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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친 뛰어넘은 李회장처럼… 삼성, 새 역사 쓰며 더 탄탄해질 것”

    이곳은 또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의 미래를 키워 가는 중심이기도 하다. 지난해 4월 이 부회장은 이곳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메모리반도체는 독보적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2030년까지 세계 1위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며 133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 부회장, 부인 홍라희씨 등 유족들은 고인이 2010년 기공식, 2011년 준공식에 직접 참여해 환하게 웃으며 직원들을 격려했던 16라인 앞에서 모두 하차했다. 그리고 배웅 나온 임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은 이 회장이 첫 삽을 떴던 16라인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나와 고인을 기렸다. 이날 이 회장의 종착지는 경기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의 가족 선영이었다.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 회장의 부모와 조부가 묻힌 곳으로 장지가 결정된 데는 부인 홍씨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전 7시 30분부터 1시간가량 삼성서울병원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는 ‘무한탐구를 즐긴 소년 이건희’부터 ‘아버지를 뛰어넘은 기업인 이건희’까지 고인의 면면이 조망됐다. 고인의 50년지기 서울사대부고 동창인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은 추모사에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 회장보다 ‘승어부’(勝於父)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승어부는 아비를 능가하는 효의 첫걸음”이라며 “부친 어깨 너머로 배운 이 회장이 부친을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듯 이 부회장이 새 역사를 쓰며 삼성을 더욱 탄탄하게 키워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영결식에는 비서실장으로 고인을 보좌했던 이학수 전 부회장, 최지성 전 부회장, 이수빈 삼성경제연구소 회장 등 ‘이건희 사람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이수빈 회장은 약력 보고를 하면서 “고인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신경영을 통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회고하던 중 “영면에 드셨다”는 부분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고인은 2014년 5월 자택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 5개월간 투병하다 지난 25일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반도체로 ‘마지막 출근’… 한국경제 거인, 영원히 잠들다

    반도체로 ‘마지막 출근’… 한국경제 거인, 영원히 잠들다

    ‘한국 경제의 거인’이 반도체의 미래를 바라보며 영원한 잠에 들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8일 오전 경기 화성사업장으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이날 오전 11시 고인을 태운 운구차가 화성사업장 정문에 나타나자 삼성전자 전현직 임직원 1000여명이 사업장 내 길가에 모여들었다. 운구차가 도착하기 2시간 전부터 하나둘씩 나와 3000여 송이의 국화를 나눠 든 직원들은 운구차가 지나가자 고개 숙여 ‘회장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애도의 발걸음들이 늘어나면서 2㎞에 이르는 화성사업장 내 도로 양쪽에 직원들이 4~5줄로 겹겹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 차량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영상에서 생전 화성사업장을 찾은 이 회장의 모습이 등장하자 일부 직원들은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화성사업장이 마지막 출근지가 된 것은 이 회장이 ‘세계의 삼성’을 일구게 한 핵심 생산기지이자 삼성 반도체의 미래를 심은 곳이기 때문이다.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당시로선 ‘무모한 결단’을 내린 고인은 이곳에서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신화를 써 내려갔다. 1983년 직접 해당 사업장 부지를 정하고 착공식, 준공식 등의 행사를 챙길 정도로 애정과 공을 들였다. 이날 운구 행렬은 이전 행선지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과 한남동 자택, 집무실이 있는 이태원동 승지원 등은 정차하지 않고 지나간 반면 화성사업장에서는 25분간이나 머무르며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화성사업장은 또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라는 미래를 키워 가는 중심이기도 하다. 지난해 4월 이 부회장은 이곳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메모리반도체는 독보적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2030년까지 세계 1위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며 133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 부회장, 부인 홍라희씨 등 유가족들은 고인이 2010년 기공식, 2011년 준공식에 직접 참여해 환하게 웃으며 직원들을 격려했던 16라인 앞에서 모두 하차했다. 그리고 배웅 나온 임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은 이 회장이 첫 삽을 떴던 16라인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나와 고인을 기렸다.이날 이 회장의 종착지는 경기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의 가족 선영이었다.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 회장의 부모와 조부가 묻힌 곳으로 장지로 결정된 데는 부인 홍씨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전 7시 30분부터 1시간가량 삼성서울병원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는 ‘무한탐구를 즐긴 소년 이건희’부터 ‘아버지를 뛰어넘은 기업인 이건희’까지 고인의 면면이 조망됐다. 고인의 50년지기 서울사대부고 동창인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은 추모사에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 회장보다 ‘승어부’(勝於父)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승어부는 아비를 이긴다기보다 아비를 능가하는 효의 첫걸음”이라며 “부친 어깨너머로 배운 이 회장이 부친을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듯 이 부회장이 새 역사를 쓰며 삼성을 더욱 탄탄하게 키워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비서실장을 지낸 이수빈 삼성경제연구소 회장(전 삼성생명 회장)은 약력 보고를 하면서 “고인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신경영을 통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회고하던 중 “영면에 드셨다”는 부분에서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앞서 주요 그룹 총수 중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날 영결식에도 참석해 이 회장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고인은 2014년 5월 자택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 5개월간 투병하다 지난 25일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거인 이건희, 반도체 미래 조망하며 잠들다

    거인 이건희, 반도체 미래 조망하며 잠들다

    ‘한국경제의 거인’이 반도체의 미래를 바라보며 영원한 잠에 들었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8일 오전 경기 화성 사업장으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이날 오전 11시 고인을 태운 운구차가 화성 사업장 정문에 나타나자 삼성전자 전현직 임직원 1000여명이 사업장 내 길가에 모여들었다. 운구차가 도착하기 2시간 전부터 하나둘씩 나와 3000여 송이의 국화를 나눠 든 직원들은 운구차가 지나가자 고개 숙여 ‘회장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애도의 발걸음들이 늘어나면서 2㎞에 이르는 화성 사업장 내 도로 양쪽에 직원들이 4~5줄로 겹겹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 차량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영상에서 생전 화성사업장을 찾은 이 회장의 모습이 등장하자 일부 직원들은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화성 사업장이 마지막 출근지가 된 것은 이 회장이 ‘세계의 삼성’을 일구게 한 핵심 생산기지이자 삼성 반도체의 미래를 심은 곳이기 때문이다.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당시로선 ‘무모한 결단’을 내린 고인은 이 곳에서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신화를 써내려갔다. 1983년 직접 해당 사업장 부지를 정하고 착공식, 준공식 등의 행사를 챙길 정도로 고인이 애정과 공을 들였다. 그런 까닭인지 이날 운구 행렬은 이전 행선지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과 한남동 자택, 집무실이 있는 이태원동 승지원 등은 정차하지 않고 지나간 반면 화성 사업장에서는 25분간이나 머무르며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이 곳은 또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의 미래를 키워가는 중심이기도 하다. 지난해 4월 이 부회장은 이 곳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메모리 반도체는 독보적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2030년까지 세계 1위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며 133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 부회장, 홍라희 여사 등 유족들은 고인이 지난 2010년 기공식, 2011년 준공식에 직접 참여해 환하게 웃으며 직원들을 격려했던 16라인 앞에 모두 하차했다. 그리고 배웅나온 임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이 이 회장이 첫 삽을 떴던 16라인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나와 고인을 기렸다.이날 이 회장의 종착지는 수원 장안구 이목동의 가족 선영이었다.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 회장의 부모와 조부가 묻힌 곳으로 장지로 결정된 데는 홍 여사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전 7시반부터 1시간가량 삼성서울병원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는 ‘무한탐구를 즐긴 소년 이건희’부터 ‘아버지를 뛰어넘은 기업인 이건희’까지 고인의 면면이 조망됐다. 고인의 50년지기 서울사대부고 동창인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은 추모사에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 회장보다 ‘승어부’(勝於父)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승어부는 아비를 능가하는 효의 첫걸음”이라며 “부친 어깨 너머로 배운 이 회장이 부친을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듯 이 부회장이 새 역사를 쓰며 삼성을 더욱 탄탄하게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영결식에는 이 회장 비서실 출신인 이학수 전 부회장, 최지성 전 부회장, 이수빈 삼성경제연구소 회장 등 ‘이건희 사람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이 회장은 약력보고를 하면서 “고인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신경영을 통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회고하던 중 “영면에 드셨다”는 부분에서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고인은 지난 2014년 5월 자택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 5개월간 투병하다 지난 25일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세계 반도체 업계에 획기적 M&A로 지각변동 일어난다

