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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한양 가던 배 한 해에 66척 침몰 쌀 썩는 냄새에 운하 만들었지만…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한양 가던 배 한 해에 66척 침몰 쌀 썩는 냄새에 운하 만들었지만…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선박 마도 4호선은 조선시대 조운선이었다. ‘광흥창’(廣興倉)이라고 적힌 목간과 ‘내섬’(內贍)이라고 쓰인 분청사기 등 유물과 견고한 선박 구조로 미뤄 조선 초기 조운선으로 보인다는 것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설명이다. ●태안 앞바다에서 분청사기 등 유물 발견 조운선이라면 삼남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한양으로 나르던 배다. 60점 남짓한 목간에는 대부분 출발지인 나주와 종착지인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州廣興倉)이 적혀 있었다. 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배가 1410∼1420년 침몰한 것으로 추정했다. 잔해는 대부분 마도 북동쪽 해역의 수심 9∼15m 지점에 파묻혀 있었다. 태안은 삼국시대 중국을 오가는 수운의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태안에는 개경을 오가는 송나라의 사신이 머물다 가는 객관 안흥정이 자리잡은 국제항로의 일부이기도 했다. 안흥정에 관한 기록은 송나라 사람 서긍(1091~1153)의 ‘고려도경’에도 보인다. 안흥 해역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침몰 사고가 빈번했다. 통과하기 어렵다고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릴 정도였다. 서긍도 이곳을 지나며 ‘격렬한 파도는 회오리치고, 들이치는 여울은 세찬 것이 매우 기괴한 모습이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침몰선과 수중 유물은 이 뱃길의 역사적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발굴된 유물의 시대와 국적은 매우 다양하다. 고려자기는 11세기 해무리굽 청자부터 14세기 후반의 상감청자까지 질과 양에서 풍부하다. 조선시대 것도 15세기 분청사기와 17~18세기 백자가 다채롭다. 중국 것은 송·원 시대 청자, 15~16세기 명나라 시대 복건성 남쪽에서 만들어져 동남아시아로 많이 수출됐던 청화백자, 18~19세기 청나라 시대 백자가 망라되고 있다. ●뱃길 낯설고 화물 무거워 3분의1 침몰 난행량은 조운선에 더욱 두려운 뱃길이었다. 상선은 그래도 전문적인 뱃사람들이 익숙한 뱃길로 오가는 만큼 사고 위험이 덜했지만, 각 지역에서 징발된 세곡선의 일꾼들은 뱃길이 익숙지 않았고 화물도 무거웠으니 항해는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서해안에서 침몰한 세곡선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태조 4년(1395)에는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가라앉았다. 태종 3년(1403)에는 5월에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다시 6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이 잇따라 피해를 입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 세조 원년(1455)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했다. 많을 때는 전체 세곡선의 3분의1 가까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한강 하류의 교하와 강화도 앞 교동에서도 조운선이 침몰한 기록이 있지만, 대부분은 난행량과 안면도 서남쪽의 쌀썩은여였다. 쌀썩은여는 세곡선의 침몰로 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평안하게 번성한다’는 의미의 안흥(安興)이라는 지명이 태어난 것도 조운선의 안전을 빌고자 난행량을 안흥량으로 고친 결과라고 한다. 난행량을 피해 태안반도를 관통하는 운하를 파는 계획은 일찌감치 고려시대부터 추진됐다. 당시에도 세곡선의 잇따른 침몰이 국가재정을 크게 위협할 정도였으니 운하 건설까지 궁리한 것이다. 고려 인종 12년(1134) 군졸 수천 명을 풀어 운하 공사를 벌였고, 의종 8년(1154)에도 운하 개착 시도가 있었다. 공양왕 3년(1391) 공사를 재개했으나 화강암 암반이 나타나는 바람에 중단됐다. 태안반도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잇는 굴포운하였다.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를 연결하는 12㎞ 구간이다. 갯벌이 8㎞ 정도로 난공사 구간인 육지 부분은 4㎞ 정도다. 운하가 완성되면 천수만으로 진입한 세곡선은 쌀썩은여와 난행량을 모두 피해 북상할 수 있었다. 굴포운하는 조선시대에도 태종과 태조에 이어 세조까지 줄기차게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안면도 인근 운하 만들어 ‘쌀썩은여’ 피해 가 대안은 태안군 소현면 송현리와 의항리를 잇는 의항 운하였다. 안흥에서 가까운 의항운하는 2㎞만 파면 난행량을 피할 수 있었다. 중종 32년(1537) 승려 5000명을 동원해 완성하지만, 토목기술의 한계로 둑이 계속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메워지고 말았다. 태안반도와 남쪽의 반도였던 안면도 사이에 운하를 파는 공사가 마지막 대안이었다. 북상하는 세곡선은 천수만으로 진입한 다음 안면도를 가로질러 다시 큰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난행량 통과는 불가피했지만 쌀썩은여는 피해갈 수 있었다. 대(大)토목공사였던 안면운하 개착은 인조연간(1623~1649) 본격 추진되어 17세기 후반 마무리됐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해외여행 | [Surprising China] 톈진-북방 최대의 무역 항구 도시 톈진

    해외여행 | [Surprising China] 톈진-북방 최대의 무역 항구 도시 톈진

    톈진(천진, 天津)은 베이징(북경, 北京), 상하이(상해, 上海), 충칭(중경, 重慶)과 함께 중국 4대 직할시 중 하나다. 해안가 시골에 불과했던 톈진이 지금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베이징의 동부 해안 방어선 군사기지 역할을 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858년 톈진항이 외국에 개항되면서 급속도로 성장, 북방 최대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역사가 길지 않아 볼거리가 풍부하진 않지만 발달된 중국 산업도시의 면모와 유럽식 건축물들의 이국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톈진 최고의 전망대 천탑 천탑天塔은 톈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톈진의 랜드마크이다. 톈진 TV 방송국의 송신탑으로 높이가 무려 415.2m에 이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은 타워로 천탑호天塔湖라는 인공호수 중앙에 우뚝 서 있다. 엘리베이터를 탑승하면 전망대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간다. 주변에 산이 없는 톈진 시내는 그야말로 도심의 지평선을 보여 준다. 사방 모두가 끝없이 이어지고 아주 먼 어딘가에서 하늘과 맞닿는다. 특히 해가 질 무렵에는 하나 둘 불을 밝히는 빌딩들과 도로를 수놓는 자동차들의 황금 불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전망대에서 한층 더 올라가면 레스토랑이다. 좀 더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며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날씨다. 흐리거나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가시거리가 짧아 온통 뿌연 세상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지하철 1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영구도营口道역 주변은 쇼핑의 중심지다. 특히 보행자 전용도로인 빈강도滨江道는 톈진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번화가다. 백화점과 쇼핑센터,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빈강도 남쪽 끝에서 길을 건너면 역시 양쪽에 쇼핑센터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여행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쇼핑센터보다 정면에 보이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바로 톈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당인 서개천주교당西开天主教堂이다. 1917년, 조계 시절 프랑스인에 의해서 세워진 서개천주교당은 붉은색 벽돌과 화강암이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이다. 양쪽에 두 개의 첨탑이 세워져 있으며 첨탑의 돔은 연한 초록색이다. 내부의 벽면과 기둥은 흰색이며 천장은 외부의 돔처럼 연한 초록색이다. 전체적으로 황금색 라인이 장식되어 있어서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런 느낌이다. 벽면에는 각종 성화 액자가 걸려 있으며 중앙 제단 주변에는 예수의 희생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미사가 없을 때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톈진 속 작은 유럽 이태리풍경구 1856년 벌어진 애로Arrow호 사건은 2차 아편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건은 영국 국기를 달고 있던 중국인 소유의 해적선 애로호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영국 국기가 강제로 끌어 내려지며 영국은 명예가 손상되었다며 배상금과 사과문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린다. 청나라는 이를 거부했고 영국은 이를 빌미로 프랑스와 연합하여 광저우를 점령하고 본격적인 2차 아편전쟁을 벌였다. 톈진까지 점령한 영국은 1858년 불평등한 톈진조약까지 맺었고 톈진의 8배에 달하는 지역을 조계지로 삼았다. 이후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톈진에는 1902년까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 9개국의 조계지가 들어섰다. 이러한 외세 침략의 아픈 흔적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톈진 도심 곳곳에 남아 있는 유럽풍 건축물들이 그것들이다. 특히 이탈리안 거리로 불리는 이태리풍경구意大利风景区는 테마파크가 연상될 정도로 조계지 시대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태리풍경구는 민족로와 자유도가 교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장방형으로 퍼져 있다. 두 개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은 마르코폴로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시원한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석주 정상에는 날개 달린 여신상이 월계관을 높이 들고 있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의 주변은 온통 2~3층 높이의 이국적인 건축물들이며 1층은 대부분 카페나 레스토랑들이다. 해가 질 무렵 카페에 앉아서 시원한 생맥주에 피자나 파스타를 곁들인다면 이곳이 중국이란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다. 청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고문화가 톈진에서 가장 주목 받는 곳은 누가 뭐라 해도 고문화가古文化街다. 100여 년 전 톈진의 부자들이었던 소금상인들이 모여 살던 고문화가는 현재 청대 거리를 재현해 놓은 쇼핑 지구로 패루가 세워진 입구를 지나면 고풍스런 2층 규모의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대부분 근래 조성된 건물들이지만 청대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판매하는 물품들도 차나 다기, 도장과 벼루, 골동품과 전통 장신구들이 많아서 예스럽다. 고문화가 한복판에는 천후궁天后宮이 자리하고 있다. 천후궁은 천비궁天妃宮 또는 낭랑묘娘娘廟라고도 부르는데 바다 또는 물의 신인 천후를 모신 사원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후는 어릴 때 도사를 만나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었는데 거대한 파도 앞에서 위기를 맞은 어민을 구해낸 후 사람들은 그녀의 영험한 능력을 특별하게 여겨 바다의 여신으로 칭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해상 교통의 요지인 톈진에 천후궁이 세워진 것은 원나라 때인 1326년. 사원 내부는 시끌벅적한 고문화가와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다. 출입문 하나만을 통과했는데도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다. 사원 안에는 천후를 모신 정전正殿을 비롯해 10개가 넘는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천후궁에서 나와 북쪽 출입구 방향으로 걷다가 우측 골목으로 빠져나가면 옥황각玉皇閣이 자리한다. 2층 규모의 옥황각은 톈진에서 가장 큰 도교 사원 건축물로 명나라 초기인 1427년에 중건된 것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또 고문화가 북쪽 출입구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해하海河강 위에 자리잡은 관람차 톈진아이天津之眼를 만나게 되는데 해하강 주변 풍경을 시원하게 감상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톈진 시민의 휴식처 수상공원 톈진 남쪽에 자리한 수상공원水上公園은 톈진 시민들이 사랑하는 휴식처다. 총 면적도 167만km2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사각 모양의 공원은 출입문이 여럿인데 지하철 3호선 주등기념관周邓纪念馆역에서 하차하면 곧바로 북쪽 출구와 연결된다. 공원에 들어서면 수상공원답게 넓은 호수가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한다. 수상공원은 크게 동호와 서호로 나뉘는데 북쪽 출구에서 마주하는 호수는 서호다.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산책 나온 많은 시민들을 만나게 된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기도 하고 제기차기를 하기도 한다. 제기차기는 중국의 어느 공원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제기뿐 아니라 핸드볼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공을 이용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롤러블레이드를 즐기는 시민들도 꽤 많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라는 것. 입구에서 400여 미터를 내려가면 아치형의 석교를 건너게 되는데, 좌측에 보이는 호수가 동호다. 다리 건너 작은 언덕에는 3층 규모의 콘크리트 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수상공원 전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평온해진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동호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회전목마와 바이킹, 후룸라이드 등을 비롯해 다양한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놀이공원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관람차. ‘수상공원’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는 관람차는 기념사진을 찍기에도 안성맞춤이다. 3층 누각 전망대에서의 전망이 아쉬웠다면 관람차를 타고 시원한 전망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수상공원 남쪽에는 180여 종, 1,800여 마리의 동물과 조류들을 보유한 톈진동물원天津动物园이 있다.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로 사자, 호랑이, 기린, 하마 등을 비롯해 수십 종의 파충류 등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희귀한 백호와 손오공의 모델이 되었다는 황금원숭이도 만날 수 있다. 주은래의 삶과 업적을 한눈에 수상공원 북쪽 출구 바로 옆에는 주은래등영초기념관周恩来邓颖超纪念馆이 자리하고 있다. 주은래기념관이나 주등기념관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주은래등영초기념관이다.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던 주은래는 장쑤성강소성, 江蘇省 후아이안회안, 淮安에서 태어나 톈진의 남개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에는 일본에서 유학했다. 1919년,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이었던 5·4 운동 때는 톈진에서 활약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921년에는 파리에서 공산당 프랑스 지부 결성에 참여했다. 1924년 귀국 후에는 꾸준하게 공산당 혁명 운동을 이끌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자 초대 수상 겸 외교부장 자리에 올랐다. 당대 함께 활동했던 모택동毛澤東이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택동이 엄하고 강한 이미지의 정치가였다면 주은래는 인자하고 포용심 많은 정치가로 인정받고 있다. 늘 중국 인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이 이끌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중국의 문화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던 인물이다. 기념관은 1998년 2월28일 주은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했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황동 간판 글씨는 강택민江澤民이 쓴 것이다. 기념관 내부로 들어서면 홀 정면에 세워진 주은래와 부인 등영초邓颖超의 흰색 조각상을 먼저 만나게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조각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기념관 1층에는 주은래의 일생과 관련된 자료들이 꼼꼼하게 전시되어 있다. *본문에 나오는 중국의 지명은 중국어 발음으로 적고 한자 음과 한자를 동시에 표시했다. 관광지, 사람 이름, 산 등 지명 이외의 것은 한자 음을 적고 한문을 병행 표기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el info 天津 Airline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중국국제항공 등이 톈진까지 직항편을 운행한다. 운항 회수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매일, 중국국제항공은 주 1회. 소요시간은 약 1시간 50분. 여행이 목적이라면 톈진 직항보다 베이징 직항을 이용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톈진보다 베이징 직항 항공권 요금이 훨씬 저렴하고, 톈진과 베이징 간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TIP가는 길┃베이징에서 톈진까지는 고속철로 30분이면 갈 수 있다. 베이징남역에서 출발하며 도착역은 톈진역과 톈진남역 두 곳이다. 톈진역과 톈진남역을 모두 정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지에 따라 각각 다른 열차를 선택해야 한다. 톈진 시내 교통┃톈진 시내에서는 지하철로 이동하면 편하다. 톈진은 현재 4개의 지하철 노선이 운행 중이다. 기차역인 톈진역과 톈진남역도 모두 지하철이 연결돼 있다. 주은래등영초기념관┃입장료는 무료지만, 외국인은 여권을 소지해야만 입장권을 받을 수 있다. 여권을 꼭 챙기자. 촬영 명소┃이태리풍경구에서 고문화가에 이르는 길은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해하강을 따라 북쪽으로 800m 정도 이어지는데, 유럽풍 건축물이 줄지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걷다 보면 보행전용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고문화가 남쪽 출입구를 만나게 된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박동식 여행작가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서울지국 www.visitchina.or.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장영실이 뿌린 ‘과학의 씨앗’ 꽃피우다

