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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노정객의 훈수/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노정객의 훈수/임병선 논설위원

    “지도자는 원래 수재형보다는 약간 건달기가 있어야 되더라고요. 공동체를 휘어잡고 하려면 좀 건들건들해야지.” 청와대 수석과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유인태(73) 전 의원의 말을 듣고 어이없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편해질 줄 알았는데/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더 많이 이해해야 하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최정재 시인의 깨달음에 한참 못 미친다. 잊을 만하면 한마디 보태는 김종인(81)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도 시간이 지혜와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년 3월 대선 투표까지 한참 남아 국민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야당이 대선에 승리할 확률이 60~70%”라고 말해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오죽했으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마저 “김 전 위원장께 전화를 드려 오만해 보이는 발언을 자제하시라고 말씀드릴 것”이라고 했겠는가. 집권여당의 ‘큰어른’을 자처하는 이해찬(69) 전 대표도 못지않았다. 진보 집권이 20년 갈 것이라 큰소리를 친 게 불과 3년 전인 2018년 8월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무색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우리 정치문화에 일그러진 구석이 많지만 그중 하나가 어른의 부재다. 모두 1987년 체제와 3김 시대의 종언을 얘기하지만 그를 대체할 것을 충실히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설픈 흉내를 내는 사람만 많아졌다. 바둑에 몰두하면 판 전체를 읽기 어렵다. 이런 때 조언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친 훈수는 분란을 부채질한다. 태종실록을 보면 권희달이란 벼슬아치가 내기 바둑을 두던 상관 조영무의 심기를 건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보다 못한 조영무가 관직을 박탈하니 권희달이 관대를 상관 앞에 집어던지고는 승추부에 나쁜 말을 넣었다. 임금이 싸고 돌아 매번 봐주니 권희달은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중국 사기에도 송나라 때 학식과 인품이 깊은 사홍미가 내기 바둑 훈수꾼에 분개해 판을 엎은 뒤 저주를 퍼붓고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반면 국왕의 체면과 나라의 위신을 살린 훈수도 있었다. 선조가 이항복의 건의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더니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모르는 선조에게 무람없게도 대국을 청했다. 유성룡이 수락하라고 하더니 이여송의 등 뒤에서 양산을 펼쳐 들고 대국 모양대로 구멍을 뚫었다. 선조는 그대로 돌을 놓았고, 이여송은 결국 돌을 던지고는 선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유권자를 깔보는 듯한 태도에 스스로를 플레이어로 착각하는구나 의심케 하는 언행도 있다. 그렇잖아도 대선 판도가 어지러운데 노정객마저 판을 흔들면 되겠는가.
  • [금요칼럼] 진령군을 아십니까/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진령군을 아십니까/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근현대사를 잘 아는 분이라면 진령군(眞靈君)이라 불린 무당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이씨 성을 가진 무녀로, 이야기는 임오군란(고종 19년, 1882)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해 불안을 떨치지 못하였는데, 그때 한 무녀가 찾아갔다. 황후는 무녀의 신통력을 확신하고 도성으로 데려왔다. 이후 황후는 몸이 불편할 때마다 이 무녀를 불렀고, 그러면 병세가 사라졌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1권). 고종 20년, 무녀는 자신의 신통한 정체성을 주장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을 구원한 관우 장군의 딸이라면서, 부디 관우를 섬기게 관왕묘(關王廟)를 지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황후는 북악산 아래 숭동(명륜동1가)에 관왕묘를 새로 짓고 무녀에게 맡겼다. 그때부터 무녀는 진령군으로 불렸다(정교, ‘대한계년사’, 권1). 무녀가 궁중을 마음대로 들락거린 것은 철종 때부터였다. 이를 망국의 조짐으로 보았던 흥선대원군은 집권하기가 무섭게 단호한 조치를 명령하였다. 도성 안의 무녀를 몽땅 쫓아낸 거였다. 그러나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황후는, 무녀들을 다시 대궐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바람에 도성 안 어디서나 굿하는 소리가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별건곤’, 제15호 1928년 8월호, ‘이십세기 대복마전…’). 국왕 내외가 진령군에게 의지하자 출세를 꾀하는 많은 사람이 진령군에게 붙었다. 충청도 영동의 이용직은 그에게 l00만냥을 바치고 경상도 관찰사가 됐다. 또 경상도 김해 출신으로 법부대신까지 지낸 이유인도 진령군을 배경으로 삼아 출세길을 달렸다. 이런 사실은 국가의 공식 기록에도 나와 있고(실록, 고종 44년 1월 21일), 동학 농민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증언자 전두형, 정리자 신영우, ‘다시 피는 녹두꽃’). 이유인은 진령군의 수양아들로서 내연관계였다고도 한다(‘매천야록’, 1권). 어리석게도 고종은 진령군을 신임해 국가의 길흉을 점쳤다. 무녀의 말 한마디에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형편이었다. 이에 조정 대신들까지 몰래 진령군에게 아부하였다. 그들은 아내를 보내 진령군과 자매의 연을 맺었다. 조병식, 윤영신 및 정태호 등은 아예 진령군의 수양아들이 되었다(‘매천야록’, 1권). 이처럼 고관대작이 모두 진령군을 찾아가 아부하였다(‘개벽’, 제48호, 1924년 6월호, ‘경성의 미신굴’). 구한말 신문들도 당시의 황당한 사정을 개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읽어 보면 “진령군이 돈을 던져주면 (대신들이란 사람들이) 그 발아래 조아리며 부디 저희의 자리를 지켜 달라며 매달렸다”고 한다(1908년 4월 26일, 필자 번역). 이런 판국이라서 무지한 진령군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누구는 벼슬이 끊기고 귀양도 갔다. 이 무녀가 어느 날 국왕에게 경고하기를, 관운장(관우)은 여포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여씨 성을 가진 여규형 같은 이를 멀리하라고 하였다(매천야록, 1권). 여포가 관우를 살해한 것도 사실이 아닌 데다 19세기 조선의 여규형이 관우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고종은 무녀의 말을 믿고 여규형을 번번이 못살게 굴었으니, 정말 어리석은 군주였다. 강직한 선비들은 진령군을 쫓아내려고 별렀으나 고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녀의 아들 김창렬은 벼슬길에 올랐고, 무녀의 손녀사위 이한영은 법부 협판 등 요직을 두루 지내며 많은 비리를 저질렀다(‘통감부문서’, 8권). 명성황후도 진령군도 세상을 뜬 지 오래였으나, 무녀의 권세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셈이다.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어느 후보가 정체불명의 술사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마침 박근혜 정권이 사이비종교 세력에게 국정을 맡긴 끝에 탄핵당한 전사가 있는지라, 시민들의 걱정은 쉬 가시지 않을 것 같다.
  • 中 “한복, 명나라 의상 표절” 억지 주장... 서경덕 교수 “한심”

    中 “한복, 명나라 의상 표절” 억지 주장... 서경덕 교수 “한심”

    중국 네티즌들이 한복이 명나라 의상을 표절했다고 억지 주장을 부리자, 이에 대해 서경덕 교수가 “한심스럽다”고 비판했다. 23일 서 교수는 SNS를 통해 “중국 누리꾼들이 SBS 드라마 ‘홍천기’ 속 의상과 소품 등이 중국 문화를 표절했다고 주장을 펼치고 있다. 참 한심스럽다”고 말했다. 중국 네티즌들은 해당 드라마의 주인공인 배우 김유정이 입은 한복이 명나라 한복을 표절했고, 의상과 소품 모두 중국 드라마 ‘유리미인살’을 그대로 베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서 교수는 “현재 한국의 전통문화와 대중문화가 세계인들에게 주목받으면서 중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여기서 드러나는 잘못된 애국주의의 발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세계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게 되면서 예전에는 서양 사람들이 아시아 문화의 중심지를 중국으로 인식했다면 이제는 한국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중국 누리꾼들은 한류가 정말로 두려운 모양”이라고 짚었다. 서 교수는 “이럴수록 우리는 감정적인 대응이 아닌, 중국의 동북공정을 ‘역이용’ 해야만 한다”며 “이번 기회에 오히려 한복을 세계에 당당히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 [책꽂이]

    [책꽂이]

    대운하 시대 1415~1784(조영헌 지음, 민음사 펴냄) 중국 근세사 연구자인 저자가 15~18세기 중국이 1800㎞ 길이의 대운하를 통해 물자·인력·정보를 실어 나르며 번영을 누렸던 역사를 조명한다.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기에 앞서 대운하를 정비했지만, 대운하는 중국의 ‘바다 공포증’을 강화해 제국의 쇠퇴를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된다. 464쪽. 2만 8000원.고래가 가는 곳(리베카 긱스 지음, 배동근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호주 출신 수필가의 시각으로 지구 최대의 생물인 고래의 생태와 역사·문화 이야기를 담았다. 고래의 진화적 기원과 인류와의 공생의 역사, 고래가 대기에 미치는 영향 등을 설명한다. 죽은 고래의 몸은 심해에서 풍요로운 생태계가 된다는 의미에서 ‘해저의 오아시스’로 불린다. 496쪽. 1만 9800원.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장화 외 10인 지음, 글항아리 펴냄) 가족이나 친척에게 성폭력을 당한 아픔이 있는 여성 11명이 자신의 트라우마와 치유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저자들은 친족 성폭력에 따른 수면장애, 조울증 등을 겪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생존자들끼리 서로 응원하자고 격려한다. 256쪽. 1만 5000원.어느 대학 출신이세요?(제정임·곽영신 엮음, 오월의봄 펴냄) 언론학 연구자인 저자들이 지방대 재학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비하의 대상이 된 지방대의 실태와 과잉 능력주의가 낳은 차별의 피라미드를 파헤친다. 대학 서열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화된 점에 주목해 학력과 학벌이 차별의 도구가 되지 않는 사회를 모색한다. 296쪽. 1만 6000원.피트니스의 시대(위르겐 마르추카트 지음, 류동수 옮김, 호밀밭 펴냄) 독일 역사학자의 눈으로 헬스, 필라테스, 스쿼시 등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신체를 가꾸는 현대인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했다. 몸의 역사는 ‘인간이 제 몸을 통해 사회와 관계를 맺는 과정’이라고 규정한 저자는 뚱뚱한 몸이 어떻게 가난과 실패의 상징이 됐는지 보여 준다. 424쪽. 2만원.달콤한 복수 주식회사(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 스웨덴 베스트셀러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신작 장편소설. 교활하고 위선적인 미술품 거래인 빅토르가 버린 전 부인 옌뉘와 빅토르의 사생아 케빈이 빅토르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복수 대행업이라는 생소한 발상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524쪽. 1만 5800원.
  • 질병·기후의 경고… 지구적 연대로 풀어라

