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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각가 김창희(이세기의 인물탐구:119)

    ◎자연­인간­생명의 하모니를 빚는다/형태와 윤곽 파괴… 근본적 원형만 담아내/「고향마을」시리즈 도시인에 이상향 제시 「넓은 벌 동쪽끝으로/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것은 조각가 김창희가 그리는 「고향마을」시리즈다.그의 조각품을 보고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차마 잊힐리 없는 두고온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풀이슬이 발등을 적시는 오솔길,보리가 익어서 황금물결 치는 들판,솔밭에 내리는 가랑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소리.논밭을 맬때 손에 닿는 향긋한 흙의 촉감그대로 그는 두고온 고향산천을 손끝에서 꾸밈없이 빚어낸다. 지난 93년 그가 뉴욕주립 스토니브룩대에 대작 「고향마을」을 기증했을때 뉴욕타임스(4월 30일자)는 이 사진을 크게 취급하고 「한국적 토속정서를 담고있는 독자적 조형성은 정신적인 위안과 새로운 인스피레이션을 함양하게 될것」을 보도한바 있다.그 무렵 뉴욕에 들렀던 세계 10대 화상의 한사람인 파리의 다니엘 르롱은 「인체를 조형미의 탐구로서뿐만 아니라 영혼이 깃든 인간상을 조성하여 메마른 도시인들에게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감탄했다. ○“예술은 여유와 휴식” 르롱부부의 소개로 지난해 파리 노세라출판사가 출간한 그의 작품집 서문에 보면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파니는 「김창희의 미학적 통찰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겨냥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매스와 볼륨,비례와 균제에서의 독창성과 유일성외에도 환경과 인물설정에서 연극적 특성을 연출하고 있다」고 했다.무대미술가 윌프레드 밍크가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 로버트 윌슨을 연극과 오페라무대에서 재현하고 있다면 김창희는 과연 「적극적인 표현의 미와 표현의 힘」으로 「인간이 잃어버린 고향과 가족」을 그의 브론즈로 되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김창희의 일관된 작업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레스타니의 이러한 지적에 거부감을 표할수 없게 된다.우선 그의 작품에는 자연속에 인간이,인간앞에 자연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인간적 정취」가 「굽이치는 리듬」과 「청결한 라인」으로 「유동적인 하모니」를 이루어나간다.그의 매질은 브론즈지만 그가 빚은 둥그런 구릉은 인체의 양감과 질감,「선」에서 출발하여 「조각에는 독창성보다 생명이 필요하다」는 로댕의 말을 실감시킨다.그의 인체는 어느것이나 살아숨쉬는 바이털리즘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산과 나뭇잎은 햇빛에 반짝거리고 잔디는 푸른 윤기를 머금은채 바람에 흩날린다. 지난해 파리 기테화랑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을 보고 파리화단의 제라르 주리게라는 「김창희에게 있어 예술이란 여유와 휴식」이라고 평한다.「그가 노구치나 백남준,이우환처럼 자신이 국제적으로 경력을 쌓지 않은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것은 자신이 태어난 땅과 그 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 예술가로서 독특한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면의 아름다움에 눈길 그는 외향적으로는 정열의 화신같은 예술가지만 실은 명상적인 예술가다.64년 국전 첫입선후 77·78년 문공부장관상 국무총리상을 연달아 수상할 때도 「인체의 무한한 신비」에 매혹되어 손가락으로 찌르면 터질 것같은 풍만한 탄력,한복바지에서의 대님을 맨 이미지로 다소곳한 「기다림」「무심」과 「깊은 사색」을 작품의 내면에 담고 있었다. ○뇌출혈·폭음으로 쓰러져 한때는 창공으로 치닫는 도약과 화려한 누드군이 도시한복판을 질주히는듯한,또는 도시로부터 끝없이 탈출하고 싶은 도시인의 생리를 역동적으로 그려낸적도 있다.엘지 쌍둥이빌딩이나 쁘렝땅백화점의 인체들이 그 예이고 이후 작위성에서 탈피한 자연의 근본문제에 파고들면서 「예술가의 개성이나 독창성은 기법의 특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얻어지는 달관의 경지」임을 터득하게 되었다.형태를 차츰 지우고 윤곽을 뭉개어 가장 근본적인 원형만을 남긴채 인간을 끝내 자연에 귀의시키게 된 작업이 최근의 「고향마을」시리즈다. 어떤 예술가도 곡절없이 정상에 오른 예는 없겠지만 김창희야말로 모험과 모색의 긴 험로를 지나 오늘에 다다른 작가다.그는 대학교수로서 조각가로서 지나치게 완벽과 최고를 지향한 나머지 89년 엄청난 작업량과 노동에 짓눌려 뇌출혈로 쓸어졌고 두번째는 3년전 두주불사의 술실력을 자랑하다 술때문에 쓰러졌다.주변의 가족들은 그의 소생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받아들였으나 「부르델처럼 되지 못하는한 눈감을수 없다」면서 수개월만에 병석을 털고 일어섰다.「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든 남다른 체험을 살려 「다시 태어나는 아픔과 혼돈」속에서 그는 『미켈란젤로는 가장 인간적인 형상을 만들었으나 로댕은 바로 인간 그자체를 만들었다』는 것을 마음의 등불로 켜두고 미의 원점인 내면의 아름다움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는 충남 당진에서 인조치아를 만들던 김인성씨의 3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그의 아호인 「당진」은 고향인 당진에서 딴 이름이다.치과가 흔치않던 시절에 부친이 밤새 이빨을 갈고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도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일상적으로 접근해 갔다.인천사범시절 만국공원에서 열린 맥아더 장군 동상제막식을 본것이 「조각가가 그처럼 위대한 존재」인줄을 처음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홍대 조각과에 진학했다. ○구긴듯한 백색형체 집착 그가 무엇이 되고자하는 목표와 꿈은 거칠것 없이 확실하다.「가장 높이 오르는 새가 가장 먼데를 보듯」 마음속 깊은 「심연의 공간」에 서서 아주 멀리 전체를 보고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그리고 「모든 것을 지나치게 설명하면 창조적 상상력이 상실된다」는 자세로 다시한번 설명과 테크닉을 배제한 구긴듯한 백색형체에 집착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핵심테마는 「정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표현이다.그런 메타포로 인해 그는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미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황폐한 도시의 숲속에서 그의 우뚝한 백색의 운집들은 마치 천상의 신기루인듯 눈부신 극광을 발산하고 있다.고향마을시리즈는 「환상적 현실」과 「실제적 환상」을 동시에 함축하면서 「형태의 빛을 내면에 비친다」는 새로운 결론아래서 그는 찬란한 미래를 향해,그리고 뉴욕과 파리의 화단을 향해 싱싱하고 약동적인 질주를 멈추지 않게 될 것이다. □연보 ▲1938년 충남 당진 출생 ▲60년 홍익대 입학 ▲64년 국전 「요정」입선 ▲65년 국전 「탈출」 특선 ▲66년 신상회공모전차석상 ▲67년 홍대 조각과 졸업 ▲77년 국전 문공부장관상 ▲78년 홍대 대학원 졸업,국전 국무총리상,제1회 개인전(선화랑) ▲78∼현재 서울시립대 교수 ▲79년 국전 추천작가 ▲80년 한국구상조각회 로마전 ▲81년 뉴욕 한국화랑초대전,서울개인전(선화랑)이후 해마다 개인전 ▲83년 바로셀로나 국제화랑 10인초대전(바르셀로나 국제화랑) ▲84년 ’84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환경조각전 ▲85년 국전 초대작가,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86년 도쿄한국문화원초대 개인전 ▲88년 ’88서울미술대전 ▲90년 ’90부산 환경조각전 ▲91년 모스크바 국립동양예술박물관 초대개인전 ▲92년 오사카 대한민국총영사관 초대개인전 ▲93년 뉴욕 한국문화원 초대개인전,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 대작「고향마을」 설치 ▲94년 뉴욕 패터슨미술관 초대 한국조각 ’94전 ▲96년 ’96쾰른아트페어참가,「김창희조각 작품집」(프랑스 노세라출판사)출간,파리기테화랑초대 작품집출간기념전,「LE BENEZIT 세계예술가 인명사전」에 인명수록 ▲97년 ’97도쿄아트페어참가(도쿄 빅사이트,아키에 아리치갤러리) ▲98년 5월 레스타니기획 서울∼뉴욕전(뉴욕 파크애버뉴)예정
  • 서울신문’96히트상품 10개부문 43품목 선정/제1차 11선:Ⅱ

