 「국민위공보」를 발행했다.63년 국민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기선선생(1888∼1920)=평북 정주 출생으로 중국 봉천성 통화현에서 배달학교를 설립,민족교육에 헌신하고 한족회의 일원으로 항일활동을 벌이다 1920년 11월 배달학교에서 일군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윤희순선생(1860∼1935)=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로 1895년 시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반발,강원도 춘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의병군가를 작곡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부녀의병의 일원으로 참여했다.8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KBS/SBS/드라마 「명성황후」 제작 신경전

    ◎내년 시해 100주년… KBS “먼저 기획”·SBS “공식발표” 내세워 기득권 주장/고뇌하는 삶에 초점… 접근방향도 비슷/K/다음달에 촬영… 내년 1월부터 방송/S/전국 네트웨크 대비,사극시리즈 첫 편 1백년전 인물인 명성황후(민비)를 놓고 KBS와 SBS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SBS는 최근 『전국 네트워크 시대를 대비,지방 팬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사극 시리즈를 기획했다』고 밝히고 『1탄으로 내년으로 시해 1백주년을 맞는 「명성황후」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극작가 임충씨가 집필할 「명성황후」는 내년 5월부터 50부작으로 방영될 예정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민비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드라마 「민자영」을 기획하고 있던 KBS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른 것. KBS는 월화드라마 「한명회」의 후속으로 지난 해 제작하려다 제작비 때문에 무산됐던 「민자영」을 하기로 하고 지난 7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작가 이환경씨가 이달 말까지 대본을 완성하면 10월 중순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52부작으로 제작돼 내년 1월2일부터 6월26일까지 방영될 이 드라마의 연출은 이영국PD가 맡기로 돼 있다. 이PD는 『대형 사극의 경우 제작 실무자들 사이에는 다 알려지게 되는데 우리가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면서 『KBS로선 취소할 이유가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SBS의 김우광 드라마제작국장 역시 『소재 찾기가 어려운 실정에서 우연히 같은 소재를 채택하게 됐지만 명성황후­장희빈­임꺽정으로 이어지는 사극 시리즈를 기획한 이상 계속 밀고 나갈 계획』이라고 밝혀 어느 측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민자영」이 됐건 「명성황후」가 됐건 양 방송사의 기획의도나 제작방향은 똑같다. 내년은 명성황후 시해 1백주년이 되는 해인데다 광복 50주년이란 역사적 의미가 있고,최근들어 민비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활발해 지고 있어 시의적절한 소재이기 때문.또한 지금까지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사극은 많았지만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는 없었다는 점도 방송사의 드라마 제작진의 구미를 당겼다. 제작방향도 한 사람의아내,자식을 잃은 어머니,역사와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가진 국모로서 고뇌하는 명성황후 개인의 인생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파란만장한 삶을 부각시켜 「시아버지 대원군을 쫓아낸 못된 며느리,권력욕과 질투심이 강했던 여자」라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 잡겠다는 것. 현재는 KBS측에선 먼저 기획한 쪽이 우선,SBS측에선 공식발표한 쪽이 우선이라며 서로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 양 방송사간에 의견 조정이 없는 한 시청자들은 내년에 똑같은 드라마를 연이어 보게 됐고,결국은 막대한 제작비와 인력을 낭비하는 결과밖에 안될 전망이어서 이번 사안을 보는 방송가 밖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 「명성왕후 시해 칼」 발견/국제한국연 최서면원장,일 신사서

    ◎칼집에 “단칼에 늙은 여우 살해” 문구/낭인들 자백담긴 보고문도 찾아내 1895년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민비)시해 만행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칼과 범행에 동원된 일본인 낭인들의 자백이 담긴 일본재판소의 보고전문이 발견됐다.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원장(67)은 22일 『1895년10월8일 당시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삼포오루)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낭인중 한명인 후지가쓰 아키(등승현)가 명성황후를 건청궁(경복궁)에서 살해할때 사용한 칼을 일본 규슈(구주)에 있는 한 신사에서 발견했다』고 밝히고 칼의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일본 제일의 칼 제작자 다다요시(충길)가 만든 이 칼은 길이 1m20㎝로 칼집에는 「일순 전광 나 노호」(한 칼에 늙은 여우를 살해했다)라는 문구와 함께 후지가쓰의 호인 「몽암」이 새겨져 있다. 최원장은 이날 『관련사료에 민비시해의 일본측 암호명이 「호수」로 나타난 점을 감안하면 칼집에 새겨진 「늙은 여우」는 민비를 지칭함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민비시해후 일본으로 돌아가 규슈지방의 한 신사에 이칼을 헌납한 후지가쓰는 공범들과 함께 히로시마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이후 절에서 잠시 은거하다 나온뒤 여학교를 세우는등 교육자로 활동하다 8·15해방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함께 민비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 낭인들을 신문한 히로시마재판소의 구사노(초야)검사장이 당시 법무대신에게 보낸 1895년11월9일자 보고전문은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것으로 구로다 기요다카(흑전청륭·강화도조약체결당시 일본측 전권대사)관련 문서중에서 발견됐다. 특히 이 전문에는 『민비시해의 하수인을 찾던중 히라야마 이와히코(평산암언)등 13명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당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이들이 시해범인 것을 알고서도 일본 수사당국이 무혐의로 풀어주었고 또 정부수뇌부가 범행을 배후조종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 전문에는 『후지가쓰등이 시해당시 명성황후처럼 보이는 여자가 많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이에 모두 옷을 벗긴뒤 유방을 살펴 명성황후 나이인 44세정도의 여자를칼로 베어 살해했으며 이를 저지하다 일본인 관리의 총을 맞고 쓰러진 궁내부대신 이경식을 다시 칼로 베었다』고 돼있어 당시의 무참한 살육상과 시해사건에는 낭인뿐아니라 일본인 관리들도 개입됐음을 입증하고 있다. 최원장은 이에대해 『내년으로 다가온 민비시해 1백주년을 맞아 지난달 자료수집차 일본을 방문,당시 시해때 동원된 낭인들의 후손으로부터 만행때 사용된 칼이 신사에 보관돼 있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끝에 칼과 관련자료를 발견했다』며 『지금까지는 민비시해때 일본인 부랑아들만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신문기자인 아다치겐조(안달겸장),교육자인 사사도모쿠사(좌좌우방)등 당시의 일본 지식인층과 외교관·군인등이 함께 저지른 극에 치달은 만행』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 주한공사 미우라 고로는 독일·프랑스·러시아의 삼국간섭(1895년5월)이후 친러정책을 지향한 명성황후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낭인과 군대를 동원,같은해 10월8일 상오7시쯤 민비를 시해했다.
  • 80여년만에 건국훈장 추서 민효식의병장

