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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의 출현(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7)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삼국사기」,신라가 고구려보다 앞선것으로 “오기”/고구려,현도군 몰아낸 BC75년에 성립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민족사의 주도권을 놓고 다툰「삼국시대」는 삼국간에 쉼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속에서도 민족문화의 질과 양을 드높인 시대였다.철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돼 농업생산기반이 확립된 바탕 위에 각국은 불교의 도입,중국의 왕조들및 위와의 교류등을 통해 저마다 개성있는 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서기전 1∼2세기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를 일컫는「삼국시대」의 초기모습은 상당부분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대표적인 예가 삼국의 건국연대다. 삼국사기에는 각국의 건국연대를『고구려 서기전 37년,백제 서기전 18년,신라 서기전 57년』으로 밝히고 있다.신라가 삼국중 가장 먼저 건국됐다는 이 기록은 그러나 국가의 발달단계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가발달단계란 「사람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발전에 따라 점차 국가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말한다.국내 학계에서는 한국사의 발달단계를 보통 성읍국가(부족국가)에서 군장국가­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국가(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이론을 적용하면 고구려는 한군현의 하나인 현도군을 몰아낸 기원전 75년 이미 5부족이 주축이 된 연맹왕국단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동가강 상류 비류국의 송량왕과 싸워 굴복시켰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부여출신의 주몽일파가 기존세력을 누르고 연맹체내에서 주도적인 부족으로 떠오른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구려는 이후 부여와의 경쟁,주변소국에 대한 정복등을 통해 태조왕대(53∼145)에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반면 마한의 소국 백제국에서 발전한 백제나,진한의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의 건국설화는 그 자체가 성읍국가의 형성단계에 머물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백제는 고구려 유민인 온조(주몽의 아들로 기록됨)가 한강유역에 처음 세웠으며 고이왕대(234∼285)에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했다.신라도 경주부근의 사로국에서 시작해 내물마립간(내물왕)집권기인 356∼401년에 비로소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결국 고구려·백제·신라가 1백여년씩의 시차를 두고 순서대로 고대국가를 형성한 것이다.이 3국과 비슷한 시기에 장기간 존재하던 부여·가야가 한국사의 본류에서 밀려난 것은 연맹왕국단계에서 3국에 흡수됐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3국의 건국연대를 신라­고구려­백제순으로 서술한데 대해 동국대 이기동교수는『신라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57년으로 설정한 것은 신라의 건국이 고구려보다 앞서는 것으로 조정하기 위해서이며 특히「서기전 57년」으로 못박은 이유는 그 해가 60간지의 첫해인 갑자년에 해당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 박상우작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이작가 이작품)

    ◎인류멸망의 정신사적 궤적 탐구/소설의 논리구조 탈피… 마약 등 문명 비판/“2년동안 6번 실패 끝에 발표” 90년대의 주목받는 젊은 작가군의 선두주자중 한사람인 소설가 박상우씨(36)가 기호와 생경한 미래용어가 난무하는 문명비판소설 「블랙리포트;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세계사간)를 내놓았다.「지구인의 늦은 하오」「시인 마태오」에 이은 자신의 3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지난 91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60년대식 낭만주의의 부활을 노래한 작가의 「문학적 변신」이 담겨있다.그러나 작가 자신은 「변신」이 아니라 「주제의식의 확대」이며 「소설적 운동공간의 확충」이라고 말한다.등단때부터 한번쯤 쓰고 싶었던 글쓰기의 해갈이라는 것이다. 91년 가을부터 「한국문학」「현대문학」「작가세계」등 3개 문예지에 연작형식으로 각각 분재됐던 이 소설은 「분열적 소설공법」이라는 소설형식을 취하고 있다.낯선 이 용어는 세계의 가시적 분열상을 최대한으로 수용하기위해 소설의 논리구조를 의도적으로 파괴한 작가특유의 창작그릇이다.연작발표 당시 이 작품에는 『재래식 소설형식을 그대로 둔채 그 골격을 해체하는 실험』『소설개념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평이 뒤따랐다.그러나 작가자신은 『형식및 내용이 미흡하다』며 집필을 중단했었다.이후 2년동안 6번의 실패를 거듭한끝에 첫발표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장편으로 태어났다. 이 소설은 본문에 들어가기전 일러두기를 통해 「독서의 영향으로 경미한 두통과 미열,혹은 구토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통지하고 있다.90년대말쯤에야 발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작가의 조심스러움 내지는 아직은 우리 독서풍토가 이런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자가진단때문으로 보인다. 소설은 수미상응형식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사용,전체를 미래소설로 전환시키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본문은 「사막,111통제구역」∼「사막,000사각지대」까지 10개 부문으로 나뉜다. 서기30 30년 빙하에서 19 00년대의 사막유적을 탐사하던중에 특이한 문어문집 즉「블랙리포트」를발견한다.「논리의 끝에서 내가 만난건 분열뿐이었다…」는 서두로 시작되는 이 리포트는 혼돈의 현시대를 의미하는 사막을 횡단하던 주인공이 10개의 각 통제구역에서 마주친 정치,폭력,범죄,섹스,포르노,테러,마약,종교등 위기의 문명구조가 야기하는 다양한 광기의 파편이 구토를 동반할만큼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서기 30 30년 미래세계에 의해 「인류멸망의 정신사적 궤적을 조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 이 리포트는 사막이 끝나는 곳에 있는 빙하가 희망이나 구원이 아닌 멸절의 각성을 의미한다는 역설로 끝맺는다. 박씨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동두천등 군부대주변에서 보냈다.춘천고와 중앙대 문창과를 나와 강원도 인제와 태백에서 교편을 잡았다.88년 중편 「스러지지 않는 빛」이 문예중앙에 당선돼 등단했다.요즘은 경기도 미금시 연립주택 지하에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창작작업중이다. 『이 작품에 대해 평단이나 독자들은 어떠한 심판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결과에 연연치 않겠습니다.평에 관계없이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
  • 열국시대(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6)

    ◎“고조선 붕괴후 부족간 주도권 다툼”/북쪽에 부여·고구려,남쪽엔 삼한 건립/고구려·신라·백제 3국 등장 초석 마련 강력했던 국가 고조선은 위만의 손자대에 이르러 중국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그 이후 고구려·신라·백제등 삼국이 민족사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기까지,옛 고조선의 땅에는 많은 나라들이 등장했다가는 사라졌다. 이 시기를 일컬어 단국대 윤내현교수는「열국시대」라 했으며 고고학계에서는 「원삼국시대」 또는「삼국시대 전기」라고 부르고 있다. 고조선이 쇠퇴하면서 영토내 각지의 부족들은 부족연맹체를 형성,정치적인 독립체로 성장했고 고조선이 망하자 한군현들과 싸우면서 힘을 키웠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부여와 고구려이다. 부여는 서기전 2세기쯤에 건국돼 494년 고구려에 멸망할 때까지 북만주 일대를 호령한 강국이었다.서쪽으로 선비족,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해 있어 이들과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부여는 비록 한국사의 본류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고구려·백제가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할만큼 우리 역사전개에 큰 몫을 했다. 부여의 수도인 부여성의 현위치는 중국의 장춘 또는 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는 「서기전 57년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에 의해 건국됐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그러나 고구려가 정치적 독립체로 등장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빠른 것으로 여져진다. 서기전 107년 설치된 한군현인 현토군에 「고구려현」이 속해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이 있다.따라서 「고구려」가 고조선의 행정단위 명칭이었건,부족의 명칭이었건 간에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족은 30여년만에 현도군을 쫓아낸 뒤 주변의 소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해 동방 대국의 기틀을 잡아갔다. 한반도 중북부와 북중국,만주일대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의 후예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한강이남에서는 삼한이 착실히 성장했다. 중국측 일부 사서에 서기전 2세기쯤 한반도 남부에「진」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그 실체는 아직 수수께기로 남아있다.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을 통칭하는 용어로,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진한은 대구·경북 지역에,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에 위치했다.삼한은 이후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한다. 이처럼 여러나라가 고조선의 공백을 메우려 주도권을 다투던 「열국시대」의 역사적 의의를 윤내현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고조선이 붕괴함에 따라 각지역의 거주민이 활발하게 이주·혼합하면서 민족융합과 문화융합을 이루었다.또 각국이 주도적으로 민족통일을 추구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등 우리 역사를 꽃피운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는 초석이 됐다』
  • 한사군의 실체(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5)