    세계 반도체 업계에 획기적 M&A로 지각변동 일어난다

    세계 반도체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수요 급증과 잇단 인수·합병(M&A)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업체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MD)는 27일(현지시간) 경쟁사인 자일링스(Xilinx)를 350억 달러(약 39조 42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AMD와 자일링스는 이날 인수합병(M&A) 협상 타결 소식을 알리며 제품군과 시장점유율을 크게 확대하고 재정적으로도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리사 수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AMD는 컴퓨터의 핵심 기술인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칩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팬데믹을 계기로 랩톱 컴퓨터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엑스박스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등 게임기 수요가 급증한 덕분에 올해 주가가 급등했다. 또한 지난 수년간 차세대 고성능 반도체를 내놓아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고객사를 대거 유치해 인텔을 바싹 추격하고 있다. 인텔이 제조과정에서의 문제로 재택근무 확산에 따른 랩톱과 클라우드컴퓨팅 수요 급증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는 동안 AMD는 급진전을 보이고 있다. 이 덕분에 AMD의 주가는 올 들어 80% 가까이 급등해 공격적 M&A를 위한 충분한 실탄이 마련됐다. 수 CEO는 “반도체 산업 합병이 가속화되고 소비자 요구가 변화하고 있는 만큼 규모 확대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자일링스는 사용자들이 재프로그램할 수 있는 반도체를 개발해 경쟁사들과 차별화 전략을 펼쳐 왔다. AMD가 통신 인프라와 국방 등 전혀 진출하지 않았거나 시장점유율이 극히 낮은 부문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일링스의 반도체는 미국의 최신 전투기인 록히드마틴의 F-35 합동타격전투기와 5세대 이동통신(5G) 네트워크에도 사용된다. 이들 두 회사의 합병은 재정적 측면에서 이득도 크다. AMD와 자일링스는 데이터센터 등 고객사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합병 후 18개월 내 3억달러의 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고 AMD 측은 밝혔다. 합병 기업은 약 1만 3000명의 엔지니어 인력을 갖추게 된다. 합병 기업의 CEO는 수 AMD CEO가 맡게 되고, 빅터 펭 자일링스 CEO는 자일링스 사업부 총괄 사장을 맡게 된다. 이런 가운데 SK하이닉스는 앞서 이달 20일 인텔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문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인텔에서 옵테인을 제외한 낸드플래시 사업 전체를 인수한다. 인텔이 중국 항구도시인 랴오닝성 다롄에 운영 중인 핵심 제조시설인 3D 낸드플래시 공장도 포함된다. 이번 거래를 낸드플래시 부문 세계 시장 2위로 도약하게 됐다. 미국 엔디비아는 지난달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회사 영국 ARM을 4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고, 지난 7월에는 아날로그디바이시스가 맥심인티그레이티드프로덕츠를 2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마지막길 배웅한 ‘이건희 사람들’..삼성 저격수 박용진 “삼성은 응원”

    마지막길 배웅한 ‘이건희 사람들’..삼성 저격수 박용진 “삼성은 응원”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입관식이 치러진 26일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는 ‘이건희의 사람들’이 대거 몰려 고인의 마지막길을 배웅했다. ‘미덥지 않으면 일을 맡기지 않고 한번 사람을 믿고 썼으면 끝까지 믿고 맡긴다’는 인사 원칙을 견지했던 이 회장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들은 침통한 얼굴로 이날 오전 일찍 빈소를 방문했다. 가까이에서 이 회장을 보좌해온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은 이날 첫 조문객이었다. 삼성 내 핵심 전략통으로 분석력이 뛰어난 그는 신년사, 연설문도 직접 작성했을 정도로 이 회장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 고문, 황창규 전 KT 회장,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전직 임원들도 조문했다. 권 고문은 지난 7월 삼성전자 사내방송 인터뷰에서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초격자를 유지해온 동력은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결단에 있었다”며 총수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황 전 회장은 이날 “어른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다. 저희가 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직 사장단에서는 반도체 사업을 이끄는 김기남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 부회장을 비롯해 고동진 IT·모바일(IM) 부문장 사장, 강인엽 시스템LSI사업부장,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 박학규 DS부문 경영지원실장 등이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이날 내내 장례식장을 지킨 김 부회장은 취재진에게 “애통하다”고 심경을 전했다.이날 빈소는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장들과 정세균 국무총리,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정치권 인사, 주한 외국 대사 등 주요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종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고인의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조카인 정용진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이웅열 전 코오롱 회장, 조현준 효성 회장 등 재계 총수들도 조문 행렬을 이뤘다.‘삼성 저격수’로 유명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빈소 방문도 눈길을 끌었다. 박 의원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위로를 드리려 왔다. 삼성이라는 기업은 응원한다”며 “혹시나 (유족들이) 불편하실까봐 올까말까 고민했다 말씀드리니 큰 위로가 됐다고 하셨다”고 했다. 반 총장 등 주요 인사들은 상주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우리 경제사회 발전에 큰 버팀목이 되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 회장의) 영정을 보며 ‘이재용 회장 시대’가 활짝 열리길 바라는 게 고인의 마지막 생각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당초 입관식은 원불교 관계자들의 입회 하에 원불교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으나, 삼성 측은 원불교식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NYT “삼성을 韓경제 주춧돌·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NYT “삼성을 韓경제 주춧돌·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외신들은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소식을 긴급 타전하고 그의 생애와 업적을 집중 조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회장은 삼성을 스마트폰과 TV, 컴퓨터칩 글로벌 거인으로 만든 이”라면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경영 혁신으로 삼성을 한국 경제의 주춧돌이자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냈다”고 회고했다. ●블룸버그 “누구나 탐내는 기업 만들어 ”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고인이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2류 전자부품 제조사를 TV와 스마트폰, 메모리칩 분야 세계 1위로 올려놨다”고 전했다. 블룸버그통신도 “삼성전자를 모조품 생산업체에서 누구나 탐내는 세계 최대 기업으로 변모시킨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글로벌 기술 대기업을 일군 오점의 거인’ 제하 부고기사에서 “그가 경영진에게 끊임없는 위기의식을 심어줘 자기만족을 배격했다”면서도 “불투명한 지배구조, 가족 재산의 미심쩍은 이전 등으로 비난받았다”고 평했다. AFP는 “삼성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가족 소유 대기업, 혹은 재벌”이라고 소개했다. ●요미우리 “日기업 경영 기법에도 정통” 중국 환구망은 “이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넘게 투병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고인의 일본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고인은 와세다대에서 수학하고 파나소닉 창업자를 존경해 일본 기업의 경영 기법에도 정통하다”고 썼고, NHK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카리스마적 경영자로 알려졌다”고 회고했다. 삼성 스마트폰 생산 공장이 있는 베트남의 국영 베트남뉴스통신(VNA)은 메인화면에 부고를 전하며 “이 회장이 삼성을 전자, 보험, 조선, 건설 분야에서 수십개 계열사를 둔 한국 최대 기업으로 키웠다”고 전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NYT “삼성을 韓경제 주춧돌·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외신들은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소식을 긴급 타전하고 그의 생애와 업적을 집중 조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회장은 삼성을 스마트폰과 TV, 컴퓨터칩 글로벌 거인으로 만든 이”라면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경영 혁신으로 삼성을 한국 경제의 주춧돌이자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냈다”고 회고했다. 경영에서 손 뗀 이후에도 ‘큰 사상가’(big thinker)로 남아 거시전략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 “누구나 탐내는 기업 만들어 ”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고인이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2류 전자부품 제조사를 TV와 스마트폰, 메모리칩 분야 세계 1위로 올려놨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아버지 이병철이 운영하던 국수 무역 사업을 한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일조한 주인공”이라고 했다. 블룸버그통신도 “삼성전자를 모조품 생산업체에서 누구나 탐내는 세계 최대 스마트폰·텔레비전·메모리칩 기업으로 변모시킨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삼성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가족 소유 대기업, 혹은 재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외신들은 그가 혁신 독려차 ‘휴대전화 화형식’을 했던 에피소드, 비자금 조성 등으로 두 차례 기소된 전력과 함께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활동, 은둔형 생활방식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요미우리 “日기업 경영 기법에도 정통” 중국 환구망은 “이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넘게 투병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고인의 일본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고인은 와세다대에서 수학하고 파나소닉 창업자를 존경해 일본 기업의 경영 기법에도 정통하다”고 썼다. 삼성 스마트폰 생산 공장이 있는 베트남의 국영 베트남뉴스통신(VNA)은 메인화면에 부고를 전하며 “이 회장이 삼성을 전자, 보험, 조선, 건설 분야에서 수십 개 계열사를 둔 한국 최대 기업으로 키웠다”고 전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양 벗어나 질 위주로 변하라”… 신경영 선언 후 추격자서 선도자로