    ◎황해도일대서 돌격대장으로 맹활약/“의병궐기” 고종 밀지 전해듣고 거병/6백만명 이끌고 일제 토벌군과 혈전 『뒤늦게 나마 4대 80여년만에 고조할아버지의 항일 의병활동을 발굴,명예를 살리게 돼 후손으로서 감개무량합니다』 15일 제49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는 민효식의병장(1854∼1910)을 대신해 훈장을 친수받는 민의병장의 4대손 민형원덕성여대교수(43·서울 도봉구 방학동 신동아아파트)는 『아버지의 평생소원을 풀어드려 효도를 하게 됐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민교수는 그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 10여년동안 유학을 하느라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던중 92년 7월 아버지 경남씨가 중풍으로 자리에 누으면서 『효자,식자 할아버지의 독립운동활약상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국회도서관등을 돌아다니며 사료를 모은 끝에 이번에 국가보훈처에 민효식의병장의 서훈을 신청한 것. 민의병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우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의병항쟁사」는 『경의선 철도 서쪽의 장연·송화·은율 등지에서 민효식부대가 새로이 기반을 다지게 됐다』고 적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는 수십여곳에서 민의병장의 활동상을 밝히고 있다.또 국립도서관에 보존중인 일제의 조선폭도토벌지에도 『황해도 지역에 있는 괴수 민효식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낸 결과 약간의 손상은 주었으나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했다』고 본국에 보고한 기록이 적혀 있다. 민의병장은 이런 기록에 근거,한말 일제의 강점에 대항해 일어난 제1차 을미의병 전쟁당시 크게 활약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말 마지막 진사인 민영태의 장남인 민의병장은 39세 때인 1895년까지는 고향인 황해도 벽성군 일대에서 명망높은 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명성황후시해·단발령·군대해산 등의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구한말 군부대신 신기선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궐기토록 하라』는 고종의 밀지를 전하자 본격적으로 거병하게 됐다. 민의병장은 이 과정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초병의 역할을 맡았다. 민의병장은 이후 1908년 황해도 일대에서 많게는 수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토벌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 마침내 혈전 끝에 전사했다. 황해도 지편찬위원회가 펴낸 황해도지에 따르면 민의병장은 의병지휘 돌격대장으로 6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1910년 해주·옹진·송화로 일군을 도륙하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민교수의 아버지 경남씨는 병석에 누워 민의병장에 대한 서훈소식을 듣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민교수는 『고조할아버지는 순국후 시신마저 찾지 못해 평소 사용하던 물건을 선영에 모셨다고 들었다』면서 민의병장의 유일한 유품인 초상화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 1910년 남북한 총인구1,331만명/통계로본 구한말 경제·사회상