    장영실이 뿌린 ‘과학의 씨앗’ 꽃피우다

    조선 세종 이후에도 의약·지리·자연철학 ‘일취월장’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는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지만 국내 과학계에서 4월은 대중과 과학이 만나는 축제의 달이다. 더군다나 올해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인 만큼 다채로운 과학기술 행사들이 준비되고 있다. ●한국 과학기술 50년… 행사 봇물 다양한 행사 중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12월 문을 연 국립부산과학관이 이달 11일 시작한 ‘장영실 특별기획전’이다. 조선 세종조에 활약한 장영실은 생몰 연대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과학자이자 발명가다. 최근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TV 드라마도 방영된 가운데 장영실을 통해 우리 전통 과학기술을 되돌아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전시회다. 많은 사람들이 장영실과 그를 적극 지원했던 세종대왕의 업적 때문에 당시가 우리 역사에서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했던 때이며 그 이후 과학기술은 사실상 쇠퇴했다고 알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 석학들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선정한 ‘명예로운 과학기술인’ 31명의 면면을 보더라도 20세기 이전의 인물은 11명에 불과한데 이 중 세종시대 인물이 3분의1인 4명에 이른다. 실제로 세종 때 이순지가 완성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은 15세기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법으로 평가받았지만 이후 개선되지 못하고 후대 역법 연구자들은 천체 운행을 제대로 계산하지도 못했다. 또 장영실이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물시계를 정확한 시보 장치를 갖춘 일종의 디지털 물시계로 만든 ‘자격루’도 그가 파직된 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어서 무용지물이 됐다. 또 이천과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완성한 ‘혼천의’ ‘간의’ ‘일성정시의’ ‘정남일구’ 등의 천문 기기들은 세종 이후 사용되지 않고 방치돼 있다가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사라지고 남은 기구들도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세종 이후 우리나라 과학기술 전통의 맥이 끊겼다고 하는점을 뒷받침하는 듯하지만 과학사 학계에서는 “그런 생각은 서양 과학과 유사한 형태만 과학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역사가 짧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유는 17세기 이후 탄생한 서양 근대과학의 개념과 범주에서 전통 과학을 보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 전통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과학이라는 필터를 제거하고 특정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이후에도 의약학과 지리학, 자연철학 분야는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15세기 대표적인 의학 연구 서적은 ‘향약집성방’ ‘의방유취’인데 이는 금나라와 원나라의 의약학을 수용해 한국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여기에 명나라의 의약학 기술까지 포함해 조선의 시각으로 정리하고 재해석한 허준의 ‘동의보감’이 등장했다. 당시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서 의약학 교본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정호 ‘대동여지도’는 지리학의 절정 지리학 분야에서도 후대에 갈수록 행정, 군사, 경제 등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가진 특수 지도가 만들어지고, 각 지방 군현 단위의 세부 축적 지도 등을 제작하면서 기술 발전이 거듭됐다. 이런 전통 지리학 기술의 발전은 19세기 중순에 만들어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절정을 이룬다. 형이상학적 자연철학 분야에서도 세종 때 이순지가 편찬한 천문학서 ‘제가역상집’이 후대에 나온 것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실학자들은 서양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서양 과학을 비판적으로 일부만 받아들이며 우리 고유 과학사상의 틀을 마련하려 했다는 것이 과학사학자들의 의견이다.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활약했던 실학자 중에서 김석문은 태극과 이(理)의 원리를 바탕으로, 홍대용은 기(氣)의 개념으로 각각 지동설을 주장했고 최한기는 기륜설(氣輪說)이라는 전통적 이론 체계로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뉴턴의 만유인력과 우주론을 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교수는 “한국 전통 과학과 근대 서양 과학은 과학적 사실과 내용은 비슷할 수 있지만 다른 패러다임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근대 이후 서양 과학은 발전해 왔는데 우리는 퇴보했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은 무리”라고 설명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칼은 뒤로 찬다 그게 조선 검술…베어라, 역사 왜곡

