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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헤르손 수복 벼르는 러시아가 유해 빼내간 포템킨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헤르손 수복 벼르는 러시아가 유해 빼내간 포템킨

    세르게이 예이젠슈타인 감독이 1925년 연출한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은 영화학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봐야 할 영화로 손꼽힌다. 군대의 발포에 무수한 사람들이 쓰러지는 오데사의 계단 위를 유모차가 굴러내려오는데 아기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의 경악하는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는 몽타주 기법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영화 제작의 가장 기본적인 기법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의 스무 돐을 맞아 이 영화가 제작됐는데 제정러시아 해군의 수병들이 전함 포템킨 호에서 일으킨 반란 사건을 담았다. 이 전함은 제정러시아의 귀족 출신 정치인이자 군인,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의 총독이었던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툠킨타브리체스키(1739~91)를 기려 건조됐다. 1898년부터 건조되기 시작했으나 화재 사고 등 곡절이 적지 않아 1905년이 돼서야 흑해함대에 편성됐다. 상당히 뒤늦게 만들어진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이미 영국에서는 드레드노트급이 건조되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러일전쟁으로 인해 발트 함대가 증발되다시피 한 러시아에는 그야말로 ‘최신상’ 전함이었다. 포템킨은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 총사령관으로 1783년 조약을 통해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크름(크림) 반도를 빼앗아 편입시키는 공을 세웠다. 세바스토폴이란 부동항을 러시아에 안긴 인물이며 세계 최강의 해군 전력으로 꼽히는 흑해함대를 창설한 것도 그였다. 그는 튀르크와 조약을 체결하던 중 1791년 10월 16일 병사했는데 그의 유해는 크림 반도 인근 헤르손의 성 예카테리나 성당에 안장됐다. 크림 반도를 2014년에 다시 점령하고 제정러시아의 영화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푹 빠져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극우세력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인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뜬금없이 영화 얘기와 2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포템킨 장군 얘기를 떠올리는 것은 헤르손주 수복 대공세를 벼르는 러시아 군이 포템킨의 유해를 헤르손에서 빼내 다른 점령지로 옮겼다는 소식 때문이다. 28일(현지시간) 미국 CNN 방송 등에 따르면 러시아 군은 최근 헤르손의 성 카테리나 성당에 보관돼 있던 포템킨의 유해와 동상을 드니프로 강 동쪽 러시아 점령지로 반출했다. 포템킨의 이름은 러시아가 올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언급됐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 합병 연설에서 이들 지역을 ‘새 러시아’를 뜻하는 ‘노보로시야’라고 칭하면서, 우크라이나 동부에 여러 도시를 건설한 인물 중 하나로 포템킨을 언급했다. 현재 포템킨의 유해가 옮겨진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러시아는 헤르손의 상황이 안정되면 유해를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밝혔다. 최근 대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는 헤르손 주변 지역을 공략하면서 헤르손과 크림반도 수복을 공언하고 있으며, 러시아군도 헤르손 러시아계 주민들을 대피시켜놓고 이곳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러시아에서는 ‘포템킨 경제’란 말이 시사용어로 자리잡았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연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둘의 관계가 좋았는데 포템킨 총독이 다스리는 크림 반도의 경제 사정은 여제에게 보고된 것과 달리 좋지 않았고, 해서 빛좋은 개살구 식으로 폄하할 때 쓰이는 용어였다. 푸틴 대통령은 포템킨 장군의 좋은 점만 부각시키려 하는데 그늘도 적지 않았던 셈이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로큰롤 여명기 열었지만 킬러로 불린 제리 리 루이스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로큰롤 여명기 열었지만 킬러로 불린 제리 리 루이스

    1950년대 로큰롤 황금 시대를 이끌었던 마지막 생존자 제리 리 루이스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에이전트 자크 파넘은 28일(현지시간) 아침 루이스가 미국 미시시피주 데소토 카운티에 있는 자택에서 일곱 번째 부인 주디스가 임종한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연예전문 매체 TMZ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가 며칠 전에 세상을 등졌다고 오보를 내기도 했다. 워낙 많은 질환을 갖고 있었고, 부상도 잦아 의료진은 세상을 떴어도 수십년 전에 떴어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고 파넘은 전했다. 격정적인 피아노 연주와 개성 있는 창법으로 유명했던 루이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 팻 도미노 등과 함께 로큰롤의 여명을 연 사람으로 꼽힌다. 1935년 루이지애나주 페리데이에서 태어난 그는 컨트리 뮤직과 리듬 앤드 블루스, 가스펠을 들으며 성장했고, 열네 살 때 처음 무대에 섰다. 그는 주로 컨트리 뮤직을 연주했지만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주, 스물한 살 때인 1956년 프레슬리가 몸 담았던 선 레코드와 계약한 뒤 본격적으로 로큰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가 발표한 ‘홀 랏 오브 셰이킹’은 세계적으로 600만장이 팔리면서 로큰롤 초창기에 가장 많이 팔린 노래 중 하나가 됐다. 이어 대표곡인 ‘그레이트 볼스 오브 파이어’를 히트시키면서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던 프레슬리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 노래를 주제로 1989년 같은 제목의 영화가 제작됐는데 데니스 퀘이드가 루이스를, 위노나 라이더가 마이라를 연기했다. 그는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958년 추문에 얽히면서 인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과 스물두 살 나이에 세 번째 부인을 맞았는데 사촌 마이라 게일 브라운이었고,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비난 여론이 확산하자 월드투어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루이스가 연주하던 1950년대풍 로큰롤에 대한 수요도 줄었다. 그러자 그는 1960년대 말 컨트리 가수로 복귀해 인기를 얻었지만 주변에서 일어난 다양한 비극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1962년에는 세 살 된 아들이 익사했고, 1973년에는 열아홉 살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82년에는 네 번째 부인이 이혼 조정을 앞두고 수영장에서 익사했다. 물론 스스로도 사고를 쳤다. 1976년 총기를 들고 프레슬리를 만나야겠다고 그의 자택 그레이스랜드 앞에서 기다리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같은 해에 그는 콜라병 뚜껑을 총으로 맞추는 놀이를 하다 베이스 연주자 노먼 버치 오언스의 가슴에 총탄을 박는 오발 사고를 내기도 했다. 다행히 오언스는 목숨을 건졌고, 12만 5000 달러의 손해배상을 받아냈다.피아노에 불을 놓는 등 과격한 무대 매너로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는 1986년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올해 컨트리 뮤직 명예의전당에 헌액됐다. 마지막 앨범은 평생을 함께 한 사촌이자 복음주의 목사 지미 스와가르트와 함께 만든 가스펠 음반이었다. 스와가르트는 젊었을 때부터 고인이 음악하는 것을 반대해 꾸준히 말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이들이 애도 행렬에 동참했다. 롤링스톤스의 로니 우드는 “RIP(영원한 안식을) JLL 킬러-남자다운 남자”라고 했고, 비틀스의 링고 스타는 “고인에게 축복을, 평화와 사랑이 유족에게 내리길”이라고 기원했다. 고인 때문에 피아노를 사랑하게 됐다고 늘 털어놓은 엘튼 존은 인스타그램에 둘이 함께 찍힌 사진을 올리고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형을 바꾸는 인물이었으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피아노를 박살낸 인물이었다”고 적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의 닐 맥코믹 음악전문기자는 고인을 “로큰롤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였으며 총질을 해대고 트러블에 불을 지르는 인물이었다. 동시에 이제껏 살아온 이들 가운데 가장 진정한 로커였다. 숙취와 약물중독, 설상가상의 여색 등의 논란이 그의 생애 대부분을 망쳤다”고 적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욘더에 갈거야” 다음날 세상 뜬 레슬리 조던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욘더에 갈거야” 다음날 세상 뜬 레슬리 조던

    “주님의 나팔 소리가 들리며 시간이 다 돼가고 있어/ 그리고 영원히 맑고 깨끗한 날의 아침이 밝아오네/ 시로 구원받은 이들이 피안에 모여들고/ 그 길이 욘더라 불릴 때 난 그곳에 있을거야” 시추에이션 코미디 ‘윌과 그레이스’의 스타로 낯익은 미국 코미디언 겸 배우, 작가, 가수인 레슬리 조던이 24일(현지시간) 할리우드에서 교통사고로 67세 삶을 접기 전날에 프로듀서이며 친구인 대니 마이릭의 쇼에 출연해 처음 들려준 자작곡의 가사 한 대목이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동영상을 올린 지 하루가 안돼 손수 차를 운전해 드라마 ‘콜 미 캣’ 촬영 현장인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로 향하다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은 뒤 그의 차가 한 건물을 들이받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동영상을 올리며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작별의 인사를 남겼다. “사랑. 빛. 레슬리.” 그의 노래는 사후 세계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토종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에 지난 주말 공개된 이준익 감독의 오리지널 시리즈 ‘욘더’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기억을 이승의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가상공간으로 욘더를 그려 눈길을 끌고 있다. ‘Yonder’는 우리말로 옮기면 피안(彼岸)에 가깝다. 고인은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태어났는데 열두 살 때 어머니에게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것으로 유명했다. 열네 살 때부터 술을 입에 대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다. 동성애자인 CNN 앵커 앤더슨 쿠퍼가 기자로 일하던 1990년대  자신의 중독 치료 과정을 주제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2006년 ‘윌과 그레이스’로 에미상을 받았고,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와 ‘더 쿨 키즈’ 등에도 출연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미국 전역에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하루 두 차례 온라인에 재미있는 동영상을 올려 젊은이들의 스타로 거듭나기도 했다. 키가 150㎝ 밖에 되지 않았지만 재치가 넘쳤다. 기이할 정도로 죽음을 예감한 듯 올린 인스타그램 동영상에 추모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니콜 셰르징거는 “레슬리 믿을 수가 없네요! 그냥 가슴이 찢어져요. 당신은 사랑이요 빛이었어요. 당신을 많이 사랑하고 무척 그리워할 거에요. 천국에서 영면하세요”라고 적었다. 레인 배스는 “이제 그 동영상은 작별의 인사가 됐다. 하늘 높이 올라가요 내 친구”라고 댓글을 달았다. 여배우 올리비아 먼은 “사랑 속에 영면하소서”라고 추모했고, 다른 팔로워들은 그의 죽음 이후 이 슬픈 찬가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고 지적했다. 한 팔로워는 “기막히게도 이것이 마지막 포스트가 됐다”고 애석해 한 반면, 다른 이는 슬픈 소식에도 이런 동영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혼돈스럽다고 털어놓았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레드불 창립자로 은둔하며 스포츠 지원한 마테쉬츠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레드불 창립자로 은둔하며 스포츠 지원한 마테쉬츠

