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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6] 징비록 특별전과 안동 유림 패션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6] 징비록 특별전과 안동 유림 패션

    KBS TV 역사 드라마 ‘징비록’이 얼마 전 막을 내렸다. 드라마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겠지만 때맞춰 국립민속박물관이 지난주 ‘징비록’ 특별전을 시작했다. 일반 공개에 앞서 지난 11일에는 초청인사를 대상으로 하는 개막식이 열렸다. 민속박물관 전시회의 개막식은 대개 조촐하게 치러지곤 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휴관일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각종 차량이 박물관 앞마당을 온통 점령했다. ‘징비록’의 지은이이자 주인공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의 향리인 안동에서도 대거 올라온 듯 전세버스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류성룡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무게를 반영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흥미로웠던 대목은 단체로 참석한 안동 유림의 패션이었다. 정갈하게 손질한 모시 두루마기에 중절모, 그리고 새하얀 고무신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 자체에서 품위와 권위가 느껴졌다. 조선시대 유림이 아닌 21세기 안동 유림의 여름 ‘드레스 코드’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안동의 전통이란 한때 존재하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별전은 기획전시실에 마련됐다. 둘러보면 ‘징비록’과 관련된 각종 유물이 매우 좋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전시 유물 대부분은 특별전의 공동주최자인 한국국학진흥원이 관리하고 있는데, 안전하게 보존하고자 풍산 류씨를 비롯한 각 문중이 소장 유물을 위탁했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되 과학적 사고와 실천에도 적극적인 안동 유림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징비록’ 그 자체다. 국보로 지정된 서애의 1604년 친필본과 이후의 목판본, 그리고 ‘징비록’을 찍어낸 조선 후기 책판을 모두 볼 수 있다. 친필본에서 정치적으로 미묘한 대목은 목판본으로 찍어내며 생략하기도 했다고 사실은 처음 알았다. 서애와 친분이 깊었던 오리 이원익(1547~1643)의 종가가 소장한 19세기 한글본 ‘징비록’도 눈길을 끈다. 전시는 ‘영의정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하다’, ‘이순신을 등용하다’, ‘명나라 군대와 평양성을 탈환하다’, ‘병으로 사직을 청하다’, ‘오직 나라를 위해 힘쓰다’ 등의 몇가지 주제로 나뉘어 졌다.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을 알게 해주는 다양한 역사적 문헌 자료가 제시되어 있지만, 관람객의 발길은 아무래도 서애의 갑옷과 투구, 그리고 말안장이 있는 곳에 가장 오래 머무는 듯 하다. 서애가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가 되어 현장에서 군사업무를 총괄할 때 직접 썼던 것들이라고 한다. 함께 전시된 ‘정원전교’(政院傳敎)는 글자 그대로 승정원에서 서애에게 왕명을 전달한 문서를 모아놓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2월 4일 왕의 전교를 보면 ‘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검찰하게 하였으나, 현재 일컬을 만한 직책이 없어서 일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많을 것이다. 지금 경울 도체찰사로 삼으니 여러 군사를 총괄하여 흉적을 섬멸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징비록’ 특별전은 9월 30일까지 열린다. 매주 화요일 휴관.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해외여행 | 중국 구이린Guilin-풍경 그 너머의 고장