    칼은 뒤로 찬다 그게 조선 검술…베어라, 역사 왜곡

    ‘무예24기’ 시범단이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짧은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어떤 아이들은 활 쏘는 모습을 따라하느라 야단법석이다. 환도를 꺼내 본국검 시범을 보여주자 일본인 관광객들이 “스고이”(대단하다)라며 감탄한다. 수원화성의 혼이 담겨 있는 무예24기 시범이 펼쳐지는 화성행궁 앞에서는 오전 11시가 되면 무예24기 시범 공연이 펼쳐진다. 18일에도 외국인 관광객과 어린이 관람객들이 공연에 눈을 떼지 못했다. 북이 울리자 등나무로 만든 방패인 등패를 든 무사와 칼과 활을 허리에 찬 무사들이 짝을 이뤄 무예를 보여줬다. 등패로 전방을 방어하는 사이 뒤에서는 재빨리 화살을 날린다. 곧이어 장창과 낭선, 기창, 등패까지 든 1대(오늘날 분대에 해당)가 진법을 펼치는 모습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日 접전 대응법·中 무예 녹인 유일한 軍교본 ‘무예도보통지’ 무예24기는 조선시대 정조가 규장각검서관인 이덕무·박제가, 장용영(壯勇營) 장교였던 백동수 등에게 명해 1790년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한다. 조선 후기 군인들이 익혔던 군사 무예였다. 무예도보통지는 도(刀), 검(劍), 창(槍), 곤(棍) 등의 병장기와 권법(拳法) 등 각종 ‘무예’를 그림과 해설로 설명[圖譜]한 종합교본[通志]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도검 10기, 창·봉 7기, 마상(馬上)무예 6기, 권법 1기로 구성돼 있다. 무예24기는 또 임진왜란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단병접전 능력에 고전한 조선군은 칼과 창 등을 집중 교육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때문에 무예24기에는 예도(조선세법), 본국검, 쌍검술 등의 전통 무예에 더해 일본 무예인 왜검, 명나라 군대를 통해 들어온 중국 무예인 낭선과 등패 등도 담았다. 거기에 마상무예인 기창(騎槍), 마상쌍검, 마상월도,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까지 포함시켰다. 무예24기는 문헌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군사 무예다. 구한말 군대 해산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맥이 끊어졌지만 전통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 끝에 연구와 수련을 거듭하며 원래 모습을 복원해 가고 있다. 1999년부터 수원화성 연무대에서 공개 시범, 2003년부터는 상설 공연을 시작하더니 마침내 지난해 수원시립공연단으로 승격했다. 현재 월요일만 빼고는 1년 내내 공개 공연을 이어 가고 있다. ●최형국 박사 지리산서 3개월간 홀로 수련도 최형국 박사는 무예24기 공연단의 산증인이다. 1990년대 초반 무예24기를 접한 뒤 혼자 지리산에 들어가 3개월 동안 무예 수련을 했을 정도로 무예24기에 푹 빠진 그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무예24기 연구와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당초 경영학을 공부한 그가 쓴 석사 논문도 ‘수원화성의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 마케팅 전략’이었다. 무예24기 복원을 위해서는 역사학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중앙대 사학과에 들어가 7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시에서는 무예24기 복원과 대중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무예24기 상설 공연을 위한 전용관(정조상설테마공연장)을 건립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발주한 것이 대표적이다. 수원시에서는 현재 무예24기 수련관 설립도 검토 중이다. 현재 18명인 무예24기 시범단 정식 단원도 대폭 확대하기 위해 최근 채용 공고를 냈다. 장기적으로는 정조와 수원화성, 무예24기를 핵심 콘텐츠로 하는 테마공원을 만드는 것까지 고민 중이다. 최 박사는 “화성행궁 앞 광장 옆에 500석 규모의 상설공연장이 들어서면 수원시를 대표하는 역사문화 상품이 될 것”이라면서 “수련관과 공연단을 연계하면 무예24기 시범단이 세계적인 공연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무예24기와 수원화성을 결합해 수원 도심 지역사회 활성화도 도모할 수 있다”면서 “무예24기는 수원화성이라는 유형 문화유산과 가장 잘 어울리는 무형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손잡이 앞을 향한 일본식 칼 차기 등 사극 속 왜곡 심각” 무예24기 시범단은 고증에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공연을 유심히 보면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얼마나 역사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알게 되고 결과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장수들이 칼을 들고 다니는 장면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이순신 동상부터 시작해 한 손에 칼을 들고 말을 타는 게 상식처럼 돼 버렸다. 최 박사는 이를 “멜빵 없이 소총을 들고 다니는 것과 똑같다”고 꼬집었다. 칼을 차더라도 칼머리가 앞으로 가게 한 일본식 칼 차기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무예24기 공연단은 하나같이 활이 몸 앞으로 오고 칼머리는 몸 뒤로 가 있는 복장을 하고 있다. 최 박사는 이에 대해 “조선시대 전통 환도는 띠돈이라는 고리가 있어서 칼머리를 자유자재로 앞뒤로 움직일 수 있다”면서 “직접 칼싸움을 할 때가 아니면 칼을 뒤로 차는 게 정석”이라고 말했다. 이어 “칼을 앞으로 차면 말을 탈 때 불편하다. 전술적으로도 칼보다 활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과 화살을 등 뒤로 차는 것도 한마디로 ‘듣보잡’이라고 최 박사는 꼬집는다. 이어 “사극에선 병졸들이 모두 당파(삼지창)만 들고 다니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칼을 차고 4m가 넘는 장창을 들거나 총을 메는 것이었고, 부대 운용도 장창에 당파와 낭선, 곤봉 등을 조합한 형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본 전술은 100보 이상에선 포병과 조총수, 50~100보는 궁수, 50보 이내는 기병 돌격, 그다음이 보병 돌격”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전통 무예가 활성화되고 있다. 이 중에는 그 연원을 화랑이나 달마대사에서까지 찾기도 한다. 하지만 무예사를 전공한 최 박사는 “대부분 아무리 오래 잡아도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통지상주의, ‘위대한 고대’라는 집단적 상상력에 빠져 역사를 왜곡하면 안 된다”면서 “가령 태권도 뿌리가 택견이 아니라 해방 직후 최홍희가 일본의 가라테를 본떠 창안했다고 해서 태권도의 위대함이 훼손되는 건 결코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씨줄날줄] 옥새전쟁/박홍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옥새전쟁/박홍기 논설위원

    새누리당에 때아닌 ‘옥새(玉璽)전쟁’이다. 그제 당 대표 직인(職印)을 옥새에 비유하면서부터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이른바 ‘3·15 공천’에 강하게 반발하는 김무성 대표가 공천장에 직인을 찍어 주지 않겠다는 ‘옥새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옥새전쟁’, ‘옥새투쟁’이라는 말이 입길에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옥새는 왕의 도장이다. 왕조시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 국새(國璽)다. 권위와 정통성의 표상이다. 왕명으로 이뤄지는 모든 외교문서, 행정문서에 썼다. 왕위 계승 때 나라를 물려주는 전국(傳國)의 징표다. 고대 중국에서는 금인(印)을 쓰다 진시황제 때 처음으로 ‘수천지명황제수창’(受天之命皇帝壽昌·하늘의 명을 받았으니 황제는 장수하고 창성하리라)을 새긴 옥으로 만든 옥새를 사용했다. 우리나라의 옥새는 고대 부여국 예왕(穢王)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재질에 따라 옥새, 금인, 금보(寶)라고 불리지만 통칭 옥새다. 왕조가 교체될 때 중국에 사신을 보내 옥새를 받아야 했다.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다. 옥새의 주권은 중국에 있었다.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은 조선 건국 초기 국새가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다 상상력을 더해 ‘국새를 삼킨 고래’를 찾는 소동을 그렸다.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새겨진 금인이다. 함흥차사(咸興差使),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사자성어도 옥새에서 비롯됐다. 태조는 다섯째 아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정종)를 물려준 뒤 옥새를 가지고 함흥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른 뒤 사죄와 함께 옥새를 얻기 위해 태조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태조는 사신을 죽이거나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야사(野史)다. 옥새를 주체적으로 제작한 것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다. 옥새에 황제지보(皇帝之寶), 대한국새(大韓國璽)라고 썼다. 문양도 거북에서 용으로 바꿨다. 용은 황제의 상징으로 중국의 전유물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옥새의 개념이 폐지되고 국새가 자리 잡았다. 현재 국새는 ‘대한민국’이라고 새긴 봉황 모양이다. 김 대표는 옥새로 불리는 도장 2개를 갖고 있다. 하나는 새누리당 도장인 당인(黨印), 또 하나는 대표 직인이다. 공직선거법 제49조 2항(후보자 등록)에 따르면 추천 정당의 당인 및 그 대표자의 직인이 날인된 추천서 등을 등록신청서에 첨부해야 한다. 당 대표의 직인이 없는 공천장은 무효다. 막강한 권한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 대표 직인을 옥새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왕조시대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해서다. 마뜩잖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섬’ 산에 빠지다, 능선 물결 속에

    ‘섬’ 산에 빠지다, 능선 물결 속에

    섬 산행은 뭍의 산을 오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바다 위를 거니는 듯, 발아래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고도를 높여 가는 맛이 그만이다. 물론 반론도 있겠다. 등산 한 번 하자고 뭍의 유명산 다 제치고 섬까지 가랴. 한데 섬 산행은 긴 여정 자체가 여행이다. 뭍의 막다른 곳에 항구가 있고, 그곳에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 북부의 네 섬에서 명산으로 꼽히는 곳은 두 개다. 암태도의 승봉산(356m)과 자은도의 두봉산(364m)이다. 둘 다 빼어난 조망을 가진 산이긴 하나, 높이와 풍경의 깊이 등에서 두봉산이 반 발짝 정도 앞서는 형국이다. 자은도 사람들은 두봉산을 말봉산, 암태도 사람들은 승봉산을 되봉산이라 각각 부른다. 여기엔 전설이 깃들었다. 오래전 바닷물에 잠겨 있던 이 지역에 한 말(斗)가량의 땅이 솟았다. 세월이 흘러 점점 바닷물이 줄면서 한 말의 땅이 산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두봉산(斗峰山)이다. 승봉산(升峰山) 이야기는 대충 짐작이 된다. 한 말보다 작은 한 되(升)가량의 땅이 솟아 승봉산이 됐을 터다. 지금도 두 산의 꼭대기에서 조개껍질이 발견된다고 하니 전설이 마냥 황당한 건 아닌 듯하다. ●갈 길 바쁜 외지인은 ‘대율재 코스’ 적합 두봉산은 신안 전체에서도 전망 좋은 산으로 꼽힌다. 암릉지대에 오르면 ‘천사(1004) 섬’이라 불리는 신안의 여러 섬들이 줄곧 발아래 펼쳐진다. 주변 산들보다 월등히 높고, 정상부가 암릉으로 이뤄져 뱃사람들이 두봉산을 곧잘 이정표로 삼았다고 한다. 산행 코스는 세 개로 나뉜다. 구영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해 도명사~정상~대율재~구영저수지를 돌아 원점회귀하는 코스는 3시간 남짓 소요된다. 자은초등학교를 출발해 무선기지국~성재봉 봉화대터~대율재~암릉지대~정상~도명사로 내려오는 코스는 얼추 4시간을 잡아야 한다. 갈 길 바쁜 외지인에게 적합한 코스는 대율재 코스다. 줄곧 오르막만 이어지는 자은초등학교 구간을 지름길로 통과한 뒤 대율재와 암릉지대를 거쳐 정상을 찍고 원점회귀한다. 보폭을 빨리하면 2시간 30분 안쪽에 오갈 수 있다. 들머리는 구영리(舊營里)다. 조선시대 수군영(水軍營)이 있던 곳이다. 현재 자은초등학교 자리가 당시 병사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구영리에서 대율재 이정표를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이층집이 나온다. 산행의 실질적인 들머리다. 등산로는 집 왼쪽의 산자락을 따라 나 있다. 여기서 콧잔등에 땀이 맺힐 정도의 비탈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대율재 안부다. 자은초등학교에서 출발한 등산로도 이곳에서 합류된다. 대율재부터 첫 번째 암릉지대까지 능선길과 바위지대가 번갈아 펼쳐진다. 능선을 따라 10여분 정도 고도를 올리면 한순간 하늘이 열리고 쉬어 갈 만한 암릉지대가 나온다. 여기부터 약 1㎞ 구간이 두봉산 산행의 백미다. 쉴 틈 없이 빼어난 풍경들이 몰아친다. 멀리 자은도 둔장해변 등이 한눈에 담기고, 코앞으로는 두봉산 정상부의 암릉들이 우뚝 솟았다. ●명나라 장수 살린 사랑과 은혜 ‘자은’ 놀라운 건 고도를 높여 만나는 암릉 구간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는 거다. 암릉 등에 가려졌던 풍경들이 그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 설치된 철봉을 잡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으로 ‘1004’개에 이르는 섬들이 물결친다. 그야말로 섬들의 파도다. 오른쪽으로 해남반도와 진도, 하의도 등이 아련하다.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에 속한 팔금, 안좌, 암태, 도초 등도 눈에 잡힌다. 왼쪽으로는 임자도와 사옥도, 증도, 무안의 해제반도까지 볼 수 있다. 두봉산은 정상보다 바로 아래 암릉의 전망이 더 낫다. 맑은 날엔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하던데, 아쉽게도 그런 행운은 없었다. 원점회귀가 아닌 경우 정상 삼거리에서 내려가는 코스는 둘이다. 중국의 장수 두사춘이 머물렀다는 굴, 천혜방(天惠房)을 지나는 유천리 코스와 도명사로 내려가는 코스다. 두사춘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참전한 병사다. 남의 나라에 와서 싸우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던 두사춘은 탈영을 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 자은도까지 왔다. 섬에 도착한 그는 난세에 생명을 보전할 수 있게 섬이 베푼 사랑(慈)과 은혜(恩)를 못 잊어 했고, 섬 이름도 자은도(慈恩島)가 됐다는 속설이 있다. 면소재지가 있는 구영리로 가려면 도명사 방면이 무난하다. 초반부터 급경사 지대를 통과하는 등 다소 험하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글 사진 신안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조선 초기 도가사상·장례풍습 담은 ‘주역참동계’ 등 4건 보물 지정 예고