    에너지음료 레드불의 공동창업자인 오스트리아 최고 갑부 디트리히 마테쉬츠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레드불은 22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평생 인터뷰를 하지 않고 은둔의 삶을 살았던 마테쉬츠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면서 그가 성취한 것들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고인은 이미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던 붉은 황소란 뜻을 지닌 태국 에너지음료 ‘크라팅 탱’을 유럽인의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바꿔 큰 성공을 거뒀다. 태국을 여행하다 이 음료를 발견했을 때 그는 프록터 앤 갬블(P&G)의 세일즈맨이었다. 1984년 그는 원래 창업자 타이 찰레오 유위티야와 함께 레드불을 창업해 1987년 레드불이란 상표의 음료를 출시했다. 올해 포브스는 그의 자산을 274억 달러(약 39조 4000억원)로 평가하며 오스트리아 최고 부자로 꼽았다. 마테쉬츠는 자신의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스포츠를 적극 활용한 인물로도 기억된다.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 원(F1)에 출전하는 레드불 팀을 창단했다. 2005년에는 오스트리아 프로축구 잘츠부르크와 독일 분데스리가 라이프치히를 인수했다. 두 클럽 모두 마테쉬츠의 막대한 투자 덕에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는 승리를 구가했다. 레드불은 공중곡예 스턴트 팀을 비롯해 스포츠클라이밍, 서핑, 협곡 다이빙, 카누 등 익스트림 스포츠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는 F1 월드 그랑프리 미국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레드불 레이싱 팀의 총감독 겸 최고경영자(CEO) 크리스티앙 호르네르는 고인에 대해 “전 세계 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스포츠 종목을 위해 일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애도했다. BBC는 고인이 고향인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지방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현지 수공예와 예술 분야를 일으키려 애쓰는 한편, 척수 연구를 돕기 위해 자선단체 ‘윙스 포 라이프’를 만든 일도 높이 샀다. 평생 모터 스포츠와 글로벌 사업에 상당한 업적을 남긴 고인이 세상을 등짐으로써 그의 사업 모든 분야에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했다. 다만 공동창업자 찰레오의 맏아들 찰레름이 내내 레드불의 최대 주주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역시 F1에 상당한 열정을 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방송은 전했다. 지난 8월 마약 복용에 음주운전, 뺑소니 사망 사건을 일으키고도 처벌을 면해 무전유죄 논란을 빚어낸 오라윳(37)이 찰레오의 손자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미 대법원 승소한 가정폭력 피해자 나르키스 골란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미 대법원 승소한 가정폭력 피해자 나르키스 골란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웃는 이 여성, 나르키스 골란(32)이다. 이달 초에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에는 행복하게만 보이는데 지난 19일(이하 현지시간) 저녁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제제벨(Jezebel) 닷컴이 21일 전했다. 지난 6월 미국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골란이 아들의 아빠인 이사코 재키 사다에게 아들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다. 우리는 주목하지 않았는데 가정폭력과 싸우는 이들에게는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사다는 가정폭력이 심해 골란과 아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승소 4개월 만에 이 엄마는 쓸쓸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뉴욕경찰청은 “현재로선 범죄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검의는 여전히 사인을 밝히려 노력하고 있으며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골란 지지자들은 상심과 분노,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의심을 소셜미디어에 털어놓고 있다. 특히 어린 아들이 다시 이탈리아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겠다는 걱정이 커졌다. 대법원이 골란의 손을 들어줬는데도 뉴욕 동부지구 법원은 골란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2019년의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당시 판결은 이탈리아로 아들을 돌려보내면 “심각하고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다의 손을 들어줬다. 골란 지지자들은 그녀가 “모성 있는 엄마”였다며 “아이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언니(혹은 여동생) 모린은 줌 화상 인터뷰를 통해 골란 가족과 그녀의 어린 아들, 그녀의 유산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순간 그녀의 죽음에 의심을 부채질하는 일을 자제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우리 모두 그것을 존중할 것이란 점을 확인하고 싶다. 그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내러티브가 그녀의 아들을 계속 보호하려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길 원치 않는다.” 골란과 함께 몇년을 싸워온 프로보노(재능기부) 담당 니콜 피들러는 그녀가 죽던 날 밤에도 변호사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뉴욕 제2 항소법원에서의 싸움 전략을 논의했다며 고인이 마지막 날까지 싸우고 있었다고 전했다. 고인은 지난달 1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대법원 승소 뒤에도 난 여전히 내가 온갖 방법으로 고문과 강간, 유린을 당한 나라로 우리 아들을 억지로 돌려보내고 싶어하는, 동정심 없는 판사와 다시 마주해야 한다. 그곳에는 날 위한 정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말도 안되는 이 전쟁에 싸우는 동안 가장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난 그저 계속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라고 물었다. 이런 얘기도 했다. “왜 이 시스템은 그런 인권유린에서 살아남은 뒤에도 한 사람이 우리 아들을 계속해서 데려가겠다고 하고 법정에서 날 다치게 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인가?” 그녀는 자신과 같은 사례들에서 “많은 여성들이 죽어야 매듭지어지는” 소름끼치는 현상을 관찰했다고 덧붙인 뒤 “사람들은 날 생존자라고 한다. 그렇게 많은 세월 나에게서 빼앗아간 인간적 권리를 위해 싸울 때 난 살아남았다. 반면 진짜 범죄자는 지금도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줄 알면서 좋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치를 떨었다. 그리고 한달 조금 더 지나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됐다. 골란이 죽은 다음날, 남편 사다와 나눈 대화 녹취록이 공개됐다. 사다는 이탈리아 판사들과 법원에 인맥이 많다고 떠벌였다. 골란의 소송 서류를 보면 사다는 아들 앞에서 골란을 밀치고 뺨을 때리며 꼭 붙들곤 했다. 심지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골란은 2018년 오빠(혹은 남동생) 결혼식을 핑계로 아들과 함께 미국에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찾았다. 사다의 대리인들은 제제벨의 코멘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우리 아버지 폴 뉴먼은요” 회고록 대신 정리한 막내딸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우리 아버지 폴 뉴먼은요” 회고록 대신 정리한 막내딸