    ◎입체냉장고 탱크Ⅱ­냉장온도 2도… 인체공학 디자인 호평/OB라거­“목으로 느낀다”… 깊고 풍부한 맥주맛/금호 베스트홈­3차원 영상 설계… 주문주택시장 리드/가비앙 전자수첩­월2만대 판매… 국내 최소·최경량 자랑/복지복권­중기지원 어필… 20회에 8천만장 판매 ▷입체냉장고 탱크Ⅱ­대우전자◁ 「3면 입체냉각으로 냉각효율을 높인다」. 대우 터보입체냉장고 「탱크Ⅱ」는 소비자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 제품이다. 지난 94 제품사용 후 의견을 제조업체에 제시하는 냉장고 전용고객카드제와 95년 접수된 4만여통의 고객의견 데이터를 기반으로 소비자의 잠재적 불만사항을 신제품 기획에 반영했다. 터보입체 냉장고 탱크Ⅱ의 장점은 구형제품에 비해 냉각성능이 대폭 강화됐다는 점이다.지난 2년간 우수성능을 입증받은 「2팬3면 입체냉각」의 냉각사이클에 냉기단속시스템(Aero Chopping System)을 채택한 터보입체 냉각을 채용,냉각성능을 한층 높였다.기존 냉각시스템이 30분 간격으로 냉기를 보내던 것을 고압력의 냉기를 5분간격으로 단속적으로 공급,냉장고내 시간에 따른 온도편차를 섭씨 0.27도로 극소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탱크Ⅱ는 냉장온도 섭씨 2도를 실현했으며 정온 균일 강력냉장 등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 냉장보관식품의 신선유지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됐다. 편리성도 향상됐다.한국과학기술원(KAIST),한국표준연구원(KRISS)과 공동으로 「인체공학적 분석을 통한 냉장고 디자인」연구를 통해 전면포켓핸들,조작패널의 위치 및 구성내용을 사용자 편리에 맞게 개선했다.새로 설계된 냉수디스펜서 장착모델은 국내 최대용량인 3.2의 물통에 전용 냉기로를 설치,물온도를 국내 최저로 유지하게 했다.또 물이 가장 차가운 온도인 섭씨 4도이하가 되면 색깔이 변하는 온도스티커를 부착,냉각수의 차가운 상태를 소비자가 직접 확인하게 하는 검색기능도 채용했다. 이밖에 대우측은 입체냉장고 출시후 품질수준 안정화로 품질우위가 입증됐다는 판단 아래 소비자가 사용해보고 구입하는 「후불제」 판촉활동을 채택,탱크Ⅱ를 통한 고객만족을 극대화하고 있다. ▷OB라거­OB맥주◁소득수준의 향상과 소비패턴의 변화로 맥주산업에도 소비자들의 다양화·개성화·고급화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음주행태의 변화로 병맥주 생맥주 등 카테고리간 선택에서 브랜드 맥주를 선호하는 시대로 바뀌었다.건강·레저에 대한 관심증가로 저칼로리·저알코올 맥주 등 기능성 맥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현상도 뚜렷한 변화중 하나다. 이런 변화는 맥주회사들에 과거의 전체 음용층을 대상으로 한 제품에서 시장 세분화에 맞춘 특정 고객층을 겨냥한 신제품으로 승부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OB라거는 이같은 변화에 부응,목표 고객층의 차별화와 제품특성에 힘입어 국내 최고의 맥주 브랜드로 자리잡은 제품이다.맥주 맛을 혀끝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느끼게 하는 본래의 깊고 풍부한 맛에 초점을 맞춘 것이 히트상품의 비결.이 때문에 맥주 본래의 맛을 갈망하는 소비자를 표적고객층으로 끌어들였다. OB라거는 맛 향 색깔 거품 등 맥주의 기본특성을 더욱 강화,OB맥주 기술진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정통 라거타입이다.엄선된고품질의 맥아와 아로마호프를 사용하고 원료 투입량을 늘렸다.오랜 기간동안 저온숙성을 시켜 깊고 풍부한 맛이 살아 있고 부드러운 맛을 내는게 특징. OB라거는 이같은 장점으로 승부수를 던져 지난해 7월말 출시 후 4개월만에 판매량 1천만상자(500㎖짜리 20병들이 기준)를 돌파했다.한때 최고의 맥주를 구가하던 조선맥주의 하이트가 출시 4개월 후 1백50만상자,진로쿠어스맥주의 카스가 6백50만상자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가히 폭발적인 수요량이다. 올해 들어서도 폭발적인 판매추세를 지속,연간 판매량이 5천3백만상자로 전망되는 등 출시 1년만에 한국 맥주산업 사상 유례없는 성장이 기대되고 있다. OB라거의 품질은 지난 6월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월드 비어 컵(World Beer Cup)국제 콘테스트」에서 아메리칸 라거타입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국제적으로도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OB맥주는 폭발적 판매추세를 이어가는 OB라거를 주력제품으로 맥주시장의 전체 규모를 키우고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을 비롯,러시아 등에 대한 수출도 늘려가고 있다. ▷금호 베스트홈­금호건설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는 집이 있다.교외의 전원주택이든,도심 속의 단독주택이든…. 금호베스트홈은 수요자들의 이러한 욕구를 설계 단계부터 충족시켜줄 수 있는 3차원 영상시스템으로 주문주택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주문주택에 관해서는 금호베스트홈으로」.캐치프레이즈대로 주문주택의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상담에서 기본계획까지는 무료서비스. 상담은 물론 현장과 주변상황(지가조사 도로 교통 상하수도 도시가스 전기인입 등)을 면밀히 조사해 주택의 개발방향을 제시해 준다.이미지 디자인시스템(KID)을 활용,대지 형태와 부지여건,그리고 건축주가 원하는 주택을 입체영상으로 보여준다. 설계 뿐 아니라 착공전에 해야 할 측량이나 지질조사,각종 인허가 업무도 전문인력이 대행해준다.상세한 계약내역서와 함께 마감자재리스트를 작성,샘플을 제시함으로써 마감자재변경으로 인한 분쟁의 소지도 줄였다.자재전시실을 마련,코디네이터와 인테리어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주택과 건축주의 취향에 맞는 마감자재를선정할 수 있게 했다. 금호건설은 강남구 대치동에 이어 올 6월에는 고양시에 제2영업장을 열고 신도시 단독주택시장에도 진출했다.고객의 주문내용에 따라 적게는 평당 2백50만원에서 3백50만원의 건축비가 소요된다.금호관계자는 『3차원 입체영상시스템을 통해 시공전이나 공사중이라도 건출주가 원하는 대로 설계가 되었는 지,원하는대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게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금호베스트홈은 강남구 삼성동과 일산신도시 등에 10여개동을 완공했으며 행당동·수유리·일산신도시·곤지암·퇴촌 등 수도권 일대에 20여동을 설계하거나 시공중에 있다.올해 60개동 수주를 낙관한다. ▷가비앙­샤프전자◁ 전자수첩은 이제 직장인과 학생들사이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다. 개인정보기기로서 각광받고 있는 전자수첩은 항상 휴대해야하기 때문에 점점 소형화하는 추세이다.이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샤프전자의 가비앙전자수첩.가비앙은 올 3월 시판에 들어간 뒤 월 2만대의 획기적인 판매실적을 올려 화제가 됐던 품목이다. 국내 최소형,최경량을 자랑하는 이 제품은 출시 이후 7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매월 2만5천대씩 팔릴 만큼 꾸준한 성장을 기록하는 등 베스트셀러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국내 최초로 한글전자수첩을 개발한 샤프전자산업은 전자수첩수요자들이 보다 작고 휴대하기 간편한 제품을 선호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가벼운 무게의 작은 모델 개발에 앞장서 히트상품을 만들어낸 것이다.전자수첩의 핵심기능을 빠뜨리지 않고 내장하고 있으며 무게와 크기에 있어서 삐삐만큼 작고 가볍다. 제품이 흘러내려 분실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해 분실방지용 고리줄을 부착한 것도 독특한 아이디어.심플하면서도 내용에서 뒤지지 않는 제품을 선호하는 실용파 신세대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샤프전자는 최근 가비앙과 크기 및 기능이 동일하면서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이 첨가된 「가비앙­딕」을 개발,지난 11월 15일부터 시판에 들어갔다.내장된 단어수는 영한사전이 약 7만3천단어,한영사전이 약 1만2천400단어.중사전 수준의 풍부한 어휘를 숙어·변화형·동의어·반의어 등과 함께 내장한 것이 특징이다.해외여행을 떠날 때나 학교·직장 등에서 사전대용으로 활용하기에 매우 유용하다. ▷복지복권­근로복지공단◁ 복지복권이 히트상품으로 자리잡은 데는 중소기업근로자를 지원한다는 명분이 크게 작용했다.복권 자체의 캐릭터와 기금조성 및 운용 등에서 다른 복권과 구별되는 점도 「정상의 복권」으로 올려놓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복지복권은 93년12월 제정된 「중소기업근로자 복지진흥법」에 근거,94년5월1일 근로자의 날부터 발행됐다.현재 조흥·국민은행 등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판매중인 복지복권은 1장에 500원,즉석식 복권,1등 최고상금 1천만원 등으로 다른 복권과 비슷하다.그러나 기금조성 및 운용,수익사업의 수혜계층,복권 자체의 캐릭터에서 뚜렷이 구분되고 사은행사방식도 특이하다. 복지복권은 지난 10월까지 20차례에 걸쳐 1억5천2백만장이 발행됐다.이 가운데 54.8%인 8천8백34만7천여장이 판매됐다.복지복권이 「복권중의 복권」으로 떠오른 데는 우선 기금조성과 운용명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복지복권은 판매수익금과 정부출연금 등으로 조성되는 근로복지진흥기금에 50%를 기여하고 있다.국민주택기금(찬스복권)·국민체육진흥기금(체육복권)·기술개발기금(기술복권) 등과 비교할 때 복지복권의 기여도가 훨씬 높다. 근로복지진흥기금의 운용에서도 일정금액이 조성될 때까지 적립하는 적립성 기금이 아니다.복권판매 등 연간 수익범위내에서 사업예산을 편성,집행하는 사업성 기금이기 때문에 곧바로 복지사업에 쓰여진다.따라서 복권판매율이 높을수록 그만큼 복지사업도 크고 다양하게 추진될 수 있다.
  •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 영구 귀국

    ◎전주 이씨 대동종약회 적극 주선으로/“이국땅 맴도는 통한의 역사 90년만에 마감”/새달10일 완공 서울 장충동 영빈맨션서 “새삶” 조선조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씨(65)가 25일 상오 11시50분 대한항공 705편으로 일본에서 영구 귀국했다. 이씨는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국에서 여생을 마치기 위해 영구귀국했다』면서 『황손이 이국땅을 떠도는 통한의 역사를 90년만에 마감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20여년을 일본과 미국 등지로 떠돌아 다니느라 조상들에 대한 제례도 주관하지 못하는 등 황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점을 통감한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씨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하오 2시 서울 종묘에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신위에 예를 올리는 고유제를 지냈다. 이씨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회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고국에 안주하게 됐다.다음 달 10일쯤 완공될 서울 중구 장충동 앰버서더 영빈맨션에서 거주한다.31평형의 이 맨션은 종친회원인 부영주택 이중근회장이 기증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서울 종로구 화룡동 종친회 사무실에 출근해 총재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종친회측은 그동안 이씨가 창경궁내 낙선재에 기거하며 생활비와 품위유지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었다.문화체육부는 그러나 이씨가 문화재관리 특별회계법에 규정된 구황족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고,낙선재는 생활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주거가 불가능하다며 요청을 거절했다. 이씨는 지난 31년 일본에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 이은씨와 일본인 이방자여사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차대전이 끝난 뒤 맥아더장군의 주선으로 미국 MIT를 졸업했다.지난 63년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던 이씨는 사업이 실패하자 79년 일본으로 떠났으며,미국인 부인 줄리아 여사와도 이혼한 뒤 홀몸으로 지내왔다.
  • EEZ채택은 국제관행

    ◎200해리내 자원개발·탐사 「주권적 권리」행사 해양법에 있어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200­mile Exclusive Economic Zone:EEZ)제도는 이제 국제관습으로 확립되었다.현재 이 제도를 채택한 연안국의 수는 120개국을 넘어 거의 모든 연안국들이 포함되어 있다. 200해리는 370.4㎞인데 이 제도에 따라 연안국은 이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의 탐사·개발·보존·관리에 관하여 「주권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이러한 권리를 하필 주권적 권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선박의 통항등 공해에 있어서의 기타의 자유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완전한 주권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EEZ의 유래는 1945년 9월에 미국정부가 발표한 소위 「트루먼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것은 영해에 인접한 공해수역에 대륙붕및 어업에 관한 관할권을 행사한다는 몹시 비약적인 것이었다.대륙붕에 관한 것은 미국의 3해리 영해 밖에서 개발되는 석유의 관할권은 연안 주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가 행사한다는 것이었고,어업에 관한 것은 북양 연어자원의 관할권 역시 미국이 행사함으로써 일본의 진출을 사전에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 두 트루먼선언에는 200해리 등 거리를 수치로 표시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중남미의 여러 연안국들은 이것을 받아서 앞을 다투어 해양관할권을 확장하면서 「200해리까지」라고 명시했다.그러나 「200해리」라는 수치의 산출근거는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오늘까지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가 1952년 1월18일에 공포한 소위「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선언」 역시 이러한 동향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즉,그때까지 일본어선들의 조업범위는 「맥아더 라인」에 묶여서 한반도 주변에는 접근이 불가능했었으나 그해 4월에 대일강화조약의 발효를 앞두고 「맥아더 라인」은 철폐되므로 우리나라는 사전에 대책을 세웠던 것이다.일본의 항의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자」는 조치라고 해명하여 이 선을 「평화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한편 독도가 평화선안에 들어있어서 독도에 관한 영토문제도 동시에 일어났다. 「경제수역」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유엔의 공식회의에 제기된 것은 1972년이었다.그 당시 후진국들사이에는 이미 자연자원에 관한 주권의식이 고조되었고 신국제경제질서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래서 연안의 해양자원에 관한 관할권에 경제수역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자 여러 후진국들의 압도적인 호응을 받았다. EEZ 제도의 최대의 수혜국은 해안선과 태평양등 대양에 고도를 많이 갖고 있는 미국·캐나다·러시아·일본·호주·뉴질랜드·프랑스 등 8개국이다.이들은 새로이 국가관할권에 편입되는 공해해역의 거의 45%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 각처에서 EEZ제도가 채택되기 시작한 것은 1977년부터였다.한·중·일 3국은 금년에 들어와서 겨우 채택했다.인접국 및 대향국간의 경계문제가 복잡하고 게다가 섬에 관한 영토문제가 끼여있어서 문제의 해결이 한층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해양문제에 관한한 밖의 동향은 대립에서 타협으로 중심이동이 시작된지 오래다.우리나라 주변만이 언제까지 대세를 외면할 수 없다.앞으로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 세 전 대통령 「동시 법정서기」불발/12·12 결심공판­이모저모