    질병·기후의 경고… 지구적 연대로 풀어라

    지리·기술·제도, 인류 발전 동력 英 산업혁명·美 세계 패권 주도 中 근대 쇄국 정책으로 몰락의 길 세계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물결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어딘가 밋밋하다.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긴 역사의 흐름과 그 이유를 종합적인 이론으로 해석하는 시도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다. 가장 유명한 결과물이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2005)일 것이다. 그는 1만 3000년 역사를 훑으며, 유라시아 민족과 다른 민족들 간의 운명이 달라지게 만든 원인을 무기, 병균, 금속에서 찾았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5)를 통해 10만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종족을 제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된 원인을 파헤쳤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지난 7만년 인류 역사를 열쇠말 3개로 설명한다. 인류가 이 기간 일곱 번의 변곡점을 겪었으며, 발전과 쇠퇴, 협력과 갈등의 흐름에 지리, 기술, 제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곱 번의 시대는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기마 시대, 고전 시대, 해양 시대, 산업 시대, 디지털 시대다. 그리고 지리, 기술, 제도는 상호 의존적으로 연계하며 인류 발전의 동력이 됐다. 예컨대 산업 시대 가장 중요한 발명품인 석탄 증기기관을 떠올려 보자. 18세기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발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국에 석탄이 많았고, 지식재산권을 보호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세계 시장도 매력적이었다. 이어 세계를 지배한 미국은 혼자 동떨어져 있어 예외적인 사례처럼 보인다. 실제로 1820년 전까지 미국은 가난한 데다 인구밀도도 낮았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이 전 세계를 이으면서 물꼬가 트였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온대 기후,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 배가 다닐 수 있는 거대한 하천, 긴 해안선, 엄청난 광물 및 에너지 매장량 등을 찾을 수 있다. 세계화에 대한 근시안적 결정을 내린 중국이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15세기 중반의 명나라는 환관 정화의 해양 원정으로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동부까지 활동 지역을 넓혔다. 당시 해군력과 항해술이 유럽을 능가했지만, 원정에 드는 경비, 유교 이데올로기, 북방 세력의 위협 등을 이유로 국가 경영 방침을 급작스럽게 반무역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영국과의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하며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저자는 지금의 디지털 시대가 막대한 경제적 성장을 이뤘지만, 세 가지 관점에서는 실패라고 말한다. 고숙련 노동자와 저숙련 노동자 간 격차가 커지면서 불공정이 심화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환경오염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고 있다. 저자는 특히 환경오염에 대해 “인류가 막대한 부를 누리면서도 지구 환경에 미칠 영향을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국가 간 갈등도 위험 요소다. 지정학적인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면서 미국과 중국, 그 외 여러 지역에서 불안감이 높아진다. 저자는 앞서 ‘빈곤의 종말’(2006), ‘지속 가능한 발전의 시대’(2015)에 이어 전 지구적인 연대를 강조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모두 세계적”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다. 질병, 정복, 전쟁, 재정 위기 등 지금 위협을 이해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게 바로 우리의 과업이라고 강조한다. ‘총, 균, 쇠’나 ‘사피엔스’가 재밌었다면 이 책 역시 그럴듯하다. 인류의 역사를 3개의 키워드로 엮어 냈고,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대유행 앞에서 저자의 경고는 다시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상기하게 한다. 저자의 명성을 제쳐 놓고라도, 일독을 권한다.
  • 제자와 茶맹세 아직도 그윽… 민초의 한 머금은 길따라 뚜벅뚜벅

    제자와 茶맹세 아직도 그윽… 민초의 한 머금은 길따라 뚜벅뚜벅

    올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면서,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극중 ‘강진 선생’으로 불리는 다산(류승룡 분)의 학자적, 철학자적 모습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대 세상을 호령하던 고관대작(형조참의) 자리에 있다가, 머나먼 전남 강진 땅에 유배를 와 묵묵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정약용의 인품은 주인공 정약전(설경구 분)의 극중 비중에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대선을 앞둔 최근엔 소설 ‘대통령 정약용’이 눈길을 끌고 있다. 타임슬립을 통해 현대로 온 다산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유쾌한 상상을 담았다. 대통령 다산이 추진한다는 ‘실학21’의 바탕이 된 1표2서(‘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저술한 땅, 강진을 다시 돌아보니 그동안 보고 알았던 것보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역사상 한반도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다산은 그야말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실학을 주도적으로 연구했으며 행정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법학과 법의학을 두루 전공한 법률가였다. 또한 의학과 지리학, 건축학에 통달한 과학자요, 발명가였다. 게다가 언어학자, 아동 교육자, 걸출한 시인에다 차 전문가, 동서양사를 넘나드는 역사 철학 이론가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조선은 만사‘다’통이었다. 다산을 거치면 안 될 게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다빈치처럼. 아, 공교롭게도 다산과 다빈치, 둘 다 이름 첫 자에 ‘다’자가 들어간다. 마침 다빈치도 유배는 아니지만 1516년 고향을 떠나 프랑스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궁에서 살며 ‘모나리자’ 등 역작을 남겼다. 그런 다산이 강진에 내려왔다. 조용한 강진에 유배를 오는 바람에 그의 눈부신 업적이 꽃을 피웠다고 하는 것도 맞겠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저서와 서간, 일화, 대한민국 차문화가 탄생했다. 당시 조선의 유형(流刑)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다. 죄의 경중에 맞춰 2000리, 2500리, 3000리 등으로 올려가며 유배를 보내는 거다. 1리가 400m쯤이니 1000리면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전남 완도까지도 갈 수 있다. 조선에선 이런 거리가 나올 수 없는 터라 일부러 여러 지역을 거치며 행로를 늘렸다. 세종이 ‘실정에 맞게’ 600, 750, 900리로 조정하기 전까지 1년 가까이 돌고도는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는 많은 것을 남겼다. 깡시골인 유배지로 한양의 높은 지식과 문화 산업이 수혈됐다.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때 이름난 관직자는 대부분 유배를 다녀왔을 만큼 유배는 ‘일상’이었다. 정조는 창덕궁 부용정에 인공 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하들과 시 짓기 내기를 하다가 ‘잠시 쉬는’ 벌칙으로 인공 섬에 유형을 보내기도 했다. 블루마블 게임에서 ‘무인도’ 같은 의미다. 그만큼 유형은 고급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는 뜻이다. 시에 능한 다산이 ‘인공 섬’에 유배를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산을 친애하던 정조가 승하한 후, 정말 강진 땅으로 기나긴 유형을 떠나게 됐다. 그나마 강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축에 속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형을 가기도, 여행하기도 딱 적당한 거리다. 프로야구의 옛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는 2군 구장을 강진에 뒀는데 당시 1군 선수가 2군에 내려가면 “유배간다”고 자조했다. 당시 몇몇 선수들은 강진에서 2군 생활을 경험하며 다산의 후예가 됐다.다산이 처음 도착한 곳이 강진읍의 사의재다. 다산의 인품을 알아본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 주모의 호의로 여기서 4년간 생활했다. 다산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생각과 외모, 말, 움직임을 네(四) 가지 덕목으로 삼아 마땅히(宜) 바로잡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의 일기에 따르면 1803년 겨울의 일이다. 초가 주막이던 본래 사의재 건물은 사라졌지만 2007년 강진군청은 이를 복원해 한옥체험 숙소, 식당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남도 강진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의재는 아욱국이 맛있기로 소문났다. 다행히 유배지 주위에 가시나무를 심어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는 ‘위리안치’는 아니었다. ‘강진 선생’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다 47세이던 1808년 봄에 귤동리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의 외가 쪽 집안인 해남 윤씨 윤단과 윤규로의 선처 덕분이었다.(해남 윤씨 윤선도는 무려 25년을 유배지에서 생을 보낸 ‘유배의 왕’이다.) 다산은 산정 초당을 고쳐 다산초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윤규로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가르쳤다. 다산은 18년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에서 약 11년을 머물며 다양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권에 달한다.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 측량, 건축 등 모든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총망라하고 있다. 애초의 초당은 무너지고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 초당을 다시 지었다. 다만 원래 초당 건물이 아니라 목조 기와건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바위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글자 ‘丁石’(정석)이 새겨져 있으며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켠에는 ‘약천’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지가 있다. 초당에 관어재(觀魚齋)란 현판이 따로 있는 것으로 봐, 연지에 잉어를 키웠을 것으로 유추된다.초당 뒤 가파른 길은 만덕산 백련사로 이어진다. 꿀럭꿀럭한 산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동백숲으로 유명한 고찰 백련사로 갈 수 있다. 이 길이 ‘사색의 길’이다. 다산과 백련사 혜장선사의 만남이 이뤄진 길이다. 다산은 차와 바다를 찾아 백련사로 향했고 혜장은 스승과 책을 찾아 초당을 오갔다. 유배 와 제자를 가르치며 산중칩거하던 다산이 다른 철학(불교)을 통해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대의 학승 혜장 덕분일 수도 있다. 산중 차향은 그렇게 피어나 학문으로 승화됐다.다산은 강진의 아름다운 산(만덕산, 월출산)과 강(탐진강), 바다(강진만) 등 자연을 사랑했다. 특히 월출산 옥판봉을 바라보는 백운동 원림과 그 인근에서 생산되는 야생차를 각별히 좋아했다. 월출산의 남쪽 월남(베트남이 아니다) 마을에 이르면 다산의 차를 재배했던 다원이 나온다. 전남 최대 가람이었던 월남사지 앞에 차를 재배하며 제다(製茶)해온 다부 이한영 가문의 생가 다향산방과 다원, 전통차문화원이자 시음장이 함께 있다. 이한영의 선조는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다. 1830년 해배 후 광주(현 경기 남양주)로 올라간 다산은 제자 중 막내인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잘 받았다. 고맙다. 내 몸이 좋지 않아 오직 떡차(餠茶)만 의지하고 있는데 다시 곡우가 되었으니 차를 또 보내 달라”고 했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거칠었다. 반드시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야 한다. 알아들었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목민심서’를 집필한 ‘강직한 공직자’ 다산이었지만 제자에게는 단호하게 차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제자와 맺은 다신계(茶信契) 때문이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더라도, 제자들은 매년 공부한 글과 차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약속은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전해졌고 마지막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이한영이다. 평생 차를 위해 살아온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난 차가 일본 차로 바뀌어 유통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우리 고유 상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로,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뜻이다. 그는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한국 전통차의 맥을 이었고,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는 다시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 현 이현정 전통차문화원장에 이르고 있다. 다산이 즐기던 차가 바로 백운옥판차다. 사제 간의 다신계가 정녕 200여년 지속된 셈이다.생가 옆에는 백운동 원림(園林)이 있다.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전통 원림이다. 이곳에도 다산의 흔적이 있다. 다산은 평소에도 백운동 원림을 찾았고 1812년에는 초의선사와 함께 백운동 12경을 방문한 후 각각 그림 같은 풍경에 대한 시(백운동 12승사)를 남겼다. 여기에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백운동도)을 묶은 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홍옥폭,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 정선대, 운당원 등 백운동 12경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일화다.람사르 협약 생태습지로 유명한 남포 습지에도 다산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강진만과 탐진강 물길이 만나는 남포마을은 제주, 완도 등 섬과 육지의 교역 중심지로 예부터 번성했는데 다산초당 만덕산에서 내려오면 닿는 곳이라 다산의 행차도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포마을의 옛 이름은 갈대밭이란 뜻의 갈밭마을. “강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 포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강진만의 색다른 정취는 그 포구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등장하는 문구다. 다산은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세리들은 세금을 징세하기 위해 죽은 이와 갓난아이까지 군적(軍籍)에 올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횡포를 부렸다. 도저히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이에 항의하던 한 백성은 “아이를 낳은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 거세하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이 안타까운 사연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로 남겼다.‘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사연 호소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크게 포효하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간 방에 피가 흥건하고/ 남편은 스스로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애절양’ 시구는 강진만 생태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남포호 전망대에 선명히 적혀 있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3282만㎡(813만평)에 이른다.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한 에코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정보와 신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덕인지, 강진에는 특이한 맥주 소비 트렌드가 있다. 인구 3만 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신기하게도 술집마다 미국 맥주 브랜드인 ‘버드와이저’를 팔고 있다. 서울 등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심지어 생맥주 체인점에서도 버드와이저를 주문하면 따로 내올 정도다. 20여년 전 강진에는 주류를 공급하는 회사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 이 회사가 상대적으로 고급제품이었던 버드와이저 마케팅을 펼쳤는데, 뜻밖에 이게 먹혀들어 누구나 버드와이저를 즐겨찾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강진은 전남에서도 주류소비량이 높은 편이라 주류회사들의 주요 마케팅 대상지였다. 이런 시장 상황이 지속되며 버드와이저가 국산 맥주보다 좋다는 이미지를 남겼고 마침내 ‘군민 맥주’로 인정받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싱가폴 슬링’을 찾아 마시듯 무더운 여름날 강진에 간다면 시원한 버드와이저 한 잔 마셔 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 될 듯하다. 다산이 18년이나 살며 많은 흔적을 남긴 강진 땅. 농가체험숙박 ‘푸소 프로그램’과 역사문화 체험, 청정 생태 여행 1번지로 변모한 이 청잣빛 푸른 땅에 스스로 ‘아름다운 유배’를 떠나보는 것도 역병으로 우울한 이 여름, 참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강진 여행 체크리스트 무엇을 볼까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은 이현정 원장의 재미있는 해설을 들으며 백운옥판차 등 다양한 전통차 시음과 차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월남사지 잔디밭에 앉아 다식을 들며 차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민화박물관에선 민중의 삶을 그대로 녹인 민화를 통해 조상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층에선 성문화를 표현한 한중일 3국의 춘화를 만날 수 있다.뭘 먹을까 은행나무는 한정식 미향(味鄕) 강진에서도 이름난 한정식집이다. 반찬 그릇 위에 또 그릇이 올라가는 ‘강진한정식이층탑’ 별칭이 있을 정도다. 해물과 고기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음식의 면면이 훌륭해 어느 하나 손이 안 가는 것이 없다. 토종닭과 전복, 문어를 넣고 끓인 회춘탕(해천탕)도 여름철 복달임으로 좋다. 설성식당은 한 상 가득 돼지불고기 백반상을 받는 집이다. 조선 중후기 육군 사령부가 있던 병영면에 돼지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불맛 가득한 양념 돼지고기는 물론 각종 곁들임 찬만 해도 12가지가 넘는다. 1인 1만원꼴로 값도 저렴하다.
  • 목축이던 주막선 군민맥주 캬~ 다산 걷던 동백숲서 시름 털털

