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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건독재자/개혁정치가/대원군 상반된 평가

    ◎사후 1세기… 근대사연간 「…한국현대사」서 쟁점화/비판/대외적 위기 모면위해 쇄국정책/긍정/명 신종 모신 묘 폐쇄 등 자주정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고루하고 완고한 봉건적 폭군·독재자인가,과감한 실천력을 가진 자주적 개혁정치가인가.사후 1세기가 가까운 지금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과 비판이 엇갈리는 이중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즉 대외정책면에서 쇄국책은 제국주의열강의 침략을 물리쳐 자주성을 고취시켰으나 내치면에서는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한국근대사연구소가 최근 펴낸 「쟁점 한국근현대사」창간호에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대한 역사학계의 이같은 상반된 견해를 쟁점화,그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해 내는 새로운 인물연구를 시도했다.홍순창전영남대 사학과교수는 개혁정치가의 시각에서,성대경성균관대 사학과교수의 경우 보수정치가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홍전교수는 「대원군 이하응 그는 개혁정치가였다」에서 격동기였던 한말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주역으로 등장했던 대원군집정의 당위성과 임오군란으로 인해 재집권한 배경,청군으로 납치된뒤의 세론등을 분석한뒤 긍정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우선 대원군집권의 역사적 상황으로 사교로 규정된 천주교의 만연,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왕도정치의 위기,삼정의 문란등 정당성을 논거했다.특히 서원철폐시 명나라 신종을 모신 화양동 만동묘를 폐쇠한 것은 대원군이 종래 중국에 대한 사대정치로부터 자주정치에의 일대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강압적인 개혁정치는 『흔미속에서 갈길을 잃은 한말의 우리 민족을 영도한 지도자상』으로 보았다.또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단순한 쇄국책이 아니라 위정척사론을 사상적 배경으로한 쇄국양이정책으로 한민족의 자존을 위한 반침략적 애국애족사상과 결부돼 결국 한말의 민족정신으로 고양됐다』고 평했다.임오군란이후 대원군의 재등장은 국내정치의 부패를 일소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략적 행동에 단호하게 대처한 내외책 또한 국민에게 용기를 주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한 성공작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반해 성교수는 대원군정권 성립의 역사적 의의는 『봉건지배자 즉 양반관료지주들이 그들의 경제적 신분적 기반인 봉건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독재자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대원군집정후 최초,최대의 과업이 왕조체제를 강화하고 왕권의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일이었음을 그 예로 들었다.그리고 비변사폐지및 의정부기능회복과 삼군부의 부활,종친세력의 대거 중용등도 자신의 지지세력포섭과 장악기도의 맥락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주장이다.또한 임술민란직후 나타난 민중의 변혁에네르기를 새로운 사회건설로 영도할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즉 대원군정권은 『본질적으로 봉건귀족양반의 계급적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쇄국양이정책 또한 대외적 위기에 몰린 대원군정권이 봉건제도수호를 위해 위정척사사상을 끌어 들여 전개한 반역사적 보수정권』으로 규정했다.
  • 발렌타인 데이가 무엇이길래(박갑천칼럼)