    ◎최씨,지팡이 짚고 현관계단 내려와/수사관들 서교동자택 대문밖서 1시간 대기/장세동 피고 지도들고 부대이동 설명 “눈길” 14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나왔지만 「증언」은 거부했다.재판부가 변호인·검찰·피고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을 퇴정시킨 가운데 최 전대통령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함으로써 전직 대통령 3명이 함께 법정에 서는 「초유」의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강제구인◁ ○…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인영장을 가지고 상오 7시50분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 467의 5 최 전대통령의 자택에 도착한 서울지검 이재영 수사3과장 등 수사관 4명은 대문 밖에서 1시간여 동안 대기. 가족이나 수사관들의 부축을 받지 않은 채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현관 계단을 내려와 문밖에 모습을 드러낸 최 전 대통령은 요각통으로 다리가 불편해 보였지만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으며,곧바로 대기중이던 서울2보 6747호 그랜저승용차에 탑승. ○…상오 9시26분쯤 법원에 도착한 최 전대통령은 서울고법 김갑동 사무국장과 김찬식 형사과장의 안내로 대기실로 직행. 검정색 코트 차림의 최 전 대통령은 대기하고 있던 촬영기자 30여명이 집중적으로 플래시를 터뜨리자 발밑을 응시한 채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지었으며 소감과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함구로 일관. ○…법원측은 『최 전대통령이 커피를 피한다』는 측근의 귀띔에 따라 녹차 등 2∼3가지의 국산차를 준비했다가 대접하는 예를 갖추기도. 이날 비공개재판에 방청하러 나온 최 전 대통령의 측근은 최흥순 비서관과 이기창 변호사 이외에 신두순 전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정동렬 전 청와대 의전경호실장 등 2명 뿐이어서 조촐한 느낌. ○…최 전 대통령은 일체의 증언을 거부하다 법원에 도착한지 2시간여 만인 상오 11시25분쯤 서교동 자택으로 출발. 최씨는 공판 시작 50분만인 10시50분쯤 상오 공판이 끝나자 417호 대법정 옆에 있는 대기실에 들러 이기창 변호사 등 측근들과 30여분간 얘기를 나누며 휴식. 최씨는 로비 엘리베이터에서 출입구에 이르는 30여m의 「ㄱ」자형 복도를 느린 걸음으로 가 피로한 기색이 다소 엿보이기도. ▷결심 공판◁ ○…장세동 피고인이 재판부가 앉아있는 법대 앞에서 상황지도를 펼쳐들고 당시 부대이동 상황을 일일이 설명해 눈길. 이에 앞서 권성 부장판사는 장피고인에게 서울시 지도 등 3개 지도를 주며 1공수여단이 출동했다는 신월동 삼거리의 위치와 부대 대기위치 등을 지도에 표시하라고 지시. ○…하오에 속개된 공판에서 서울고검 김각영 검사는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한 재판부의 노고에 감사한다』며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한 변호인에게도 감사한다』는 인사말로 서두. 김검사는 이어 『전피고인에 대해서는 항소를 기각해주시고 노피고인 등 나머지 15명 가운데 박준병·황영시·정호용 피고인에 대해서는 원심의 무죄판결을 파기한 다음 원심의 구형대로 형을 선고해 주십시오』라고 주문. ○…변호인들은 이날 최후 변론에서 문학적 표현을 가미하는가 하면 호소력을 더하기 위해 대학강의 내용까지 인용하는 등 최후 변론의 진수를 한껏 과시. 석진강 변호사는 『상식이 빼앗긴 자리를 되돌려 줘야 한다』 『무엇이 정의인지 옷깃을 여미고 생각해야 한다』 『폭풍속에서 헤매는 이성의 방파제가 돼야 한다』는 등의 문학적 표현을 가미시키며 상식을 유달리 강조. 전상석 변호사도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재판의 임무』라며 『그렇지 못할 경우 맥아더의 「진주만의 보복」이 될 것이며 사상최대의 위선이 될 것이요 부정이 부정을 낳게 될 것』이라고 다소 협박성 발언. ○…이양우 변호사는 『전피고인이 정말로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이라면 단임실천을 했겠느냐』며 『당시 참혹한 정치보복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강변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껴 신문이 잠시 중단되기도. 이변호사는 형벌부과의 신중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학강의에서 들었던 「호리병의 술을 바가지로 꺼내라」는 문구까지 인용. 하지만 공판을 지켜본 대다수 방청객들은 『일리있는 논리였으나 그렇다고 내란과 반란 사실까지도 부인할 수 있겠느냐』고 시큰둥한 반응. ○…이변호사의 최후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에 있던 「광주유가족 협의회」소속 회원들이 야유를 보내 법정이 한때 술렁. 이변호사가 『모든 반민족적,반민주적 투쟁을 벌이는 일부 계층의 투쟁만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하자 50대 여성 3∼4명이 『에구…저런…』 등 야유를 퍼붓다 재판장으로부터 제지당하기도. □「12·12」 「5·18」사건 일지 ▲95년11월24일=김영삼 대통령,5·18 특별법 제정 지시 ▲11월30일=특별수사본부 발족 ▲12월3일=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수감(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자금사건으로 11월16일 구속 수감) ▲12월21일=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공포 ▲96년2월16일=헌법재판소,특별법 합헌 결정 ▲2월28일=12·12 및 5·18 사건 수사종결.전·노씨 등 16명 기소 ▲3월11일=1심 첫공판 ▲8월5일=27차 공판.1심 결심 및 검찰 구형 ▲8월26일=1심 선고 ▲10월7일=항소심 첫 공판.최규하 전 대통령 등 33명 증인채택 ▲10월28일=7차 공판.최 전 대통령 증인 불출석,재소환 결정 ▲11월4일=9차 공판.최 전 대통령 강제구인 포기 및 3차소환 결정. ▲11월11일=10차 공판.최 전 대통령 강제구인 결정 ▲11월14일=11차 공판.최 전 대통령 강제구인.결심 및 검찰 구형
  • 독도는 우리땅… 공사시비 말라(사설)

    일본의 독도시비는 우리를 참으로 곤혹스럽게 한다.한국이 독도에 접안시설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일본외무성이 지난달 31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공사를 중지해줄 것을 공식요청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이번 요청은 접안공사와 관련,항용 있는 기록용 외교행위일 수도 있고 최근 중국이 조어도(일본명 센카쿠)에 일본이 설치한 등대를 철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대한 반사적 반응일 수도 있다.그래서 그냥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그러나 영토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그런 영토문제를 일본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자민당이 지난번 총선때 선거공약으로 독도문제를 거론한 것이나 이번에도 조어도문제로 해서 일본내의 보수여론이 드세지자 이를 의식해 독도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외무성 대변인이 일본측 입장을 전달한 다음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통해 이 문제를 일부러 공개한 것은 다분히 독도문제의 정치적 이용이라는 혐의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독도문제를 조어도문제와 연계해서 보는 것마저 옳지 않다고 믿는다.독도문제와 조어도문제는 그 성격이 기본적으로 다르다.조어도는 2차대전후 맥아더사령부가 그것을 중국에 반환치 않은 데서 발단된 것이고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한국의 영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정부가 독도문제를 흔쾌히 정리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그러나 이 문제는 어떻게든 풀어야 할 일본의 숙제다.배타적경제수역(EEZ)획정협상때 독도문제를 한걸음 선명히 함으로써 단계적으로 풀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도문제는 일본에 실익없이 두고두고 한·일간의 기본관계만 뒤틀어놓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우리는 일본외무성이 강조한대로 이 문제로 해서 양국관계가 더이상 손상되길 바라지 않는다.
  • 항암맥주(외언내언)

    세계에서 맥주를 처음으로 만든 종족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메르족.이 종족은 기원전 4천2백년께부터 맥주를 마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1953년 메스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견된 수메르족의 한 무덤 비문에는 「발효를 이용해 빵을 만들고 그 빵으로 보리의 맥아를 당화시켜 물과 섞어 맥주를 만든다」는 제조법까지 기록돼 있다.오늘날 맥주가 「액체로 만든 빵」으로 불리는 것도 초기의 이런 제조법에서 연유한 것. 이후 맥주는 소아시아인의 이동과 함께 이집트로 전해졌고 다시 유럽대륙으로 보급됐다.맥주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긴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술을 「매우 신성하고 깨끗한 사후의 음료」로 여겼다.그래서 가족이 죽으면 그 무덤에 영혼이 목을 축일수 있도록 4병의 맥주를 넣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맥주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대중의 술이다.1995년 세계맥주시장의 연간매출액은 1천3백억달러(약1백5조원).한국도 3조원(출고가 기준)에 이른다.지난해 한국에서의 맥주판매량은 1억9천1백여만상자,5백㎖짜리 맥주병으로 38억2천여만병이다.국민 한사람이 연간 90병씩을 마신 셈.70년의 5·4병,80년의 30병,90년의 64병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났다.세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체코의 2백44병,독일의 2백18명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소비증가율은 이들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 맥주에 발암물질을 억제하는 항암효과가 있다는 흥미있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일본 오카야마대학 약학부연구팀은 맥주가 고기나 생선의 탄 부분에서 발견되는 「트립P2NHOH」라는 발암성분의 DNA파괴기능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오는 10월10일 열리는 일본 암학회에 보고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당들에겐 환호작약할 복음이겠지만 그렇게 기뻐할 것은 못된다.이 연구가 아직 의학계 검증을 거치지 못했을뿐 아니라 맥주는 역시 술이지 약이 아니기 때문.맥주도 지나치게 마시면 알코올중독이 될뿐 아니라 건강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는 더 무서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이것이 히트상품이다/’96 상반기 히트상품