    목축이던 주막선 군민맥주 캬~ 다산 걷던 동백숲서 시름 털털

    올봄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면서,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극중 ‘강진 선생’으로 불리는 다산(류승룡 분)의 학자적, 철학자적 모습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대 세상을 호령하던 고관대작(형조참의) 자리에 있다가, 머나먼 전남 강진 땅에 유배를 와 묵묵히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정약용의 인품은 주인공 정약전(설경구 분)의 극중 비중에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대선을 앞둔 최근엔 소설 ‘대통령 정약용’이 눈길을 끌고 있다. 타임슬립을 통해 현대로 온 다산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간다는 유쾌한 상상을 담았다. 대통령 다산이 추진한다는 ‘실학21’의 바탕이 된 1표2서(‘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저술한 땅, 강진을 다시 돌아보니 그동안 보고 알았던 것보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역사상 한반도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다산은 그야말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실학을 주도적으로 연구했으며 행정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법학과 법의학을 두루 전공한 법률가였다. 또한 의학과 지리학, 건축학에 통달한 과학자요, 발명가였다. 게다가 언어학자, 아동 교육자, 걸출한 시인에다 차 전문가, 동서양사를 넘나드는 역사 철학 이론가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조선은 만사‘다’통이었다. 다산을 거치면 안 될 게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다빈치처럼. 아, 공교롭게도 다산과 다빈치, 둘 다 이름 첫 자에 ‘다’자가 들어간다. 마침 다빈치도 유배는 아니지만 1516년 고향을 떠나 프랑스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궁에서 살며 ‘모나리자’ 등 역작을 남겼다. 그런 다산이 강진에 내려왔다. 조용한 강진에 유배를 오는 바람에 그의 눈부신 업적이 꽃을 피웠다고 하는 것도 맞겠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저서와 서간, 일화, 대한민국 차문화가 탄생했다. 당시 조선의 유형(流刑)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다. 죄의 경중에 맞춰 2000리, 2500리, 3000리 등으로 올려가며 유배를 보내는 거다. 1리가 400m쯤이니 1000리면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전남 완도까지도 갈 수 있다. 조선에선 이런 거리가 나올 수 없는 터라 일부러 여러 지역을 거치며 행로를 늘렸다. 세종이 ‘실정에 맞게’ 600, 750, 900리로 조정하기 전까지 1년 가까이 돌고도는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는 많은 것을 남겼다. 깡시골인 유배지로 한양의 높은 지식과 문화 산업이 수혈됐다. 당쟁이 치열했던 조선 때 이름난 관직자는 대부분 유배를 다녀왔을 만큼 유배는 ‘일상’이었다. 정조는 창덕궁 부용정에 인공 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하들과 시 짓기 내기를 하다가 ‘잠시 쉬는’ 벌칙으로 인공 섬에 유형을 보내기도 했다. 블루마블 게임에서 ‘무인도’ 같은 의미다. 그만큼 유형은 고급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는 뜻이다. 시에 능한 다산이 ‘인공 섬’에 유배를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산을 친애하던 정조가 승하한 후, 정말 강진 땅으로 기나긴 유형을 떠나게 됐다. 그나마 강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축에 속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형을 가기도, 여행하기도 딱 적당한 거리다. 프로야구의 옛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는 2군 구장을 강진에 뒀는데 당시 1군 선수가 2군에 내려가면 “유배간다”고 자조했다. 당시 몇몇 선수들은 강진에서 2군 생활을 경험하며 다산의 후예가 됐다.다산이 처음 도착한 곳이 강진읍의 사의재다. 다산의 인품을 알아본 주막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 주모의 호의로 여기서 4년간 생활했다. 다산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생각과 외모, 말, 움직임을 네(四) 가지 덕목으로 삼아 마땅히(宜) 바로잡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의 일기에 따르면 1803년 겨울의 일이다. 초가 주막이던 본래 사의재 건물은 사라졌지만 2007년 강진군청은 이를 복원해 한옥체험 숙소, 식당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남도 강진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의재는 아욱국이 맛있기로 소문났다. 다행히 유배지 주위에 가시나무를 심어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는 ‘위리안치’는 아니었다. ‘강진 선생’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다 47세이던 1808년 봄에 귤동리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의 외가 쪽 집안인 해남 윤씨 윤단과 윤규로의 선처 덕분이었다.(해남 윤씨 윤선도는 무려 25년을 유배지에서 생을 보낸 ‘유배의 왕’이다.) 다산은 산정 초당을 고쳐 다산초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윤규로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가르쳤다. 다산은 18년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에서 약 11년을 머물며 다양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권에 달한다.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 측량, 건축 등 모든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총망라하고 있다. 애초의 초당은 무너지고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 초당을 다시 지었다. 다만 원래 초당 건물이 아니라 목조 기와건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바위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글자 ‘丁石’(정석)이 새겨져 있으며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켠에는 ‘약천’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지가 있다. 초당에 관어재(觀魚齋)란 현판이 따로 있는 것으로 봐, 연지에 잉어를 키웠을 것으로 유추된다.초당 뒤 가파른 길은 만덕산 백련사로 이어진다. 꿀럭꿀럭한 산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동백숲으로 유명한 고찰 백련사로 갈 수 있다. 이 길이 ‘사색의 길’이다. 다산과 백련사 혜장선사의 만남이 이뤄진 길이다. 다산은 차와 바다를 찾아 백련사로 향했고 혜장은 스승과 책을 찾아 초당을 오갔다. 유배 와 제자를 가르치며 산중칩거하던 다산이 다른 철학(불교)을 통해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대의 학승 혜장 덕분일 수도 있다. 산중 차향은 그렇게 피어나 학문으로 승화됐다.다산은 강진의 아름다운 산(만덕산, 월출산)과 강(탐진강), 바다(강진만) 등 자연을 사랑했다. 특히 월출산 옥판봉을 바라보는 백운동 원림과 그 인근에서 생산되는 야생차를 각별히 좋아했다. 월출산의 남쪽 월남(베트남이 아니다) 마을에 이르면 다산의 차를 재배했던 다원이 나온다. 전남 최대 가람이었던 월남사지 앞에 차를 재배하며 제다(製茶)해온 다부 이한영 가문의 생가 다향산방과 다원, 전통차문화원이자 시음장이 함께 있다. 이한영의 선조는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이다. 1830년 해배 후 광주(현 경기 남양주)로 올라간 다산은 제자 중 막내인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잘 받았다. 고맙다. 내 몸이 좋지 않아 오직 떡차(餠茶)만 의지하고 있는데 다시 곡우가 되었으니 차를 또 보내 달라”고 했다. “지난번 보내준 차는 거칠었다. 반드시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야 한다. 알아들었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다.‘목민심서’를 집필한 ‘강직한 공직자’ 다산이었지만 제자에게는 단호하게 차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제자와 맺은 다신계(茶信契) 때문이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더라도, 제자들은 매년 공부한 글과 차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약속은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전해졌고 마지막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이한영이다. 평생 차를 위해 살아온 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난 차가 일본 차로 바뀌어 유통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우리 고유 상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로,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뜻이다. 그는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한국 전통차의 맥을 이었고,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는 다시 100여년의 세월을 지나 현 이현정 전통차문화원장에 이르고 있다. 다산이 즐기던 차가 바로 백운옥판차다. 사제 간의 다신계가 정녕 200여년 지속된 셈이다.생가 옆에는 백운동 원림(園林)이 있다.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전통 원림이다. 이곳에도 다산의 흔적이 있다. 다산은 평소에도 백운동 원림을 찾았고 1812년에는 초의선사와 함께 백운동 12경을 방문한 후 각각 그림 같은 풍경에 대한 시(백운동 12승사)를 남겼다. 여기에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백운동도)을 묶은 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홍옥폭,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 정선대, 운당원 등 백운동 12경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일화다.람사르 협약 생태습지로 유명한 남포 습지에도 다산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강진만과 탐진강 물길이 만나는 남포마을은 제주, 완도 등 섬과 육지의 교역 중심지로 예부터 번성했는데 다산초당 만덕산에서 내려오면 닿는 곳이라 다산의 행차도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포마을의 옛 이름은 갈대밭이란 뜻의 갈밭마을. “강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 포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강진만의 색다른 정취는 그 포구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등장하는 문구다. 다산은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세리들은 세금을 징세하기 위해 죽은 이와 갓난아이까지 군적(軍籍)에 올리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횡포를 부렸다. 도저히 군포를 감당할 수 없어 이에 항의하던 한 백성은 “아이를 낳은 내 잘못”이라며 스스로 거세하기에 이르렀다. 다산은 이 안타까운 사연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로 남겼다.‘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사연 호소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크게 포효하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간 방에 피가 흥건하고/ 남편은 스스로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애절양’ 시구는 강진만 생태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남포호 전망대에 선명히 적혀 있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3282만㎡(813만평)에 이른다.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한 에코 투어 코스가 마련돼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정보와 신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덕인지, 강진에는 특이한 맥주 소비 트렌드가 있다. 인구 3만 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신기하게도 술집마다 미국 맥주 브랜드인 ‘버드와이저’를 팔고 있다. 서울 등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심지어 생맥주 체인점에서도 버드와이저를 주문하면 따로 내올 정도다. 20여년 전 강진에는 주류를 공급하는 회사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시 이 회사가 상대적으로 고급제품이었던 버드와이저 마케팅을 펼쳤는데, 뜻밖에 이게 먹혀들어 누구나 버드와이저를 즐겨찾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강진은 전남에서도 주류소비량이 높은 편이라 주류회사들의 주요 마케팅 대상지였다. 이런 시장 상황이 지속되며 버드와이저가 국산 맥주보다 좋다는 이미지를 남겼고 마침내 ‘군민 맥주’로 인정받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싱가폴 슬링’을 찾아 마시듯 무더운 여름날 강진에 간다면 시원한 버드와이저 한 잔 마셔 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 될 듯하다. 다산이 18년이나 살며 많은 흔적을 남긴 강진 땅. 농가체험숙박 ‘푸소 프로그램’과 역사문화 체험, 청정 생태 여행 1번지로 변모한 이 청잣빛 푸른 땅에 스스로 ‘아름다운 유배’를 떠나보는 것도 역병으로 우울한 이 여름, 참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강진 여행 체크리스트 무엇을 볼까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은 이현정 원장의 재미있는 해설을 들으며 백운옥판차 등 다양한 전통차 시음과 차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월남사지 잔디밭에 앉아 다식을 들며 차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민화박물관에선 민중의 삶을 그대로 녹인 민화를 통해 조상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층에선 성문화를 표현한 한중일 3국의 춘화를 만날 수 있다.뭘 먹을까 은행나무는 한정식 미향(味鄕) 강진에서도 이름난 한정식집이다. 반찬 그릇 위에 또 그릇이 올라가는 ‘강진한정식이층탑’ 별칭이 있을 정도다. 해물과 고기 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음식의 면면이 훌륭해 어느 하나 손이 안 가는 것이 없다. 토종닭과 전복, 문어를 넣고 끓인 회춘탕(해천탕)도 여름철 복달임으로 좋다. 설성식당은 한 상 가득 돼지불고기 백반상을 받는 집이다. 조선 중후기 육군 사령부가 있던 병영면에 돼지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불맛 가득한 양념 돼지고기는 물론 각종 곁들임 찬만 해도 12가지가 넘는다. 1인 1만원꼴로 값도 저렴하다.
  • ‘쫀달고 옥수수’… 이 맛에 반해 또 왔니?

