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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배소송 흡연자 패소 확정] “흡연은 자유의지” 판단… 폐암 종류따라 인과관계 여부 갈려

    [담배소송 흡연자 패소 확정] “흡연은 자유의지” 판단… 폐암 종류따라 인과관계 여부 갈려

    오랜 기간 담배를 피우다 암에 걸린 흡연자들이 제조회사인 KT&G(옛 담배인삼공사)와 국가에 배상을 요구한 국내 첫 ‘담배 소송’에서 대법원이 10일 흡연자 측의 패소를 최종 확정했다. 재판부는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 담배 제조·설계·표시상의 결함, KT&G 측이 담배가 해롭지 않다고 광고하거나 유해성을 은폐해 불법행위를 저질렀는지 등 쟁점이 됐던 사안에 대해 모두 흡연자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우선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에 대해 “폐암은 흡연과의 관련성이 높은 것부터 관련성에 대한 근거가 없는 것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원고들에게 발병한 비소세포암, 세기관지 폐포세포암(모두 폐암)과 흡연 사이에 통계적 관련성을 기초로 한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연령, 면역체계 등 개인별 신체 특성까지 고려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흡연이 아닌 환경오염물질 등 다른 요인에 의한 발병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이번 판단은 ‘흡연과 암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상고심에서 판단 대상이 된 원고들에 대해서는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재판부는 항소심에서 인과관계를 인정받은 4명에 대해서는 법리 판단을 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흡연과 역학적 인과관계가 높다고 알려진 소세포암(3명), 비소세포암 중 편평세포암(1명)에 대해서는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반면 비소세포암, 세기관지 폐포세포암에 걸린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5년 동안 이어진 소송에서 당사자가 앓고 있는 폐암의 종류와 이에 따른 특성 등을 검토해야 인과관계 여부를 따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폐암 종류 등을 판단해 설사 흡연과의 인과관계를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손해배상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가 선고에서 “KT&G가 제조·판매 과정에서 유해성을 은폐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담배 제조·설계·표시상 결함이 있다고 볼 증거도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담배의 결함 여부에 대해 “흡연이 폐를 포함한 각종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사회 전반에 널리 인식돼 있다. 흡연 여부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며 “추가적인 설명 등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표시상 결함이 인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제조회사의 불법행위 등에 대해서도 “KT&G가 제조한 담배가 이전에 소비됐던 담배들에 비해 특별히 위해성이 높다고 볼 수 없다”며 “유해성과 관련해 사회 인식을 넘어선 정보를 은폐했다고 볼 증거도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KT&G의 불법행위 등 기존에 제시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제조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판례가 앞으로의 소송에서도 판단 기준이 될 전망이다. 일반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피고 측의 불법 혹은 위법행위가 인정돼야 배상을 받을 수 있다. 한편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금연운동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원고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담배회사에 면죄부를 주는 시대에 역행하는 판결”이라면서 “판결에 굴하지 않고 KT&G에 계속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원고 측 대리인 정미화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담배회사에 수차례 자료를 요청했지만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거절당해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었다”며 “담배회사가 어떻게 유해성을 속여왔는지 증거를 모으는 등 앞으로 사법적·입법적 절차를 모두 동원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피고 측 대리인 박교선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담배회사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제조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면서 “15년간 끌어왔던 소송이 마무리된 만큼 이제 흡연으로 인한 배상책임 다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서울광장] 권력의 비정상부터 정상화하라/박찬구 논설위원

    [서울광장] 권력의 비정상부터 정상화하라/박찬구 논설위원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선출된 권력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리다. 유권자의 한 표를 얻기 위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후보는 공약을 내걸고 심판을 받는다. 굳이 헌법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권력의 주인은 국민이다. 선거 한철 그럴듯한 공약으로 표를 얻고서 당선이 되면 공약(空約)으로 저버리는 행태는 분명 국민의 믿음과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에 어긋나는 비정상과 비상식이다. 박근혜 정부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국정의 핵심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공공부문과 법질서, 기업활동, 노사분야 등에 자리 잡은 잘못된 관행과 제도를 정상화시키겠다는 것이다. 비정상의 사전적 의미는 제대로가 아닌 상태 또는 바르거나 떳떳지 못한 상태로 요약된다. 사회 각 분야의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데야 굳이 토를 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국정 과제가 설득력과 추진력을 얻으려면 위임받은 권력과 그 주변의 비정상부터 정상화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는 신뢰와 진정성이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뿐이 아니다. 반값 등록금과 중·고교 무상교육,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무상진료, 군 복무기간 단축…. 대선 공약의 잇따른 파기와 후퇴는 과연 우리의 선거 문화와 정책 정당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백번 양보해 치열한 공약 전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공약의 현실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후진적인 선거 문화를 꾸짖고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강조하는 매질 정도에 그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권력의 주인인 국민에게 공약 파기와 후퇴에 대한 대통령 본인의 진정성 있는 해명과 사과는 있어야 하는 게 선출된 권력의 도리라고 본다. 그래야 제대로 되고 떳떳한 정상의 절차라고 할 수 있다. 국정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여당도 비정상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국회 제1당의 원내대표는 입법부의 요직이며 권력이다. 민생·개혁 입법을 추진하고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끊임없이 야당과 협상하고 타협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럼에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는 야당 대표에게 ‘너나 잘해’라고 막말하며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는 여야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가르는 비정상의 정치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막말·편파 방송으로 질타를 받아온 일부 종합편성채널의 재승인 과정은 또 어떤가. 심사위원의 구성에서부터 심사 기준과 항목에 이르기까지 방송통신위원회의 면죄부·봐주기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이들이 야당 인사에게 하는 절반 정도라도 여권과 여당 인사에게 독설을 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결과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횡행했던 권언유착의 망령을 되살려서는 공익과 공정성을 추구해야 할 미디어 본연의 역할이 질곡과 비정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정권과 그 주변은 혹여라도 방송을 헤게모니의 수단으로 삼겠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미디어가 살아야 여론의 광장이 열리고, 여론이 물 흐르듯 흘러야 권력의 정당한 행사도 가능하다. 대선에 개입하고 간첩수사 증거까지 조작한 국정원의 행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비정상의 극치라 할 만하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윗선을 수사하지 않고 도마뱀 꼬리를 자르는 꼼수로 기존의 조직을 유지하려 든다면 더 큰 국민의 심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인사와 조직을 비롯해 일대 혁신을 이룬 연후에야 국정원의 정상화를 운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그 출발점과 목적지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회복이라야 한다. 현 정권이 주창하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진정성을 가지려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겸허한 믿음의 확인, 그리고 그 믿음에 부응하는 실천과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권력과 그 주변이 우선 정상화하지 않고는, 민주적 가치가 회복되지 않고는 비정상의 정상화도 요원한 일이다. 정치적 레토릭, 그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지 모른다. ckpark@seoul.co.kr
  • 이성민 “연기파라고요? 맘에 안들면 벽 긁는 반성파”

    이성민 “연기파라고요? 맘에 안들면 벽 긁는 반성파”