    “양 벗어나 질 위주로 변하라”… 신경영 선언 후 추격자서 선도자로

    신경영 선언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계열사 사장단 200여명을 불러놓고 ‘신경영’을 선언하며 이같이 일갈한 일화는 삼성에 혁신 DNA를 불어넣은 전환점으로 불린다.그해 2월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본 도쿄,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4개월간 해외 시장 순방 출장에 나선 그는 로스앤젤레스 유통매장 구석 한쪽에 먼지를 머리에 이고 외면당하는 삼성 TV를 보고 대노했다.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는가.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통탄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선 세탁기 조립 라인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의 규격이 안 맞아 닫히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조립하는 모습이 담긴 품질 고발 사내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하라”고 주문한 ‘신경영’ 선언이 나온 배경이다. 이어 그해 6월부터 8월 초까지의 대장정 이후 이 회장은 사장단, 국내외 임원 등 1800여명과 회의 등을 열었고 당시 대화시간은 350시간, A4 용지 8500매에 이르렀다. 당시 신경영 선언으로 1993년 D램 하나뿐이던 삼성의 ‘월드베스트’(세계 시장 1위) 제품은 20년 뒤인 2012년 20개가 됐다.반도체 강국 우리나라가 지금의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하는 데도 고인의 추진력이 있었다. 1974년 그가 파산 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하자 회사 안팎에서는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처졌는데 따라가기가 되겠느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도 “불가능하다”고 했을 정도로 반도체 사업은 ‘공상’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느냐.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한다. 제 사재를 보태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고 엔지니어를 찾아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인력 확보에 나섰다. 1984년 세계 반도체 시장이 극심한 불황으로 위기를 맞고 삼성도 반도체 사업에서 1000억원 정도의 막대한 영업손실을 봤을 때도 “위기는 곧 기회”라며 오히려 설비투자를 대폭 늘리는 등 노력 끝에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기업을 만들었다. 무선전화 15만대를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은 삼성에 ‘품질 경영’을 뿌리내리게 한 계기였다. “불량은 암”이라고 했던 이 회장은 양보다 질을 강조한 지 1년이 지나도 불량률이 여전히 11.8%에 이르자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고 질타했다.불량품 화형식 그는 1995년 1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가정용 무선전화 15만대(150억원어치)를 쌓아놓고 불도저와 해머로 산산조각 낸 뒤 불태웠다. 당시 무선부문 이사였던 이기태 전 삼성전자 사장을 포함해 임직원들은 제 손으로 만든 제품이 불타는 걸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사건은 삼성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 1위로 우뚝 서는 동력이 됐다.다만 자동차 마니아인 이 회장이 주위의 만류에도 밀어붙였던 자동차 사업은 실패로 끝나 오점으로 남았다. 1995년 현대·기아·대우·쌍용 등으로 포화상태인 차 시장에 진출했다가 1999년 삼성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4조원 이상)를 내고 사업을 접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무한탐구 즐긴 집념의 소년… 글로벌 삼성 ‘제2의 창업’ 이루다

    무한탐구 즐긴 집념의 소년… 글로벌 삼성 ‘제2의 창업’ 이루다

    국내 재계에서 가장 극적인 성공신화를 쓴 총수, 삼성을 글로벌 정보기술(IT) 최강자로 키워 낸 경영인, 무노조 경영을 견지한 자본가, 그리고 은둔의 황제. 이 같은 이름으로 수식돼 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미래를 꿰뚫는 혁신의 리더십, 과감한 결단으로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키우며 우리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아버지인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서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은 그는 수많은 기로에서 발휘한 승부사적 결단, 품질에 대한 집념으로 메모리반도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TV 등에서 글로벌 1위를 거머쥐며 삼성을 ‘제2의 창업’ 수준으로 발전시켰다.외로운 유년기 바쁜 부모님·日유학으로 외로움에 익숙 자동차·레슬링 등 ‘마니아적 기질’ 키워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박두을씨 사이에서 3남 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씨와 고인이 된 창희씨 등 두 명의 형이 있어 아들 중에서는 막내다. 여자 형제로는 인희(한솔그룹 고문), 숙희, 순희, 덕희씨 등 네 명의 누나가 있으며 여동생으로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씨가 있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 사업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경남 의령의 할머니댁에서 세 살 때까지 자랐다. 국내에서 초등학교를 다섯 차례 옮겨 다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학교 때 귀국해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6년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해 법무·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딸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과 결혼했다. 결혼 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의 큰 그림을 보게 된다.회장된 3남 두 형 제치고 46세에 삼성그룹 회장 취임 승부사적 결단·혁신으로 韓경제 신화 써 1966년. 이 회장의 둘째 형인 창희씨가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구속되고, 맏형인 맹희씨도 밀수에 관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청와대 투서 사건 등 혼란이 이어진 가운데 호암은 1971년 막내아들 건희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장남 맹희는 경영에 뜻이 없고 차남 창희는 많은 기업을 하기 싫어한다. 3남 건희도 당초에는 사양했으나 마지막에는 역량은 부족하나 맡아 보겠다는 뜻을 가져다 주었다.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갈 것이다.” 호암이 유언장에 남긴 말이다. 1987년 11월 19일 호암이 노환과 폐암의 합병증으로 78세의 일기로 별세하자 삼성그룹 사장단은 이건희 당시 부회장을 제2대 삼성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어린 시절 환경이 자주 바뀌며 홀로 보내는 시간에 익숙했던 고인은 마니아적 성격으로 집중력이 강했는데 이런 기질로 자라난 집념은 세계 1위 삼성의 원동력이 됐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취미와 관심사는 다방면에 뻗쳐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고인의 외로움을 달래 줬던 건 프로레슬링이었다. 와세다대 재학 시절 역도산을 직접 만날 만큼 레슬링에 몰두했던 그는 눈자위가 찢어지는 부상으로 그만둘 때까지 1년여 동안 레슬링을 하면서 치열한 목표 의식을 키웠다. 그의 레슬링 사랑은 1996년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내며 이어졌다. 일본 유학 3년간 1200편의 영화를 봤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각종 기계를 직접 분해, 조립하면서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것도 즐겼다. 이에 평생 즐겨 쓴 휘호가 ‘무한탐구’였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1년 반 동안 차를 죄다 뜯어 보며 차를 6대나 바꾸기도 했다. 1987년 취임과 함께 그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일성을 내놨고 그 약속을 지켰다. 흑백 TV가 삼성의 주력이던 1974년 호암이 반도체산업 진출을 선언하도록 설득하며 사업을 주도한 것도 그다. 당초 동물적인 사업감각의 소유자였던 호암도 아들이 반도체 얘기를 꺼내면 “이놈아, 그 돈이면 TV를 몇백만 대나 더 만들 수 있는데 그 쪼그만 것 만드는 데 쓰겠다는 거냐”며 답답해했다고 한다. 197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면서 첨단 하이테크 산업만이 살길이라고 믿은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호암의 지원을 이끌어 내 오늘날의 삼성을 만든 것이다. 삼성이 글로벌 일류기업이 된 뒤에도 ‘2등 구제불능론’(2등은 현상 유지밖에 못 한다. 조금이라도 지면 완전히 진 것이다) 등 늘 위기론을 부각시키며 ‘초격차’를 위한 고삐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13년 사상 최대 실적에도 이듬해인 2014년 신년사에서 “다시 한번 바뀌어야 한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며 체질과 구조를 총체적으로 혁신하는 ‘마하경영’을 화두로 제시했다. 그의 마지막 신년사이기도 했다.어두운 유산 정관계 로비로 퇴진, 위기론 들고 복귀불법 승계 의혹, 삼성의 리스크로 남아 성공만큼 시련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검찰과 질긴 악연을 이어 가며 재임 기간 세 차례나 법정에 섰다. 1996년에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공소시효 완료로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2005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 때도 검찰 수사를 받았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는 삼성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전직 법무팀장이던 김 변호사는 삼성 비자금 50여억원을 자신이 직접 관리해 왔다고 폭로했다. 삼성의 비자금 조성 방식과 정치인, 법조인에 대한 전방위적 로비 등이 공개되며 지탄을 받았다. 2008년 4월 22일 이 회장은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직을 내놓으며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듬해 재판부는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고인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했다. 이어 2010년 3월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정관계 불법 로비, 불투명한 지배구조, 노조 설립 불허 등 그의 체제에서 이뤄진 삼성의 각종 문제들은 지금도 삼성과 재벌에 대한 불신을 만든 ‘어두운 유산’으로 남았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건희 1942~2020…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지금도 위기다