    해외여행 | 중국 구이린Guilin-풍경 그 너머의 고장

    억만년의 시간이 빚어낸 경치를 시인묵객들은 천하제일이라 예찬했고, 구이린계림, 桂林을 보지 않고 산수를 논하지 말라고 누군가는 으스댔다. 그러나 마주한 그곳에서 시선을 파고든 건 산과 물의 품에 안긴 사람들이었다. 장엄한 풍광도 삶의 터전일 뿐인 그들은 전통을 잇고 현재를 수긍하며, 리장리강, 漓江처럼 담담히 흐르고 있었다. 순한 웃음을 주던 그 얼굴들이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다. 구이린桂林을 여행하기 전 기원전 214년, 진나라 시황제가 처음 도시를 세운 구이린은 광시좡족자치구 북동부에 있다. 수려한 경관은 익히 유명하고 특히, 몇년 전부터는 수십 개의 풍경구를 새로 개발하고 교통까지 편리해져 국제관광도시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구이린은 아열대 기후라 기온이 높고 일 년 내 비가 자주 온다. 크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곳이라지만 실제 체감 온도는 그렇지 않다. 습기 탓에 훨씬 덥게 느껴지고 비가 내린 후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5월 말의 기온이 34℃ 정도였는데 체감온도는 40℃처럼 느껴졌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이기 때문에 가볍게 보지 말고 여행시에는 계절에 맞는 준비물을 잘 챙기도록 한다. 흔히 계수나무 꽃이 피는 가을을 여행의 최적기로 꼽는다. 룽지티톈의 경우 10월 둘째 주쯤 추수를 하기 때문에 황금 논을 보기 위해서는 중국 내 인파가 몰리는 첫째 주는 피하는 것이 좋다. ●구이린桂林 계수나무의 숲 잦은 비에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고작 60일이라는 구이린. 출국 전부터 중국 기상청 예보에 온통 신경이 쏠렸건만. 6월을 앞둔 구이린의 하늘은 머리 위로 폭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동하는 내내 차창에 코를 박았다. 종일 집안으로 향기가 스민다는 꽃이 피기에는 이른 시기였지만 계수나무는 초여름 무성한 녹음을 뿜고 있었다. 건물 사이 기괴한 봉우리들이 시선을 끌었고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그 사이를 무심히 내달렸다. 구이린은 몇년 사이 빠르게 변화해 왔다. 특히 광시廣西좡족자치구의 교통 요지로서, 잘 정비된 도로에 리장漓江, 샹장湘江의 물길은 광저우와 홍콩, 마카오까지 이어진다. 숲을 이룰 만큼 계수나무가 많다는 뜻을 가진, 구이린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110년의 계수나무 부부수가 있는 곳은 징장왕청靖江王城이다. 징장은 구이린의 옛 지명으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면서 장손인 주수겸을 왕으로 임명해 구이린에 파견했다. 왕청은 징장왕의 저택으로 명나라 5년에 착공해 완성까지 20년이 걸렸다. 현재 광시사범대학 왕청캠퍼스로 사용 중인 징장왕청은 시내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견고한 성벽과 네 개의 성문은 당시 그대로지만 종묘, 정자, 누각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중일전쟁1937~1945년 때 파괴되어 1947년 재건한 것이다. 역사전시실로 꾸며진 청윈뎬承云殿에는 12대에 걸친 성의 역사를 모아 놓고 있으며 한 켠에서는 작은 공연도 펼쳐진다. 그 뒤 국학당으로 사용 중인 침궁 앞으로 학생들이 오간다. 우거진 나무터널을 지나 걸음은 두슈펑獨秀峰에서 멈췄다. 66m 높이에 불과한 이 석회암 봉우리는 이름처럼 홀로 우뚝 솟아 있는데 정상에서 보이는 멋진 전경은 과거 명인들의 동경이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석각이다. 당나라 이래 136개나 되는 석각이 봉우리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새겨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송나라 후기 때 문인이던 왕정공王正功이 직접 새긴 시다. ‘구이린의 산수가 천하의 으뜸桂林山水甲天下’이라는 유명한 문장이 그 시 속에 있다. 젊은이들과의 연회에서 흥에 겨워 쓴 시의 한 구절이 구이린을 대표하는 말로 대대손손 기억되리라는 것을 왕정공은 짐작이나 했을까.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더위에 지쳐 있다 쾌재를 부른 것은 루디옌蘆笛岩에서다. 루디옌은 시내에서 7km 떨어진 광명산에 있는 동굴로 전체 2km 중에 개방된 곳은 500m 정도다. 18℃를 유지한다는 동굴 안은 정말 시원했다. 눈사람, 부처, 사자, 수정궁 등 기이한 형상의 종유석과 석주, 석화가 색색의 조명 아래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고 안내원의 설명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동굴은 정말 신비로웠지만 여기저기 판매를 목적으로 잘려 나간 종유석을 보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자연의 예술궁전’이라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분명하다. 구이린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평범했던 낮과 달리 밤의 구이린은 화려하게 변신한다. 대표적인 곳이 량장쓰후兩江四湖다. 량장쓰후는 시내를 감싸 흐르는 리장과 타오화장桃花江의 물줄기를 도심의 룽후龍湖, 산후杉湖, 구이후桂湖, 무룽후木龍湖와 연결해 만든 해자라고 할 수 있다. 네 개의 호수는 당나라 당시에도 구이린의 해자였다. 샹산象山공원도 량장쓰후 부근에 자리한다. 흔한 유원지를 떠올리는 분위기 탓에 명성과 달리 조연으로 전락했던 그 코끼리 모양의 돌산은 차라리 밤이 되자 주연의 자리를 되찾은 듯 보였다. 산후 앞 선착장에서 유람선의 차례를 기다렸다. 물 위로 량장쓰후의 랜드마크인 일월쌍탑日月月雙塔이 반짝인다. 금탑은 태양, 은탑은 달을 뜻한다. 유람선이 제 속도를 내고 룽후를 지나는 오른쪽으로는 룽후공원의 밤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조명에 파묻혀 웃고 있다. 함께 손을 흔들었다. 속도가 줄어든 것은 중간 지점 구이후 부근에서다. 재현된 옛 선박모형 앞에서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낚시 퍼포먼스가 연출되고 있었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는 긴 목과 주둥이를 이용해 재빠르게 물고기를 잡는다. 배는 다시 미국 금문교 모양의 다리 아래를 지난다. 모두 열 아홉 개나 되는 량장쓰후의 다리 중에는 이처럼 세계 유명 다리를 본뜬 것도 많아 교량박물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뱃놀이의 풍류는 당을 거쳐 송宋대에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많은 호수와 강이 있는 구이린은 수로가 발달해 뗏목과 배를 이용한 뱃놀이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위해 개발이 진행되면서 수질은 나빠지고 하천의 체계는 무너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1998년의 량장쓰후 프로젝트다. 강과 호수를 연결하고 공원 녹지를 조성했으며, 다리와 길을 만들고 수질을 정화하는 작업을 거쳐 2002년, 지금의 량장쓰후를 탄생시켰다. 덕분에 도심의 생태환경 질은 높아졌고 오늘날 쾌적하게 밤의 풍류를 즐기게 된 것이다. 유치하다 싶을 만큼 화려한 조명들로 몽롱한 사이, 수변 무대 앞에서 유람선이 갑자기 멈춰 선다. 음악과 함께 민속공연이 한창이었다. 감상도 잠시, 출발 지점을 향해 다시 뱃머리를 돌린다. 배 안. 어여쁜 한족 아가씨가 익숙한 우리 노래를 비파로 연주하는 동안 한 시간여의 현대판 뱃놀이가 끝나 가고 있었다. ●룽성 龍勝 눈물로 일군 천국의 계단 구이린에서 77km. 광시와 후난湖南성 접경에 자리한 룽성으로 향한다. 정확히 말하면 룽성 각족各族자치현 허핑和平향, 그곳에 있는 룽지티뎬龍脊梯田이 목적지다. 룽지티톈은 우리가 흔히 다랭이 논이라 부르는 계단식 논이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곳이다. 두 시간 반 만에 버스가 매표소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을 또 가야 한다. 세차게 비가 내렸고 험한 산길 아래는 물줄기가 운무에 쌓인 계곡을 휘감았다. 멀미가 슬슬 올라올 무렵 멈춘 곳은 훙야오红瑶족의 부락인 황뤄야오자이黄洛瑶寨. 60가구, 약 500명이 이곳에 모여 산다. 야오족은 수난의 역사를 가졌다. 원명元明시대 봉건통치자들의 압박을 피해 대규모 야오족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특히 명대 97년간은 군대까지 동원한 유혈진압에 시달렸다. 훙야오족이 룽지티톈에 정착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다채로운 자수를 수놓은 붉은색 옷을 입는 훙야오족은 여인들의 긴 머리가 유명하다. 머리카락 평균 길이는 1.7m, 가장 긴 사람은 2.1m나 된다. 다섯살 때부터 기른 머리를 성인식 때 귀밑까지 자르고는 다시 평생 기른다. 자른 머리카락은 뭉치로 잘 보관해 뒀다가 결혼 후 자녀를 낳으면 틀어 얹는데 그것을 반발盤髮이라 한다. 그리고 머리를 손질할 때 빠지는 머리카락을 모아 뒀다가 또 하나의 반발을 만든다. 예쁘게 틀어 올린 머리는 지금의 머리에 두 개의 머리채를 묶어 비로소 완성된 스타일이다. 훙야오족이 이토록 애지중지 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머리카락이 부귀영화와 장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부락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흔들다리를 건너야 했다. 10여 명씩 우산을 든 채 한 손으로 출렁대는 다리를 부여잡고 뒤뚱대며 건넜다. 발아래로 비에 불어난 물살이 아찔했다. ‘천하제일장발촌’이라는 표지석을 지나 들어선 민속공연장에는 훙야오족 문화의 면면이 공연으로 펼쳐진다. 전통차인 유차를 마시며 여인들이 그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감아올리는 퍼포먼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남성 관객과 함께 연출하는 결혼 풍습도 흥미롭다. 마음에 드는 남성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꼬집고 남성이 여성의 발등을 살짝 밟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공연은 부락에서 가장 나이 많은 81세의 할머니가 창가에서 긴 머리를 빗는 것으로 막바지에 이른다. 놀랍게도 흰머리가 하나도 없다. 훙야오족은 쌀뜨물을 발효시킨 물로 계곡에서 머리를 감는다는데, 일평생 검고 윤기 나는 머릿결을 지니고 있는 비법일지도. 노동이 흐르는 산등성이 풍경 71.6km2라는 가늠하기도 힘든 면적의 룽지티톈은 해발 1,916m 룽지산 자락을 380m부터 높게는 1,180m까지 뒤덮고 있다. 크게 진컹티텐金坑梯田과 핑안티텐平安梯田으로 나뉘는데, 핑안은 좡壯족의 거주지이고 진컹은 훙야오족의 거주지다. 그들은 13세기 원나라 때부터 이 방대한 개간 작업을 시작해 청나라 초기에 완성했고,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방향은 진컹티톈 쪽이었다. 3년 전 설치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로 했다. 천천히 고도가 높아지고 창밖으로 논이 물결친다. 20분 후, 드디어 가장 높은 진푸딩金佛頂 전망대다. 막 비가 그친 희뿌연 산자락에 온통 용이 춤을 춘다. 논 사이사이 다자이, 신자이, 좡지예 등 부락들이 그림처럼 박혀 있고, 장대한 선율로 흐르는 곳곳에서 모심기가 한창이다. 룽지티톈에는 ‘황금빛 부처의 정수리’라는 진푸딩 외에도 8개의 전망대가 더 있다. ‘달과 일곱 개의 별’, ‘천국으로 향하는 천개의 계단’ 등 저마다 낭만적인 이름을 지녔다. 위대한 이 풍광은 땀과 정성으로 일군 것이라기보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옳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카메라를 내려놓기 힘든 매력적인 예술작품이기 전에 돌투성이 산을 일구며 죽음과 맞서 온 이들의 삶의 터전인 것이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이 역설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저 말을 잊을 뿐이다. ●싼장 三江 시의 고향, 노래의 바다 또 하나의 소수민족을 만나러 싼장 둥족자치현으로 향한다. 소수민족들이 흔히 그렇듯 이들 또한 한족, 몽고족, 만주족 등 주류의 핍박을 피해 이 변방의 산간벽지에서 거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8개의 부락이 모여 산다는 정양촌 입구. 촌락 입구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청양펑위차오程陽風雨橋, 이름 그대로 바람과 비의 다리다. 길이 64.4m에 폭 3.4m, 높이는 10.6m에 이르는 이 다리는 실용성을 넘어 뛰어난 조형미와 아름다운 자태로 세계적으로도 건축양식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1916년부터 12년이 걸려 완성됐는데 중국 정부의 중점보호대상문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양펑위차오는 맨 아래에 5개의 청석으로 기둥을 받치고 그 위에 삼나무로 몸체를 만든 후 탑 모양의 정자를 지붕으로 올린다. 다리 내부는 긴 복도 형태다. 놀라운 것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서로 맞물려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펑위차오風雨橋는 둥족 마을 어디에나 있다. 현에만 모양이 다른 다리가 100개도 넘는다. 부락과 부락의 경계, 강이 있는 자리에 세우는 펑위차오는 교량의 기능 외에도 영혼을 달래고 액을 막아 복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다른 펑위차오인 허룽河龍교를 지나니 핑자이平寨다. 이 부락에는 고루鼓樓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펑위차오와 함께 둥족 문화를 상징하는 고루는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고루를 지을 때는 모두가 힘을 보태고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기도 한다고. 점심은 관샤오冠小촌에서 바이자옌百家宴을 베풀어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바이자옌은 귀한 손님이 오면 집집마다 대여섯 가지의 음식을 만들어 모여 접대하는 손님맞이 잔칫상인데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전통복장을 한 둥족 여인들이 줄을 맞춰 서서 고음과 저음이 섞인 음색으로 환영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들의 환대는 노랫가락을 타고 둥족은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아무 때고 권해도 막힘없이 한 자락을 뽑아낸다. 고유문자가 없는 그들이 노래 속에 역사와 신화를 담아 문화적 전통을 이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둥족 사회가 ‘시의 고향이자 노래의 바다’라는 서정적 칭호를 갖게 된 것도 민족의 서사를 전승하는 방법이 노래였기 때문이다. 고루 앞 광장. 군무와 함께 연회가 시작된다.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인 루성蘆笙이 갖가지 소리를 내며 광장을 울리고, 이들이 모시는 대모신 싸마薩瑪를 상징하는 우산을 들고서 여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춤을 춘다. 햇살처럼 사방으로 퍼진 우산살이 마을의 재앙을 막아 준다고 믿는다. 공연이 끝날 때쯤 여인들이 서둘러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상 하나에 두 가정이 만든 음식이 놓이는데 얼핏 봐도 백 가족은 돼 보인다. 둥족은 자신의 집에서 만든 음식상 앞에 앉아 그 자리에 마주 앉은 손님과 함께 식사를 나눈다. 특이한 것은 한자리에서 식사를 마치는 것이 아니라 젓가락을 들고 상을 돌면서 각각의 손맛을 볼 수가 있다. 개구리튀김이나 메뚜기볶음이 앞에 있다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다. 상마다 반겨 주는 얼굴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연신 받아먹었다. 여기저기서 권주가가 끝날 때까지 권하는 술잔을 연거푸 들이켜 곤혹을 치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배를 두드릴 때쯤 마지막 순서는 뚜어예多耶다. 강강술래처럼 음악에 맞춰 모두가 손을 잡고 도는 춤으로 화합의 뜻이 담겨 있다. 연회가 끝났다. 돌아 나서는 등 뒤에서 그들이 또 이별 노래를 부른다. 괜히 목이 메어서 결국 뒤돌아 손 한 번 흔들지 못했다. 바람소리 같고 새소리 같은 그 노래 때문이다. 소수민족 중국에는 한족 외에도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에 비해 다른 민족들은 10% 미만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는 1952년 소수민족정책 시행 이후 5개 자치구와 30개 자치주, 120개 현에서 소수민족 자치를 허용하고 있는데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은 1,800만 의 좡족으로 광시에 많다. ▶travel info GUILIN Airline 아시아나항공 ‘인천-구이린’ 직항편이 현재 매주 목, 일요일 20:30에 출발하고 ‘구이린-인천’은 04:55 인천 도착이다. 에어차이나항공은 김포에서 베이징을 경유해 구이린까지 운항한다. 직항 소요시간은 약 4시간, 경유시 ‘김포-베이징’은 1시간 40분, ‘베이징-구이린’은 약 3시간이 소요된다. TEA 유차油茶 좡족, 둥족, 묘족, 야오족은 복장이나 음식 등 비슷한 풍습이 많다. 그중 하나가 유차다. 구이린의 유차는 궁청 야오족유차, 룽성 둥족유차, 신안유차로 나뉘는데 유차를 만들고 마시는 것을 ‘타打유차’라고 한다. 만드는 방법은 보통 현지에서 나는 차를 살짝 볶아 생강, 마늘, 쪽파 등을 넣고 물을 부어 끓인 후 걸러낸다. 그리고 기름에 튀긴 찹쌀 위에 부어 낸다. 감기를 치료하고 고된 노동 후, 체력회복을 위해 마셔 왔다는 유차는 손님이 오면 꼭 권한다. 훙야오족과 둥족 모두 환영의 뜻으로 유차를 냈는데 둘 다 비슷했다. 맛은 마치 식용유가 섞인 누룽지처럼 약간 애매하다. MUSICAL 둥족의 사랑이야기, 줘메이坐妹 <줘메이>는 둥족의 풍속을 연출한 대형 뮤지컬이다. 현 중심에 자리한 공연장, 둥샹냐오차오侗鄕鳥巢는 새의 둥지를 형상화한 둥근 형태로 천장이 없다. 줘메이는 둥족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서막을 포함, 전체 6장의 구성 안에서 전통과 현대적인 감각을 조화시켜 춤과 노래로 엮어낸다. 특히 펑위차오와 전통가옥, 흐르는 강 등 둥족의 생활터전을 연출한 무대와 출연자들의 화려한 의상이 볼거리다. www.zuomeisj.com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www.visitchina.or.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류성룡의 삶·정신 오롯이… ‘징비록’을 만나다