    『직제학 김천령이 기유년의 진사시에 삼도부로써 첫째를 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었다.다만 고구려국 계통을 서술하면서 「주몽이 빛나는 공업을 열었고 동명이 그 조상의 업적을 이었다…」고 했는바 주몽이 고구려 시조로서 19년을 왕위에 있다가 죽었고 아들 유리왕이 즉위하면서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호로 하였으므로 주몽과 동명은 한사람이다.그런데 인용의 그릇됨이 이에 이르렀다.당시의 시관이 살피지 못해 뭉개지 않았고 사림이 전해가며 외면서도 알지 못한다.우리나라 사람의 본국 사적에의 자세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가소롭다』(김정국의 「사재척언」).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부족해서 명인)의 성명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한 경우가 많다.안시성주를 두고 말하더라도…(중략)성주의 성명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빠뜨려져 있으니 실로 애석하다.「월정만록」(월정만록:월정만필이라고도 함.조선 선조때의 문신 윤근수의 글)을 상고해 보면 「임진란 이후 명나라 장수·사졸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나왔는데 그중에 오종도란 사람이 있어 내게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이니 태종동정기에 보인다고 했다」는 대목이 있다.…(중략)아,안시성의 공렬은 우리 역사에 압두하고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실로 그 이름을 전송해야 마땅하겠건만 중국인들이 아는 성명을 우리나라에서는 망연히 알지 못한다.…(후략)(홍만종의 「순오지」상).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리것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냐를 말해 주는 옛글 두편을 줄여서 옮겨보았다.이런 까닭으로 해서 우리의 역사를 중국이나 일본의 전적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사가 서거정이 「동인시화」(동인시화)에서 지적한바 있듯이 중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러기도 했고 기록에 대한 의식의 박약,잦은 병화등등에 연유한다 할 것이다.이러한 생각의 줄기를 잇고 있음인가,오늘에도 내것에 어둡고 내것이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사례들은 한둘이 아니다.일상의언어·문자 생활부터 그렇다. 이른바 「밸런타인 데이」라는 것도 그런 점에서 많이 불쾌하게 하는 것중의 하나이다.일부 서양나라에서의 풍습이 우리한테 들어와(그것도 일본을 통해)젊은 남녀들의 명절같이 되어오고 있는게 아닌가.상혼이 나서서 부추기는데 따라 엉덩춤을 춘 결과인데 올해 또한 백화점·호텔들이 대목을 볼양으로 법석대고 있다.문득 그리스신화에서의 헤르메스가 떠오른다.상업의 신이면서 도둑의 수호신이기도 한 올림포스 12신의 하나.그는 어째서 장사와 도둑을 함께 관장하게 되었던 것일까. YMCA등에 의해 밸런타인 데이 추방운동이 벌여져 오고 있다.올해는 또 정월 대보름을 부럼 선물하며 사랑 고백하는 날로 삼자는 움직임도 있었고.남의 것도 내것의 바탕위에 받아들이게 돼야겠다.
  • 임란 개인체험 다룬 실기문학 재조명(건널목)

    ○단대 황패강교수 지음 ○…지난해는 임진왜란발발 4백주년이 되던해.그 역사적 의미를 재검한 학계의 움직임이 결실을 거두고 있는 가운데 「실기」를 통해 우리 선인들의 임진왜란체험을 보다 냉정하게 살펴보려는 저서가 나와 주목을 끈다. ○…한국고전문학연구에 일가를 이루고 있는 국어학자 황패강교수(단국대)가 펴낸 「임진왜란과 실기문학」은 이같은 맥락에서 우리 학계에 새로운 학문적접근방식을 제시하고 있다.황교수는 이 책에서 유성용의 「징비록」,이순신의 「난중일기」등 이미 알려져 있는 실기문학의 대표작을 비롯,조정의 「임진위란일기」,오희문의 「*미록」,유진의 「임진록」,정영방의 「임진조변사적」등 6작품을 검토했다. ○정사와 달리 주변사다뤄 ○…「실기」란 「정사」와 달리 작자자신의 주변적 사실과 개인적인 생활현실을 다뤘기 때문에 사회전반적인 문제나 역사적 소재취급에는 제약이 따르게 마련.필요한 사회의 정보를 대개 풍문이나 전문 혹은 문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고 있어 사실 전달이 불완전하거나 부정확할수 밖에 없다.그러나 「정사」를 공식사건의 추상적인 기록이라한다면 「실기」는 전쟁을 몸으로 겪은 각 계층인들의 각이한 체험을 사실적이고 감성적으로 고찰한 것이다.예를 들어 유진의 「임진녹」에는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를 거두는 마을주민들의 훈훈한 인정담을 통해 전쟁의 참화에도 우리 고유의 온정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사회 병리도 묘사 ○…따라서 황교수는 이들 「실기」에서 「정사」에서 간과하고 있는 문제들을 들추어냈다.이를테면 개인들의 사소한 신변문제를 통해 위정자와 관리들의 허세와 무능,의병에 대한 부정적 시각,명나라군대에 대한 비판등 당시 조선사회의 감춰진 병리를 드러내는 소중한 우리 문학이라는 것이다.
  • 이약동/“치부는 수치”… 철저히 담싸(역사속의 청백리)

