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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 “숨은 보물 각석군 관광상품으로”

    도봉 “숨은 보물 각석군 관광상품으로”

    “조선 후기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의 집권 이념과 학맥을 수려한 도봉산 계곡의 자연과 함께 만날 수 있는 서울의 유일한 곳이 도봉산에 있습니다.” ●도봉산에 선비들 소신 쓴 바위 15개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지난 19일 도봉산의 숨은 보물 각석군을 방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각석군이란 쉽게 말해 바위에 글을 새겨 놓은 무리가 모여 있다는 것이다. 도봉산에는 17세기에서 구한말까지 선비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소신 등을 글이나 시구로 새겨 놓은 바위가 15개 있다. 내년부터 복원하기로 한, 조광조를 기리는 도봉서원과 함께 조선 후기를 만나볼 수 있는 역사문화 탐방 코스로 제격이다. 도봉산 초입에서는 어른 키보다 큰 바위에 노론의 태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도봉동문’(道峯洞門)이 우선 눈에 띈다. 도봉동 영역을 설정하는 기준으로 잡는 이 각석은 우암이 62세 때 경기 양주 선산에 왔다가 개성 송도의 박연폭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도봉산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가면서 남겨 놓은 글이다. 당시 도봉서원의 선비들이 글을 적어 달라고 해 가장 큰 붓으로 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봉문화원 홍기원 사무국장은 “충북 괴산 화양구곡에 있는 송시열의 글 ‘화양동문’과 견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 동문(洞門)이라는 것은 파라다이스”라고 귀띔했다. 홍 국장은 “화양구곡 각석군을 최고로 치는데, 도봉동문은 화양동문 각석군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수려한 도봉계곡에서 산행하며 인문학적 가치도 가져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이런 곳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단풍이 붉게 물드는 도봉산에서 이 구청장을 만난 등산객들은 “등산로에 있는 화장실에 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민원도 하고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는 등 친근하게 구청장을 대하고 있었다. ●“최고 각석군 화양구곡과 견줄 만해” ‘도봉동문’에서 시작하는 각석을 다 둘러보려면 걸어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중요한 글로는 공자의 말에서 인용된 만절필동(萬折必東)에 어원을 둔 ‘필동암’(必東岩)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물은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자연현상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후기 집권 세력인 노론파의 집권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황하가 만번 꺾어져도 동쪽으로 흐른다는 말이지만 선조의 어록인 ‘만절필동재조변방’과 연결하면, 청나라가 들어섰더라도 망해가는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에 대해 의리와 지조를 지키자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복호동천’(伏虎洞天)은 선비들이 파라다이스에서 때를 기다리며 수양하고 있다는 뜻이다. 곡운 김수증(1624~1701)이 쓴 ‘고산앙지’(高山仰止)도 도봉서원에서 배향하는 조광조의 선비 정신을 기린 것이다. ‘제월광풍갱별전료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別傳聊將絃誦答潺湲)은 우암의 글로 주자의 도덕적 품성을 기르고 절대로 출세를 위한 과거공부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망상을 하지 말도록 한두 편의 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구청장은 “자연에 인문학적 가치를 부여한 조선 후기의 역사·문화적 보고를 잘 보전하고, 역사 문화 코스로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 역사적 의미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中개고기 축제, 반대여론에 결국 취소 ‘논란’

    중국 저장성의 한 마을에서 매해 열리는 개고기 전통축제가 반대여론으로 올해 취소됐다. 올해 10월 18일(현지시간) 저장성 진화현의 한 마을에서 열리기로 예정됐던 ‘개고기 축제’(金华狗肉节)가 반대여론에 부딪쳐 뜨거운 논란을 빚다가 결국 올해 전면 취소됐다고 현지 언론매체 신민망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축제는 명나라 건국 초기 때부터 전해오는 이 지역의 개고기 식문화를 연례행사로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칭다오에서 열리는 맥주축제와 비슷한 성격이지만 살아있는 개를 도축해 축제에 내놓는 다는 것이 가장 큰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올해 이 행사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축제를 며칠 앞두고 판매업자들이 길에서 개를 도축하거나 좁은 우리에 개를 가두고 옮기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인터넷에서 일파만파 퍼지면서 반대여론이 확산된 것. 동물 보호단체까지 비난에 합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다. 이에 지역당국은 올해 개고기 축제를 취소하며, 공개된 장소에서 개를 도축할 경우 처벌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축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당국의 조치를 반기고 있지만 축제를 준비했던 판매업자들이나 마을 주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구오라는 한 주민은 “우리 지역에서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개고기 식문화 전통을 일부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강제로 취소당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한편 중국에서 개고기는 수천 년 동안 인기 있는 음식이었으나 최근 잔인하다는 여론 때문에 개고기 금지가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6월 산시성 위린시에서도 식용견 1만 5000마리가 동원된 개고기 축제가 열려 논란이 된 바 있었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中·타이완 저명화가 60명 ‘新부춘산거도’ 공동 완성

    中·타이완 저명화가 60명 ‘新부춘산거도’ 공동 완성

    무려 66m에 이르는 신(新)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가 완성돼 양안(兩岸·중국과 타이완)이 또다시 ‘하나’가 됐다. 중국과 타이완의 저명한 화가 60명이 함께 그린 신부춘산거도는 오는 8일부터 18일까지 베이징의 중국 국가박물관에 전시된 뒤 내년 2월에는 타이완으로 옮겨져 선보일 예정이다. 부춘산거도는 원나라 때 화가 황공망(黃公望)이 저장성의 절경인 부춘강(富春江)을 배경으로 3년여간에 걸쳐 그린 수묵산수화 대작으로 명나라 말 두 부분으로 분리됐으며 지난 6월 1일 중국과 타이완이 각각 소장하고 있던 두 부분을 타이완에서 합체, 전시하면서 화해와 통일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당초 360여년 만에 합체된 뜻을 기리기 위해 36m 길이로 제작할 것을 계획했지만 그림에 대한 화가들의 열정이 넘쳐 계획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황공망이 그림을 완성한 1350년부터 660여년 후라는 의미에서 66m로 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글로벌 시대] 맹자와 현대 동북아의 민주주의/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맹자와 현대 동북아의 민주주의/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가 문화와 사상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양국의 유교 문화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 핵심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일본의 저명한 동양학자인 가이즈카 시게키의 견해를 참고로 해서 이 점으로부터 논의하기로 한다. 중국 명나라 때 당시 해상무역에 종사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맹자를 싣고 일본으로 가는 배는 바다에서 난파된다고 하는 속설이 확산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헌에서는 명나라 말기에 나온 사조제(謝肇?)의 수필 오잡저(五?俎)에 언급되어 있다. 또 일본 에도 시대의 작가 우에다 아키나리는 우게쓰 모노가타리(雨月物語)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12세기 배경). ‘주 나라의 무왕이 은 나라의 주왕(紂王)을 치고 천하통일을 한 사건은 신하의 군주에 대한 하극상으로 간주해서는 아니된다. 인의(仁義)를 상실한 주왕은 더 이상 군주가 아니기 때문에 무왕은 폭군으로 전락한 주왕을 쳤다고 하는 내용이 맹자에 적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유명한 중국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맹자만은 아직도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맹자를 싣고 오는 배는 반드시 폭풍에 당하고 침몰해 버리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일본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천지개벽 이후 한번도 끊기지 않은 황통이 상속되어 왔는데, 맹자처럼 건방진 사상이 전해 오면 후세에 하나님의 후예인 천황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해악이 일어날 우려가 있어서, 팔백만신(八百万之神)이 맹자를 싫어해서 가미카제(神風)를 일으켜 배를 전복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맹자의 말씀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알려진 내용이며, 민위귀(民?貴), 사직차지(社稷次之), 군위경(君??) 즉 사람이 가장 귀하며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를 가장 가벼운 것으로 한다고 하는 문장으로 알려진, 이른바 민본주의와 더불어 생각하면 백성은 전제정치에 반대하고 혁명을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언한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맹자사상이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맞지 않는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9세기에 맹자가 일본에 전해졌지만, 옛날부터 역성혁명에 대한 부분만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서 에도 막부 타도와 메이지 정부수립에 공헌한 인물들을 육성함으로써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요시다 쇼인도 역시 맹자를 애독하면서도 역성혁명은 일본의 정치체제에 맞지 않다고 해서 외면했다. 이처럼 일본의 맹자 인식은 한국의 유교와는 분명히 다르다. 한국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 역성혁명에 근거했다고 하는 사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역성혁명이란 정치적 변혁이나 반란을 정당화하는 호칭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한편 일본에서는, 예를 들면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메이지유신을 역성혁명이라고 본다면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성혁명 사상에서는 장래 정치지도부가 부패하거나 포학을 실시했을 경우 혁명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사회는 아시아적 민주주의 사상의 기원인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배우지 않았다. 일본인은 ‘민주주의’를 유교, 즉 맹자에게서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후에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시대 흐름에 따라서, 또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민주화 시대에 구미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시대의 슬로건이 메이지 유신 이래의 ‘탈아입구’에서 ‘탈구입아(脫歐入亞)’로 전환된 듯하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탈구입아를 맹자의 사상으로 다시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맹자는 현재 북한 지도부에 대해 2000년의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강력한 질타의 말을 계속 발신하고 있다.
  • 중국 산시성-가장 중국다운 중국을 찾아가다