    류성룡의 삶·정신 오롯이… ‘징비록’을 만나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삶과 정신이 TV 드라마에 이어 전시에서도 되살아났다. 국립민속박물관과 한국국학진흥원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다음달 30일까지 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는 ‘징비록’(懲毖錄) 특별전을 통해서다. 류성룡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조정의 중추 역할을 했다. 전후 어린 시절을 보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가 더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옥연정사에서 집필에 주력했다. 징비록도 이때 완성됐다. 징비록은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라는 의미로, 임진왜란의 원인 및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특별전에선 국보 제132호 ‘징비록’ 초본, ‘난후잡록’(보물 제160호), 투구와 갑옷(보물 제460호), 한글본 ‘징비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5호) 등 30여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전시는 2부로 이뤄져 있다. 1부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다’에서는 류성룡이 국난 극복에 들인 노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피란 중 영의정과 도체찰사가 돼 7년여 동안 선조를 보좌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다. 개성 피란 도중 영의정으로 임명된 교지, 도체찰사로서 사용했던 투구와 갑옷, 전쟁 중 문서를 넣어 휴대했던 유서통(諭書筒),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류성룡에게 시를 써서 준 부채 등이 전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부 ‘뒷날의 경계를 위해 징비록을 쓰다’에서는 ‘징비록’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모았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그가 작성한 문서 등을 모두 이면지를 활용해 필사해 두거나 명나라 책력인 대통력에 그때그때의 감회 등을 적었다. 전후 류성룡은 옥연정사에서 이들 기록을 참조해 저술했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난후잡록’(後雜錄)이라 했다가 ‘시경’ 소비편의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라는 내용을 참조해 ‘징비록’으로 바꿨다. ‘징비록’ 초본과 류성룡이 ‘징비록’ 초본을 쓸 때 사용했던 대나무 경상(經床), 류성룡과 각별하게 지냈던 오리 이원익(1547~1634) 종가 소장의 한글본 ‘징비록’, 2종의 목판본 ‘징비록’ 등을 접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민속박물관 상설3전시관의 전시 ‘풍산 류씨 집안의 가족 이야기-충효 이외 힘쓸 일은 없다’와 연계해 진행되고 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효경’의 ‘효자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는 말처럼 안으로는 효를 바탕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진정한 충을 실천했던 류성룡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나우! 지구촌] 중국 피서지에 등장한 ‘마장 인파’

    [나우! 지구촌] 중국 피서지에 등장한 ‘마장 인파’

    한국과는 사뭇 다른 피서 풍경이 중국에서 펼쳐졌다. 바다나 계곡 등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삼삼오오 모여 마장(麻將)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늘어난 것. 화시두스바오 등 현지 언론의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기온이 38.8℃에 달했던 지난 주말, 쓰촨성의 한 피서지는 그야말로 ‘파라솔 천국’으로 변했다. 이들은 가족·친구와 함께 피서지를 찾아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근 채 저마다 마장을 두기 시작했다. 주말에만 무려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쓰촨성 두장옌시의 계곡을 찾았는데, 이중 상당수는 마장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마장을 즐기기 위해 파라솔을 빌려 앉았고, 현지 언론은 파라솔 아래 모여든 사람들을 ‘마장 인파’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마장 인파’는 계곡에서 그치지 않았다. 드넓은 모래사장과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도 중국인들은 파라솔을 펼치고 마장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현지에서는 피서지에서 마장을 즐기길 원하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마장 전용 튜브’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마장 전용 튜브는 일반 튜브처럼 바람을 넣어 사용하는 것으로, 휴대가 간편하고 마치 물놀이를 하듯 물에 몸을 담근 채 마장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수중 마장 튜브’라 불리는 이것은 워터파크처럼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젊은 여성들이 아찔한 비키니를 입고 튜브에 앉아 이를 즐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한편 마장은 한국에서 ‘마작’이라고 부르는 중국 전통놀이로, 4명의 대국자가 136개의 파이[牌]를 여러 모양으로 짝짓기를 하여 승패를 겨룬다.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마댜오’라는 놀이의 이름에서 비롯됐으며 현재 마장의 형태와 내용은 청나라 초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씨줄날줄] 표해록(漂海錄)과 문화휴가/서동철 수석논설위원

    “오늘은 날씨가 흐렸으나 풍파는 조금 그쳤다. 비로소 조각난 돗자리를 기워서 돛을 만들고, 장대를 세워서 돛대를 만들었다. 그전 돛대의 밑동을 잘라서 닻을 만들어 바람을 따라 서쪽으로 떠나갔다. 돌아다 보니 큰 파도 사이에 무엇이 있는데, 그 크기는 알 수가 없었지만 물 위에 나타난 것은 기다란 행랑과도 같고, 거품을 뿜어 하늘에 쏘는데 물결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사공이 배 안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손을 흔들어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멀리 지나가자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것이 바로 고래입니다.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도 배를 뒤엎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최부(崔溥·1454~1504)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감찰과 홍문관 수찬을 거쳤다. 서거정과 ‘동국통감’을 편찬하기도 했으니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고 있던 선비였다. 홍문관 부교리로 임명된 해인 1487년 11월 12일 도피한 죄인을 쫓는 소임의 추쇄경차관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듬해 윤정월 3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나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모두 43명이 탄 배는 악천후로 동중국해를 표류하다 오늘날의 중국 저장성에 닿는다. 일행은 14일 동안 표류하다가 해적을 만나기도 하고, 왜구로 오인받아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의 관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항저우에서 대운하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명나라 황제를 만나기도 했던 그는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 6월에는 한양에 닿았다. 제주를 떠난 지 148일 만이었다. 그는 성종의 명에 따라 그동안의 행적을 일기체로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기행 문학의 세계적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표해록’(漂海錄)이다. 표류 도중 고래를 만난 장면의 서술에서 보듯 현장감이 뛰어나다.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역사에서 표류 기록은 매우 흔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조선 세조 14년(1468)부터 헌종 7년(1841)까지 중국 배의 제주 표착이 25건, 일본 배의 제주 표착이 9건이었다. 반면 같은 기간 제주 배의 중국 표착은 23건, 일본과 유구 표착이 각각 15건과 9건이었다. 제주가 ‘표류의 섬’으로 불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렇듯 표류가 빈번했음에도 그 과정을 기록하거나, 표류지 문물을 기록으로 남긴 사례는 거의 없다. ‘표해록’이 갖는 남다른 가치이다. 국립제주박물관이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 기획특별전을 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 세계 학계가 15세기 명나라에 대한 사실적이고도 객관적인 기록으로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표해록’을 오늘의 시점에서 조명했다. 중국 저장성박물관과 공동기획한 이 전시는 2016년 중국 순회전도 예정되어 있다. 이번 여름 제주를 휴가지로 정했다면 이 전시회를 꼭 찾아볼 일이다. 제주를 찾는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자신들로 잘 모르는 과거를 돌아볼 좋은 기회로 알려야 한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문화 유랑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시 한 편에 목숨을 잃다

    [문화 유랑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시 한 편에 목숨을 잃다

    -왕의 부자에게 희생된 조선 최고의 시인 사제 온 나라가 임진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송강 정철이 강화도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은거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요, 정치 권력자의 최후 치고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 무렵 송강을 가끔씩 찾아온 강화도 시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송강의 제자 권필(權韠)이었다. 권필(1569~1612)은 누구인가? 선조대의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호는 석주(石洲). 당시 문단에서 동악(東岳)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호방한 기풍으로 당대에 이미 시의 대가를 넘어선 정종(正宗)이라는 평을 들었다.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권필은 야인이면서도 그를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에는 세상에 뜻을 접고는 강화도 고려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런데 스승 송강 정철이 정적을 제거하는 선조의 칼잡이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 이어, 그 제자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니, 유사 이래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광해군에게 직접 맞아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왕의 친국에서 혹독한 곤장을 맞은 후, 유뱃길에 올라 동대문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폭음하고는 그 밤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광해군에게 맞아죽었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권필에게 화를 불러온 시는 그가 지은 ‘궁류시(宮柳詩)’로서,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 (宮柳青青花亂飛 滿冠蓋媚城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遺危言出布衣) 세간에서는 다들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씨가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광해가 발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권필은 워낙 벼슬에는 뜻이 없어 술과 시로 살아가는 풍류인이었다. 허균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나, 권신 이이첨이 친교를 청하는 것은 끝끝내 거절한 강직한 성품이었다. 시류를 비판한 궁류시가 광해군에게 들어가자 왕은 불같이 노해 시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일찌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는 그 시인이었다.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왕을 만류하고 나섰다.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버티었다.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군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의 불행한 종말을 예고한 불통과 협량이었다고나 할까. 마치 역적을 대하듯 한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밤,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문장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분명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항복의 낙담은 더욱 컸다.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고 자탄했다.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유허비와 함께 아직도 강화에 남아 있다. 그가 초당을 세웠던 곳인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는 권필의 후손이 세운 ‘석주권선생유허비(石州權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고려산 기슭의 하도 저수지 옆이다. 시인이 원래 세상에 별 뜻이 없어 강화에 은둔해 있을 때, 그의 문명을 듣고 찾아온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초당 터이다.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조선 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로 아까운 선비, 인걸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는 권필뿐이었다. 그는 시의 순교자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땅에 있다. 고양땅에 있는 정철의 첫 유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권필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사흘 전 그는 평생 쓴 시를 보자기에 싸서 지인에게 건네고는 주고 마지막 시를 남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 즐겨 지어떠들썩 온갖 입에 오르내렸네시 주머니 닫고 세상 마치리공자님도 말 없고자 하셨거늘.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그의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광해는 유배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지막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로 글을 접도록 하자.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곤륜산 상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군산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유리 물결 걷는 선비… 신선 숨결 걷는 신비