    조선조 성종때 이조참판·지중추부사·제주목사등을 지낸 이약동(1416∼1493)은 남에게는 너그럽고 후했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격한 자세로 일관했다. 한때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올 정도로 당대에는 모두가 우러러 볼 정도로 경사에도 해박했으나 재물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지냈다. 더욱이 치부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지냈기 때문에 국가에서 지급하는 봉록이외에는 일체 사리를 탐하지 않았다.평생 청백리로서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 훈계할 때도 「김보기를 돌보듯 하라」고 일렀다. 그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그는 사냥을 나갈 때면 항상 채찍 하나를 들고 다녔는데 임기가 끝나 떠나올 때 그 채찍마저도 사사로이 챙길 수 없다며 벽위에다 걸어두고 떠났다. 이약동이 떠난 뒤 제주도 사람들은 그 채찍을 보물처럼 간수하였다가 목사가 새로 부임해올 때마다 그것을 꺼내 놓았다.세월이 흘러 그 채찍이 좀이 먹어 부식돼 버리자 화공을 시켜 그 채찍의 형상을 그리게 한뒤 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이는 이약동의 청렴한 정신과 선정을 기리는 동시에 후임자들도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한 것이다. 제주에서 떠나올 때 그가 탄 배가 바다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빙빙 돌면서 요동을 쳐 사공들은 모두 겁을 먹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게 됐다.이때 비장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제주도민들이 목사님의 선정과 맑은 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김으로 만든 갑옷을 한벌 지어 보내면서 훗날 갑옷을 입으실 때 꼭 입어주십사하는 당부의 말이 있었다」며 그 갑옷을 조심스레 꺼냈다.이에 이약동은 진노하며 그 갑옷을 즉시 바다에 던지도록 했다.그러자 한순간 바닷물이 잠잠해지면서 배는 무사히 육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이는 이약동의 청렴결백한 정신자세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이나 제주도 사람들은 지금도 금갑옷이 버려진 곳을 투갑연이라고 부르며 그를 기리고 있다.
  • 귤향 짙은 노년이고자(박갑천칼럼)

    『하루해가 벌써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해가 장차 저물려 해도 귤 향기 더욱 꽃답다.이러므로 일생의 말로인 만년은 군자가 마땅히 정신을 다시 백배할 때이다』­홍자성의 「채근담」:원문생략=조지훈번역. 노년이 아름답고 향기가 번져나야 할 것을 가르치는 글귀이다.노년으로 될수록 꼭두서니 저녁 노을을 더욱 선연한 것으로 물들여야겠다는 권유이다.지나치게 짙거나 살지거나 맵거나 단것은 참다운 맛이 아님을 깨단하면서 담담할 줄 알라는 타이름이다.지나치게 영걸스럽거나 기괴하거나 우뚝하거나 판이한 것은 지인의 경지가 아님을 터득하면서 평범할 줄을 알라는 충고이다.고요하게 승화된 대단원의 막을 마련해 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젊은 날이 제아무리 화려했어도 노년에 구름끼고 안개 덮인다면 아름다운 인생이랄 수가 없다.그것은 젊은 날이 화려했던 그만큼 도리어 더 슬픈 인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그래서 사람이면 누구나 향기로운 노년을 생각한다.수신의 경지로도 그러하지만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가정적·물질적으로도뒷받쳐져야 하는 것.이게 누구에게나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더구나 오늘의 사회풍조는 노년이 서러운 쪽으로 자꾸 기울어 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애민육조」는 「양로」로부터 시작되고 있다.­『양로의 예가 폐지된 후에 백성들은 효도를 일으키지 않으니 수령이 된 사람은 다시 양로의 예를 거행하지 않으면 안된다』.정다산은 조선초기에 노인들 위로하는 기로소 설치한 일을 회고하면서 동월의 『나라 안에 80세된 노인이 있으면 남녀 모두 연회를 베풀어 임금의 은혜를 널리 입게 한다』는 「조선부」를 소개하고도 있다.동월은 성종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사람이다. 『백성들은 효도를 일으키지 않으니…』했지만 정다산 시대만 해도 이땅의 노년들은 외롭고 슬프지 않았다.정다산같은 목민관도 있었고 사회의 전반적 기풍이 경로효친을 숭상했으니 오늘의 시대상황과 더불어 비길 일이 아니다.직계 존비속간의 살상행위까지 예사롭게 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세태.그래서 「귤향내 짙은 노을」의 노년맞이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간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구조가 선진국형으로 되고 있다는 보사부 발표가 나왔다.이는 다시 말해 유년인구 비율은 낮아지면서 노년인구 비율은 높아진다는 것을 뜻한다.환갑잔치하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노령인구가 늘어났음은 누구나가 실감하고 있는터.그에 따라 쓸쓸하고 서러운 노년들도 불어난다.수즉다욕(수칙다욕)이면 죽느니만 못한 법.오래 살되 건강하고 보람에 찬 나날일 수 있어야 한다.그게 참된 복지국가의 모습이다.
  • 배(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20)