    ◎60명이던 인구밀도 작년 4백44명/일인이 판검사 74%·경찰 40% 장악/외국인수 184,237명… 93년도의 2.7배/쌀 1가마 현재돈 4만6천원·쇠고기 1근 699원/서울 수도보급률 18%… 전화가입자 6,448명 오는 30일은 갑오경장이 일어난 지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이때를 기점으로 근대적인 문물제도가 본격도입되면서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제도는 일대변혁을 맞는다.국가통계도 의정부에 기록국이 설치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통계가 시작됐다. 통계청은 28일 이날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통계연감 등 당시의 각종 통계자료를 종합한 「개화기의 경제·사회상」이라는 책자를 펴냈다.변혁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한세기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알아본다. ▷인구◁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 남북한을 합친 전국인구는 2백89만4천7백77호구에 1천3백31만3천여명.올해 남북한의 19%,남한의 30%수준이다.그러나 인구밀도는 60명(93년 남한 4백44명)수준으로 지난해 세계평균 41명보다 높아 당시에도 인구가 조밀했다.경북이 1백57만7천명으로 가장 많았다. ○외국인 90%가 일인 현재 남한인구의 4분의 1이 몰려 있는 서울은 당시 27만8천9백58명으로 전체의 2.6%에 불과,그동안의 인구집중추세를 여실히 알려준다.그동안 38배가 늘었다.당시 서울의 가옥은 초가집이 주종으로 기와집과 반기와집은 30%정도였다. 전체호구수의 84.1%가 농업에 종사했고 상업 6%,광공업 0.8%,날품팔이 0.2%였다.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양반과 유생은 2.5%였다.양반이 가장 많은 곳은 충남으로 전체호구수의 10.3%가 양반이었다.「충청도양반」이 헛말이 아닌 셈이다. 당시 외국인수는 18만4천2백37명으로 93년의 6만6천6백88명보다 2.7배나 많다.90%가 넘는 17만1천5백43명이 일본인으로 한반도쟁탈전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이 떼지어 밀려왔다.창기와 작부도 4천여명이나 됐다. 식수체계의 미비와 의료시설의 낙후로 수인성전염병에 의한 사망이 많아 1909년에는 인구 10만명당 12·2명이 콜레라에 감염됐고 치사율은 79.2%나 됐다.지금은 거의 사라진 천연두도 기승을 부려 1910년에는 4백45명이 이 병으로 숨졌으며 56%가 10세미만의 어린이였다.특히 이 해에는 발육 및 영양부족으로 죽은 어린이가 2천81명이나 됐다. ▷산업◁ 1909년의 농가당 경지면적은 1.03㏊로 지난해의 1.29㏊와 큰 차이가 없다.논은 전남이,밭은 평북이 가장 넓었고 전국 논밭의 43%가 관청과 향교 등에 소속돼 면세혜택을 받았다.쌀생산량은 7백45만8천섬으로 지난해의 23%수준.반면 보리·조·수수 등은 지금보다 수확량이 많아 잡곡이 주식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0년의 가축수는 소와 돼지가 각각 현재의 25%와 10%수준인 62만8천마리와 57만6천마리였다.주요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말은 3만3천마리로 지금의 6배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형태의 공장들도 들어섰다.1910년의 공장수는 전국에 1백51개,종업원은 8천4백77명이다.한 공장에 56명이 근무한 셈이며 공장당 건평은 현재의 33%인 1백62평이다.정미·인쇄·방직·철공장이 주종이고 전국 공장의 38%가 몰린 경기도가 전국생산량의 58%를 차지했다. 상거래는 5일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다.시장수도 1908년 8백46개에서 3년 뒤 1천84개로 늘었다.농수축산물이 60%,직물이 21.7%로 거래품목의 대부분이었다. 1910년의 개인사업자는 14만여명으로 한국인 83·7%,일본인 15%였다.한국인은 음식점과 여인숙 등을 주로 했으며 일본인은 총포상과 화약상 및 고철상 등 13개 업종을 독점했다. ▷수도·철도·통신◁ 1910년까지 부산과 경성 등 4곳에 상수도시설이 갖춰지면서 1만6천여가구에 식수가 공급됐다.그러나 경성의 수도보급률은 18%에 그쳤다. ○전화 한통화에 2전 1899년 인천∼노량진 간 경인선을 시작으로 깔리기 시작한 철도망은 10년 뒤에는 1천86㎞(현재의 35%수준)로 늘어났다.하루평균 5천7백30여명의 여객을 수송했고,2천5백여t의 화물을 운송했다. 전화가입자는 1902년 3백10명에서 1910년에는 6천4백48명으로 21배가 됐다.경기(46.8%)와 경남(15.6%)이 전체의 60%를 넘었다.1구역의 전화요금은 한 통화에 2전으로 달걀 1개(1.5전)보다 비쌌다.요즘 달걀값과 비교하면 당시의 전화요금이 지금보다 비싼 셈이다. 교육·의료 보통학교도 있었지만 여전히 서당이 교육기관의 중심이었다.1910년 전국의 서당수는 1만6천5백40개로 한 서당에서 평균 9명이 배웠다.보통학교는 1백73개교로 학급당 학생은 34·3명이었다.여학생은 6%에 불과했다.결석률은 1911년의 경우 11·6%,중퇴율도 30% 가까웠으며 만학도가 많아 학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병원은 1백25개가 있었지만 한국인 소유는 고작 14개였다.그러나 1천7백38명의 의사 가운데 한국인이 1천3백44명으로 77%였다.의사 1인당 인구는 현재의 10분의 1수준인 7천6백60명이었다. ○목수 일당 쌀한말값 ▷물가·임금◁ 1898년 서울시장의 1등미 1섬의 가격은 8원(한가마 4원)이었다.닭 한마리는 0.2원으로 쇠고기 한근(0.12원)보다 비쌌다.요즘 화폐로 환산하면 쌀 한섬은 4만6천5백원,쇠고기 한근은 6백99원정도로 추정된다.당시 목수의 평균일당은 0.82원으로 쌀 1말정도를 살 수 있었다.요즘의 일당으로 구입할 수 있는 2.5말과 비교하면 당시 임금이 박했음을 알 수 있다.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공무원봉급은 격차가 더 심해 일본인이 2∼3배 많았다. ▷공공행정·치안◁ 1910년의 경찰은 5천8백81명으로 40%가 일본인이었다.특히 경찰의 고위직 대부분과 판·검사의 74%가 일본인으로 치안·사법계통을 일본인들이 거의 장악했다.다만 변호사의 경우는 한국인이 51명으로 일본인보다 20명정도 많았다. 1910년의 인구 10만명당 강도발생건수는 92년의 4배인 23.9건으로 개화기의 뒤숭숭한 세태를 반영했다. ○수입이 수출의 2배 ▷무역·금융◁ 1876년 개항이후 대외교역이 본격화되면서 교역량은 1910년까지 연평균 17%씩 늘었다.1910년의 수출은 1만9천9백원,수입은 3만9천7백원으로 수입이 2배나 됐다.엄청난 무역적자인 셈이다.일본과의 교역이 수출의 74%,수입의 60%를 차지했다.수출품은 농축산물·인삼·철광,수입품은 석탄·옥양목 등이 주종이었다. 화폐발행고는 1910년 2천16만4천원으로 8년 전보다 54.3% 증가했다. 은행예금보다 대출규모가 컸으며 금리도 1909년의 경우 예금 5∼6%,대출 11∼13%로 대출금리가 월등히 높았다. 1894년 당시 엔화환율은 1엔이 우리 돈 은화 5냥(50전) 수준이었다. ◎군예산이 전체의 25%로 최고/명성왕후 장례비 쌀4만섬값/재무예산 31% 대일채무상환/19세기말 국가예산 쓰임새 1899년의 우리나라 국고는 당시 화폐로 대략 6백40만원정도.예산편성은 지금의 재무부격인 도지부(탁지부)에서 했다.예산규모는 군부(국방부)·내부(내무부)·도지부·궁내부(청와대) 순으로 요즈음과 비슷하다.지세·가호세·관세 등으로 조달된 세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궁내부의 예산은 6만5천원.대부분 황제를 모시고 궁정을 유지하는 데 쓰였지만 제사비용도 1만5천원으로 23%나 됐다.1896년과 그 이듬해에는 일본인이 시해한 명성황후의 장례비로 농상공부 예산의 2배 가까운 35만5천원을 썼다.지금으로 치면 1백여억원규모며 당시 쌀 4만4천3백섬을 살 수 있는 돈이다. 1백30만원의 내부 예산 대부분은 지방의 행정기관과 경찰·감옥 유지에 쓰였다.서울시격인 한성부 예산이 내부 전체의 0.5%에 불과한 것이 이채롭다.창궐하던 천연두예방을 위해 종두접종을 의무화해 3천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탁지부 예산은 일본 차관금 상환여부에 따라 해마다 큰 차이가 났다.1899년의 예산은 2백여만원으로이중 대일채무상환용이 31%를 차지,가장 많았다.주로 정부의 채무를 갚는 데 예산이 집행됐다.각 도에서 징수한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든 돈도 10%정도인 22만원이나 됐다.세금으로 거둔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1.8∼2㎏이나 돼 수송비용이 많이 들었다. 군부의 예산은 전체의 25%정도로 지금처럼 가장 비중이 높았다.1899년의 예산 1백43만8천여원의 90%이상이 군대유지비에 쓰여졌다.이중 대부분이 수도군의 유지비로 쓰였다.법부(법무부)의 예산이 3만8천9백여원으로 가장 적었다.지금과 달리 교도소 등 감옥이 법부가 아닌 내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 러시아 첩보장교 대한제국에 오다/카르네프등 지음(화제의 책)

    ◎러 첩보장교 19세기 대한제국 여행기 19세기 말 대한제국을 여행하며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던 러시아의 육군대령등이 각각 쓴 여행기록 4편을 모았다.한국의 행정·사회체제를 비롯 지리·기후등 자연조건과 민중의 사는 모습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 당시 발생했던 일본인의 명성황후 시해,아관파천,동학혁명,갑오개혁등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보고들은 내용과 그에 따른 분석도 곁들였다.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세력경쟁을 하던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일본에 대한 민중의 혐오감을 강조하기도 했다. 기록자들이 군인·관리등 공직자였고 여행 목적이 정보수집에 있었던 만큼 기록이 자세하고 객관적이란 인상이다.사료적 가치와 함께 읽는 재미도 뛰어난 책이다. 이르계바예브등 옮김 가야미디어 5천원.
  • 백정기 의사/흑색공포단 결성…일밀정 제거 앞장(이달의 독립운동가)