    “아빠는 동화를 없애고 싶어 했어요.” 딸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삶을 담은 회고록을 대신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클레아 뉴먼 소덜룬드(57)는 아버지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 스타 폴 뉴먼(1925~2008)이 회고록을 쓰겠다고 처음 마음먹었던 과정을 털어놓은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고 영국 BBC가 21일(현지시간) 전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30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영화배우 중 한 명이었던 아버지 폴은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허슬러’ 같은 영화 주인공으로 명성을 날렸다. 눈부시게 푸르른 눈동자, 소년 같은 매력, 똑같이 재능 많았던 여배우 조앤 우드워드와의 이상적인 50년 결혼생활 등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섯 딸 가운데 막내인 클레아는 “아빠는 그냥 위대하다는 식의 완벽함을 없애고 싶어했다”면서 “누구의 삶도 그와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이유였다. 나이 육십에 폴은 친구이며 각본가 스튜어트 스턴과 함께 회고록 작업을 하기로 했다. 둘은 폴의 어린 시절, 경력, 가족과 명성 등에 대해 5년 내내 얘기를 나눴다. 클레아는 “그 때는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며 “그는 많은 자기 분석(soul searching)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둘은 책에 실을 밑천이 너무 많은 데 압도돼 집필을 포기하고 말았다. 뉴먼은 2008년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고, 스턴은 2015년에 죽었다. 수천 쪽에 이르는 인터뷰 속기록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들이 모닥불에 태워졌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2년 전에야 속기록들이 가족의 창고 건물에서 발견됐고, 이제 새 책 ‘보통 남자의 각별한 인생’(The Extraordinary Life of an Ordinary Man)으로 엮여져 나온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했으며, 어머니는 집착이 심했고, 우드워드를 만나 그만 뒀던 첫 번째 결혼, 아버지로서의 실패, 지나친 음주 등 매우 솔직한 폴 뉴먼의 모습을 담았다. 폴의 딸에게 속기록을 읽는 일은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주 날것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는 아주 불안한 사람이었다”며 “난 1965년에 태어났다. 내가 세상에 나올 무렵, 당시와 그 뒤에도 너무 유명해져서 아버지에겐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다른 시각이었다. 아이들과 가족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과 아주 다르게 스스로를 바라봤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이해하느라 힘겨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주 확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만큼 아마도 자신의 일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얼마나 스스로를 거칠게 비판했는지 알고 놀랐던 것 같다.”책의 한 대목에서 폴은 “충분히 잘해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늘 걱정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커리어가 자신과 겉모습에 어떻게 투영될지 궁금해 했다. “확실한 길을 찾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운좋게 태어나 성공한 것처럼 늘 끔찍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갖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많이 다른 모습으로 다뤄지길 바랐다고 말한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던 상관 없이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저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눈동자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70년대 뉴먼은 로버트 레드포드와 영화로 좋은 인연을 맺었다. 둘은 늘 다른 영화를 함께 만들겠다며 좋은 각본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둘은 영화 외의 일에서는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 뉴먼은 “레드포드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거기에 올 것이라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소덜룬드는 일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어떤 긴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시간을 맞추는 일에 대해 훨씬 까다로운 사람이었는데 밥(레드포드)은 절대 그게 장점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고 성공하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는데 밥은 자유로운 영혼인 편이었다.” 책에는 뉴먼이 우드워드와의 관계에도 갈등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한때 결혼생활에 대해 “집에 스테이크가 있는데 왜 햄버거를 먹으러 외출해야 하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배신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우리는 우리 문제가 있었다. 침대에 늘 장미만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소덜룬드는 “오, 긴장이 있었다. 난 그와 결혼하는 일이 케이크 행진만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함께 살려고 진짜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이다. 난 그들이 정말 힘든 시기의 많은 일들을 해내 다른 결과를 강하고 낫게 만들었다는 데 많은 점수를 드린다. 우리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어머니가 자신을 꼭 붙잡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부모로서 뉴먼은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선언하듯 “아버지로서 소질이 없다”고 말하곤 했으며, “우리 아이들과 하나 되는 것이 더 많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 더 참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아들 스콧이 약물과 알코올 남용으로 1978년 먼저 세상을 등진 무렵이었다. 소덜룬드는 아버지를 “열심히 일한 사람, 그래서 많이 밖으로 돈 사람”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큰 아이였다. 내가 어릴 적이었다. 그는 아이와 놀다가 풀에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관되지 않았다.” 딸은 뉴먼이 “스스로 열심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훨씬 괜찮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또 내밀한 얘기가 많고 당황스러운 통찰이 있어 회고록을 출간하려고 결정하는 일이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매들은 그의 바람을 따르기로 했다. “아버지도 원했을 것이다.” 뉴먼은 이런 얘기를 한다. “똑바로 상황을 정리하고 날 둘러싼 신화의 구멍을 짚어내며 일종의 전설을 파괴하며 피라냐들을 떼놓는 기록 같은 것을 남겼으면 한다. 내가 이 행성에 있었던 때를 약간의 정확성을 기울여 기록한 어떤 것 말이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사후 61년 25센트 美동전에 얼굴 새겨진 안나 메이 웡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사후 61년 25센트 美동전에 얼굴 새겨진 안나 메이 웡

    중국계 미국 배우 겸 인권운동가 안나 메이 웡이 오는 24일(이하 현지시간) 배송이 시작되는 미국의 25센트(쿼터)짜리 동전에 얼굴이 들어간다고 피플 닷컴이 18일 전했다. 물론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첫 역사를 쓴다. 미국 조폐청은 아메리칸 여성 쿼터(AWQ)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을 기린다는 취지인데 웡이 다섯 번째 주인공이 됐다. 세상을 떠난 것이 1961년인데 61년 만에 동전에 얼굴이 들어가는 영예를 상상이나 했을까 싶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마야 안젤루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 처음 동전에 얼굴이 들어간 것도 이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첫 중국계 배우였다. 1922년 무성영화 ‘The Toll of the Sea‘에 여자 주인공으로 열연했다. 1951년 드라마 ‘The Gallery of Madame Liu-Tsong’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미국 텔레비전 쇼에 주연을 맡은 첫 아시아계 미국 배우가 됐다. 벤트리스 깁슨 조폐청장은 성명을 통해 “아시아계를 대변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기여하며 평생에 걸쳐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낸 안나 메이 웡이 이룬 성취를 넓고 깊게 반영하기 위해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일간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조폐청은 쿼터 동전을 3억개 이상 발행할 예정이다. 웡은 무성영화, 유성영화, 텔레비전과 연극 모두에서 활약했다. 로스앤젤레스 고교를 중퇴한 뒤 1921년에 풀타임 배우 경력을 시작했다. 첫 스크린 데뷔작은 ‘Bits of Life’. 그 뒤 많은 영화들의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서 1928년 유럽으로 더 나은 배역을 찾기 위해 떠났다. 세상을 뜨기 일년 전인 1960년 할리우드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루시 리우가 두 번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로 같은 영예를 누린 것이 2019년의 일이었으니 얼마나 웡이 시대를 앞서갔는지 알 수 있다. 리우는 웡이 길을 잘 닦아준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조폐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웡은 국제적인 영화 스타로, 패션 아이콘으로, 텔레비전 개척자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영화로 대변한 챔피언으로 기억된다. 오늘날의 배우들과 제작자들도 계속 고무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해리 포터‘의 숲지기 해그리드 로비 콜트레인 72세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해리 포터‘의 숲지기 해그리드 로비 콜트레인 72세에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학교 호그와트의 숲지기 루베우스 해그리드 역을 연기한 영국 배우 로비 콜트레인이 14일(현지시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콜트레인이 영국 스코틀랜드 팔커크 근처 라버트에 있는 포스 밸리 로열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그의 에이전트 발표를 인용해 BBC가 보도했다. 에이전트 벨린다 라이트는 성명을 통해 “고인은 해리 포터의 해그리드 역으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라며 “그는 전 세계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역할을 했고 20년 넘게 매주 팬레터를 받았다”고 추모했다. 사인은 밝히지 않고 유족들의 슬픔을 헤아려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고 주문했다. 고인은 2001∼2011년 개봉한 여덟 편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호크와트 숲을 지키는 혼혈 거인 해그리드를 연기했다. 주인공 포터와 친구들을 도와주는, 정감 넘치는 조언자 역할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포터로 출연한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성명을 통해 “내가 만나본 가장 재미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촬영하던 꼬마 시절의 우리들을 늘 웃게 만든 사람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원작자 J K 롤링은 둘이 함께 식사하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린 뒤 고인을 “믿기지 않는 재능”과 “완벽한 오직 한 사람(one-off)”였다고 돌아봤다. 1983년 ITV에서 방영된 코미디 ‘알프레스코’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휴 로리는 고인과 함께 맨체스터와 런던을 오가는 자동차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내 일생에 그 때보다 많이 웃어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스코틀랜드의 수석 장관(총리 격)인 니콜라 스터전도 매우 슬픈 소식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제임스 본드 트위터 계정, 방송인 리처드 콜스도 애도 행렬에 합류했다. 본명이 앤서니 로버트 맥밀란인 고인은 1950년 사우스 라나크셔주 루서글렌에서 교사이며 피아니스트인 진 로스와 이언 백스터 맥밀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퍼스앤킨로스에 있는 독립학교 글렌날몬드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연기 경력은 1979년 TV 시리즈 ‘Play for Today’로 시작했다. 트레이시 울먼, 미리엄 마르골예스, 릭 마욜이 나온 BBC TV의 코미디 시리즈 ‘A Kick Up the Eighties’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알프레스코’에서 스티븐 프라이, 엠마 톰슨, 시오반 레드먼드, 로리와 호흡을 맞췄다. 1987년에는 스코틀랜드 록밴드 더매제스틱스를 다룬 ‘Tutti Frutti’ 주연을 꿰찼는데 톰슨, 리처드 윌슨이 함께 출연했다. 밥 호스킨스가 주연한 범죄 영화 ‘모나리자’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주연으로 더욱 명성을 얻은 작품은 1993~95년 방영된 ITV 시리즈 ‘Cracker’에서 연기한 심리학자이며 범죄자인 에디 핏츠 피츠제럴드 박사 역할이었는데 2006년에 새롭게 제작돼 출연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 연속 영국 아카데미(Bafta) 주연상을 수상하게 만든 역할이기도 했다. 2016년에는 Bafta상을 수상한 채널 4의 드라마 ‘National Treasure’에 백작부인 줄리 월터스와 호흡을 맞췄는데 코미디언 겸 TV 진행자가 여성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고 비난받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말에는 해리 포터 재결합 TV 스페셜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작가 롤링은 출연하지 않고 아카이브의 동영상 클립으로만 등장해 아쉬움을 남겼다. 콜트레인은 래드클리프, 엠마 왓슨, 루퍼트 그린트, 헬레나 본햄 카터, 제이슨 이삭스, 개리 올드맨, 랄프 피네스 등과 함께 나왔는데 갑자기 일년 만에 다시 못 올 길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테러 악몽 6년, 안락사 택한 23세 벨기에 여성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테러 악몽 6년, 안락사 택한 23세 벨기에 여성