    이건희 1942~2020…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지금도 위기다

    ‘글로벌 삼성’을 빚어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세상을 떠났다.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자택에서 쓰러진 지 6년 5개월 만이다. 이로써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뒤 33년간 지치지 않고 혁신을 위해 경주해 왔던 ‘이건희의 삼성’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부인 홍라희씨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은 전날(24일) 이 회장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 이날 새벽 4시쯤 고인의 임종을 함께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병상이 있던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17호실에 꾸려졌다. 장례는 이날부터 총 4일간 가족장으로 치러치며 발인은 28일이다. 외부 조문은 최소화하기로 했으나 생전과 고인과 인연이 있었던 재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경제 거목’의 마지막길에 예의를 표했다. 고인은 2014년 5월 10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심근경색을 일으켜 근처 순천향대학 서울병원에서 심폐소생술(CPR)을 받고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됐으며, 다음날인 11일 새벽 막힌 심혈관을 넓혀 주는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이후 중환자실에서 뇌와 장기의 조직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체온 치료를 받고 진정 치료를 계속하다 심폐 기능이 정상을 되찾으면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혼수상태에서 회복했다. 심장 기능을 포함한 신체 기능은 정상을 회복해 입원 6개월 무렵부터 안정적인 상태로 하루 15∼19시간 깨어 있으면서 휠체어 운동을 포함한 재활치료를 받아 왔으며 최근까지 자가호흡을 하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942년 1월 9일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박두을씨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 회장의 인생은 도전의 역사였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장남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었으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등으로 아버지의 눈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을 인수해 오늘의 ‘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 삼성을 일구는 기폭제로 삼았다. 1987년 창업주 별세 이후 그룹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당시 취임사에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를 지켜 냈다. 이미 삼성이 한국의 대표 기업으로 올라섰을 때에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삼성도 어찌 될지 모른다”(2010년 경영복귀 일성), “1등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2013년 신경영 20주년 기념사)며 스스로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성별·학력·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를 실력 위주의 인재 등용주의로 바꿔 실시하고, 협력사와의 상생에 앞장선 것 또한 ‘글로벌 삼성’을 일군 자양분이 됐다. 1995년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도입해 실력만 되면 대학 졸업장은 의미가 없도록 했다.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전거 바퀴 두 개 가운데 하나를 빼 놓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한 그는 1992년 국내 기업 최초로 대졸 여성 전문직 공채를 실시했고 사내 어린이집도 국내 기업 최초로 마련했다. 1988년에는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하고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 중 352개를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 결과 취임 당시 10조원이 채 안 됐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기준 386조원으로 39배 늘어났다.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 커졌다. 불투명한 지배구조, 정경유착, 노조 불인정 등 어두운 면모도 있지만 이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TV 판매, 스마트폰 출하량, 메모리 반도체 등에서 글로벌 정상의 기업으로 일궈 내며 ‘글로벌 삼성’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이건희 회장 “불량은 범죄”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 호통친 이유