    ‘쫀달고 옥수수’… 이 맛에 반해 또 왔니?

    “검은색 찰옥수수 한 봉지 주세요.” “예, 한 봉지 5000원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지난 10일 오후 경남 고성군 고성읍 월평리 앞 국도 14호선 도로변. 한여름 뜨거운 햇볕을 가리는 파라솔과 간이천막 50여개가 거운마을과 곡용마을 앞 국도 양쪽 공터를 따라 줄지어 설치돼 있다. 옥수수 농사를 짓는 마을 농민들이 옥수수를 판매하는 노점이다. 차량들이 잇따라 노점 앞 갓길에 잠깐 멈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삶은 옥수수 한두 봉지씩을 사간다. “맛이 어떤지 먹어 보라”며 크기가 조금 작은 옥수수 1개씩을 덤으로 주는 인심 좋은 노점도 있다. 승차판매·구입(드라이브스루)을 이용하는 차량도 많다. 고성 옥수수 판매 거리에서는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인기를 끄는 드라이브스루 방식을 이미 30년 전부터 시작했다.●1개 덤으로~인심 좋은 노점도 창원시~고성군~통영시를 잇는 국도 14호선 고성군 구간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옥수수 판매 노점 거리’가 형성된다. 고성에서 생산되는 지역 특산품 옥수수를 즉석에서 삶아 판매한다. 특히 월평리 국도 200m 구간 양편에는 노점 40~50개가 몰려 시장을 이룬다. 모두 월평리 옥수수 작목반 농민들이 운영한다. 이곳에 노점이 생긴 지는 30년이 넘었다. 마을 주민 몇몇이 수확한 옥수수를 길가에서 삶아 팔았는데 반응이 좋자 주민들이 하나둘 동참, 명소가 됐다. 월평리는 남해안 바닷가에 있다. 월평리 국도 주변에선 해마다 6~9월이면 넓은 옥수수밭을 볼 수 있다. 고성군과 옥수수 재배 농민들은 “월평리 옥수수는 수확 때까지 밤낮으로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 맛이 더 달고 쫀득하다”고 자랑한다. 농민들은 날마다 아침 일찍 옥수수를 수확해 집이나 노점에서 삶아 판다. 거운마을 김갑수(75)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1000여평에 농사를 지어 노점에서 판매한 지 30년이 넘었다”며 “월평리 옥수수 거리에서 한번 옥수수를 사먹어 본 손님은 ‘맛있다’며 다시 찾는다”고 했다.월평리 옥수수 농가와 고성군은 재배환경이 비슷하고 삶는 방식도 큰 차이가 없어 어느 집에서 살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고성군은 옥수수를 맛있게 삶는 방법을 표준화했다. 센불과 중간불, 약한불에 20분씩 1시간 동안 삶은 뒤 불을 끄고 10분쯤 뜸을 들인 다음 건져내면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최고로 맛있는 옥수수가 된다. 삶을 때 약간의 소금과 합성감미료를 넣기도 한다. 곡용마을 주민 황모(67·여)씨는 “6년 전 남편과 함께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옥수수 농사를 지어 노점에서 판매한다”며 “단골이 많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노점을 한다는 강모(65)씨는 “6월 중순부터 노점을 열고 그해 농사지은 옥수수를 다 팔 때까지 운영한다”며 “주말이나 휴가철 바쁜 날에는 며느리가 나와 도와준다”고 말했다. 강씨는 “노점이 늘어나면서 손님이 분산되다 보니 해마다 수입이 줄어든다”고 전했다. 군에 따르면 고성 지역에는 모두 432농가에서 137㏊에 옥수수를 재배한다. 월평리는 70여 농가 45㏊다. 고성 옥수수는 미흑찰, 미백2호, 흑점2호 등 찰옥수수 3품종이다. 종자는 강원도 옥수수연구원에서 공급한다. 미흑찰은 알 전체가 검은색으로 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는 안토시아닌 색소가 많다. 파종해 95~110일 뒤 수확하는 중생종이다. 미백2호는 알이 흰색으로 병해충에 강하며 고소하고 씹는 느낌과 맛이 좋다. 파종한 뒤 85~100일 지나 거둔다. 흑점2호는 점박이 옥수수다. 고성 찰옥수수는 2~5월 파종해 6월 중순부터 수확한다. 본격 수확기는 휴가철인 7월이다. 한 노점 주인은 “7월에는 주말이나 휴일에 하루 100만원어치 넘게 파는 노점도 있다”고 귀띔했다. 고성 옥수수거리에서 노점하는 농민들은 그해 생산한 옥수수가 모두 팔리면 철수한다. 해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9월 초다. 고성군 거류면은 올해 처음으로 9~10일에 옥수수 축제를 했다. 해풍을 맞고 자라 쫀득하고 달콤하다고 해서 ‘쫀달고 옥수수’라고 부르는 고성 옥수수를 명품 브랜드로 알리기 위해 시작했다. 올해 첫 축제는 코로나19 탓에 비대면 판매와 고성동부농협 외곡지점 앞에서 승차판매 등만 했다.●빵·과자·물엿·술로 변신하는 옥수수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뒤 유럽으로 전파돼 전 세계로 퍼졌다. 옥수수는 밀, 쌀과 함께 세계 3대 곡물로 꼽힌다. 최대 생산국 미국은 대부분을 사료와 바이오 에너지인 에탄올을 만드는 데 쓴다. 우리나라에 옥수수가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원나라 설과 조선시대 명나라 설이 전해진다. 옥수수 이름은 중국 음인 ‘위수수’(玉蜀黍)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강냉이’로도 불리는데 중국 강남 지역인 화난지방(양쯔강 유역)에서 들어왔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옥수수는 수확하면 당분이 빠르게 녹말로 바뀌어 단맛이 급속히 떨어진다. 그래서 수확하자마자 찌거나 삶는 것이다. 고성 국도변 노점 옥수수가 맛있는 이유다. 바로 먹을 수 없을 때는 냉장실이나 냉동실에 보관해야 한다. 삶는 것보다 찌는 게 더 맛이 좋다. 옥수수는 우유와 궁합이 잘 맞아 대부분의 시리얼은 옥수수로 만든다. 옥수수 품종은 사료용과 식용이 다르다. 공업용과 사료용은 오목씨(마치종)다. 통조림용은 굳음씨(경립종)다. 찌거나 삶아 먹는 품종은 찰옥수수(나종)이며 스위트콘(감미종)은 당도가 높고 수분이 많아 식용과 통조림으로 쓴다. 전분은 연립종으로 만든다. 팝콘은 유일하게 튀김옥수수(폭렬종)로 만드는데 쥐이빨 옥수수라고도 부른다. 생으로도 먹는 초당옥수수는 단옥수수(감미종)를 개량했다. 경북 지방에서는 단옥수수와 초당옥수수를, 강원도에서는 찰옥수수를 주로 재배한다. 옥수수는 가루로 빻아 빵, 과자, 물엿, 술도 만든다. 옥수수는 속대, 수염 모두 버릴 게 없는 건강식품이다. 식이섬유가 많아 장 건강에 좋다. 옥수수 씨눈에는 불포화지방산이 많아 나쁜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것을 억제해 심혈관 질환과 동맥경화 예방에 도움이 된다. 비타민 E의 한 종류인 토코페롤이 풍부해 피부노화 예방 등에도 효과가 있다. 항산화 성분인 루테인도 있어 눈 건강에 도움이 된다. 트립파톤 성분도 풍부해 위장을 편안하게 해주고 잠을 깊이 잘 수 있도록 도와준다. 프로테아제 성분을 고농도로 함유해 결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속대에는 잇몸질환을 개선하는 데 사용되는 인사돌 주요 성분인 베타시토스테롤도 많이 있다. 끓여서 차로 마시거나 입안을 헹구면 잇몸 질환과 입안 염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 옥수수수염은 이뇨작용을 촉진하고 부기를 없앤다. 말려서 차로 끓여 마시면 좋다. 옥수수는 필수 아미노산 등이 부족해 식사 대용으로 오래 먹는 것은 좋지 않고 혈당지수(GI)가 높아 주의해야 한다.
  • [금요칼럼] 국가 정체성 문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국가 정체성 문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병자호란 직전 전운이 감돌 때 조선이 청나라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온 조정은 척화(斥和) 논의로 들끓었다.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왜 질 줄 알면서도 전쟁을 불사했을까? 흔히 말하듯 현실(실리)에 눈감은 헛된 명분론자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실리 없는 명분만 강조한 정권은 역사상 없었다. 역사 현상을 명분과 현실(실리)로 도식화해 나누는 이분법은 몰역사적이요, 비상식적이다. 당시 조선이 전쟁을 감수한 이유는 왕조의 안녕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이 아직 없었다. 유럽의 중세가 국가 단위의 가치보다 기독교라는 보편적 가치를 훨씬 상위에 두었듯이, 중국과 조선에서도 화이론(華夷論)적 중화 문명을 당위적 보편 가치로 믿고 국가 단위보다 더 중시하였다. 조선이라는 왕조의 존망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엄연했던 것이다. 특히 명나라와 조선은 군부(君父)-신자(臣子) 관계로 이념화한 상태였다. 조선 초기(15세기)만 해도 충(忠)에 기초한 군신관계였는데 16세기에는 효(孝)에 기초한 부자관계가 더해진 결과였다. 이런 변화는 중차대하다. 군신관계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상대가치인 데 비해 부자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가치였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아무리 충을 강조할지라도, 만일 군주가 패륜을 자행한다면 신하로서 군신관계를 얼마든지 끊을 수 있었다. 반정이나 역성혁명도 가능했다. 부자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부친이 아무리 패악할지라도 자식이 먼저 부자관계를 끊을 방법은 없었다. 16세기에 명과 조선이 이런 부자관계로 묶인 사실은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조선은 명나라와 운명을 함께해야 함을 의미했다. 남한산성 내 고민의 본질도 이와 같았다.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자식이 취할 올바른 행동은 무엇일까? 즉시 달려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적과 싸우는 일 외에는 없다. 그런데도 청나라 칸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버지와 함께하기는커녕 되레 아버지를 죽이려는 도적 앞에 무릎 꿇고 “저 사람은 제 부친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칸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맹세한 꼴이다. 그러니 그 충격과 후폭풍이 어떠했을까? 이게 바로 삼전도 항복의 본질이요, 조선왕조의 국가 정체성을 정면으로 거스른 행위였다. 군신관계라는 사대‘정책’을 부자관계라는 사대‘주의’로 한 번 조정해 그 국가 정체성을 불변의 절대가치로 고정해 놓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재조정을 거부한 결과였다.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은 무엇일까? 정부 수립(1948) 후 냉전시대에는 반공과 한미혈맹이었다. 민주공화국은 헌법 속의 힘없는 텍스트일 뿐이었다. 모든 것은 반공으로 수렴했다. 주적은 북괴였고, 미국은 은인이자 큰형님이요, 일본은 작은형이었다.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어떤 폭력도 면죄부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다른 세상이 도래했다.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압승을 거둔 지 오래다. 군사독재정권이 사라지고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공인’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런 새 환경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도 조금씩 변하며 진화하는 중이다. 당연히 그럴 때다. 최근 한 대통령 후보가 생뚱맞게도 해방군ㆍ점령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방군은 보는 시각에 따라 가변적이나 점령군은 객관적 사실이다. 역사에서 해방과 점령은 교집합이 크다. 별개의 대립 개념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한때는 미국이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었으나, 지금은 가장 중요한 나라일 뿐이다. 한국의 국가 정체성도 그에 따라 조정 중이다. 이런 2020년대인데 언제까지 색깔론으로 연명하려는가? 이런 수준의 학부 보고서라면 F 외에는 달리 고려할 학점이 없다. 국가 정체성 재조정을 아예 거부했던 조선을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다.
  • 문헌에만 있던 ‘흠경각 옥루’ 581년 만에 되살려낸 ‘복원의 달인’