    벨기에의 스물세 살 여성이 지난 5월에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016년 극렬 테러단체 이슬람 국가(IS)의 브뤼셀 공항 폭탄 테러에서 살아 남은 샨티 디 코르테가 주인공이다.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이 그녀의 어머니 마리엘레를 인터뷰해 보도한 것을 미국 폭스 뉴스가 지난 10일(이하 현지시간) 인용해 보도했다. 마리엘레는 “그날(의 악몽)이 정말로 딸애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딸은 그 뒤로 결코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고 현지 VRT 방송에 털어놓았다. 2016년 3월 22일에 디 코르테는 열일곱 살 한참 꿈많은 여고생이었다. 공항 터미널에서 급우들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는데 IS 요원들이 장치한 폭탄이 두 차례 폭발하며 33명이 숨지고 부상당한 사람만 340여명에 이르렀다. 디 코르테는 몸을 전혀 다치지 않고 살아 남았으나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 여생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어머니의 얘기다. “그 애는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두려워서 아예 가려 하지 않았다. 딸은 자주 패닉에 빠졌고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벨기에는 국가 정책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다. 2002년에 맨먼저 관행으로 허용한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허용했다. 그리고 두 나라에 이어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캐나다, 스페인, 뉴질랜드가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반면 미국에서는 안락사가 불법이며 환자들은 의료 처치를 거부할 수 있거나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데 동의할 수 있기는 하다. 다만 미국의 여러 주는 특정한 여건 아래 의사의 조력을 얻어 극단을 선택할 수 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들에 견줘 안락사의 조건을 엄격히 따지지 않고, 정신건강으로 고통 받는 환자도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다. 디 코르테의 안락사는 연초에 두 명의 신경정신과 전문의 승인을 얻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토로해 왔다. 2018년과 2020년 두 차례나 극단을 선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주기적으로 소셜미디어에 정신건강에 대한 어려움을 하소연하곤 했다. 어느날 그녀가 올린 포스트를 보자. “아침을 먹기 위해 약을 조금 먹었다. 그렇게 하루에 항우울제 11알을 삼켰다. 난 그 약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내가 삼킨 약들 때문에 난 유령처럼 느껴지며 더 이상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약말고 다른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디 코르테에게 안락사가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브뤼셀에 있는 UZC 브룩먼 아카데믹 클리닉의 신경의학자가 섣부른 결정이라며 우려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검찰이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도 디 코르테는 결국 지난 5월 안락사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느낀 점들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난 웃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마지막날까지 사랑했고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느꼈다. 이제 나는 평화롭게 사라질 것이다. 벌써 여러분이 그리워진다는 것을 알면서.”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제시카의 추리극장’ 앤젤라 랜즈베리 97세로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제시카의 추리극장’ 앤젤라 랜즈베리 97세로

    미국 범죄수사물 ‘제시카의 추리극장’(Murder, She Wrote)에서 주인공 제시카 플레처 역할을 맡아 낯익은 영국 여배우 앤젤라 랜즈베리가 97세를 일기로 저하늘로 떠났다. 11일(현지시간) 영국 BBC에 따르면 랜즈베리의 유족은 생일을 닷새 앞둔 고인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영면에 들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1925년 런던에서 1930년대 영국 노동당 당수를 지낸 조지 랜스베리와 어머니 모이나 맥길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뉴욕으로 이주해 피긴 드라마예술학교에 입학했다. 1942년 할리우드의 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제작진의 눈에 띄어 데뷔한 것이 1944년 작품 ‘가스등’에서의 하녀 역할이었다.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를 오가며 화려한 이력을 쌓은 랜스베리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황금 시대를 이끈 스타 가운데 마지막으로 생존해 있던 인물로 꼽힌다. ‘가스등’의 하녀로 처음 오스카 후보가 된 뒤 1945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시빌 역할, 1962년 ‘만주인 포로’에서 로렌스 하비를 조종하는 어머니 배역으로 세 차례 오스카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1984년 처음 방영된 ‘제시카의 추리극장’에서 제시카 플레처 역할을 맡아 그의 이름과 얼굴을 세계 각국에 각인시켰다. 12년 동안 아홉 시즌에 걸쳐 제작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런 성공 덕에 그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혔는데 당시 재산이 1억 달러 정도로 추산됐다. 이 작품은 80년 가까이 영화와 연극으로 계속 제작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세 차례나 아카데미상 후보로 그녀 이름을 오르게 했다. 2014년 드라마와 영화, 자선활동 등으로 국위를 선양했다는 이유로 백작부인 칭호를 얻는 영예도 누렸다. 88세이던 2013년 아카데미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호주 출신 배우 제프리 러시가 그녀를 “연기 범위를 규정하는 산 예(living definition of range)”이라고 극찬했다. 2002년 영국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은 물론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도 들었다. 1960년대 브로드웨이로 옮긴 뒤에도 1970년 스위니 토드에서 넬리 러벳 역할 등 여러 차례 토니상을 수상했다. 랜즈베리는 목소리 연기와 노래 실력으로도 무대를 휘어잡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에서 마법에 걸려 주전자로 변한 ‘포트 부인’ 목소리를 연기했고, 주제곡도 직접 불렀다. 또 브로드웨이 뮤지컬 ‘메임’, ‘디어월드’, ‘집시’ 등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당연히 조시 가드, 하비 피어스테인 등 많은 배우들의 추모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1978년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에서 호흡을 맞춘 여배우 미아 패로는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애도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고인이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에이즈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TV 캠페인을 펼치고 치료 기금을 모으는 데 앞장선 일을 지적했다. 고인은 두 차례 결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열아홉 살 때 리처드 크롬웰과 화촉을 밝혔다. 이 결혼은 짧게 끝났고, 나중에 같은 배우 겸 제작자 피터 쇼와 가정을 꾸려 그가 200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이상 해로했다. 유족으로는 세 자녀와 남동생이며 제작자인 에드가, 여러 명의 손주와 증손주를 남겼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도쿄 로즈’로 몰려 희생된 도구리 다키노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도쿄 로즈’로 몰려 희생된 도구리 다키노

    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장에서 싸운 미군 병사들이 ‘도쿄 로즈’라고 얘기하는 여성이 있었다. 전장에서 매일 밤 그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고혹적이었으며 영어 발음은 유창했다. 그녀는 미군 함정들이 모두 격침될 것이며 부대들은 일본군에 말끔히 청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틈틈이 미국에서 유행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인 1949년 10월 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은 반역 혐의로 기소된 이바 도구리 다키노(일본명 이구코 도구리)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징역 10년형에 벌금 1만 달러를 부과했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 언론이 묘사한 것과 같은 ‘도쿄 로즈’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일간 마이애미 헤럴드가 지난 8일 보도했다. 도구리는 1916년 7월 4일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 교포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0년 UCLA를 졸업했는데 동물학 학사학위를 땄다고 연방수사국(FBI) 기록에 나와 있다. 이듬해 아픈 이모를 간호하고 약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던 날에 진주만 공격이 발발했다. 일본 당국은 오도가도 못하는 도구리에게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자 적국 시민으로 간주돼 이모 집안은 식량 배급에서 제외됐다.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포로수용소로 보냈는데 도구리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와 연락이 끊기고 생활비도 지원받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라디오 도쿄의 타피스트로 취업했다. 도구리는 나중에 미군 병사들을 겨냥한 선전 쇼 ‘제로 아워’(Zero Hour)에 고정 출연하게 됐다. 자신을 “고아 앤”이라거나 “고아 애니”라고 소개하며 선전문을 읽거나 매일 밤 20분정도 음악을 틀어줬다. 이 일을 하고 한달에 받은 돈은 150엔정도였다. 도구리는 1945년에 포르투갈계 필리페 다키노와 결혼했다. 사실 그녀는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마이크를 잡아 미군 병사들에게 ‘도쿄 로즈’란 별명이 붙은 14명의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이다. FBI 문서에 따르면 종전 후 두 미국 기자가 악명 높은 도쿄 로즈를 추적해 결국 도구리가 그 여성이란 점을 밝혀냈다. 두 기자는 2000달러를 줄테니 인터뷰를 통해 “하나뿐인” 도쿄 로즈였음을 자백하라고 권했지만 나중에 결국 돈을 건네지 않았다고 일간 워싱턴 포스트(WP)는 보도했다. 이 인터뷰는 미국인들에게 악명 높은 일본군 선전 앞잡이로 도구리를 각인시켰다. 다른 여성들의 신원은 종전 뒤에도 철저히 감춰졌는데 도구리만 기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는 바람에 미국민들의 미움을 사게 됐다. 하지만 FBI와 육군첩보전사단이 일본에서 수사한 결과 도구리가 선전전 확대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실제로 도구리는 선전전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했다. 연합군 포로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거나 의미없는 말장난을 하는 등 잡담에 치중했다. 그녀의 방송 멘트는 이랬다. “여러분이 타신 배는 전부 가라앉아 버렸어요. 집에 어떻게 돌아가실 건가요?” “커다란 배를 타고 있으면 쾌적하겠죠. 그렇지만 곧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타깝네요.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얼마나 많은 수병들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지금쯤 당신들의 아내와 연인은 다른 남자와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여우 구멍(개인호)같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당신 아내나 연인은 분명 외로워할 거예요. 그런 여성에게는 분명 유혹자가 나타나죠. 첫 데이트에서 키스까지 했을까요?” 그녀는 또 함께 방송하던 연합군 포로들의 식량과 약품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고 WP는 전했다. 미군 병사들도 그녀의 방송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에 코웃음 치며 그저 영어 좀 하는 여성의 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일 뿐이었다. 적어도 미국 언론이 묘사한 것 같은 ‘도쿄 로즈’는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1946년 수사 때 도구리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증거와 녹음이 파괴돼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더라면 한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가 나중에 다시 기소돼 유죄 판결 받는 일은 없을지 모른다.미국 국적을 말소한 적이 없기 때문에 도구리는 귀국하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고, 그 바람에 ‘도쿄 로즈’의 저주가 시작됐다.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라디오 진행자 월터 윈첼과 다른 사람들이 고발해 당국의 조사가 시작됐고, 이번에는 자신을 인터뷰했던 기자 한 명이 수사에 협조했는데 그에게 위증을 종용했다는 혐의가 더해졌다. 샌프란시스코 대배심은 적국을 도운 반역 혐의에 유죄를 평결했다. WP에 따르면, 재판에서 ‘제로 아워’의 옛 동료가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가 나중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인이 법정에 설 것이라고 위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취재진에게 밝혔다. 도구리는 미국에서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곱 번째 인물이 됐다. 10년형 가운데 6년만 복역했다. 그녀는 나중에 WP 인터뷰를 통해 “난 그들이 다른 누구를 발견해 그 일을 마무리지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들 모두 만족해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느 것을 고를까, 어느것을 고를까 알아맞혀 보세요 하는 식이었는데 그게 나였다(It was eeny, meeny, miney and I was ‘moe’).” 그의 남편은 재판에 변호하러 왔다가 다시는 미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나중에 부부는 이혼했다. 그녀는 복역 뒤에 시카고에서 조용히 살다 1977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사면을 받았다. 미국 국적도 회복했다. 2006년 9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도구리와 비슷하게 나치 독일의 선전전에는 ‘호호 경’(Lord Haw-Haw)이라 불린 외국인이 있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윌리엄 조이스인데 가족과 함께 아일랜드로 돌아왔다가 1932년 영국 파시스트동맹에 가입했다가 나중에 축출돼 자신의 파시스트 정당을 창당한 뒤 전쟁 직전 독일로 옮겨왔다. 나치 당의 영어 선전방송에 출연해 완벽한 영국식 억양을 구사하며 “독일이 부른다, 독일이 부른다”라고 외치며 방송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했다. 영국군 병사들에게 탈영하라고 권하고 유대인들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라고 탓하는 방송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조이스는 마지막 방송을 통해 “하일 히틀러, 그리고 안녕”이라고 고별사를 늘어놓았다. 영국 첩보요원은 독일의 한 마을에 숨어있던 그를 체포해 반역 혐의로 1946년 1월 3일 교수형에 처형했다. 도구리처럼 역사의 장난에 희생된 힘없는 개인의 사례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라크 공보장관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를 들 수 있다. 그는 ‘바그다드 밥’으로 불렸는데 멍청하게만 보이는 선전 노력 때문이었다. 미군 탱크들이 바그다드를 향해 진격하는데도 사하프는 매일 텔레비전 브리핑에 나와 미군이 이라크에서 달아나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어틀랜틱이 보도했다. 오죽했으면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이죽거린 뒤 “누군가는 우리가 그를 기용해 거기 내세웠다고 비난한다. 그는 클래식이었다”고 비아냥댔다. 그는 티셔츠, 머그 컵, 팝송, 움직이는 피규어 인형에 조롱거리로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밈으로 나타난다. 사하프는 끝내 자신의 직위를 물러난 뒤 종전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도쿄 로즈’의 뒤를 이어 수많은 ‘후배’들이 전쟁마다 배출됐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붙잡혀 억지로 마이크를 잡은 미국 여성 ‘평양 샐리’와 ‘서울 수(Sue)’,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선전방송을 맡은 ‘하노이 한나’와 ‘하노이 제인’, ‘하노이 폰다’, 걸프전 때 사담 후세인 정권의 마이크를 잡은 ‘바그다드 베티’ 등이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성폭력의 참담함 일깨운 나미오트카의 죽음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성폭력의 참담함 일깨운 나미오트카의 죽음