    하나밖에 없는 여중생 딸 수진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던 상현(정재영)은 어느 날 범인의 정보가 담긴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그는 찾아간 곳에서 18세 소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죽어 가는 딸의 동영상을 지켜보는 소년 철용을 발견한다. 순간 이성을 잃어 우발적으로 철용을 죽이고 만 상현은 공범을 찾아 나선다. 수진의 살인 사건을 담당하던 형사 억관(이성민)은 피해자에서 살인자가 된 상현을 뒤쫓는다. 10일 개봉하는 ‘방황하는 칼날’은 사회적인 통념에 대해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딸을 죽인 소년을 살해한 아버지의 ‘개인적 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법은 옳은 것일까. 그런 사회적 화두들이 끊임없이 관객을 따라다닌다. 이런 질문을 관객과 함께 풀어 가는 인물이 억관이다. 배우 이성민(46)은 “아버지 상현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법을 따라야 하는 딜레마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저도 중학생 딸을 둔 아버지로서 누군가 범인을 알려 준다면 경찰에 신고하기보다 상현처럼 일단 움직였겠죠. 아빠로서 법만 믿고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었을 거예요.” ‘용의자 X’, ‘백야행’ 등을 쓴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영화는 스릴러보다는 사회 고발성 영화에 가깝다. 이성민도 초고에 나온 거칠고 폭력적인 형사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고뇌가 담긴 캐릭터로 방향을 바꿨다. “극 중 상현에게는 목표가 정확하지만 억관은 애매하고 복잡한 측면이 크죠. 그도 딜레마에 빠진 인물이니까요. 의상에서도 방황하는 내면을 부각시키려 노력했어요. 제목처럼 혼란스러운 정의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것은 2년 전 MBC 드라마 ‘골든 타임’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신념이 강한 외과의사 역을 맡으면서였다. 하지만 알고 보면 스무살 때부터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연기파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고 재수생 시절 덜컥 극단에 들어간 그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군 제대 뒤에도 연극을 반대하는 부모님과 ‘원수’가 되면서까지 극단 활동을 이어 갔다. “주변에선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 없는 제가 어떻게 배우가 됐는지 의아해해요. 물론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힘들어 고향으로 돌아간 적도 있고 가장이 된 이후 경제적 책임감에 잠을 못 이룬 적도 있죠.” 서른다섯살 때 대학로의 극단 차이무에 진출한 이후 드라마와 영화로 영역을 착착 넓혔다. 연극 외의 작품은 처음엔 아르바이트 삼아 손댔다. 간간이 자존심 때문에 출연을 거절하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 만난 작품이 ‘골든 타임’이었다. 그는 “대표작이 생기면서 더 이상 월세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건 감사할 일이었다”며 웃는다. 그는 인터뷰 도중 ‘숙제’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자신의 연기가 맘에 들지 않으면 벽을 긁으며 반성한다는 그에게 평생 숙제는 “완벽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도전할 기회는 많다. 최근 드라마 ‘미스코리아’, 영화 ‘관능의 법칙’ 등에 출연했던 그는 하반기에도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빅매치’ 등을 찍는다. “아직도 제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일이 힘들어요. 민망해서 손발이 오그라들어요.(웃음)”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든 스크린에 인간미를 투영시킬 수 있는 배우로 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글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사진 안주영 기자 jya@ seoul.co.kr
  • 면죄부 받은 ‘황제노역’ 판결

    면죄부 받은 ‘황제노역’ 판결

    대법원은 2일 이른바 ‘황제노역’ 판결로 비난을 받아 온 장병우(60) 광주지방법원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2004년 4월 골프 접대로 물의를 빚은 인천지법원장이 사퇴한 이후 10년 만의 불명예 퇴진이다. 2010년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일당 5억원의 황제노역 판결을 선고한 장 법원장은 2007년 대주그룹 계열사인 HH건설과 아파트 매매 거래를 한 사실 등이 최근 불거지자 지난달 29일 사표를 제출했다. 대법원이 장 법원장을 징계위원회에 넘기지 않고 그대로 사표를 수리하면서 제기된 의혹은 규명되지 않아 ‘면죄부’ 논란이 예상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아파트 거래 등 제기된 의혹을 검토했지만 예규에서 정한 ‘직무에 관한 위법행위’가 있었다고 볼 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면서 “아파트 대금은 본인 소유 예금과 차용금, 금융기관 대출금으로 충당했고, 거래 시점과 판결 선고 시점을 고려했을 때 직무와 관련된 편의 제공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폐지 논란이 일고 있는 지역법관(향판) 제도에 대해 “올 상반기 안으로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해 내년 정기 인사부터 적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日帝, 9년간 6500여명을 산 채로 해부”

    지난 달 29일 독일 베를린의 쾨르버 재단본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30만명 이상을 학살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달 초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에선 중국 헤이룽장성에 남아 있는 일제 ‘731부대’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일제의 만행과 731부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731부대가 생산한 살상용 세균 탓에 중국인 20만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는 게 중국 정부의 주장이다. 정일성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은 ‘책과 인생’ 4월호에 기고한 ‘731부대의 인체실험 면죄 내막’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적시했다. 저자는 쓰네이시 게이치의 ‘사라진 세균전부대 관동군 제731부대’ 등 저작물과 그간 공표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731부대가 히로히토 일본왕의 칙령으로 1932년 창설됐으며, 반인륜적 생체실험이 종전 이후 도쿄전범재판소에 기소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소련과의 군비경쟁에 나선 미국이 세균전 자료 등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은밀한 뒷거래를 벌인 탓이라는 것이다.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남쪽 베이인허에 ‘관동군방역반’이란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부대는 패전 직전 1000개가 넘는 사람의 머리·팔·내장 표본을 인근 송화강에 갖다버리고 50명가량의 살아있는 인체실험자를 파묻는 방법으로 교묘히 은폐에 나섰다. 애초 연구소가 아닌 제재소를 짓는다는 소문을 내 인체실험자는 통나무를 뜻하는 ‘마루타’로 불렸다. 교토제국대 의학부를 수석 졸업한 세균전문의 이시이 시로가 총책임자로 히로히토의 막내동생도 이 부대의 장교로 복무했다고 한다. 부대 규모는 군인 1200여명 등 한때 3560명까지 늘었고, 300~4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실험실을 갖췄다. “날마다 2~3명, 많게는 5명을 산 채로 해부했다”는 증언에 따라 9년간 희생자는 6500명으로 추정된다. 희생자 명단에는 이청천, 심득룡, 이기수, 고창률 등 독립운동가로 보이는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도 담겨 있다. 저자는 “인체실험 기록을 미국에 넘겨주고 면죄부를 받은 가해자들은 의대와 국립연구소, 병원, 제약회사에서 전후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우뚝 섰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내러티브 리포트] 전남 신의도 염전마을 가보니…