    ◎이동통신 011­세계 최초로 CDMA 상용 서비스/쿨 사이다­신선하고 깨끗… 신세대 청량음료/귀족­저가격·고품질… 구두시장 새바람/엔크린­뛰어난 청정성능… 최고급 휘발유/독립만세­냉각능력·환경 동시 만족 냉장고/델타 3500­고음·저음 재생 우수… 슬림형 앰프/삼성카드­국내 첫 자동차카드… 선풍적 인기/크레도스­공간미 극대화… 중형차시장 주도/비락식혜­음료시장 전통음료 돌풍의 “주역”/닥터위콤­어학 실습기… 특정부분 자동 반복/OB라거­깊고 풍부한 맛… 맛 아는 고객 겨냥 ○귀족(한국신발공업협동조합) 1천3백여개의 중소신발업체가 조합을 중심으로 만든 공동브랜드.공동판매를 통해 불합리한 유통구조를 개선,기존의 절반정도인 파격적인 가격과 고품질로 한국신발시장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지난 5월 4일 24개점을 1차로 개점한뒤 2차 3차에 걸쳐 전국에 42개점을 열었다.대리점별로 하루평균 20∼1백20켤레가 팔리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42개 대리점이 개점 이후 한달동안 신사숙녀화 「귀족」이 2만5천켤레가,패밀리브랜드로 여성용구두 「웨딩」 1만5천켤레,캐주얼화 「두잉」 1만1천켤레,아동용 「아이호프」 5천켤레 등 모두 5만6천켤레가 팔려나갔다.판매금액은 모두 22억5천만원.신발값은 「귀족」이 3만∼5만원,「웨딩」 3만9천∼5만원,「두잉」 2만3천∼2만8천원등이다. 조합은 이같은 여세를 몰아 해외시장도 개척할 계획이다.일본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 시장 개척단을 보내 홍보및 수출상담을 본격적으로 전개키로 했다. ○쿨 사이다/해태음료 이름그대로 신선하고 깨끗한 맛을 내세워 침체된 사이다시장에 새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다.지난 4월에 출시,첫달 9백만캔 28억원의 매출을 기록한데 이어 5월에는 1천5백만캔,6월 1천3백만캔을 팔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해태측은 당초 계획한 사이다시장 점유율 25%대 가입과 5백억원 매출을 달성할수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특히 입맛이 까다로운 젊은층들을 겨냥한게 주효해 신세대음료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제품명도 간단하고도 쉽게 기억될 수 있는 쿨로 정해 신세대취향에 맞췄다. 광고전략은 1.2단계로 나눴다.먼저 신세대를 중심으로 저변을 노리기 위해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등장시켰다. 해태측은 2백50㎖ 슬림형 캔제품에 이어 최근 3백50㎖ 병제품과 3백55㎖ 캔제품을 추가로 내놓을 계획이다. ○크레도스/기아자동차 기아자동차가 지난해 6월말부터 본격 판매에 들어간 중형차의 대표주자격이다.크레도스가 판매되자 현대자동차는 쏘나타Ⅲ를 시판해 맞대응하는 등 중형차의 판매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계기가 됐다. 올 상반기에 4만9천7백43대를 판매해 승용차 판매순위 4위에 올랐다.중형차 판매중 28%를 차지했다.기아는 35%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해외마케팅도 강화해 수출 전략차종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중형차급 최고를 개발목표로 해 지난 90년부터 GCA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5천1백억원을 투입해 4년5개월만에 독자기술로 개발됐다.공격적 타원형을 기본개념으로 전체적으로는 풍부한 볼륨과 매끄러운 곡선미를 갖추고 있다.겉모습은 근육질의 남성미와 함께 곡선미를 최대한 살려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실현했다. 내부는 여유와 공간미를 극대화해 중형차이면서도 대형 승용차처럼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을 실현한 게 특징이다.도난경보와 키 뽑는 것을 잊었을 때에는 경보가 울리는 등 경보제어 장치 기능도 갖춰져있다.소음진동도 최소화했다.커브길에서의 차체 쏠림도 적다.출발후 11.1초후에는 시속 1백㎞로 달릴수 있을 정도로 가속성능도 좋다. ○011디지털 이동통신/한국이동통신 연초 우리나라에도 이동전화의 사용 폭을 넓힌 고품질의 디지털 이동전화 시대가 개막됐다.한국이동통신이 지난 1월3일 인천,부천지역에서 세계 최초로 CDMA(카드분할 다중접속방식) 이동전화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CDMA방식 디지털 011은 디지털 이동전화 시스템 중 가장 진보된 방식으로 주파수 이용효율이 높아 통화완료율이 높으며 가입자를 많이 수용할수 있다.또 통화품질도 획기적으로 개선돼 혼선이나 잡음이 없으며 통화내용에 대한 비밀이 완벽하게 보장된다.특히 한국이동통신의 디지털 이동전화 가입자는 디지털 서비스 이외의 지역에서도 기존 아날로그망을 이용할수 있어 전국 어디에서나 통화가 가능하다. 4월12일 서울지역 서비스를 계기로 가입자가 증가했는데 특히 지난달에는 하루 평균 2천명 규모로 수직상승,최근 CDMA가입자는 10만명을 넘어서 세계 최대 규모의 가입자를 보유하게 됐다. 사용료는 음성사서함은 월 4천원,기타 부가서비스는 최초 한종목은 9백원이며 추가 한종목당 4백원이다. ○비락식혜/비락 음료시장에 「식혜」돌풍을 일으킨 주역으로 지난달 말까지 단일품목으로 3억8천만캔 이상을 판매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비락식혜가 발매되기 이전의 식혜시장 규모는 월3천5백만원정도.그러나 94년 비락캔식혜가 나온 이후에는 시장 성장폭이 급속도로 빨라졌다.지난해에는 연 2천3백억원으로 청량음료의 간판격인 사이다 시장규모를 추월하는 이변을 낳았다. 국내시장에서 상품의 우수성을 입증한 비락식혜는 국내 출시와 동시에 국제화에도 나서 93년에는 미주시장을 대상으로 수출에 들어갔다.지금은 미주,남미,유럽,동남아 등 총 7개지역권 21개국에 수출해 연간 수출실적 3백만달러을 올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같은 비락식혜의 성공을 끊임없는 시장조사와 시장분석을 통한 틈새시장 공략,급변하는 사회적 환경변화에 발맞춘 능동적인 자세,지속적으로 우리 생활주변 식품을 상품으로 특화한 기술개발 등을 꼽는다. 똑같은 식혜를 만들면서도 일반가정에서 만든 것과 같은 독특하고 고유한 맛을 유지하는 비법에 대해 회사측은 우리땅에서 수확한 우리쌀로 제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비락은 밥알없는 청식혜와 호박식혜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제품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델타 3500/아남전자 아남전자는 델타 3500을 장인정신과 프로정신으로 창조해 낸 제품이라고 자랑한다.전문업체로서의 기술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은 것으로 여긴다. 실제로 아남 하이파이 컴포넌트 오디오 델타 3500은 지난 해 초 선보인 이후 월 평균 4백조의 판매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게 회사측 설명이다.오디오는 앰프와 스피커 등의 한 세트를 한 조로 부른다. 이 제품은 아남이 20년 노하우로 자체 개발한 콘덴서를 사용,고음영역에서 가느다란 현의떨림까지도 또렷하게 재생한다. 고음질 재생에 가장 이상적인 회로 설계로 음향신호의 미세한 전류가 서로 얽혀 음질을 낮추는 현상까지도 잡아낸다. ○독립만세/삼성전자 삼성전자가 57명의 연구원과 1백25억원을 투입,3년간 연구끝에 올해 초 선보인 환경형 냉장고 「독립만세」.냉각능력을 대폭 강화하고 환경문제에도 대응,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한 제품이다.환경부문은 에너지절약(절전)과 오염물질 배출을 완전히 배제,컴퓨터에 이어 냉장고 시장에도 처음으로 「녹색바람」을 일으켰다. 냉장고의 냉매로 사용되던 프레온가스(CFC) 대신 HFC­134a를 사용했다.발포제도 사이크로펜탄을 사용,오존층 파괴의 주범인 염소가스 배출을 완전히 배제,1백% NON­CFC를 구현했다. ○엔크린/유공 국내 정유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유공의 「엔크린」이 휘발유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지난해 10월 국내 최초의 휘발유 독자 브랜드로 출시된 엔크린은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청정제를 첨가,세계 유수의 엔진 실험기관인 영국리카아도와 미국 SWRI로부터 선진국 제품보다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엔크린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엔진내부의 찌꺼기 발생을 대폭 줄일뿐만 아니라 기존에 쌓여있던 찌꺼기를 제거해 엔진수명을 연장하고 엔진출력 및 연비향상은 물론 유해 배기가스 발생량을 대폭 줄일 수있다는 제품상의 탁월한 장점때문이다. 엔크린 제품이미지를 소비자에게 확실히 인식시킨데는 광고모델로 나선 톱 탤런트 박중훈과 이경영의 공로도 컸다.찌꺼기제거를 강조하기위해 새차를 등장시킨 첫 광고는 박중훈과 이경영의 코믹연기로 단번에 세간의 화제가 됐다. ○OB라거/OB맥주 OB맥주의 다 브랜드(상표)전략에 따라 지난해 7월24일 나온 맥주.맥주 본래의 깊고 풍부한 맛을 찾는 고객층을 겨냥했다.혀끝으로 느끼는 분위기 위주의 감각적인 맛이 아닌 목으로 느끼는 맥주본래의 맛을 갈망하는 소비자들을 표적 고객층으로 삼았다. 맛,향,색깔,거품 등 맥주의 기본특성이 더욱 강화된 맥주로 고품질의 맥아와 홉을 사용했다.오랜 시간 저온 숙성시켜깊고 풍부한 맛이 살아있고 보다 부드러운 맛을 내는게 특징이다. 카프리,넥스 등 OB맥주의 다양한 제품 중 최고의 주력제품으로 지난달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열린 「월드 비어(세계맥주)컵 국제콘테스트」에서 아메리칸 스타일 라거부문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다. 출시된 지 4개월만에 1천만상자(상자당 5백㎖ 20병) 판매를 돌파하는 기록도 세웠다.올 상반기(1∼6월)에는 2천5백50만상자를 판매하는 등 인기는 여전하다. 「숙성이 다른 맥주」라는 컨셉트로 제품차별화를 시켜 맥주의 맛은 숙성이 좌우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간대별로 다른 TV 광고를 하면서 소비자들에게 호기심과 친숙함을 준 것도 인기에 한몫 했다는 평을 받는다. ○삼성카드/삼성카드 지난 5월6일부터 삼성자동차와 제휴해 삼성자동차카드를 발급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자동차카드가 나온 것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국내에 자동차카드 열풍을 몰고왔다.지난 92년 GM이 자동차카드를 도입한 이후 포드·도요타·혼다 등 선진자동차 업체에서는 자동차카드 제도를 시행 중이다. 삼성자동차카드가 선보인 뒤 현대자동차는 국민·BC·외환카드와 제휴하고,대우자동차는 LG·외환·다이너스·한미비자 등과 제휴해 각각 자동차카드를 발급하는 등 카드시장에 자동차카드 붐이 일고있다.2개월여만에 자동차카드 가입자는 1백50만명에 이른다. 삼성자동차카드는 기존의 삼성카드 고객들이 받는 혜택외에도 카드사용 실적의 3∼8%에 해당하는 금액을 적립받아 오는 98년 이후 나오는 삼성자동차를 구입할 때 적립된 금액만큼을 할인받는다. 삼성전자 대리점과 SS패션·하티스트·빈폴매장 및 호텔신라(제주신라) 객실과 면세점 등의 특별가맹점을 이용하면 추가로 5%를 적립받는다.한화에너지 플라자를 이용하거나 한샘이나 보루네오 가구를 구입할 때도 5∼8%씩 혜택이 있다.적립금액은 연간 최고 20만원이며 5년간 최고 1백만원이다. ○닥터위콤/서부산업 서부산업이 개발한 어학실습기.어학실습실의 기능을 갖춘 첨단 기기다.학습자가 교재(테이프)의 특정부분을 마음대로 골라 자동반복해서 들을수 있다.「1개 문장 5번 반복」,「3개 문장 10번 반복」 등 문장의 길이와 반복횟수를 지시하는대로 자동반복해 주므로 교재내용을 완전히 암기할 수 있다. 교재와 학습자간의 일대일 대화기능 등을 통한 반복학습으로 빠른 시일내에 외국어 실력이 향상시킬수 있다.교재음을 들려준 뒤 자동정지되고 학습자가 따라해야만 계속 진행되므로 현장감있는 학습이 가능하다.말하기에 자신감도 생긴다. 서울올림픽 통역요원의 교육기재로 활용됐으며 세계 10여개국에 수출된다.중국,미국,사우디아라비아의 학교를 비롯해 세계의 어학실습실에 진출했다.지난 91년에는 전국 우수발명품전에서 대통령상을,독일 국제발명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로스앤젤레스 미국 발명품전 대상과 은상(94년,95년)도 받았다.지난 5월20일 열린 「발명의 날」에서 부도를 극복하고 재기한 서부산업의 윤만희 사장은 금탑산업훈장도 받았다.
  • 아,압록강/예위멍 지음(화제의 책)

    ◎중국 작가가 조명한 한국전쟁 체험기 중국인의 시각에서 쓴 한국전쟁 참전기(전3권).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로도 읽히는 이 책에서 지은이는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과정을 소상히 밝힌다.중공군은 동북아 전체를 사회주의화하려는 야욕외에 유엔군이 중국본토까지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에 한국전에 개입하게 됐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모택동 군대의 전략전술에 특히 주목한다. 「전우를 방패삼아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건넜던 오합지졸의 중공군」 이 정도가 우리가 알고있는 한국전 참전당시의 중공군 모습이다.그러나 미군의 공격에 저항할 방법이 없어 인해전술을 폈다는 주장은 미국측 시각일뿐 중공군은 나름의 치밀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전쟁을 치렀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한국전쟁에서 장남까지 잃어버린 모택동의 고뇌와 결단,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총사령원 팽덕회의 승리와 패배,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야망과 좌절 등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중국작가의 입장에서 쓴 한국전쟁 체험기인만큼 이 책은 고증 여부를 떠나 그동안 접했던 기록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여명출판사 김택 옮김 각권 6천원.〈김종면 기자〉
  • “6·25 기본적 이해 결여… 공당 의심”/신한국 김철 대변인