    이건희 회장 “불량은 범죄”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 호통친 이유

    삼성전자를 글로벌 IT 기업 최강자로 키워낸 이건희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우리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할 정도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다. 과감한 돌파력과 끈질긴 인내, 사업에 대한 통찰력은 이런 다채로운 삶을 통해 차츰 완성되고 굳건해졌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이다. 어린 건희는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다. 1945년 해방되고 어머니와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형으로는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씨와 고인이 된 창희씨, 누나로는 인희(한솔그룹 고문), 숙희, 순희, 덕희씨가 있다.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씨가 유일한 동생(여동생)이다. 그는 사업가인 호암을 따라다니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유년기를 대구에서 보내다 사업확장에 나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947년 상경했다. 혜화초등학교에 다녔다. ●무슨 물건이든 뜯어보고 해부해봐야 직성 풀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독 과학탐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슨 물건이든 손에 잡히면 뜯어보고 해부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성격이 삼성그룹의 발자취에 큰 영향을 미쳤다.당시 첫째 형이 도쿄대학 농과대학에, 둘째 형이 와세다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어린 건희는 둘째 형과 같이 지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나 났던 만큼 외로움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움을 타다 보니 개를 길렀다. 개 기르기는 취미가 돼 1979년엔 일본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직접 출전시키기도 했다. 순종을 찾느라 150마리까지 키워보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에 심취해 일본 유학 3년간 1200편 이상을 본 걸로 알려져 있다. 일본 막부시대 사무라이 영화가 많았다. 3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고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 들어갔으며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엔 당시 전설로 불리던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만난 일화도 있다. 럭비에도 심취했다. 당시 스포츠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는 등 아마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는 영광으로 이어졌다. ●경영 철학에 핵심이 된 ‘미꾸라지와 메기’ 이론 호암은 학창시절의 이건희 회장에게 ‘미꾸라지와 메기 이론’을 주입시켰다. 이것은 그의 경영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 농부가 한쪽 논에는 미꾸라지만 풀어놓고, 다른 쪽 논에는 미꾸라지와 메기를 같이 풀어놓았다. 천적인 메기와 뒤섞여 풀어놓은 미꾸라지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튼실했다. 살아남으려면 메기보다 빨라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고,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이 시절 이 회장은 자동차에 심취했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이 됐다. 미국에서 어느 대사가 타던 차량을 4200달러에 사서 한참 타다가 600달러를 더 받고 판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를 만나 맞선을 봤다. 1967년 1월 약혼을 하고 홍 여사가 대학을 졸업한 후인 그해 4월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의 큰 그림을 보게 된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첨단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때였다. 당시 ‘반도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조악한 집적회로로 전자시계를 만들던 한국 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삼성이 인수하자’고 건의했으나 호암은 고개를 저었다. 서른둘의 이건희는 순전히 자기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리고는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려 애썼다. 페어차일드사에는 지분 30%를 내놓는 대신 기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256메가 D램의 신화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호암의 반대에도…‘반도체 신화’의 시작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8월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약 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창업주는 1977년 니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화했다.이어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해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28층에서 일을 시작했다. 창업주의 집무실 바로 옆방이었다. 호암은 “건희는 취미와 의향에서 기업 경영에 열심히 참여해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부회장이 되고도 9년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는 엄청난 풍랑이 몰아쳤다. 입사 이후에도 20년 넘게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호암은 이 회장에게 중앙매스컴을 맡길 작정이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부터 이를 권했고 실제로 이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으로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하지만 그해 불거진 이른바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삼성그룹의 후계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사카린 원료 밀수가 적발된 한비 사건은 호암의 장·차남인 맹희·창희 씨가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사건 직후에는 차남인 창희씨만 구속됐다. 이후 호암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 눈물을 머금고 한비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서른여섯이던 맹희씨는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10여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당시만 해도 장자상속이 대원칙이던 시절 삼성의 경영권이 장남인 맹희씨로 넘어갈 듯 보였다.호암은 사장단을 향해 “맹희 부사장이 거부하면 세 번 얘기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내게 가져오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자전에선 “주위 권고와 본인 희망이 있어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봤는데 6개월도 채 못돼 맡긴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져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썼다. 반면 맹희씨는 자신이 6개월이 아니라 7년간 삼성을 경영했다고 달리 기술했다. 이어진 그룹의 혼란과 청와대 투서 사건 등의 여파로 장남 맹희씨는 호암의 신임을 잃고 해외로 떠돌게 된다. 몇 차례 복귀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날아갔고 호암은 1971년 일찌감치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이건희 부회장에게도 1982년 아찔한 순간이 닥친다. 그해 가을 어느 날 푸조를 몰고 양재대로를 달리던 그의 눈앞에 덤프트럭이 나타난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차 밖으로 튕겨 나간 이 회장은 외상이 심하지 않아 2주 만에 회복했지만 항간에는 교통사고를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불호령 나온 이유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 삼성 역사에 남을 중요한 해가 밝았다. 그해 2월. 삼성이 8㎜ VTR을 막 개발해 시장에 내놓던 시기다. 이 회장은 임원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가전매장을 찾았다. GE, 필립스, 소니, 도시바 등 선진국 전자회사들의 휘황찬란한 제품 진열장 한 귀퉁이에 삼성 제품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LA 센추리프라자 호텔 회의장에서 이 회장은 78가지 전자제품을 갖다놓고 당장 분해하라고 했다. 삼성 제품은 싸구려로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회의장에는 내내 이 회장의 호통과 불호령이 이어졌다. 그리고 세탁기 사건이 터졌다. 삼성사내방송 SBC의 몰래카메라 영상물에는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직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칼로 2㎜를 깎아내고 조립하는 장면이 나왔다. 심지어 교대자를 바꿔가며 이런 식으로 제품을 대충 끼워 맞추는 장면이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잡혔다.이 회장은 득달같이 이학수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녹음하시오. 이게 그토록 강조했던 질 경영의 결과란 말이요. 당장 사장과 임원들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시오”라고 지시했다. 윤종용, 김순택, 현명관 등 삼성의 주요 CEO와 고위 임원들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에 모였다.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압축되는 신경영 선언을 했다.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것을 보고 격노했던 그가 삼성의 제2 창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회장은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에세이에 썼다. 이 회장은 “전자산업의 경우 불량률이 3%에 달하면 그 회사는 망한다. ‘불량은 암이다. 악의 근원이다’라고 되뇌면서 일하라고 했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 때 ‘불량은 범죄’라는 신조가 만들어졌다. 이 회장은 1990년대 들어 그룹의 주요 사업체를 분리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그룹의 소유와 경영 체제를 명확히 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1991년 11월에는 신세계와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1993년 6월 제일제당(현 CJ)을 분리했고 1995년 7월에는 제일합섬을 떼냈다. ●“불량은 범죄” 부숴버린 15만점의 삼성제품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그룹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자 이 회장은 또 결단한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직원들이 모였다. 운동장 중앙엔 무선전화기 등 삼성 마크가 붙은 전자제품 15만점이 놓였다. 해머를 든 직원들이 제품을 모조리 때려 부쉈다. 이윽고 무선전화기엔 불을 붙였다. 삼성전자 부회장을 한 이기태 당시 데이터사업본부 이사는 “내 혼이 들어간 제품이 불에 탔다. 그런데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이었다”고 회고했다.1994년 국내 4위였던 삼성의 무선전화기 시장 점유율은 1년 뒤 시장 점유율 19%를 달성하며 1위에 올라섰다. 1990년대 중반에 일기 시작한 ‘애니콜 신화’는 국내 시장을 휩쓸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시 휴대전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모토로라가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애니콜의 인기는 전략 스마트폰인 갤럭시S 시리즈 등 모바일 기기의 혁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반도체에 대한 이 회장의 남다른 집념도 결실을 봤다. 1992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64메가 D램을 개발하면서 반도체 강자가 됐고 이후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 번도 글로벌 1위를 내주지 않고 질주했다. 이 같은 체질 개선과 미래 산업에 대한 집중투자는 삼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 회장 취임 당시 9조9천억원이었던 그룹의 매출은 2013년 390조원으로 25년 만에 40배나 성장했으며 수출 규모도 63억 달러에서 2012년 1567억 달러로 25배 커졌다. 시가 총액은 1987년 1조원에서 2012년 300조원을 넘어섰다. 총자산은 500조원을 돌파했다. 고용 인원(글로벌 기준)도 10만여명에서 42만 5000여명으로 늘었다. 계열사 수도 비상장사를 포함해 17개에서 83개로 증가했다. 이는 신세계, 한솔, 새한 등 계열 분리된 기업을 제외한 것이다. 브랜드 가치도 급신장했다. 브랜드 컨설팅 그룹인 인터브랜드는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 9위인 329억 달러로 추산했다. 삼성은 부품과 세트(완제품)에서 모두 글로벌 1위를 제패한 전무후무한 IT 전자 기업으로 우뚝 섰다. 1969년 흑백 TV를 생산한 이후 37년 만인 2006년 글로벌 TV 시장에서 소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2012년에는 갤럭시 시리즈로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 시장 세계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LSI 등 반도체 부문은 일찌감치 세계 1위 고지를 점령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위기마다 승부사로...‘세계의 삼성’ 일군 이건희