    [내러티브 리포트] 전남 신의도 염전마을 가보니…

    지난 21일 국내 최대 천일염 산지로 알려진 전남 신안군 신의도. 소금 생산 개시일(28일)을 1주일 앞둔 시점인데도 척박한 소금밭에는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만 있었다. 이맘때쯤 염전 다지기 작업인 ‘로라질’에 한창이어야 할 염부(염전 인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초 불거진 ‘염전 노예’ 사건 이후 전남경찰청 ‘도서인권보호특별수사대’가 민간인권단체인 전남장애인인권센터와 신의도에 상주하며 염부들을 상대로 면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부 염전주는 임금 체불 사실이 드러날까 봐 염부들을 섬 밖으로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7일 시작된 도서인권보호특별수사대의 염부 면담 조사는 수십 년간 공공연하게 인권유린이 묵인된 이곳에서 최초로 이뤄지는 시도다. 수사대는 현재까지 신의도 내 염전 239개를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를 30% 정도만 마친 상태다. 이날 면담이 이뤄진 염부 A(38)씨도 무허가 직업소개소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A씨는 서울 노원구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군대까지 다녀왔지만 오랜 노숙생활로 사회성이 매우 취약했다. 2011년 신의도에 들어온 A씨는 이듬해 염전 주인이 노환으로 숨지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한 달간 일자리를 구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했다. 결국 전에 일했던 염전 주인의 친척 집 염전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난달 염전 노예 사건이 불거진 이후 부랴부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근로계약서에는 A씨에게 염전철인 4~10월 매달 100만원씩을 지급한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A씨는 염전철이 아닌 11~3월에도 박씨의 밭일과 소금을 옮겨 싣는 일을 도왔다고 증언했다. A씨는 원형탈모증을 앓고 있었으며 치과 치료를 받지 못해 어금니가 모두 빠진 상태였다. 지난 3년치 임금만 제대로 받았어도 치료할 수 있었을 터였다. 신의도에서 만난 염전주들은 면담조사에 대해 볼멘소리를 했다. “한 명당 면담이 5~6차례 이뤄지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 염부들이 자진해서 염전을 떠났다”고 말했다. 수사대 측은 “대부분 지적장애가 있거나 오랜 노숙생활로 사회성이 떨어진 상태라 마음을 열려면 5~6차례 정도 만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염전 노예 사건의 진원지로 질타를 받으면서 마을 주민들은 외지인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인력난이 가중된 탓에 생계가 어렵다며 원망했다. 염전주 B(60·여)씨는 “염전 일은 일반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라며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직업소개소와 염전주의 관계에서 인력브로커들이 ‘갑’”이라고 말했다. 15년간 부모에게 물려받은 염전을 운영해 온 C(41)씨는 “구인광고를 통해 인력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허가 직업소개소를 통해서라도 사람을 구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신의면사무소에서 만난 염전주협의회 박영호 회장은 “300명에 이르던 염부들 수가 70~80명으로 감소하는 등 섬 전체가 뒤숭숭하다”면서 “염전주의 인권 의식을 바로잡으려고 지난달에 이어 25일에도 교육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안군의 본격적인 천일염 생산을 알리는 ‘채렴식’도 다음 달 15일로 미뤘다고 했다. 목포에는 염전주에게 노숙인이나 지적장애인들을 알선하는 직업소개소가 130여개나 있다. 이 중 70%는 무허가 직업소개소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본인이 어떤 경로로 신의도에 왔는지 기억하는 염부가 손에 꼽힐 정도라 장애인들을 알선한 직업소개소를 단속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밝혔다. 인권센터 관계자는 “지자체나 고용노동부가 장애인을 고용한 염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임금 체불, 인권유린 등을 단속해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다”면서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한 평 남짓한 방에 재우면서 가혹행위나 임금을 체불한 염전주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신안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시론] 한·일 역사문제, 세계여론을 우리 편으로/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시론] 한·일 역사문제, 세계여론을 우리 편으로/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한·미·일 3국이 오는 24~25일 네덜란드 핵 안보정상회의 기간에 3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게 확실시된다. 미국의 요청에 응한 형태이긴 하지만 한·일 양국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공통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장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제 서울과 도쿄에 기회의 창이 열렸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미·일 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은 미국의 강력한 요구와 아베 총리가 역사인식과 관련해 국내외 비판여론으로 역풍을 맞자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는 변화된 태도를 보인 것에 더해, 한국 역시 우리 때문에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부담이 막중하다고 인식하고 유연한 외교 자세를 보여준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이 일본에 오판의 메시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우리 정부는 대화의 문을 열어뒀으며 요구 사항도 줄곧 같았다. 한국정부의 ‘침략과 식민지배, 위안부 강제동원으로 한국 사람에게 고통을 준 것을 인정하고 사죄한다’는 무라야마·고노 담화의 핵심정신을 계승하고, 위안부문제 등 과거사의 조속한 해결에 진정성 있게 임하라는 것이었다. 아베 총리가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는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위안부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을 비롯해 한·일 간에는 해결해야 할 과거사 문제가 산적해 있다. 따라서 아베가 이번 회동을 과거사 부정의 면죄부로 오판한다면 한·일 관계는 3국 정상회담 이전보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베 총리는 취임한 이후 뒤틀린 역사인식의 표출로 한국의 여론을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일 양국 정상회담에는 언제든지 응할 자세가 돼 있음을 세계 여론에 과시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지속해 왔다. 이러한 아베 총리의 얄미운 행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이 고집스럽게 한·일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는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한때 한국을 난처하게 했다. 그러나 작년 말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미국의 여론은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으로 일변했다. 한국과 중국의 비판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미·일동맹의 강화에 전력을 쏟아 온 아베 총리로서는 야스쿠니참배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비판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UN인권이사회에서의 국제사회로부터 싸늘한 시선 앞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집단적자위권의 행사를 헌법해석 변경으로 강행하려는 아베 총리에 대해 자민당 내부에서도 ‘아베는 어리석은 도련님 같다’라는 비판이 나왔다. 전후체제로부터의 탈피를 기치로 내걸고 쏟아 냈던 역사인식과 헌법 개정의 움직임에 대해 국내외에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수세에 몰리자 고노담화의 수정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즉 국내외의 여론에 밀려서 태도 변화를 보인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 역사문제는 본질에서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일본이 역사문제의 해결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한·일 양국 간 관계에서 일본에 압력을 가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곤혹스러웠다. 따라서 이번 회동이 성사된 배경은 우리 외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일 간 역사문제의 본질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의 여론을 우리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외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회동을 기회의 창으로 살리기 위해 우리 정부는 자신 있게 한·일 수뇌회담을 추진할 필요가 있겠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참배 이후 세계 여론은 한·일 양국의 행보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으므로 일본이 역사문제에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면 또다시 세계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사설] 종편 이제라도 방송 공공성 되돌아 보라

    종합편성채널(종편)에 대한 재승인을 놓고 말들이 많다.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불공정·막말방송으로 지탄받아온 TV조선, JTBC, 채널A 등 종편에 면죄부를 안겨줬다는 것이다. 방통위가 낮은 기준의 재승인 심사 기본계획을 마련한 데 이어 종편심사위원회 또한 친여·보수성향 인사들로 대거 채워지면서 심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다. 무엇보다 불공정 보도와 과다한 보도프로그램 편성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재승인 거부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방통위 심사에서도 공히 지적된 문제다. 우리는 지난해 두 종편사가 ‘5·18 북한군 개입설’을 무책임하게 보도했다가 공식 사과까지 한 부끄러운 사건을 기억한다. 방송의 공적 책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몰역사적인 행태에 국민은 분노했다. 목적이 앞선 선정적 보도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종편은 ‘영혼 없는 방송’이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종편의 과도한 보도 편성 비율은 ‘종합’ 편성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TV조선과 채널A의 지난해 보도프로그램 편성비율은 40%를 넘는다. 전년에 비해 몇 배가 늘었다. 그럼에도 심사위는 “각 사가 사업계획서에 제시한 방송 분야별 편성비율을 준수하라”고 타이르는 식의 얘기만 하고 있다. 그러니 ‘재승인 시나리오’라는 말도 나올 법하다. 방송생태계를 어지럽히는 비정상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이를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으니 종편은 값싼 보도프로그램을 양산해 내는 것 아닌가. 자극적인 정치·시사토크 프로그램으로 방송을 메우려 한다면 국민의 건전한 여론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종편은 2011년 ‘신문·방송 겸영’ 특혜 논란 속에 어렵사리 출범했다. 이제 지난 3년을 차분히 돌이켜 볼 때다. 많은 사람들이 종편이라면 일단 막말과 편파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게 사실이다. 방송 진행자도 출연자도 막말에 가까운 센 단어를 쓰는 것을 무슨 쓴소리, 곧은소리를 하는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을 정도다. 두 달 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놓고 종편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할지 벌써부터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뻔하다. 시사·보도를 특화한다며 대놓고 정파적 보도를 일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다. 방송의 생명이 공공성과 공정성에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괴물방송’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편은 스스로 언론의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방송의 기본 품격을 지켜나가기 바란다.
  • 與 지도부도 남재준 사퇴론 ‘솔솔’… 野 “해임·구속 수사해야” 총공세