    ◎“만주폭격”… 국민회의 「무책임 발언」 반박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26일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24일 전방 순시에서 6·25 당시 맥아더 장군의 「만주폭격」을 언급한데 대해 국민회의측이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한 성명을 발표,『6·25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결여됐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 어느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김대변인은 『당시 중공과 북한은 유엔에 의해 침략자로 규정되었다』면서 『이제는 역사가 된 반세기전 전쟁상황을 기준한 대통령의 발언이 어떻게 한­중,한­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25일 『6·25 당시 맥아더 장군의 소원대로 만주를 폭격했더라면 통일이 끝났을 것』이라는 김대통령의 언급을 문제삼아 성명을 내고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극히 충격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 맥아더 사령부 「일 영토규정」 문서/“독도는 일본땅 아니다”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2차대전의 패전국 일본을 통치했던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부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4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일본이 통치권 및 행정권을 행사할수 있는 영토규정」에 따르면 독도를 제주도·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통치권 밖에 있는 것으로 명시돼 있다. 맥아더 사령관의 명의로 발송한 이 문서는 제3항에서 『일본의 영토를 혼슈(본주) 등 4대 섬과 대마도·유구열도 등 1천여개의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울릉도와 독도,제주도는 이같은 일본의 영토에서 1차적으로 제외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 주변4강의 남북한 정책/중·일 전문가의 교차 분석

    ◎중서 본 일정책/서선 중 현대국제관계연 부주임/동북아주도권 잡으려」등거리」유지/대미 견제외교로 영향력 강화 폭석 한반도가 일본식민통치의 질곡에서 벗어난 지 50년이 지났으며 적대관계였던 한·일 두나라의 국교정상화도 30년이 지났다.냉전종식후 국제관계에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한반도정책은 동북아의 안정·번영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냉전종식후 일본은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북한관계도 개선하겠다는 동시관계 발전정책과 한반도의 안정유지정책을 구사하고 있다.이를 통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한반도정책의 기본목표다. 이런 두나라 관계는 일부 인사들의 망언으로 잡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협력부문까지 확대되고 있다.최근 두나라는 방위방면의 정기 관계자회의에 대한 기본협약에 합의했다. 일본은 또 대북한 관계에도 두드러진 성과를 얻어냈다.91년부터 북한과 수교회담을 진행,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두나라 수교협상이 핵문제로 중단됐지만 북한과의 관계개선 및 수교에 대한 일본정부의 기본입장은 변치 않았다.일본정부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정국은 안정됐으며 정권이양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신속하게 내렸다.이같은 정세판단의 맥락아래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를 제공,새로운 정권이 경제곤란을 극복하는 데 돕고 있다. 이러한 외교 행보에서 한국과 동반자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려는 것이 일본의 한반도 외교정책의 기본입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본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전망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군사전략적인 차원에서 한반도를 러시아와 중국으로 가는 발판이며 대륙세력의 위협을 저지하는 방파제로 생각해 왔다.한반도를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방어선으로 생각한 것이다.이러한 기본인식아래 일본은 안전확보를 위해 한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미국·한국·일본의 삼각 군사 안보체제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두번째 기본전략은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해 나갈 것이란 점이다.이것은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그중 하나는 한반도의 현재 상태가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이는 한반도의 현상유지 정책으로 표현된다.특히 남북한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일본이 원하는 한반도의 안정이다. 거시적으로 일본 외교는 이미 변하고 있다.그것은 「대국외교의 추진」으로 요약된다.일본은 그동안의 소극적이고 미국 추종적인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동북아 신질서 건립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일본은 한국과의 관계강화를 통한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한 견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관계강화를 통해 한반도의 발언권을 높이려 하고 있다.일본은 북한시장의 잠재력을 인정,북한시장 터 다지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한반도외교의 바람은 순조롭게 전개될 수 있을까.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2차대전의 종전 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일본은 아직도 전쟁 범죄자라는 사실은 물론 교과서왜곡을 통해 국내 역사를 왜곡하고 침략역사를 부정하는 등 한반도 및 아시아인들의 경계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한반도외교는 기본적으로 미국·한국이라는 기본적인 제약요인 아래 수행할 수 밖에 없다.이점에서 일본의 대북한 관계개선도 미국이라는 변수에 어느정도는 종속돼 있다.특히 한국의 정국이 대변혁기에 있고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돼 있는 지금 대북문제와 관련,일본은 모험은 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우호가운데 투쟁,합작가운데 마찰」속에 부단히 발전하고 있다고 요약된다.일본은 앞으로 한국과의 정치,안보부문의 합작을 부단히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과 북한 관계는 더 밝다고 전망된다.일본은 북한과 국교수립을 위한 회담을 계속 진행시켜 나갈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북한·일본 회담에서 일본정부가 미국·한국이라는 제약요인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일본은 핵문제와 관련,북한에 압력을 가하고 남북대화에 있어선 북한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배상문제에 있어선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이 받아들인 바로 그러한 모델을 채택하도록 밀어붙일 것이다.이런 점에서 아직은 일본과북한의 국교수립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서 본 중정책/이노구치 다카시 국(유엔)대학 부학장/남북한균형 유지… 북붕괴 방지 주력/경제이익 오려 사안따라 협력·경계 중국의 대한정책은 몇가지 관점에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만큼 한­중관계는 역사적으로도,군사적으로도,또 경제적으로도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한중관계는 현재의 북한의 대부분과 중국의 동북,내몽골 등이 때때로 전략적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전개돼 왔다는 점이다.금방 떠오르는 것은 한국전 당시 중국의 군사개입이다.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은 중국동북에도 폭격을 소규모로 단행했었고 맥아더원수는 동북지방의 핵공격조차 계획했었다. 여기에 역사를 조금 더 거술러 올라가면 제국 일본에 의한 중국동북 신민지화는 조선의 식민지 방위를 구실로한 것이었다.더 소급해 올라가면 몽골의 원나라 군대 및 만주족의 조선개입,수·당시대의 군사분쟁은 모두 이들 지역을 한 덩어리로 해서 다투어졌던 것이다. 독같은 이유로 중국은 북한이 붕괴한다거나 극도의 불안정화를 경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같은 조선족은 중국동북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고 중국동북지역은 공업화로 약진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중국은 대한정책에서 현상유지를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 94년 북한의 핵의혹이 미국 등으로부터 강력히 기대되어지면서도 이것을 회피해 오히려 저자세로 시종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군사적으로는 북한·한국·일본이 핵무기를 소유한다거나 또는 군사대국이 되는 것을 중국은 바라고 있지 않다.중국은 경제발전에 의해 많은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 있다.그 노력이 군사분쟁의 발생에 의해 중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늦어지는 것조차 결코 바라지 않는다.중국의 국경에서 평화가 계속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중국으로서 커다란 이익이 된다.말할것도 없이 평화라고해도 중국이 본 중국류의 평화다.주권의 주장,대국의 위신옹호 등으로 보아 필요하다면 군사력의 행사에 대해서 그다지 주저하지 않는것도 중국이다.현재 관찰되는 대만해협 남사군도에서의 중국의 완강한 태도는 이를 증명한다.79년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도 그 예다. 셋째 경제적으로 보아 북한을 장래의 것이라 치더라도 한국은 현재 중국에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이다.한국자본의 중국 동북,화북,산동반도 등에의 진출은 상당한 수준이다.중국동북을 경유해 북한에 진출하는 전망도 보이고 있다.중국은 북한이 붕괴한다든지 모험적인 대외행동으로 질주하지 않는 한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우선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중국으로서 국경에 있어 평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한정책은 다면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경제발전을 위한 평화로운 국경의 유지에 전력을 기울이겠지만 주권과 위신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도 때로 나타나곤 한다. 북한이 예를 들어 21세기의 제1사분기에 붕괴하게 될 때 중국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우선 붕괴를 방지하려고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그러나 가령 그것이 불가피하게 되면 다음으로는 한국과의 협조관계를 수립하려 할 것이다.한국주도의 한반도에 있어 민족통일이 중국동북의 조선족의 민족분리주의에 용기를 불어넣지 않는 한 이러한 제2의 시나리오에는 반드시 강한 저항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세번째로 중국동북의 조선족의 분리주의를 촉진하는 기운이 보이면 중국은 한국주도의 한반도통일에 전면적으로 반대해 올것이다. 세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중국은 스스로 경제발전의 템포를 가속시키려 할 것이고 북한의 붕괴를 막는데서 이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의 의미가 중국에 있어 강하게 있는 한 북한의 붕괴는 가능하다면 저지하고 싶은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중국의 대한정책은 한반도를 둘러싼 다른 대국인 미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기본적 정책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근본적으로 4대국은 한반도의 영토변경,국경변경을 바라지 않는다.즉 현상유지다.한반도에 있어서 외교와 안전보장의 기본틀을 미국이 주도해 가는 한에 있어 중국의 대한반도 외교가 적극화하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미국주도의외교적 협조에 편승할까 말까를 놓고 한반도를 둘러싼 다국간 외고가 당분간 전개돼가지는 않을까.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의 경제대국화와 군사대국화가 21세기 제1사분기까지 급속히 진전돼 동중국해(서해)에 있어서도 중국해군이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는 자유항행,자유무역의 구도에 장애를 미치는 형태로 전개될 것인가.그러한 시나리오하에서는 중국은 현상유지 대국으로부터 현상변경대국으로 이행해 가기 위해서 전혀 다른 대한정책을 전개하게 될 것이다.
  • 5·16과 제4공화국(새로쓰는 한국현대사:49)