    ◎상해서 학도병 구출 등 항일투쟁/일군 회의장 폭파하려다 체포돼 『나의 구국일념은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독립투사 구파 백정기의사(1896년 1월19일∼1934년 6월5일)가 1933년 3월17일 중국 상해의 한요릿집에 모인 일제 군간부와 중국의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비장한 결의로 떠나면서 남긴 유서다. 의사는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요리사등으로 가장해 숨어있던 일경과 일제헌병들에게 붙잡혀 1년3개월여 옥고를 치르다 끝내 조국해방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이 거사는 비록 미수로 끝났으나 한국인과 중국인의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의사는 명성황후가 일제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던 해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면서 독학으로 글을 익힌 의사는 일찍이 소년기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으며 23세 인 1919년 2월 상경,독립투사의 길을 믿아 나섰다. 서울에 도착한 의사는 사람들로부터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됐으며 곧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의사는 그 뒤 인천등지에서 무장독립활동을 펼치기 위한 준비를 하다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당시 북경에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신채호등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신채호가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크게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행동강령으로 채택하고 이를 통해 독립을 관철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들이 표방한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무지배,무권력의 민족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의사는 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때 호남성 동정호부근에서 이상적 농촌사회 건설을 위해 애썼다. 의사는 다음해인 1924년 일본 조천수력공사장을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도쿄에 잠입했다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북경에서 곧바로 상해로 옮긴 의사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힌 뒤 1925년 상해에서 5·30총파업이 실시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을 결성,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활용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1927년 복건성 천주시에서 중국인 동료들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양성소인 민단훈련소를 설립,농민 3천5백여명을 모아 농민자위대를 조직했다. 의사는 1930년 상해에서 동료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제거작전을 주임무로 삼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조직은 나중 일제에 징용된 한인학도병 귀순작전과 포로구출작전,항일전쟁참가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의사는 또 이 조직등을 골간으로 1931년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자유신문」을 발행,결사항일투쟁의지를 북돋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의사는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동지와 함께 파괴암살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밀단체 「흑색공포단」을 결성,일본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활동에 나섰다. 이 흑색공포단은 결성되자마자 일제 밀정들을 다수 처형하는등 맹활약을 펼쳐 일제를 긴장시켰다. 일제는 이처럼 비정규적인 유격전이 펼쳐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상해의 고급음식점 「육삼정」에서 군간부등이 참가한 가운데 비밀회의를 개최키로 했으며 이 정보를 흑색공포단이 입수,의사가 이 음식점을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의사를 비롯한 흑색공포단원들은 이 거사를 서로 자기가 적임이라고 주장,추첨으로 의사와 동료 이강훈이 행동대원에 선정됐다. 의사등 행동대원 2명은 거사일인 1933년 3월17일 육삼정 비밀회의가 시작되기 2시간전인 하오 6시쯤 폭탄과 권총,수류탄등으로 무장을 하고 현장에 도착해 정세를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들은 변절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사전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인력거꾼·요리사등으로 변장하고 수십여명이 현장주변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 채지 못해 그 자리에서 체포돼 거사는 불발로 끝났다. 의사등은 바로 일본으로 압송됐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의사는 1년3개월여 복역하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옥중에서 순국했다. 백의사의 유해는 적지 일본에 묻혔다가 광복 1년 뒤인 1946년 7월 이봉창·윤봉길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됐으며 국민장으로 천묘의식을 치른 뒤 효창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고향인 전북 영원면에는 도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순국기념비가 서 있다.
  • 제모습 찾는 경복궁후원(청와대)

    청와대 정문 앞 길건너 맞은편에 신무문이 있다.경복궁의 북문.항상 헌병 두사람이 서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곳이다.그 안에 청와대 경비업무를 맡고 있는 수도방위사령부 제30경비단이 주둔하고 있다. 30년 넘게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던 이곳이 내년말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청와대 주변 군부대의 외곽이전 방침에 따라 30단의 본부와 내무반이 모두 서대문구 현저동 제33단 자리로 옮겨가게 돼있어 경복궁의 후원으로 제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이곳의 넓이는 모두 1만2천평.61년 5·16 때 서울에 들어왔던 군부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경복궁후원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으로 됐다. 30단의 내부는 연병장과 테니스장일대,탱크·차량등이 있는 주차장일대,문화재건물일대등 3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이들 땅의 내력은 서로 다르다. 연병장지역은 경복궁 창건 때 궁중에 상이 나면 시신을 안치하는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건물 이름은 태훤전·영사재 등이었던 것으로 구전된다.그러나 정확한 고증자료가 없어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도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5·16 때도 지금의 연병장은 그저 빈터로 남아 있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조선조말에는 이곳이 궁중요리에 쓸 소나 돼지의 도축장으로 사용됐고,일부는 궁궐수비대가 궁중난방용 장작을 쌓아 놓기도 했던 곳이다.이를테면 궁중의 궂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그래서 터가 세다는 말도 들린다. 주차장지역에는 천체관측을 하는 간이대·규표등의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역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옛 문화재가 남아 있는 지역은 30단 본부건물 앞.청와대 쪽 담장을 등지고 팔우정.집옥재·협길당이 왼쪽부터 차례로 서 있다. 이들 건물은 모두 궁중도서관겸 서재로 쓰였던 곳이다.집옥재와 협길당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짜리 기와집이다.팔우정은 8각 2층의 중국풍 정자.한때 명성황후의 독서실로 이용됐다고 한다. 이곳에는 보현당이란 건물도 나란히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그러나 1917년 창덕궁에 큰불이 나 복원공사를 할 때 이 건물의 목재를 가져다 쓰느라 헐어버렸다고 문화재관리국의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다. 30단본부는 전두환전대통령이 이곳 대대장으로 있을 때인 지난 68년1월에 준공한 2층 슬래브 건물이다.12·12 때 신군부의 주도세력들이 모여 병력이동을 지휘했던 부대장실은 이건물 2층에 있다.또 하나 「현대사의 장」인 셈이다.따라서 이 건물을 과거사의 복원을 위해 헐지,아니면 「역사의 현장」으로 보관할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듯 하다. 이곳의 명물은 집옥재 앞에 있는 수십그루의 큰 은행나무들.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오래된 문화재들과 어우러져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이곳이 개방되면 시민들의 공간은 그만큼 더 늘어난다. 그러나 청와대 경호실의 부담은 훨씬 더 커진다.아무리 문민시대라 하더라도 군이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경비업무를 맡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무엇보다 군이 철수하면 청와대 경비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게 불어난다.청와대 경비업무의 일부를 맡고 있는 서울지방경찰청 제101경비단만 해도 연간 1백억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비슷한업무를 맡은 30단의 예산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 두번째 「힘의 속성」 개인전 유근택씨(인터뷰)