    위기마다 승부사로...‘세계의 삼성’ 일군 이건희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 과감한 결단으로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키우며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아버지인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서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은 그는 수많은 기로에서 발휘한 승부사 기질, 품질에 대한 집념으로 메모리반도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TV 등 20종의 글로벌 1위 제품을 만들며 삼성을 ‘제2의 창업’ 수준으로 일궜다. 하지만 정경유착, 불투명한 지배구조, 부당 내부거래, 노조 설립 불허 등 각종 탈법·편법 행위로 재벌기업의 폐해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며 ‘독주하는 영향력’ 만큼 한국 사회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남겼다. 고인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번째(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 사업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경남 의령의 할머니댁에서 세 살 때까지 자랐다. 국내에서 초등학교를 다섯 차례 옮겨 다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학교 때 귀국해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6년 MBA과정 수료 후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해 법무·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딸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과 결혼했다. 병역은 정신질환을 이유로 면제받았다.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던 고인은 마니아적인 성격과 집중력이 강했다. 일본 유학 시절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던 고인의 외로움을 달래줬던 건 프로레슬링이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역도산을 직접 만날 만큼 레슬링에 몰두했던 그는 눈자위가 찢어지는 부상으로 그만둘 때까지 1년여 동안 레슬링을 하면서 친구도 사귀고 치열한 목표 의식을 키웠다. 그의 레슬링 사랑은 1996년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내며 이어졌다. 일본 유학 시절 영화관에서 하루에 8편을 볼 만큼 영화도 좋아했다. 각종 기계를 직접 분해, 조립하면서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것도 즐겼다. 거짓말 안하고 배신할 줄 모르는 충직함 때문에 진돗개를 길러 1979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진돗개를 출전시키기도 했다. “장남 맹희는 경영에 뜻이 없고 차남 창희는 많은 기업을 하기 싫어한다. 3남 건희도 당초에는 사양했으나 마지막에는 역량은 부족하나 맡아보겠다는 뜻을 가져다 주었다.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갈 것이다.” 1971년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전 회장이 유언장에 남긴 말이다. 1987년 11월 19일 호암이 노환과 폐암의 합병증으로 78세의 일기로 별세하자 삼성그룹 사장단은 이건희 부회장을 제2대 삼성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우리나라를 지금의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하는 데는 고인의 추진력이 큰 역할을 했다. 1974년 그가 파산 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하자 회사 안팎에서는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가 하겠느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도 “반도체는 인구 1억, GNP 1만 달러, 내수판매 50% 이상이 가능한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산업으로 기술·인력 재원이 없는 우리에겐 불가능하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반도체 사업은 ‘공상’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느냐.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한다. 제 사재를 보태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고 엔지니어를 찾아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차례 드나들며 인력 확보에 나섰다. 1984년 세계 반도체 시장이 극심한 불황으로 위기를 맞고 삼성도 반도체 사업에서 1000억원 정도의 막대한 영업손실을 봤을 때도 고인은 “위기는 곧 기회”라며 오히려 설비투자를 대폭 늘리며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기업을 만들었다.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성공을 ‘운이 좋다’ ‘돈이 돈을 벌었다’고도 평가하기도 한다. 이에 이 회장은 1997년 10월 언론 기고를 통해 이렇게 대답한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을 놓고 간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업을 해 본 사람은 운이 좋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을 하려면 그에 값하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재임기간 동안 3차례나 법정에 서야 했다. 1996년에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확정받았다. 공소시효 완료로 무혐의 결정을 받긴 했지만 2005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 때도 이 회장은 검찰 수사를 받았다. 다시 2년 후 터진 2007년에는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는 삼성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전직 법무팀장이던 김 변호사는 삼성그룹의 비자금 50여억원을 자신이 직접 관리해 왔다고 폭로했다. 삼성의 비자금 조성 방식과 전방위적 로비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2008년 4월 22일 이 회장은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 직을 내놓으며 경영에서 손을 뗐다. 1년 후 재판부는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했다. 이후 2010년 3월 이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변을 내놓으며 경영 일선에 복귀해 조직 재정비, 삼성의 도약에 힘을 쏟았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삼성 거인으로 변화시켜”...이건희 별세 소식 전한 외신(종합)

    “삼성 거인으로 변화시켜”...이건희 별세 소식 전한 외신(종합)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주요 외신들도 긴급 뉴스로 타전하며 그의 생애와 삼성에 대해 조명했다. AP통신과 블룸버그통신, 로이터통신, AFP통신 교도통신 등은 이 회장의 별세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AP통신은 이 회장에 대해 “소규모 TV 제조사를 글로벌 가전제품 거인으로 변화시켰다”며 “이 회장이 리더십을 발휘한 약 30년간 삼성전자는 글로벌 브랜드로 부상했으며 전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TV, 메모리칩 제조사가 됐다”고 평가했다. 로이터통신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 회장의 어록을 소개하며 “그는 소니 등 라이벌들에 도전하기 위해 혁신을 촉진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도 관련 소식을 전하며 “이 회장은 삼성을 스마트폰, TV, 컴퓨터 칩 거인으로 키웠다”며 “삼성전자는 오늘날 한국 경제의 주춧돌이며 전 세계에서 연구개발 투자지출이 가장 큰 기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이어 “그의 재임 동안 점차 다른 전문 경영인들이 그룹에서 더 큰 책임을 지게 됐지만, 이 회장은 삼성의 ‘큰 사상가’(big thinker)로 남아 거시 전략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프랑스 AFP통신은 “삼성전자를 글로벌 테크 거인으로 변모시킨 이 회장은 2014년 심장마비로 병석에 눕게 됐다”며 “은둔형 생활방식으로 유명한 이 회장의 구체적인 상태에 관해선 공개된 바가 적어, 그의 마지막 날들 역시 미스터리에 쌓여 있었다”고 전했다. 통신은 “삼성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가족 소유 대기업, 혹은 재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 언론들도 이 회장의 별세 소식을 긴급 보도했다. 해외망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향년 78세로 별세했다”고 전했고, 환구망도 한국 언론을 인용해 이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넘게 투병하다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수준 미달 제품 만드는 건 죄악” 삼성에 ‘일류DNA’ 심은 이건희

    “수준 미달 제품 만드는 건 죄악” 삼성에 ‘일류DNA’ 심은 이건희

    25일 타계한 고 이건희 회장은 양적 성장과 외형에 치중하던 삼성에 ‘일류 문화’를 심어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국가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주요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D램·낸드플래시를 필두로 한 메모리반도체, 휴대전화, TV 등 삼성의 주력 부품과 완제품이 모두 세계 1위를 고수하는 데는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품질 향상, 초격차 기술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건 이 회장의 지도력이 있었다는 평가다. 고인이 총수 취임 27년간 삼성그룹의 매출액을 9조 9000억원에서 338조 6000억원으로 34배, 자산을 8조원에서 575조 1000억원으로 70배 이상 키울 수 있었던 이유다. 특히 밑바닥부터의 체질 개선을 요구한 1993년 신경영선언, 1995년 애니콜 화형식은 삼성을 도약하게 한 주요 순간으로 꼽힌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계열사 사장단 200여명을 불러놓고 이 회장이 말한 이 유명한 구호(신경영선언)는 ‘내가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던 삼성에 혁신 DNA를 불어넣은 전환점이다. 그 해 2월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본 도쿄,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4개월간 해외 시장 순방 출장에 나선 이 회장은 유통매장에서 먼지를 머리에 이고 구석에 외면당하는 삼성 TV를 보고 대노했다. 임원들과 이를 함께 둘러본 이 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는가.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통탄했다. 이어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의 규격이 안 맞아 닫히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조립하는 모습이 담긴 품질 고발 사내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하라”고 주문한 ‘신경영 선언’이 나온 배경이다. 1993년 6월부터 8월 초까지의 대장정에서 이 회장은 사장단, 국내외 임원 등 1800여명과 회의 등을 열었고 당시 대화시간은 350시간, A4 용지 8500매에 이르렀다. 신경영 선언으로 1993년 D램 하나 뿐이던 삼성의 ‘월드베스트’(세계 시장 1위) 제품은 20년 뒤인 2012년 20개가 됐다.무선전화 15만대를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 같은 과감한 충격요법은 삼성에 ‘품질 경영’을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불량은 암”이라고 했던 이 회장은 양보다 질을 강조한지 1년이 지나도 불량률이 여전히 11.8%에 이르자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1995년 1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가정용 무선전화 15만대(150억원 어치)를 쌓아놓고 불도저와 해머로 산산조각낸 뒤 불태웠다. 당시 무선부문 이사였던 이기태 전 삼성전자 사장을 포함해 임직원들은 제 손으로 만든 제품이 불타는 걸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사건은 삼성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 1위를 꿰차게 하는 동력이 됐다. 자동차 마니아인 이 회장이 주위의 만류에도 밀어붙였던 자동차 사업은 처참한 실패로 삼성에 큰 오점을 남겼다. 1995년 현대·기아·대우·쌍용 등으로 이미 포화상태인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으나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 제조 역량 부족, 차종 단순화 등으로 1999년 삼성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적자(4조원 이상)를 내고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비자금 조성, 정관계 불법 로비, 무노조 경영 등 이 회장 체제 아래서 이뤄진 삼성의 각종 편법·불법·부정 행위들은 우리 사회와 경제에 해악을 끼치고 삼성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만든 ‘어두운 유산’이기도 하다. 이는 3세 경영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재용 부회장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에 발목을 잡는 사법리스크로 부메랑이 돼 돌아오며 이 부회장이 그리는 ‘뉴삼성’에 큰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건희 회장 보유주식 18조 어떻게…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는?