    중국 산시성-가장 중국다운 중국을 찾아가다

    ‘중국의 현대를 보려면 상하이를, 중국의 근대 오백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을, 오천년 중국 역사를 보려면 산시山西로 가라’는 말이 있다. 가장 중국다운 중국을 찾아가다 산시성 山西省 ‘중국의 현대를 보려면 상하이를, 중국의 근대 오백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을, 오천년 중국 역사를 보려면 산시山西로 가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아찔한 현대 발전상보다는 중국에 대해 품고 있는 로망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중국다운 장소를 찾는다면 산시성이 그 답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더 비밀스럽게 빛나는 곳, 산시를 소개한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김명희 취재협조 (주)레드팡닷컴 02-6925-2569 핑야오구청 平遙古城 평요고성 유네스코가 감탄한 성곽 도시 베이징에서 고속열차로 3시간여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시성山西省은 그 면면을 살펴보면 아직까지 우리에게 생소한 점이 더 많은, 매력적인 곳이다. 일단 세계 3대 문명인 황하문명의 발상지이면서 세계 면 요리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누들로드’의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활발한 교류와 무역으로 중국 금융 중심지로서 융성했던 명·청대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세계문화유산 고성까지 지니고 있는 까닭에서다. 산시성을 여행할 때는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어 보자.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중국의 진짜 모습을 잰 걸음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역사 유적지가 많은 이곳 산시에서도 핑야오가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바로 핑야오구청 때문이다. 핑야오구청은 199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당시 그 보존 상태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로 2,500년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고성이다. 성벽 둘레 길이 6,163m, 성 전체 면적은 여의도의 5배의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성문 안으로 발을 디디면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명·청 시대의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성의 골목이나 성벽의 구멍 개수까지 공자의 제자수를 따라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핑야요구청은 중국의 유교문화를 가장 잘 나타낸 곳으로도 꼽히며 그 자체가 하나의 큰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1970년대 개발의 급류를 타고 허물어질 뻔했던 고성은 생각 있는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원래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고, 현재는 유럽인들에게 ‘가장 가고 싶은 중국 내 여행지 10위’를 차지할 정도로 사랑을 받는 곳이 되었다. 느긋하게 옛 중국을 만끽하다 완벽에 가깝게 보존된 유네스코 지정 고성이라 유명 여행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호객 행위며 시끌벅적한 상업화의 모습을 볼까 걱정했던 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크게 상업화되지 않고 잘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조용히 고성의 정취를 느끼는 일이 가능하다. 핑야오구청에서라면 골목들을 탐험하는 일조차 설레는 ‘여행’이 되어 줄 것이다. 계획도시였음을 알려주듯 반듯하고 널찍하게 뻗은 골목들에는 14세기 명나라 때 지어진 건축물이 줄지어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명·청 시대의 건축이나 발전 모습 등 그 시대의 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붉은 등을 매단 상점과 식당 등을 지나 조용히 걷노라면 몇백년전 사람들도 이곳을 지나다니며 같은 풍경을 봤으리라는 생각에 묘한 기분에 빠져든다. 살아있는 박물관이라는 말답게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적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중국 최초의 근대 은행인 표호票號나 불교, 도교 사원, 각종 박물관들이 도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민가 구역으로 들어가면 예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흘러가는 삶의 모습들이 고성과 역사를 같이하며 빛이 바랜 집들과 어우러져 정감어린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활기찬 고성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하려면 고성에서 가장 높은 시루에 오르기를 추천한다. 핑야오구청에서 가장 멋진 전망을 제공함과 동시에 훌륭한 포토 포인트가 되어 준다. 1 핑야오구청 거리에서 마임을 하는 예술가 2 국제학교 학생들이 저마다 예쁜 중국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모습이 이국적이다 3 핑야요구청에는 중국의 옛모습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복판에 위치한 시루는 이곳의 랜드마크이자 전망대 역할을 한다 4 시루에서 내려다본 핑야요구청 거리. 예스런 모습의 거리지만 활기가 넘친다 산시성의 면 요리 맛보기! 혹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전해 준 면요리가 지역에 맞게 변형된 것이 스파게티라는 설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이 ‘누들로드’의 시발점이라고 불리는 산시성은 쌀보다는 메밀이나 밀, 귀리 등이 많이 나는 기후 때문에 예부터 면 요리를 즐겨먹었다. 현재 380여 가지가 넘는 면 요리를 가지고 있으며 9월에는 면 축제도 열린다니 가히 면 요리의 중심지라 할 만하다. 산시성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면 요리들은 중국 요리 특유의 향이 진하지 않아 한국인의 입맛에도 맞는 편이다. 오히려 맛이 다소 심심하면 함께 나온 소스들을 넣어 먹으면 된다. 핑야오구청을 즐기는 6가지 방법 2,500년 전 세워진 이 고색창연한 성 안에서는 누구든 시간을 잊고 중국 문화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 긴 역사에 압도되어 짐짓 역사책마냥 지루하거나 고루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일랑은 접어두시길. 은퇴 후 동양 문화를 즐기러 온 프랑스 노부부들만큼이나 젊은 여행자들이 많은 곳도 핑야오구청이었으니 말이다. 고성의 매력에 흠뻑 빠진 기자의 ‘핑야오구청 120% 즐기기’ 제안! 1 카페에서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여행자들. 핑야오구청은 유럽인들이 꼽은 중국에서 가고 싶은 여행지 중 10위 안에 드는 곳이기도 하다 2 고소해서 우리 입맛에도 맞는 미니호떡 셔무미쩌무위에빙. 산책에 즐거움을 더해 줄 간식 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3, 6 핑야오구청 여행을 완벽하게 마무리시켜 줄 고택 숙소. 정원이 내다보이는 오래된 중국 전통 가옥에서 보내는 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한다 4, 5 선물로 좋을 한자로 만든 핸드폰줄과 예쁜 중국풍 신발들. 핑야오구청에서 즐기는 쇼핑은 화려하거나 떠들석하지 않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01 자전거로 돌아보는 고성의 낭만 핑야오고성 내의 주 교통수단은 전기차와 자전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전통과 환경을 보전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부분이다. 반대로 그만큼 여유롭게 그리고 조용히 고성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걷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자전거로 고성 구석구석을 누비는 것도 언제나 즐거운 대안이 되어 준다. 