    ◎“역사화로 평가받고 싶다”/태극기·유적 등 소재 26점 선보여 지난 82년 당시 고교2년 재학중 국전에 입선,연령미달로 당선이 취소돼 화제가 됐던 유근택씨(30)가 두번째 개인전을 29일부터 금호갤러리에서 열고 있다. 오는 4월6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에서 유씨는 그동안 치중해온 「힘의 속성」을 첫 전시회보다 좀더 구체화한 수묵채색과 모필소묘작품 22점과 함께 목판화 4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품속에서의 힘은 단순히 사물을 그린다거나 옮겨놓는 작업보다는 체험을 통해서 구체화할때 그 이미지가 생생하게 살아난다고 봅니다』 일상속에 내재돼있는 사건들을 역사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치중하고 있는만큼 자신의 작품을 역사화로 인정받고 싶다는 유씨는 역사화가 현실과 맞물려있을때 힘을 발휘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따라서 3년전 첫 전시회가 주로 할머니의 대화등 단순히 시간성을 지닌 소재만으로 힘을 표출했던데 비해 이번 전시회는 정원 태극기 유적 물결등 역사의 흐름과 맞물리는 일상속의 구체적인 대상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직까지 역사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차츰 확신을 갖게된다』고 말하는 유씨는 앞으로 구한말 명성황후와 관련된 일들과 역사상의 죽음등 과거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대상으로 삼겠다고 작품계획을 밝힌다. 충남 아산태생인 유씨는 중학2학년때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고교시절 미술부를 창단해 개인전을 열기도한 인물로 홍익대 입학후부터 예술속에서의 힘에대한 속성에 꾸준히 집착해오고 있다.
  • 신춘 춤무대 한국춤 바람/태평무·승무·장고춤서 창작무까지 공연

    ◎김세일라·국수호씨 창작무용 선보여/윤덕경·이윤자씨 충주·정주·부산서 춤판 중견춤꾼들의 의욕적인 춤무대가 신춘무용계를 잇따라 장식,관심을 모으고 있다.김세일라(김세일라무용단 단장),국수호(중앙대 무용학과교수),윤덕경(서원대 무용학과교수),이윤자씨(부산대 무용학과교수)등이 그들.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이들은 모두 한국춤 분야에서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고있는 중진들이어서 한층 묵직한 무대가 될것으로 보인다. 「김세일라무용단」은 28·29일(하오7시30분) 93년 공연예술창작활성화 지원작품인 「파야」를 서울 국립극장 대극장무대에 올린다.신라시대 「파야」라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권력의 광기와 숭고한 사랑의 힘을 절제된 춤언어로 풀어낸 이 작품은 특히 산사에서의 종춤이 압권.이는 인간의 심리적 갈등과 고뇌를 불교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으로 한국무용만이 갖는 독특한 「정중동의 흐름」을 읽게한다. 국수호교수는 춤인생 30년을 결산하는 개인전「춤」을 오는 4월22일(하오7시30분),23일(하오4시·7시30분),24일(하오4시) 서울 국립극장 대극장무대에서 펼친다.우리 민속춤의 동작과 호흡법을 기초로 의욕적인 안무활동을 해온 그가 선보일 무대는 조선조 5백년의 진혼무인 45분짜리 대작「명성황후」를 비롯,독무「신무1­신고」,베트남전의 원혼들에게 바치는 「혼의 바다」등.이 가운데 특히 서울정도 6백년 기념무대로 마련된 「명성황후」는 한국판 진혼곡인 종묘제례악과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합성,동서양음악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윤덕경무용단」은 30일부터(하오7시)사흘간 충주(충주문화회관),대전(우송문화회관),정주(정읍사예술회관)등 3개시에서 지방순회공연을 갖는다.승무·태평무·살풀이·장구춤등 전통무용 외에 「보이지 않는 문」등 창작춤도 선보일 이번 공연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인 윤교수의 11년 안무생활을 중간점검해보는 무대.왕성한 실험정신으로 우리춤의 주제찾기에 골몰해온 그는 『죽음과 삶을 동질적으로 보는 한국인의 심성을 삶의 통과의례를 통해 표현하는데 안무의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이밖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수자로 우리춤의 맥을 잇기위해 노력해온 이윤자교수의 다섯번째 개인춤판이 29일 하오7시30분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이윤자 춤­화두」로 명명된 이번 공연에서는 우리 근대무용의 시조라할 한성준옹이 다양한 춤사위를 집대성해 만든 전통민속춤 「태평무」를 비롯,창작무용「제행무상,늘 새로운 현재여!」「히말라야 설음」등 3편의 작품이 선보인다. 한편 중견춤꾼들의 이같은 풍성한 봄맞이무대는 대부분 인간적 삶의 근원을 모색하는 완성도높은 대작들로 꾸며지고있어 한 무용가의 개인적 자화상을 엿보는것 이상의 철학적 의미를 갖게한다.
  • 임병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완의 의병조직 독립의군부 이끌어/12년 고종밀서 받고 대규모 전쟁준비/착수 2년만에 일경에 발각… 수포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돈헌 임병찬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되믿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장세력인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추진하다 일제에 붙잡혀 유배중 숨진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44세때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선비로서 지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제 불량배들에게 시해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66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의병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1851년 2월 전북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세살때에 천자문을 읽을 만큼 총명을 타고난 선생은 15세때 전주부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관직에 나섰으며 38세때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다음해 낙안군수에 임명됐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기로 하고 곧 관직을 청산,귀향해 회문산 북쪽 종성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일제를 물리칠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집안의 남녀종복을 풀어주는등 가산을 정리한 선생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1년전인 1904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으나 정부 대신들이 『시기가 이르다』고 만류하자 거사를 일단 중단하기도 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고는 즉시 의기투합,서로 사제의 의를 맺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포천에 살고 있던 면암은 같은해 정월무렵 영호남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 것을 도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문인들이 『호남의 한 선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자 선생을 믿아왔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따라 그해 6월4일 의병 80여명을 모아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게 들고 일어났다. 이 의병들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날로 태인지방을 휩쓸어 군기와 군량을 확보한데 이어 정읍·순창을 차례로 격파,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거사 5일만인 6월8일에는 순창에서 마주친왜군을 단숨에 물리쳐 곡성을 점령하는등 기염을 토했으며 의병수도 9백여명으로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면암과 선생은 6월12일 전주와 남원 진위대군사가 반격작전에 돌입하자 동포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조직한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전주진위대는 해산과정의 의병들을 공격,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했으며 선생과 면암등 13명이 전주진위대를 거쳐 일본군사령부에 잡혀가 7월9일 대마도 위수영에 감금됐다. 그뒤 면암이 옥중단식으로 순국하자 선생은 1907년 첫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불매동맹·국채보상운동등을 전개하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됐다.선생이 순무대장으로 지명된 것은 1906년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례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보냈으나 황제는 다시 밀소를 내려보내 그를 신임했다. 선생은 1914년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의군부의 이같은 계획은 그해 5월 일경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일경이 6월3일 총사령인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12일 금고 1년을 선고받은뒤 거문도에 다시 유배됐다.선생은 2년뒤인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아가씨와 건달들/화려한 출연진 넘치는 생동감