    이건희 회장 보유주식 18조 어떻게…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작고함에 따라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는 다시금 격량에 휩싸이게 됐다. 이 회장이 보유중인 약 18조원 상당의 삼성 주식을 유족들이 물려받으려면 막대한 상속세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 오너일가가 현금으로 지닌 자금이 여의치 않아 주식 일부를 매각하게 되면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정점에 위치한 삼성 지배구조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국정농단 재판’과 ‘삼성물산 합병·회계부정 재판’을 비롯해 ‘사법리스크’ 문제가 아직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이 부회장은 상속세 문제라는 또다른 고민거리를 마주하게 됐다. 이날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이 지니고 있던 삼성그룹의 주식은 시가로 18조원에 달한다. 국내 주식 부자 1위에 해당하는 액수다. 삼성전자 보통주 4.18%, 삼성전자 우선주 0.08%, 삼성생명 20.76%, 삼성물산 2.90%, 삼성SDS 0.01%, 삼성라이온즈 2.50% 등을 보유했다. 삼성 오너 일가는 이 부회장이 지닌 삼성물산 주식 17.48%에다가 그외 가족들이 보유한 14.12%를 합쳐 삼성물산의 경영권을 쥐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삼성의 지배구조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하지만 이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그가 보유중이던 주식에는 막대한 상속세가 부과될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상 최고 실제 상속세율은 65%에 달하는데 이를 단순 계산하면 삼성 오너 일가는 약 10조원 내외에 상속세를 낼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온다. 아무리 국내 최고의 ‘로얄 패밀리’라 불리는 삼성 오너 일가라 하더라도 재산의 상당부분이 주식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10조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이 부회장은 2017년에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이후부터는 삼성에서 월급을 일체 받지 않는 ‘무보수 경영’을 펼쳐오고 있다. 삼성생명은 삼성 오너일가 측 주식이 57.25%에 달하는데 이 회장이 20.76%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구조 손질이 불가피해진다. 삼성물산이 보유중인 삼성바이로조직스 주식을 팔아 삼성생명 주식을 사들인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세금 문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 연부연납 제도를 이용할 가능성도 있다. 연이자 1.8%를 적용해 1차로 전체의 ‘6분의 1’ 금액을 낸 뒤 나머지 ’6분의 5’를 5년간 지불하는 방식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고 구본무 선대 회장에게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상속세 9215억원을 이같은 방식으로 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 오너 일가가 부담해야할 상속세가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5년에 시간이 주어졌다 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말했다.삼성전자를 ‘사법리스크’ 문제도 지배구조를 정리하는 데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국정농단 재판에서는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불법승계’를 저질렀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됐다. 또한 추후에 검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와 관련해 수사와 기소를 할 때도 ‘불법승계’ 문제는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정기관은 물론이고 대중들도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다. 만약 삼성에서 또다시 무리해서 경영권을 방어하려 하면 금새 비판 여론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 부회장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4세 경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맞물려 이참에 지배구조 문제를 조금씩 정리하라는 압박이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반면 보유 주식만으로는 삼성전자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태까지 보여준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주주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2014년 5월 이 회장이 심근경색 증상으로 갑자기 쓰러진 이후에도 이 부회장은 우려를 딛고 무난하게 삼성을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세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2030년 1위 기업 등극을 목표로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스마트폰 부문에서도 ‘폴더블(접히는) 스마트폰’의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고,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량에서는 꾸준히 1~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업 전반을 이끌어오던 이 부회장의 경영권이 흔들리면 ‘잘 나가는’ 삼성전자 또한 요동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의식한 주주들이 삼성 오너 일가 편에 설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부회장은 부친을 잃은 슬픔을 추수린 뒤에 곧바로 ‘경영권 방어 작업’에 돌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절반 찬 객석 감동… 한국 공연은 행운” 마스크 뒤로 미소 잃지 않는 고양이들

    “절반 찬 객석 감동… 한국 공연은 행운” 마스크 뒤로 미소 잃지 않는 고양이들

    “일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지인과 동료들이 수도 없이 말해 준 단어가 있어요. ‘러키’!” 40년 가까이 세계 무대를 누볐던 뮤지컬배우 브래드 리틀마저 올해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거듭 말했다.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행운을 안고 있다는 아름다움은 놓칠 수 없는 부분”이라면서다.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드 하이드’ 등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리틀은 지난 9일부터 ‘캣츠’ 40주년 기념 내한공연에서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로 다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공연을 하기로 계약했을 땐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였는데 리허설을 시작하면서 2단계로 올라가더니 2.5단계까지 가 솔직히 긴장되고 불안했어요. 그런데 한국이 늘 그랬듯 똘똘 뭉쳤죠. 미국인으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데 미국이었으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캣츠’의 오랜 명성을 이어 가고 있는 주역인 리틀과 함께 조아나 암필, 댄 파트리지를 20일 샤롯데씨어터 무대에서 만났다. 세 사람은 세계적인 팬데믹 속에서 한국에서 ‘캣츠’ 무대에 서고 있다는 데 한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영국 출신인 파트리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향에서 공연하고 싶어도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 죄책감이 들 만큼 힘들었지만 그들의 에너지와 사랑까지 모아 무대에서 전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대 위에선 인기 아이돌이자 반항아인 고양이 럼 텀 터거로 다양한 개성을 보여 주고 있다.‘메모리’로 아름다운 매력을 뽐내는 그리자벨라 역의 암필은 “과연 관객들이 있을까 걱정할 정도였는데 객석 50%를 채워 준 관객들에게 감동을 받았다”면서 “용감하게 저희를 믿고 안전한 환경에서 공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 공연장에 온 관객들 덕에 많은 힘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에서 올드 듀터러노미를 비롯해 객석을 지나는 몇몇 고양이들은 마스크를 쓴다. 얼굴에 한 분장과 똑같은 분장을 그린 메이크업 마스크로 조심스레 객석을 지난다. 공연 일주일 전쯤 결정된 새로운 시도였다. 리틀은 “메이크업을 똑같이 한 마스크로 예술적 감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 수 있어 놀라웠다”면서 “마스크 속에서 어떤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객에겐 보여 줄 수 없어 안타깝지만, 작품의 예술성과 기승전결에 필요한 요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캣츠’는 T S 엘리엇의 시를 바탕으로 고양이 축제라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상상력이 더해져 1981년 초연 이후 30개 국가, 300여 도시에서 15개 이상 언어로 공연됐다. 무대예술과 아름다운 노래도 매력을 주지만 특히 고양이 몸짓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뮤지컬 배우들에겐 철인 3종 경기처럼 어려운 작업으로도 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유튜브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고양이를 관찰한다는 암필은 “그런데 동료 배우들이 정말 고양이 같아서인지 자꾸 재채기가 나온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암필은 특히 요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푹 빠져 있다며 “제가 너무 사랑하는 현빈의 나라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리틀과 파트리지가 “대기실을 온통 현빈 사진으로 도배했다”고 알려주자 암필은 “한 번 만나게 해 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유쾌한 웃음으로 대화를 이어 가던 리틀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 전 별세한 어머니 생각에. “공연 마지막에 암필이 깡통에 앉아 ‘메모리’를 부르는데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어요. 관객들은 모르셨죠? 여러분을 등지고 하늘로 손을 흔들 때 ‘엄마,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아셨네요.”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뮤지컬 ‘캣츠’ 3인방 “무대 위 설 수 있는 자체가 행운…한국이라 가능했어요”

    뮤지컬 ‘캣츠’ 3인방 “무대 위 설 수 있는 자체가 행운…한국이라 가능했어요”