    ◎“한반도·중국 연결하는 무역중개지”/일 학자,한구사 왜곡위해 “식민통치 기구” 주장/낙랑·진번 등 4개군 존속기간 각각 달라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 한나라가 그 땅에 설치했다는「한사군」.「한사군」의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한이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낙낭·임둔·진번·현토등 4개 군현을 세웠다」는 기록은 중국측 사서를 인용한 삼국유사등에도 나와 있다.그러나 이들 4개 군현은 명칭·존속기간·관할구역등에서 각각 다른 변천과정을 거쳤다. 진번군은 기원전 82년 낙랑군에,임둔군은 현도군에 각각 통합됐다.또 현도군은 기원전 75년 관할구역을 한의 통치지역내로 옮겼으며 그 지역의 지배권은 토착민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결국 4개 군현 가운데 진번·임둔군은 26년만에,현도군은 33년만에 소멸했고 다만 낙랑군만이 4백여년 유지되다 고구려 미천왕때(313년) 멸망했다. 따라서 한의 4개 군현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6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변천과정이 각각 다른 4개 군현을 한데묶어 「한사군」이란 역사용어를 만든 것은 일제하 일본학자들이었다.그들은 한국사의 흐름을「고조선∼한사군시대∼삼국시대」로 엮어 한군현의 통치가 한국사 전개에 큰 역할을 한듯이 호도했다. 그들의 억지주장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한사군」이 발전해 신라·고구려·백제로 형성됐다 ▲「한사군」의 통치범위가 남해안및 영남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미쳤다는 것등이다.심지어 「조선사의 길잡이」등 일부 역사서는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시대」에서부터 잡는등 한국사를 축소·왜곡할 목적으로 「한사군」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일본학자들의 궤변은 그러나 광복이후 국내 사학자들의 연구성과에 따라 철저히 무너져갔다. 한이 위만조선 왕조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실제 점령한 지역은 일부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한의 군현이 설치된 범위도 한정돼 있었음이 밝혀졌다.또 한군현의 역할도 한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토착민을 직접 지배하는 식민통치기구였다기보다는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무역중개지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가고 있다. 다만 낙랑·임둔·진번·현도등 한군현이 실제 설치됐던 위치에 대해서는 국내학자간에 학설이 엇갈리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성과가 주목된다. 낙랑의 경우 대동강유역에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낙랑」을 고구려·부여와 같은 한민족 국가의 하나인 「낙랑국」으로 보고 있다.한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은 다른 3개군과 함께 조기 소멸했다는 것이다. 한때 「한사군」으로 불렸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 전혀 무의미하며 역사용어로도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따라서 「한사군」이란 용어는 죽은말(사어)이 돼가고 있다.
  • 위만조선의 성격(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4)

    ◎단군조선 계승한 강력한 무역국가/「위만 중국인설」로 88년이전엔 학계 홀대/철기문화 개화,무기생산·농업 활발 수천년간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만주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고조선을 멸망시킨 위만은 중국인 인가.또 그가 세운 「위만조선」은 우리땅을 점령한 외국인 정복국가인가. 위만조선을 둘러싼 이같은 의문들은 오랫동안 국내 사학계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였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우리 역사상 그만큼 홀대를 받아왔다. 부정적 평가의 주된 이유는 위만이 중국 연지방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해와 그 국적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또 그가 왕위를「찬탈」했으며 그의 손자인 우거왕때 중국 한무제에게 망해 그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케 했다는것 등에서였다. 이에따라 지난 88년이전까지만해도 고교용 국정 국사교과서에서 위만의 신분을「중국에서 고조선에 들어온 이주민 세력의 대표」로만 막연하게 밝혀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위만이 조선인이며,위만조선은 이민족의 정복국가가 아니라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이와함께 위만조선은 강력한 무역국가로도 새로이 평가받고 있다. 이같은 해석의 근거는 다양하다. 우선 위만과 그의 무리 1천여명이 망명당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있었다는 기록과 위만이 준왕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은 뒤에도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유지했으며 고조선의 토착민 중에서 고위관리를 계속 중용한 사실이 밝혀졌다.또 고조선 토착민들이 위만의 세력들에게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같은 민족의 뿌리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와함께 위만조선기를 전후한 당시대 상황을 볼때 이같은 해석은 훨씬 신빙성을 갖게 된다. 위만은 왕으로 등극할때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튼튼한 왕권을 바탕으로 청동기문화에 머물러 있던 고조선 사회에 철기를 적극 도입했다.농업생산도 늘리고 무기생산을 중심으로한 수공업을 발전시켰다.이후 위만조선은 주변국들과 활발히 무역을 벌였으며 한의 변방을 쳐 빼앗는등 자주 괴롭혔다. 반면에 중국대륙을 통일,당시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던 한은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1년넘게 고조선 백성들에게 시달려야 했다.고조선 점령후 설치했던 한사군도 엄청난 저항 때문에 수년내 통치를 포기해야 했다. 위만은 단군의 후손이 이끌던 고조선의 왕좌를 빼앗었지만 이는 단순한「정권교체」였다.오히려 그는 고조선 사회에 철기문화를 꽃피웠으며 고조선을 강력한 무역국가로 성장시켰다. 위만조선은 우리 민족이 통일된 중국세력과 처음 맞닥뜨렸던 한과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멸망하고 말았다.기원전 1백8년의 일이었다.그러나 위만조선의 백성은 한사군을 축출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에 꿋꿋이 맞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전통을 수립했다.
  • 동성연애자들이 당당해지면(박갑천칼럼)

    사방지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여자이면서 남자였다.어숙권의 「패관잡기」(패관잡기:권1)에 그얘기가 있다.그의 어미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계집의 옷을 입히고 연지·분을 발라주며 바느질을 시켰다.성숙해지면서는 사대부집에 드나들며 여시들과 함께 자는 일도 많았다.「여자」였던 셈이다. 한데,문제가 생긴다.판중추원사 이순지의 과부된 딸과 가까워진데서이다.이씨는 남편 김구석을 잃고 홀어미로 있으면서 사방지를 데려다 바느질을 시켰다.그렇게 10년이나 함께 지낸다.평소 사방지와 사통해온 여승이 사방지는 「남성」을 지녔다 하여 데려다 조사했더니 『과연!』이었다.임금은 이순지를 생각하여 이순지로 하여금 처리케 했는데 가벼이 다스리고서 놓아주었다.이순지가 죽자 이 「여성부부」는 다시 놀아난다. 사방지의 경우는 어숙권도 언급했듯이 양성을 함께 지녔던 듯하다.다만 그어미가 잘 몰라서 여성으로 기른 「여성 아닌 여성」이었다.그러니까 이순지의 딸 이씨와 사방지가 동성애를 즐겼다 할 수는 없겠다.오히려 마님과 침모의 관계를 위장한 사통이었다고 할 것이다.「필원잡기」에도 그 비슷한 얘기는 보인다. 동성애는 이상성욕의 표출이다.결코 「정상」이라 할수 없는 심리·생리현상이다.하건만 남성의 경우 3∼16%,여성의 경우 1∼3%가량이 이증세라 한다.사춘기 전후해서 그런 심리상태를 대체로 거쳐간다는 말도 있다.하여간 동성끼리 어울려 성욕에 탐닉한다는 건 섭리의 뜻일수가 없다.성서에 쓰여있듯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까닭도 성적도착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었다. 기원전 6세기 전반 소아시아 연안 레스보스 섬에서 소녀들을 데리고 산 여류시인 사포는 적어도 동성애를 내세우며 과시했던 것은 아니다.그런데 오늘의 동성연애자들은 어째서 그리 당당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그것은 「정상한」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동성연애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라』 『클린턴은 동성연애자들의 군복무허용 약속을 지키라』.이는­지난 일요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모여든 1백만 동성연애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외쳐댄 구호들이다.유방을 드러낸채 입을 맞추는 「여자부부」사진을 국내신문이 왜 실었는지 알수가 없다. 이렇게나 염치를 잃은 세상으로 된 것인가.표를 생각한 정치는 이 대처에도 약해지는 것인가.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신의 징벌을 불러들이는 양한 기관이다.만에 하나 우리에게 전염돼올까 겁부터 난다.
  • 25개팀 1차통과… 비디오 심사 진출