    유리 물결 걷는 선비… 신선 숨결 걷는 신비

    덥다. 시원한 나무 그늘, 얼음장 같은 계곡물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마 조선의 선비들도 그랬겠지. 갓끈 풀고, 저고리 벗고 쉬어갈 곳 찾았을 것이다. 한데 선비 체면에 마냥 놀기만 하자니 뒤통수가 가려웠을 터. 쉬더라도 명승 속에서 인문학적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여건을 갖춘 적당한 곳, 그 곳이 바로 ‘잊혀진 명승’ 안의삼동(安義三洞)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지방의 이상향으로 꼽았던 곳이 이른바 안의삼동이다. ‘조선 선비들의 답사 일번지 원학동’(최석기 지음)이란 책에 이 같은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안의삼동은 경남 함양의 화림동(花林洞)과 심진동(尋眞洞, 현 용추폭포), 그리고 거창의 원학동(猿鶴洞)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옛날엔 안의현(1896년 안의군으로 변경)이 셋을 모두 품었다. 한데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안의군이 없어지면서 서상·서하·안의면은 함양으로, 북상·마리·위천면은 거창으로 넘어갔고, 지명도 갈리게 됐다. 이 가운데 가장 넓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 원학동이다. 원학동은 북쪽의 덕유산, 서남쪽의 금원산과 기백산, 동쪽의 월봉산과 황석산 등에 둘러싸였다. 갈계리 계곡에서 내려오는 계곡수와 월성리 계곡의 사선대, 분설암, 강선대 등을 거쳐온 계곡수가 수승대 위에서 합류해 풍성한 명승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신선들이 산다는 별천지, 이른바 동천(洞天)으로 불렸다. 거창읍내를 기준 삼아 순서대로 짚어 오르자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수승대(搜勝臺) 관광지다. ‘원학동의 꽃’이라 할 만한 곳이다. 맑은 물과 고졸한 정자, 기이한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펼쳐 낸다. 여러 선인들이 수승대의 경치를 칭송했는데, 독특하기로는 남공철(1760~1840)이 표현한 ‘유리세계’를 꼽을 만하다. 너럭바위 아래 계곡수가 모여 이룬 깊은 못이 있고, 주위의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물결에 비쳐 일렁이는 모양새가 반짝이는 유리와 같다는 뜻이다. 옛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이 이름엔 사연이 있다. 거창 일대가 백제에 속했을 무렵이다. 국력이 쇠했던 백제는 당시 강대국 신라로 사신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한데 신라로 간 백제 사신 가운데 온갖 수모를 겪다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탓에 신라로 가는 사신이 떠날 때면 위로 잔치를 베풀곤 했는데, 그때 이용됐던 곳이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낸(送) 수송대였다고 한다. 수송대를 수승대로 바꾼 이는 퇴계 이황이다. 1543년 수승대 인근의 영승마을을 찾은 퇴계가 수송대에 얽힌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수송과 소리가 같은 수승으로 고치라고 권유한 시에서 비롯됐다. 수승대의 핵심은 거북 모양의 바위다.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른다. 생김새가 거북을 닮아 구연대(龜淵臺) 또는 암구대(岩龜臺)라 불린다. 예나 지금이나 명물 위에 제 이름을 남기려는 욕심은 같았던 모양이다. 거북바위 벽면 여기저기에 사람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 숫자가 무려 15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모양이 얼마나 어지러웠던지 남명 조식(1501~1572)이 이 일대를 소요하다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짓”이라 일갈했다고 전한다. 거북바위 맞은편은 요수정(樂水停)이다. 자연 그대로의 암반을 초석으로 쓴 고졸한 정자다. 우물마루 형태의 건물에 올라서면 남공철이 표현했던 이른바 ‘유리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승대에서 북상면 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월성계곡이다. 북상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골짜기다. 월성계곡을 따라 1㎞ 남짓 올라가면 강선대가 나온다. 이름 그대로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곳이다. 황톳빛 암반과 묵직한 느낌의 정자가 인상적이다. 강선대에서 다리 건너 산자락을 따라 2㎞ 정도 올라가면 모리재다. 꼿꼿한 선비 정온이 1637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청나라와 화친한 조정에 반대하며 낙향해 은거한 곳이다. 아무 모(某)에 마을 리(里)란 당호에서 보듯 자신이 산 곳을 알리지 않고 숨어 살겠다는 선비의 고집이 옛집 곳곳에 담겼다. 모리재는 마을 사람도 잘 모를 만큼 꼭꼭 숨어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오르는 길도 제법 가파르고 좁은 편이다. 꼭 둘러보고 싶다면 다소간의 어려움은 감내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부터 하길 권한다. 다시 강선대로 내려와 월성계곡을 따라 5.3㎞쯤 오르면 분설담(噴雪潭)이다. 계곡수가 바위에 부딪치며 포말을 일으키는 모양새가 꼭 눈이 내리는 듯하다는 암반지대다. 시냇가에 축대를 쌓고 그 옆에 도로를 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도로 변에 세워진 작은 표지판을 놓치지 말아야 분설담에 이를 수 있다. 분설담에서 5㎞ 정도 오르면 사선대다. 4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곳. 월성계곡의 정수와 같은 곳이다.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자라 송대(松臺)라고도 불린다. 이 일대 풍경도 수승대에 견줄 만큼 빼어나다. 여러개의 바윗덩이를 쌓은 듯한 사선대와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길이 아름답다. 남명 조식, 동춘당 송준길 등이 여기서 소요했다고 전해 온다. 바위 꼭대기는 뜻밖에 평평하다. 탑의 옥개석을 닮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신선들이 수담을 나눴을 터다. 거대한 바위 아래 ‘사선대’(四仙臺)란 글자가 선연하다. 조선 말 경상도 관찰사 김양순이 썼다고 전한다. 수승대 인근의 금원산 휴양림도 들러볼 만하다.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530호) 때문이다. 휴양림관리소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물길 옆에 거대한 바위가 서 있다. 옛 가섭암의 일주문 노릇을 했다는 문바위다. 족히 3층 건물은 넘어서는 높이로, 단일 바윗덩어리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문바위 뒤편 산비탈엔 거대한 바위들이 포개져 이룬 동굴이 있다. 이 동굴 안 벽면에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조각돼 있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불상이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굴로 스미는 한 줌 빛과 어울린 세 부처를 보자면 저절로 두 손을 모으게 된다. 팁 하나. 제27회 거창국제연극제가 24일~8월 9일 열린다. 낮에는 수승대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밤에는 별빛, 달빛 맞으며 야외극장에서 연극 삼매경에 풍덩 빠질 수 있다. 연극제가 펼쳐지는 공연장 10곳 가운데 6곳이 수승대 일대의 야외극장이다. 최현우 매직쇼 등 부대행사도 다양하게 열린다. 글 사진 거창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55)]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대전~통영 고속도로 서상나들목으로 나가는 게 가장 알기 쉽다. 이어 26번 국도, 37번 지방도로 갈아 탄 뒤 북상면에서 우회전해 내려가면 수승대다. 북상면에서 월성계곡 쪽의 볼거리들을 먼저 둘러보고 내려가도 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고령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거창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거창읍내에서 수승대까지는 약 16㎞다. →맛집 거창엔 추어탕과 어탕국수를 내는 식당들이 많다. 중앙교 사거리 인근엔 추어탕 거리도 조성돼 있다. 거창추어탕(943-0302)이 많이 알려졌다. 위천구구식당(943-2399)은 어죽으로 이름난 집이다. 수승대 인근에 있다. 읍내에도 구구식당(942-7496)이 있는데, 맛은 비슷하다. →잘 곳 숲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금원산자연휴양림과 용추계곡휴양림 등을 권할 만하다. 월성계곡 등에도 크고 작은 캠핑장들이 마련돼 있다. 모텔은 거창읍내 버스터미널 부근에 모여 있다. 가조면 쪽엔 가조온천관광지가 조성돼 있다. 백두산천지온천(941-0723) 등 여행의 피로를 풀 만한 온천이 여럿 몰려 있다. 마이다스온천모텔(941-1183) 등 숙박업소도 있다. 전통한옥마을인 황산마을에서 고택 체험을 하는 것도 좋겠다. 위천면에 있다. 거창군청 940-3000.
  • [문화 유랑기]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

    [문화 유랑기]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인

    -왕의 부자에게 희생된 조선 최고의 시인 사제 온 나라가 임진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송강 정철이 강화도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은거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요, 정치 권력자의 최후 치고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 무렵 송강을 가끔씩 찾아온 강화도 시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송강의 제자 권필(權韠)이었다. 권필(1569~1612)은 누구인가? 선조대의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호는 석주(石洲). 당시 문단에서 동악(東岳)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호방한 기풍으로 당대에 이미 시의 대가를 넘어선 정종(正宗)이라는 평을 들었다.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권필은 야인이면서도 그를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에는 세상에 뜻을 접고는 강화도 고려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런데 스승 송강 정철이 정적을 제거하는 선조의 칼잡이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 이어, 그 제자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니, 유사 이래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광해군에게 직접 맞아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왕의 친국에서 혹독한 곤장을 맞은 후, 유뱃길에 올라 동대문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폭음하고는 그 밤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광해군에게 맞아죽었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권필에게 화를 불러온 시는 그가 지은 ‘궁류시(宮柳詩)’로서,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 (宮柳青青花亂飛 滿冠蓋媚城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遺危言出布衣) 세간에서는 다들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씨가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광해가 발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권필은 워낙 벼슬에는 뜻이 없어 술과 시로 살아가는 풍류인이었다. 허균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나, 권신 이이첨이 친교를 청하는 것은 끝끝내 거절한 강직한 성품이었다. 시류를 비판한 궁류시가 광해군에게 들어가자 왕은 불같이 노해 시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일찌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는 그 시인이었다.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왕을 만류하고 나섰다.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버티었다.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군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의 불행한 종말을 예고한 불통과 협량이었다고나 할까. 마치 역적을 대하듯 한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밤,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문장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분명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항복의 낙담은 더욱 컸다.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고 자탄했다.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유허비와 함께 아직도 강화에 남아 있다. 그가 초당을 세웠던 곳인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는 권필의 후손이 세운 ‘석주권선생유허비(石州權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고려산 기슭의 하도 저수지 옆이다. 시인이 원래 세상에 별 뜻이 없어 강화에 은둔해 있을 때, 그의 문명을 듣고 찾아온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초당 터이다.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조선 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로 아까운 선비, 인걸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는 권필뿐이었다. 그는 시의 순교자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땅에 있다. 고양땅에 있는 정철의 첫 유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권필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사흘 전 그는 평생 쓴 시를 보자기에 싸서 지인에게 건네고는 주고 마지막 시를 남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 즐겨 지어떠들썩 온갖 입에 오르내렸네시 주머니 닫고 세상 마치리공자님도 말 없고자 하셨거늘.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그의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광해는 유배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지막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로 글을 접도록 하자.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곤륜산 상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군산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古都의 물소리 역사의 숨소리

