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통일 25주년/ (상)현황
호치민시티(옛 사이공)의 중앙광장 한 편에 혁명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의대형초상화가 걸려 있다.이 초상화 밑에는 ‘공산주의의 위대한 승리는 1,000년을 지속할 것’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그의 초상화가 바라보는 광장 건너편에는 몇달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패션모델 신디 크로포드의 입간판이 서있었다. 지금은 베트남 당국이 통일 25주년 기념을 위해 철거했지만 크로포드는 호치민과 나란히 서서 미국산 고급시계를 사라고 베트남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호치민의 초상화와 크로포드의 입간판은 베트남전(베트남인들은 미국전쟁이라고 부른다)이 끝나고 남북으로 갈라졌던 베트남이 통일된지 25주년을 맞는베트남의 오늘을 잘 보여준다.미국은 베트남의 적이었고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 베트남 지도자들에게는 지금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미국은 적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의 상징이다.
현재 베트남의 인구 7,800만 가운데 절반 이상이 75년 통일 이후 태어났다.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서만 베트남전쟁을 아는 이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역사의일부분일 뿐이다.30일의 통일기념일도 그저 휴일일 뿐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이들에겐 많은 돈을 벌어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전히 사회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베트남 지도층과 이같은 젊은이들의 의식차이는 오늘날 베트남이 안고 있는 고민을 대변해준다.전쟁은 베트남에 통일을 안겨주었지만 대신 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380달러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국민의 80%가 시골에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는 깨끗한 식수와 전기조차도 사치로 여겨질 정도다.
통일 후 사회주의 경제를 도입하고 자본주의의 모든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안간힘을 썼던 베트남은 결국 86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도이모이’(혁신) 정책을 채택했다.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에 문을 연 것이다.95년에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도 재개했다.
도이모이 정책은 외국인 투자를 불러오는 등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받았다.95년 9.5%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은지난해 4.8%로 뚝 떨어졌고 96년 최고 90억달러에 육박했던 외국인 투자도지난해에는 14억달러로 격감했다.올해는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외국인 투자가 감소하는 것은 베트남의 개혁이 외국으로부터 신뢰를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베트남은 지난해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마무리짓고도 최종 단계에서 조인을 연기했다.무역협정이 조인됐다면 수출도 크게 늘어나고 외국인 투자도 늘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공산당의 사회 장악이 약화되고 국가지배체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지도부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외국 투자가들로선 베트남의 개혁정책에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다.
베트남 정부는 사회주의와 자주독립노선을 유지하면서 경제 개방에 의한 경제개발도 계속한다는 계획이다.그러나 문제는 사회주의와 경제 개방이 양립하기 힘들다는데 있다.개혁을 택할 것이냐 보수를 택할 것이냐 베트남은 지금 생존을 위한 심각한 교차점에 서 있는 것이다.
전쟁은 실제로 25년전 끝났다.그러나 베트남에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베트남 지도자들은 경제를 통한 미국 등 서방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고생각하고 있다.이들은 기본적으로 과거지향적이다.그러나 전쟁 후 태어난 젊은이들은 이들과 다르다.베트남이 잘 살기 위해서는 세계경제로 진입해야 한다.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 젊은이들의 생각이다.젊은이들은미래지향적이다. 과거지향의 지도층과 미래지향의 젊은이들간에 경제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가치를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도 점점 커지고 있다.남쪽은 외국인 투자도 많고 그런대로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북쪽은 상대적으로 경제가 더 어려운 형편이다.베트남 정부는 북쪽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남쪽에의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북부지역을 살리기 위해 남부지역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나오고 있다.통일이 됐다고 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과북은 대립은 계속되고 있고 실제적인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면한 국민성,높은 교육열 등 베트남의 가능성만은 무한하다는데많은 베트남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이들은 베트남만큼 잠재적 가능성과 현실과의 괴리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세진기자 yujin@.
*100만명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은 남북이 통일된 지 25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통일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남베트남인들의 희생은 철저히통일 베트남 역사에서 잊혀지고 있다.남북 베트남 출신간 갈등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골은 여전히 깊다.10년간 지속된 민족전쟁에 따른 빈곤문제,고엽제 문제와 실종자 및 난민(보트피플)문제,미군과 최근 불거진 한국군의 주민학살 문제 등 당면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0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300만명의 베트남 국민들이사망했다. 이중 200만명이 민간인이다.북베트남 군인중 30만명이 실종됐고남베트남 군인의 실종자수는 아예 잡혀 있지도 않다.100만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한편 미군은 5만8,000명이 전사했고 2,000여명이 실종됐다.한국군은 4,960명이 전사했다.
□민족갈등 종전후 100만명 이상이 베트남을빠져나갔다.40만명 가량은 '재교육‘ 명목 아래 수용소에 보내졌고 140만명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베트남남부의 ‘신경제구역’에 강제이주당한 뒤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똑같은 전쟁 참전군인 유족이지만 남베트남 군인의 유족들은 얼마 안되는 연금마저 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베트남의 한 언론인은 “1975년에 지리적으로 남북이 통일됐고 76년에 법적으로 통일국가를 세웠지만 정서적으로 완전히 통일이 되려면 수십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지적,그만큼 남북간 감정의골이 치유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아직도 당서기장,총리,대통령 등 3역을 뽑을 때 묵시적으로 지역 안배를 하고 있고 경제특구를 설정할 때도 마찬가지다.이같은 지역갈등은 베트남의 완전 개방을 가로막는 요인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고엽제 문제 미군이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정글 속에 설치된 근거지를 찾아내기 위해 62∼71년까지 정글에 쏟아부은 고엽제는 약 4,200만ℓ.
베트남 정부는 현재 7,800만 인구중 100만명이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고엽제는 암,면역결핍증,기형아 출산 등의 주원인으로 알려져왔으며 특히 최근 미 공군이 발표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고엽제는 당뇨병과 심장질환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엽제 피해자들에게 미국이 지원을약속했고 1월부터 베트남 정부와 관련단체들이 매달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보상금 규모가 턱없이 미미해 이들은 적절한 치료는 차치하고끼니를 때우기에도 부족한 실정이다.
□난민(보트피플)문제 7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적·종교적 자유를 찾아 무작정 배에 몸을 실어 망망대해로 떠났던 이들에게 세계는 동정적이었다.상당수가 홍콩,태국,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필리핀,한국 등지의 난민촌을 거쳐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 호주 등에서 재정착했다.그러나 80∼90년대 경제난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세계의 시선도 냉정해졌다.이들은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부분 본국으로 이송됐다.되돌아온 이들을 끌어안고 경제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가 최대의 과제다.
□양민학살 문제 미군은 68년 3월16일 무방비 상태의 미라이 주민 수백명을학살했다.이 사건은 미군의 수치와 은폐의 동의어가 됐고 미국의 여론을 반전으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최근 들어서는 한국군의 주민학살 논쟁까지 가세했다.베트남 정부는 과거의 문제로 접어두고 경제개발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입장이다.하지만 언제든 보상문제는 당사국간에 현안으로떠오를 수 있다.
□대미관계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이 3월 베트남을 방문,고엽제 피해자에대한 지원을 약속했다.실종자 문제는 양국이 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해 조사중이다.아직 양국간 전쟁과 관련 어떠한 보상협상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본협상이 이뤄질 경우 어떻게 결론날지 미지수다.
김균미기자 k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