    ◎윤석화·박인환 등 나와… 새달6일까지 예술의 전당서 뮤지컬 전문극단인 에이콤(대표 윤호진)이 창단공연으로 「아가씨와 건달들」을 오는 2월6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95년 10월 국제경쟁력을 갖춘 창작뮤지컬「명성황후」(이문열작·윤호진연출)를 무대에 올리기 위한 전단계로 가장 자신있는 레퍼토리를 선정,자체제작에 나선 것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국내에서도 여러번 공연돼 인기를 끌었던 작품인데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원저작자와 정식 로열티계약을 맺고 극본과 악보등을 제공받고 전속오케스트라까지 동원,생동감을 더한다.특히 이번 공연에는 내로라하는 국내 연극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끈다. 1년전 연극공부를 하겠다며 미국에 갔던 윤석화가 돌아와 주인공 아들레이드역을 맡았다.박인환씨가 브로드웨이의 도박꾼 나산역을,국립극단 배우인 손봉숙이 구세군 선교사 사라역을,연극배우 이승철이 나산과의 내기 때문에 사라를 유혹했다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또다른 도박꾼 스카이역으로 나온다.최주봉 손숙 박웅 박봉서등 중견 연극배우들이 무대를 받쳐준다. 브로드웨이의 도박꾼 나산은 14년째 약혼중인 애인 아들레이드 몰래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뉴욕 최고의 도박꾼 스카이와 웃지못할 내기를 건다.엄격하고 쌀쌀하기로 유명한 선교사 사라를 유혹해 하바나로 데려갈수 있느냐에 1천달러를 건것.냉담하던 사라는 폐쇄위기에 처한 선교사무소를 구하기 위해 회계할 사람들을 모아주겠다는 스카이의 제안과 하바나까지의 동행을 맞바꾼다.도박자금도 없는데다 도박장에 경찰이 급습,곤경에 빠진 나산은 이 모임이 결혼을 앞둔 총각파티라고 둘러댄 아들레이드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하고 스카이는 사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박장에 몰려든 전국의 도박꾼들을 선교사무소로 데려간다.그리고 그곳에서 두쌍의 남녀가 부부로 태어난다. 공연은 평일 하오7시30분,수·토·일 하오3시 7시30분.공연문의는 562­5022∼3.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이인영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13도 의병 규합… 1907년 “서울진공” 시도/12월말 8천여명 연합부대 편성·지휘/양주서 집결…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무기·병력 열세로 일제에 패배… 한말 15년의병사 마감 『동포들이여,우리는 함께 뭉쳐 조국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우리는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을 전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27세 여주서 거병 이인영선생은 1868년 9월23일 경기도 여주군 군북면 교곡동에서 부친 이현상씨와 모친 한씨의 4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선생은 27세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등 압제를 강화해나가자 보다못해 유린석등과 함께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여주에서 의병 5백여명을 규합,왜군과 싸웠다.1896년 여름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의병해산령을 공포하자 선생은 할 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고 경북 문경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일제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킨 뒤 고종을 폐위하는등 더욱 오만무례한 행동을 자행,나라의 형세는 말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고 있을 때 강원도에서 의병 2천여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등이 선생을 통솔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으나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했다.이은찬등은 나흘동안을 유숙하며 선생의 결단을 촉구하자 선생은 마침내 허락을 하기에 이른다.1907년 7월25일이었다.선생은 즉시 원주로 가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됐다. 선생은 곧 국내외에 격문을 발송했다.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조국의 독립을 찾자는 내용이었다.해외동포들에게도 격문을 보내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 격문에 감동,의병으로 참가,그 수가 무려 1만여명에 달했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철원등 강원 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항전했다. ○일군 접전 38차례 선생은 시골에서 아무리 일군과 싸운다해도 서울을 일군이 장악하는 한 국권회복은 멀다고 판단,전국의 의병을 하나로 뭉쳐 서울로 진격시키는 전략을 굳혔다.산발적인 의병활동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통합,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방책이었다. 각 의병대장에게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라는 전갈이 전달된다.선생은 13도 창의대진소 원수부가 설치된 뒤 의병장들의 협의끝에 만장일치로 총대장으로 옹립됐다.선생도 이를 쾌히 승락하고 조직을 정비,관동군(강원도지역)6천여명과 진동군(경기·황해지역)2천여명을 축으로 연합대부대를 편성했다. 서울 진격일을 12월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 일대에 진주토록 했다. 선생은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명도 엄선했다. 선생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서울에 가 이를 인쇄토록 지시했다.인쇄된 격문은 김세영이 직접 서울주재 각국영사관에 전달하게 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한다.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싸웠음에도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 정규군대 훈련을 받은 일군 앞에는 불가항력이었다.선발대 의병은 항일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살총으로는 패전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선발대는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1907년 12월25일(양력 1908년 1월28일)이었다.선생은 허위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퇴한다.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간다. ○42세때 체포·순국 선생이 부친상을 치르고 있을 때 후임 의병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되었는데 일군이 산을 태워 공격하는 화공작전으로 나와 의병들은 1908년 5월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되는 신세가 됐다.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공략계획은 이로써 무산돼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시영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북 상주,충북금계동으로 피신생활을 하면서 3년상이 끝나는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7일 금계동에서 9명의 일군헌병에게 붙잡혔다. 일본 헌병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 선생은 『당시 전황이 그러한데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선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다』고 답했다.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9월20일 사형이 집행됐다.42세때였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본지 연재 새 장편소설 「찬란한 비명」 집필 신봉승씨