종일 타도 10위안이라는 매력적인 가격에, 자전거에 서툰 이들을 위해 다인용 자전거도 준비되어 있다. 02 고성에서 쇼핑하기 쇼핑은 도시에서만 즐길 수 있다고? 물론 다양하고 세련된 물건들이 즐비한 도시에서의 그것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이곳에는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쇼핑의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핑야오의 특산품을 찾는다면 칠기제품이 유명하지만 조금 더 가벼운 기념품을 찾는다면 종이로 화려한 예술세계를 구현하는 종이공예나 아기자기한 손거울, 한지로 만드는 핸드폰줄 등이 인기 있다. 꽃 자수가 예쁜 중국풍 신발이나 어린이용 치파오도 중국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해줄 아이템. 대부분이 정찰제로 운영되거나 무리한 흥정 혹은 호객 행위가 없어 더욱 기분 좋다. 03 하루의 피로를 푸는 마사지 중국 여행에 마사지를 빼놓기 아쉽다면 저녁을 먹고 고성 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는 마사지숍으로 가보자. 숍마다 가격 차이는 크게 없으므로 둘러보고 맘에 드는 곳으로 가면 된다. 마사지사의 실력은 종종 운에 좌우되곤 하지만 하루 여행의 피로를 풀며 휴식하기에는 충분하다. 04 고택에서 맞는 고즈넉한 밤 중국 전통 가옥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택은 이곳에서의 하루를 근사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숙소. 문을 지나 높다란 담벼락을 따라 난 길을 지나면 곳곳에 위치한 정원이 운치를 더해 객실로 가는 동안의 짧은 순간에도 <홍등> 같은 중국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내게 해준다. 매번 똑같이 생긴 호텔이 지루하다면 이곳에서의 하룻밤이 색다른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아침나절 정원 나뭇가지에 앉은 맑은 새소리와 햇살에 잠이 깨면 이곳을 떠나기가 무척이나 아쉬워질지도 모르겠다. 05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주전부리 골목 탐험을 하다 보면 출출해질 때쯤 새로운 주전부리들이 나타나곤 한다. 장조림 맛이 나는 핑야오 쇠고기 핑야오 뉴러우나 호두, 참깨 등이 들어가 고소한 미니호떡 셔우미쩌우위에빙 등이 그것이다. 명청가를 바라보며 즐기는 그윽한 차 한 잔의 여유도 빼놓을 수 없겠다. 06 세계의 여행자들과 나누는 시원한 맥주 한잔 고성에 어둠이 깔리고 홍등에 불이 들어올 즈음 고성 내 위치한 카페나 바에 가면 낮에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던 여행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여행자들도 있고 중국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은 모습도 보인다. 흥겨운 음악과 시원한 칭타오 한잔을 사이에 두고 핑야오구청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말자. 대부분의 고택 숙소들이 일찍 문을 닫기에 기분 좋을 만큼의 술자리 이후에는 내일을 위해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T clip 인천에서 산시성 성도 타이위엔(太原, 태원)까지 아시아나 전세기가 2011년 10월28일까지 운항된다. 월요일과 금요일 주 2회 운항하며 약 2시간 소요. 날씨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며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5~9월. 우리나라보다 1시간 느림 위안화(1위안은 약170원) 일본 NHK에서까지 취재 올 정도로 건강에 좋다고 소문난 산시성 식초와 이백, 두보 등이 극찬했다고 전해지는 중국 명주인 ‘펀주汾酒 ’가 있다. 전세기 한국사업자인 (주)레드팡닷컴(02-6925-2569)을 비롯한 전국 여행사에서 산시성 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멘산 綿山 면산 한식의 유래를 찾아서 핑야오구청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멘산綿山은 여행책자에서도 찾기 힘든 곳이지만 한해 130만명의 중국인이 찾는 여행지다. 중국 4대 명절 ‘한식寒食’이 유래된 곳이자 가파른 협곡을 따라 불교와 도교 사원들이 자리잡고 있어 중국 문화와 정신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인 까닭이다. 개자추 전설의 배경이 된 곳답게 멘산에는 개자추의 무덤과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무덤은 약 해발 1,800m 높이에 위치하고 있어, 그곳을 향하는 케이블카에서 시원한 멘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사당은 원래 있던 동굴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가 신선이 되었다 믿는 사람들의 말을 반영하듯 화려한 위용을 자랑한다. 절벽 위에 세워진 공중도시 멘산은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 일컬어지는 타이항太行산맥에서 나온 한 갈래다. 그 천연절경의 협곡을 따라 불교, 도교 사원들이 세워졌고 현대에 들어서는 호텔까지 더해져 공중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한 석탄 부호가 후손들에게 문화유산을 물려주고자 훼손, 파괴된 부분을 복원하고 전폭적인 투자를 한 덕에 명실상부한 문화 관광지가 되었다고. 절벽 동굴에 지어진 불교사원 윈펑스雲峰寺, 운봉사는 당태종 시대에 서안의 가뭄을 해결했던 고승이 있던 곳으로 108번뇌와 12간지를 상징하는 120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동굴 안쪽에서 내려다보는 사원과 멘산의 풍경이 가히 절경이며 간절한 기원이 깃든 절벽 위의 종들도 이국적이다. 이곳에서 이른 아침에 산책을 하면 발아래로 안개 낀 협곡이 펼쳐져 무릉도원이 따로 없단다. 이곳에서 갈지자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거나 엘리베이터의 힘을 빌면 정궈스正果寺, 정과사에 닿는다. 중국 남북조시대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담란曇鸞대사를 기념하는 파고다와 법당 및 동굴에서 발견된 등신불들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도교사원인 따뤄궁 또한 절벽에 층층이 쌓여 올려진 건물로서, 금박으로 쓰여진 도덕경에서 볼 수 있듯 확연한 도교적 색채를 지녔지만 멘산의 유물들을 모아둔 전시관도 구경할 수 있어 일반인도 가볼 만하다. 저택에서 엿본 산시성의 번영기 멘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왕자다위안王家大院, 왕가대원도 산시성의 매력적인 관광지 중 하나다. 청대淸代의 명문가 저택이었던 이곳은 압도적인 크기를 지니고 있어, 흔히 얘기하는 중국의 스케일과 부유했던 산시성의 모습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4만 5,000㎡의 면적에 1,000개에 달하는 방을 가지고 있으며 건축양식으로도 유명하다. 저택 전체 모습은 왕王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곳곳에 많은 뜻이 숨겨진 디테일한 장식과 조각이 흥미롭다. 현재는 정부 관리 하에 관광지로 관리되고 있으며 미로같이 얽힌 저택 내에서 자칫 눈을 팔면 일행을 잃기 십상이다. 절벽 위의 호텔, 원펑수위안 멘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호텔인 윈펑수위안雲峰墅苑, 운봉서원은 중국 내 유일한 절벽 위 호텔로 윈펑스 옆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2,000m에 위치한 객실에서 즐기는 뷰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다. T clip 한식의 유래가 된 개자추의 전설 멘산을 이야기하면서 개자추介子推를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며 주인인 문공을 보필한 진晋나라 충신 개자추는 아직까지도 충효를 이야기할 때 회자되는 인물. 문공이 왕위에 오른 뒤 서로의 공을 놓고 다투는 신하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바로 이곳 멘산에 칩거하게 되고, 문공은 개자추를 산에서 내려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지르지만 결국 개자추는 어머니와 불에 타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개자추가 죽은 날에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차가운 음식을 먹은 것이 바로 한식의 유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조선시대 외국어로 富·명예 거머쥔 사람들