    ◎임진왜란때 태극기 단 전선/명 종군화기의 노량해전그림에 원형/중국·왜선과 구별… 국가상징물로 인식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였다.당시 참전했던 명나라의 한 종군화가가 6.5m의 화폭에 시간상으로는 3개월,거리로는 약30㎞에 해당하는 전투상황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여기에 태극기의 선구적 원형이 나타나 있다.이 태극기는 중국선박과 일본의 선박으로부터 한국의 선박을 구별하기 위해 쓰여진 국가의 상징물이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증거로 보아 한국인은 오래 전부터 태극을 국가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그림속에는 태극 말고도 네 귀퉁이에 구름의 모양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태극기 괘의 위치와 일치한다. 이 해전도를 그린 사람의 임무가 종군화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전쟁상황을 그대로 그린 것이며 화면에 나타난 전투지역이 실제 노량지역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태극기의 기원이 조선 수군의 군기에서 유래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1882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군선과 상선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었다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현재 해군사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통상장정」은 중국정부가 외국과 맺은 조약,외국사신의 서신등을 모아놓은 것으로 이속에 각국의 국기 59종 중 아름다운 태극기가 수록되어 있다.통상장정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1874년 태극기를 포함한 각국의 국기가 청국에 전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총이아문발신,동치13년(1874)3월9일 미국공사의 서신을 접수하였다.근자에 여러 나라의 대표가 모여서 정한 18장의 기의 양식이 있는데 각장마다 그 그라의 음을 알려준다.이것은 서양에서 선박이 운항할시 그 의사 전달방법을 본따 정한 것이다.우리나라에도 기보 한권을 보내왔으니 잘 살펴 정리해두면 중국배들이 그 방법에 따라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동치13연5월27일,남북양대신수신』 위글의 내용은 병선과 상선이 항해할 때 국가를 식별하고 의사전달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국제신호서를 미국공사가 청국 총리아문에 전달한 것으로 서신의 성질상 활용부서인 남북양 함대로 재 시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당시 미국은 동아시아를 거대한 무역대상국으로 보고 국제관례상 필요한 국기를 수집하여 그것을 국제신호서에 게재하여 사용하던 중 이미 외교관계가 수립된 중국에 국제신호서를 전달하여 항해시 활용토록 한 것이다. 당시 미국과 우리 나라는 외교관계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태극기를 달고 중국의 항구에 정박한 우리나라 상선에서 태극기를 입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노량해전에 나타난 태극기와 통상장정의 태극기는 괘의 모양을 제외하고는 노랑 바탕에 중앙의 태극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태극기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무엇보다도 삼국이 노량해상에 집결하여 국운을 가름하는 전쟁에서 중국·일본함대와 구별하기 위해 선명한 태극기를 우리나라 군선에 게양하였다는 것은 민족 자존의식을 나타낸 것이며 이런 의식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생각할 때 노량해전에 휘날린 태극기는 민족 혼을 일깨우는 우리나라의 영원한 표상이 될 것이다.
  •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부총장 조이제씨

    ◎“동서문물 접촉기회 마련 앞장”/새 문화창조에 창의력 쏟을때 『우리나라가 동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접촉해 활용할수 있도록 문호개방에 더욱 앞장서겠습니다』 지난 20년동안 우리나라 학생·교수등 3백여명을 미국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지원해온 이 센터 부총장 조이제씨(56)가 24일 정부로부터 민간인 최고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조씨는 『중국5천년사중 최대의 전성기는 당시로서는 먼 지역이었던 스리랑카,마다가스카르섬까지 함대를 파견했던 명나라시대였다』면서 『그 어느때보다도 외국과의 문물교류에 적극 나설 때가 지금』이라고 역설했다. 『우리나라는 과거 중국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소화·흡수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이를 일본에 전파했으나 요즘에는 창의력과 지구력이 모자라고 사회기강까지 해이해져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같습니다』 조부총장의 주선으로 이 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인사는 박준규국회의장 정원식전국무총리 남덕우전국무총리,김만제전부총리,최창윤민자당총재비서실장 등으로 사회각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학 사회학 인구학 등 3개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조씨는 지난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두만강개발 국제학술회의」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동생 백제씨(54)는 현 통신개발연구원장이다.
  • 국수 맛·가늘기 비결은 어디에/명대 「영수면」 미국서 심층 연구