    문헌에만 있던 ‘흠경각 옥루’ 581년 만에 되살려낸 ‘복원의 달인’

    홍대용 자명종·청동반가사유상 등 살려中日 잃어버린 기술 ‘고대 금도금법’ 성공멸실된 문화재 복원하려 고문헌과 ‘씨름’中 북송시대 고서·터키에서 실마리 찾아장영실은 동서양의 기술 융합해 재창조 1400~1450년 전세계가 일군 최첨단 기술日 과학사에 조선 29개·中 5개·日 0개 기록세종 때 확보한 첨단기술 다른 국가 압도“선조들의 뛰어난 과학 정확히 가르쳐야”물레방아처럼 생긴 수차가 자동 물시계를 움직이면 366개의 톱니를 가진 동력기륜이 12신기륜, 시보기륜, 4신 기륜과 천륜을 회전시킨다. 4신 기륜에 연결된 4신 옥녀는 1시간마다 방울종을 흔들고 동시에 4신 동물이 시계 방향으로 90도씩 회전한다. 산 중턱에 선 3명의 무사는 각각 종, 북, 징을 친다. 산 아래 평지에는 12지신과 12옥녀가 짝을 이뤄 누웠다가 2시간마다 일어선다. 천륜의 톱니와 연결된 혼천의 태양은 시계 방향으로 하루 한 바퀴 회전한다.1438년 세종과 장영실이 백성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설계한 ‘흠경각 옥루’는 당대 국내외 최신 과학기술을 종합해 만들어 낸 첨단 자동 물시계였다. 문헌에만 남아 있던 흠경각 옥루를 581년 만에 복원한 이가 6일 인사혁신처의 협조로 서울신문이 만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 윤용현 박사다. 윤 과장은 고천문학자, 고문헌학자, 고건축학자 등과 협력해 2019년 흠경각 옥루 복원에 성공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이 만든 자명종, 삼국시대 청동반가사유상, 청동기시대 잔무늬거울, 조선시대 화폐 상평통보가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었다. 윤 과장은 “일본 과학기술사 사전에 1400~1 450년 반세기 동안 전 세계가 일군 최첨단 기술이 기록돼 있는데, 조선이 29개, 중국이 5개, 일본이 0개였고 동아시아 이외 기타 지역 하이테크 기술 합계가 28개였다. 조선 세종 때 확보한 최첨단 기술은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뛰어난 과학 문화재를 복원하지 않으면 선조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게 된다”며 “그간 학교에서 우리 선조들의 과학기술을 정확히 가르치지 못했던 것도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불행히도 흠경각 옥루를 비롯한 당시 과학기술 문화재 일부는 멸실돼 고문헌에만 남았다. 윤 과장은 흠경각 옥루를 복원하려고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흠경각기’, ‘동문선’, ‘여지승람’, ‘어제궁궐지’ 등 고문헌을 파고들었다. 그는 “흠경각기에 ‘수차를 사용했고, 외부에는 12옥녀, 12지신이 있었다’ 같은 내용이 있어 외부 복원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기륜이 몇 단위이고 수차는 얼마나 크고 바퀴가 몇 개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실마리는 의외로 중국 북송시대 소송이 지은 ‘신의상법요’에서 찾았다. 조선 천문학자 이순지가 쓴 ‘제가역상집’에서 중국 송나라에 ‘수운의상대’라는 자동 물시계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고, 신의상법요에서 수운의상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확인했다. 윤 과장은 “이순지와 장영실이 동시대 사람이니 장영실도 수운의상대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고, 관련 문헌도 꿰뚫고 있었을 것이란 가정하에 수운의상대 관련 기록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연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다만 수운의상대로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 흠경각 옥루는 쇠구슬을 이용해 소리로 시간을 알려 줬다는데, 관련 기록이 어디에도 없었다. ‘쇠구슬을 이용한 시계는 어디서 처음 만들었을까?’ 윤 과장은 해외로 눈을 돌려 터키를 찾았다. “과학사학자들이 셀주크튀르크 시대 앨제재리라는 과학자가 코끼리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터키로 건너가 직접 관련 문헌을 확인하고 복원한 실물을 보고서 장영실이 흠경각 옥루에 적용한 쇠구슬 원리의 원형을 찾은 거죠.” 그럼 장영실은 먼 이국땅 터키의 기술을 어떻게 습득했던 걸까. 윤 과장은 “앨제재리가 활동한 시기에 셀주크튀르크가 원나라의 침략으로 150년 정도 나라를 잃었고, 그때 이런 기술이 원나라로 들어가 장영실에게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며 “장영실은 동서양의 기술을 융합해 재창조하는 창의력이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말했다. 고대 금도금법을 복원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롭다. 지금은 금속을 질산에 담가 표면을 부식시키고 아말감을 칠해 도금한다. 하지만 질산이 없었던 과거에는 도금을 어떻게 했을까. 여러 문헌에서 찾은 비법은 바로 매실이었다. 윤 과장은 매실을 3~4개월 숙성하고 착즙·농축해 1.9 수준의 강산성 매실산을 만들었다. 그다음 금속을 20분가량 매실산에 담갔다가 문헌에 나온 대로 숯으로 세척한 뒤 가열해 아말감을 발랐는데 생각처럼 도금이 되지 않았다. “일단 다음 일정이 있어 연구팀은 철수하기로 하고 함께 도금 작업을 하던 장인에게 마저 시험을 해 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이분이 아말감을 바르고서 잊고 있다가 하루 정도 지나서야 ‘아차’ 한 거예요. 부랴부랴 숯에 올려 가열했더니 도금이 기가 막히게 됐어요. 실수에서 방법을 찾은 거죠. ‘아, 아말감도 숙성을 해야 하는구나.’ 그때 알았죠.” 고대 금도금법은 중국도, 일본도 잃어버린 기술이었다. 그는 “남은 문헌에만 의존하면 그 이상 진전할 수 없다. 동시대 기술이라면 동북아시아든 서양이든 문헌을 조사해야 좀더 실물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조선시대 화폐 상평통보 또한 성분 분석을 하고 당시 미국인이 남긴 기록을 보고서 합금 비율을 알아내 복원했다. 윤 과장은 “청동으로 동전을 만들다 조선 숙종 때 구리에 아연을 넣은 황동으로 바꿨고, 이 신기술을 적용한 화폐가 상평통보”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 시대에는 주조기술이 굉장히 뛰어나 연산군 때 아연과 납에서 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는 중국 명나라보다도 200년 앞선 것이었다”면서 “은 추출 기술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부강하게 했고, 부강해진 일본이 조총을 사서 결국 우리를 침략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윤 과장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청동유물 주조와 복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일한 건 1994년부터다. 공개경쟁채용 시험을 통해 학예연구사로 입직했다. 국립중앙과학관이 자리한 대전 유성구 구성동의 지명을 따 자신의 호도 ‘구성’으로 지을 만큼 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는 “전문 지식만 있다고 과학기술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끈기와 노력을 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과장의 정년은 2024년까지로 3년 남짓 남았다. 그는 “정년 전까지 철 불상 주조기술을 복원해 조상들의 첨단기술을 국민께 알려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 [책꽂이]

    [책꽂이]

    임진왜란(김영진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 국제정치학자의 시각으로 16세기 한중일 3국이 유일하게 전면전을 벌인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과 국제 관계의 변화상을 펼쳐 냈다. 임진왜란이 ‘7년 전쟁’으로 알려졌지만, 저자는 대마도주의 조선 방문부터 명나라 군대 철수까지 12년간 지속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 차원에서 바라본다. 948쪽. 4만 3500원.하늘의 과학(장조원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30여년간 항공 과학 인재들을 길러낸 장조원 한국항공대 교수가 비행기, 로켓, 인공위성처럼 하늘을 나는 모든 장치가 따라야 하는 수학·과학 법칙을 한 권에 담았다. 여객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선 승객 탑승 전부터 진행되는 운항 브리핑 등 현장감이 묻어나는 이야기도 가득하다. 612쪽. 2만 5000원.해양세력 연대기(앤드루 램버트 지음, 박홍경 옮김, 까치 펴냄) 영국 해군사학자인 저자가 고대 아테네, 카르타고,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해양 국가들이 어떻게 국제 질서를 만들어 왔는지 톺아봤다. 이들 국가는 패권 국가의 등장을 경계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고자 했고, 무역 활동을 위협받지 않는 한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542쪽. 2만 5000원.木의 건축(배기철·이도형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건축 전문가인 두 저자가 환경친화적 목조 건축의 발전 가능성을 짚어 보고 국내외 주요 목조 건축물 현황을 소개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콘크리트 건축의 내구성이 크지 않고, 국토의 65%가 산림인 우리나라에서 목조 건축물도 건강하고 쾌적한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16쪽. 2만 3000원.놀이터는 24시(김초엽 외 6인 지음, 자이언트북스 펴냄) 김초엽·배명훈·편혜영·장강명·김금희·박상영·김중혁 등 인기 작가 7명이 게임회사 엔씨소프트와 손잡고 즐거움을 주제로 펴낸 앤솔러지. SF소설 ‘글로버리의 봄’, ‘수요 곡선의 수호자’ 등과 같이 여행과 소비, 일과 놀이에서 즐거움을 각자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단편 7편이 실렸다. 288쪽. 1만 4000원.한글빅뱅(금해랑 지음, 해랑한국어 펴냄) 금해랑 시인이 내외국인 수백 명을 직접 가르치며 완성한 한글 교육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학습지 회사 경력 20년인 저자는 글자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닌, 소리와 의미를 연결해 쉽게 기억하도록 하는 독특한 교육법을 강조한다. 168쪽. 1만 5900원.
  • 손가락만 한 새장용 꽃병도 백자로… 중세에도 지극한 해외명품 사랑