    “일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지인과 동료들이 수도 없이 말해 준 단어가 있어요. ‘러키’!” 40년 가까이 세계 무대를 누볐던 뮤지컬배우 브래드 리틀마저 올해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거듭 말했다.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행운을 안고 있다는 아름다움은 놓칠 수 없는 부분”이라면서다.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드 하이드’ 등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리틀은 지난 9일부터 ‘캣츠’ 40주년 기념 내한공연에서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로 다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공연을 하기로 계약했을 땐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였는데 리허설을 시작하면서 2단계로 올라가더니 2.5단계까지 가 솔직히 긴장되고 불안했어요. 그런데 한국이 늘 그랬듯 똘똘 뭉쳤죠. 미국인으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데 미국이었으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캣츠’의 오랜 명성을 이어 가고 있는 주역인 리틀과 함께 조아나 암필, 댄 파트리지를 20일 샤롯데씨어터 무대에서 만났다. 세 사람은 세계적인 팬데믹 속에서 한국에서 ‘캣츠’ 무대에 서고 있다는 데 한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영국 출신인 파트리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향에서 공연하고 싶어도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 죄책감이 들 만큼 힘들었지만 그들의 에너지와 사랑까지 모아 무대에서 전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대 위에선 인기 아이돌이자 반항아인 고양이 럼 텀 터거로 다양한 개성을 보여 주고 있다.‘메모리’로 아름다운 매력을 뽐내는 그리자벨라 역의 암필은 “과연 관객들이 있을까 걱정할 정도였는데 객석 50%를 채워 준 관객들에게 감동을 받았다”면서 “용감하게 저희를 믿고 안전한 환경에서 공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 공연장에 온 관객들 덕에 많은 힘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에서 올드 듀터러노미를 비롯해 객석을 지나는 몇몇 고양이들은 마스크를 쓴다. 얼굴에 한 분장과 똑같은 분장을 그린 메이크업 마스크로 조심스레 객석을 지난다. 공연 일주일 전쯤 결정된 새로운 시도였다. 리틀은 “메이크업을 똑같이 한 마스크로 예술적 감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 수 있어 놀라웠다”면서 “마스크 속에서 어떤 미소를 짓고 있는지 관객에겐 보여 줄 수 없어 안타깝지만, 작품의 예술성과 기승전결에 필요한 요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캣츠’는 T S 엘리엇의 시를 바탕으로 고양이 축제라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상상력이 더해져 1981년 초연 이후 30개 국가, 300여 도시에서 15개 이상 언어로 공연됐다. 무대예술과 아름다운 노래도 매력을 주지만 특히 고양이 몸짓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뮤지컬 배우들에겐 철인 3종 경기처럼 어려운 작업으로도 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유튜브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고양이를 관찰한다는 암필은 “그런데 동료 배우들이 정말 고양이 같아서인지 자꾸 재채기가 나온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암필은 특히 요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푹 빠져 있다며 “제가 너무 사랑하는 현빈의 나라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리틀과 파트리지가 “대기실을 온통 현빈 사진으로 도배했다”고 알려주자 암필은 “한 번 만나게 해 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유쾌한 웃음으로 대화를 이어 가던 리틀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 전 별세한 어머니 생각에. “공연 마지막에 암필이 깡통에 앉아 ‘메모리’를 부르는데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어요. 관객들은 모르셨죠? 여러분을 등지고 하늘로 손을 흔들 때 ‘엄마,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아셨네요.”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최태원의 10조원 통큰 베팅… 인텔 품고 단숨에 낸드 세계 2위로

    최태원의 10조원 통큰 베팅… 인텔 품고 단숨에 낸드 세계 2위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국내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인 인텔 낸드플래시 메모리 부문 인수로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SK하이닉스는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 전체를 10조 3104억원(90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20일 밝혔다. 직전까지 국내 M&A 사상 최대 기록은 지난 2016년 이뤄진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로 규모가 약 80억 달러에 달했다. 이번 M&A로 SK하이닉스는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도 세계 2위로 도약하며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 1위인 삼성전자의 뒤를 바짝 뒤쫓는다. SK그룹의 반도체 사업은 최 회장의 공격적인 M&A로 시작해 성장해 왔다. SK그룹은 지난 2011년 3조 4267억원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를 인수하면서 기업의 주요 사업으로 에너지·화학, 정보통신기술(ICT)에 이어 반도체를 추가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그룹의 주요 성장축으로 자리잡으며 최 회장의 최대 경영성과로 꼽히고 있다. 최 회장은 2018년 도시바(현 키옥시아) 메모리 사업 부문을 인수할 때는 진두지휘하면서 낸드 사업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앞서 2014년 미국 바이올린 메모리 PCIe 카드 사업부와 벨라루스의 소프텍 벨라루스의 펌웨어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낸드 부문 보강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특히 지난 2015년 OCI머티리얼즈(현 SK머티리얼즈)를 4800억원에 사들이고 2017년 LG실트론(현 SK실트론)을 6200억원에 인수하면서 반도체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SK실트론은 이후 미국 듀폰의 웨이퍼 사업부를 5400억원에 인수하며 전력반도체용 웨이퍼 경쟁력을 강화했다. 지난 2018년에는 인텔 출신(2000~2010년)인 반도체 공정 전문가 이석희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하면서 사업 강화 의지를 꾸준히 피력했다. SK하이닉스는 이번 인수로 D램에 이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낸드플래시까지 경쟁력을 강화해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잡았다는 평가다. SK하이닉스는 D램 부문에서는 삼성에 이어 2위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4~5위권을 오갔으나 이번 인수로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도 단숨에 20%대 점유율로 삼성전자에 이어 2위로 올라서게 됐다. 특히 인텔의 최대 강점으로 꼽히는 기업형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시장에서는 1위로 선두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이에 따라 SK하이닉스의 매출 비중도 지난 2분기 기준 D램이 72.7%, 낸드플래시가 23.7%에서 낸드플래시의 경쟁력이 높아지며 6대4 정도로 ‘D램 쏠림 현상’이 완화될 전망이다. 그간 SK하이닉스는 D램 매출 의존도가 높아 D램 가격이 출렁일 때마다 실적에 악재가 돼 왔으나 안정적인 사업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SK하이닉스의 ‘통 큰 베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메모리반도체는 시스템반도체와 달리 수요자 중심으로 가격이 매겨져 왔는데 SK하이닉스가 낸드 시장에서 압도적인 공급자 위치를 점유하게 되면서 향후 가격 협상력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이 그동안 보유 현금을 크게 늘리는 등 코로나19로 최대한 몸을 사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최 회장의 과감한 승부수를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판명됐다”며 “이번 M&A로 다른 기업들과의 격차를 계속 벌여 나갈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SK하이닉스, 인텔 ‘메모리’ 낸드 부문 10조 3천억원에 인수

    SK하이닉스, 인텔 ‘메모리’ 낸드 부문 10조 3천억원에 인수

    SK하이닉스가 미국 인텔의 낸드 사업 부문 전체를 10조 3000억원에 인수한다. SK하이닉스는 20일 공정공시를 통해 미국 인텔사의 메모리 사업 부문인 낸드 부문을 10조 3104억원에 인수하는 내용의 양도 양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이와 관련해 이날 오전 이사회 의결도 마쳤다. 인수 부문은 인텔의 SSD 사업 부문과 낸드 단품 및 웨이퍼 비즈니스, 중국 다롄 생산시설을 포함한 낸드 사업 부문 전체다. 반도체 중앙처리장치(CPU) 전문 회사인 인텔은 최근 가격 하락과 시장경쟁 격화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목표로 한 수익을 내지 못하자 사업 철수를 추진해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속보] SK하이닉스, 인텔 낸드 사업부문 10조 3천억원에 인수

    [속보] SK하이닉스, 인텔 낸드 사업부문 10조 3천억원에 인수

    SK하이닉스가 인텔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인 낸드플래시 사업 부문을 10조 3000억원에 인수했다고 20일 밝혔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SK하이닉스가 인텔과 메모리 반도체 사업분야 인수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고, 타결에 접근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인텔은 중국 다롄에 3D 낸드 플래시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다. 향후 인텔 사업구조의 무게 중심은 비메모리 반도체로 급격하게 쏠리게 된다. 인텔은 최근 가격 하락과 시장경쟁 격화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목표로 한 수익을 내지 못하자 사업 철수를 추진해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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