    ◎20년전 서양에 소개… 곧 라면인기 뒤이을 듯/야구공만한 크기의 밀가루 반죽/머리칼굵기 면발 2,048가닥 뽑아 미국 식품화학계는 최근 중국의 전통요리인 용수면(소면의 일종)의 국수발을 가늘고 길게 뽑아내는 원리와 어째서 이 국수는 쫄깃쫄깃하고 매우 고소한 맛을 지니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20여년전부터 서양사람들에게 「용의 수염을 뽑아 만든 국수」로 소개된 용수면은 16세기인 명나라때 중국 동북지방의 산동성과 화북지방의 귀족들이 즐겨 먹던 궁중요리의 일종이다. 지금까지 식품화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용수면은 밀가루 반죽안에 들어있는 단백질의 혼합물인 피브릴이라는 미세섬유와 홀섬유의 독특한 작용 때문에 가늘고 긴 국수발을 계속 뽑아낼수 있다는 것이다. 가늘고 긴사슬로 연결된 밀가루 반죽안의 단백질은 수소원자에 의한 화학결합으로 끈끈한 물리적 성질과 탄력성을 지니고 있다.민가루 반죽을 가늘고 길게 뽑아낼때 피브릴섬유는 굴곡성을 나타내는데 이때 요리사의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에 의해 더욱 가늘어진 국수발을만들어 낼수있다. 30여년전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형마크씨(51)는 현재 뉴저지주 와일드우드시에서 용원이라는 중국음식점을 경영하고있는데 그는 가늘고 긴 국수발을 뽑아내는 세계 10대 중국요리사중의 한사람으로 꼽히고있다. 형씨의 밀가루 반죽비결은 고농도 단백질이 함유된 밀가루 3컵,약간의 흰소금,물 1컵반 그리고 빵을 부풀게하는 소량의 소다를 섞어 야구공 크기의 밀가루 반죽을 빚어낸다. 이 밀가루 반죽을 양손으로 주물러 흰 엿가래처럼 길게 뽑아낸다.이 긴 반죽을 손등에서 고리처럼 구부린다음 2개의 반죽으로 갈라낸다.이 국수반죽은 처음 1개에서 2개로 쪼개고 다시 4개,8,16,32,64,1백28개의 국수발을 거쳐 11회의 반복된 손놀림을 미국사람들은 아직 용수면이라는 국수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맛 자체도 널리 선전이 안됐기 때문에 아직 인기와는 거리가 멀어 대량 생산할수가 없다.그러나 용수면이 앞으로 몇십년안에 미국인들의 구미에 맞게되면 라면의 인기처럼 미국뿐 아니라 유럽·남아메리카등 전세계 미식가들의사랑을 받아 널리 보급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 신안해저인양 중국배(배/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12)

    ◎길이 30m 돛 2개… 일 가던 원무역선 인듯/용골 긴V자형 배밑구조 유럽형과 흡사 75년 전남신안 앞바다의 바다밑 보물선이 세상에 알려졌다.그후 10년간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중국청자 및 기타유물 2만2천여점과 동전28t,그리고 선체조각 등을 인양하였다. 이 배는 1323년 6월께 중국 절강성 항주만의 경원항을 출항,일본으로 가던 원나라 무역선으로 폭풍을 만나 침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인양된 선체편은 문화재연구소 목포보존처리소에서 복원작업이 진행중으로 멀지않아 본래의 선체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배는 전체길이 30m,최대폭 9.4m,깊이가 3.7로 추정되며 8개의 격실과 2개의 돛을 갖고 있고 배밑은 긴 용골을 가진 V자의 첨저형이다.그리고 이물의 형태는 아랫부분은 서양식의 첨예한 모습에 윗부분은 동양식의 이물비우를 가진 혼합식이고,고물의 형태는 서양배와 같이 평탄한 트랜삼구조로 돼 있으며,외판은 전통적 한선의 방식과 비슷한 홈붙이 클링커이음이다.크기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해군사관학교와 한강에 떠 있는 복원거북선의 크기를 보면 길이가 34m,폭 10m이므로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안 앞바다 배 이외에도 2건의 중요한 중국선 발굴이 있었다.하나는 중국의 복건성 천주만에서 발굴된 1270년대의 송나라 배인데,길이가 34.55m 폭이 9.9m이며,서양식 용골을 가진 전형적인 남중국의 첨저형 배로서 2개의 돛을 가지고 있으며 신안 배와 여러모로 비슷하다.또 하나는 1984년에 산동성 봉래의 옛등주항만에서 발굴된 14세기 중엽의 원나라군함으로서 길이가 35m 폭이 6.2m인데 3개의 돛을 갖고,배밑은 천해에 알맞은 전형적인 북중국의 평저형이다.이런 발굴로 중국배들은 해안조건에 적합한 배밑구조를 지역별로 발전시켜 왔음을 알수 있다.또 중국에는 서양배와 같은 용골을 가진 첨저선은 없다고 해왔으나 그렇지 않음을 재확인시켜 주었으며 13∼14세기 중국의 배는 세계에서도 가장 크고 훌륭하였음을 알수 있었다.이점은 특히 신안배보다 1백여년 뒤의 명나라 정화함대의 보선의 길이가 무려 1백50.5m 폭이 61.5m이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신안배의 발견은 당시 한·중·일간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항해술은 11세기 무렵부터 등장한 나침반과 함께 선원들은 해·달·별이나 바닷물빛 또는 바다밑의 펄로서 방향을 확인하였음을 알려준다.당시의 배들은 절강성 항주만 입구의 주산열도를 출발,동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의 한라산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한국서해안이나 일본규슈로 향했다.
  • 거북선서 쏘던 포 건져냈다/해군발굴단/한산도앞 충무공 격전해역서