    역관(譯官)이란 알다시피 통번역을 하는 벼슬이다. 이들은 주로 중국과 왜, 몽골, 여진 등과의 외교에서 통역 업무를 맡았다. 사신의 행차를 따라가 통역을 하거나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는 등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또 밀무역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하면서 조선시대의 무역 활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역관들은 기술과 행정 실무뿐만 아니라 지식과 경제력에서도 양반 계층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늘 중인으로 대우받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당시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에서부터 무역까지 종횡무진 활약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중인 신분의 외국어 전문가이면서도, 양반 사회에서 신분차별의 설움을 견디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인물들이기에 ‘조선 역관 열전’(이상각 지음·서해문집 펴냄)에 적잖이 눈길이 간다. 이 책의 특징은 인물을 크게 네 분야로 나눴다는 점이다. ‘차이나 드림을 꿈꾸다’, ‘일본과 통하다’에선 중국어와 일본어 역관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나머지는 조선시대 통역관의 면면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관들은 외교 당사국의 이질적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장점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외교관이자 뉴프런티어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나라의 위급상황 시 활약했던 인물들을 흥미롭게 나열한다. 임진왜란 당시 홍순언은 종계변무(명나라 사서에 잘못 기록된 조선 왕실의 족보를 바로잡는 일)와 명나라가 참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청나라 역관이 돼 조선을 골탕 먹인 정명수는 홍순언과는 반대되는 인물이라는 점을 대비시킨다. 그는 청나라 포로가 됐다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장수의 역관이 돼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잡이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역관 가문이 밀양 변씨와 인동 장씨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두 가문의 대표적 역관으로 변승업과 장현 등을 열거하면서 특히 변승업의 할아버지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장사 수완을 바탕으로 큰 재산을 모았고 ‘허생전’의 등장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장희빈의 숙부이자 대부호인 장현도 역관 신분으로 중개무역을 통해 큰 부를 쌓으면서 조선시대 최고 역관 가문의 반열에 올랐다고 말한다. 19세기 중엽 중국어 역관으로 활약한 오경석의 집안은 아버지 오응현과 아들 오세창까지 이어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관 가문이다. 이러한 내력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경석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침공에 대비한 대책을 세우는 등 대외 관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면서도 역관으로 쌓은 지식과 부를 바탕으로 서화 수집과 예술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대목에도 눈길이 간다. 1만 5000원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옛 문인 거닐던 ‘이백리 양반길’ 생긴다

    옛 문인 거닐던 ‘이백리 양반길’ 생긴다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 송강 정철 등 옛 문인들의 발자취를 느끼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명품길이 조성된다. 충북 괴산군은 내년까지 국비 10억여원을 지원받아 군자산 일원에 위치한 갈은·화양·선유·쌍곡 등 4개 계곡과 산막이옛길을 연결하는 총 80㎞의 친환경 명품 녹색길인 ‘이백리 양반길’을 조성, 트레킹 관광코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14일 밝혔다. 현재 실시설계 중이며 올해 말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양반길은 총 7개 코스로 나뉜다. 1코스는 이미 조성돼 있는 산막이옛길(8㎞)로, 괴산댐~산막이옛길~갈론마을, 2코스는 갈은구곡길(13㎞)로 갈론마을~갈은구곡~사기막마을, 3코스는 용추폭포길(7㎞)로 사기막마을~용추골~후영리이다. 4코스 화양구곡길(14㎞)은 후영리~화양구곡~송면, 5코스 선유구곡길(11㎞)은 송면~선유동~중관평, 6코스 절말길(12㎞)은 중관평~제수리재~절말, 7코스 쌍곡구곡길(15㎞)은 절말~쌍곡구곡~호롱소~다파리재~괴산댐 구간이다. 소요시간은 3코스가 3시간으로 가장 짧고, 나머지 6개 코스는 7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계곡마다 펜션들이 즐비하고 민박도 가능해 하루 이상을 묵으며 걸을 수도 있다. 양반길의 자랑거리는 선현들의 삶이 묻어나는 옛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양반길을 걸으며 마주치게 되는 계곡들은 퇴계, 우암, 송강 등 많은 유학자와 문인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사색에 잠기기 위해 즐겨찾던 곳이다. 선유계곡과 화양계곡은 절경에 반한 퇴계와 우암이 직접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양계곡 인근에는 우암의 뜻을 받들어 제자가 지은 만동묘라는 사당도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에 지어졌다. 군은 녹색농촌체험마을과 아토피문화생태마을 등 각종 체험시설과 연계된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인근에 조선시대 재현마을도 조성하는 등 이곳을 관광명소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양반길 곳곳에 농산물판매장 설치도 계획하고 있다. 괴산군 현민호 관광담당은 “현대적인 시설물은 코스 안내판 정도만 설치할 방침.”이라면서 “양반길과 괴산의 명산인 군자산과 칠보산 등산길을 연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괴산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씨줄날줄] 순장조(殉葬組)/박대출 논설위원

    인도에 사티라는 풍습이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뒤를 따랐다. 몸을 불태워 남편과 함께 묻혔다. 1829년 법으로 금지됐다. 순장(殉葬)이란 풍습이다.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처첩, 신하, 노비를 곁에 묻었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중국, 인도, 오세아니아 등에서 순장 유골들이 출토됐다. 고대 갈리아, 아일랜드, 불가리아, 슬라브에서도 나왔다. 한국과 일본에도 순장이 있었다. 삼국사기엔 신라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죽으면 황궁에 곡소리가 퍼졌다. 수십명의 후궁들이 따라 죽을 운명이 서글퍼서 울었다. 자발적인 순장은 자진(自盡)이다. 이때는 순사(殉死)다. 반면 강제 내지 타살도 있다. 경북 경산 일대 무덤에서 나온 순장 두개골은 함몰돼 있다. 둔기에 맞아 숨졌다는 얘기다. 사람은 노동력이자, 군사력이었다. 이를 묻었으니 국력 낭비였다. 잔인하고 비인륜적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인형으로 바꿨다. 흙을 빚어 토용(土俑)을 만들었다. 공자는 이마저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진시황릉은 아이러니다. 살아 있는 병사를 대신해 병마용(兵馬俑)을 만들었다. 규모가 세계 8대 불가사의다. 그런데도 순장을 했고, 규모 역시 사상 최대다. 한서(漢書) 36권에는 “궁녀들과 능묘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을 산 채로 묻었으니 수만을 헤아렸다.”고 적혀 있다. 청와대 개편이 단행됐다. 김효재 정무수석, 김두우 홍보수석 등이 기용됐다. 김두우 수석은 ‘순장 4인방’으로 꼽힌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나머지 3인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이동관 언론특보, 박형준 사회특보 등이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김효재 수석은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순장조에 편입된 셈이다. 순장조엔 희생(犧牲) 사자수호(死者守護) 개념이 깔려 있다. 구차하게 내세(世)를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예든, 영화(榮華)든 누린 게 작지는 않다. 영(榮)을 얻었으니 욕(辱)을 감내하는 게 책임정치다. 순장조는 국가 경영에 핵심으로 참여했다. 값비싼 경륜이자 자산이다. 순장되면 묻힌다. 우리 정치는 늘 소모적이다. 순장조를 별로 중용하지 않는다. 5년마다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본인이 그 현실을 깨려고 하면 무리다. 무모한 도전이나 과욕이다. 영화만 좇는 속물이 된다. 내세에서 찾아 쓰기를 기다려야 할 일이다. 머잖아 갈림길에 선다. 희생조냐, 회생조냐. 하나 더 있다. 자발적 순사냐, 타살적 순장이냐. 그동안 뭘 하느냐에 달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말 안 듣는 水墨, 한번쯤 완벽하게 꺾고 싶다”

    “말 안 듣는 水墨, 한번쯤 완벽하게 꺾고 싶다”