    ◎스포츠서울 주최,제1회 OB스카이 대학연극제/9월말 5개팀 선발 대학연극의 활성화와 건전한 대학문화의 개발을 위해 스포츠서울과 동양맥주가 공동 주최하는 제1회 OB스카이 대학연극제의 1차 서류심사결과가 나왔다.지난 4월20일 참가신청을 마친 전국의 41개 대학(전문대 포함)소속 연극팀 가운데 25개팀이 서류심사를 통과,2차 공연비디오 심사에 진출하게 됐다.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25개팀에게는 50만원씩의 지원금이 지급되며 오는 9월말 2차 공연비디오 심사를 거쳐 본선에 진출할 5개팀을 최종 가려내게 된다.본선에 진출한 5개팀은 실연심사를 통해 대상(상패및 상금 5백만원),금상(◎ 상금 3백만원),은상(◎ 상금 2백만원)각 1팀과 동상(상패및 상금 1백만원)2개팀을 선정하게 된다.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단체및 작품명은 다음과 같다.▲건국대 건대극장「쎄추앙의 착한 여자」 ▲경희대 의대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대학연합서클 라임라이트 「죄없는 사람들의 시대」 ▲서울시립대 극예술연구회 「물리학자들」▲세종대〃 「오장군의 발톱」 ▲숙명여대 마당극패 고두쇠 「뒤웅박 팔자타령」 ▲중앙대 영죽무대 「태양제국의 멸망」 ▲한국방송대 극예술연구회 「징」 ▲외국어대 외대연극회 「한씨연대기」 ▲한양대 극예술연구회 「아무도 그 일기장을 가지려…」 ▲성심여대 극예술연구회 「칠산회」 ▲수원대 천마극예술연구회 「사의 찬미」 ▲아주대 아몽극회 「넛츠」 ▲유한전문대 스□□극예술연구회 「신화 1900」 ▲인하대 극예술연구회 「만선」 ▲경남대 〃 「벤조호프가의 사람들」 ▲동국대(경주)연극회 「그들의 바다」▲동래여전 운봉극예술연구회 「최선생」 ▲부산경상전문대 연극실험실 「천지창조와 그밖의 일들」 ▲성심외국어전문대 허물라기 「꼭두」 ▲대전대 페가서스­〃 「독배」 ▲청주대 극예술연구회 「국물 있사옵니다」 ▲한남대 숭맥극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강릉대 □극회 「안내놔 못내놔」 ▲한림대 극회 「뜻대로 생각하세요」
  • “삼국통일 진정한 주체는 신라아닌 고구려”(북한 이모저모)

    ◎북 사학자 김정일대학시절 논문근거 주장 ○국내 역사학계 정설 부정 ○…북한역사학계는 삼국통일부문과 관련해 「신라에 의한 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가 진정한 통일의 주체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관련 북한 중앙방송은 11일 「삼국통일론에 대한 주체적 평가」제하의 문답프로에서 김일성대 역사학부 고구려사 연구실의 준박사 김성준의 말을 인용,김정일이 지난 60년 김일성대학교 재학중에 발표한 논문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할데 대하여」를 근거로 삼국통일의 주체는 고구려라고 주장했다. 김정일은 이 논문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주장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를 근거로 해서 수백년동안 국내 역사학계에 정설로 내려왔으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대동강이북 지역에 「해동성국」으로 불리우던 발해라는 주권국가가 2백여년동안 존속했다는 점 ▲신라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고려가 이름에서나 국가의 지향에서나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그같은 설을 부정했다. 김정일은 나아가 삼국시대 역사가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고구려의 대륙적 기질 및 외세의 도움없이 삼국통일을 이룩하려했던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영원한 한별·영원한 태양 ○…북한은 12일 김일성을 「영원한 한별·태양」으로 찬양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변함없는 충성을 강조했다. 북한은 이날 김일성의 81회생일(4월15일)을 앞두고 당기관지 노동신문에 게재한 사설에서 『김일성동지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 인민의 영원한 한별이시며 영원한 태양』이라고 찬양하면서 김일성을 단결과 영도의 중심,곧 수령으로 모신 것은 『조선혁명가들의 행운 중의 행운이고 영광 가운데 영광』이라고 주장했다. ○원산 소년야영소 개관식 ○…북한은 지난 10일 총리 강성산을 비롯한 고위 당·정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원산 송도원에 새로 건설한 「국제소년단야영소」개관식을 가졌다고 중앙방송이 보도했다. 30여만㎡의 부지에 연건평 4만㎡ 규모의 이 야영소는 3개동으로 이루어진 「돛배」모양의 야영각과 「독특한 건축양식」의 식당,1천2백여석의 관람실,그리고 겨울철에도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을 할수 있는 수영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 나무/“대기오염 정화에 최고 효과”

    ◎광합성작용외에 오염물질 흡수기능까지 가져/능수버들·소나무·잣나무 등 대표적/CO₂정화능력 녹나무가 가장 우수 공장연기 난방연료연기등에서 나오는 대기오염물질은 아무리 정화기술이 발달된다하더라도 완전히 나오지 않게할 수는 없다. 이런측면에서 볼때 대기오염물질의 발생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한 계속되는것이다. 그러면 이미 대기중에 있는 오염물질을 감소시킬 방법은 없는가.유일한 방법이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다. 나무는 광합성작용에 의한 산소생산과 이산화탄소의 흡수외에도 조직에서 대기오염물질을 흡수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때문이다.또 방음효과도 크다. 물론 모든 나무가 환경정화력을 갖고 있지만 나무별로 그 차이가 있어 가급적이면 대기오염에 내성이 강하고 정화효과도 큰 나무를 심어야 바람직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환경정화수」로까지 불리는 나무들을 살펴보면 할엽수로는 능수버들 양버즘나무 은단풍나무 가중나무 은행나무등이 있고 침엽수로는 소나무 곰솔나무 잣나무 호기테타나무 톄타소나무 일본전나무등을 대표적으로 꼽을수있다. 수령이 15년정도인 나무를 기준으로 할때 아황산가스정화능력은 일본전나무가 가장 높다.연간 1백36g을 정화하고 가중나무도 50g을 없앤다.그리고 녹나무도 연간 1백30g을 흡수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산화질소의 경우에는 녹나무가 가장높아 1백60g을 정화하고 일본전나무는 32.4g,가중나무가 13.2g을 각각 흡수한다. 그리고 중금속을 흡수하는 나무도 있다.설탕단풍나무는 연간 카드뮴을 60㎎,납은 1백40㎎을 정화하고 물히야신스는 1에이커 정도면 연간 질소 1천5백75㎏,인 3백60㎏,페놀 1만2천1백50,43.2㎏을 각각 흡수한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의 정화는 대부분의 나무가 연간 5∼45㎏정도인데 비해 녹나무는 3백34㎏이나 되고 이에 필적하는 산소를 내뿜고있어 이 방면에서는 최고다. 산림은 ㏊당 연간 6.7t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4.7t의 산소를 내놓고있다.우리나라의 산림넓이는 6백27만㏊이니까 한해에 모두 2천9백46만9천t의 산소를 생산하고 있는셈이다.사람이 1년동안 필요한 산소가 2백74㎏이니 우리나라 4천만국민이 연간 필요한 산소량인 1천96만t의 2배가 넘는 산소량을 우리산림이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이밖에 나무는 소음방지에도 큰 역할을 한다.활엽수를 심어놓으면 그 옆의 소음은 25% 감소하고 9m가 떨어졌다면 50%가 준다. 나무별로는 같은 나무라도 잎이 크고 조직이 단단하면 좋은데 단풍나무류가 10∼12㏊까지 감소시켜 가장 적합한 수종으로 꼽힌다. 이에따라 환경처는 지난해부터 실시해온 환경정화수심기운동을 올해부터는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우리나라에서 잘자라는 나무를 중심으로 42종을 선정,올해 식수기를 전후해 적극 권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대기오염도가 심하나 나무가 거의 없는 공단지역이나 도심을 중심으로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하고 업체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할 방침이다.그리고 실적에 따라 모범업체를 선정,표창할 계획이다.
  • 압구정 「오렌지족」 누가 책임질 것인가(사설)