    미국의 피겨 스타 브리짓 나미오트카는 자신과 짝을 이뤄 국내외 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수상한 존 코글린이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해 왔다고 많은 여성들 가운데 맨먼저 고발했다.  그런 나미오트카가 지난 7월 25일(이하 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고 부모들이 USA투데이 스포츠 금요판에 확인해 줬다. 32세 짧은 삶이었다. 부모 스티브와 모린은 “브리짓이 성적 유린의 트라우마와 싸우느라 여러 해 힘겨운 세월을 보낸 뒤에 약물중독과의 오랜 싸움에 굴복했다”며 “딸은 아름다운 아이였고 뛰어난 선수였다. 가슴이 무너진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성적 학대의 끔찍한 영향과 우리 사회 중독의 심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나미오트카는 2019년 5월 19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10대 시절의 2년 동안 코플린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같은 해 1월 18일 33세의 나이로 극단을 선택한 코플린을 응원하는 글에 댓글을 달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존은 나를 포함해 적어도 10명을 (성적 학대로) 다치게 했다. 그는 2년 동안 나를 성적으로 유린했다”고 적었다. 둘이 호흡을 맞춘 것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였다. 그녀의 나이 14~17세였고, 코글린은 18~21세였다. 둘은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3개의 메달을 땄고, 2007년 미국선수권 대회에서 시니어(올림픽) 부문 9위를 차지했다. 나미오트카는 첫 번째 글을 올린 뒤 곧바로 잇따라 글을 올렸는데 “그루밍이 있었다. 내게 일어났고, 그는 많은 소녀들을 다치게 했다. 피해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강조했다. 코글린은 다른 두 파트너와 두 차례 미국선수권 페어 우승을 차지했는데 미국 스포츠안전센터로부터 임시 자격정지 징계를 받고 아버지의 캔사스시티 집에서 목을 매달았다. 코글린에게 자행된 성적 비위는 세 차례 보고됐다. 그가 죽음으로써 다음달 스포츠안전위원회는 조사 종결을 선언했다. 나미오트카의 페이스북 폭로가 나온 지 석달도 안된 8월 1일에 두 번째 코플린 고발이 나왔다. 2016년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이며 당대 최고의 미국 여성 피겨스타였던 애슐리 와그너가 USA투데이 스포츠에 본인이 17세, 코글린이 22세였던 2008년 6월 콜로라도주의 국가대표팀 캠프에서 파티를 마친 뒤 성폭행했다고 폭로했다. 세 차례 미국 챔피언에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와그너는 코글린이 자신이 잠든 침대에 난입해 입을 맞추고 그녀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난 공포에 절어 완전히 마비돼 버렸다.” 미국 체조 여자대표팀의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에게 성적 유린을 당했던 선수 등 무려 200명 이상의 피해자를 대변했던 변호사 존 맨리는 2019년 3월 USA투데이 스포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10대 시절에 코글린에게 당했다고 주장하던 두 여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의뢰인들과 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은데 존 코글린은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지위와 권력, 유명세를 이용해 복수의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 생전의 코글린은 2019년 1월 7일 USA투데이 스포츠에 이메일 답변을 보내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이 “내게 제기된 근거 없는 의혹들에게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데 스포츠안전위원회 규정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스포츠안전위원회가 파악한 사실은 하나도 없이 공지하고 있으며 이런 의혹 제기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스포츠안전위원회의 댄 힐 대변인은 같은 해 3월 코글린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파리 공항에서 47세 삶 접은 김정기 작가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파리 공항에서 47세 삶 접은 김정기 작가

    밑그림 없이 큰 종이에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라이브 드로잉’의 대가 김정기 작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했다. 47세 너무 짧은 삶이었다. 김정기 작가는 지난 3일(이하 현지시간) 유럽 일정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의 한 공항에서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다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며 정신을 잃었다. 곧바로 근처 병원에 이송돼 수술대에 올랐으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뉴욕 코믹 콘(Comic Con)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이 행사는 게임과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등 글로벌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엔터테인먼트 박람회이자 서브컬처의 메카다. 세계 코믹콘 중 단연 압도적인 규모와 화제성을 자랑하며 올해 행사는 6일부터 9일까지 진행된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인 슈퍼애니를 함께 이끌던 김현진 작가가 5일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통해 전해 알려졌다. 미국 일간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 CNN 방송, 뉴스위크 등도 그의 비보를 전했다. 김현진 작가는 “정기는 우리를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며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붓질을 안해도 돼. 고마워 정기”라고 애도의 메시지를 남겼다. 김 작가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네이버 웹툰에 박성진 글 작가와 함께 ‘TLT’(TIGER THE LONG TAIL)를 연재했으며, 라이브 드로잉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작품 제작과정을 촬영해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계기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으며, 2017년에는 청와대 사랑채에서 문재인 정부 첫 해 기념 라이브 드로잉 쇼를 7시간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마블과 DC 코믹스 같은 만화 회사에도 기여했으며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 가장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린 인물로 등재됐다. 고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파리의 매겐 갤러리는 성명을 통해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그가 우리에게 선사한 엄청난 행복과 대조된다”며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와 10년 정도 함께 했는데 상실감 때문에 지독한 상처를 받는다. 미망인과 두 자녀, 늘 협업했던 김현진 등과 팬들에게 그의 죽음은 지독한 공허함으로 다가온다”고 안타까워했다.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매겐 갤러리의 전시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8일까지 이어진다고 밝혔다. 고인은 1975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나 부산 동의대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3년만 재학한 뒤 중퇴했다. 2년 동안 군 복무하면서 동료 장병들이 연인 얼굴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귀찮게 하니까 일부러 못 그리는 척 굴었던 일이 있었다고 2018년 ‘프로코’ 인터뷰를 통해 털어놓았다. “난 우리 가족 얼굴도 그리지 않았는데 내가 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야 하는 거지? 몇 달 뒤 다른 미대생이 입대했는데 결국 엄청 힘들어 했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진짜 뛰어난 그림 기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조금 화를 내더라.” 그는 군대에서 모든 무기와 차량 배열을 정확히 기억해내 그렸다.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여했을 때 액자 그림을 제출한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는 테이블 주위의 세 벽에 종이를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탁월한 기억력으로 완벽히 재현했고, 유튜브에 올린 이 영상으로 세계의 다양한 행사에 초대됐다. 최근 몇 년간 그는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아시아 전역에서 공연 비슷한 전시를 할 수 있었다. 고인은 여섯 권의 스케치북을 발간했는데 12년 동안 4500가지 그림이었다. 힙합 아티스트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 커버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룹 클론 출신 구준엽은 생전의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제가 너무 좋아하고 존경했던 김정기 작가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애도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광부의 딸’이자 페미니스트 가수 로레타 린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광부의 딸’이자 페미니스트 가수 로레타 린