    ◎“역사에 묻힌 선각자들의 삶 조명”/극작가서 소설가로 화려한 변신/사실에 90% 기초… 오류없는 역사소설 지향 인기극작가 신봉승씨(61)가 다음달 1일부터 서울신문에 연재하는 장편 역사소설 「찬란한 비명」을 데뷔작으로 본격소설가로의 대변신을 꾀한다. 「조선왕조오백년」으로 TV사극의 실록화를,「소설 한명회」로 역사소설의 사실주의를 선언한 그가 이순의 나이에 그동안 천착해온 장르를 바꿔 새로운 분야의 개척을 시도하는 쉽지 않은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독자들에게는 「극작가 신봉승이 신문연재소설을 집필한다」는 뉴스만으로도 화제거리인 셈이다. 『역사는 그 사실자체만으로도 어떤 픽션보다 훨씬 드라마틱합니다.그러나 그동안 대부분의 역사소설이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은채 야사위주로 흘러온게 사실입니다.「찬란한 비명」은 오류없는 역사소설을 지향,90%의 사실에 10%의 허구를 가미해 역사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는 명제를 독자들에게 보여줄 생각입니다』 그는 역사학자는 물론 아니다.그러나 8백87책이나 되는 「조선왕조실록」을 4번이나 독파한 전문가다.50대에 대학원에 진학,역사소설의 역사적 오류를 지적하는 학위논문을 써낸 집념의 만학도이기도 하다.그래서 역사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역사지식을 소설로 전달해 보겠다는 것이 이번 작품집필의 저의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이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이순신·세종대왕등의 인물이 선정되고 있어요.하지만 1천2백회정도로 예정하고 있는 「찬란한 비명」의 연재가 끝날 즈음이면 이 소설의 주요등장인물인 박규수·이동인·유대치 같은 묻혀 있던 선각자들이 존경받는 인물로 부상될 것』이라는 의지를 내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본격 국민소설로 기록될 이 작품은 18 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타면서 시작되는 병인양요로부터 19 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조인되기까지의 39년간의 격동기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이 39년은 평온기의 3백90년에 해당할만큼 엄청난 회오리가 한반도를 할퀴고간 시절이었다.임오군란,명성황후시해사건,갑신정변,아관파천,청일전쟁,노일전쟁등 대파노라마가 이 소설에서 다뤄질 주요 사건목록이다.여기에 박규수·오경석·김옥균등 일세를 풍미한 개혁의 주역들이 실명으로 등장,흥미진진한 인물사가 펼쳐진다. 『작중무대는 한반도안에만 머물지 않을 겁니다.미국·일본·중국등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이면 직접 찾아가 생생한 역사현장분위기를 살리면서 그 흔적을 더듬어 볼 작정입니다』 지난61년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30여년 동안의 작가생명을 걸고 새로운 작업에 뛰어든 「소설가 신봉승」이 그려낼 개화기 선각자들의 목숨을 건 찬란하고 아름다운 희생의 공과 과가 이 한편의 소설로 가려질 것으로 기대된다.
  • “도심의 정원” 홍릉수목원/울창한 숲·꽃 뒤덮인 오솔길 “일품”

    ◎초롱꽃·고로쇠 등 식물 2천종 서식/진달래·개나리 만개… 봄내음 흠씬/70년만에 무료개방… “대중교통 이용해야 편리” 어쩌다 하늘마저 찌푸릴 참이면 서울은 이제 숨쉬기조차 힘든 도시다.먹고살기도 힘들던 시절에야 무심코 넘겼지만 요즘 도시인들은 다르다.주말의 서울 외곽도로는 맑은 공기를 찾아 교외로 빠지는 인파들때문에 미어터질 판이다.교통체증이 싫다고 모처럼의 주말을 방안에만 처박혀 지낼수는 없는 노릇.가볍게 떠날 수 있는 산책길을 찾아보자. 지난 11일 70년만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홍릉수목원(동대문구 청량리 207)은 바로 도심속에 감춰진 우리의 「정원」이다.울창한 숲과 갖가지의 화초들로 꾸며진 산책로를 걷다보면 잠시 쉬어갈수 있는 벤치가 있고 거기에 맑디맑은 약수까지 솟아오른다. 홍릉은 본래 일본이 보낸 자객의 손에 비참히 시해된 고종황제의 왕비 명성황후(민비)의 무덤자리였다.고종이 서거한 1919년,임을 따라 왕비의 묘도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됐으나 그 터는 아직도 홍릉이라 불린다.이후 일제가 이곳에 임엄시험장을 개설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은 산림청과 임업연구원이 들어서있다. 홍릉수목원의 총면적은 13만2천평.동대문운동장 3개가 한꺼번에 들어가고도 남을만한 규모다.이안에 70년동안 국내외 각지에서 들여와 재배한 식물이 2천35종이나 자라고 있으며 서식하는 야생동물들도 69종에 달한다.현재 임업연구원이 일반에 개장한 면적은 시험림과 연구원부지를 제외한 3만여평규모이나 점차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녹지라면 척박한 생활에 찌든 도시인들이 잠시 숨돌리고 가기는 충분하다.입장권을 살 필요도 없는 정문을 지나 2백m만 올라가면 오솔길 모양의 산책로가 시작된다.팻말은 「자연관찰로」라고 되어있지만 주변의 갖가지 식물을 관찰하고 안하고는 지나가는 사람 마음대로다.길 양옆으로 초롱꽃,상사화,뱀딸기,은방울꽃등 수백종의 야생화가 심어져 있고 안쪽에는 상수리나무,떡갈나무,참개암나무,고로쇠나무등 어디선가 본것 같이 낯익은 활엽수들이 반긴다. 광릉과 달리 홍릉수목원의 관찰로는 평탄하고 완만해 숨가쁠 일이없어 좋다.아직 이른 철이라 녹음의 싱그러운 맛을 느끼지는 못해도 곳곳에 만개한 개나리,진달래가 봄내음을 전해준다.자연관찰로를 타고 천천히 한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가량.관찰로 곳곳의 샛길을 두루두루 거치면 2∼3시간가량 소요된다. 개장시간은 산림의 보호를 위해 매주 일요일 상오7시∼하오7시사이로 제한하고 있다.도시락,과자,음료수등 먹을거리 일체의 반입을 금지하며 제아무리 애연가라도 흡연은 안되므로 각오해야 한다.대신 구내식당이 있어 간단한 요기가 가능하며 자연생수를 무료로 공급한다. 수목원은 청량리역에서 과학기술원방면으로 20분가량 걸어 올러간 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주차장이 없으므로 반드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한다.지하철은 1호선 청량리역 하차,버스는 일반버스의 경우 133,134,803번,좌석버스 134,720번을 타고 홍릉에 내리면 된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임업연구원 기획과(961­2522∼5)로 문의하면 친절히 안내한다.
  • 뮤지컬 개발단체 「에이콤」 설립/연극인·3개기업·건축가 참여

    ◎홍보·기획·판촉 전문기획팀도 운영 뮤지컬 연극개발을 위한 본격적인 제작단체인 에이콤이 연극인,기업인,건축가들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 설립됐다. 지난 5일 서울 강남에 사무실을 연 에이콤은 연극연출가 윤호진씨(단국대 교수)를 대표로 출범했다.그리고 연출가 정진수(성균관대교수)·손숙씨등 연극인과 조창걸(주)한샘사장,이상열 (주)대농사장,이수문(주)한강사장등 기업인과 김석철 아키반 건축연구소 대표등 6명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이밖에 홍보·기획·판촉·관객개발및 관리를 위한 전문기획팀을 따로 둬 운영하게 된다. 에이콤은 제작의 영세성,훈련된 전문배우의 부족,무대기술 부재등 그동안 우리나라 뮤지컬 연극발전의 장애요인들을 순차적으로 해소,뮤지컬을 정착시킴으로써 연극의 직업화와 전문화를 실현시키는데 그 설립목적을 두고 있다. 에이콤은 오는 95년중으로 국내공연뿐 아니라 외국무대진출을 목표로 한 창작뮤지컬 개발에 착수,소설가 이문열씨에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소재로 한 뮤지컬 극본의 초고를 의뢰해놓은 상태다.또 뮤지컬「레미제라블」「미스 사이공」의 작곡자인 프랑스의 클로드 미셸 쇤베르씨에게 작곡자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해놓고 있다.쇤베르씨는 지난주 한국 연극계를 둘러보기 위해 한국을 다녀갔기 때문에 성사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에이콤은 창작뮤지컬 「명성황후」(가제)공연에 앞서 94년중에 외국의 유명뮤지컬 작품을 로열티 계약에 의해 국내에서 공연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한편 뮤지컬연극의 단계적인 발전을 위해 서울시내에 훈련및 사무기능을 갖춘 「에이콤센터」를 마련하고 내년 상반기쯤 공개 오디션을 거쳐 기성및 신인 연기자 30명정도를 모집,집중적인 연기훈련을 실시할 방침이다. 이밖에 중간규모의 뮤지컬을 제작·장기공연할 수 있는 중극장과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전문소극장및 무대시설을 포함한 복합공연공간과 뮤지컬 연극연구소 설립도 추진중이다.
  • MBC,교포사학자 신기수씨 소장 필름·사진 입수