    조선 초기 도가사상·장례풍습 담은 ‘주역참동계’ 등 4건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은 ‘주역참동계’, ‘서경우 초상 및 함’, ‘서문중 초상 및 함’, ‘은제도금화형탁잔’ 등 4건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5일 밝혔다.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는 중국 위백양의 저술로 도가의 심신수련 방식과 장생불로의 단약 제조법을 소개한 서책이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책은 명나라 초기 장본진이 송나라 말기 인물인 유염의 ‘주역참동계발휘’(周易參同契發揮)와 ‘주역참동계석의’(周易參同契釋疑)를 합본 간행한 것으로, 1441년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금속활자)로 인출됐다. 문화재청은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유일본”이라며 “조선 초기 도가사상과 장례풍속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서경우 초상 및 함은 조선 중기 문신 서경우(1573∼1645)의 초상으로, 큰 손상 없이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진지한 풍모와 의자 손잡이 묘사 등에서 17세기 초상화의 다양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머리에는 관복과 함께 착용하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가슴에 한 쌍의 학이 묘사된 의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서문중 초상 및 함은 조선 후기 문신 서문중(1634∼1709)을 그린 그림으로, 평상시 입던 공무복인 시복(時服)을 착용하고 앉아 있는 전신좌상(全身坐像) 형태의 초상화다. 문화재청은 “두 초상은 17세기 초와 18세기 초에 유행한 화풍 특징이 잘 반영된 수작이고, 그림을 담는 함도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은제도금화형탁잔(銀製鍍金花形托盞)은 은에 금을 입힌 잔과 잔을 받치는 잔탁으로 구성된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이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두 타이완 기록자의 일기①그 여자의 일기,남쪽의 이야기를 들려줘-타이베이

    두 타이완 기록자의 일기①그 여자의 일기,남쪽의 이야기를 들려줘-타이베이

    두 사람이 나섰다. 타이완 방방곡곡을 훑으며 각개전투를 펼치고 나니 크고 작은 것 모두 버릴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기록한다.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타이완의 얼굴을. 타이완은 어떤 곳일까 공식명칭은 ‘중화민국’이다. 우리나라 3분의 1 정도 크기의 섬나라다. 인구는 약 2,300만명, 수도 타이베이와 함께 가오슝, 타이중, 타이난이 4대 도시로 불린다. 16세기까지는 말레이계 원주민들이 타이완 전역에 분포해 살았으나,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지금의 타이난에 거점을 두고 중국의 한족들을 모집해 토지개간을 시작하면서부터 한족들이 유입됐다.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관할하던 1644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침입하자 한족들이 전쟁을 피해 타이완으로 대거 들어왔다. 1661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밀린 명나라가 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타이완에 상륙해 네덜란드인을 몰아냈다. 이때부터 타이완은 중국인의 섬이 되었다. 1683년 타이완은 다시 청나라에 정복되어, 청나라의 22번째 성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부터 50년 동안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타이완을 식민지배했다. 1945년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전하자 다시 중국국민당이 타이완을 관할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 패한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이 그해 12월7일 타이완으로 ‘중화민국’의 정부를 이전함으로써 지금의 타이완이 됐다.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넘어올 당시 중국 자금성 뒤편의 고궁박물원에 안치되어 있던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을 가져 왔는데, 중국의 역사를 아우르는 그 진귀한 유물들이 현재 중국이 아닌 타이완의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타이완 인구의 84%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유입된 한족 ‘본성인’, 14%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유입된 한족 ‘외성인’, 나머지 2%는 한족이 유입되기 이전인 16세기까지 섬에 살고 있었던 ‘말레이계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레이계 원주민은 아직도 타이완의 고산지역에서 고유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중국 본토의 중화요리는 모두 타이완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 전역의 요리사들이 다양한 경로로 타이완에 유입된 까닭이다.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덕에 타이완에 가면 다양한 중국 전통요리들을 맛볼 수 있다. ●그 여자의 일기 남쪽의 이야기를 들려줘 오롯한 자유의 시간이 주어졌다. 욕심을 내서 타이베이는 물론 남부 도시 가오슝까지 들렀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듯 구석구석 관심을 가져보고 꼼꼼히 소식을 경청했다. 타이완은 여전히 다정하고 속이 깊은 친구였다. 역시, 내가 눈썰미가 있다니까. ●타이베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을 어루만지다 보면 지금까지 알아 왔던 타이베이 말고, 또 다른 타이베이가 보인다. 언제든지 이야기를 쏟아낼 준비가 돼 있다. 콕, 찌르기만 한다면. ▶옛 거리에 움트는 새싹들 디화지에DihuaStreet 아마도 사람들은 조금 덜 꾸미고, 덜 복잡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있나 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흥행은 바로 그런 감성을 자극했던 것이 아닐까. 희한하게도 타이완에 발을 디디면 멀지 않은 과거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우리의 과거 모습들이 타이완 곳곳에서 엿보이기 때문일 테다. 세련되지 않아도 소박한 옷차림, 숨기는 것이 없는 날것의 표정. 타이완을 여행하며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번잡한 관광지 대신 도시의 외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유리로 마감한 신식 건물들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2~3층의 건물이 골목을 이루기 시작했다. 디화지에다. 1850년경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디화지에는 과거 타이완의 경제 중심지였다고. 각종 허브, 직물, 차 등을 파는 골목이었단다. 당시의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은 덕에 시간 여행을 하는 듯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게 된다.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듯 아직도 디화지에 골목 곳곳에는 타이완의 각종 전통 먹거리, 직물을 파는 곳들이 남아 있다. 사람을 모으는 호객꾼의 소리는 낡은 건물 사이를 넘나들며 생기를 북돋는다. 가장 번성했던 19세기를 지나면서 디화지에의 화양연화는 지나갔다. 그러나 주름이 패었을지언정 여전히 생기로운 빛을 띠는 것은 왜일까? 정답은 낡은 땅에 찾아와 깃든 젊은이들에게 있다. 디화지에에는 빛 바랜 건물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멋진 카페와 갤러리, 편집숍들이 꽁꽁 숨어 있다. 바쁜 걸음으로 재촉한다면 절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화려한 간판을 내건 것도 아니요, 나만 잘났다고 뽐내는 모양도 아니다. 옛 거리에 살갑게 녹아들어 그저 ‘디화지에’ 같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로 생긴 숍들만 모은 지도가 빽빽하다. 겨우 2년 남짓한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디화지에에 모이게 된 것은 다름 아니다. 옛 건물이 가득한데다 개발이 늦어지면서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 프로젝트처럼 하나의 업체가 주도해 여러 건물에 숍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개별적으로 카페나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한단다. 건물 중앙을 비워둔 ‘ㅁ’자 형 전통 가옥에는 그래서 각 모서리별로 각양각색의 숍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함정에 갇힌 것처럼 하나의 건물을 다 돌고 나오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만다. 물론 지갑이 홀쭉해지는 정도도 머문 시간에 정비례한다. 아트야드Art Yard세다이그룹Sedai Group이 디화지에가 속한 다다오청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만든 복합공간. 지난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아트야드가 꾸며지기 시작해 지금 막 기반을 잡았다. 디화지에 거리 곳곳에 아트야드에 속한 총 5개 건물이 운영되고 있다. 소소한 잡화를 파는 숍과 강연장이 운영되는 시아오이청小藝埕 · Xiăo yì chéng, 타이완 전통 예술을 재해석하는 숍이 모인 민이청民藝埕 · Mín yì chéng, 아티스트의 개별 숍이 모여 있는 종이청眾藝埕 · Zhòng yì chéng, 전시회와 강의가 열리는 시에이청學藝埕 · Xué yì chéng, 예술가의 안뜰을 표방한 리안이청聯藝埕 · Lián yì chéng 등이 그것이다. 각각 서점, 갤러리, 카페 등 여러 개의 숍이 입주해 있다.www.artyard.tw 플라이시fleisch타이완에서 난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는 레스토랑. 공정한 방식으로 재료를 공수해 농민에게는 알찬 수익을, 소비자에게는 신선한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주방을 개방해 어떻게 음식이 만들어지는지 공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방식에 공감하는 방문객들이 3층 건물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톤다운 된 내부 인테리어가 주는 편안함이 일품. 각종 미디어에 소개된 유명 레스토랑이기도 하다. No. 76, Section 1, Dihua St, Datong District, Taipei City www.fleisch.com.tw +886 2 2556 2526 프로그카페Frog Cafe나무로 만들어진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프로그숍Frog Shop이 카페의 형식을 빌렸다. 엽서나 달력, 작은 사무용품을 전시하는 공간과 카페로 이뤄져 있는데, 디화지에 메인 거리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항상 붐비는 편. 간단한 식사도 즐길 수 있어 다음 여행을 위한 기력을 보충할 수 있다. No. 13, Section 1, Dihua St, Datong District, Taipei City shop.frogfree.com +886 2 2555 2125 ▶그들이 사는 세상 다다오청DaDaoCheng 디화지에의 정겨움은 바로 인접한 다다오청 항구로 이어진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한강공원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 타이베이의 메인 선착장인 다다오청에는 여가를 즐기기 위해 나온 가족과 연인들이 한 가득이다. 앳된 얼굴을 한 연인들부터, 노모와 아이까지 나선 대가족도 있다. 타이베이 어딘가에서 밥을 짓고 사는 사람들, 진짜 그들의 생활 안에 녹아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땡땡’ 작은 종을 울리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는 사람도 있다. 쉴 새 없이 휙휙 지나가는 것은 자전거다. 어디서나 자전거를 즐긴다는 타이완 사람들의 생활이 그대로 느껴지는 전경이다. 다다오청 한쪽에는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 대여소가 마련돼 있다. 교통카드만 있으면 자전거 빌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강 너머를 천천히 바라보며 즐기기에는 자전거만한 것도 없겠다. ▶홀로 남은 외딴 섬의 변신 보피리아오BoPiLiao MRT 룽산쓰역을 나서자 사방에서 울리는 번잡한 소음이 귓속으로 파고 든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보니 언제 와도 사람이 많다. 기도를 올리러 찾아온 주민들부터 사진을 찍기 바쁜 관광객까지, 어디에 시선을 둬도 위엄 있는 룽산쓰의 자태보다 사람이 먼저 들어온다. 룽산쓰를 한 바퀴 빙 돌고 발길을 틀었다. 진짜 목적은 보피리아오다. 룽산쓰 오른편으로 딱 한 블록만 걸으면 금세 보피리아오를 발견할 수 있다. 붉은 벽돌로 쌓은 2층 건물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 간판도 없고 표지판도 찾기 어렵지만 주변 상가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마치 보피리아오만 동떨어진 시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보피리아오의 역사는 200년 전 후기 청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보피리아오 일대는 망카Mangka지구와 구팅Guting지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번성했었다고. 일제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인근의 옛 건물들은 모두 새로 개발되어 서양식으로 변모했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보피리아오만은 그대로 남게 됐단다. 우여곡절 끝에 홀로 남아서인지 외딴 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희끗희끗한 벽돌색마저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겨우 한 블록 차이인데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룽산쓰와는 달리 보피리아오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아치형 터널을 지나다 보니 한쪽에서 피아노 연주가 들려온다. 보피리아오의 한 구역에서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연주에 맞춰 성악가의 목소리도 울려퍼졌다. 보피리아오의 희끗희끗한 벽돌이 돋보이는 조용한 거리에는 근대 타이완의 역사를 체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육관, 공연 및 전시가 이뤄지는 공간 등이 다양하게 자리하고 있다. 여행자에겐 훌륭한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군사 주거지, 따뜻한 남쪽이 되다 쓰쓰난춘SiSi Nan Cun 우연히 발견한 샘터는 그것이 크건 작건 반갑고 사랑스럽기 마련이다. 쓰쓰난춘이 그랬다. 기대보다 작은 규모에 과연 잘 찾아온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지만, 고층 빌딩 옆에서도 기죽지 않는 존재감을 뽐낸다. 우선 외형 때문이다. 타이베이101이 한 발짝 거리에서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서 있고, 그 주변에도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 쓰쓰난춘은 1층 높이의 2층 건물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낮고 작았다. 하지만 외형만으로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경솔하다. 건물 곳곳에 숨은 보석 같은 가게들, 매주 주말마다 열리는 플리마켓은 쓰쓰난춘이 진짜 ‘따뜻’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한가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주말만 되면 북적이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매주 주말 오후 1시부터 작은 액세서리부터 옷, 먹거리, 문구까지 다양한 숍이 쓰쓰난춘 중앙 광장에 빼곡하게 들어선다. 이곳은 지난 1949~1960년대 중국에서 넘어온 중화민국의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100만명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컸지만, 시간이 가면서 거주하던 군인들이 은퇴하고 사회로 돌아가면서 점점 영향력이 축소되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지금은 단 몇동의 건물만 남아 이색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회색 시멘트 벽 그대로 남은 건물은 빨강, 노랑, 초록 등 원색으로 문과 창틀에 포인트를 줬다. 낡고 바랜 느낌이지만 그런대로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좁은 벽과 벽 사이를 지나다 보면 자연스레 과거 이곳에서의 삶이 그려진다. 옛 흔적을 모아 둔 전시관에서는 그 상상이 좀 더 구체화될지도 모르겠다. 굿초스Good Cho’s타이완 ‘로컬 푸드’가 총집합했다. 장류, 조미료, 커피, 화장품까지 모두 모인 이곳은 쓰쓰난춘에 입점한 가장 큰 숍이다. 특히 주방에서 바로 만들어 내는 베이글의 인기가 뜨겁다고. 그 명성을 못 들어본 자라도 굿초스에 들어서자마자 풍겨 오는 고소한 빵냄새 때문에 베이글을 사게 될지 모른다. 종류도 수십가지에 달해서 고르는 재미도 쏠쏠한데, 다만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면 직감으로 고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함정. No. 54, Songqin St, Xinyi District, Taipei City +886 2 2758 2609 미도리Midori역시나 로컬 푸드를 이용하는 아이스크림 숍이다. 방부제 등 인체에 유해한 화학 제품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미도리의 특징. 그래서인지 아이스크림의 색이 연하고 부드럽다. 관찰 결과 굿초스에서 베이글을 먹고 미도리에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쓰쓰난춘의 메인 코스가 분명하다. 콘이나 컵 중 선택할 수 있다. No. 50, Songqin St, Xinyi District, Taipei City 에디터 고서령 기자 글·사진 차민경 기자, Travie writer 김봉수 취재협조 내일투어 02-6262-5000타이완관광청 www.taiwan.net.tw, 브이에어 www.flyvair.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설 연휴엔 복 부르는 원숭이 만나러 가요