    ◎「만력 병신」 명문… 1596년 주조/구경 5.8㎝,길이 89㎝ 청동제/“한번 쏘아 적선 수장” 칠언대구 새겨 임진왜란당시 거북선에 장착돼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국보급 총통(총통)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거북선탐사작업을 벌여온 해군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단장 황동환대령)은 지난18일 하오3시쯤 경남 통영군 한산면 문어포 서북방 4백60m 한산도 제승당 서북방 1.4㎞(북위34도48분,동경 1백28도27분91초)해역에서 거북선에 장착됐던 것이 확실시되는 별황자총통(별황자총통)1점을 발견,인양했다고 20일 발표했다.이 총통에는 「구함황자경적선 일사적선필수장」(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의 배를 놀라게 하고 한발의 포를 쏘아 적의 배를 반드시 수장시킨다)이라는 7언시와 「만력 병신 육월일조상」이라는 제조일시가 음각되어 있다. 「만력」이란 연호는 중국 명나라 신종때의 연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4년이 되는 서기1596년(선조29년)에 해당되며 왜국과 강화교섭이 한창 진행되던 때이다. 해군 발굴단은 총통의 주조일자와「구함」등의 글자로 미루어 이 총통이 임진왜란당시 거북선에 사용됐던 대포가 확실하다고 밝혔다. ◎10m 해저서 수심10m의 바다밑 펄속에서 인양한 이 총통은 길이 89.5㎝,내구경 5.8㎝,외구경 12.6㎝,중량 65.25㎏으로 재질은 청동으로 되어 있다. 황발굴단장은 지난 12일부터 문어포인근해역에서 해저 탐사를 벌이던 발굴단이 금속탐지기에 이상한 물체가 표착됨에 따라 잠수부를 투입,확인을 한 결과 수심 10m되는 펄밑 30㎝ 지점에서 포신이 45도 기울어져 묻혀있는 총통을 발견,인양하게 됐다고 말했다. 황단장은 인양된 총통을 해군사관학교 조성도교수(문화재전문위원)등 전문가의 실측평가에 의해 임진왜란당시 주조됐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헌상에는 거북선에 관한 자료가 있으나 실증자료가 인양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황자총통이 발견된 한산도해역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이끌고 왜국수군과 격전을 치른 해역으로 그동안 화살촉·철환·침몰선박의 잔해등이 발견된 곳이다.
  • 임란 4백년 세미나 참석/일 마키 히로시박사(인터뷰)

    ◎“한국인의 반일감정 임란의 상처때문” 『일본의 지식인들 중에는 「임진왜란이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나」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습니다.전쟁의 참화에 비해 전쟁의 목적과 과정,수단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인 지한파 학자로 잘 알려진 일본 동양대 동양학연구소 마키 히로시(전호사·72)박사가 지난주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주최로 열린 「임진왜란 4백주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그는 『7년동안의 전란으로 조선과 일본,명 등 3개국 국민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서도 결국 전쟁의 목적인 명나라 땅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철군해야 했다』며 『선전포고도 없이 왔다가 항복선언도 없이 슬그머니 떠나가 버려 전쟁의 기본개념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키씨는 최근 김성한씨의 소설인 「임진왜란」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다.일본인 독자들을 위해 소설 원문 이외에 당시 일본과 중국의 국내사정도 포함시켰다. 마키씨가 「임진왜란」을 번역하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가진 반일감정의 뿌리를 일본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그는 한국인들이 임진왜란에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어 그때부터 일본과 일본인을 적대시 하게된 것으로 보고있다. 마키씨는 그러나 자신이 「지한파」이긴 해도 주요 관심사는 한국의 의·식·주와 풍속이라고 말한다.그는 특히 한국의 음식에 보통한국인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일본 사회에 한국 음식을 소개해왔다.10년 걸려 「한국음식 이야기」란 책을 일본에서 펴내기도 했다. 마키씨는 다음달 23일 일본 도쿄 한국대사관 문화원에서 열리는 세미나 「임진왜란의 재조명」에서 주제발표를 한다.
  • “한­베트남 문학교류 조선시대부터 시작”