    ◎40년대 재일한인 생활상 생생/징용·학병·조선인 빈민촌 수록/대원군·명성황후 등의 사진도 해방전후 재일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희귀영상자료가 MBC방송문화연구소 자료부팀에 의해 발굴되었다. MBC 방송문화연구소(소장 김정환)는 오랜 시도끝에 일본 오사카에서 청구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교포사학자 신기수씨로부터 한국관련 영상자료(약1시간분)와 사진자료를 전격 입수,지난 1일 이를 공개했다. 신씨는 그동안 꾸준히 한국관련 영상사진을 수집,보관해 왔으며 특히 임진왜란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통신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한 재일 사학자. 이번에 MBC가 입수한 영상필름의 주요내용은 19 40년대 재일동포에 관한 것으로 유바리탄광 징용,학병 징병신체검사,관동대지진등과 60년대초 오무라수용소,재일조선인 거주지였던 하카타 빈민촌,북송자 가족의 이별,니이가타항등이며 서울과 근교의 풍경사진,대원군·명성왕후등 인물사진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이와관련 자료부의 김세화 부국장은 『일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사회상과 관련된 자료가 아주 많지만 자료의 소유자가 주로 조총련계통이어서 접근하기가 무척 어려우며 입수하기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국장은 『이들 자료의 대부분」이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과 연루된 것들이어서 계속 수집해 나가야한다』덧붙였다. 한편 MBC자료부는 지난 91년에도 구소연방중앙기록보존소에서 6·25전쟁뒤 북한의 실상과 윤봉길의사 상해의거 현장등을 포함한 2시간 길이의 필름을 입수,「뉴스데스크」를 통해 공개한바 있다.
  • 동요/정복근 극작가(굄돌)

    이삼십년전 만 해도 동네 골목길에서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을 하거나 줄넘기 하는 광경은 쉽게 볼수 있었다.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닌 밑도끝도 없는 노래에 맞춰 뛰고 노는데 대도시의 아이들이나 산간벽지의 아이들이나 비슷한 시기에 유행하는 그런 놀이 노래를 아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 배웠는가 물어보면 모두 친구들에게 배웠다고 웃고 마는데 내게는 늘 그런 노래들의 출처가 궁금했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시대를 예언하거나 민심을 현혹시키는 참요가 끼어들기도 했다는 기록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선화공주를 얻기위해 백제의 무왕이 퍼뜨렸다는 서동요의 예가 그렇고,장희빈의 몰락을 미리 알린 장다리노래도 있으며,동학혁명을 예언한 파랑새노래도 있다.대한제국의 몰락을 예언한 술래백정노래도 있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에 내내 시중과 궁중에서까지 유행했다는 단속곳노래도 있다. ∼여의사 단속곳 다 타며는 자미사 단속곳 내 해주마∼라는 가사의 노래가 유행했었는데 나중에 황후의 불탄 시신을,다 타고 한뼘 남은 단속곳 자락으로 확인했었다는 이야기를 상궁 한분으로 부터 들었었다. 해방 직후에는 또 미국에 대한 경계심,일본의 대두를 알리고,소련에 속지말 것을 당부하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마음에 파고 드는 삼박자의 선율에 간결하지만 함축성 있는 가사를 담아서 퍼뜨리는 이런 노래들의 드러나지 않은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오랜 관심이 작품으로 맺혀지기도 했지만 궁금증은 아직도 남아서 나는 이즈음도 때때로 주택가나 아파트 당지의 텅빈 놀이터를 바라보곤 한다. 일년내내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 처럼 내게도 숨어서 세상을 지키는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행복한 환상이 있는 것 같다.
  • “명성황후 시해 일제정부가 주도”

    ◎범인들,만행성공뒤 “출세가도” 질주/어제 97주기… 「역사연구서」 발간 1895년10월8일 새벽6시가 조금 지나는 시각.명성황후 민비가 거처하고 있는 경복궁 건청궁 곤령합에 일본군복을 입은 장교가 지휘하는 20여명의 낭인들이 일본도를 들고 난입했다. 8일은 바로 명성황후시해 97년이 되는 날.일본의 역사말살과 조작으로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에 묻혀져 있던 이 문제를 재조명한 역사연구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출판기념회가 이날 하오4시 경북궁내 구민속박물관 시해현장에서열렸다.「만행을 자행한 자들은 누구였으며 이를 배후에서 주모한 시해의 주범은 과연 누구였나」를 이 책은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시해를 모의하고 지휘한 주범은 이노우에 가오루(정상 형)전주한전권공사를 중심으로한 일본정부였다. 또 일본인 낭인으로만 알려진 폭도의정체도 단순한 깡패가 아닌 미국 하버드대학과 일본 동경대학법학부를 졸업한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들은 그후에 내상,브라질공사,중의원 의원,루마니아전권공사등을 지냈다는 가공할 사실도 추모회를 겸한 출판기념회에서 새롭게 폭로됐다. 미국공사관의 10월10일자 보고서와 영국영사보고등 당시 외국공사의 보고서와 목격자진술을 토대로 97년전 오늘에 일어난 사건현장을 재구성해보면 치가 떨린다.일본정규군의 엄호하에 건청궁을 통해 들어온 이들 무리는 곧바로왕비가 피신해있던 곤령합내 옥호루로 몰려들었다. 곧바로 왕비를 시해한 이들은 시신을비단 홑이불천에 싸서 근처 숲속으로 끌고가 시관도 주저하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10년에 걸친 연구를 뒷받침한 명성황후추모사업준비회(대표 이영숙)가 마련했다.참석자들은 준비된 제단에 꽃을 봉정하고 논문을 영전에 바쳤다.조완규교육부장관,고병익방송위원장,김옥균대주교,알렉산드러 파로프주한러시아공화국대사를 비롯,논문의저자인 최문형한양대교수등 2백여명의 각계참석자들은 97년전 이곳에서 비명에 간 왕비의 넋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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