    “수묵을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오기 때문에라도 그만두질 못하겠어요.” 서울 관훈동 미술공간 현에서 개인전 ‘도시사유’를 열고 있는 박성식(39)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홍익대 동양화과 출신이다. 여전히 한지에 수묵을 고집하고 있다.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동양화 전공 가운데 수묵을 유지하는 작가는 흔치 않은 게 현실이다. 현대를 담아내기에는 먹이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서양 물감을 가져다 쓰거나, 아예 설치미술처럼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박 작가는 대놓고 동양화 ‘티’를 확실하게 낸다. 한지 위에 수묵을 올리는 점이 그렇고, 하얀 바탕으로 구름이 주는 여백을 한껏 살린 점이 그렇다. 차이가 있다면 대상이다. 옛 산수화의 구름 뒤 산봉우리나 폭포수가 낡고 오래된 상가 건물과 아파트로 대체됐다. →낡은 건물보다 초현대식 건물을 그렸으면 기법과 대상이 더 대조적이지 않았을까.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어릴 적 감성이 받쳐주지 않는다. 고향인 충남 공주에 어릴 적 살던 3층짜리 아파트가 있다. 얼마 전에 가보니까 낡았지만 그대로 있더라. 그런 풍경이 와닿는다. (서울 강남의) 타워팰리스보다 그런 건물에서 각 가정의 신산스러운 얘기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아직도 수묵화냐는 핀잔을 듣지 않나. -집안 내력 같다. 미대 가기 전에 서양화도 해봤는데, 결국 어릴 적 익숙했던 묵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평생 서예를 하셨다. 얼마 전 가보로 주신 것도 통째로 직접 쓴 천자문이다. 그 영향에서 못 벗어난 셈이다. →동양화 전공자들도 수묵을 외면하는데. -솔직히 수묵을 놓는 사람들 가운데 70%는 수묵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 생각한다. 솔직히 수묵이란 게 쉽지 않다. 김을 뜨듯 종이를 뜨는 게 한지라 질이 모두 다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재료를 써서 만들어도 다 다른 게 한지다. 수묵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바로 이 천차만별인 한지를 살살 달래가며 쓸 줄 안다는 거다. 이게 정말 어렵다. →버리고 싶은 유혹은 없었나. -왜 없겠나. 안 그래도 수묵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농담 삼아 “버티자, 무조건 버티면 대가가 된다.”고 말한다.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해 버리니 살아남는 자가 이긴다는 거다. 하하하. 공개를 안 해서 그렇지 나도 화려한 작업을 한다. 실험 차원에서 여러 시도를 해 본다. 그렇지만 그런 작업은 늙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수묵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싶다. 말 안 듣는 이 수묵을, 한번쯤 완벽하게 꺾어 보고 싶다. →도시풍경을 사진처럼 묘사하면서도 수묵을 고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 -수묵을 고집한다고 산과 물만 그릴 필요 있나. 그건 윤선도, 김홍도 때 얘기다. 그리고 사진기법 같은 것도 배워올 수 있지 않나. 호방하다거나 하는 작업을 하고 싶지 않은 점도 작용했다. 호방하다는 건 산전수전 다 겪은 대가들이나 하는 거라 생각한다. 고된 단련 없이 젊었을 때부터 대가 흉내내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안 그래도 중국 작가들은 대학생 때부터 자기 세계를 내세우는 우리나라 풍토를 신기하게 여기더라. -맞다. 중국은 미대생들에게 송나라, 명나라 때 그림 펴놓고 그대로 베끼라고 한다. 배울 때는 정확하게 배우고, 자기 세계는 나중에 가서 펼치라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일찍 새로운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언제까지 수묵을 이어갈 수 있다고 보나. -나도 도전 중이다. 갈 데까지 가볼 생각이다. 일단 집사람은 포기시켰으니 당분간은 버틸 수 있다. 하하. 13일까지. (02)732-5556.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박제가(그림·1750~1805)는 ‘서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서얼은 신분상의 제약과 차별 때문에 실력을 갖추어도 기량과 경륜을 펼치기 어려웠다. “우리를 믿지 않고 소인이라 하니, 무한한 마음속 계책 누구에게 말해 볼까?”라는 고민은 박제가에겐 숙명적인 것이었다. 박제가는 양반이면서 양반이 아닌, 경계인으로서 그 ‘존재성’에 대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패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지당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인습에 저항했다.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을 떼어내고 천하를 응시하여 ‘심지를 열고 이목을 넓히라.’고 외쳤다. ●이덕무 “답습한 시는 가짜 시다” 박제가는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나누는 우정의 향연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시와 글씨와 그림을 연마했다. 박제가에게 친구는 ‘기운을 나누지 않은 동기요, 한 집에 살지 않는 부부’였다. ‘나와는 둘이면서 하나인’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 유금, 백동수와 같은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박제가는 세상의 시와는 다른 시를 거침없이 쓸 수 있었다.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어서 시는 서로 답습할 수 없다네. 답습한 것은 가짜 시라네.”라고 채찍질한 이덕무와 같은 친구가 그의 곁에 있었다. 1700수가 넘는 시 작품엔 박제가와 이 멘토들의 우정의 숨결이 함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제가는 고군분투했다. 틀에 박히고 고루하고 진부한 시와 문장을 혐오하며 나만의 글쓰기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여겨 배웠고, 다음은 당나라 시, 그 다음은 송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시를 배웠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범에 매달리는 글쓰기는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했다. 자기 시대의 현장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만의 글쓰기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 고인의 글쓰기에 다가가는 길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형암선생시집서’·炯菴先生詩集序) 지금-여기 살아 있는 만물 각각의 미묘한 움직임과 그 지극한 경지를 포착하는 것. 이것이 시의 출발이다. 사물에 대한 미세하고도 예리한 관찰은 시인에게는 절대적인 지상과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당대의 문장을 순정한 문체로 되돌리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 부응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자송문’(自訟文)에 어울리지 않게 반성은 하지 않고 항변에 열을 올렸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맛의 문장! 이것은 박제가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글쓰기의 보루였다. 이는 당대의 복고, 혹은 의고문에 저항하는 방식이었으며, 더 나아가 만물의 보편 원리나 질서를 따르는 당대 성리학의 이념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오직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하는 그 시대 ‘권력’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청나라 선진 문물 도입이 부국강병의 길 박제가는 29세 때인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종사관 자격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곳곳에서 맞닥뜨린 청나라의 문명은 실로 눈이 부실만큼 풍요롭고 세련되고 화려했다.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균·이조원·반정균·옹방강·나빙·이정원 등 청나라의 학술부흥운동을 주도한, 명망 있는 지식인들이 일개 조선의 선비와 흉금을 터놓고 학문을 논하자, 그들의 자유로움과 벽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제가는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전환한다. 가난한 조선, 비문명국 조선의 갈 길은 북벌이 아니라 북학이라고. 진정한 오랑캐가 누구인지 먼저 분간하고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를 힘써 배워야 한다고. 박제가는 ‘가난’을 싫어했다. 권력에 아부하기 싫어 ‘차라리’ 가난하게 산 것이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장인 이관원이 검소하게 살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꾸했다.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 박제가에게 ‘안빈낙도’는 자신을 속이는 말이었다. 명분에 매이지 않고 욕망에 솔직했던 박제가.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그는 확신했다. 조선의 빈곤 타파와 갑갑한 습속의 개혁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만 가능함을. 이 때문에 연행을 다녀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한다. 이 책에는 청나라의 수레, 기와, 벽돌, 수차, 화폐, 종이, 의복, 문화예술 등을 적극적으로 배워 조선을 부강한 문명국으로 이끌고 싶다는 박제가의 패기가 넘쳐난다.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북학의’) 가난하고, 학문은 고루하고, 견문은 좁고, 문화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조선. 박제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조선이 풍요롭고 세련된 문명 세계가 되기를, 조선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문화의 향기가 넘쳐나기를. 박제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향기 나는 사회다. 재화의 유통이 활발하고, 사치가 가능하며, 문화적 수준도 상당한 사회. 박제가는 문화예술과 사치품에 관해 논할 때 도덕주의적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은 재화와 물품을 마르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순간 조선의 선비 박제가는 소박하고 질박한 생활을 표상했던 유학적 가치와 완전히 결별한다. 박제가는 더 나아간다. 조선이 빠르게 청나라에 맞서는 문명국이 되려면 언문이 일치되는 중국어(북경어)를 사용하잔다. 영어공용론에 맞먹는 상상력이다. 중국어를 제2의 국어로 사용하자는 제안은 실로 급진적이다. 그에게는 조선 땅이 너무 좁았으며 조선의 현실이 너무 답답했다. 문명세계를 향한 박제가의 욕망은 중국어공용론으로 거리낌 없이 내달린다. 이런 정황상 북벌을 절대 이념으로 수호했던 당대 선비들이 이 열혈 북학자에게 당괴(唐魁) 혹은 당벽(唐癖)이라는 비방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무 조숙한 세계주의자… ‘나’를 둘러싼 사회와 세계는 늘 살아 움직이고 변화한다.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여 변화를 보지 못하고 인습적 규범에 갇혀 있다면 그건 진흙 소상을 모방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박제가는 그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비겁하지 않게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 그러나 박제가는 지나치게 조숙한 문명주의자요, 세계주의자였다. 북학파 중에 가장 급진적이었고 가장 앞서 나아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명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어쩌면 조선의 ‘현재’와 ‘새로운’ 문명 사이를 조율할 수 있는 천리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비호해주던 정조의 죽음 직후 박제가는 대비 김씨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다. 그는 외롭게 고투했다. 그가 희망한 바, “1000년 뒤에도 1000만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이순신 장군 전사후 84일만에 장례…16년 후 이장했다”