    ◎무력으로 장기정권 인수… 합법 권력장악 추진/민정이양선언 파기… 유신까지 18년 집권 1961년 5월16일 상오 3시,한강 쪽에서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온 그 순간을 기다린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나른한 봄밤을 깊은 잠으로 보내고 깨어났을 때 새벽에 바뀐 불행한 역사 현실을 알아차렸다.이날 상오 5시 KBS 첫 방송이 정규프로를 접어둔채 성공한 쿠데타 소식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 주역은 이날부터 18년을 독재권력 정상에 군림한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었다.그리고 해병대 사령관 김동하 소장과 김종필 중령등이 주체세력으로 떠오른 군사쿠데타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들러리를 섰다.장도영은 쿠데타가 성공한 첫 날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국민의 기본 권리를 묶어버린 혁명공약과 각종 포고문이 그의 이름으로 시간시간 전파를 탔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진압의사를 밝혔다.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쿠데타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매그루더의 쿠데타 저지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미 국무성도 군사혁명위원회 지도자들의 반공친미성향을 긍정적으로 주목했다.이는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에서 미국의 이익과 엇갈리지 않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 박탈 군사혁명위는 쿠데타 첫날 포고령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이어 다음날은 장면정권을 정식 인수했다고 밝혔다.군사혁명위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최고회의는 6월6일 공포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에 따라 최고권력기구로 등장했다.이와는 별도로 5월20일 장도영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이 출범한데 이어 부정축재처리위원회와 혁명재판소,혁명검찰부가 설치되었다. 군사쿠데타는 군인들이 장악한 권력 그 자체보다 쿠데타 이후 군인들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그 행동은 목적을 달성한 이후 병영으로 돌아가는 중재자형과 장기간 공공연히 정치에 간여하는 감독자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당시 한국의 군부도 초기에는 혁명과업을 2년내에 완수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주변의 소수 장교들은 군정하에서 장기집권 계획을 세웠다.그 계획의 하나가 최고회의 직속의 중앙정보부(중정) 창설로 나타났다.미국의 CIA를 표방한 것이라고 하나 성격이 전혀 달랐던 중정은 창설 초기부터 무소불위의 감독자 증후군을 다양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1961년 6월에 창설한 중정은 막강한 권부의 핵으로 민주공화당(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을 주도하는등 장기집권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공화당 창당은 19 61년 8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2년내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발표한 이후 비밀스럽게 추진되었다.그 정당의 골격은 군사혁명 정부 2년간 통치에 이어 계속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패권정당이었다.그러니까 군부는 혁명과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군인이 예편한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장악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군부는 이를 끝내 실현해냈다.군사혁명 포고령 제4호로이른바 구시대 정치인들의 발목을 모두 잡아두었던 군사정권은 그것도 공화당 사전 조직으로 먼저 뛰었다. 군사정부는 1962년 11월 민정이양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의결하고 이를 12월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12월12일 국민투표를 거친 개헌안을 정식 가결한 최고회의는 1963년 1월1일 포고령으로 묶었던 정당·사회단체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없애버렸다.1년7개월만에 정치활동이 재개된 것이다.그러나 오랫동안 휴면기를 살았던 기성 정치인들은 뒤늦게 스타트라인에 서야하는 불리한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공화당은 63년 2월26일 김종필이 사전조직한 재건동지회를 기반으로 창당되었다. 그러면 군사정권의 정상 박정희 장군은 약속대로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물론 아니다.그는 1963년 2월18일 민정불참을 선언하고 선서식을 일단 갖기는 했다.그러나 1주일뒤 원주발언에서 자신의 민정불참 선서에 대해 부정시각을 드러냈다.이어 3월16일 현시국은 과도적 군정이 필요하기때문에 4년간 군정연장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그의 폭탄선언이 나왔다.그는 이 선언을 자신의 민정참여를 기정사실화 하는 계기로 삼아 4·8성명을 내놓았다. ○헌정 짓밟은 반역 기록 그해 5월27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박정희 장군은 8월13일 지포리에서 군복을 벗는 전역식을 가졌다.대장 계급장을 단 전역식에서 「나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지만 그 아류의 정치군인들도 뒷날 네 개의 별을 달고 나서 정권을 잡는 전철을 밟았다.그래서 5·16군사쿠데타 연결선상의 군사정권이 장장 30여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거니와 헌정질서를 뒤흔든 반역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떻든 박정희 장군은 1963년 10월15일 대통령선거에서 범 재야세력의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겨우 15만표차로 누르고 신승했다.윤보선과 또 한차례 격돌을 벌인 대통령 박정희 장군은 1969년 9월14일 국회 변칙개헌으로 3선을 향해 줄달음쳤다.그리고 한 차례 더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나서 1972년 10월17일 영구집권으로 가는 유신을 선포했다.박정희 정권의 제4공화국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상용 문화부부차장 ▲김성호 문화부부기자 ▲김영중 조사부 기자 ◎「5·16성명」 미국무성 보고서/주한 미대표부 이한림 장군 충고로 쿠데타 반대/본국과 협의없어 “합법정부 지지” 표명/워싱턴 명령에 「간섭」 배제… 경비만 강화 한국에서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 군사쿠데타와 당시 미국의 관계를 확인하는 2건의 새로운 문서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에 의해 미 워싱턴 케네디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이들 문서는 1961년 5월16일 쿠데타 첫날 미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한미국대표부 성명의 배경」과 11월28일 박정희 장군이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친서 등으로 되어있다. 미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한 미국대표부 성명서의 배경」은 5·16당일 M 그린 주한미대사 대리와 C B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우선 거론했다.이들의 쿠데타 반대성명은 국무성과 사전협의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쿠데타 반대성명이 나온 배경을 설명했다.그 배경은 매그루더의 해명을 인용한 것으로,쿠데타 반대성명은 한반도 군사분계선 방위담당 지휘관인 한국군 1군사령관 이한림의 충고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주한미대리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의 성명에는 5·16 군사쿠데타를 직접 반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다만 「한국 국민의 선거에 의해 구성된 합법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담았을 뿐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되어있다.그 이후 매그루더는 명령에 따라 군사쿠데타에 간섭하지 않고 경비강화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서에 기록했다. 이밖에 또 다른 문서 박정희 장군의 친서에는 맥아더 원수에게 전하는 감사의 뜻을 담았다.1961년 11월14일∼25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최고회의 의장자격으로 보낸 것이다.뉴프론티어의 기수를 자처한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 등을 통해 한국 군사정부가 지지를 받기까지 미국의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대기업 내년 해외투자 대폭 확대

    ◎“최적 생산거점 찾기”… 사업 세계화전략 일환/현대 2조6천억 최고… 대우도 2조원 투입 국내 재벌그룹들이 해외생산비중을 급격히 높이고 있다.10대 그룹은 내년에 국내투자 증가율을 낮춰잡는 대신 남는 재원을 해외투자 쪽에 집중시키는 투자전략을 세우고 있다.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국경 없는 무역」이 시작됨에 따라 사업영역을 전세계로 확대하는 세계화 전략의 일환이다.세계에서 가장 이자가 싼 자본과,가장 양질의 노동력,첨단기술과 경영노하우를 결합해 최적생산거점을 구축한다는 전략이다.국내 재벌들의 세계경영이 한차원 높아지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내년 해외투자규모는 2조6천9백50억원.올해 3천80억원의 8.75배 규모다.국내에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 보다는 시장·자본·기술이 있는 곳에 공장을 지어 현지생산·수출 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이를 위해 올해 중국에 이어 내년에는 미국에 13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조립공장을 건설하고 베트남에 자동차 조립공장·조선소·발전소를 건설하는 등 동남아의 전략거점으로 집중육성할 계획이다. 대우그룹도 내년 총투자액중 44%인 2조원을 해외부문에 쏟아부을 방침이다.올해 인수한 폴란드 및 체코의 자동차회사 설비를 확충하는데 집중 투자한다. 삼성그룹은 새해 해외투자를 올해의 5천1백억원보다 18% 늘어난 6천억원 선으로 잡고 있다.전자관련이 5천6백억원으로 90% 이상을 차지한다.전자 해외생산·판매법인 1백곳의 증자에 1천6백억원,미국 텍사스주 반도체 공장 건설비로 3백50억원을 투자한다.중남미 동남아 인도 등 해외거점투자에 역점을 두고 있다. LG그룹도 새해에 브라질 컬러TV공장과 인도 VCR공장 건설에 각각 4천만달러씩을 투자하는 등 해외투자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동남아와 인도에 2000년까지 45억달러를 집중 투자,전략거점지역으로 육성해나갈 방침이다. 선경그룹은 내년 해외투자를 올해의 5백억원보다 4배 늘린 2천억원으로 잡았다.세계화전략에 따라 중국 인도네시아 미국 등 주요거점지역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할 방침이다.유공의 해외유전 개발과 SKC의 미국현지공장 증설,SKKI(선경 끄리스 인도네시아) 등에중점투자한다.총투자비 15억달러가 소요되는 중국 심천의 정유공장 건설 계약도 내년 상반기중 체결한다. 한화그룹도 그리스 아테네은행의 국내외지점을 28개로 6개 늘리고 엥도스 헝가리 은행의 인수를 추진하는 한편 그루지야 및 카자흐공화국에 석유유통업 진출을 확대하고 중국 닝보항에 물류기지 건설을 확대하는 등 해외사업을 중점적으로 강화할 계획이다. 고합그룹의 새해 해외시설투자는 1천2백39억원으로 올해보다 무려 16배나 늘어난다. 두산그룹도 내년 해외투자를 올해의 3백억원보다 두배인 6백억원으로 잡고 있다.호주에 맥아공장을 짓고 멕시코에 두산전자 합작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 일 지주회사제 되살린다/내년초 법률 개정

    ◎“계열사 지배로 그룹 경쟁력 강화”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의 공정거래위원회가 독점금지법에서 금하고 있는 지주회사에 대해 부분적으로 해금하기로 결정했다고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일본 경제계등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소극적 입장을 보이던 공정거래위원회가 이처럼 결정함에 따라 빠르면 내년 초 국회에서 법률 개정안이 제출될 것으로 보인다. 지주회사는 스스로 사업을 하지 않으면서 산하에 계열사를 지배,종합 경영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 전쟁전 일본 재벌의 경제력 집중,재벌과 군벌의 결탁등의 폐단이 컸던 것으로 지적돼 맥아더원수가 이끄는 점령연합군사령부가 폐지시켰다. 지주회사의 부활은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기업들의 응집력을 모아 경쟁력을 제고하고 합병등을 쉽게 하기 위해 경제계가 오래전부터 요구해 온 것이다. 따라서 지주회사제도가 허용될 경우 경제력의 집중과 함께 일본 기업들의 합병,신규투자등이 활발하게 전개돼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그러나 금융지주회사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 앞으로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 왜 지주회사 다시 허용하나/기업 힘모아 불황타개 포석/종합경영으로 비용절감·고용효과 증대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전후 금지돼 온 지주회사제도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다.이에 따라 내년 초 지주회사의 설립을 금하고 있는 독점금지법이 개정될 것으로 예상된다.아직 금융부문까지 허용할지는 분명하지 않다.지주회사제도의 부활은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한는 것으로 일본 경제에 폭넓은 변화를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지주회사는 스스로 사업은 하지않으면서 계열사의 주식만을 소유함으로써 지배,종합경영할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일본에서 패전시까지 재벌들은 지주회사를 통해 거대한 그룹을 형성하면서 경제력을 통해 기업들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데 지주회사 제도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지주회사가 있으면 계열사를 슬림화해 코스트를 삭감할 수 있으며 각 부분에 적합한 고용형태와 입금체계의 선택이 가능해 효율성이 제고된다는 것이다.또 대기업 그룹이 효울적으로 움직임으써 경쟁력이 제고된다고 이유를 제시했다. 이들은 구미선진국에서 지주회사가 허용되고 있다는 점도 내세웠다.또 소유분산이 충분이 이뤄져 있어 재벌의 부활은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반대론자들을 설득해 왔다.또 지주회사가 부화돼도 예전처럼 집중시켜 왔다.재벌들은 경제적 침략을 위해 군벌과 결탈,일본 제국주의의 한 축을 이뤄왔다.이 때문에 전후 연합군 사령부는46년9월부터1년에 걸쳐 83개의 지주회사를 정리하고 재벌창업가족 출신등 기업의 주요임원1천5백여명을 추방시켰다.사업지주회사(일부 사업도 운영하는 지주회사)가 아닌 순수지주회사는 불법화시켰다.현재 지주회사를 금지시키고 있는 것은 일본과 한국이 대표적이다.미국과 유럽에서는 허용되고 있다. 일본 경제계는 오랫동안 지주회사의 허용을 요구해 왔다.공정거래위원회는 소극적이었다.경제계는 산업구조재편(리스트럭처링)을 그룹내 거래만을 행하는 것은 경쟁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선택할 리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기업의 슬림화는 지주회사없이도 가능하며,은행의 주식소유를 금지하지 않는 한 경제력의 집중,재벌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우려한다. 소극적 입장의 공정거래위원회가 부활입장으로 기운 것은 일본 경제가 워낙 바닥권을 헤매고있기 때문.엔고등으로 산업공동화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은행들은 부실채권 처리에 골치를 앓고 있고 기업들은 경쟁력 회복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 징용한인(외언내언)

    『주위를 자세히 보니까 창마다 쇠창살이 있고 셰퍼드 몇마리가 으르릉거리며 돌아다녔다.창고보다 못한 건물에 썩어 문드러진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쓰레기통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악취가 방안에 가득 넘쳐 흘렀다.…』1941년 일본 홋카이도 탄광에 끌려간 어느 징용 노무자의 수기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강요당했다.조선인 노무자의 탈출을 막기위해 작업장주변 철조망에는 고압전류를 흐르게까지 해놓았다. 1940년부터 본격화된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은 경찰력을 앞세우고 전국 각지에서 실시되었다.「인간사냥」이었다.일본의 탄광·철도·댐 건설현장이나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종사했다.중국 동남아 남양군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끌려갔다. 종전직후 맥아더사령부에 제출한 일본정부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강제 징용자의 수가 1백66만8천명으로 파악되고 있다.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들의 배상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공식문서가 없어 파악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떼었다.태평양전쟁중 강제징집된 희생자 24만명의 명부가 93년에 돌아온 일이 있다.이는 실제 희생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끌려간 한국인 노무자에 대해 일본정부는 종전 50년이 넘도록 아무런 배상도 하지 않았다.배상은 커녕 전쟁당시의 저축금조차 안주고 있다.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문제도 마찬가지이지만. 며칠전 일본 오사카지방법원은 「징용된 재일한국인의 보상거부는 위헌소지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모처럼 들어보는 「양심의 소리」다.그동안 일본법정은 「일본 국적이 없기 때문에 재일한국인 징용자에 대한 보상은 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일본의 필요에 의해 끌려갔다가 종전과 더불어 내팽개쳐진 재일한국인.그들을 외면하는 일본은 몰염치한 부도덕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 휴전협정의 뒤안(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9)