    ◎조동일교수,「최고시인 완채」책서 주장/“선조때 양국사신이 중국서 한시 교환” 연락대표부 설치 합의등 한·베트남간의 교류협력관계가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베트남문학이 국내에 소개되어 화제다. 최근 지식산업사에서 출간된 「베트남 최고시인 완채」는 15세기 베트남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완채(응우옌 차이·1380∼1442)의 한시와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소개하고 있다.한문학자 지준모씨가 번역하고 서울대 조동일교수가 해설을 붙인 이 책에는 1868년 완간된 「억재유집」전7권 가운데 제1집 「억재시집」전부와 제3권의 「평오대고」편,제7권 「국음시집」중 일부가 번역·수록됐다. 조동일교수에 따르면 한·베트남간의 문학교류는 조선 선조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쉬광이 베트남 사신 풍극관을 만나 한시를 주고받았던 일이 최초.이수광이 풍극관과 주고받은 시는 당시 베트남에 전해져서 대단한 평가를 얻었다고 한다.이밖에 20세기초엔 한문으로 지어진 「월남망국사」가 식민지하의 한국에 전해져 양국간의 공통적인 유대감을 형성케 한바도 있다. 『베트남은 우리와 직접적인 교류는 적었으면서도 역사나 문화의 동질성이 가장 큰 나라』라고 전제한 조동일교수는 『한문학을 민족문학으로 발전시키려한 노력이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에서 특히 뚜렷하며 두 나라 문학사 사이의 공통점도 아주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완채는 베트남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인.군사전략가이자 정치가로 중국 명나라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키는데 커다란 공적을 세운 민족의 영웅이었던 그는 정쟁의 희생물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시인이기도 했다.그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높은 수준의 한시를 많이 남겼을 뿐만아니라 베트남어로 시를 짓는 국음시를 확립,베트남 민족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 임란 「귀무덤영혼」 안식처 찾아

    ◎12만6천여 원혼 일 경도대로변에 방치/4백돌 맞아 22일 사천서 대재열고 합장 임진왜란이 남긴 최대 비극의 하나였던 귀무덤(이총)영혼이 임란발발 4백년만에 고국에서 안식처를 찾게 됐다. 「임란이총호국영령의분합장대재봉행위원회」(위원장 박삼중)는 22일 하오2시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조명군총(지방문화재 80호)에서 대재를 갖고 12만 6천 원혼을 이곳 「머리무덤」에 합장한다. 이로써 일본 교토 방광사 앞 대로변에 4백년 가까이 방치돼 있던 귀무덤 영혼은 임란 발발 4백년,환국 2년만에 긴 방황을 마감하고 고국에서 영면할 수 있게 됐다. 삼중스님이 80년대 후반 일본 교도소 교화사업중 우연히 발견한 이 귀무덤 영혼은 각고의 노력끝에 지난 90년 4월22일 환국했으나 그동안 이렇다 할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부산 동래 자비사에서 임시 머물러왔다. 봉행위는 21일 자비사에서 전도재를 지낸 후 22일 상오8시 부산 사직 실내체육관에서 이운식을 가지며 이날 하오 2시부터는 조멍군총 현지에서 윤길중 전국회의장,이강훈광복회회장,안춘생독립기념관 관장,서돈각학술원 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재를 봉행한다. 특히 이날 대제에는 한일 불교복지협의회 일본측 회장인 가키누마 센싱(폐소선심)등 일본승려 10여명도 참석해 의미를 더욱 깊게 할 것으로 보이며 인간문화재 박송암 스님 등이 범패 등으로 영가천도예술대제를 치러 행사를 한층 빛낼 예정이다. 봉행위는 『지난 2년동안 적지를 찾아오다 거북선의 첫 전승지이자 조명연합군의 최대 피해지 중 하나인 사천 현지에 귀무덤 영혼을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이번 대재 후 합장무덤 일대 20만평을 성역화하고 임진란 종합전시관 등을 건립해 후세들에게 역사교육장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귀무덤 영혼이 안장되는 조명군총은 정유재란 때인 15 98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희생자 3만8천명이 묻힌 무덤으로,귀와 코를 전리품으로 뺏긴 이들의 머리가 합장된 이 무덤은 현지에서 「당벙무덤」「댕강무데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외언내언