    “이순신 장군 전사후 84일만에 장례…16년 후 이장했다”

    교육공무원이 이순신 장군의 장례 과정과 묘역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전사후 84일만에 장례를 치렀고 16년 후 이장했다.”고 주장했다. 홍순승 충남도교육청 장학관은 16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펴낸 이순신연구논총에서 “이 충무공은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남해 고금도에 안치됐다가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운구돼 다음 해 2월11일 금성산에 안장됐다.”고 밝혔다. 장례가 늦게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三月而葬)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첫 묘자리는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참모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잡았다. 두사충은 박상의와 함께 조선시대 풍수지리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홍 장학관은 “이 충무공이 이후 재평가를 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며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이 조정에 첫 장례가 전란 직후 예우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며 이장을 상소했다.”면서 “첫 장례가 이뤄진지 16년 후인 1614년 일등공신에 걸맞은 크기와 이장절차를 거쳐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이어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 충무공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더욱 활발해져 1908년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성웅(聖雄)’ 칭호가 붙여진데 이어 제3공화국 시절 역사상 최고조의 평가에 오르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곡장)이 처지고 홍살문이 세워지는 등 왕가의 무덤(園)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밝혔다. 홍 장학관은 이 연구에 대해 “자료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아 초장과 이장의 정확한 내용을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면서 ”이장과 확장 등 모두가 당 시대의 이 충무공에 대한 평가 실상이 그대로 반영돼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하루에 각 드라마서 다섯번 죽은 ‘죽음 전문배우’

    하루에 각 드라마서 다섯번 죽은 ‘죽음 전문배우’

    죽음은 불행하지만 여기 한 중국 배우는 죽임을 당할수록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중견배우 라러림(나락림·羅樂林)이 하루 동안 방송한 각기 다른 연속극에서 다섯 차례나 죽음을 당해 이색적인 신기록을 세웠다고 12일 중국 언론은 물론 AFP통신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라러림은 홍콩 방송 TVB의 각기 다른 드라마 5편에서 모두 죽임을 당한다. 무술 드라마 ‘포의신상’(布衣神相)과 ‘여권’(女拳)에서는 싸움 도중 피를 흘리며 죽었다. 또한 그는 드라마 ‘홍무삽십이’(洪武三十二)에서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으로 출연하는데 결국 질병으로 사망했다. ‘칠호차관’(七號差館)과 코미디 ‘개대환희’(皆大歡喜)라는 두 편의 드라마에서도 화면 상에서는 죽지 않지만 죽음으로 잠정 결론지어졌다. 본의 아니게 죽음 전문 배우가 된 라러림(63)은 자신의 사망신을 촬영하기 전, 여러 스태프에게 행운을 비는 동전을 담은 붉은 봉투를 선물 받아 부적 대신 몸에 지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방송 TVB 측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올린 한 영상에서 라러림은 “작품을 선택할 때 배역이 죽는 것은 상관없다. 그가 죽기로 돼 있다면 단지 가서 죽으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라러림의 일부 팬들은 인터넷 게시판에 “짧은 시간안에 너무 자주 그를 죽인다.”며 TVB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 TVB 관계자는 “라러림은 다섯 번 죽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해명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허달재 매화도는 다르다

    허달재 매화도는 다르다

    외로운 가지 하나 덩그러니 있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나뭇결도 거칠다기보다는 허벅허벅하니 푸근하다. 포인트처럼 찍히는 화려한 꽃송이도 없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가지와 꽃이 만발한 모양새다. 사군자 가운데 매화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꽃이다. 해서 대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모양새로 그려진다. 허나 ‘심조화 화조심’(心造畵 畵造心)이란 이름이 붙은 직헌(直軒) 허달재(59)의 매화는 정반대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격조도 중요하지만 시대상도 중요하지요. 컬러를 쓰고 풍성한 것은 그런 현대 사회의 심상이 투영된 게 아닐까요.” 허 작가는 남종화(南宗畫·중국 명나라 때 막시룡 등이 일으킨 화풍으로 장식적인 북종화와 달리 수묵과 담채 위주의 문인화를 중시)의 대가로 꼽히는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의 장손이다. 그럼에도 현대적 변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기초적인 작업방식에서 할아버지를 떠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림까지 할아버지처럼 그리는 게 계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림 크기도 실용적이다. 병풍 모양으로 제작한 작품들도 있는데, 소파나 침대, 사무실 뒤편에 두고 쓸 수 있도록 그림 높이를 현대적으로 조절했다. 4월 25일까지 서울 명동 롯데갤러리. (02)726-4429.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선의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의 영주

    조선의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의 영주

    23일 오후 7시 20분 방영되는 KBS 1TV ‘학자의 고향’에서 삼봉 정도전을 다룬다. 정도전은 널리 알려졌듯,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뒷받침한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개국공신이라면 조선조 내내 숭앙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되레 줄곧 기피인물로 꼽히다가 500년이 지나서야 흥선대원군이 복권시켜 줬다. 대신 조선조 내내 유학자들이 떠받들었던 인물은 정몽주였다. 역성혁명에 반대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던 정몽주는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충절의 표상으로 떠받들어졌다. 한데 개국공신인 데다, 한양천도 작업을 총지휘했고, 법전 마련과 고려사 정리작업에 이르기까지 신생왕국 조선의 기틀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정도전은 계속 묻혀 있었다? 프로그램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꿈꾸게 된 것은 유배지인 전남 나주에서 만난 백성들의 실태 때문이었다. 온갖 세금과 실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위민(爲民) 사상을 되새겼다. 그가 웅대한 꿈을 펼칠 기회를 잡은 것은 이성계와의 만남 이후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능히 국가를 취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게 아니라 장자방이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자신이 조선의 장자방이 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도전에게도 걸림돌은 있었다. 그는 유학자임에도 명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며 요동정벌론을 내세웠다. 외이(外夷)론이 대표적이다. 한(漢)족 외 변경의 오랑캐도 중원을 차지한 전례가 있다, 따라서 조선도 그리 될 수 있으니 굽히고 들어갈 일이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그는 왕권의 절대성보다 신권과의 균형을 강조한 왕도정치론자였다. 이방원에게 끝내 피살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대내외적 안정을 추구했던 조선왕조에 걸맞지 않은 부분이다. 그를 죽인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마자 영의정이 각부 신하들의 의견을 취합해 왕과 국사를 논의하던 제도를 각 부 신하들이 왕에게 직접 보고토록 한 것이 단적인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北 폐쇄성은 변화 두려워하는 한민족 전통”