    영화 ‘광부의 딸’ 주제곡을 만든 컨트리 음악의 여왕 로레타 린이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고인이 4일(현지시간) 아침 미국 테네시주 자택에서 잠자다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로레타는 1960∼70년대 컨트리 음악계를 대표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페미니스트였다. 자신의 인생 경험을 녹여 곡을 썼고 늘 강인함과 독립심을 여성에게 심어주는 가사를 붙였다. 그녀는 켄터키주 탄광 마을에서 8남매를 둔 광부 가족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통나무 오두막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대공황 때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밤새 탄광에서 일하고 낮에는 옥수수를 길렀디. 가족의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된 것이 음악이었다. 어머니가 기타를, 아버지가 밴조를 연주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고 2016년 AP 통신 인터뷰를 통해 돌아봤다. “아빠가 ‘로레타, 그 큰 입 좀 다물렴. 이 홀 안의 모두가 듣겠다’ 그러면 난 ‘아빠,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들은 모두 사촌들인데’라고 대꾸하곤 했어요.” 열다섯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에는 파이를 구워 그걸 맛있다고 먹는 남자와 데이트하는 유행이 있었는데 로레타는 그만 설탕 대신 소금을 넣어 구웠다. 그게 맛있다고 군인 올리버 린이 말했고, 둘은 한 달 뒤 결혼해 워싱턴주 커스터란 곳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네 아이를 키웠다. 올리버는 아내를 ‘두리틀’(Doolittle)이라 불렀고, 프로로 노래하라고 권하며 17달러짜리 기타를 사줬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밴드를 결성한 그녀는 남동생 제이 리 웹도 멤버로 넣어 제로 레코드란 회사에서 데뷔 싱글 ‘아임 어 홍키 통크 걸’을 내놓았다. 1960년의 일이다. 워싱턴주에서 친해진 여성이 남편에게 버림 받은 얘기를 낡은 화장실 벽에 기댄 채 작곡했고 10분 만에 영감이 떠올라 가사를 썼다고 했다. 부부는 모든 카운티를 돌아다니며 라디오 DJ들에게 틀어달라고 공짜 음반을 뿌렸다. 이렇게 해서 이 노래는 컨트리 음악 차트 14위까지 올랐고 가족은 내슈빌로 이사한 뒤 데카 레코드와 계약했다. 2년 뒤 첫 앨범 ‘석세스’를 내놓아 1990년대까지 꾸준히 히트곡을 내놓았다. 1965년 발표한 ‘술 취해 집에 오지 마’가 처음 1위를 차지한 뒤 무려 15차례 더 영광을 차지했다. 통산 60장의 앨범에 18차례 그래미상 후보에 올라 세 차례 수상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애창곡 ‘더 필’, 남편에게 접근하는 여자를 혼내주겠다고 다짐하는 ‘피스트 시티’ 등 체험담을 오선지에 그린 히트곡들을 연달아 내놓았다. 남편이 음악 활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고, 그녀도 많은 인터뷰를 통해 고마움을 밝혔지만 둘은 종종 심하게 다퉜다. “남편이 한 방 먹이면 나도 먹이고, 늘 그런 식이었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그래도 올리버와는 1996년 먼저 세상을 등질 때까지 48년을 해로했다. 로이터 통신은 “남성 중심의 컨트리 음악계에서 대담하고 재능있는 산골 페미니스트로 명성을 쌓았다”며 “고인의 노래는 남녀 불평등, 피임약과 여성의 성적 자유 문제 등을 다뤘다”고 전했다. 1975년 발표한 ‘더 필’은 피임약이 있었다면 나중에 두 자녀를 낳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이렇게 그의 노래 14곡은 당시로는 도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사 때문에 라디오 방송 금지곡에 오르기도 했다. 그 무렵 동료 콘웨이 트위티와 듀오를 결성해 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1976년에 시골마을 주부에서 컨트리 음악 여왕이 되기까지를 자서전으로 펴냈는데 제목이 ‘광부의 딸’이었다. 같은 제목으로 1980년 개봉한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린을 연기한 배우 시시 스페이섹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1980년대 들어 곡을 드문드문 발표했고 1990년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앨범 몇 장을 내놓았는데 1993년 ‘홍키 통크 위민’에 돌리 파턴, 태미 와이넷이 협업했다. 나중에 음식에 관심을 돌려 로레타 린스 키친이란 레스토랑을 창업하고 인생 얘기와 조리법을 버무린 요리책을 시리즈로 내놓았다. 파턴의 돌리 우드를 본떠 테네시주에 로레타 린 목장을 열고 미술전, 캠핑장, 음악 공연 등을 개최했다. 2004년 자신의 광팬 잭 화이트가 그녀를 설득해 앨범을 다시 녹음하고 밴조가 등장하는 밴드를 조직해 음악에로 돌아왔다. 작사 실력도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나이 일흔둘에 새로운 청중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미상 베스트 컨트리앨범으로 뽑혔다. 고인은 미국 최고 권위 음악상인 그래미상을 받았고, 1988년 컨트리 음악 명예의전당에 헌액됐다. 2013년에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받아 목에 걸었다. 그 뒤에도 새 곡과 옛 노래를 리메이크한 ‘풀 서클’ 앨범을 발표했고 지난해에도 ‘스틸 우먼 이너프’란 곡을 써 마고 프라이스, 타냐 터커와 듀엣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2017년 졸도해 투어 공연을 중단했고 이듬해 집에서 넘어져 골반을 다쳐 고생했다. 타블로이드 매체들은 그녀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보도했지만 연주하고 녹음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 무렵 페이스북에 “오랜 세월 그들은 나보고 파산했네. 집이 없네, 사기를 치네, 술 마시네, 미쳤네, 불치병이네, 심지어 죽었네 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그런 낡고 쓰레기 같은 타블로이드들이 날 희롱할 정도면 딴 사람들은 박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난 조금만 손을 뻗으면 그놈들에게 ‘피스트 시티’ 먹일 수 있다고!”라고 적었다. BBC 음악 전문기자 마크 새비지는 지난 60년 동안 팬들에게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당당함을 보여줬다며 그런 요소가 그녀의 음악을 믿을 만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2004년 인터뷰했을 때 로레타는 “난 실제의 삶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 사람들이 내 레코드를 사는 이유는 나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그것을 꽉 잡는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여섯 자녀 가운데 클라라, 어니스트, 쌍둥이 페기와 팻시만 남아 있고 17명의 손주, 네 증손주를 뒀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할리우드 별들이 드나든 ‘마담 우의 가든’ 여주인 106세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할리우드 별들이 드나든 ‘마담 우의 가든’ 여주인 106세에

    40년 남짓 수많은 할리우드의 ‘별’들이 드나들었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의 유명 레스토랑 ‘마담 우의 가든’을 운영했던 여주인 실비아 우가 10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AP 통신이 여러 매체를 인용해 2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레스토랑은 서울 강남에 △△ 가든 식의 식당들이 잇따라 문을 열게 하는 본보기가 됐다. 샌타모니카의 윌셔 블루바드에 1959년 문을 열자마자 유명인들의 회식이나 축하 모임 자리로 각광을 받았다. 음식도 음식이었지만 파고다(탑)들이 잔뜩 들어선 것이나 청동 동상들, 인공폭포와 잉어와 금붕어가 가득한 분수 등으로 손님들에게 색다른 볼거리와 위안을 제공한 것이 주효했다. 생전의 고인은 늘 바닥에 끌리는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손님들을 환한 미소로 맞으며 손님이 주문한 요리를 전화 수화기에 대고 주방에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고인이 숨을 거둔 것은 지난달 29일이었는데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가 전날 그녀의 부음을 맨처음 세상에 알렸다. AP는 지난달 19일이라고 잘못 표기했다. 마담 우가 식당을 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미국 사람들이 기름기 많은 광둥 요리를 중국 요리의 전부로 착각하고 먹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간 USA 투데이에 미국에 건너온 중국인 노무자들이 즐겨 먹던 요리인 “찹수이(Chop suey)가 어디에나 있었다. 여러분은 찹수이 가게만 볼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LA 타임스에 따르면 할리우드 스타들이 마담 우의 가든에서 새로운 중국 요리를 즐겨 먹으면서 미국인들의 입맛을 바꿨다. 메이 웨스트가 수박 화채를 즐겼고, 그레고리 펙과 폴 뉴먼이 멘보샤를,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베이징덕을 특히 좋아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젊은 부인 미아 패로를 데리고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캐리 그랜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자니 카슨, 캐롤 버넷, 월터 매도, 로버트 레드포드, 톰 크루즈,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이곳을 들락거렸다.  이미 고인이 된 텔레비전 사회자 머브 그리핀은 “이 마을의 모두가 마담 우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알던 가장 친근하고 다정하며 우아한 여성이었다”고 신문에 돌아본 적이 있었다. 가든 문을 닫은 것은 1998년이었다. 곧바로 고인은 폐업 결정을 후회하며 이번에는 마담 우의 아시안 비스트로 앤드 스시를 개업했다. 오래 버티지 못했지만 마담 우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2014년 100세 생일을 호텔 볼룸에서 열었을 때 오랜 손님들이 가득 메웠다. 본명이 실비아 청인 고인은 1915년 10월 24일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상하이에서 요리를 배웠는데 하녀가 부유했던 자기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가족은 나중에 홍콩으로 이주했는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향했다. 고인은 생전에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미국에 가족 한 명 없었다. 배 여행에 40일이 걸렸는데 전쟁 통이라 늘 어두컴컴했다”고 돌아봤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화학학자로 성공한 킹 얀 우를 만나 결혼해 세 자녀를 뒀다. 남편이 휴즈 항공회사에 엔지니어 일을 구하면서 LA로 옮겨왔고 그녀는 레스토랑 여주인이 됐다. 요리책도 여러 권 냈고, 정규적으로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었으며. 자선 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딸 로레타가 34세 젊은 나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등지자 시티 호프 암센터 설립에 두 손을 걷어붙였다. 유족으로는 두 아들 조지와 패트릭, 많은 손주들을 남겼다. 남편은 2011년 먼저 세상을 떠나 두 사람은 67년을 해로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김일과 명승부, 알리와 싸우던 안토니오 이노키 79세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김일과 명승부, 알리와 싸우던 안토니오 이노키 79세에