    ◎미·유엔군,중공군 개입으로 확전전략 수정/군사분계선·포로문제로 2년남짓 줄다리기 1950년 6월25일 새벽부터 시작된 한국전쟁은 19 53년 7월27일 상오10시 유엔군과 공산군측 대표가 판문점에서 휴전 조인식을 가짐으로써 형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전쟁 발발 만 3년1개월2일만이었다.전선에서의 공방만큼이나 휴전을 이루어내기 위한 협상전도 치열했다.유엔군과 공산군측은 장장 2년여에 걸쳐 험난한 설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중공군 46만명 손실 그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거지로 마감했던 휴전회담의 결과는 개전 이전보다 한국의 영토를 조금 더 확보하는 것으로 그쳤다.그러나 휴전회담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꿈꾸었던 대다수 한국민들의 의지가 도외시됐다.휴전회담에 따라 종결된 「승리없는 전쟁」에서 비롯된 분단과 갈등이라는 후유증은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은채 중병으로 번져있다. 휴전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51년 5월 하순 중공군이 총공세에서 실패,열세에 빠지면서부터다.중공군은 이때쯤 한국전 개입이후 46만명에 달하는 병력손실을 입었다.더이상의 공격작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럼에도 미국과 유엔군은 당초 38도선 이북의 공산군을 격멸한다는 목표에서 후퇴했다.중공군 개입에 부닥치자 전략을 「명예로운 휴전성립」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미국은 5월31일 소련문제 전문가 케넌을 시켜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에게 협상의사를 타진했다.이어 유엔사무총장 T 리는 6월1일 「현재의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떤 형태의 협상을 통해 한국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는 미 행정부의 주장을 반영한 성명을 내놓았다.「대략 38도선에 머무는 휴전이 그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회복한다면 유엔은 주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는게 그 내용이었다. 그와 동시에 애치슨 장관도 맥아더 청문회를 통해 같은 견해를 공식으로 밝혔다.6월22일 미 국무부의 미국의 소리(VOA)방송은 말리크에게 리의 호소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그 다음날 말리크도 마침내 유엔 라디오방송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왔다.이 제의에 대해 중공은 25일,북한은 27일 각각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이처럼 한국전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입장이 협상쪽으로 기울면서 한국정부는 범국민적인 휴전반대운동을 벌여나갔다.6월5일 국회가 휴전반대 결의를 표명하자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38도선 휴전반대 국민궐기대회」가 일어났다.특히 6월30일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원산항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열자는 제의가 나오자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이날 즉각 5개항의 휴전조건 5개항을 발표하는 것으로 맞섰다. ○남한선 휴전에 반대 한국정부의 이 휴전조건은 중공군의 완전철수와 북한군의 무장해제,유엔이 북한공산당에 대한 제3국의 원조제공을 차단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사실상 휴전반대를 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가운데 공산군측은 7월3일 회담개최에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공산군측은 회담장소를 원산대신 개성으로 바꿔 제의해왔다.유엔군측이 이를 받아들여 7월8일 개성의 연락장교단 예비회담을 열었다.그리고 7월10일 상오11시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에서 그리도 지루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채 첫 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담은 처음부터 암초에 걸렸다.전세가 불리했던 공산측은 현 상황에 관계없이 군사문제 일체를 전쟁전의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입장이었다.이에반해 유엔군은 군사적 문제만을 의제로 삼자는 제안을 내놓았다.공산측은 또 외국군 철수를 고집해와 5개항의 의제합의는 10차회담에서 겨우 이끌어냈다.그러나 군사분계선 설정을 놓고 공산군측은 종래 주장대로 38도선을,유엔군측은 쌍방 전투부대의 현 접촉선을 양보하지 않았다. 교착상태의 협상은 8월22일 공산측 대표 이상조가 38도선 안을 수정할 뜻을 비치면서 진전기미를 보이는듯 했다.그러나 공산측이 돌연 개성폭격 사건을 조작하는 통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유엔공군이 회담장소를 폭격했다는 북한측의 주장은 날조로 증명됐지만 결국 회담중단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말까지 대 공세에 나서 임진강 북쪽 연안∼역곡천∼중강리∼금성천변까지 장악했다.이로써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변경한다는데 공산측도 동의했다.10월25일 휴전회담이 재개됐다.11월27일 마침내 대치중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결정하는 소위 11·27합의가 이루어졌다.그러나 이 합의는 30일 이내에 휴전협정 조인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이는 미국의 의도였지만 조기 종전노력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성 폭격사건 날조 그 다음 협상에서 공산군측의 유엔군 인원교체와 장비보충 금지,비행장 복구문제는 줄곧 협상을 가로 막았다.유엔군 수뇌부는 공산군의 공군력 증강을 막기위해 북한의 비행장 복구에 대해 크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해가 바뀌었다.그래도 유엔군 인원교체와 장비보충 문제는 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유엔군측은 미국정부의 훈령을 받아들여 결국 비행장 복구문제를 공산측에 양보했다.인원교체에 대한 공산측의 완강한 반대와 송환 거부 포로문제 처리에 막힌 회담은 결국 그해 9월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로부터 10개월후인 1953년 7월10일 판문점에서 재개된 휴전회담은 종전과는 달리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7월19일 양측은 그동안 대립했던 포로송환 문제등 모든 부분에서 최종 합의를 보았다.곧이어 20일 양측 참모장교들은 휴전협정 세부사항과 비무장지대의 경계선을 긋기 시작했다. 마침내 27일 상오10시 판문점에서는 두 개의 서류가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휴전협정과 비무장지대에서 중립국송환위원회로 송환 거부포로의 인도를 인정하는 간단한 보조협정이 그것이었다.유엔군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북한의 남일은 휴전 조인식 내내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두 사람은 각각 9부의 서류사본에 서명한후 교환하고 상대방의 사본에 서명했다.조인식이 끝난 것은 10시12분이었는데 불과 12분이 걸렸다.그러나 양쪽의 포병사격과 해·공군 작전은 휴전 발효시간인 그날밤 10시까지 계속됐다. ◎미 방첨대 보고서/미·북한,휴전회담중 비밀교섭/박진목 등 3명 남북한 오가며 「특수 업무」/“전쟁 수행 능력 한계” 북한측 입장 전해와 한국전쟁을 일단 끝낸 휴전회담에도 미국과 북한의 비밀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이같은 정황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으로부터 입수한 문서군(Record Group) 319상자 방첩대(CIC)보고서에서 확인됐다. 1951년 12월7일에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박진목(당시 39세)등 3명이 등장한다.박은 본래 공산주의자였으나 보도연맹에 가입,무사히 자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후 안동전선에 참가했다.그이후 춘천에서 이탈,대구에서 머물다 어떤 경로를 통해 월북했다. 그리고 나서 북한에서 돌아온 박은 CIC요원을 만나 북한은 남침전쟁을 통해 조기승리를 예상했지만 유엔의 참전은 의외라는 북한의 입장을 전해주었다.또 중공군이 개입해도 더이상 전쟁수행 능력이 없다는 사실과 중공군 개입은 국제공산주의의 역량을 과시한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나온다. 1951년 1월 공산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자 박은 서울시인민위원회로 이승엽을 찾아가 만났다.박은 그해 7월28일 미군의 배려로 다시 월북했다가 40일만에 남하해 미군 CIC로 연행되어 간첩활동에 대한 신문을 받는 것으로 돼있다.미군 CIC는 박의 효용성을 인정,1천만원을 제공하고자 했고,또 다른 인물 최익환(당시 56세)은 미 국무부 요청으로 평양에서 업무를 수행중이라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어떻든 이 CIC 보고서는 박진목의 말 그대로 북한이 도발한 전쟁이 더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는 당시의 현실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다.이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재촉한 요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 고등과학원 설립에 부쳐/유희열 과기처 기술인력국장(기고)

    ◎“차세대 과기인재 양성의 필수기구” 지난 23일 한국과학기술회관 개관식에서 대통령이 축사를 통해 고등과학원을 만들어서 노벨상에 도전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한데 대해 국내 과학자는 물론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차제에 지면을 빌려 고등과학원의 설립배경,기초과학육성 전략,운영방향,소요경비 등을 중심으로 설명함으로써 일반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선,고등과학원의 설립필요성은 창조적인 차세대 인력양성의 시급성에서 비롯된다.흔히들 한나라의 과학이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3세대가 필요하다고 하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과거 60 ∼ 70년대의 제1세대 과학기술인력이 외국기술의 도입 및 소화에 치중했다면 80년∼90년대 중반의 제2세대 인력은 도입기술의 개량 및 연구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의 자체개발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세계적 수준의 앞서가는 기술을 개발하는 제3세대형의 창조적 과학기술인력이 필요하다.미래사회는 기술상호간 복합으로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기초과학과 응용공학의 융화현상,기술의 정보화·지식화로 매우 복잡다기화될 것이다.따라서 세계적 수준의 고급과학기술 인재를 양성,이들이 창의성을 발휘하여 과학기술을 선도적으로 개척하고 개발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과학기술 발전의 근간이 되는 것은 기초과학으로 이의 연구중심인 대학과 관련연구소를 동시에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 장기간이 소요되는데다 정부예산의 한계때문에 어려움이 뒤따른다.따라서 적은 투자로 짧은 기간내에 가장 효과를 높이는 선별적 육성전략이 필요하게 된다. 고등과학원을 설립하려는 것은 24년전인 19 71년,앞을 내다보고 고급 과학기술인력양성과 이공계 대학교육을 선도할 목표로 설립,성공적으로 운영하여온 한국과학기술원의 사례를 거울삼아 국내 기초과학연구를 선도하면서 세계적인 석학의 지도아래 국내의 선별된 우수 정예과학도들이 창조적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는 취지에서다. 고등과학원의 운영방향중 제일 중요한 것은 세계 석학의 초청·활용이다.내년에는 우선 수학·물리분야 석학으로 노벨상 수상자 또는 수상자급 저명인사를 초빙할 계획이다.다만,이들이 고령이기 때문에 연구활동에 대해 기여가 적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그러나 이들은 연구의 방향설정과 연구수행추진 과정상 도출되는 문제에 대해 세계 각국의 저명인사와의 연계 및 자료제공등 전체적인 팀웍으로 연구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매우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전쟁시 맥아더장군이 정보,인재활용,경험,판단을 바탕으로 훌륭한 지휘아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것이라든가,또는 음악에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번스타인이나 게오르기 솔티 등 훌륭한 지휘자가 천재성에 더하여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악기를 조화시켜 아름다운 음악을 창출하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될 것이다. 세계 석학의 초청에는 이에 상응하는 대우가 뒤따라야 한다.실제로 국내에서 외국인사의 단기간 초청(운동선수,연예인,사업가 초청시도 같음)에도 적지 않은 비용을 지급하는 것에 비하면 국가 잠재력배양의 핵심인 기초과학의 육성을 위해 세계 석학 초청에 사용되는 비용은 금액의 크기보다 우리가 초청하는 이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석학 초청에 소요되는 경비인 인건비와 연구비는 통상 기초과학의 공공재적 성격에 비추어 정부에서 지원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고등과학원의 경우,정부재정의 한계를 감안하여 민간기금으로 조성하여 지급할 예정이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는 1년동안 계속 근무할 석학의 인건비는 30만달러와 1년간의 연구비는 25만달러로 추정한 바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훨씬 적은 금액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그 이유로는 석학의 경우 1년이상 장기적으로 초빙이 어렵고 또한 민간기금 조성 규모와 계약에 따라 월봉액이 조정되므로 인건비는 훨씬 줄어들고 연구비도 순수기초과학이므로 실험 실습비,장비구입 등 소요가 적어 현실적으로 아주 낮은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등과학원은 한국과학기술원의 부설기관으로 서울분원에 설립될 예정이지만 운영에 있어서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함으로써 한국과학기술원과 인사,회계,조직운영 등으로 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할 계획이다.
  • 전시경제와 통화(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7)