    손가락만 한 새장용 꽃병도 백자로… 중세에도 지극한 해외명품 사랑

    1975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옛 선박이 발견되면서 한국 학계에는 수중고고학과 문화재보존과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신안선은 학문 영역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 동아시아 문화상을 보여 준다는 의미도 크다. 40여년이나 됐지만, 신안선 유물은 여전히 연구할 게 많다. 그야말로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2만6000여점 공예품 실린 ‘보물 같은’ 무역선 신안선은 1323년 중국 경원(현재의 닝보)을 출발해 일본 하카타로 가던 중 한국의 신안 증도 해역에서 침몰한 원나라 무역선이다. 배에는 일본 사찰인 후쿠오카 조자쿠암, 교토의 도호쿠지, 후쿠오카의 신사 하코자키궁으로 보낼 물품들이 실려 있었다. 수중 발굴한 유물은 압수한 도굴품 2000여점 등을 포함해 모두 2만 6000여점이나 됐다. 중국·일본·고려의 도자기, 다양한 금속 공예품, 자단목, 동전, 주석과 백동으로 만든 금속 기물, 각종 향신료와 약재 등이다. 특히 배에서 발견한 다양한 공예품은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했던 문화를 보여 준다. 이들과 활발히 교류했던 고려의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신안선의 공예품은 중세 동아시아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코드’인 셈이다. 당시 중세 동아시아에서는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매우 발달했다. 차, 향, 꽃과 관련한 의례나 장식용 도자기부터 접시, 발 등 일상 생활용기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이 제작됐다. 공예품은 특히 도자기로 만들어지면서 점차 퍼졌다. 금속은 재질의 특성상 형태 제작에 한계가 있었지만, 도자기는 비교적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어서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자기 제작에 성공한 나라다. 도자기 제작에서 기술성과 예술성이 당시 최고로 꼽혔다. 신안선에서는 중국 도자기가 2만여점 이상 발견됐다. 대부분 원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었고, 일부는 송대의 도자기였다. 송대의 도자기는 골동품으로 사용되다가 배에 선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도자기는 당시 주요 해외 수출상품이었던 청자와 백자, 흑유자(검은색을 띠는 자기), 도기 등이다. 주로 중국 남쪽과 북쪽의 여러 가마에서 만들었다.●명나라서 쓰던 백자 새 모이통·꽃병, 일본 항구도시에서도 발견 신안선의 중국 도자기에는 새를 기르고 즐겼던 문화를 보여 주는 물건이 있다. 새 먹이를 주려고 사용한 새 모이통과 새장 안에 넣는 꽃병이다. 새 모이통은 당시 새를 기르는 문화를 잘 보여 준다. 송나라 황실에서는 감상과 유희의 목적으로 새를 즐겨 길렀다. 북송의 휘종은 궁중에서 각종 진귀한 새를 길렀다. 남송의 고종은 100여 마리 앵무새를 길렀다고 전해진다. 민간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새를 싸움에 붙여 돈을 걸게 하거나, 새를 이용한 공연 등 돈벌이의 목적으로도 이용됐다. 상류층이 새를 기르다가 점차 민간의 풍속으로 자리했다. 신안선에서 발견된 새 모이통 도자기는 백자로 만들었다. 둥근 항아리 형태로 바닥은 편평하고, 겉에는 구멍이 뚫린 작은 고리가 달렸다. 입구가 조금 넓어 새가 그릇 안으로 부리를 넣어 모이나 물을 먹기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 도자기는 장시성의 징더전요나 푸젠성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 마디를 표현한 통 모양 청백자는 징더전요에서 만들었다. 세로로 길쭉하지만 크기가 작다. 속은 비어 있어 안에 무언가를 담거나 꽂았던 용도로 보인다. 하지만 높이가 약 6.3㎝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새장 안에 넣어 장식하는 꽃병으로 알려졌다. 이런 부류의 꽃병은 명나라 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가마에서도 청화백자 형태로 발견됐다. 원나라 이후에도 즐겼던 문화임을 알 수 있다.일본에서는 새 모이통 도자기가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됐다. 중세 무역을 담당한 항구 도시인 후쿠오카현 하카타 유적, 15~16세기 해상을 통해 활발히 중계무역을 했던 류큐왕국의 슈리성 궁전터 등이다. 일본 중세시대 그림에는 새장을 들고 가는 남성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신안선에서 나온 청자 주전자… 유목민 생활 보여준 다목호 유행 도자기로 된 다목호는 원대에 새롭게 생겨나고 유행했다. 다목호는 티베트와 몽골 사람들이 우유나 양젖을 담는 데 사용하던 유목민들의 생활용기다. 원나라 자체가 몽골 민족이 세운 나라인 만큼 티베트와 몽골 유목민의 특성이 강하게 반영됐다. 원래 나무나 다른 재질로 만들었는데, 점차 도자기, 금속기로도 제작했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중시하고 불교와 관련된 의례 등에서 고승에게 이 다목호를 하사할 만큼 황실의 사랑을 받았다. 신안선에서 나온 청자 다목호는 주전자다. 통 모양으로 되어 있고 손잡이와 물을 따르는 주구가 달렸다. 겉면 손잡이 위쪽에는 꽃 모양의 관을 쓴 것과 같이 위로 뻗은 형태가 연결됐다. 신안선에서 나온 청자 다목호에는 없지만, 원대 이후에 만들어진 기물을 살펴보면 뚜껑을 덮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에서는 다목호를 지금까지 일상에서도 사용한다. 몽골 시장이나 대형 마트 등에서도 볼 수 있고, 작은 장식용 기념품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중국산 흑유 찻잔… 일본의 수입품 ‘가라모노’의 대표 ‘가라모노’라는 말은 9세기 일본 사료에 처음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단어다. 일본어로 수입한 외국산 물품을 뜻하는데, 당시엔 대개 중국산을 의미했다. 신안선을 운영하던 일본 중세시대에는 중국산 물품이 특히 유행했다. 신안선에는 청자, 백자와 함께 검은색을 띠는 흑유자기도 발견됐다. 그중에서도 흑유 토기는 모두 548점으로, 이 가운데 66점이 젠요(푸젠성에서 흑유자기를 생산한 가마)의 찻잔이다. 이 젠요의 흑유 찻잔은 송나라 황실에서 사용될 만큼 귀하고 명성이 높았던 차 도구였다. 송나라 때 차를 우리는 방법인 점다법(분말 형태로 된 가루차를 찻잔에 넣고 끓인 물을 넣어 찻솔로 휘저어 거품을 내는 방식)으로 사용했는데, 송대의 차 문화를 대표하는 물건이다. 흑유 찻잔은 차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송대 회화에도 등장한다. 이 흑유 찻잔은 사실, 신안선이 출항할 당시 중국 원대에는 더는 생산하지 않았던 도자기다. 송대에 다시 제작돼 골동품으로 유통됐다. 당시 일본에서는 선종이 유행했는데, 선종 사찰에서는 여전히 점다법으로 다례를 행했다. 이후에도 이러한 차 음용법이 이어졌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 사찰에서 시작한 차 문화는 당시의 권력층인 무사계층, 권문세가로 확산하면서 그들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때 사용한 찻잔은 자연스럽게 유명해지고, 비싼 가격에 팔렸다. 원나라에서는 더는 사용하지 않는 찻잔이 일본에서는 오히려 크게 유행하면서 골동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까지 무로마치 장군가의 연회 공간의 방에 장식된 물건들을 기록한 ‘군다이칸소초키’에는 젠요의 흑유 찻잔이 있다. “피륙(베나 무명, 비단 등의 천을 이르는 말) 삼천필의 가치가 있다”고 쓰여 있을 정도다. 14~16세기인 무로마치시대에 어느 부잣집을 묘사한 그림에도 용천요 청자, 흑유 찻잔, 칠기가 장식됐다. 당시 흑유 찻잔이 부와 권력을 상징했음을 보여 준다. 15세기 말, 나라와 교토를 중심으로 물가를 비교했을 때, 차를 마실 때 찻물을 끓이는 솥이 당시 화폐 2000문(文)이라면, 이 흑유 찻잔은 8000문이나 됐다. 고가의 흑유 찻잔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었다. 결국 일본에서 도기를 생산했던 주요 가마인 세토와 같은 가마들에서 이를 모방한 흑유잔을 만들어 내기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해외 명품이 인기가 있는 것처럼, 고급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심리를 보여 준다. 이명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 [금요칼럼] 스승이 말릴 수 없었던, 이재 황윤석의 호기심/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스승이 말릴 수 없었던, 이재 황윤석의 호기심/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충청도 전의 현감 황윤석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한 죄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는 업무에 미숙해 고을 아전과 좌수에게 휘둘렸다. 가난한 백성에게 환곡을 배정하는 일도 틀렸고, 심지어는 관노가 죄수에게 곤장을 칠 때 뇌물을 받아먹었으나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행정 실무에 꽝이었다. 암행어사 심환지의 보고에 따라 정조는 황윤석을 파면했다(실록, 정조 11년 4월 8일). 아직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 황윤석은 시강원 익찬(정6품)으로 세손을 보좌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훗날 정조는 황윤석의 학문을 칭찬했다. “옛일을 자세히 살피는 데 있어 내가 (황윤석에게) 도움받은 점이 많았다.”(정조 22년 2월 6일) 그런 맥락에서 왕은 말하기를, 전라감사가 왜란 때 조헌과 의병의 의로운 죽음을 제아무리 철저히 조사해도 황윤석이 나라에 보고한 것보다 충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과연 황윤석의 저술은 후세에 호평을 받았다. 북학파의 후예로 개화파의 스승이기도 했던 박규수 역시 황윤석을 존중했다. 고종 12년(1875) 선비 윤사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환재집’ 제9권). 그 집안이 화재를 입었으나 “이당(황윤석)의 글씨와 저술이 무사하다니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소장한 황윤석의 ‘이재난고’(?齋亂藁)와 장차 비교 검토할 뜻을 보였다. ‘이재난고’는 황윤석 필생의 저작이었다. 10세 때부터 별세하기 이틀 전까지 54년 동안에 쓴 방대한 기록이었다. 날씨와 농사 형편, 날마다 책을 읽고 토론한 내용, 주고받은 편지며 여행 기록이 빼곡하다. 사실적이고 총체적인 기록이라 18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를 가장 생생하게 알려 주는 자료다. 아직껏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한 사실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황윤석은 진취적인 학자여서 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에도 해박했다. 그런데 그는 서양 학문의 원류를 중국 고전 문명에서 찾았다. 이러한 지적 흐름은 이미 17세기 중국 명나라의 황종희에서 비롯했다. 황윤석의 선배인 서명응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그는 북학파의 비조요,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의 할아버지였다. 황윤석은 신지식에 심취해 과학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이수신편’을 저술했다. 그 책에서는 사칙산법과 삼각측량법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사칙인데 수준이 다양했다. 삼각측량법은 두 점의 거리를 재보지 않고도 알아내는 방법으로, 정말 새로운 지식이었다. 신학문을 추구한 때문에 황윤석은 스승 미호 김원행과 노선 갈등을 빚었다.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김원행은 편지를 보내 황윤석의 학문적 취향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미호집’(제9권)에 보면 보수적인 스승과 진취적인 제자의 심적 갈등이 피부에 와닿는다. 스승은 책을 읽더라도 성리학적 의리, 즉 도덕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기 바란다면서 제자를 나무랐다. “널리 읽고, 지나치게 많이 읽는 것을 추구하지 말게.” 또 “이제부터는 지난날의 널리 잡다한 지식을 추구하던 습관을 버리게.” 오직 성리학적 도덕의 연구와 실천에 힘을 쏟으라는 명령이었다. 스승 김원행의 눈에는 제자 황윤석이 세상사에 관심을 갖는 것도 걱정스러운 점이었다(‘미호집’ 제9권). “자네가 수년간 옛 성인의 책을 읽었는데도, 아직 이점을 환히 알지 못하는가.” 스승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윤석은 신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헌것에서 새것이 나온다. 견해와 시각 차이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이지만 피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선각자라고 해서 일상에 만능이 되지도 못한다. 잘잘못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고, 완벽하지 못한 것이 사람의 일이다. 세사를 볼 때마다 나는 너그러움을 그리워한다.
  • 마윈, 자기가 세운 대학 총장직 반납… 학교까지 뻗친 中 당국의 ‘길들이기’