    이 해괴한 족속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다.「오렌지주」이란 이름의 이들에 대한 일부보도가 좀 과장된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는데 급기야 히로뽕 상습으로 쇠고랑까지 찬 걸보면 그들의 존재가 실증된다.이런 족속이 왜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제 나이 스무나뭇살에 쾌락과 환락을 쫓다못해 마약중독의 종말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이제 구제불능이 되었음을 뜻한다.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의 책임은 우선 그들의 부모에게 물을 수 밖에 없다.외제거나 그에 준하는 고급승용차,하루저녁에 수십만원의 유흥비,맡겨진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논다니생활을 그들에게서 감당해준 그들의 부모가 첫째 책임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들은 대부분이 「8학군」출신에 「병역면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그런 힘좋은 능력을 가진 부모는 권세가이기도 할 것이다.그런 부모의 능력이 아이들을 철저하게 멸망시키는데 기여한 셈이므로 필경 부정하고 부당하게 이룬 부와 권세가 스스로의 아이들을 망치는 업보를 치렀을수도 있으므로 그 인과응보의 준엄함에 외경을 느끼게도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의 악행성은 그들이 번식시킨 악의 바이러스가 건강하고 순수한 죄없는 다른 체질에 옮아들어 암의 소인을 만든다는데 있다.「오렌지주」의 보도가 나간 이후 전국의 호기심많고 분별력 약한 청소년들이 무작정 오렌지족동네를 찾아 탐험하려는 요구를 자극했다고 해서 경종의 효과보다 역효과를 불렀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도 짐작되는 일이다. 제자식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식까지 함께 못쓰게 만드는 이런 부모의 각성이 제발 있어야 할 것이다.젊은 아이에게 고급승용차를 사주고 수백만원의 용돈을 주는 부모는 그것만으로죄를진셈이다.채임을져야한다. 마치 악의 온상처럼 상징되는 「압구정동」도 유감스럽다.주민은 오히려 피해자이고 그곳에 모여든 악덕 상인이 병을 창궐시킨다는 것은 알고있다.그러나 오렌지족이 아니라도 그 무서운 구매력과 소비성향이 온상역할을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주민들도 이런 일은 각성해야 한다.그런 것이 피해의 간접원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지역 문화가 부정적이고 퇴폐적인 것만은 아니다.진취적이고 현대적이다.편리하고 유쾌하고 건강하며 첨단적이어서 세련된 거리문화를 지니고 있다.그 에너지가 곬을 잘못 탄것이 문제일 뿐이다.모든 청소년을 자기 자식으로 여기는 어른다운 사려가 도시행정이나 치안에서 반영되고 시민의식으로 정착되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건강한 기상과 호기심의 기운을 발전적인 방향으로 분출시킨 「압구정문화」의 창출을 위해 다함께 나서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 최익현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조약 체결되자 “항일의병” 횃불/74세 거유,“조약은 무효” 전북 태인에서 거병/대마도 유배뒤 순국… 전국적 배일투쟁 “점화”/“나라위해 생사초월” 무성서원연설 민족혼 일깨워 노옹의 항쟁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다.그가 이끄는 의병의 병력과 무기도 보잘 것 없었고,정부측의 반응도 냉담했다.정부는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오히려 해산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면암 최익현­1906년 6월4일부터 14일까지의 「뜨거운 날들」은 선생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붉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요원의 불꽃으로 번지게 한 의병항쟁의 불씨를,선생이 지폈다는 뜻만으로서가 아니다.선생은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으며,인권도 중요하고 민권도 중요하지만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치며 이같은 독립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출생 당대 유학의 거봉으로 74세나 된 선생이,국권회복을 부르짖고 구국창의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일관된 삶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출생한 면암은 일찍이 이항로 문하에서 「애국여부 우국여가」의 사상을 이어받고,그 이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철저하였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그 부당함을 상소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표되자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 ▲1905년 소위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재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등 「오적」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린 일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다. 1906년 3월15일.선생은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 사람들과 이별,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상소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참담함을 맛보지않을 수 없었다.판서 이용원·김학진·참판 이성렬·이남규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란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 고석진의 소개로 「태인사람 임병찬」을 만나게 된다.임병찬은 임실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이후 두달 남짓동안 거의가 준비됐다.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2백여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6월4일.태인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불꽃에 민족혼을 일깨운 의병들은 이날 정읍에 무혈입성,총칼과 탄환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했다.또한 일제에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후 정읍에서 흥덕으로,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읍내로 행군하였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명을 넘게 되었다.힘을 얻은 「면암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 가려 했으나,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남원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의병은 8백여명으로 불어났다. 6월11일.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고종의 칙지를 전해왔다.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면암은 『이미 소장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그리고 다시 남원진입을 꾀했다. ○고종,의병 해산령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경군)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차례나 보내왔다.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되었다.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 뿐이었다. 6월14일.선생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그리고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선생은 1907년 1월1일 단식 끝에 한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비정신의 귀표 역사학자 박성수교수(정신문화연구원)는 면암의 항일운동과 관련,『선생은 1876년 개항 이후 줄곧 외침을 경고했으며 이에 맞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국론을 통일해 일치단결하는 것밖에 없다고 부르짖어 온 분이었다』며 『그러므로 선생이 70고령을 무릅쓰고 무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는데 외딴 섬 대마도에서 순국하셨다는 소식은 온 국민의 가슴에 칼을 꽂은거나 다름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고 평가했다. 선생의 항쟁 이후 호남을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의병들이 일어난 점만 보아도 당시 선생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서,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이 입증되는 셈이다. 선생은 순국직전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죽음에 있어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으면 삶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나 이제 죽을 것이니 황상에게 올릴 마지막 소를 비밀히 간직하였다가 본국으로 돌아 가는 날 전해주길 바란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의 영구행렬 앞에는 「춘추대의 일월고충」이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 대마초 연예인 근절책은 없는가(사설)