    古都의 물소리 역사의 숨소리

    중국 장쑤성(江蘇省) 여행은 시골 할머니 밥상 같은 맛이다. 투박하고 반찬도 몇 개 없는 수수하기 이를 데 없어 별 기대도 안 하지만 막상 한 입, 두 입 먹고 나면 그 깊은 맛에 고개 숙이게 되는…. 양쯔(揚子)강 동부 하류 연안에 위치한 장쑤성은 잘 알려진 여행지는 아니다. 하지만 수천년 고도(古都)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아름다운 운하로 이뤄진 도시는 진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역사의 중심지 난징(南京), 문화의 보고(寶庫) 쑤저우(蘇州), 아름다운 물의 도시 쿤산(昆山)을 다녀왔다. 역사의 도시 ‘난징’ 장쑤성의 성도 난징의 첫인상은 솔직히 그저 그랬다. 우기에 접어든 습한 날씨 탓도 있었겠지만 스모그에 회색빛 만연한 도시의 모습은 특별할 것 없어 보였다. 처음 도착한 곳은 공자(孔子)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당 부자묘(夫子廟)다. 공자의 극존칭인 공부자(孔夫子)에서 유래했다. 중국 전역의 공자 사당 가운데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대성전 제단에 걸려 있는 공자 초상화는 높이 6.5m로 전국 최대 규모라고 한다. 부자묘 바로 옆에는 남송(南宋) 때 세워진 과거시험장 강남공원(江南貢院)이 있다. 당시 과거시험장 중 최대 규모였으며, 명·청대에는 오승은(吳承恩), 옹동화(翁同和) 등 명인들을 배출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유생들은 강남공원 앞을 유유히 흐르는 친화이허(秦淮河)에서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달랬을 터. 화려한 등불 아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친화이허를 배를 타고 돌아보니 고즈넉한 옛 정취에 과거로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난징 동쪽에 위치한 해발 448m의 쯔진산(紫山)에는 두 개의 능이 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묻힌 명효릉(明孝陵)과 중국 혁명의 선도자이자 국부로 불리는 쑨원(孫文)이 묻힌 중산릉(中山陵)이다. 평일 한낮에 도착한 중산릉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시야를 압도한다. ‘박애’(博愛)라고 쓰인 패방(牌坊)을 지나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고 새겨진 능문(陵門)을 통과하자 ‘중국 국민당 총리 쑨 선생이 여기 묻히다’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여기서 다시 심호흡을 해야 한다. 제당(祭堂)까지 392개의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조성 당시 중국 인구 3억 9200만명을 상징한다는 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비로소 제당에 도착할 수 있다. 제당 중앙에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고 그의 시신은 지하 묘실에 안치돼 있다. 황제의 무덤에만 칭하는 ‘능’이 붙을 만큼 절대적인 존재로 칭송받는 쑨원의 위상이 느껴진다. 중산릉에서 20분쯤 거리에 명효릉이 있다. 주원장 생전에 짓기 시작해 32년 만에 완공된 능은 많은 전란 속에 대부분이 소실되고 현재는 능의 일부만 남았다고 한다. 황후 마씨와 합장된 황제의 능은 위용 있지만 화려하지 않았다. 중산릉에 비교하니 소박한(?) 느낌마저 든다. 생전 반봉건을 주장하며 민족·민권·민생을 제창하던 쑨원은 죽어서 황제보다 더 받들어지게 될 줄 알았을까. 정원의 도시 ‘쑤저우’ 쑤저우를 일컫는 말들만 보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하늘 아래 천국’(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이며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은 곳’이라니. 그만큼 기후 좋고 살기 좋았다는 뜻일 것이다. 풍부한 자원과 경제적 번영 위에 도시가 발달하고 최상의 정원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송대부터 이어진 쑤저우의 정원은 중국 남방 고전원림 건축의 정수로 일컬어진다. 중국 4대 정원 중 두 곳인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을 비롯해 사자림(獅子林), 망사원(網師園), 우원(?園) 등 9개의 ‘정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을 정도다. 그중 으뜸으로 치는 졸정원은 명나라 관리 왕헌신이 낙향해 16년에 걸쳐 만들었지만 자신은 정작 3년밖에 살지 못했다. 5만 1950㎡(약 1만 6000평)에 달하는 정원은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연못으로 이뤄져 있다. 졸정원의 연꽃은 아름답기로 유명해 7~8월 연꽃이 필 때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중원·동원·서원 세 부분으로 나뉘며 중원에 볼거리가 가장 많다. 졸정원과 함께 명대를 대표하는 정원인 유원은 비교적 아담한 크기다. 중부·동부·서부·북부 4개 경구로 구분하며 각 경구는 700m에 이르는 긴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회랑을 걷다 보면 곳곳에 나 있는 화창(花窓)을 통해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쑤저우의 정원은 한눈에 경치를 보여 주지 않는다. 문이나 담장, 바위가 시선을 막고 창문을 통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막힘과 트임, 빛과 그림자, 인공과 자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정원은 아니지만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 합려가 묻힌 곳인 후추(虎丘)도 경치가 아름답다. 20만㎡(약 6만 500평)의 녹지 언덕에 합려의 묘가 수장된 검지(劍池)와 3.5도가 기울어졌다 해서 중국판 ‘피사의 사탑’이라 불리는 후추탑이 있다. 후추탑은 아쉽게도 보수 중이어서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물의 도시 ‘쿤산’ 쑤저우 동쪽 끝에 위치한 쿤산은 강남 6대 수향고진(水鄕古鎭) 중 하나인 저우좡(周莊)으로 유명하다. ‘강남 풍경은 천하제일이고 저우좡 풍경은 강남 제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던 곳이다. 평범한 촌락이었던 저우좡은 명나라 때 강남의 대부호 심만삼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진시(鎭市)로 번창했다고 한다. 명·청 시대 건축물의 60%가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로 강남수향의 원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수로를 사이에 두고 겹겹이 조성된 고가옥과 그 사이를 잇는 다리와 골목길이 정갈하면서 고풍스럽다. 수로를 잇는 다리 중 하나인 쌍교는 화가 천이페이(陳逸飛)의 ‘고향의 추억’(故鄉的回憶)이란 그림에 등장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두 개의 다리가 직각으로 만나는 쌍교 앞은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이 외에도 쿤산에는 민간 박물관의 고장 진시(锦溪), 석판 거리가 인상적인 첸덩(千燈), 대갑게로 유명한 바성(巴城) 등 특색 있는 수향이 곳곳에 있다. 강남 목각관, 게 문화관, 장성미술관 등 마을들에 있는 작은 박물관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글 사진 난징·쑤저우·쿤산(중국) 박수정 기자 psj@seoul.co.kr [여행수첩] →아시아나항공과 중국 동방항공이 매일한차례씩 인천~난징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2시간정도 소요된다. 난징과쑤저우, 쿤산은 고속철로 연결돼 있어 이동하기가 편리하다. 난징에서 쑤저우까지는 1시간10분, 쑤저우에서쿤산까지는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쑤저우 정원을 특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졸정원은 개장시간(오전7시 30분)보다 1시간 먼저 입장해 아침식사와 곤극(昆剧)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요금은 388위안(약 7만 2000원)으로 다소 비싼 게 흠이다. 망사원은 3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야간 개장(오후 7시 30분~10시)을 한다. 호젓하게 정원을 거닐며 6개의 다양한 공연을 만끽할 수 있다.야간 입장료 100위안. →쿤산에 가면 아오짜오몐(奥灶面)을 먹어보길권한다. 진한 육수의 훙유바오위몐(紅油爆魚面)과 맑은 육수의 바이탕루야(白湯卤鴨) 두 종류가 있다. 얇게 뽑은 생면에 튀긴 생선이나 오리고기를 곁들여 먹는 것이 특징이다.
  • 나도 질러볼까, 전질

    나도 질러볼까, 전질

    출판계가 7~8월 여름 휴가철 독서 시장 대목을 맞아 방대한 분량의 전질을 잇달아 출간하고 있어 불황 타개의 돌파구가 될지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여름 한철 반짝 특수를 노리고 새로운 작품 발굴보다는 작품성과 대중성이 검증된 작가의 작품들만 낸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근 출간된 전질들은 청소년과 직장인이 즐겨 읽는 문학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강희대제’(전 12권·더봄), ‘인간시장’(전 10권·해냄), ‘동주 열국지’(전 5권·글항아리), 청소년판 ‘아리랑’(전 12권·해냄) 등이다. ‘강희대제’는 중국 작가 얼웨허(二月河)의 대하소설로, 15년 만에 다시 번역·출간됐다. ‘제왕삼부곡’(강희·옹정·건륭황제) 중 가장 먼저 선보인 작품으로, 중국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의 일생과 업적을 담았다. 김덕문 더봄 대표는 “15년 전 첫 출간 때 번역이 어설퍼 늘 후회로 남았다. 2년간 중국 관련 서적 200~300권을 읽고 재번역을 추진했다”며 “200년 전 100만 만주족으로 1억 5000 한족을 지배한 강희·옹정·건륭의 리더십과 통치 철학을 알아야 오늘의 중국을 깊이 있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옹정황제’(전10권), 건륭황제(전18권)도 순차적으로 나온다. 소설가 김홍신(68)의 대표작 ‘인간시장’도 30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다. 작가는 1981년 초 이 작품을 ‘스물두 살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주간한국’에 연재하기 시작해 그해 9월 처음 단행본으로 묶었다. 이후 5년 동안 모두 10권, 91개 장으로 구성된 대작을 완성했다. 출간 2년 만에 판매 100만부를 돌파해 한국 출판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됐다. 중국 명나라 말기 소설가 풍몽룡(1574~1646)의 ‘동주 열국기’도 51년 만에 새로운 완역판으로 나왔다. ‘동주 열국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를 다룬 작품으로 중국 고전 백미로 꼽힌다. 풍몽룡판의 국내 첫 완역본은 1964년 김구용판이지만 현재 절판된 상태다. 청소년판 ‘아리랑’은 1995년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완간 20년 만에 나왔다. 원작의 이야기 구조를 충실히 각색하면서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장면과 인물 묘사, 대화, 사건 전개 등을 다듬었다. 전태일문학상과 라가치상을 수상한 청소년 소설 작가 조호상이 3년에 걸쳐 개작하고 백남원 화백이 그림을 그렸다. 만화 전질도 가세했다. 만화가 오세영·박명운의 ‘만화 토지’(전 17권·마로니에북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전 20권·휴머니스트), 만화가 이두호의 ‘만화 객주’(전 10권·바다출판사) 등이 대표적이다. ‘만화 토지’는 2012년 오류를 바로잡아 펴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결정본 전집을 토대로 오세영 화백이 1∼7권, 박명운 화백이 8∼17권을 맡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개정판이다. 2013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250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다. 독자들이 지적한 오류와 새롭게 확인된 사실을 반영해 본문의 글과 그림에서 220건 이상을 수정했다. ‘만화 객주’도 13년 만에 재출간됐다. 소설가 김주영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1988~1993년 5년 동안 ‘매주만화’에 연재된 이 만화가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것은 1992년, 2002년에 이어 세 번째다. 복수의 출판사 관계자들은 “여름철은 독서 시장의 대목”이라고 입을 모았다.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휴가와 방학이 몰린 여름 휴가철 전후로 책이 가장 많이 팔린다. 청소년은 교양·철학류나 문학서적류, 직장인들은 문학서적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여름휴가철에 나오는 전집들은 기존 출간된 작품들을 재출간하는 게 많다. 출판 시장이 불황이라 새롭게 뭔가를 발굴해 출판 시장을 개척하기보다는 마니아층이 두터운 작품들로 최소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신간을 내는 위험 요소를 줄이면서 기존에 상품성이 입증되고 콘텐츠가 탄탄한 작품으로 시장의 활로를 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독자들이 신뢰할 만한 콘텐츠가 새롭게 정비돼 나왔다”고 했다. “‘인간시장’이 다룬 8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게 없다.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엘리트 부패가 더 심각해졌다. 중국이 최대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중국은 다른 무엇보다 그 나라 역사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무한경쟁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 살아남는 전략을 담은 역사소설이나 중국에서도 1억부가 팔린 강희·옹정·건륭황제는 현 시류를 반영할뿐더러 시의성도 떨어지지 않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문화 유랑기] 송강 정철은 왜 강화에서 굶어죽었나