    與 지도부도 남재준 사퇴론 ‘솔솔’… 野 “해임·구속 수사해야” 총공세

    국가정보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과 관련해 새누리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번 의혹에 대해 국정원을 두둔해 온 새누리당으로서는 증거 조작 혐의가 선명해지면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전날 일부 비주류 의원들의 남재준 국정원장 사퇴 주장에 이어 12일에는 지도부 일각에서도 공식적으로 사퇴를 언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6·4 지방선거의 악재가 될 것을 우려해 국정원과 거리를 두는 차원의 ‘출구 전략’으로 해석된다. 심재철 최고위원 이날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국정원이 보여준 일탈과 무능이 매우 심각하다”며 “국정원의 철저한 쇄신을 위해서는 남 원장에 대한 책임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황우여 대표도 “검찰 수사는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엄정·신속하게 마쳐져야 함은 물론 그에 따른 엄중한 문책과 처벌이 따라야 한다”고 처음으로 문책을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황 대표는 “사전 문책론을 펴기보다는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린 뒤 책임 소재를 논하는 게 온당하다”고 수위를 조절했다. 하지만 국정원 출신인 이철우 의원은 방송에 출연해 “간첩 조작을 했다면 국정원장이 아니라 수사라인 모두가 책임져야 하지만 여러 증거 중 하나가 고의성이 있었다면 국정원장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남 원장을 감쌌다. 반면 국회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정청래 의원은 “국정원장의 지시 없이는 이 같은 엄청난 위조 행각은 불가능하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남 원장을 파면하고 검찰은 남 의원을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파상공세를 폈다. 전날 국정원을 항의 방문했던 정 의원은 “검찰이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대공수사실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면 증거 인멸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서 “이번 압수수색은 형식적으로 면죄부를 주기 위한 출구전략”이라고 주장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여권이 남 원장 해임을 선거 국면에서 반전카드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열린세상] 제2의 안현수가 나와서는 안 된다/김용환 서울대 초빙교수·전 문화부 차관

    [열린세상] 제2의 안현수가 나와서는 안 된다/김용환 서울대 초빙교수·전 문화부 차관

    안현수 귀화파문, 김연아 판정시비 등 시끄럽고 탈도 많았던 소치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매순간 최선을 다한 선수단에 박수를 보낸다. 소치 올림픽은 4년 후 평창올림픽 개최를 앞둔 우리 체육계에 그 어느 대회보다 많은 숙제를 남겨준 대회였다. 특히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는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따며 러시아에 20년 만의 종합우승을 안겨준 반면 우리나라는 애초 목표인 톱10 진입에 실패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올림픽은 선수 개개인을 넘어 국가대표선수로 상징되는 치열한 국가경쟁의 장이다. 국민은 밤잠을 설쳐가며 한마음으로 자국선수들을 응원하고 공감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대표인 안현수와 한국대표선수가 경합을 벌이면 누구를 응원하겠느냐는 질문에 우리 국민의 70%가 안현수를 응원하겠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비리, 파벌, 승부조작 등 체육계의 정정당당하지 못한 관행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다. 체육계로서는 할 말도 많고 억울한 마음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자신이 원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국가로 귀화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변명에 앞서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4년 앞으로 다가온 평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면 안현수 사태로 추락한 국민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순간을 모면하는 미봉책이 아니라 뼛속까지 바꾸는 체질개선이 요구된다. 우선, 체육단체 운영과 선수 선발·관리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2013년도 대한체육회 예산 1356억원 중 정부 지원은 1202억원에 이르러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 홈페이지 어디에도 어떤 기준으로 얼마가, 어디에, 어떻게 지출되고 있는지 나와 있지 않다. 선수선발 기준이나 선수별 입상경력 등 관련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선수 선발을 둘러싸고 편 가르기가 일상화되고, 탈락 선수들은 의구심과 불평을 터트린다. 이들 정보만이라도 국민에게 제대로 공개된다면 체육 현장의 비리는 상당부분 예방되고 자정노력도 촉진될 것이다. 종목별로 분산된 정보와 기준을 표준화하고 이를 투명하게 국민에게 제공하는 ‘체육통합정보망’을 조기에 구축해 상시적인 국민 감시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체육계의 폐쇄성이 혁파돼야 한다. 그동안 전문 체육인 중심의 체육단체 운영은 전문성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으나, 지나친 순혈주의는 파벌을 조장하고 자기 혁신을 저해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미 체육은 단순한 운동경기를 넘어 교육, 방송, 용품, 패션, 건강 등과 융합해 발전하고 있다. 스포츠와 여타 분야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먹거리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외부 인사들의 체육단체 참여는 장려해야 한다. 체육단체 운영에 체육계 인사가 과반을 넘지 않는 5대5 원칙을 제시한다. 취약 종목에 대해서는 히딩크 감독과 같이 국내 연고가 없는 해외 지도자를 확충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우승지상주의를 대체할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동안 승리는 모든 잘못을 덮어주는 면죄부였다. 승리를 위해서는 비리를 저지른 지도자도 재기용되곤 했다. 이런 지도자 밑에서 선수들은 악습을 이어받게 된다. 체육계 비리에 대해서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의 무관용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아직도 체육 현장에서는 체벌이나 폭언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경험론이 우세하다. 획일화된 합숙훈련으로 인한 갈등도 비일비재하다. 강압적 훈련문화를 탈피하면서도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함께 사회와 더불어 호흡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은퇴 선수에 대한 정부와 체육계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고 나면 동·하계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8번째 국가가 된다. 국제경기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스포츠 강국이다. 이번 안현수 사태를 계기로 체육계의 불공정한 관행들이 일소돼 명실상부한 스포츠 선진국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 정부위원회 ‘공무원 수준’으로 윤리 강화

    정부위원회 ‘공무원 수준’으로 윤리 강화

    ‘전문가가 참여하는 의사결정체’와 ‘옥상옥’(屋上屋), ‘공무원의 책임 회피용 면죄부’란 양면성을 가진 정부위원회의 윤리성이 강조된다. 안전행정부는 5일 민간 위원이 직무와 관련해 비리를 저지르면 공무원과 같은 수준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위원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 사립대 교수 A씨는 2003년 지방자치단체 영향평가위원회 재해분과심의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골프장 등의 재해영향평가 심의 과정에서 용역비 명목으로 억대의 금품을 받았다. A씨는 징역 4년에 추징금 1억 5265만원을 선고받았지만 사립대 교원인 자신을 공무원과 같은 수준으로 처벌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적이 있다. 안행부의 이번 개정안은 이 같은 사례를 막고자 인허가, 분쟁 조정 등을 맡은 민간 위원이 뇌물 수수 등의 비리를 저지르면 공무원과 같은 수준의 벌을 받도록 했다. 그동안은 제안서 평가위원이 입찰 참여 업체로부터 3000만원의 뇌물을 받으면 배임수재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하지만 개정안에 따라 민간 위원도 공무원과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되면 가중처벌이 적용돼 5년 이상의 징역형 또는 수수액 2~5배의 벌금형에 동시에 처해진다. 민간 위원을 공무원과 같은 수준으로 보는 것은 안건 관련 사항에 한정되며 평소 생활과 신분에 대해서까지 공무원의 책임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고 안행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또 행정기관장이 공정한 위원회를 운영하도록 민간 위원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면직 또는 해촉 기준을 사전에 마련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직무와 관련해 비위 사실이 있거나 사회적 물의 등에 연루된 위원에 대한 해촉 기준이 의무화되면서 민간 위원의 책임성이 강화됐다. 안행부 측은 “기준이 마련되면 민간 위원이 부당하게 면직되지 않고 공정하게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정부위원회가 무분별하게 설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격과 기능이 유사하거나 서로 관련성이 있는 위원회는 본위원회와 분과위원회로 연계해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정권 말기면 회의도 거의 열지 않는 위원회가 무차별적으로 늘어나 ‘위원회 공화국’이라 불리는 것을 막기 위한 조항이다. 안행부 관계자는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민간 전문가와 국민이 참여하는 위원회 숫자가 늘어난 것은 사회가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증거”라며 “위원회 수를 줄이는 것 뿐만아니라 효율화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진술조력인제도 시행 두 달째] 오락가락 진술 막고 신빙성 더하는 중개자… “중립성 확보가 중요”