    또 대마초 연예인이 구속됐다.덕분에 지난 연말 가요계의 「떠오르는 별」로 자리를 굳힌 젊은 가수가 함정에 빠져서 신년벽두부터 곤두박질을 하고 말았다.이 마의 풀이 잊혀질만하면 나타나 성장중인 연예인들을 수렁에 빠뜨리곤 하는 일이 안타깝다. 번번이 거듭되는 이 덫에 연예인들이 계속해서 희생되는 일이 어처구니없고 안됐다.이번에 구속된 가수는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젊은이다.이번의 대마초도 미국인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미국과 한국은 대마초에 대한 인식에 약간 차이가 있다.그때문에 경계심이 다소 해이했었는지도 모르겠다.그러나 그런 것으로 변명이 될 수는 없다.또 연예인 처럼 무서운 경쟁과 인기관리에 힘을 들여야하는 직업인은 까딱 잘못하면 슬럼프에 빠질 염려까지 있어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그러므로 말초신경을 취한 상태로 유지해야만 한다는 이론도 있다. 연예인이 그런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대마초같은 향정신성 물질의 중독성 효능에 끊임없이 유혹을 받는다고 해서 사회가 그것에 관대해질 수는 없다.대마초가 한걸음 나아가면 마약이 되고 그것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된다.개인만 망하는데 그치지않고 온갖 범죄의 근원이 되어 사회를 부패시키는 원인이 된다.그러니 그것을 허용할 수는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합의한 이 규범에 연예인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 더구나 한번 별로 떠오르기 시작한 연예인에게는 수천수만의 청소년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며 따르게 마련이다.그런 인기인의 몸가짐은 일거수일투족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 어린 사람들이 흉내낸다.대마초연예인이 생기면 같은 짓을 흉내내려는 청소년들도 많이 생길 것이다.비록 구속되기는 했지만 절정의 인기를 누린 그들의 행동을 한번쯤 흉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청소년이 적잖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단속은 엄격해야 한다.한때 구속되었다가도 다시 브라운관에 나타나 화려하게 인기인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그래가지고는 연예인들이 대마초를 겁내지도 않고 청소년들조차 그것을 경계하지 않고 모방하고 싶게 할 뿐이다. 춤동작에서 매무시까지의 저급한 풍조와 대마초 습관까지 예사로 수입해들이는 교포출신 연예인이 있다는 일도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방송매체들의 각별한 관리가 필요한 것이 이 대목이다.자라나는 세대를 병들지 않게 예방하기 위해서도 엄격하고 사려깊은 대처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 백제/일 지배위해 왕자 파견/최재석교수,한일문화학술대회서 주장

    ◎고위관리 장군 승려 화공까지 보내/461년부터 2백년간 대화위 통치 백제는 일본점령지인 대화위(오늘날 일본중부 나라지역) 경영을 위해 AD 461년(개로왕7년)부터 멸망할때까지 2백여년동안 총독으로 왕자를 파견했으며 동시에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했다는 새학설이 나왔다.이는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가 최근 「고대한국문화의 일본전파」를 주제로 연 한일문화국제학술대회 발제를 통해 제기됐다.백제의 일본지배설을 처음으로 다룬 발제는 최재석교수(고려대 명예)의 「대화위 파견 백제왕자의 거처와 대화위왕의 거처」.최교수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대화왜왕과 백제총독의 거처비교를 통해 양자의 종속 지배관계가 확고했음을 밝혔다.이와 더불어 파견된 관리들의 기록을 검토,구체적 경영사례를 분석하고 있다. 최교수는 대화왜왕의 궁전은 5세기까지는 띠(아)로 지붕을 엮다가 7세기중엽에 이르러 전나무껍질(회피)로 이은 보잘것 없는 것이어서 왕궁이라기 보다는 왕의 거처라는 표현이 적당하다고 지적했다.당시 왕궁이 불과 20∼30년만에 잦은 이동을 할만큼 나무기둥을 땅에 박아 지은 허술한 건축양식을 보인데 반해 백제총독이 묵었던 난파관은 2백년이상 한곳에 위치하고 있을 만큼 견고했다는 것이다.따라서 난파관은 돌기초 위에 기둥을 세워 지은 기와집이었다는 점에서 백제와 대화왜와의 힘의 관계를 알수 있다고 주장했다. 백제가 대화왜 경영을 위해 파견한 총독은 왕자였으며 그밖에 일정기간 파견되는 관리와 부정기적으로 파견되는 관리그룹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AD461년 개로왕의 동생이 최초의 총독으로 파견된 다음 505년(무령왕5년)에는 왕자가 파견되는등 모두 8명의 왕자가 대화왜경영을 위해 일본에 간 기록이 있음을 들추어냈다. 한편 대화왜에 본격적으로 경영팀이 파견된것은 무령왕때.513년(무령왕13년)에 행정을 맡은 오경박사와 군사를 맡은 백제장군이 파견됐다는 최교수는 오경박사의 일본행을 정기파견으로 해석했다.그래서 3년후인 516년 새로운 오경박사로 교체됐으며 백제장군은 부정기파견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1년8개월만에 귀환했다는 것이다. 이들 파견 관리들중 우두머리는 백제의 16계급관등중 3·4위 관등의 높은 관리였던 것으로 미루어 백제가 당시 대화왜 경영을 중시했음을 알수 있다는 것이 최교수의 주장이다.또 이들의 파견때는 승려·사공·와박사·화공등도 파견하여 불사를 건립케 했는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588년(위덕왕35년)에 창건한 법흥사를 꼽았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이밖에도 「일본구주의 환웅상과 일본속의 단군문화」(박성수),「단군신화의 뿌리와 계통」(황목박지),「팔번신앙과 한국과의 관계」(중야번능),「한국고대문화의 일본 전파」(최인학),「향춘신사와 신라신」(오야정남),「고조선 문화권과 문화전파」(권태원),「한국과 맺어져 있는 일본 영언산의 산의 문화」(장야각)등이 발표됐다.
  • 쉽게 풀어 쓴 고고학책 많이 읽힌다