    경상남북도를 합친것만한 넓이다.79개의 군소섬들을 거느리고 있다.중국 최대의 섬이다.3세기 무렵 중국사람들이 발견했다.본격적인 개척은 중세이후이며 근대중국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에 시달렸다.첫 식민지를 객척한것은 1624년 네덜란드인들.그들이 붙인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것이 포모사(Formosa)다.보물섬이란 뜻.◆그후 명나라 유신 정성공이 네덜란드인들을 항복시키고 「항청복명」의 피난처로 삼았다가 청나라에 망한후 1885년 대만성으로 복귀.그러나 기구한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청­일전쟁후 일제식민지 51년을 겪고 49년 국공내전에 패한 국민당정부의 피난처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대만의 약력이다.중국대륙의 3백분의1도 안되는 이곳에 살고있는 사람은 모두 2천여만.선주민족인 말레이·폴리네시아계의 고산주 25만을 제외하면 98%가 한주이다.그러나 이 한주의 84%는 남쪽해안의 복건·광동성에서 이주해 오래전부터 살아온 이른바 본성인이며 16%는 49년 국민당정부와 함께 피난온 북중국계의 외성인들.◆그동안 대만을 정치적으로 지배해온것은 이 국민당정부와 외성인들이었다.이때문에 본성인들은 불만이 많았으며 심한 정치적탄압을 받기도했다.그러나 85년이후의 세계적인 민주화바람은 대만에도 정치적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본성인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었다.◆본성인출신이 국민당정부의 총통이 되고 「대만의 운명은 대만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한다」는 「자결강령」의 야당도 출현.민주진보당으로 89년 총선에서 30%의 지지를 획득했다.13일 대만정부는 물론 중국정부의 요란한 경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강령에 대만을 「독립된 주권공화국」으로 규정한 조항을 삽입키로 한것도 바로 그 민진당.2개의 중국정부가 모처럼 일치된 반대를 하고있다.독립 「대만공화국」은 탄생할 수 있을까.기구한 운명의 또한차례 향방이 주목된다.
  • 외언내언

    고향이란 개념에는 사람 못지 않게 산천이 포괄된다. 나에게 정기를 내리고 언제나 근엄하면서 관대하던 고향의 산은 아버지. 그에 비하면 강은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편이다. ◆서울 하면 한강 이듯이 평양하면 대동강. 대동강은 1천만 실향민 가슴에 어머니로 자리잡아 꿈속에서도 금빛 물결을 일으켜 온다. 여조의 최자,조선조의 정도전만이 대동강에 부치는 노래를 남긴 것이 아니다. 숱한 시인묵객의 넋을 홀려낸 대동강. 명나라의 사신 아겸도 넋을 뺏기는 데서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대동강 넓은 물 얼어 붙어 구슬을 깐 듯/빙빙 둘러 멀리 바다와 통하고 구불구불 가까이 성을 둘렀네…』하고 읊어 나간다. ◆맑은 물줄기 바로 거울”(고려 김인존)이라는 대동강은 우리의 개화기에 일본의 명승지 아타미(열해)에 갈음되기도 한다. 메이지(명치) 문단 수일의 대가로 알려진 오자키(미기홍엽)의 명작 「곤지키야사」(금색야우)의 번안소설 「이수일과 심순애」의 무대로 되면서. 『대동강 부벽루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이 「창가」를아는 세대의 실향민은 그 노래가락 흥얼거리며 어린날을 생각해 보게도 된다. ◆남북통일축구대회 축구단을 따라 평양에 간 우리 기자들이 그 대동강 소식을 전해 온다. 곳곳에 차단댐을 설치해서 강이라기보다는 저수지 같다는 느낌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물은 예나 다름없이 맑고 푸르다는 것. 그래서 낚시꾼이 많고 잡힌 잉어는 회를 쳐 먹기도 한다고 전한다. 물이 맑은 데는 관리를 잘 한다는 측면도 있겠으나 산업화가 덜 진전되었기에 그렇다는 측면도 있긴 할 것이다. ◆그 강을 떠올리는 실향민들의 가슴은 울렁인다. 이회택 감독 부자의 처지가 그렇게나 부러울 수가 없다.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면서 상머리를 치는 젖가락 장단에 눈물 글썽이며 불러보는 노래­『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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