    설 연휴엔 복 부르는 원숭이 만나러 가요

    중국 명나라 오승은의 장편소설 ‘서유기’ 속 손오공이 판화와 그림을 통해 되살아난다. 원숭이해를 맞아 2일부터 5월 15일까지 강원 원주시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관장 한선학)이 여는 ‘서유기 특별전-붉은 열정 손오공’에서다. 한국, 중국, 일본, 티베트, 인도, 태국 등 아시아에서 제작된 서유기 관련 유물 70여점이 전시된다. 손오공의 유래가 된 인도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하누만 석판화와 탁본을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의 서유기 목판본과 목판 연화(年畵·민화의 일종), ‘우키요에’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일본 에도시대의 채색 풍속 판화, 전적류 등이다. 한선학 관장은 “하누만은 열정과 헌신을 다해 곤경에 빠진 왕을 구하면서 불가능을 희망으로 바꾼 원숭이로 태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고 있다. 손오공도 하누만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장 법사를 도와 90여 차례의 역경을 극복하고 서역에서 불경을 중국으로 가져오는 기적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 서유기 관련 대형 육필 연화 2점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연화는 요괴 홍매아의 불을 내뿜는 공격에 치명타를 입은 손오공이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홍매아는 관음보살에게 귀의해 선재동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관장은 “천에 그려진 채색 서유기 육필 연화는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자료 중에는 고려시대 청자원숭이와 12지신 동경, 김유신 장군 묘석의 12지신 중 원숭이 탁본이 주목할 만하다. 한 관장은 “불굴의 열정을 상징하는 손오공을 주제로 그동안 수집한 서유기 관련 자료를 선별해 전시회를 마련했다”며 “이번 전시가 심리적으로 위축된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명주사 주지인 한 관장은 17년 동안 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목판화 관련 유물 4000여점을 모았고 이를 기반으로 2004년 명주사 내에 고판화박물관을 세웠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영상) 드라마 ‘장영실’ 속 박규리 모습 보니

    (영상) 드라마 ‘장영실’ 속 박규리 모습 보니

    박규리가 걸그룹 ‘카라’를 공식 탈퇴한 뒤 연기자로서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30일 방송된 KBS1 대하드라마 ‘장영실’에서 박규리는 명나라 황실종친의 외동딸 ‘주부령’으로 분해 아버지인 명나라 대신 주태강(임동진 분)과 함께 조선에서 온 사신들을 맞았다. 박규리는 천체관측기구 아스트롤라베(astrolabe)로 장영실(송일국 분)을 시험하거나 사천대군사들에게 쫓기는 송일국을 지켜보다 은밀한 지시를 내리는 등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눈길을 끌었다. 드라마 관계자는 “드라마 ‘장영실’ 속 주부령은 아버지 주태강과 함께 격물 지식이 풍부한 당대 북경 최고 미녀로, 뚜렷한 이목구비와 함께 연기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 박규리가 주부령 역할과 잘 어울려 캐스팅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앞서 박규리는 SBS 드라마 ’여인천하’를 통해 아역으로 데뷔, 케이블채널 MBC QueeN 드라마 ‘네일샵 파리스’, 영화 ‘두 개의 연애’ 등에 출연한 바 있다. 사진·영상=장영실-명나라 대신 주태강의 딸(박규리)이 가져온 휘귀한 물건을 본 명나라 대신들과 조선 사신들/네이버tv캐스트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다.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가 서울과 개성을 잇는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려 말과 조선 시대에는 혜음령을 지나는 의주대로가 한양에서 황해도, 평안도 지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혜음령은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흔히 용미리공동묘지로 불리는 서울시립용미리공원묘지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옛 의주대로는 정비가 이루어져 서울과 경기가 경계를 이루는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 걸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혜음원 국립 숙박시설… 석불입상 높이 17.4m 혜음령과 광탄면 사무소 사이에는 혜음원 터와 용미리 석불입상이 있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예종 17년(1122) 세운 국립 숙박 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혜음원(惠陰院)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나왔고, 동서 104m, 남북 106m의 절터에서 9개 석단에 27개 건물터가 확인됐다. 혜음원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장지산 기슭에 용미리 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높이가 17.4m에 이르는 한 쌍의 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상에 새겨진 글을 토대로 조선 성종 2년에 해당하는 성화(成化) 7년(1471) 조성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성화는 명나라 헌종의 연호다. 명문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도 줄줄이 적혀 있으니 석불입상의 조성과 연관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석불입상·혜음사 사회안전망 필요성 인식 담겨 하지만 석불입상에 얽힌 구전설화와 혜음사 창건 배경을 담은 고려시대 문신 김부식의 글을 찬찬히 읽다 보면 고려시대 조성설(說)에 다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 궁주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궁주의 이야기를 들은 왕이 그들이 있다는 곳을 찾아가게 했더니 과연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불공을 드렸더니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이기도 한 김부식은 ‘혜음사 신창기’(惠陰寺 新創記)에서 혜음령 길을 두고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 범과 이리가 떼 지어 모이고, 도둑의 무리도 숨기 쉬워 통행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해 지나가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자가 한 해 수백 명’이라고 탄식했다. 이런 실상을 파악한 신하가 “허물어진 절을 새로 지어 중을 모으고, 그 옆에 집을 지어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킨다면 짐승과 도둑의 해는 절로 멀어져 통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진언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고 결국 ‘무서운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빈민구제 정신 함축하고 있는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 창건 설화와 혜음사 신창기는 의주대로 주변에 살고 있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도적을 토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빈민의 배고픔을 막아 도둑의 길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 사고는 오늘날에도 배울 만하다. 고려시대에 오늘날의 표현으로 사회 안전망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석불입상 창건 설화는 상징성이 강한 설화의 특성상 구구절절한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신창기’와 다르지 않은 빈민구제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석불입상은 혜음원과 비슷한 시기 일종의 세트로 조성한 것은 아닐까 상상도 해 본다. 반면 ‘세조와 정희왕후가 일시에 깨달을 것을 미륵에 기원했다’는 명문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창건설은 감동이 없다. 글 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육룡이 나르샤’ 요동정벌 시작, 조선 건국 불씨 당겨