    [진술조력인제도 시행 두 달째] 오락가락 진술 막고 신빙성 더하는 중개자… “중립성 확보가 중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아동·장애인의 심리 상태는 불안 그 자체다. 안절부절못해 행동이 산만해지기도 하고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정도가 심하면 지적 능력과 감각 기능에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의사표현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조사 및 재판 과정에서 진술이 번복되거나 왜곡될 소지가 크다. 도입 두 달째를 맞는 ‘진술조력인’ 제도에 대해 알아본다. 2004년 A양은 유치원에서 40대 남성 B씨에게 여러 차례 성추행을 당했다. A양은 본인이 성추행을 당한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 채 사건담당 검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B씨가 코뿔소 놀이를 같이하자고 했어요. 놀이를 하는데 ‘빨간색 삼각 수건’이 사용됐어요…” 하지만 검사는 “코뿔소 가면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삼각 수건이 놀이에 이용될 수 있느냐”고 되물으면서 A양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검사는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아 기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 A양이 성추행을 당한 일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B씨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말았다. 당시 검사는 성폭력 피해 아동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피의자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삼각 수건이 사용된 맥락에 접근하지 못하고 코뿔소 놀이와 삼각 수건 사이에 연관성이 떨어진다며 피해 아동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했다. 이때 삼각 수건이 코뿔소 놀이에 꼭 필요한 물건인지, 놀이를 하면서 삼각 수건을 누가 들고 있었는지, 또 삼각 수건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을 차근차근 물었다면 피의자의 범행 사실을 밝혀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진술조력인’ 제도가 도입됐다. 진술조력인은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려운 아동 및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과 행동을 초동수사 단계부터 재판 과정까지 수사기관, 재판부 등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개자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19일 법무부는 진술조력인 48명을 뽑았다. 제도가 도입된 지 두어 달이 지나면서 진술조력인을 요청하는 사례가 조금씩 늘고 있다. 25일 진술조력인으로 일하는 이경미(51·경력 13년)씨와 황혜미(35·8년)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언어장애, 지적장애를 안고 있는 아동·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언어·놀이치료 등을 실시해왔다. 다양한 유형과 특성을 가진 장애인들의 언어적·비언어적 표현 안에 숨어 있는 정서 상태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다. 황씨는 “장애 아동들을 상대로 심리치료를 진행하면서 남자 어른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거나 특정 선생님을 가리키면서 본인을 만졌다고 이야기한다든지 등 추행을 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행동을 하는 아동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진술조력인은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피해자를 면담해 피해자 개인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때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간파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이씨는 “경찰 조사 전 40~50분에 걸쳐 피해자의 ‘지남력’(시간, 장소 등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 진술 능력, 평소 생활습관 등을 통해 그의 심리를 알아야 경찰관, 검사에게 조사 중에 어떤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형을 계속 만진다든지 의자를 앞뒤로 끄는 등 사전면담에서 피해 아동 및 장애인이 보여주는 사소한 행동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술조력인만 아동·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것은 아니다.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피해자에게 유사판례 제공, 피해자 증인신문 때 보호절차 요청 등 법률 서비스를 지원하는 법률조력인과 진술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심신 안정을 돕는 신뢰관계인이 있다. 법률조력인과 신뢰관계인은 피해자 편에서 일한다. 하지만 진술조력인은 피해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씨는 “진술조력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중립성 확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간의 언어치료 경험을 살려 피해 아동 및 장애인의 여러 발달 기능들을 파악하고, 그 내용을 수사기관 등에 제대로 전달함과 동시에 조사자의 질문을 피해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개하는 일만 해야 해요. 만일 진술조력인이 어느 한쪽의 편에 선다면 피해자가 자칫 잘못된 증언을 할 수가 있지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말하거나 기억나지 않으면서 기억난다고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지도 못한 채 피해자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실제 성범죄자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거든요.” 이런 이유로 진술조력인에게는 이른바 ‘비(非) 소유적 경청’ 자세가 필요하다. 황씨는 “특히 성폭력 피해 아동을 대할 때는 ‘우리가 이 자리에서 네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들을 준비는 돼 있단다. 일단 네가 하는 말은 모두 듣겠다’라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피해 아동들도 마음의 문을 연다”라고 설명했다. 진술조력인은 피해 아동·장애인과 수사기관 간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 보호자와의 소통에도 신경을 쓴다. 그만큼 책임감도 크다. 황씨는 “부모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성폭력 피해 여부를 조사받으러 오는 아동들도 있다. 이들에게 부모는 커다란 압박감으로 다가온다”면서 “아이들은 ‘내가 아는 사실을 모두 진술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시달려 진술 내용을 바꾸거나 지어낼 우려가 있다. 부모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 성폭력 피해자가 편안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과거 일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책 한 페이지를 넘기자 혁명의 페이지가 시작됐다

    책 한 페이지를 넘기자 혁명의 페이지가 시작됐다

    ‘무엇이 세상을 바꾸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도 으뜸인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대량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사고의 폭은 이전의 세상에 비해 확실히 넓어졌을 것이다. 사고의 변화를 이끌었으니 책이 변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료와 해석을 담은 책 2권이 번역 출간됐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뤼시앵 페브르와 도서관·문헌학자인 앙리 장마르탱이 공동집필한 ‘책의 탄생’(돌베개 펴냄, 강주헌·배영란 옮김)은 문헌사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책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전파하며 사회변혁을 이끌었는지를 처음으로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책으로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앙리 베르가 기획한 ‘인류의 진화’ 총서 중 49권에 해당한다. 1958년 프랑스 파리의 알뱅 미셸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으며 반세기 만에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책의 탄생’을 기획하고 편집방향을 잡은 뤼시앵 페브르의 책 예찬론을 들어보자. 그는 “책은 위대한 영혼들이 남긴 사상을 되살려내는 동시에 그 사상들에 미증유의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의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편집됨으로써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널리 확산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면서 “인쇄된 책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며 특색이길 바란다”고 했다. 이 책의 대부분을 집필한 장마르탱은 “책이라는 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보여주고(…) 스스로의 확신과 신념을 더욱 심화시키고 구체화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뿐 아니라 책에는 망설이던 사람들까지도 함께 엮어 가담시켜 주는 힘이 있다”며 책을 가장 강력한 사회변화의 원동력으로 꼽았다. 종교개혁은 확실히 인쇄술과 인쇄기의 덕을 톡톡히 봤다. 루터는 들으면 그때뿐인 말로 하는 설교가 아니라 인쇄된 벽보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한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성당 정문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박문을 벽보로 붙였다. 반박문은 독일어로 요약되어 벽보 형태로 인쇄된 뒤 독일 전역에 배포돼 불과 2주 만에 그 내용이 도처에 알려졌다.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에 이어 설교집과 교화서, 논쟁집을 독일어로 여러 편 써서 책으로 만들었다. 가볍고 쉽게 들춰볼 수 있는 책들이 활판인쇄술을 이용해 깔끔한 판본으로 제작돼 독일 전역에서 다시 인쇄됐다. 독일 전역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1520~1530년 배포된 소책자의 수는 630개 정도로 집계됐다. 1518~1535년 판매된 독일어 책 가운데 3분의1 이상이 루터의 저서였다. 설교집 ‘면죄부와 신의 은총’은 스무 차례 이상 재인쇄됐고 또 다른 설교집 ‘예수의 성스러운 고난에 관하여’는 알려진 판본만 20여종이다. 루터의 ‘신학서’와 ‘주기도문 해설’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루터는 인쇄업자들에게 ‘확실하게 돈이 되는 작가’였다. 당시 독일 인쇄소 70여곳 가운데 45군데가 루터의 저서를 작업한 것으로 집계된다. 루터의 저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지로 유입돼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물결을 퍼뜨렸다. 로버트 단턴은 명저 ‘책과 혁명’(알마 펴냄, 주명철 옮김)의 제3부를 ‘책이 혁명을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한다. 단턴은 계몽주의 고전들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촉발했다는 기존 정설을 뒤집었다. 관습적인 고전목록 대신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한 문학에 주목하라고 주문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금지된 포르노 소설, SF, 중상비방 문학 같은 베스트셀러 도서를 조사해 보면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붕괴를 좀 더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책 후반부에는 작자 미상의 포르노 소설 ‘계몽사상가 테레즈, 또는 디라그 신부와 에라디스양의 사건에 대한 보고서’, 메르시에의 공상소설 ‘2440년, 한 번쯤 꾸어봄 직한 꿈’, 드 메로베르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정치적 중상비방문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 등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는 “이 책들이 감정을 폭발적으로 자극해 당시 사람들의 봉건적 인식체계를 뒤흔들었다”면서 “평등이라는 관념은 계몽서적의 우아한 논증으로부터 대중에게 인식된 것이 아니라 계층을 뛰어넘는 연애담을 통해 감각적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고 밝혔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사설] 공안사건 잇단 무죄, 반성과 국가보상 따라야