    일본 프로 레슬링의 대부인 안토니오 이노키(본명 이노키 간지·猪木寬至)가 1일 오전 심부전으로 별세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79. 북한 지역 출신으로 일본인들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역도산(본명 김신락)의 3대 제자로 김일, 이노키, 자이언트 바비가 꼽혔는데 특히 2006년 세상을 떠난 김일과 여러 차례 대결하며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북한을 30여 차례 방문해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도 족적을 남겼다. 자이언트 바바도 지난 1999년 세상을 등졌다. 고인은 아밀로이드종(amyloidosis)이란 희귀질환 때문에 고생했다.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한 곳 이상의 조직이나 장기에 지나치게 쌓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하지만 투병 의지가 대단해 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채 나타나곤 했다. 지난 8월 한 텔레비전 쇼에 휠체어에 앉은 채로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여러분이 보는 대로 난 스스로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힘이 넘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1943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이노키는 중학교 때 가족과 브라질로 이주해 커피 농장에서 일했다. 1960년 원정을 위해 브라질을 찾은 역도산에게 스카우트됐는데 투포환 선수로 명성을 떨친 뒤 프로 레슬러로 데뷔해 있었다. 이노키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연맹을 창립했는데 그의 일본 프로 레슬링 데뷔전 상대가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이었다. 안토니오 이노키란 이름은 데뷔 2년 뒤에 스스로 붙였다. 일본 프로 레슬링을 이끈 인물이 고인이었다. 데뷔전에서는 김일에게 졌으나 그 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김일과 명승부를 펼치며 우리 국민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역도산의 최후를 지켜본 제자로 알려졌다. 또 일본 언론들에는 의도적으로 김일과의 라이벌 관계가 다뤄지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고인은 김일이 말년에 외롭게 투병할 때 치료비를 보낸 적이 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76년 도쿄 부도칸에서 당시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챔피언인 무하마드 알리와 이종 대결을 펼쳐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실 일본인들은 세기의 대결이라 했지만 미국 등에서는 이노키가 시종 링 위에 드러누워 뱅뱅 도는 알리의 다리를 걷어차려 애쓰는, 말도 안되는 대결로 업신여겨졌다. 고인은 이 경기를 통해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종합격투기(MMA)를 일본에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이노키는 1989년 스포츠평화당을 만들어 같은 해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1990년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일본인들을 석방하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1995년 선거에서 낙선했고, 1998년에는 레슬링과 정치 양쪽에서 모두 은퇴했다가 2013년 정계에 복귀해 참의원 재선에 성공했다. 이노키는 스승인 역도산이 북한 출신이라는 배경 등을 이유로 북한을 무려 30여 차례 방문해 고위층과 회담하는 등 북일관계 개선에도 의욕을 보였다. 그는 1995년 4월 북한에서 처음으로 프로 레슬링 행사를 열었는데 이틀 동안 38만명이 관람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참의원 의원이던 2013년 11월에는 스포츠 교류 행사 참석차 북한을 방문해 김영일 노동당 비서와 회담하고 북일 관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노키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 방북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고 NHK 방송이 전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90년대 ‘갱스타즈 파라다이스’의 쿨리오 59세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90년대 ‘갱스타즈 파라다이스’의 쿨리오 59세에

    1995년 ‘갱스타즈 파라다이스’를 발표해 힙합의 레전드로 만든 미국 래퍼 쿨리오가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접었다. 오랜 매니저인 하레즈 포시는 28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친구의 집 욕실 바닥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됐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TMZ를 비롯한 현지 매체들에 밝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사망 원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는데 포시는 응급요원들이 심정지를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본명이 아르티스 레온 아이비 주니어인 고인이 음악계에 뛰어든 것은 1980년대였는데 앞의 노래로 힙합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이 노래로 그래미 상을 수상했는데 미셸 파이퍼 주연의 영화 ‘위험한 아이들(Dangerous Minds)’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삽입됐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이 꾸준히 이 노래를 찾아 들어 그의 공식 홈페이자에 따르면 스포티파이 스트리밍 횟수는 10억회를 넘겼다. 갱단이 들끓는 콤프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천식을 앎았으며, 책을 즐겨 읽었으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빈민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을 보며 자란 그는 갱스터 문화를 완벽히 이해한 래퍼였다. 코너 포켓 크립 갱단에 들어가며 마약을 복용하는 등 위험천만한 삶을 살다 목숨을 잃을 뻔한 뒤 손을 씻고 콤프턴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며 의용소방대에 들어간 일로 유명하다. 40년의 음악 경력에 여덟 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내놓았다. 한 차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세 차례 MTV 비디오뮤직어워드를 수상했다. 다른 히트곡으로는 ‘Fantastic Voyage’, ‘Rollin’ With My Homies’, ‘1, 2, 3, 4(Sumpin‘ New)’, ‘ Too Hot’이 있다. 죽음을 전혀 예감하지 못해 얼마 전까지도 그는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펼쳤다. 바닐라 아이스, 영 MC 같은 90년대 스타들과 함께 투어 공연 중이었다. 며칠 전 텍사스주의 한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됐다. 바닐라 아이스는 트위터에 “좋은 친구 쿨리오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털어놓았다. 동료 래퍼이면서 배우인 아이스 큐브도 “슬픈 소식이다. 힙합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로 내가 첫 손 꼽는 인물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스눕 독도 추모 글을 “갱스타즈 파라다이스. R I P(Rest In Paradise)”라고 달았다. 그는 둘이 협업한 뮤직비디오 ‘갱스타 워크’ 세트 사진을 공유했다. MC G해머는 고인을 “내가 아는 가장 멋진 녀석 중 하나였다. 좋은 사람 RIP 쿨리오”라고 적으며 고인의 흑백 사진과 둘이 함께 투팍, 스눕 독과 어울려 찍힌 사진을 올렸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마나슬루 실종 이틀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힐러리 넬슨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마나슬루 실종 이틀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힐러리 넬슨

    지난 26일(이하 현지시간) 네팔 히말라야 마나슬루(해발 고도 8163m)에서 실종됐던 미국 유명 산악스키어 힐러리 넬슨(49)이 끝내 이틀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수습됐다. 28일 히말라얀 타임스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넬슨 등의 탐사를 조직하고 수색대를 조직한 ‘샹그리라 네팔 트렉’의 지반 기미레 운영극장은 “이날 아침 헬리콥터를 타고 떠난 수색대가 그의 시신을 발견해 옮겨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익스플로러스웹은 법적 절차를 완료하는 대로 주검을 수도 카트만두로 옮길 예정이라고 밝혔다. 산악 경력 20년의 넬슨은 미국 최고의 산악스키인으로 꼽히며 2018년 9월 30일 로체(8516m) 정상에 오른 뒤 스키를 탄 채 하강에 성공해 내셔널지오그래픽 올해의 모험가상을 수상했다. 그의 하강 모습은 더치 심프슨의 다큐멘터리 영화 ‘로체’로 제작돼 지난해 제6회 울주국제산악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당시 함께 했던 오랜 파트너 짐 모리슨과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마나슬루 정상에 오른 뒤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 크레바스(빙하 틈)로 추락해 실종됐다. 등정 성공 14분 만에 비극이 덮쳤다. 넬슨과 달리 모리슨은 사고 4시간 반 뒤 무사히 캠프로 귀환했다. 동료들은 곧바로 수색대를 꾸렸지만 실종 당일은 악천후 탓에 헬리콥터를 띄우지 못했고, 다음날 항공 수색에 나서 주검의 위치를 육안으로 확인한 뒤 이날에야 모리슨과 세 셰르파를 내려 보내 주검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익스플로러스웹이 전했다. 노스 페이스가 후원하는 산악인이며 두 아들의 어머니인 넬슨은 모리슨과 호흡이 잘 맞아 가장 잘나가는 알피니스트이자 백패킹 스키어로 손꼽혔다. 워싱턴주 시애틀 출신의 넬슨은 캘리포니아주 레이크 타호 출신의 모리슨과 함께 로키산맥이 있는 콜로라도주에서 훈련하며 세계적으로 높은 봉우리와 사람들의 발길을 막는 봉우리 등정에 주력했다. 그녀는 2012년 24시간 안에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86m)와 로체를 한꺼번에 등정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기도 했다.노스 페이스 홈페이지는 그녀를 “20여년의 등반 경력에 16개 나라에 40차례 이상 탐사해 최초의 스키 하강 기록을 10여개 작성해 그녀 세대의 산악 스키어 가운데 가장 빼어났다”고 소개했다. 회사 대변인은 이메일 답을 통해 “힐러리 가족과 접촉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수색과 구조에 지구 전체의 역량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10대 때부터 체육에 빼어난 소질을 보여 아버지는 농구를 했으면 했다. 하지만 콜로라도 칼리지에서 생물학 학사를 딴 뒤 곧바로 유럽으로 건너가 스키를 즐기기 시작했다. 스키 선수로 활약해 1996년 유럽여자선수권을 우승한 전력도 있다. 하지만 산이 불렀고 그는 소명을 받아들였다. 2002년 몽골 알타이산맥의 파이브 홀리 봉우리에서 첫 스키 하강을 했다. 4년 뒤 초오유(8188m)를 등정했다. 두 아들 역시 산악인의 길을 걷고 있어 앞으로가 기대된다. 넬슨은 해외 탐사를 나설 때면 아들들을 전 남편에게 맡겼다. 모리슨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잃은 다음 산과 탐험에 몰두하고 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뻐둥새‘에서 잭 니콜슨 괴롭힌 수간호사 플레처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뻐둥새‘에서 잭 니콜슨 괴롭힌 수간호사 플레처