    ‘육룡이 나르샤’ 요동정벌 시작, 조선 건국 불씨 당겨

    ‘육룡이 나르샤’ 요동정벌 시작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드디어 조선 건국의 계기가 된 요동정벌이 시작됐다. 지난 7일 방송된 SBS 창사25주년 특별기획 ‘육룡이 나르샤’ 19회에서 조선 건국의 시초가 된 ‘요동 정벌’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자세히 방영됐다. 이날 방송에서는 이성계의 새로운 대립 세력으로 최영 장군이 떠올랐다. 최영은 폭군 우왕을 찾아가 “저 분은 고려의 왕이시다. 나는 저 분과 함께 반드시 이 나라를 일으킬 것이다”고 다짐했다. 최영은 명나라가 영토를 요구하는 가운데 우왕, 이성계와 함께 사냥을 떠났다.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이는 모두 최영의 계획된 행동이었다. 이 자리에서 최영과 우왕은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이성계가 최영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있을 때 이방원과 분이, 무휼은 몸으로 부딪혀 최영의 계획을 추적했다. 이들은 추적을 거듭한 끝에 최영이 비국사의 지재상인 적룡을 통해 무기를 만들 물소 뿔을 사들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적룡은 이방원에게 최영이 원나라인과 비국사에서 필담을 나눴고, 그 흔적 속에서 ‘압록강’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정도전은 이방지, 연희와 함께 화사단을 추적했고 그 곳에서 최영이 상인을 가장한 원나라 관료와 만났음을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화사단 단주 초영으로부터 ‘초이레’라는 단서를 얻어냈다. ‘초이레’와 ‘압록강’이라는 두 가지 단서가 모인 셈이다. 정도전과 이방원은 이 두 가지 단서를 가지고 최영과 우왕의 목적이 ‘요동 정벌’임을 알아챘다. 오는 8일 방송될 20회에서 요동정벌을 계기로 육룡의 활약이 한층 더 요동칠 전망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中억만장자는 그림 낙찰가 1972억원 어떻게 지불할까?

    中억만장자는 그림 낙찰가 1972억원 어떻게 지불할까?

    최근 중국 미술품 수집가 류이첸이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걸작인 ‘누워있는 나부’를 1억 7040만 달러(약 1972억원)에 낙찰 받아 화제를 모은 가운데, 이 억만장자의 낙찰비용 결제수단이 밝혀져 또 한 번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최근 류이첸의 아내인 왕웨이는 최근 뉴욕타임즈와 한 인터뷰에서 “남편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센츄리언 카드(American Express Centurion Card)로 1년 할부에 걸쳐 낙찰가를 지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만약 선불·현금으로 지불해야 했다면 조금 어려웠을 것 같다. 때문에 남편은 1억 7040만 달러를 1년 할부로 카드결제 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류이첸이 사용할 것으로 알려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센츄리언 카드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VVVIP용 신용카드다. 영화에도 종종 등장할 정도로 ‘고품격 프리미엄 카드’로 알려져 있으며 업계에서는 “이 카드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가입조건이 까다롭다. 특히 이 카드는 자산이나 신용 등급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발급되지 않는다. 자산과 수입은 기본이고, 직업과 거주지, 심지어 대중의 평판까지 심사대상에 올린 뒤 이를 통과해야만 사용 권한이 주어진다. 발급비는 7500달러(약 874만원), 연회비는 2500달러(약 291만원)에 달한다. 류이첸은 이미 지난해에도 이 카드를 이용해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 잔을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 받았다. 당시 낙찰가는 3630만 달러. 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약 2000억에 달하는 현금을 단시간에 조달하기는 어렵다. 류이첸이 이 같은 이유 외에도 미술·예술품 구매 시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이유가 또 있다. 카드 포인트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류이첸이 이번 거래를 통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로부터 받는 포인트로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런던-뉴욕을 무려 733차례 왕복 할 수 있다. 만약 일반석을 이용한다면 2200번이나 왕복할 수 있을 정도의 포인트다. 한편 류이첸은 택시 운전사 출신의 갑부로, 국제 미술시장에서 걸작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컬렉터다. 이번에 구매한 작품은 자신과 부인이 함께 운영하는 상하이의 미술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진=ⓒ AFPBBNews=News1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中 큰손에 최고가 경신하는 명화들

    中 큰손에 최고가 경신하는 명화들

    이탈리아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유화 작품이 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두 번째 최고가를 기록했다. ●1623억 부른 한국인 신홍규씨 불발 모딜리아니의 ‘누워 있는 나부’가 지난 9일 밤(현지시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열띤 응찰 끝에 1억 7040만 5000달러(약 1971억 4154만원·수수료 12% 포함)에 낙찰됐다고 AFP, 로이터통신 등이 10일 보도했다. 예상가인 1억 달러를 훨씬 웃돈 이번 낙찰가는 미술품 경매 사상 2위에 해당한다. 최고가에 낙찰된 회화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이다. 지난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7936만 5000달러에 낙찰됐다. 수집가들끼리 경쟁이 붙으며 호가는 금세 1억 달러를 훌쩍 넘었다. 한국인 수집가 신홍규씨가 1억 4000만 달러(약 1623억원)를 부르자 경매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전화 입찰로 1억 7000만 달러 이상 호가가 나오자 신씨는 고개를 내저으며 작품을 포기했다. 이후 작품의 낙찰자는 중국 억만장자 미술품 수집가로 중국 상하이 룽(龍)미술관 설립자인 류이첸(劉益謙·52) 신리이그룹 회장으로 확인됐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택시 운전기사에서 금융투자가, 화학회사 경영주로 변신한 류 회장의 자산은 포브스 집계 기준(2015년) 14억 달러에 이른다. 그는 부인과 함께 중국 고미술품 경매시장의 ‘큰손’으로 통한다. 지난 3월 600년 된 명나라 시대 불교 경전을 1402만 달러에, 작년에는 명나라 시대 청화백자 술잔을 중국 도자기 경매 사상 최고가인 3600만 달러에 사들여 눈길을 끌었다. ●파리 첫 전시 때 외설 논란도 모딜리아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누워 있는 나부’는 1917~1918년쯤 캔버스에 그린 유화다. 붉은색 소파 위 파란색 쿠션에 누워 있는 전라의 여인을 담았다. 당시로서는 외설적인 작품이었던 까닭에 프랑스 파리에 처음 전시됐을 때부터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절망한 모딜리아니가 1918년 겨울, 이 작품을 포함한 파리 스튜디오의 모든 작품을 영국 시인 오스버트 시트웰 남매에게 100파운드(현재 기준 약 545만원)를 받고 팔아 버린 일화로 유명하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서울광장] 역사 쓰기 과거사 알기/주병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역사 쓰기 과거사 알기/주병철 논설위원

    유명한 역사학자 한 분이 어느 모임에서 참석자들에게 대뜸 6·25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반반이 나왔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북침은 남한이 북한을 쳐들어갔다는 뜻은 아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쳐들어온 걸 남침이라고 표현했고, 북쪽이 남쪽을 침략한 것을 북침이라고 했을 뿐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사례다. 정치권의 이념 논쟁에 역사학계의 이해관계에 따른 셈법, 학교 현장의 주입식 교육의 문제 등이 얽힌 한국사 교과서 논쟁은 이렇게 복잡하다. 하지만 현행 교과서가 편향성을 배제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지만 국정화가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데 상당수 국민들이 동의하고 있는 편이다. 적어도 미래 세대를 위해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대안이 국정화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국정화를 액면 그대로 생각해 보자. 우리의 역사를 왜곡되지 않고 알차고 바르게 기술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국정화만 한 수단도 없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고, 훌륭한 집필진을 확보하는 일은 정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데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교과서와 출판사 중심의 검인정 교과서가 경쟁하면 결과는 뻔하다. 문제는 국정화 추진 의도에 대한 강한 불신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공식 발표한 정부는 다음달 5일 고시를 한 뒤 본격적으로 추진할 태세다. 지금으로선 신뢰와 리더십이 생명인 정부가 쉽게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방향을 정한 뒤 추진하겠다고 하면 하는 게 정부다. 일관성 없는 정책이 더 불신을 초래한다는 걸 정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국정화 추진에 대한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국정화는 곳곳에서 걸림돌을 만날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적어도 두어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 번째는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근현대사 부분을 빼는 것이다. 정말 불가피하다면 극히 일부분에 한해 넣어야 한다. 역사와 과거사는 분명히 구분돼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평가와 판단이 정리된 부분이다. 과거사는 평가와 판단의 대상이다. 그 대상이 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당사자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하지 않는 게 순리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군가가 또 고치려 들 게 뻔하다. 근현대사는 아직 역사로서 영글지 않은 과거사이기 때문에 한국사 교과서에 포함하지 말고 사회과목 등에 넣어 학생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토론하고 배우도록 하면 된다. 논란이 되는 대목은 수능시험에 내지 않으면 될 일이다. 예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에는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정통 사서)로 인정되는 24사서(史書)가 있다. 청(淸)의 건륭제(1735~1795) 때 만든 것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까지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가 망하고 새로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 역시 원사(元史)와 청사고(淸史稿)를 갖고 있지만 정통 사서로 넣지는 않고 있다. 적어도 왕조가 끝나고 200년 가까이 지나지 않으면 정사로 기록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로 치면 조선시대까지가 진짜 역사인 셈이다. 두 번째는 새 교과서 제작 기간이다. 정부는 2017년 3월 새 학기 시작 전까지 새 교과서를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나라 중 하나인 터키만 보더라도 방대한 자료 등을 촘촘히 수집·연구·정리하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터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오롯이 담은 국정 교과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이 정부 임기 내에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내놓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역사는 좌우가 없다. 이를 둘러싸고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달려드는 건 우리밖에 없다. 부끄러운 일이다. 정부가 아무리 잘 만들겠다고 약속해도 역사와 과거사를 구분 짓지 않는 한 국정화는 또 다른 편향성을 놓고 의심과 불신만 증폭시키게 될 거다. 정부가 국정화 추진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을 때 국정화는 추동력을 얻고 역사에 남을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역사를 모독한다는 소릴 들어서는 곤란하다. bcjoo@seoul.co.kr
  • [씨줄날줄] 정화 & 장보고/구본영 논설고문