    진실은 하나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에 이르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부림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무려 33년, 2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지불한 비용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그런 만큼 이번 무죄판결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당시 수사와 재판을 담당한 검찰과 재판부라면 적어도 유감 표명과 함께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다짐하는 제스처라도 보이는 게 역사에 대한 도리다. 그러나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까지 불린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사법부의 과거 판결에 대해 어떤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에 의한 대표적 공안사건으로 꼽히는 부림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재판부는 법리 판단만 내렸을 뿐 과거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는 유감이나 사과 표시를 하지 않았다. 부림사건 당시 수사를 맡았던 어느 인사는 법원이 스스로 자기 부정을 하고 있다며 “임오군란 사건을 지금 다시 재판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동안의 공안 사건들을 전부 그런 식으로 뒤집어 왔으니 그 연장선상이 아니겠느냐”고까지 했다. 이런 식이라면 이번 법원의 판결은 사회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큰 분열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다. 진실을 외면한 수사와 기소, 재판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당시 검찰과 경찰, 법원의 책임자들은 합법적으로 수집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만을 단죄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형사소송의 원칙을 준수하지 못했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겸허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마땅하다. 검찰이 상고한다면 대법원의 판단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무죄로 최종 확정된다면 그에 따른 명예회복과 보상이 차질없이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재심 판결은 완결이 아니라 시작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사회에 진정한 정의의 관념을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고 사건에 관여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최소한 도덕적 책임이라도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역사의 망각에 빠진다. 아무리 첨단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국가폭력의 그림자가 스며들지 모른다.
  • [커버스토리] 南과 北 사이… 우리가 낄 자리는 없다 친목 도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커버스토리] 南과 北 사이… 우리가 낄 자리는 없다 친목 도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서울 강동구에서 온라인 유통사업체를 운영하는 박성완(45)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지만 “내 고향은 평안북도”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전쟁 중 평북 삭주에서 홀로 월남했고 어머니는 평북 박천에서 일가가 모두 월남했다. 지금도 집안에선 평북 사투리가 표준어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평북도민회 모임을 다닌 그는 이제 삭주군 명예군수도 맡고 있다. 그는 안전행정부 산하 이북5도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임명하는 명예 시장·군수(임기 3년) 가운데 최연소다. 명예 군수로서 박씨가 하는 일은 두 달에 한 차례씩 도지사가 주재하는 시장·군수 모임에 참석하고 매년 어린이날 열리는 도민체육대회와 10월에 열리는 이북5도민중앙연합회(이하 연합회) 체육대회 준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밖에 청년 프로그램이나 해외 연수, 기업체 견학 등이 있는 정도다. 명예 시장·군수의 평균 연령은 63세, 명예 읍·면·동장의 연령은 56.6세다. 월남민 1세대가 70~80대 이상이라는 걸 감안하면 활동의 중심은 월남민 1.5세대와 자녀 세대로 넘어갔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직접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예 시장·군수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절반은 공무원이고 통일이 되면 그대로 북한에 가서 행정업무를 보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통일 후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교육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내 “특별한 행정실무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면서 “실제로 업무를 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 없다”고 인정한다. 김성겸 위원회 사무국장 역시 “행정·교육 훈련은 없다”면서 “우리가 북한 사정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한 안행부 관계자도 “통일 이후 위원회가 북한 행정을 담당한다는 건 꿈같은 소리”라고 말했다. 현재 명예 시장·군수는 92명, 명예 읍·면·동장은 911명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민간단체 차원의 친목 도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통일 이후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이산가족 상봉 준비에서도 위원회나 연합회가 낄 자리는 전혀 없다. 그런데 이들이 명예직이라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일반 통·반장처럼 정부가 지급하는 수당을 받는 것은 모순이다. 명예 시장·군수는 월 27만원, 명예 읍·면·동장은 월 12만원을 받는다.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은 “월남민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20억원 가까운 예산을 쓰는 것은 헌법이 금지하는 ‘세습’에 해당한다”면서 “위원회 규정만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것도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스스로 밝히는 자기 존재 이유는 ▲이북5도 분야별 정보 수집·분석 ▲북한 지역 수복 때 실시할 제반 정책 연구 ▲이북5도민 및 관련 단체 지원·관리 ▲북한이탈주민 및 이북도민 후계 세대 육성·지원 ▲이북5도 향토문화 계승·발전 등이다. 하지만 실제 활동은 명분과 거리가 너무 멀다. 정보 수집이나 정책 연구는 통일부나 법무부 등이 하고 있으며 위원회는 관련 예산을 책정조차 하지 않았다. 위원회 예산사업설명서가 자체 사업으로 꼽은 것은 북한이탈주민 지원 사업(6억 8100만원), 청사시설 개·보수(1억 5300만원), 이북도민 체육대회와 연합회 지원 사업(11억 500만원)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인건비와 운영비다. 조직 운영을 위한 조직 운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후계 세대 육성·지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김 사무국장은 “북한이탈주민 관련 업무는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하고 우리는 월남민 1세대와 탈북자 자매결연 사업 위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60년 전에 고향을 떠난 월남민과 북한이탈주민은 나이 차이가 수십년이기 때문에 사실상 갈등만 깊어진다”면서 “탈북자를 월남민과 연결해 주는 건 오히려 한국 정착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남는 건 연합회 지원, 월남민과 자녀 세대 지원, 향토문화 계승·발전뿐이다. 위원회는 이북5도 도지사들로 이뤄지며 이를 위한 사무처가 이북5도청이다. 이북5도위원장은 윤번제로 도지사 가운데 1명이 맡는다. 현재 위원장은 박연용(73) 황해도지사이며 김정겸 황해도 사무국장이 위원회 사무국장을 겸임한다. 평남·평북·함북 위원장은 모두 지난해 9월 임명됐다. 선정위원회 같은 별도 절차 없이 청와대에서 낙점하기 때문에 논공행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 안행부 관계자가 귀띔했다. 사실 위원회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엘리트 월남민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거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이북5도청사 건립만 해도 1988년 대선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지한 데 대한 답례였다. 당시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던 황해도민회장 홍성철씨는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연합회 소속 도민회와 산하 단체 등은 청사 입주 뒤 임대료를 전혀 내지 않았다. 임대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다.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행정자치부(현 안행부)는 2005년 “이북5도위원회에서 관리하는 재산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해 면죄부를 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위원회 회유 차원에서 연합회에 정기적인 자금 지원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도지사들은 차관급 별정직 공무원이다. 1년 보수로 지난해 기준 1억 660만 5000원을 받는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업무추진비로 2072만 6800원, 황덕호 함남도지사는 2788만 4142원을 썼다. 5도 지사를 합하면 연간 6억원이 넘는 액수다. 거기다 각자 운전기사와 관용차, 비서도 둔다. 한 안행부 관계자는 “차관급 대접을 받지만 변변한 주간 일정조차 없을 정도로 할 일이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 “특혜라는 지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인정했다. 5도 지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살펴봤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에 따르면 사용 내역은 식사비가 대부분이며 기념품 구입과 화환 구입 등이 있다. 이북5도 지사들이 2013년에 카드 집행이 아닌 세금계산서나 계좌이체 방식으로 집행한 건은 총 20건, 2500여만원으로 주로 격려품 구입 명목이었다. 17차례 약 728만원은 업무추진비를 주말에 집행한 것이었다. 모두 정부 예산 집행 지침을 위반한 것이다. 위원회는 2012년에도 자체 감사에서 동일한 사항을 지적받았지만 전혀 시정이 되지 않은 셈이다. 글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보험사 질병정보 수집 관행 바꾸자] 묻지마식 수집 실태 보니