    ◎전비 하루 10억∼40억원 지출… 인플레 심각/52년 화폐발행고 1조… 100대1로 화폐개혁 1951년 봄 전선에서는 수 많은 인명이 죽어갔으나 전선은 진지밖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그렇다고 숱한 인명의 희생이 국민들에게 어떤 반대급부적 대가를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후방은 그저 전선이 멀리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뿐 날로 가중되어가는 경제적 궁핍이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당시 경제문제는 전선의 전투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이다. ○부산 빈민도시 전락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에는 1백50만명의 인구가 들끓었다.전쟁전 43만명의 인구를 포용했던 매력있는 도시 부산은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남한의 피란민은 물론 북한을 탈출한 피란민,전쟁고아,전상자들이 삽시간에 부산을 빈민가로 만들어버렸다.전국의 후방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부두에는 태평양에서 꼬리를 물고 입항한 거대한 선박들이 매일 산더미같은 짐을 풀었다.그러나 당장 끼니거리가 없는 피란민들에게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이들을돌볼 겨를을 주지 않았다.한국정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하루 10억원에서 40억원의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입장이었다.이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원화경비를 지출키로 합의한 이른바 대구협정에 따른 것이다.유엔군에게 꾸어주는 대여금 이었지만 이를 흡수할 실물경제의 기반은 계속 허물어졌다.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 돈의 홍수는 결국 한국통화의 지독한 인플레현상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정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전쟁은 벌써 2년째에 접어들어 세입이 전무한 상태였다.그래서 세입은 한국은행에서 꾸어오는 인플레 방식의 한은차입금이 큰 줄기를 이루었다. 한국은행은 1951년 한햇동안 5천5백79억원의 화폐를 발행했다.이 수치는 전년도 화폐발행고 2천2백92억원에 비해 자그마치 3천2백87억원이 늘어난 것이다.그해 51년의 통화량은 전년도 보다 3천9백77억원이 많은 6천4백98억원을 기록했다. ○2년새 6배 치솟아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 조차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수 밖에없었다.해방 당시 도매물가지수를 1백으로 할 때 1951년 초에 이미 5천을 뛰어넘어 52년에는 단숨에 3만을 돌파했다.배고픈 피란민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쌀값은 1946년 1월 기준 1만6백50원에서 1952년말에는 9만원대로 치솟았다. 한국전에 개입한 미군 주축의 유엔군은 한화가 필요했다.그래서 한국정부는 대전에서 철수한 1950년 7월28일 대구협정을 맺었다.한국정부는 유엔군 지출관이 요구하는 액수의 원화를 필요한 장소에서 무제한 공급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이후에 어떻게 갚는다는 조항을 두지않고 일방적으로 공급의무 만을 규정한 이 협정은 오랫동안 말썽을 빚었다.이 협정에 따라 한국은 유엔군에게 원화를 꾸어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한은 20억 북에 뺏겨 그러나 현찰이 없었다.유엔군 대여금 보다 더 급했던 한국군에 공급할 현찰도 부족한 판이었다.한국은행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6월26∼27일까지 20억원을 서울에서 풀었다.그리고나서 피란지로 수송한 돈은 5억원에 불과했다.금고에 그냥 두었던 20억원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남한경제 교란에 악용되었다.이때에 화폐인쇄용 원판을 서울 원효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빠뜨리고 온 실책을 저질렀다.대전에서 이 정보를 수집한 미 대사관은 곧바로 맥아더 사령부에 통보했다.그래서 원효로 일대는 개전 초기 미공군으로부터 엄청난 폭격을 받았다. 한국은행은 궁여지책으로 저액권 지폐에 고액 스탬프를 찍는 작업에 착수했다.10원짜리 지폐에 「당백원」 또는 「당천원」을 새긴 고무도장을 찍었다.이 지폐가 유통되지는 않았다.미 경제협조처(ECA)와 맥아더 사령부의 주선으로 19 50년 7월 하순부터 일본 토쿄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얼굴 도안이 들어있는 새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한국은행 토쿄지점이 발권업무를 맡아 서북항공(NWA) 전세기와 DC4 쌍발수송기로 부산 수영공항에 공수되었다.비행기만으로는 수송능력이 모자라 9·28 수복 이후에는 캐나다 선적의 1만t급 상선 아일랜드사이드호가 8일 간격으로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에게 꾸어준 대여금을 받아내는 일이 시급했다.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상환독촉은 보통이 아니었다.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미국은 원화대여금을 전쟁이 끝난 뒤 그동안의 전비와 상쇄할 전도금으로 해석한 것이다.한·미간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다가 1952년 1월10일 우선 유엔군 휴가비로 나간 한화를 달러로 받았다.처음으로 한국정부 손에 들어온 외화는 1천2백15만5천7백14달러였다. 미국은 그 뒤에도 대여금 상환을 놓고 한국과 줄다리기를 계속했다.미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4월 클레어렌스 마이어를 대통령특사로 한 사절단 12명을 부산에 보냈다.백두진 재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한 한국대표단과 이들의 회담은 5월에 접어들어서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미국은 달러를 되도록 덜 주면서도 지불시기를 늦추고 지불한 돈에 대한 사용처를 명시한다는 입장이었다.이와달리 한국은 많은 액수를 빨리 받아 자유롭게 써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쪽에서 먼저 2천8백만달러를 제시하고 나섰다.이 액수는 지금까지 가져간 돈 가운데 52년 1월∼4월까지 4개월분을 달러로 환산한 것이다.한국대표단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마이어는 이 대통령을 직접 예방하고 5개월분을 제시하고 수락을 간청했다.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장장 40일간의 마라톤 회담이 5월24일 타결되었다.이를 양국 대표가 서명했는데 바로 유명한 마이어협정이다. ○6천대1 환율 적용 마이어협정은 미국의 대여금 상환 말고도 고용 한국인에 대한 노임 및 물자대(월 4백만달러)상환내용 등이 들어있다.여기서는 6천대1의 환율이 적용되었다.이 협정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통화팽창과 투자억제를 골격으로 한 한국정부의 의무조항이다.의무조항은 한국의 통화개혁을 부추켰다. 1952년 여름에 접어들어 화폐발행고는 1조원을 넘어서고 말았다.그해 가을 백두진재무장관이 국무총리 서리 겸임 발령을 받았다.백서리로부터 통화개혁 기초작업 착수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히 조치해보라』는 말로 이를 동의했다.백두진과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를 필두로 김정렴,배수곤 등이 실무팀으로 참여했다.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통화개혁 작업은 11월말 가닥을 잡았다.그 내용은 당시 통용화폐 원을 1백대1로 낮추어 환(원)으로 하고 일정액 이상의 통화를 예금으로 동결시킨다는 것이었다.백두진팀이 쉽게 통화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에스 프린트」라는 사용하지않은 신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것은 미군정이 화폐교환을 위해 1947년 미국에서 인쇄한 화폐였는데 그 도안이 절묘했다.이 미사용 신권지폐는 1천원,1백원,10원권 등이 「원」으로 표기되었지만 「환」으로 호칭한다는 원칙 아래 1953년 2월15일부터 통용되었다. ◎미 대사관 보고서 「조인트 위카」/미,통화개혁후도 원화 평가절하 요구/다스카 사절단 내한… 백두진 총리에/53년 1달러=60환서 18환으로 올려 한국정부가 1953년 2월15일 통화개혁을 단행한 이후에도 미국으로부터 원화의 평가절하 요구를 계속 받아들여 이를 수용했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주한미대사관 무관들의 19 53년 5월15일자 주간보고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에서 드러났다.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한국에서통화개혁이 이루어진 지 약 2개월 이후인 53년4월에 다스카가 이끌고 온 다스카사절단은 백두진 국무총리에게 원화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당시 한국의 공정환율은 1달러당 60환(원)이었는데 다스카의 평가절하 요구액은 1달러당 2백20환이었다.이에 대해 백총리는 1백80∼2백환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스카는 미국의 요구가 수용되어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는 기록이 「조인트 위카」에 나온다.다스카의 예상은 사실상 적중했다.그해 12월 백총리와 우드간에 체결한 한미합동경제위원회협약을 통해 1달러당 60환이었던 환율이 자그마치 3배나 오른 1백80환으로 결정되었다.다스카의 애초 제시한 2백20환 보다는 적지만 원조 공여국인 미국의 요구가 어느정도 관철된 셈이다. 다스카는 방한중에 파악한 한국경제상황을 근거로 「다스카 보고서」를 작성했다.이 보고서에 실린 한국원조 3개년 계획안은 군사원조,구호,재건사업으로 나누어 모두 8억8천3백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담았다.그러면서 한국이 악성 인플레이션과 환율문제를 해결하지않고는 어떠한 시설투자도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입장에서 원조물자의 구성을 소비재 7,시설재 3을 제시했다.
  • 미 「힉컬슨 문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포로처리 싸고 첨예대립 입증/한국측 일방적 북 포로 석방에 미 당황/반공포로 중립국 송환위 이양도 검토 한국전쟁 시기 북한군 포로관계 문서의 소개는 한국전쟁 연구의 실증성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서울신문 발굴 관련자료들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북한군 포로문제는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1950년 7월4일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당국에 자신의 부대에 의해 포획된 북한인들은 『문명국가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대우받을 것』을 보증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그는 포로가 된 그의 부대원들에게도 같은 대우를 기대하는 경고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950∼19 51년간의 문서에는 북한군 포로명단,포로중 장교명단,포로사망자 명단등을 비롯해 북한군 포로에 대한 심문,중공군 참전 이후 포획한 중공군 포로 처리문제,1.4후퇴 이후 북한군 전쟁포로의 철수문제등이 주요하게 다루어졌다.아울러 공산군이 행한 포로잔학행위에 대한 항의문서,전쟁포로들이 유엔사무총장에 보내는 탄원서,전쟁포로 석방문제등까지 언급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시기 북한군과 중공군측도 미군과 유엔이 포로를 학대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이에대해 미군측은 미군포로를 위한 국제 적십자활동의 강화,북한 점령지역내 한·미간의 항공수송협정,한일간의 어업분쟁,미군·유엔군 포로에 대한 구조,원호문제등을 검토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또한 공산군측의 포로학대 비난에 강력히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대한 중립국의 검사방안을 신중히 검토했고 이에따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1952년 하반기가 되면서 포로문제는 정전협정과 맞물려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1952년 10월1일 발생한 제주도의 중공군 포로문제를 필두로 거제도포로수용소 폭동은 이들에 대한 처벌여부를 둘러싸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정전협상이 궤도에 오르면서 전쟁포로의 송환,교환문제가 검토되기 시작해서 포로 전반에 대한 송환,교환문제가 제기되었다. 1953년 초반부터 판문점에서 벌어진 정전협상에서는 이들 포로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북한·중국 공산측과 미국·유엔군측이 날카롭게 대립했음을 문서들은 보여준다.한편 정전협상의 고비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일방적 북한포로 석방으로 미국측이 혼비백산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이와함께 반공포로를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기는 문제도 적극 검토되었으며 특히 인도가 중립국 감시단에 참가하는 문제가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결국 이같이 한국전쟁기 북한군 포로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은 전쟁이 전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포로수용소와 포로문제를 둘러싼 선전전,심리전의 일환으로도 이용되었다는 것이 포로관계 문서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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