    ◎「고고학에의 접근」·「백제사의 이해」·「고대문화의 흐름」 등 잇달아 출간/중진학자들 한국인 입장서 기술/인류·민속학 등 인접학문과 연계도 시도 우리 선사시대의 뿌리를 캐고 역사시대로의 끈을 잇는 고고학연구의 현황과 전망을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알리려는 서적의 간행이 활발하다.김원용,윤무병,한병삼,황용훈등 일본교육을 받은 고고학계의 이른바1,2세대에 이어 제3,4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에 의한 이러한 시도는 높이 평가된다.특히 외국학자들의 이론을옮겨 전달하기에만 급급하던 종전의 학문풍토와 달리 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고고학설의 전파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호응도 만만치 않다. 이같은 흐름을 대표하는 책으로는 「한국고대문화의 흐름」(임효재),「한국인의 발자취」(김병모),「고고학에의 접근」(최몽룡),「백제사의 이해」(최몽룡·심정보),「한국선사고고학」(조유전·배기동외),「고고학이론입문」(배기동)등.이들은 미국이론을 번역한 「고고학개설」(김원용)등으로 우리나라 고고학의 지평을 열었지만 여건상 큰 학문적업적을 남기지 못한 1,2세대와 달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대학및 국립연구단체에서 연구하고 있는 40∼50대의 중진학자군으로 돼있다.3,4세대 저작물의 특징은 한국인의 본질을 알고자하는 일반인들의 역사전반에 대한 관심에부합하면서 인접학문인 고고학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이 있다.특히 이같은 노력은 어려운 학문인 고고학의 대중화를 꾀해 독자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공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여행하는 열쇠역할까지 해준다. 임효재(서울대)교수의 「한국고대문화의 흐름」(집문당)은 그간 잡지나 학술지등에 발표했던 글들을 한데 모아 정리한 것.일반독자나 대학초년생을 대상으로 최근 30년동안 이루어진 우리고고학의 연구성과를 보여준다.전5장중 제1장 한국고대문화이해의 사전지식편은 고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현대고고학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그리고 과학적인 연대측정방법을 사진과 표등을 이용해 쉽게 풀이했다. 특히 고고학의 새로운 경향편에서는 시간·공간적 좌표에 매달리면서 발굴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전통고고학」에서 일명 「고인류학」이라고 불릴정도로 그러한 유물을 낳게한 사회와 문화의 성격규명을 목표로 하는 현대 고고학을 소개하고 있다.또 전곡리구석기유적등을 중심으로 최근 30년간의 고고학적 발굴수확을 살펴보는 정열을 기울였다. 김병모(한양대)교수의 「한국인의 발자취」(집문당)는 85년도에 나온 초판을 수정·보완해 펴낸 개정판으로 그동안의 자료발굴과 국내연구업적,미흡한부문을 손질해 내놓은 것.82년도에 제작된 KBS­TV의 「한국인,당신은 누구인가」를 진행하면서 다루었던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땅은 이렇게 열렸다,맨처음 이땅에 자리 잡은 사람들등 선사시대를 추적 발굴하는데 역점을 두고있다. 그리고 한국인의 체질과 언어,한국신화의 고고·민속학적 연구,한국인과 어우러져 살아온 동물들,민간신앙등 기존의 내용에다 한국인의 무덤쓰기(묘제)등을 추가했다.어려운 전문용어는 피하면서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기본 지식을 고고학적,인류학적,역사적근거위에서 마련해 보고자 시도한 책이다. 「문명의 성장과 멸망」이라는 부제가붙은 최몽룡(서울대)교수의 「고고학에의 접근」(신서원)도 조나단 하스의 원시국가의 진화」,고든 차일드의 「인류문명발달사」등 10편의 중요한 고고학관계문헌을 소개하면서 지은이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미했다.여기에 「역사학과 고고학」,「미국고고학연구의 동향」등 3편의 글을 추가했다.이중 「중국동북3성답사유적」은 선사시대 한·중교류와 한민족의 기원을 고찰한 것이다. 「한국선사고고학사(조유전·배기동외)의 경우 3,4세대학자들의 합작품으로구석기부터 해방후까지 우리 고고학계의 연구업적을 총망라,그동안의 발전상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연구서이다.이밖에 「중국의 고고학」(최무장·건국대),「원시국가의 진화」(최몽룡옮김),「백제사의 이해」(최몽룡·심정보),「문명의 여명」(배기동옮김),「고고학이론입문」(배기동옮김)등도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련의 연구업적으로 꼽힌다.
  • 공약에 도의진작 안보여(박갑천칼럼)

    놀라운 사건이 하많은 세상이다 보니 웬만한 일쯤 늑대 나왔다고 외치는 소년의 소리쯤으로 치부되고 있다.하지만 지난 30일밤 경찰청이 4시간 동안 전국적으로 실시한 검문검색에서 각종 치안사범 5만3천5백4명을 검거했다는 소식까지 그렇게 들어넘겨도 되는 것일까.경찰이 친 그물에 안걸린 범죄까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범죄의 소굴 속에서 살고 있구나 싶어지면서 새삼 오금이 저려오는 것 아닌가. 3대 정당이 내놓은 대통령 선거 공약을 훑어보면서 이 「사건」을 생각한다.하건만 그에 대응할 수 있는 항목이 선뜻 눈에 안들어온다.다만 제1당의 공약 가운데 「인간성 회복을 위한 생활교육 강화」와 「국민이 안심하고 살수 있는 사회환경 조성」이 부속 항목으로 매달려 있을 뿐이다.정신의 황폐화와 도덕성 추락에 따르는 각종 범죄의 만연에 대한 언급은 화려한 청사진을 펼치는데 있어 거추장스러운 혹이었던 것일까. 우리에게는 관포지교란 말로 많이 알려진 제나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관중이 쓴 책이 「관자」.그 첫머리에 사유가 나온다.나라를떠받치는 도의적인 4대강령을 뜻하는 네 줄기로서 예·의·염·치를 가리키는 말.『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고 했던 그였건만 물질의 풍요만으로는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네 줄기중 한 줄기가 끊기면 나라가 기울고 두 줄기가 끊기면 나라가 위태로우며 세 줄기가 끊어지면 나라가 엎어지고 네 줄기가 다 끊어지면 나라는 멸망한다.기운 것은 바로잡을 수 있고 위태롭게 된 것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엎어진 것 또한 다시 일으킬 수 있다.그러나 멸망한 나라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이같은 관자의 말에 비춘다면 오늘의 우리 사회는 몇줄기가 끊어져 있는 것일까.꼬리를 무는 갖가지 비리·부정·폭력·살인·사기·패륜…의 사건들.마치 「범죄와의 전쟁」선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잡아들이고 잡아들여도 끝이 없는 범죄.왜 그럴까.마지막 줄기마저 다 끊어져 가는듯,정신건강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도덕·윤리는 땅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대증요법 같은 치안력으로써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80년대 후반 번쩍 흑자시대에 우리의 심성들은 졸부의 못된 것으로 더 많이 기울었다는 말도 있다.무엇이 진실로 「잘 사는 것」이며 어떤 것이 진실로 「살기 좋은 나라」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국민소득이 제아무리 높아져도 정신의 건강이 뒷받쳐지지 못하면 그것은 도리어 불행의 씨앗으로 되는 것.그런데 어째서 3당의 공약에는 이 대목이 홀시된 것인지 알수가 없다.열거된 「한국병」의 원인들도 다 건강하지 못한 정신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 약물중독된 노래는 듣기 싫다(사설)

    또 연예인들이 대마초흡연을 하다가 적발되었다.마약이나 대마초를 단속만 하면 연예인들이 무더기로 걸려드는 일에 우리는 환멸을 느낀다.몽롱한 눈으로 취한듯이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무대를 향해 열광하는 10대들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그들은 영웅이 없는 시대에 연예인을 우상으로 삼아 청소년기의 한때를 환호하며 보내는 우리의 자녀들이다. 연예인 생활이 스트레스가 심하고 약물로라도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야 절정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연예활동의 속성이라는 이론이 있다는 것은 안다.그러나 그렇지 않고도 좋은 연예활동을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그래야만 재능이 나온다는 것도 「설」일뿐이다.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해악이 사회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면 해서는 안된다. 약물중독이 본인의 인생을 멸망시키고 마침내는 폐인이 되어 쓰레기같은 종말을 만든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더 말할 것도 없다.자신의 잘못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은 업보이므로 어쩔수 없다 치고 문제는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다.특히어린 세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엄중하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오늘날 청소년에게 집단으로 영향을 미치는 세력중에서 대중예술만큼 지대한 것이 또 있는가.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력으로 인기를 얻고 영화를 누리고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이 연예인들이라면 그들에게는 그들의 소중한 수요자인 청소년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특히 우리의 청소년처럼 정제된 고급문화의 기회에 접할 기회는 부족하면서 분별없이 외래의 저질문화에만 한없이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그 영향과 해악이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노래방이 전 세대의 오락으로 공개되어 있고 눈만 뜨면 TV가 갖가지역할로 가수를 동원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가수도 단순한 가수로 끝나지 않는다. 최근에만 해도 뉴키즈소동이 사회의 지축을 흔들듯 했었다.감성을 이성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미숙한 그들에게는 우상에 몰입하는 정도가 전인격적이다.하는 짓마다 닮고 싶어하므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약물복용을 한다면 그것이 독약이라도 따라 할 지경이다.그러므로 잊을만하면 약물소동을 빚는 연예인들을 우리는 용서하기 힘들다. 그런 뜻에서는 사회가 너무 만만하게 대처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우리에게는 든다.그런 근거로는 약물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이 별로 오래지 않아서 멀쩡한 모양새로 브라운관에 복귀하고 연예활동에 별로 지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약물중독이 인생을 멸망시키는 것은,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런 이치로 보면 중독혐의가 무고가 아닌 이상 계속 중독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는데도 금방 방송으로 되돌아오곤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그런 일이 반복되면 약물사용에 대한 청소년의 죄의식을 점점 약화시키고 불감증을 증폭시키게 된다.약물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는 듣기도 싫고 아이들에게 듣게 하기도 싫다.그런 혐의가 남아있는 연예인들이 슬며시 안방으로 스며드는 일에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이런 정서에 관계인들의 성찰이 있기를 빈다.
  • 방송들이 「불륜」을 경쟁하다니(사설)