    [보험사 질병정보 수집 관행 바꾸자] 묻지마식 수집 실태 보니

    금융당국이 카드 3사의 1억 400만건 고객 정보 유출을 계기로 개인 정보 보호 강화 대책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보험업계의 묻지마식 ‘질병 정보’ 수집 관행과 계약자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듯하다. 질병 정보는 민감 정보에 속해 외부 유출로 이어진다면 사회적 파장은 이번 ‘카드 사태’ 이상이라는 분석이다. 보험사 간 질병 정보의 공유뿐 아니라 수집과 저장에도 엄격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질병 정보 수집 실태와 막강 로비력, 대안 등을 세 차례에 나눠서 짚어본다.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은 지난해 12월 30일 서울중앙지법에 보험고객 112명의 서명을 받아 생명보험협회를 상대로 계약 건당 2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생보협회가 그동안 고객의 동의 없이 질병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조연행 금소연 대표는 10일 “보험사가 수집하는 정보는 고객의 질병에 관한 것으로 이는 신용정보법상 신용 정보에 해당되지 않는 민감 정보”라면서 “이를 이익단체가 마구잡이식으로 수집하다 보니 사생활 침해와 인권 침해 논란이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12월부터 금융위원회를 상대로 보험협회에 질병 정보를 수집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한 인권 침해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비협조 얘기가 흘러나온다.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한 금소연의 조 대표는 “인권위가 금융위에 질의서를 보냈지만 터무니없는 답변이 돌아왔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보험업계가 수집하는 고객 정보는 어떤 내용일까. 2002년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는 보험협회를 ‘개별신용 정보집중기관’으로 등록시켜 총 25개의 정보 수집을 허용했다. 그러나 협회는 이를 확대 해석해 총 196종(생보협회 125종, 손보협회 71종)의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고 저장해왔다. 10년 이상 보험 가입자의 정보가 각 보험사를 거쳐 협회에 전달되고, 협회는 이를 가공해 회원사의 입맛에 맞게 제공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2012년 이미 승인받은 25종의 정보 범위를 되레 확대해 앞으로는 84종(생보협회 57종, 손보협회 27종)을 합법적으로 수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금융위가 196종에서 84종으로 ‘가지치기’를 했지만, 사실상 요실금이나 매독 등의 질병명과 사인명, 장해부위, 출산 명수, 수술명, 수술 부위 등 민감 정보 수집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개인 정보 보호보다 업체의 정보 이용에 무게가 실린 조치인 것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인 이은우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월드뱅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신용정보 집중 수준은 100%로 세계 1위”라면서 “그러나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공개하는 수준은 낙제점”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금융사와 협회들은 공시 의무를 도외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개하더라도 ‘~ 등’으로 묶어 진짜 어떤 정보를 수집했는지를 모르도록 편법을 쓴다”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보험업계가 이 같은 민감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데 있다. 보험업계는 민감 정보를 불법적으로 활용해 금융당국의 제재를 수시로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개인 정보 ‘무(無)동의 조회’를 조사한 결과 생보사 4696건, 손보사 3568건을 적발했다. 일부 보험사는 개인 정보 동의서를 허위로 작성해 검사 업무를 방해하거나 조회 흔적을 지우기도 했다. 지난해 9월에는 불법 정보 수집으로 보험협회와 임직원 9명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다. 금융당국의 제재도 형식적이다. 기관에는 주의와 과태료, 직원에게는 견책과 주의가 대부분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보험협회가 개인 정보를 최소 한도로 수집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면서 “지금 수집할 수 있는 정보 범위 내에서 어떤 것을 뺄 것인지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저자와 차 한잔] 건축·도시·사회 연관관계 다룬 ‘빨간 도시’ 펴낸 건축가 서현씨

    [저자와 차 한잔] 건축·도시·사회 연관관계 다룬 ‘빨간 도시’ 펴낸 건축가 서현씨

    “도시는 그 도시에 담겨 있는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잘 들여다보면 이 사회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우리 스스로를 거울처럼 볼 수 있는 거죠.”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축을 묻다’ ‘배흘림 기둥의 고백’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인문학적 건축읽기의 묘미를 선사해 준 건축가 서현(51·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그가 이번에는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사회의 연관 관계를 다룬 책 ‘빨간 도시’(효형출판)를 내놓았다. 지난 15일 한양대 과학기술관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건축이 어떤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는지, 시대를 관통하는 건축과 사회의 모순이 과연 어떤 것인지, 왜 그런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15년 동안 건축을 통해 본 세상에 대한 기록과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의 부제는 그래서 ‘건축으로 목격한 대한민국’이다. 닭장을 닮은 아파트의 숲,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병영 같은 학교 건물,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르고 지어진 권위적인 관공서 건물들, 우리가 아직은 씨족공동체 사회임을 보여주는 예식장과 장례식장 건물 등. 왜 늘 저렇게밖에 못 짓는 건지 답답해하던 차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분석과 지적들을 읽으니 수긍이 가고 날카로운 비판에는 속이 다 후련하다. 특유의 경쾌하고 유려한 문체의 글은 읽는 재미까지 얹어준다. 왜 하필 ‘빨간 도시’라고 했을까? 빨강은 우리에게 비릿한 느낌을 주는 색 아니던가. “중의적인 표현이긴 한데 한국사회에서 빨강이 도시의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색깔이라고 봤습니다.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빨강은 색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단어였지만 이제는 자신감의 상징이고, 심지어 보수정당의 상징색이 되었어요. 2002년 월드컵은 빨강에 면죄부를 준 사건이었지요.” 그는 우리의 도시를 한마디로 ‘정글’이라고 표현했다. “정글에는 룰이 없어요. 유일한 룰은 큰 힘을 가진 자가 더 많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죠. 우리의 도시가 그래요. 서울 강남에 가 보면 자동차가 최고의 대접을 받지요. 걸어다니는 사람은 무시되고, 특히 유모차나 휠체어를 끌고는 인도를 걸어갈 수 없어요.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조금 더 부족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하는데 한국의 도시에서는 부족한 사람들이 알아서 생존해야 해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가치는 바로 ‘공정함’입니다.” 그가 꼽은 최악의 현대 건물은 단연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다. “민주주의의 전당이어야 할 국회의사당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광장에는 현대판 품계석을 놓고, 뒷문을 ‘국민의 문’이라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전당이 아닌 권위의 전당이 된 거예요. 그걸 받아들이라고 건물 자체가 강요하고 있지요.” 건축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가 이 땅에 남겨놓는 것이니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건축행위는 동시대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음 시대에 던져 놓는 구조물로서 책임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건축은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래도 우리 도시의 미래에 대해 그는 낙관론자이다. “지금의 도시는 좋은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관광버스 타고 해외의 도시를 겉에서만 본 세대가 만들었어요. 배낭여행을 하면서 그 도시의 생태와 역사를 들여다본 세대, 즉 빨강을 축제의 색으로 당당하게 쓸 줄 아는 세대가 만들어 가는 도시는 지금보다 한결 나은 모습일 겁니다. 어느 정도 좌충우돌은 하겠지만.”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탐사보도-공익제보 끝나지 않은 싸움] (3) 부정에 눈감은 사회