    마윈, 자기가 세운 대학 총장직 반납… 학교까지 뻗친 中 당국의 ‘길들이기’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의 창업자이자 알리페이 운영사 앤트그룹의 최대주주인 마윈의 시련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경영대학원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그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분야에 압박이 가해지는 모양새다. 2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마윈은 자신이 세운 후판대학 총장직을 조만간 내려놓기로 했다. 이미 학교 홈페이지에서 그의 프로필 사진이 사라졌다. 앞서 중국 정부는 지난달 말 신입생들의 수업 등록을 잠정 중단시켰고, 이달 중순에는 “정부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학’ 명칭도 금지시켰다. 결국 학교를 지키고자 마윈 스스로 거취를 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후판대는 2015년 마윈이 학계 인사 8명과 함께 저장성 항저우에 설립한 경영대학원(MBA)이다. ‘후판’이라는 이름은 마윈이 알리바바 창업을 구상하던 시절 머물던 공동주택 ‘후판화위안’에서 따왔다. 정식 대학은 아니지만 마윈 자신과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창업자 등이 강의해 중국 최고의 MBA로 평가받았다. 재학연한은 3년이다. 홍콩 명보는 “합격률이 2%에 불과해 미국 하버드대 MBA보다 들어가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학교 관계자는 FT에 “마윈이 공산당의 목표와 상충하는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어 (중국 정부가) 우려했다”고 전했다. 중국 공산당은 마윈이 후판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조직을 키우는 ‘현대판 동림서원’을 구상한다고 의심해 왔다. 동림서원은 명나라 말 정쟁에서 밀려 유배당한 이들이 모여 세를 키우던 저항 세력을 말한다. 마윈은 지난해 10월 상하이 금융포럼에서 중국 당국의 금융산업 규제가 퇴행적이라고 공개 비판한 뒤로 시련을 겪고 있다. 지난해 11월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로 예정됐던 앤트그룹의 3270억달러(약 369조원) 규모 상장이 전격 취소됐고, 곧바로 앤트그룹이 보유한 기업에 대해 규제 조치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시장 지배력을 남용했다”며 알리바바에 182억 위안(3조 2000억원)에 달하는 반독점 과징금도 부과됐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忠을 이긴 孝

    忠을 이긴 孝

    불충한 어머니´ 그를 폐위하려는 불효한 아들인목대비 폐위 논쟁을 다시 소환하다군사부일체서 군이 빠진 유교 국가의 진화 담아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충과 효, 두 핵심 가치가 국가의 근간이었다. 그런데 두 가치가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조선의 역사에서 충과 효가 정면충돌한 대표적 사건은 광해군 재위(1608~1623) 때 빚어진 인목대비 폐위 논쟁이다. ‘모후의 반역’은 당시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폐위 논쟁을 오늘날 논쟁의 무대로 다시 소환했다. 폐위 논쟁을 일회성 패륜 소동이 아닌, 조선 왕조의 본질적 변화라는 통시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다. 유교적 관점에서 광해군의 모후(어머니)다. 한데 그 어머니가 군왕인 아들을 용상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의 핏줄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반역 의혹이 불거졌다. 불충한 어머니와 그를 폐위하려는 불효한 아들. 인목대비 폐비 논쟁의 시작이다. 광해군은 유교의 종법으로는 보위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적자나 장자가 아니고, 아버지 선조마저 배척했다. 게다가 세자 지위를 ‘인증’해 줘야 할 명나라가 다섯 차례 책봉을 거부하는 등 유례없는 난관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 겨우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에 이복형에게 목숨을 잃은 영창대군, 손녀뻘의 인목대비와 혼인한 선조 등 관련 인물 하나하나가 문학의 소재가 될 만큼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이 모든 서사조차 책에선 폐비 논쟁의 역사적 의미를 찾는 수단으로만 활용될 뿐이다. 책은 그만큼 총체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다.폐비 논쟁에서 폐위반대론자들이 승기를 잡은 계기는 인조반정이다. 당시 반정의 주요 명분은 배명(背明)과 폐모(廢母)였다. 하지만 얼마 뒤 인조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된다. 정묘호란(1627)이 터지자 인조는 군부(君父)였던 명나라를 해치려는 강도(후금)와 맹약을 체결했다. 충과 효를 동시에 저버린 거다. 광해군에게 덧씌웠던 패륜을 인조 자신이 저지르는 역설이었다. 당시 조야에도 이런 인식이 팽배했는데, 이를 의식한 인조는 배명에 대해선 입을 닫고 폐모에 대해서만 목청을 높였다. 어떤 경우에도 효의 가치는 범할 수 없다는 명제는 이후 철옹성처럼 굳어졌다. 일련의 과정으로 탄생한 ‘효치국가’가 가져온 후폭풍은 매우 컸다. 이전까지는 충과 효의 가치가 충돌할 때,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서 얼마든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효치’가 정립되고 강화되면서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동북아 어느 왕조에서든 사적 영역인 효는 공적 영역인 충의 실현을 위한 전제이거나 출발점이었지 종착점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만큼은 저자의 표현처럼 “효가 충을 제압해 버렸다.” 이후 충은 “경전의 텍스트로만 존재”하게 됐고, 조선 역시 “군사부일체에서 ‘군’은 탈락하고 ‘사’와 ‘부’에 대해서만 의리를 실천하면 충분한, ‘이상한’ 유교국가로 진화”하게 된다. 충을 상대로 거둔 효의 승리는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19세기 중반, 조선이 제국주의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력한 국가 리더십 구축이 절실했지만, 당시 조선은 이론적 근거인 “충 이데올로기를 이미 꽤 상실한 상태”였다. 저자는 충과 효를 독점해 북한에 기형적 사회주의 가족국가를 구축한 김일성, 충을 강조하며 남한에 변형적인 국민국가를 성립한 박정희 등도 ‘효치’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인목대비 폐비 논쟁이 한국 역사에서 갖는 위상과 중요성은 거시적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라카이코리아, 뉴욕 타임스퀘어에 새로운 한복 광고 진행…더욱 커진 스케일

    라카이코리아, 뉴욕 타임스퀘어에 새로운 한복 광고 진행…더욱 커진 스케일

    지난 3.1절 102주년을 맞아 뉴욕 타임스퀘어에 한복 광고를 진행했던 라카이코리아가 뉴욕 타임스퀘어에 다시 한 번 한복 광고를 진행했다. 더욱 특별한 점은 이미지 광고로 진행되었던 이전 광고와 달리 이번 광고는 더욱 많은 정보를 담은 영상으로 진행됐다. 뉴욕 타임스퀘어 메인 스트리트의 여섯 개 전광판을 꽉 채우며 보다 큰 스케일로 진행된 모습이 눈에 띈다. 앞서 라카이코리아는 지난 3.1절을 맞아 최근 더욱 뜨겁게 불거지고 있는 중국의 ‘한복공정’ 문제를 저격하면서, 배우 전효성과 합작해 뉴욕 타임스퀘어에 ‘한국의 전통 의상 한복’ 광고를 2건 게재한 바 있다. 뉴욕 타임스퀘어는 매해 유동인구 150만 명에 달하는 뉴욕 맨해튼의 중심지로, 이곳에 광고를 게재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금전적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카이코리아가 이번에 진행한 영상 광고는 중국의 각종 고서를 인용,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이 중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명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각종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서는 ‘경신외사’, ‘속자치통감’ 등 다양한 중국의 고서 중 오히려 과거 중국이 한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제시하는 다양한 내용을 영어 번역으로 제시하며 이전 광고에도 사용됐던 ‘Traditional Korean Clothes, HANBOK(한국의 전통 의상 한복)’이라는 슬로건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The wheel of history cannot be reversed.(역사의 수레바퀴는 뒤로 돌릴 수 없다)’는 중국의 속담을 인용해 중국의 역사 왜곡을 겨냥한 것임을 드러내며 중국에 동북공정과 각종 역사왜곡을 그만 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라카이코리아는 “현재 세계 여러 국가의 기업들은 자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며 “한국의 역사를 지키고 알리기 위해 우리와 함께 많은 기업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이전에 진행했던 한복 광고와 국내외에서 큰 화제가 됐던 만우절 ’역 동북공정‘ 풍속도 이미지 등을 계기로 현재까지 중국과 일본 등에서 각종 악성 항의와 악성 댓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라카이코리아는 이들에 대한 국제소송을 통해 역사왜곡과 수위 높은 비난을 처벌할 것임을 밝혔으며, 이후 수차례 공지사항으로 진행상황을 알려왔다. 라카이코리아의 공식 SNS와 각종 상품 페이지 후기 등에는 “라카이코리아 응원합니다”, “이런 일을 먼저 나서서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등 국제소송을 응원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응원 메시지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광장] ‘부평 일제 조병창’ 보존 희망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부평 일제 조병창’ 보존 희망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인천 부평의 미군기지 캠프마켓 터에 남아 있는 ‘20세기 유적’의 보존을 놓고 찬반 논란이 한창이라고 한다. ‘인천시 캠프마켓시민참여위원회’는 캠프마켓 남쪽 야구장 일대 시설물 31개동 가운데 22개동을 남겨 두고 9개동은 철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일제강점기 흔적을 남기지 말아 달라’는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패망 직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9월 부평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해 군수지원사령부(애스컴시티)라 이름 붙였다. 1973년 해체된 애스컴시티의 중심 시설인 캠프마켓은 2019년 한국 정부에 반환됐다. 캠프마켓을 ‘일제강점기 흔적’이라 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부평 일본 육군 조병창’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일본’이나 ‘조병창’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강화도 전등사를 오래전 찾았을 때다. 그다지 눈썰미가 없는 사람들도 전등사 범종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 것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등사 범종은 한국 종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시대 유물이다. 전등사에 왜 중국 종이 걸려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역사학자 김상기(1901~1977)가 전등사 범종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 연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만들 금속류를 닥치는 대로 수탈했다. 문화재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전등사 범종도 부평 조병창으로 실려 갔다. 전쟁이 끝나자 전등사 스님들은 서둘러 조병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전등사 범종은 이미 간 데가 없었고 마당에 나뒹구는 중국 종들 가운데 북송 철종 4년(1097) 조성한 백암산 숭명사 범종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조병창 마당에 나뒹굴었던 다른 중국 종들의 행방도 궁금하다. 광복 이후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의 회고담에 해답이 담겨 있다. 1946년 3월 당시 김재원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부터 조병창에 중국 종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부평을 찾았다는 것이다. 지금 인천시립박물관에 가면 당시 수습한 중국 종 3구를 야외 전시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 것이다. 특히 명나라 종은 태산행궁이라는 도교사원에 걸려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으면 조병창에서 수습한 청동관음보살이며 동물 모양 대포, 청동향로 등 일제가 중국에서 수탈한 각종 문화재와 곳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중국 문화재뿐이겠는가. 전등사 범종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 문화유산이 부평 조병창 용광로에 던져져 전쟁 무기로 탈바꿈했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다 오싹해진다. 문화유산을 빼앗아 간 나라는 많아도 이런 방법으로 말살한 나라가 또 있나. 그런데도 문화유산 파괴를 다룬 ‘반달리즘의 역사’에 일본의 행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이 문화 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역사를 보존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평역사박물관이 조병창에서 캠프마켓에 이르는 상설 전시를 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부평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41년 부평 조병창을 세울 당시 초기 생산 목표는 소총 2만정, 총검 2만정, 경기관총 100정, 군도 1000자루였다고 한다. 지역에서는 ‘미쓰비시 줄사택’의 보존 여부도 논란이다. 역시 부평역사박물관에 따르면 1937년 화물열차와 광산기계를 생산하는 히로나카상공이 설립됐다. 1942년 미쓰비시중공업이 이 회사를 인수해 같은 해 미쓰비시제강 부평공장으로 재편한다. 미쓰비시제강은 박격포와 방탄용 강판 등을 만드는 병기창이었다. 부평2동에 남은 줄사택도 세워졌다. 부평은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거대한 병기공단이었다. 그러니 부평 조병창과 줄사택은 한국사를 넘어선 세계사의 일부분이다. 무엇보다 조병창 터와 줄사택, 인천시립박물관, 부평역사박물관, 전등사를 한데 엮으면 인천의 근대 역사를 보여 주는 훌륭한 역사 투어 코스가 된다. 모두 둘러보고 나면 ‘일제 흔적을 없애고 쇼핑센터로 개발하자’는 일부 시민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다시 자유화되면 부평 조병창과 인천시립박물관, 그리고 전등사는 중국 관광객의 한국 관광 필수 코스로 떠오를 가능성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본다. 그렇게 인천시민들이 ‘세계사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보존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믿는다. sol@seoul.co.kr
  • [씨줄날줄] 한복의 날/이동구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한복의 날/이동구 수석논설위원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위원회의 등재 결정 회의장에서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순간 검은색 갓을 쓴 중년의 남자들이 하얀 도포 자락을 치켜들며 환호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전통 의상 한복을 차려입고 갓까지 착용한 한국 서원 관계자들의 이색적인 모습에 해외 언론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한복’은 고구려 고분벽화(4~6세기)와 신라, 백제의 유물로도 확인된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도에서도 한복의 다양한 형태를 알 수 있다. 주름치마와 색동치마는 삼국시대 때부터 유행했고, 치마의 길이는 저고리의 길이와 반비례했다고 한다. 서민 남녀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포(두루마기)를 입었다. 조끼와 마고자는 개화기 때 생긴 옷이지만 전통 한복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끼는 1880년 이후 남자 양복이 들어오면서 주머니가 없는 한복의 불편함을 보완해 주면서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불편해 외면하던 한복이 다시 인기를 모으고 있으니 다행이다. 서울 도심 경복궁이나 덕수궁 근처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입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멋스러움과 함께 자부심을 안겨 준다. 생활 한복으로 개선하는 등 한복의 대중화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특히 드라마나 영화 등이 한류를 이끌면서 한복의 아름다움이 세계인에게 알려지고 점차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패션 업체들이 한복을 대중화ㆍ세계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한복을 브랜드화하고 협업을 통해 가격을 낮추는 등으로 한복의 대중화에도 힘을 모은다. 입기도 편하고 멋도 있게 전환하는 것이다. 한복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니 일부 중국인들의 시샘이 시작됐다. “한복이 중국 명나라의 의상”이라는 주장이다. 김치와 삼계탕에 이어 이제 한복까지 중국의 유산인 것처럼 만들려 든다. 발해, 고조선 등의 북방 역사를 모두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이 낳은 고약한 버릇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뉴저지주의 테너플라이시 당국이 매년 10월 21일을 ‘한복의 날’로 선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정식 명칭도 ‘코리안 한복 데이’(Korean Hanbok Day)로 했다. 이곳의 한인 고교생들이 한복과 김치를 중국의 문화로 주장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한복의 날 제정에 나서 시 당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반가워해야 할지, 씁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남의 것을 자기네 것으로 억지 주장하는 이웃 나라 국민들의 심보가 한심스럽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산모와 미역국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산모와 미역국