    정화(鄭和)는 장구한 중국사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의 하나다. 명나라 영락제의 환관 출신 제독인 그는 7차례나 대양 원정(1405∼1433년)에 나섰다. 색목인, 즉 중동계 혈통인 그가 이끈 대선단은 많을 때는 240여척의 배에 승선 인원이 3만명에 육박했다. 선단 중의 일부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에 도달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전해진다. 다만 ‘정화함대’가 동남아~인도~동아프리카를 잇는 바닷길을 연 건 과장 없는 사실(史實)이다. 이를 통해 명은 시쳇말로 ‘자원무역’의 헤게모니를 쥐었다. 하긴 정화보다 앞서 통일신라엔 장보고가 있었다. 장보고 역시 청해진을 설치해 해적을 소탕하면서 갖게 된 제해권을 토대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지 않았던가. 두 인물이 진취적 자세라는 키워드를 공유한 만큼 그들의 몰락 이후 대제국 명이나 신라가 모두 쇠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국가의 부침이 ‘먼바다로 진출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로 갈리는 경우는 세계사에서 비일비재했다. 정화함대 해체 이후 중국의 600여년은 굴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미국 해군대학에서 전쟁사를 강의한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은 그럼 점에 주목했다. 지금은 고전이 된, 1889년 출간한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다. 머핸은 해외 해군기지와 파나마 운하 건설, 하와이 합병 등을 제안해 ‘팍스 아메리카나’의 초석을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의 해양굴기(海洋?起)가 본격화하는가. 마오쩌둥 시대까지 대륙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던 중국이었다. “중국의 영토는 둥사군도, 시사군도, 난사군도를 비롯해 인근의 모든 도서를 포함한다”는 법령을 공포한 덩샤오핑 시대만 해도 은밀히 해양력을 키우는 듯했다. 시진핑 주석의 5세대 지도부는 대놓고 남중국해 제해권을 선포하려는 기세다. 필리핀·베트남 등과 영유권 분쟁 중인 난사군도의 암초에 인공섬 건설을 강행하면서다. ‘섬을 점령하면 주변 바다는 그 나라 차지가 된다’는 머핸 식 전략을 답습하는 모양새다. 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비등점을 향하는 느낌이다. 미국의 이지스구축함 래슨호가 중국 인공섬 주변 12해리 내로 진입하면서다. 중국의 ‘영토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필리핀 등 주변국의 편에 서서 미국이 ‘자유항행권’을 명분으로 벌이는 무력시위다. 여기엔 우리도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다. 난사군도 경유 수송로로 해운 물동량의 30%, 원유 수송량의 90%를 실어 나르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미·중 충돌 국면에서 우리의 외교적 입지가 넓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엔 “남중국해 분쟁이 국제 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청와대 관계자)는 어정쩡한 자세가 불가피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장보고와 같은 혜안을 갖고 우리의 해양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한국, 중국, 이탈리아 합작 ‘한복입은 남자’…오픈세트장에 광주 패밀리랜드 낙점!

    한국, 중국, 이탈리아 합작 ‘한복입은 남자’…오픈세트장에 광주 패밀리랜드 낙점!

    한국과 중국, 이탈리아 3국 합작으로 제작되는 블록버스터 ‘한복 입은 남자’의 국내 오픈세트장이 광주 패밀리랜드에 들어설 전망이다. ‘한복 입은 남자’는 700여년 동안 역사속에 봉인된 장영실의 행적을 추적한 영화. 투자금액만 200억 원 이상 투입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급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어서 영화계는 물론 제작을 유치하려는 각 지자체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제작사인 (주)현진영화사(대표 이순열)에 따르면 오픈세트장의 최적지로 ‘문화도시’ 광주의 이미지가 투영된 패밀리랜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9월 이후 수 차례 광주를 방문한 제작진은 이달 14일 광주시청을 방문, 윤장현 광주시장으로부터 오픈세트 설립에 관한 전폭적인 지원의사를 확인해 영화제작에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현진영화사 이순열 대표는 “지자체 5~6곳이 영화제작 유치에 경합을 벌인 가운데 광주의 제작환경이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했다”며, “장영실을 둘러싼 우리 역사 최고의 미스테리를 해체하는 작업은 전쟁영웅보다 과학영웅에 주목하는 우리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한복 입은 남자’는 지난해 말 이후 베스트셀러로 부상한 동명의 원작소설을 뼈대로 하고 있다. 위대한 발명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가마를 잘못 설계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 장영실의 이후 일대기에 주목했다. 이 대표는 “장영실이 조선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중국 명나라 해상왕 정화의 도움을 받는 스토리를 전개, 동서양 ‘빛의 도시’로 알려진 광주~피렌체간 제 2의 실크로드를 구축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을 거쳐 이탈리아 피렌체로 건너간 영화 속 장영실은 로마교황청과 대립하는 메디치 가문 편에 서서 다연발 로켓 제작에 도움을 줘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는 한편, 중세 천재 레오나르도와 그의 제자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 되는 험난한 오디세이를 경험할 예정이다. 관객 1천만 명을 겨냥한 대작으로 제작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밝힌 현진영화사 측은 한국과 중국 등 3국의 최상급 배우들을 캐스팅할 예정이다. 또, 원작자이자 KBS PD출신으로 영화 ‘마파도 2’ ‘돈텔파파’ 등을 만든 이상훈씨가 메가폰을 잡는다. 한편 제작사 측은 지난달 한국농어촌공사 조성광 광주전남본부장을 면담한 데 이어 이상무 사장과 극중 정화함대의 대형 범선을 띄울 후보지 광주 패밀리랜드 인근 저수지인 ‘대야제’를 방문, 수면사용허가에 관한 법적검토와 추가투자 등 후속조치를 이른 시일내에 마무리하기로 했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한복 입은 남자’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광주 영상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흥행수입, 국제교류를 통한 광주의 이미지 제고 등 천문학적인 직간접 경제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글로벌 시대] 중국의 꿈,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라/민재홍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글로벌 시대] 중국의 꿈,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라/민재홍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중국은 일찍이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개척해 동서양 문명을 연결하고 활발한 경제·문화 교류에 기여해 왔다. BC 139년 한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張騫)은 100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시안(西安)을 출발해 미지의 세계 서역으로 떠났다. 무려 13년 동안 생사를 넘는 사투 끝에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건설했다. 명나라 정화(鄭和)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중국 함대를 이끌고 해상 대원정을 통해 바닷길을 열었다. 중국 남해와 북인도양의 연안지구, 아랍 반도와 아프리카 동쪽 연안까지 30여개국을 탐험했다. 개빈 멘지스의 저서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는 콜럼버스보다 앞서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으로 기술될 정도로 당시 중국의 해상 장악력은 대단했다. 이러한 역사와 기반을 바탕으로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기존의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확대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인 일대(一帶)와 동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인 일로(一路)를 주창하고 나섰다. 중국에서 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육로와 해로로 연결하고, 연결선상의 국가들과 경제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으로 불릴 수 있는 일대일로(One Belt and One Road)는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도 맥을 같이한다. 박 대통령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한반도 종단철도, 시베리아 횡단철도, 중국 횡단철도 등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철도망 구축을 제안했다. 따라서 중국의 일대일로와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전략적 목표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상호 간 연계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중국은 특히 세계의 바닷길과 해상 영역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했던가. 현재 전 세계 물류의 약 90%가 바다를 통해 이동하고, 주요 해상 거점 기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계가 각축을 벌이는 ‘대항해 시대’에 중국은 해상 영토 확보와 전략적 군사기지 구축, 대규모 운하 건설 등을 통해 21세기 중화(中華) 해양 패권을 드러내고 있다. 말레이 반도를 관통해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끄라 운하가 완공되면 중국은 중동과 아프리카 북동부까지 쉽게 진출하게 될 것이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니카라과 운하에는 중국 자본을 투입해 100년 동안 운영권을 확보했다. 중국은 또한 남쪽 바다인 남중국해 영토 지배 강화에도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난사군도 일대 암초와 산호초를 매립해 인공섬을 건설하고 활주로 등 군사용 시설을 지어 남태평양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이 강력 견제에 나서자 시진핑은 이번 미국 방문 중에 남중국해 섬들은 중국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남중국해에 건설된 인공섬들의 군사화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한발 후퇴하긴 했다.앞으로 중국은 이러한 정책이 외국의 우수 기술과 중국의 자본이 융합돼 상호 시너지를 거두게 되고, 세계 글로벌 경제에도 도약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순수한 의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중국이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선상의 국가들이 함께 공생하는 개념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패권 강화가 아닌 중국이 외교에서 추구하는 가치인 친(親·친선), 성(誠·성실), 혜(惠·혜택), 용(容·포용)의 이념에 맞추어 주변국과 공동 구축하고 성과도 공유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다.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가 서울과 개성을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혜음령을 지나는 의주대로가 한양에서 개성은 물론 평양, 의주를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삼국시대 한강과 임진강 일대는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려 각축을 벌이던 당시 임진강을 넘나드는 통로는 오늘날의 적성·연천 일대였다. 임진강에서 갈수기에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최남단 지역이다. 옛 장단 땅인 연쳔 장남면에 고구려의 호로고루, 적성에 신라의 칠중성 등 국방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남북 통행로는 당연히 수도인 개경, 즉 개성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고려는 장단대로에 위치해 갈수록 규모가 켜져가던 양주를 문종 21년(1067)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킨다. 이후 남경의 중심이 한양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거리를 돌아야 하는 장단길보다 개성에서 임진나루를 거쳐 곧바로 남하하는 ‘의주대로’를 자연스럽게 선호하게 된다.  혜음령은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흔히 용미리공동묘지로 불리는 서울시립용미리공원묘지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의주대로는 지금 고양시와 파주시의 협력으로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비되어 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는 걸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혜음령과 광탄면 사무소 사이에는 혜음원(惠陰院)터와 용미리석불입상이 있어 의주대로의 역사를 알려준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예종 17년(1122) 세운 국립 숙박 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한자로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됐고, 동서 104m, 남북 106m에 걸친 9개 석단의 27개 건물터와 연못터를 비롯한 놀라운 규모의 유구가 확인됐다.  혜음원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장지산 기슭에 높이 17.4m의 우람한 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구로 이루어진 용미리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불상에 남아있는 명문을 토대로 성화 7년(1471) 조성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헌종의 연호다. 명문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도 줄줄이 면면도 적혀있으니 석불입상의 조성과 연관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석불입상에 얽힌 구전설화와 혜음사 창건 배경을 담은 김부식의 글을 찬찬이 읽다보면 석불입상의 고려시대 조성설(說)에 다시 마음이 기운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는데,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궁주의 말을 들은 왕이 그들이 있다는 곳을 찾아가게 했더니 과연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불공을 드렸더니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혜음사 신창기’(惠陰寺 新創記)에서 이 길을 두고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 범과 이리가 떼 지어 모이고, 도둑의 무리도 숨기 쉬워 통행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해 (혜음령을) 지나가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자가 한해 수백 명’이라고 탄식했다. 이런 실상을 파악한 신하가 ‘허물어진 절을 새로 지어 중을 모으고, 그 옆에 집을 지어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킨다면 짐승과 도둑의 해는 절로 멀어져 통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진언하고, 왕이 그대로 따르자 ‘무서운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용미리석불입상 창건 설화와 혜음사 신창기는 의주대로 주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산도적을 토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빈민의 배고픔을 막아 도둑의 길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 사고는 오늘날에도 배울 만하다.  석불입상의 창건 설화는 상징성의 강한 설화의 특성상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신창기 방식의 사고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미리석불입상은 의주대로의 안전을 위해 비슷한 시기 혜음원과 일종의 세트로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일시에 깨달을 것을 미륵에 기원했다’는 명문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창건설(說)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해외여행 | [Surprising China] 산시성- 놀라운 중국 역사의 중심지 산시성陝西省