    주한 중국 외교관이 북한의 폐쇄성에 대해 “명·청 시대에 조공을 바치며 변화를 두려워한 한국(조선)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남북한을 싸잡아 비하한 사실이 4일 공개된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강석주 북한 내각 부총리에 대해서는 ‘무역적자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로 평가했다. ● 청 융화 前대사 “北 화폐개혁 경솔” 스페인 신문 ‘엘 파이스’가 위키리크스로부터 건네받아 공개한 2009년 12월 24일 자 주한 미국대사관 외교전문에 따르면 청융화(程永華) 당시 주한 중국 대사는 2009년 12월 21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와 가진 만찬에서 한달 전 단행된 북한의 화폐개혁에 대해 “경제 통제를 강화하려는 ‘경솔한 시도’”라고 평가절하했다. 청 대사는 “북한이 중국의 개혁노선을 따랐으면 지금 더 잘살게 됐을 것”이라면서 “북한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같은 인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청 대사는 2009년 중국이 북한과 핵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북한의 행동 중 일부는 분명히 중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점을 주기적으로 경고했다고 소개했다. ● “강석주 무역적자 개념도 이해 못해” 이 자리에 배석한 천하이 주한 중국대사관 정무참사관은 “북한의 폐쇄성이 한국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한 지 100년이 지날 때까지 한국은 명나라 왕실에 조공을 보내고 명나라의 풍습과 전통을 고수했다.”면서 “작은 나라인 한국은 ‘변화에 굴복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 때문에 급격히 변하는 환경에 대응할 때 움츠러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이 현대 경제학과 무역 원칙에 대해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천 참사관은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수석대표와 북한 대미외교의 실무 사령탑인 강석주 내각 부총리 사이의 대화를 스티븐스 대사에게 소개한 뒤 “북한 당국자 중 누구보다도 서방 경제에 많이 노출된 강석주 부총리가 무역적자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천 참사관은 중국 외교부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을 ‘북한에서 유학하거나 근무한 시니어그룹’, ‘중국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으로 학위를 딴 중견 간부 그룹’, ‘한국에서 전문성을 쌓은 신흥 주니어 그룹’으로 나눈 뒤 “중국 외교부 내 한국 전문가 그룹에서 북한에서 공부한 시니어들조차 북한보다는 일이 더 실질적이고 다이내믹하며, 삶의 질이 나은 남한에서 근무하기를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씨줄날줄] 사무사(思無邪)/노주석 논설위원

    종종 ‘사무사’(思無邪)를 접한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조종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명나라 의종의 친필을 우암 송시열이 각자(刻字)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공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전남 곡성 성출산 입구 계곡 바위에 남아 있는 것은 조선 고종의 필체이다. 면암 최익현이 새긴 것이다. 면암은 이 글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켰다. 김종필 전 총리는 1999년도 신년 휘호를 ‘일상사무사’(日常思無邪)로 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정부를 형성했던 JP에게 이 휘호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바라는 복심이었다. 송태옥 시인은 “비둘기가 도덕 시간에 교실에 들어왔다/있음은 없음에서 나서/나도 너도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다며/노자 도덕경을 강의하는데…비둘기도 학생일 수 있고/학생도 비둘기일 수 있는 것이라고…학생들보다 노자를 먼저 깨달은 비둘기는/말 않고 가르치겠다며/말없이 교실을 떠난다/빈 책상자리가 있는 듯 없는 듯 휑하다.”라고 ‘사무사’를 읊었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사무사를 현대시어로 옮겼다. 공자는 기원전 11세기 주나라 초기부터 기원전 6세기 춘추전국시대 중기까지 전해 내려오던 노래 3000여편 중 자질구레한 것은 빼고 정리했다. 현재 311편이 전해지는데, 6편은 제목만 있으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305편으로 편집한 셈이다. 논어 위정편에 ‘자왈시삼백(子曰詩三百)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왈사무사(曰思無邪)’라고 했다. 공자 가라사대 “시 300편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라고 정의한 것이다. ‘시삼백’은 시경의 그 시대 제목이다. 시 속에 담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사무사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듯 각자 취향에 따라 다르게 푼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편에 “사무사란 무슨 뜻인가.”라는 단종의 질문을 받은 사육신 박팽년의 답이 명답이다. “생각하는 바에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바름을 일컫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바르면 모든 사물에서 모두 바름을 얻을 것입니다.” 또 한해를 접는 마지막 날이다. 생각 사(思), 없을 무(無), 간사할 사(邪) 세 글자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되새겨 보면 내뱉었던 말, 행동거지, 그리고 인터넷의 바다를 떠도는 기록물들이 두렵다. 삿됨이 없는 삶을 어찌 얻을 것인가. 사무사라, 사무사라….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청와대 신년 화두 一氣呵成