    TV방송들이 앞다퉈가며 안방에 불륜의 기운을 쏘아대고 있다.방금 진행중인 3개 TV의 드라마들에는 한결같이 아름다운 젊은여인과 혼외관계를 누리는 남편을 소재삼고 있어서 시청자들로부터 지적을 받고 있다.사람사는 세상에는 온갖 상상을 넘어서는 사건들이 일어나므로 「불륜」도 드라마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을 시청률경쟁삼아 흥미위주로 확대시키고 아무런 여과없이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일은 곤란하다. 오늘날의 우리 생활에서는 TV가 안방이나 거실에서 가족으로 동거하는 일에서 거의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다.그때문에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어른 세상을 엿보고 흉내내고 싶어 하는자녀,기회만 있으면 지루한 일상에서 자극을 받고싶어 하는 젊은이,끊임없이 탈선을 유혹받는 중년이 혼재된 가족이 함께 앉아 감상하는 것이 TV다.때로는 조손이 함께하는 3대가,더러는 시부모와 며느리가 나란히 그 앞에 앉기도 하는 상자가 TV다.그 상자에서 불륜이,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인 것을 보여줄까를 다투는 소재로 동원된다는 것은 공기능을맡긴 방송이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가나 방송국으로서도 할말은 있을 것이다.전체를 놓고 보면 죄악이나 탈선은 마침내 멸망하는 것으로 끝나고 선만이 긍정적인 끝을 본다는 결과가 준비되어 있거나 갖가지 인생에 보탬이 될 교훈적 요소가 마련되어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사회교육적 역할까지 충분히 해내리라는 것도 짐작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한회마다 독립성을 지니고 있고,부정적인 영향이 더 쉽게 침투되게 마련인 대중매체로서의 TV의 기능을 고려한다면 전체적인 완성도만을 평가할 수가 없다.가장 안좋은 것은 청소년에 미치는 영향이다.불륜까지도 미화하여 동경하게 만들고,퇴폐적이고 부정적인 어른 세계를 당연하고 예사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도덕적 불감증부터 길러주는 결과를 낳는다.어른 또한,가정은 신성하고 순결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회의하게하고 타락과 부도덕의 행태가 잠재의식에 침투하여 사물에 대한 평가나 가치관이 은연중에 무너지게 된다.부부가 근거없는 불신의 시선에 휘말리기도 하고 부정에 대한 감수성에 회의를 느끼게도 할수 있다.무엇보다도 사회에 대한 인식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가속하여 우리의 주변이 점점 황폐해져간다. 어쩌다가 일어나는 일을 방송매체가 다룸으로써 사회에서 그 정도가 훨씬 빠르고 심하게 진행되기도 하며 악화시킬수도 있는 것이다.그것이 정보화시대의 주역인 방송매체가 지닌 거대한 부정적 기능인 것이다. 그런 방송매체가,불륜을 일상의 관심처럼 다루고 자녀를 둔 가장이 외도하는 상대에게 잠자리에서 본처를 흉보는 장면들이 안방에서 예사로 재연되는 따위 드라마는 그냥 무심히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비록 밤늦은 시청시간대라고는 하나 아이들을 완벽하게 격리할 수 있는 생활양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 이런 식의 시청률경쟁으로 전파를 낭비하고,우리의 공동의 삶을 거칠고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방송사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여론에 신중하게 귀기울이기를 당부한다.
  • 서인도­유럽문화 작품속에 접목

    ◎노벨문학상 수상 월코트의 생애와 문학세계/수상소감/“서인도문학 우수성 인정에 뿌듯” 내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때 무척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내생각에는 트리니다드 출신작가 V S 나이폴이나 에이레 출신 시인 시머스 히니가 받을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내가 받게됨으로써 서인도문학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됐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나는 어렸을때부터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꿔왔고 이제 그 꿈을 이뤘다.그러나 이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열심히 창작에 몰두할 계획이다.또 상금을 받게되면 고향에 연극스튜디오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카리브해 민요·토속신화를 시로/영국인 아버지·아프리카 출신 어머니 복합전통 계승/은유속의 강렬한 이미지가 특징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영연방 세인트 루시아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데릭 월코트씨(62)는 서인도·유럽·흑인문화,흑·백문화간의 통합이라는 주제를그의 작품속에서 일관되게 그려왔다. 한림원은 월코트의 수상이유를『일생을 통해 탁월한 역사적 안목과 다양한 문화를 접속시킨 훌륭한 시들을 발표해 서인도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고 밝혔다.그의 시들은 아름다운 운율과 다양한 이미지·은유,언어(영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으로 알려져왔으며 특히 지난 90년에 발표된 「오메로스」는 『64장으로 된 장엄한 카리브 서사시』라는 극찬을 받았다.이밖에도 그는 독창적인 희곡들을 다수 발표,이를 자신이 창단한 트리니다드 극장에서 직접 연출하는등 희곡부문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오기도 했다.특히 「원숭이 산에서의 꿈」(67)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이작품은 캐나다와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되었다.그리고 트리니다드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근 20년간의 역사를 다룬 또 다른 희곡 「마지막 카니발」(86)이 곧 연극으로 만들어져 스톡홀름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월코트는 영국인 아버지와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후예로 식민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이라는 복합적인 문화에서 성장했다.따라서 자신의 복합적인 문화적 환경들을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속에 그려 내용과 형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카리브해에 살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흑인 후예인 그는 이런 문화적·형식적인 상이점등을 강력하고도 독창적으로 작품속에 용해시켜내는 문학적 업적을 남기는데 공헌했다. 그는 다양한 스타일과 배경,주제들을 즐겨 다루어왔다.인종주의,제국주의의 부당함,열강들의 멸망,그리고 개인적·문화적·정치적인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도 주제로 등장한다.그의 작품세계는 은유와 이미지가 다양하고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세인트 루시아와 자메이카에서 수학한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면서도 크레오어와 서인도지방의 방언을 작품속에 가능한한 많이 도입,지방방언의 아름다움을 살리려는 남다른 노력을 쏟는등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그는 또 작품의 소재와 모티브를 서인도제도의 민담과 토속신화,전설등에서 많이 가져옴으로써 이곳 문화를 외국에 자연스럽게 소개시켰다. 그는 희곡 「도핀바다」(1954) 「원숭이산에서의 꿈」(1967)등에서 세인트 루시아지방의 전설들과 신화,그리고 식민지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식민정치가 인간의 영혼에 끼칠 수 있는 해악등을 강력히 떠올렸다.반면 그의 시들은 희곡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종문제,식민지문제등을 다루고 있지만 형식상으로는 희곡보다 영국적인 전통을 많이 따르고 있다.대표시집 「또 하나의 삶」(1973)은 자전적인 장시로 이전의 역사적·사회적인 주제들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접근들을 보여준다. 18살때 2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를 한 그는 그러나 62년에 시집 「푸른 밤에」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는 문학이외에도 미술과 언론등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활동을 해온 인물로 알려져있다.1962년 현재 부인인 마가레드 루스 메일리드여사와 재혼했고 세자녀를 두었다. ○월코드 연보/1954년 희곡 「도핀바다」로 데뷔 ▲1930년 서인도제도 세인트 루시아 출생 ▲세인트 메리대및 자메이카 웨스트 인디즈대 수학 ▲1948년 시집 「젊은이들을 위한 비문」으로 데뷔 ▲1953년 트리니다드로 이주 ▲1954년 희곡집 「도핀바다」출판 ▲1959년 트리니다드 극문학연구회 설립 ▲1962년 시집 「푸른 밤에」로 유명해짐 ▲1971년 민속극 「원숭이 산에서의 꿈」으로 오비상 수상 ▲1986년 희곡 「최후의 카니발」출판 ▲1988년 퀸즈 골프 메달 시부문 수상 ▲현재 미보스턴대 영문학교수 재직 ○대표작/장편서사시 「오메로스」로 영예 ◇희곡=▲도핀바다(1954) ▲이오네(1957) ▲티 진과 형제들(1958) ▲원숭이산에서의 꿈(1967) ▲오 바빌론!(1976) ▲회상(1979) ▲판토마임(1981) ◇시=▲푸른 밤에(1962) ▲캐스터웨이와 시들(1965) ▲걸프와 시들(1969) ▲또다른 삶(1973) ▲모자반(1976) ▲스타애플왕국(1980) ▲행복한 여행가(1982) ▲한여름(1984) ▲오메로스(1990)
  • 한국역사인가 중국주변사인가/발해사 소속문제 재론