    [문화 유랑기] 송강 정철은 왜 강화에서 굶어죽었나

    -한 농가에서 겨울날 홀로 임종 송강 정철이 강화에서 굶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강화대교 초입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길섶에 ‘숭뢰리’라 새겨진 장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송정촌이라 불리던 마을로,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한강 줄기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한 달 남짓 송강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이듬해 연말이었다. 송강은 그 노경에 어쩌다 홀로 강화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조선문학의 최고봉이요, 한때는 서인의 거두로서 서슬 푸른 권력을 휘둘렀던 송강이 대체 어쩌다가 늘그막에 강화 섬으로 흘러들어와서 겨울 저녁풍경처럼 스산한 말년을 보내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갔단 말인가? 여기서 파쟁과 유배로 점철된 그의 굴곡진 생애를 죄다 둘러볼 수는 없지만, 강화행 직전의 상황만 간략히 살펴본다면, 임진난을 맞자 선조는 유배 중인 송강을 불러 명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사신을 다녀온 후 모함을 당하자 송강은 스스로 임금에게 사면을 청하고는 강화로 은거했던 것이다. 그가 은거처를 강화로 정한 것은 당시 강화에 살던 그의 문인 석주(石洲) 권필과 관계가 있을 법하다는 추측과 함께, 혹 나라에서 급히 부를 때 바로 달려가기 위한 노신의 충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강화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당장 생계를 꾸리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비록 현직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정승 직책을 지니고 있던 송강이었지만, 워낙 청렴한 성품이라 무엇 하나 챙겨둔 것이 없었던 터이다. 그가 얼마나 궁핍에 시달렸나 하는 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도 알 수 있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평일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여지껏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송강의 곤궁함과 염치가 손에 잡힐 듯하다. 송강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시에도 그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외로운 섬 나그네 신세 해조차 저무는데남녘에선 아직도 왜적 물리치지 못했다네천리 밖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오경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은 건가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러 있기 어렵고 시름은 실오리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원님이 보내온 진일주(眞一酒)에 힘입어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 끼고 마신다오.(박영주 역) 송강의 이런 고단한 삶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은거 한 달 남짓 만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한다. 향년 58세. 온 나라가 환란 중에 있었던 1593년 12월 18일, 추운 겨울날, 송강은 홀로 굶어죽었던 것이다. 송강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송강과 동갑내기로 같이 벼슬살이를 한 율곡 이이가 “송강은 충직하고 맑으며 의로운 선비다. 다만 성격이 편협하여 아량이 적은 것이 흠이다”고 평한 것을 보면, 그가 왜 당쟁의 한가운데서 수많은 정적을 만들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백사 이항복이 “송강이 손뼉 치며 담소하는 것을 보면 마치 신선을 보는 듯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타고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송강은 죽은 후 선영이 있는 경기도 고양 땅 신원리에 묻혔다가, 70여 년 후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북 진천 환희산 자락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의 송강사이다. 송강의 문인으로 강화에 같이 인연을 맺었던 당대 최고의 문장 권필이 송강 묘를 찾아 지은 칠언절구가 전한다. 空山木落雨蕭蕭 빈산에 잎 지고 궂은비 내리는데相國風流此寂寥 재상의 풍류 또한 이같이 쓸쓸하네 惆悵一杯難更進 슬프다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昔年歌曲卽今朝 예전의 그 노래는 오늘을 말함인가 ‘예전의 그 노래’는 송강의 사설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말한다. 저 멀고도 고적한 곳, 북망(北邙의) 적막한 정경을 우리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며 술 한 잔을 권하는 절창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매어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숲에 가기곳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찌리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북망의 스산한 풍경을 단어 몇 개로 어쩌면 저렇게 손에 잡힐 듯이 그릴 수 있을까. 가히 대가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강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송정촌에 들러 마을 어르신을 붙잡고 송강이 만년을 보낸 집터를 물어보았다. 예전엔 한강이 마을 바로 앞에까지 들어와 있어 송정포라 했는데, 포구 어름의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잠시 살다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가끔 고려산 아래 사는 젊은 선비가 찾아오곤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이라 한다. 그 선비는 아마 송강의 문인 권필 시인이리라. 그뿐, 어디에도 송강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 서운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벌써 4백 년도 더 전의 일. 흐르는 바람 따라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게 어디 그뿐이랴. 하지만 송강의 전후 미인곡과 관동별곡을 일컬어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세 편뿐"이라고 서포(西浦) 김만중이 평했듯이 송강의 명구는 아직도 살아남아, 요즘도 '관동별곡'의 결구를 가다끔 읊조리곤 한다.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를 흐르는 강석해협에 푸른 달빛이 휘영청할 때면 어김없이 이 구절이 읊조려지곤 하는 것이다. "명월이 천산만락(千山萬落)에 아니 비쵠 데 없다." 어떤 진경산수화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동·서양의 사자는 ‘용’의 형상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동·서양의 사자는 ‘용’의 형상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지금까지 동양 용의 갖가지 모습과 조형적 본질을 추구해 왔는데, 사람들은 서양에 그런 용이 있는지 의심할 것이다. 아무도 동양 용의 모습과 성격을 가진 용을 보지도 못했고 따라서 언급한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로 서양 미술품 모두 찾아보아도 없다. 그런데 ‘세계의 조형예술품, 용으로 읽다’라고 서두에 감히 말했는데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고려청자 가운데 뚜껑에 사자를 조각한 걸작품 향로가 있다. ① 두 앞무릎을 세우고 앉은 사자가 오른손으로 오른발 위에 큰 보주를 짚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곧 그 사자가 현실에서 보는 사자가 아님을 직감한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은 명나라 때 호승지(胡承之)가 지은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용의 아홉 아들은 각각 나온 순서에 따라 그 이름을 비희(贔屓), 이문(螭吻), 포뢰(浦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하(蚣蝦),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고 한다. 산예는 그 모습이 사자를 닮았다. 이름부터가 ‘사자 산(狻)’에 ‘사자 예(猊)’다. 앉는 것을 좋아하고 등에 태우는 것도 좋아하여 그런 도상의 산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 예가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사자가 바로 이 산예이며, 불화에서 여래의 대좌에서 흔히 나오기도 한다. 이름은 산예이나 바로 용이다. 이 ‘용생구자설’은 후대에 지은 기록치고는 우리에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바가 많은, 뜻밖으로 유용한 보기 드문 기록이다. ‘용은 길어서 앉거나 여래나 보살을 등에 태울 수 없어서 용을 변용시킨 모습이 바로 영화(靈化)시킨 사자 모양이다.’ 용에서처럼 모든 갈기는 부처님 머리처럼 모두 제1영기싹이다. 따라서 고려청자 사자향로는 용 향로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이래 모두가 사자라고 부르는 것이 용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바로 꼬리다. 우리는 흔히 동물의 꼬리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형들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꼬리가 시작이고, 영기문으로 된 꼬리에서 영수와 영조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고려청자 향로의 영화된 사자의 꼬리를 보면 만물 생성의 근원인 제1영기싹들이 전개한 모양이다. ② 큰 보주를 자세히 보면 음각으로 무량보주를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수없이 봐 왔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알아보았다. 특히 무량보주는 용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용 향로가 틀림없다. ③ 하나의 보주도 ‘무량한 보주’이지만 이렇게 보주를 무량하게 음각선(陰刻線)으로 겹치면서 표현한 ‘절대적 보주’를 필자가 ‘무량보주’로 이름 지은 것이다. 보주는 용, 봉황, 기린, 선학, 해태, 여래, 관음보살 등 즉 영수(靈獸)나 영조(靈鳥), 그리고 신적(神的) 존재, 즉 영기화생된 특별한 존재만이 보주를 지닐 수 있다. 현실의 사자는 보주를 지닐 자격이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용성(龍性)을 지닌 다양한 영화된 동물 혹은 식물모양들이 있듯이 서양에도 같은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 신전 폐허에서 사자를 보았을 때 처음부터 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용성(龍性)과 불성(佛性)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충분히 이 문제는 논의할 수 없는 큰 주제다. 필자는 그리스 코린트의 아폴로 신전에서 영화된 사자의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보고 놀랐다. 동서양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영기문을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처음 보았던 그 순간은, 필자에게 ‘세계미술사’를 가능케 하리라는 확신을 준 순간이었다. 용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신전의 홈통으로 만든 영화된 사자의 입을 통해 지붕에서 내려오는 물이 쏟아져 나오니 용성을 지녔다 할 것이다. 서양 학자들은 현실의 사자를 이용해 홈통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니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이 보일 리가 없다. 동서양 미술사학계가 마찬가지 상태였다. 옛 예술가들은 기능과 함께 고도의 상징을 부여해 왔다는 것을 필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기능만 보이므로 상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용의 갈기를 보고 갈기라고 부르며, 마찬가지로 사자의 갈기도 갈기로 알고 있다. 비록 현실의 사물과 똑같다고 해도 조형예술의 세계에서는 일체가 영화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필자가 지적한 그 수많은 용어의 오류의 근원은, 영화시킨 세계를 현실적 기능의 면에서 바라보거나 비슷한 현실의 사물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데 있다. 기원전 338년에 세워진 코린트의 아폴로신전의 지붕 코니스(cornice)의 사자와 그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채색 분석해 보면우리나라 통일신라의 사찰이나 궁궐터에서 출토하는 기와의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④ 둥근 수막새의 용이나 연꽃의 양쪽으로 긴 암막새의 영기문이 발산하는 광경과 같다. 무릇 모든 넝쿨모양 영기문은 일체가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라는 것을 앞 회에서 보았다. 바로 똑같은 영기문을 그리스 첫 여행에서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너무 커서 거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갈래 사이에서 무엇인가 나오고 있는데 만물을 상징한다. 그 영기문을 더 전개시켜 보았더니 동서양이 더욱 같음을 절감한다. ⑤ 넝쿨모양 영기문은 물론 보주는 가장 강력한 용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아래 부분에 직선으로 교차하는 연이은 태극의 순환무늬가 있고 그 밑에 크고 작은 타원체 혹은 구형의 보주가 줄 서 있지 않은가! 영화된 사자와 보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⑥ 대지의 옴팔로스(배꼽)가 있는 델피의 아폴로 신전, 그 유명한 신탁이 이루어졌던 ‘신전 가운데 대표적 신전’, ‘너 자신을 알라’가 새겨진 신전에서도 지붕 끝에 같은 코니스의 조형을 보았다. 영화된 사자로부터 양쪽으로 제1영기싹 영기문이 전개되어 가다가 중앙에서 아크로테리온을 이룬다. ⑦, ⑧ 그리스·로마 등의 건축에서, 지붕 맨 위를 장식하는 여러 가지 조각상들이 있는데 팔메트라고 부르는 것도 그 하나다. 그러나 이렇게 영기문 절반이 만나 영기문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이 지붕에서 처음 보면서 팔메트란 용어가 틀린 것을 알았다. 즉 두 영화된 사자로부터 발산하는 영기문이 만나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영기문의 발산이 아름다운 곡선들로 매듭을 짓는다. 아폴로신전은 기원전 330년에 재건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기문이다. 그런데 영기문은 용으로부터만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봉황이나 해치, 그리고 연꽃이나 아칸서스에서도 발산한다. 그러한 영수, 영조, 영수(靈樹) 등 영성(靈性)을 지닌 것에서는 영기가 발산한다. 영성은 곧 용성이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 수많은 사자는 현실의 사자가 아니라 동물모양으로 만든 강력한 영기문이기 때문에 갖가지 넝쿨모양 영기문을 발산하는 것이다. 주체들이 중요하지만 세계의 조형을 풀어내는 열쇠는 용성을 지닌 존재로부터 발산하는 갖가지 영기문이다. 그 영기문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광경을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영적인 존재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존재들이 있지만 그 대표적 가시화가 바로 동양의 용임을 깨달았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류성룡 ‘징비록’