    한국인의 몸에는 미역의 DNA가 들어 있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미역과 인연을 갖고 태어난다. 삼신할미가 아기를 점지하고 태중에서 열 달 동안 잘 키워 주고 순산시켜 주었다고 해 쌀밥과 미역으로 정성껏 삼신상을 차려 삼신할미를 위했다. 출산하면 먼저 산모에게 삼신상에 차렸던 쌀과 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이를 ‘첫국밥’이라 한다. 우리에게 미역국은 ‘태어난 날’인 생일을 상징한다. 미역은 바다에서 나는 띠와 채소라 하여 해대·해채, 달달한 맛이 난다고 해 감곽이라고 한다. 산모가 먹는 미역은 ‘해산미역’이라 하여 가격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준다. 미역을 접으면 ‘명 자른다’라고 해 절대로 꺾지 않고 새끼줄로 묶어 준다. 산모에게 끓여 줄 미역을 사서 어깨에 거는 것을 보고도 왼쪽에 걸면 아들이고, 오른쪽에 걸면 딸이라고 해 미리 성별을 점쳐 보기도 했다. 산모는 미역국을 하루에 네 끼 혹은 여섯 끼를 세이레(21일) 동안 먹는다. 요즈음도 출산을 하면 반드시 미역국을 먹어야 하고 그래야 제대로 산후 조리를 했다고 여긴다. 예부터 미역국은 산후선약(産後仙藥)이라 하여 산모가 출산한 후에 바로 먹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흐물흐물거리고, 잡초라고 해 먹지 않는다. 중국의 임산부들은 피를 따뜻하게 하고 양기를 얻기 위해 미역국 대신 닭고기국을 먹었다(이규경, ‘오주연문산고’). 현대 과학자들이 산모의 미역국 효용을 증명했듯이 미역은 출산 후 상처를 아물게 할 뿐만 아니라 모유 분비를 촉진하고 피를 맑게 하는 효과가 탁월해 일찍부터 산모의 영양제로 애용됐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기 시작한 것은 그 역사가 오래됐다. 고려 사람들은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였다고 한다. 당나라 때 서견(659~729)이 지은 백과사전인 ‘초학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고려시대는 이미 “미역을 중국에 수출했으며, 11대 문종은 1058년 곽전(藿田ㆍ바닷가의 미역을 따는 곳)을 하사했고, 26대 충선왕은 1301년 미역을 원나라 황태후에게 바쳤다”고 고려사는 기록했다.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이 개성에 와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쓴 ‘고려도경’에도 “미역은 고려에서 귀천이 없이 널리 즐겨 먹고 있으며, 그 맛이 짜고 비린내가 나지만 오랫동안 먹으면 그저 먹을 만하다”고 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미역국은 임산부에게 신선의 약만큼이나 좋은 음식이라고 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미역은 독이 없고, 몸을 따뜻하게 해 답답한 것을 없애고 뭉친 기를 풀어 주며, 오줌을 잘 나오게 한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도 왕비나 공주가 아기씨를 낳으면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산모의 미역 효능에 대해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막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먹혀 뱃속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으며 오장육부의 나쁜 혈이 모두 물로 변해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미역이 산후 조리에 효험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고 했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도 미역은 성장을 촉진하고 산모에게 좋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뿐 아니라 유모나 버려진 아기를 거두어 기른 사람에게도 미역을 나누어 주었다. 정조는 1783년 걸식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열 살부터 일곱 살까지는 한 아이당 매일 쌀, 된장과 함께 미역 두 잎씩을 주고, 여섯 살부터 네 살까지는 매일 쌀과 된장, 미역을 한 잎씩 주었다. 또 가난해서 젖을 먹지 못하는 아기를 하나 데려다 키운 여자에게는 매일 미역 두 잎과 쌀 한 되, 장 두 홉을 주었다.
  • “세종이 술시중” 초고속 폐지 자초한 ‘조선구마사’ [이슈픽]

    “세종이 술시중” 초고속 폐지 자초한 ‘조선구마사’ [이슈픽]

    조선 건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태종과 세종 등 위인을 폄훼해 비난받은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2회를 끝으로 폐지된다. SBS는 26일 “SBS는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여 ‘조선구마사’ 방영권 구매 계약을 해지하고 방송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SBS는 “본 드라마의 방영권료 대부분을 이미 선지급한 상황이고, 제작사는 80% 촬영을 마친 상황이지만 지상파 방송사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방송 취소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태종 시기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사극인 ‘조선구마사’는 지난 22일 첫 방송 이후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 중국이 김치, 한복 등을 자국 문화라고 주장하는 등 ‘신 동북공정’에 나선 예민한 시기에 이같은 묘사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극중 태종이 죽은 아버지 이성계의 환영을 본 후 광기에 빠져 백성들을 학살하는 내용과 극중 명나라와 국경이 맞닿은 의주 지역에서 대접하는 음식이 중국식으로 차려진 점 등이 대표적으로 역사왜곡이란 비판을 샀다. 세종대왕인 충녕대군이 시종처럼 구석에 서서 서역신부에게 술을 따르는 장면도 논란에 올랐고 악기, 칼, 기생집 다과, 무녀의 옷 모양, 갑옷 등이 중국풍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분노한 시청자들은 방송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에 ‘방영 중지’ 및 SBS를 지상파에서 제외하라는 청원하는 글을 게재했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을 접수했다. 제작지원, 광고에 참여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불매’를 외치자 브랜드들이 ‘손절’을 선언했다. 장소 제공, 협찬 계약을 맺었던 나주시, 문경시에서도 더이상 촬영 장소를 제공하지 않고, 엔딩에서도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하는 등 ‘조선구마사’와 거리두기가 확산됐다. 제작사인 YG스튜디오플렉스, 크레이브웍스, 롯데컬쳐웍스와 SBS는 드라마가 중국식 소품과 의상 사용, 실존 인물 왜곡 등으로 논란을 빚은 데 대해 사과하고 해당 장면 수정과 더불어 한 주 결방을 통해 작품을 재정비하겠다고 했지만 모든 광고주와 지방자치단체가 제작 지원을 철회하고, 거센 반중 정서 속에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아 현실적으로 촬영을 지속하기 어렵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판타지 퓨전사극” 해명했지만… 제작사는 “역사 속 인물과 배경을 차용했지만, 판타지 퓨전 사극으로서 ‘조선 초기의 혼란 속 인간의 욕망에 깃드는 악령이 깨어난다면?’이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태종과 충녕대군, 양녕대군이 각자의 입장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대의를 향해 달려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실존 인물을 차용해 ‘공포의 현실성’을 전하며 ‘판타지적 상상력’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했으나, 예민한 시기에 큰 혼란을 드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실존 인물을 다루는 작품인 만큼 더 무거운 책임 의식을 갖고 준비했어야 마땅한데, 제작진의 부족함으로 시청자분들께 실망을 드린 점 사과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와 관련 한국홍보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이미 중국 네티즌들은 웨이보를 통해 ‘당시 한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며 드라마 장면을 옹호하기 시작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서 교수는 “최근에는 중국이 한복, 김치, 판소리 등을 자신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新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라며 “제작진 역시 입장문에서 ‘예민한 시기’라고 언급했듯이, 이러한 시기에는 더 조심했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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