    [탐사보도-공익제보 끝나지 않은 싸움] (3) 부정에 눈감은 사회

    “대학이라는 조직은 공룡처럼 거대하고 문제가 생겨도 개선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박사 논문을 표절하는가 하면, 정부 예산을 눈먼 돈으로 여기는 등 교수 사회에 만연한 비리를 잘라내지 않는다면 대학의 권위가 무너질 것입니다.” 2004년 1월 모교인 연세대 홈페이지에 독문과 교수 5명의 학술진흥재단 연구비 횡령 등의 의혹을 폭로한 A(56)씨(당시 연세대 독문과 강사)는 공익 제보를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학계를 보면 아직도 이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공익 제보자들이 좌절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비리 혐의자들이 면죄부를 받거나 가벼운 처벌에 그친 반면 제보자들은 되레 불이익을 받는다는 점이다. 특히 제보를 받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거대 조직의 벽에 부딪혀 좌절감을 느끼는 사례가 많다. 서울신문의 설문 조사 결과 35명 전원이 우리 사회는 아직 내부 고발을 단행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답한 점은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A씨가 모교 독문과 교수들의 비리 혐의를 폭로하자 법원은 이 가운데 3명의 연구비 유용 혐의를 인정했지만 대학 측은 이듬해 해당 교수들에게 정직 2개월, 경책, 구두경고 처분을 내리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들 교수들은 징계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A씨는 제보 이후 연세대에서 강의를 맡을 수 없었다. 2013년 12월 현재 피고발인 5명 가운데 2명은 2007년과 2009년 정년퇴임했고, 나머지 3명은 아직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서울 시내 한 대학에서 강사와 비슷한 처우인 연구 교수 직함을 갖고 있는 A씨는 16일 “제보 이후 교육부나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연구윤리강령을 제정하는 등 개혁의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대학에서는 여전히 실명으로 문제를 제기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2004년 1월 고성군수가 민원인의 땅을 직접 사들이기 위해 서류까지 위조해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은 사실을 폭로했던 군청 공무원 이정구(42)씨도 공무원법상 비밀누설죄로 되레 직위해제 조치를 당했다. 이씨는 “강원도청에 군수의 비리에 대한 조사 요청을 했는데도 고성군청이 제일 먼저 1차 조사를 하더라”면서 “복직하자마자 해당 업무에서 배제되고 면사무소로 좌천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징계무효 소송을 내 대법원까지 갔지만 군수의 죄를 폭로한 것이 공무원의 비밀누설 죄라는 이유로 패소했다”고 억울함을 드러냈다. 당시 고성군수는 이씨의 고발에도 자리를 지켰으나 2007년 다른 아파트 인허가 비리 혐의로 결국 구속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호루라기재단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부패방지법 시행 이후 부패혐의 조사기관 이첩 사건 822건 가운데 44.5%인 366건이 공익 제보에 의한 적발로 조사됐다. 하지만 고발된 비리혐의자에 대한 사법당국의 수사는 여전히 미흡하고 공익 제보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불이익이 가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공익 제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감각한 인식이다. 송재룡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공공성보다 사적 관계를 우선하는 유사 가족주의적 집단의 관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 집단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치 가정을 허무는 것과 동일시되고 배신으로 여겨지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 집단문화 정서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탐사보도팀
  • 英법원, 흑인 총격 경찰에 면죄부

    英법원, 흑인 총격 경찰에 면죄부

    “경찰에 의해 살해된 마크 더건을 법원이 다시 사형 집행했다.” 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검시법원. 2011년 8월 4일 런던 북부 토트넘에서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흑인 청년 마크 더건의 유족들과 친구들이 울부짖었다. BBC 방송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법원 배심원단 10명 중 8명이 경찰이 더건의 총기 휴대를 오인해 사망케 한 것은 적법한 대응이었다고 결론 냈다. 배심원들은 “더건이 사망 당시 총을 휴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총을 가지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고 사건 현장 6m 지점에서 총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번 평결에 대해 영국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의 죽음이 영국 현대사에 최악의 폭동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찰은 아프리카 이민사회의 총기 범죄 사건을 조사하던 중 더건이 탑승한 택시를 세웠다. 더건이 검문에 불응하자 경찰은 총을 쐈다. 경찰은 “더건이 먼저 총을 쐈다”고 주장했으나, 불만처리위원회(IPCC) 조사 결과 사망 당시 더건은 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더건의 친·인척들이 먼저 항의시위를 벌였고, 빈곤층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뒤따랐다. 시위대는 약탈과 방화에 나섰고, 순식간에 폭동으로 치달았다.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로 청년실업이 악화됐고, 빈곤층 보조금 및 실업수당 삭감으로 소외계층의 불만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유족은 물론 인권운동가들까지 법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자 런던 경찰은 제2의 폭동으로 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런던 경찰국장 버나드 호건 하우는 평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모든 경찰에게 비디오 카메라를 지급해 증거 확보에 더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극악 범죄 보고도 식사에 몰입하는 현대인

    극악 범죄 보고도 식사에 몰입하는 현대인

    탈감정사회/스테판 G. 메스트로비치 지음/박형신 옮김 한울아카데미/365쪽/3만 6000원 잔인한 살인범의 극악한 범죄 현장을 보도하는 TV 뉴스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 천인공노할 폭력사태를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사람들. 흔히 인간은 이성과 감정의 동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그 이성·감정과는 달리 실제 대응의 행위에선 소극적이다. 그 괴리의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탈감정사회’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과 실제 행위의 철저한 격리가 만연한 현대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알기 쉽게 풀어낸 사회평론서이다. 미국에서 이름난 전쟁범죄 연구가인 저자가 해석하는 ‘탈감정사회’는 종전 사회학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해 왔던 것과는 조금 달라 눈길을 끈다. 지성화되고 조작되고 대량생산된 기계적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요즘의 ‘탈감정사회’다. 지금의 ‘탈감정사회’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연결시켜 해부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1984년’에 드러난 사상 통제와 조작은 오늘날 감정 조작이라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정치와 문화산업에 의해 조작되고 기계적으로 변형된 감정은 나의 분노와 나의 연민이 아닌 가짜 감정에 불과하다. ‘분노하면서도 단죄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감정이 행위의 실천적 동력이 되지 못하는 하나의 사치품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과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인 O J 심슨 재판의 사례로 모아진다. 보스니아 내전에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내전을 중단시킬 어떠한 실제적인 행동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O J 심슨 재판에선 인종차별주의라는 ‘탈감정적’ 가치 탓에 사람을 죽인 심슨에게 면죄부를 안겨 주었다. 저자는 지금의 ‘탈감정사회’는 사상 통제와 조작 측면에서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년’에서 그렸던 것보다 훨씬 더 악화됐다고 본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고 역설한다. “탈감정주의로부터 탈출하는 첫걸음은 거기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그 깨달음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속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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