    [서울대 지망생의 책장-읽어라, 청춘] 류성룡 ‘징비록’

    때는 1604년 싸락눈이 날리는 한겨울의 깊은 밤이다. 경북 안동의 유서 깊어 보이는 한 사랑채에서 나이가 지긋한 선비가 일렁이는 촛불에 의지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덧입혀지는 내레이션.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이순신은 직접 나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탄에 맞고 말았다. 총탄은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현재 KBS에서 주말 밤마다 방송하고 있는 대하드라마 ‘징비록’(懲毖錄)의 첫 회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쓰는 글에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줌으로써 이 드라마가 류성룡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임진왜란 이야기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낸다. 실제로 ‘징비록’은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임진왜란 7년간의 기록물이고 드라마는 바로 류성룡의 이 저작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류성룡은 중종 37년(1542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자랑했던 그는 21세가 되던 해 퇴계 이황 밑에서 학문을 사사하게 되는데, 이때 이황이 류성룡을 가리켜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인물이다. 반드시 뒷날에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온 그는 1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재상의 자리에 머문 인물이고, 당파 간의 다툼이 예사롭지 않았던 선조 대에 남인의 영수라 거론되면서도 한 번도 유배를 가지 않은 인물이다. ‘하늘이 내린 재상’이라고 불릴 뿐 아니라 이순신과 함께 육지에서 임진왜란을 이끈 탁월한 리더십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에 그는 좌의정이면서 병조판서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4월 13일 오후에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이 거칠 것 없이 부산, 동래, 밀양을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오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류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해 군사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선조가 한양을 떠나 피란길에 오를 때 수행 업무를 맡았고 개성에 도착해서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7년 동안 전란의 한가운데서 진두지휘를 맡았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을 저술하게 된다. ‘징비록’이라는 책 제목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에서 유래한다. 류성룡 자신이 직접 서문에서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고위직에 있으면서 전쟁을 막아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 땅에서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쓰인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류성룡 개인이 저술한 초본과 나중에 인쇄된 간행본 두 가지가 전해 온다. 간행본에서는 초본의 일부 내용을 수정하고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선조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이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예를 들면 초본에서는 선조가 주도하여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간행본에서는 그냥 조정 내에서 한양을 떠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간행본은 다시 16권본과 2권본으로 나누어진다. 16권본은 ‘징비록’ 상·하 2권과 ‘근폭집’ 2권, ‘진사록’ 9권, ‘군문등록’ 2권과 ‘녹후잡기’로 구성되어 있고, 2권본은 ‘징비록’ 상·하 2권과 ‘녹후잡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징비록’의 대부분은 간행본의 2권본을 번역한 것이다. ‘징비록’ 1권(상)은 1586년에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조선에 온 일부터 시작한다.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는 히데요시에게 물길이 험해서 사신을 보내지 못한다고 답장을 보낸 일, 소 요시토시가 다시 사신으로 오고 이에 대해 조건부로 통신사 파견을 수락하는 과정, 통신사의 파견,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 날로 극성스러워지는 왜적 때문에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라는 선조의 명에 그동안 세운 공에 비해 진급이 늦었던 이순신을 천거한 일, 그리고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 다니기에만 급급했던 초기 전황, 선조의 피란, 명나라 원군의 도착과 패전,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과 의병들의 활약상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2권(하)은 대부대를 이끌고 온 명나라의 2차 원군과 권율의 행주대첩, 일본이 한양을 점령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면서 굶어 죽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버린 백성들의 딱한 상황, 한양 수복,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하옥과 원균의 패전, 명나라와의 갈등, 곽재우와 유정의 활약, 이순신의 복귀와 전사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녹후잡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한강의 물이 3일 동안이나 붉은 모습을 띠었다든가 도성 안에 항상 검은 기운이 퍼져 있었는데도 하늘이 간절히 알려준 이상한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이 지속된 기간 동안 보고 들은 내용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징비록’은 전쟁 기간 동안 재상과 도체찰사를 겸임한, 요즘 말로 하면 국정 최고책임자였던 류성룡이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파의 색깔 없이 객관적으로 집필한 저서로서 임진왜란에 대한 그 어떤 기록물보다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역사적인 가치로만 빛나는 건 아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뒤 조선과 중국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에서 시작하여 그런 히데요시의 야망을 한순간에 꺾으며 장렬히 죽어간 이순신의 죽음으로 책을 마무리한 구성이 마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드라마틱하여 기록 문학으로서의 재미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다. 또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는 말도 있다. ‘징비록’은 책 제목에 드러나듯이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자는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집필된 책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때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다시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중국과 자위대가 전 세계 어디에서든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위지침을 마련한 일본, 그러한 일본을 명실상부한 파트너로 점찍은 미국 등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정세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임진왜란의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자신을 ‘징비’하지 않은 우리에게 역사는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남북분단과 같은 비극으로 되돌아왔다.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기 전에 ‘징비록’을 썼던 류성룡의 마음을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권경주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읽어라 청춘’은 격주로 게재됩니다.
  • 미국 유학파 지식인의 두 얼굴

    미국 유학파 지식인의 두 얼굴

    지배받는 지배자/김종영 지음/돌베개/318쪽/1만 6000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계층이론을 내놓으며 지식인을 ‘지배받는 지배자’로 규정했다. 지식인들은 문화적 영역의 지배자이면서 그것조차 아우르는 경제적 영역을 담당하는 자본가 계층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가 칭하는 ‘지배받는 지배자’는 지식공동체, 특히 한국 대학사회 속 ‘미국 유학파’들을 특정한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적·문화적 헤게모니를 갖고 있지만,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김 교수는 단순한 한국 사회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담론이 아닌, 지식 생산의 글로벌 위계를 통해 그 생성과 발전의 과정을 분석했다. 기실 역사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 늘 선진국에서 배워 오는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신라시대에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조선시대에는 실학을 배우러 명나라·청나라를 향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근대화를 배우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을 택했다. 그리고 결국 이들이 세상을 차지해 왔다. 미국 유학파들은 ‘영어’라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방법과 유학을 통해 다진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서구 학계의 선진 연구 결과를 맨 먼저 받아들였다. 뒤에서는 ‘지식 수입상’이라는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국내 학계에서 엄연히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 따른 루저들의 질시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미국 유학파를 모두 삐딱하게 볼 수만은 없다. 글로벌 문화자본의 축적을 통한 사회적 지위 상승의 욕망뿐 아니라 국내 대학의 폐쇄성, 봉건성으로부터 탈출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의 열망 등도 주요한 요인이다. 실제 이들 중 일부는 미국 대학의 자유로운 연구 풍토, 개방성, 공정성 등을 배워 와 한국 대학의 비민주성을 개혁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김 교수는 1999~2005년, 2011~2014년 두 번에 걸쳐 미국·한국 곳곳을 찾아가 심층면접 인터뷰를 진행했다. 발과 가슴으로 담아 낸 연구 결과임을 방증하고 있다. 덕분에 언어와 학비 문제, 연구조교 생활, 학위 취득 뒤 취업 과정 등 미국 유학을 둘러싼 긍정적 경험과 부정적 경험까지 포함해 생생한 사례들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저자의 목적은 분명하다. 국내 대학 풍토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주말 영화]