    잭 니콜슨의 미친 연기로 인상 깊은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에는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수간호사 밀드레드 랫치드가 나온다. 노역을 피하려고 정신병자인 것처럼 굴었던 맥머피(니콜슨)는 사사건건 잔인하고 계산적인 랫치드와 대립하다가 결국은 굴복하고 만다. 기성사회의 논리와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따지는 젊은이들을 기성사회가 어떻게 다루고 굴복시키는지 폐쇄적인 정신병동에 은유했다. 기존 질서에 대드는 환자들에게 뇌 절제 시술 등으로 응징하는 수간호사는 체제의 수호자를 상징했다. 그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루이스 플레처가 88세를 일기로 23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프랑스 남부 몽두로스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에 둘러싸인 채 잠을 자다 숨을 거뒀다고 AP 통신이 전했다. 플레처는 앨라배마주 버밍햄 출신이었는데 배우가 되려고 로스앤젤레스(LA)로 이주한 뒤 TV 시리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1960대 초 결혼해 두 아들을 낳으면서 11년 동안 연기를 중단했던 ‘경단녀’였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켄 키지(1935~2001)의 1962년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밀로스 포먼 감독이 영화화를 결심하고 배우들을 캐스팅했는데 랫치드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 맡으려 하지 않았다. 안젤라 랜스베리와 엘린 버스틴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에게 퇴짜를 맞자 포먼 감독이 떠올린 것이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영화 ‘우리같은 도둑들’(Thieves like us)을 통해 복귀했던 플레처였다. 당시 그녀의 이름은 캐스팅 명단에서 맨아래에 있었지만 배역을 따냈고, 그야말로 인생 역전을 이뤘다. 미국영화연구소는 수간호사 랫치드를 영화 사상 최악의 악당 순위 가운데 , 서쪽의 사악한 마녀(오즈의 마법사), 다스 베이더(스타워즈), 노먼 베이츠(사이코), 한니발 렉터 (양들의 침묵)다음에 매김할 정도다. 부모가 청각장애인이었던 그는 수상 소감을 수어로 전달하는, 당시로는 파격을 선보였는데 “여러분 모두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밝혀 큰 화제가 됐다. 불혹의 나이에 오스카상을 탄 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드라마 ‘조안 오브 아카디아’와 ‘피켓 펜스’에 출연해 에미상 후보에 올랐고, ‘스타 트렉-딥 스페이스 나인’에서는 바조란의 종교 지도자 카이 윈 아다미 역을 맡았다. 그는 1960년대 프로듀서 제리 빅과 결혼해 1977년 이혼했는데 두 아들 존과 앤드루가 유족으로 남았다. 친구들과 팬들은 소셜미디어에 추모의 글을 나누고 있다. 고인과 피켓 펜스에서 호흡을 맞춘 청각장애 배우 마를리 매틀린은 트위터에 “영민한 여배우”라고 고인을 돌아본 뒤 오스카 수상 연설에 수어를 처음 사용한 배우라는 점을 강조했다. 스타 트렉: 딥스페이스 나인의 작가 휴잇 울프는 “루이스 플레처를 위해 대본을 쓴 것은 영예이자 즐거움이었다”고 애도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케네스 스타의 죽음 접한 르윈스키 ‘대인배’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케네스 스타의 죽음 접한 르윈스키 ‘대인배’

    ‘르윈스키 스캔들’을 수사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고 갔던 케네스 스타 전 특별검사가 13일(이하 현지시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있는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밝혀 온 모니카 르윈스키(49)가 보인 애틋한 반응에 놀랐다는 누리꾼들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고 일간 USA 투데이 등 많은 매체들이 전해 눈길을 끈다. 유족과 지인은 스타 전 특검이 휴스턴 병원에서 넉 달가량 집중 치료를 받다 수술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고인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아칸소 주지사로 재직하고 힐러리 여사가 법률회사 변호사로 일하던 1980년대 화이트워터 지역에서 발생한 토지개발 사기 사건을 수사하다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클린턴 부부는 2000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스타 전 특검은 백악관 인턴 직원 르윈스키(당시 25)와의 성 추문을 파헤치면서 클린턴 전 대통령을 절체절명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일종의 별건 수사였던 셈인데 그가 입수한 녹음테이프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하고 위증을 종용한 정황이 담겨 있었다. 르윈스키가 린다 트립이란 동료에게 털어놓았는데 트립이 몰래 녹음하고 있었다. 이 테이프 내용이 공개된 후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시인해야 했다. 르윈스키가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을 안고 괴로워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스타 전 특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감정의 회오리를 겪지 않았을까? 그녀는 1998년 특검 조사 과정에 몇 시간씩 심문을 받고 협조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것이라고 겁박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클린턴 탄핵 심리에 공화당측 증인으로 불려나와 증언하는 곤욕도 치렀다. 그런데 원수라 해도 무방할 스타 전 특검의 부고를 접한 르윈스키는 트위터에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데 켄 스타에 대한 내 생각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사랑한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상실이란 점을 상상하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적었다. 허핑턴 포스트는 누리꾼들의 댓글을 일일이 옮겼는데, 대체로 “이렇게 대인배인줄 몰랐다” “생각이 깊은 사람인줄 예전에 몰랐다”는 놀라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탄핵시킬 뻔하는 과정에 “공적으로 까발려지고 모든 관계가 단절됐다(ostracized)”고 털어놓았던 그녀는 더 세월이 지난 뒤에는 종종 그 일을 농담 소재로 삼았다. 2018년 잡지 배너티 페어에 가족과 외식을 하다 스타 전 특검과 마주친 일화를 들려줬다. “그의 품행은, 거의 목가적인데, 아재(avuncular)와 소름끼침(creepy) 사이 어디쯤이었다. 그는 내 어깨와 팔꿈치를 계속 만져대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2015년 TED 강연을 통해선 “수치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며 온라인 혐오 퇴치 운동에 나선 계기를 설명했다. 고인 역시 ‘경멸, 클린턴 수사 회고록’을 통해 “수사 과정의 르윈스키 대목을 떠올리면 깊은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난 여전히 20년 지나서도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없었다”고 돌아봤다. 회고록을 더 들춰보자. “모니카가 비명을 지르고 울어댔다. 입을 삐죽거렸다. 소위 친구라 믿었던 트립의 덫에 빠진 것을 신랄하게 불평했다. 검사들이 겁을 주고 어머니까지 검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강권했지만 그녀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모니카는 어머니를 이겨먹었다. 미합중국 대통령을 궁지에 모는 것보다 스스로 칼 위에 쓰러지려고 했다. 순진하고 스타병에 걸린 젊은 여성이라 금세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과소평가한 것이란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대통령을 보호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모니카는 숙련된 연방수사국(FBI) 요원들과 풍부한 경력의 검사들로 이뤄진 팀이 대부분의 나날을 초조하게 엄지만 빙빙 돌리게 만들었다.” 그는 텍사스주의 작은 마을 버넌에서 태어나 샌안토니오에서 성장했다.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듀크대 로스쿨에서 학업을 마친 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워런 버거 연방대법원장의 재판연구원으로 근무했다. 30대부터는 법률가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워싱턴 DC 항소법원 연방판사로 임명됐고,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1989년 법무부 차관이 됐다.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던 고인은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자 시카고 법률 사무소로 자리를 옮겼다가 ‘화이트워터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으로 1994년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클린턴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1998년 하원에서 통과됐으나, 상원에서 부결됐다. 하지만 앤드루 존슨 전 대통령에 이어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두 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고인은 특검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캘리포니아주 페퍼다인대 교수, 세계 최대 규모 침례교 대학인 텍사스주 베일러대 총장 등을 지냈다. 베일러대 총장이던 2016년에는 필라델피아 토론회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을 “베이비붐 세대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정치인”으로 호평해 눈길을 끌었다. 그 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리자 그를 지원하는 법률 조직에 변호인으로 몸담기도 했다.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AP에 “켄은 미국을 사랑했고, 헌신하려는 마음과 탁월한 태도로 봉직했다”며 “그는 법조계와 공직 사회에서 본보기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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