    ◎송기호교수,한·중수교 계기 남북한·중·일·러 학계 입장정리/남북한/고구려 계승국… 한국사 편입 당연/중국/영토내 존재했던 지방정부 간주/러·일/역사규명보다 자국영향연구 초점 발해사는 한국사인가,중국주변사인가. 한중수교를 계기로 양국 학계가 견해차를 보여온 발해사의 소속문제를 놓고 학계의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발해사를 둘러싼 남·북한과 중국·러시아·일본학계의 입장을 정리한 서울대 송기호교수(한국사)의 글이 「역사비평」가을호에 실린것. 송교수는 「발해사,남북한·중·일·러의 자국중심해석」이라는 기고문에서 발해는 중국만주,러시아 연해주,우리나라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고구려계와 말갈계 사람들이 세운 나라지만 자체적으로 남겨진 사료가 전혀 없어 민족주의적 입장에 선 관련국들의 자의적 해석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뒤 각국의 발해관을 요약·정리하고 있다. 송교수는 우선 중국이 역사의 범주를 현재 중국영토 안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 모두로 잡고 있으며 이는 소수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의 분리독립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중국의 역사관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은 발해가 고대 중국 동북일대에 살았던 속말말갈족이 주체가 돼 세운 나라로 독립국이 아닌 일개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비해 러시아학자들은 발해사를 독립된 역사로 보고 있다.이는 발해사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송교수는 보고 있다.또 러시아학자들의 연구는 발해 전체보다는 연해주지방으로 국한돼있고 발해사 자체의 규명보다는 연해주지방의 과거역사규명에 초점을 맞춰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영향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북한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가임을 들어 한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한에 비해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왕성한 북한학계의 경우 60년대 만주 발해유적의 직접답사·발굴을 근거로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고 있다.80년대이후 북한내의 유적조사에 착수한 북한은 『발해의 모든 것이 고구려적인 것이고 당나라로부터 영향받은 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주장을 아직까지 수정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 송교수는 또 북한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대조영이 고구려 왕실출신이라는 점,그리고 발해멸망과정에 도식적인 계급투쟁설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북한의 주체사관과 어떻게 부합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80년대이후 본격화된 한국의 발해사연구는 문헌사학분야에 집중돼있다.그리고 북한과 마찬가지로 최치원의 발언과 「삼국유사」의 기록만을 근거로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발해사연구는 발굴조사와 지리고증,일본과의 대외관계에 집중돼있다.그러면서 발해와 일본의 외교관계를 천황제적 질서속에서 보고 역시 자국중심의 해석에 치우쳐있다. 송교수는 『민중사학이 고대사에 적용될 수 있다면 발해사는 말갈족의 다수성을 근거로 볼때 만주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이는 만주가 역사적으로 중원과 별개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사의 일부는 분명히 아니다』고 부연하고 있다. 송교수는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관련국 학자들이 『발해사가 과연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하는 점보다는 그 실체 규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그동안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을 교정하는 데 집착했던 우리학계도 이제 한중수교를 계기로 한반도 북부의 부여·고구려·발해등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학계와의 「학문적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종말론/2백50여교회에 신도 2만명/휴거주장 교세 실태·피해사례

    ◎다미선교회서 88년부터 올10월28일 예수재림 유포/교리에 심취 재산헌납·가출·사직 급증/1명은 자살… 이혼 등 가정파탄 속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이른바 「시한부종말론」에 대해 수사당국의 내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10월28일 휴거」를 주장해온 「다미선교회」의 이장림목사(44)가 갑자기 출국,깊은 관심을 자아내고 있다. 그동안 수사당국이 밝혀낸 시한부종말론의 내용과 종단실태·피해사례등을 살펴본다. ▷종말론 내용·교회실태◁ 예수가 공중재림하게되면 종말론추종자들은 휴거(들림)돼 공중에서 7년을 지내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멸망한뒤 다시 내려와 천년왕국에서 살게된다는게 종말론의 요지라할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지난88년 8월 이장림목사가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우고 「다미선교회」를 설립한뒤 급격히 퍼져 현재 2백50여개 교회가 이같은 종말론을 추종하고 있는것으로 밝혀졌다.신도수는 2만여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5천여명은 광신도인것으로 수사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오는 10월28일 「휴거」가 온다고 주장하는「다미선교회」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본부를 두고 국내에 90여개,해외에 1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있고 신도수는 1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또 나머지 1백40여개 교회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목사·전도사등이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의 「다베라선교회」 「지구촌선교회」등 20개교회는 별도의 건물을 갖추고 5백∼1천명의 신도를 두고 있으나 나머지 1백20개교회는 신도 50여명 미만의 「가정교회」들이다. ▷피해사례◁ 그동안 수사당국에 확인된 피해등 사례는 24건,39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명은 종말론을 맹신한 신도때문에 자살 또는 사망했고 △직장 사직7명 △학교중퇴·무단가출21명 △재산헌납6명 △가정불화 이혼3명등으로 분석됐다. 또 성별로는 남자27명,여자12명이었고 연령별로는 10대9명,20대10명,30대8명,40대11명,50대 1명등으로 남자들이 많고 대부분 40대이하인것이 특징이다. 자살한 송경호씨(31·전주시 완산구)의 경우 부인 김모씨(29)가 「다미선교회」활동에 빠져 가정에 소홀하자 부부싸움끝에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고 정찬봉씨(47·농업·전남 영암군)는 『안수기도로 신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다미선교회」 영암지부장 박홍순씨등 4명으로부터 구타당해 숨졌다. 또 광주D여고 서무계장으로 있던 정모씨(40)는 지난해부터 시한부 종말론에 심취해 지난6월 직장을 그만둔뒤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전직경찰관인 이모씨(48·광주시 서구)는 부인의 권유로 「다미선교회」에 심취해 지난1월 경찰직을 그만두고 아파트등 재산을 처분하고 종말론을 믿고 학교를 그만둔 두 아들등과 선교에 나섰다. 주모군(18)은 부산성화선교회에서 북한선교자로 지명받자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북한으로 가서 순교하겠다』는등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다 정신과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다. 이밖에 개인택시운전사 김모씨(43·경북 구미시)는 종말론에 심취한 지난3월부터 하루에 영업은 1∼2시간만하고 차량에 「휴거」를 선전하는 현수막을 달고 선교활동을 벌이고있다. 김모씨(43·회사원·마포구 합정동)는 부산 「다베라선교회」에 심취해 매일철야 기도에 나서는 부인과 자식에게 교회에 나가지 말것을 종용하다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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