    ■황진이(EBS 1TV 일요일 밤 11시) 황진이는 황진사의 딸로 재색을 겸비한 인물이다. 이런 그녀를 오랫동안 남몰래 연모해 온 갖바치가 상사병으로 자살을 하고 마는데 그가 자살한 날이 진이의 혼례 전날이어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하고 갖바치의 비극적 삶에 충격을 받고 일개 기녀로 변신한다. 진이가 기녀로 명성을 떨칠 때 벽계수를 만나 두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나 벽계수가 명나라 사신으로 발탁돼 진이의 곁을 떠나게 되며 다른 여자의 품으로 가 버린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진이는 유랑길에 오르며 연약한 선비 이생과 만나 삶을 같이한다. 하지만 이생이 경제적으로 무능력해 진이는 몸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고, 이생은 이에 모멸감에 젖어 비굴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이생은 사당패들에게 진이를 팔아넘기려 하고 진이는 그것을 알고 스스로 사당패를 따라나선다. ■리딕:헬리온 최후의 빛(OBS 토요일 밤 10시 10분) 절대 공포의 상징 네크로몬거는 자신을 거역하는 행성은 모두 휩쓸어 버린 후 정복의 상징으로 죽음의 조각상만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평화로운 헬리온 행성에도 예외 없이 네크로몬거의 침략이 시작되고, 네크로몬거의 강력한 무력 앞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위기에 처한 헬리온의 지도자는 네크로몬거에 대항할 수 있는 퓨리온족의 유일한 후예 리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우주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 리딕은 대군단인 네크로몬거를 맞아 미래의 운명을 거머쥘 전투를 시작한다.
  • ‘만능 재주꾼’ 中人, 그들이 꽃피운 조선

    ‘만능 재주꾼’ 中人, 그들이 꽃피운 조선

    조선의 중인들/허경진 지음/알에이치코리아/400쪽/1만 8000원 고득점자 순으로 전국 모든 대학의 의대라는 의대는 모두 돌고 돈 뒤 그 다음 수험생이 서울대를 간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갯소리가 통용되는 세상이다. 의사는 선망의 직업이다. 판사, 변호사, 외교관 등은 또 어떤가. 업무를 통해 명예와 성취를 이뤄 내는 기준이라기보다는, 돈을 잘 버는 직업들인 덕에 세간의 인기가 드높다. 시간을 150년 전으로 되돌려 보면 사정은 어떨까.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을 통해 선발된 전문직 관원들이다. 생원·진사 합격자에게 주는 국보가 찍힌 백패(白牌)가 아니라 예조인(禮曹印)만 찍힌 백패를 받았다. 양반과 평민 사이에 끼인 경계인 신분이었지만 계급의 벽을 넘나들며 예술적 열정을 꽃피웠고, 과학적 재능과 비범함을 마음껏 발산했다. 또한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열린 사고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 메신저 역할도 기꺼이 도맡았다. 실사구시형 지식인의 소양을 눈여겨본 여러 왕과 양반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궈 낸 정조 시대가 대표적이다. 정조는 당시 서얼금고법 때문에 중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신설, 책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업무를 맡겼다.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가 이렇게 등용된 중인들이다. 농사꾼 출신으로 ‘기하원본’을 독학한 김영은 정조에게 발탁돼 관상감에 등용됐다. 평평한 해시계인 지평일구를 만든 과학자였다. 또 조선의 운명을 바꾼 인물도 있었다. ‘종계변무’(宗系辨誣·명나라 서적에 이성계 및 왕실의 계보가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일)는 절체절명의 난제였고, 노련한 역관 홍순언이 이를 해결한 사례도 있다. 39가지 야담과 소설로 후세에 이야기가 전할 정도가 됐다. 또한 효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극심했던 질병 종기를 치료한 의원 백광현 역시 마찬가지다. 백광현은 현종의 목에 난 종기를 고치고, 효종비 인선왕후의 머리에 난 종기까지 치료해 명예직이지만, 종1품 벼슬에까지 올랐다. 기술과 과학이 있어 삶의 질은 더욱 윤택해지고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 물론 공동체의 삶에 복무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다. 봉건의 시대, 반상의 계급 제도가 사람을 출생 자체로 규정지을 때 중인들의 기술과 과학은 태생적 한계를 비웃듯 극복하고 공동체와 대의를 고민하며 새 시대의 맹아가 됐다. 그때의 중인들은 이제 전문가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됐건만, 세태가 보여주는 뒷맛이 개운치 만은 않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동아시아 500년 역사 해양과 대륙 힘겨루기

    동아시아 500년 역사 해양과 대륙 힘겨루기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김시덕 지음/메디치미디어/384쪽/1만 6000원 해양과 대륙이 서로를 탐내고 세력다툼을 벌이면서 문명과 역사가 바뀐 것은 동서양이 다를 것이 없었다. 500년 전 일본이라는 해양 세력이 대륙의 맹주 명나라 섬멸을 목표로 벌인 임진왜란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역사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500년사를 담았다. 임진왜란은 한반도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이후 동아시아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통사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아시아를 보는 일반적인 통념과 전혀 다른 결론을 보여준다.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늘그막의 과대망상’으로 벌인 전쟁이라고 폄하하지만 이 사건은 분명 중앙집권화된 해양세력의 습격이었다. 저자는 임진왜란이 “해양의 부상과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전체의 판도를 바꿔버린 국제전쟁”이라고 단언한다. 조선과 명이 일본에 신경 쓰는 사이에 북방 만주인은 청을 세웠고, 이는 명나라의 멸망과 또 다른 동아시아 중심지 대만의 탄생을 불러왔다. 17~19세기 초로 넘어가면 동남아까지 진출한 대항해시대의 유럽이 개입돼 있고, 시베리아를 넘어온 러시아까지 동아시아와 접촉한다. 19~20세기 중반 들어선 제국주의 세계와 동아시아가 충돌하면서 격동의 현대가 열린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조선은 중국 대륙 너머의 세계를 파악하지 못했던 ‘소중화’ 수준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 같은 ‘삼국지연의적 세계관’은 한·미·일 혹은 한·미·중 등 삼각구도로 국제관계를 한정해 보려는 오늘날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하는 저자는 “대륙뿐 아니라 해양과도 접한 한반도를 주목하면 이제 중심 시각을 해양으로 바꾸고 ‘열국지적 세계’를 구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중국, 일본, 러시아의 고문서를 비롯해 엽서, 사진 등 다양한 시각자료를 활용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미얀마 ‘코캉’ 화약고 터지나

    미얀마 ‘코캉’ 화약고 터지나

    중국과 미얀마 국경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BBC 중문망 등은 22일 미얀마 북부 코캉 지역에서 2주일째 미얀마 정부군과 중국계 소수민족 반군이 교전을 벌여 130여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미얀마 정부도 21일 교전 발생 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군과 경찰 61명, 반군 72명 등 133명이 사망하고 정부군 100여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국방부 대변인은 “전투가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면서 “우리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물러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교전으로 난민 9만여명이 발생했으며, 이 중 3만여명은 중국으로 피란하고 나머지는 미얀마 중부, 동북부 지방으로 피신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지난 17일에는 구호단체마저 습격을 당해 구호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이번 교전은 2009년 정부군에 의해 쫓겨난 코캉 반군 지도자 펑자성(彭家聲)이 코캉 수복을 시도하면서 발생했다. 11개 반군 연합단체인 민족연합위원회(UNFC)도 펑자성을 지지하고 있다. 펑자성은 전투에 앞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서한을 보내 “중화민족을 위한 전투”라고 주장하며 지원을 요청했으며, “코캉을 수복한 뒤에는 중국에 통합돼 민족자치구로 남고 싶다”고 밝혔다.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보쉰(博訊)은 “중국은 미얀마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정식으로 코캉 반군을 지원하지는 않았으나 인민해방군 정보요원들이 사복 차림으로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얀마 북부 샨주에 위치한 코캉은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거의 미치지 않는 산악지역으로 주민 15만여명 가운데 80% 이상이 중국어를 사용하는 한족(漢族)이다. 이들은 명나라 멸망 당시 만주족의 청나라에 반대해 이곳까지 온 사람들의 후예이다. 청나라 때 중국에 속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얀마 영토로 편입됐다. 코캉 반군은 독립 및 중국과의 통합을 꾸준히 요구해오다 2009년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한 뒤 이번에 다시 무장봉기에 나섰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변방의 여진족 소년, 대륙의 신화가 되다

    변방의 여진족 소년, 대륙의 신화가 되다

    누르하치/천제셴 지음/홍순도 옮김/돌베개/388쪽/1만 8000원 우리에게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였다. 두 차례나 호란(胡亂)을 일으켜 우리 민족을 겁박했으니 ‘철천지원수’이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한국인이 생각하는 만주족과 누르하치는 오랑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결코 오랑캐 출신의 정복자로만 평가받을 인물이 아니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13벌의 갑옷과 약간의 병사를 밑천 삼아 요동 건주(建州) 지역에서 기반을 다진 그는 무예와 전략·전술로 대륙을 정복한 발군의 만주족 무장이었다. 동시에 노련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였으며 팔기(八旗) 제도와 만주문자의 발명으로 만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문화적 리더이기도 했다. 새 책 ‘누르하치’는 청 제국의 건국 시조로 ‘제2의 칭기즈칸’이라 불리는 누르하치를 촘촘히 그려 낸 평전이다.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생계를 잇던 변방의 여진족 소년으로 태어난 누르하치가 명 조정의 신임을 받는 지도자로 지위를 굳힌 뒤 마침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 제국의 기틀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극적인 생애 속의 일화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탁월한 면모, 그리고 인격적 결함까지, 누르하치라는 역사 속 개인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되살려 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었다. 그는 요동 지역 곳곳에서 ‘말갈’, ‘여진’ 등 부족 단위로 살아오던 일족을 규합해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아울러 누르하치와 영향을 주고받은 조선 등 당대 동북아 주요 세력들과의 관계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남해군수가 명나라 장군 참배한 까닭은

    남해군수가 명나라 장군 참배한 까닭은

    경남 남해군 박영일 군수가 410여년 전 노량해전에 조명연합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중국 장군의 고향 도시를 찾아 감사를 전하고 교류를 합의했다. 남해군은 26일 박 군수를 비롯한 교류추진단이 지난 20~24일 펑청시를 방문해 임진왜란 당시 조선원병 수군 부총병으로 참전했다가 노량해전에서 숨진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의 묘소를 참배했다고 밝혔다. 박 군수 등의 방문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역사적 인연을 매개로 등 장군의 고향 펑청시와 우호 교류를 하기 위한 것이다. 박 군수는 등 장군이 숨진 남해군 고현면 소재 남해 관음포에서 직접 채수한 성수를 장군의 무덤 앞에 올렸다. 등 장군의 후손들과 만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려고 400여년 전 등자룡 장군이 원정 온 그 길을 거슬러 남해군민의 고마운 뜻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인사말을 했다. 박 군수는 “등 장군이 목숨을 바쳐 지킨 신의를 교훈 삼아 두 지역이 화합하고 교류해 번영을 이루자”고 말했다. 등 장군 후손들은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 416년 만에 조상님의 은덕을 잊지 않고 찾아준 박 군수에게 감사드린다. 남해군에서 가져온 성수는 등씨 가문의 가보로 영원히 보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박 군수는 특히 “관음포만 일대에 조성 중인 이 충무공 순국공원 조성사업 현장에 등 장군의 활약을 소개하는 기념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남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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