    해외여행 | [Surprising China] 산시성- 놀라운 중국 역사의 중심지 산시성陝西省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던 수천명의 병사들. 그들은 지금 누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빙마용(병마용, 兵馬俑)의 거대한 군대에서 시작한 놀라움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품은 화칭츠(화청지, 华清), 중국 5악 중 하나로 꼽히는 화산華山으로 이어진다. 중국 지도에서 한가운데 있는 산시성(섬서성, 陝西省). 빙마용만 보고 돌아오면 아쉽다. 산시성 구석구석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찾아보자. 세계 4대 역사 도시 중 하나인 시안 중국의 역사를 느끼기 위해 꼭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시안서안, 西安으로 떠나야 한다.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은 오랫동안 중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도를 봐도 산시성은 중국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추흥팔수秋興八首’에서 ‘진중자고제왕주(진중은 예로부터 제왕들의 터였다네, 秦中自古帝王州’)라고 읊었다. 중국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룩한 진나라뿐만이 아니다. 13개 왕조를 거치는 1,180여 년 동안 시안은 중국의 수도였다. 시안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였다. 중국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도 시안이고 중국 8개 불교 종파 중 6개 종파가 시작된 곳도 시안이다. 뿐만 아니라 시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이기도 했다.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을 수출했고 이 길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아테네와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역사 도시로 꼽히는 시안은 한때 인구 100만명을 자랑하는 국제도시이기도 했으며 문화와 종교가 섞이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던 용광로였고 사상과 문화를 중국 곳곳으로 퍼트린 통로였다. 당나라 때 시안은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뜻의 ‘장안長安’으로 불렸다가 수도를 비롯해 국가 경제·문화 중심이 동부 베이징으로 이동한 이후 서쪽이 편안하라는 의미에서 ‘시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방궁이나 대명궁같이 황제의 권력으로 건축이 가능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사라졌지만 친숙한 중국 여행의 상징인 빙마용(병마용, 兵馬俑)과 무용(舞俑, 무희 등을 형상화한 인형)을 만날 수 있는 유적지들이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 온 빙마용 시안 여행의 스타는 뭐니뭐니 해도 빙마용이다. 빙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를 말하는 것으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빙마용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수천년의 기나긴 침묵을 끝내고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 빙마용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무려 6,000여 개가 넘는 사람과 말의 토우가 그곳에 매장되어 있었다. 빙마용은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 없고 핏줄이나 근육 모양, 표정 등까지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어 놀라움을 준다. 빙마용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있는데, 궁전과 성의 문 위치도 동일하다. 시안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빙마용 갱은 3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져 있다. 1호 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인데 규모가 제일 크다. 2호 갱에는 1,300개의 전사와 말이 있으며 다섯명의 병사는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빙마용들은 서 있는 자세지만 화살을 쏘는 사수도 있고 갑옷을 입은 장군도 있다. 사수는 마치 소총을 쏘듯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편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활쏘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원래 중앙, 또는 오른쪽에 틀어 올리는 상투를 왼쪽으로 튼 것도 재미있다. 진시황 사후 3년째 되던 해, 진시황이 초나라를 짓밟았을 때 이에 대한 원한으로 항우가 빙마용 갱에 불을 질렀는데 석 달이 넘도록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하니 그 규모는 상상에 맡긴다. 이때 전리품으로 병마용 병사들이 갖고 있던 창과 방패를 가져가는 바람에 병마용 갱의 병사들은 모두 무장해제된 상태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무대, 화칭츠 빙마용 갱에서 1.5km 떨어진 곳에는 진시황릉이 있다. 진시황릉은 높이 79m, 동서 475m, 남북 384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으로 능을 만드는 데 70만명이 투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막상 진시황릉 앞에 서면 무덤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산이라는 느낌이 든다. 역사서 <사기史記>를 보면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에 대해 ‘지상의 궁전을 본떠 만들었으며 대량의 수은을 사용해 황허(황하, 黄河)와 양쯔강(양자강, 揚子江)을 조성하고 매일 진시황의 관이 중국 전역을 주유할 수 있도록 설비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밖에서 보기에는 산이지만 무덤 안에는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던 것이다. 역대 황제들의 별장이었던 화칭츠도 시안 여행에서 결코 건너뛰면 안 된다. 화칭츠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로 유명해 역대 제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내부로 들어가면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하이탕탕(해당탕, 海棠湯)을 비롯해 롄화탕(연화탕, 蓮華湯), 타이즈탕(태자탕, 太子汤) 등 여러 유적들이 과거를 상상하게 만든다. 화칭츠 안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은 양귀비가 목욕을 막 끝내고 나오는 동상 앞. 비록 동상이지만 양귀비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이들로 북적인다. 저녁이 되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다룬 바이쥐이(백거이, 白居易)의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현대판 무용으로 연출한 공연이 펼쳐진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애절한 음악과 함께 공연을 보다 보면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성벽과 종루, 다안타, 베이린박물관 등 역사의 보고 시안 시내에도 둘러볼 곳들이 많다. 시안 성벽과 다안타(대안탑, 大雁塔), 산시성박물관, 베이린(비림, 碑林)박물관 등 시안 시내를 돌아보는 데 적어도 며칠이 필요하다. 시안에서 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시안 성벽 위에서 자전거 타기다. 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시안 성벽은 14세기 명나라 초기 홍무 때 축성한 것으로, 중국 성벽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성벽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높이 12m에 두께는 12~18m, 전체 둘레 13.7km로 4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각 문마다 드나드는 이들이 달랐는데, 그중 남문은 황제만 다닐 수 있었다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이 들어오는 문,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한 문이었다.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시안 중심에는 중러우(종루, 鐘樓)와 구러우(고루, 鼓楼)가 있다. 중러우와 구러우는 명나라 때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과거에는 시간을 알려 주는 관직에 있던 이만 오를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중러우와 구러우 사이에 있는 광장은 젊은이와 여행자들에게 만남의 광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밤에는 시안 시내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으며 근처에는 이슬람 거리가 있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안타는 츠언사(자은사, 慈恩寺) 경내에 있는 전탑으로 당나라때부터 과거 급제한 이들이 이 탑에 올라가 이름을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다안타는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7층 높이다. 중국 5악 중 하나인 화산 시안에서 동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시엔양(함양, 咸陽)에는 진시황릉과 분위기가 다른 시엔양릉이 자리하고 있다. 시엔양은 진시황이 다스린 진나라의 황궁이 위치한 곳으로 관중평야에서도 웨이하(위하, 渭河)의 하류 지역으로 리산(여산, 驪山)을 끼고 있는 풍수지리가 좋은 땅이다. 시엔양릉은 한무제의 아버지인 한경제의 무덤으로 함양국제공항과 시안 사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발견되었다. 시엔양릉에서 출품된 도자기 형태의 인형들은 빙마용의 그것과는 다르다. 50~60cm의 자그마한 크기에 팔도 없이 앙상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쯔진청(자금성, 紫禁城)과 경복궁을 크기만으로 비교할 수 없듯이 시엔양릉의 도용 역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시안에서 북쪽으로 120km 거리에 있는 화산을 찾아보자. 중국 오악 중 서악에 속하는 화산은 기암괴석이 많아 무척 험하다. 평지라고는 거의 없고 아슬아슬한 절벽이 이어져 있다. 화산은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작품에 나오는 화산파의 배경지로 중국 무협지 주인공처럼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화산은 옥녀봉을 비롯해 5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봉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travel info Shanxi Airline 대한항공과 에어차이나 등 여러 항공사에서 인천-시안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5분. FOOD 후이족회족, 回族 거리에 가면 두건을 두른 후이족들이 곳곳에서 특색 있는 길거리 음식과 국수를 팔고 있다. 양꼬치와 해산물 꼬치를 비롯해 다양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 SPOTS 진시황릉과 시엔양릉 외에도 산시성 곳곳에는 수많은 황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는 5대 황제인 한무제의 묘 ‘무릉’이 있다. 한무제는 실크로드 개척자로, 무릉 근처에는 한무제 때 장수 곽거병의 묘도 있다. 또 시안에서 80km 떨어진 곳에는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건릉’도 자리하고 있어, 중국 역대 황제들의 흔적을 밟고 싶은 이라면 능을 테마로 산시성을 여행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museum 역사에 관심많은 당신에게 산시성 역사박물관은 중국의 3,000년 고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36만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 궁전양식의 외관에 3개의 전시실이 자리했다. 옛 중국의 도서관 시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박물관 중 하나가 베이린박물관이다. 베이린박물관은 시안에서 출토된 비문을 모아 놓은 박물관으로 유명 서예가들이 새긴 수천개의 비석이 나무숲처럼 빼곡히 모여 있다. 비석은 종이가 없던 시절부터 기록하기 좋은 재료였던 것을 생각하면, 베이린박물관은 옛 중국의 도서관이나 마찬가지다. 베이린박물관 주변에는 시안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문서거리가 있다. 서책과 문방사우를 파는 시안의 명물거리다.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채지형 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트래비CB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서울지국 www.visitchina.or.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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