    청와대가 2011년 신년 화두로 ‘일기가성’(一氣呵成)을 내놨다. 청와대는 30일 보도자료를 내고 “국운이 융성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국민이 단합해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선진국의 문턱을 막힘 없이 넘어가자는 염원을 담아 신년 화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일기가성은 일을 단숨에 매끄럽게 해낸다는 의미로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루지 않고 이뤄내야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16세기 명나라 시인·문예비평가인 호응린(胡應麟)의 역대 시 평론집 ‘시수’(詩藪)에 실린 시인 두보의 작품 ‘등고’(登高)에 대한 시평 부분에 나오는 문장이다. 청와대는 “한 단계 도약한 더 큰 대한민국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지금의 고비를 긍정적인 기회로 여겨 염원을 이뤄내고자 하는 2011년의 국정운영 자세”라고 설명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5) 이탁오의 ‘분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 위험한 책과 위험하지 않은 책. ‘분서’는 전자에 속하는 책이다. 태워버려야 할 정도로 위험한 책, 분서(焚書)! “읽는 사람에 따라 질책과 원한이 생길 수도 있겠기에, 이 책이 응당 불살라지고 내버려질 운명”임을 예감한 이지(李贄·1527~1602)는 자신의 문집에 ‘분서’라는 쇼킹한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분서’는 불태워지는 대신 불처럼 번져나갔고, 불타오르듯이 읽혔다. ●위험하지만 절박한… 낯선 배움의 여정 이지. 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로, 호는 ‘탁오’(卓吾)다. 대체로 이탁오 앞에는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 ‘명대 최고의 사상범’ 같은 극단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탁오는 당대(當代) 지식인들의 도그마가 되어버린 주자학적 질서에서 발생한 하나의 균열이었다. “내가 지금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도(道)를 추구한다면 공자와 노자를 가릴 여유가 있겠느냐.”던 이탁오는, 굶주린 자가 밥을 구하는 절박함으로 기존의 영토를 떠나 낯선 배움의 여정을 시작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오호라! 나는 오늘에서야 우리 공자를 이해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따라 짖지는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난쟁이가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속분서’ 중 ‘성교소인’(聖敎小引)> 이탁오의 집안은 원래 대외무역을 하던 상인 집안이었지만, 조부 덕분에 글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된 26세부터 53세까지 중국 각지를 전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보통 사람들 같으면 더 높은 관직에 오르려고 발버둥치면서 안정된 노후대책을 모색할 나이에 출가를 결심한다. 이유인즉, ‘진짜 공부’를 하겠다는 것. 그는 선언한다. “나는 한 마리의 개”였노라고! 이보다 더 파격적이고 용감한 자기선언이 또 있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앎과 신념을 더 견고하게 다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탁오는 50이 넘은 나이에 자신이 믿었던 세계가 허상일 수도 있음을 보았고, 자신이 한 마리 개였음을 자각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도 계속 개처럼 살 수야 없지 않은가. 그는 미련 없이 자기 자리를 떠난다. ●사욕 속 ‘본래의 성’을 되묻다 송·명대 이학(理學)의 출발점은 천리(天理)다. 그것은 ‘그런 것’이면서 ‘그래야 하는 것’이며, 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만물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법칙이다. 그리고 이 법칙이자 자연으로서의 이(理)가 인간에게 내면화된 것이 본성(性)이다. 이 본성은 기질에 따라 치우치거나 탁해지게 되는데, 이때 ‘사욕’(私慾)이 발생한다. 예컨대, 먹고 입고 자는 등의 행위는 ‘본래의 성’에 속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어떤 잉여가 더해지면, 즉 더 좋은 걸 먹거나 입고 싶어 하게 되면, 그것은 사욕으로 변질되고 만다. 성리학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이 ‘사욕’을 어떻게 극복하고 ‘본래의 성’을 되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탁오는 이 기본구도를 깨고 나간다. 그는 천리가 아니라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일상에서 시작한다. 과연 ‘사욕’이 개입되지 않은 도리가 따로 존재할 수 있는가. 도리와 법칙을 추구하는 것은 사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는 ‘도리 vs 사욕’이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그것을 재정의하는 대신 그와 같은 틀 자체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밀어붙인다. 여기에는 당시 지식인들의 위선과 자기 기만에 대한 이탁오의 깊은 혐오가 깔려 있다. 이탁오는 자신의 ‘참된’ 도리로 지식인들의 ‘거짓’ 도리를 비난하는 대신, 현실적 욕망의 지평에서 ‘도리’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도리’는 어쩌면 자신들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그들의 도리가 백성들의 사욕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도리’라는 명분이 도리어 지식인들의 탐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닐까. 이탁오는 묻는다.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욕망의 자리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사유를 시작할 것이며, 어디서 도를 구할 것인가, 라고. 인간에게 의지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 삶에 대한 의지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보면, 재물과 여색을 탐하는 자의 욕망이나 도를 탐하는 자의 욕망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실체화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한에서는 똑같이 즐겁고 똑같이 괴롭다. 그러니 문제는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안에서’,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분서’ 곳곳에서 이탁오는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잘살고 싶어서 관리가 되었고, 그러다 더 잘살아 보려고 출가했을 뿐이다. 처자식을 열심히 먹여 살리고 싶었던 것도 이탁오고, 그러다가 다 내버리고 도망쳐 나온 것도 이탁오다. 그의 비난자들이 말한 것처럼 초탈해서 처자식을 버린 것도 아니고, 무슨 선기(禪機)가 있어서 부러 기행(奇行)을 일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할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 ●개로 살 것인가,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인가 불온한 사상으로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탁오는 명 말의 부패한 권력자들에게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종의 ‘사상범’으로 관에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물던 옥사에서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자가 남긴 글에 따르면, 옥중에서도 평상시처럼 책을 읽고 시를 짓다가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는 말을 남기고는 덤덤하게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빛나는 최강 ‘포스’. 추측컨대, 죽음마저도 스스로 결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분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조형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불균질적인 사유의 조각들이다. 절실한 배움의 관계가 사라져가고, 지식은 지배와 계급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권력으로 기능하는 우리 시대에, 그의 물음은 더욱 더 사무치게 와 닿는다. 개로 살아갈 것인가,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인가. 채운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용봉문 투구·갑옷 야스쿠니신사 소장

    용봉문 투구·갑옷 야스쿠니신사 소장

    이순신 장군이 직접 착용했던 투구와 똑같은 진품이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2일 확인됐다. 지난 3월부터 야스쿠니신사에서 열리고 있는 ‘가미카제(神風) 특별전’에 조선시대 최고의 군 통수권자가 썼던 ‘용봉문 투구와 갑옷’이 전시되고 있다. 이 투구에는 금으로 용과 봉황이 조각됐으며, 이마 가리개에는 최고 통수권자를 지칭하는 ‘원수’(元帥)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메이지 18년인 1885년에 야스쿠니신사에 봉납(奉納)됐다.’고 표기돼 있다. 국내에 용봉문 투구는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인 이봉상 원수의 투구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반면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용봉문 투구는 붉은색 갑옷에 맞춰진 완전한 형태로 국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문화재다. 이 투구와 갑옷은 이순신 장군이 실제 착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조선왕실의궤 등 한국도서 1205책의 연내반환이 일본 국회의 비협조로 무산된 만큼 용봉문 투구와 갑옷 같은 진귀한 문화재 반환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될 전망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지난달 14일 요코하마에서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일본으로 반출된 도서만의 반환을 약속하는 ‘한일도서협정’에 서명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는 용봉문 투구 옆에 지난 1274년 몽골의 일본 침략 시 일왕이 ‘적국항복(敵國降伏)’이라고 쓴 글씨를 나란히 전시하고 있다. 이 글씨는 1593년 임진왜란 중에 조선출병에 나서, 백제관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싸워 이긴 고바야카와의 손을 거쳐 후쿠오카의 하코자키구 신사에 보관하고 있는 진품의 복사본이라고 야스쿠니 측은 설명하고 있다. 마치 조선 최고 장군이 일왕에게 항복한 것처럼 보이도록 전시품으로 진열하고 있는 셈이다. 1978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야스쿠니신사가 조선시대 원수의 갑옷과 투구마저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한 만큼 한국 측의 반발은 불가피하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인 혜문스님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야스쿠니 신사에 조선 최고 군 통수권자인 ‘원수’의 투구와 갑옷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울분을 느낀다.”며 “이순신 장군이 착용했던 것과 동일한 투구가 적국항복이란 글씨 옆에 ‘승전 기념물’ 처럼 진열되어 있는 것에 무척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혜문 스님은 조만간 야스쿠니 신사에 이번 전시회의 부당성과 용봉문 투구와 갑옷의 반환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낼 예정이다. 가미카제 특별전은 오는 8일까지 열린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황비웅 기자의 광저우 아침] 끝없는 철조망·방어벽 中경기장도 ‘만리장성’

    최근 광저우 아시안게임 기사의 제목에는 ‘만리장성’이라는 용어가 자주 들어간다. 가령 ‘남자 탁구 만리장성 못 넘고 은메달’ 같은 식이다. ‘중국=만리장성’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 [포토] 코리안號 ‘종합 2위 목표’ 순항중 만리장성은 진나라 때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시황이 지은 성벽이다. 지난해 4월 중국 고고학계가 발표한 총길이는 8851.8㎞. 명나라 때 증축한 뒤 현재도 연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이 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흉노족 등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구분 짓는 문화적 경계선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변방문화로부터 중화문화를 지키기 위한 심리적인 ‘방어벽’ 역할까지 겸한 셈이다. 아시아의 최대 축제가 한창인 광저우에서 취재를 다니면서 느끼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층 건축물 단지에 빙 둘러쳐져 있는 담장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5m마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안들은 성곽을 지키는 병사를 연상케 한다. 출입문은 대부분 하나라서 찾기도 쉽지 않고, 들어가려면 반드시 공안의 신원 확인이 필요하다. 중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만리장성’ 문화다. 경기장은 더 심하다. 처음 수영장 취재를 갔을 때 일이다. 지도상으로 야구장 옆에 수영장이 있기에 야구장을 찾은 뒤 수영장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구장을 따라 빙 둘러친 철조망은 끝이 없었다. 경기장 시설물은 옛 성곽이고, 철조망은 성곽을 지키기 위해 쌓은 장성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지도상에서 바로 옆 건물로 보였던 경기장을 찾아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나가는 문과 들어오는 문이 분리돼 있어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심리적인 방어벽은 더 심해 보인다. 외국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도록 교육받은 자원봉사단도 출입 제한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절대 들여보낼 수 없다는 듯 일단 손으로 막고 본다.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ID카드를 천천히 스크린한 뒤에야 겨우 가도 좋다는 눈짓을 한다. 하지만 어렵게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이들은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다. 외국 취재진들을 당황케 하는 ‘만리장성’ 문화가 이들에게는 삶의 한 방식일 뿐이었다. stylis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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